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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 國立臺灣大學 National Taiwan University 국립타이완대학 | ||
대학 정보 | ||
<colbgcolor=#66232E> 교훈 | <colbgcolor=#66232E><colcolor=#fff> 중국어 | 敦品勵學、愛國愛人 (ㄉㄨㄣㄆㄧㄣˇㄌㄧˋㄒㄩㄝˊ、ㄞˋㄍㄨㄛˊㄞˋㄖㄣˊ) |
한국어 | 품성과 학문의 함양에 힘쓰고, 나라와 사람을 사랑하라 | |
국가 | [[대만| ]][[틀:국기| ]][[틀:국기| ]] | |
분류 | 국립대학 | |
개교 | 1928년 3월 17일 ([age(1928-03-17)]주년) | |
총장 | 진문장 (陳文章) | |
주소 | 타이베이시 다안구 쉐푸리 | |
재학생 | 학사 | 16,773명 (2021년) |
석사 | 12,533명 (2021년) | |
박사 | 3,668명 (2021년) | |
교직원 | 교원 | 2,029명 (2021년) |
직원 | 6,765명 (2021년) | |
교색 | NTU Maroon (#66232E) NTU Gold (#B29A1C) | |
링크 |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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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ntegrity, Diligence, Fidelity, Compassion.
敦品勵學,愛國愛人
敦品勵學,愛國愛人
국립대만대학(국립타이완대학)은 대만 타이베이시 다안구 쉐푸리(學府里)에 있는 대만의 대표적 대학이다. 전신은 일본 제국에 의해 1928년에 설립된 다이호쿠제국대학으로, 1945년에 행정원에 의해 국립타이완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약칭은 타이다(臺大)이다.[1]
2. 평가
▲ 국립타이완대학 2021년 QS 세계 대학 랭킹 66위 |
역사적으로 제국대학을 전신으로, 모든 학술 분야에서 타이완 1위를 유지하고 있으며 대만 대학으로서 대만 학벌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다. 1986년에 타이완 본성인으로 첫 노벨상을 수상한 리위안저 역시 국립대만대학 출신이다. 출신 인물들 가운데 장징궈 이후 민주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통 5명, 부총통 5명, 수도 타이베이의 시장 2명 등이 있다.
1990년대 이전에는 물론이고, 중국 대학들 세계 순위가 본격적으로 인플레 되기 시작하기 전인 2000년대 중반까지 중국, 홍콩 등 중화권 전체에서 최고 명문교로 꼽혔다. 중국의 상하이교통대학이 발표한 ARWU 세계500대 대학 순위로는 제1회(2003년) 중화권 1위를 기록했다.[2] 중화권 최고 명문 '국립대만大' 기사 참고.
국제적인 기관의 평가로는 2021년 QS 세계 대학 랭킹에서 66위를 기록했다.[3] 2021년 THE 세계 대학 랭킹에서 97위, 2021년 ARWU(세계 대학 학술 평가) 에서는 201-300위를 기록했다.
이공학, 의학 분야에서는 중국 본토에서도 명성이 드높다. 중국은 의학 교육이 아직 체계적이지 않은 것에 반해 타이완의 경우 과거 서양 의학을 빠르게 받아들여 체계화를 단행하였었다. 또 의사에 대한 대우 및 교육도 한국과 비슷한 노선을 걸음으로 인해 전반적 수준이 높은 편이다. 공학의 경우 세계 유수의 반도체 회사들이 타이완에 있는 만큼 정밀 공학, 그중에서도 반도체 공학에서 특출나다. 학내에 TSMC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NTU-TSMC 연구소도 존재한다.
3. 역사
3.1. 대만일치시기
자세한 내용은 대북제국대학 문서 참고하십시오.▲ 대북제국대학 정문(출처) |
- 1895년 6월 18일: 현재 국립타이완대학 부설의원의 전신인 대만병원(臺灣病院) 개원
- 1922년: 대만 총독 덴 켄지로(田健治郎)가 제국대학 설립을 위한 계획을 개시
- 1925년: 제10대 총독 이자와 타키오(伊澤多喜男)가 대만문화의 중심으로 삼을 제국대학 설립계획을 구체화[4]
- 1928년 3월 17일: 쇼와 3년 칙령 제31호 대북제국대학관제(臺北帝國大學官制) 공포, 대북제국대학 설립[5]
- 1928년 4월 1일: 문정학부, 이농학부 개강(제1회 신입생 59명)
- 1936년: 의학부를 설치하고 1897년 개교한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를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
- 1938년: 부속의원 개원
- 1941년 7월: 예과 설치
- 1943년 3월: 이농학부를 이학부와 농학부로 분리
- 1943년 5월: 공학부 설치
- 1944년: 재학생 394명 중 대만인 117명, 도서관 장서량은 9개 제국대학 중 3위
- 1945년: 문정학부, 이학부, 농학부, 공학부 등 5개 학부(114개 강좌) 재학생 382명
- 1945년 11월 15일: 중화민국 정부가 대북제국대학을 접수(책임자 나종락(羅宗洛)), 중국식 학제로 개편하고[6] 국립대북대학(國立臺北大學)으로 개칭
- 1945년 12월 15일: 중화민국 행정원 결의에 따라 국립대만대학(國立臺灣大學)으로 개칭
3.2. 중화민국 시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했다. 카이로 선언과 포츠담 선언에 의해 타이완 섬은 중화민국에 귀속되는 것으로 결정된 바, 10월 25일부로 중화민국군에 접수된다. 다이호쿠제국대학은 1945년 11월에 국민정부 교육부에 접수되어 '국립타이베이대학'이 되고, 공식적으로는 동년 12월 15일에 행정원 결의로 교육부 결의에 따라 '국립타이완대학'으로 개칭되며 중국식 학제에 따라 예과를 통합하며 '학부' 명칭이 '학원'으로 바뀌고 문정학부가 문학원과 법학원으로 분리되어 6개 학원(學院) 22개 학계(學系) 체제로 개편되었다. 다이호쿠제국대학이 국립대만대학으로 개편되는 과정과 관련해서는 링크 참조.1947년에는 대만총독부 다이호쿠경제전문학교[7]를 1947년 법학원 상학계[8]로 흡수통합하였다. 대만일치시기 대만의 구제전문학교 중 의학전문학교는 1936년에 이미 제국대학에 부속 의학전문부로 흡수된 상태였으며 공업전문학교는 타이난에 있었고 농림전문학교[9]는 타이중시에 위치해있어서 개별 대학으로 승격됐다. 대만 유일의 구제고등학교였던 다이호쿠고등학교는 다이호쿠제국대학과 가까이 있었지만, 시급했던 중등교원 양성에 집중하기 위해 국립대만사범대학으로 별도 승격되었다.
1928년 개교 후 현재까지 자타공인 명실상부 대만의 최고학부로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대만에서는 물론이고, 1949년 국부천대로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대만으로 천도한 이후 지금까지 대만을 넘어 중화권[10] 전체에서 수위로 꼽히며 해당 권역으로 진학을 희망하는 전세계 화교들이 지망하는 학교다. 2003년부터 상하이교통대학에서 발표하기 시작한 세계대학순위 ARWU에서 2003-2004년 연속으로 중화권 최고 명문 '국립대만大'가 꼽혔다.[11] ARWU 대학순위 참조. 2005-2007년에는 칭화대와 공동 1위, 그리고 2008-2013년에 다시 대만대가 단독 1위를 기록했다.
본래 대륙 시절 중화민국의 명목상 최고학부는[12] 난징에 있었던 국립중앙대학(國立中央大學)이었고,[13] 대만대학은 일본제국 대만의 최고학부인 다이호쿠제국대학이었으므로 2차대전 종전 후 중화민국이 일본 제국 대만총독부를 접수한 후 한국으로 치면 거점국립대학교 중의 하나가 될 수도 있지 않았겠냐는 상상도 있지만,[14] 국공내전에서 패배하고 대만으로 도주하면서 대만이 중화민국의 사실상 전부가 되었고, 국립대만대학은 경쟁자도 없이 독보적인 대만의 최고학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15]
(과거)
국부천대 이후 대만에서 대만대학 다음 순위인 2위 대학으로는 국립칭화대학, 문과로 한정하면 국립정치대학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중국국민당 일당 독재의 대만은 당이 모든 것을 조종하는 당-국가체제로 국민당의 당교(黨校)인[16] 국립정치대학에 엄청난 지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외성인 엘리트들은 정치대로 진학하고 대만 정부는 정치대 졸업생들을 우대 특채하는 공생관계로 문과에서 인기가 좋았었는데,[17] 대조적으로 대만 본성인 및 대만 정체성 느낌이 강한 대만대[18]에는 미치지 못했으며,[19] 계엄 해제 후 정권 교체가 이뤄지고 중국국민당이 쇠락해가면서 이제는 국립정치대학 문과가 타이난고등공업학교의 후신인 국립성공대학 문과에게도 위협 당하는 상황이다. 국립성공대학 문과는 대만대학보다도 더욱 대만 고유성이 강조되는 분위기로, 대만문학계(대만문학과)와 그 연구소는 대만 최고 학교로 꼽히고 있다.
이과에서는 신주에 재대복교한 국립칭화대학이 마찬가지로 중국국민당 일당독재 시절 장제스-장징궈 부자의 집중적인 지원에 힘입어 2위 학교로 꼽혔으나, 해엄 이후에는 명실상부한 대만 2위의 의대까지 갖추고 공대가 근본인 국립성공대학에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성공대학은 대만 내의 평가로는 이미 청화대학을 제치고 2위 자리를 굳히고 있는 것 같은 양상이다. 심지어 기업들을 대상으로 채용대상자로 어느 대학 출신을 선호하냐는 설문조사에서는 대만대학을 추월하여 선두를 하기도 했다. 일단 대만의 4대 명문대학 자리를 굳히고 있는 중. 臺清交成(위키백과) 참조.
遠見 발표 2019 대만대학 순위
대만대학은 언제나 그래왔듯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고, 교통대학이 4위를 유지하고 있다면 국립성공대학과 국립칭화대학이 매년 2~3위를 자리바꿈하고 있는데,[20] 시간이 가면 갈수록 국립성공대학이 점점 더 우세해지는 분위기다.
4. 조직
한국 대학의 단과대학에 해당하는 곳을 학원(學院)이라고 부른다.[21]현재 11개 학원으로 구성되어있다. 학원과 학계•연구소[22] 순서는 홈페이지의 서열을 따랐다. 학과명은 최대한 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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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캠퍼스 및 부속시설
▲ 국립타이완대학 캠퍼스 |
▲ 부종(傅鐘) |
비슷한 설로는 밤 12시 정각에 남자 혼자 부종 옆을 지나가지 말라는 괴담이 있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지나가게 되었을 때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시간을 물어온다면 뒤돌아보지 말고 최대한 빨리 살아있는 다른 여성 근처로 도망가야 한다고 한다.
◈ 부종(傅鐘)에 얽힌 한국 유학생들의 일화
1960년 전후에 대만에 유학한 원로 선배들의 일화 가운데는 부종(傅鐘)과 관련된 한국인 특유의 장난기가 물씬 풍기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대만에 유학한 분들은 대부분 국비 장학생을 포함해서 현역 군인이 어학연수를 위해 국립대만대학, 국립대만사범대학, 국립정치대학 등에서 10명 내외의 학생이 수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낯선 타국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한편 향수심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이따금 국립대만대학 정문 근처 식당에서 모였다고 한다.
그련데 한 번은 저녁 식사 후 캠퍼스를 산책하다가 이 부종(傅鐘) 밑에 모여앉아 오손도손 정담을 나누기도 하고, 유행가도 목청 높여 부르면서 나름대로 향수심을 달래보는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캠퍼스 내는 인적이 드물고 적막한 가운데 시침은 자정을 향하고 있었기에 서둘러 각자 기숙사로 돌아가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때 한 유학생이 헤어지기 서운하니 재미 삼아 이 부종(傅鐘)이나 몇 번 치고 도망가자고 제의를 했다. 그러자 한 유학생이 도망갈 필요가 전혀 없다. 내가 책임지고 지혜롭게 해결할 것이니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산책하면서 다정하게 얘기하는 척만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아닌 밤중에 낭랑한 종소리는 캠퍼스의 적막을 여지없이 깨고 말았다. 아니랄까 캠퍼스 내에 있는 파출소에서 불과 몇 분 만에 경찰이 자전거를 타고 현장에 도착하게 되었다. 경찰관은 바로 한국 유학생을 향하여 타종자 목격 여부를 의심스러운 말투로 묻자, 태연하게 말하기를 조금 전에 어떤 사람이 종을 치고는 실습농장이 있는 저쪽(어두운 방향)으로 급히 달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거짓말로 응대했다. 그러자 경찰은 듣자마자 황급히 그쪽으로 페달을 밟으며 사라지게 되었다. 종소리에 이어서 이제는 유학생들의 박장대소가 캠퍼스 적막을 깨고 말았다고 한다.
6. 국제 교류
- 서울대학교
- KAIST
- 포항공과대학교
- 연세대학교
- 고려대학교
- 서강대학교
- 성균관대학교
- 한양대학교
- 경희대학교
- 이화여자대학교
- 동국대학교
- 숭실대학교
- 아주대학교
- 부산대학교
- 영남대학교
- 경북대학교
- 순천대학교
- 신한대학교
- 그 외 교류협정대학명단
이 중 '학생교류협정'까지 맺고 교환학생을 상호파견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대만대 국제사무처 출처
* 서울대학교(1999년부터)
* 포항공과대학교(2005년부터)
* 순천대학교(2005년부터)
* 이화여자대학교(2009년부터)
* 한양대학교(2009년부터)
* 성균관대학교(2010년부터)
* 부산대학교(2011년부터)
* 고려대학교(2013년부터)
* 연세대학교(2013년부터)
* KAIST(2015년부터)
* 경북대학교(2024년부터)
* 서울대학교(1999년부터)
* 포항공과대학교(2005년부터)
* 순천대학교(2005년부터)
* 이화여자대학교(2009년부터)
* 한양대학교(2009년부터)
* 성균관대학교(2010년부터)
* 부산대학교(2011년부터)
* 고려대학교(2013년부터)
* 연세대학교(2013년부터)
* KAIST(2015년부터)
* 경북대학교(2024년부터)
국내대학들 중에서는 특히 서울대학교와 관계가 긴밀하다. 최초로 일본의 도쿄대학과 1995년 학생교류협정 체결을 시작으로 국제화를 추진해나가던 서울대학교와 1998년 6월 24일 대학교 본부 차원에서 국제학술교류 및 교환학생 상호파견(학생교류)까지 포함한 최고 수준의 협정을 맺었다.자료 링크 이후 현재까지 사회과학대학, 공과대학 등 여러 단과대학과 사회학과 등 학과별 수준에서 수많은 학생들이 상호 교환파견되고 있다. 2019년에는 서울대의 박보경 경영대 박사가 국내대학 박사출신으로는 최초로 외국의 국가 최고학부인 국립대만대학 관리학원(경영대학) 조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기사)[56]. 1998년 국립대만대 한국총동창회 창립 기사를 보면 국내 사회 저명인사들이 포함되어있다.
7. 출신 인물
대만 최고의 대학으로서 대만 학벌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만의 수많은 정치인, 기업인들이 이 학교 출신이다. 1986년에 대만 첫 노벨상을 수상한 리위안저 역시 국립대만대학 출신이다. 또한, 출신 인물들 가운데 장징궈 이후 민주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통 5명(리덩후이, 천수이볜, 마잉주, 차이잉원, 라이칭더)[57], 부총통 5명(롄잔, 뤼슈롄, 우둔이, 천젠런, 라이칭더), 타이베이시장 2명(하오룽빈, 커원저), 신베이시장(주리룬)이 있다.한국 최고 명문인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이 불과 2명(김영삼, 윤석열)뿐[58]임을 생각하면, 국립타이완대학은 그야말로 대만 정치 지도층의 산실인 셈. 물론 타 부문에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동문들이 매우 많다.
7.1. 정치인
- 리덩후이 - 농업경제학과, 1949년 졸업(편입), 제8, 9대 총통.
- 천수이볜 - 법학과, 1974년 졸업. 제10, 11대 총통.
- 마잉주 - 법학과, 1972년 졸업. 제12, 13대 총통.
- 차이잉원 - 법학과, 1978년 졸업. 제14, 15대 총통.
- 라이칭더 - 보건의학, 제16대 총통.
- 롄잔 - 정치학과, 9대 부총통
- 뤼슈롄 - 법학과, 1967년 졸업. 10, 11대 부총통
- 우둔이 - 역사학, 13대 부총통
- 천젠런 - 의학대학원, 1977년 졸업. 14대 부총통
- 쑤전창 - 법학과, 행정원장
- 린자룽 - 정치학과, 28대 외교부 부장
- 주리룬 - 경영학과, 1, 2대 신베이시 시장
- 커원저 - 의대, 외과의사, 15, 16대 타이베이시 시장
- 하오룽빈 - 농업화학과, 13, 14대 타이베이시 시장
- 셰창팅 - 법학과, 변호사, 20, 21대 가오슝시 시장
- 정원찬 - 전기학과, 사회학과, 1, 2대 타오위안시 시장
- 황웨이저 - 농업경제학과, 3, 4대 타이난시 시장
- 천치마이 - 의학전문대학원 의학박사, 26대 가오슝시 시장
- 딩서우중 - 정치학과, 입법위원
- 황지에 - 공공위생학, 입법위원
7.2. 학계
7.3. 법조계
- 린양강 - 정치학과, 사법원 원장[60]
- 스치양 - 법학과, 사법원 원장[61]
- 웡웨셩 - 법학과, 사법원 원장[62]
- 라이잉자오 - 법학과, 사법원 원장[63]
- 라이하오민- 법학과, 사법원 원장[64]
- 쉬쫑리 - 법학과, 사법원 원장[65]
7.4. 재계
- 린바이리 - 전기공학과, Quanta Computer 회장, 대만부자 1위
- 차이완차이 - 법학과, 캐세이 그룹 창립자
- 차이밍종 - 법학과, 타이완모바일 회장, 푸본 파이낸셜 홀딩스 이사, 대만부자 5위, 차이완차이의 장남
- 차이밍싱 - 경영학과, 푸본 파이낸셜 홀딩스 회장, 타이완모바일 이사, 대만부자 7위, 차이완차이의 차남
- 차이홍투 - 법학과, 캐세이 금융지주 회장, 대만부자 8위[66], 차이완차이의 조카
- 차이전위 - MBA, 캐세이 금융지주 부회장, 대만부자 22위, 차이홍투의 동생
- 스총탕 - 전기공학과, ASUS 회장
- 차이밍제 - 전기공학과, 미디어텍 회장
- 차이리싱 - 물리학과, 미디어텍 부회장
- 장첸셩 - 전기공학과, ASE 그룹 회장
- 린즈천 - 화학공학과, 타이완모바일 CEO
- 천원치 - 전기공학과, VIA 회장, HTC 회장 왕쉐홍의 남편
- 량츠전 - 물리학과, Quanta Computer 부회장
7.5. 예술계
7.6. 기타
- 주우신룽 :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사회대 출신으로 자세한 출신 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7.7. 한국인 동문
- 정두현 - 다이호쿠제국대학 1941년 12월 졸업(제3회).[67]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내과학/생리학연구실 연구생(1942.4~1945.6), 평양의학전문학교 교장, 김일성종합대학 의학부장(초대).
- 마형옥 - 다이호쿠제국대학 이농학부 1942년 졸업(참조). 교토제국대학 이학부 연구실 조수,[68]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 북한 경공업성 중앙연구소 소장, 과학원 화학섬유연구소장.
- 김준엽 - 역사연구소[69] 석사 1955년 수료(참고)[70][71] 고려대학교 총장
- 이지철 - 정치학계 졸업. 주중(타이패이)한국대사관 참사 역임.
- 오상근 - 정치학계 졸업. 한국관광공사 타이패이 지사장 역임.
- 김학주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61년 졸업(최초의 한국인 석사 졸업생).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국립대만대학 한국총동창회 회장.
- 김충렬 - 철학계 1960년 졸업, 철학연구소 석사 1962년 졸업. 중국문화대학 철학박사 1973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대학원장.
- 황병곤 - 정치학계 졸업. 경희대학교 교수
- 김시준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65년 졸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 이남영 - 철학연구소 석사 졸업. 서울대학교 교수.
- 허 벽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졸업. 국립대만사범대학 박사 졸업. 연세대학교 교수.
- 최무장 - 인류학연구소 석사 졸업. 프랑스 파리제1대학 박사. 건국대학교 교수.
- 이동향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0년 졸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고려대학교 교수.
- 이한조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졸업. 교토대학 박사, 고려대학교 교수..
- 전락희 - 정치학연구소 석사 1970년 졸업. 국립정치대학 박사 1975년 졸업. 단국대학교 교수.
- 신승하 - 역사학연구소 석사 1971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송하경 - 철학연구소 석사 1971년 졸업. 성균관대학교 교수.
- 이강수 - 철학연구소 석사 1971년 졸업. 경희대학교, 중앙대학교, 연세대학교 교수.
- 김경호 - 농업경제학연구소 농학석사 1971년 졸업. 중국문화대학 농학박사 1978년 졸업. 청주대학교 교수.
- 구양근 - 역사학연구소 석사 1971년 졸업. 도쿄대학 동양사학과 박사, 성신여자대학교 총장(직대). 주 타이베이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2008~2011).
- 송영배 - 철학연구소 석사 1972년 졸업. 독일 프랑크프르트대학교 철학박사 졸업. 서울대학교 교수.
- 전인초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2년 졸업. 국립대만사범대학 박사 1978년 졸업. 연세대학교 교수.
- 박종철 - 정치학연구소 석사 1972년 졸업. 동국대학교 교수.
- 문명숙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2년 졸업. 가톨릭대학교 교수. 부총장.
- 최영애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2년 졸업. 박사 1980년 졸업.[72] 연세대학교 교수.
- 양동숙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2년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 백정희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2년 졸업. 국민대학교 교수.
- 문정구 - 농업경제학연구소 농학석사 1973년 졸업. 경제학연구소 경제학박사 1881년 졸업. 건국대학교 교수.
- 박원호 - 역사학연구소 석사 1973년 졸업. 도쿄대학 인문과학연구과 박사, 고려대학교 교수.
- 김용옥 - 철학연구소 석사 1974년 졸업.[73]. 도쿄대학 석사 졸업. 하버드대학교 박사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철학자.
- 김영수 - 경제학연구소 수학.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제학 박사 졸업. 캐나다 앨버타대 금융학과 교수 역임. 이스트우드사 CEO.
- 김동수 - 철학연구소 석사 1975년 졸업. 부산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교수.
- 양승무 - 철학연구소 석사 1975년 졸업. 국립대만사범대학 박사 1984년 졸업. 중앙대학교 교수.
- 김병채 - 철학연구소 석사 1975년 졸업. 보인대학 박사 1986년 졸업. 단국대학교. 한양대학교 교수, 부총장.
- 임수무 - 철학연구소 석사 1975년 졸업. 박사 1994년 졸업. 계명대학교 교수.
- 김귀달 - 역사학연구소 석사 졸업. 전북대학교 교수.
- 조윤수 - 정치학연구소 석사 1976년 졸업. 박사 1989년 졸업.
- 이충양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6년 졸업. 프랑스 파리제7대학 박사 1981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한창수 - 중국문학연구소 수학. 국립정치대학 석사 졸업. 한양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한국방송통신대학 교수.
- 김세호 - 역사학연구소 석사 졸업. 원광대학교 교수.
- 주채혁 - 역사학연구소 수학. 연세대학교 석사, 박사 졸업. 세종대학교 교수. 강원대학교 교수.
- 이재광 - 정치학연구소 석사 1978년 졸업. 박사 1984년 졸업. 인하대학교 교수.
- 이영구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78년 졸업. 연세대학교 박사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 함근식 - 경제학연구소 박사 1980년 졸업. 경희대학교 교수.
- 함병수 - 정치학연구소 수학. 중국문화대학 박사 졸업.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연구위원.
- 손예철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0년 졸업, 박사 1986년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 선정규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0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세종캠퍼스 부총장.
- 목은균 - 역사학연구소 석사 1981년 졸업. 박사 1987년 졸업.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 이형구 - 인류고고학연구소 석사 1981년 졸업. 역사학연구소 문학박사 1987년 졸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문대학교 교수.
- 변인석 - 역사학연구소 석사 졸업. 영남대학교 박사. 아주대학교 교수.
- 이명한 - 철학연구소 석사 졸업. 중앙대학교 교수.
- 김백현 - 철학연구소 석사 졸업. 강릉원주대학교 교수.
- 이재훈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2년 졸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고려대학교 교수.
- 이동춘 - 경제학연구소 석사 1983년 졸업.
- 오수형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3년 졸업.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 최용철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3년 졸업. 박사 1990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김선욱 - 역사연구소 문학박사 1983년 졸업. 충남대학교 교수
- 이승환 - 철학연구소 석사 1984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박재우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졸업, 박사 1990년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 조재송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4년 졸업. 박사 1989년 졸업. 한신대학교 교수
- 문흥호 - 푸싱강정치연구소 석사. 1985년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 이인호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5년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 최규발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5년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 손진호 - 경제학연구소 석사 1985년 졸업.
- 오승렬 - 경제학연구소 석사 1986년 졸업. 중문대학 박사 졸업.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 이문형 - 경제학연구소 석사 1987년 졸업. 베이징대학 박사. 산업연구원. 숭실대학교 교수.
- 서상철 - 경제학연구소 석사 1987년 졸업. 로체스터대학교 박사 졸업. 캐나다 윈저대학교 교수.
- 김정훈 - 역사학계 1986년 졸업, 역사연구소 석사 1988년 졸업(참조)
- 송갑호 - 역사학연구소 석사 졸업. 고려대학교 교수, 동아일보 비상임감사.
- 손두석 - 상학계 학사 졸업. 두산(중국)투자유한공사 부총재
- 최천모 - 경제계 학사 1989년 졸업. 성균관대학교 석사 1994년 졸업. 베이징대학 박사 1999년 졸업.
- 류동춘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1989년 졸업, 박사 1996년 졸업. 서강대학교 교수
- 하영애 - 정치학연구소 박사 1989년 졸업. 경희대학교 교수.
- 명동성 - 법학연구소 석사 1989년 졸업. 광주고검장, 서울중앙지검장, 법무연수원장. 법무법인 세종 대표변호사.
- 김선자 - 중국문학연구소 석사 졸업. 연세대학교 교수.
- 정상봉 - 철학연구소 석사/박사 졸업. 건국대학교 교수.
- 오이환 - 철학계 수료. 교토대학 석사/박사, 경상국립대학교 교수.
- 박광득 - 정치학연구소 박사 1990년 졸업. 대구대학교 교수.
- 이치수 - 문학석사/박사 1990년 졸업. 경북대학교중어중문학과 교수.
- 남상호 - 철학연구소 박사 1991년 졸업. 강원대학교 교수.
- 김상섭 - 철학연구소 박사 1992년 졸업.
- 전광진 - 중국문학연구소 박사 1992년 졸업. 경희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교수.
- 한기종 - 법학박사 1992년 졸업. 상지대학교 교수.
- 한상돈 - 법학박사 1993년 졸업. 아주대학교 교수.
- 김윤태 - 사회과학원 석사 1993년 졸업. 박사 1998년 졸업.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 김재기 - 농학원 박사 1994년 졸업. 순천대학교 총장.
- 한동수 - 건축•성향연구소[74] 석사 1994년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 조동제 - 법률학연구소 석사 1994년졸업. 박사 2000년 졸업. 동아대학교 교수.
- 장태원 - 문학석사/박사 1994년 졸업. 경북대학교중어중문학과 교수.
- 이수행 - 농업경제학연구소 석사 1995년 졸업. 베이징대학 박사 2001년 졸업. 경기개발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정정길 - 농업경제학연구소 농학박사 1995년 졸업.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송재훈 - 상학연구소 경영학박사 1996년 졸업. 우석대학교 교수.
- 허흥호 - 경제학박사 1998년 졸업. 목원대학교 교수
- 안찬순 - 문학석사1993/박사 1999년 졸업. 경북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이연승 - 철학연구소 박사 1999년 졸업.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 학사/석사 졸업. 서울대학교 교수.
- 김태용 - 철학연구소 석사 1999년 졸업, 베이징대학 박사 2005년 졸업. 한양대학교 교수.
- 문익준 - 경제학연구소 석사 2004년 졸업. 청화대학 박사 2013년 졸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민대학교 교수.
8. 찾아가는 길
- 정문 : 타이베이 첩운 쑹산신뎬선 궁관역 바로 앞에 있다.
- 후문 : 타이베이 첩운 원후선 커지다러우역에서 남쪽으로 500m 걸어가면 된다.
9. 기타
- 대만에서 대만대(台灣大)라고 하면 통신사인 台灣大哥大(타이완모바일)을 말하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 台大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 대만의 대형 커뮤니티중 하나인 PTT의 운영주체이기도 하다. 원래는 텔넷 사설 BBS에서 시작했지만, 규모가 커지고 웹 페이지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웹 페이지가 생겨도 텔넷 접속 역시 현역으로 돌아가고 있다.
- 서울대학교가 전신 중 하나인 경성제국대학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것과는 달리
경성제국대학 졸업자를 동문으로 보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 대학은 대만일치시기 제국대학의 역사를 공식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대학 홈페이지에서도 제국대학 당시의 일본인 총장들까지 전부 소개하고 있다. 국립타이완대학도 국민당 독재 시기에는 제국대학과의 연관성을 부정하고 1945년에 개교했다는 것이 공식적 견해였는데, 민주화되면서 1945년 개교인지 1928년 개교인지에 대해 학내 견해가 엇갈리다가[76] 2007년에 공식적으로 '1928년 개교'로 확정하여 제국대학을 스스로의 전신으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지금도 국립타이완대학의 개교기념일은 제국대학 개교일이 아닌 국민정부가 제국대학을 접수한 11월 15일이다.11월 15일에 개최된 개교 90년 행사
[1] 국문 한자 독음 대대[2] QS, THE와 달리 ARWU 순위에서는 201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밀리기 시작함[3] 세부적으로 보면 1위 대만대학(66위), 2위 청화대학(168위), 3위 성공대학(234위), 4위 교통대학(240위), 5위 대만과기대학(267위), 6위 양명대학(298위), 7위 사범대학(331위), 8위 타이베이의학대학(387위), 8위 중산대학(416위), 9위 중앙대학(465위), 10위 타이베이과기대학(488위), 11위 창겅대학(493위), 12위 정치대학(581~590위), 13위 중흥대학(601~650위), 14위 가오슝의학대학(701~750위), 15위 중정대학(801~1000위) 등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4] 당초 일본제국은 대만에 설립할 제국대학에 의학부와 농학부만 설치할 것을 구상했으나, 이자와의 주장이 관철되어 문정학부를 포함하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5] 문정학부, 이농학부 및 부속 농림전문부(현재의 국립중흥대학)으로 구성.[6] 기존 문정학부, 이학부, 농학부, 의학부, 공학부 조직을 법학원, 문학원, 이학원, 농학원, 의학원, 공학원 등 6개 학원 편제로 재편.[7] 1919년 대만총독부 고등상업학교(台灣總督部 高等商業學校)로 설립, 1926년 다이호쿠고등상업학교(臺北高等商業學校)를 거쳐 1944년 다이호쿠경제전문학교(臺北經濟專門學校)로 개편됨. 1945년 중화민국에 접수되어 1946년 대만성립법상학원(臺灣省立法商學院)으로 개칭된 상황[8] 1987년 관리학원(한국의 경영대학)이라는 개별 단과대학으로 독립[9] 원래 다이호쿠제국대학 캠퍼스 자리에 1919년 먼저 개교했던 다이호쿠고등농림학교(臺北高等農林學校)였으나, 제국대학 설립의 모체가 되어 흡수당했다가 1943년에 타이중시로 독립해나감[10]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11] 2004년 기준 서울대와 동일한 153-201위권으로 중국의 칭화대 베이징대, 홍콩의 홍콩대 홍콩중문대를 모두 꺾고 수위를 차지했다. 중국 대학들은 2005년에야 칭화대가 처음 대만대와 공동 1위(153-202위)를 차지했고 2006-2007년에도 동일, 2008-2013년에는 다시 대만대가 단독 1위, 2014년에 베이징대 칭화대 상하이자오퉁대와 싱가포르 난양공대와 공동 1위(101-150위)를 기록했다.[12] 그러나 인식 차원에서 칭화대학나 상하이교통대학보다 앞섰다고 할 수는 없다.[13] 국립중앙대학은 1962년 대만에서 재대복교하여 다시 문을 열었지만 중화민국 최고학부의 위상은 잃어버렸다. 아니, 최고 명문의 위상을 잃어버린 수준이 아니라 현재는 같이 재대복교한 국립칭화대학, 국립양명교통대학, 국립정치대학 3개교와 함께 대만대처럼 대만일치시기에 지어진 공업전문학교인 국립성공대학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떨어졌다(...). 대만에서 명문대라면 보통 대성청교(臺成清交) 4개교를 꼽고(한국의 SKY처럼),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특히 과거에 政까지 더해 '대성청교정' 즉 대만대, 성공대, 청화대, 교통대, 정치대 이 5개의 대학교를 꼽는 경우가 많다. 국립중앙대학은 한때 진짜로 중국의 중앙을 자부했던 과거가 무상하게도 현재에는 이 리스트에도 들지 못한거다(...). 국립중앙대학은 위 5개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 다음 순서로 역시 대만일치시기에 지어진 농업전문학교인 국립중흥대학, 국립중산대학, 국립중정대학과 함께 4中대학의 하나로 꼽힌다. 그래도 중국 난징에 남은 후신 대학 중 1개인 난징대학은 구교연맹에 들 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도 전통적으로 상위권을 자랑하는 아직도 나름 세계구 명문대인 것과 대조적이다.[14] 일제 때는 교명에 다이호쿠(타이베이)를 썼지만 중화민국 시대는 도시명인 타이베이를 교명으로 계속 쓰지 않고 섬 이름 또는 성 이름인 타이완으로 바꿨는데 아직 국부천대 전이었던 중화민국 정부는 이 학교를 타이완성을 대표하는 국립대로 만들려는 의도였을 수도 있다.[15] 이는 사실 일제가 만들어놓은 다이호쿠제국대학의 존재가 넘사벽이었기 때문이다. 장제스가 국공내전의 와중에 대만으로 천도하게 된 이유는 일본이 조성해놓은 공업 시설 등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으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2차대전 종전 직후 국민당과 공산당이 만주쟁탈 레이스를 벌인 것도 일제가 개발해놓은 만주의 공업지대를 먼저 차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만일치시기 대만의 발전 역시 만주 못지않게 엄청나서 1935년 대만총독부가 주최한 시정 40년 기념 대만박람회에 참석했던 중화민국 푸젠성 주석 진의는 대만의 발전상에 경악을 금치 못했을 정도였고, 귀국 후 자신이 통치하고 있던 복건성에 대만 발전모델을 이식하려 했을 정도였다.[16] 그래서 2020년 현재도 정치대 교가에는 '吾黨(우리당=중국국민당)'이 들어가고 교내에 장제스 동상이 있을 정도.[17] 양안관계 연구는 여전히 탑클래스이고, 외교부의 정치대 인맥은 여전히 막강한 수준. 국민당 정치인들도 많이 배출하였다. 외성인인 쑹추위는 정치대 출신, 훙슈주는 문화대 출신, 한궈위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정치대에서 석사를 받았다. 국민당 정권의 양안관계 담당자로 92공식을 제창한 쑤치도 정치대 외교학과를 나왔고, 현 국민당 주석인 장치천 역시 정치대 외교학과 출신이다.[18] 역대 민주진보당 총통 후보인 펑밍민, 천수이볜, 셰창팅, 차이잉원이 모두 본성인 출신 엘리트로 대만대 법대를 나왔다. 국민당에서도 대만 본성인인 리덩후이, 롄잔 등이 대만대 동문[19] 마잉주처럼 외성인도 대만대를 갈 수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 하면 대만대로 진학했다.[20] 위 遠見의 台灣最佳大學 排名에서 2016 2017 2019년에 국립성공대학이 2위, 2018 2020년에 국립칭화대학이 2위를 기록[21] 대만일치시기에는 당시 한국과 같이 학부(단과대학)-학과로 이어지는 일본 舊制학제를 따르고 있었으나, 1945년 중화민국이 대만섬을 점령하고 대학을 접수한 12월 이를 학원(단과대학)-학계(학과)의 중국식 학제로 명칭을 바꾸었다.[22] 학사 과정은 계(系), 대학원 과정은 연구소(研究所)이며 일반적으로 학사과정이 설치된 곳은 연구소가 부설되어 있기 때문에 ~계로만 표기하였다.[23] 문헌정보학과[24] 언어학[25] 화어(華語) 교사 양성 석사학위 과정[26] 번역사 양성 석사학위 과정[27] 외국어교육센터[28] 기후변화•지속가능발전 국제학위 석사•박사과정[29] 기계로봇연구센터[30] 사회복지학과[31] 치의학전문대학원[32] 약학전문대학원[33] 치의학과[34] 간호학과[35] 학사학위 소지자 대상 간호학 과정[36] 의학검사•생물기술학과[37] 임상치의학[38] 독극물 연구[39] 뇌•인지과학연구소[40] 산업공학 및 해양공학과[41] 재료과학•재료공학과[42] 건축•도시연구소[43] 수의학전문대학원[44] 식물병리•미생물학과[45] 삼림환경•자원학과[46] 원예•조경학과[47] 바이오산업학과[48] 농기계전기공학과[49] 및 상학연구소[50] 정보관리학과[51] 공공위생학 석사학위 과정[52] 컴퓨터공학과[53] 광(光, photo)공학[54] 법학조, 사법조, 재경법학조로 구성[55] 유럽연합법률센터[56] 재무학 분야에서 국내 대학 박사학위 소지자가 해외 대학으로 교수가 된 사례가 있기는 하나, 한 국가를 대표하는 대학으로 교수임용이 된 사례는 박 박사가 처음이다. 또한, 주목할만한 점은 박 박사의 서울대 박사졸업 논문과 교수 추천서만으로 임용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만대에서 박 박사 졸업논문의 잠재성을 인정하고 저명한 교수진들의 추천서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해석된다.[57] 장제스는 육군 군관 출신이고 장징궈는 소련에서 유학했다.[58]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 윤보선은 에든버러 대학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육군사관학교, 최규하는 쓰쿠바대학, 김대중, 노무현은 고졸, 이명박은 고려대학교, 박근혜는 서강대학교, 문재인은 경희대학교를 나왔다. 즉, 한국 정치계에서는 학력보다는 사회인으로서의 경력을 더 중요시하는 편이다.[59] 허나 미국으로 귀화해, 수상 당시는 미국 국적였다. 수상 후에는 타이완 국적을 회복하였다. 다만 타이완 섬 출생자 및 본성인 중 최초며, 그보다 먼저 상을 받은 중화민국 국적자(양전닝, 리정다오)와 대만의 외성인(딩자오중)도 있다. 셋 다 물리학상이며, 화학상은 한족 중 리위안저가 최초이다. 그래도 양전닝과 리정다오는 대륙 출신이라 타이완섬과는 별 접점이 없고 딩자오중은 초중고만 대만에서 다니고(다만 아버지가 대만으로 넘어온 후 대만대 교수를 했기 때문에 대만대와 접점이 없지는 않다. 당시 대만대의 교직원 숙소는 현재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들 부자의 이름을 따서 딩관하이, 딩자오중 거소라고 부른다.) 성공대 중퇴 후 미국 가서(부모가 미국 체류 중일 때에 태어났기 때문에 미국 국적이 있다.) 눌러 앉았기에 아무래도 대만에서는 '언급만 하는' 수준이다.[60] 1987.04 ~ 1994.08[61] 1994.08 ~ 1999.01[62] 1999.02 ~ 2007.10[63] 2007.10 ~ 2010.07[64] 2010.10 ~ 2016.10[65] 2016.11 ~[66] 형 차이정다는 9위[67] 다이호쿠제국대학 의학부의 유일한 조선인 졸업생이라고 한다.[68] 리승기의 심복 중 심복이었다고 한다(참조).[69] 다만 김준엽이 대만대학에 유학했던 시절에는 문학연구소 사학부(文學研究所 史學部)였고, 지금의 역사연구소로 개칭이 된건 1957년이다. 별개로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된 김준엽의 대만대학 수강신청표에는 소속이 문학원 역사연구소로도 기재가 되어있긴 하다.[70] 회고록 <장정>에서는 국립타이완대학에 간 것은 연구교수 자격으로 가서 연구원에서 연구를 한거라고 서술했지만, 대만[77]에서는 한국, 일본과 달리 대학원을 연구소라 부르고 무엇보다 유학당시 발급된 성적표의 학번이 R로 시작되는 걸 보아(국립타이완대학의 학번은 학사과정생은 B, 석사과정생은 R, 박사과정생은 D가 항상 첫글자로 시작된다) 실제로는 대학원에 입학하여 석사과정을 밟은 걸로 추정된다.[71]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전시된 김준엽의 국립타이완대학 시간표에 따르면 1951년 9월부터 1953년 7월까지는 강의를 수강하고 그 이후인 1953년 9월부터 1955년 1월까지는 논문을 작성하고 있다고 되어있으나, 국립타이완대학 학적부에는 이 때 작성중이던 논문을 완성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정황상 이 때 작성중이던 논문이 석사학위논문으로 보이며 결국 이 논문을 다 완성하지 않은 채 1955년에 한국으로 귀국을 해버린 듯 하다.[72] 국립대만대학 중문과 대학원에서 중국문법학과 음운학 방면으로 석,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국립대만대학에서 언어학 방면으로 외국인에게 주어진 최초의 학위이다. 그 이후, 동경대학 중문학과 히라야마 교수 밑에서 다년간 수학하면서 동서 언어학의 폭넒은 관점을 수용하였다. 대만대 재학 중 김용옥과 캠퍼스 커플이었고 결혼까지 하게 된다. 1981년 연세대 중문과 교수로 취임한 이래, 2011년 2월까지 30년간 중국 언어학 및 관련된 문학 분야를 폭넓게 강의해왔다. 그리고 『詩經』,『楚辭』를 언어학적 관점에서 참신하게 해석하는 연구성과를 축적하여 왔다.[73] 1972년 2월 고려대 철학과 졸업 후에 가을학기가 1학기로 신입학이 이뤄지는 대만 학제에 맞춰 1972년 봄학기에 고려대 철학과 석사과정을 다닌 후 1972년 가을학기 입학, 1974년 봄학기 이수 후 졸업.[74] 建築與城鄉研究所 = 건축•도시공학 대학원.[75] 중국은 어차피 전부 국립이므로 국립을 따로 붙이지 않는다. 비슷한 예로 고궁박물원과 국립고궁박물원의 차이도 있다.[76] 가령 1990년에는 대만대학 60주년을 기념하는 책자(歡聚與期勉 : 臺大創校六十大慶活動紀實)가 출판되는가 하면, 1995년에는 '대만대학 50년사'(臺大五十年)가 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