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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성장
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湌龍春【一云龍樹】之子也 【唐書以爲眞德之弟 誤也】 母天明夫人 眞平王女 妃文明夫人 舒玄角湌女也
휘는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왕비는 각찬(角湌) 서현의 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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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휘는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고 왕비는 각찬(角湌) 서현의 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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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는 제왕학을 배우며 왕위를 무난하게 상속받은 것이 아닌 폐위된 진지왕 계열의 왕족으로서 신라 정계의 비주류로 시작해 삼국의 다툼이 치열했던 7세기 삼국시대 후반이라는 특수한 시대 상황에서 자신의 국제 외교와 정치적 능력을 적극적으로 발휘해 비담, 알천 등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고 그의 집권을 기점으로 신라는 여러 측면에서 많은 변화를 이루게 된다.[1]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김용수)과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 사이의 아들로 선덕여왕의 조카이자 6촌 남동생이다.[2]
진평왕의 외손자이자 5촌 조카인 동시에 직계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이모이자 6촌 누나는 물론 5촌 이모이자 6촌 누나에게 왕위 계승권이 밀렸고, 심지어 진덕여왕 사후에도 알천의 양보가 없었다면 왕이 되지 못할 뻔했다. 이에 대해 김춘추의 혈통에 무언가 큰 결함이 있었다는 추측을 해볼 수 있는데 여러 설 중 조부 진지왕이 폐위된 후 후손인 태종 무열왕도 연좌되어 진골로 족강되었다는 설이 가장 널리 퍼져 있다.[3] 다만 이보다는 진평왕이 본인의 왕위 계승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 동륜태자의 자손들만을 성골로 삼았기 때문에 그 이외 신분이었던 김춘추는 밀렸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진흥왕-김구륜(3남)-김선품-자의왕후(문무왕비)로 이어지는 가계가 있었는데, 이들 역시 성골이 아닌 진골로 취급되었기 때문.[4]
혹은 아버지 김용수가 진지왕의 정비 지도부인의 소생이 아닌 골품이 낮은 여자 소생의 서자라는 설도 있다. 설화 속 비형랑이 김용춘을 모티브로 했으며 실제로 김용수가 서자였다는 추측이다. 비형랑은 폐주의 아들임에도 새롭게 즉위한 진평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는 김용수와 유사하며, 김용수가 황룡사 9층 목탑 같은 토목업에 종사하는 등 비형랑 전설과 김용수의 유사점은 상당히 많다.
이 외에 어머니 천명공주가 진평왕의 정비 마야부인의 소생이 아닌 비왕족 출신의 후궁이 낳은 서녀라는 설도 있다. 선덕여왕의 사후 천명공주나 천명공주의 아들인 김춘추가 아니라 사촌인 진덕여왕이 왕위에 오른 것이 이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천명공주의 생모는 알려져 있지 않은데 만약 천명공주가 진평왕의 서녀였다면 장녀였든 차녀였든 간에 마야부인 소생의 적장녀인 선덕여왕과 방계이지만 순수 왕족 혈통인 진덕여왕에게 계승권이 밀리는 것이 당연하다. 참고로 적자가 없으면 서자가 왕위를 잇는 방식이 자리잡힌 것은 조선 중기 이후로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서자에게는 어지간해서는 왕위 계승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적자가 없다면 형제가 왕위를 잇는 것이 대부분이었다.[5][6][7] 같은 신분끼리만 혼인하던 신라의 풍습을 고려하면 천명공주와 용춘 모두 서녀 혹은 서자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현대 학자들은 비담의 정체를 진지왕의 아들이자 용수의 형으로 추측하는 경우가 많은데, 진평왕이 비담(형)이 아닌 용수(동생)를 사위로 삼으면서 계승권이 꼬인 게 문제가 되었을 수도 있다. 진평왕이 무슨 생각으로 용수를 사위로 선택했는지는 불명이나, 이 경우 용수가 적자라도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부계로는 비담이 우선이지만 모계로는 용수-춘추가 우선이기 때문.[8] 알천도 용수의 아들이자 김춘추의 이복형이라는 설이 있는데,[9][10] 이게 사실일 경우 김춘추는 성골 모계 혈통을 내세워 부계로는 우위인 백부와 이복형을 밀어내고 왕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 당시 신라의 복잡하게 꼬여있던 왕위계승권과 그로 인한 다툼을 엿볼 수 있는 부분.[11]
태종 무열왕의 이름 춘추(春秋)는 당시 신라의 일반적인 작명법과는 상당히 이질적인 유학적 성격의 이름이었다.[12] 이는 춘추의 아들 법민(法敏), 인문(仁問), 문왕(文王)도 마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름은 어떤 지향성을 띠는 것이 일반적임을 고려하면 이는 김춘추 본인이나 길게는 이름을 지었을 아버지 김용춘부터 일가 전체가 기존 불교를 대신할 유교적 사회 질서와 개혁에 관심이 많은 성향이었다고 해석하여 훗날 태종 무열왕이 비담의 난 평정 이후 실권을 쥐면서부터 있었던 당나라 제도 도입과 각종 개혁도 그 영향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유교적인 이름을 지은 김유신[13]과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성향이 겹쳤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풍채가 매우 특이했는지 당 태종 이세민은 김춘추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고 신성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일본서기》에서도 일본에 외교를 위해 넘어갔던 김춘추에 대해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담소를 잘했다'(春秋美姿顔善談笑)고 기록되어 있다. 사실 국내 기록에서 외모가 뛰어나다고 써 있는 건 흔하지만 이 경우는 굳이 김춘추의 외모나 화술을 칭찬해줄 필요가 없는 적대적 국가 일본에서도 그런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실제로도 뭔가 사람을 끄는 외모와 언변의 소유자였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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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기이> 제1, -태종 춘추공-}}}{{{#!wiki style="text-align:right"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춘추는 한 끼에 쌀 3말과 꿩 9마리를 먹는 대식가이기도 했다. 다만, 이 구절은 다른 식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일례로 왕의 식사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를 기준으로 보면 왕을 위해 차린 음식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왕이 혼자서 다 먹지는 않는데 일부만 먹은 뒤 남은 반찬은 왕이 식사를 마친 뒤 밥만 바꾸어서 왕 밑의 신하들이 먹었다. 이걸 '물림상'이라고 하는데 현대인의 기준에서 이상한 풍습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왕이 신임하는 사람에게 왕의 음식을 내려준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윗사람들이 먹을 때는 아랫사람들을 생각해서 최대한 깨끗하게 반찬을 먹었다. 조선시대와 신라시대의 풍습이 같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보면 혼자서 다 먹었다기보다는 왕을 포함한 궁중의 신료들이 먹은 음식 전체라는 소리다. 무열왕 본인이 대식가였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무열왕 치세 신라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은유적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 밥그릇과 같이 삼국 시대 식기가 발견되고 있는데 그 크기나 규모를 보면 실제로 그 정도 양을 먹었을 가능성도 있다.
2. 왕이 되기 전
2.1. 청년기
신라의 풍월주(風月主) 박창화가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화랑세기의 기록 | ||||
17대 염장공 김염장 | ← | 18대 태종 춘추공 김춘추 | → | 19대 흠순공 김흠순 |
3. 외교 활동
김춘추는 진골 신분이었기에 아직 성골 왕족이 많이 남아있던 젊은 시절에는 유력한 귀족이었고, 스스로 학문을 닦아 왕이 되기 전에는 뛰어난 국제적 외교가로 활약했다. 김춘추의 외교 활동에 대해서는 평가가 다소 갈리기는 하지만 어쨌든 김춘추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이 결과적으로 신라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끝내 신라의 삼한일통으로 이어지게 된 것은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다. 또한 당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외교 활동을 벌였기에 7세기 동아시아에서는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정치가이기도 했다.김춘추의 딸 고타소와 사위인 대야성 도독 김품석이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있었던 백제의 대야성 침공 당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었는데 당시 서라벌에 머물던 김춘추가 이들의 부고 소식을 듣자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런 후 백제를 멸망시키겠다고 스스로 맹세하면서 지원군을 요청하고자 고구려로 향했던 것이다. 김춘추의 고구려행, 어떤 경우는 나당동맹 체결이나 백제 멸망전의 동기 자체를 김춘추 개인의 복수심으로만 부각시키려 보는 해석도 있는데[14] 물론 그것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수는 있겠지만 그 뿐 아니라 정치적인 타격도 김춘추 고구려행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대야성주 김품석은 아무래도 장인 김춘추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사람이었을 개연성이 높은데 정작 그 김품석이 대야성을 백제에 홀라당 내주게 된 원흉이었다. 대야성 전투의 전개 과정에 대한 기록을 보면 김품석이 끝까지 항전하지 않고 백제군에 항복하려 했는데 이는 화랑의 주요 이념인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처음에 대야성이 패하였을 때 도독인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이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하루 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가 지나서 "슬프다!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삼키지 못하겠는가?"라 하고 곧 왕을 찾아 뵙고 말하기를, "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게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라고 하자 왕이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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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여왕 11년(642년)}}}{{{#!wiki style="text-align:right"
7세기 전체가 신라인들에게는 전시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임전무퇴 정신을 얼마나 중요시했는지는 아막성 전투, 반굴, 관창, 김원술 등 사례가 많아서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런 와중에 비겁하게 항복하려 했다가 세게 통수를 맞고 처참히 죽은 김품석은 당시 신라인들에게 비난의 표적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이런 김품석이 속한 라인의 리더 격이었던 김춘추에게도 정치적으로 적지 않은 타격이 왔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신라 정계는 김춘추가 654년 즉위하기 전까지는 비담, 알천으로 대표되는 귀족 견제 세력이 나름 건재했고 이들 계파와 경쟁하는 구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춘추로서도 백제의 공세로 초래된 자신의 정치적 위기와 국가적 위기를 타개할만한 방안을 모색해야만 했다. 다만 이건 김춘추 본인이 다시 살아 돌아와서 인증하지 않는 한 답이 없기 때문에 무엇이 더 큰 이유인지는 알 수 없다. 국가적 위기는 대야성 함락의 결과가 일개 성의 함락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대야성은 대 백제 방어선의 가장 중요한 축인데 이게 붕괴된 것이었고, 이후 백제는 신라의 서부 지역을 맹공격한 결과 신라는 옛 가야 지역인 낙동강 서안 지역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다. 이와 동시에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해서 신라와 당나라의 연결 통로인 당항성을 공략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당나라와의 교류가 막히고 한강 유역도 위험해지므로 신라에게는 만만치 않은 위기였다.
고구려로 가기 전에 김유신과 맹세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떠나는 김춘추를 향해 김유신은 '공이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내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왕궁의 뜰을 짓밟게 될 것이오.'라는 패기가 흘러넘치는 말을 했고 김유신에게 '60일 이내면 돌아올 것인데 이 때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볼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김유신과 피를 나눈 맹세를 다졌다.[15]
3.1. 대고구려 외교
당시 고구려는 고구려를 좌지우지하던 권력자였던 연개소문이 직접 김춘추를 대접할 정도로 나름 정중하게 영접했다. 이후 김춘추는 보장왕 앞에 나아가 양국이 그간의 상쟁을 중지하고 화해하며 고구려가 현재 백제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신라를 도와 군사적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보장왕은 "죽령 이북 땅이 원래 고구려의 영역이었는데[16] 신라가 이를 돌려준다면 구원병을 보내줄 수 있다"고 답했다. 죽령 이북인 한강 유역은 신라의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그걸 다 돌려주면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약소국으로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고구려 본인들도 신라가 땅을 돌려줄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없고 단지 김춘추를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김춘추가 답변하기 힘든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되어 있다. 다만 고구려 입장에서는 이 정도 큰 대가를 받아내지 못하면 신라를 도와줄 이유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김춘추는 "이웃의 위기를 기회로 어찌 영토를 내놓으라 할 수 있습니까? 전 신하로서 어쩔 수 없으니 처분을 바랄 뿐입니다."라며 이를 거부하였고 결국 구금당하고 만다. 감옥에서 김춘추는 보장왕의 총애를 받는 고구려의 대신 선도해에게 청포 300보의 뇌물을 보낸다. 이를 받은 선도해는 김춘추를 찾아와 <토끼전>을 이야기해주며 거짓말로 자라를 속이고 위험에서 벗어난 토끼의 꾀를 상기시키며 융통성 있는 대답을 할 것을 당부했다. 이에 대해 연개소문이 그냥 겁만 줄려고 안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연개소문은 김춘추를 대접한 일 밖에 없다. 쿠데타로 영류왕과 대신들을 다 갈아마시고 1인 독재자였던만큼 연개소문이 보장왕을 조종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증거는 없다.
한편 김유신은 김춘추를 구출할 결사대[17]를 꾸려 한강을 넘어 북상해 고구려 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이를 신라에 스님으로 잠입해 있던 고구려 간첩 덕창이 고구려에 보고했고 김춘추 역시 <토끼전> 이야기대로 보장왕을 다시 만나 신라에 돌아가면 왕을 설득해 고구려 옛 땅을 돌려주도록 하겠다고 일단 지르자 고구려는 땅을 돌려준다는 약속도 받았고 신라군과의 충돌도 우려해서 결국 김춘추를 그냥 내보내줬다고 한다. 이후 김춘추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도중 황해 바다 위에서 고구려 순찰선을 만났는데 고구려군은 김춘추를 죽이려 했으나 김춘추를 보좌하던 온군해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으로 김춘추처럼 위장해 대신 죽어 김춘추는 무사히 살아돌아가는 일도 있었다. 고구려는 김춘추를 죽이려 했고 김춘추는 거짓말로 겨우 빠져나왔으니 김춘추가 탈출한 뒤로 신라와 고구려의 외교 관계는 고구려가 668년 멸망할 때까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에서의 협상 자체는 실패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이 담판으로 김춘추는 정치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한다. 이미 선덕여왕 말년쯤 되면 신라 내부에서도 성골 여왕 다음에는 김춘추가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걸 알고 있었다.[18] 그런 김춘추가 목숨을 걸고 적국에 가서 담판을 지으려 했으니, 신라인들에게는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영웅이라고 각인시켜주는 행동이었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김춘추는 연개소문이 만약 우호적으로 나와주면 가장 좋지만, 그게 아니면 아닌 대로 나름대로 이득이 있다는 식으로 이미 계산을 해 두었던 셈이다.
3.2. 대왜 외교
647년에 비담의 난이 김춘추 세력 주도로 평정되었고 상대등 비담을 필두로 하는 귀족 세력은 약화되었다.[19] 동시에 진덕여왕이 즉위했지만 나이든 진덕여왕을 마지막으로 성골 혈통의 대가 끊길 것이 기정사실인 상황에서 차기 국왕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이 바로 김춘추였기에 자연히 신라 최대의 권력자가 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으로 《구당서》에서는 648년 김춘추가 신라의 국상(國相)이었다고 쓰고 있는데 국상을 섭정과 비슷한 직책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삼국유사》에서는 648년의 김춘추가 동궁(東宮)(태자)에 해당하는 신분이었다고 쓰고 있다. 이렇게 국내 문제가 일단락되자 김춘추는 좌절된 고구려 외교를 만회하기 위해 이번에는 왜국을 방문하여 양국 현안 절충을 모색하였다.김춘추가 일종의 외교관으로서 일본에 다녀온 사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없고, 《일본서기》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646년 9월 기사를 보면 왜 조정은 당나라 유학생 출신 관료인 타카무코노 쿠로마로(高向玄理)[20]를 신라에 보내 '질(質)' 파견을 요청했다. 이에 응해 비담의 난이 평정된 후 김춘추는 타카무코노 쿠로마로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단 교섭을 왜국 측이 먼저 요청한 것을 알 수 있고, '질'[21]은 인질을 의미하는데 보통 상대국에 대한 굴종의 의미로 보내져 장기간 그 나라에 체류하는 사람이지만 김춘추는 곧 본국으로 돌아와 648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건너갔다. 사실 김춘추를 인질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본서기》의 편찬 의도와 부합하는 건데 신라 중대 왕실의 시조인 김춘추를 인질로 규정하여 '신라는 왜의 번국'임을 내세우려는 소산이라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는 인질이 아니었고 《일본서기》가 늘 그러듯 김춘추가 사신으로 넘어온 것을 인질로 과장한 것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김춘추가 전통적으로 신라의 적대국이자 오히려 백제와 친밀했던 왜에 건너간 이유와 김춘추가 일본에서 어떤 활동을 펼쳤는지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불분명하다. 학자들이 추정하기로는 나름대로 왜와의 외교를 통해 다른 가능성을 탐색했던 행동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학자들의 자문을 받은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백제와 왜국이 당시에 잠깐 사이가 안 좋아진 타이밍을 김춘추가 포착해냈고, 백제를 상대하기 위한 지원군을 끌어내는 게 제1목적이지만 군대를 빌리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한반도에 대해 왜국이 중립적 입장을 가지도록 유도하려 했을 것이라고 풀어냈고, 노태돈 교수는 저서 《삼국통일전쟁사》에서 백제에 대한 왜국의 군사 지원을 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을 가능성도 제기했으며, 신라와 왜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다. 다른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지 않고 당시 신라 정계 최고의 거물인 김춘추가 직접 바다를 건너갔다는 점에서 신라가 왜를 대충 찔러본 게 아니라 상당한 기대를 갖고 갔음을 알 수 있는데 당시 왜의 정세를 살펴보면 김춘추가 왜로 건너가기 직전인 645년에 친 백제계 가문인 소가씨가 몰락하는 다이카 개신이 일어나는데 김현구의 견해에 따르면 이 때 소가씨를 몰락시키는데 큰 활약을 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가 그동안의 백제만 바라보는 외교를 벗어나 상대적으로 친신라파였다고 보기도 한다.
일본 측 기록에서도 써 있는 '훌륭한 풍채와 세련된 화술'로 여러 왜의 신하들과도 교류하며 신라와 왜의 관계에 대해 협의를 했던 것으로 보이고 일본이 654년 당에 견당사를 보낼 때 신라 땅을 지나서 가는 것을 신라가 허락해 준 것을 볼 때 신라와 왜 양국간에 어느 정도 우호적 교섭이 논의된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왜는 이후로도 근본적으로는 신라보다는 친백제 외교 노선을 유지했고[22] 백강 전투 이전까지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김춘추의 대왜 외교는 뚜렷한 결실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도 김춘추가 직접은 아니지만 일본에 몇 차례 더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김춘추는 당나라로 가서 648년 결국 나당동맹을 체결하는데 이 때 당나라의 중국식 관복을 받아들인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51년에 신라에서 사찬 관등에 있는 지만(知萬)이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일본에 보내는데 지만 사찬은 당연히 당나라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었다. 왜국 조정은 이것을 핑계로 사신을 꾸짖어 쫓가보내고 신라 공격 논의까지 벌어지는데 나당동맹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53년 8월에 백제가 다이카 개신 이후 왜. 고구려와 다시금 우호 관계를 맺어 진영이 확실히 고구려 + 백제 + 말갈 + 돌궐 + 왜 VS 당 + 신라로 갈리게 되었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 따르면 조선 시대 동래(東萊)의 절영도(絶影島)에 태종대(太宗臺)가 있는데 속전(俗傳)하기를 ‘신라의 태종(太宗)이 대마도(對馬島)를 토벌할 때 주필(駐蹕)하였던 곳이라 한다.’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김춘추의 대왜 외교 이후에도 신라와 왜의 관계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험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제로 태종 무열왕 재위기에 대마도를 토벌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고려 이전의 기록에서 교차검증되는 부분이 아니라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고 있고 조선 시대에 그런 전승이 전해지고 있었다는 근거는 된다.
3.3. 대당 외교
648년 3월 당나라에 파견된 신라 사신에게 당태종 이세민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삼았고 이 문제로 김춘추는 진덕여왕의 아우이자[23] 신라의 이찬간(伊贊干)으로서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계기는 당나라가 신라에 태클을 거는 듯한 형태였지만 이는 명분이었고, 실제 회담은 화기애애했는데 당태종은 김춘추를 극진히 우대했다. 김춘추도 신라에 필요한 요구를 급하게 먼저 꺼내지 않은 채 학문 관련 주제를 먼저 꺼내 당태종과의 공감대를 먼저 차근차근 만드는 화법을 구사했고, 장안에 오래 머물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리고 당나라 조정 중신들과도 교류하면서 양국의 이해 관계를 확인하였다.당태종은 과거 신라 사신과 선덕여왕을 모욕하다시피 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건 신라도 당나라의 힘을 이용해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서 벗어날 길을 모색했지만 당시 상황은 당나라 역시 신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는 기록에 있는 것처럼 김춘추의 외모나 말솜씨가 친화력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당태종이 예전에는 신라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동안 고구려-당 전쟁에 여러 차례 실패하면서 후방 지원 세력으로서 신라의 지정학적 가치를 깨달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같은 편으로 삼기 위해 환대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이로써 양국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해 관계의 일치를 바탕으로 김춘추는 당나라 방문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였는데 3남 김문왕을 장안에 머물며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로 남게 하여 나당 외교의 거점을 확보했으며 김춘추 입장에서도 아들을 통해 최강대국 당나라의 유력자들과 계속 교류할 수 있었으므로 신라 정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태종과 만나서 고구려와 백제를 멸한 후 평양 이남 지역은 신라에 귀속시킨다는 약속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흔히 나당동맹의 결성 시점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양국의 합의점을 찾아냈지 구체적인 시기나 계획 등은 나오지 않은 시점이었다.
김춘추는 단지 당나라의 힘을 빌리는 것뿐만 아니라 체계화된 당나라의 제도와 유학을 도입해 신라를 개혁하는 데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김춘추가 당나라에 도착하자마자 당태종에게 요청해 국학(당나라 국자감) 견학을 요청한데서도 드러난다. 당태종은 기뻐하며 직접 국학을 참관시켜 주었고, 직접 지었던 <온탕비문>(溫湯碑文)과 <진사비문>(晉祠碑文), 직전에 본인이 직접 편찬에 관여해 완성한 역사서인 《진서》(晉書)를 김춘추에게 선물로 주었다. 김춘추는 귀국한 뒤 진덕여왕에게 요청해 신라 관복의 양식을 당나라의 복식과 같게 하였으며[24] 신라 고유의 연호를 없애고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이것은 신라의 대외 관계 방향성을 표방한 것으로 신라는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상징적으로 귀속하겠다는 점을 보여준 상징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25] 당나라는 649년 당태종이 죽고 당고종 이치가 즉위하자 고구려에 대한 압박을 계속해 나갔고 거란과 요서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당나라에 온 백제 사신을 통해 백제가 신라에게 빼앗아간 성을 돌려주고 신라 공격을 계속하면 당나라가 개입할 것을 천명했으며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신라를 지원할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는데 이로써 나당동맹은 명백히 표명된 셈이다.
4. 임금 시절
비담의 난 진압 후 신라 정계의 최대 실력자로 떠오른 김춘추는 진덕여왕 치세에서 왕권을 강화하는 제도의 정비도 단행하였다. 이 때 신라의 중앙 관서 조직은 크게 확충되었는데 651년에는 재정 지출을 담당하는 창부, 입법과 형벌을 관장하는 좌리방부를 창설하였으며 국가 기무를 총괄하는 최고 집행 기구로서 집사부가 개설되었다. 위에서 언급된 당의 복식 도입을 주도하고 집사부의 설치를 건의한 사람도 역시 김춘추였다.654년 진덕여왕이 승하하면서 비로소 성골 혈통이 완전히 끊기자 어쩔 수 없이 진골 중에서 왕을 추대해야 하는 순간이 왔고 화백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김춘추 대신 당시 상대등이었던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의견도 약간 있었지만 자신감이 없었던 알천이 건강이 좋지 않음 등 핑계를 대어 스스로 양보하는 식으로 물러나[26] 김춘추가 순조롭게 첫 번째 진골 왕에 올랐다. 할아버지 진지왕이 폐위당한 지 76년만의 일이었다. 김춘추의 능력이나 세력도 세력이지만 혈통을 따져 봤을 때도 진골 중에서는 성골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27] 별 문제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의 분류에 따르면 신라 중대의 시작이며 일연의 분류에 따르면 신라 하고(下古)의 시작이었다. 어느 쪽에 있어서도 신라 역사상 중대한 전환점이 된 것은 사실이다.
진덕여왕 때부터 이미 무열왕이 실권을 가지고 추진했던 제도 개혁은 즉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대신들을 감찰하는 기관인 사정부(司正府)를 설치해 통치가 한층 정교해졌고, 율령 체제도 당의 율령을 본떠 좀 더 업그레이드했다. 김춘추가 태종 무열왕으로 즉위한 이후인 654년에는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상세히 살펴 이방부의 법제 60여 조를 정비했다. 신라에서 율령은 법흥왕 때 처음 반포했으나 이를 다시 정비한 것이며, 율령 개정은 이후 문무왕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조치들은 신라의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에 도움이 되었으며 신라에서 가장 왕권이 강대했던 시기라 평가되는 중대 왕권의 기본적 골격과 체제가 김춘추에 의해 다져지게 되었다.
흔히 진평왕 때부터 열세였던 신라가 태종 무열왕이 즉위하자 다시 상승세를 타고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알려져 있기도 한데, 사실 진덕여왕 말기 김유신이 20여개의 성을 함락하며 신라는 상승세를 타는 듯 했으나 고구려와 백제, 말갈이 신라를 계속 침공해 여전히 엄청난 위기였다. 태종 무열왕 재위 2년(655년)에는 고구려, 백제, 말갈이 연합해서 신라 33개 성을 빼앗아 나누어 가졌고, 재위 5년째인 659년에도 하슬라(강릉시) 방어선이 말갈과 고구려의 위협을 받아서 남쪽의 실직(삼척시)을 2선 방어 기지로 삼아야 했다. 이 연합군에는 연개소문과 의자왕, 윤충은 물론이고 대야성 전투 후 백제에 투항한 검일과 모척도 가담했을 것이다. 여튼 태종 무열왕도 세 나라의 연합군을 처단하기 위해 655년부터 당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냈으나 아직까지는 연락이 없었다. 일단 당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백제보단 고구려 정복이었는데 신라 측은 고구려와 같은 편이자 고구려의 후방에 위치한 백제가 걸림돌이 되므로 고구려보다 먼저 멸망시켜야 한다는 것을 어필하고 있었고 실제로 백제 의자왕은 650년대 들어서 대놓고 반당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650년대 중후반 당시 당은 당태종 및 장손무기로 대표되는 관롱집단 출신 개국공신 세대가 저물고 측천무후와 그녀를 돕는 신진 세력으로 세대 교체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태종이 쭉 해왔듯 고구려 직공을 계속하는 것과 일단 백제부터 공격한 후 고구려 공략 둘 중 뭐가 먼저일지 아직 정하지 못하고 원정군 파견 결정을 미뤄두고 있었다. 그래서 《삼국사기》에는 이 무렵의 태종 무열왕이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冬十月 王坐朝 以請兵於唐不報 憂形於色
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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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 무열왕 6년 기사}}}겨울 10월에 왕이 조정에 앉아 있는데, 당에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회보가 없었으므로 근심하는 빛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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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659년 10월, 태종 무열왕의 꿈에 앞서 죽은 신하인 장춘과 파랑이 나타나 "당에서 내년에 백제를 친다고 합니다."라는 보고를 하고 사라졌다고 한다. 태종 무열왕은 두 사람을 추모하는 불교 의식을 거행했고 그 자손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으며 한산주에 장의사(莊義寺)라는 절을 세워 이들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물론 실제로 귀신이 나타나 정보를 알렸을 리는 없고 그만큼 양국의 이해 관계가 극적으로 맞아 떨어졌음을 이후 일화로 각색한 기록이다.
이듬해 660년 결국 당은 서역 정벌의 명장인 소정방에게 130,000명의 대군을 맡겨 황해를 건너 신라로 보냈고,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어 660년에 백제를 단기간에 멸망시켰다. 대장군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 주력 군대가 황산벌 전투를 거쳐 사비성, 웅진성 공성전에서 싸우는 동안 무열왕은 6월 29일부터 후방 금돌성(今突城, 지금의 상주시)에서 머물렀고 의자왕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자 660년 7월 29일 사비성으로 이동했다. 8월 2일에 열린 정식 항복식에서 의자왕이 직접 따르는 술잔을 받고, 과거 대야성 함락 때 백제군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백제에 투항한 배신자 검일과 모척을 처단해 딸 고타소와 사위 김품석의 복수를 했다.
그러나 백제 수도권을 속전속결로 공격해 무너트렸지만 아직 백제의 각 지방에는 여전히 지방 세력이 남아있었고, 백제 남쪽 각 지방에서 부여복신, 도침 등이 이끄는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무열왕은 이전에 전장에서 직접 지휘하기보다는 전장은 김유신에게 맡기고 주로 후방에서 원격 지휘했던 것과 달리 태자 김법민과 함께 친정해 10월 9일 이례성(尒禮城)을 쳐 곧 함락시키고, 이어서 백제의 20여개 성이 항복하였다. 10월 30일에 구도 사비(泗沘) 남쪽의 산마루에 있던 부흥군을 공격하여 1,500명의 목을 베었고, 11월 5일에는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공격해 7일에 이겨서 700명의 목을 베었다. 11월 22일 신라 도성으로 돌아와 백제 멸망전에서 신라군으로서 공을 세운 선복, 두질, 유사지, 설유 등과 신라에 투항해서 공을 세운 백제인 충상, 상영, 자간 등에 대한 논공행상을 벌였다.
결국 그가 원하던 삼국통일의 완성은 보지 못하고 백제 잔여세력과 고구려, 당나라까지 정리할 역할은 아들 문무왕에게 물려준채 661년 6월에 죽었다. 딸의 복수를 마치고 오래지 않아 죽었으니 일종의 복수귀 같은 인생인 셈. 삼국을 통일한 왕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은 편인데 태종 무열왕은 어디까지나 즉위 전에 왜, 당, 고구려를 넘나든 외교 활동이나 즉위 후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군주이다. 백제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정리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당나라 군대를 격파해 신라의 삼국통일을 완수한 사람은 그의 아들 문무왕이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것이 아니라 삼국통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왕으로 보는 것이 맞다.
묘호로 태종을 올렸는데 훗날 신문왕 때, 당태종 이세민과 묘호가 같아서 당나라에서 이것을 문제삼아 묘호를 고치라고 압력을 넣었지만 신라 측에서는 이를 완곡한 어조로 거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5. 최후
흔히 병사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백제부흥군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설도 구전되어 온다. <무열왕 본기> 마지막에 나오는 아래 기록을 근거로 상상을 더한 것이다.六月 大官寺井水爲血 金馬郡地流血廣五步 王薨
661년 6월에 대관사(大官寺)[28]의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29]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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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661년 6월에 대관사(大官寺)[28]의 우물 물이 피가 되었고, 금마군(金馬郡)[29] 땅에 피가 흘러 그 넓이가 다섯 보(步)가 되었다. 왕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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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 지방은 미륵사나 왕궁리 유적 등이 있던 백제의 주요한 지방이었기 때문에 정복된지 1년도 안된 661년에 신라의 왕이 그 곳에 갔다가 백제부흥군에 의해 시해되었음을 암시할 수 있다는 것. 보통 《삼국사기》에서 암살, 숙청, 정쟁 등 정치적 격변을 그대로 기록하기보단 은유를 통해 나타낸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가능한 해석이지만, 교차 검토 가능한 근거, 또는 기록이 없는 이상 근거가 희박한 상상의 영역일 뿐이다.[30]
일단 당시 일본 측 기록에 전혀 무열왕 암살을 시사하는 기록이 없는 것이 이 설의 주요 문제 중 하나다. 당시 백제부흥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관심을 가지며 한국 기록보다 시시콜콜한 사정을 많이 기록했던데다 신라와 적대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큰 일이 있었다면 은유로 숨길 필요가 없는 일본 측 기록에도 전혀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도 무열왕 암살설의 신빙성을 대폭 떨어뜨리는 점이다. 3년 간의 백제부흥운동은 일본의 지원이 컸고 결국 부흥에 실패한 뒤 많은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는데 무열왕 암살 같은 '매우 큰 일'을 백제인이 했다면 일본에서 그걸 기록에 남겼을텐데 그러지 않았다. 신라와 사이가 대대로 안 좋아서 역사왜곡과 디스를 일삼던 당시 일본 입장에서도 여기저기 소문내고 다닐 정도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추가로 백제 땅 한 켠에서 웅진도독부를 경영하던 중국 기록에도 무열왕이 암살당했다는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무열왕은 승하 당시 이미 환갑이 가까워지는 나이로 당시 시대를 감안하면 고령이었다. 특히 인생의 마지막 1년 동안에는 백제 사비까지 행차해 항복식을 치렀고 부흥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전장에서 여러 번 친정을 하는 등 수많은 일을 겪었다. 이 와중에 타지에서 과로로 인해 몸이 축났다고 가정해도 납득이 가는 부분이다.
그래도 창작물에서는 극적인 장면이 나오다보니까 이런 암살설을 적극적으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다. 드라마 <삼국기>에는 백제의 패장 윤충에 의해 암살당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남교의 《고백신조》(高百新鳥)[31]를 원작으로 한 드라마로, 여기서도 무열왕이 윤충의 손에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김정산의 소설 《삼한지》에는 백제의 왕족 부여궁, 이문영의 소설 《취리산》에는 백제의 유민 사충에게 암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6. 무덤(무열왕릉)
자세한 내용은 무열왕릉 문서 참고하십시오.무열왕릉은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 제20호.
[1] 다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비담과 알천도 진지왕계로 추정하기 때문에 김춘추는 동륜계 단절 이후 진지왕계의 다른 경쟁자들과도 치열하게 싸워 왕위를 쟁취한 것으로 보인다.[2] 학계에서 위서로 취급받는 《화랑세기》 필사본에서는 용춘의 형인 용수(《삼국사기》 등에는 용춘과 용수가 동일 인물이다.)와 진평왕의 장녀인 천명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18세 춘추공 부분에는 용춘으로 되어 있다. 용춘이 딸밖에 없어 김춘추를 아들로 삼았다고 한다.[3] 다만 이 설을 따른다 해도, 진지왕이 폐위되고 진평왕이 즉위했을 당시 그는 불과 10대 초중반의 나이였으므로 진평왕의 외손자인 김춘추는 단 한 순간도 성골이었던 적이 없었을 것이다.[4] 다만 현대 학자들은 김구륜의 어머니가 사도왕후보다 백제 성왕의 딸 소비 부여씨로 유력시하기 때문에 부여씨 문제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비 부여씨도 엄연한 진지왕의 정실부인이었으며 구륜계인 자의왕후가 문무왕의 처가 된 걸 보면 구륜계도 김춘추 생전에는 나름 위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구륜계는 동륜계, 진지왕계 다음가는 서열이었으니까. 훗날 문무왕계가 몰락한 뒤 진종계(지증왕 3남)인 원성왕계가 신라 왕위를 차지하고 구륜계가 서라벌에서 밀린 정황이 있지만(이 과정에서 추풍령 귀족인 아자개의 조상과 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남은 문무왕계조차 강릉 김씨로 밀려난 상황이니 별다를 것도 없다.[5] 일례로 조선의 제2대 왕인 정종은 많은 서자들을 두었으나 정실 왕비 소생의 적자가 없었기에 그의 동생인 이방원이 태자가 되었다.[6] 신라 1,000년 동안 서자가 왕이 된 것은 제52대 효공왕이 유일한 케이스였다. 심지어 이 경우도 아버지 헌강왕이 승하한 후 숙부 정강왕, 고모 진성여왕한테까지 왕위가 넘어갔다가 더 이상 후계를 이을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효공왕을 태자로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서자라는 출신 성분상의 한계로 인해 재위 기간 내내 실권을 잡지 못한 것으로 유력시되고 있다.[7] 그런데 천명공주가 서녀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선덕여왕의 국서라고 기록된 음갈문왕이 국반 갈문왕의 오기이고, 국반 갈문왕이 선덕여왕과 혼인하면서 자연스럽게 국반 갈문왕과 월명부인의 딸인 진덕여왕이 혈연적으로는 사촌 언니인 선덕여왕의 양녀가 되어 왕위 계승권이 높아졌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음갈문왕은 국반이 아니라 진평왕과 국반 사이의 형제인 김백반이라는 설도 있으며, 백반설일 경우 단순히 마지막 성골이라서 즉위했을 가능성이 높다.[8] 선덕여왕 사망 1~2년 전까지 살아있던 용수가 황룡사 9층 목탑 건립 같은 중책을 맡기는 했지만 김춘추의 행적이 더 활발했던 것도 이 문제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김춘추가 외교 활동이 잦아서 그렇게 보일 뿐 생전에는 용수가 춘추보다 더 존재감이 강했을 수도 있다.[9] 동륜계가 진덕여왕을 끝으로 단절되고 화백회의에서 알천이 김춘추보다 먼저 거론되었으며 알천이 스스로 김춘추보다 연상이라고 밝혔기 때문. 알천이 용수의 장남이라면 김춘추보다 먼저 거론되어도 자연스럽다.[10] 용수가 천명공주와 결혼했을 때 용수의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데, 10대 중후반에 결혼하던 당대 특성상 용수는 만혼이다. 전처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소리.[11] 선덕여왕 사후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즉위를 주도한 건 이 때문일 수도 있다. 성골 여성의 계승권 우위를 최대한 강조해야 비담, 알천처럼 부계로는 밀리지만 모계로는 위인 김춘추의 계승 근거를 강조할 수 있기 때문.[12] 유교의 핵심 경전인 사서오경 중 하나가 《춘추》다.[13] 당대의 현자로 이름높았던 북주 사람 유신(庾信)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14] 보통 드라마 등 매체에서는 극적인 스토리를 뽑아내기 위해 그러는 경우가 많다.[15] 이 때 김유신은 압량주(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군주로 임명된다.[16] 이 시점에서 100여 년 이전에 진흥왕이 고구려를 쳐서 얻었던 한강 유역을 말한다.[17] 결사대 숫자는 <신라본기>에는 10,000명, <김유신 열전>에는 3,000명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8] 다만 이 때까지는 비담, 알천 같은 다른 쟁쟁한 후보도 아직 있었기에 김춘추는 유력한 대권주자인 셈이었다.[19] 이미 646년 겨울에 김춘추가 일본 사신 타카무코노 쿠로마로(高向玄理)와 함께 일본으로 출발했고, 비담의 난은 김춘추의 부재를 틈타서 일으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비담의 난과 관련된 사료에는 김유신의 역할만 강조될 뿐 김춘추가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20] 수나라에 32년간 유학 경력이 있으며 이후 다이카 개신의 핵심 인물이다.[21] 일본어에서 인질에 해당하는 '질'의 훈독은 '무카하리'(人力)라고 읽는데, 그 뜻은 '왕의 대리인'이라는 뜻이므로 고대 일본에서 받아들여지는 인질의 개념은 인신공납의 개념이 아님을 알 수 있다.[22] 이후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가 위기에 처하자 왜는 수 만명의 구원군을 보냈으며, 백강 전투에서 충돌했다.[23] 물론 진덕여왕과 김춘추가 실제로 누이 관계는 아니지만 재종 관계이고, 이런 식의 외교적 목적으로 먼 방계 왕족을 가까운 왕족인 것처럼 행세하게 하는 건 조선시대까지 종종 있었다.[24] 1971년 중국 섬서성박물관이 발굴한 <예빈도> 그림에서는 당고종 아들의 무덤에 부장된 그림인데도 신라 사신이 조우관을 쓰고 있다. 《일본서기》에도 신라 사신이 이 때부터 중국식 옷을 입었다고 하므로 전체적인 의복을 바꿨지만 관모는 독자적 조우관을 유지했다.[25] 이때부터 고려를 거쳐 구한말까지 벼슬아치의 관복은 중국식으로 입게 된다. 정작 중국에서는 청나라부터 복식을 만주족 스타일로 교체해서 오히려 한국이 중국보다 더 오랫동안 중국식 관복을 이어가게 되었다. 청나라 한족들이 조선에 와서 부럽다고 울었을 정도였다.[26] 이건 핑계가 아니라 정말로 알천의 건강이 좋지 않았을 가능성도 높다. 알천은 636년 옥문곡 전투 당시 이미 지휘관이었으므로 654년에는 적어도 중년인데, 상대등을 역임할 정도의 귀족이면 이미 고령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그의 생몰년은 불명이지만 신라에서 보통 상대등직이 죽을 때까지 역임하는 종신직이었음을 감안하면 바로 다음 해 655년에 이찬 금강이 상대등이 되기 때문에, 김춘추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1년 안에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27] 진평왕의 아버지 동륜태자의 집안만을 성골로 삼았다는 설을 채용해도 그의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이었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그도 성골 집안에 속한다.[28] 지금의 익산 지방의 사찰터에서 '대관'이라는 글자가 찍힌 기와가 출토되었다.[29] 지금의 익산 지방.[30] 뒷날 고려의 고종이 승하하기 1개월 전에 자운사 연못 물이 피로 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본 보문각교감 강교가 "옛적 신라의 무열왕이 승하했을 때도 대관사 물이 피로 변했다고 하는데 불길한 징조다"라고 해석하는 기록이 존재한다.(《고려사절요》, 고종 46년)[31] 고구려, 백제, 신라의 머릿자와 야마토 정권 아스카(飛鳥) 시대의 鳥를 따 지은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