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 10. 27. — 1940. 6. 27. (향년 56세, 세는나이 5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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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레 겐(呉 建, 1883-1940)은 일본의 의사 및 의학 연구가이다. 그는 1883년 도쿄부 고지마치구(현 지요다구)에서 태어났으며, 도쿄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1907년 졸업하였다. 그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유학을 하다가 귀국하여 규슈대학 교수직, 도쿄대학 교수직, 도쿄대학 의학부 소속 의원 의장직을 역임한 바 있다.구레는 자율신경계에 대한 연구로 당대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31년에는 척수를 해부하던 중 후근에 원심성 섬유 조직을 발견하였고, 그것이 척수의 부교감신경임을 밝혀냈다. 또 수의근이 뇌수신경성과 자율신경성으로 나뉘어져 신경지배를 받는다는 이론을 내세우고 미국과 유럽의 여러 학자들에게 검증을 받고 지지를 얻었다.
회화에도 조예가 있어 여러 점의 서양화를 그려서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의학 분야에서 업적들을 많이 남겨 일본 국내외로부터 많은 상을 받았지만, 유독 노벨상과는 하술할 사유로 인해 인연이 없었다. 이후 구레는 여생을 의사로서 종사하다가 1940년에 향년 56세 일기로 사망하였다.
2. 의문의 노벨상 수상 불발
구레는 부교감신경 발견 건으로 인해, 구레는 1930년대에 총 28명에게서 노벨생리학·의학상 수상자로써 추천을 받고 6차례나 후보에 올랐었는데, 이는 일본인들 가운데서 역대 최다로 추천을 받은 횟수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연구 성과가 명망높은 업적이었다는 방증이다.그러나 구레의 노벨상 수상은 석연찮은 이유로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와 관련하여서는 자세히 밝혀진 바는 없으나, 유엔 대사를 역임했던 마츠다이라 고토에 따르면 당시 일본이 추축국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노벨위원회장이 그에게 의도적으로 상을 수여하기를 거부하여 수상이 불발된 것이었다고 증언하여 파장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이 추축국이라서" 일본인에게 상을 주지 않았다는 건 상당히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다. 당시에도 같은 추축국이었던 독일과 이탈리아 출신의 인물은 추축국 결성의 기류가 형성되던 1936년~2차 대전 종전까지 여러차례 노벨상을 받은 적이 있고, 2차 대전을 일으키고 공식적으로 추축국이 결성된 이후로도 독일은 2차례나 상을 받았다. 같은 추축국이던 독일이나 이탈리아는 잘만 받았는데 일본만 추축국이라는 이유로 수상을 거부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애당초 노벨상은 국적과 인종에 상관없이 주어져야 하며 추축국 출신의 인물이라는 이유로 시상을 거부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노벨재단의 일본인에 대한 차별의식 때문에 받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미 그 이전에, 일본 의학계에서는 구레가 수상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많았는데, 그 이유가 노벨위원회가 일본인이나 동양인을 차별을 행한다는 설이 이미 일본 학계내에서 암암리에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1926년에 암의 발병 기전을 해명하는 데 성공한 야마기와 가쓰사부로(山極 勝三郎)와 이치카와 고이치(市川 厚一) 등의 일본 생리학자들이 당시 매우 유력한 수상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벨위원회는 "동양인에게 시상은 아직 이르다"라고 발언하면서 이들에게 상을 주지 않고 대신 기생충 암 기원설을 주장한 덴마크인 피비게르에게 무리해서 줬다는 의혹이 일어난 적이 있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 내에선 노벨위원회의 일본인 차별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실제로도 기생충 암 기원설은 현재 틀린 것으로 입증되었고 야마기와 등의 방법이 현대 의학에서 암 연구에 있어 종양 유도법의 기반이 된 것을 생각해보면, 이들이 시상을 탈락한 건 상당히 의심스러운 면이 있기는 하다. 그 외에도 러더퍼드에 앞서 먼저 원자핵 이론을 창설한 나가오카 한타로(長岡 半太郎), 파상풍, 디프테리아 등의 항체 배양법을 개발한 기타사토 시바사부로(北里 柴三郎), 살바르산 606호를 공동 개발한 하타 사하치로(秦 佐八郎) 등과 같이 세계적인 업적을 남긴 일본인 학자들이 이전부터 유난히 노벨상 후보에 오르고도 떨어진 사례가 많았던 터라 이러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 때문에 1930년 전후로 일본 학계에서는 노벨재단의 일본인 차별설이 퍼져 있었다고 하며, 구레가 자신이 노벨상 수상과 관련하여 동료들과 상담했을 때에도 오가타 토모자부로(緒方 知三郎, 1883-1973)라는 동료 생리학자가 "노벨 위원회는 동양인을 차별하는 경향이 있으니, 수상하기를 바라지 말고 단념하라"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관측은 정확히 맞아 떨어져 구레는 끝내 수상에 이르지 못했고, 구레의 수상 불발 소식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노벨상 일본차별설이 더욱 확고해지는 계기가 되어 일본 학계에서는 더이상 일본인 학자들이 노벨상을 받기를 기대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1] 결국 일본 출신의 사람이 노벨상을 처음 수상하게 된 일은 1949년(유카와 히데키)이 되어서였다.
아무튼 이러한 일이 있었던 탓에 구레는 일본에서 불행하게 노벨상을 받지 못한 비운의 일본인 과학자들 중 한 명으로 소개되곤 하며, 만약 이때 그가 노벨상을 수상하였으면 유카와 히데키보다 10여년 가량 더 이른 일본인 수상자가 되었으리라는 관측이 있다.
[1] 東京大学教養学部哲学・科学史部会 哲学・科学史論叢第四号 平成14年1月 (2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