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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FC/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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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단과 첼시의 첫 중흥기3. 재정난으로 위기에 빠진 첼시4.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등장5. 무리뉴 1기, 첫 번째이자 역대 최고의 전성기6. 무리뉴의 사임, 그리고 과도기
6.1. 2007-08 시즌
6.1.1. 로만 집권 후 잦은 감독 교체와 스타 영입 실패의 원인
6.2. 2008-09 시즌
7. 카를로 안첼로티의 부임. 두번째 전성기8. 안첼로티의 사임으로 또다시 맞이한 과도기. 그리고 기적9. 주제 무리뉴 2기와 이후의 침체기10. 안토니오 콘테의 부임, 첼시의 부활11. 마우리치오 사리의 부임, 에덴 아자르의 마지막 불꽃12. 이적시장 제재에도 굴하지 않은 램파드13. 토마스 투헬의 부임, 세 번째 전성기이자 로만 시대의 마지막14. 구단주의 교체, 그리고 시작된 암흑기15. 기타
15.1. 역대 감독15.2. 역대 주장15.3. 역대 올해의 선수15.4. 역대 선수단 선정 올해의 선수

1. 개요

첼시 FC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창단과 첼시의 첫 중흥기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소속 프로 축구 구단으로 1905년 3월, 라이징 선(해오름)이라는 술집에 모인 여러 주주들이 모여서 만든 게 시초이다. 당시 현재 첼시의 홈구장인 스탬포드 브릿지의 부지를 사들인 거스 미어스풀럼 FC에게 구장을 대여해주고 그 대가로 수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당시 풀럼의 회장이던 헨리 노리스와 그 측근이 이를 거절하였고, 이에 미어스의 친구였던 프레드릭 파커의 설득에 따라 창립멤버와의 회의를 통해 제일 유력했던 켄싱턴 FC라는 이름으로 창립하려 했으나 안 멋있다는 이유로 형인 조셉과 같이 구단주로서 창립한 팀이름을 첼시 FC로 지었다.[1]

2부 리그 소속으로 첫걸음을 내딛은 첼시는 선수겸 감독으로 존 로버트슨을 선임하고 주장이자 140kg의 거구로 화제성을 모았던 골키퍼 윌리엄 폴크와 인사이드 포워드 지미 윈드리지가 활약을 하며 브리스톨 시티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함께 승격 자리를 놓고 다투었으나 맨유에 밀려 3위로 2부 리그 첫 시즌을 마감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시즌 지미 윈드리지 외에 개틀링 건이라는 별명을 지닌 첼시의 첫번째 100골 돌파 선수인 조지 힐스돈[2], 닐스 미들보 등의 슈퍼스타를 앞세우며 1906-07 시즌 준우승을 거두며 1부 리그로 올랐고, 다음 시즌 13위라는 성적을 거두며 안정적으로 1부 리그에 정착했다. 이후 1907년부터 26년간 데이비드 칼더헤드 감독이 팀을 이끌었다.

설립자인 거스 미어스는 1912년 39살로 요절하고 마는데, 120킬로그램이 넘는 비만이었던 게 문제였다. 결국 형인 조셉이 구단주를 이어간다. 창단 10주년인 14-15 시즌 FA컵 준우승을 거두었고, 19-20 시즌에는 리그 3위라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꾸준히 중상위권을 넘나드는 팀으로 자리잡았으나 하지만 돈은 돈대로 쓰며 타이틀은 얻지 못해 놀림감의 대상이었다. 피파 온라인 3에서 첼시로 플레이를 하면 가끔 배성재가 얘기하는 부진한 첼시의 성적에 대한 옛 우스갯소리가 현지에서 나온 게 바로 이때 쯤이다.[3] 이후 2번의 세계 대전을 거치며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구단이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가 전후를 기점으로 반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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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55 첼시 FC 우승 멤버
2차 대전 발발 직전에 임명되어 전쟁 중 임시로 진행되었던 대회에서 좋은 역량을 보여주었던 빌리 비렐 감독은 토미 로튼, 렌 굴든, 토미 워커, 로이 벤틀리 등을 영입하였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유소년 시스템을 도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것이 밑에 설명할 테드 드레이크부터 데이브 섹스턴 시대까지 첼시의 첫 중흥기를 책임지는 선수들이 등장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요새의 첼시나 맨시티 등을 봐도 알 수 있다시피 FC 바르셀로나맨유, 레알 마드리드 CF의 유스 정책을 보고 유스 선수들이 따라잡았다고 해도 결과로 나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듯이 빌리 비렐의 재임 기간에는 이 시스템이 빛을 발하지 못했고, 순위는 엉망이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52년, 조 미어스[4] 회장은 전 레딩 감독 테드 드레이크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드레이크 감독은 축구적인 면 외에 구단의 전반적인 현대화 작업을 진행시켰다. 또한 첼시팬들의 옛 애칭인 펜셔너즈의 유래가 된 군인 얼굴의 로고 대신 현재의 것과 유사한 지팡이를 든 사자 엠블럼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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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의 로고 변천사
스타 플레이어 영입에만 의존하던 기존 방침에서 벗어나 빌리 비렐의 유스 시스템과 스카우트 시스템을 강화했다. 켄 암스트롱, 존 해리스[5] 등 전도유망한 유망주들을 수집하고, 유스시스템을 재정비해 팀의 기초를 탄탄히 다지기 시작했다. 이 같은 드레이크 감독의 노력에 힘입어 첼시는 54-55 시즌, 팀의 주장이자 주포 로이 벤틀리와 함께 드디어 처음으로 리그 우승을 거둔다. 하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 전신인 유러피언컵은 당시 대회 자체를 무시하던 축구협회의 압력으로 참가를 포기해야 했다. 또한, 우승 직후 스쿼드가 노쇠화된 것을 막지 못하고 결정적으로 지미 그리브스[6]가 61년 밀란으로 이적하며 팀은 강등권으로 추락했고 드레이크 감독은 경질되었다.엥 이거 2015-16 시즌이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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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 시티 FC와의 EFL컵 결승전 스쿼드와 60년대 첼시를 대표한 선수들
드레이크가 경질되며 1961년에 선수겸 코치였던 토미 도허티가 새 감독으로 취임한 뒤 팀의 강등은 막지 못했으나 62-63 시즌 곧바로 1부 리그로 승격시키며, 63-64 시즌 터지기 시작한 유스들인 론 해리스, 피터 오스굿, 바비 탬블링, 피터 보네티, 테리 베너블스, 찰리 쿠크,존 홀린스 등과 조지 그레엄, 에디 맥크레디, 마빈 히튼 등을 영입했고 이 선수들은 도허티의 다이아몬드로 불리며 첼시는 5위에 오른다. 64-65 시즌, 2개 대회 결승에 진출하며 프리미어 리그 우승, FA컵 우승, EFL컵 우승이라는 트레블을 달성할 기회를 얻었으나, EFL컵우승에 만족해야 했다.[7] 이후에도 데이브 섹스톤 감독 시절에 1969/70 시즌 다시 한번 FA 컵 우승을 거두었고, 70-71 시즌에는 UEFA컵과 더불어 UEFA 유로파 리그의 양대 전신 중 하나인 위너스 컵 결승에서 레알을 상대로 2-1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첼시 100주년 기념 팬 선정 베스트 11
(2005년 선정)
LW
바비 탬블링
ST
피터 오스굿
RW
잔프랑코 졸라
LCM
프랭크 램파드
CM
데니스 와이즈
RCM
찰리 쿠크
{{{#!wiki style="margin: -16px -11px;" LB
그레이엄 르 소
LCB
존 테리
RCB
마르셀 드사이
RB
스티브 클라크
}}}
GK
피터 보네티

3. 재정난으로 위기에 빠진 첼시

첼시의 첫 중흥기였던 60~70년대 초가 끝나고 섹스턴 감독과의 불화로 피터 오스굿도 팀을 떠나고, 성적 부진으로 1974년에 섹스톤 감독이 해임된 이후 팀은 쇠퇴해 오다가 70년대 후반에 첼시는 스탬포드 브릿지의 재건축으로 인해 구단의 재정이 심각하게 흔들렸고, 팀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매각하면서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이후 1978/79 시즌에는 2부리그로 강등됐고, 설립자인 조셉 미어스의 손자인 조셉 브라이언 미어스(1931~2009) 회장은 팬들의 사임 압박을 받다가 1981년에 물러났다.

1981년에 존 닐 감독이 부임한 뒤 이듬해에 켄 베이츠가 팀을 인수한 후 회장으로 취임했고, 83-84 시즌 2부리그 우승컵을 거머쥐며 다시 한 번 1부리그로 승격하고 84-85 시즌엔 케리 딕슨이 득점왕까지 차지하는 등 호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부리그로 승격한 첼시는 87-88 시즌 다시한번 강등되고 팀을 이끌던 존 홀린스 감독이 사퇴하고, 이듬해인 88-89 시즌 바비 캠벨 감독과 함께 또 2부리그 1위를 차지해 1부리그로 승격한다.

프리미어 리그 개편 이후에도 중상위권을 유지하였다. 92-93 시즌 이안 포터필드 감독이 이끌던 첼시는 우승권에 근접했으나 박싱데이 이후 추락하며 프리미어리그 개편 이후 첫 감독 경질이라는 기록도 보유했다. 그 뒤를 이은 글렌 호들 감독은 1994년 FA컵 결승에 진출시켰으며, 1996년 발롱도르 컨텐더인 루드 굴리트가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여 96-97 FA컵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지금까지도 첼시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취급받는 잔프랑코 졸라가 영입된 것도 이 시기이다. 97-98 시즌 도중에 굴리트 감독이 쫓겨나자 지안루카 비알리가 팀을 맡아 2번째 UEFA 컵위너스컵 우승 및 UEFA 슈퍼컵 우승까지 차지했다. 월드컵 우승국 프랑스의 주전 센터백 마르셀 드사이가 영입된 98-99 시즌에는 리그 3위를 기록하며[8] 역사상 처음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했다. 99-00 시즌에는 리그에서 맨유를 5:0으로 이기기도 했으며 그 해 FA컵을 우승하고 챔피언스 리그 8강까지 진출했다.[9] 이후 5, 6위를 꾸준히 유지하며 중상위권 팀으로 저력을 보였고 2002-03 시즌에는 4위를 차지하며 4강에도 진입했다.[10]

이 시절 구단주인 켄 베이츠는 1982년 첼시가 가진 빚을 갚고 1파운드라는 상징적인 값을 내며 구단을 샀다. 그의 투자로 중하위에 맴돌던 첼시는 중상위권에 들면서 안정적인 성적을 내긴 했으나 그도 결국은 많은 빚을 져야 했고 결국 2003년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구단이 진 빚을 청산함과 동시에 구단을 팔고 만다.[11]

EPL 출범 이후 간간히 챔스에 출전하기도 하는 등 중상위권 팀이었으나 로만 아브라모비치에게 인수 될 즈음에는 챔스에 단골 출전하게 되면서 빅 4의 일원으로 자리잡으면서 유럽의 강호로 평가받을 만큼 강호의 이미지를 굳힌 팀으로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돈 발라서 급격히 강해진 하위 팀'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저 그런 중위권 팀이었으나, 90년대 중반, 팀을 괴롭히던 고질적인 경기장 부동산 문제가 해결되고 대대적인 투자로 강팀으로 탈바꿈했다. 이 시기에 팀 감독까지 했던 잔루카 비알리, 로베르토 디 마테오, 첼시의 레전드로 기억되는 잔프랑코 졸라 등 이탈리아 출신의 선수들[12]월드컵 우승의 주역인 마르셀 드사이, 디디에 데샹, 프랑크 르뵈프, 에마뉘엘 프티 등의 프랑스 커넥션, 그리고 네덜란드 출신으로 프리미어 리그에서 두 번이나 득점왕을 차지한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13], 오베르마스와 더불어 윙을 보면서 폭발적인 돌파력을 보여준 바우데베인 젠던 등을 영입했다. 결국엔 부채를 껴안았으나 극적인 챔피언스 리그 진출과 결국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인수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4.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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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첼시를 인수한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첼시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는 세계 축구계에 있어서 신흥 부호들의 대대적인 스포츠 투자의 붐을 일으킨 일대기적인 사건으로 일컬어지곤 한다.[14]

로만은 축구계 원조 석유 부자 구단주로, 지금 첼시의 역사와 위상은 이 시기에 쌓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2003년 6월 로만은 팀의 빚을 청산시키며 인수를 단행했고,[15] 인수 첫해에 맨유 단장이던 피터 케년을 영전하며 지난 시즌의 상승세를 리그 우승으로 연결시키겠다며 두 달 동안 잔프랑코 졸라 등 기존 선수들과 재계약을 하지 않으며 정리하였고, 후안 베론을 비롯해 조 콜, 제레미 은지탑, 웨인 브리지, 글렌 존슨, 데이미언 더프, 에르난 크레스포 등을 도합 1억 1천만 파운드에 사들였다. 이에 순수주의자들이 리그는 돈 뿌린다고 되는 건 아니라며 비난했으나, 이를 비웃으며 시즌 준우승과 챔스 4강을 거뒀다.[16]

04-05 시즌 전에 켄 베이츠 회장 대신 변호사 브루스 벅을 회장으로 부임시킨 후,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감독을 자르고 전 시즌에 FC 포르투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주제 무리뉴를 감독으로 영입했고, 드사이 등을 팔아치우며 페트르 체흐 등 젊은 선수들까지 도합 1억 파운드 이상을 들여 사들였다. 당시 첼시의 이미지가 지금처럼 유럽의 강호가 아니었기에 막상 당대 최고의 스타를 영입하지는 못했고,[17] 대부분 스타 선수가 될 만한 잠재력을 가진 선수들을 영입했다.

무리뉴가 영입했던 선수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뉘는데, 한 쪽은 포르투에서 함께 뛰었던 선수들이었으며[18], 다른 한 쪽은 리그 1를 비롯한 다른 리그들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이던 선수들이었다.[19] 이 당시 대표적으로 비난받은 영입 대상이었던 디디에 드록바마이클 에시앙은 첼시를 떠난 이후에도 첼시 역사 상 최고의 선수들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체흐 역시 원래는 주전이었던 카를로 쿠디치니의 백업 요원으로 영입했었지만,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주전 자리를 꿰찼고, 04-05 시즌 EPL 최소 실점을 기록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다만 레딩 전에서의 악몽같은 부상으로 폼이 많이 떨어졌다가 다시 서서히 폼이 올라오더니 11-12 시즌 첼시의 챔스 우승은 체흐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할만큼 대단한 활약을 보여줬고, 아스날로 이적한 후에도 여전히 유럽에서 다섯 손가락 내에 드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다만 무리뉴의 영입이 항상 성공했던 것은 아니다. 아틀레틱 빌바오의 왼쪽 풀백이었던 아시에르 델 오르노의 경우 무리뉴가 완벽한 자신만의 포메이션을 구축하기 위해 야심차게 영입한 선수이지만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발렌시아 CF로 가버렸다. 존 오비 미켈살로몬 칼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미켈은 영입할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마찰을 감수하면서 질렀는데, 나름 성장을 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칼루는 냉정하게 말해 서브 이상의 카드로서 쓰지 못 할 정도였다.

그리고 영입 과정에서 지네딘 지단 이후 빠지고 있던 이적 시장의 거품을 다시 불러일으켰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후 미하엘 발락이나 안드리 셰브첸코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를 영입하기도 했으나 이건 구단주의 입김이 작용한 영입이었다.

이런 행태에 알렉스 퍼거슨 맨유 감독은 돈으로 성공을 살 수 없다면서 첼시의 돈지랄을 비난했고, 이에 당시 감독이었던 무리뉴는 "퍼거슨의 말이 맞다. 난 맨유의 10% 예산인 포르투를 이끌고 맨유를 꺾었다. 그것이 그 증거이다."라고 응수했다.

어찌됐든 간에 이런 영입을 통해 무리뉴 사단은 04-05 시즌 29승 8무 1패 승점 95점이라는 구단 역사상 최고 승점을 따내며 우승.[20] 이 해 EPL 역대 한 시즌 최소 실점 (15실점)을 기록한 것은 덤. 참고로 1패는 맨시티에게 0:1로 패배한 기록이다.[21] 막대한 자금을 써서 대개혁을 실행한 첼시에게 처음에 쏟아진 것은 돈 처바른 구단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이었으며, 첼시가 이후 프리미어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에서 보여준 팀 컬러[22]은 그 비난을 더더욱 가중시켰으나, 무리뉴는 그딴거 몰라라는 듯 승승장구했다.

특히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FC 바르셀로나와의 16강 2차전에서 무리뉴 사단의 팀 컬러가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주었는데, 전반에만 무려 3골을 빠른 역습과 세트 피스로 집어 넣었다. 각각 전반 8분, 17분, 18분에 득점하여 단숨에 분위기를 가져오는 듯했으나 당시 외계인으로 이름을 날리던 호나우지뉴가 팀의 부진 속에서도[23] 2골이나 넣으며 추격했다. 그러나 후반 테리의 헤더로 점수차를 더 벌린 첼시가 바르셀로나를 4:2로 박살내고 8강으로 올라갔다. 이후 8강에서 독일 거함 뮌헨을 잡은 무리뉴의 첼시는 첫 시즌에 4강까지 진출했으나 당시 베니테스가 이끌던 리버풀 FC에게 유령골 논란 끝에 탈락하였다. 이때부터 리버풀과 무려 5시즌 연속으로(...) 챔피언스리그에서 만나는 질긴 악연이 시작된다. 같은 리그 팀끼리는 8강부터 만날 수 있는 챔피언스리그 제도를 생각하면 특이한 일.[24] 그 외에 리버풀과의 EFL컵 결승전에서 제라드의 충격적인 자책골과 함께 분위기를 되돌리며 2-3으로 역전, 우승했다.

다음 시즌인 05-06 시즌에도 첼시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개막하자마자 9연승을 거뒀고, 비록 무패행진이 40경기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의해 중단되기는 했지만 또다시 10연승을 거두며 2006년 1월 2위와 승점 15점차로 사실상 리그 우승을 예약해두었다.[25] 이후 미들즈브러[26]와 풀럼[27]에 패배하는 등 조금 주춤하면서 9연승을 기록한 맨유의 추격을 받았지만 마지막 홈경기에서 맨유를 직접 3-0으로 때려잡고 리그 2연패를 확정지었다. 동시에 팀 내 잉여 선수들도 이 때 상당히 정리되었다. 아이두르 구드욘센, 에르난 크레스포, 데미안 더프, 아시에르 델 오르노, 윌리엄 갈라스 등이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나거나 다른 선수와 트레이드 되었다. 특히 갈라스는 현금과 함께 아스날 FC의 애슐리 콜과 트레이드되었는데, 이 상황에서 불법 접촉 논란이 있었으며, 그것이 일부 사실로 드러나는 등 잡음이 생겼었다. 갈라스는 이후 자서전에서 무리뉴 감독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또 바르셀로나와 16강에서 만나 홈에서 어이없는 1-2 패배, 원정 1-1 무승부로 떨어지고 만다. 칼링컵은 첫 경기에서 찰튼에 승부차기로 떨어졌고, FA컵은 준결승에서 루이스 가르시아의 환상적인 득점에 의하여 리버풀을 상대로 떨어졌다.

06-07 시즌부터는 로만의 영입 의사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우선 애슐리 콜을 불법 접촉 논란까지 나올 정도로 집요하게 노려 겨우 영입했지만 덕분에 튼튼했던 수비진이 혼란을 겪었으며, 수비진은 센터백이 세 명 밖에[28] 남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미하엘 발락안드리 셰브첸코를 영입하는 데에 이적료를 낭비하여 팀의 정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레딩전에서 체흐가 끔찍한 부상을 당해 사실상 시즌 아웃에 가까울 정도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또한 야심차게 영입한 발락과 셰브첸코는 부진을 보였으며, 특히 셰브첸코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발락과 달리 리그 적응에 실패하여 전력 외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29][30] 뿐만 아니라 그나마 없는 센터백들이 줄부상당하고, 할리드 불라루즈외계인 막기 빼고 미친 듯한 부진을 보이며 삽질을 해서 결국 맨유의 벽을 넘어서지 못하고 리그 3연패에 실패한다. 또한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대장정 끝에 다시 한번 4강으로 들어섰으나 다시 만난 리버풀 FC에게 패하고 만다.[31] 그러나 FA컵과 칼링컵 우승[32]을 거머쥐었으며 드록바는 포텐이 뻥뻥 터져 득점왕까지 석권했다. 이로써 무리뉴는 3시즌간 5개 대회 석권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것이다.
그러나 무리뉴는 로만이 원했던 공격적인 축구와는 정반대인 탄탄한 수비를 기반으로 한 전술을 사용했다. 04-05 시즌에 87골을 넣어 득점수 2위를 기록한 아스날의 실점수는 36실점으로, 당시 득점수가 72골이었던 첼시에 비해 15골이나 많은 득점수를 기록했지만 실점수 또한 첼시의 15실점에 비해 21점이나 더 많았던 걸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무리뉴의 축구가 10백 축구였던 것은 아니다. 당시 데미안 더프-디디에 드록바-아르연 로번의 3톱은 가히 살인적인 공격력을 선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만이 궁극적으로 원했던 챔피언스리그의 우승에는 번번이 실패하자 로만은 점차 무리뉴의 축구에 불만을 표시한다. 3년 동안 최고수준의 성적을 냈음에도 말이다.

5. 무리뉴 1기, 첫 번째이자 역대 최고의 전성기

첼시를 상징하는 2명, 로만과 무리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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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아브라모비치의 대대적인 자본력의 지원, 더불어 주제 무리뉴의 등장과 함께 맞이한 첼시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 주제 무리뉴 부임 첫 시즌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승점 95점[33], EPL 역대 최소실점 우승[34]을 기록하였다. 여기에 스탬퍼드 브리지에서의 EPL 86경기 무패 기록(2008년 10월 26일까지), 개막 후 최다 9연승 기록도 있다.

5.1. 2004-0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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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첫 리그 우승을 한 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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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역대 최고의 시즌

EPL 역대 최다승(29승), EPL 역대 최다 클린시트(25회), EPL 역대 최다 승점(95점), EPL 역대 최소 실점(15실점)[35]

주제 무리뉴 감독 부임후 첫 번째 시즌이자 첼시의 가장 강력했던 시즌이라 평가할 수 있다. 50년만에 리그 우승을 되찾아 온 것뿐만이 아닌 당시 우승 경쟁 체제였던 아스날과 맨유의 라이벌 구도를 완전히 찢어놓으면서 압도적으로 리그를 군림했다. 무리뉴 감독이 EPL에 도입시킨 4-3-3 포메이션, 선 수비 후 역습 전략이 확실하게 팀에 녹아들며 첼시 최고의 전성기를 알리기 시작한 시즌이다.

5.2. 2005-0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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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즌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한 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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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뉴 1기의 2번쨰 시즌으로 저번시즌만큼 압도적으로 역대 기록들을 갈아치운건 아니지만 한번 더 커뮤니티 실드 우승과 동시에 잉글랜드의 정상에 서며 당시 라이벌팀이었던 맨유를 꺾고 2연속 리그 우승을 한다.

5.3. 2006-0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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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준우승과 FA컵 우승을 한 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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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뉴 1기의 마지막 시즌으로, 약 3년간 짧지만 엄청난 임팩트를 남기며 PL을 제패했던 첼시의 전성기는 이 시즌을 끝으로 내려간다.

6. 무리뉴의 사임, 그리고 과도기

6.1. 2007-0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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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이적시장에서 시즌 중 거의 도움이 안 되었던 3인방 클라우디오 피사로탈 벤 하임, 스티브 시드웰을 자유계약으로 데려오고 빅 네임 영입은 유리몸이었던 아르연 로번을 대체하기 위해 플로랑 말루다를 데려오는데 그치면서 이상 기류가 감지되기 시작했다.[36] 무리뉴 감독이 오른쪽 측면 수비수 보강을 위해 세비야에서 한창 주가를 높이던 다니 아우베스를 원했는데도 나이 30이 넘고 바르셀로나에서 백업에 그친 줄리아누 벨레티를 데려온게 대표적. 07-08 시즌이 시작하자 첼시는 상위권 팀들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이고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에서도 로젠보리와 비기는 등 불안불안한 행보를 보인다. 이를 핑계로 로만은 무리뉴의 상호 계약 해지, 사실상 해고를 선언한다.

무리뉴가 떠난 후 첼시의 레전드 클로드 마켈렐레는 후에 프랑스에서 발간된 자신의 자서전에서 첼시에서 주제 무리뉴 감독을 쫓아낸 장본인은 존 테리라는 폭탄 발언을 했다. 테리의 불만으로 인해 무리뉴 감독은 첼시를 떠나야 했다 며 당시 사건의 내용을 폭로했다. 그는 "나는 당초 무리뉴 감독이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테리가 피터 케넌 첼시 이사에게 무리뉴 감독과의 불화를 이유로 이적을 요구하자, 아브라모비치 구단주가 직접 나서 무리뉴에게 첼시를 떠날 것을 명령했다"고 전했다.

첼시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제 무리뉴 감독이 로만 아브라모비치와의 불화 때문에 사임하고 당시 기술고문으로 있던[37] 이스라엘 국적의 아브람 그랜트 감독을 세웠다. 그랜트를 보좌할 수석코치로 스티브 클라크을 그대로 갔다가 11월에는 AFC 아약스의 감독이었던 헹크 텐카터를 추가로 수석코치로 영입했다. 하루아침에 첼시 역사상 최고의 영광을 안긴 무리뉴 감독이 떠나고 로만의 낙하산 인사나 다름없어 보였던 그랜트가 부임하자 팬들의 반응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초반에는 좋지 않았다. 데뷔전이었던 맨유 원정에서 무기력하게 2:0 패배를 당하고 첫 홈경기였던 풀럼과의 경기에서 0:0으로 무기력한 모습으로 비기자 스탬포드 브리지에서는 무리뉴 감독의 응원가가 계속 울려퍼지고 로만 구단주와 그가 직접 영입한 솁첸코, 그리고 그랜트 감독과 피터 캐넌 사장에게 야유가 쏟아졌었다.

사실상 그랜트 감독은 아르네센의 꼭두각시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야망을 위해 얼굴마담을 한 것. 실질적으로 선수들에게 전술 지시를 한 것은 클라크와 텐카터 수석코치. 게다가 그랜트는 UEFA에서 인정하는 프로 코칭 자격증이 없었다. # 이로 인해 UEFA에서 주관하는 챔피언스리그에 벤치에 앉을 수 없는거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UEFA에서 문제 없을 것이라고 하여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그랜트 감독은 라이센싱 문제로 시즌 도중 이스라엘에 다녀오기도 했다. #

다행히 무리뉴와의 이별의 충격을 극복하고 다시 원래의 첼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발렌시아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역전승을 시작으로 맨유전 패배 이후 16경기 무패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리그에서도 맨체스터 시티에 6-0 대승을 거두는 등 연승행진을 시작하며 8위까지 처졌던 상황에서 다시 상위권으로 올라갔다. 챔피언스리그에서 조1위를 되찾고 좋은 모습을 보이자 12월에 07-08 시즌까지였던 그랜트의 계약 기간은 4년 연장되었다.

겨울이적시장에서 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니콜라 아넬카, 프랑코 디 산토를 영입하였다.

그러나 강팀을 상대로 약한 모습은 계속해서 비판을 받았다. 그랜트 부임 후 첫 경기였던 맨유전 2-0 패배도 그렇고 16경기 무패를 깬 팀도 상대가 아스날이었다. 리버풀을 상대로도 홈에서 0-0 무승부에 그쳤다. 그 이외에도 이따금씩 다 이기던 경기를 막판에 어이없게 내주는 경우도 여러차례 발생했는데[38] 그 하나하나가 정말 임팩트가 컸다. 그리고 2년 연속으로 올라간 칼링컵 결승전에서 토트넘을 상대로 어이없는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쳤고 2주 뒤에는 맨유가 먼저 탈락해버린 FA컵 8강에서 2부리그 팀 반즐리에게 0-1로 패하며 탈락하자 그랜트에 대한 첼시 팬들의 여론은 더더욱 안좋아졌다.

충격의 2개 대회 탈락을 딛고 분위기를 추스려 리그에서는 무패행진을 이어나가며 아스날을 제치고 2위로 올라가 맨유와 아스날의 2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우승 경쟁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31라운드에서 아스날을 상대로 홈에서 디디에 드록바의 2골 원맨쇼[39]로 2:1 역전승을 거두며 강팀 상대로 약하다는 이미지를 떨쳐내는데 성공했고 이 경기 승리로 아스날을 제치고 2위에 올라갈 수 있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대진운을 잘 받아 올림피아코스 FC페네르바흐체 SK[40] 꺾고 2년 연속 준결승(5시즌 중 4번)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FA컵 광탈 후 계속해서 좋았던 분위기였으나 리그 34라운드 위건과의 홈경기에서 마이클 에시엔의 골로 1-0으로 이기던 경기를 후반 추가시간에 에밀 헤스키에게 동점골을 먹히며 1:1로 비기며 맨유에 5점차로 벌어져 큰 타격을 받았다.[41] 이후 35라운드 에버튼 원정에서 에시앙의 2경기 연속골로 승리하고 맨유가 블랙번 원정에서 비겨 3점 차가 되고 챔피언스리그 4강전 중간에 치러진 리그 36라운드 맨유와의 우승 단두대 매치에서 발락의 2골로 2-1로 승리하며[42] 맨유와의 승점차를 없앤 터라 위건과의 무승부가 아쉬울 수 밖에 없었다.

이 시즌 챔피언스 리그 4강전은 첼시팬들에게는 감동 그 자체였다. 상대는 4번 연속으로 챔스에서 맞대결하게 된 리버풀이었고, 04-05 시즌과 06-07 시즌 리버풀에게 4강에서 패배한 악연이 있었기 때문에 다소 트라우마가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우려대로 안필드 원정 경기로 치뤄진 1차전에서도 1-0으로 끌려갔으나 후반 추가시간에 나온 욘 아르네 리세의 자책골로 극적으로 1-1 무승부를 거두어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그리고 2차전에서 디디에 드록바페르난도 토레스가 정규시간에 골을 주고받으며 연장전으로 돌입했고, 연장 전반전에 프랭크 램파드가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페널티킥 결승골을 넣었다. 저 시기에 어머니를 여의었던 램파드가 골을 넣고 코너 플래그 쪽으로 달려간 뒤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자 따라 달려간 첼시 선수들이 격려해주는 모습,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랭크 램파드 시니어도 관중석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그야말로 명장면. 이후 드록바의 추가골로 첼시는 쐐기를 박았고, 경기 종료 직전 라이언 바벌에게 추격골을 먹었지만 더이상의 실점을 허용하지 않으며 3-2 승리로 창단 첫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했다.

리그와 챔스 모두 맨유와 우승 경쟁에 나서게 되었는데 37라운드까지 맨유와 첼시 모두 승점이 같아 결국 최종전에서 우승팀을 가리게 되었다. 첼시는 16위 볼튼[43]을 상대로 홈 경기에, 맨유는 잔류가 확정된 위건을 상대로 원정 경기에 나서게 되었다. 최종전에서 맨유는 위건을 손쉽게 2-0으로 제압했고, 첼시는 셰브첸코가 오랜만에 리그 5호골[44]을 터뜨려 1-0으로 이기고 있었으나 추가 시간에 동점골을 내주며 맨유와 승점 동률로 마감하는 데에 실패, 준우승을 차지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로고 화이트.svg
2007-08 UEFA Champions League Final
2008. 05. 21 / 루즈니키 스타디움 (러시아,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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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FC
파일:UEFA 챔피언스 리그 엠블럼.svg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 - 1
45' 프랭크 램파드 26'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매치 리포트, 하이라이트
승부차기 결과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6 5 첼시 FC
카를로스 테베스 O O 미하엘 발락
마이클 캐릭 O O 줄리아누 벨레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X O 프랭크 램파드
오언 하그리브스 O O 애슐리 콜
루이스 나니 O X 존 테리
안데르송 O O 살로몬 칼루
라이언 긱스 O X 니콜라 아넬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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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패배한 첼시.
당시 감독이 이스라엘 밖에서 무명이었단 점을 감안해보면 준우승은 절대로 나쁜 성적이 아니다. 되려 무리뉴도 못 해내던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도 첼시 역사상 처음으로 이룩했고 무리뉴 때부터 이어온 스탬포드 브리지에서의 무패 기록도 이어나갔다. 허나 이 때부터 선수들 간의 분위기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스티브 클라크 코치도 홀대를 받기 시작하는 등 로만의 네덜란드 커넥션이 점점 영향력을 대놓고 행사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능력이 있는데도 같은 유대인인 로만에 의한 낙하산이라고 불리던 그랜트도 결국 경질[45]당하고 남은 연봉을 받기 위해 고소까지 하였다.

6.1.1. 로만 집권 후 잦은 감독 교체와 스타 영입 실패의 원인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 때문이다. 2004년 이후의 첼시의 성공에는 로만의 과감한 투자가 크게 작용했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양날의 검으로 작용했다.

로만은 매우 다혈질이고 참을성이 부족한 성격인데다가, 축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구단 운영에 매우 깊게 관여하고 있다. 물론 첼시에 거금을 투자했으니 어느 정도 구단 운영에 관여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그 정도가 심하다.

실제로 로만은 경기중 리저브 타임에 선수 라커룸에 들어와 선수를 질책한다던가 칭찬을 하며 전술적 요구는 물론 지시까지 내린다고 한다.[46] 때문에 로만은 필연적으로 감독들과 잦은 마찰을 빚어왔다.[47]

이는 팀 구조에서도 드러난다. 잉글랜드 축구는 전통적으로 감독이 팀내 업무의 전권을 쥐고 있다. 때문에 감독은 선수 영입과 유소년 발탁, 계약, 훈련 등 거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구단주 밑에 보드진, 감독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첼시의 경우에는 감독 외에 스포팅 디렉터(Sporting Director)라는, 이른 바 단장 혹은 기술 이사라고 불리는 직책이 존재하며 스포팅 디렉터가 선수 스카우트 등 구단 운영의 전반적인 일을 맡는다. 때문에 감독은 선수단 관리와 전술 등 경기장 내부의 일만을 맡게 되고 스포팅 디렉터는 그 외의 구단 운영을 하며, 선수 영입은 감독과 스포팅 디렉터의 상의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스포팅 디렉터는 감독과 동등한, 또는 감독보다 조금 높은 지위를 맡는다.

스포팅 디렉터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퍼거슨이나 벵거 같은 장기 집권 감독이 아닌 이상 감독은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존재이다. 스포팅 디렉터가 없는 K리그에서는 감독이 교체되어 팀 컬러가 돌변하면 옛 선수들이 사라지고 새 감독의 전술에 맞는 새로운 선수들이 나타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감독 한 명 갈았을 뿐인데 갑자기 쓸데없는 비용이 엄청나게 발생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팬들 입장에서도 응원하는 팀에서 정 붙이던 선수들이 1~2년 사이에 거의 다 사라져 버리는, 납득하기 어려운 운영 형태로 보이게 된다. 또한, 이 경우 후임 감독이 자기 전술에 맞는 팀을 만든답시고 몇 년간 삽질을 하는 것을 용인할 수 밖에 없는데, 정작 그러고도 후임 감독이 부진한 반면 전임 감독이 쌓아놓은 유망주나 중용하던 선수들이 타 구단에서 활약하면 비용 낭비는 막대한데 팬들의 복장도 터지는 이중고를 안게 된다. 이런 쓸데 없는 낭비를 막기 위해 축구 전문가인 스포팅 디렉터가 팀 차원에서 팀의 운영 방향을 정하고, 유망주 육성 방향도 정하고, 감독 교체시 팀 컬러에 맞는 감독을 선임한다.

그리고 이 스포팅 디렉터는 보드진과 감독 간에 의견차가 생길 경우, 특히 선수단의 연봉이나 영입과 방출 등의 의견이 충돌할 시에 보드진과 감독 간을 조율하며 구단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도 수행한다. 문제는 첼시의 경우 감독과 스포팅 디렉터 사이에 권력 다툼이 심하며 선수 영입과 운영에 대하여 힘 싸움을 벌인다는 것이다. 또한 스포팅 디렉터는 사실상 보드진으로서 로만 구단주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안드리 셰브첸코미하엘 발락[48]은 무리뉴 감독이 영입을 반대했지만 당시 스포팅 디렉터인 아르넨센과 그랜트의 주장(이라고 쓰고 로만의 주장으로 읽는다.)으로 영입되었고 페르난도 토레스의 경우도 스포팅 디렉터와 보드진의 요구로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의중과는 상관 없이 영입되었다. 셰브첸코 영입 당시 무리뉴가 원했던 선수는 자신의 전술에 맞는 다비드 비야. 그러나 구단주는 전술마저 바꾸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감독 입장에서는 자신의 전술과 맞지 않을 뿐더러 원하지도 않는 선수를 당연히 선발진에서 빼고, 팀 전술에 녹아들지 못하는 영입된 스타 선수들의 성적은 저하된다. 그러면 보드진은 감독이 스타 선수를 계속 기용하도록 압박하고 감독은 어쩔 수 없이 스타 선수를 다시 기용한다. 그럼 다시 전술에 맞지 않는 스타 선수들의 성적은 더욱 떨어지고 다시 선발에서 빠지는 상황이 반복된다. 이런 현상이 반복되면서 감독과 보드진 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고 보드진 입장에서는 큰 돈을 들여 영입한 스타 선수를(비록 감독이 원치 않았더라도) 못 써먹는 감독을 무능하다고 판단하여 결국 감독을 경질하게 되는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전혀 없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현 기술이사인 마이클 에메날로가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을 로베르토 디 마테오 감독 후임으로 추천한 것 때문에 큰 압박을 받고 있어 조만간 기술이사가 바뀌어 구단 운영에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49][50]

그러나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본인이 지극히 원하던 펩 과르디올라FC 바이에른 뮌헨으로 가버린 후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감독인 주제 무리뉴를 선임함으로써 지금까지의 행보의 변화를 예고했다. 에메날로의 경질도 본인은 사임을 표했으나 무리뉴와 보드진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셰브첸코 이적에 대한 것은 무리뉴가 직접 인터뷰로 구단주의 의도만으로 된 것이 아닌 자신의 의사도 들어가 있었다고 고백했다.[51]

그러나 이런 잦은 감독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성적이 나오는 것은 칭찬받을 만하다. 새로 들어온 감독의 전술적 역량, 감독의 경질에 따른 선수단의 사기 상승 등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두 가지 이유로는 주제 무리뉴 감독이 닦아놓은 첼시의 기본적인 큰 틀과 첼시의 10년을 책임진 환상적인 척추 라인[52]이 손꼽히고 있다.

주제 무리뉴 감독이 닦아놓은 첼시의 4-3-3 포메이션은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의 부임 이전까지 첼시의 큰 틀이었고, 그 틀 안에서 첼시의 황금 세대, 척추 라인이라고 불리우는 페트르 체흐, 존 테리, 애슐리 콜, 프랭크 램파드, 디디에 드록바는 꾸준히 환상적인 활약을 펼칠 수 있었고, 그 덕에 첼시는 EPL과 유럽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첼시의 지난 10년을 만들어 냈었던 주제 무리뉴 감독을 귀환시킴과 동시에 전 시즌 첼시의 주축이었던 다비드 루이스, 후안 마타 등을 상당한 금액에 이적시키고 세스크 파브레가스, 디에고 코스타 등의 유능한 선수들을 상대적으로 매우 싼 가격에 데려오는 모습과 주급 체계를 엄격히 지키는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거상의 면모를 보여주면서 향후 첼시의 또다른 10년이 주목되고 있다는 15-16 시즌 개막 전까지의 전망..

14-15 시즌 우승에 너무 도취되었는지 전시즌 갓드진이라 칭송받던 보드진은 무리뉴가 요청한 영입 리스트를 무시했고, 도리어 여름 이적 시장에선 최대 라이벌인 아스날에 구단 역사상 최고의 골리였던 페트르 체흐되도않는 대인배 코스프레 하면서 떠나보내는 창의적인 병크를 작렬한다. 그리고 첼시는 커뮤니티 실드 아스날과의 매치에서 극악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조금씩 위기론이 나오게 되었고, 이윽고 시즌이 시작되자 커뮤니티 실드 전을 능가하는 엄청난 리얼 개막장 경기력을 보여준다. 부랴부랴 무리뉴의 전화 찬스로 페드로 로드리게스 하이재킹엔 성공했지만, 이미 NFS 떨어진 마르퀴뇨스, 폴 포그바에 매달리다가 막판에 듣도 보도 못한 파피 질로보지, 바바 라만이란 선수를 영입하면서 무리뉴에게 빅엿을 먹였고, 그 결과는 15-16 시즌 순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 팀은 팀 닥터 스캔들, 태업설 등등 망하는 집안의 적절한 예시를 보여주며 12월에는 16위까지 추락했고, 그 위대한 갓드진과 로짜르은 현지시간 12월 17일, 7개월 전 프리미어리그 우승 감독인 주제 무리뉴를 경질한다.

하지만 새로이 부임한 안토니오 콘테 감독이 리그 우승에 FA컵 결승까지 보낸 데다 무리뉴식 4-3-3 전술만큼의 완성도와 센세이션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임팩트를 주며 첼시는 또 다시 성공을 이룬다. 무리뉴 2기의 병크는 다른 문서들을 같이 읽어보면 알겠지만 UEFA FFP 룰의 도입과 로만의 주머니 사정 등이 맞물린 결과이다. 실제로 콘테의 두번째 시즌의 이적료와 방출 금액을 보면 전 시즌에 로테로 고생한 팀이 새로운 대회를 나감에도 불구하고 선수층은 오히려 얇아지는 기현상을 목격하게 된다.200m 가까이 썼는데도 -30m도 안된다 이 문제는 첼시의 수익 구조와 관계가 있으며 요코하마 타이어 스폰서와 나이키 유니폼으로 교체하는 방법 등을 통해 FFP 룰 안에서 건전한 방법으로 자립하며 해결 중이다.

이후 콘테가 첼시를 떠나고 마우리치오 사리를 거쳐간 뒤, 팀의 핵심적인 에이스 에덴 아자르가 레알에 팔려나갔음에도 FFP 룰에 대한 징계로 19-20 시즌 영입이 불가능해지는 위기에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첼시의 레전드 프랭크 램파드가 감독으로 선임되어 유스들과 함께 첼시를 챔피언스리그로 이끄는 데 성공하고, 이에 램파드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20-21 시즌 여름 이적시장에서 3000억에 가까운 지출을 하며 티모 베르너, 카이 하베르츠 등과 같은 영입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램파드가 간절히 원했던 데클란 라이스는 영입하지 않았고, 각각 700억, 1000억이란 금액으로 영입한 베르너와 하베르츠는 로만이 선호하는 선수였다. 결국 첼시는 3선 자원의 부재로 공격과 수비의 간격 유지에 어려움을 겪으며 무너지게 되고, 로만이 원한 베르너와 하베르츠는 거액의 몸값을 전혀 하지 못하며 현재까지도 첼시에서 완벽한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하고 있다.[53]
그리고 로만은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수뇌부와 갈등을 겪으며 경질된 토마스 투헬을 선임하게 된다. 선임 초기에는 불같은 성격의 투헬이 감독에 대한 간섭이 심한 로만과 잘 맞을지 걱정하는 여론이 많았으나, 투헬이 3-4-2-1 시스템의 도입으로 3선 문제로 수비에 어려움을 겪던 첼시의 수비를 단숨에 안정화시키며 중도 부임 감독으로 무려 9년만의 챔스 우승을 이뤄내는 업적을 보이게 된다.

이후 맞은 21-22 시즌에 지난 시즌 첼시의 거의 유일한 단점이었던 스트라이커 포지션 보강을 위해 세리에 A를 폭격한 로멜루 루카쿠에 1500억에 달하는 거금을 투자하며 완벽한 보강을 성공, 첼버지라는 호칭을 수여받으며 첼시 팬들에게 설렘을 안겨주고 있다. 걱정했던 투헬과의 갈등 문제도 커리어에서 연속된 갈등으로 인한 경질 때문인지 훨씬 온순해진 투헬의 성격 덕분에 현재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팬들은 투헬의 장기 집권까지 바라는 의견도 나올만큼 현재 기준으로 미래는 밝아 보인다.

하지만 전반기가 끝난 현재 로만의 픽인 루카쿠는 초반의 센세이션함 이후 팀 플레이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있고, 설상가상으로 인테르 시절이 그립다는 뉘앙스의 인터뷰로 팀에 큰 분란을 몰고 온 데다 첼시가 수많은 부상자로 인해 우승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는 점이 약간의 불안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6.2. 2008-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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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과 선수진과의 불화로 좋지 않은 시작을 했으나 거스 히딩크의 투입으로 가까스로 FA컵을 들며 다음 시즌을 기대케했다.

7. 카를로 안첼로티의 부임. 두번째 전성기

7.1. 2009-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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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딩크가 사임한 후, AC 밀란 전 감독인 안첼로티 감독을 후임으로 내정하고 영입 시장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마 예상하기를 안첼로티 감독은 챔피언스 리그에 강한 감독이기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위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리그를 먹었네? 09-10 시즌은 좋은 활약을 펼친 선수들 덕분에 첼시 팬들로 하여금 다음 시즌에 대한 밝은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7.2. 201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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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을 빼면 디펜딩 챔피언의 면모는 온데간데 없었다. 적절한 선수보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주축 선수들의 노쇠화 문제가 불거졌고, 선두를 질주하다가 리그에서 2개월 동안 달랑 1승만 하는 충격적인 부진으로 챔스권 바깥까지 밀려나는 충격을 겪기도 했다. 겨울이적시장 마감일에 클럽 레코드로 영입한 페르난도 토레스는 오자마자 먹튀 행보를 보였다. 다행히 리그 순위는 어찌어찌 반등하며 2위로 마치기는 했으나 결국 어떠한 대회도 트로피를 올리는데 실패하며 무관에 그쳤다. 결국 지난 시즌 더블을 이끌었던 카를로 안첼로티는 시즌 최종전을 마치자마자 쓸쓸하게 경질되었다.

8. 안첼로티의 사임으로 또다시 맞이한 과도기. 그리고 기적

8.1. 2011-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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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 체제가 들어선 이후 사상 최악의 리그 성적인 6위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는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획득할 수 있는 4위권 진입에 실패했다는 의미...하지만 FA컵에서 극적인 우승을 따냈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몇번의 고비를 넘기고 결승에서 FC 바이에른 뮌헨마저 꺾어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망했다고 생각했던 11-12 시즌이었으나 빅 이어와 FA컵을 따내면서 더블이란 기적같은 성적을 거두며 첼시 역사상 최고의 시즌으로 남게 되었다. 더불어서,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함으로써 내년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까지 확보했다!

이로서 첼시는 런던 축구 클럽들 중에서 최초로 UEFA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한 팀이 되었다.[54] 그리고 로베르토 디 마테오는 1999-00 시즌의 비센테 델보스케 전 레알 감독에 이어 감독대행 신분으로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한 두 번째 감독이 되었다.[55] 그야말로 기적 같은 시즌이었다.

8.1.1. 2011-12 시즌의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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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창단 이후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한 첼시.

첼램덩크공교롭게도 한국 프로농구의 안양 KGC인삼공사가 첼시와 같이 기적적인 창단 첫 챔프 우승을 따내면서 2012년은 첼시와 KGC 모두 종목을 초월한 기적의 해가 되었다.

챔피언의 숙명은 원래 아픔이 따른다 11-12 시즌의 첼시의 행보는 드라마로 써도 비현실적이라고 욕을 먹을만한 한 편의 드라마였는데, 특히 챔피언스 리그에서의 활약은 그야말로 독보적이었다.

챔피언스 리그 16강 원정 SSC 나폴리 전에서 3:1로 참패를 당한 후, FA컵 버밍엄 시티 FC 전도 1:1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실망스러운 행보를 이어가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감독은 결국 웨스트 브로미치 알비온 FC 전 1:0 패배를 계기로 경질당하고,그 자리를 소년 명수 로베르토 디 마테오 수석 코치가 맡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타 축구 팬들은 물론이요 첼시 팬들마저 첼시의 이번 시즌이 망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게 되었다.

허나 FA 컵 재경기에서 버밍엄을 깔끔하게 2:0으로 이기고, 스토크 시티전 역시 1:0으로 이기며 슬슬 경기력을 끌어올린 첼시는 나폴리와의 2차전 홈 경기에서 4:1로 극장 같은 역전승을 따내며 8강 진출에 성공한다. 전반 17분 하미레스의 크로스를 받은 드록바의 헤딩골, 후반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온 코너킥에서 존 테리의 헤딩골로 두 골을 먼저 넣어 쉽게 올라갈 수 있었으나, 인러의 만회 골로 다시 득실에서 뒤쳐졌고 결국 램파드의 페널티 킥 득점으로 동률이 되어 연장전에 돌입한 뒤, 드록바의 크로스를 받은 이바노비치의 골로 극적인 승리를 따낸 것이다.

그뒤 비록 리그는 미미했으나 FA 컵에서 레스터 시티를 5:2로 화끈하게 격파해 토트넘 홋스퍼 FC와의 경기를 남겨두었고, 진출한 8강 SL 벤피카 전은 원정 팀의 무덤이라 불리는 벤피카 홈에서 1:0 승리, 그리고 극장 골로 패배를 면한 2차전 2:1 승리로 4강으로 진출했다.

그러나 4강전 상대는 무려 당시 축구의 신 그 자체의 모습을 보여줬던 리오넬 메시를 필두로 한 FC 바르셀로나. 첼시 팬들 역시도 바르사를 잡을거라는 기대를 크게 가지지 않았다. 허나 토트넘과의 FA 컵 4강전에서 5:1 대승을 거두며 희망의 불씨를 태운 첼시는 바르사를 홈으로 불러들여 드록바의 결승골로 1:0으로 격침시켰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 첼시의 유효슈팅 개수는 단 하나(!!) 였다. 초반부터 반코트게임으로 얻어맞다가 램파드가 기가막히게 찔러준 횡패스를 하미레스가 받아 또 기가막히게 크로스를 올렸고, 드록바는 그 찬스를 놓치지 않고 하미레스의 패스를 받아 한방에 골을 넣었다. 그야말로 원샷원킬. 원정에서는 존 테리가 산체스를 뒤에서 엉덩이에 니킥을 날려 가격하는 반칙을 저질러 퇴장당하고 케이힐이 부상으로 교체되어 센터 백이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2점이나 실점, 후반에는 PK까지 허용하는 그야말로 불운의 끝을 달렸으나, 메시의 PK 삽질에 힘입은 영혼을 담은 수비와 한 방 역습을 잘 살려 하미레스의 만회골과 900억짜리 토레스의 종료 직전 동점 골로 2:2 극적인 무승부[56]를 이끌어내며 첼시 역사상 두 번째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 진출한다.

FA 컵에서는 최근 두 시즌동안 5번 만나 모두 패한 리버풀을 상대. 허나 첼시는 하미레스의 선제골과 결승전의 사나이 드록바의 결승골로 캐롤의 만회골을 허용하고도 끝까지 버티며 2:1로 승리해 무관을 벗어났다.

그리고 대망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첼시는 바르사와의 4강전의 주역이었던 하미레스, 메이렐레스, 존 테리, 이바노비치 등 주축이 모두 빠진 라인 업에, 이제 막 부상에서 복귀한 케이힐-루이스 조합을 센터 백으로 써야 했다. 게다가 결승전 장소는 뮌헨의 홈 구장인 푸스발 아레나 뮌헨인,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비록 뮌헨 역시 3명이나 경고 누적으로 출장하지 못한다지만 공격진은 건재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첼시는 홈 어드벤티지를 업고 밀어붙이는 뮌헨을 전반부터 후반 막판까지 혼신의 힘을 다한 수비로 막아 냈으며, 제공권을 절대로 넘겨주지 않으며 세트 피스 상황에서도 모두 걷어 내는 투혼을 발휘했다. 사실 어느 쪽으로 승부의 축이 기운 것은 아니었다. 뮐러와 고메스는 시종일관 루이스에게 막히는 모습이었고, 애슐리 콜은 로벤을 완벽하게 봉쇄했다. 심지어 똥쟁이보싱와마저 리베리와 디에고 콘텐토를 예상외로 잘 막아내며 결정적이거나 위협적인 장면은 얼마 되지 않았다.
사실 리베리와 로벤, 뮐러가 큰 찬스때마다 삽푼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큰 경기에 강했던 토마스 뮐러의 기습 헤더로 후반 37분경 골을 먹으며 끌려다니기 시작했다.순식간에 패색이 짙어졌고, 첼시 팬들이 여기까지 온것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고 포기하려던 찰나, 종료 직전 마타의 코너 킥에 이은 결승전의 사나이 드록바의 미친 헤더로 1:1 극적인 동점을 이룬다.

허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연장전에 들어서자마자 리베리의 돌파를 막으려던 드록바의 실수로 PK를 허용한 것. 다시 패색이 짙어졌고 첼시 팬들이 모두 돌아서려던 순간, 키커 로벤의 슛 경로를 읽은 체흐의 완벽한 선방이 나왔다.[57] 또한 드록바의 태클로 인해 리베리는 교체당했고, 안 그래도 보싱와라 시도때도 없이 뚫리던 오른쪽 측면이 안정화되었다.

그 뒤 오히려 뮌헨은 정신적으로 충격이었는지 급한 모습을 보여주었고,[58] 첼시는 차분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바이에른의 공격을 막으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하고 승부차기에 돌입.

독일 팀이 전통적으로 승부차기에 강했기에 이 역시 뮌헨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들이 많았고,[59] 실제로 첼시의 1번 키커인 마타가 실축해 버렸을 때까지만 해도 모두들 바이에른의 승리를 다시 점치고 있었다. 허나 뮌헨의 4번 키커 올리치가 체흐에게 막히고, 새가슴인 5번 키커 슈바인슈타이거의 킥이 골 포스트를 맞고 흘러 나오면서[60] 순식간에 분위기는 다시 첼시 쪽으로 넘어갔다. 이 날 체흐는 경기 중에 모든 PK의 방향을 예측하는 미친 활약을 보여주었다.

결국 오늘 좋은 활약을 펼친 드록바가 마지막 키커로 나서 노이어를 상대로 매우 침착하게 페널티 킥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첼시는 구단 역사상 최초로 빅 이어를 들게 되었다. 그리고 케이힐은 오자마자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전 소속팀은 블루 드래곤과 함께 강등을... 토트넘은 4위를 해놓고 유로파행을...
파일:external/www.whatsondalian.com/1788Cheslea_wins_Champions_League.jpg
그리고 보싱와는 센터싱와라는 별명을 획득했다 센터싱와의 진실

8.2. 2012-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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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으로서의 자존심은 로만 구단주 부임 이후 첫 챔피언스 리그 16강 진출 실패로 빛이 바랬다. 그것도 챔피언스 리그 개편 이후 유일한 전 대회 우승팀의 16강 진출 실패라는 기록까지 남겼다. 그것뿐만 아니라 FA 커뮤니티 실드, FIFA 클럽 월드컵, EFL컵, FA컵,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모두 우승에 실패하며 기운만 빼고 무너지는게 아닌가 싶었으나 어찌 어찌 UEFA 유로파 리그를 우승하며 체면치레는 했다.

'뮌헨의 기적'의 주인공 로베르토 디 마테오는 감독 대행에서 정식 감독 계약을 맺었으나[61] 유벤투스 FC 전 0-3 완패 이후 새벽 4시에 초고속으로 경질되었다. 세간은 물론 첼시 팬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들끓었음은 당연하다. 다만 로만은 이전부터 감독 물갈이가 잦다는 지적을 받아 왔기 때문에 디 마테오에 대한 동정 여론이 좀 더 힘을 얻었다.

미국 투어까지 포함하면 12-13 시즌 동안 무려 71경기를 치르게 되는 것인데,노예가 따로 없구만 대회란 대회는 다 참가하는 식으로 선수들을 혹사시킨 감이 없지 않다. 이런 체력적인 부담이 각종 대회에서의 우승 실패에 한 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을 듯. 근데 이것도 핑계라면 핑계

9. 주제 무리뉴 2기와 이후의 침체기

9.1. 2013-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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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단어로 시즌을 요약하면 첼타몽, 뮌헨을 만나든 선덜랜드 AFC를 만나든 비등한 경기를 펼치는...[62]
리그, 컵, 챔피언스리그 모두 무관으로 끝났다. 이로써 로만 체제 2번째 무관이자 무리뉴의 감독 경력 2번째 무관이 되었다.
팬들의 평가는 엇갈리는 편인데, 애초에 무리뉴가 없는 동안 전력이 약화되어 지난 시즌에는 우승경쟁에서 진작에 밀려났고 챔스는 조별리그 광탈을 했던 팀을 가지고 시즌 막판에 결국 밀려났다지만 라는 희대의 처참한 퀄리티의 스트라이커진을 가지고 우승경쟁을 했고,[63] 챔스도 4강을 기록했기에 나쁘지 않다는 평가. 우승 경쟁을 하던 맨체스터 시티 FC리버풀 FC에게 전승을 거두고그놈의 의적질만 아니었어도 리그와 리그컵 성적은 더 좋았을 테니... 챔스 8강에서 기적적으로 판도를 뒤집는 등의 임팩트 있는 모습이 몇 번 있었기에 이대로 끝난 게 아쉽다는 평가로 나뉜다.물론 첼시까들과 무까들은 무관을 신나게 조롱 중 그래도 다음 시즌을 기대한다는 점은 모두 같은 듯.

9.2. 2014-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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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리그에선 파리 생제르맹 FC과의 16강전, 전 시즌 리벤지 매치에서 일격을 맞고 탈락했지만 리그컵에서 토트넘을 꺾어 우승을 거두고 그리고 중반에 약간 위기가 있었으나 시즌 초반부터 줄곧 1위를 내달리며 리그 우승을 차지해 더블을 달성하였다.[64]

그러나 부족한 선수층 뎁스와 후반기 들어서 주축 오스카, 세스크 파브레가스의 체력저하에 따른 부진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다음 시즌 보다 더 치열한 순위 싸움을 예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9.3. 2015-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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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이후 첼시 역대 최악의 시즌 중 하나이다.

첼시의 상징과도 같은 무리뉴를 떠나 보내야만 했고 바로 전시즌 우승했던 디펜딩 챔피언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버렸다.

9.3.1. 첼시의 상징 무리뉴의 해임

무리뉴는 첼시 연례 행사에 참석해 선수들과 함께 식사하던 중 해임 통보를 받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넜다. 무리뉴 감독이 경질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첼시 팬들은 SNS에서 선수들을 미친듯이 비난하고 있으며 첼시 서포터즈 연합 회장인 팀 롤스는 텔레그라프와의 인터뷰에서 “분위기가 별로 좋지는 않다. 그래도 무리뉴의 이름을 외칠 것이다” 라며 구단의 결정이 틀렸음을 보일 것이라고 한다.

추후 보도된 기사에 따르면 무리뉴는 자신의 선수 장악력이 바닥을 쳐 선수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성적이 최악에 치닫자 지푸라기라도 잡아 팀을 끌어올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를 찾아가 선수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눠달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구단주가 직접 나서 선수들과 대화를 나누고 동기부여를 심어준다면 현재의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감독의 힘이 더이상 선수단에게 닿지 않자 고개를 숙이고 최후의 방법으로 로만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그러나 로만은 무리뉴를 해임시킨 이후 첼시의 코밤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선수들에게 현재 상황을 바꾸는 것은 당신들의 책임이라고 말했다. 무리뉴는 보드진 미팅 이후 단 한 번도 로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계약 해지 소식을 통보받은 뒤에도 마찬가지다. 짐을 정리하기 위해 코밤 훈련장을 찾았으나 수뇌부 그 누구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첼시 수뇌부의 No.2라 할 수 있는 마이클 에메날로 기술이사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에메날로는 이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서 무리뉴를 평가절하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무리뉴는 씁쓸하게 자신의 차를 타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에 이른다. 이후 무리뉴는 19일 에이전트를 통한 성명서에서 "난 잘렸다, 합의 아닌 해고였다. 710억 보상금도 필요없다."라고 상호 합의가 아닌 일방적 해고라고 못 박으며 “나는 하나도 지치지 않았다. 안식 기간도 필요 없고 곧 다른 팀을 맡을 것이기 때문에 첼시는 위약금을 줄 필요도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무리뉴가 팀 리빌딩에 보태라고 말하고 위약금을 거절했다는 루머가 있는데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는 계약 조항상 재취업 전까지 남은 계약기간 동안의 연봉(위에 언급한 710억 보상금이 이것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을 지급 받는 것과 1년치 연봉 지급 중 하나를 선택할수 있었는데 무리뉴는 경질이후 감독직을 계속 쉴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1년치 연봉 12m 약 210억 규모의 보상금을 받고 나가는 후자를 선택한 것이다. 결국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리뉴는 위약금을 모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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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뉴가 해임된 직후 선덜랜드 전에서는 관중들이 선수들이 득점을 하든 실점을 하든 상관없이 연신 무리뉴의 이름을 연호했으며 특히 언론에서 태업의 주동자라고 지목받는 세스크 파브레가스와 디에고 코스타, 존 테리를 비난했다.[65]

무리뉴는 경질 당한 이후 브라질과 포르투갈에서 휴식을 취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인 루이 판할의 해임을 기다리고 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으며 맨유 수뇌부가 무리뉴와 접촉했다는 ESPN의 보도가 흘러나오기까지 해 무리뉴 맨유행의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 매체는 무리뉴 감독의 측근을 인용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무리뉴 감독과 접촉 중이라고 설명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도 무리뉴를 원하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무리뉴는 맨유로 갈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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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뉴가 떠난후 훈련장에 들어오는 첼시 선수들.

그리고 무리뉴는 2016년 5월 27일 스승인 루이 반 할의 후임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으로 부임하였다.

9.3.2. 거스 히딩크와의 재회

무리뉴가 해임된 이후 첼시는 임시 방편으로 로만과 친분도 있고, 과거에도 공석이었던 첼시의 감독직을 맡아 FA컵 우승을 이뤄낸 거스 히딩크를 빠르게 선임했다. 계약 기간은 15-16 시즌이 끝날 때까지이다. 히딩크는 자신이 첼시 감독직을 맡는 조건으로 잉글랜드 출신 스트라이커의 영입과 드록바의 코치직을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일 선덜랜드 전을 디디에 드록바와 함께 직관했다.

히딩크 감독은 무리뉴의 후임으로 공식 임명된 후, 발 빠르게 구단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무리뉴와 런던 버커리 호텔에서 만나 조식을 함께했다. 이를 통해 무리뉴로부터 현 스쿼드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전달받았으며, 그동안 첼시 내에 있었던 불화도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히딩크는 부임 직전에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첼시의 상황이 좋지 않고,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며 첼시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하겠다는 뜻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히딩크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의 두 경기는 모두 무승... 그러자 태업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는 실력이 현저히 떨어진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속출했으나 이후 리그에서 몇 경기 동안 무패를 유지했다.

무리뉴가 경질된 이후 부터...

1월 7일 이청용이 선발 출전한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서는 코스타와 오스카가 1골 1어시스트로 팀의 3:0이라는 큰 승리를 기여했다

1월 10일 잉글랜드 FA컵 64강에서 만난 스컨토프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였다.

1월 17일 에버튼 FC과의 홈 경기에서는 전반전까지 존 테리의 자책골과 케빈 미랄라스의 골로 2:0으로 크게 밀렸으나 63분 코스타의 골과 65분 파브레가스의 동점골로 추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70분에 교체되어 들어온 푸네스 모리의 90분 극장 역전골로 지는 듯 싶었으나 막판 추가시간, 존테리의 극장(?) 동점골로 패배를 면하게 되었다.

1월 15일 아스날 FC과의 경기에서는 이바노비치의 어시스트와 코스타의 득점, 그리고 수비들의 활약으로 당시 리그 1위 아스날을 무실점으로 잡았다.

이로써 아스날전 4년 연속 무패 및 올시즌 더블, 그리고 최근 9시간 36분 아스날전 무실점 기록을 이어나갔다.

2월 1일 MK 돈스와의 경기에서는 기다리던 아자르의 PK 골과 트라오레의 데뷔골 오스카의 헤트트릭과 코스타의 골로 5:1 승리를 이끌어 냈다.

2월 8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홈으로 불러온 경기에서는 신예 제시 린가드에게 선제골을 허용하였지만 90분 + 추가시간 1분에 디에고 코스타의 극장골로 리그 12경기 무패 기록을 새웠다. 이 경기에서 커트 주마가 헤딩 후 착지를 하다 다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을 당했다

결국 히딩크도 08-09 시즌의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꾸역꾸역 무승부와 간간히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며 첼시는 10위라는 순위로 시즌을 마감한다. 그래도 시즌 초반 엄청난 속도로 강등권으로 추락한 팀을 적어도 쉽게 지지는 않는 팀으로 바꿔 놓은 점은 좋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10. 안토니오 콘테의 부임, 첼시의 부활

10.1. 2016-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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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 7라운드부터 19라운드까지 13연승을 달리며 구단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을 수립했다.

모호한 프리시즌, 뜬금포 은골로 캉테를 제외하면 성에 차지않는 영입, 작년과 달라질바 없는 경기력에 저번 시즌 막판부터 폼이 올라온 디에고 코스타의 하드캐리로 겨우겨우 승점을 챙겨가다가 형제구단에게 참교육 당하며 그럼 그렇지라며 모두가 포기하던 순간 헐시티전을 기점으로 콘테가 쓰리백을 꺼내들었고, 프리미어리그 최다연승 타이기록 및 구단자체 최고기록을 갱신하며 정신나간 포스를 보여주며 죽을 쓰던 나머지 리그 라이벌들을 재치고 우승을 차지한다.
우수한 풀백이며, 공격도 강점이 있긴하지만 돌파력에 약점이 있던 탄코를 스토퍼로, 가출을 일삼던 루이스를 스위퍼로, 13-14시즌 이후로 폼이 계속 떨어지던 케이힐의 커버범위를 줄여주며 피지컬과 대인방어,경험만을 살리는 기용, 톱급 윙어로서는 아쉽던 모제스의 윙백, 아자르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등 선수 개개인의 디테일에 기반하여 맞춤 수트처럼 재단된 전술은 리그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 이전에 쓰리백을 시도하는 구단들은 있었지만 대부분 결말이 좋지 못하거나 하위권들의 텐백을 가동할때나 사용되는 방식이었으나 첼시의 성공이후로 라이벌이자 강팀들인 아스널,토트넘,맨유까지 채용하는 등 채용률이 대폭 늘어났다. 특히 보수적인걸로 유명한 벵거감독도 3백 채용이후 리그 순위를 꽤나 끌어올렸으며, 토트넘또한 3백과 4백을 병용하는 전술로 첼시와 함께 팽팽한 타이틀 경쟁을 했다. [66]
하지만 시즌 중간부터 매 시즌마다 징징대던 디에고와 콘테가 충돌하고, 전술이 조금씩 파훼되는 것과[67] 영입 당시 주전선수들의 퀄리티 문제와[68] 과다한 출장으로 인해 경기력이 떨어지며 다음 시즌 또다시 이적시장에 활발히 움직여야 할 것을 예고했다.

10.2. 2017-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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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중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1차전 승리 이후 10년간 첼시의 기술이사직을 맡아왔던 마이크 에메날로가 사임했다. 에메날로는 주제 무리뉴와의 악연으로 첼시팬들에게 익히 알려진 인물인데, 선수들 영입방향 관련해서 감독들과 알력이 있어왔던 걸로 보인다. 무리뉴를 경질시킨 후 헛소리를 한 경력이 있으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의 경기 이전에 선수들의 멘탈리티나 팀 퍼포먼스에 잡음이 꽤나 있은 후에 안토니오 콘테체제 이후 핵심 중 하나였던 다비드 루이스를 명단 제외를 했던 결정 이후인 것으로 봐서는 무리뉴와 고질적으로 있었던 감독과의 알력싸움 이후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결국 콘테의 편을 들어준 것으로 보인다. 욕받이로써 욕을 엄청 얻어먹긴했어도 무리뉴 해임 이후 대체자 선발이나 유망주들을 영입하려는 시도[69]들로 현재 골문을 지키는 티보 쿠르투아나 당장 다비드 루이스의 대체자로서 충분한 활약을 보여주었던 안드레아스 크리스텐센 등의 영입은 좋은 평가를 받으나, 무리뉴 2기의 바바 라만,파피 질로보지,마이클 헥터등의 끔찍한 영입 등은 비판받을만 하다. 첼시 FC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장난감을 벗어나 재정적 자립을 시도하는 중에 나온 욕받이로서 희생양인 동시에 감독과의 알력싸움등 공과 과가 있는 인물이라고 보여진다.

특기할만한 점은 이번 시즌 들어 다소 비판을 받던 첼시의 유망주 정책과 관련해서 요새 유망주들의 약진이 눈에 띈다. 일전의 티보 쿠르투아 이외에도 돌아와 12R 기준 다비드 루이스마저 밀어내며 주축으로 자리잡아가는 안드레아스 크리스텐센부터 스토크 시티 FC에서 철벽인 퀴르트 주마[70], 크리스탈 팰리스 FC의 핵심으로 자리잡아가는 루빈 로프터스치크페르난도 요렌테길피 시구르드손이 나가 공격진이 약화된 스완지 시티 AFC의 최전방을 맡고있는 태미 에이브러햄이 리그내에서 꽤 주목받는 자원이다. 타 리그에서는 메이슨 마운트마리오 파샬리치정도가 기대 중인 자원으로 알려져있다.

챔스 로마전 이후 흔들리던 선수진을 크리스텐센의 주전기용,캉테와 아자르의 정상적인 복귀를 통해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마지막 조별리그 경기에서 비기며 16강을 확정지은데다 리그도 챔스권으로 안정적으로 들어갔으나 중반기가 넘어가며 다시 흔들리고 있다. 원인은 속속들이 터지는 부상과 징계 덕에 로테이션을 돌리긴 돌려도 그게 어느 한쪽으로 편중돼서 체력적으로 부담이 가해지는 애매한 상황.[71] 2월 기준으로 이번 시즌 첼시 1군에서 징계 및 부상으로 출전 불가가 되지 않았던 선수는 카바예로,뤼디거,자파코스타,아스필리쿠에타 단 4명뿐일정도로 꽤나 문제가 있다. 거기에 겨울이적시장에 3명의 주전급을 영입했으나 셋다 부상 복귀 후 경기감각이 그다지 많지않다는 게 함정..거기에 2월 들어서 2경기를 3점차로 연패하며 콘테의 거취에 대해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나 일단은 4위 수성 / 16강 진출 / FA컵 진행 중 이라는 단순 상황 자체는 부정적이진 않기에 이번 시즌은 콘테로 계속 가려는 분위기. 거기에 콘테가 해임될 시 보드진이 밀고있는 유력한 1순위 대체자가 루이스 엔리케라는 점에서 콘테의 까들도 콘테의 시즌 중반 사임은 원하지 않는 분위기.

그러나 2018년이 시작된 이후 자신이 언급한 무리뉴 시즌의 재림이 이어지고있다. 2위까지 올라갔던 팀 성적은 5위로 곤두박질쳤고, 3백의 코어 루이스의 장기부상 이후 좋은 대체자였던 크리스텐센이 강팀과의 연전인 바르사와의 챔스 1차전 이후로부터 폼이 수직낙하하며 상대의 찬스를 번번이 골로 내주며 챔스를 탈락했으며 로테이션을 잘 돌리지 않던 콘테덕에 선수들의 체력이 종잇장 수준으로 얇아졌다. 콘테를 상징하는 리액션도 사라지다시피한 것은 덤, 그나마 소튼 전 이후로는 교체 타이밍을 좀 더 빠르게 가져가거나 부분적 로테이션을 통해 마지막 실낱같은 4위 탈환+FA컵 우승을 노리고 있다.

막판 강팀전인 리버풀전에서 리버풀을 박살내며 정말 마지막 희망이 보이나 싶었으나 어김없이 다음 경기부터는 똥을 싸재끼며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나마 위안은 FA컵에서 맨유를 상대로 트로피를 거머쥐며 유종의 미를 거두나 했으나 얼마 안있어 윌리안이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트로피 이모지로 콘테만 지우고 올린 사건이 생기며 아직 선수진과 감독의 불화가 깊게 남아있음을 여실히 증명했다.

11. 마우리치오 사리의 부임, 에덴 아자르의 마지막 불꽃

11.1. 2018-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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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내부의 불화가 뚜렷함이 온천하에 공개된 가운데 또다시 2년만에 감독이 바뀔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그 자리는 SSC 나폴리에서 자기 색이 강한 축구로 돌풍을 일으켰던 마우리치오 사리 감독이 대신할 것으로 보였다. 여러 루머가 나오는 가운데 실제로 나폴리의 새로운 사령탑에는 카를로 안첼로티 감독이 선임되었다. 하지만 사리감독의 계약기간이 1년 남아있는 가운데 거기에 따른 보상금과 콘테 감독의 경질 위약금 문제가 겹쳐 어떻게든 돈을 조금 쓰려는 마리나 그라노브스카이아를 위시한 보드진 덕에 지켜보는 팬들과 선수들은 죽을 맛이다. 하도 지지부진한 탓에 사리 대신 슬라비사 요카노비치,루이스 엔리케,토마스 투헬,우나이 에메리,로랑 블랑 등 별별 감독이 선임될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지만 결국은 사리를 선임할 확률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 얘기가 시즌이 종료된 지 두 달에 가깝게 48시간, 다음 주를 들먹이며 진전은 하나도 되지않고 있고, 거기에 따라 선수영입까지 차질까지 생기는 상황이다. 설상가상으로 이번 시즌은 EPL의 영입기간이 단축된 첫 시즌이며, 구단주 아브라모비치는 영러관계가 차가워짐에 따라 영국에 입국도 못하고 있는 개막장인 상태[72] 거기에 따라 새로 꾸려지는 스탭진에 이름을 올린 잔프랑코 졸라마저 이 상황에 대해 힘들다는 인터뷰까지 했다.

7월 9일 월요일 프리시즌 소집을 앞두고 한국시간 7월 6일까지 아무것도 확정나지 않은 상태이며, 아직 공식적인 첼시의 감독인 안토니오 콘테 감독도 자신의 프리시즌 일정에 맞춰 선수들을 소집하겠다고 얘기한 상황.[73]
정말 마지막으로 중요한 문제인, 첼시의 유이한 월드 클래스이자 크랙인 에덴 아자르의 재계약 건에 관해서도 문제이다. 선수 본인은 첼시에 대한 애정도와 충성심은 매우 높으나[74] 계속되는 감독과 선수진의 불화와 그에 따른 성적의 결과, 다비데 자파코스타, 마이클 헥터 등 보드진의 영입결과물에 대해서는 상당히 피로도를 느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같은 국적인 팀메이트인 쿠르투아는 입단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아들 문제를 거론하며 첼시를 다시 떠나기를 원했으며 계약기간이 1년만 남음에 따라 셀레상의 수문장인 알리송 베케르나 다른 골키퍼를 영입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 또한 아자르와의 재계약 문제에 대해서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의문이다.

다행히 마우리치오 사리를 감독으로 선임하는데에 성공했으며, 사리볼의 핵심인 조르지뉴 또한 동시에 영입하는데에 성공했다. 그 후 전임자의 듀오와, 수비 불안을 없앨만한 자원인 곤살로 이과인, 미랼렘 퍄니치, 다니엘레 루가니 등과 접촉했으나 전부 밀란의 스왑딜의 여파로 무산되어버렸다.

그 후 영입 없이 시즌을 시작하는 줄 알았으나 '쿠'가 훈련 불참 후 도망가는 해프닝을 겪은 후 빌바오의 수문장 케파 아리사발라가의 바이아웃을 질러 월드레코드로 영입을 완료했다. 바카요코를 밀란으로 임대 보내는 동시에, 출전시간에 불만이 많았던 레알 마드리드의 마테오 코바치치를 임대로 영입하였다.

프리시즌과 FA 커뮤니티 실드에서 사리볼의 가능성이 보였으나 모라타와 중원문제가 심각함이 드러났다. 하지만 캉테와 코바시치, 아자르의 합류로 이러한 문제는 어느정도 해결되었으며 개막 후 4연승에 성공했다. 아직까진 사리가 원한 스트라이커 문제최후방 센터백의 문제가 여실히 남아있긴 하다. [75]

그 후로는 11월까지는 위기도 있었지만 무패행진을 달리고 있으며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보여준 양쪽 포워드와의 연계력을 강점으로 보이는 지루 덕에 최전방의 걱정은 조금이나마 덜었으며 센터백 라인도 의 기량은 미심쩍지만 주전 센터백 라인은 나름 믿을맨인 상황이다. 양쪽 메짤라 자리에서 뛸 수 있는 로프터스치크, 코바치치, 로스 바클리의 경쟁이 매우 치열하다.

12월달 들어 맨시티전에서 아자르의 폼이 물 오른 걸보아 괜찮은 것 같다.

그 후 본머스와 맨시티에게 4:0, 6:0 대패를 당하고 선수들의 멘탈리티문제와 더불어 사리 경질설이 대두되다가 EFL컵 결승전 케파 항명파동을 겪고나서 한층 팀은 단단해졌다. 갑자기 사리볼의 적응도가 급상승하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저렇게 기이하게 패배하는 일은 없어졌으며 시즌 막판 니가 가라 챔스를 찍는 막장 상황의 마지막에 분전해서 가장 빨리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결정짓고 유로파는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리그 마지막 경기 이후 엠바고가 풀린 골닷컴과 아자르의 인터뷰에서 아자르 또한 첼시와 레알과의 이적협상 내용을 기다리고 있음을 밝혔다. 정말 큰 일이 없는 이상 아자르의 마지막 시즌이다

이래저래 말은 많았지만, -밑에 애들이 서로 넘어져서 그런거지만-리그3위에 안정적인 순위로 챔스티켓 확보, 그리고 유럽대항전인 유로파리그 우승까지 해내면서 사리 감독 개인 커리어에 첫번째 트로피를 첼시에서 성공해냈다.

여담으로 유로피리그 상대팀은 아스날 FC로, 감독인 에메리는 유로파 3연패라는 성적을 지니고 있어서 첼시팬들에겐 경기전까지 불안했다고한다.이게 챔스 3연패랑 좀 다른게, 리그에서 5~6위성적을 할정도의 애매함과 유로파 리그 우승할정도의 강함을 3년 내내 유지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챔스보다 그 권위성이나 인기도 측면에서 떨어진다 해도 유로파 역시 엄연한 유럽 대항전이기에 무시할 건 못됐는데 그걸 누르고 우승하면서 면은 세웠다.

12. 이적시장 제재에도 굴하지 않은 램파드

12.1. 2019-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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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에이스 에덴 아자르를 레알로 보내고 치르는 첫 시즌이자 클럽 최고의 레전드 중 하나인 프랭크 램파드를 감독으로 부임시킨 시즌이다. 게다가 1년 이적시장 금지를 당하며 다른 빅6 팀들에 비해 스쿼드 경쟁력이 많이 약화되었으나 예상보다 꽤 좋은 성적을 거둔 시즌으로 요약할 수 있다. 숙원 사업 중 하나인 유스들의 1군 정착을 성공시켰으며 그러면서도 챔스 진출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판데믹 때문에 굉장히 긴 기간 동안 치뤄진 시즌이기도 하다.

13. 토마스 투헬의 부임, 세 번째 전성기이자 로만 시대의 마지막

13.1. 20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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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년 만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 두 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리며 명실상부한 명문 클럽으로 거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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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내적으로 모아놨던 이적료를 폭발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는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여유있는 팀들조차 큰 돈을 쓰는 데 부담스러운 상황이기 때문에 여름 이적시장 최고의 큰 손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3,000억원 이상을 투자하고도 시즌 중반 8위까지 순위가 떨어지자 프랭크 램파드 감독은 경질되었고, 후임으로 토마스 투헬이 오게 됐다. 투헬 부임 후 첼시는 반등에 성공하며 리그 순위를 4위권으로 끌어올렸고 FA컵은 결승 진출, 챔스에서도 결승 진출을 이루어냈다. 아쉽게도 레스터와의 결승전에서 패배하며 준우승했다. 그리고, 이 시즌 첼시는 두 번째 챔스 우승을 달성하며, 이견의 여지가 없는 런던 최고의 클럽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3.2. 2021-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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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평하자면, 지난 시즌영광을 이어갈 기세로 희망차게 시작했으나 여러 악재가 겹치며 기대보다는 다소 아쉬운 성적을 거둔, 축구 내, 외적으로 매우 힘들고 부침이 심했던 시즌이라고 볼 수 있다.

비록 리그를 3위로 마치며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확보했고 오랜 시간 난항을 겪던 구단 인수 문제가 해결되며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지만, 뤼디거와 같은 팀의 핵심선수를 자유계약으로 내보내게 되는 등, 첼시로서는 잃지 않아도 되었을 것들을 너무 많이 잃게 된 시즌이 되고 말았다. 코너 갤러거, 빌리 길모어를 위시한 유망주들을 1군에 연착륙 시키는 것과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 고주급자 선수들을 처분하는 것과 동시에 나이가 차 기울어가는 3선 미드진의 뒤를 받치거나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좋은 기량의 미드필더 및 대규모 붕괴가 예상되는 수비진을 메꿀 정상급 선수들의 영입까지 해결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안은 채로 새 시즌을 준비하게 되었다. 결국 2022년 5월, 토드 볼리가 구성한 컨소시엄이 구단을 인수해 보엘리가 대표로 계약을 체결하며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14. 구단주의 교체, 그리고 시작된 암흑기

14.1. 2022-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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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토마스 투헬 감독이 경질됐다. 후임으로는 브라이튼 앤 호브 알비온 FC의 감독 그레이엄 포터가 부임했지만 첼시에서 승률 29.4%로 최악의 성적을 거두며 2023년 4월 2일부로 상호 합의하에 계약을 해지하여 첼시 FC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 후로 브루노 살토르가 감독대행을 맡다가 4월 6일, 임시감독으로 프랭크 램파드가 정식 선임되었다. 그러나 램파드의 첼시 2기는 1승 2무 6패와 리그 12위라는 포터보다 더한 처참한 성적으로 막을 내렸다. 정리하자면 15-16 시즌을 뛰어넘는 21세기 이후 첼시 최악의 시즌이라 볼 수 있다. 팬들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15-16 시즌 초반 강등권에서 허덕였을 때보다 희망이 없다라는 의견이 많다. 또한 토드 볼리가 여름 이적시장과 겨울 이적시장에 지출한 약 8000억원이나 되는 막대한 지원에 비해 선수들의 부진과 겹쳐 팀의 성적은 매우 좋지 못했다. 따라서 다음 시즌이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여름 이적시장에 보강할 포지션과 나가야 할 자원들을 정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졌고, 다음 시즌 첼시의 새로운 감독인 마우리시오 포체티노가 스쿼드를 어떻게 꾸려나가고 활용할지 귀추가 주목된다.

14.2. 2023-24 시즌

파일:첼시 23/24 스쿼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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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시각 2023년 5월 29일 오후 12시, 포체티노 감독의 선임이 공식 발표되었다. 계약 기간은 2년 계약에 1년의 클럽 옵션이며, 7월 1일부터 업무를 시작한다. 이 부임으로 인해 포체티노첼시토트넘에 모두 부임해본 5번째 감독이 되었다.[76] 이후 첼시는 여름 이적시장이 시작되자마자 방대한 스쿼드를 줄이기 위한 선수들의 방출 작업을 시작했다. 여러명의 선수들을 사우디행과 타 클럽으로 이적을 성공시켜 이적료로 2000억이 넘는 수익을 얻었고, 구단 대부분의 수익이 쓸데없이 고주급인 선수들에게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으며 나름 이적시장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5. 기타

15.1. 역대 감독

첼시 FC 역대 감독
이름 국가 기간 경기 승률 트로피
존 로버트슨[77]
(John Tait Robertson)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05.05 - 1906.10 50 30 10 10 121 54 60%
윌리엄 루이스[78]
(William Lewi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06.10 - 1907.04 31 20 5 6 59 28 65%
데이비드 캘더헤드
(David Calderhead)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07.07 - 1933.06 966 384 239 343 1376 1305 40%
레슬리 나이튼
(Leslie Knighto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33.07 - 1939.06 274 93 72 109 419 446 34%
빌리 비렐
(Billy Birrell)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39.07 - 1952.06 289 95 74 120 410 462 33%
테드 드레이크
(Ted Drak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52.07 - 1961.09 424 156 103 165 771 772 37% 퍼스트 디비전(1955)
채리티 실드(1955)
토미 도허티
(Tommy Docherty)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61.10 - 1967.09 302 143 64 95 526 422 47% 리그 컵(1965)
데이브 섹스턴
(Dave Sexto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67.10 - 1974.09 373 165 108 100 570 438 44% FA컵(1970)
UEFA 컵위너스컵(1971)
론 수어트[79]
(Ron Suart)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74.10 - 1975.03 31 8 11 12 38 58 26%
에디 맥크레디
(Eddie McCreadie)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75.04 - 1977.06 99 37 32 30 141 128 37%
켄 셀리토
(Ken Shellito)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77.07 - 1978.12 66 16 18 32 77 114 24%
대니 블랜치플라워
(Danny Blanchflower)
파일:북아일랜드 국기.svg 1978.12 - 1979.09 32 5 8 19 34 68 16%
제프 허스트
(Geoff Hurst)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79.09 - 1981.04 83 35 19 29 108 94 42%
바비 굴드[80]
(Bobby Gould)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81.04 - 1981.05 2 0 0 2 0 5 0%
존 닐
(John Neal)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81.06 - 1985.07 204 84 62 58 326 253 41% 세컨드 디비전 챔피언십(1984)
존 홀린스
(John Hollin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85.07 - 1988.03 144 56 37 51 196 214 39% 풀 멤버스 컵(1986)
바비 캠벨
(Bobby Campbell)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88.03 - 1991.06 161 74 47 40 280 230 46% 세컨드 디비전 챔피언십(1989)
풀 멤버스 컵(1990)
이안 포터필드
(John Porterfiled)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1991.06 - 1993.02 89 32 28 29 106 115 36%
데이비드 웹[81]
(David webb)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93.02 - 1993.06 13 5 4 4 19 18 38%
글렌 호들[82]
(Glenn Hoddl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1993.06 - 1996.05 157 53 54 50 192 182 34%
루드 굴리트[83]
(Ruud Gullut)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1996.05 - 1998.02 82 41 17 24 157 109 50% FA 컵(1997)
지안루카 비알리[84]
(GianLuca Viall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1998.02 - 2000.09 142 75 38 29 222 123 53% 리그 컵(1998)
UEFA 컵위너스컵(1998)
UEFA 슈퍼컵(1998)
FA 컵(2000)
채리티 실드(2000)
그레엄 릭스[85]
(Graham Cyril Rix)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2000.09 - 2000.09 1 1 0 0 2 1 100%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Claudio Ranier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2000.09 - 2004.05 200 107 46 47 358 199 54%
주제 무리뉴
(José Mourinho)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2004.06 - 2007.09 185 124 40 21 330 119 67% 프리미어 리그(04-05), (05-06)
EFL 컵(04-05),(06-07)
FA 컵(06-07)
FA 커뮤니티 실드(2005)
아브람 그랜트
(Avram Grant)
파일:이스라엘 국기.svg 2007.09 - 2008.05 54 36 13 5 97 36 67%
루이스 스콜라리
(Luiz Felipe Scolari)
파일:브라질 국기.svg 2008.07 - 2009.02 36 20 11 5 66 24 56%
레이 윌킨스[86]
(Ray Wilkin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2009.02 - 2009.02 1 1 0 0 3 1 100%
거스 히딩크[87]
(Guus Hiddink)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2009.02 - 2009.05 22 16 5 1 41 19 73% FA 컵(08-09)
카를로 안첼로티
(Carlo Ancelott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2009.06 - 2011.05 109 67 20 22 242 94 61% 프리미어 리그(09-10)
FA 컵(09-10)
커뮤니티 실드(2009)
안드레 빌라스보아스
(André Villas-Boas)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2011.06 - 2012.03 40 19 11 10 69 43 48%
로베르토 디 마테오[88]
(Roberto Di Matteo)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2012.03 - 2012.11 42 24 9 9 89 56 57% FA 컵(11-12)
UEFA 챔피언스리그(11-12)
라파엘 베니테즈[89]
(Rafael Benitez)
파일:스페인 국기.svg 2012.11 - 2013.05 48 28 10 10 99 48 58% UEFA 유로파리그(12-13)
주제 무리뉴
(José Mourinho)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2013.06 - 2015.12 136 80 29 27 245 121 59% 프리미어리그(14-15)
리그 컵(14-15)
스티브 홀란드[90]
(Steve Holland)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2015.12 - 2015.12 1 1 0 0 3 1 100%
거스 히딩크[91]
(Guus Hiddink)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2015.12 - 2016.05 27 10 11 6 52 34 37%
안토니오 콘테
(Antonio Conte)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2016.07 - 2018.07 106 70 15 21 112 48 66% 프리미어 리그(16-17)
FA 컵(17-18)
마우리치오 사리
(Maurizio Sarri )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2018.07 - 2019.06 67 40 16 11 116 60 60% UEFA 유로파리그(18-19)
프랭크 램파드
(Frank Lampard )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2019.06 - 2021.01 84 44 17 23 163 106 52%
토마스 투헬
(Thomas Tuchel )
파일:독일 국기.svg 2021.01 - 2022.09 100 60 24 16 168 80 67% UEFA 챔피언스리그(20-21)
UEFA 슈퍼컵(2021)
FIFA 클럽 월드컵(2021)
그레이엄 포터
(Graham Potter )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2022.09 - 2023.04 31 12 8 11 34 31 32%
브루노 살토르[92]
(Bruno Saltor )
파일:스페인 국기.svg 2023.04 - 2023.04 1 - 1 - - - 0%
프랭크 램파드[93]
(Frank Lampard )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2023.04 - 2023.05 9 1 2 6 9 21 10%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Mauricio Pochettino )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2023.07 - - - - - - - -%

15.2. 역대 주장

첼시 FC 역대 주장
이름 국가 포지션 기간 커리어기간 비고
윌리엄 폴크
(William Foulk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GK 1905-1906 1905-1906 최초의 주장
잭 해로우
(Jack Harrow)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94] ?-? 1911-1926
토미 로
(Tommy Law)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DF[95] ? 1925-1939
세계 2차대전 이후
로이 벤틀리
(Roy Bentl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FW ?-? 1948-1956 최초 우승
테리 베너블스
(Terry Venable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 1960-1966
론 해리스
(Ron Harri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 1961-1980
레이 윌킨스
(Ray Wilkin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 1973-1979 최연소주장
콜린 페이츠
(Colin Pate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 1979-1988
데니스 와이즈
(Dennis Wis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 1990-2001
스티브 클라크
(Steve Clarke)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DF[96] - 1987-1998
마르셀 드사이
(Marcel Desailly)
파일:프랑스 국기.svg DF 2001-2004 1998-2004
존 테리
(John Terr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2004-2017 1998-2017 최장기간 주장역임
게리 케이힐
(Gary Cahill)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2017-2019 2012-2019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
(Cesar Azpilicueta)
파일:스페인 국기.svg DF 2019-2023 2013-2023
리스 제임스
(Reece Jame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2023- 2018-

15.3. 역대 올해의 선수

첼시 FC/올해의 선수 목록
시즌 이름 국적 포지션 시즌 이름 국적 포지션
1966-67 피터 보네티
(Peter Bonetti)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GK 1967-68 찰리 쿠크
(Charlie Cooke)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MF[97]
1968-69 데이비드 웹
(David Webb)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1969-70 존 홀린스
(John Hollin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98]
1970-71 존 홀린스
(John Hollin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1971-72 데이비드 웹
(David Webb)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1972-73 피터 오스굿
(Peter Osgood)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FW 1973-74 게리 로크
(Gary Lock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99]
1974-75 찰리 쿠크
(Charlie Cooke)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MF 1975-76 레이 윌킨스
(Ray Wilkin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1976-77 레이 윌킨스
(Ray Wilkin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1977-78 미키 드로이
(Micky Dro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1978-79 토미 랭글리
(Tommy Langle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FW 1979-80 클리브 워커
(Clive Walker)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100]
1980-81 페타르 보로타
(Peter Borota)
파일: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국기.svg GK 1981-82 마이크 필러리
(Mike Filler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1982-83 조이 존스
(Joey Jones)
파일:웨일스 국기.svg DF[101] 1983-84 팻 네빈
(Pat Nevin)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MF[102]
1984-85 데이비드 스피디
(Daivd Speedie)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FW 1985-86 에디 네이즈위키
(Eddie Niedzwiecki)
파일:웨일스 국기.svg GK
1986-87 팻 네빈
(Pat Nevin)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MF 1987-88 토니 도리고
(Tony Dorigo)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1988-89 그레이엄 로버츠
(Graham Robert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1989-90 켄 몬쿠
(Ken Monkou)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DF
1990-91 앤디 타운젠드
(Andy Townsend)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MF 1991-92 폴 엘리엇
(Paul Elliott)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1992-93 프랭크 싱클레어
(Frank Sinclair)
파일:자메이카 국기.svg DF 1993-94 스티브 클라크
(Steve Clarke)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DF
1994-95 에란드 욘센
(Erland Johnsen)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DF 1995-96 루드 굴리트
(Ruud Gullit)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MF
1996-97 마크 휴즈
(Mark Hughes)
파일:웨일스 국기.svg FW 1997-98 데니스 와이즈
(Dennis Wis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1998-99 잔프랑코 졸라
(Gianfranco Zola)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FW 1999-00 데니스 와이즈
(Dennis Wis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2000-01 존 테리
(John Terr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2001-02 카를로 쿠디치니
(Carlo Cudicin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GK
2002-03 잔프랑코 졸라
(Gianfranco Zola)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FW 2003-04 프랭크 램파드
(Frank Lampard)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2004-05 프랭크 램파드
(Frank Lampard)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2005-06 존 테리
(John Terr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2006-07 마이클 에시엔
(Michael Essien)
파일:가나 국기.svg MF 2007-08 조 콜
(Joe Col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2008-09 프랭크 램파드
(Frank Lampard)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2009-10 디디에 드록바
(Didier Drogba)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FW
2010-11 페트르 체흐
(Peter Cech)
파일:체코 국기.svg GK 2011-12 후안 마타
(Juan Mata)
파일:스페인 국기.svg MF
2012-13 후안 마타
(Juan Mata)
파일:스페인 국기.svg MF 2013-14 에덴 아자르
(Eden Hazard)
파일:벨기에 국기.svg MF
2014-15 에덴 아자르
(Eden Hazard)
파일:벨기에 국기.svg MF 2015-16 윌리안
(Willan)
파일:브라질 국기.svg MF
2016-17 에덴 아자르
(Eden Hazard)
파일:벨기에 국기.svg FW 2017-18 은골로 캉테
(N'golo Kante)
파일:프랑스 국기.svg MF
2018-19 에덴 아자르
(Eden Hazard)
파일:벨기에 국기.svg FW 2019-20 마테오 코바치치
(Mateo Kovačić)
파일:크로아티아 국기.svg MF
2020-21 메이슨 마운트
(Mason Mount)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2021-22 메이슨 마운트
(Mason Mount)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MF
2022-23 티아고 실바
(Thiago Silva)
파일:브라질 국기.svg DF

15.4. 역대 선수단 선정 올해의 선수

첼시 FC/선수단 선정 올해의 선수 목록
시즌 이름 국적 포지션 시즌 이름 국적 포지션
2005-06 클로드 마켈렐레
(Claude Makélélé)
파일:프랑스 국기.svg MF 2006-07 디디에 드록바
(Didier Drogba)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FW
2007-08 히카르두 카르발류
(Ricardo Carvalho)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DF 2008-09 애슐리 콜
(Ashely Col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2009-10 플로랑 말루다
(Florent Malouda)
파일:프랑스 국기.svg MF 2010-11 애슐리 콜
(Ashely Col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DF
2011-12 하미레스
(Ramires)
파일:브라질 국기.svg MF 2012-13 후안 마타
(Juan Mata)
파일:스페인 국기.svg MF
2013-14 세사르 아스필리쿠에타
(Cesar Azpilicueta)
파일:스페인 국기.svg DF 2014-15 에덴 아자르
(Eden Hazard)
파일:벨기에 국기.svg MF
2015-16 윌리안
(Willian)
파일:브라질 국기.svg MF 2016-17 은골로 캉테
(N'golo Kante)
파일:프랑스 국기.svg MF
2017-18 윌리안
(Willian)
파일:브라질 국기.svg MF 2018-19 에덴 아자르
(Eden Hazard)
파일:벨기에 국기.svg MF
2020-22 N/A - - 2022-23 티아고 실바
(Thiago Silva)
파일:브라질 국기.svg DF



[1] 구장인 스탬퍼드 브리지가 풀럼, 켄싱턴, 첼시 세 지역의 경계에 위치해있어서 어느 이름을 써도 이상하진 않다.[2] 펜셔너의 신이라 불렸으며 이를 본딴 풍향계가 아직 스탬포드 브릿지에 복제본으로 남아있다.[3] 세상에 피할 수 없는 것 세 가지는 죽음, 세금, 첼시의 패배 드립..[4] 1905~1966. 설립자 조셉 미어스 형제의 아들이다.[5] 첼시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는 1944년생 축구 선수가 아닌, 스코틀랜드 출신 1917년생 축구 선수로, 1945년에 영입된 걸로 나와있다.[6] 첼시의 유스출신이고 밀란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토트넘으로 가서 레전드가 되었다. 57년에 데뷔해서 첼시의 주포로 활약했다.[7] 이 당시의 이야기는 토미 도허티, 바비 탬블링문서 참고[8] 우승팀 맨유와의 승점차는 4점이었다.[9] 덜미를 잡은 게 FC 바르셀로나였다.[10] 과정이 정말 드라마틱했는데, 최종전 상대가 리버풀 FC였다. 당시 첼시가 4위, 리버풀이 5위였으며 여기서 패하는 팀은 챔피언스리그에 나갈 수 없었다. 당시 2,300만 파운드 가량의 부채(심지어 6주안에 갚아야했고 이미 다음 시즌 중계권료가 담보 잡힌 상태였다.)를 지고 있던 첼시에게는 부채를 갚기 위해선 무조건 승리만이 필요했고, 그 유명한 예스페르 그룅키에르의 10억 파운드 짜리 골에 힘입어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2:1로 승리하며 챔스에 진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승리의 여파로 로만 아브라모비치에 의해 구단이 인수되었고, 이후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면서 현재의 강팀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당시 로만은 챔스에 나가는 구단을 선호했는데, 첼시가 승리하여 챔스에 나가게 되면서 인수 결심하게 된 것. 그만큼 그룅키에르의 득점은 구단의 운명을 바꾼 값어치 있는 득점이었으며 현재까지 종종 화자가 되고 있다. 사실 이 경기에서 퇴장당하며 첼시의 역사를 바꾸신 숨은 개국공신이 더 있다[11] 참고로 베이츠는 첼시를 판 돈으로 2005년 리즈 유나이티드 FC를 샀지만 3부 리그로 강등당하는 일을 겪게 되었고, 결국 2013년에 바레인의 사업가 살라 누루딘에게 팀을 매각하고 구단주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12] 이 지역은 이탈리아계 이주민이 많다고 한다.[13] 아이두르 구드욘센과 최고의 호흡을 보여준 그 선수 맞다.[14] 물론 뚜렷한 성적을 올린 사례는 첼시 외엔 맨체스터 시티 FC파리 생제르맹 FC 정도이다. FC 샤흐타르 도네츠크FC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동구권 일대의 팀들은 챔스에서는 아직은 두각을 보이고 있지는 않는다. 2023년, 맨시티는 기나긴 빅 이어와의 악연을 끊고 우승을 했지만 파리의 경우는 아직까지 챔스 우승이 없다.[15]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서는 이 글 참조.[16] 이 시즌 우승팀이 그 유명한 무패 우승 아스날 FC였는데 그 아스날을 챔스 8강에서 패퇴시켰다.[17] 맨시티의 인수 후 초창기를 생각해보자.[18] 히카르두 카르발류, 파울루 페헤이라[19] 페트르 체흐, 존 오비 미켈, 디디에 드록바, 마이클 에시앙 등.[20] 참고로 이 승점이 역대 우승팀 승점 1위 기록은 아니다. 맨체스터 시티 FC가 17-18 시즌 100점, 18-19 시즌 98점을 기록했고 19-20 시즌 리버풀 FC가 승점 99점으로 우승하며 역대 우승팀 승점 4위로 밀려났다.[21] 아이러니하게도 이 득점은 한때 첼시에 있었던 니콜라스 아넬카의 득점이다. 파울루 페헤이라의 반칙으로 얻은 페널티 킥을 성공한 것.[22] 선 수비 후 역습.[23] 부진이라고 해도 점유율은 4:6으로 바르셀로나가 앞서 갔다. 그러나 유효 슈팅 수는 첼시가 더 많았다.[24] 단, 05-06 시즌에는 리버풀이 EPL 4위 이내의 팀이 아닌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챔스에 참가해 조별 리그에서 첼시와 만나게 되었다. 04-05 시즌 당시, 리버풀은 리그 5위를 기록했지만 04-05 챔스에서 우승했다. 그런데 디펜딩 챔피언은 리그 순위와 관계없이 다음 시즌 챔스에 직행한다는 규정이 당시에는 없었다. 결국 UEFA에서는 당시 리그 4위였던 에버튼을 그대로 플레이오프부터, 리버풀을 1차 예선부터 치르도록 했고, 리버풀은 그 예선을 모두 통과하여 본선에 올랐다. 05-06 시즌 이후 디펜딩 챔피언은 리그 순위가 4위권 바깥이라도 다음 시즌 챔스 본선 직행이 가능하고 리그 4위 팀은 유로파리그에 진출하는 형식으로 조항이 정비되어 다시는 같은 리그 팀끼리 8강 이하의 단계에서 맞대결 할 일은 없어졌다.[25] 특히 이전까지 첼시에 굉장히 강했던 아스날을 상대로 홈어웨이 경기를 모두 잡아냈다.[26] 미들즈브러는 해당 시즌 맨유에도 4-1 대승, 아스날에도 2-1 승리를 거두고 최하위 팀 선덜랜드에 패배하는 등 도깨비 팀의 대명사였다.[27] 이 패배는 첼시가 풀럼을 상대로 무려 27년 만에 허용한 패배였다. 그리고 첼시는 이후 2022년 현재까지 풀럼전 무패를 기록하고 있다.[28] 테리, 카르발류, 불라루즈[29] 역시 거금을 들여 영입한 칼루와 미켈은 위에서 언급했으므로 생략.[30] 물론 발락은 FA로 왔기 때문에 이적료에 대한 부담감은 전혀 없었어서 셰브첸코보다는 덜 까였다. 후에 잘했기도 했고... 문제는 주급이 너무 비싸 재계약에 실패했다는 것이다.[31] 참고로 첼시는 04-05, 06-07, 08-09 시즌에 4강전을 치를 때마다 심판 판정에 대한 논란이 불거져 나왔으며, 그럴 때마다 반드시 패했다.[32] 아스날에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따라붙은 계기가 된 경기. 아스날 FC 항목 참조. 06-07 FA컵 결승전에서는 드록바의 연장 결승골이 터지자 무리뉴의 벼 베기 세레모니가 나왔다. 벼 베지 마[33] 17-18 시즌 맨시티가 승점 100점으로 경신하기 전까지 EPL 최다 승점 기록이었다.[34] 15실점.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다.[35] 유일하게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기록이다.[36] 사실 이 조짐은 06-07 시즌부터 감지되고 있었는데 셰브첸코와 발락이 무리뉴가 원했던 영입이 아니었음에도 이루어진 것을 포함하여 시즌 중반 주축 선수들이 줄줄이 부상병동에 시달리면서도 겨울이적시장에서 로만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37] 06-07 시즌까진 해리 레드냅 사단에서 포츠머스에 있다가 07-08 시즌을 앞두고 무리뉴를 견제하기 위한 프랑크 아르네센 단장의 입김으로 첼시로 넘어왔다.[38] 13라운드 에버튼과의 홈경기에서 종료직전 케이힐에게 동점골을 먹혀 1-1 무승부, 19라운드 빌라에 홈경기에서 솁첸코가 2골 1어시로 첼시에서의 인생경기를 찍으며 이기고 있었으나 종료직전 동점골을 먹혀 4-4 무승부, 25라운드 포츠머스 원정에서의 1-1 무승부.[39] 2골 모두 오프사이드 논란이 있었다.[40] 페네르바체는 이 시즌이 처음으로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 진출한 시즌이었다. 16강에서 UEFA컵 2연패 세비야 FC를 승부차기로 꺾고 올라갔다. 8강전에서 첼시는 페네르바체 원정에서 1차전 1-2 패배를 당했으나 2차전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준결승에 다소 어렵게 올라갔다.[41] 공교롭게도 위건의 감독은 맨유의 주장이었던 스티브 브루스였다. 스승에게 큰 선물을 안긴 셈.[42] 램파드는 모친상으로 나오지 못했고 발락이 골을 넣은 후 팀동료 램파드의 어머니를 기리는 세레머니를 하기도 했다.[43] 18위 레딩에 승점 3점이 앞서있지만 골득실에서 많이 앞서있어 사실상 잔류가 확정된 상황이었다.[44] 셰브첸코가 다음 시즌 AC 밀란으로 임대되고 그 다음 시즌에 FC 디나모 키이우로 떠나게 되면서 이 골은 셰브첸코가 첼시에서 기록한 마지막 골이 되었다.[45] 그랜트는 이후 이스라엘 여러 구단의 스카웃 제의를 받았으나 프리미어 리그에 남고 싶다며 거절했다. 이후 포츠머스 FC 감독이 되었지만 첼시 때와 달리 강등당하였고, 다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감독이 되었지만 여기서도 10-11 시즌에 강등되어 2회 연속 강등된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당했다. 그 뒤에 잉글랜드를 떠난 그랜트는 세르비아로 가서 FK 파르티잔 감독이 되어 팀을 리그 우승시키며 프리미어 리그 시절 2회 연속 강등 감독이란 오명을 씻었다.[46] 로만은 라커룸에 들어와 에시엔에게 네가 전술의 핵심이다고 말하고 간 적도 있으며 무리뉴 경질 후 자신이 직접 전술 지시를 하기도 했었다.[47] 첼시 부임 당시 무리뉴는 "만약 로만이 계속 팀 훈련에 관여했다면 우린 리그 꼴찌일 것이다. 만약 내가 로만의 사업에 관여했다면 우린 파산했을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 즉 무리뉴의 말은 경영은 경영 전문가가, 스포츠는 스포츠 전문가가 맡아야지, 전문 분야가 아닌 일에 간섭하려 들면 서로 어긋나고 무너져 내린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이다.[48] 발락은 초창기에는 적응에 실패하였으나 08-09 시즌부터 에시앙-램파드-발락 삼각편대의 한 축을 맡는 등의 쏠쏠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셰브첸코는...[49] 그렇다고 에메날로가 무능한 것은 아니다. 토레스 영입시에도 사실 그는 반대했었고 후안 마타, 다비드 루이스, 오스카르, 에덴 아자르 등 주전은 물론 티보 쿠르투아, 오리올 로메우, 케빈 더브라위너. 루카스 피아존과 같은 유망주까지, 11-12 시즌 이후 이루어진 꿀영입들은 모두 그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50] 그리고 페르난도 토레스 영입은 에메날로가 아닌 당시 기술이사였고 지금은 함부르크 SV의 단장인 프랭크 아르네센의 입김이 가장 강했다. 사실 10-11 시즌의 생각없는 무리한 지출은 아르네센의 무능함이 그 큰 원인이었던 듯. 그리고 그 무능함을 함부르크에 가서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마이클 에메날로가 기술이사가 된 후에는 딱히 심각한 지출 없이 선수들을 쏠쏠하게 사오는 것을 보면...[51] 당시 첼시는 다비드 비야도 관심이 있었지만 사무엘 에투에게도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에투 및 비야 구입에 사력을 다했으나 돌아온 것은 NFS였고 그 차선책으로 구입한 것이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셰브첸코였다. 그러나 이후 경기에서 셰브첸코가 폭망(...).[52] 체흐, 테리, 램파드, 드록바[53] 하베르츠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일시불 골이라도 성공했지만, 베르너는 20-21시즌 수많은 빅찬스미스에 이어 21-22 시즌에는 장점이던 오프더볼과 활동량을 기반으로 한 수비라인을 흔드는 움직임마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54] 런던 소재 클럽 중 첼시와 함께 빅 4의 일원이었던 아스날은 바르사에게 패해 준우승을 한 게 클럽 최고 기록이다. 또 다른 런던 클럽인 토트넘도 결승에는 올랐지만 리버풀에게 패해 우승 경력이 없다.[55] 공교롭게도 당시 레알도 리그를 5위로 마무리하는 바람에 챔피언스 리그에 직행할 수 없었다. 이 때 레알은 결승전에서 발렌시아 CF를 3-0으로 완파하며 8번째 빅 이어를 들어올렸고, 유럽 축구 연맹스페인 왕립 축구 협회는 리그를 4위로 마감한 레알 사라고사를 UEFA컵으로 강등시키고, 레알 마드리드에게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부여하였다.[56] 사실 토레스의 골이 없었어도 1,2차 총합골 (2)-(2)로 홈에서 바르셀로나에게 골을 안내준 첼시가 원정 다득점이여서 결승 진출은 가능했다. 그래도 이 골로 바르셀로나가 2골을 넣어야 되어 화려하게 마무리하게 된다. 1골차면 바르셀로나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지만 버스 한 번 뚫는 것도 어려운데 시간도 부족하고 그것도 두번을 어떻게 하냐토레스에게 골을 먹히기 전까지만 해도 바르셀로나 선수들에게는 초조함이, 첼시 선수들에게는 절박함이 역력했다. 그 긴장감을 한번에 깨부순 것이 토레스의 노마크 드리블에 이은 골키퍼를 제친 골이었다. 토레스의 골이 들어간 이후 바르셀로나, 특히 메시는 유니폼에 얼굴을 파묻고 절망했으며 첼시의 분위기는 극적으로 달아올랐다. 단 1년 전까지만 해도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이 막강했던 바르셀로나가 다른 팀도 아닌 어수선한 분위기의 첼시에게 1무1패로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자체가 영화의 한 장면 같았을 정도. 토레스의 골이 없었더라도 결승진출은 가능했지만, 그만큼 드라마틱한 연출도 없었을 것이다. 이 골이 더 특별한 이유는, 골을 넣은 선수가 다른 선수도 아니고 900억짜리 먹튀 소리를 듣던 토레스였기 때문이기도 했다.[57] 체력이 많이 떨어진 연장전이니만큼 키커가 더 강하게 찰 수 있는 방향으로 올 거라 생각했고, 왼발잡이인 로벤의 입장에서는 오른쪽으로 찰 때 힘을 더 많이 실을 수 있으므로 오른쪽을 선택했다고 한다.[58] 특히 슈바인슈타이거는 카메라에 잡힌 모습만으로도 박살나고 있는 멘탈이 보일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그리고...[59] 바이에른 자체도 이 경기 전까지 챔피언스 리그에서 승부차기 2승 0패를 기록하고 있었다.[60] 체흐가 손끝으로 터치하기는 했다.[61] 펩 과르디올라를 원하고 있었던 로만으로서는 차마 우승 감독을 내칠 수는 없어서 마지못해 맺은 계약이었다. 햇수도 고작 1년.[62] 실제로 바이에른 뮌헨과의 슈퍼컵에서 비겼지만 리그에서 선덜랜드한테 홈인데도 졌다. 무리뉴가 홈에서 당한 유일한 1패....[63] 토레스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이 최악의 폼이었고 사무엘 에투는 이미 선수의 황혼기로 들어서며 돈 땡기려고 안지로 떠났다가 안지가 폭파되면서 감독과의 인연으로 온 케이스, 뎀장군께서는 고질적인 유리몸[64] 프리미어 리그 역대 최장기 1위 수성 기록이었다.[65] 단 디에고 코스타의 경우는 무리뉴 경질 2주 전에 훈련량을 늘리는 등 태업과는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비난의 여론에서 벗어난 상황.[66] 심지어 3백의 핵심인 양쪽 윙백과 (꾸준함 면에서)원톱조차 첼시보다 우위였다. 결정적인 퀄리티 차이는 아자르와 캉테의 유무라고 봐야할 것이다.[67] 토트넘과 맨유가 그 약점을 잘 캐치해서 후반기에 첼시를 무력화시켰다.[68] 모제스가 잘해주고는 있지만 로만의 욕심에 맞는 퀄리티로 팀을 끌어올리려면 모제스는 홈그로운의 장점까지 가진 우수한 로테이션 자원 정도로 남아있어야한다. 마르코스 알론소도 마찬가지[69] 모든 선수의 영입이 온전한 에메날로의 작품인 것은 아니나 방향성, 스카우터들이 데리고 온 선수들에 대한 결정은 에메날로의 의사가 어느정도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70] 첼시 유스 출신은 아니다[71] 포워드진은 모라타의 병크 및 개인신변문제, 부상을 통한 공백, 백업 퀄리티가 안되는 바추아이[103]와 완전히 맛이 간 듯한 페드로, 중원은 부상을 반복하는 드링크워터와 기복이 심각한 바카요코의 중원자원으로 인해 캉테에 대한 의존도가 심각한 수준이며 수비진은 다비드 루이스가 부상으로 빠졌었으나 1군 퀄리티에 뤼디거와 신예 암파두의 등장으로 그나마 사정이 좋으나 윙백 자원은 백업이 없는 왼쪽과 기복이 있는 두 우측이 문제이다. 총체적으로보자면 살때부터 부상 중이던 바카요코, 드링크워터, 세스크, 루이스, 케이힐의 징계, 타이트한 일정이 가져온 혼선이 로테이션 부재라는 1차적 결과로 나왔다.[72] 지난 FA컵 결승 때 로만은 경기를 참관하지도 못했다.[73] 구단측에서는 이번 주말에 월드컵을 치루지않은 선수들을 대상으로 1~2일 정도 조기소집을 시도하려한 바 있다.[74] 지난 시즌 팀이 좋지않을 때 단순 팬서비스일지도 모르지만 첼시를 떠날 것이냐는 팬의 질문에 'Never!'라고 답한 바 있고, 쿠르투아가 재계약을 한다면 자신도 하겠다, FA컵 결승 이후 뤼디거가 이번 경기처럼만 하면 자신은 계속 첼시에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신호를 내비친바 있으며, 지속적으로 나오는 기사의 내용으로 봤을 때 콘테 경질 후 새 감독선임, 팀의 비전이 보이는 클래스있는 선수의 영입 정도만 충족되면 재계약을 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75] 알바로 모라타는 아스날전 득점에 성공하긴 했으나 텐백과 마주하는 순간 풀백인 마르코스 알론소보다 위협적이지도 못하며, 다비드 루이스는 공격적인 빌드업과 롱패스는 좋은 옵션이지만 작년의 장기부상 이후 정신을 놓는 빈도 수가 약간 늘어났다. 아스필리쿠에타도 그렇고 아직까지는 3백의 수혜자들이라 수비적인 부분에선 적응도가 덜 올라온 것처럼 보인다.[76] 이러한 커리어의 대표적인 감독은 안드레 빌라스보아스조세 무리뉴가 있다. 그러나 이 둘은 포체티노와 다르게 첼시에서 먼저 감독직을 맡은 후에 토트넘에 부임했다.[77] 선수 겸 감독[78] 임시 감독[79] 임시 감독[80] 임시감독[81] 13경기를 대행했다.[82] 선수 겸 감독[83] 선수 겸 감독[84] 선수 겸 감독[85] 임시 감독[86] 히딩크가 오기전까지 한 경기 대행, 이전에 올해의 첼시선수상을 2회연속으로 받은적도 있던 선수[87] 임시감독[88] 임시감독이었으나 챔스 우승 후 정식감독이 됐다.[89] 임시감독[90] 다년간 첼시의 수석코치를 맡아왔으며 17-18시즌이 개막하기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수석코치로 떠났다. 역시 히딩크가 오기전까지 선더랜드전 한경기 대행[91] 임시감독[92] 감독 대행[93] 임시 감독[94] 레프트백[95] 풀백[96] 라이트백[97] 윙어[98] 풀백,미드필더[99] 풀백[100] 윙어[101] 레프트백[102] 윙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