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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알하지[1] 무함마드 아민 알후세이니(الحاج محمد أمين الحسيني, 1897년 ~ 1974년 6월 4일)는 이슬람 법학자(المفتي, 알무프티),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족주의자,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이며 최초의 팔레스타인 민족의 시조이기도 하다.[2] 1897년 오스만 제국령 예루살렘에서 태어났다. 알-후세이니 가문은 예루살렘의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팔레스타인의 명문가로 그의 아버지인 타히르, 21살 차이가 나는 이복형 카밀도 이슬람 법관을 역임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16살이었던 1913년 모친 손을 붙잡고 같이 성지순례를 하여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지 칭호를 얻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팔레스타인은 당시 오스만 제국령이었기 때문에 포병장교로 징집되었다. 1916년 병을 얻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팔레스타인에 전운이 감돌고 있을 때였다.
2. 반오스만 운동
지금이야 사우디아라비아가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사분오열을 거듭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고 무함마드의 후손인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 (샤리프 후세인)가 통치하던 헤자즈 왕국이 메카와 메디나를 기반으로 존재하였고 역시 아랍의 또 다른 명문가 사우드 가문이 통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전신이 되는 네지드 술탄국이 리야드에 있었다. 북부에는 사우드 가문의 오랜 라이벌인 라시드 가문이 통치하는 자발 샴마르가 있었다.오스만 제국은 전쟁이 발발하자 헤자즈 왕국에게 원병을 보내라고 끈질기게 요구하였지만 헤자즈 왕국은 이득도 없는 전쟁에 병력을 보내길 원하지 않았는데 사우드 가문이 메카와 메디나의 수복을 외치면서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극적인 헤자즈 왕국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오스만 제국은 후세인 빈 알리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으나 후세인이 먼저 이를 알아차렸다.
이에 후세인은 당시 영국 보호령 이집트의 고등 판무관이었던 헨리 맥마흔과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하였으며 맥마흔으로부터 "아랍인들이 대대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반기를 든다면, 영국은 아랍인들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후세인-맥마흔 협정)
이에 사우드 가문은 후세인에 대한 적대 행위를 멈추고 반오스만 전선 구성에 협력하였다. 1916년 5월 헤자즈와 사우드 연합군이 오스만령 영토로 출병하였고 육군 중령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이끄는 영국군이 이집트에서 출격하였다. 동시에 아랍 각지에서도 대대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1917년 다마스쿠스가 시민군의 손에 떨어졌으며 1918년 오스만 제국이 항복하면서 아랍인들은 독립을 쟁취하는 듯하였다.
3. 영국의 농간
사실 영국은 아랍인들을 독립시켜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영국은 후세인과 서신을 교환하기도 전에 프랑스와 함께 아랍 지역을 양분하여 통치할 계획을 세워두 었으며 프랑스와 사이크스-피코 협정까지 맺었다. 동시에 영국은 전쟁에서 유대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현재의 이스라엘 땅을 유대인들에게 할양하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발표했다.하지만 그런 것도 모르고 아랍인들은 쟁취한 독립의 기쁨을 즐기고 있었는데 아민 알후세이니도 예외가 아닌지라 영국군을 해방군으로 생각하고 새 정부 수립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에 따라 1919년 시리아 아랍 왕국(المملكة العربية السورية, Arab Kingdom of Syria)이 건국되었고 파이살 1세가 초대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시리아 아랍 왕국을 공격하는 것을 방관하고만 있었다. 신생국인 시리아 아랍 왕국이 붕괴된 후 영국은 무주공산이 된 팔레스타인과 요르단을 접수하였다.
4. 반유대인 운동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벨푸어 선언에 의거하여 유대인 공동체들이 영국령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는데 아랍인 공동체들과 오랫동안 지긋지긋한 이권투쟁에 휘말렸다. 이 사태의 원흉인 영국은 이 문제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열강의 위선적인 행태에 분노한 아민은 아랍인 민족국가를 세우는 사회운동에 본격적으로 투신하였다. 1921년 이슬람 법관이었던 이복형 카밀이 사망하고 나서 예루살렘의 율법학자직을 아민이 이어받았는데 그는 팔레스타인 영토를 되찾는 것이 이슬람의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하였다.영국은 토착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총독자문기구인 '최고무슬림위원회(Supreme Muslim Council, SMC)'를 설치하고 아민을 수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아민은 영국의 의도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SMC를 독립투쟁의 기구로서 활용하였다.
유대인 공동체들이 계속 재정착하고 수정시오니즘과 종교시오니즘을 중심으로 우파 시오니즘 분파들을 추종하는 유대인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무슬림 아랍인들과 충돌하는 폭동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게다가 이슈브(영국령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자치정부)의 하가나(민방위군과 정착촌경찰)가 사법권을 행사하여 아랍인 공동체들을 총칼로 위협했으니 오랜 터전을 야금야금 빼앗긴 무슬림 아랍인들의 관점에서는 분통이 터질 일이었다.
결국 이러한 크고 작은 반목은 쌓이고 쌓여 1929년에 터졌는데 우리가 흔히 '통곡의 벽'이라고 알고 있는 서쪽 성벽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미 없어져 버린 제2성전에 남아 있는 흔적이며 무슬림들의 입장에서는 메카 다음으로 중요한 성지인 알아크사 성원의 일부였다. 유대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자연스레 시온주의자들도 많아지면서 통곡의 벽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1928년에는 무슬림들을 내쫓고 유대교 예배에 필요한 물품들을 설치하는 일이 생겼다. 이슬람 학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다시 철거되었으나 이미 유대인과 무슬림들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아민은 무슬림들에게 서쪽 성벽을 유대인들의 침입으로부터 지켜야 한다고 촉구하며 유대인과 대립각을 세웠다. 한 유대인 청년이 아랍인에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유대인들은 반아랍 시위를 조직하였는데 아민은 이에 맞서서 반유대인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가 폭력으로까지 번지면서 대대적인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1929년 폭동으로 수백명이 사상당하자 영국 식민정부는 유대인의 이민을 제한하였다.
5. 아랍민족주의 투쟁운동
1930년 무장투쟁을 좀 더 조직적으로 전개할 필요성을 느낀 독립운동가들은 무장투쟁론자 이즈 앗딘 알 카삼의 지휘 아래 '검은 손'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했다. 알 카삼은 식민정부에 저항하다가 1935년에 피살되었는데 전설적인 투쟁가가 죽자 아랍인들은 격앙되었다. 하가나에게 대량의 무기가 공급되고 있음이 알려지자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준비하고 있다는 괴소문이 돌았다.영국이 오기 전까지 자영농으로 먹고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이 영국 식민정부와 유대인이 집단 이주한 후에는 자기 땅을 잃고 도시로 쫓겨나 노동자가 되었으며 그들의 생활수준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근대화시키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실상은 300년 전 오스만 제국이 부과하던 것보다 더 무거운 세금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부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아민은 알-카삼의 후계를 이어 검은 손을 지휘하고 민중 파업을 주도하였는데 1936년 4월 파업이 시작되었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민중들은 생활수준 개선, 반유대주의, 팔레스타인 독립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는데 이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컸기 때문에 무려 3년이나 시위가 계속되었다.
식민 정부는 군대를 보내 이들을 피로 진압하였다. 팔레스타인인 2만명이 죽거나 다치고 13,000명이 구금되었다. 아민도 이때 구금될 뻔하였으나 영국군이 들이닥치기 전에 도피하여 레바논에 있었다.
6. 나치와의 협력
"아랍인들이여, 최후의 단 한 명까지 봉기하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싸우라. 유대인들을 찾아내는 족족 죽여버려라. 이것은 알라와 역사와 우리의 땅을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명예를 지킬 것이며, 알라께서 그대들과 함께 하실 것이다." - 예루살렘 대율법관 및 전 팔레스타인 정부 대통령 및 팔레스틴 민족평의회 의장 아민 알후세이니[3] |
1939년 그는 레바논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때 마침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다. 당시 나치 독일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에 대항하는 나라로서 피지배민족들을 영국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존재로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이었지만 실상이 알려진 건 전후의 일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수의 피지배 민족들의 독립운동가들은 나치를 해방군으로 생각하였다.[4]
아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이 무력으로 진압된 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구금당했다. 아랍인 민족국가를 세우는 사회운동의 원동력이 사실상 없어진 것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아민은 강력한 반유대주의를 제창하고 있었던 나치와 적극적으로 연계하여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으려고 하였다. 이라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41년 4월 이라크는 영국의 괴뢰정부로 자원셔틀 신세였는데 독일의 지원을 받은 민족주의자들이 정변을 일으키고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지만 한 달만에 발렸다. 1941년 10월 이탈리아를 방문한 아민은 베니토 무솔리니와 갈레아초 치아노 등을 만나 이들로부터 반유대주의 정책에 대한 확약을 받았으며 11월에 독일을 방문해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아돌프 히틀러와의 만남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유럽에서 유대-볼셰비즘을 멸절시킬 것이라고 발언하였고 이에 아민은 반색하면서 그 계획을 중동으로 확장시켜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의 유대인을 모두 죽여 달라고 요청했으며 나치의 아랍 독립운동 지원도 요청하였으나 히틀러는 중동을 무솔리니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지 자신이 열등하다고 여긴 아랍인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아민의 요청에 대해서 답변을 회피했다.[5] 이후 이라크 왕국 총리 라시드 알리 알 가일라니와 함께 히틀러에게 아랍 독립운동을 지지해 줄 것을 계속 청원하였으나 히틀러는 다른 동맹국과의 관계를 우려하여 이를 회피했으며 아민의 아랍 독립 선언의 공개를 금지하는 한편 아랍자유군을 창설하게 해 달라는 아민의 요청도 거부했다.
아돌프 히틀러와 아민 알후세이니.
하인리히 힘러와 아민 알후세이니. 힘러와는 나치 정권 수립 이후인 1933년부터 서신을 교환히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막역한 사이였다고 한다.
1942년 아민은 아예 독일에 정착하였다. 1943년부터 나치에 대한 협력을 넘어서서 실제적인 업무도 맡게 되었는데 이 성과가 "제13무장산악사단"으로 모병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3년 초반까지만 해도 모병 방법조차 헤매고 있다가 아민 알후세이니의 도움으로 대규모의 무슬림을 영입하였다. 나치는 이후 한트샤르에 크로아티아 기독교인을 영입하려고 했으나 사실상 통합이 불가능했다. 이후 아민은 홀로코스트에도 적극 개입해 <라디오 베를린>에 나타나 유대인을 온 인류의 적으로 선전하면서 나치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1943년 5월 불가리아 왕국이 4천명의 유대인 아이들의 팔레스타인으로의 탈출을 허용하자 아민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장관에게 격노를 표출하면서 있을 수 없는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맹비난했고 이탈리아, 독일, 불가리아, 헝가리 외무성을 닦달하여 유대인놈들이 탈출하지 못하게 하라고 요구했다. 아민이 홀로코스트의 광병적 지지자였다는 사실은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아랍 민족 전체에 개망신 중의 개망신이므로 아랍 학자들은 아민이 시오니즘과 나치즘이라는 두 인종주의에 맞서 싸웠다고 실드치려고 했지만 문서고 전체에 아민이 유대인 쳐죽이라고 요구한 게 다 남아 있어서 아랍의 미화 시도는 학계에서 연구가 아니라 선전선동의 일환이라고 깔끔하게 무시당한다. 아민 본인부터가 2차 대전에서 재수좋게 살아남은 다음에 히틀러가 밸푸어 선언에 충격을 받아 반유대주의자가 되었으며 독일이 내부로부터의 중상에 망한 게 맞다는 사이비 역사소설을 지어내고 다녔다.[6]
1945년 나치가 패망하자 프랑스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석방되었는데 소련에 잡혔다면 팔레스타인 독립은 물건너가고 해당 지역은 애매한 상태의 평화가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7]
앞서 저질러진 세르비아인 학살 문제 때문에 티토가 잡아 죽이려는 것을(참고) 프랑스에서 체포되어 목숨은 건졌다.
7. 말년과 사후평가
알 후세이니는 물론 홀로코스트의 수동적 방관자가 아니었다. 그는 적극적이고 열정적인 나치 부역자였다. 다른 말로, 그는 그의 손에 수천명의 유대인의 피를 묻혔다.
텔아비브 대학 중동학부 교수 Meir Litvak[8]
텔아비브 대학 중동학부 교수 Meir Litvak[8]
어떤 경우에도, 아민의 증오가 시오니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 전체를 향한 것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잦고 밀접한 나치 정권 지도자들과의 접촉은 그의 노력으로 팔레스타인으로의 이민이 차단된 유대인들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에 대해 아민에게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그가 남긴 수많은 발언들은 그가 유대인들이 그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지 못하는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라, 나치의 최종 해결책에 즐거워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Zvi Elpeleg, 이스라엘의 외교관, 역사학자.
Zvi Elpeleg, 이스라엘의 외교관, 역사학자.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에게 비교적 온정적인 자세를 취했기 때문에 전쟁범죄로 심판해야 한다는 영국과 유고슬라비아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범으로 간주하여 그를 석방시켰다.[9] 이후 그는 자신을 석방해 준 프랑스 당국에 감사했으며 만약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프랑스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면 아랍인들에게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대한 불간섭을 천명하도록 만들겠다고 한다.
이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건국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했지만 위에서 언급된 나치 인사들과 활동한 기록이 유대인/팔레스타인 분할 국가 설립을 반대하는 큰 악수로 작용하게 되었다.[10] 허나 그럼에도 아민은 대 무프티 시절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 군벌 중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남아 있었으나 1948년 1차 중동전쟁 당시 요르단강 서안을 합병하고자 했던 요르단군이 방해되는 아민의 군대를 집중적으로 공격해 전멸시켜버리면서 세력기반을 완전히 잃고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한다.
이에 아민은 레바논으로 이주하여 살다가 1974년에 사망했는데 예루살렘 동부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당연히 이스라엘은 거부했다. 나치 협조로 이스라엘에 명분을 준 자폭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도 평가가 좋지 않았고 제대로 된 동상이나 기념비 하나 없다고 한다. 위에서 언급된 엘펠렉은 아민이 죽었을 때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진영엔 아무런 충격도 없었고 애도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그의 이름은 패배의 상징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21세기에 이르러서 아민 재평가론은 사실상 매장되었다. 아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들은 아민이 이슬람에 나치즘의 유대인 음모론과 인종차별주의를 대거 수혈시키는 중대한 악영향을 남긴 원흉으로 지목하고[11] 나치-이슬람 동맹이 현대의 알카에다로까지 이어진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위에서 영국의 농간이니 다소 긍정적으로 서술된 30년대 활동도 좋은 소리는 못 듣는데 1936년에 그가 주동한 시위는 까놓고 말해서 유대인과 공존을 주장했던 당시 헤브론, 예루살렘의 시장을 포함한 같은 아랍인 136명을 테러로 살해하는 등 2010년대의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뒤지지 않을 만큼 유대인 학살과 추방에 앞장서는 폭력적인 시위였으며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영국군이 붕괴할 경우 아인자츠그루펜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대인을 섬멸하려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 계획을 실행할 부대로서 아인자츠그루페 에귑텐(Einsatzgruppe Ägypten)을 조직하였으나 엘 알라메인 전투 이후 이 부대는 동부전선으로 차출되었다. 이 때문에 2015년 10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히틀러에게 홀로코스트의 아이디어를 준 사람이 다름아닌 후세이니라고 주장하였다가 이스라엘 내부에서도 히틀러에게 면죄부를 주는 망언이라는 반발을 샀고 급히 페이스북을 통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는 아민을 만나기 전인 1941년에 시작된 것이라고 한 발짝 물러섰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슬람을 변호하는 사람들도 사실 아민이 좋은 놈이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민이 그저 반영 투쟁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해서 일부 세력의 환영을 받았을 뿐이지 아랍 세계를 영도한 적이 있는 거물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면서 아민은 사실 개새끼가 맞지만 아랍 지도자들 중에 듣보잡에 불과했다고 그의 위상을 평가절하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20세기의 폭발적 이념전쟁을 겪은 것은 아랍 세계도 마찬가지라서 아민 류의 친나치 광병적 학살자도 있었지만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의 지분도 당시에는 상당했고 이들은 당연히 나치가 반유대주의라고 빠는게 아니라 나치를 비판적으로 보고 개중에는 영국을 롤모델로 여기기도 했다.
인도에도 비슷한 성향의 찬드라 보스가 있긴 한데 비슷한 이유로 그가 협력한 세력인 일본 제국이 추축국이라 국내에서는 독립영웅으로 선전해도 대외적으로는 선전을 삼가는 편이다. 실제로도 찬드라 보세는 학계에서 일본 파시즘의 주요 인물로써 언급되기도 한다.
이외에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스테판 반데라가 나치 독일과 협력하며 독립운동을 꾀했지만 그도 제노사이드 주도자라는 사실 때문에 문제가 많은 인물이다. 특히 아직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이후 동서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폴란드, 러시아에서는 2차 대전 때 반데라 의 나치 협력행적과 그의 추종세력이 유대계, 폴란드계 등을 향해 벌인 학살(볼린 학살 등)을 저지른 이유를 들며 평가가 나쁘다.
실제로 그의 사상은 나중에 팔레스타인의 분리독립을 외치는 아랍인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심대한 악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 건국전쟁 당시 아랍연맹의 회원국들이 그의 행적을 쏠쏠하게 써먹으면서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나치 독일에 대하여 긍정적인 이미지를 이용하였다.
8. 기타
인터넷에서는 배우 라이언 고슬링이랑 닮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기도 한다. 구글에 이름을 쳐 봐도 라이언 고슬링이 같이 나온다(...).[1] 성지순례의 임무를 완수한 무슬림에게 붙는 칭호.[2] 이전부터 현대 팔레스타인인의 조상들은 존재했지만 이들이 다른 아랍인과 구분되는 팔레스타인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갖게되는 뿌리를 만든 건 아민 알후세이니의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운동 시기라고 해도 무방하다.[3] https://en.wikipedia.org/wiki/Haj_Amin_al-Husseini[4] 오늘날에도 제3세계에서 나치와 히틀러보다 영국과 프랑스처럼 과거 자신들을 지배했던 식민제국들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하다. 당장 인도만 보더라도 히틀러의 이름을 딴 정치인이 존재하고 그의 일생을 다룬 영화까지 만들기까지 하니...핀란드도 소련의 침공 때문에 나치 독일에 협력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특이한 사례. 그리고 아르헨티나는 후안 페론 집권기에 아예 나치 인사들의 망명을 거의 대놓고 받아줬다.[5] Meir Litvak, Netanyahu and the Mufti: Hajj Amin al-Husseini as Prime Instigator of the Destruction of European Jewry or Eager Accessory?(2015)[6] Zvi Elpeleg, The Grand Mufti: Haj Amin al-Hussaini, Founder of the Palestinian National Movement (London, 1993)[7] 이후에도 설명하지만 이 인간이 민족의 독립이랍시고 추축국의 지원을 받으려고 한 것이 이후에 공개되어서 팔레스타인 독립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치게 되었다.[8] 참고로 그는 아민 알 후세이니가 히틀러를 조종해서 홀로코스트를 일으켰다는 네타냐후 총리의 주장이 비역사적인 것이라고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후세이니의 홀로코스트 협력은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선을 그었다.[9] 영국은 당연히 그의 이전 테러 활동 때문에 잡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고 유고슬라비아는 그가 창설한 한트샤르 덕분에 민간인들이 학살당했기 때문이다.[10] 히틀러를 비롯한 고위 나치 인사들과 추축국 인사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이주를 거부하는 알후세이니의 주장에 동의하고 사인까지 한 자료가 배포되었다.[11] 실제로 그가 모병을 담당했던 SS 한트샤르 사단의 생존자들은 중동전쟁 때 아랍국가에 자원병 형식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