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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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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상
2.1. 정치 사상
2.1.1. 영향 받은 학설들
2.2. 인종주의
2.2.1. 유색인종에 대해서
2.3. 아돌프 히틀러와 종교

1. 개요

아돌프 히틀러의 사상에 대해서 서술한 문서.

2.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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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 14일 타임지
아돌프 히틀러의 사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유럽은 멸망하리라"는 식의 염세주의[1], 변질된 니체주의에 입각한 우생학인종주의, 사회진화론과 독일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기반한다.

거대한 영향력에 비하자면 사상 체계는 빈약하고 체계성이 없어 상호모순적인 측면도 많았다. 나의 투쟁 출판 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책과 모순된 정책으로 비웃음을 샀다[2]. 심지어는 나치즘의 이론조차 히틀러가 세운 게 아니고 그레고어 슈트라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등이 세웠는데, 슈트라서는 장검의 밤 때 숙청당했으며, 로젠베르크는 시온 의정서 따위의 음모론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히틀러를 논할 때는 정치, 인종 사상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편의상 이하는 별도로 다룬다.

2.1. 정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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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 Volk - ein Reich -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 하나의 국가 - 하나의 지도자!
히틀러는 감옥 안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히틀러의 세계관이 분명하고 광범위하게 담긴 이 책은 1945년까지 독일 안에서만 1천만 권이 팔렸다. 《나의 투쟁》에는 히틀러의 정치적 신조, 세계관, 사명감, 전망, 장기적 목표가 모두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 신화의 토대가 거기서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이 책에서 자신을 도탄에 빠진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불세출의 지도자로 그렸다.

《나의 투쟁》을 읽으면 히틀러가 1920년대 중반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간파할 수 있다. 그 무렵 히틀러는 역사와 세상의 모든 악을 완벽하게 규명하고 그 극복 방안까지 알려주는 철학을 개발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우월한 아리아인이 기생충 같은 열등한 유대인에게 시달리고 피해를 입는, 선과 악의 인종 투쟁으로 역사를 보았다. “인종 문제는 세계사는 물론 인간의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히틀러는 주장했다. 나치 운동의 사명은 오직 하나, ‘유대 볼셰비즘’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단숨에 논리가 비약해서 그래야만 독일 민족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데 필요한 생존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서 노골적인 제국주의 침탈을 정당화했다. 히틀러는 이 생각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세월이 흘러도 바탕은 달라지지 않았다. 메시아를 방불케 하는 하나의 ‘이념’에 대한 비타협적 몰입, 단순하고 수미일관하고 포괄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신념 체계는 히틀러에게 의지력과 운명에 대한 주인 의식을 심어주었고 히틀러와 접한 사람들은 누구나 거기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히틀러는 넘치는 자기 확신을 강하게 표현할 줄 알았고 주변 사람들은 자연히 거기서 권위를 느꼈다. 모든 것은 흑백으로, 승리가 아니면 완전한 파멸로 그려졌다.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
히틀러 1권 7장 카리스마(366쪽)
아돌프 히틀러는 1차 대전의 패전은 독일인들이 '인류 문명의 수호'라는 슬로건을 내건 연합군을 이길 사상적 무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생학, 인종주의, 사회진화론 등 온갖 자극적인 소스를 무질서하게 혼합한 나치즘을 내세운다. 빈약한 사상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독일인들의 관념 깊숙히 파고들 수 있었다. 그가 주장했던 독일민족의 생존권 영역은 이미 독일 제2제국 시절부터 존재했던 독일 민족의 영역 확장 개념에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식의 사회진화론적 주장을 도용한 결과물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1905년에서 1914년까지 빈에서 보냈다. 이 시절은 '나의 투쟁' 초반부에 잘 나타난다. 아돌프 히틀러는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단순한 룸펜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각 정파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계에는 기독교,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대독일주의 세력이 주요 정파들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대중주의를, 기독교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반유대주의를, 대독일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독일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사해동포주의나, 기독교의 엘리트주의 등을 배격했다. 이렇게 각 정파에서 히틀러 자신의 구미가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해나갔다. 또한 거리의 부랑아 숙소에서 동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면서 화술 및 대중 장악력을 길렀다. 이 시절의 그를 기억한 한 부랑자가 나중에 이를 자랑스럽게 떠벌이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의 허무한 패배와 굴욕적인 조약으로 인한 국민적 분노는 아돌프 히틀러가 득세하는 토양이 되었다.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던 독일 제국의 패배는 일반 민중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물론 제1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독일인도 이미 전쟁수행능력이 바닥났음을 인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뒷공작으로 인해 부당한 패배를 당했다고 현실도피를 시작했다. 연합군이 독일 영토 내로 진격하기 전에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항복했다는 사실은 망상을 부채질했다. 때문에 전간기 독일인들에게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은 무너져버린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하고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인정함으로써 패전을 합리화시키는 그럴듯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윈스턴 처칠과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유럽과 세계를 지배할 야망과 "마스터 플랜"이 있다고 믿었다. 영국인 학자로, 1970년대 <2차대전의 기원>을 발표한 A.J.P. 테일러는 그 견해에 반대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유럽 정치환경과 연합국의 온정적인 정책과 기타 여러 삽질들이 겹쳐진 결과라고 본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뚜렷한 계획은 없었으며 세계의 정세를 잘 탄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이는 당대의 주류 의견과는 반대였기에 큰 반감을 샀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유력한 주장 중 하나로 꼽힌다.

"독일 민족"조차도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파괴도구"로 여겼다. 그리고 독일이 한계에 도달해 패배가 확정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자체와 함께 자폭하려 했다. 마지막 순간에도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도취적인 파멸의 미학에 빠져서 가능한 한 많은 인간과 문명이 자신과 함께 파멸하도록 모든 힘을 다했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 민족은 패배자니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면서 사회기반시설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네로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는 "독일 민족은 약한 걸로 판명되었어. 나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없어"라는 망언을 남겼다. 이는 그의 사상이 얼마나 사회진화론에 물들어 있는지 볼 수 있는 단적인 예다. 독일 민족은 전쟁에서 졌으니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불태우라고 했던 파리는 불타지 않았으며,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각종 전쟁 범죄 혐의가 있던 파리의 독일 주둔군 사령관 디트리히 폰 콜티츠가 되려 선한 사람으로 둔갑해서 각국의 도덕 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베를린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절친한 친구였던 알베르트 슈페어가 방어전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온존시켰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독일이 멸망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와 소련이 대립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동쪽에서 온 자들(소련)이 세계를 지배하리라고 예측했다. 서구권의 민주주의는 나약하여 소련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에 맞설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불안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20세기 전반 전 세계를 휩쓴 파시즘의 광풍도 종말을 고했고,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기나긴 냉전에 돌입한다. 그러나 절멸 전쟁이 남긴 참혹한 폐허와 홀로코스트는 양 진영 모두에게 나치즘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가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차별적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반성은 종전 이후 세계적으로 인종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급격히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독재/공포 정치가 사라지지 않았듯 인종주의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특이한 점으로 세습 군주제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가 되었지만 자신이 독일의 카이저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히틀러는 퓌러라는 직위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는데 그 이유도 이와 연관된다. 나의 투쟁에서는 군주제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 언급되어 있고, 이후의 발언 중에는 '세습하는 군주제의 군주란, 대부분 식료품 가게 하나 제대로 운영할 능력도 없는 자들'이라는 적나라한 비난도 있다. (1942년 3월의 어느 저녁식사 도중 발언)

아돌프 히틀러가 군주제에 반감을 가진 이유는 여러 가지다. 먼저 빌헬름 2세를 비롯한 제1차 세계 대전 패망 이전 독일 제국의 군주제 체제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히틀러는 고향인 오스트리아 특유의 다민족-다문화 체제를 매우 증오했는데, 바로 이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한 곳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였고 이 자체가 합스부르크의 중요한 정체성이기도 했다. 이것이 합스부르크 왕조를 포함한 군주제를 향한 반감으로 이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가문 인사들과 히틀러의 관계는 대단히 나빴는데 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표격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대놓고 반나치 저항 운동을 벌였다.

태생적 한계도 있을 수 있다. 자본가들도 그러한 모습이 있었으나 당시 귀족들은 당연히 비귀족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랜시스 골턴 등이 기여한 유럽의 우생학에서는 귀족들이 태생적으로 우월한 인간이었으며 특히 독일 귀족들은 귀족주의가 상당히 심했고 심지어 같은 나치여도 내심 히틀러와 같은 비귀족들을 멸시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히틀러는 자본가 계급에는 속할 수 있었어도 귀족 계급에는 속할 수 없어서 그런 인간들과 자주 대립하기도 했다.

2.1.1. 영향 받은 학설들

히틀러가 가장 존경하는 미국인으로 미국 포드의 창업주인 헨리 포드를 꼽았는데 <나의 투쟁>에 반영된 상당수의 유대인 비판이 헨리 포드가 쓴 《국제유대인》이라는 문헌과 똑같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예 포드의 주장을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다가 전부 베꼈다고 해도 될 정도다. 《국제유대인》의 한국어판도 나와있는데 읽어보면 나치의 유대인 비판 내용과 완전히 똑같은 대목이 대부분이다. 《국제유대인》은 포드가 1920년대에 배포한 4권의 반유대주의 책자인데 이 문헌에서 미국 유대인 재벌 제이콥 쉬프같은 인물이 국정실패의 탓을 유대인에게 전가하려고 유대인을 탄압하던 러시아 왕정을 무너트리기 위해 레닌트로츠키에게 러시아 혁명 자금을 지원한 사실 등을 비난하며 유대인-공산주의자의 커넥션을 고발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한데, 포드는 제조업의 아버지로서 미국의 유대계 금융업자들의 이같은 행태에 상당히 불만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의 문제점들을 대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헨리 포드는 히틀러에게 선거 자금으로 쓰라며 7만 달러를 지원할 만큼 나치독일에 우호적이었고 그 답례로 나치로부터 독일 정부가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의 훈장인 독일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실제로 제이콥 쉬프같은 유대 재벌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제국에 자금을 지원하고 메이지 천황을 알현했고 일본 천황은 차관 제공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3] 물론 그 포드도 소련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며 소련의 경제성장과 군비확장에 도움이 된 인물이라는 것은 함정이기는 하다. 아르투어 딘터는 아리안인과 타인종의 결혼을 반대하며 인종의 순수성 보존을 주장했던 사상가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실하다. 아르투어 딘터는 1925년부터 나치당 튀링겐 대관구장을 지냈다가 "나치당 안에 입법부를 만들자!"고 아돌프 히틀러의 권위에 홀로 도전하다 1928년 쫓겨난다.

루돌프 헤스의 스승이었던 하우스호퍼 교수의 게르만족의 동부생활권(레반스라움)도 《나의 투쟁》에서 차용했다.

당대 독일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힌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의 《19세기 독일사》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읽진 않았어도 당시 유행했던 사조로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슈펭글러의 다른 저서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1920년)에서는 민족 전체가 독재자 아래 일치 단결하는 초계급적 민족사회주의가 제창된다.

보수혁명론자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Moeller van den Bruck)는 낡은 것이 젊은 것에 패하는 것은 이치라며 독일의 패전을 합리화했고, 그의 저서 제3제국(Das Dritte Reich, 1923)에서 낡은 독일은 보수혁명을 통해 서구의 자본주의와 러시아의 공산주의 같은 외세의 이념에 대항하고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권위주의적인 "민족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 통치되는 "제3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나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졌다.

2.2. 인종주의

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처음에는 반자본주의적 색깔을 띠다가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유대인을 소련 및 공산주의자들과 연결하는 쪽으로 바뀐다. 자본주의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주장을 버리고 공산주의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쪽으로 말을 바꿔 탄 것은 아니었다. 증오에 사로잡힌 히틀러의 머리에서 둘은 공존했다. 그렇게 지독한 증오는 공포심이 없다면 생겨날 수가 없었다. 국제 금융 자본과 소련 공산주의를 모두 조정할 수 있는 막강한 집단을 상상했을 때 느껴지는 적대감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도 감당하기 벅찰 만큼 강력한 '유대인의 세계 음모'가 있다는 고정관념이었다.
히틀러 1권 (p. 368)
히틀러는 권좌에 오르기 전부터 죽는 순간까지 '유대-볼셰비즘'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 지금으로선 우습지만 당시 우익 진영에선 유대적이란 말과 볼셰비즘이 동일한 개념으로 통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고립과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유대인과 연관지어 독일인의 증오를 유발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양면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공격을 결심한 이유도,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비이성적인 증오가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소련의 고위직에는 몰로토프 이전 외무장관이었던 막심 리트비노프 등 유대인도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스탈린은 유대인을 배려하지는 않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 받는 탄압 이상의 차별도 없었다. 스탈린이 필요 이상으로 유대인을 숙청하고 탄압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이스라엘 독립 이후다. 때문에 그의 관점에서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거치면 소련은 '유대인'과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악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국가였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이 아닌 인종 투쟁이라고 주장했는데, 그는 인종성을 순종으로 유지하지 않고 잡종이 돼버린다면 그 민족은 망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흑인이 독일말을 배우고 독일말에 익숙해졌다해도 독일인이 될 수도 없고 유대인들도 기독교로 개종해도 절대 독일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독일말을 잊어버리고 200년 전 러시아로 이주한[4]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독일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구분이 문화나 언어가 아닌 인종이다. 민족성 강조도 인종주의에 기반한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는 1차 세계대전 전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가톨릭 교육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그가 살던 빈 내 과격파들의 유대인 척결론,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독일 내 부각되었던 여론을 따랐던 것이 가장 크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반유대주의 성향은 1905년에서 1914까지 빈에서 지냈던 시절부터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의 시장은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전신인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의 창당자 카를 루에거(Karl Lueger)[5]라는 반유대주의자로 1897~1910년까지 빈의 시장으로 재임했다. 열성 가톨릭 신도로 우파성향의 정치인이었지만 사회복지와 연방주의도 같이 주창해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루에게를 좌익으로 생각하고 2년이나 임명을 거부한 전력도 있다.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는 유명한 어록이 있는데, 이는 빈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안심시키고 혹은 냅두고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내려온 코가 크고 검은 머리에 독일어를 못하고 튀는 외모의 유대인들만 탄압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는 연설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며 인기를 얻었다.[6] 나의 투쟁에 따르면 당시 히틀러는 남는 시간을 "독서"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가 읽는 책들은 주로 인종주의적인 팜플렛이거나 혹은 과격한 정치단체의 선전물들이었다. 이때부터 그가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이를 두고 히틀러 전기작가 이언 커쇼는 "뮌헨에서도 그랬고 빈에서도 그랬고 히틀러에게 독서란 깨닫거나 배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선입견을 다지는 수단이었다"고 촌평했을 정도다.

반유대주의는 이 시대 유럽의 보편적인 감정이었다. 오히려 히틀러가 살던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

반유대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도 상당했다. 드레퓌스 사건만 봐도 당대 서유럽의 반유대주의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가톨릭 교회의 세가 강한 남유럽, 이탈리아, 스페인은 더 심했다. 끝판대장격은 러시아 제국으로 조직적인 유대인 탄압과 학살(일명 포그롬)을 펼쳤다. 폴란드발트 3국도 러시아와 사정이 비슷했다. 차르 시대에 대한 반감과 빈부격차 등 사회모순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선동꾼들도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반유대교육을 실시했으며 정부는 이를 방조했다. 게토 지역에는 살인, 약탈, 강간, 방화 등이 빈번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탄압이 적은 다민족 다언어 국가인 오스트리아로 많이 이주했다. 이주 유대인들은 빈의 골목 지역에 주로 살았는데,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 수준과 언어 장벽 때문에 뒷골목에서 매춘, 소매치기, 구걸 등으로 연명하는 하층민들이 증가한다. 이들이 유대인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으며, 반유대주의 선동까지 더해져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유대인은 부유하다는 편견 때문에 당시의 상황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도 부유한 사람은 소수다. 서방 금융권에서 유대계의 비율이 높긴 하나 그 수많은 유대인 인구가 다 금융계의 거물들일 리 만무하다. 미국 뉴욕에만 해도 유대인 마을은 브루클린에 있다. 브루클린은 개발되고 치안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가난한 동네였다. 청나라가 개막장일 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세운 차이나타운과 아일랜드가 감자대기근을 겪을 때 이주해 온 이들이 세운 헬스키친도 위치는 맨하탄에 있다. 부유한 사람은 해외로 이주하는 등 발빠르게 행동했으며, 그들 중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자들도 최후에 그 자리에 갔다. 언제나처럼 가난한 자들이 먼저였다.

'헤르만 뢴스', '디터 에크하르트', '빌헬름 폰 폴렌츠' 등은 반유대적인 농민소설을 쓴 작가다. 이들은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자, 가축상인, 중개인 등으로 묘사했다. 20세기 초반 40쇄를 찍을 정도로 엄청나게 팔린 '테오도어 프리치'의 <반 유대주의 문답서>는 후에 나치에서 위대한 교사라 칭할 정도였다. 이런 작품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독서 취향이었다.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은 1916년 독일에 귀화한 영국인이다. 영국 해군제독의 아들로 태어났고 영국 육군원수 네벨 체임벌린의 조카뻘이 된다. 반유대주의자 프랑스인 고비노 백작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의 사위가 된다. 그는 게르만빠로 반유대주의자였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1927년 체임벌린이 임종시엔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손에 입을 맞춰줄 정도였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어 아버지와의 불화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가 유난히 유태인을 싫어했을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일부에선 어렸을 때 유태인에게 강간당했다느니, 혹은 어머니가 유대인과 바람을 피웠느니 아버지가 실은 유태인이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를 못 살게 굴었다느니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다.

반유대주의는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유럽에 보편적인 정서였다. 히틀러도 독자적인 반유대주의를 창시했다기보다는, 수천년동안 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주로 금융업과 보석세공업에 종사하며 여기저기 이주하였던 유대인들이 돈줄을 쥐고 유럽 도시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금융자본주의 담론은 이미 18세기부터 어느 정도의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노숙자로 살던 시절에 주로 거래하던 화상(畵商)이 유대인이었고, 어머니를 돌보던 의사 에두아르트 블로흐도 유태인이었으며[7], 심지어 이후 겪게 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우 중에 유대인이 있었으나, 그와 사이는 특별히 나쁘지 않았으며, 거기다 그때 받았고 이후 그가 평생 자랑하던 철십자 훈장을 주도록 추천해줬다는 설의 주인공이자,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후고 구트만도 유대인이었다. 후고 구트만 역시 아돌프 히틀러 집권한 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적이 있으나 부대 전우들의 청원으로 석방되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즉, 히틀러 역시 자신과 아는 유대인들에게는 잔혹하게 대우하기는 커녕 인간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었던것이었다. 진짜인지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빈으로 상경하기 전엔 유대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물론 이는 사실은 아니다. 히틀러의 학교 동창 증언으론 빈으로 상경하기 전에 이미 반유대주의에 빠져있었고 린츠와 아돌프 히틀러가 다닌 학교에서도 유대인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언 커쇼의 연구 등을 종합해본다면 빈 상경 이전~빈 체류 시절에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에 어느 정도 빠져 있긴 했지만 당시 유럽 전반에 유행하던 반유대주의의 흐름을 고려할 때는 특출나진 않은 편이었다.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유대인에 대한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거나 멘델스존을 비롯한 유대인 예술가들을 호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유럽과 소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슬라브 민족은 게르만 민족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히틀러는 '인종적 검사'를 통해 '가치'가 판명된 슬라브인들에 한해 간단한 셈법과 교통 표지판을 알아볼 정도의 기초적인 교육만 시켜서 독일인들의 노예로 부려먹고, 나머지는 우랄산맥 밖으로 추방하며 굶어죽든말든 개의치 않겠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볼 인세지옥이 실현된다. 막상 독소전이 개시되고 아리안인의 후손들이 동장군에 고생하자 나약함을 질타하고 열등했다고 주장했던 슬라브인들의 "인종적 강인함"을 찬양하는 등 오락가락 맛탱이가 갔다.

다만 나치당 내부에 슬라브계 간부들도 있었다. 나치당 교육부장이었던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러시아계 피가 섞인 발트 독일인이었고, 바르샤바 봉기에서 봉기 진압을 맡은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는 폴란드계였다. 200만 유대인을 가스실에서 학살한 오딜로 글로보츠닉은 슬로바키아계였으며, 나치당 인원은 아니었지만 히틀러 밑에서 싸웠던 독일 국방군의 원수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혈통이 섞여 있었다.

반면 서유럽북유럽에서는 그나마 온정적이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영국에 '저런 하등한 인종 돕는다고 서로 싸우지 말고 우월한 우리들끼리 잘 살아보자'며 화해 의사를 피력했다. 물론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이를 거절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또한 북유럽에 속하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벨기에플란데런 지역은 인종적 가치가 독일 민족과도 비슷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한때 독일계 민족국가의 영토였던 벨기에의 오이펜-말메디,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19세기 독일 연방에 속했던 룩셈부르크 지역의 거주자들은 조부모 중 두 명 이상의 혈통이 확인되면 '명예 아리아인' 인증을 했다. 독일군 입대시 독일 국적도 부여했다.

물론 히틀러의 모든 논리는 독일인은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다른 민족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일 민족과 얼마나 많은 유사점을 가졌는가"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일례로 프랑스는 골 족과 게르만 족의 피가 섞인데다 라틴 민족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만큼 더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요아힘 C. 페스트는 자신의 저서 《몰락》(한국판: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14일)에서 구체적인 사상은 존재치 않고 오직 파괴와 증오만 존재하였다고 간략하게 그의 사상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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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
킴벌리 코니시는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라는 서적을 발표한다. 여기서 린츠에서 자랄 때 학생 시절의 유대인 급우이자 훗날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충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다만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는 같은 학교 동기라는 외에는 충돌할 지점이 적었다. 실제 학교만 같지 학년은 달랐다.

2.2.1. 유색인종에 대해서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론에 따르면 다른 민족들은 아리안과 유대인 사이에 위치한다. 그 당시 서양의 흔한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백인은 다른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에 따르면 아리안은 인류 문명의 모든 가치있는 것을 만들고 발전시켜 나갔으며, 다른 민족들은 아리안인을 뒤쫓기 바빴으며 유대인은 문명을 파괴하기에 바빴다는 설명이다.

"아리아인의 문화가 없다면 일본이나 중국은 다시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며 동양인보다 아리아인이 위대하다는 걸 확실히 해두기는 했지만 일본과 추축 동맹을 맺은 후엔 재독 일본인들을 명예 아리아인이라 선포하고, 심지어는 여러 번 동양과 접촉하고 나서는 "아시아인의 고대 문명이 우리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믿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 말은 그의 본심이 아닌 어디까지나 동맹인 일본을 위한 외교적 발언이었다. 오히려 실제론 전쟁 중에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곤 매우 아쉬워했다. 영국이 자신들과 동맹만 맺었어도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면서 독일이 전유럽을 제패해나가자 일본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일본 교과서 만큼이나 엄청나게 인쇄되며 팔려나갔다. 일본인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으며 감명받고 일본도 독일처럼 행동해서 아시아를 정복하고 미국과 영국을 밀어내야한다고 주장하며 궐기대회까지 열며 아돌프 히틀러 본받기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판매된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일본인에 대한 아돌프 히틀러 본인 스스로도 이불킥적인 안 좋은 이야기가 검열된 후반본 책이다. 다음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일본 번역판에서 검열된 초반본 부분이다. 이 검열 부분은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도 언급된다. #
일본인은 미개하고 추악하지만, 서구문명이라는 빛을 얻음으로써 일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빛이 없으면 그림자 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인종이다.
스스로의 창작성이 부족한 열등한 인종이다.
하지만 손재주가 좋고 일처리가 빠르니 독일의 하인으로 이용하기에는 좋다.
독일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의 단계적 계획이론의 4단계 상황, 즉 독일 민족의 위대한 독일 제국이 해외에서 세계제국 건설에 나서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제국 독일과 동맹국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돌프 히틀러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일본 양국이 내렸던 중요한 결정들을 보면, 양국의 불신이 극명했다. 애초에 동맹을 맺기 전 중일전쟁 때는 중국에 무기를 계속 수출하고 전쟁 고문들도 계속해서 파견해 일본군이 독일제 무기와 독일의 고급 인력들을 상대하면서 궤멸해 가는 일본군의 상황이 연출됐고 동맹 채택도 중국 or 일본 중에 꽤나 고민했다. 또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 침공 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을 일본에 비밀로 했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 된 진주만 기습 결정에 대해서 독일에 알리지 않았다.

1942년 1월 18일에 독일-일본 양국이 비밀 군사회담을 통해서, 시베리아와 인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동경 70도를 기점으로 동반구에서의 각자의 작전반경을 나누었지만, 베를린과 도쿄는 어떤 군사 협정도 체결하지 않았다. 두 추축국은 보급상의 난관을 무시하고, 인도양 일대를 공동 작전지역으로 설정했다.

양국간의 군사 협력이 구체화되지 않은 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일본이 무지막지하게 태평양과 유럽의 식민지들을 강탈하고 여러 가지 성범죄나 학살같은 전쟁범죄에 대해서 일본을 견제할 생각이 있었다는 추정이다. 이와 관련해서 폰 하셀(von Hassell)이 일본이 싱가폴을 함락시킨 직후인 1942년 3월 22일에 적은 일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의 엄청난 성공에 크게 열정적이지 않았고, 그는 영국이 그 일본 황인종을 격퇴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 영국에게 20개 사단을 기꺼이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Milan Hauner, Did Hitler Want a World Dominion? 중
그러나 흑인종에 대해서는 그때 당시의 온 유럽이 좋게 생각하지 않았듯이 비슷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나치 독일 내에서 흑인들 또한 이런저런 못볼 꼴을 많이 당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이 나오고 있다. 특히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라인란트 지방이 벨기에, 프랑스군에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군 중에 식민지 출신 흑인 부대(외인부대)도 주둔했고, 그 흑인 프랑스군과 독일 여성 사이에서 500여 명의 아이가 생겨났다. 이들은 "라인란트 사생아(Rhineland Bastard)"라고 불리웠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불임 수술을 통해 이들을 사실상 멸종시켰다.

당시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매우 저 아래'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깔려있던 시기라서 굳이 흑인을 타겟으로 잡고 사냥해봐야 별다른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나치즘은 반서방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니 그들과 차별화하려는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흑인에 대한 처분은 유대인처럼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서방열강들처럼 마구 탄압하던 것도 아닌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당시 유럽의 유색인종(흑인, 황인 등)은 식민지를 통해서 유입되었으나, 독일은 식민지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색 인종이 적은 편이었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 당시 독일 본토에 살고 있던 흑인의 수는 25,000명 정도로 전체 인구 6,500만 중 0.04%에 불과했다. 이렇게 유색인이 적다보니 유색인의 존재감은 독일 내에서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스 또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고 나치당에서도 확고한 정책 기준이 없었다.

다른 서구권 지도자들에 비해 유색인종을 우호적으로 대접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는데, 이는 특히 나치 독일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거나 반서방적인 인물들이 조직적으로 유포하는 왜곡 정보이다. 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손기정제시 오언스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거나, 태국 국왕 라마 8세 아난타 마히돈이 독일에 오자 직접 공항까지 가서 마주한 것, 그리고 1938년 네팔 국왕에게 차를 선물한 것 등이다. 또 중동의 국가원수들과 회담을 하고 슬라브계인 크로아티아불가리아와도 우호적으로 지냈다는 식이다.

개별적으로 이 일화들은 사실이긴 하나 매우 지엽적인 사례일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히틀러가 수천만의 유대인과 러시아인, 집시 등의 타 인종을 전례없이 대량학살한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 히틀러가 손기정과 오언스와 악수를 나눈 것은 세계의 이목이 쏠리는 공식 석상에서 기본적인 예의를 갖춘 것일 뿐이다. 당시는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며 선전의 대가인 히틀러는 세계에 독일의 번영을 보여주기 위해 베를린 올림픽을 매우 공들여 준비했다. 심지어 올림픽을 위해 나치즘 사상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유대인 탄압까지도 일시적으로 중지하기까지 했던[8] 그가 유색인종 국가대표 선수와 '악수'한 단편적인 사례가 그리 큰 의미를 가질 리 없다. 라마 8세를 마중나온 것 등 또한 그저 일국의 국가원수로서 외국 국가원수를 접견하며 외교 의례를 지킨 것 뿐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개 당수 시절부터 독일 총통으로 다른 나라들에 대한 침략 전쟁을 벌일 때까지 상대방을 기만함으로 일종의 뒷통수를 쳐서 그 자리까지 올라왔다. 즉 상대방을 현재 상황에 맞게 이용해 먹은 것 뿐, 나치가 진짜 견제할 국가 없이 세계 패권을 쥔다면 어떻게 변했을 지 알 수 없다. 소련과도 불가침조약 이후부터 독소전쟁 이전까진 상호 비난의 수위가 크게 줄어들고 경제협력도 크게 늘리는 등 훈훈한 듯한 분위기가 오갔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히틀러는 뮌헨 협정 시기까지는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없을 것이라 단언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치적으로 필요했었다면 인종을 떠나서 이용하는 것을 전혀 꺼리지 않았다.

또한 히틀러가 1940년 유색인종을 잡아와서 동물원에 넣어 공개적으로 전시하는 이른바 '인간 동물원'에 대한 폐지 명령을 내렸다는 정보 역시 퍼져 있다. 그러나 이 정보는 단 하나의 신뢰할 수 없는 출처 외에는 나오지 않는 정보이다. 독일 사회에서는 이 소문에 대하여 의구심을 표한다. 반대로 하나 확실한 것은 흑인들과 집시들 역시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뉘른베르크 인종법의 절멸 대상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인의 경우에도 역시 광의의 측면에서 뉘른베르크 법의 대상이었으나, 나치는 일본과의 동맹 관계를 감안하여 일본인과 독일인의 결혼을 뉘른베르크법으로 처벌하는 것을 보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이 알지 못하는 독일 정계 내에서는 '인종적 오염'을 막기 위해 일본인들과 독일인들의 결합을 장기적으로 불허해야 한다는 논의가 꾸준히 이어졌다. 히틀러 역시 외교 문제 때문에 일본인들에 대한 차별 정책을 보류하였으나 근본적으로 그들과 독일인들은 동등한 존재가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이는 후루야 하루미 시데하라가 논문 <Nazi Racism Toward the Japanese>에서 밝힌 바이다. 따라서 히틀러가 일본인을 예외로 둔 것은 그가 이데올로기적으로 일본인이 우수인종이라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일본과 동맹을 결성했다는 현실정치(Realpolitik)적 상황 때문에 그들을 절멸수용소에 집어넣지 못했을 뿐이다.

대조되는 사례가 바로 재독 중국인들이다. 중화민국의 경우 1938년까지 독일과 정치적 동맹 관계에 있었기에[9] 양국 간에 우호적인 인적 교류가 이어졌다. 그러나 곧 독일이 중국 대신 일본을 파트너로 선택하면서 재독 중국인들은 동맹국 시민에서 박해의 대상으로 굴러떨어졌다. 1941년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며 일본이 본격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가담하자 중국인들은 일본인들과 달리 게슈타포에 체포되었다. 그들은 다른 정치범이나 유대인들과 함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노역을 당하다 최후를 맞았다. 만일 나치 독일이 중국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일본과 동맹을 맺지 않았다면, 강제수용소로 보내지는 것은 재독 중국인들이 아니라 재독 일본인들과 역시 일본 국적으로 분류되던 재독 한국인들이었을 것이다.

2.3. 아돌프 히틀러와 종교

일단 명목상으로는 가톨릭에서 세례성사(유아세례)를 받았으나, 부모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는 성체성사고해성사에 단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다.[10] 사실상 냉담자로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1931년, 나치 지도층 전체가 교황청으로부터 파문 선고를 받으면서 히틀러의 교적도 파문 처리 되었다. 그 후 사망할 때까지 공식적으로 종교를 가지지 않고 무종교 상태를 유지했다.

일부 기독교인들과 유신론자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무신론자이자 반종교주의자라고 주장하고, 일부 반신론자와 반종교주의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한편 일부 반가톨릭적 개신교인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독실한 가톨릭이라서 디트리히 본회퍼 등의 개신교인들을 탄압했다고 주장하고[11] 가톨릭 일각에서는 히틀러가 개신교인이라고 주장하는 등, 사실상 모든 진영에서 히틀러가 상대편에 속한다고 주장하며 상대를 깎아내리려고 하고 있다. 사실 히틀러는 지하디스트나 십자군들마냥 악행을 저지르면서 종교나 반종교 자체를 그 명분으로 내세운 적은 없으니 히틀러의 종교관이 무신론이나 유신론을 깎아내리는 근거가 될 수는 없지만, 히틀러의 종교관이 흥미로운 떡밥인 것은 사실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기독교를 긍정하는 모습을 보였다.[12] 그리고 연설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나 이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당시 80%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 우파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무신론=볼셰비즘으로 낙인 찍던 시대이다. 세속화가 상당히 진행된 21세기 유럽에서도 종교 문제에 언급을 피하는 정도면 모를까 무신론자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국가원수급 정치인은 매우 드물며[13], 종교의 영향력이 더 강한 미국에서는 공식적 무신론자인 국회의원은 한 기수에 1명 나올까말까한 정도로 무슬림 의원들보다도 드물다.

아돌프 히틀러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 같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고, "기독교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기독교를 정치적으로도 자주 써먹었다. 당시엔 "무신론 = 공산주의"라는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였으니 무신론자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도 당연히 서슴치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위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인지, 다른 종교인인지, 무신론자인지 알 수 없지만, 다음은 아돌프 히틀러가 어떻게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 보여주는 문구이다.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특별히 각자 자기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단지 피상적으로 신의 뜻을 얘기하는 것을 중단하게 하고 실제로 신의 뜻을 실행하게 하여 신의 말씀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만들 성스러운 의무를 지닌다. 왜냐하면 신의 말씀은 인간에게 그 형체와 정수와 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의 작업을 파괴하는 자는 주님의 피조물, 그 성스러운 의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일깨워, 원한다면 각자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이 누구든 그 활동에 있어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의 종교적인 공동체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것을 일차적이고 가장 성스러운 의무로 삼게 하라.
(중략)
따라서 오늘 나는 전능하신 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유대인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랄프 만하임(Ralph Manheim)[14] 영역, 먼소류[15] 한국어 역
이것저것 길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론만 따지고 말하면, 자신의 반유대주의가 종교(혹은 신의 의지)에 의해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퓌러께서는 최종 해결책의 임무를 맡은 자들에게 살해가 가능한 한 인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알렸다. 이것은 해충으로 가득한 세상을 정화하라는 신의 명령에 봉사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과도 일치했다. 로마 교회의 계급을 혐오하면서도 여전히 로마 교회의 평판 좋은 회원인 그는 유대인이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는 그들의 가르침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말살 정책은 따라서 비개인적으로 잔인하지 않게 행해지는 한은 그가 단지 신의 복수의 손으로서 행동하는 것이었으므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John Toland (Pulitzer Prize winner), from "Adolf Hitler", pp 507, talking about the Autumn of 1941.
이것도 마찬가지. 아돌프 히틀러는 세간의 비난을 받기 쉬운 학살을 정당화 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인들은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고 매도했고, 그 매도를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의 기록이다. 유대인을 예수를 살해한 자라고 비난한 건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히틀러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많은 발언을 남기기도 하였다. 1941년에 그는 나치 중위들에게 “기독교적 세계관과 게르만 영웅적 세계관 사이에는 풀 수 없는 모순이 있다. 그러나 이 모순은 전쟁 중에는 해결할 수 없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나서야 한다.”라고 발언을 하며 전후 기독교의 체계적인 말살을 암시하는 듯한 발언을 남겼다.

또 나치 신문 편집자였던 한스 지글러에게 히틀러는 "당신은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비종교적이다. 나는 그것을 비기독교인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라고 발언하기도 하였다.

히틀러가 무신론자였다는 증언도 있다.오토 슈트라서와 히틀러의 친구 에른스트 한프슈팅글은 히틀러가 무신론자였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정치세계에서 무신론자임을 드러내는 건 정치적으로 큰 리스크였고, 이 둘은 히틀러와 후에 척을 진 인물들이기에 그의 이미지를 깍아먹기 위해서 과장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히틀러의 예수에 대한 이해는 굉장히 괴상했는데, 그는 예수를 유대인과 맞서 싸운 아리아인이라는 시각을 가졌다. 실제로 1921년 4월 연설에서 히틀러는 예수를 금발벽안이라고 주장했으며, 1922년 11월의 연설에서는 예수를 게르만인이라고 주장했다. 또 히틀러의 측근 오토 바게너에 따르면 히틀러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시신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무덤에서 고의로 숨겨졌다고 발언하여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예수의 부활에 대해서 부정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어릴 적 가톨릭 세례를 받아 기독교인이었으며 유럽의 보편적인 기독교 문화에 대놓고 반대하지 않았고 좀 불만이 있었어도 독일 민족이 2000년 동안 기독교에 동화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봤다. 힘러처럼 대놓고 반기독교적 성향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즉,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가톨릭 신도는 아니었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적어도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자주 보여줬다. 연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쓰는 네덜란드식 감사 기도[16]라며 공식석상에선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측근과의 대화에서나 1927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나치당 강령을 두고 회의 시엔 "당 강령은 안 바꾼다. 성경은 모순 덩어리지만 기독교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라고 못박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수많은 성직자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을 틀려먹은 종교(Wrong Religion)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개신교의 경우에는 가톨릭에 비해서는 덜 한편이기는 하였으나 반나치 성향 고백 교회 목사들 700명을 게슈타포가 체포해서 수용소로 보내기도 한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거슬리지 않는 경우에 한정된 이야기로 보인다. 가톨릭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 나치당 내의 개신교도를 억압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였고, 심지어 나치와 개신교의 충돌을 막고자 "게르만 기독교 신앙운동"을 열기도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다른 점이 독립된 종파이며 중앙 조직이 없다는 점인데 가장 크게 반발했던 부분이다. 세례받은 유대인을 탄압하거나 서로 다른 개신교 종파를 억지로 "독일 민족 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서 국가에서 관리하고자 할 땐 개신교계에서도 크게 반발했다. 이는 독일 개신교 내에서 반나치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 고백교회를 이끌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다.

또한 다른 나치 추종자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고 본다면 돌격대친위대는 가톨릭 사제들을 "로마의 첩자", "남색집단"이라고 폄하했고 괴벨스는 가톨릭 사제들을 가리켜 "검은 무뢰한들"이 동성애적 성향으로 독일 청소년들에 성적인 폭력을 동반한 악영향을 끼친다고 비난했으며, 힘러아넨에르베는 신비주의와 실체도 없는 게르만 민족종교나 찾아다니는 등 반유대-반기독교성향이 뚜렷했고 총통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은 "국가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당한 인종학자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독일이 살아남으려면 십자가가 떨어져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괴벨스도 가톨릭 장학금만 먹튀하고 신앙은 일찍 버렸다.[17]

평전 작가 이안 커쇼는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의지와 운명만을 믿었다고 평가했고 아돌프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한 <독재자들(Dictators)>을 저술한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아돌프 히틀러는 교회를 파괴하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점에서 판단으로 독재체제 내에서만 허용되었다"라고 평가한다. 종국에는 소련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는 종교와 양립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돌프 히틀러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힘러와의 사적 대화에선 "기독교 교리는 과학이 진보하기 전에 낡아버렸다."라고 평가했다. 독일이 기독교 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어서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적극적인 탄압은 없었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 및 독일 개신교 교단의 성향상 나치의 종교 정책에 대체로 순응했으며 반나치 성향의 고백교회를 제외하고 적극 이용당하고 소극적으로나마 협력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교도라는 주장도 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이교, 즉 게르만족의 전통 믿음인 북유럽 신화에 관심을 보이고 독일의 신앙을 기독교에서 이교로 갈아치우려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실제로 나치는 크리스마스 때 산타가 아니라 오딘이 선물을 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혹은 예수의 출신을 북유럽의 영웅으로 조작했고 이에 반대하는 성직자들을 제거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나치 고관들인 루돌프 헤스하인리히 힘러와는 달리 신비주의적이나 이교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헤스나 힘러는 기독교 이전 시대의 아리안족 고유신앙을 재구성한답시고 문자가 새겨진 비문들을 수집하거나 인도나 페르시아의 고대 종교들을 연구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오히려 이러한 행동들을 비웃었다. 실제로 힘러가 1938년에 "아리아인의 뿌리를 찾겠다."라며 친위대원들로 탐사대를 꾸려서 티베트로 보낸 적이 있는데 이게 아돌프 히틀러 귀에 들어가자 예산을 함부로 낭비했다는 일갈이나 들어야했다. 슈페어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리안 드립은 쳤지만 고고학적 발견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엄청난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유물로는 돌도끼 같은 것이나 발굴되면 쪽팔리니까 그만두자는 것이었다. 힘러와 후에 나치 내에서도 정신상태가 맛이 갔다고 여겨지던 루돌프 헤스는 프리메이슨과 가톨릭 예수회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국제 유대인 조직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힘러의 친위대에선 휴스턴 체임벌린의 영향을 받아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아인이었다는 주장까지 펼쳤다.

나치당이 집권한 후엔 심지어 일본신토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혼들을 숭배하는 위대한 종교라고 추켜올리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공자석가모니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역시 해석은 제멋대로에 엉망이라서 인도에 자리잡았던 아리아인들은 북부 독일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세웠던 지배인종이며 샤캬족도 그들의 후손이라는 개드립이나 치는 수준이었다. 이슬람이 진정한 아리안의 신앙인데 망할 카롤루스 대제가 이슬람의 북상을 저지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가 모국의 종교로 자리잡게 됐다."라는 발언을 했다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18]
내가 유일하게 존중해주는 종교는 이슬람이며,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지자는 무함마드이다.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는 위 발언처럼 이슬람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발언도 하였다.[19]

물론 일본의 신토 관련으로 발언한 것과 같이, 이 또한 외교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남긴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대전이 진행되면서 독일은 예루살렘의 大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 휘하의 팔레스타인계 아랍 민병대들을 꼬셔다 반영 반란을 부추기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슈페어에게 "아랍인들은 아리아인들보다 한 수 아래다"라는 발언을 직접 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히틀러가 그러면서도 아랍인들의 일사불란한 군사 문화에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는 게 슈페어의 회상이었다. 실제로 힘러에게도 친위대 내부에 무슬림 분과를 마련해놓으라고 했다는 증언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 예수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목사 및 신부 탄압과 기독교 탄압이 "자신을 예수로 인정해주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를 "재림 예수"처럼 꾸며낸 일등공신은 괴벨스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서 친숙한 성자나 구세주적인 이미지를 쓴 것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서 유교 드립 친다고 해서 상투 틀고 갓 쓰면서 청학동에 사서삼경 외우는 사람이 아니듯이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기독교적 소도구를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저 루머는 목사와 신부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다가 실패하고 탄압했다는 것이 와전되어서 생긴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돌프 히틀러가 종전 후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계획했다는 설도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 자료

아래는 위 내용을 대충 간추려서 번역한 글이다.
앨런 불록(Bullock)은 “전쟁이 끝난다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뿌리뽑으리라 스스로 다짐했다.”고 썼다. 미첼 페이어(Phayer)는 “1930년대 후반기까지 교회 관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다른 나치당원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말살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독일 국민들의 절대 다수가 그리스도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목표는 나치의 단기적 목표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장기적 목표가 되어야만 했다.”고 적었다. 1999년 Julie Seltzer Mandel은 뉘렘베르크 프로젝트의 문서들을 연구하던 도중 도노반(William Donovan) 장군이 나치의 전쟁 범죄를 문서화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수집한 한 세트인 150권의 기록을 발견하였다. 도노반은 미국 검사팀의 수석요원이었으며 나치당의 교회 박해에 대한 많은 양의 증거를 모았다.

108쪽의 개요문서인 “나치당의 종합 계획”에서 미국 전략사무국은 나치 정권은 조직적인 박해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보고서에서는 “민족사회주의당(national socialist party)의 주요 지도자들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말살과 순수하게 인종에 근간을 둔 종교로 대체하는 이러한 상황을 반겼을 것”이라고 서술되었다. 가장 유력한 근거는 “박해 그 자체가 가지는 조직적 본성”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동유럽 독일화 계획에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안배는 전혀 없을 것이었다. 그때까지 당분간은 아돌프 히틀러는 이러한 교회 문제에 대하여 느리게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가장 반교회 성향이 강하고 공격적인 인사 중 하나였던 괴벨스는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이러한 문제는 전후에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고, 이는 즉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교와 독일 전통 이교 신앙 사이에는 매울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고 밝혔다. 불록은 “전쟁이 끝난다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영향력을 파괴하고 뿌리뽑겠지만, 그 순간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신중함을 유지하기로 스스로 다짐했다.”라고 적었다. Yad Vashem에 기고한 글에서 역사학자 미첼 페이어는 1930년대 후반까지, 교회 관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장기적인 목표가 “그리스도교의 완전한 멸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아돌프 히틀러의 수석 설계자였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회고록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새 베를린 초안을 구상할 당시 그가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비서였던 마르틴 보어만에게 가톨릭과 개신교 관계자들에게 교회의 위치에 대하여 논의하였다고 하자 보어만은 짧게 “교회들은 건물 위치를 배정받지 못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나치가 기독교 말살을 계획했다는 주장 자체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상당한 근거를 들어 제출된 바가 있고(본문에서 언급되는 도노반 장군의 자료들이 재판에서 제출되었다.) 첫 문단에서 인용하고 있는 앨런 불록의 <Hitler: A Study in Tyranny>나 미첼 페이어의 <The Catholic Church and the Holocaust> 등에도 실려 있다.

도노반 장군의 자료들의 내용을 요약하면,
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Nuremberg) 국제재판은 무려 6백만의 유태인을 살해한 Holocaust 사건을 나치의 인종학살 계획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고발하였다. 미국의 고소인단을 이끌었던 윌리엄 도노반 장군(General William Donovan)은 나치가 유태인 학살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체계적 파괴도 계획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방대한 분량의 문서들을 제출하였다. 도노반의 문서들―무려 150 권에 달하는 장정본(裝幀本)―은 1959년 도노반이 죽은 후에 코넬(Cornel) 대학교에 보관되었다. 지금은 Rutgers Journal of Law and Religion에서 internet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이 범죄적 음모에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선전부장 요셉 게벨스(Joseph Goebbels), 히틀러유겐트의 지도자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피고인 발두어 시라크(Baldure Schirach)를 포함한 나치당의 정상급 핵심 요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나치는 기독교회가 애초부터 나치의 인종차별과 정복전쟁 계획에 반대 입장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나치는 교회의 내부에 침입하려 하였다. 즉, 중상모략, 체포, 습격 등을 획책하고 목회자를 살해하고, 신도의 사상을 개조하며, 교회 학교와 청소년 조직에 침입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교회는 타협적인 교회에 반대하면서 대(對) 나치 항거의 전면에 나섰다. 성경의 무오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하지 못했던 자유주의 교회들은 집권자의 친-진화론적 이념에 기독교 교리를 끼어 맞추려는 기도의 일환으로 기독교 교리를 서슴없이 ‘재해석’하려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다윈의 ‘과학’적 이론에 추종하려는 현상과 유사했다. 일찍이 1937년에 벌써,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나치 정책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자 나치는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700명의 목회자를 체포 구금하였다. 인본주의자와 자칭 ‘민간 자유주의 단체’는 ‘창조설을 교회 내에 국한’시키자, 그리고 모든 기독교의 영향을 대중의 생활과 학교로부터 말살하자고 외쳤다. 이 불길한 외침에 보조를 맞추어 여러 교파의 교회들도 종교 활동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으로 한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자진하여 축소한 활동범위 위에 더 많은 제약을 막무가내로 가하려 하던 나치의 방해 공작에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기독교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러한 현상은 나치의 ‘점진적 잠식을 위한 용의주도한 기독교 말살 계획’을 진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교회의 조직체계를 나치의 정치목적에 이용당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기독교 혐오에 대해 일단 아돌프 히틀러 본인이 직접적으로 남긴 발언은 상술했듯 기독교가 "너무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라서 싫다"는 거였는데, 다만 이 또한 어떤 경로로 기독교를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가 극히 불분명하다. 순수하게 신학적으로만 따져본다면, 기독교를 비롯한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의 대다수가 최후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으나 이 중에서 최후의 심판 직전에 대전쟁이 지상을 휩쓸고 지나간다고 예언하는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하다. 물론 이는 요한묵시록의 문헌적 특수성을 감안해야 하는 점도 있으나 일단 이것만 놓고 본다면 기독교가 비슷한 계통의 다른 종교들에 비해 "순종적이고 무기력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다. 결국 이 또한 신학적 이해 없이 그냥 되는대로 발언하고 보았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 외 히틀러의 여러 연설과 주변인들과의 발언을 토대로 그의 종교관을 분석한 리처드 위카르트(Richard Wikart) 교수는 그가 범신론적 성향을 지녔다고 저서에서 밝혔다. 실제로 히틀러는 1941년 연설에서는 "자연의 영원한 법칙 앞에서 인류는 무력합니다. 인류 전체의 구원은 신의 섭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인간이 그 법을 거역할 수 있다는 게 거짓이라는 걸 인지하게 된다면 결코 해로운 것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신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과 자연의 법칙을 동일시 하면서 적자생존의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게 신의 뜻에 부합하다는 그의 종교관을 내비쳤다.

이렇게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공통된 사실이 있다면 이러한 설들에 대해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치나 아돌프 히틀러 관련하여 공신력 있는 서적들에서 종교 탄압은 꼭 한 챕터씩은 다루고 있다. 페스트 <아돌프 히틀러 평전>, 이안 커쇼 <아돌프 히틀러>,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 일상사>, 귀도 크놉 <아돌프 히틀러의 뜻대로>, 마르틴 브로샤트 <히틀러 국가>, 슈테판 마르크스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 간접적으로 다룬 책들 중에 폴 존슨 <모던 타임즈>,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등이 있다. 다만 반기독교와 같은 동기, 신념과 기독교에 대한 증오, 혐오로 탄압했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나치와 자신에게 방해가 될 때에만 탄압했다.

그래서 히틀러의 종교관에 대해서 '애초에 종교에 대한 일관적인 관점이나 사상 자체가 히틀러에겐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때 그때 권력에 이용하기 위해 태도를 달리하였을 뿐이다'라는 해석이 현재는 가장 유력하다. 히틀러의 즉흥적이고 상당히 충동적으로 일을 벌리는 성격을 고려해 봤을 때 그의 반종교적인 발언이 명확한 신념이었는지 그때그때 필요와 기분에 따라 그냥 내뱉은 말이었는지 증언만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1] 오스발트 슈펭글러가 그 대표격이다.[2] 다만 파시즘은 원래 정교한 논리 체계에 집착하는 사상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파시즘의 원동력은 어디까지나 대중들의 분노와 증오 같은 철저한 감정적인 요소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3] # 헨리 포드의 '국제유대인'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볼 수 있다.[4]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독일 루터교도들이 러시아로 많이 이주했다. 스탈린 시대 볼가 강 지역에 50만명의 독일계 주민이 남아 있었다.[5] 철자로 인해 '뤼거'로 표기되기도 하나 독일어 발음은 '루에거'에 가깝다. #[6] 물론 단순히 반유대주의자라서 지지를 얻은 것은 아니고, 우파정치인임에도 사회복지제도를 선도적으로 도입하면서 상하수도와 전기같은 기초 인프라 시설들을 대거 확충해서 인기를 얻었던 것이기도 했다. 히틀러가 소식적에 복지수당을 꽤 타서 생계를 꾸려나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히틀러도 루에거의 덕을 독특히 본셈이기도 했다.[7] 이 당시 블로흐는 히틀러가 경제적인 사정이 썩 좋지 않다는것을 알아서 치료비를 깍아주었는데, 이에 대해 히틀러는 블로흐에게 감사를 표시했고,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며 오스트리아의 유대인들이 탄압받기 시작했을때에도, 히틀러는 이때의 은혜를 잊지 않아서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블로흐를 흔쾌히 보호해주면서 미국 망명을 허락해주었다.[8] 당연히 유대인 탄압 정책은 올림픽이 끝난 후 재개되었다.[9] 당시 중국은 독일군 재무장에 필요한 원자재 상당수를 공급했고, 반대로 독일은 중국의 산업화와 국방건설에 필요한 시설과 인력을 제공해주었다.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은 장제스의 중국공산당 토벌 작전과 중일전쟁에도 가담하면서 홍군일본군에 막대한 피해를 강요했다. 때문에 이 당시 독일과 일본은 오히려 갈등 관계에 가까웠다.[10] Rißmann, Michael (2001). Hitlers Gott. Vorsehungsglaube und Sendungsbewußtsein des deutschen Diktators[11] 사실 개신교인들이 이러한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상당히 뻔뻔한 행보이다. 나치는 기독교적 정통성을 가장한 정치선전 속에서 오히려 루터를 "교황의 속박에서 독일을 해방시킨 민족적 영웅"으로 내세우며 개신교, 특히 루터교 전통과 전략적 유착을 시도했다. 고위 나치당원 에리히 코흐는 쾨니히스베르크 연설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마르틴 루터를 나란히 세우며 "히틀러는 루터의 정신으로 싸운다"고 선동했다. 이 같은 흐름은 이미 히틀러가 사상적으로 영향을 받은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등 독일 민족주의적 반가톨릭 사조와도 맞물려 있다. 실제로 나치당 고위층의 약 3분의 2가 개신교 배경이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1931년 바이에른 주교단을 중심으로 "국가사회주의 이념은 가톨릭 신앙과 양립할 수 없다"는 선언을 통해 신자들의 나치당 가입을 금지했으나, 이는 정식 파문이라기보다는 교리적 금지령이었다. 이후 냉전 시기 KGBSeat 12 심리전 작전과 존 콘웰의 "히틀러의 교황" 표지 등 조작된 이미지들이 결합되며 비오 12세 교황에 대한 '히틀러의 교황' 프레임이 본격 확산되었다.[12] Norman H. Baynes, ed., The Speeches of Adolf Hitler, April 1922-August 1939. Vol.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2. 아돌프 히틀러가 헌신적인 신자라고 말한 기사들은 다음 2개다. John Toland, Adolf Hitler. New York: Anchor Publishing, 1992, p. 507 / Michael, Robert (2008). A history of Catholic antisemitism. New York: Macmillan, p. 111[13] 그 드문 사례 중 하나로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이 있다.[14] 유대계 미국인 번역가. 1907~1992[15] "뭔 소리유?"를 다소 바꾼 필명인 듯한데 역자 정보가 불분명하다.[16] 연설 말미에 "주여 우리를 자유롭게 하소서!"라는 문구로 끝낸다.[17] 학창 시절 반가톨릭적 글을 발표했는데 이 때문에 장학금을 박탈당할 뻔해서 본인과 아버지 등 주변 인물들이 사정 사정한 끝에 박탈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괴벨스 집안이 상당히 가난했고 본인 또한 장학금에 의존해 공부를 이어나가던 환경이었던 걸 감안하면 상당히 근시안적인 행동이었다고 평하지 않을 수 없다.[18] Speer, Albert. <Inside the Third Reich: Memoirs>. New York: Simon & Schuster, 1997[19] 지금의 이슬람 근본주의에 물든 시각으로 보면 이상하다 생각하겠지만 이는 당시의 시대상 또한 감안해야한다. 제 1차 세계대전때만 해도 이슬람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은 상당한 기술과 윤리관을 가진 하나의 열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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