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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태/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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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2. 목록
2.1. 초등, 중학, 고교, 대학 시절2.2. 1992년 ~ 1993년2.3. 1994년2.4. 1995년2.5. 1996년2.6. 1997년2.7. 1998년2.8. 1999년2.9. 2000년2.10. 2001년 ~ 200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2.11. 2003년2.12. 2004년2.13. 2005년2.14. 2006년2.15. 2007년2.16. 2008년
3. 현대-히어로즈로의 귀환, 은퇴식4. 국가대표 경력
4.1. 1989 한미야구선수권4.2.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4.3. 1991 IBA4.4. 1991 대륙간컵4.5. 1991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4.6. 1999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4.7. 2000 시드니 올림픽4.8.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5. 기타
5.1. 1990년대 최고 투수 논쟁5.2. 역대 단일시즌 선발승 순위에서의 정민태5.3. 저평가
6. 연도별 성적
6.1. KBO6.2. NP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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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1996년부터 2000년, 2003년까지 6시즌간 부동의 KBO를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로 군림했던 현대 유니콘스의 레전드였다.

현대가 마지막으로 우승했지만 개인 성적은 좋지 않았던 2004년과, 팀은 해체되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정규리그 2위를 했지만 본인은 재활만 하다 단 한경기만을 등판한 2006년을 빼면, 정민태와 현대 유니콘스의 성적은 거의 같은 흐름을 보였다. 또한 2000년까지 탄탄대로를 걷던 현대 팀이 정민태가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진출한 2001년에 잠깐 가세가 기울었고, 정민태가 복귀한 후 2번의 우승을 더하며, 1998년부터 2004년까지 7년간 4번의 우승을 일궈내며 독보적인 강팀으로 군림했다. 더불어 양자 모두 야구에서의 결말이 비참했던 것까지 똑같았으니...이쯤되면 아예 팀과 인생을 같이한 수준. 만약은 없다지만 현대 유니콘스가 재정난을 겪지 않고 지금까지 존속했다면 그의 등번호 20번은 영구결번으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1]

그래서 '투수왕국'으로 불렸던 현대 구단에서도 단연 투수 중 간판, 최고 서열로 대접받았다. 역대 삼청태현 투수 중 스탯티즈 WAR 1위, 최다승 투수(124승), 단일 시즌 20승 투수(1999년), 프로야구 최초의 연봉 7억 투수[2] 등의 타이틀을 가진, 현대의 명실상부한 에이스.

92년 데뷔했으나 토미 존 수술로 2년을 쉬고, 94년부터 본격적으로 뛴 이래 04년까지 선발투수 WAR 1위(45.41)[3], 다승 1위(123승). 90년대 후반(95~99년)으로 범위를 좁히면 다승1위 (73승), WAR 누적 1위 (29.35) KBO리그 90년대 후반의 투수 1인자 [4].
5년 연속 200이닝 투구와 더불어 두자리수 선발승. 게다가 98년~03년 (01,02제외)까지 4년연속 리그 선발승 1위 및 4년연속 선발17승 이상을 기록한 유일의 투수. 역대 단일시즌 런 세이브 1위 (62.5)

통산 전적은 290경기 등판(선발 270경기) 1831이닝 124승 96패 평균 자책점 3.48이며, 특히 포스트시즌에서는 유일하게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한 선수이자 최다 선발 등판, 스탯티즈 WAR 1위 등을 기록한 가을 야구 끝판왕.

포스트시즌 통산 21경기 등판(선발 18경기), 10승 1패 (10선발승) 평균 자책점 2.11, 115.1이닝, WAR 5.01을 기록했다.

이 중에서도 한국시리즈 기록은 더 특별한데, 한국시리즈 통산 유일하게 두 자릿수이상 선발 등판한(12경기) 투수이며 선발승 6승으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통산 다승으로는 가을까치 김정수 투수(7승)에 이어 선동열과 공동 2위, 누적 war 2위(2.90)[5]. 또한 최동원과 더불어 단일 한국시리즈에서 선발투수로 3승 이상을 기록한 둘뿐인 사례(2003년 한국시리즈[6])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정민태의 포스트시즌 및 한국시리즈 유일한 1패는 96년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조계현에게 당한 패배 뿐. 즉, 현대가 우승할 때 정민태는 패전을 기록한 적이 없다.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3회이상 수상한 유이한 선수 [7] 이자 선동열에 이은 투수부문 골든글러브 2연패 달성한 투수이기도 하다. 총 3회 수상으로 선동열(6회)에 이은 단독 2위.
투수 골든글러브 기록으로는 역대 No.2.

골든글러브 2연패 기록은 이후 린드블럼 외에는 아직 달성한 사람이 없으며 2회 수상자는 김시진 류현진 린드블럼 3명이다.

2. 목록

2.1. 초등, 중학, 고교, 대학 시절

인천숭의초, 동산중, 동산고 출신. 야구 훈련중 콜라를 마셨으며, 84년 중학야구 MVP로 주목을 받았고 86,87년 팀을 황금사자기 4강에 까지 올렸다. 87년 전국체전 우승은 덤.
87년에는 훗날 국가대표에서 늘 함께한 지연규, 구대성 등과 함께 청소년 야구 대표팀으로 선발되었고, 고교 대어로 주목받으며 한양대에 진학하였다.
파일:kiDdcb4.jpg
사진 좌측부터 정민태, 구대성, 양준혁

한양대 시절에는 1년 후배인[8][9] 구대성과 함께 좌대성 우민태로 불리며 대학 야구를 평정했다.[10] [11]

1989년에 1학년 구대성과 함께 전국대회 3관왕, 1990년에는 2관왕의 왕좌에 오르는데 1등공신이었으며

1989년 대만 IBA배 국제대회 우승 및 베스트9선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공동)우승에도 기여한다.

1990년에는 캐나다 세계선수권 3위 [12] , 북경 아시안게임 준우승[13] 등 화려한 족적을 남기며 1990년 아마야구 MVP로 뽑혔다. 90년 대학리그에서 무려 13승.
북경아시안게임 준결승 일본전 완투

1991년에는 6월 IBA 우승의 주역이 되었지만,[14] 7월 스페인 대륙간컵 4강 실패(5위), 9월 올림픽티켓 실패 등의 시련을 겪는다. [15][16]

2.2. 1992년 ~ 1993년

1992년 태평양 돌핀스의 1차 지명을 받고 데뷔했으나 그 해 겨울 병역비리로 인해 65일 간 유치장에 갇혀 버린 데다가 설상가상으로 팔꿈치 인대가 끊어지는 부상[17]을 당해 결국 몇 경기 등판하지도 못하고 수술을 받게 된다.[18] 이때 한국프로야구 선수 중 최초로 토미존서저리, 즉 인대 접합 수술을 받았다. 참고로 당시 한국 프로야구계에서는 팔꿈치에 칼을 대는 수술을 금기시하고 있었고, 수술 후 재활방식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없었고, 영입한 신인 투수가 1년 6개월 이상 재활하는 것을 바라만 봐줄 감독도 찾기 어려웠다. 언론에서도 잘못된 계약 운운할 정도로 재활을 곱게 보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한국 야구의 일반적 상황이었다면 한의원 다니고 진통제나 맞으면서 야구하다가 성적 못 내면 방출돼서, 흔한 학창시절 혹사당한 유망주 중 한명으로 끝나는 거였다. 그런데 토미 존 수술과 재활 결정이라는 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태평양 감독이었던 정동진이 메이저리그를 경험한 인물이었고, 팀의 완전한 리빌딩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동진은 수술을 꺼리던 당시 투수들을 설득했고, 2010년대까지도 토미 존 서저리 최고 권위자로 불리는 제임스 앤드류스 박사를 찾아가서 투수들을 수술시키고, 완벽한 재활을 보장하는데 정민태가 운 좋게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 때 재활을 담당한 코치가 은퇴한 후 막 태평양이 투수코치로 영입한 김시진이었는데, 김시진 역시 정동진 당시 태평양 감독이 그 이전 대구상고 사제지간, 삼성 코치 시절 인연으로 영입한 인물이었다.

수술을 받고 재활하는 과정에서 미국 커리큘럼을 그대로 받아오긴 했는데, 일상 움직임 회복에 대한 과정은 잘 끝났고, 진짜 투수 피칭을 시작하려 했는데, 할때마다 강한 통증으로 금방 중단되어 꾸준한 투수훈련을 전혀 하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은 이 과정에서 투구부터 시작하지 말고, 약한 단거리 송구부터 시작하면서 약간의 통증은 견뎌서 재활을 하다가 장거리 송구를 하고 통증이 경감되는걸 보면서 투구 재활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걸 몰랐던 것. 게다가 처음 아팠을때 의사가 괜찮다고 한걸 믿었다가 잘못되어 인대가 끊어졌던만큼, 훈련시 통증이 올때마다 크게 두려워져 스스로 위축되어 훈련을 거부한 부분도 있었다. 결국 투수훈련을 제대로 안하고 쉬면서 1년 반에 가까운 시기가 되자 구단 내에서 방출 얘기까지 돌게 되고, 코치들과 프런트 직원들이 정민태에게 따가운 시선을 보냈다고 한다. 인사도 안 받아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결국 정민태는 통증을 참고 억지로 투구를 하는 투수훈련을 시작했는데, 한동안은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서 혼자 울기까지 했었지만, 확실히 장기간의 휴식[19]을 취한 효과가 있는지,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더니 어느새 점점 빨리 통증이 줄어들기 시작하여 한달쯤 지나니까 별로 안 아팠다고 한다. 본의 아니게 오래 쉬면서 오히려 팔이 더 확실하게 회복된 측면도 있다. 그리하여 투수 복귀를 하게 되었다.

2.3. 1994년

25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145.1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5.8), ERA 3.72 / FIP 3.01 (ERA+ 103.4 / FIP+ 127.6)
탈삼진/9 : 5.64 볼넷/9 : 2.35 피홈런/9 : 0.43, sWAR 3.23.
기나긴 재활에서 복귀한 시즌. 당시 수준 높았던 태평양 돌핀스 선발진의 한 축을 담당하며 8승 9패를 기록한다. 플레이오프에서 한화를 상대로 1승을 기록했으며 LG와 벌였던 한국시리즈에서는 3차전에 선발 투수로 나서 5이닝 동안 퍼펙트 투구를 하기도 했다.

2.4. 1995년

28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188이닝(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6.7), ERA 3.63 / FIP 3.08 (ERA+ 103.4 / FIP+ 120.4)
탈삼진/9 : 5.51 볼넷/9 : 2.78 피홈런/9 : 0.38, sWAR 3.60.

팀 내에서 가장 많은 188이닝을 던지며 8승 14패[20]를 기록했고 동산고 후배 위재영[21]과 함께 팀 마운드를 지탱했다. 본격적으로 많은 이닝을 소화하기 시작했으나 태평양의 아름다운(?) 득점력 덕에 리그 최다패를 기록했다. 팀은 최종 순위 7위를 기록.

2.5. 1996년

30경기 출장(선발 29경기), 210.1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 ERA 2.44 / FIP 3.13 (ERA+ 150.5 / FIP+ 117.1)
탈삼진/9 : 5.43 볼넷/9 : 1.93 피홈런/9 : 0.64, sWAR 5.87.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고 팀명을 바꾼 현대 유니콘스의 꾸준한 지원과 김재박 감독, 하기룡 투수코치의 도움으로 에이스로 활약, 15승 9패를 기록한다. 한화 이글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는 8이닝동안 무실점으로 호투[22]하며 1차전 승리를 안겨주었고, 플레이오프 쌍방울전에서는 활약이 뚜렷하지 않았으나 마지막 5차전에서의 활약이 컸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승리하여[23] 한국시리즈에 진출, 해태전에 2차전(8.1이닝 ND)과 5차전(패배)[24][25] 선발 투수로 나서기도 하였다.

2.6. 1997년

31경기 모두 선발로 출장, 219이닝 (선발 출장 경기당 소화 이닝 7.1), ERA 3.33 / FIP 3.08 (ERA+ 119.9 / FIP+ 129.6)
탈삼진/9 : 6.53 볼넷/9 : 2.10 피홈런/9 : 0.62, sWAR 5.53.

1997년에는 219이닝을 던지며 13승 13패 평균 자책점 3.33을 기록. 호투하고도 팀 타선이 터져주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아쉬웠던 해. 팀은 6위로 추락한다.

정민철과 탈삼진왕 경쟁을 벌였으나 1개 차이로 2위를 기록.(159삼진, 1위 정민철 160삼진)

2.7. 1998년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98)
파일:1998년 한국시리즈  MVP 정민태.jpg
1998년 한국시리즈 MVP 정민태
1998년에는 200.2이닝을 던지며 평균 자책점 2.89, 17승(리그 2위, 선발승 순위 1위 [26][27]) 9패를 기록, 현대 유니콘스의 정규리그 1위[28]를 이끌어낸다. 이후 한국시리즈에서는 1차전과 4차전에 선발투수로 나서며 승리를 거두었고 6차전에서는 마무리로 등판한다. 도합 3경기 2승 방어율 0.61이라는 무시무시한 호투를 선보이며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 당시 신차였던 EF 쏘나타를 부상으로 받았고, 이어서 그 해 다승왕 김용수를 제치고 투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한다.[29][30][31]다만 정규리그 MVP는 그 해 42홈런을 치며 종전 장종훈의 단일시즌 홈런 기록(41개)을 경신한 타이론 우즈가 가져간다[32].

2.8. 1999년

파일:KBO 골든글러브 로고.svg
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1999)

1999년에는 33경기(선발 29경기) 등판, 230.2이닝을 던지며 20승[33] 7패 3세이브 평균 자책점 2.54[34](2위)[35]를 기록한다. 이 해가 정민태의 커리어하이인데, 사실 1999년 시즌은 역사상 손꼽히는 타고투저의 해였다. 30-30 기록자만 세 명이 나오고, 이승엽이 54홈런을 치고, 해태 타이거즈가 팀 홈런 210개를 기록하며, 리그 평균자책점이 4.98인 해. 즉 타고투저 시대에 혼자 투고타저 놀이한 선수[36]. 당장 평균자책점 3위를 기록한 문동환의 평균자책점이 3.28이다.

타고투저에서 20승을 거두고 평균자책점이 2점대인 것을 보고 팀 운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이 해 현대 유니콘스는 드림리그 3위, 종합 5위로 시즌을 마쳤다[37]. 팀 실점은 2위를 기록하였지만 이건 정민태의 지분이 크고, 나머지 투수들은 그 해의 타고투저를 버티지 못하였다. 김수경은 탈삼진왕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기복이 심했고, 위재영은 시즌 중 병역비리에 걸려 한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최원호는 방콕 아시안 게임 뒤에 제대로 박살나버렸다. 중간계투의 조웅천은 성적이 점점 내려가고 있었고, 김홍집은 LOOGY로 많은 경기에 등판하긴 했지만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 나머지 계투들 또한 성적이 좋지 않았다. 초반에 선발로 나섰다가 마무리로 복귀한 정명원은 구위 저하가 현저히 드러났다. 결국 이 해 현대는 특정한 마무리 없이 집단 마무리 체제를 가동, 10명의 선수들이 세이브를 번갈아 가면서 획득했다. 이 상황에서 정민태의 승리를 지켜주거나 분식회계를 막아준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팀 타선은 더 심각했다. 팀 득점은 쌍방울 다음으로 낮은 7위에 불과하였다. 작년도 좋은 성적을 낸 이명수김경기는 규정타석도 소화하지 못한 채[38] 그대로 고꾸라졌고 전준호는 그나마 규정타석은 소화했으나 타격성적이 전년도 보다 3푼이나 급락했다. 이숭용이나 나머지 선수들도 모두 성적이 조금씩 하락하였다. 이 시즌은 가중출루율(wOBA)이 4할 이상인 선수가 15명이나 있었지만 그 중에 현대 선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나마 wOBA 순위를 상위 25위로 범위를 넓혀야 박재홍(19위, .391), 박종호(24위, .370)만 이름을 보인다. 야심차게 데려온 외국인 선수 에디 피어슨은 wOBA 리그 28위(.365)로 전 해의 스캇 쿨바만큼의 활약을 하지 못하였다. 사실 피어슨은 공격력만 보고 데려온 외국인 타자인데[39], 그 공격력마저도 그저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하게 버틴게 정민태였다.

선동열 이후 처음으로 투수 골든글러브 2연패를 달성하지만, 정규리그 MVP는 54홈런을 때린 이승엽에게 밀려 수상에 실패한다.

시즌이 끝나고 일본 진출을 하려했으나 KBO 규정상 1시즌을 더 소화해야 해서[40] 2000년까지 KBO에서 뛰게 된다.

여담으로 정민태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1999년 230이닝을 넘게 던졌을 때 나중에는 팔이 안들어지고 밥도 못 비빌 정도로 마비되는 기분을 느꼈다고 한다. 그만큼 무리하게 던졌다는 것.

이와중에 아시아야구선수권 겸 시드니올림픽대회 예선 국가대표, 한일 슈퍼게임까지 출전하였다.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결승리그 2차전 대만전에 선발로 나서 7이닝 2실점으로 승리의 발판을 놓았다.[41]

시즌 후 11월 도쿄 돔에서 열린 한일슈퍼게임에서는 4차전에 선발로 출전하여 3.1이닝 동안 5안타 3실점하였는데 마쓰이 히데키한테 1회 2루타를 맞으며 2실점한게 컸다. 5:3 상황에 내려온 이 경기는 결국 8:8로 무승부.[42]

선발 등판했지만 1회부터 2실점하고 이후 4회에 추가실점 후 조기강판당했다. 99년 슈퍼게임은 95년 슈퍼게임의 선전으로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 선발들이 모두 5이닝을 못 버티고 강판당하며 선발 구대성(4.2이닝 5자책), 문동환(3이닝 2자책), 정민철(3이닝 1자책), 정민태(3.1이닝 3자책) 모두 부진했다.

사실 정규시즌 230이닝을 던진 데 이어 시즌 후에는 아시아야구선수권 국가대표팀 차출, 그리고 한일 슈퍼게임까지 뛰면서 총 250이닝 가까이 던진 시즌으로 그는 허벅지 부상으로 시즌 내내 고생했으며 2000 시즌의 구위저하로 연결된다.

2.9. 2000년

2000년에는 김수경, 임선동과 함께 18승을 올리며 리그 최초 공동 다승왕에 올랐고[43] 삼성과의 플레이오프에서 2승, 두산과의 한국시리즈에서 1승을 올렸다. 그 해 플레이오프 MVP와 스포츠 신문사에서 주관하는 정규리그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이해 7월 30일부터 정규시즌 종료까지 7연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일본 진출 및 복귀 이후인 2003년 21연승까지 이어진다.

http://mn.kbs.co.kr/news/view.do?ncd=108486

그러나 99년의 무리 탓에 후반기에는 허벅지 부상에 시달렸으며 플레이오프에서는 삼성과의 7전 4선승제의 경기에서 2승을 거두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앞장섰으며 한국시리즈에서 3차전 선발로 승리를 거두었다.

2.10. 2001년 ~ 200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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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시즌 종료 후 이적료 5억 5천만 엔,[44][45] 연봉 1억 2000만 엔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조성민, 정민철과 1군 진입 경쟁을 펼쳤다. 그런데 2001 시즌 개막 직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시범경기에서 발목 부상을 당하고, 8월에야 데뷔전(13일 대 야쿠르트전)을 갖는다. 그런데 여기서 3이닝 3실점을 기록, 하루만에 2군으로 내려가고 만다. 9월에 다시 1군에 올라와 16일, 18일에 구원승 2승을 올리지만, 선발로 올라가면 올라가는 족족 털리고 만다. 2001년 성적은 10경기 등판(선발 3경기) 2승 무패 방어율 6.16.

2002년에는 6월에서야 1군에 올라가게 된다. 중간계투로 등판하면서 7월 중순까지는 선방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7월 25일 한신전에서 끝내기를 당하면서 2군으로 내려가고, 8월 18일에 1군에 복귀하여 0이닝 3실점을 기록하고 만다. 그래도 바로 2군으로 내려가지는 않고 몇 경기 더 던졌지만, 8월 30일에 역시 0이닝 3실점을 기록하고 이후 1군 경기에 나오지 못한다. 2002년 성적은 17경기(선발등판 없음) 1패 방어율 6.41.

이후 정민태는 계약기간 1년을 남기고 KBO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12월 16일 연봉 5억 원에 현대 유니콘스로 복귀한다.

일본에서의 실패 요인이라면, 정민태 본인은 차별대우코칭스태프(특히 가토리 요시타카 투수코치)와의 불화를 이유로 들었다. 이러한 불화는 정민태 본인을 통해 일본 시기 때부터 한국에서 기사화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고, 이후 2022년에도 스톡킹을 통해서 정민태가 재차 언급하였다.

물론 본인이 이야기한 요미우리 특유의 배타적 문화와 정민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가토리 투수코치 등 외적 요인으로 인한 심리적 위축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일본 진출 당시 정민태의 몸상태가 최상이 아니었다는 점 또한 중요한 요인이다. 정민태는 1996~00년까지 5년연속 200이닝을 던지면서 구위가 약해지고 있었고, 이미 1999년부터 고생했던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하체 중심의 투구폼에 나오는 특유의 구위를 잃어가고 있었다. 한국시리즈의 무적 투수라지만 2000년 무렵 실전에서 보여주는 정민태의 구위는 96~99년과는 많이 달랐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구위도 1999년의 아시아선수권과는 많이 차이가 났으며 2000년에도 비록 18승을 거두고 한국시리즈 에서 1승을 거뒀으나 예전의 구위는 아니었다.[46]

정민태가 스톡킹에서 얘기했듯이 한국리그에 복귀하여 2003년에 선보인 투구와 기록한 성적은 투심을 새롭게 장착해서 거둔 성적이다. 또 한국시리즈에서 진통제를 맞아가며 3승 선발승(7차전 완봉)을 해냈는데, 이는 사실상 본인의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모아 만들어낸 마지막 불꽃이었다. 결국 그 후유증이 2004년 폭발, 허벅지 부상이 재발하고 어깨부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전성기 정민태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정민태는 가토리 코치가 한국인 선수를 차별했으며, 자신뿐 아니라 정민철, 조성민에게도 엄격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가토리 코치가 정민철에게는 우호적인 편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정민태와 가토리 둘은 처음부터 서로 상성이 맞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아마도 가토리는 일종의 '선수 길들이기'를 통해 정민태를 통제하려 했던 듯하다. '정민태 선수가 한국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지만 여기는 일본이니, 일본 야구를 존중하는 태도가 느껴지지 않으면 요미우리의 선수로 절대 인정해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가토리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일본 코칭 스태프들이 일본에 진출한 한국 스타플레이어를 접했을 때, '한국에서는 스타 대접을 받았겠지만, 여기서는 아니니까 일단 그런 마인드부터 고쳐줄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선동열, 이종범, 이승엽 등 초창기 일본 진출 선수들이 1년차 때 고생한 게 다 이런 편견 때문. 게다가 정민태는 한국에서부터 자존심도 센 편이었고 감독과 직접 이야기를 해서 여러 문제를 해결하는 등 기가 센 것으로 유명했던 선수였다. 만일 가토리가 현대 유니콘스 구단 관계자들을 통해서 정민태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들은 게 있었다면, 일단 무조건 기부터 죽여놔야겠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이런 정황은 정민태 본인이 2011년에 스포츠 2.0에서 박동희와 한 인터뷰에서 드러난다.
가토리코치는 나(정민태)를 보자마자 “네가 한국 최고의 투수라고 하는데 얼마나 콧대가 센지 두고 보자”라고 하더라. 왜 그가 나를 경계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토리코치는 삼성을 비롯한 한국프로야구 관계자들과 친했다. 전날 밤 삼성 코칭스태프와 술자리를 한 모양이더라. 거기서 가토리코치가 삼성 코치들한테 “정민태 이 녀석, 콧대 좀 납작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했단다. 아무래도 팔이 안으로 굽지 밖으로 굽겠는가. 나중에 삼성 코치 가운데 한 분이 그 이야기를 해주더라. 그러면서 “네가 어떻게 처신했기에 가토리가 너를 박살내달라고 하느냐”고 묻는데 그때 이런 생각이 들더라. '아, 여기서는 더 이상 야구할 수 없겠구나.'

앞서 언급했듯 정민태는 가토리 코치가 한국 선수를 차별했다고 했지만, 해당 내용을 봤을 때 가토리가 특별히 혐한 정서가 있었다기보다는 한국의 스타 플레이어를 컨트롤해야 하니 자만심을 꺾고 길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던 측면이 커 보인다.[47]

어쨌거나 구대성과 같이 한국야구와 비슷한 성향의 퍼시픽리그나 좀더 여유있는 코칭과 기용이 가능한 요미우리 외의 구단에 입단 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얘기도 있다. 실제 구대성은 절친한 선배인 정민태에게 같은 조언을 하기도 했다. 일본야구-구대성, 정민태 만나 조언 심지어 위의 스포츠 2.0 인터뷰에서 정민태 본인 역시 '일본 해설가들이 본인(정민태)를 만나면 왜 요미우리 와서 고생하냐, 불쌍하다'라고 얘기했다고 증언했다.

당시에도 정민철과 정민태의 사례를 들며 요미우리가 한국의 에이스급 선수를 데려다가 망친다는 얘기는 심심찮게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인만 골라서 차별한 건 아니고, 애초에 요미우리가 선수들을 소모품 다루듯 했던 탓이 크다. 본래 교진은 예나 지금이나 FA매물만 나왔다 하면 가격표 안 보고 쓸어담는 팀이며, 팀에 필요한 선수만 사는 게 아니라 적으로 만나기 싫은 선수를 그냥 팀 내에 묶어버리려고 영입하는 경우가 생각 이상으로 많다. 때문에 괜찮은 선수만 나왔다 하면 포지션 중복도 신경쓰지 않고 얼마든지 사들이며 조급증도 심해서 1년만 부진했다 하면 바로 2군에 박아버리고 또 새로운 FA를 사들이는 일도 예삿일이라 명색이 FA로 입단한 선수인데도 주전 보장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그렇다보니 좀 여유를 갖고 기다려주면 살아날 수도 있는 선수가 기회를 박탈당해 폼을 회복하지 못하는 등 망가지는 선수도 많다.[* 물론 이러면 선수들이 선호하지 않을 수 있으나, 돈 앞에 장사없다. 교진은 다른 구단에서 주전 보장받으며 7~8년 정도 길게 야구해봤자 손에 못 넣을 거금을 3~4년만에 주니 경쟁에서 져서 빨리 은퇴하게 되더라도 금전적으로는 훨씬 이득이며, 일본 프로야구 주인공팀이라고 할 만한 인기팀이라 선수들 본인도 교진 유니폼 한번 입는 게 소원인 선수도 많고, 수도 도쿄를 홈으로 하는 쾌적한 생활환경도 무시 못하기 때문에 이래도 다들 교진에 가고 싶어한다. 물론 2023년 현재는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도 도쿄 대신 후쿠오카라는 점만 빼면 엄청난 돈을 부르기 때문에 쿄진만큼 인기가 많아서 쿄진이 최우선인 것은 아니다. 단 호크스도 최근 견제성 FA구매를 시작하고 있고, 이쪽은 육성선수들을 대거 뽑아 4군까지 만들 정도로 어린 유망주들도 꽉꽉 차 있기 때문에 슬럼프가 오면 자리를 빼앗기는 것도 거의 비슷하다.(단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스타들에게는 쿄진보다는 조금 너그럽긴 하다.
최근에는 젊은 선수들도 이걸 알아서 쿄진은 fa보강에서 연속으로 물을 먹고 있다. 일본언론에서는 쿄진 브랜드가 먹히지 않는다는 표현을 쓴다. 아베 감독으로 바뀌기 몇년전부터 매년 대형 보강을 했던(fa보강 12구단 중 1위) 쿄진이 fa대어들을 추파를 던져고 다 놓치고 있다. 젊은 선수들은 요미우리에서 쉽게 선수를 쓰다 조금만 못하면 버려 버리는 것에 대해 알고있고, 예전 같이 쿄진만 지상파에서 중계하는 시대도 아닌지 오래다. 요즈음 젊은 일본 선수들은 자기가 잘 그리고 오래 선수 생활 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다.)
)] 여튼 이런 교진의 환경은 국적 상관없이 어떤 선수에게나 평등하게 가혹하다. 정민철과 정민태는 이런 교진의 무한경쟁을 이겨내지 못했을 뿐. 그 외에도 교진은 역대 감독이나 영구결번자 등 재일교포들이 여럿 레전드로 있을 뿐더러 한류 붐이 일기 전부터 홈구장 내에 한국음식점을 유치하거나 홈페이지, 유튜브에서도 한국어 지원을 하는 등 오히려 친한에 가까운 구단이다.[48]

게다가 현대가 거액의 이적료 (5.5억엔)을 위해 요미우리를 선택했고 정민태의 말로는 요미우리 퇴단 시 관계자와 협상을 하면서 3년간 일본리그 타 구단 이적 금지 각서를 쓰고 나왔기 때문에[49]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정민태의 일본 시절은 대실패로 막을 내렸다. 이적료 및 연봉을 합친 액수로 따지면 마이크 그린웰 같은 메이저리거 출신 대형 먹튀와도 맞먹을 수 있는 영입이었다.

2.11.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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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투수 부문 수상자 (2003)

2003년은 정민태가 사실상 선수로써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시기. 정민태는 이 해 8월 31일 세계 기록인 선발 21연승[50]을 기록했다. 하지만 단일 시즌이 아니라 세계기록으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51] 최종 성적은 29경기(전부 선발등판) 177이닝 평균자책점 3.31(3위), 17승(1위) 2패를 기록. 세번째로 다승왕 타이틀+골든글러브를 차지했고 승률부문 타이틀도 차지한다. 다만 선발 21연승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해서 그렇지 세부 스탯으로만 보면 한화의 이상목이 더 뛰어났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52][53][54] 스톡킹에서 후술하기를 일본에서 복귀 당시 몸이 매우 안 좋았으나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구종인 투심 패스트볼을 장착했고 그것으로 03년을 버텼다고 한다.

9월말에 열린 KIA와의 정규시즌 1위 결정전에서 8이닝 1실점 완벽투로 팀의 정규시즌 우승을 확정지었고 SK맞붙었던 한국시리즈에서는 1, 4, 7차전에서 선발로 나서며 모두 승리를 따내 1998년에 이어 2번째로 한국시리즈 MVP에 오른다. 단일 한국시리즈 선발 3승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이 거둔 4승(선발3승, 구원1승) 이외에는 나오지 않은 기록.[55] 또한 정민태 이후로 아직까지 7차전을 완봉승으로 장식한 선수는 없다. 정민태의 KS 7차전 완봉승은 현재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그러나 선발 21연승, 한국시리즈 3승이라는 대기록이 정민태의 남은 선수생활에 악영향을 미치는데, 우선 정규시즌에서 7연승을 한창 달리던 중 정민태는 고질적인 허벅지 근육통으로 인해 2군에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다. 그런데 당시 현대의 선발진이 무너지기 직전이었고[56] 이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선발 로테이션에 끌려나온 것. 한국시리즈에서도 정민태는 허리 상태가 썩 좋지 못했는데, 그걸 참고 1, 4, 7차전에 선발로 등판했고, 특히 7차전에서는 허리에 테이핑을 하고 완투를 하게 된다. 거기에 다시 2003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대표로 차출되어 대만전 선발로 나서지만 4이닝 2실점의 부진한 투구를 선보이고 강판된다. 그리고 팀도 연장끝에 패배한다.[57] 이렇게 무리를 한 결과는 바로 다음 해부터 드러나게 된다.[58]

아무튼 화려한 성적을 거둔 그는 당시 프로야구 역대 최고연봉인 7억 4천만원에 연봉협상을 마무리한다.[59]

2.12. 2004년

개막전에 출전. 이전까지 개막 5연승을 달리던 정민태였는데, 시즌 개막전에서는 홈런 2방을 맞고 7이닝 3실점. 잘 던졌으나 패전을 떠안고 만다. 그러나 그 이후로 3연승을 하며 5년만의 20승 재도전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4월 25일 두산전[60]에서 1.1이닝 9실점(6자책)을 기록하며 털리고 만다. 이후 정민태는 그대로 무너졌고, 이 와중에 허리부상무릎부상까지 닥치면서 선수생활 자체에 빨간불이 켜지게 된다. 결국 최종성적은 28경기(전부 선발 등판) 165.2이닝 7승 14패(최다패 2위) 평균자책점 5.00을 기록한다.

그래도 왕년의 에이스이고 워낙 포스트시즌에 강했던 모습을 보여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고 2차전과 7차전 선발로 출격했지만, 2차전에서는 1.1이닝 6실점, 7차전에서는 4.1이닝 3실점으로 무너졌다. 다만 두 경기 모두 무승부를 기록.[61] [62]

시즌 종료 후 바로 연봉이 25% 삭감, 5억 5500만에 연봉협상을 마무리한다.

2.13. 2005년

2005년에는 시즌 개막 전에 어깨 물혹 증세가 발견, 재활에 힘쓰다 5월에 1군 등록. 8일 복귀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했지만 패전을 떠안았다. 그런데 5월 13일 경기에서 2.2이닝만에 허벅지 부상으로 인해 강판되고, 그대로 시즌 아웃. 9월에 조용준과 함께 어깨 수술을 받는다.

2.14.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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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는 전해 받은 어깨 수술로 인해 7월 이후에나 복귀할 예정이었다. 이 해 정민태는 FA까지 60이닝 정도 남은 상황이어서 건강하게 복귀하는 것이 절실했던 상황. 그러나 복귀가 점점 늦어졌고, 그 와중에 2군 경기에서 3이닝 12실점이나 하는 모습도 보이고 말았다. 그래도 끝내 1군 복귀를 하지 못한 조용준과는 달리 9월 29일, 1년만에 1군에 등록되고 10월 1일 삼성전에서 중간계투로 첫 등판을 가졌다. 복귀하자마자 심정수에게 투런홈런을 맞고 말았지만[63], 2이닝 1실점을 하며 그런대로 지켜볼 만한 투구를 펼쳤다. 팀은 당시 정규리그 2위를 기록했고, 정민태가 막판에 PO 엔트리에 들어갈 수 있을지가 관심사였으나, 결국 PO 엔트리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리고 현대가 PO에서 한화에게 업셋을 당하면서 정민태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2.15. 2007년

2007년에는 시작부터 복귀 가능성에 대해 좋지 않은 평이 들려왔다. 그리고 4월 7일 롯데전 홈 경기에 7회 계투로 나온 첫 등판부터 0.2이닝 4실점으로 무너지고, 15일 LG전에 선발로 나와서도 4이닝 4실점(3자책)을 기록한다. 그리고 21일 롯데전에는 이대호에게 사직구장 첫 장외홈런을 허용하는 등 0.2이닝 5실점을 기록. 평균자책점이 3경기 20.25까지 치솟자 정민태는 자진해서 2군으로 내려간다. 결국 김시진 감독의 입에서 은퇴 이야기까지 나오고 만다. 그래도 7월 12일에 1군에 다시 등록되고, 비로 한 차례 선발 등판이 밀려 22일 KIA전에 선발로 등판했지만 4.1이닝 4실점을 기록. 29일 LG전에서는 1회부터 강습타구에 맞는 등 불운까지 겹쳐 2.2이닝 4실점을 기록. 이제까지 등판한 경기에서 모두 패전을 떠안았고, 평균자책점도 14.59. 다행히 시간이 조금 지난 8월 19일 롯데전에서는 그래도 5이닝 2실점을 기록하지만 ND. 게다가 다음 등판인 8월 25일 두산전에서 2.1이닝 6실점 패전을 기록하며 도로 원상태로 돌아오고 만다. 그리고 이 경기가, 그가 현대 유니폼을 입고 뛴 마지막 경기가 된다. 그리고 9월 20일 두산과의 홈경기에서 다니엘 리오스가 본인 이후 8년만에 20승을 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07시즌 최종 성적은 7경기(선발 6경기) 19.2이닝 0승 6패 평균자책점 12.81.

3년 동안 무승, 10연패. 한 때 KBO를 대표하는 에이스였던 그는 너무나 처참하게 무너져 있었다.

2.16.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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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말년에는 무리한 연봉으로 '돈민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는데, 이는 2004년 4월 말 이후 급격한 노쇠화와 부상 등으로 인하여 전혀 팀에 도움이 안 됨에도 불구하고 연봉 협상에서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64] [65] 그러다 현대 유니콘스히어로즈로 재창단될 때, 이장석 사장과 박노준 단장은 '연봉 거품을 빼는 MLB식 운영'이란 명목으로 김동수, 전준호, 이숭용, 송지만, 조용준 등의 고액연봉자는 물론 모든 선수의 연봉을 후려치려 했다. 고참 선수들은 집단으로 반발했고 박노준 단장과 계속 트러블이 나다 박노준은 선수들에게 경고장을 날리는 목적으로 3월 4일 정민태를 자유계약 공시하며 방출시켰다.[66] 그 후 선수들은 결국 3월 말에야 깎인 연봉안을 받아들였다.

어쨌건 평소 고향 팀에서 커리어를 마무리하고 싶다고 밝혔고, 김성근 감독과 마지막 커리어를 하고 싶어 SK에 입단을 타진하였으나 SK와 협상이 실패하였다. [67] 안타깝게 여긴 김용휘 현대 유니콘스 사장이 KIA 타이거즈에게 정민태를 영입해 달라고 요청하고[68], KIA 타이거즈도 정민태에게 선발 자리를 보장한단 조건을 내건 결과, 정민태는 KIA 타이거즈로 이적한다.

그러나 2008년 4월 18일 광주 한화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1984년생 김태완에게 홈런을 맞는 등 부진하여 패전 투수가 된 뒤 2군으로 내려갔고, 그게 마지막 경기가 됐다. 2군으로 내려가서도 재기에 실패하며 결국 현역 은퇴를 선언한다.[69] 은퇴할 때도 고운 눈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었다. 이는 원래 그를 옹호해줘야 할 현대 팬 자체가 적을 뿐더러, 히어로즈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그나마 적던 팬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더욱 심화된 것이기도 하다.
동아일보 [허구연의 스포츠클럽] ‘대투수’ 정민태의 쓸쓸한 은퇴
입력 2008-07-14 08:45수정 2009-09-24 16:40

지난 주 갑작스런 정민태의 은퇴 소식은 그 며칠 전 타계한 김진우의 비보와 함께 필자에겐 충격적이었다. 김진우는 삼미·청보의 주전 포수였다. 짧은 감독 재임기간이었지만 청보 선수였던 그의 밝은 생전 모습을 지울 수 없다. 건강이 악화돼 먼저 세상을 떠난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보다 후배인 정민태의 은퇴는 화려한 성적과 경력에 비하면 너무 허무하게 무대를 떠나는 배우 같아 가슴 아팠다. 그는 팀이 넘어가는 과정에서 강한 저항 속에 결국 KIA 유니폼을 입었기에 그를 아끼는 팬들의 아쉬움은 더욱 컸을 것이다.

올 초 현대 유니콘스 매각과정 때 우리 히어로즈의 운영주체인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와의 갈등 속에 그는 스스로 방출을 요구했고, 4월 18일 딱 한차례 광주에서 등판한 것이 팬들 앞에서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인천 야구팬들은 고인이 된 박현식, 최관수 선배들이 아마추어 야구의 대표적 선수였다면 프로야구 출범 후 최고의 투수 중 한명이었던 정민태가 은퇴식도 없이 쓸쓸히 운동장을 떠난 소식을 듣고 착잡했을 것이다. 그가 많은 기록을 보유하고 있지만 선발 21연승 기록은 세계 최다 선발투수 연승기록이고, 4차례 한국시리즈 우승 및 2차례 시리즈 MVP수상(1998년·2003년)도 값진 기록이다. 이 정도면 무대를 떠나는 그가 당연히 축하 속에 유니폼을 벗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은퇴 소식을 접하면서 장종훈의 화려한 은퇴식과 대비됐고, 또 슈퍼스타들의 은퇴시기를 선수들 스스로 잘 조절했으면 하는 안타까움도 교차했다. 현재 뛰고 있는 스타들도 구단이나 코칭스태프, 동료·후배들에게 짐이 되면서 은퇴시기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124승 투수 정민태가 후배들의 기회나 뺏는 선배 투수, 연봉이나 축내는 선수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는 은퇴의 변은 대투수다운 모습이었다.

그의 은퇴를 보면서 히어로즈의 노장 전준호와 김동수가 어떤 형태로 은퇴할 지 궁금한 반면 이종범, 송진우, 마해영, 양준혁 등은 본거지에서 은퇴할 수 있는 ‘행운아’라고 생각된다.

멋진 마무리를 할 수 있도록 스타들은 구단과 함께 미리 입장을 조율했으면 한다. 실제 구단과 선수 사이에는 팬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대립적 가치의 갈등이 있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양보와 화해의 부드러움 속에 스타들의 멋진 은퇴식이 이어지길 팬들과 함께 기대해 본다.

허구연 야구해설가

3. 현대-히어로즈로의 귀환, 은퇴식

사실 KIA에서 은퇴한 뒤에 KIA에서 투수코치로 일하면서 영건들을 키우고 싶다는 의견을 표력했지만, 선수들이 전혀 따라주지 않는 바람에KIA 선수들의 신의 한 수 실망한 나머지 2008년 시즌 후 김시진 감독의 부름을 받고 서울 히어로즈의 코치로 합류하였다. 보직은 1군 투수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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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2일 목동 LG전에서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고 은퇴식을 치렀다.[70] 코치를 하면서 보람을 많이 느낀다고 한다. 사진에도 나오듯이 평소때의 인상은 둥글둥글하고 인자해 보이지만, 투수가 어이없이 털릴 때 눈에 힘이 들어가는데 그땐 굉장히 무서워 보인다.(...)[71]

4. 국가대표 경력

아마/프로에서는 그는 주로 대만전 담당, 구대성은 일본전 담당이었는데 사실 대학 3학년때까지는 일본에 매우 강했었다.

4.1. 1989 한미야구선수권

1989년 7월 미국 본토에서 열린 한미야구선수권[72] 4차전에서는 미국을 상대로 5피안타 1실점 완투승,[73][74] 11월 대만에서 열린 IBA 국제대회 결승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삼진 12개, 4안타 무실전 완봉승을 거두었고, 아시아선수권에서는 결승전에서 5회부터 구원하여 2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했다 [75][76] 특히 1990년 8월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개최된 세계야구선수권에서는 팀의 5승 중 3승을 혼자 책임지면서 한국이 3위하는데 공헌을 하면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고, 그해 9월 북경 아시안게임 준결승 일본전에서는 1실점 완투승으로 한국을 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4.2.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4.3. 1991 IBA

그렇지만 1991년에는 6월 IBA대회[77] 우승을 하기도 했다.[78]

4.4. 1991 대륙간컵

그러나 7월 스페인 대륙간컵과 9월 중국 바르셀로나올림픽 예선(아시아야구선수권)에서 부진했는데 정&구 원투펀치가 부진하면 한국대표팀은 바로 부침을 겪었다.

4.5. 1991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특히 1991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겸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에서는 첫 경기 대만전에서 부진했고[79] 일본전에서는 7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했지만 (1대1 동점상황이던) 8회에 상대 4번타자 '나카모토 히로시'에게 3점홈런을 허용하면서 경기가 넘어가 버렸다.[80][81]
정민태 입장에서 일본전이 더욱 아쉬웠던 점은 대만전(9월 20일)과 일본전(9월 21일)을 휴식일없이 연달아 선발등판하면서 결국 일본전 경기 후반 체력이 떨어진 점인데, 이 지옥같았던 경기일정 또한 사연이 있다. 요약 참조.[82]
후일 구대성이 프로입단 직전 야구잡지 <주간야구>에서 하일성과 가진 '직격인터뷰'에 의하면, 원래 대만전 정민태, 일본전 구대성 순번이었지만, 생각보다 일이 꼬이다 보니 참사가 발생한 것 같다고 밝힌 바 있다.[83][84]

4.6. 1999 서울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999년 아시아야구선수권 대회 겸 올림픽예선전 결승리그 2차전
프로 데뷔 이후 당시 아마-프로야구 관계에 따라 대표팀 활동은 끝나는 듯 했으나 98년 아시안게임 이후 프로의 아마야구 대표팀 차출이 가능해지면서 1999년 아시아선수권 대회 겸 시드니올림픽 예선 대표팀으로 차출된다.
당시 한국 아마대표팀의 전략은 일본과는 백중세이므로 반드시 대만을 이겨서 최소 2위를 확보해서 진출하는 전략이었다.
98년 이후 프로위주의 드림팀이 구성되면서 전략이 바뀌긴 했으나 99년만 해도 일본은 퍼시픽리그 중심의 아마프로 혼성팀으로 출전을 했고 대만은 프로위주의 정예를 내세웠다. 역대 경기에서 늘 대만과의 경기는 막연하게 알려진 수준의 격차보다는 늘 대만의 한방에 당하는 적이 많았기에 당시에도 대만전에 에이스 정민태를 내세웠다.
정민태는 가장 중요한 대만전에서 선발 7이닝 2실점의 호투를 펼쳤다. 4대2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8회 임창용에게 마운드를 넘기지만, 임창용이 동점을 허용하면서 정민태는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으나 해당 경기 승리를 통해 한국팀은 귀한 첫 승을 획득한다. [85]

여기까지가 그의 국제무대 전성기였다.

4.7. 2000 시드니 올림픽

2000년 올림픽에서의 부진이 그의 이미지를 많이 퇴색하게 하는데 일조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직전 99년에 아시아선수권 및 올림픽예선 대만전에서 호투를 펼쳤고 이미 2000년에는 구위 저하 현상이 있었음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또한 아마시절부터 대만은 정민태, 일본은 구대성이 막는 구조였고 전통적으로 일본에는 좌완에이스를 대만에는 우완 파워피쳐를 내왔었다.

호주전 : 1.1이닝 2실점 조기강판(팀도 패배)
일본전 : 0.1이닝 2실점 조기강판(팀은 승리)[86]

4.8. 2003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첫경기 대만전에 등판하지만 4이닝 2실점의 다소 부진한 투구를 보였다. 평균자책 4.50의 수준. 이 경기는 결국 연장 끝에 패배하는데, 이후 한국 대표팀은 일본전에도 패하면서 이듬해 올림픽에 나가지 못하게 된다.

다만 그해 정민태는 한국시리즈에 3차례 등판[87] 때까지 허벅지 부상을 안고 뛰었고[88] 원래 정민태 본인은 한국시리즈 직후 대표팀 사퇴를 고민할 정도로 몸상태가 안 좋았지만, 당시 소속팀 감독이자 대표팀 감독인 김재박 감독의 반강요에 가까운 설득으로 대표팀에 승선하게 된 배경이 후에 전해졌으나 [89] [90]. [91] 당시에는 일본진출실패와 연계되어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사실 대만전 역전패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4대2로 앞선 9회 위기상황에서 (당시 대체선수로 뽑혀 훈련이 부족했던) 조웅천[92]을 끝까지 고집한 김재박 감독의 용병술이 첫손[93]으로 꼽힌다.

5. 기타

5.1. 1990년대 최고 투수 논쟁

우선 이름이 비슷하고, 전성기가 1990년대로 겹치고, 일본에도 비슷한 시기에 다녀오고(그것도 같은 팀), 일본에서나 돌아와서나 비슷하게 망한(...) 한화 이글스정민철과 늘 비교가 된다. 올드팬에게는 영원한 논쟁 거리. 일단 다승 측면에서만 보면 161승(우완 최다승)의 정민철이 124승의 정민태를 압도한다.

1992년에 같이 데뷔해서 1995년까지 4년간 정민철은 54승, 정민태는 17승을 거뒀으나, 이후 1996년부터 2004년까지 각각 7시즌을 KBO에서 뛰면서 정민철은 73승(평균 10승), 정민태는 107승(평균 15승)을 거뒀다. 2004년까지 양 정의 누적은 각각 127승(정민철), 124승 (정민태) 으로 비슷했다. 그러나 2005년 이후 정민태는 폭망한 반면, 정민철은 다시 살아나 2009년까지 34승을 더해 둘의 누적 스탯 격차가 벌어지게 되었다. 현재 시점에서 기록으로 보는 두 정의 비교는 누가 봐도 정민철의 우위.

1990년대 에이스 논란도 1990~1999년을 놓고 보았을 때 데뷔시즌부터 활약한 정민철이 1996년부터 본 궤도에 오른 정민태보다 1990년대 누적 WAR에서 우위이다(sWAR 정민철 42.67, 정민태 29.21). 다만 분석 경향에 따라 5년 단위 WAR 또는 연속 7개년간 누적 다승 또는 선발승이란 기준으로 조회를 하게 되면 1990년대 전반기의 정민철, 후반기의 정민태라는 결과를 얻기도 한다.

하여튼 정민태가 부상에서 복귀하여 본격적으로 뛴 1994년 시즌부터 기준을 하게 되면 이후 6년간 또는 2004년을 포함하여 7년간 보여준 포스와 기록은 당대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94] 당대의 임팩트와 리그 지배력만 놓고 봤을 때 정민태의 위상은 포스트 선동열이라는 수식어가 다른 이보다 부끄럽지 않을 수준. 투수부문에서 선동열 이후 3시즌 연속 다승왕, 골든글러브 3회 수상자는 정민태밖에 없다.[95]

반면에 정민철은 1990년대 내내 꾸준했지만 전성기가 1990년대 초중반에 있었기에 현대 왕조 도래와 더불어 1990년대 후반~2000년 초반에 걸쳐 있는 정민태의 임팩트보다 묻혀있기도 하다. 1990년대의 다승 우월주위에 묻힌 면도 분명히 있다.

1990년대 에이스의 기준은 최소 15승이었는데, 정민철은 당대 에이스 기준인 15승을 1999년(18승)에 딱 한 번 달성했다. 물론 그 해에는 정민태가 20승. 정민태는 15승 이상을 5회 기록했다.[96]

1990년대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그리고 통산성적을 놓고 보면 확실히 정민철이 우위에 있다. 그러나 1996년부터 2003년까지의 리그 지배력은 정민태의 승리다.

5.2. 역대 단일시즌 선발승 순위에서의 정민태

2022년 종료 기준으로 역대 선발승 순위를 정리해 보면[97]
승수 선수(연도)
28승 장명부(1983)
22승 다니엘 리오스(2007*)
21승 김시진(1985, 1987), 더스틴 니퍼트(2016)
20승 김일융(1985), 이상훈(1995), 앤디 밴헤켄(2014), 헥터 노에시(2017), 양현종(2017), 조쉬 린드블럼(2019), 라울 알칸타라(2020)
19승 정민태(1999), 마크 키퍼(2002), 에릭 해커(2015)
18승 조계현(1994), 이상훈(1994), 주형광(1996), 정민철(1999), 정민태(2000), 임선동(2000), 김수경(2000), 류현진 (2006)

철완 최동원, 국보 선동열도 밟지 못한[98] 선발 20승은 국내투수 기준 김시진, 이상훈, 양현종만 밟은 고지이며[99], 또한 선발 18승을 2회 이상 기록한 투수는 김시진 (선발 20승 이상 2회), 이상훈, 정민태 세 명뿐이다. 정민태는 단일시즌 선발 19승으로 국내 우완 3위, 국내투수 기준 6위에 위치한다. 구원 1승이 아쉽지만 이 정도로도 그의 단일 시즌 임팩트를 가늠해 봄직하다.

여담으로, 재미있는 것은 삼청태현 프랜차이즈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100]과 김시진 및 그의 제자들이 최상위권이라는 점이다[101]. 또한 역대 단일시즌 선발승 순위에서도 보듯이 선발 18승 이상을 달성한 국내 투수 중에서 재일교포인 장명부, 김일융을 제외하면 10명뿐인데 그 중 3명을 한 시즌에 동시에 배출해 버린 2000년 현대가 얼마나 강팀인지 새삼 알 수 있다.

5.3. 저평가

현대 유니콘스의 에이스로서 시대를 풍미했지만 유독 저평가가 심하다. 그 이유로는 소속팀인 현대가 비인기 구단이었다는 점과 야구 인기가 시들했던 IMF 시대라는 점이 겹쳐있기도 하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활동이 부진하거나 없었던 관계로 영상이 많이 남아있지도 않다.

단일 시즌 WAR만 놓고 보아도 그보다 위인 투수가 선동열[102],장명부[103], 최동원, 김시진[104], 박철순[105], 류현진[106]뿐이고 이들 다음의 일곱 번째 투수이자 순위로서는 16위 [107] 기록이다

9이닝당 실점 기준(RA9-WAR)으로 하면 8위로서 그 위로는 선동열, 장명부, 김시진, 박철순, 최동원 5명 만이 존재한다. 즉, 한 시대를 풍미한 대투수들과 어깨를 견주고 있다는 것.

6년 만에 100승을 달성하며 6년 연속 10승을 이룬 단 3명의 투수로[108], 정민태는 96년부터 03년까지 연평균 16.6승을 기록하였다. 동 기간 5년연속 200이닝 투구는 덤.

99시즌의 선발 19승도 NPB에서 이미 몇 년간 뛰고 KBO에 온 장명부와 김일융을 제외하면 국내 투수로서는 김시진, 이상훈, 양현종에 이은 네 번째이며 3년 연속 다승왕, 골든글러브 3회 이상의 기록 또한 선동열 이후 정민태만 보유하고 있는 기록이며,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4년 연속 선발승 1위 [109]의 기록은 정민태만이 유일하다. 또한 5년 연속 200이닝 투구의 기록은 철완 최동원과 함께 그만이 갖고 있는 기록이기도 하다. 90년대 후반 그가 얼마나 리그에서 임팩트있는 투수였는지 보여준다.

다만, 상술했듯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 2000년대의 국제경기에서의 부진과 일본 리그에서의 부진, 그리고 04년부터 은퇴까지 이어진 부진한 모습과 함께 전성기였던 90년대의 영상자료가 디지털화 되지 않은 한계 등이 그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6. 연도별 성적

6.1. KBO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92 태평양 7 26 1 3 0 0 3.81 21 13 54 1.31
1993 5 9⅓ 0 0 0 0 6.75 11 4 7 1.61
1994 25 145⅓ 8 9 0 0 3.72 159 40 91 1.36
1995 28 188 8 14
(1위)
0 0 3.69 187
(1위)
62 115 1.30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1996 현대 30 210⅓
(4위)
15 9 0 0 2.44
(5위)
180
(5위)
48 127 1.07
1997 31 219
(1위)
13 13
(1위)
0 0 3.33 189
(1위)
58 159
(2위)
1.10
(4위)
1998 28 200⅔
(1위)
17
(2위) [110]
9 0 0 2.83 184
(2위)
51 159
(5위)
1.16
1999 33 230⅔
(1위)
20
(1위) [111]
7 3 0 2.54
(2위)
208
(1위)
67 178
(2위)
1.18
(5위)
2000 29 207
(2위)
18
(1위)
6 0 0 3.48 192
(2위)
67 153
(4위)
1.25
2003 29 177
(4위)
17
(1위)
2 0 0 3.31
(3위)
179
(4위)
47 122
(3위)
1.25
(2위)
2004 28 165⅔ 7 14
(2위)
0 0 5.00 193
(2위)
50 123 1.42
2005 8 26⅔ 0 3 0 0 4.73 34 7 13 1.50
2006 1 2 0 0 0 0 4.5 2 1 1 1.50
2007 7 19⅔ 0 6 0 0 12.81 35 12 6 2.3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8 KIA 1 3⅔ 0 1 0 0 14.73 5 3 3 1.91
<colbgcolor=#ffff88> KBO 통산
(15시즌)
290 1831 124 96 3 0 3.48 1779 547 1278 1.24

6.2. NPB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WHIP
2001 요미우리 10 19 2 0 0 0 6.16 21 4 14 1.26
2002 17 19⅔ 0 1 0 0 6.41 24 8 14 1.58
<colbgcolor=#ffff88> NPB 통산
(2시즌)
27 38⅔ 2 1 0 0 6.28 45 13 28 1.42

[1] 또 다른 한명은 꼽자면 62번의 박재홍. 더불어 김재박 감독과 정명원, 김경기, 김동기, 심정수, 전준호, 장명부도 거론된다. 이중 정명원의 28번은 2000년 은퇴 이후 현대 해체 시까지 아무도 달지 않았으며, 공식화되지 않았을 뿐 사실상 결번이었다.[2] 2016년 김광현이 연봉 8억을 받으며 기록을 경신한다.[3] 동 기간 투수1위는 임창용 46.25이나 01,02시즌 9.89를 제외하면 36.36으로 정민태가 우위. 동 기간 정민철은 40.84, 동 기간 리그 전체 WAR 1위는 양준혁(62.29)[4] 물론 90년대 기록은 Sorting 방법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92년부터 00년으로 분류하면 정민철이 109승 WAR 48.03, 정민태가 100승 WAR 38.89지만 정민태는 92,93시즌은 쉬었기 때문에 94년부터 끊으면 결과가 바뀐다. 마찬가지로 90년~94년으로 90년대 전반기를 분류하면 부동의 1위는 선동열이 된다. 90년대 전체로 하면 1위는 선동열.[5] 1위는 선동렬의 3.22. 둘 다 한국시리즈에서 6승 1패를 기록.[6] 당연하지만 이 위로는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4승(3선발승 1구원승) 을 기록한 최동원밖에 없고, 단일 한국시리즈에서 3승을 거둔 투수는 정민태와 김정수(86한국시리즈, 1선발승 2구원승) 그리고 김일융(84한국시리즈, 2선발승 1구원승) 말고는 없다.[7] 다른 한 명은 당연히(!) 선동열[8] 실제로는 구대성과 동년배다. 구대성은 69년생, 정민태는 빠른 70. 구대성이 유급을 한 탓에 상호간 족보가 꼬였다. 그럼에도 구대성은 '50살이 넘어서도 정민태를 형이라고 부르는게 편하다'고 방송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단순히 편한 것도 있지만 존경의 의미도 있는데, 정민태가 선배로서 야구부 내 구타와 폭력을 근절했기에 존경의 의미를 담아 형으로 부르는 것이라고 한다.[9] 나이가 같으나 유급으로 인해 선후배 관계가 되었다가 이후 친구가 되는 경우는 꽤 있다. 이만수는 유급 이후 친구인 김시진에게 고등학교 때 선배님이라고 부르다가 졸업 후에는 친구를 했다. 박철순은 중학생때 유급 1년, 고등학생때 유급 1년을 해서 2년이나 늦게 졸업했지만, 지금도 본인보다 고등학교를 2년 먼저 나온 김용희(초등학교 야구부 동창)와 친구로 지내고 있다. 다만 이것이 일반적인 케이스는 아닌 것이, 1년 유급하여 프로에 입단했던 한희민은 동갑내기인 이상군을 지금도 형이라 부른다.[10] (1990년 아마야구 MVP 정민태, 1991년 MVP 구대성 )[11] 후배 구대성과는 교학상장 하는 사이. 각자의 인터뷰에서 라이벌이자 절친을 서로를 꼽고 았다[12] 팀의 5승중 3승 획득[13] 준결승 일본전 1실점 완투승.[14] 이 대회는 일본과 대만이 9월 올림픽예선 전력노출을 우려해 정예팀을 내보내지 않았다.[15] 1991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아시아 예선 겸 아시아야구 선수권대회에서 대만전 선발로 나섰으나 동점을 허용했고 뒤에 구대성의 실점으로 통한의 패배를 했다.[16] 1991년 아마야구 MVP는 구대성. 진정한 좌대성 우민태.[17] 정민태 본인 말로는 첫 등판부터 계속 아팠는데, 참고 던지다가 너무 아파서 병원만 가면 이상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한국 의료환경의 부족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 훗날 미국 병원에 가자마자 "인대가 다 망가졌는데 극심한 통증을 어떻게 견디다가 왜 이제 왔냐"는 소리를 미국 의사에게 들었다고 하니 얼마나 부족했는지 알 수 있다.[18] 92년 4월 22일 쌍방울과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 최고구속 147km/h을 자랑하며 경기 개시 4타자 연속 탈삼진, 7회까지 매이닝 탈삼진으로 진가를 발휘하며 데뷔했으나 4회말 삼진을 잡으려고 던진 공 하나로 팔꿈치에 치명타를 입었다고 한다. - 베이스볼코리아 96년 11월호 참조.[19] 최근은 수개월 뒤부터 송구 재활훈련을 시작한다. 정민태는 거의 1년 반 가까이 쉬었으니 몇배의 휴식을 취한 것.[20] 리그 최다패 공동 1위. 다른 한 명은 한양대 1년 후배인 절친후배 구대성[21] 위재영은 신인으로 선발, 중무리 등 전천후 투수로 활약하며 팀 최다승인 12승을 거두었다.[22] 상대는 정민철[23] 플레이오프 최초의 리버스 스윕이 나왔다.[24] 한국시리즈에서 유일하게 패전을 떠안은 경기다.[25] 이날 피홈런도 있었는데 홈런친 해태 타자가 그분이었다.[26] 김용수는 선발15승 / 구원3승으로 18승. 시즌 내내 LG 김용수와 다승왕 경쟁을 벌였다. 정민태는 그 전에 이미 17승째였고, 김용수는 9월 27일 현대전에서 구원승을 따내 양자 모두 17승을 거둔 상태에서 공동 다승왕으로 가자는 비하인드 얘기가 있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나 김용수가 9월 28일 현대전에서 또 선발등판하여 18승을 거두자 정민태가 많이 화가 났었다고.[27] 또 다른 설도 있는데, 현대가 한국시리즈에 갈 것이 확실시되자 에이스인 정민태를 일부러 아끼면서 한국시리즈에 대비하고, 다승왕은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한국시리즈로 올라올 것이 유력한 LG의 김용수에게 넘기는 쪽으로 작전을 세웠다고 한다. 김용수는 나이도 38살로 많았기에 체력도 상대적으로 밀리던 편이었고, LG의 1선발이 김용수니까 플레이오프 내내 올라올 가능성도 컸다. 하지만 이 설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후술할 우즈의 42호 홈런이 나온 경기가 바로 98년 10월 1일, 정민태의 18승이 달린 경기였기 때문. 또한 이 해 LG는 정규리그 3위를 기록하고, 이 3위도 2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6위에서 치고 올라가다가 1위 현대, 2위 삼성의 전력이 너무 막강해서 3위를 지키는 쪽으로 팀 전략을 수정하여 달성한 것이다. 때문에 시즌 중에는 2위 삼성 라이온즈가 한국시리즈에 올라올 것으로 예측되었다. 현대도 그걸 바랬고(대 삼성전 14승 4패).[28] 111경기만에 정규리그 1위를 확정했다. 126경기 체제에서는 최단경기.[29] LG 김용수가 당시 최고령 다승왕에 올랐지만(18승), 한국시리즈에서 2패를 기록하다보니 기자단들이 정민태에게 돌아섰다는 말도 있었으나 정민태는 당해 투수 WAR 3위(선발 중 2위, 선발 1위는 1점대 평균자책점의 정명원)를 기록했지만 김용수는 14위(선발 중 10위)를 기록했다. 김용수의 평균자책점이 꽤 높기도 하고(3.45), 이닝도 25이닝 차이가 났다.[30] 한편 골든글러브 2위는 선발 보직이 아닌 마무리 투수 임창용이 기록. 참고로 임창용은 1998년 투타 전체 WAR 1위. 임창용은 삼성시절의 혹사로 많이 기억되지만, 사실은 해태 때에도 무진장 굴렀다.[31] 정규시즌 때는 오히려 LG한테 약했는데 LG 타자들에게 쿠세를 읽혔음을 간파하고 투구폼을 수정했다고 한다.[32] 이 해 MVP와 골든글러브는 논란이 꽤 있는데, 자세한 건 KBO 골든글러브 항목 참조.[33] 선발같은 구원승 1승(8이닝을 던진 구원승이다) 포함. 언제부턴가 구원 1승을 비하하며 선발 20승이 아니라는 기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선발 20승의 가치는 존중받아야 하지만 정민태의 구원 1승도 5이닝 이상 던지고 얻은 승리에다 당시 에이스가 구원투수로도 나와야 했던 99년 현대의 사정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구원 등판이 오히려 20승의 방해 요소가 되기도 했다. 8월 28일에 19승째를 올렸지만, 후술하듯 현대의 구원진이 망가져 있어서 9월 동안 구원투수로도 간간이 등판해야 했고(3구원등판, 3세이브 기록 - 9월에는 2구원 2세이브 기록#, 1세이브는 99년 4월 28일에 2이닝 무실점으로 기록(이틀 뒤 선발 등판하여 8이닝 2실점 승리투수)), 이후 선발로 돌아왔을 때 3패만을 추가한다. 그리고 20승을 올린 건 10월 7일(10월 3일 8이닝 4실점 패# 이후 3일 휴식 후 8이닝 2실점 승리투수#). 1995년 당겨쓰기로 인해 20승을 못 올릴 뻔한 이상훈과 유사한 경우. 참고로 순수 선발승으로만 20승 고지에 오른 마지막 투수가 바로 그 이상훈. 그 후로 단일 시즌 20승은 2007년 다니엘 리오스, 2014년 앤디 밴 헤켄, 2016년 더스틴 니퍼트, 2017년 헥터 노에시 같은 외국인 투수들이 달성했다가, 정민태 이후로 18년 만인 2017년에 양현종이 토종 투수로써 20승 고지에 올랐다.[34] 선발투수의 평균 자책점과 구원투수의 평균 자책점의 가치를 맞추기위해 등장한 런 세이브라는 지표를 보면, 1999년의 정민태는 1986년의 선동열보다도 높은 런 세이브를 기록한다. 1999년의 정민태의 런 세이브는 약 62.5, 1986년의 선동열은 약 61.[35] 평균자책점 1위는 선발 등판을 한 번도 안 하고 규정이닝을 채운(...) 임창용이 기록한다.[36] 스탯티즈 기준 정민태의 ERA+는 자그마치 194.6으로, 리그 평균인 100에 비해 자그마치 2배 가까이 된다.[37] 그래도 5할을 넘기긴 했다.[38] 이명수 400타석, 김경기 308타석.[39] 덩치가 그 찰스 스미스와 비슷했고, 수비나 주루 또한 그 찰스 스미스와 비슷했다(...)[40] 외국 진출을 위해서는 풀타임 7시즌을 소화해야 한다. 정민태는 입단 후 8시즌을 보냈으나 위에 설명했듯이 부상으로 인해 초반 두 시즌을 거의 나오지 못했기에 6시즌만 소화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여담이지만 이 때 현대 구단은 정민태의 일본 진출을 구단 차원에서 돕기 위해 자유계약선수로 방출한 뒤 무적 상태에서 일본 구단과 계약을 맺을 수 있게끔 하려고 했지만, KBO 측에서 이를 편법으로 판단하고 불허했다.#[41] 4:2 상황에서 8회 마운드를 임창용에게 넘겨줬으나 실점을 하여 연장전에 돌입했고, 11회에 박재홍의 결승타로 신승했다. 이후 일본과의 결승도 5:4 로 신승하여 대회 우승을 달성했다.[42] 1차전은 구대성, 2차전 문동환, 3차전 정민철이 선발로 나섰으나 1,2,3,4차전 모두 선발이 5이닝을 채우지 못하고 부진했다.[43] 사실 공동 다승왕이 가시권에 보이자, 김재박 감독과 김시진 투수코치가 로테이션을 조정했다.[44] 2000년부터 모기업 현대전자의 경영난 탓에 가세가 본격적으로 기울기 시작한 현대 유니콘스는 이 해 대략 55억 원에 달했던 정민태의 이적료에 조웅천, 조규제 이적료 15억원을 보태 1년 구단 운영비를 충당해 어찌어찌 버텼다.[45] 당시 주니치, 오릭스도 정민태 연봉은 엇비슷한 수준으로 책정했으나 이적료 액수가 제법 차이났다고.[46] 당시 리그는 양대리그제로 리그 1위팀이라도 플레이오프를 다시 치르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데 되어있었다. 이에 정민태가 플레이오프에서 1선발로 플레이오프에서 4연승을 하는 데 1, 4차전에서 일조하고 로테이션상 임선동이 코시 1선발을 하게 되었다.[47] 가토리 코치가 혐한이었다면 삼성 코치들에게 정민태 좀 컨트롤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도 안 했을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정민태가 요미우리에 입단할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48] 일본 수도 도쿄가 홈인 만큼 팬베이스에 재일교포도 많고(지금은 중국이나 네팔에 역전되었지만 정민태 시절까지만 해도 일본내 외국인 국적 1위는 한국인이었다), 일본프로야구 중계권 사 주는 나라도 mlb파업시기 미국을 제외하면 한국밖에 없었기에 한국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49] 당초 요미우리는 중도에 퇴단하는 것이니 잔여시즌 연봉 5,000만엔(5억 이상)을 토해내라고 했지만 정민태는 이에 "03년까지 계속 2군에서 던질 것이고, 한국언론에 요미우리가 보여준 것을 모두 폭로하겠다."라고 배수의 진을 치면서 결국 요미우리는 각서와 함께 방출을 시켜주었다.[50] 박철순이 1982년에 22연승을 기록한 적은 있지만 이것은 구원승(7승)을 포함하여 세운 연승 기록이다. 이후 다나카 마사히로가 2013년 선발 22연승을 넘어서면서 기록을 갱신했다.[51] 당시 세계기록은 로저 클레멘스의 20연승[52] 스탯티즈 WAR 기준 이상목이 5.66, 정민태가 5.02[53] 사실 정민태는 5월 14일까지 7연승에 평균자책점 1.55(당시 2위), 47탈삼진(당시 1위)를 기록하며 불타올랐으나, 그 이후 약 두 달동안 무너진다. 7승 경기 이후 55일만에 승리를 추가하고, 그 동안의 6경기에서 모조리 부진했지만 패만 적립하지 않은 정도. 8승째 경기도 5.2이닝 4실점을 기록하고 타선 도움을 받아 승리. 당시 신문에서 대놓고 '억세게 운좋은 사나이'라고 깠을 정도. 5월 이후 무실점 경기는 3개월 뒤인 8월 15일에야 나온다. 그리고 그 뒤로 21연승 달성 경기(9월 1일, 이 날도 6.2이닝 3실점을 기록)까지 무실점 경기가 없다. 그래도 후반기에 QS 정도는 계속 찍어주면서 평균자책점을 조금 끌어내린 결과 10위권에서 놀던 자책점 순위를 3위까지 낮추긴 했다. 다만 정민태가 이런 성적을 거둔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것은 기사에도 나오긴 하지만 후술.[54] 이상목은 클래식 스탯에서 정민태에게 밀린 것이 문제.(33경기 29선발 185이닝 15승 7패 평균자책점 3.54)[55]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의 김일융이 선발과 구원을 합쳐서 3승을 기록한 경우는 있다. 2선발승 1구원승 1패 도합 3승 1패.[56] 외국인 투수 셰인 바워스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선발이 없었다. 당장 5선발이 원래 없었고(이동학, 전준호가 각각 11선발씩 등판), 4선발 마일영은 제대로 망했으며(20경기 14선발 69.1이닝 평균자책점 5.97), 3선발 김수경 또한 썩 좋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다(29경기 167이닝 평균자책점 4.63). 02년까지 선발진의 주축으로 활약했던 임선동은 이 해부터 은퇴 때까지 1승도 못 거두는 등 퇴물로 전락해버렸고, 마무리에서 선발로 전향한 위재영 또한 부상과 부진이 겹쳐 4경기밖에 뛰지 못한다. 심지어 그나마 멀쩡했던 선발 바워스도 중간에 부상으로 인해 선발진을 이탈했던 적이 있고, 그 결과 22선발 143.2이닝만 던졌다.[57] 5:4 역전패. 삿포로 참사[58] 허벅지 부상은 99년 이래 고질병이었고, 일본에서 복귀한 직후 몸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2003년을 하얗게 불태웠고 이후 급격한 내리막을 걷게 된다.[59] 사실 처음에는 연봉으로 10억, 보장액 8억 5000만을 요구했었다. 저 액수를 요구한 이유는 FA를 앞둔 모 선수는 배로 올려주는데 자신은 FA가 아니라고 그 선수랑 똑같이 받는다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60] 이 날 선발이 이제 막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재우였다.[61] 당시 경기시간이 4시간을 넘어가면 그대로 경기를 끝낸다는 조항이 있었고, 이 때문에 무승부가 속출했다.[62] 이런 부진 이전의 그의 포스트시즌 기록과 코시 기록은 거의 완벽 그 자체였다. 04년의 부진을 반영했음에도 통산 포스트시즌/코시 성적은 레전드 그 자체.[63] 당시 심정수도 수술하고 재활에서 막 복귀할 때라, 이 홈런이 본인의 06시즌 마수걸이 홈런이었다.[64] 2007년 그가 받은 연봉은 3억 1080만원.[65] 사실 현대 유니콘스가 2001년 한 해동안 정민태의 요미우리 임대료 5억엔+조웅천,조규제 트레이드머니 15억원으로만 살아간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66] 정민태가 연봉에 불만을 가져 자의로 떠났다고 알려졌지만, 기아에서 받았던 연봉은 히어로즈가 제시했던 8천만원보다 1천만원 적은 7천만원이었다. 그리고 2009년 인터뷰에서 박노준 단장이 먼저 본인을 방출시켰다고 밝혔다.[67] 그간 SK에서 적극적인 영입을 시도하였으나 금액 협상 과정에서 영입이 실패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네이버의 KBO 리그 40주년 레전드 40인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에 따르면 SK에서 정민태를 적극적으로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68] 정민태를 범 현대가에 남기려 했단 추측도 있다.[69] 2008년 7월에 김조호 단장에게 본인 방출 요청을 하자, 임의탈퇴 공시되었다.[70] 여담이지만 영구결번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구단 내에서는 20번을 아무도 달지 않는 등 사실상 영구결번으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정민태가 2012년 시즌 후 롯데 코치로 이적하면서 자연스럽게 해제되었는데 2013년에는 장시환, 2014년에는 김성태가 차례로 달았다. 2015년부터 2023년, 트레이드 전 까지는 최원태가 계속해서 달았었다. 사실 해체를 거치는 바람에 키움 히어로즈현대 유니콘스와 똑같은 구단은 아닌 데다가 정민태 본인도 히어로즈에서 은퇴식만 했지 히어로즈 유니폼을 입고 공식적으로 한 경기도 뛰지 않았다 보니 영구결번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다.[71] 실제로 한 성격하는 야구선수로 유명하다. 본인이 밝힌 바로, 본인의 전성기(=현대 왕조 시절)에 감독 김재박에게 대놓고 항명도 한 적이 있다. 김재박이 선수단 미팅에서 정민태가 LG전에 약하다고 핀잔을 줬다가, 정민태가 바로 다음날부터 갑자기 모든 훈련에 불참을 선언하고 숙소에서 나오지 않은 것. 후에 프런트 직원들이 정민태의 숙소를 찾아오자 미팅때의 일을 말하면서 "단둘이 있을 때 해도 참기힘든 이야기를 어떻게 선후배들 다 모인 곳에서 말하느냐"고 분노했고, 이후 직원들이 이를 김재박에게 전하자, 김재박은 정민태를 감독 사무실로 불렀다. 그리고 혼낼거라는 예상과 달리 김재박이 정민태에게 '나는 앞으로 더 잘하라는 좋은 뜻으로 말한건데 니가 그렇게 느꼈다니 미안하다'며 직접 사과를 했다. 정민태는 "감독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알겠습니다"라며 사과를 받아들이고 다음날부터 훈련을 했다. 아무리 프로야구 최고스타라 해도 한국이나 일본 프로야구 문화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인, 감독에게 대놓고 훈련거부 항명을 하고 감독이 깨갱하게 만들 정도이니 보통 사나운 성격이 아니다.[72] 총 7차전까지 펼쳐진 대회이다. 이 대회는 8월말 푸에르토리코에서 펼쳐질 대륙간컵의 전초전 및 평가전의 성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미선수권이 폄하될 이유도 없다. 미국은 전년도에 열린 1988 서울 올림픽 야구 금메달 팀이었고, 무엇보다 한국대표팀 입장에서는 원정경기라는 불이익을 안고 뛰는 대회였으니까.[73] 2차전에 승리하기 전까지 한국대표팀은 미국을 상대로 13연패 중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2차전 승리에 이어 4차전도 정민태의 호투로 승리했으니 그의 가치를 한껏 세운 셈이다. 참고로 정민태는 7차전에서 8회에 구원등판하지만 팀은 역전패했다.[74] 본선 격인 8월 대륙간컵에서 정민태는 또한번 미국전에 등판하지만, 아쉽게도 3이닝 5피안타 2피홈런 3실점의 부진한 모습을 보인다.[75] 선발 구대성이 4이닝 5실점.[76] 단, 구대성은 그 이전인 8월 대륙간컵 일본전에서 연장 12회까지 완투하면서 2실점으로 버틴 전력이 있다. 수비진의 실책성 플레이로 패배하긴 했지만(총 3실점)... 참고로 이때 구대성과 맞대결을 펼친 일본투수가 바로 노모 히데오이다(5회부터 구원등판해 연장 12회까지 투구).[77] 한국 개최.[78] 사실 이 대회에 일본과 대만은 정예팀을 내보내지 않았다. 여기에도 뒷이야기가 있는데, 그해 막 대표팀감독을 맡았던 강문길 감독(당시 단국대 야구부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고 직전해인 북경 아시안게임 때까지는 대표팀 코치였다)이 전력노출 우려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정예팀을 가동하는 바람에, 이 대회가 결국 올림픽탈락의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도 있다.[79] 3회 조기강판.[80] '나카모토'에게 3점홈런을 허용한 투수는 정민태이다. 1사 1-2루 상황에서 홈런을 허용했다.[81] 1991년 아시아선수권은 준결승-결승 개념이 아니라, 1차 조별리그-2차 풀리그 개념이었다. 즉, 한국대표팀은 2차 풀리그에서 대만과 일본에 연달아 패하면서 올림픽티켓이 좌절된 것이다. 마지막경기 호주전은 승리했지만(위재영 완봉승) 대세는 결정된 뒤였다.[82] 1차 조별리그에서 한국과 일본은 같은 조, 대만은 다른 조였다. 1차 조별리그 일본전에서 한국은 지연규를 선발투입해 2대1로 앞서갔지만, 경기후반 구원등판한 김홍집이 일본의 '다카미'한테 역전 3점홈런을 허용하고 경기도 패배한다. 물론 2차 풀리그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일본에 이은 조2위로 진출하게 된 것이고, 이렇게 됨으로써 경기일정이 <대만전-일본전-호주전> 순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만약 1차 조별리그 일본전을 승리하고 조1위로 2차 풀리그에 진출했으면 한국팀의 경기일정도 <호주전-일본전-대만전> 순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일본팀은 2차 풀리그 첫경기에 대만과 경기 후 한국전에 나서야 하기 때문에 어느정도 전력소모가 있을 수밖에 없고(일본팀은 제1선발을 첫경기 대만전에 투입해야 하는 부분이 대표적), 한국팀 입장에서는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일본전에 임했을 것이다. 물론 후술하다시피 일본전은 원래 구대성 선발예정이었지만, 조별리그를 1위로 올라와서 첫경기 호주전 이후 일본전이 예정되었다면 그냥 정민태가 그대로 선발등판했을 가능성도 있다(직전년도 북경 아시안게임 일본전 호투 기억). 무엇보다 호주가 당시에도 워낙 약체였기에(실제로 당시 대표팀 4선발이던 위재영이 완봉승을 기록했다), 일본전만 이기면 올림픽티켓 확보라는 목표의식 속에, 선발투수가 정민태든 구대성이든 한명에게만 부담주는 법 없이 어떻게든 계투작전으로 부담을 줄여줄 가능성도 컸기 때문이다.[83] 대만전에서 정민태의 조기강판당한 영향이 크긴 했지만, 어쨌든 구대성도 대만전 패배의 책임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후 구대성이 새로 위기를 자초한 가운데(구대성 본인이 출루시킨 주자 2명) 대만의 '장요등'에게 역전 3점홈런을 허용했기 때문이다. 최종결과는 6대7이었다.[84] 당시 대표팀 코치였던 김정택 씨는 대만전의 피홈런 순간을 회상하는 인터뷰에서, 홈런 직전 3루수 앞 병살 상황(1사 1-2루)에서 타자주자 세이프판정이 나왔고(호주 1루심), 이후 바로 역전 3점홈런을 맞았다고 한다(김정택 씨는 지금도 그 판정이 고의적인 오심이었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하나 덧붙이자면, 그 판정 직후 다음타자를 상대하는 과정에서, 대표팀 포수였던 강성우는 타석에 있었던 '장요등'이 직구에 약한 타자라 직구 싸인을 보냈는데, 싸인이 꼬였는지 구대성은 변화구를 던졌고 결과는...(2006년 박동희 기자의 스포츠춘추 대만야구 특집기사에서 김정택, 강성우의 인터뷰 중).[85] 11회말 박재홍의 결승타로 5:4 신승을 거둔다.[86] 2회에 타구에 정강이를 맞고 강판. 90년 북경아시안게임 일본전에서도 9회에 정강이를 맞는 모습이 보인다.[87] 1차전/4차전/7차전[88] 허벅지에 테이핑 까지 한 상태라고 밝혔다.[89] 2006년 <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 중.[90] 안 좋은 몸이었으나 소속팀 감독이 국대 감독인 까닭에 부상을 참고 대만전에 등판한 투혼에 대해 또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91] 실제 아마시절이나 99년 아시아선수권까지 정민태는 대만에 매우 강한 모습을 보였다.[92] 조웅천은 당시 회고하기를 당해 한국시리즈가 끝나고 휴양차 잠시 제주도에서 쉬고 있었다고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투수 한명이 부진하다는 소리에 급하게 부랴부랴 대표팀에 소집 되어버린 것(...) 반대로 교체가 되었던 선수는 한양대학교 재학중인 심수창이였다.[93] 두 사람 태평양-현대 사제지간이였다.[94] 1994년~2003년 누적 WAR 43.26으로 임창용과 공동 1위. 정민철은 41.28. 1994년~2000년으로 집계하면 단독 1위 38.24.[95] 1996년~2003년 6시즌 간 100승, 한국시리즈 MVP 2회(1998, 2003), 다승왕 3회(1999, 2000, 2003, 일본 진출기였던 2001년~2002년 제외 시 사실상 KBO 리그 3시즌 연속), 골든글러브 3회(1998, 1999, 2003), 4시즌 연속 최다선발승(1998년 17승, 1999년 19승, 2000년 18승, 2003년 17승. 당해 최종 승수는 각각 17승, 20승, 18승, 17승) 등[96] 다승우월주위의 시대가 지나간 후 14승 다승왕이 나오면서 에이스의 문턱이 낮아졌다고도 한다. 이는 메이저리그도 마찬가지.[97] 다만, '승' 지표는 세이버 관점에서는 더이상 의미가 없는 스탯이라 어디까지나 참고용이다. 1994년 정민철, 2012년 류현진, 2022년 알버트 수아레즈 등 본인이 아무리 잘 던져도 팀의 도움을 못받아 비정상적으로 낮은 승리를 기록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98] 사실 이 둘은 선발 등판 자체를 많이 하지 못했다. 시즌 중 22번 선발 등판이 최다 등판 횟수였다.[99] 재일교포를 포함하면 장명부와 김일융까지 성공했다.[100] 장명부 28승, 정민태 19승, 정민태/임선동/김수경 18승[101] 김시진 21승 2회, 정민태 19승, 정민태/임선동/김수경 18승[102] 86년, 87~91년, 93년, 95년[103] 83년 WAR 13.63[104] 85년 WAR 10.52[105] 82년 WAR 9.54[106] 2010년 WAR 9.20[107] 99년 WAR 8.84[108] 철완 최동원도 100승은 83~90, 총 8시즌에 걸쳐 달성했다. 정민태의 성적을 데뷔 기준으로 하면 92~99년 8시즌 100승이기도 하다.[109] 1998~2000년, 2003년[110] 선발 17승 1위[111] 구원1승. 선발 19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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