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30 20:06:18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내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내전
civil war in Mandatory Palestine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분쟁의 일부
기간
1947년 11월 30일 ~ 1948년 5월 14일
장소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전역
교전국 및 교전세력
하가나
이르군
레히
성전군
아랍 해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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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란스요르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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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메나헴 베긴
야코프 도리
이갈 야딘
파일:영국 국기.svg 고든 맥밀런
결과
이스라엘건국선언
제1차 중동전쟁으로 확전
1. 개요2. 원인3. 전개
3.1. 초기 전개3.2. 제1단계3.3. 제2단계

1. 개요

1947년부터 1948년까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유대인아랍인, 그리고 치안을 유지하려는 영국군 사이에서 발생한 내전이다.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철수하고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제1차 중동전쟁으로 확전된다.

2. 원인

파일:Aliyah_Bet.jpg
1940년대 팔레스타인에 유입되는 유대 난민들. '독일인들이 우리 가정과 집을 파괴했다. 우리의 희망을 파괴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내전의 배경은 20세기 초 영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점령하고 국제연맹 위임통치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영국은 1917년 벨푸어 선언을 통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 설립을 지지하였으나, 동시에 아랍인 주민들의 정치적 권리와 독립 요구도 약속하였다. 이중적 약속은 유대인 이주와 아랍인 간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920~1930년대 유대인 이민이 급증하면서 토지 구매와 경제적 변화가 발생했고, 아랍인 농민과 주민들은 점차 경제적·사회적 압박을 받았다. 1936~1939년 아랍 반란은 아랍인들의 독립 요구와 이민 반대를 표출한 것으로, 영국군과 유대인 민병대 간 충돌을 격화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유럽 유대인들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이주가 이어지면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영국의 통치력 약화와 국제사회의 유대인 국가 설립 지지 움직임 속에서 유대인 무장 단체인 하가나, 이르군, 레히와 아랍 민병대 간 충돌이 빈번해지며, 결국 1947년 UN 분할안 제안 이후 내전 상태가 본격화되었다.

3. 전개

3.1. 초기 전개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안(결의안 181(II))이 채택된 직후, 유대인 사회의 환호와 아랍인들의 전국적인 반발이 동시에 나타났으며, 12월 1일부터 아랍고등위원회는 3일간 총파업을 단행했다. 이후 폭력의 바람이 불면서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서 살인과 보복이 이어졌고, 영국군은 이를 막지 않았다. 분할안 직후인 11월 30일, 야파 출신 8명 갱단이 카프르 시르킨 근처 유대인 버스를 공격해 5명을 살해했고, 하데라행 두 번째 버스에서도 2명이 사망했다. 이는 레히가 10일 전 헤르즐리야 근처에서 5명의 팔레스타인인을 살해한 슈바키 가문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

1948년 1월 이후 공격은 더욱 군사화되었으며, 예루살렘과 하이파 등 혼합 지역에서 폭력과 보복이 격화되었다. 2월 22일, 아민 알후세이니 지지자들은 차량 폭탄 공격으로 총 88명의 유대인을 살해했고, 이에 레히는 레호보트 철로에 지뢰를 설치해 28명의 영국 병사를 죽였다. 다비드 벤구리온하가나를 재편하고 징집을 의무화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은 분할안 지지를 철회하고 1948년 3월 팔레스타인 신탁통치안을 제안하며, 영국은 2월 7일 요르단강 서안 합병을 지지했다. 유대인은 모든 지역에서 방어를 명령받았지만, 아랍인은 불안으로 인해 하이파, 야파, 예루살렘 등에서 10만 명가량이 해외나 동쪽 아랍 지역으로 피난했다. 유대인 측은 골다 메이어가 미국에서 모금한 자금과 소련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무기 계약을 체결하고, 제2차 세계대전 재고 무기를 회수해 군사력을 강화했다.

1947년 12월 이후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과 아랍인의 사상자는 급증했으며, 1948년 1월까지 유대인 333명, 아랍인 345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 전체 사망자는 1,000명, 부상자는 2,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외국군의 개입으로 폭력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시리아, 이라크, 북아프리카 등지에서 온 아랍 자원병과 아랍 해방군이 팔레스타인에 들어와 여러 지역에 배치되었다. 영국은 질서 유지 책임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개입하지 않고 철수 준비에 집중했다. 아랍군은 초기 승리로 사기가 높아졌고, 아랍고등위원회는 유엔 분할안을 저지하겠다는 결의를 선언했다. 반면 유대인 지도부는 초기에는 사기가 낮았지만, 하가나를 중심으로 병력과 장비 면에서 아랍군보다 우위를 유지하며 방어와 보급에 집중했다. 결국 외국군 개입과 지속적인 공격 속에서도 유대인 측은 조직력과 군사력에서 우위를 점하며 내전이 격화되었다.

1947년 말부터 1948년 초까지 팔레스타인 아랍 민간인들은 높은 아랍 전투원들의 사기와 달리 공포와 불안 속에 있었으며, 약 10만 명이 해외 또는 팔레스타인 내 안전 지역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주로 중산층과 상류층, 지방 관료 및 아랍고등위원회 인사 가족들이었다. 국제적 상황도 분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은 무프티가 이끄는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을 원치 않았고, 1948년 2월 비공식적으로 요르단의 아랍군이 팔레스타인의 아랍 지역을 점령하도록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은 3월 유엔 분할안 지지를 철회하고, 대신 팔레스타인을 유엔 감독 하에 두는 방안을 제안했다. 이로 인해 유대인 지도부는 외교적 타협을 모색하며 휴전을 제안했다. 한편, 소련은 유대인 측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무기 지원을 하여 물류적 지원을 제공했으며, 팔레스타인 아랍 측은 동등한 수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아랍 지도자들은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피하며 재정적·군사적 지원도 제한했지만, 아랍해방군을 조직해 일부 병력을 팔레스타인에 투입했다. 초기에는 시리아군 700명이 트랜스요르단을 통해 진입하고, 아랍연맹 지도자들은 팔레스타인 아랍군이 아랍해방군의 지원으로 자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3.2. 제1단계

1947년 말 기준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 정착지는 해안가를 제외하면 매우 흩어져 있었고, 외곽 정착지와 해안 지역 간 이동은 도로에 의존했으며, 이 도로들은 대부분 아랍 마을을 지나가 공격에 취약했다. 예루살렘헤브론 사이 전략 도로상의 키부츠 카르 에치온, 네게브 남부의 27개 정착지, 갈릴리 북부 정착지 등 외곽 정착지의 고립은 유쉬브의 전략적 약점이었다. 데이비드 베닝거는 정착지를 철수하지 말고 모든 전초기지와 정착지를 텔아비브처럼 방어하도록 지시했으며, 실제로 1948년 5월 이스라엘 독립 전까지 대부분 정착지는 철수하지 않았다. 네게브 사막과 주요 위험 지역의 키부츠는 인원과 물자를 강화하고, 팔마흐 연대까지 배치되었다. 예루살렘은 전체 유대인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했으며,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고 아랍 마을 근처를 통과해 접근이 매우 어려웠다. 그는 비르 지트에 훈련소를 두고, 하산 살라마와 협력해 예루살렘 서부 유대인 지역을 고립시키고 도로 교통을 방해하는 전략을 펼쳤다. 1947년 12월 10일 첫 조직적 공격이 발생했으며, 1948년 1월 14일 카르 에치온 공격에는 1,000명의 아랍 전투원이 투입되었으나 실패하고 200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유대인 측도 35명의 팔마흐 전투원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다. 1월 25일 알-카스탈 근처에서 유대인 호송대가 공격당했고, 이후 도로 통제 싸움은 아랍군의 핵심 전략이 되었다. 3월 22일 이후 예루살렘으로의 보급 호송이 중단되었고, 3월 27일 카르 에치온 호송대가 남부 예루살렘에서 전멸당하며 무기와 차량을 모두 빼앗겼다. 예루살렘과 네게브의 정착지는 심각하게 고립되었고, 3월 27일 갈릴리 북서부 키부츠로 향하던 예히암 호송대도 나하리야 인근에서 아랍해방군과 전투를 벌여 42~47명의 팔마흐 전투원이 사망하고 차량이 모두 파괴되었다.

3.3. 제2단계

1948년 4월부터 시작된 전쟁 2단계에서 하가나가 공세로 전환했다. 아랍군은 약 1만 명으로, 그중 3,000~5,000명은 아랍해방군 외국 자원병이었다. 하가나와 팔마흐 병력은 3월 약 1만 5,000명에서 5월에는 약 3만 명으로 증가했고, 장비와 훈련, 조직이 개선되었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는 연이어 패배했고, 유대인 측은 주요 정착지 연결 도로를 확보해 예루살렘에 다시 보급이 가능해졌으며, 팔레스타인 사회는 붕괴하고 야파 등 혼합 도시에서도 대규모 탈출이 발생했다. 3월 10일 최종화된 ‘플랜 달렛’은 하가나의 작전 지침으로, 유대인 정착지 간 영토 연결을 확보하고 아랍국가 개입에 대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4월 2일부터 시작된 ‘나흐숀 작전’에서 1,500명의 지바티·하렐 여단 병력이 예루살렘 도로를 장악하고 일부 호송대를 통과시켰으나, 계획된 3,000톤 중 1,800톤만 운송되었고 심각한 배급이 계속되었다. 4월 7~8일 알-후세이니가 전사하며 아랍 전략이 혼란에 빠졌고, 후임 에밀 구리는 바브 알-와드에 도로 차단을 설치해 예루살렘을 다시 고립시켰다. 하가나 측은 ‘빵을 던져라’ 작전으로 점령 마을 우물을 독살해 팔레스타인의 귀환을 방해하고, 나중에는 아랍군을 상대로도 생물학적 수단을 확장했다. 4월 4일부터 15일까지 이즈레엘 계곡의 키부츠 미슈마르 하에멕에서 아랍해방군이 공격했으나, 하가나가 반격해 주변 마을을 포위하고 아랍해방군은 퇴각했다. 대부분 주민은 도주했으며, 남은 주민은 투옥되거나 제닌으로 강제 이주당하고, 마을들은 파괴되었다. 아랍해방군은 탈영과 사기 저하를 겪었고, 팔마흐와 하가나 병력은 계속 ‘정리 작전’을 벌여 추가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을 피신시켰다. 5월에는 이르군과 골라니·알렉산드로니 여단 일부도 작전에 참여해 여러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 일부를 살해했다.

갈릴리 팬핸들은 유대인이 통제하는 가장 외딴 지역으로, 레이크 티베리아스와 메툴라 사이에 위치했으며, 주변의 아랍 지역과 레바논·시리아 국경으로 인해 아랍군 개입의 가능성이 높았다. 팔마흐 지휘관 이갈 알론이 작전 '이프타'를 맡아 해당 지역과 사페드, 훌라 계곡의 아랍 마을들을 장악하고 파괴하며 아랍군의 진격을 막았다. 5월 중순까지 갈릴리 팬핸들은 아랍 주민이 철수한 상태가 되었다. 5월 10일, 골다 메이어는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과 비공개 회담을 진행했지만, 국왕은 유대국가 공격 대신 팔레스타인 아랍 지역에 대한 통치를 고려하며 협상에 진전이 없었다. 다수 역사가는 유대인 지도부와 압둘라 사이에 팔레스타인 분할에 대한 이해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나, 아랍 측 압력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카프르 에치온의 유대인 정착지는 5월 13~14일 아랍군에 의해 함락되고 수많은 주민이 학살되었다. 이는 고립된 정착지의 방어 한계를 보여주었다. 예루살렘에서는 4월 말부터 작전 '예부시'와 '킬숀'을 통해 유대군이 전략적 요충지와 고립된 유대인 지역을 연결하며 아랍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5월 13~22일, '벤-아미' 작전으로 서부 갈릴리의 유대 정착지와 전략적 마을을 확보하며 아랍군을 격퇴했다. 이 기간 동안 약 35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탈출하며 난민 문제가 심화되었다.

아랍연맹은 5월 15일 유엔 팔레스타인 분할안을 거부하고 군사 개입을 결정했지만, 준비 부족과 지휘 체계 혼란 등으로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5개월간의 전투에서 유대군은 승리하며 연속된 영토를 확보했고, 하가나는 준군사 조직에서 정규군으로 전환되었다. 아랍 지역의 저항은 거의 붕괴되었고, 5월 14일 이스라엘 국가가 선포되며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본격적 단계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