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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가나

<colbgcolor=#fff><colcolor=#fff> 하가나
ההגנה
Haganah
파일:하가나 로고.svg
창설일 1920년
창설자 불명
해산일 1948년 5월 28일
규모 21,000명
본부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파일: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기.svg
]]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참전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제2차 세계 대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내전
제1차 중동전쟁
파일:다비드의 별.svg

1. 개요2. 역사3. 하가나 출신 인물

1. 개요

이슈브[1]준군사조직이자 정착촌경찰이다. 이스라엘군이스라엘 경찰, 모사드, 신 베트 등의 창설에 관여한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 인사들은 여기서 경찰 훈련과 소방 훈련 및 군사 훈련과 첩보 훈련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복무했다. 하가나의 뜻은 방어이다.

팔레스타인인이 일으킨 1929년 봉기와 1936~39년 대봉기 진압에 투입되었다. 대봉기 후 1939년 영국유대인의 이주를 제한하는 정책을 취하자 하가나는 반영 무장 투쟁을 벌였다. 이스라엘 건국 전쟁이 발발한 후 하가나는 신생 이스라엘군에 통합되었다.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사건을 일으킨 테러단체이다.

2. 역사

1920년 네비 무사 폭동과 1921년 야파 폭동 이후, 팔레스타인 유대인 지도부는 영국이 아랍인 공격으로부터 유대인을 보호할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농장과 키부츠를 보호하기 위해 하가나를 창설했다. 초대 지도자는 유대인 군단 출신의 28세 요세프 헥트였다. 초기 하가나는 지역 단위로 조직되어 무장이 약하고, 농민들이 순번제로 경비를 서는 수준이었다. 1929년 폭동 이후 하가나는 규모가 확대되고 도시 구성원까지 참여하며 외국 무기를 확보하고 수류탄과 간단한 군수품 제작을 시작하며 조직이 전문적인 지하군대로 발전했다. 1931년, 하가나 내부에서 방어에만 집중하고 공격을 금지하는 '하블라가' 정책에 반발한 일부 급진파가 분리되어 이르군을 결성했다.

1936~1939년 아랍 반란 동안 하가나는 영국의 이해를 보호하고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포시와 히쉬 부대를 운용하며 약 1만 명의 현역과 4만 명의 예비군을 동원했고, 영국과 협력해 유대인 정착 경찰과 특수 야간부대를 조직하여 훈련 경험을 쌓았다. 폴란드 제2공화국은 유대인 국가 수립을 지원하고 대규모 유대인 이주를 촉진하기 위해 하가나에 군사 훈련과 무기를 제공했으며, 예후다 아라치가 수차례 무기 수송을 지휘했고 일부 회원들은 폴란드 렘베르토프 군사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다. 1939년 영국의 화이트 페이퍼 발표로 유대인 이주가 제한되자 다비드 벤구리온은 영국과 히틀러에 동시에 대응하는 정책을 세우고, 하가나는 팔마흐를 창설하여 엘리트 공격 부대를 구성하고 불법 유대인 이주를 조직했으며 약 10만 명이 아리야 벳을 통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고, 영국의 이민 제한에 반대하는 시위도 조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의 추축군 위협 때문에 하가나에 협력을 요청했으나, 1942년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에르빈 롬멜이 패배한 뒤에는 지원을 축소했다. 1943년 영국군은 5,000명 규모의 유대인 여단을 창설했고, 팔레스타인 유대인 약 3만 명이 영국군에 복무했다. 1941년 하가나는 팔레스타인 방어와 추축군 침략 대비를 위해 정예부대 팔마흐를 창설했고, 영국의 일시적 지원 후에도 지하 조직으로 활동하며 군사 및 지도자 훈련을 이어갔다. 1944년 레히의 로드 모인 암살 사건 이후, 하가나는 이르군을 대상으로 납치·심문·추방 작전을 수행한 시즌을 실시했으며, 이르군은 내전을 피하기 위해 반격하지 않았다. 1945년 하가나, 이르군, 레히는 공동 지휘체제 하의 유대인 저항운동을 결성했고, 하가나는 팔마흐를 통해 아틀릿 구금 캠프 습격, 기차와 다리 공격, 경찰서 공격 등 영국군 대상 작전을 수행했다. 하가나는 불법 유대인 이주를 조직하고, 영국 레이더 시설과 선박을 폭파하거나 사보타주하며, 비리야 사건에서는 주민 재정착 운동을 주도했다. 동시에 아랍과의 전쟁을 대비해 비밀 무기 산업과 탄약 비축을 운영했다. 1946년 하가나의 실질 병력은 약 3만 명, 문서상 7만 5천 명으로 중동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으로 평가되었으며, 예산은 1946년 40만 파운드에서 1947년 330만 파운드로 증가했다. 1947년 유엔 팔레스타인 조사단 방문 시, 유대인 기관은 이르군과 레히의 작전을 일시 중단시키기 위해 하가나를 동원했고, 이 과정에서 팔마흐는 참여를 거부했으며, 이르군이 세 명의 처형 위기 멤버의 대가로 영국 하사 두 명을 납치한 하사 사건에도 개입했다. 시도는 실패로 끝났고, 하가나와 이르군 간 소규모 보복과 납치가 반복되며 “리틀 시즌”으로 불렸다.

벤구리온은 하가나를 은밀한 준군사 조직에서 정규 군대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했고, 이스라엘 갈릴리, 텔아비브, 예루살렘 등 지역별로 여섯 보병여단으로 나누고, 팔마흐는 세 개의 정예 여단으로 조직해 기동 부대로 배치했다. 1947년 11월부터 17~25세 남녀를 대상으로 의무 징집이 시작되었고, 이후 26~35세와 40세 미만 남성까지 확대되었다. 하가나는 점차 영토 방위 민병대에서 정규군으로 변화하며,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 독립 선언과 아랍 연합군의 침공 이후 정식 군대로서 주변 아랍국 군대와 전투를 벌였다. 5월 28일, 임시정부는 하가나, 이르군, 레히를 통합해 이스라엘 방위군(IDF)을 창설했으며, 일부는 예루살렘과 해외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3. 하가나 출신 인물



[1]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유대인 자치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