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5:21:18

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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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절차
2.1. 카이샤쿠(介錯, 개착)
3. 역사
3.1. 기원3.2. 센고쿠 시대3.3. 에도 시대3.4. 메이지 유신
3.4.1. 사카이 사건
3.5. 제2차 세계 대전3.6. 현대3.7. 기타 사례
4. 외국의 할복5. 매체
5.1. 영상물5.2. 게임

1. 개요

파일:external/pds26.egloos.com/c0006629_553f4ee953022.jpg
할복하는 무사의 모습
할복()이란 일본사무라이 계급에서 행해지던 의식화된 자살 방법이다. 일본어로는 '셋푸쿠([ruby(切, ruby=せっ)][ruby(腹, ruby=ぷく)], 절복)'나 '하라키리([ruby(腹, ruby=はら)][ruby(切, ruby=き)]り, 배 베기)'라 하고 '지진([ruby(自, ruby=じ)][ruby(刃, ruby=じん)], 자인)'이란 단어를 쓸 때도 있다.

이름처럼 칼로 를 갈라 죽는다. 다만, 아래 설명되듯 혼자 스스로 배를 가르는 것만으로는 쉽게 죽지 못한다. 그래서 카이샤쿠(介錯)라고 불리는 사무라이가 뒤에서 검을 든 채 대기하고 있다가, 죽으려는 사람이 스스로 배를 찌르는 순간 목을 쳐서 숨이 끊어지게 돕는 것까지가 할복 의식이다.

사무라이의 자결 방법일 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는 자결의 명목을 빌린 사형 수단이기도 했다. 대체로 사형을 받을 만한 죄를 지었으나 참수형을 내릴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되면 비교적 명예롭게 여겨지던 할복으로 대체하거나, 판결 전에 죄를 지은 당사자가 알아서 할복하는 일도 있었다.

서양에는 일본에서 행해지던 할복이 이미 1800년대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73년, 미국의 한 주간지는 철도회사로부터 뇌물을 받아먹은 상원의원들에게 할복을 명령하는 엉클 샘의 풍자화를 그리기도 했다.#[1] 1960년대 이후로 일본의 사무라이/찬바라 영화들이 서양권에서도 제법 입소문을 탄 탓에 사무라이, 스시, 스모, 닌자보다는 인지도가 덜하지만 서양인들에게 익숙한 일본어 단어 중 하나가 되었다. 주로 'harakiri'라고 쓰며, 대다수 영어사전에 신조어로 등재되어 있을 만큼 꽤 대중적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간혹 'commit Sudoku'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스도쿠와 셋푸쿠를 헷갈린(...) 대화에서 유래된 밈이라고 한다.#

2. 절차

에도 시대의 할복 전문가 자살 전문가 이세 사다타케(伊勢貞丈 : 1718~1784)[2]에 따르면 정확한 작법은 다음과 같다.
몸의 청결을 위해 특별한 입욕법 + 적절한 머리모양 + 올바른 의복 착용법(보통 흰색 옷)을 지킬 것
할복 자리는 흰 천으로 덮은 다다미 2매
술잔 2개 & 간단한 음식을 담은 접시가 놓인 의식용 상을 제공
이때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먹는 것에는 매우 번잡한 예법이 있음
이후 칼 중간을 흰 종이로 싼 의식용 칼을 나무 쟁반 위에 놓는다. 칼 중간을 흰 종이로 싸는 것은 손잡이로 쓰기 위함이다.
그 뒤에 카이샤쿠(介錯)가 할복자의 뒤에 선다.
이후의 과정은 글로 쓸 수 없고, 오직 구전(口傳)으로 전할 수 밖에 없다.

생략된 부분은 사실 별 건 없고, 상의를 벗고 칼날을 종이나 천으로 감싸쥐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배를 가르면 카이샤쿠(介錯)가 할복자가 고통을 오래 느끼지 않도록 신속하게 목을 잘라주는 게 전부다. 당연한 내용이지만 차마 글이나 그림으로 남기기 싫었던 듯.

할복할 때 다다미에 천을 덮는 것은 목이 잘렸을 때 다다미 바닥을 구르는 추태를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때 타인에게 선물 받은 천을 사용하면 그것은 선물한 자에 대한 최대한의 존경의 표시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할복 과정에 사용되는 의복, 천, 장막 등은 대체로 흰색을 사용하였다. 하얀 천에 붉은 피가 뿌려져 시각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나는 형태를 이상적으로 여긴 듯하다.

할복에는 주로 와키자시탄토를 사용하였다. 사무라이들은 보통 크고 작은 칼을 2자루 차고 다녔는데, 큰 쪽을 우치가타나라고 부르고 작은 쪽을 와키자시라고 부른다. 이 중에서 와키자시를 할복용으로 쓰는데, 당연히 원래부터 할복하려고 들고 다니는 것은 아니고, 할복용의 단도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사용한다. 실제 길이도 할복을 하기에는 불편할 정도로 긴 편. 그래서 보통 칼날 부분에 종이나 천을 감고 그 부분을 잡고 베었다. 할복용 단도는 대개 은장도보다 살짝 큰데, 흔히보는 가정용 식칼 정도라고 보면 된다.

사실 자살 치고는 매우 이상한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배를 가르는 것만으로는 혼자 죽기가 어렵거나 너무 고통스러워서 조력자가 꼭 필요하다는 점에서, 결국 자살이 자살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배를 가르는 이유는, 옛날 일본인들이 사람의 영혼이 뱃속에 들어있다고 믿어서, 그것을 통해 자신의 긍지나 결백함 등을 증명하려던 것이 시초가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원래 센코쿠 시대 초기에는 예법이 정착되지 않아, 카이샤쿠 없이 배가 아니라 가슴을 가르거나 목을 찔러 죽었던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 즉사에 가까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논의될 문제점들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나, 할복의 예법이 어쩐지 '배를 가른다'로 정착된 탓에 결국 카이샤쿠가 필수적인 존재가 되었다.

2.1. 카이샤쿠(介錯, 개착)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카이샤쿠 문서 참조)

할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카이샤쿠(介錯)의 존재를 모르고, 할복은 그냥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 것 정도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사실 할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카이샤쿠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자기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다는 행위가 사실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보통 외상으로 인한 주요 사인은 과다출혈 내지 쇼크이다. 의학적으로 대부분의 쇼크는 저체액성 쇼크, 즉 과다출혈이지만 정신성 쇼크 등의 예외적인 경우도 있긴 하다. 문제는 할복의 경우 두 상태에 빠르게 도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우선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다는 행동 그 자체가 엄청나게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복자살은 미디어에서 비장하게 묘사하는 것과는 다르게 절대로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일단 배를 단도로 찔러넣고 내장을 손상시켜야 하는 과정이 두꺼운 지방층을 관통해야되는 것이라 웬만한 정신력이 있는 사람들도 절대로 시도하기가 어렵다. 일반인들은 조그마한 압정에만 찔려도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는 것을 생각해보자.

이것은 우리가 생고기를 칼로 썰 때도 경험할 수 있는데, 조그만 생살 조각을 칼로 썰 때도 조금만 칼이 안 들어도 겉돌고 썰기가 힘들다. 여기에 고기의 부피가 커지면 그 난이도는 그야말로 수직 상승.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아예 살아있는 생물에 칼이 박히면 근육이 수축하여 칼날을 붙잡기 때문에 훨씬 더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할랄 방식으로 도축을 할때는 동물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기도문을 읊은 후 단칼에 목의 동맥을 베어 죽이는데, 이 단칼에 동물을 절명시킨다는 게 아주 어렵기 때문에 할랄 도축업자들은 오랜 시간의 수련과 연습을 거친다.

다른 생물의 살을 가르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스스로 자신의 배를 가른다고 생각해 보라. 다른 물체를 벨 때처럼 무게와 관성으로 벨 수도 없고, 배를 찌른 다음 오로지 자신의 근력으로 갈라야 하는데, 근육의 수축은 물론이고 고통과 공포로 인한 망설임까지 더해지니 상상만 해봐도 웬만한 담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자신의 배를 깔끔하게 가른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임을 알 수 있다. 현대의 통계를 봐도 도검에 의해 발생하는 사고에서 가장 흔한 손상은, 도검에 찔리면서 발생한 손상이거나 몸에 꽂힌 후 다시 빼면서 발생한 2차상이다. 도검을 꽂거나 관통시킨 후 다시 힘을 주어 날을 진행시켜 베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기에 일단 배를 가르고 난 다음에 죽는 것도 문제이다. 우선 복부에는 손상된다고 즉사할만한 장기가 없다. 복부가 손상되고 가장 빠르게 죽을 수 있는 사인은 과다출혈인데, 배에서 단시간에 죽음에 이를 정도의 출혈이 일어나려면 간동맥을 찔러야 한다. 그런데 간동맥은 복부 장기들의 제일 뒤편, 등 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복부에 칼을 박아서 간동맥까지 찌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본인 배를 찌른다는 것에서 오는 공포도 있고, 칼을 찌르는 순간 고통 때문에 의지와 관계 없이 배에 힘이 들어가 복근이 수축하여 칼을 막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를 찌르고 가르는 것까지 성공한다 해도 잘해야 복근에서 복막, 제아무리 대단한 의지와 힘이 있어도 장을 베는 정도에서 그칠 뿐 간동맥에 도달하지 못한다. 즉, 외부의 도움이 없으면 짧아도 몇 시간에서 하루 이상을 엄청난 고통에 몸부림치다 결국 흉한 꼴로 죽게 된다는 것. 결국 완전히 혼자서 할복을 할 경우, 고통을 못 이긴 끝에 자기 목이나 가슴을 깊게 찔러 자해를 해야만 그나마 출혈로 죽을 수 있긴 한데,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고통과 탈진, 저혈압으로 인해 불가능이나 다름 없다.

정신상의 쇼크로 빠르게 죽는 것은, 그냥 이론 상으로만 가능할 뿐 실제로는 불가능하다. 갑작스럽게 사고를 당했거나 타인에게 공격당한 것도 아니고, 할복자가 '나 할복한다!'라고 인지한 채로 스스로 칼을 찌르는데 정신적인 쇼크가 발생할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일단 칼이 배에 꽂히는 그 순간부터 극심한 고통을 느끼게 되고 두려움이 든다. 따라서 본인의 배를 가르는 것은 정말 초인적인 의지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즉 카이샤쿠가 없다면, 배에 칼을 꽂는다 → 아프고 무섭다 → 망설인다 → 배를 좀 가른다 → 아프고 무섭다 → 망설인다 → 배를 가른다...의 무한 루프로 몇 시간이나 고생하다가 출혈과 고통으로 기력이 다한 끝에 비참하게 죽는다는 것이다. 아래에 나오듯, 흔히 카미카제의 창시자로 불리는 해군중장 오니시 다키지로는 카이샤쿠를 거부하고 혼자 할복을 했다가 이런 식으로 15시간이나 고통을 겪다가 사망했다.
때문에 실질적으로 할복하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존재는 바로 뒤에서 목을 쳐주는 카이샤쿠다. 최대한 고통이 적게 일격에 보내주는 실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뛰어난 검술이 요구되었다. 이 카이샤쿠를 행하는 사람의 격에 따라서 할복을 하는 사람의 격이 정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서, 변변치 않은 가문에서는 돈을 주고 카이샤쿠를 해줄 사람을 몰래 구해왔다는 기록도 있고, 그 밖에도 조금이라도 더 실력있고 인정받는 사람을 카이샤쿠로 세우기 위해 지인의 인맥까지 동원하여 불러왔다는 예도 있다.

그런데 카이샤쿠가 이렇게 막중한 역할이고, 할복자의 명예와도 직결된 자리이다보니, 할복자가 실력이고 담력이고 명성이고 하나라도 부족하다 싶으면 부탁받은 사람이 카이샤쿠를 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어서 보통 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사형수가 그렇게까지 노력과 시간을 들일 가치가 없는 신분이라고 판단되면 그냥 막부영주(다이묘)가 직접 참수형을 명한 뒤 서류에만 할복으로 기록하는 게 보통이었다.

3. 역사

3.1. 기원

최초로 행해진 것은 헤이안 시대이며, 정확하게 누가 처음으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설이 불분명하기에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았다.

일반적으로 할복의 원조로 꼽는 것은 헤이안 시대 말기의 장군인 미나모토노 타메토모이다. 여러 가지 다른 견해도 있으나, 할복이 가장 성행하였던 에도 시대 사무라이들이 할복의 원조를 미나모토노 다메토모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외에 후지와라노 야스스케가 구속되고 자해를 한 게 할복의 원조로 꼽히지만, 그는 바로 죽지 않고 다음날에 옥사하였다.

그 밖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중 하가쿠레(葉隱) 혹은 상산기담(常山紀談)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느 무사의 아들이 떡 혹은 사과를 훔쳐 먹었다는 의혹을 받자 무사는 치욕을 씻기 위해 자식의 배를 갈라 무죄를 증명한 뒤, 의혹을 제기한 상대방을 죽여버리고는 자신도 할복했다고 한다. 일본 아키타현의 민간 전설이나 설화에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는데, 실제로 군국주의 시절 일본의 도덕 교과서에 실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후대에 정형화된 할복과는 차이가 있으며,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중국에도 전해지므로 일종의 설화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와 할복자들이 종종 보이기 시작하더니,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수의 할복자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는 당시 무사도의 개념이 원숙해짐과 더불어 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 실례로, 가마쿠라 막부의 탄생을 다룬 헤이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할복은 6건에 불과한데 반해, 무로마치 시대 이야기인 태평기에 기록된 할복은 무려 2,140건에 달한다.

그러나 이때까지의 할복은 대체로 패배한 장수가 행하는 경우에 국한되었으며, 극형이나 순사 등 전쟁이 없을 때에 행해지는 경우는 적었다. 또한 엄격히 말해 이런 사례가 모두 형식적으로 제대로 된 할복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대체로 당시 기록에서 "패장이 적에게 잡히는 것을 수치로 여겨서 자인(自刃)했다"는 문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후세의 할복처럼 '배를 가른다'는 고정된 형식으로 해석하기 어렵고, 좀 더 포괄적으로 스스로 날붙이를 써서 자살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패배 후 자결을 하던 것에는 명예와 자존심 이외의 다른 목적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해석이 있다. 이는 바로 적군에 의해 효수당하는 불명예를 피한다거나 자신의 죽음을 숨기려는 등의 실질적인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적군이 죽으면 반드시 목을 쳐서 그것이 본인의 목이 맞는지를 확인함으로서 죽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실제로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지만 몇몇 장수의 경우 목이 발견되지 않거나 목이 달라보였다는 이유로 생존설이 만들어지는 경우도 제법 존재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전국시대의 오다 노부나가아케치 미츠히데.

3.2. 센고쿠 시대

이러한 자살 방법들은 센고쿠 시대를 거치면서 할복이라는 형태로 극도로 양식화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당시 어떤 기록은 시골 사무라이들이 정확하게 할복하는 작법을 모른다며 비웃는 내용을 적었을 정도인데, 이는 당시 할복에 작법이란 것이 등장할 정도로 절차화되었음을 입증한다. 또한, 이때부터 할복이 단순히 전쟁에서 패배한 경우 뿐 아니라, 사무라이들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경우 내지는 정치적인 수단으로서까지 사용되면서 발전해갔으며, 전쟁이 없을 때에도 순사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할복의 성격이 명예와 결합된 정치적인 수단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서 센코쿠 시대의 무사인 시미즈 무네하루의 할복을 들 수 있다. 당시 시미즈가 속한 모리 일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침공을 받고 있었는데, 혼노지의 변이 발생하여 히데요시가 긴급히 군대를 회군하게 되어 동맹을 맺기로 하였다. 그런데 히데요시 측은 동맹의 조건으로 무네하루의 할복을 요구했는데, 사실 무네하루는 굳이 할복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시미즈 일족은 지방의 토착세력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다이묘의 권력하에 놓여진 존재는 아니었다. 또한 당장 군대의 회군이 급했던 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측이었다. 때문에 시미즈 무네하루를 휘하에 두었던 모리 측도 반대하였으나, 무네하루는 쾌히 이것을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이에 한시라도 빨리 군대를 회군해야 되는 히데요시조차도 무네하루의 할복을 "진정한 무사의 죽음"이라 하며, 그의 할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훗날 일본을 석권한 다음 그 아들인 카게하루에게 "다이묘로 삼아줄 테니 나의 직신(직접 주군으로 섬기는 신하)이 되어라"라고 제안하였으나, 카게하루는 모리에 대한 의리로서 그것을 거절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는 무사도의 본질을 관통하는 일화로서 유명하다.

결국 이런 식으로 책임을 지거나 명예를 입증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할복이 정립되었다.

또 한편으론, 센코쿠 시대 말기에 들어서며 할복의 이름을 빌린 처형이 빈번하게 발생하면서 점차 사형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참수형이나 책형 같은 다른 사형 방법이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라고 여겨진 것과 대비되어, 할복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형태로서 사무라이의 명예를 지킬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 당시 사무라이의 관념 상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체면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후 할복이라는 형태로 집행되는 사형이 제도화되었다.

센고쿠 시대에도 예외적인 사례가 있어서 임진왜란의 선봉장이기도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가톨릭 신자였던 탓에,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후 할복 자살을 종용받았으나 하지 않았다. 기독교에서는 자살을 금기로 하기 때문. 그 때문에 조리돌림을 당해 갖은 모욕을 당한 후에 참수형으로 죽었다. 죽을 때 불교식대로 승려가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놓고 을 읊었는데 고니시는 "허튼 짓 하지 말아라, 나는 키리시탄(크리스천)이다"라며 경을 팽개치고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참수당했다.

3.3. 에도 시대

에도 시대에 오늘날 알려진 고도로 절차화된 할복의 형태가 완성되어, 권위 있는 할복 전문가가 올바른 작법을 설명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에도시대의 사형 중 참수형에 해당하는 것에는 세 종류가 있었다. 가장 가벼운 형벌인 게슈닌(下手人, げしゅにん)은 참수만 하고 끝이지만, 시자이(死罪,しざい) 이상에서는 참수에 더해 재산을 몰수하고 몸체를 타메시기리에 쓰게하며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했으며, 가장 중형인 고쿠몬(獄門, ごくもん)은 참수된 머리를 효수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참수를 할 때도 평균적으로 세 번이상의 칼질을 해야 목이 떨어지는데다 남은 몸뚱이도 타메시기리에 쓰일 경우 멀쩡하지 못했으며 노코기리히키[3]책형, 화형 쯤 가면 특성상 신체훼손을 논하는게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반면에 할복의 경우, 사형으로서의 절차가 정립된 후에는 후술하다시피 배에 칼을 댄 시늉을 한 후에 카이샤쿠(介錯)가 한번에 목을 떨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러한 방식은 검을 숭상하고 체면을 중시한 중세 일본의 사고방식이 극명하게 드러난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스스로 배를 갈라 죽는다'는 행위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배를 가르는 행위' 자체가 형식화되어 버렸다. 나중에는 아예 할복 시행 시 칼 대신 부채를 줘서 배를 긋는 시늉만 하는 식이 일반적이게 되었다. 설령 칼을 쓴다 해도 할복할 사람의 손에 칼 손잡이가 닿기도 전에 목을 베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이러면 그냥 참수형이랑 다를 게 뭔가 싶기는 하지만, 형식적으로나마 죽기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보아 할복으로 인정하였다.

원래부터 사무라이라는 것이 시험으로 뽑는 것도 아니고 그냥 무가의 자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무라이가 되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에도 막부에서 법적으로 인정하는 사무라이의 지위는 사무라이 본인과 그 대를 이을 장자뿐이었고, 차남 이하는 성인이 되어 다른 가문에 정식으로 출사하여 가신이 되기 전에는 사무라이로 인정하지 않고 로닌으로 불렀다. [4] 그렇다보니 당연히 모든 사무라이들이 스스로 배를 가를 정도도 간이 큰 것은 아니었다. 연좌제에 걸려 할복을 명령받은 대상 중에는 극히 드물게 코흘리개 어린아이도 있었으며, 이럴 경우에는 100% 부채 지급이었다. 때문에 에도 시대 중기에 이르면, 아예 이런 문제 때문에 복잡한 절차 거칠 것 없이 그냥 참수형을 집행한 다음, 서류상으로만 할복으로 보고하는 경우도 제법 존재하였다.

이렇다 보니 에도 후기부터는, 진짜 자기가 배를 가르고 죽었다는 것은 상당한 의지의 표명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때문에 스스로 배를 가른 극소수의 진짜 할복은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예를 들어 신선조야마나미 케이스케는 당시 부채를 집는 풍습이 퍼졌음에도 무사답게 최후를 맞이했다고 한다. 이런 경향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진짜로 할복이 실행된 경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우였다.
  1. 사건 자체가 무사도와의 관련성이 매우 높고, 세간의 상당한 주목을 받는 경우.
  2. 형벌로서의 할복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자살 형태의 할복. 개중에서도 진심으로 자신의 의지를 천명하는 경우.

1번 케이스로 유명한 경우가 바로 추신구라 사건이다. 사건을 일으킨 46명의 낭인은 이후 할복을 명받았고 그중 10명의 할복이 모리 가문의 저택에서 이루어졌는데, 할복에 대한 온갖 과장들이 난무하는 와중에, 이때의 기록은 과장된 점 없이 매우 객관적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모리의 가신들은 처음에는 부채를 주었다. 그런데 이를 본 막부의 관리가 단도를 사용하라고 요구하여 결국 진짜로 배를 찌르는 광경이 벌어졌다. 10명 중 특별히 기록될 만한 케이스는 단 2건으로, 하나는 할복 직전 카이샤쿠에게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인사한 것과, 나머지 하나는 정말로 깊게 배를 갈랐다는 것이라고 한다. 즉 대부분의 경우 인사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긴장했으며, 제대로 배를 가른 자도 별로 없었다는 이야기. 이는 진짜 제대로 된 할복은 소수에 불과했다는 방증이다.

또다른 예로 막말 유신지사 다케치 한페이타의 할복이 있다. 한페이타는 도사 번가로 요시다 도요를 암살한 죄로 할복을 하게 되는데, 이때 카이샤쿠역을 맡은 자에게 "내가 명령을 내리면 목을 쳐라"라고 부탁한다. 할복장에서 단도로 처음 배를 가르자 카이샤쿠역이 목을 치려 하자 '아직이야!'라며 말렸고, 다시 한번 배를 가른다. 이에 카이샤쿠역이 목을 치려 하자, 또 말리며 3번째 배를 가른 후 죽는다. 이 모습을 본 도요의 조카인 고토 쇼지로[5]와 쇼지로의 친구 이누이 다이스케는 "한페이타의 최후가 장렬하다"고 말했는데, 적에게 삼촌을 잃은 조카와 그 친구마저 적의 할복이 장렬하다고 인정한 것이다. 대부분의 할복이 장렬했다면 굳이 그렇게 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는 진짜 제대로 된 할복은 소수에 불과했다는 또 하나의 방증이다.

2번의 경우 역시 극히 드물었다. 사실 자살 형태의 할복 또한 대부분의 경우 할복자가 "나 할복한다"고 선언한 뒤, 실제로 배를 가르지는 않고 카이샤쿠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일은 대체로 주군인 다이묘가 죽은 뒤 가신들이 따라 죽는 순사에서 벌어졌다. 사실 순사란 것이 충성과 도리라는 미명으로 포장은 되었으나, 그 이면에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이 따랐기 때문이다. 조선 유학자로서는 유일무이하게 17세기 초반 사무라이 문화를 관찰할 수 있었던 강항은 당대 유행하던 할복을 통한 순사가 겉으로만 요란할 뿐 사실은 다른 속내가 있음을 간파하고, "겉으로는 주군을 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혀 아니며,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있다"고 논하였다. 실제로 17세기 무렵 순사자가 너무 많은 것에 골머리를 앓은 막부가 "순사자의 가문에게 벌을 주겠다"는 포고령을 내리자, 순사는 그 즉시 소멸했다. 실상이 이러니 당연히 진짜로 배를 가르는 자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하여 에도 막부 측에서 막부의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말기 양자[6]를 금지하려 하거나 사소한 것을 구실로 가이에키[7]을 하려고 하는 경우, 지방 쪽에서 막부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선수를 쳐서 다이묘의 가신급에서 할복을 해버리는 경우 또한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런 경우는 할복이 아니라 책임회피용 자살내지 빠른 형집행. 하지만 명목상으로는 할복이기 때문에 막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사후 처리를 관대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건이 너무 크다면 설령 할복을 했어도 다이묘 참수와 개역을 명하는 경우도 있었다.

황당한 할복 시도 사례도 있는데, 1688년에 이세 나가시마번[8] 2대 번주 마츠다이라 타다미츠의 장남인 마츠다이라 타다아키가 성 안에서 졸다가 잠결에 자신의 배를 칼로 찌르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다행히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타다아키는 이 소동으로 차기 번주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소동으로 폐적되었다는 설도 있고, 스스로 후계자의 자리를 고사했다는 설도 있다. 다만 이 할복 아닌 할복 소동이 벌어진 데는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는데, 당시 타다아키는 부친인 타다미츠와 사이가 상당히 험악했다고 한다. 문무양도를 겸비한 타다아키와는 대조적으로 아버지 타다미츠는 어리석은 주군이었고, 사소한 이유로 가신 3명을 추방하는 등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이런 탓에 타다아키가 점점 부친에게 불만을 품게 되면서 부자 사이에는 도저히 수습하기 힘든 감정의 골이 패여 버렸고 그 와중에 타다아키의 '졸음할복' 소동이 벌어진 것. 당시 타다아키가 졸고 있었던 이유를 부친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스트레스와 피로 누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3.4.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 시기에 일어난 무진전쟁 당시 패배한 아이즈 번의 소년 무사 군대인 백호대(白虎隊)가 쓰루가 성(鶴ヶ城) 근처 뒷산에서 집단 할복한 사건도 있었다. 원칙적으로 조슈 번 출신들이 장악한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반란군들에 불과했지만, 시간이 좀 더 흐르자 2차대전 당시 일본군에서 백호대 할복 사건을 "명예로운 사무라이의 표상"이라며 신격화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일어났으며, 카미카제 대원들에게도 정신 교육용으로 이 일화를 자주 인용했다.[9]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많은 사무라이들이 몰락했지만,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었던 조슈 번과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은 일본 육군과 해군의 시초가 된다. 낭인이 된 하급 사무라이들 중 다수가 메이지 정부에서 신설된 군대와 경찰 조직에 등용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도시대에 치안유지나 소방업무 등을 맡던 것도 원래 사무라이들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신식 군대에서도 지휘 경험이 있고 전투 훈련이 되어있는 사무라이들이 자연스레 사관이나 부사관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군은 명실상부 사무라이 계급의 연장선에 있었고 이들의 가치관과 행동 양식도 이어지게 된다. 이중에는 할복도 포함된다. 결국 할복은 제도적으로는 폐지되었으나, 실제로는 일본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존속되었다.

메이지 시대 이후로 할복한 사람들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러일전쟁 당시 뤼순 공방전에서 일본군을 지휘했던 노기 마레스케이다. 노기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고 자신도 참전한 두 아들을 잃었다. 때문에, 승전을 했음에도 할복하려고 했지만 메이지 덴노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안 된다"고 말렸다. 그 후 메이지 덴노가 1912년 사망하자 아내인 시즈코와 함께 칼로 자살했다. 노기는 할복 후 가슴을 찔렀고, 시즈코는 심장을 찔렀다. 순사라고 볼 수도 있지만, 명령에 따라 미루었던 할복을 행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3.4.1. 사카이 사건

메이지 유신 이후의 신뢰할 만한 할복 사례 중 유명한 것으로 사카이 사건(堺 事件)을 들 수 있다. 일본 위키의 사카이 사건 항목.

사건과정을 살펴보면 메이지 원년인 1868년, 무진전쟁이 발발한지 얼마 안 된 시점인 2월. 이때 오사카 근처 사카이(堺)에는 신정부군 측 도사 번의 보병대가 주둔해서 치안 유지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외국인 출입 금지 지역임에도 프랑스 해군 일부가 상륙하여 소동을 피워 토사 보병대가 이들을 군함으로 돌려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 한 프랑스 수병이 토사 측의 군기를 빼앗아 달아나는 장난을 쳤다. 일본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군기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군대와 그 군대의 명예를 상징하며 따라서 반드시 사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군기를 가지고 장난을 쳤으니 어마어마한 대형사고를 저지른 셈이다. 이에 분노한 토사 측 기수대장이 쇠갈고리를 던졌는데 이게 이 수병의 뒤통수를 맞춰 버렸던 것. 그 즉시 양쪽에 총격전이 발생하였고, 프랑스 수병 11명(혹은 13명으로도 추측된다)이 사망하였다. 어느 쪽이 먼저 발포하였는지는 양쪽의 주장이 엇갈린다. 다만 프랑스 쪽에서만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점, 사후처리에서 보인 일본의 저자세를 볼 때 일본 쪽이 먼저 발포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프랑스 공사는 즉각 일본 정부에 토사번주의 직접 사과, 배상금 지불 및 사건을 저지른 병사 20명의 사형을 요구하였고, 일본 조정은 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병사들은 임무를 수행한 자신들을 사형시킨다는 사실에 매우 큰 불만을 가졌고, 이에 불복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다. 결국 이들을 달래기 위해 책임자인 토사번은 이들에게 할복을 허락한다. 그리고 묘고쿠지(妙國寺)에서 프랑스 공사 레온 로슈(Michel Jules Marie Léon Roches 1809~1900)와 프랑스 해군 사령관 등 프랑스 인사들과 어네스트 사토영국 공사관 직원들까지 참석한 가운데 최초로 외국인들 앞에서 할복 의식이 치러진다.

문제는 이때의 할복이 에도 시대의 배를 긋는 시늉을 하는 참수형이 아니라, 진짜 배를 가르는 할복, 것도 원본 버전보다도 잔혹하고 유혈낭자한 엽기 자살극이었다는 것. 일이 이렇게 된 원인은 할복자인 토사번의 병사들이 젊고 혈기왕성한 나이에 존왕양이의 신념으로 봉기한 자들로, 원수처럼 여기던 외국인들에게 굴복해 앞에서 할복하게 된 처지인 데다, 하급 사무라이 계급 출신들로 성정이 과격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저 괘씸한 외국인들 앞에서 진짜배기 할복을 보여주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당연하지만 그저 참수형 정도로 생각했던 프랑스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사실 프랑스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1981년에 사형을 폐지하기 전까지 일부 총살형 사례를 제외하면 단두대를 이용한 참수형을 고집할만큼 참수형에 익숙한 국가다. 더군다나 사카이 사건이 벌어진 19세기 중엽은 공개처형이 기본이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이들 프랑스인들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이들의 할복 현장은 참혹했다.

특히 최초의 할복자인 미노우라 이노기치의 경우는, 정말로 이게 가능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유혈극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미노우라는 일단 프랑스 공사에게 "지금부터 잘 봐라!"라고 큰소리로 선언한 뒤, 배를 가르고 손을 넣어 창자를 꺼내 집어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카이샤쿠가 목을 칠 때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적중하지 않자 "좀 더 침착하게 치게!"라고 큰소리로 격려했다고 한다. 2번째 칼질 역시 제대로 먹히지 않자 장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다시 쳐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결국 3번째 칼질에 사망했는데, 이 첫 할복부터 프랑스 공사가 혼이 나가서 새파랗게 질린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후 할복자들 역시 전원이 진짜로 배를 갈랐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 기록에 따르면 내장을 꺼내놓고 그걸 정렬한 다음, 피 묻은 손으로 모래바닥에 '나 죽는다'고 인증 쓰고는 그 내장을 프랑스인들을 향해 집어던졌다는 얘기까지 전해진다. 어느 할복자는 처음에 배를 가른 것이 얕다고 여겨 다시 한 번 그었다거나, 어느 할복자는 배를 좌우 다른 방향으로 2번 그어 창자가 땅에 쏟아지는 연출을 했다고도 전해진다. 신뢰할 만한 기록들에 따르면 그 정도까지는 아닌 듯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엽기적이라고 할 만큼 유혈이 낭자했다.

마침내 참다 못한 레온 로슈 프랑스 공사는 현장에서 도망쳐버렸다. 어안이 벙벙해진 토사번은 일단 형집행을 멈췄다. 이 시점에는 11명이 할복을 하였고, 9명이 대기 중이던 상황. 그리고 레온 로슈 공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데 감탄했으나 너무 처참하므로 더 지켜볼 수가 없다"고 밝히는 한편 "남은 9명의 목숨을 살려주도록 정부에 건의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리하여 남은 9명은 유배형으로 감면되었다. 이들은 비록 유배형 처분을 받았으나 칼을 차고 가마에 탄 채로 유배지로 떠나는 등, 극진한 영웅 대접을 받았다. 이후 유배지에서 1명이 병으로 사망하였으나 1년도 안 되어 메이지 덴노의 즉위를 핑계로 완전 사면되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프랑스 공사인 레온 로슈(Michel Jules Marie Léon Roches 1809~1900)는 이날 일기에 기록을 남겼는데, 그들에게 동정을 느낀 동시에 이런 형태의 처형은 프랑스 측이 원하는 대로 책임을 묻고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할복자들이 영웅시되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중단시킨 것이었다고 기록했다.

한편, 영국 외교관어네스트 사토는 자신의 저서에 "온 힘을 다해 이 형벌을 입회하는 일에서 뒷걸음치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라고 적었다. 아마도 옆의 프랑스 공사 일행 때문에 체면 상 억지로 버틴 것 같다.

이 할복 중지 사태가 발생한 지 불과 1주일 뒤에 영국 공사 일행이 길거리에서 양이지사 2인에게 습격받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2명의 자객 중 하야시다 사다카타(林田貞堅)[10]는 습격 직후 호위였던 사쓰마 번사 나카이 히로시(中井弘)와 도사 번사 고토 모토하루(後藤元曄)[11]에게 격퇴당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렸고, 나머지 1명인 사에구사 시게루(三枝蓊)는 영국인 호위병 몇 명에게 상처를 입히며 영국 공사 파크스 쪽으로 돌진했으나, 어네스트 사토가 직접 달려들어 칼을 빼앗는 바람에 결국 생포되었다. 덧붙어서 범인 2명 모두 사진이 남아 있다. 사에구사는 처형 2시간 전에 서양인들에 의해 초상 사진을 남겼고, 하야시다는 잘린 머리의 사진이 공개됐다.

3.5. 제2차 세계 대전

2차대전임팔 작전을 거하게 말아먹은 무타구치 렌야는 "책임감을 느끼니 콱 자결해버릴까"라는 형식적인 면피용 말을 했다가, 그 소리를 듣던 부관이 "옛말에 나 죽어 나 죽어 하던 자 중에 진짜 죽은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만약 장군께서 진짜 책임감을 느끼신다면 닥치고 배를 가르십시오, 이 패배에는 그 정도의 책임이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권총을 내밀었다고 한다. 물론 죽을 생각을 하지도 않은 만큼 무다구치 렌야는 할복을 하는 대신 삶의 의지를 다졌으나, 대신 자기 부하인 사토 고토쿠 중장에게 패배 책임을 떠넘기고 할복하라면서 칼을 남기고 도망쳐 숨어버렸다. 물론 무능한 상관에게 빡칠 대로 빡친 사토는 자살하기는커녕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를 쑤셔버리겠다!"라면서 칼을 챙겨갔다고 한다. 참고로 아래에 서술된 미시마 유키오와 이 부관은 지인이었다는데, 미시마의 자위대 총궐기 계획과 할복 계획을 전해듣고 "내가 살다살다 무다구치 이상으로 멍청한 놈은 처음 봤다."라고 평했다고 한다.

일본이 항복할 때 육군대신이었던 아나미 고레치카내각 온건파의 항복주장에 격렬히 반대하였으나, 쿠데타를 획책하며 궁성사건을 일으킨 극우파들에게도 협조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패전의 책임을 죽음으로 사죄한다'며 할복자살하였다.

카미카제 특공대를 최초로 만들었던 해군 군령부 차장 오니시 다키지로 중장은 패전 후 죽은 특공대원들에게 죽음으로 사죄한다는 유서를 남기고 카이샤쿠 없이 할복한 뒤 고통 끝에 15시간만에 사망했다. 새벽에 할복한 뒤 아침에 발견되었지만, 치료나 안락사 조치를 스스로 거부했다고 한다.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을 지휘한 32군 사령관 우지시마 미쓰루 대장과 참모장 조 이사무 중장도 패배가 확실해지자 할복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모든 일본군 자살자가 할복으로 자살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 해군제독 나구모 주이치 대장은 권총으로 자살했다. 도조 히데키도조 히데키 자살 미수 사건에서 권총으로 자살하다 실패했고 이후 교수형으로 사망한다.

3.6. 현대

전후에도 간간히 행해졌는데, 특히 일본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사례가 유명하다. 극우 사상에 경도된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미시마 사건을 일으켜 육상자위대 동부 방면 총감실을 점거하고 자위대원들에게 쿠데타를 종용하다가 총감실에서 할복 자살했다. 이 때 카이샤쿠의 칼질이 서툴렀던 탓에 즉사하지 못하고 2번이나 목을 쳐서 사망했다고 한다. 고통 때문에 배를 가른 후 쓰려던 혈서도 쓰지 못했고, 부검 결과 혀를 깨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할복으로 죽는게 힘들다는 걸 보여준 가장 최근의 사례라고 하겠다.

할복이라는 말이 너무 흔해지다보니 잘못 알려진 사례도 있다. 오히라 미쓰요도 15살 때 왕따를 심하게 겪은 나머지 할복을 시도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날붙이를 쓴 자해였을 것으로 보인다.

3.7. 기타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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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외국의 할복

일본이 아닌 외국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자살한 경우가 몇몇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특수한 사례였고, 고대의 기록들로 신뢰성이 적다. 게다가 일본처럼 의식화된 것이 아니므로 할복은 일본의 고유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 나열된 사례들 중 상당수는 일본식 할복이 아니라 날붙이로 배에 자상을 입히는 자해에 해당한다.

중국의 경우, 춘추전국시대 전투에 나가 죽은 위의공의 시체가 온전하지 못하여 멀쩡한 부위가 밖에 없게 되자 한 신하가 배를 가르고 자신의 내장을 꺼낸 후 그 안에 위의공의 간을 집어넣어 장례를 치르게 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로마 공화정 말기의 공화주의 정치가인 소(小) 카토의 경우가 유명한데, 자신이 수비하던 우티카카이사르 군대에게 항복하는 전날 저녁에 친구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 배를 갈라 자살했다. 기록에 따라 손목을 긋고 자살한 것에 불과하다는 얘기도 있고 배를 가른 뒤 창자를 끄집어내기까지 했다는 얘기도 있다. 로마인들이 자살을 "의지의 죽음"이라고 불렀다고 하지만, 카토의 방식은 워낙 충격적이어서 카이사르가 카토의 행동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고 한다. 물론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키케로는 다시 카이사르를 비판하는 글을 적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인 포로 홍호연이 할복 자살한 기록이 있다.참조 이 외에 병자호란 시기 이조 참판 정온이 출성 항복에 반대하여 배를 갈라 자살을 기도했으나 사람들이 달려들어 치료하는 바람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헤이그 특사로 잘 알려진 이준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서 할복으로 순국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헤이그 특사 중 한 사람이 이준이 회의장에 들어가 할복자살을 하여 창자를 흩뿌렸다는 민담 등이 전해지지만, 이준은 할복은커녕 자살한 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확한 사인은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 입장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지병 뺨종기가 도져서 사망했는데, 어니스트 베델대한매일신보에서 오보를 낸 것이 민중들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주며 퍼진 것이다.

심지어 현대 한국에서도 할복을 했다고 일컬어지는 자들이 간혹 등장한다. 독립운동가 문일민은 1947년에 중앙청 앞에서 할복을 했다. 확실하게 죽으려고 수산화나트륨을 삼키고 행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할복하면서 가른 위장사이로 빠져나와 살 수 있었다.

정치가들 중에는 특히 검찰 조사를 받게 도중이나 재판 과정 중 세간의 이목을 끌기 위해 이런 짓을 벌이는 경우가 있다.이런 짓을 한 사람 중에 유명한 인물로 1세대 조폭 김두한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유명하다. 또한 한국의 민주화운동가나 재야인사 중에도 할복자살로 신념을 드러낸 사례도 있는데, 1975년에 숨진 김상진 열사, 1988년에 숨진 조성만 열사(할복 후 투신), 2003년에 숨진 이경해 열사[12]가 대표적 사례였다.

이 외에도 일부 죄질이 극히 불량한 양아치, 깡패, 조폭, 일진 등의 경우 아직까지도 심심찮게 이런 짓거리를 벌인다고 한다. 다만 위의 설명대로 실제 할복은 실행하기 상당히 어려우며, 김두한이나 김현철 등이 사용한 도구도 커터칼이나 통조림 깡통 뚜껑날(...) 등이었다. 즉, 할복으로 보기 어렵고 복부에 자상을 입히는 수준의 자해에 불과한 것.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는 사람이 결코 즉사하지 못하고, 고통도 그리 심하지 않다. 결국 동정심과 이목을 끌기 위한 자살쇼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삼청교육대 피해자들 중에서 할복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1월 23일에 삼청교육대 인권실천연합회가 한국은행 본점 앞에서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던 중에 발생했다. 이 영향으로 시위를 막기 위해 출동한 경찰들이 사건 현장 주변을 봉쇄했으며 양씨는 119에 의해 백병원으로 옮겨졌다.[13]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촉발된 박근혜 탄핵에 대하여 박사모가 할복단을 모집한다고 했다가 일본 문화를 따라한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실행은 하지 않았다.

2023년 1월, 건물주의 월세 인상에 반발한 육회집 여사장이 나체로 할복 시위를 하려다가 경찰에게 제압당했다. 기사

할복은 한국 문화일본 문화를 비교할 때에 드러나는 대표적인 차이점을 보여준다. 할복을 하기 위해서는 할복을 명예로 여기는 문화와, 칼을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다. 한국은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강조하는 효 사상 때문에 몸을 훼손하는 일에 저항감이 커서 할복같은 자살 방법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다. 자결을 하더라도 대게 신체가 온전하게 남는 방식이었다.[14] 종종 비유적으로 한국인이 누군가를 도의적으로 비난할 때 "할복해라!"라는 말을 꺼내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원래 일본식 할복의 목적인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라,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으라는 의미의 악담으로 사용하는 경우다.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한국인들이 명예나 주의 주장을 위해서 자살을 했지만, 그 중에서 할복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병자호란 후 정온, 을사조약 체결 후 민영환 등 정말 소수이고 그나마도 둘 다 할복으로 죽는데 실패했다.

5. 매체

5.1. 영상물

할복이 워낙 전 세계에 잘 알려진 자살 방법인 탓에, 창작물에서도 숱하게 등장하고 있다.

야인시대 40화에서는 가미소리김두한의 우미관 패에게 패배한 책임을 지고 할복했으며, 77회에서는 김두한이 미군 법정에서 군사재판을 받을 때 최후진술을 하면서 통조림 깡통 뚜껑을 꺼내 할복을 시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방송심의상 연출이 아닌 실제장면에 가까울 정도로 잔인한 데다가, 통조림 뚜껑이 흉기로 판정되어 모자이크 처리한 상태로 나왔다. 이후에 미군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일본에서는 전연령 혹은 15세 이하 관람가로 사극을 제작할 경우 할복 장면을 생략하거나, 나오더라도 최대한 은유적으로 묘사한다. 일례로 1989년에 제작된 『千利休 本覺坊遺文』(센 리큐 혼카쿠보 유문)이란 영화에서는 센 리큐와 주변 인물들의 할복 장면을 묘사할 때 최대한 잔인해 보이지 않으려고 할복을 연기하는 배우의 얼굴만 클로즈업하거나, 벚꽃이 흩날리는 등의 묘사를 사용했다.

필살 시리즈는 위장 할복으로 유명하다. 주인공 나카무라 몬도는, 악당의 수괴나 권력을 앞세워 온갖 더러운 공작을 벌이며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지체 높은 사무라이들을 위장 할복으로 처단할 때가 많다. 상대가 완전히 숨이 끊어진 후에는 "훌륭한 최후(자해)이십니다(見事なご最後(自害)でございます)", "언젠가 지옥에서 만나자고(いずれまた地獄で会おうぜ)"라고 비꼬면서 유유히 자리를 뜬다.

추신구라 사건을 영화화한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47 로닌에서도 할복이 중요한 소재로 나온다. 주인공인 키아누 리브스와 그의 일행들 역시 결말부에 직접 할복으로 자살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미국 애니메이션인 네모바지 스폰지밥에도 할복을 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쇼군(2024년 드라마)에선 에도 막부 직전의 배경을 다루기에 정형화된 할복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당시 일본 사무라이 계급이 자신의 명예나 정치적 문제에 항거하는 방식으로도 등장하며 한편으로 처형의 일종으로도 등장한다. 성인 등급의 드라마인 만큼 할복하는 과정부터 가이샤쿠가 목을 치는 장면까지 전부 묘사되어 수위높은 장면으로 드러난다.

선라이즈의 애니메이션 혁명기 발브레이브에선 주인공 기체인 발브레이브 1호기가 시전한다. 다만 자폭이나 동귀어진이 아닌 순수한 필살기 속성으로 사용. 주역 기체들은 기동할 수록 열량 수치가 상승하고 100이 되면 기체가 오버히트하여 강제적으로 냉각모드에 돌입하며 전투불능 상태가 되는 일종의 타임 리미트가 존재하는데 주인공 기체인 1호기는 열량수치가 100이 되어 냉각모드에 돌입해도 특별하게 열량 수치가 계속해서 666까지 상승한다. 666에 돌입하면 기체가 황금색으로 빛나는데 이때 검으로 할복하듯이 복부의 코어를 찌르게 되면 엄청난 에너지를 내뿜으며 파워업 상태로 재가동하는 기믹이 존재한다. 이 때문에 최초의 할복로봇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5.2. 게임

모탈 컴뱃: 디셉션에서는 상대에게 끔살당하느니 차라리 치욕을 덜하기 위해 할복이 가능하다. 이중 실제 할복과 가장 흡사한 케릭터는 켄시.

철권 캐릭터 요시미츠는 할복을 필살기로 쓴다. 기술명이 할복은 아니다. 커맨드는 66 LP + RK, 2 LP + RK, 뒤를 돈 상태에서 2 LP + RK. 칼로 자기 배를 관통(!) 시켜서 등 뒤에 있는 상대에게 대미지를 주는 가불기이지만, 자기 몸을 관통하는 만큼 시전하면 전체 체력의 1/3 만큼의 상당한 대미지를 입는다. 가불기들 중에서 상당히 빠르고 앞으로 길게 전진하기 때문에 기습으로 넣으면 상대가 맞는 경우도 생기지만 공격 사거리가 짧아서 그냥 자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요시미츠인 만큼 할복에도 파생이 있다. 할복 모션을 취하다가 요시미츠가 투명화 되면서 위쪽으로 순간이동하는 할복 훼이크라든가(할복 대미지를 입지 않는다), 할복 모션을 시전한뒤에 44 입력시 또다른 칼을 꺼내서 다시 할복 모션을 시전하는 더블 할목 기술도 있다. 이때 요시미츠는 200 이상의 대미지를 입게 되어 즉시 KO당한다. 할복 모션을 시전한뒤 LP 입력시 할목 스핀도 한다. 일향포(rk~lk) 후에 2 lp+rk로 할복을 공중 콤보로 넣어줄 수도 있다. 이 기술을 사용해서 이기면 엄청난 쾌감을 얻지만, 이 기술로 KO 당하면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TTT까지는 할복으로 상대를 KO 시켜도 요시미츠의 체력이 동시에 감소되어서 더블 KO가 되었지만 4편부터는 K.O시 자신의 체력이 15 프레임 늦게 감소되기 때문에 상대가 KO 당하면 요시미츠의 승리가 된다. 6편부터 레이지에서 사용시 상대방이 반 피 이상이 날아가기 때문에 간보다가 써주면 생각보다 짭짤한 편. 상대방은 '막고 때려야지' 하다가 가불기 맞고 죽는다. 믿음과 신념의 할복. 실제로 할복 기술로 이긴 사례가 유튜브에 치면 나온다. 당장에 철권 스트리머인 ㅇyㅇ나 아빠킹 등 요시미츠를 사용하는 플레이어는 할복을 심리전이나 콤보 마무리로 유용하게 써먹는다.

아케이드 게임카부키 Z는 오프닝에서부터 할복하는 장면이 나오고 나머지 묘사도 잔인한 등 참으로 경파하고 끔찍한 것도 모자라 분위기도 뜬금없어지는 게임이라 혹평을 받았다.

토탈 워: 쇼군2에서도 플레이어블 대가문들이 멸망시 각 가문들을 상징하는 병과들이 전투에서 패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그 뒤에 해당 다이묘가 할복하는 모습을 보이며 멸망을 표현한다. 다만 오토모는 시작부터 기독교를 믿어서인지 위의 할복 씬이 안 나오고 그냥 멸망했다고만 뜬다.

다크 소울 2에서 기사 아론를 노데미지로 클리어를 하면 자신의 검을 복부에 꽂아 할복을 한다.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에서도 5편에서 버질염마도로 시전한다. 죽기 위해서 시전하는 다른 매체들과는 반대로, 얼마 안 남은 시한부 목숨에서 벗어나 연명하기 위해 사용한게 특징. 이렇게 배를 째서 자기 인간성도려내 버렸다. 인게임에서도 할복하면 체력이 회복되면서 광범위 공격을 퍼붓는다.

엘든 링에서 전회로 나온다. 사용 시 자신의 배에 칼을 꽂았다가 뽑아서 소량의 데미지를 입고 칼날에 피를 둘러 무기에 출혈 상태이상을 부여한다. 무슨 원리일까

고에몽 시리즈에서는 이름에 할복이 들어간 '셋푸쿠마루'라는 악역이 나오는데, 분위기가 매우 가벼운 고에몽 시리즈답게 어딘가 맛이 가 있는 악역이며 게임에서든 애니메이션에서든 할복을 결코 좋게 묘사하지 않는다. 메인 악역이자 최종 보스로 등장하는 <힘내라 고에몽 반짝반짝 여행길 ~내가 댄서가 된 이유~>에서는 스포츠 승부에 미쳐 사는 헬창이자 할복을 일종의 가장 어려운 스포츠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고에몽 일행에게 패배하고서 기어이 카이샤쿠 없이 할복을 자행하고 그로 인해 행성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 시한폭탄이 몸 속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고에몽 임팩트가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셋푸쿠마루를 데리고 태양으로 들어가려고 할 적 할복이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 몰랐다며 나름대로 후회하고, 고에몽 임팩트가 "할복은 스포츠가 아닙니다."라고 가르쳐주자 자기가 한심한 짓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화를 내면서 임팩트를 행성으로 되돌려 주고 자신은 태양에서 산화한다. 해당 게임을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판에는 설정이 달라져서 고에몽 일행에게 패배할 때 할복을 시도하다가 부하들에게 저지되는 것으로 나온다.

미국의 3D 렐름즈에서 제작한 FPS Shadow Warrior의 더미 데이터 중에는 나체인 여성 NPC가 할복 자살하는 스프라이트가 있다.

마인크래프트의 유명 서버인 배드워즈에서는 죽어도 계속 부활하기 때문에 침입자가 왔을때 육로로 돌아가는것보다 의도적으로 죽어 기지로 돌아가는것이 효율적일때가 있는데 이때 하는 자살을 할복이라 부른다.


[1] 일러스트레이터가 착각을 했는지 "hari-kari"라고 잘못 적혀 있다. 뭐 운율은 맞네.[2] 하타모토이자 유직고실(각종 예법과 예식)의 전문가로, 할복에 관한 예법에 대해서도 저술을 남겼으므로 할복에 있어서도 전문가인 셈이다.[3] 머리만 나오게 생매장시킨 다음 으로 머리를 켜는(!) 처형법.[4] 그 유명한 신선조오키타 소지 역시 부친이 오슈 시라카와 번사였지만 매형이 데릴사위로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막부에서 작성한 대원목록에는 신분이 로닌으로 되어 있다.[5] 보수파였지만 나중에 사카모토 료마와 함께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다.[6] 다이묘가 죽기 직전, 죽은 후에 양자를 들여서 가문을 잇게 함으로서 가문이 끊기지 않도록 하는 것.[7] 개역改易(かいえき), 무사의 봉록을 모두 빼앗고 평민으로 강등하는 것.[8] 현재의 미에현 쿠와나시 나가시마[9] 이세연, 《메이지시기 백호대 전사자를 둘러싼 기억의 재구성》, 2008[10] 별칭은 '스자쿠 미사오'(朱雀操)이며 일본 위키에는 별칭으로 등록되어 있다.[11] 통칭은 쇼지로(象次郞)[12] 세계무역기구(WTO) 제5차 각료회의 협상에 항의하며 멕시코 칸쿤에서 자결. 장례는 세계농민장으로 거행되었다.[13] 그 결과 2003년 12월 '삼청교육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어 2004년 1월 29일에 정식 시행됐으나, 일부 문제점이 있었다. 이후 2018년 12월 28일, 대법원은 삼청교육대 근간이던 '계엄포고 제13호'에 위헌 판결을 내리면서 정부에서는 명예 회복에 대한 노력을 하고 있다.[14] 조선에서 왕족이나 양반층을 대상으로 명예롭게 사형을 내리기 위해 사용한 방편이 독극물을 마시고 죽는 사약인 이유가 바로 시신을 온전하게 보존하기 위함이었다. 사약을 받으면 멀쩡한 시신을 수습해 장례지낼 수 있었기 때문. 그래서 사약을 받은 사람은 의외로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며 임금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예외적으로 저항이 심하거나 사약을 먹고도 죽지 않는 경우 목을 매도록 하거나 교살했다. 어쨌든 이 방법도 시신에 손상을 최소한으로 가하는 법이라는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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