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7 01:57:02

김흥배

한국외국어대학교 초대 이사장
김흥배
金興培 | Kim Heung-Bae
파일:24571_10538_2243.jpg
<colbgcolor=#8d704f><colcolor=#ffffff> 출생 1914년 9월 12일
경기도 여주군 (現 여주시)
사망 1987년 8월 9일 (향년 73세)
서울특별시
동원(東園)
학력 여주보통학교[1] (졸업)
약력 한국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 회장
동일방직공업주식회사 회장
한국중앙무진주식회사 회장
한국신탁주식회사 회장
한국외국어대학교 설립자 겸 초대 이사장
주 엘살바도르 명예대사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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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기업인, 교육인이며 친일반민족행위자. 한국외국어대학교동원육영회의 설립자 겸 초대 이사장. 본관은 김해, 호는 동원(東園)이다.

2. 생애

1914년 9월 12일 경기도 여주군(현 경기도 여주시)에서 태어났다. 여주보통학교(현 여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혈혈단신 경성부로 상경해 운동구 상점에서 일하며 돈을 모아 18세인 1932년 2월 자신의 회사인 금흥상회를 설립한다.

그 후 사업을 점점 확장시켜 1934년에는 창씨개명한 자신의 일본식 이름인 '노다'를 붙여 '노다상사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가내수공업으로 운동복, 내복, 속옷 등을 만들었고 피복 제작 부문을 확대해 1936년에는 다른 공장에 하청을 주어 교복을 생산, 판매했다. 1938년에는 마포구 아현동에 군복 등 피복제조회사인 노다피복공장을 설립할 정도로 사업을 번창시켰다. 이 때 일제에 군복을 대규모로 공급하는 등 일제의 전쟁행위를 지원했기 때문에, 후대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평가받을 행적을 남기게 되었다. 실제로 1943년에는 고이소 구니아키 총독이 군복이 생산되는 노다피복공장을 방문해 시찰하고 "제일선 장병의 마음을 신의 마음으로 하고 이 대전쟁을 이겨내도록 싸워주기 바란다"며 김흥배를 격려하기도 했다. 28세가 된 1942년에는 중공업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해 동양철강주식회사를 세웠는데, 국가의 기간산업인 자원 산업을 맡겼다는 점에서 일제에 얼마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같은 해 5월에는 29살의 나이에 56명과 경합해 경성부 부회의원에 일등으로 당선되었고, 여주공립농업학교(현 여주자영농업고등학교) 설립에 일조하기도 했다.

부회의원에 당선 되고 나서는 국민총력 경성부연맹 이사도 겸임했는데, 이 경성부연맹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결성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산하기관으로써, 전쟁승리를 위한 모든 물자와 인력을 동원하기 위한 기구였다. 1944년에는 매일신보를 통해 "전쟁결전의 해를 맞아, 지금까지의 기술력을 최대한 결집시켜 미싱공급을 차질 없이 확대공급하고, 종업원의 이직을 방지할 획기적인 대책을 마련하려고 한다..(중략)..피복공장 종업원 전원이 혼연일체가 되어 최고의 생산능률을 발휘하도록 하여 전쟁수행에 앞장설 것이다"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들어왔으나, 여느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그렇듯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해방 직후에는 일제강점기 때 동경화재의 관서였던 현재 한국은행 별관을 사들여 회사 건물로 삼기도 했으며, 1947년에는 기존 사업을 청산한 뒤 보험회사인 '한국화재해상보험주식회사'를 설립한다. 1949년에는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고 체포되어 검찰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나, 반민법 폐지 이후 무죄를 선고받아 석방되었다. 이 과정에서 처를 통해 조사관이었던 김명동이 뇌물죄로 처벌받게끔 공작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외대교지 관련 기사를 참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을 상술한 현 한국은행 별관 건물 지하에 숨기는 등 난관을 겪다가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전쟁 중에서도 사업을 더욱 확장하여 1952년 동일방직공업주식회사, 1954년 한국중앙무진주식회사, 1956년 한국신탁주식회사를 설립했다. [2] 피난 가 있던 부산에서 대학교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정부와의 논의 끝에 전쟁이 끝난 후 1954년 서울 종로구에 한국외국어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역임한다. 한국외대 설립에 관한 이야기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 문서를 참조.

1968년엘살바도르로부터 기사도작위 훈장, 1982년 콜롬비아로부터 산까를로스 대수 훈장을 수여받았다. 1983년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으며, 4년 뒤인 1987년 8월 9일 자택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국내 외국어 교육에 공헌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도 존재하지만,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부정적 평가가 그에 상응하거나 덮을 만큼 크기 때문에 그의 행적은 사후에도 큰 논란이 되고 있다. [3] 2014년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에 학생들 모르게 기습적으로 김흥배의 동상이 세워져 큰 논란이 되기도 했는데, 이에 관해서는 한국외국어대학교/사건사고 항목을 참조.

4. 여담

정치활동에도 크게 몸담지 않았고, 제4공화국 이후에는 경영활동 일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타 대학교 설립자들에 비해 알려진 것이 적다. 기성 언론보다도 외대의 학내 언론 특집기사들에서 김흥배의 일생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외대교지 기사
외대알리 기사

[1] 현 여주초등학교[2] 이 회사들 중 대부분은 1962년까지 운영되다가 5.16 군사정변 당시 국가에 강제 귀속당했다고 한다.[3]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해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인촌 김성수가 그 후손들을 필두로 한 고려중앙학원 이사회와 고려대학교 대학본부로부터는 추앙을 받지만, 고려대생들에게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받듯, 김흥배가 설립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도 김흥배를 추앙하는 재단과 이사회 vs 김흥배의 친일 행적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생들 간에 반목이 발생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