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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243><colcolor=#fff> 보르본 왕조 Casa de Borbón | |
창립일 | 1700년 11월 1일 |
창립자 | 펠리페 5세 |
現 수장 | 펠리페 6세 |
본가 | 부르봉 왕조 |
국가 | 스페인 왕국 |
[Clearfix]
1. 개요
Casa de Borbón. 18세기 이래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스페인 왕국의 왕조. 보르본은 부르봉 왕조의 '부르봉'의 스페인어 발음이다. 시조 펠리페 5세가 앙주 공작이었으므로 보르본앙주 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2024년 현재 펠리페 6세가 스페인 국왕으로 재위 중이다.
2. 역사
2.1. 18세기
17세기 말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가 단절될 위기에 처하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 그리고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이 스페인 왕위를 두고 경쟁했다.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는 원래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2세 에마누엘의 맏아들 요제프 페르디난트에게 왕위를 넘기려고 했다.[1] 그러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요절하고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프랑스가 스페인 국토를 분할할 비밀조약을 맺은 것이 들통나 격노하여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를 왕위계승자로 지목했다.[2] 루이 14세는 이어 필리프를 프랑스 왕실의 후계자로 지명, 궁극적으로 스페인을 합병하려고 했으나,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해서 체결된 위트레흐트 조약의 결과 보르본 왕가는 스페인과 프랑스 왕가로 분할되었다. 다만 왕위만 나눴을 뿐이지, 나폴레옹 전쟁 이전까지 프랑스와 스페인은 끈끈한 동맹으로 맺어져 있었다.1703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 안달루시아는 이제 영국군의 처분에 달린 듯이 보였고, 이 지방이 봉기한 것은 앤 여왕의 종교적 열광 때문이었다. 카탈루냐인의 지지를 받고 있던 카를 대공은 1705년 마드리드에 입성했으나 1707년 펠리페 5세가 아라곤 왕국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아라곤 왕국을 아예 없애고 포르투갈 왕국을 뺀 이베리아 반도 전역을 통일했는데 법적으로는 이때가 스페인 왕국의 첫 탄생이었다.(그 이전에는 카스티야-아라곤의 동군연합 혹은 연합왕국 형태)
18세기 중반에 들어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으로 나폴리 왕국-시칠리아 왕국[3]을 탈환했고, 파르마 공국도 획득했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1860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전 사보이아 공국)에 병합되었다.
스페인 보르본 왕가는 계승전쟁 직후 나라를 수습하고 여러 개혁을 단행해 한 세기간의 평화를 가져왔다. 계승전쟁 이후 즉위한 펠리페 5세의 통치 덕분에 막장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 18세기 초반부터 스페인은 중흥기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18세기 보르본 왕조 시대를 스페인 계몽주의 시대(Ilustración en España)라 하기도 한다. 보르본 왕조 국왕들은 프랑스의 예를 본받아 행정을 강화하며 각종 개혁[4]을 시행하였다. 또한 유럽과 신대륙의 무역을 장려하고 국내 발전에 힘써 100여 년 동안 스페인은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카를로스 3세 시기에 루이지애나도 획득하는 등 중흥하였다. 카를로스 3세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종교재판 규정을 완화했다. 또한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 등 북미 식민지 경영에 적극적이었으며 북미 여러곳에 스페인 탐험대가 파견되었다. 영토상으로 스페인 제국의 최대 영토를 달성하던 시기가 이즈음.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여[5]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편을 들어 참가했고, 7년 전쟁으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획득했다.[6]
미국 독립전쟁에서는 프랑스의 동맹 자격으로 미국편을 들어, 펜서콜라 공방전에서 영국군을 격파하고 1763년 영국이 가져간 플로리다를 1783년 다시 획득했다. 1819년 미국과의 애덤스-오니스 조약(Adams - Onís Treaty)으로 플로리다는 미국에 할양했지만, 로키산맥, 스페인령 누에바에스파냐를 기준으로 국경정리를 했다.[7]
그런데 주요 동맹국인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터지자 스페인 정국은 급속히 불안해져갔다.
1788년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 4세는 정치에 무관심했고 여자에도 관심이 없어 왕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왕비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는 자신에게 무신경한 남편 대신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으며, 그 중에서 마누엘 고도이는 왕비의 근위병 출신에서 총리대신으로까지 임명되었다.
사실상 정치는 고도이가 쥐락펴락했으며 왕은 사냥에나 열중하며 놀기에 바빴고 그에 따라 고도이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등장했고 이때에도 스페인은 동맹국이었으나 나폴레옹에게 스페인 왕국은 속국 정도의 대우밖에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스페인은 트라팔가르 해전 후 그러한 친프랑스 정책을 버렸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1807년에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면서 고도이는 다시 친프랑스 기조로 전환했지만, 프랑스는 더이상 스페인과의 동맹에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프랑스와의 동맹도 고도이의 지배를 약화시켰고, 영국과 밀접한 관계를 모색하는 페르난파(페르난도 왕태자의 지지자)는 활기차게 활동을 하였다.
1808년 스페인의 국민들은 총리인 마누엘 고도이와 왕비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그리고 무능한 왕의 전횡을 더는 참지 못하고 봉기를 일으켜 왕을 내쫓았고 왕태자 페르난도를 새로운 스페인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러자 스페인의 상황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나폴레옹은 화해를 주선한다는 목적으로 카를로스 부처와 고도이, 페르난도 7세를 비요나로 불러들이고 카를로스 부처와 고도이는 퐁텐블로 성, 페르난도 7세는 발렌시아 성에 가둔 뒤 자신의 형 조제프 보나파르트를 스페인의 왕 호세 1세로 옹립했다. 이로써 보르본 왕조는 잠시 단절되었다.
2.2. 19세기 중반
이베리아 반도 전쟁이라는 혹독한 전쟁 끝에 스페인은 프랑스 세력을 몰아냈다. 그러나 이때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본토가 완전히 황폐화된 것은 물론이고, 나폴레옹의 스페인 본국 유린을 본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크리오요들은 간섭 많은 본국에서 독립하고자 라틴아메리카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콜롬비아의 시몬 볼리바르와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아르헨티나 등지의 호세 데 산 마르틴 장군 등의 활약으로 인해 스페인이 설치한 부왕령[8] 체제는 붕괴되어 현 남아메리카 국가들로 독립하게 된다.나폴레옹에 쫓겨났던 페르난도 7세는 복위했다. 그는 4번째 결혼에서 드디어 자식을 갖게 되었다. 스페인은 보르본 왕조 이후로 살리카 법을 따르고 있었기에 딸이 태어나면 차기 국왕은 동생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가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든 자신의 자식에게 왕위를 잇게 하고 싶었던 그는 앞으로 태어날 아이가 딸일 것을 대비해 1830년 3월 18일, 살리카 법을 폐지했다. 페르난도 7세의 장녀 이사벨 공주가 태어난 뒤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는 포르투갈로 추방되었다. 왕은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봉건주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자유주의자들을 대거 포섭해 이사벨 공주의 지지세력을 만든 후 1833년 9월에 사망한다. 페르난도 7세가 죽자 포르투갈에서 돌아온 몰리나 백작 카를로스는 이사벨의 후계자 권리를 인정치 않고 스스로를 카를로스 5세라 칭했고, 그의 지지자들은 카를리스타(Carlista)라 불리며 이자벨파와 대립했다. 이에 자유주의자들은 이사벨 공주를 이사벨 2세로 옹립하였으며 결국 제1차 카를로스 전쟁이 벌어진다.
이 내전에서 이사벨파가 승리함에 따라 자유주의적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은 전 인구의 2/3이 농경에 종사하는 국가였고, 자유주의자들이 펼친 개혁책은 이상주의에 입각한 비현실적인 정책들이었다. 이렇듯 이사벨 2세를 옹립한 자유주의자들의 정치적 무능과[9] 여전히 잔존한 카를리스타의 준동 등으로 스페인 정국은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1868년 프란시스코 세라노 장군과 후안 프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군이 항복하자 같은 해 9월 30일 이사벨 2세가 프랑스로 망명하고 새로이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아 가문의 아오스타 공작 아메데오를 스페인 국왕 아마데오 1세로 추대해 보르본 왕조는 잠시 단절되었다.
2.3.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
아마데오 1세의 퇴위 후 성립한 제1공화국은 엄청난 혼란상을 보여주어 결국 쿠데타로 보르본 왕정이 복고된다. 자세한 사항은 스페인 왕정복고 참조.복고 후 왕위는 이사벨 2세의 장남 알폰소가 차지하여 알폰소 12세로 즉위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카를로스파의 돈 카를로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되었고, 알폰소 12세는 1876년 7월, 기존 헌법보다 자유주의적인 새 헌법을 통과시켰는데, 새 헌법은 의회와 국왕을 동등한 지위로 놓고, 국왕의 입법권 및 의회 소집권, 양원제,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스페인은 이때를 기점으로 확실한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이 즈음 스페인의 산업혁명도 진척되었는데, 1850년대 첫 장거리 전신통신이 도입되었고, 1848년 카탈루냐에 첫 철도노선이 개통되었다. 이후 1869년 마드리드 - 프랑스 국경 이룬을 연결하는 노선이 개통되었고, 1870년대 후반쯤에는 스페인의 대도시를 잇는 철도노선이 완비되었다.
대외적으로는 1848년, 군함을 파견해 차파리나스 제도(Chafarinas Islands)[10]를 점령하였고, 1860년 모로코와의 국경분쟁으로 시작된 전쟁에서 승리하여 모로코로 하여금 불평등 조약인 와드라스 조약(Treaty of Wad-rass)을 체결하도록 하여 기존 점령지를 승인받고 모로코 북부를 개방시켰다. 1884년 베를린 회담에서는 서사하라를 차지하여 스페인령 사하라를 성립시켰다. 이후 스페인은 모로코로부터 이권을 조금씩 뜯어내다가 마침내 1912년, 프랑스와 함께 모로코를 분할하였다.
모로코에서의 개입은 성공적이었지만, 아메리카 지역의 전황은 그닥 좋지 않았다. 스페인은 도미니카 공화국을 아이티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861년에 도미니카를 재점령해 보호령으로 삼았다. 그러나 산티아고 로드리게스가 주도한 도미니카 독립군은 아이티의 지원을 받아 끈질기게 저항했고, 1863년 결국 스페인은 별 소득없이 도미니카에서 철수했다. 쿠바에서도 1868년 스페인 본국의 노예제도, 사법제도, 관세제도에 불만을 품은 크리오요 주도 하에 10년 전쟁(1868~1878)이 발발하였다.
1885년, 알폰소 12세가 갑작스럽게 요절하자, 그의 유복자가 알폰소 13세로 즉위하였다. 알폰소 13세는 1902년 친정을 시작했지만 스페인 정국은 보수당, 자유당의 잦은 내각 교체로 시끌시끌했고, 1921년에 리프 전쟁(Rif War)[11] 초기 아누알 전투(Battle of Anuual)에서 진압군이 대패하여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스페인 국민들은 제국의 재건을 위한 식민지 확장에 별 의지가 없었고, 미국-스페인 전쟁의 패배로 스페인이 식민지를 처분하자 스페인의 경제는 오히려 빠르게 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파에 직접 힘을 실어준 것은 알폰소 13세 본인이었기 때문에, 모로코에서의 전황 악화는 그의 정치적 생명에도 치명타가 되었다. 결국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리베라는 막후에서 알폰소 13세의 지지를 얻어 30년까지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대공황으로 인기를 잃은 리베라는 1930년 1월 실각하였고, 알폰소 13세는 다시 입헌군주제로 복귀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했다. 그러나 1931년 총선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다시 왕정이 폐지되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4. 20세기 후반 이후
스페인 제2공화국을 스페인 내전을 통해 몰아낸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스페인국을 수립했는데, 1947년에 공식적으로 보르본 왕정 복고를 선포한다. 그러나 1969년 공식적으로 후안 카를로스가 계승자로 지명되기 전까지는 왕이 없는 왕정(...)이었고 그동안 프랑코는 섭정으로 독재를 행했다.그리고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하여 보르본 왕조가 다시 이어진다. 2공화국 이전부터 왕정이 무능한 모습을 많이 보여준 탓에 왕정 복고 이후에도 왕실에 대한 지지도는 높지 않았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체제를 거부하고 민주화를 추진하였고 그 결과 의원내각제와 입헌군주제가 도입되면서 국왕은 실권을 잃었지만 보르본 왕조는 다시 스페인에 자리를 잡았다.
3. 분가
분가로는 이탈리아계 분파인 보르보네파르마 가문과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 가문이 있다.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은 펠리페 5세의 7남 펠리페 왕자가 파르마 공국을 상속받아 파르마 공국의 필리포 1세로 즉위하며 창설되었다. 현재 수장은 카를로스 하비에르(1970년생)이며 어머니는 네덜란드 율리아나 여왕의 차녀 이레너 공주(1934년생)이다. 룩셈부르크 대공가의 부계가 이 가문에 해당하는데, 장 대공이 자녀들의 결혼 문제로 1987년 카를로스 하비에르의 부친 카를로스 우고(Carlos Hugo de Borbón-Parma 1930~2010)[12]와 크게 싸워서 현재는 어머니의 성씨인 나사우바일부르크(Nassau-Weilburg)를 사용하고 있다.[13]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 가문은 카를로스 3세의 3남 페르디난도 왕자가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를 물려받아 페르디난도 1세가 즉위하면서 창설되었고, 1816년 두 왕국이 정식으로 통합되어 양시칠리아 왕국이 출범하면서 그 왕가가 되었다.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어머니가 이 가문 출신이다. 1960년 이래 두 계통(카스트로 계통, 칼라브리아 계통)으로 분열된 상태이며, 현재 카스트로 계통의 수장은 카를로(1963 ~ )이고, 칼라브리아 계통의 수장은 페드로(1968 ~ )이다.
이들 분가는 보르본 왕조가 살리카법을 계승법으로 사용하던 시기에 분가하였기 때문에 본가인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계승법을 따르지 않는다. 보르보네파르마 가문의 경우 현재까지도 살리카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 가문의 경우는 현 수장인 카를로가 딸만 둘 있고 중시조인 라니에리 기준으로 다른 남계 후손도 없는 카스트로 계통은 절대적 맏이 상속법으로 바꾸었으나, 칼라브리아 계통은 살리카법을 유지하고 있다.[14]
여담으로 보르본 왕조 본가는 이탈리아계 분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 보르보네파르마 분가는 후술할 카를로스주의를 계승하여 스페인 왕실과 불편한 관계[15]이며, 양쪽으로 갈라진 보르보네두에시칠리에 가문의 경우 유럽 왕실들은 카스트로 계통을 정통으로 보는 반면, 스페인 왕실은 칼라브리아 계통을 정통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현재 명목상의 부르봉 왕조 본가의 수장이자 프랑스 왕위 요구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과도 썩 좋은 사이는 아닌데 1987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스페인 왕실이 공식적으로 임명하는 카디스 공작위를 루이스가 세습하지 못하게 하여 왕실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인상을 준데다가, 2003년 루이스가 베네수엘라 출신 마르가리타 바르가스와 결혼할 때 스페인 왕실에서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게다가 2022년 스페인 민주화 기억법으로 루이스의 외가쪽인 프랑코 공작 작위조차도 세습하지 못하게 하여서 스페인 왕실과는 더더욱 사이가 나빠졌다.
4. 카를로스주의
자세한 내용은 카를로스주의 문서 참고하십시오.5. 왕조명 변경?
스페인의 현 국왕 펠리페 6세는 즉위한 이래 슬하에 레오노르 왕세녀와 소피아 공주밖에 없고, 아들을 낳을 생각이 없다며 더이상의 자녀 계획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때문에 펠리페 6세의 뒤를 이어 그의 장녀 레오노르 왕세녀가 스페인의 여왕으로 즉위할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원칙적으로는 훗날 레오노르의 남편의 가문으로 스페인의 왕조명이 바뀌겠지만[16], 20세기 이후 유럽 왕조에서는 여계로 계승되는 경우에도 왕조명을 유지하는 원칙을 세운 경우가 많으므로 스페인의 보르본 왕가도 왕조명을 그대로 유지되거나 바뀌어 봤자 보르본-(남편의 성) 왕조 정도로 이름이 변경될 가능성이 높다.[17] 현재 대대로 여왕을 거쳐 계승된 네덜란드도 왕가 이름은 암스베르크 왕가가 아니라 오라녀나사우 왕가이며, 엘리자베스 2세 사후 영국 왕실도 그대로 윈저 왕가로 이어지고 있다.6. 역대 국왕
대수 | 왕호 | 재위시작 | 재위종료 | 재위기간 | 비고 |
6대 | 펠리페 5세 | 1700.11.01. | 1724.01.15. | 23년 80일 | [18] |
7대 | 루이스 1세 | 1724.01.15. | 1724.08.31. | 229일 | |
8대 | 펠리페 5세 | 1724.09.06. | 1746.07.09. | 21년 311일 | [19] |
9대 | 페르난도 6세 | 1746.07.09. | 1759.08.10. | 13년 24일 | |
10대 | 카를로스 3세 | 1759.08.10. | 1788.12.14. | 29년 134일 | |
11대 | 카를로스 4세 | 1788.12.14. | 1808.03.19. | 19년 99일 | |
12대 | 페르난도 7세 | 1808.03.19. | 1808.05.06. | 48일 | |
14대 | 페르난도 7세 | 1813.12.11. | 1833.09.29. | 19년 297일 | [20] |
15대 | 이사벨 2세 | 1833.09.29. | 1868.09.30. | 35년 1일 | [21] |
17대 | 알폰소 12세 | 1874.12.19. | 1885.11.25. | 10년 344일 | [22] |
18대 | 알폰소 13세 | 1886.05.17. | 1931.04.14. | 44년 342일 | [23] |
- |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 - | - | - | [24] |
19대 | 후안 카를로스 1세 | 1975.11.22. | 2014.06.19. | 38년 219일 | [25] |
20대 | 펠리페 6세 | 2014.06.19. | (현재) | (재위중) | [26] |
7. 가계도
직계만 작성- 이사벨 2세 (1830 ~ 1904) - 프란시스코 데 아시스 데 보르본 (1822 ~ 1902)
- 알폰소 12세 (1857 ~ 1885) - 마리아 크리스티나 (1858 ~ 1929)
- 알폰소 13세 (1886 ~ 1941) - 빅토리아 유제니 율리아 에나 (1887 ~ 1969)
- 하이메 (1908 ~ 1975) - 에마누엘라 데 담피에레 (1913 ~2012) - 샤를로테 티데만 (1919 ~ 1979)
- 알폰소 (1936 ~ 1989) -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1951 ~ )
- 프란시스코 (1972 ~ 1984)
-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1974 ~ ) - 마리아 마르가리타 바르가스 산타엘라 (1983 ~ )
- 에우헤니아 (2007 ~ )
- 루이스 (2010 ~ )
- 알폰소 (2010 ~ )
- 엔리케 (2019 ~ )
- 곤살로 (1937 ~ 2000)
- 사생아 딸 1명
-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1913 ~ 1993) -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 (1910 ~ 2000)
- 필라르 (1936 ~ 2020)
- 후안 카를로스 1세 (1938 ~ ) -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1938 ~ )
- (3)엘레나루고 여공작 (1963 ~ ) - 하이메 데 마리차라 (1963 ~ )
- (4)펠리페 (1998 ~ )
- (5)빅토리아 (2000 ~ )
- (6)크리스티나 (1965 ~ ) - 이냐키 우르단가린 (1968 ~ )
- (7)후안 (1999 ~ )
- (8)파블로 (2000 ~ )
- (9)미겔 (2002 ~ )
- (10)이레네 (2005 ~ )
- 펠리페 6세 (1968 ~ )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1972 ~ )
- 마르가리타 (1939 ~ )
- 알폰소 (1941 ~ 1956)
당주 계보(이사벨 2세 이후): 이사벨 2세 → 알폰소 12세 → 알폰소 13세 →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 후안 카를로스 1세 → 펠리페 6세
[1]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친누나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외손자이자 유일한 후손이었기 때문이다.[2] 필리프는 카를로스 2세의 이복 누나이자 루이 14세의 왕비인 마리 테레즈의 손자였다. 게다가 루이 14세의 어머니도 펠리페 3세의 딸 안 도트리슈였으니, 필리프는 2대에 걸쳐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3] 나폴레옹 전쟁 이후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재편된다.[4] 프랑스를 본받아 중앙집권을 행하려고 하였으나, 스페인은 지역색이 매우 강하고 전통적으로 각 지역별로 자치가 행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완전한 중앙집권은 실패하고, 왕조의 영향력이 카스티야를 넘어서 옛 아라곤 지방을 장악하는 데서 끝났다.[5] 펠리페 5세 말기엔 잠시 동맹이 와해된 바 있다. 1718년에 일어나 1720년에 끝난 사국 동맹 전쟁이 그 이유인데 스페인의 왕이었던 펠리페 5세와 그의 부인 엘리사베타 파르네세, 그리고 그의 총리인 줄리오 알베로니 추기경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잃은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 이탈리아의 영토를 탈환하고 프랑스 왕위를 주장하고자 일으킨 전쟁이었다. 스페인에 맞서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가 동맹을 맺었고, 사보이아 공국이 5번째 동맹국으로 참여했다. 이 동맹군이 스페인을 격파함으로써 전쟁이 끝났다. 1717년 전쟁이 시작되었지만 공식적인 선전포고는 1718년에 이루어졌고, 전쟁은 헤이그 조약의 체결로 1720년 끝났다.[6] 이 당시 루이지애나라 함은 현재의 루이지애나주가 아니라 미시시피강 유역을 따라 형성된 미주리, 아칸소,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사우스다코타, 노스다코타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다. 이후 루이지애나는 쿠바 도독령 산하 스페인령 루이지애나(la Luisiana)로 40년간 스페인 치하에 있다가 나폴레옹에 의해 1801년 다시 프랑스로 넘어갔다. 그러나 지리적 요인과 대륙에서의 전쟁격화로 실질적으로는 루이지애나에 파견된 스페인 관료들이 계속 이곳의 행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루이지애나 판매로 이 지역을 미국에 넘겼을 때 스페인, 프랑스, 미국 세 국가 대표는 세인트루이스에 모여 형식적으로 소유권을 차례대로 이양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스페인 국기를 내리고, 프랑스 국기를 게양한 후, 프랑스 국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했다. 이 날을 Three Flags Day라 부른다.#[7] 플로리다와 함께 북위 42도 이북의 오리건, 브리티시컬럼비아, 유콘 지역은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했다.[8] 스페인은 라틴 아메리카에 4개의 부왕령을 설치하였다. 리오데라플라타(아르헨티나, 칠레/1776년), 누에바에스파냐(멕시코와 현 미국의 남부 일부/1535년), 누에바 그라나다(콜롬비아 등지/1717년), 페루(1543년)의 4개이다.[9] 당시 스페인의 정치체제는 귀족 공화정에 가까웠고, 왕은 이름뿐인 존재였다는 점에서 여왕의 실책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사벨 2세는 부왕의 급사로 3세에 즉위하였기에 친정을 할 수가 없었다. 내전 중에는 모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조언자들이 섭정하였고, 카를로스파를 굴복시키고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물러난 이후에는 자유주의자들이 그녀를 대신해 통치하였다.[10] 모로코 동부 라스-케브다나 앞바다에 위치한 섬으로, 현재는 생태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지역이다.[11] 모로코에서 압둘 알 카림이 이끌었던 반 스페인 봉기. 알 카림은 스페인 교사 출신으로 유창한 스페인어 실력과 능수능란한 산악전을 선보여 훗날 체 게바라와 호찌민, 마오쩌둥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12]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손자. 카를로스 우고는 로베르토 1세의 5남 사베리오 공자의 아들이고, 장 대공은 로베르토 1세의 6남 부르봉파르마의 펠릭스 공자의 아들이다.[13] 1995년 화해하기는 했으나 그와 별개로 왕실 이름은 여전히 나사우바일부르크이다.[14] 이쪽은 중시조인 카를로의 남계후손이 현 수장 페드로의 가계뿐이기는 하지만, 페드로가 네 아들을 두고 있어 직계로만 따져도 4명의 계승권자가 있기 때문에 후사가 급하지 않다.[15] 카를로스 하비에르는 2016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카를로스주의의 정당한 계승자는 맞지만 펠리페 6세와의 왕조 분쟁을 야기하고 싶지는 않다며 사실상 스페인 왕위 주장을 포기하기는 했으나, 지지자들 문제로 인해 공식적으로 포기 선언을 하지는 않고 있다.[16] 사실 카를리스타도 1936년 이후로 남계 혈통이 단절되었다.[17] 물론 이사벨 2세의 경우와 같은 과거의 몇몇 사례처럼 분가의 남성 왕족과 결혼시켜서 왕조명을 그대로 유지시키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만, 정략결혼으로 비춰질 것이 뻔하며 현대에는 좋은 반응을 얻기 어려울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만약 이렇게 한다면 역시 레오노르의 7촌숙부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의 자녀들과 결혼할 확률이 높다.[18]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루이 왕태자의 아들. 에스파냐-보르본 왕조 개창자.[19] 장남 루이스 1세의 죽음으로 복위[20] 나폴레옹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로 인해 호세 1세를 몰아내고 복위함. (보르본 왕가의 1차 복위)[21] 살리카법 개정으로 인해 여자임에도 왕위에 오름[22] 이사벨 2세의 장남으로, 왕정 복위 쿠데타로 즉위(보르본 왕가의 2차 복위)[23] 알폰소 12세의 유복자, 마누엘 아사냐를 주축으로 한 공화정 운동으로 인해 퇴위하고 이탈리아 로마로 망명.[24] 프랑코 정권 시기의 스페인 왕위 요구자. 알폰소 13세의 아들이자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 사후 아들에 의해 왕위 요구자 시절 불리던 왕호인 후안 3세로 예우되었다.[25] 알폰소 13세의 손자. 프랑코 사후 국왕으로 즉위함(보르본 왕가의 3차 복위)[26] 부왕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퇴위로 즉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