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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귀족 후작 | |||
<colbgcolor=#29176e><colcolor=#ffd400> 조선 장종의 현손 | |||
대한제국 장조의 현손 완순군 | 完順君 | |||
출생 | 1856년 1월 12일 | ||
조선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 (現 남양주시 와부읍) | |||
사망 | 1922년 8월 11일 (향년 66세) | ||
조선 경기도 경성부 가회정 자택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 |||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리 안골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29176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경창군파 → 전주 이씨 연령군파 | |
휘 | 을경(乙經) → 재완(載完)[1] | ||
부모 | 부친 이신응[2] 모친 전주 최씨 | ||
양부 흥완군 양모 정경부인 순천 박씨 | |||
배우자 | 정경부인 대구 서씨 | ||
자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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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유교 (성리학) | ||
자 | 순칠(舜七) | ||
호 | 석호(石湖) | ||
작호 | 완순군(完順君) | ||
비고 | 한성은행 은행장 조선귀족 후작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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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 및 관료. 고종의 4촌이며,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 조선 장조(사도세자)의 현손이다. 일제강점기에 후작 작위를 받은 조선귀족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록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다만 일본에게 유리한 조약을 수치심으로 느낀다고 말하는 등 생애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한 기록은 없다.2. 생애
2.1. 조선왕조 시절
1856년(철종 7년) 1월 12일, 경기도 양주군 와공면에서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 현령 이신오(李愼五)[3]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이을경(李乙經).조선 왕실 직계와는 200년 ~ 300년 전에 선조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기 때문에 원래는 단순히 왕실의 후손이었을 뿐, 왕족은 아니었다. 본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그러나 1864년(고종 1년) 8월에 21촌 숙부뻘인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가 되면서 왕실과 가까운 인척이 되었고, 장차 경창군파의 차기 종손이 될 그의 출계로 인해 경창군 종가는 그의 하나뿐인 남동생인 이재곤이 물려받았다. 이 양자 입적으로 원래는 22촌 형뻘인 먼 친척 고종과 사실상 4촌이 되어 가까운 종친으로 대접받았다.[5] 이때 이름을 이재완으로 고쳤다.
음서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8살 때인 1873년(고종 10년) 7월에 동몽교관[6]을 시작으로 1875년(고종 12년) 4월에 문과 병과에 급제했고, 이후 가주서[7]로 임명받았다. 이후 예문관 검열 겸 춘추관기주관을 거쳐 겸설서와 겸춘추를 겸직하는 등 나름 잘나갔다. 그 밖에도 승정원 동부승지를 제수받고 곡산 부사와 춘천 부사를 역임했으며 승정원 도승지 및 의약청 부제조와 이조 참판,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그의 관직 생활 중 그나마 역사의 흐름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시기가 갑신정변 때였다. 개화당 내각의 병조판서를 맡은 것.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뒤 관련자들 대부분은 망명하거나 사살당했지만 그는 종친인 데다 개화당원이 아니라서 정변 후에도 예조판서를 지내는 등 관직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에도 형조와 이조, 예조의 판서 및 지경연사를 거쳐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고 예문관과 홍문관의 제학, 시강원 좌부빈객, 한성부 판윤, 판의금부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1887년(고종 24년)에는 잠시 왕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4촌 형 이재원[8]과 함께 경기도 부평[9]으로 유배갔다가 곧 풀려났다.
1894년 6월에는 의정부 좌참찬으로 제수받았고 1895년(고종 32년) 5월에 궁내부 특진관 칙임관으로 임명받았다. 1896년(건양 원년) 1월에는 종정원경 겸 귀족원경(宗正院卿兼貴族院卿)으로 임명받아 대한제국 수립 이후인 1898년(광무 원년) 1월까지 역임했다.
1896년(건양 원년) 10월에 명성황후의 빈전 제조, 1897년(광무 원년)에는 산릉도감 제조를 맡는 등 명성황후 장례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2. 대한제국 시절
1897년(건양 2년) 2월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은행인 한성은행을 설립할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8년(광무 2년) 홍문관 학사와 궁내부 특진관을 역임한 데 이어 1899년(광무 3년)에는 궁내부 대신으로 임명받고 종정원경 직을 겸임했다. 같은 해 9월에 족보상 고조할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자 황제의 4대손에 해당했기에[10] '완순군(完順君)'으로 봉군되어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랐다.[11] 1902년(광무 6년) 7월에는 평식원(平式院) 총재 직을 맡았다.1903년(광무 7년) 2월에 한성은행을 합자회사 공립 한성은행으로 개편시키면서 은행장으로 부임했다. 같은 해 3월에는 철도 부설 건만은 왜적의 아닌 우리 손으로 일구어야 한다며 대한철도회사 사장을 맡았으며, 다음 해에 궁내부 대신으로 복직했다.
1905년(광무 9년) 1월에는 보빙대사(報聘大使)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1907년(광무 11년) 4월에 육군부장이 되었고, 그 해[12] 8월에 승녕부 총관[13]으로 임명받았다. 그 무렵 대한제국을 방문한 일본의 요시히토 황태자를 순종황제, 의민태자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맞이했다.
<colbgcolor=#29176e> 뒷 줄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영선군 이준용. 앞 줄 왼쪽부터 [[아리스가와노미야|{{{#ffd800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순종(대한제국)|{{{#ffd800 순종황제 이척}}}]], [[다이쇼 덴노|{{{#ffd800 요시히토 황태자}}}]], [[영친왕|{{{#ffd800 의민태자 이은}}}]]. |
2.3. 생애 후반
2.4. 일제강점기의 행적
<colbgcolor=#29176e> 운현궁에서 친척들과 함께. 왼쪽부터 흥친왕 이재면, 영선군 이준용, 완순군 이재완, 의양군 이재각. 전부 [[친일인명사전|{{{#ffd800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린 인물들이다. |
3. 사후
1922년 8월 11일 오전에 사망했다. 향년 67세. 후작 작위는 그해 10월에 장남 이달용이 상속했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안골[14] 흥완군 묘소 근처에 있다.묘소에 묘비는 없고 상석과 석물만이 세워져 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한일합방조약〉에 대한 수치심으로 자신의 묘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4. 여담
- 《윤치호 일기》에 따르면, 1904년(광무 8년)에 경운궁(덕수궁)이 대화재로 사실상 모두 소실되자, 완순군이 고종에게 황궁을 창덕궁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 공사관들과 가까운 경운궁에 강한 애착(집착)을 보인 고종은 창덕궁 이어 방안을 듣고 완순군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격렬하게 보였다고 한다.(전략) 이하영 대신이 말하기를, 황제가 궁궐을 다시 짓는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목을 벨 것이라는 결단을 천명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재완(李載完, 완순군)이 황제에게 동궐(창덕궁)로 옮기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황제는 몹시 격노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황제는 기를 죽이는 분개한 얼굴로 그 불운한 왕자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죽거든 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 구제불능이다. 절망적이다.
<colbgcolor=#29176e> 1908년(융희 2년) 4월 28일자 〈대한매일신보〉 기사 |
- 1912년 9월에 4촌 형 흥친왕 이재면이 죽자 장례식을 회피하려던 당조카 영선군 이준용을 달래서 장례를 치렀다. 이준용은 오랜 세월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하고, 평생 죽음의 위기 속에서 살게 한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원망이 상당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의 장례식에서조차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완순군은 영선군에게 자식으로서 너무 불효하는 것 아니냐며 질책했다고.
- 그가 살았던 집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가회동 30번지 자리에 있었다. 일명 맹현댁으로 불렸으며 필지만 총 5,943.80㎡(1,798평)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2019년 7월 19일부터 10월 6일까지 〈북촌, 열한 집의 오래된 기억〉이란 특별전을 통해 완순군 가문의 의례 및 생활상을 전시했다. 증손녀 이남주와 증손자 이길주가 당시 생활문화를 증언하는 등 전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 의친왕이 그의 문상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옛날에는 삼년상이 끝날 때까지 문상을 오지 않는 사람과는 절교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끝까지 의친왕이 오지 않자 완순군 가족들은 의친왕과 연을 끊고 왕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설날에 의친왕비가 딸 이해경을 몰래 보내 세배를 시켰다고.[15]
5. 가족과 후손
<colbgcolor=#29176e> 완순군 가족사진. 왼쪽부터 이규용(완순군 차남), 이규용 부인 홍씨, 완순군 부인 서씨, 완순군의 딸, 완순군 이재완, 이해선(완순군 장손), 이달용(완순군 장남) 부인 김씨, 이달용, 맨 뒤는 희경할머니(주방 총괄 담당)[16] |
이규용은 1888년(고종 25년) 7월 21일[18] 생으로[19], 비서원승을 지낸 풍산 홍씨 홍순구의 딸과 혼인했다.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없다.
[1] 장조의 현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어진사람 인(儿)'이 들어간 글자를 공유한다. 정조의 증손인 헌종은 '환(烉)'으로 안에 포함되어있다. 그리고 고종은 '형(㷩)'으로 좌우로 밖에 나뉘어 있으며, 초명 '재황(載晃)'에는 '황(晃)'의 밑에 발의 형태로 들어가있다. 은언군의 증손인 덕안군은 '재덕(載悳)', 청안군은 '재순(載純)'으로 파자하지 않으면 잘 알아보기 어려운 형태이다. 은신군과 은전군의 증손으로 완림군은 '재원(載元)', 완순군은 '재완(載完)', 완영군은 '재긍(載兢)', 흥친왕은 '재면(載冕)', 완은군은 '재선(載先)', 인양군은 '재근(載覲)', 의양군은 '재각(載覺)', 예양정은 '재규(載規)'로, 고종의 초명과 마찬가지로 발의 형태로 온전히 들어가있다. 완평군의 둘째 아들 '재현(載現)'은 본가의 양자로 들어가 황실 종친 자격을 잃었지만 이름자에 '儿'은 그대로 있다. 유일하게 경은군 '재성(載星)'이 규칙을 적용받지 않았는데, 서자인 데다 작호를 받은 게 굉장히 늦은 시기여서 그런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중 (헌종을 제외하고) 장조의 실제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유일하게 이 규칙을 사용하지 않은 이재성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입양을 통해 족보상 후손이 된 경우였다.[2]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3] 1868년 이후 이신응(李愼應)으로 개명. 1870년 10월 사망.[4] 이유병의 양자. 이게의 동생 이재의 손자로 이유병과 실제로는 당숙 - 당조카 사이이다.[5] 왜 사실상이냐면 고종 역시 문조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종의 생가 친 형제들 및 사촌 형제들은 이재완과 법적으로 정확히 4촌.[6] 童蒙敎官. 조선 시대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해 각 군현에 두었던 종9품 관직.[7] 假注書. 조선시대 승정원에 두었던 정7품 임시 관직.[8] 양아버지 흥완군의 친자로, 흥완군의 형 흥녕군의 양자로 출계했다.[9] 지금의 인천광역시 계양구, 부평구, 서구 및 경기도 부천시 일대.[10] 황족의 범위는 황제의 4대손까지이다. 그의 가계에서 마지막으로 왕을 했던 사람은 영조였고, 그는 영조의 5대손이었기에 사도세자 추존 이전에는 종친으로 봉군될 수 없었다.[11] 봉호는 왕실의 본관 완산(전주)의 '완(完)'에 양어머니 박씨의 본관 순천의 '순(順)'에서 따왔다.[12]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하면서 7월에 연호가 융희로 바뀌었다.[13] 承寧府. 황제가 쓰는 물품 · 의복 · 거마(車馬) 등을 조달, 관리하며 이에 관련된 회계 사무를 맡기 위해 설치했던 궁내부 산하 관청.[14]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97-1 안골.[15]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58.[16] 반찬만 담당하던 고용인인데, 집안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대단했다고 한다. 당장 이 사진에서도 고용인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완순군 가족들과 함께 촬영한 것을 보면,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희경할머니의 음식 솜씨가 굉장히 뛰어났다고 하며 희경할머니의 아들은 완순군가에서 익힌 솜씨를 바탕으로 1960년대 ~ 1970년대에 워커힐 호텔의 한식부 주방장이 되었다고 한다.(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북촌 11가의 오래된 기억》, 2019. p.35.)[17]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에는 1854년(갑인년)생으로 나와있는데, 1923년 6월 6일자 《매일신보》에는 사망 당시 나이가 65세로 적혀있다. 당시에는 나이를 세는나이로 계산했으므로, 이를 환산하면 1859년 생이다.[18] 음력 6월 13일.[19] 출처: 1900년(광무 3년) 제작 《선원속보 - 인조대왕자손록, 숙종대왕자손록, 장조의황제자손록 권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