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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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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인2. 한인3. 기타 외국인4. 교직원

1. 일본인

나무위키에 기재된 도쿄대 출신 인물 중에는 당연히 일본인, 그것도 정치인이 많은지라 이 목록에는 법학부가 압도적으로 많다.

2. 한인

국내외, 남북한을 통틀어서 나열한다.

3. 기타 외국인

  • 류밍자오(劉明朝) - 법학부 정치학과 - 대만의 정치인.[30] 제 1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타이완성 선출자 중 최다 득표자.

4. 교직원[31]



[1] 1930년대에 6번이나 유력한 노벨생리학·의학상 후보에 올랐지만, 결국엔 받지 못했다. 못 받은 이유에 대해 나중에 유엔 대사가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일본추축국이었다는 이유로 노벨 위원회장이 수상자로 선정하기를 거부하였다고 한다.[2] 도쿄대학 의학부의 전신[3] 페스트균의 발견, 파상풍 등 다수의 치료법을 개발.[4] 박사학위논문 : A systematic investigation of muon bundle underground : method of analysis (1972)[5] 2002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고시바 마사토시의 애제자 가운데 한 명이다. 도쓰카 요지는 2008년 사망하여 2015년 노벨물리학상은 받지 못하고 그의 제자인 가지타 다카아키만이 수상했다. 살아 있었다면 확실하게 공동수상할 수 있었던 셈.[6] 통상적으로 높은 수준인 자연과학 연구에는 다수의 학자가 멤버로 참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노벨상의 자연과학 부문에서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대표자 3명까지 수상이 인정되곤 있지만, 2015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택된 것은 위에서 말한 가지타 다카아키와 아서 B. 맥도널드 등 두 사람 뿐이었다. 이는 본래대로라면 수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선택될 것이었던 도쓰카를 위해서 스웨덴 왕립 과학원의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세 번째 수상자 자리를 일부러 공석으로 해둔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며 가지타 다카아키도 그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NHK의 특별 프로그램에서 밝힌 적 있다.[7] 다니던 중 외무고시에 합격하고 졸업은 하지 않고 수료로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8] 대표적 업적으론 진돗개풍산개의 보존, 각시붕어, 쉬리 동정 등[9] 도쿄대학의 전신.[10] 쓰시마 섬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한 후 가쿠슈인 고등과를 거쳤다.[11] 해당 논문에서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는 사실을 기술하지 않아 노벨 위원회에서 그 사실을 몰랐고, 결국 크리스티안 에이크만에게 비타민 B1의 최초 발견자로 타이틀이 넘어가 버렸다.[12] 야마기와 가쓰사부로(山極勝三郎)와 이치카와 고이치(市川厚一)은 1915년에 토끼 귀에 콜타르를 지속적으로 발라 인공적으로 을 유발해 내는 데 성공하며 그 과정을 해명했다. 당시에 둘 다 노벨상 후보였으나, 1926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은 먼저 기생충의 기원임을 주장한 요하네스 피비게르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현재, 피비게르의 연구는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13] 만약 이 둘이 1926년에 노벨상을 받았으면 이들은 일본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을 것이며, 유카와 히데키보다 23년은 더 이른 최초의 수상자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노벨위원회였던 폴케 헨센(Folke Henschen)의 증언에 따르면, 노벨상 선고위원회에서 이 연구를 심사할 때 동양인에게 노벨상은 아직 너무 이르다라는 등의 발언이 있었다고 한다.[14] 불문과 졸업 이후 교토대학 법학부 편입[15] '우에노 히데자부로'라는 기록도 있다.[16] 시부야역 앞에 동상도 세워져 있다. 하치코 문서 참조.[17] 일본 부자 순위에서 18위를 기록.[18] 타바타 운동법을 고안한 것으로 유명하다.[19] 게이머계를 통틀어서 손에 꼽힐 만큼 엘리트 코스를 밟은 게이머로도 유명하다.[20] 現 도쿄대학 의과학연구소[21] 당시 난치병이라 여겨진 매독의 치료약으로 사용되었다.[22] 1912년 및 1913년에는 노벨생리학·의학상에도 후보로 올랐으나 결국에 수상은 놓쳤다.[23] 도쿄대학의 전신[24] 광복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여 경성대학에 편입.[25] 광복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하여 경성대학에 편입.[26] 박사 과정에 입학할 때 한국에서 취득했던 권성주논문이 무효 처리되어 입학이 거부된 적 있다고 한다. 6개월간의 비정규 연구생 과정으로 논문을 새로 쓰고 나서 입학이 허가됐다고 한다. 링크[27] 박사학위논문 : Estimate of heat transport across the sea surface near Japan with the bulk methods (1992)[28] 재학 중 학병으로 징병되었으며, 해방 후 복학하진 않았다.[29] 학부의 경우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 (현재의 도쿄농공대학)을 졸업했다.[30] 대만 본성인으로, 일치시기에 총독부 관료였다.[31] 도쿄대학 동문 제외[32] 조선후기 사회경제사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이다.[33] 도쿄대학 공학부의 전신(前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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