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2 23:18:13

HJ중공업

대한조선공사에서 넘어옴
파일:HJ중공업 로고.svg
정식명칭 <colbgcolor=#fff,#1f2023>주식회사 에이치제이중공업
영문명칭 HJ Shipbuilding & Construction Co., Ltd.
업종명 강선 건조업, 건설업
설립일 2007년 8월 1일[1]
아파트
브랜드
해모로
상장여부 상장기업
기업규모 중견기업
모기업 동부건설
상장시장 유가증권시장(2007년 ~ )
종목코드 097230
매출액 2조 1,613억원 (2023) #
영업이익 -1,082억원 (2023) #
순손실 -1,135억원(2023) #
도급순위 36위(2024)
대표자 유상철 (조선부문) / 김완석 (건설부문)
주소 조선부문 본사(영도조선소)[2]: 부산광역시 영도구 태종로 233 (봉래동5가)
건설부문 본사: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대로71길 4 (갈월동)
부산R&D센터: 부산광역시 중구 충장대로 6 (중앙동4가)
거제공장: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연하해안로 473-7 (오비리)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연혁3. 지배구조4. 역대 로고5. 역대 임원
5.1. 구 법인5.2. 신 법인
6. 영업 현황7. 시공능력평가 순위8. 자회사9. 노동운동10. 한진그룹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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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HJ.jpg
HJ중공업 조선부문 본사 및 영도조선소

한국토지신탁 계열[3]조선, 건설 회사.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의 차남 조남호가 분가하여 운영했던 한진중공업그룹[4]의 핵심이었으나, 경영부실로 인해 오너 일가가 경영권을 잃고 그룹에서 분리되었다.[5]

2. 연혁

파일:The Korea Shipbuilding Corporation.jpg
대한조선공사 시절 영도조선소
파일:The 1st Shipbuilding dock.jpg
대한민국 조선1번지
국내 최초의 강선(鋼船,Steel Ship) 건조 조선소. 근대적 조선소의 효시로 대한민국 조선1번지로 불린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본 자본으로 부산 영도에 세워진 조선중공업(朝鮮重工業)을 전신으로 한다.[6] 조선중공업은 일본 미쓰비시 중공업동양척식주식회사의 합작투자로 설립된 회사로[7], 중일전쟁 직후인 1937년 자본금 300만원으로 설립되었으며, 1941년 태평양전쟁 직전에는 자본금 700만원(현재가치 8,400억원)의 규모로 성장했다. 이후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 해군으로부터 발주받은 선박 12척 등을 수주 건조하며, 설비와 자본금을 증자하며 (1,500만원-현재가치 1조 8,000억원) 당시까지 조선 최대 규모인 조선방직을 능가하는 금액이었으며, 해방 직전인 1945년에는 전시특수를 누리며 자본금 3,100만원(현재가치 3조 7,000억원)의 규모로 큰 성장을 하게 된다. 해방 이후 50년대까지 한국에서 1,000톤 이상의 대형 철선을 건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선소였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중화학 공업시설은 흥남북한 지역에 세워졌기 때문에, 조선중공업은 드물게 남한 지역에 온전히 남겨진 중공업 시설이었다.

1945년 8.15 광복 후 일본인 경영진과 간부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가자, 전 수상서 치안관 박상길을 중심으로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본사를 관리했으나, 대책위원회 측 횡령으로 노동자들이 노조분회를 결성 후 대책위를 축출해 자주적으로 공장을 관리했다. 그러나 미군정 출범 후 군정법령 33호에 따라 일본인 재산은 적산으로 분류되어 미군정청에 귀속되었는데, 조선중공업은 이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시절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이어받은 군정청 산하 신한공사에 귀속되어 관리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조선공사법에 의거 1950년 1월 자본금 3억원의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로 출범했고,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거치며 피폐해진 경제상황으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선박 수요가 저렴한 일본 중고선박의 수입으로 대체되어 발주되는 선박이 없다시피하다 보니 1950년대 내내 대한조선공사는 변변한 선박을 건조할 수 없었으며, 간간히 소형선박이나 수리조선만 간신히 하는 정부의 대표적인 적자 공기업이 되었다.[8] 막대한 원조를 해주던 미국 측에서는 조선공사의 민간매각을 종용했으며, 이에 정부에서는 1958년 국영기업 대한조선공사를 폐지하고 (주)대한조선공사를 설립하여 주식을 민간에 매각하려 했으나, 매각에 실패하여 형태만 주식회사로 바뀌었을 뿐 여전히 국가소유 공기업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5.16 군사정변 직후 재차 국영화하여 정상화를 꾀하다가 실패하고, 1962년 국내 최초로 공작기계(선반)를 제작 후 1968년 11월 당시 재계순위 10위권 안팎에 있던 극동해운에 매각되면서 재차 민영화됐다. 극동해운의 계열사 편입 이후 남궁연 사장은 부산 영도조선소의 설비를 확충하고, 1969년 대만으로부터 발주받아 국내 최초로 수출선을 건조[9]했고, 1974년 미국 걸프 사로부터 발주받아 국내 최초로 대형 수출선을 건조[10]하는 등 사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이미 영도조선소 인근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조선소를 확장하기 힘들어 1972년 즈음 거제도 옥포동옥포조선소를 짓기로 하였으나 이듬해 1973년 오일 쇼크의 발발로, 조선업 경기가 급강하하면서 휘청거리게 되고, 옥포조선소는 결국 1978년 대우그룹에 분할매각됐다. 이후 옥포조선소는 대우조선공업(주)을 거쳐 대우중공업(주)으로 합병되어 대우조선해양을 거쳐 오늘의 한화오션에 이르게 된다.

옥포조선소 매각 후 1977년 사우디아라비아 TAIF 공군기지 시설 공사 및 국내 최초로 석유 시추선 건조 등을 했으며 1981년 동해조선을 인수하고 옥포기업을 합병 후 부산수리조선소를 세웠다. 1982년 국내 최초로 사우디 제다에 해외 수리 조선소를 세우고, 1984년 12월 동양 최초로 수륙양용 공기 부양선을 건조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뒤로 하고 1988년 법정관리되어 1989년 조선산업 합리화 계획에 따라 한진그룹이 본사를 인수하면서 한진중공업이 되었다. 1996년 법정관리 종결 뒤 1999년 3월 경남 마산에서 경비정 등을 제작하던 중소 조선사였던 코리아타코마[11]를 합병하고, 같은 해 8월 한진건설, 한진종합건설을 합병하였다.

건설부문 또한 조선부문 못지 않은 긴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1967년 설립된 대한준설공사가 1990년 한진종합건설로 사명을 변경하고, 1968년 설립된 한일개발은 1994년에 한진건설로 사명을 변경, 운영되어오다가 1999년에 당시 조선업을 영위하던 한진중공업과 함께 3개 계열사가 합병하여 한진중공업이 만들어졌다.

한일개발 시절 국내최초의 철골구조 건물인 서울 해운센터빌딩을 신축한 이래 전통적으로 공항건설 분야의 특화된 기술력과 인천 영종도, 군장 국가 산업단지, 부산 신항 배후 단지 등 준설, 항만 사업분야에서 국내 최고의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1970년대에는 중동 및 동남아 해외건설 시장에 일찍 뛰어들어 개척자의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73년 국내 업계 최초로 필리핀 건설시장에 진출한 이후 필리핀 마닐라 경전철을 비롯하여 도로, 항만 공사 등 강점으로 꼽히는 인프라 공사에서 많은 실적을 올렸다.

대표적으로 인천국제공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내 공항시설 건설과 영종대교, 필리핀 다바오 국제공항, 경부고속철도, 인천문학 월드컵 경기장, 부산 신항만 건설 등 국내외 굵직한 공사들을 수행하였다. 특히 공항 건설 분야에서는 국내에서 독보적인 실적을 자랑한다. 1971년 김포국제공항 국내선 여객청사를 시작으로 제주, 김해, 청주, 인천, 울산, 양양, 대구, 포항, 광주, 무안공항 등 대한민국에서 최다 실적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동북아시아 허브공항인 인천국제공항 건설에서 최초 공사인 방조제 공사부터 부지조성, 활주로, 여객터미널, 부대시설, 접근도로 공사까지 거의 모든 공정에 참여했다.

이러한 성과로 한진중공업은 2001년 3월 인천국제공항 개항식에서 국내 건설업계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였으며, 이후 2단계 공사인 탑승동, 3단계 공사인 제2여객터미널 신축과 전면도로 공사 등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최근에는 초대형 프로젝트인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 확장 골조 및 마감공사를 수주하여 공항건설의 독보적인 명가임을 꾸준히 재확인 시켜오고 있다.

전통적으로 공공공사와 토목 인프라 공사에 강점이 있었으나 2010년에 접어들어 민간 건축과 주택사업에서도 그 영향력을 꾸준히 확장시켜 오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매년 개최되는 부산 영화의 전당을 비롯하여 부천문화예술회관, 세종아트센터 등 국내의 공연, 문화예술 시설에도 강점을 발휘하고 있다. 주택 사업분야에서는 2006년 런칭한 주택브랜드 <해모로>를 앞세워 정비사업 시장에서 꾸준히 수주를 이어가고 있으며 적극적인 분양 홍보 전략으로 7년 연속 초기분양율 100%라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철도차량도 제작한 적이 있었다. 여러 무궁화호 객차들과 DHC 디젤동차 일부 차량뿐만 아니라 이외에도 한국철도공사 341000호대 전동차[12]한국철도공사 351000호대 전동차[13],대구교통공사 1000호대 전동차, 서울 지하철 7호선 7000호대 전동차, 부산교통공사 2000호대 전동차, 서울교통공사 8000호대 전동차 같은 도시통근형 전동차도 생산한 적이 있었다. 이후 철도차량 부문은 현대정공대우중공업과의 빅딜 사업으로 인해 현대로템으로 합병되었다. 참고로 우리나라 최초의 VVVF 전동차를 제작한 곳이 한진중공업이다. 물론 대우중공업도 비슷한 시기에 VVVF 전동차를 제작했지만 구 2X30편성이 현재 341B01편성(한진중공업 제작)이라서 대우중공업이 최초는 아니다. 만약 2X30편성이 351F01편성이었다면 대우중공업이 우리나라의 첫 VVVF 전동차를 제작한 회사로 알려져 있을 것이다.[14]

2005년 한진그룹에서 계열 분리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엄청난 막장 드라마를 찍었다. 2006년 부터 필리핀 수빅조선소로 물량을 빼며 그로인한 노사분규가 2008년 ~ 2012년 장기화되어 해양 플랜트 건설에 많이 뛰어들지 못한 게 새옹지마가 되었는지 HD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이 줄줄이 신음하는 2015년에도 그리 큰 적자를 보지 않고 위기를 넘기나 했으나, 결국 필리핀 수빅조선소 문제와 조선업 불황으로 2016년 채권단 자율협약을 신청했다.#
파일:HHIC-Phil Inc.jpg
한진중공업 시절 수빅조선소
2019년 1월 필리핀 소재 수빅 조선소가 현지 법원에 회생절차를 신청함에 따라 자본금 대비 자본총계 비율이 -140%를 기록, 완전자본잠식에 빠졌다. 수빅조선소에 대한 한진중공업의 보증채무는 4억 1,000만달러(약 4,600억원) 규모다. 결국 채권단이 6,874억원에 달하는 채권을 출자전환하고, 대주주인 한진중공업홀딩스와 조남호 회장 개인 소유의 지분을 전액 감자하면서 채권단이 소유, 경영하는 회사가 되었다. #

2021년 4월 15일 동부건설을 주축으로 하는 컨소시엄이 한진중공업을 인수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컨소시엄은 국내 8개 은행으로 구성된 채권단과 필리핀 BDO은행으로부터 한진중공업 발행 주식의 66.85%(5,567만 2,910주)를 사들이는 주식 매매계약을 체결했다.기사

2021년 12월에 한진중공업홀딩스와의 '한진중공업' 사명에 대한 상표권 계약이 만료되어 'HJ중공업' 으로 사명을 변경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운 C.I.를 발표, 새로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2022년 상선 수주 증가에 따라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오비리의 한 조선 선박블록 제작 공장을 사들여 9월 30일, 사외 공장인 'HJ중공업 거제공장'으로 준공하고 블록 제작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생산된 블록들은 조선부문 본사이자 사업장인 영도조선소로 보내진다.

3. 지배구조

2024년 3월 31일 기준
주주명 지분율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에코프라임마린퍼시픽 유한회사[15]
66.85%

[[필리핀|]][[틀:국기|]][[틀:국기|]] 리잘상업은행
8.53%

[[필리핀|]][[틀:국기|]][[틀:국기|]] 필리핀토지은행
5.01%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우리사주조합
0.23%

4. 역대 로고

조선중공업 파일:대한조선공사 로고.png 파일:대한조선공사 주식회사 로고.png 파일:한진그룹 심볼.svg 파일:한진중공업 CI.svg 파일:HJ중공업 로고.svg
창립초기 1950년 1969년 1990년 2005년 2021년~현재

5. 역대 임원

5.1. 구 법인

  • 대표이사 사장
    • 김권태 (1945~1949)
    • 이연재 (1949~1952)
    • 신성모 (1952~1953)
    • 유완창 (1953~1954)
    • 이철원 (1954~1958)
    • 석상옥 (1958~1960)
    • 권태춘 (1961)
    • 이영진 (1961~1965)
    • 김두찬 (1965~1968)
    • 남궁련 (1968~1975)
    • 남궁호 (1975~1988)
    • 안정모 (1978~1980)
    • 송영수 (1996~2000)
    • 이우식 (2000~2002)
    • 박재영 (2000~2004)
    • 김정훈 (2002~2004)
    • 김정웅 (2004~2007)
    • 홍순익 (2004~2007)
    • 박규원, 이강록 (2007)
  • 법정관리인
    • 조원강 (1988~1989)
    • 이근수 (1989)
    • 송영수 (1989~1996)
  • 관리인(귀속재산 시절)
    • 박상길 (1945)
    • 김재련 (1945)
    • 정우조 (1945)

5.2. 신 법인

  • 대표이사 사장
    • 박규원 (2007~2009)
    • 이강록 (2007~2008)
    • 송화영 (2008~2014)
    • 이재용 (2009~2013)
    • 최성문 (2013~2015)
    • 이만영 (2014~2016)
    • 안진규 (2015~2017)
    • 이윤희 (2017~2019)
    • 이병모 (2019~2021)
    • 홍문기 (2021~2024)
    • 유상철 (2023~)
    • 김완석 (2024~)

6. 영업 현황

2000년대 이후로는 일반 아파트 건설업, 상업시설 건설 등 건설업에 치중하는 모양이며, 실제로 대부분의 매출이 건설업에서 뽑히고 있다. 해모로가 HJ중공업의 아파트 브랜드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건설업의 비중이 높을 뿐이지 조선업도 만만치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소부산광역시영도 조선소를 보유하고 있다. 영도조선소의 경우 부지가 협소한 사정상 대형 선박 건조는 불가능하다. 영도조선소에서 건조한 상선들의 트랙 레코드는 주로 중소형 상선에 집중되어있다. 영도조선소에서 건조했다는 대형선도, 건조 당시에는 대형선이었만 지금 기준으로는 중형선과 대형선의 경계에 있는 선박이 대부분이다.

대신 각종 첨단기술이 적용된 연구선이나 군함 같은 특수선 위주로 건조한다. 한마디로 공공 발주 물량을 집중적으로 건조한다. 해경이 사용하는 선박, 대형이 아닌 군함, 어업지도선, 극지 탐사선, 실습선 등이 대표적이다.

대한민국 해군과는 상당한 인연이 있다. 과거 대한조선공사, 코리아타코마 시절부터 동해급 초계함, 포항급 초계함, 울산급 호위함[16] 상당수와 최근의 독도급 대형수송함 2척 및 여기에 탑재할 솔개급 공기부양정을 건조, 인도하였으며 참수리급 고속정은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여 건조물량의 절대 다수가 HJ중공업 제작품이다.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보다는 해군이 운용해 본 경험이 없는, 처음 만들어보는 함종의 초도함 건조 이력이 상대적으로 돋보이는 편이다.

HJ중공업이 조선 BIG3 중 방위산업을 영위하는 회사인 HD현대중공업, 한화오션과 경쟁하는 것이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다. 우선 일부 선종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함은 대형 상선보다 작다. 따라서 설비 규모가 작은 HJ중공업이 대형 조선소와 경쟁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선박 건조는 작은 선박을 찬찬히 건조하면서 기술을 쌓은 후 차츰차츰 대형화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초창기 프로토타입 물량을 중소형 선박을 위주로 건조하는 HJ중공업이 초도물량을 수주하고 건조하는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다.

HJ중공업과 사이즈가 비슷한 중형 조선소와 비교하면, HD현대미포는 중형 조선소 중 압도적 기술력과 실적을 자랑하는 조선소이긴 하지만 상선만 건조한다. HD현대미포 입장에서도 애매한 사이즈의 군함 2~3척을 도크에서 순차적으로 건조하느니, 중소형 선박 2~4척을 하나의 도크에서 동시에 단기간에 건조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다.

중형조선소 중 HJ중공업에 가장 큰 위협이 되었던 조선사는 2000년대 중후반의 STX조선해양이다. 다만 STX조선해양은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치며 상선만 건조하는 케이조선으로 바뀌었으며, 특수선 부문은 SK오션플랜트로 매각되었다.

대한민국 해군 과의 인연은 윤영하급 고속함참수리 211급 고속정으로 이어지고 있다.[17]

영도조선소는 경제성 있는 특수선에 역량을 집중하고 상선의 비중을 점차 줄여나가는 것으로 수익성 강화에 나섰다. 특수선은 정부 발주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적자수주의 가능성이 거의 없다. 대금이 늦게 들어올 일도 거의 없다. 이익률이 호황기 시절 상선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많기는 하나, 극단적 사이클 산업인 조선업에서 방산은 안정적인 매출과 손익분기점을 제공하는 선종이다.

다만, 특수선 중심의 수익성 강화가 정답인 것은 아니다. 조선업은 고정비가 큰 산업인데, 방산에 집중하면 특수선 분야에서는 흑자가 나도, 조선소 전체로 보면 적자가 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산 집중형 적자를 막으려면 상선 부문을 최소화하는 대규모 구조조정을 해야한다. 실제로 HJ중공업이 특수선 위주로 포트폴리오를 짜던 시기는 대규모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영도조선소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던 시기와 겹친다.

그리고 HJ중공업은 영도조선소의 한계 때문에 상선에서 부진한, 그러면서 특수선 비중이 높아진 측면도 있다. HJ중공업 영도조선소는 부지와 설비가 좁아서 대형상선을 건조하기 힘들다. 2000년대 조선업 호황기 시기에 HJ중공업이 건조했다는 대형선도 지금 기준으로는 중형 내지는 중대형급이다. HJ중공업이 독자적인 댐 공법으로 영도조선소의 협소함을 극복하기는 했지만, 컨테이너선 기준으로 7000~8000TEU급 정도를 건조하는 데 그쳤다. 1만TEU급 이상 건조실적은 수빅 조선소에서 건설 이후에야 가능했다.# 반면 상선 불황기이던 2010년대 중후반, 대한민국 정부가 조선 및 해운업 재건을 위해 발주한 상선은 모두 13,000TEU 이상의 대형선이었기 때문에 HJ중공업은 사실상의 정부 발주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줄어든 중소형, 중형급 상선에서 박리다매 발주 물량은 중국이 저가수주로 쓸어가고, 그나마 돈이 되겠다 싶은 발주는 중소형 상선 분야의 압도적 1위에 밀리고, 정부 주도 상선발주에는 설비상의 한계로 제외되다 보니,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HJ중공업 영도조선소의 상선은 극도로 부진했다.

2015년 2월 말 기준 영도조선소의 수주 잔량은 15척으로 일부 벌크선을 제외하면 대부분 특수선 및 중소형 상선이다. 이 중 6~7척은 지난해 한국해양수산연수원, 조달청 등으로부터 수주한 항해 실습선이다. 일반 상선은 2011년 현대상선으로부터 수주한 벌크선 1척 밖에 없다. HJ중공업을 공동관리하는 채권단은 영도조선소의 상선 부문 비중을 단계적으로 축소하여 2020년까지 영도조선소를 특수선 전문 조선소로 전환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2021년 8월 동부건설 컨소시엄에 인수합병된 이후 조선업황이 개선됨에 따라 2021년 10월 5500TEU급 컨테이너선 4척을 수주하여 상선 시장에 재진입했다.

2023년 초 HMM으로부터 9000TEU급 메탄올 추진 컨테이너선을 두 척 수주했다. 9000TEU는 중대형 사이즈로 현재 영도조선소에서 건조할 수 있는 최대 사이즈다. 삼성중공업이나 한화오션보다 먼저 메탄올 추진 선박을 수주한 것이다.[18] 새로운 연료체계 선박을 사업장 최대 건조 규모로 수주한 것은 괄목할 만한 성적이다. 물론 수주와 납품은 별개이기 때문에 해당 선박을 제대로 건조해, 제때에 납품해야한다는 숙제가 생겼다.

상술된 HMM의 9,000TEU급 메탄올 추진선 2척 수주를 위해 지자체와 지역언론이 이례적으로 큰 활동을 했다. 중형 상선에서 저가 물량은 중국에 치이고, 중고가 물량은 HD현대미포에 밀리고, 정부 발주 상선 물량은 설비상의 한계로 배제되다 보니 부산의 조선업계 및 상공계의 불만이 상당했다. 이 때문에 HMM의 중형급 컨테이너선 발주 계획이 알려진 뒤부터 부산일보, 국제신문 등 지역지에서 부산 소재 조선소의 수주 당위성을 주장하는 기사를 작성했다. 수주 계약서를 쓰는 현장에는 부산시 고위 관계자들이 이례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부산일보는 수주 확정 소식을, 거의 똑같은 내용의 기사를 두 명의 기자가 작성하는 등 고무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조선부문의 불황과 경영난 속에서도 건설부문은 건실한 실적을 유지하며 어려움을 극복해왔다. 현재 매년 약 1조 5,000억원의 수주 실적을 올리고 있으며 공공공사의 경우 약 5,000억원이 넘는 수주 실적으로 꾸준히 톱 10 순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2020년에는 7,362억원의 공공공사 수주액을 달성하여 국내 업계 3위에 랭크되었다.

주택사업 분야에서는 서울, 인천, 부산, 대전, 대구, 청주, 제주 등 전국 각지에서 정비사업에 적극 참여하고 있으며 매년 약 5천억 원의 수주고를 올리고 있다.

2019년 경영난 타개를 위해 보유 중인 동서울종합터미널신세계프라퍼티에 매각하였고, 신세계프라퍼티가 부지 개발을 위해 설립한 시행법인 신세계동서울PFV의 지분 9.91%를 확보하여 개발사업에 참여 중이다.

7. 시공능력평가 순위

<rowcolor=#fff> 연도 시공능력평가 순위
<colcolor=#fff><colbgcolor=#000> 1985년 7위
1990년 21위
2000년 10위
2001년 7위
2002년 7위
2003년 10위
2004년 10위
2005년 13위
2006년 12위
2007년 15위
2008년 15위
2009년 14위
2010년 14위
2011년 15위
2012년 20위
2013년 15위
2014년 22위
2015년 26위
2016년 24위
2017년 33위
2018년 41위
2019년 45위
2020년 46위
2021년 43위
2022년 41위
2023년 37위
2024년 36위

8. 자회사

  • 인천북항운영

9. 노동운동

타 조선업체들에 비해 노사분규가 크게 이슈화되었다.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조선소의 기나긴 역사와 궤를 함께한 노동운동의 역사가 존재하는 회사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노동운동 역사의 산증인이라 하겠다.

대한조선공사 시절부터 박정희 정부의 대한노총(현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산하 노조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노동자 권익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대규모의 민주적 노동조합이 존재했다.[19] 1960년대 말 조선공사 민영화 반대 투쟁에서 패배한 뒤 1970년대에는 당시 대다수 노조들이 그랬듯이 관제적 성격을 띄게 되나, 중공업 부문에서 민주적 노동조합이 대대적으로 부활한 1987년 이후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은 다시 부산 지역 노동운동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1980년대 이후 활약한 대표적인 노동운동가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20]으로 알려진 김진숙(이후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있다. 부산 지역에서 노동변호사로 활약하던 노무현 역시 한진중공업 노동조합의 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 씨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돌연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더군다나 장례를 치르려던 그의 시신을 경찰병력을 동원해 강제로 빼앗아가는 짓거리가 벌어지기도 했다.(시신 탈취를 방지하기 위해 보초까지 서고 있었으나 경찰은 영안실 벽을 부수어 뚫고 시신을 탈취한다.) 이는 안기부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노태우 정부 시기의 대표적인 의문사 사건으로 꼽히며, 당시의 분신정국에 기름을 끼얹는 사건 중 하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정리해고를 둘러싼 노사간의 갈등이 두드러졌다, 2003년에는 김주익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85호 크레인에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으며[21], 얼마 후 곽재규 조합원도 따라서 숨을 거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한때 노동자들의 동반자였던 노무현 정부 때였으며, 노무현 대통령은 이 사건 직전에 일어난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씨의 분신자살 사건[22]을 두고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끝났다라는 발언을 하여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

2011년에는 희망버스 사건이 있었다. 정리해고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위에서 언급된 김진숙 지도위원의 85호 크레인 농성을 계기로 크게 이슈화되었다. 희망버스 투쟁 이후에는 2012년에는 최강서 조합원이, 2013년에는 또 다른 김 모 조합원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10. 한진그룹과의 관계

영 좋지 않다.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맏형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으로부터 계열 분리하여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한바탕 막장 드라마를 찍었기 때문이다.

조남호 회장은 지금까지도 한진그룹 일가와 사이가 굉장히 안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앙금의 단적인 예로 본진인 한진그룹에서는 조중훈 전대 회장의 제사를 음력에 진행하는 반면, 한진중공업에서는 양력에 치른다. 물적분할 직후, 출장갈 때 대한항공진에어를 아예 타지 마라는 내부 지시까지 있을 정도였다. 2000년대 초반까지는 그래도 대한항공에서 할인을 해 주었으나, 이제는 없을 뿐더러 대한항공을 타면 출장비도 정산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아시아나항공(!)의 자회사인 에어부산관계가 좋은 편이다. 에어부산은 기업우대 제도로 동남권 소재 기업들에게 할인을 해 주는 게 있어서, 영도구에 본사가 있는 한진중공업으로서는 특기할 사항이 아니다.

이는 GS그룹이 필수 인프라 중 하나인 전화망을 LG U+의 것으로 사용하는 거라든지, 천일고속/천일여객 계열사들이 천일고속천일여객그룹으로 분리될 때 별 잡음이 없었던 것과 대비된다. 사실 GS그룹LG그룹과 싸워서 헤어졌더라면 전화망을 모조리 SK텔레콤이나 KT로 바꿔버렸을지 모르며, 천일여객의 경우에도 지분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식들에게 다른 회사를 물려줘서 서류상으로 남남이 된 터라 실질적으로는 계열사에 준할 정도로 교류가 많다. 대우그룹 출신 법인들이 자체 버스나 트럭 그리고 승용차를 자일대우버스, 타타대우상용차쉐보레(GM 한국사업장) 그리고 KG모빌리티로 뽑을 정도로 의리가 강한 것과는 완전 천양지차.

아시아나항공이 대한항공에 인수될 경우 해외출장 때 탈 비행기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23], 2019년 조남호 전 회장의 지분이 완전 소각되어 조씨 일가와는 무관한 회사가 되면서 한진그룹과 안 좋은 관계일 이유가 없게 되었다.


[1] 구 한진중공업 법인에서 물적분할한 날짜이다.[2] 상법상 본점[3] 1990년대 차정훈 회장이 전주에서 창업한 '신성건설'을 모태로 지속적인 M&A를 통해 성장한 기업 집단. 주요 회사로는 엠케이전자, 한국토지신탁, 동부건설, HJ중공업이 있다. HJ중공업의 모기업 동부건설 최대주주는 사모펀드 키스톤에코프라임인데, 키스톤에코프라임의 최대 투자자가 한국토지신탁이다. 지배구조는 차정훈-엠케이인베스트먼트-한국토지신탁-키스톤에코프라임-동부건설-HJ중공업으로 구성되어 있다.[4] 그룹에서 한진중공업이 분리되기 전인 2018년 5월 기준 재계 서열 56위.[5] 한진중공업 분리 이후에는 지주사 한진중공업홀딩스 아래 한일레저(골프장사업), 대륜E&S(도시가스공급업), 대륜발전, 별내에너지(발전전기업)를 지배하는 에너지 그룹으로 외형이 크게 축소되었다.[6] 1937년 초 박영철을 비롯한 4인의 민족자본가가 나서서 근대적인 조선소를 설립하려 했으나 순수한 조선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회사 설립이 어려워지자 그 당시 조선 연안 항로의 해운권을 독점하고 있던 조선우선(朝鮮郵船) 사장인 모리 벤지로(森辨治郞) 등 일본 자본가들을 어쩔 수 없이 주주로 참여시킨다. 이러한 사정은 일제강점기 하에 일본인들이 제반 권한을 독점했기 때문인데 조선중공업 역시 발기인 9명 중 한국인은 상업은행과 조선우선의 중역 2명 뿐이었고 발행한 60,000주의 주식 가운데 조선인 소유 지분은 총 5,000주로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하였다.[7] 아무래도 일본의 대표적인 전범기업 둘이서 합작하여 세워졌고 당연히 일본군의 배들을 만들기도 해서 전범기업으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8] 6.25 전쟁 당시에는 큰 역할을 했다. 조선소가 부산에 위치해 있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정부 역시 전시물자 수송에 필요한 선복(船腹)의 충당이 필요했으므로 조선업을 지원했다. 특히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든 1952년 말에는 부족한 선박의 확보와 노후 선박 대체를 목적으로 자금지원과 함께 조선산업 진흥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는데 이에 힘입어 대한조선공사는 해난복구선 대야호 준공(1951년), 미국 화물선 부르트호 수리(1952년), 영국 화물선 아이리스 칸트리호 수리(1952년), 미국 상선 파크벤저민호 수리(1953년), 준설선 제1용두호(1954년) 등의 사업을 완수했다.[9] 250톤급 어선 20척이다. 우리나라 선박 수출시대를 연 기념비적 사건[10] 총 6척이며 이 중 KOREA GALAXY호는 국내 최초 정유운반선이다. 국내 최초 1만톤급 이상의 대형선 수출 시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1] 원래 김종필 전 총리의 셋째 형 김종락이 소유했으나, 경영난으로 법정관리를 거쳐 1991년 한진그룹에 인수되었다. VLCC같은 대형 상선을 건조하지 않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의 상선과 군함 역사에 큰 역할을 한 회사이다.[12] 341B01~341B04편성[13] 351F03~351F16, 351F19~351F22편성 (351103~351203호 제외)[14] 철도차량을 제작하던 곳은 (구) 다대포공장으로, 2002년 부산교통공사 2000호대 전동차 2차분 제작을 마지막으로 철도차량 제작을 중단하고 이후 선박부품 제작용으로 활용되다가 2011년 철거 후 2017년 부지를 매각했다. 현재는 '다대마린시티'로 재개발될 예정[15] 동부건설과 에코프라임마린기업재무안정사모투자 합자회사가 각각 850억원씩 출자하고 NH PE·오퍼스 PE가 500억원을 출자해 설립된 회사.[16] 초도함인 울산함은 HD현대중공업에서 건조.[17] 윤영하급 고속함의 설계, 건조단계에서 HJ중공업이 힘든 시기를 보내는 사이 STX가 끼어든 적이 있었으나 초도함보다 더한 결함을 보인데다가 이를 무작정 쉴드치던 정옥근이라는 해군 역사상 희대의 똥별과의 검은 커넥션이 밝혀진 후 STX는 이미 정옥근이 발주해버린 인천급 호위함 3척을 끝으로 퇴출되면서 차기 고속정은 전량 HJ중공업에서 건조, 인도하고 있다.[18] 이전까지 메탄올 추진선 수주 및 건조 실적은 모두 HD현대 소속 조선소의 실적이었다.[19] 이 시기를 상세하게 다룬 연구서로 남화숙 워싱턴대학교 교수의 <<배 만들기 나라 만들기>>가 있다.[20]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71년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한 여성 용접공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 단지 1971년 입사한 여성을 포함하여 누가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인지 자료나 증언이 확실하지 않아 김 씨가 언론을 통해 임의로 본인을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지난 2020년 11월 8일 방영된 KBS 교양프로그램 다큐멘터리 3일 '굳세어라! 그 시절 여자 기술자' 편에 대한조선공사에서 용접공으로 근무했던 황순란 씨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황 씨는 20년 근속 공로패를 보여주는데 입사한 해를 역산해 보면 김 씨가 입사한 1981년으로 같은 해 인데다 심지어 입사일조차 김 씨보다 한참 빠르다. 황순란 씨가 본인을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이라 소개하지 않는 이유도 입사 당시 이미 선배 여성 용접공들이 있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사실 조선중공업이 창립한 1937년부터 김 씨가 입사한 1981년까지 여성 용접공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조선업계에서는 6.25 전쟁 당시 남자들이 징집되어 여성들을 대체 용접공으로 투입했다는 설이 유력한데, 이러한 전후 사정에 비추어 보면 한국 최초의 여성 용접공은 해방으로 조선중공업이 대한조선공사로 바뀐 1945년부터 6.25 전쟁 전후인 1950년대 사이에 근무했던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21] 정은임 아나운서가 이 사건을 소개한 라디오 방송분이 있다.[22] 사건 자체는 노무현 취임 이전에 있었다.[23] 물론 그렇게 된다고 해도 저비용 항공사(제주항공, 티웨이 등..)나 외국 항공사를 이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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