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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전곡리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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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상원 검은모루동굴유적, 덕천 승리산동굴 유적[1], 만달리 유적, 연천 전곡리 유적[2], 공주 석장리 유적[3], 두루봉동굴 유적,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혼합
신석기시대서울 암사동 유적, 울산 반구천 일대 암각화 (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울주 천전리 암각화 ),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혼합
청동기시대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 ( 고창 죽림리 지석묘군, 화순 효산리와 대신리 지석묘군, 강화 부근리 지석묘 ), 대구 진천동 입석, 사월동지석묘군, 속초 조양동 유적, 대전 둔산 선사유적지혼합
초기 철기시대광주 신창동 유적
※ 문서가 있는 경우만 서술.
[ 각주 펼치기 · 접기 ]

[1] 문서에 나오듯 산 이름이 우상화 지명이라서 통일 후 개명 가능성이 높다.[2] 사적 지정, 학설을 뒤집은 유적[3] 남한 최초로 발견된 구석기 유적이며 한강 이남에도 구석기 문화가 있었음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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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제268호
연천 전곡리 유적
漣川 全谷里 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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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315288><colcolor=#fff> 소재지 <colbgcolor=#fff><colcolor=#222>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178-1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유물산포지유적산포지 / 육상유물산포지 / 선사유물
면적 799\,055 m²
지정연도 1979년 10월 2일
제작시기 석기시대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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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전곡리 선사유적지/fist_stone_axe.jpg

이 유적지를 발견한 전설적인 인물 그렉 보웬.

파일:attachment/전곡리 선사유적지/1331269493.jpg

이게 바로 주먹도끼이다.

1. 개요2. 우연한 발견3. 왜 중요한가4. 과연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5. 그렉 보웬에 관해6. 지방자치단체로의 부수효과7. 여담8. 사적 제268호9. 외부 링크

1. 개요

연천 전곡리 유적(漣川全谷里遺蹟)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에 있는 사적 제268호로, 대한민국에서 발견된 구석기 시대 유적지 중에서도 오래된 곳이다.

공식 홈페이지

2. 우연한 발견



1978년 그렉 보웬(Greg Bowen, 1950~2009)이라는 주한미군 공군 상등병[1]이 동두천 군부대의 가수이던 한국인 애인 이상미(1954년생, 현 아내)와 1월에 한탄강에서 데이트하던 중에 커피를 마시려고 코펠에 물을 끓이기 위해 주변에서 을 모았다. 그때 이상미가 주워 온 '이상한 돌'을 보고 뭔가를 알아차린 보웬은 그 돌을 챙겨와 프랑스고고학 권위자에게 편지를 보냈다. 프랑스 교수의 소개를 통해 김원용 서울대 고고인류학과[2] 교수에게 유물을 보내 조사를 요청했는데 그 돌이 약 30만 년 전 것이라고 추정된 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전곡리 주먹도끼'로 밝혀진 것이다. 관련 글 이것으로 서울대학교박물관은 전곡리 일대에서 유물 4500여 점을 획득하였다.

우연히 나간 데이트 장소가 구석기 유적지였다는 것과 데이트를 하던 중 여자친구가 수많은 돌 중에서 주먹도끼를 주워왔는데 때마침 같이 있던 남자친구가 고고학 전공자였다는 조건이 모두 맞아떨어진 점에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3. 왜 중요한가

파일:attachment/axe_map.jpg

이 발견은 당시 고고학 학계를 완전히 뒤엎은 대사건이었다. 이전까지 동아시아에서는 아슐리안형 뗀석기가[3] 발견되지 않아 모비우스(Movius) 등으로 대표되는 학자들이 '구석기 문화 이원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모비우스 라인'이라는 가상의 선으로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는 지역과 발견되지 않는 지역을 나누어 고인류의 문화권을 크게 둘로 나눈 가설적 이론이었다. 한동안 인도 동부에서부터 동아시아 극동 지역까지 아슐리안 석기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고인류 중 일부가 아슐리안 석기가 개발되기 전에 동아시아로 진출했고 개발된 후에 인류가 유럽으로 들어갔다고 추정했다.[4]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동관진 유적이 최초로 확인된 한반도의 구석기 유적이다. 일본 제국은 조선에는 구석기 시대가 없다는 논리로 일본 학자가 발굴했음에도 동관진 유적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이때는 일본 유적도 덴노제 이전이면 무시당하던 시기였다.[5] 사실 한반도에는 중기 구석기의 함북 웅기 굴포리(1960년), 후기 구석기의 공주 석장리(1964년), 전기 구석기 유적인 평남 상원 검은모루 동굴(1966년)등 곳곳에 전곡리로부터 10여 년 전에 발견된 60, 70년대 구석기 유적이 이미 널려 있었다.

그런데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아슐리안식 석기가 발견됨으로써 이전까지 정설로 인정받던 모비우스 학설이 한순간에 뒤집어져 버렸다. 이 일은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 버클리 대학의 아프리카 구석기 권위자인 데즈먼드 클라크 같은 세계적인 학자들까지 한국에 와서 석기들을 감정하고 진품임을 인정했다.[6]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아슐리안형 석기보다 이전의 원시적인 석기를 올도완(Oldowan) 석기라고 부르는데 아프리카에서 260만 년 전부터 발견된다. 그런데 아프리카로부터 호모 에렉투스가 약 190만 년 전쯤 아프리카를 나와서 아시아 쪽으로 진출했는데 이때 조악한 올도완 석기기술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160만 년 전쯤 아프리카에 남아 있던 고인류가 보다 발전된 방식의 석기를 만드는데 이를 아슐리안형 석기라고 부른다. 따라서 중국 및 인도네시아의 오래된 호모 에렉투스 유적에서는 당연히 올도완 석기만 발견된다. 전술한 모비우스 라인은 이런 증거를 잘 설명하는 이론이라 오랫동안 고인류학자들은 정설로 받아들였다. 아슐리안 석기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1978년 전곡리에서 아슐리안 석기와 상당히 닮은 주먹도끼가 발견되어서 학계에서 논란이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연이어 중국과 유럽에서도 아슐리안형 석기가 발견되면서 모비우스 학설은 파기되었다.

4. 과연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그런데 30만 년 전이라는 수치는 전혀 확실한 연대로 보기 힘들다. 사실 전곡리 유적은 한양대 배기동 교수와 서울대 이선복 교수의 연대관이 나눠져 30만 년인지 10만 년도 안 되는지 논쟁이 많았고 확실한 연대측정 자료를 얻을 수 있는 게 없었다.[7] 그나마 2009년 연천 전곡리 중2-5호 도로 공사 구제발굴현장에서 채취한 샘플로 OSL연대측정 결과는 12~6만 년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2010년 이선복 교수는 전곡리 선사유적지 토층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용암이 삼킨 나무>의 탄화목의 시료를 채취해서 미국, 뉴질랜드 등등의 AMS연대측정 기관에 의뢰하여 맡긴 결과 4만 년이라는 지질-지형학 입장에서도 상당히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즉, 중기구석기 유적이 아닐 수도 있다. 사실 구석기 연대측정의 경우 한국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도 제대로 신뢰할 만한 값을 얻기 매우 힘들다. 일단 시료의 제한과 더불어 재퇴적 등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아 신뢰할 만한 연대를 추정할 만한 유적은 극히 일부다.

그럼 어째서 이처럼 연대차이가 커졌을까? 이는 현무암 기반암과 AT화산재 사이의 구석기 문화층이 지질학적으로 빠른 시간에 쌓인 것인지 아니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쌓여서 형성된 것인지 확신을 못하기 때문이다.

즉, 현무암 기반암은 칼륨/아르곤(K/Ar) 연대 측정법으로 측정해서 어느 정도 연대가 나왔고 문화층 상부에서 발견된 AT(아이라-탄자와) 화산재 연대를 통해 구석기 문화층의 상한과 하한은 결정되었으며 뢰스, 즉 풍성층 연대 등도 보조적인 증거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간적 사이에 지질 형성이 얼마나 걸렸냐는 점이다. 1990년대 들어서 이선복 교수는 용암댐이 형성되면서 급격해 퇴적되어 현재의 지층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즉, 가장 큰 문제는 이 용암댐이라는 것이 실제로 어떤 작용을 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단순히 구석기 고고학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가장 특이한 지질형성 과정을 보여주는 추가령 구조곡의 지질학적 문제도 얽혀 있기 때문에 쉽게 결론나기 힘들다.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호모 에렉투스가 약 2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진화한 후에 아시아와 유럽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 현재의 학설이다. 다만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직계 선조는 아프리카에서 약 30만 년 전에 진화된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이다. 대략 7만 년 ~ 6만 년 전 무렵 어떤 계기로 현생인류 중 일부가 아프리카를 떠나 중동지역을 거쳐 유라시아 전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그들 중 일부가 대략 4만 년 전쯤에 한반도에 도착했다고 추측한다.

다만 전곡리 유적은 아슐리안형으로 보이는 석기만 발굴되었고 여기서 생활했을 고인류의 화석은 확인되지 않았다. 석기만으로 정확한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에는 한계가 있고 현생인류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돌의 양면을 깨서 쓴 석기가 있으므로 유적의 시대를 정확히 단정짓기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최근에 발간된 유용욱 교수의 임진-한탄강 유역 구석기의 종합적 연구에서는 더 이상 30만년전설은 학술적 가치를 가질수 없는 대한민국 학계의 공상적인 해프닝의 결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하늘의 '신성(新星)'과 땅속 '주먹도끼'의 닮은점은? 또한 한국고고학계에서 2024년에 새롭게 발간한 '한국 고고학 이해'에서도 30만년전설은 공식적으로 완전 파기되었다.

5. 그렉 보웬에 관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그렉 보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지방자치단체로의 부수효과

[8]율무, [9] 같은 작물, 그리고 군대재인 폭포 빼고는 볼 것도 없던 동네 연천군은 구석기를 컨셉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그 일환으로 수많은 공공시설에 원시인 캐릭터와 리얼한 원시인 모형을 박아넣게 되었다. 당장 연천군 마스코트구석기인이고 청산면의 초성리에서 전곡읍으로 진입하는 3번 국도 구간에 장식을 해 놓았다.[10] 행사라고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연천군이지만 연천 전곡리 구석기축제는 지자체의 지원 속에 큰 규모를 자랑하며 연천 군민이라면 동네에서 연예인을 볼 수 있는 정말 드문 기회이다.

시행 초기만 해도 허접한 수준이라 공무원들이 원시인 코스프레하고 불피우던 수준이었는데 지금은 어엿하게 알바를 고용하고 있다. 일 년 중 유일하게 연천에 사람이 붐비는 시기라고 봐도 좋다. 방문객이 많을 때는 한 해에만 95만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그리고 2011년 4월 25일 이 유적지에 전곡선사박물관이 개관했다.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화석인골모형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며 연천에 간다면 한탄강 위에 지렁이(…)같이 생긴 은빛 구조물이 보일 텐데 그것이 바로 이 박물관이다. 개관 초기에는 밤에는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걸 볼 수 있었는데 2015년 기준으론 밝히지 않는 듯하. 내부 컨셉은 동굴인데 프랑스의 유명한 디자이너 니콜라스 데마르지에르가 설계했다고 한다. 근처 학교 학생들이 주말마다 청소년 문화해설사로도 활동한다고 하니 여기 들르는 일이 있다면 꼭 한번 가보자. 노란 조끼를 입은 안내인이 바로 이들이다.

참고로 전곡선사박물관은 2017년 9월부터 무료 개장이다.

게다가 홍보효과를 높이기 위해 연천군 진입도로에 설치된 대전차방호벽에다 선사시대 원시인, 매머드 입상 따위를 올려서 장식물로 위장(?)했다.# 이 방호벽은 미 육군 전차 시뮬레이터 CCTT가 맵을 업그레이드하면서 그대로 고증되었다(....). # 링크의 미 육군 트위터는 아예 대놓고 "님들이 여기 와봤다면 이게 어딘지 알 수 있을 걸?"이라고 유머스럽게 표현했다. 실제로 연천에서 소요산역으로 가려면 대부분 그 도로를 지나가기 때문에 연천에서 군생활을 한 사람들은 한 번씩은 다 보게 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가면 관람 시작부분에 전곡리에서 출토된 뗀석기가 처음으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만큼 전곡리 유적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사기꾼 후지무라 신이치가 유물을 조작한 계기가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는데 다른 나라도 아니고 하필이면 한국에서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일본 학계에서는 "한국에서도 수십만 년 전 구석기 유적지가 있는데 당연히 일본에서도 없을 리가 없다." 고 열폭하는 바람에 후지무라가 조작하기 쉬워지는 환경이 조성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태평양 전쟁 이전의 일본은 천황보다 오래된 역사가 있을 수 없다고 후기 구석기 이전의 유물이나 유적을 발견해도 천황제와 충돌한다는 이유로 깡그리 무시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연천 전곡리 유적은 한국인이 조작한 것도 전혀 아닌 데다 미군으로 근무하던 고고학자 그렉 보웬이 우연하게 유적지를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게다가 나중에 세계적인 고고학자들이 전곡리를 직접 찾아와서 검증하고 연구한 뒤 증명된 거라서 당연히 조작일 수 없다.

이 부분은 2022년 10월 23일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7. 여담

구석기 시대 유물 중 주먹도끼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출토된 곳이 한반도라는 낭설도 있는데 주먹도끼 같은 양면가공석기는 한반도 말고도 남중국의 백색 유적에서도 상당히 많이 발견되었고 몽골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후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주먹도끼와 같은 양면가공석기가 발견되면서 모비우스 가설의 반대 근거로 자주 거론되게 되었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원장실 앞 로비에는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 모형이 1점 방치전시되어 있는데 연천군청에서 기증한 것이다.[11]

여기서 나온 주먹도끼를 형상화한 전곡역 건물이 근처에 있는데 동두천 버스 61로 금방 왕래가 가능하다.

8. 사적 제268호

한탄강변에 있는 구석기시대 유적이다. 한탄강·임진강 줄기를 따라 구석기시대 유적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전곡리 유적이 규모가 가장 크고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1978년 처음 발견되어 1979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차례 발굴조사를 하였다. 그 결과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홍날, 찌르개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를 발견하였다. 그 중 유럽과 아프리카 지방의 아슐리안 석기 형태를 갖춘 주먹도끼와 박편도끼가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전곡리 선사 유적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밝혀 줄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한국과 동북아시아 지역의 구석기 문화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전곡리선사유적지 → 연천 전곡리 유적)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9. 외부 링크



[1] 보직은 기상관측.[2] 현 고고미술사학과[3] 흔히 '양면핵석기'라 부름.[4] 물론 이 석기에 맞는 재료의 부족이나 유행 때문에 바뀌었을 수도 있다.[5] 조몬인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야요이인과 관련 없는 미개인들로 여겨졌다. 도래인들은 철기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일본 석기 유적과 관련이 없다.[6] 다만 모비우스 라인 자체는 아직 완벽하게 깨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의 주먹도끼는 우선 시기가 한참 늦고, 전형적 아슐리안이라고 보기에는 두께도 두껍고, 재타격이 거의 이뤄지지 않았으며 가공도가 너무 낮아서 진정한 아슐리안으로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는 플린트와 달리 매우 단단한 규암과 석영, 석영맥암을 석재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에 배기동 교수는 전곡리안으로, 유용욱 교수는 비아슐리안으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동아시아계 주먹도끼를 아슐리안으로 보는 시각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비우스 라인 자체를 인정할 수는 없는데 모비우스 라인 서쪽 지역도 전체를 아슐리안으로 획일적으로 동일시하기는 모호하기 때문이다.[7] 참고로 두 사람은 삼불 김원용 선생의 제자로 배기동 교수가 한참 선배지만 연대관 문제로 가장 큰 라이벌이기도 하다. 지금은 두 사람 모두 정년퇴직하였고 전곡리 연구는 이선복 교수의 제자인 충남대학교의 유용욱 교수가 이끌고 있다.[8] 접경지역인 백학면에 펼쳐진 평야에서 생산하는 백학쌀이 유명하다.[9] 비무장지대 근처의 장단콩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이 콩으로 벌어먹는 곳은 옆동네 파주시로, 콩 축제도 파주가 챙겨갔다. 파주에서 열리는 주제에 정작 쓰는 건 죄다 연천산 콩이다![10] 이 구간은 경원선 철도와 병주하는 구간이라 열차 안에서도 보이며 2023년 12월에 소요산-연천 구간의 전철화로 새단장한 전곡역은 이 주먹도끼를 형상화하여 건설되었다.[11] 건설연은 연천읍내 포병 사격장이 옮겨가고 남은 부지에 실대형 대규모 연구시설(SOC성능연구센터)을 지어놓았기 때문에 연천군과 교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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