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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7DADE><colcolor=#964B00> 에릭 로메르 Éric Rohmer | |
본명 | 장-마리 모리스 셰레 Jean-Marie Maurice Schérer |
출생 | 1920년 3월 21일 |
프랑스 튈 | |
사망 | 2010년 1월 11일 (향년 89세) |
프랑스 파리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8cm |
직업 | 영화감독, 교사, 비평가 |
배우자 | 테레즈 바벳 (1957년 결혼) |
가족 | 남동생 르네 셰레[2] (1922~2023)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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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누벨바그 감독 중에서) 영화를 가장 많이 본 사람은 자크 리베트였고, 가장 영화를 사랑한 사람은 프랑수아 트뤼포였다. 하지만 가장 교양이 있는 사람은 에릭 로메르였다. "[출처]
ㅡ 장 뤽 고다르
ㅡ 장 뤽 고다르
프랑스의 영화감독, 영화 평론가, 작가, 교사
누벨바그 핵심인물 중 한 사람이며, 평생동안 소시민의 일상과 연애에 관한 영화들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 특징 때문에 '연애박사 로메르'와 같은 별명이 붙곤 하지만, 연애 이외의 다양한 주제에 대해서도 숱한 명작을 남긴 거장이다.
2. 소개
누벨바그 거장 중 한 사람이자, 누벨바그와 거리를 두고 자신만의 길을 나아간 감독. 다른 누벨바그 감독들은 직·간접적으로나마 실험정신이 있었고, 그에 따라 작품간의 편차가 심했던 반면, 로메르는 실험정신을 거부하고 영화를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데뷔작부터 유작까지 모두 일관된 주제와 톤을 자랑한다.[4]일생동안 일상과 연애에 대해, 특히 삼각관계로 전개되는 사랑 싸움을 자주 묘사하였고, 그 안에서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고 사유하였다. 또한 문학과 희곡에서 영향을 많이 받아, 액션과 비주얼에 집중한 다른 감독들보다 인물 간의 대사와 대화를 더 중시했으며, 한 가지 테마로 여러 영화를 만드는 '연작' 기획을 자주 시도했다.
'영화는 언제나 관객을 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지니고 활동했기에, 작품이 난해하지 않다는 것 또한 큰 특징 중 하나로 꼽힌다.
"모두가 하는 말이지만,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난해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그의 누벨바그 세대의 다른 감독들, 말하자면 장뤽 고다르나 자크 리베트와 다른 것이다."[출처]
ㅡ 정성일
ㅡ 정성일
3. 생애
1920년 3월 21일, 프랑스 중남부 튈(Tulle)에서 태어났다.[6] 본명은 '장-마리 모리스 셰레(Jean-Marie Maurice Schérer)'. 어린 시절 그는 문학·철학·예술에 재능이 뛰어난 학생이었다고 하는데, 가족 내력인지 그의 남동생 '르네 셰레(René Schérer)'는 향후 유명 철학자가 되어 파리 제8대학교 명예교수까지 역임했다.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이듬해 몇 달 간 후방에서 병역을 수행했으며, 병역을 마치곤 파리 고등사범학교를 목표로 입시를 준비했으나 실패했다. 대신 그는 교직 과정을 이수해 1940년대에 문학 교사로 활동했으며,[7] 가명으로 소설을 출간하거나 잡지에 글을 기고했다.
1950년대부터 영화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누벨바그 맴버인 장뤽 고다르와 자크 리베트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창작의 꿈을 지니고서 여러 단편 습작을 연출했으며,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카예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맡기도 하였다. 결혼도 이때 했다.[8]
1962년, 첫 장편영화 〈사자자리〉의 개봉을 통해 영화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이때 나이가 42세로, 누벨바그 감독 중 가장 늦게 데뷔한 나이였다.
이후 감독 생활을 이어가며 영화 학교에서 학생들도 가르쳤는데, 우수한 학생을 제작진으로 고용하며 영화 실습과 제작을 겸했다. 이 때문에 로메르 경력 중반부터는 그가 가르친 학생들이 주로 제작진을 맡았다.
2010년, 향년 89세로 별세했다. 사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파리의 몽파르나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엔 본명(…Schérer)과 예명(…Rohmer) 둘 다 새겨졌다.
4. 언사
" 일반 대중은 TV, 버라이어티, 모험을 재미있어합니다. 그게 맞죠.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강요하려고 하는 것은 바보짓이에요. 내 영화들은 어느 정도 영화적·문학적 배경이 있는 이들에게 어필합니다. "
……
" 내 영화의 유일한 음악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내는 음악입니다. "
1971년,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 中[9]
……
" 내 영화의 유일한 음악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내는 음악입니다. "
1971년,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 中[9]
" 돈을 적게 들여서 영화를 만들 줄 아는 것이 좋아요. 한 영화에 들어간 돈이 그 영화의 품질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많은 돈을 쏟은 영화들이 보잘것없어 보이고 그 역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낭비는 피해야만 해요. "
1982년, 《와이드 앵글》과의 인터뷰 中[10]
1982년, 《와이드 앵글》과의 인터뷰 中[10]
" 나는 날씨 변화에 맞추면서 촬영해요. 내 영화들은 날씨의 노예입니다. 나는 날씨를 속이지 않는 데다 거기에서 영감마저 받으며, 나 스스로 날씨의 남자가 되어야만 하죠. 내가 끌리는 것은 완벽한 예술품이자 자연의 경이로서의 우주입니다. "
1986년, 《포지티브》와의 인터뷰 中[11]
1986년, 《포지티브》와의 인터뷰 中[11]
5. 기타
- 장뤽 고다르가 "누벨바그 감독 중 가장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 부를 정도로 우아하고 박식했다고 한다. 문학을 사랑해 날마다 시를 읊고 다녔으며, 철학적 사색과 담론을 끊임없이 즐겼고, 감독 데뷔 후엔 건축 등을 연구하여 자기 영화 스타일과 접목시키기도 하였다. 또 차분한 사교성을 지녀, 사람을 편하게 만드는 재능도 있었다고. 그래서인지 영화를 촬영할 때 출연하는 배우들과 촬영 이전부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많이 쌓았다고 한다.
- 사생활과 작품 활동을 철저하게 구분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영화 소재로 가끔 불륜을 사용했어도, 로메르 본인은 결혼생활에 매우 충실했으며, 공(公)과 사(私) 구분이 너무나 철저해 로메르와 함께 일한 관계자들도 로메르의 장례식이 돼서야 로메르의 부인과 자식들을 알았다고 한다.
- 사생활도 매우 절제되고 규칙적이었다. 중년엔 매일 5km씩 조깅하였고, 평생동안 자동차 없이 대중교통으로만 다녔으며, 영화를 찍을 때에도 최대한 인력을 줄이고 예산을 아끼는 방향으로 찍었다. 이 같은 절제된 습관으로, 경력 중반부터는 스태프 3~4명만 대동하고 영화를 찍는 경지에 도달해서,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영화 찍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고.
- 존경하는 감독으로 히치콕, 무르나우, 하워드 혹스 등을 꼽았는데, 평론가들은 개중에서 하워드 혹스와 가장 스타일이 비슷하다고 판단한다. 실제로 로메르 영화는 스크류볼 코미디의 재해석이라는 평이 많다.
- 누벨바그 감독 중에서 가장 비(非)정치적이었는데, 평생 동안 딱 한 번 정치활동을 해본 게 생태주의 정당인 녹색당을 지지한 것 뿐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누벨바그 세대에게 "로메르는 68운동에 참가했나 안했나"가 논쟁거리가 된 적도 있는데, 로메르는 직접 "참가했다"라고 밝혔다. 근데 정치적인 이유로 참가한 게 아니라, 길거리로 나와보니 《카예 뒤 시네마》 직원들이 보여서 그냥 같이 걸은 거라고(...).
- 이 밖에도 우파 잡지를 구독했다고 인증했다는 점, 〈영국 여인과 공작〉에서 드러난 프랑스 혁명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12]으로 인해 좌파보다는 우파적 가치관에 기울어져 있는거 아니냐는 얘기가 종종 나온다. 어지간해서는 정치 언급을 안하는 앙드레 바쟁조차도 "로메르는 좌파가 아니다"라고 한 마디 했을 정도.
- 이 같은 비정치적 성향 때문에 한동안 《카이에 뒤 시네마》와 결별해야 했다. 특히 1960년대 들어서 더욱 급진적으로 변한 《카이에 뒤 시네마》는 로메르와 맞지 않았고, 논쟁 끝에 자크 리베트가 끼어들어 로메르를 편집장에서 억지로 끌어내는 사태도 있었다. 심지어 1970년대 말에 《카이에 드 시네마》는 "로메르 영화를 반대한다"라고 디스 하고 한동안 다루지 않았을 정도. 상기한 사건 때문에 자크 리베트하고도 잠시나마 소원했는데, 리베트의 〈아웃 원〉에 카메오 출연하면서 다시 관계가 회복되었다. 시간이 지나 《카이에 뒤 시네마》 연간 리스트에 로메르의 영화가 포함되면서, 정치적인 갈등은 지나간 일이 되었다.
- 생전에 지면 인터뷰는 자주 했으나 영상 인터뷰는 거부했는데, 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카메라 앞이 부끄럽고, 무엇보다 유명해지기 싫어서 였다고 한다. (로메르가 대중교통을 자주 이용했다는 점을 상기하자) 로메르가 총애했던 배우 마리 리비에르[13]가 말년의 로메르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을 때도, "스탭 없이 혼자 촬영할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을 정도.
- 유명세를 싫어하는 성향 때문인지 예명인 '에릭 로메르'로 활동했는데, 자신이 존경하는 감독 '에리히 폰 슈트로하임(Erich von Stroheim)'의 앞이름과 작가 '색스 로머(Sax Rohmer)'의 뒷이름을 조합해서 만든 이름이라고 한다.
- 특기할 만한 점으로, 누벨바그 감독들 가운데 유일하다시피 종교심이 깊은 사람이었다.[14] 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학창 시절엔 부전공으로 신학을 배웠다고 한다. 영화에 미신, 점술, 특이한 자연 현상 등이 등장하지만 감독 본인은 그저 영화적 요소로서만 사용했다고 한다.
- 홍상수가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감독 중 하나다. 실제로 로메르와 홍상수는 작업방식과 연애를 주된 소재로 삼는 특징이 매우 닮아있어, 혹자는 홍상수를 "한국의 에릭 로메르"라고 부르기도 한다. 허나 공통점만큼 차이점도 많아 대놓고 부르지는 않는 편.
- 프랑스에선 프랑수아 오종 감독이 로메르를 존경하고 뒤따르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프랑수아 오종은 자신의 영화에서 로메르에 대한 오마주를 자주 하는데, 대표적으로 로메르의 〈여름 이야기〉 시작 장면과 오종의 〈레퓨지〉 결말 장면이 있다. 참고로 〈레퓨지〉에 등장하는 멜빌 푸포는 〈여름 이야기〉의 주연 배우이기도 하다. 또한 오종 감독의 2020년 영화 〈썸머 85〉도 로메르가 연상된다는 평을 받았다.
- 홍상수와 오종 외에도, 미아 한센 러브의 〈다가오는 것들〉, 루카 구아다니노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작품들, 하마구치 류스케의 〈우연과 상상〉, 기욤 브락의 〈다함께 여름!〉, 샬린 부르주아 타케트의 〈아나이스 인 러브〉에서 로메르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 그렇게 어려운 영화를 만들지 않으면서도 지적인 매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 시네마테크에서 인기가 좋은 편이다. [15] 로메르 회고전이 열렸을때 인기작들은 전부 만석 매진되었을 정도. 주로 〈녹색 광선〉으로 생긴 팬덤이 많은데, 덕분에 서울아트시네마는 로메르 영화를 구입해 심심할때마다 틀어줬다. 2023년에는 서울아트시네마 쪽 판권이 만료되었는데, 그새 안다미로가 판권을 구매해서 회고전을 열었다.
사골다만 2000년대 초반만 해도 로메르는 국내에 크게 소개되지 않은, 미지의 감독이라고 인식되었다고 한다. 고전이지만 현 세대 영화팬들에게 접근성이 더 좋다.
6. 연출작 일람
공식적인 작품수는 23편이며, 단편 및 미완성작까지 더하면 40편이 넘는다.연도 | 제목 | 분류 | 수상 |
1962 | 사자자리 | 사실상 데뷔작[16] | |
1962 | 몽소 빵집의 소녀 | 〈여섯 개의 도덕〉 1편 (단편) | |
1963 | 수잔의 경력 | 〈여섯 개의 도덕〉 2편 (단편) | |
1967 | 수집가[17] | 〈여섯 개의 도덕〉 4편 |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
1969 | 모드 집에서의 하룻밤 | 〈여섯 개의 도덕〉 3편[18] | 전미비평가협회 각본상 수상,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 |
1970 | 클레르의 무릎 | 〈여섯 개의 도덕〉 5편 | 전미비평가협회 작품상 수상 |
1972 | 오후의 연정 | 〈여섯 개의 도덕〉 6편 | |
1976 | O 후작 부인 | 시대극 (나폴레옹 전쟁) | 칸 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 |
1978 | 갈루아인 페르스발 | 시대극 (아서 왕 전설) | |
1981 | 비행사의 아내 | 〈희극과 격언〉 1편 | |
1982 | 아름다운 결혼 | 〈희극과 격언〉 2편 | |
1983 | 해변의 폴린 | 〈희극과 격언〉 3편 |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 |
1984 | 만월의 밤 | 〈희극과 격언〉 4편 | |
1986 | 녹색 광선 | 〈희극과 격언〉 5편 |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 |
1987 | 레네트와 미라벨의 네 가지 모험 | 에피소드식 구성 | |
1987 | 내 여자친구의 남자친구 | 〈희극과 격언〉 6편 | |
1990 | 봄 이야기 | 〈사계절 이야기〉 1편 | |
1992 | 겨울 이야기 | 〈사계절 이야기〉 2편 | 베를린 영화제 국제 비평가 연맹상 수상 |
1993 | 나무, 시장, 미디어테크 | 이색작 | |
1995 | 파리의 랑데부 | 단편 모음집 | |
1996 | 여름 이야기 | 〈사계절 이야기〉 3편 | |
1998 | 가을 이야기 | 〈사계절 이야기〉 4편 | 베니스 영화제 각본상 수상[19] |
2001 | 영국 여인과 공작 | 시대극 (프랑스 혁명) | |
2004 | 삼중 스파이 | 시대극 (전간기) | |
2007 | 로맨스 | 유작 / 시대극 (5세기) |
7. 외부 자료
- 『에리크 로메르 - 아마추어리즘의 가능성』: 로메르 인터뷰집
- 정성일 평론가의 글
- 2004년, 「존재의 투명함을 위한 자유간접화법」: 감독론
- 2010년, 「에릭 로메르에게 바치는 개인적 헌사」: 추모사
- 평론가 정성일이 뽑은 21세기 영화 #
- 서울아트시네마의 글
- 2017년, 「로메르의 산책」: 김성욱 평론가의 글
- 2017년, 「로메르 전담 편집자와의 대화」: 스태프 대화록
[1] 해당 상은 1967년부터 1988년까지 심사위원특별그랑프리 (Grand Prix Spécial du Jury)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현재의 그랑프리(심사위원대상).[2] 프랑스의 철학가다.[출처] #[4] 비슷한 생각을 지닌 트뤼포도 편차가 심한 실험영화보단 매끈한 극영화를 자주 찍었다.[출처] [6] 일부 자료는 '4월 4일, 낭시(Nancy) 출생' 이라 밝히고 있다.[7] 고전 독일어를 가르쳤는데, 이후 독일어 영화 〈O 후작 부인〉을 만들 때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8] 테레즈 바벳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9] 《에리크 로메르》 이수원 역, 2017, 마음산책, p44·51[10] 《에리크 로메르》 이수원 역, 2017, 마음산책, p111-112[11] 《에리크 로메르》 이수원 역, 2017, 마음산책, p157[12] 이 영화에서 프랑스 혁명은 통제불능 난장판으로 묘사되고 반대로 주인공이 소속된 왕당파는 품위있게 다뤄진다. 이런 까닭에 프랑스 내에서는 공개 당시 비난을 받았다.[13] 〈비행사의 아내〉, 〈녹색 광선〉, 〈가을 이야기〉 주연 배우[14] 다른 감독들도 종교적 테마엔 관심있었지만, 개인적 종교심이 깊진 않았다.[15] 한국 시네마테크 계열에서 인기가 좋은 감독으로는 에드워드 양, 아녜스 바르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페드로 알모도바르, 아키 카우리스마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정도가 꼽힌다.[16] 이전작들은 모두 미완성작이거나 단편 뿐이다.[17] 로메르의 첫 컬러영화[18] 순서로는 〈수집가〉보다 먼저지만, 여러 사정으로 개봉이 늦어졌다.[19] 영화제 기간 동안에 극찬을 받아서 생애 두 번째로 황금사자상을 받을 것 같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불발됐다. 이에 대해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감독 에토레 스콜라가 좌익 성향이라 우익 감독인 로메르를 배제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