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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Friedrich Wilhelm Krüger 프리드리히 빌헬름 크뤼거 |
| 출생 | 1894년 5월 8일 |
| 독일국 슈트라스부르크 (現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 |
| 사망 | 1945년 5월 10일 (향년 51세) |
|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오버외스터라이히주 에겔스베르크 | |
| 가족 | 형: 발터 크뤼거[1] |
| 복무 | 독일제국군 슈츠슈타펠 (1931년, 1935년 ~ 1945년) |
| 최종계급 | 슈투름압타일룽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 (상급집단지도자) 질서경찰 대장 |
| 주요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 주요 서훈 | 기사십자 철십자장 |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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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의 돌격대 및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무장친위대 및 질서경찰 대장으로 많은 학살을 저지른 전범이다. 슈츠슈타펠 지휘관이지만 전선에서만 활동하며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던[3] 형 발터 크뤼거와 달리 유대인 학살을 벌인 것으로 악명이 높다.
2. 초기 행적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군 군인 가문의 육군 대령이던 알프레트 크뤼거의 차남으로 독일 제국 땅이던 스트라스부르에서 태어난 프리드리히는 1909년 중학교를 졸업한 뒤 카를스루에의 유년사관학교에 입교했고, 뒤이어 리흐터펠데의 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이후 졸업하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 1달 전인 1914년 6월 소위로 임관한다.3. 제1차 세계 대전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프리드리히는 세 차례의 부상을 입고 용맹히 싸워 1급,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소대장, 중대장, 연대 부관 등을 역임하며 중위 계급으로 패전을 맞이한다. 이후 잠시 군에 남아 해군의 프리깃함에서 근무하다가 자유군단의 휘하 부대인 뤼초우 의용군단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1920년 군을 떠난다.4. 나치당 활동
1920년부터 1923년까진 출판사에서 일하다가 1924년부터는 베를린 도시 청소 회사에서 이사로 근무했다. 그리고 1928년에 독립업체를 세워 개업했는데 1922년에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으며 그리고 세 아이의 수양아버지가 되기도 했다. 한편 그가 일했던 폐기물 처리업체는 훗날 질서경찰 총수가 되는 쿠르트 달루게도 엔지니어로 근무하여 인연을 튼다. 1929년 11월에 프리드리히는 달루게의 권유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1931년 2월에 친위대에도 입대했지만 1931년 4월에 돌격대로 이동했다. 이것은 프리드리히보다 앞서 입단한 달루게가 당시 베를린의 돌격대 지도자였기에 그를 빼내 간 것이었고 달루게는 크뤼거를 전폭적으로 밀어주기 시작한다. 1932년에 돌격대 소장으로 승진한 프리드리히는 에른스트 룀의 측근이 되었다. 1933년 6월에는 돌격대 최고위인 돌격대 대장으로 승진하여 돌격대 사관학교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 당시 국가방위군과 돌격대 사이의 연결책으로서 국가방위군과 긴밀히 협력하며 돌격대 장병들의 훈련 및 군사화를 총지휘했다. 장검의 밤 사건으로 룀을 포함한 많은 돌격대 간부가 숙청되었지만 프리드리히는 숙청 초기에 바로 국가방위군에 돌격대의 무기고를 넘겨버리는 등 일체 저항을 하지 않아 숙청을 피했다.[4] 돌격대에서의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룀의 숙청 후 후임이 된 빅토르 루체에 의해 돌격대 제복의 착용은 금지되어 일시 당내에서 직무를 상실한 프리드리히는 1935년 1월에 총통이던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 다시 친위대로 이적하도록 명령되어 친위대 대장 계급을 받고 힘러의 참모가 되었다. 1936년 2월에 국경수비대 감독관이 되었고, 1938년 5월 16일에는 친위대 기마부대 감독관이 되었다.5.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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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크뤼거 장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