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21:33:32

이승만/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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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에 대한 평가
2.1. 대한민국 정부 수립2.2. 남녀평등 투표권 부여2.3. 시장경제체제 도입2.4. 대한민국 공산화 저지2.5. 자유민주주의 도입2.6. 제대로 된 장성 : 사병 급여 비율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1. 농지개혁법 시행3.2. 초등교육 의무화 및 교육개혁3.3. 고등교육 투자
4. 외교에 대한 평가
4.1.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4.1.1. 반공포로 석방
4.2. 6.25 전쟁 초기 미국의 지원 유치4.3. 전후 미국의 대규모 지원과 원조 유치4.4.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5. 국방•안보에 관한 평가
5.1. 6.25 전쟁 당시 군부 인사
6. 경제에 대한 평가
6.1. 경제개발의 초석 마련6.2. 한국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6.3.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1. 개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평가를 작성하는 문서이다.
이승만아시아반공국가 및 비공산국가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런 지도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다. 성장하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반공지도자일 뿐 아니라 반(反)식민지 지도자였다.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이승만은 극동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그가 한국의 동맹국인 강력한 나라들의 의지에 끌려다니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전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의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From the Danube to the Yalu)》 中
그는 그의 몸무게 만큼의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인 그리고 애국자 중 한명이다.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이승만은 내가 만나본 한국인들 중 고령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가장 날카롭고 월등히 뛰어난 인물이다.
영국 외무상 셀윈 로이드(Selwyn Lloyd)
이 박사 밑에 국무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 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 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할 만큼 위대했다.
장면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1]
허정

2. 정치에 대한 평가

2.1. 대한민국 정부 수립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이승만
국부는 한 나라에 한 분, 이승만 박사뿐이니 내 이름 앞 국부라는 말은 떼어내라.
김구#[2]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인물이며 실질적인 국부이고 건국의 아버지이다. 1960년의 3.15 부정선거 전까지의 이승만은 정통이다. 김구는 정치적 감각이 없고 현실성이 떨어지는 정치인이며, 정치적 판단도 김구는 이승만을 못 따라간다.
김영삼[3]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입국하여 과도민주의원을 거쳐 UN결의안에 따라서 제헌의회 총선거를 거친 뒤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하였다.

이승만은 38선 이남 지역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 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을 폄훼하고자 하는 측에서 그를 분단의 원흉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이 보이고는 한다. 그러나 소련은 해방 직후부터 북한 지역에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을 수립한 뒤 인민민주주의 정권울 확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는 마르크스-레닌주의가 내세우는 인민민주주의 혁명 이론에 근거한 것이었고 실제로 스탈린은 동유럽과 아시아 각국에 연립 정권을 구축한 후 공산화를 진행하도록 지시하였다.
2. 모든 반일민주주의정당-단체의 광범한 동맹에 기초하여 북한에 부르주아민주주의 권력을 수립하는데 협력할 것
연해주군관구 군사회의와 제25군에 내린 스탈린의 지시
반일민주주의 정당 및 단체 범연합을 기반으로 한 북조선의 부르주아민주주의 개조는 지극히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
소련군 정치국장 이오시프 쉬킨
이러한 유물사관에 입각한 전략을 기반으로 북한 지역에서는 공산체제가 이미 굳혀져가고 있었다. 김일성소련군정이 자리잡은 38선 이북은 1946년 2월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져서 토지개혁을 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 하고 군대를 개편하였으며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하였다.

이승만도 원래는 한반도 전체에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싶어했으나 이러한 당시 상황이 현실적으로 그것을 어렵게 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남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이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혁적 조치에 대응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분단의 원흉은 이북에서 단독 국가 수립을 이미 진행하고 있던 김일성일 것이다. 실제로 김구가 김일성을 설득하려고 시도를 했으나 김일성은 비협조적이었고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은 남한지역에서라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보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좌우합작이라는 것도 목표는 이상적이었으나 이미 박헌영과 공산당이 미제의 술책이라고 비난하고 부정하면서 현실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리고 겉으로 듣기엔 그럴싸하지만 동유럽은 실제로 좌우합작을 추진하면서 공산화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자신들이 키운 소위 '작은 스탈린'들을 동유럽 각지로 보내 '화물열차 정권'을 만들었다. 이 화물열차 정권들은 비공산세력과 연립정부를 세우고 군대, 경찰 등 권력 기구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연립정부 안에 있는 비공산세력들을 축출하거나 정치테러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치러 정권을 장악하며 동유럽 국가들을 공산화시켰다. 체코슬로바키아가 그 대표적인 예시로 총선에서 제1당이 된 공산당은 연립정부를 세우고 권력기구를 장악한 뒤 1948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일당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38선 이북의 김일성 세력도 바로 이 화물열차 정권이었고[4] 좌우합작이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면 동유럽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2. 남녀평등 투표권 부여

이승만 정권은 20세 이상 전국 모든 남녀에게 모든 선거에서 평등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미국은 이미 1920년부터 여성 참정권이 부여됐으며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을 내걸고 미국을 모델로 삼아 선거제도를 시행하려는 차원에서 남녀 동등 투표권은 일면 당연한 수순이다. 물론 당시 한국은 이제 막 전근대 왕조국가식민지에서 벗어난 시점이었고 국민 중 대다수는 남녀평등한 투표권은커녕 투표권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개념도 없는 상태였기에 남녀 평등 투표권은 그 자체로 의의가 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벨기에에 남녀 동등한 투표권이 생긴 것이 한국과 같은 1948년이었고, 그리스가 1952년, 멕시코가 1953년, 스위스는 1971년, 포르투갈은 1976년에서야 남녀간에 완전히 동등한 투표권이 생겼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초대 내각을 꾸릴 때 임영신을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이었으며 불과 근래까지도 여성 장관은 드물었던 것을 생각하면 1948년 그 시대에 초대 내각 상공부 장관에 여성을 임명한 것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53년에는 원래 여성에게만 적용되던 간통죄를 남녀 모두에게 적용시켰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도 의무교육을 비롯한 평등한 교육기회를 초기부터 부여하면서 기능직 노동자부터 사무원, 의사, 교사, 군인, 경찰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시작되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여성 판사, 공학사들도 이승만 집권기 당시에 나타났다.[5] 이런 변화들에 힘입어 여성 국회의원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들은 조선 왕조 5백 년을 포함하여 오랜 기간 차별 받아온 한국의 여권 신장 역사에 엄청난 변화였다.[6]

2.3. 시장경제체제 도입

광복 당시 국내에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나 대중들 70% 이상의 다수가 공산주의[7]에 우호적이었다. 그 시기는 세계 일부 국가들을 시작으로 레닌식 공산주의가 국가체제로 채택되어 돌아가기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은 초창기였고[8]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체제일지 당시의 지식인들도 명확히 알 수 없었던 시대였다.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소련이 공산주의는 반제국주의적이다는 명분으로 신생 국가들에게 독립을 지원하거나 독립 후에도 사후지원을 지속하다보니 신생 국가들 중 적지 않은 수가 소련 편에 붙거나 중립국으로 가더라도 외교관계만 중립인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문제점과 미래가 무엇인지 명확히 꿰뚫어 봤다.
1. 재산을 나누어 가진다 : 재산을 나누어 가지면 정차 저마다 일은 하지 않고 얻어먹으려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2. 자본가를 없앤다 : 자본가를 없애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기 어렵고 사람의 지혜가 막혀 물건들이 진보되지 못한다. 자본을 폐기하는 것보다 법률로 노동과 평등 세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낫다.
3. 지식계급을 없앤다 : 모든 사람들의 지식 수준을 높여서 현재 학식으로 양반 노릇 하는 사람들과 비등하게 되게 해야지, 지식계급을 없애자고 하면 안된다.
4. 종교단체를 혁파한다 : 평등과 자유의 사상이 열교확장되는 중에 발전된 것이니 이를 없애는 것은 인류덕의상 손해가 클 것이다.
5. 정부, 군사,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한다 : 공산당 속에서도 이론이 많을 뿐더러,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러시아만 봐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자기들도 다 알고 있다.
이승만이 1923년에 쓴 '공산당의 당부당'의 내용 중 공산당의 부당한 점 요약.

위에 인용된 '공산당의 당부당'을 이승만이 1923년에 썼는데 이 때는 레닌도 생존해 있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지만 마치 이후의 일들을 엄청난 선구안으로 예견이라도 한 듯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생활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체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민주주의로 미국이 풍요롭고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며 우리도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한반도가 처한 선택의 기로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채택한 것의 혜택은 지금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 공산주의를 선택했던 국가들의 결말을 보면 그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이승만의 주도 하에 임기 중 자유시장경제를 도입하였다. 제헌헌법은 기간산업 및 주요산업의 국공유화, 대외무역의 국가통제, 사영기업의 국유화와 경영통제 등 사회주의적 통제요소들을 대폭 담고 있었다.# 이는 국가가 공공복리를 명목으로 시장에 과도하게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1954년 개헌을 통해 이러한 계획경제적 헌법조항들을 시장경제 조항들로 전환하였다. 개헌 이후 주요산업과 자원에 대한 국공유화는 헌법에서 삭제되었으며 대외무역의 국가통제의 기준도 법률로서 규정하도록 제한하였다. 또한 특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을 국유화시키거나 경영통제를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는 기업과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된 자유시장경제를 대한민국에 확립시키고 고도성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4. 대한민국 공산화 저지

한국의 이승만 같은 지도자가 베트남에도 있었다면, 베트남은 공산군에게 패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

이승만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이 터졌음에도 그 체제를 유지해낸 것에 기여한 바가 있다. 일각에서는 어차피 남한에 진주한 것이 미군이기 때문에 남한이 자본주의를 도입한 것은 이승만이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이승만이 만약 공산주의를 그만큼 배척하지 않았다면 6.25 당시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항복하거나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물론 끈질긴 항전의식과 별개로 그의 군사적 무능은 비판받을 일이다. 제대로 된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아 초반부터 밀리고 애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 실정도 저지른 바, 이를 단지 공산주의의 물결을 막아내려 했다는 점에서 미화하려 든다면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다만 훗날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의 공세를 막지 못하고 외교적으로 미국을 붙들어 놓는 데 실패하면서 끝내 공산화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미국을 붙든 것은 대한민국의 공산화를 막는 데 부정할 수 없는 업적으로, "이승만이 없었거나 다른 인물이 이승만을 대신했어도 어차피 남한이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지나치게 이승만의 역할을 낮게 잡는 평가라고 볼 수 있다.

2.5. 자유민주주의 도입

이승만이 원한 것은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였다. 나중에 사사오입 개헌3.15 부정선거 등으로 그 의미가 빛바래긴 하였으나, 그럼에도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했다는 점 자체는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승만 집권 기간 동안 국민들은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의희 의원 선거 등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는 민주주의 정치 경험을 반복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도 결국은 이승만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가치로 정부를 수립했고, 공교육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쳤기에 그 가치에 맞지 않은 부정선거가 일어나자 국민들이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다만 이에 관해서는 이승만 본인이 한국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기원을 3.1운동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찾았다고 여러 차례 언급한 것, 그리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취임한 과정 자체가 자유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른 것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대한민국 연호 문서와 3.1운동, 건국절 논란 등을 참조할 것.

2.6. 제대로 된 장성 : 사병 급여 비율

이승만 시기의 장군 대비 사병의 월급 비율은 10%로, 2022년까지도 최고치를 유지했다. 이 기록은 2023년 병장 월급이 100만원이 되고서야 처음 깨지게 된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60년 3월 기준으로 병장 급여를 120환으로 지급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준장의 급여인 1200환의 10%였다.[9] 2023년 기준 준장의 급여가 대략 (수당 포함) 900만 원인 것을 감안하고 그 당시의 비율대로 보면 병장의 급여는 90만원이 되는데, 병장 월급은 100만원이므로 현재는 10%가 넘는다. 또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현재 9급 공무원 초임에 해당하는 5급 26호봉이 360환이었으니 당시 병장은 공무원 초임의 1/3을 받은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매우 오래 지낸 덕분에 사고방식이 사실상 미국인이었고 그래서 일하면 돈 준다는 사고방식이 뼛속 깊이 박혀있었다. 그래서 사병의 급여는 제대로 지급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는 장성 대비 사병 월급 비율이 적절했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액수로만 보면 생활하기 부족했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나라 자체가 가난했고 화폐 가치가 극도로 불안정했던 시절이기 때문에[10] 장교든 사병이든 절대적인 금액으로는 부족했고 영관 장교조차 월급만으로는 가족들 입에 겨우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11] #

당시 군인들의 증언[12]들을 들며 이 병장 월급에 대해 말이 안된다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당시 절대 빈곤에 처해있었던 한국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당시 영관 장교들조차 월급만으로는 일가족이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들었을 정도니 절대적인 금액으로는 당연히 적은 금액이며[13] 당시 장군이나 공무원 월급을 고려했을 때 사병 또한 제대로 급여를 쳐줬다는 뜻이다.[14]

그러나 이후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사병 급여는 동결되었으며 전두환 정부 중에는 병장 급여가 준장 급여의 1.5% 수준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병 급여가 대폭 인상되었으며, 김영삼, 이명박 정부에서는 횡보하다가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정권에서 높은 인상률을 보였다.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1. 농지개혁법 시행

광복 이후 가장 중요한 현안이자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농지개혁을 이루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이루기 위해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앉혀서 대지주 계층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의 농지개혁법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농지개혁법은 소작농들에게 농지의 소유권을 주어 이들을 자작농으로 전환시켰고 이를 통해 이승만은 농업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 부족한 식량을 증가시켰으며 지주들의 경제적 수탈을 해소하였다.

반면 북한에서는 한국보다 먼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형식으로 농지개혁을 했었으나 그에 대해 이승만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북한식 농지개혁(무상몰수 무상분배)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의 노예가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의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승만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 전쟁 초반의 패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북한이 전쟁 초기 남한 농민들에게 선전한 토지분배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토지를 뺏어서 옆집 빈둥거리는 녀석이랑 똑같이 공짜로 나눠주겠다는데 어떤 농민이든 환영할 리가 없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기 직전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얘기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국민 절대다수가 농민인 이 시기에 농심은 곧 민심이자 여론이었다. 한마디로 농지 개혁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대한민국의 안보 정책이기도 했다.[15]

소작농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조항은 있었지만 머슴[16]들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조항은 없었기 때문에 1950년 6월 25일 쳐들어온 북한군이 머슴들한테도 땅을 분배한다고 약속하자 땅을 분배 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던 머슴들이 북한군에 협력하는 사례도 일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지개혁은 농촌 내의 유효수효를 확대하여 공업생산의 발전을 자극하였고 지주-소작 관계를 무너뜨리고 지주 계급을 무너뜨리면서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판을 만들었다. 남미나 제3세계 국가들이 토착 지주 계층의 반발로 산업화나 경제 개발 정책이 실패한 점[17]을 생각하면 농지개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한민국이 빠르게 경제성장을 이룩할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할만하다.

2023년 콜롬비아는 자국의 개혁을 위해 이승만의 토지개혁을 참고하고 싶다고 밝혔다.콜롬비아 “이승만 대통령의 토지개혁 벤치마킹할 것”

3.2. 초등교육 의무화 및 교육개혁

낮은 교육 수준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교육을 최우선시하였고 여성도 동등한 교육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전국민의 초등학교 6년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을 위해 당시 문교부 예산의 최대 80%를 할당했으며 광복 당시 초등학교 수는 2,800여개였고 한국전쟁 때문에 전후에는 이보다 훨씬 적었으나 1960년에는 4,600여개로 늘어났다. 그밖에도 이승만은 전쟁 중에도 전시하교육특별조치요강을 통해 수업이 중단되지 않도록 하며 교육을 고취하였다. 그 결과 1951년 69.8%까지 떨어졌던 의무교육 취학률은 1959년에는 전국 적령 남녀 아동의 95.3%까지 늘어나 당초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18]

초등교육 의무화와 더불어 수만개의 국문보급소를 전국 각지에 설치하고 성인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벌여서 1958년까지 550여만 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19] 이런 노력으로 광복 당시 80%였던 문맹률을 1959년에는 22%까지 낮췄다. 중학교도 광복 당시 불과 97개에서 1960년에는 1,000여개까지 늘어났고 고등학교도 1952년 당시 304개에서 1960년 640개로 늘어났다. 중학생 수도 5만여명에서 53만여명으로 10배 넘게 늘었다.[20] 그리고 교육 행정을 일반 행정에서 분리시키고 교육자치제도 실시하여 교육 지원 예산이 기존처럼 일반 행정으로 쓰이지 않고 교육 사업에만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이 시행한 이런 교육개혁들은 매우 중요한 효과들을 가져왔다. 먼저, 전통 사회에서의 신분 차별 교육과 달리 전국민에게 남녀 불문 계층 불문 동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하여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승만 시절 학교에서 강조된 실용주의적 '일인일기' 교육과 과학기술 교육은 기존의 한국 사회에 팽배하던 문(文)을 숭상하는 숭문주의 문화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을 확산시켰다.[21] 이러한 의무교육들과 후술된 고등교육 확대로 배출된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은 이후 한국의 성장의 근본적인 토대가 되었다.

당시 학교에서 이루어진 사회생활[22]같은 교과내용을 통해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부정선거 이후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서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을 물러나게 한 것도 아이러니하게 그가 시행한 의무교육이 매우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23]

3.3. 고등교육 투자

이승만은 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의 복구 과정에서 고급인력들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광복 당시 전문학교 이상의 대학 졸업자는 전체 인구의 0.2% 미만에 불과했다.[24] 그리하여 초등교육의 의무화뿐만 아니라 국가를 이끌 고급인력의 양성을 위해 고등교육에도 투자하여, 김흥배로 하여금 외국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설립하도록 도와주었고, 공학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인하공과대학(현재 인하대학교)을 설립하는 등 대학 설립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학과 전문학교는 광복 당시 19개에서 1960년 68개로 대폭 늘어났고 대학생 수는 10만명으로 늘었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고급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다. 그 때를 위해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한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이승만

또한 이승만은 한국 전쟁 와중에도 대학생들만은 보존해야한다는 신념으로 1951년 2월 18일 대학생 징집연기조치를 시행하고, 부산에 '전시연합대학'을 설립하여 피난 온 대학생들의 학업이 끊기지 않게 그곳에서 수업을 계속하여 고급 인력을 보존하였다.

4. 외교에 대한 평가

나는 이승만의 용기와 뛰어난 지성에 감명을 받고 한국을 떠났다. 나도 역시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상에서 ‘예측 불가능한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승만의 통찰력을 많이 되새겨 보았으며, 이 노(老) 정치가가 얼마나 지혜로웠는가를 더욱 새롭게 인정하게 됐다.
리처드 닉슨 부통령의 회고록 中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는 내내 일관되게 외교독립론을 견지하였다. 국제 정세를 읽는 눈 만큼은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물론, 역대 대통령 가운데에서도 가히 독보적이었다. 미국에서 국제법과 국제정치를 공부했고 미국 각계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인식과 소양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요구한 일본 내막기를 저술했다. 또한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일 관계, 미일 개전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고 미국에서 일본의 위험성, 호전성, 잔혹성을 알리는 활동을 끊임없이 개진했다.[25]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긴 것도 미국으로 하여금 이 전쟁에 개입하고 책임을 지우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외교적 책략에 미국이 홀딱 넘어가서 미국은 한국이라는 늪에 넣은 발을 당장에 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 분쟁에 있어서 북한의 군사 행동을 장기간 저지할 수 있는 명분과 더불어 한국전쟁 때 발생할 수 있는 미국의 태도 전환에 대한 억제력을 확보했다.

또한 독도 문제에 있어서 일본을 상대로 초강경책을 펼쳤다. 평화선 선포를 통한 독도의 영유권 편입도 이런 정책의 일환이었다. 아무리 당시 일본이 패전국이었다고 하지만, 두 나라 간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배짱으로 밀어붙인 외교 정책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평화선 선포만큼은 잘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26]

이러한 성공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교전을 펼칠 때 강경책을 매우 선호했다. 미국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강한 요구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저대로 못 피해가도록 도박 수까지 던지며 밀어붙였다.(반공포로 석방 사건 등.) 이 때 모든 사안을 본인이 철저하게 본인이 주도하여 일선 외교관들은 이승만의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만 수행했다. 이런 강수가 잘 먹힌 대표적인 사례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휴전 협상을 마무리 짓고 발을 빼려는 미국을 제대로 붙들어 매어 놓았고 이승만이 성사시킨 이 조약은 한국의 안보와 발전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효과는 2024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의 모든 단독행동들, 나의 모든 말들은 미국을 괴롭히는게 아니라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미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이승만이 리처드 닉슨 부통령에게 1953년에 한 말

이승만의 위 발언은 미국이 북한소련을 상대로 유리한 협상테이블에서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미친놈처럼 굴었다는 얘기인데 그의 외교적 행보들이 아무 생각없이 허투루 된게 없음을 알 수 있다. 저 말조차도 사실은 한국의 이익을 위해 그가 "내가 하는 행동들이 결국엔 미국에도 이익이 된다"라며 미국을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다.[27]

혹자는 미국의 고위인사들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 경우가 꽤 있는 것을 이유로 그의 외교력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승만은 이렇게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활용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게 바로 당시 미국 고위인사들 사이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이유다. 이승만은 국익을 위해서 철저히 미국을 이용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선 이승만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는 일각의 프레이밍과 달리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승만을 공격한답시고 한편으로는 미국 고위인사나 기관의 악평을 인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다.

4.1.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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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약을 통해 이승만은 북한의 적화통일 의지를 꺾고 한국이 아시아의 제1세계 국가로서 발전하는 원동력을 확보하여 체제경쟁 승리를 가능케하였다. 안정적인 힘의 균형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가능한 것은 사실상 이승만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이승만의 긍정적인 평가 중에서도 단연 1순위로 꼽힌다.

4.1.1. 반공포로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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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휴전 직전 반공포로를 석방해 그들의 북송을 막았고, 이를 통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4.2. 6.25 전쟁 초기 미국의 지원 유치

냉전이 격화되고 있던 세계 정세와 트루먼 대통령의 정책 기조를 생각하면 6.25 당시 미국이 지원을 하리라는 것은 어느정도 예상된 바였다.

그렇지만 6.25 전쟁 초기 이승만이 최선을 다해 미국에게 군수물자를 지원받지 못했다면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에 이르기까지 치열하게 지연전을 전개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승만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주미 대사 장면에게 훈령을 내려 미국의 지원을 촉구하라고 지시했고, 맥아더와 무쵸 주한 미국 대사에게 '더 많은 무기와 10일치의 특정 탄약과 F-51 전투기'를 지원하라고 요구했다. 이를 통해 한국군의 부족한 무기와 탄약이 보충되었으며, 공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지연전을 벌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이승만이 전쟁 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6.25라는 비극을 초래했다고 비판받을 수 있겠지만, 그가 6.25 당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도망다니기만 했던 무능한 지도자라고 폄훼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것이다.

4.3. 전후 미국의 대규모 지원과 원조 유치

이승만은 우리 미국을 궁지로 몰아 넣었고, 그리고 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미 국무부 차관보 월터 로버트슨

이승만은 미국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알았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할 줄 알았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정세를 활용해 그를 달래려는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얻어냈다. 한 예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 8억 달러를 끌어오는데 성공했는데 이는 후에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체결하며 일본에게 받은 무상차관 3억 달러보다도 훨씬 많은 돈이었다.[28]

4.4.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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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방•안보에 관한 평가

5.1. 6.25 전쟁 당시 군부 인사

이승만은 6.25 직전 국군에 유능한 인사들을 중용하였고, 이는 전쟁 당시 한국에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당시 한국군에 일본군 부역 경력이 있는 사람은 굉장히 많고, 이것이 현대까지 논란이 되곤 한다. 하지만 광복 시점까지 수백명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임시정부의 광복군 인사만을 중용하는 데 집착했다면 국군의 정통성은 살릴 수 있었을지 몰라도 북한의 남침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선엽,[29] 김종오,[30] 김석원,[31] 정일권,[32] 이종찬[33] 등은 친일 경력이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북한군의 침략을 저지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대표되는 반격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34]

또한 일방적으로 친일파만 기용했다는 것도 근거없는 비판인데, 광복군 소속이자 중화민국 국민혁명군 소속이었던 김홍일[35], 손원일[36], 이범석[37] 등 군부 수뇌부에는 독립군 출신이 어느정도 존재했다. 하다못해 제일 무능하다고 비난받은 신성모도 임시정부 출신이었다.

이승만은 친일 경력이 있는 자라도 능력만 있다면 기용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6.25 전쟁에서 대한민국이 패망하지 않게 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동부전선에서 한신을 기용하여 38선 이북의 땅을 수복하는데 성공하였다.

6. 경제에 대한 평가

6.1. 경제개발의 초석 마련

1960년대 이후의 경이적인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은 그 이전의 이승만 정부에 의한 전제조건의 구축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로버트 올리버

6.25 전쟁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고 당시 한국 경제의 상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절망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폐허가 된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기반을 닦기 위해 힘썼다. 그 예로 충주 비료 공장, 한국유리공업, 문경 시멘트 공장 등을 설립하고 PL-480(한미잉여농산물원조협정)을 맺었고 이른바 삼백산업[38]으로 불리는 신흥 산업을 번성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상품을 생산하게 한 뒤 한국에는 원조자금을 지원하여 그 원조금으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상품들을 수입해서 쓰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체적인 공업생산력을 갖추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체 공장들을 세운 것이다.

1955년에는 영암선을 개통하여 석탄을 서울로 직송하여 연료를 장작에서 석탄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벌거숭이가 되어 파괴되는 산림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었다. 기존에 전국에서 산에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쓰는 방식으로 생활을 하느라 산이 거덜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쟁으로 한국은 아무런 기반도 없는 말 그대로 0의 상태에서 시작했기에 1950년대 말, 한국의 절대 빈곤은 거의 50%에 달했다.[39] 산업의 대외의존도는 90%에 이르렀고, 공업생산은 일제 말기의 절반 수준도 안 되었다. 1959년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작성한 <퀼른 보고서>는 "많은 면에서 대한민국은 대여된 시간 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 원조 없이는 한국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40] 왜냐면 폐허의 상황에서 임기 10여년 동안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당장의 가시적 효과를 낸다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1970년까지 한국 정부 재정의 약 3분의 2가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단한다면 한국은 당장 재정 파탄이 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당장의 임기응변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썼고, 그래서 절대빈곤 속에서도 정부 예산을 전국민의 6년 의무교육 시행에 쏟아붓고 미국의 반대도 뿌리치고 비료 공장과 시멘트 공장을 지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국방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예산을 쓴 곳이 바로 교육 예산이었다.

이승만은 또한 기업, 산업체의 기술자들을 해외로 연수를 보내어 기술력을 배워오도록 했고 학생들을 국비로 해외에 유학을 보내고, 국내에도 대학교들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1953 ~ 1960년까지 정규 유학생 자격으로 4,884명의 학생이 해외로 나갔으며[41], 기술 훈련 유학생 자격으로는 1953 ~ 1961년 동안 2,309명이 해외로 나갔다.[42] 그리고 교육계, 경제계, 언론계, 노동계 등 각계 지도자 940명이 미국에 연수를 다녀왔다. 이게 어느정도였냐면 1956 ~ 1957년 기준으로 미국내 외국인 유학생 중에 한국인이 캐나다대만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43] 그 외에도 9,186명의 국군 장교와 부사관들이 미국에 파견되어 전문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이런 각종 유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갔다.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인해 기존에는 유학이라고 하면 일본 유학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이런 정책은 그런 유학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일본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44] 이렇게 유학 보내진 인재들과 국내에서 양성된 대졸 고급인력들은 이후 박정희 정부 시기에 맹활약하며 한강의 기적을 이끌게 된다.

즉, 1960년대 이후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이승만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 가능할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물론이고 인도 같은 나라가 소수의 엘리트 인력이 중요한 달탐사 로켓은 쏘아올릴 수 있으면서도 나라 전반의 산업화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이유도 일반 국민들의 교육과 훈련 수준이 낮아 노동력의 질부터 낮기 때문이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농지개혁법인데, 토지개혁 하나가 막혀서 경제 성장이 퇴보한 필리핀 같은 예를 들어도 토지 개혁의 중요성이 경제개발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빼놓을 순 없다. 박정희 정권이 실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시작은 사실 이승만 정부 때 처음 나온 계획으로 1959년에 발표되었고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한국경제재건계획이 건의되기도 했으며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1960∼1962)이 정부가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 이 계획을 변형하여 만든 것이 바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6.2. 한국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

우리나라 장래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들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 회의가 우리들이 옳은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으로 생각한다.
1959년 7월 16일 제1차 원자력 학술회의 대통령 축사

1956년 7월에 이승만 정부는 시슬러 박사#에게 원자력 발전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해 초청하였다. 이승만은 그에게서 석탄보다 300만배나 많은 전기를 생산한다는 얘기와 “한국도 원자력 발전을 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권유를 듣고 한국도 원자력 개발 체제를 갖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서 원자력 전담기구를 설치해 원자력에 관한 연구에 투자를 하고 과학자들을 양성하는 계획과 행정지원과 연구소, 인재 양성 등의 과학기술 분야 진흥을 위한 기본전략을 추진해나갔다. 1958년 2월 원자력 업무를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 원자력법도 공포하였고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를 신설하였다.

1959년에는 원자력원과 그 산하기관에 원자력연구소가 설립되었다. 후에 여기서 배출된 전문인력들은 한국의 원자력발전 도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원자력연구소는 처우도 대단히 좋아서 연구수당과 위험수당을 본봉의 100%씩 더 받았다. 즉, 본봉의 3배를 받았다.# 같은 해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에 국내 최초로 원자력공학과를 만들고 1959년 서울대 공과대학도 원자력공학과를 설치하였다. # 1959년 미국 제너럴아토믹사로부터 공급받아 한국원자력연구소에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여 기초 실험과 교육훈련을 실행하며 원자력 운영 경험을 축적하였다.

1인당 6,000달러나 드는 미국의 알곤국립연구소 프로그램에도 4년간 150여명의 훈련생을 파견하였고 1969년까지 국비 131명을 포함하여 과학자 322명을 보냈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달러 정도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큰 투자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시슬러 박사는 지금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지 묻는 이승만에게 20년 정도 후면 이루어질 것이라 얘기했는데 정확히 20여년 후인 1978년 4월에 고리 1호기가 준공되었다. 이승만이 원자력 발전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오랜 기간 한국에 큰 혜택을 가져다 준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은 이보다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6.3.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파괴로부터 경제를 복구를 하고 국민의 의식주 기초 생활을 위한 물자 수입을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한국은 외환 부족 상태에 있었고 부족한 외환을 주로 원조 자금, 유엔군 지출 경비 등으로 충당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복수환율제를 운용하였는데 외화를 최대한 끌어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협정 환율은 미국으로부터 받는 무상 원조 물자 판매 가격을 가급적 낮게 책정해 민간기업의 재건 활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수출 시장에서는 협정 환율보다 높은 시장 환율의 영향을 받게 했는데, 민간 부문의 수출 활동을 억제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수출지원정책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서 받은 원조는 최대한 값싸게 민간 부문에 판매하고 수출은 상대적으로 고환율의 영향을 받도록 해서 수출로 벌어 들이는 외화를 극대화하려는 조치였다. 미국이 이에 대해서 끊임 없이 이 복수환율제, 저환율정책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이 때문에 1950년대 후반 한미관계가 갈등에 놓이기도 했다.

다만 이승만 정부의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 등, 복잡한 환율 제도와 관련해 외환프리미엄이라는 경제적 지대가 창출됐는데, 이 때문에 많은 자본가들은 국가가 보유한 외환을 배정 받기 위해 애썼다. 1951년 11월에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의 비율은 3.03에 이르렀다.

또한 본격적인 수출주도산업화를 위해서는 미국이 요구한 변동환율제와 환율 현실화를 통한 본격적인 고환율 정책이 이승만 정부의 정책보다 훨씬 좋았고 실제로 1960년대에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실행과 함께 환율 현실화를 단행하자 경제성장률이 뛰어오른 것이 이를 증명하기에 이승만의 환율 정책을 (결과적으론) 본격적인 성장을 늦춘 오판이라고 볼 소지가 존재한다.
[1] 이 두 발언의 출처는 한국어 위키백과의 이승만 문서. 장면과 허정의 저서인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과 "내일을 위한 증언"에서 나온 평가라고.[2] 위 관련 짧은 에피소드가 링크 마지막 문단에 써져 있다.[3] 출처는 2007년 뉴라이트 성향의 잡지 '시대정신'에 기록된 김영삼과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의 대담.[4] 애초에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였다.[5] 조경원, 이배용, '해방 이후 여성교육정책의 변화와 여성의 사회진출 양성-미 군정기(1945)~제1공화국시기(1960)', "한국교육사학"[6] 반면 북한은 주체사상을 완전히 채택하였고, 그 시점에서 여성의 인권이 아예 없어졌다.[7] 정확히는 소련식 공산주의가 아닌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웠다. 이시기 사회민주주의는 지금과 달리 최종적으로 공산주의 사회 건설 완성을 목표로 했으며, 평화적인 민주주의에 의한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으로 방식을 정했을 뿐이다.[8] 실질적인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소련의 건국이 1922년이다.[9] 덤으로 박정희 시기까지 병장 급여가 이등병 급여의 1.5배에 육박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이등병 급여는 80환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0] 당시 한국은 2024년 가치로 환산해도 실질 1인당 GDP가 600~700달러대에 불과한 극빈국이었다. 실제로 1960년 한국의 1인당 GDP가 공식 환율(1달러=650환)으로는 158달러로 수준으로 보면 그렇게까지 빈곤한 수준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실질 환율(1달러=1449환)로 환산하면 71달러도 되지 않았다. 이는 2024년 가치로 환산해도 고작 748달러에 불과한 수준이다.[11] 사실 당시 병장/준장 월급을 실질 환율로 환산하면 각각 8센트/83센트 남짓이었다. 2024년 가치로 환산해도 약 0.84달러/8.76달러에 불과했던 셈. 이는 연봉으로 환산하면 당대 가치로는 0.96달러/10달러, 2024년 가치로는 10달러/106달러다. 덤으로 이등병은 월급 약 5.5센트, 연봉 약 66센트, 2024년 가치로도 7달러 미만(...)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것은 진짜로 나라에서 군 월급을 줄 형편이 못 되어 못 준 거에 가깝다.[12]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강원도 화천 3사단 포병중대의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강호창의 증언에 의하면, 휴가를 나간 사병이 안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데리러 가보면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다."라면서 부대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년 9월 20일/ 113쪽) 또한 5.16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이 쓴 책인 <한국군사혁명사>에 의하면 "장군은 트럭으로 날라다 먹고, 장교는 지프로 날라다 먹으며, 하사관은 등으로, 사병은 반합으로 날라다 먹으니 피차 마찬가지."(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년 9월 20일/ 113쪽)라는 내용이 언급된다.[13] 때문에 당시 미군수품 같은 것들을 몰래 빼돌려 암시장에 파는 등의 부패도 많았다.[14] 당시 1공화국 정부는 부족한 예산을 공직 봉급으로 배분하며 교육을 1순위에 두어 교사 월급을 가장 챙겼고 상대적으로 후순위였던 군인, 경찰, 공무원 봉급은 박봉으로 남아 부정부패를 어느정도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15] 실제로 같은 반공국가였던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이 토지 개혁에 실패하자, 베트콩이 농민들의 불만을 이용해 농촌을 게릴라 소굴로 만들어 패망에 일조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6.25 전쟁 3개월 전부터 본격적으로 토지개혁에 시동을 걸었고, 그 이전부터 농지개혁법이 시행될 것 같다는 소문을 들은 몇몇 지주들이 소작농과 타협해 농토 소유권을 넘기는 등의 자발적 조치도 더해진 상태였다. 그 결과 한국은 베트콩과 같은 자생적 무장 공산 게릴라가 세력을 더 확장하지 못했다.[16] 비록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공식적인 신분제는 폐지되었으나, 어디까지나 법률적으로만 없어졌을 뿐이지 실제로 농촌 사회에서는 50년 넘게 계속 머슴과 백정 같은 하층 계급들이 차별과 천대를 받으면서 살았다.[17] 농사지을 사람이 줄어들면 지주의 수입도 줄고 도로나 통신 인프라가 늘어나면 그 지역 지주의 권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도 그렇지만 지주들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중남미 국가들이 2차 대전 이후 농산물과 광물 수출로 한때 반짝하다가 만성적인 외채 위기로 주저 앉은 것에는, 대지주 계층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근대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한 것이 큰 이유라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18] 김기석, 강일국, '1950년대 한국교육', 문정인, 김세중 편,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19] 김기석,강일국, '1950년대 한국교육', 문정인,김세중 편,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20] 오천석, "한국신교육사"[21] 오천석, "외로운 성주"[22] (1954년 기준으로) 제1차 교육과정기의 중학교 교육과정에 있었던 지금의 일반사회와 같은 역할을 한 교과다. <김대현, 교육과정의 이해, 학지사, 1판 8쇄 347쪽>[23] 교육의 양적 성장은 4.19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식 민주주의 이념교육을 받은 세대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의 실현을 주장하며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조차 무시되는 현실에 궐기했던 것이다. <한국사연구회, 새로운 한국사길잡이(하)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초판 11쇄 430쪽>[24] 교육50년사편찬위원회, "교육 50년사, 1948-1998", 42p[25] 출간 당시에는 별 관심을 못 받았지만 정말로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다를 벌이자 관심을 받게 되었다.[26] 게다가 일본 정부가 아직 군정이 미처 끝나지 않은 때에 전격적으로 해서 일본은 즉각적인 대처를 못했고 이후 대처를 하려고 배도 보냈으나 이승만은 족족 나포하는 것으로 답을 했다.[27] 저 중에서 '미국이 이승만을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가장 효과적인 패를 잃는 것이다'라는 발언도 남베트남 상황을 생각하면 상당한 통찰력을 보여준 것이라 평가된다. 그나마 미국에 맞서 독자적으로 정책을 진행할 수 있었던 남베트남의 유일한 지도자 응오딘지엠이 미국의 묵인 하에 제거된 이후 남베트남은 미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했으며, 이것이 당시 시대 상황과 합쳐져 전세계 여론들이 남베트남을 비난하며 북베트남을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원인이 되었다.[28] 물가 보정을 한다면, 이는 더 큰 차이이다.[29] 개전 초기 개성-문산 전투와 낙동강 전선 최대의 혈전인 다부동 전투 지휘[30] 춘천-홍천 전투 지휘로 북한군 1개 군단 궤멸[31] 진천 전투 등 국군의 지연전에서 성과를 거둠[32] 전쟁 초기 육군참모총장[33] 정일권의 뒤를 이어 육군참모총장 재임[34] 다만 김종오의 경우 학병 출신이기에 공식적으로는 친일파로 분류되지 않는다.[35] 한강 방어선 전투 지휘[36]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서 대한민국 해군 건설을 맡음[37] 초대 국무총리 겸 초대 국방부 장관이며, 전쟁 당시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38] 제분, 제당, 면방직 공업의 원료로 쓰이는 밀가루, 설탕, 면화 등이 모두 흰색이어서 '삼백산업'이라고 불린다[39]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연구/ 김흥수 지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년/ 32쪽[40]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4년 7월 9일/ 279쪽[41] 김종철, "한국교육정책연구", 314p[42] 馬越徹, "현대한국교육연구", 232p[43] "An Evaluation of the Uniqueness of Education growth in Korea", Noel F. McGinn, et al.,op. cit.,p.92[44]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