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7 23:59:49

양박쌍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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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박쌍용
PP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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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박지성
(2000~2011)
10. 박주영
(2005~2014)
17. 이청용
(2008~2019)
16. 기성용
(200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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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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兩朴雙龍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공격진과 중원을 이루었던 지성, 주영, 이청, 기성 선수를 묶어 부르는 말로, 해당 선수들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전력을 갖추었던 팀 중 하나로 평가받는 2010년 월드컵 대표팀의 핵심 멤버들이었다.[1] 한국판 판타스틱4라고 할 수 있으며, 일본에서는 PPKL(park-park-ki-lee) 라인이라 부르기도 했다.

참고로 양박쌍용 전후로는 황선홍+홍명보의 H-H 라인, 그리고 좀 변주로 현재 대표팀의 황희찬+황의조+황인범의 H-H-H 라인[2], 현역 국대의 수비를 담당하고 있는 김태환/김문환+김민재+김영권+김진수+김승규이왜진이 절로 나오는 5 KIM 수비 라인이 있다.## 그 외에도 좌영표 우종국[3], 철의 3백[4] 등이 있었다.

2. 조합

  • 최전방 원톱 공격수 박주영
  • 스피드와 드리블 능력을 갖춘 윙어 이청용
  • 엄청난 활동량의 미드필더 박지성
  •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기성용

기본적으로 이 4명이 다 나오기만 해도 조합이 완성된다. 네 선수 모두 아시아권에서는 크랙으로 불리기에 손색없는 필살기를 다 하나씩 가지고 있었고 서로의 포지션 및 주 활동영역도 거의 겹치지 않기 때문에 재능 낭비도 거의 없이 공격을 책임질 수 있는 매우 생산적인 조합.[5]

3. 상세

2009년부터 부각되기 시작한 개념으로, 실제로 2010년 당시 위 4인은 국가대표팀에서 엄청난 전력 비중을 갖고 있는 F4였다. 대표팀의 전력은 이들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천지차이로 달라졌다. 특히 박지성과 이청용은 원소속팀이면 몰라도 아시아 예선에 나오는 팀들 상대로는 드리블과 테크닉, 개인전술로 언제든 아시아권 국대팀의 수비를 박살낼 수 있는 크랙이었고 박주영 역시 전성기 기량으로 아시아 예선에서는 못 하는 게 없는 만능 원톱이었다. 그 뒤에서 기성용이 빌드업을 맡아 롱패스를 쏴주면 박, 용이 패스를 받아 수비를 헤집어주고, 그 공간에 침투한 주멘이 해결해주는 완성된 조합인 것.

예를 들어 2010년 2월 10일, 국내파 중심의 대표팀은 동아시안컵에서 중국을 상대로 0:3으로 대패하여 공한증을 옛말로 만드는 굴욕을 당했지만, 고작 한달이 지난 3월 3일 부상을 입은 박주영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해외파가 집결한 대표팀은 평가전에서 코트디부아르를 2:0으로 완파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비록 코트디부아르가 감독도 없는 1.5군이었다지만, 그래도 아프리카 최고 수준의 축구 강국이니 놀라운 결과.[6]

3.1.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양박쌍용으로 대표되는 공격진은 타이틀부터 월드컵 16강에 부족함이 없었다. 각 선수들의 소속 클럽만 해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AS 모나코, 볼턴 원더러스, 셀틱 FC(소속팀은 해당 단어가 자주 쓰이던 2010년 기준)로 줄줄이 유럽의 명문 구단들. 이만한 공격력을 갖춘 대표팀은 의외로 많지 않다. 게다가 전술 이해도가 높고 많이 뛰는 헌신적인 윙어, 몸싸움과 기술을 겸비한 스트라이커, 영리하고 빠른 테크니션, 넓은 시야를 가진 롱패서 등 4명의 개성이 확실히 차별화되면서도 조화된다는 점도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본선에서도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팀의 16강을 이끌었다. 16강 1차전 그리스전에서는 기성용의 크로스를 이정수가 집어넣었고, 후반 초반 박지성의 쐐기골을 더해 2:0 완승을 거두며 한국 축구 사상 최초로 원정 월드컵 클린 시트 승리라는 기록을 견인했다. 2차전 아르헨티나전에서는 1:4로 대패하긴 했으나 유일한 골을 이청용이 득점했다.

명운이 걸린 3차전 나이지리아전에서는 0:1로 지던 상황에서 기성용의 크로스를 이정수가 동점골로 연결했고, 후반 초반 박주영의 환상적인 프리킥 역전골에 힘입어 2:2 무승부를 거두며 사상 첫 원정 16강행에 성공했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는 전반 정성룡의 실수로 선제골을 먹힌 후 이청용이 동점골을 넣었으나 루이스 수아레스에게 역전골을 먹혔고, 이동국이 결정적인 기회에서 아쉬운 물회오리슛으로 득점에 실패하며 아쉽게 패퇴했다.

이 대회에서 박지성, 박주영 각 1골, 이청용은 2골을 넣었고 기성용은 골은 넣지 못했으나 어시스트 2개를 기록했다. 한국의 총 득점인 6점에 이들이 모두 관여한 것.[7]

이 조합은 당시 국가대표 감독인 허정무가 선수빨이라는 억울한 비난을 받는 근거로 작용했지만, 시간이 지나고나서 허정무의 선수 활용 능력이 날카로웠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재평가되고 있다.

3.2.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양박쌍용의 대표격이었던 박지성은 무릎 부상 탓에 국가대표 경력을 오래 이어가기 힘들었고, 결국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를 끝으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이들 모두 2010-11시즌 전반기에 클럽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였고, 이들이 주축이 된 만큼 대한민국은 51년 만의 3번째 아시안컵 우승을 기대했다.
그러나 대회 직전 박주영이 소속팀에서 결승골을 놓고 셀러브레이션을 하다가 무릎을 다쳐(...) 대표팀 엔트리에서 탈락, 양박쌍용은 정상 가동되지 못한다. 결국 박지성과 쌍용을 축으로, 젊은 피 구자철지동원, 윤빛가람 등이 대표팀의 공격진을 이끄는 중책을 맡게 됐다. K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유병수도 기대를 받았다.

박주영이 자리를 비운 가운데, 조광래 체제로 재편된 대표팀도 생각보다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바레인과의 첫 경기에서 2:1로 진땀승을 거뒀고, 호주를 상대로는 1:1 무승부를 챙겼다. 인도를 상대로도 6분 만에 골을 넣고 6분 뒤에 PK로 동점골을 내주는 등, 4:1 대승에도 찜찜함을 남겼다.

그래도 지동원구자철이 대표팀 전술에 적응하며 경기력이 조금씩 올라왔고, 이란과의 8강전에서는 연장전에서 윤빛가람의 중거리 슛 한방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준결승에 올랐다. 준결승에서 펼쳐진 운명의 한일전에서는 기성용이 PK로 선제골을 넣은 후 동점골을 내주고, 연장에서 PK 세컨볼을 먹혀 위기에 몰렸으나 연장 후반 추가시간에 황재원의 극장골로 승부차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승부차기에서 대한민국 축구팬들을 기다리던 것은 삼연뻥...[8]

결국 우승의 꿈을 접은 대한민국은 3-4위전에서 우즈벡을 상대로 3골을 먼저 넣고 알렉산데르 게인리흐에게 2골을 먹고 쫓기며 진땀승을 거둬 간신히 3위로 대회를 마쳤다. 박지성과 이영표의 국대 은퇴 무대에 우승을 선물하겠다는 목표도 멀리 날아갔다. 그리고 이는 이후 조광래호의 난맥상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4. 해체와 이후

2010년대 슈퍼스타 정권교체..'양박 쌍용' 지고 손흥민 뜨고

그렇게 아시안컵을 끝으로 박지성이 은퇴하며 양박쌍용은 자연스레 해체됐다.

비록 국대에서 조합이 해체됐다 뿐이지, 선수들의 개별적인 커리어는 여전히 좋았다. 기성용은 셀틱으로 이적한 후 적응기를 거치다가 주축 선수들의 부상 이탈로 인하여 주전으로 떠올랐고, 박지성도 부상없이 활약하며 자신의 커리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이청용은 소포모어 징크스 따윈 없다는 듯이 리그에서만 2골 5도움으로 볼튼의 확실한 에이스로 성장했다. 마지막으로 박주영은 이 시즌 33경기 12골을 기록하며, 차범근, 설기현에 이어 유럽리그에서 3번째로 10골이상 넣은 한국 선수가 되었다.

그러나 2010-11시즌 이후 대다수 선수들이 기량 하락이나 클럽 커리어가 꼬여 이전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양박쌍용이라는 단어도 조금씩 사장되기 시작했다. 양박이 먼저 빠져나갔고, 이청용은 큰 부상 탓에 기량이 일찍 쇠했다. 그나마 기성용이 기량면에서는 좋은 모습을 이어갔으나 여러 구설수에 시달렸고, 이는 끝내 한국 축구의 최악의 암흑기로 연결됐다.

비록 전성기가 길게 이어지진 못했지만, 많은 축구팬들에게 양박쌍용은 히딩크호에 이은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제2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을 정도로 당시 이들의 조합이 대표팀에 있어서 얼마나 강력하고 든든한 무기였는지 알려주는 관용어가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장 양박쌍용 이후 대한민국 대표팀이 월드컵 16강에 올라가기까지는 손김이황이 모두 주전에 오른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까지 12년이 더 걸렸다. 물론 월드컵 16강에 꾸준히 진출하는 팀이 전세계적으로도 얼마 없지만 그만큼 양박쌍용의 성과와 실력의 비범함을 느낄 수 있다[9]

2024년 현재 양박쌍용 4명은 모두 K리그에서 활동 중이다. 가장 먼저 박주영이 2015년에 FC 서울로 돌아왔고, 2020년 초에는 이청용울산 현대로 이적, 2020년 7월에는 기성용까지 FC 서울로 돌아왔다. 유럽에서 현역 생활을 마쳤던 박지성도 2021년 1월 전북 현대 모터스의 행정가로 부임했다.

양박쌍용의 전성기 이후 상세한 행보는 아래와 같다.

4.1. 박지성

국대 은퇴 후 클럽 커리어 역시 황혼기로 접어들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서 출전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고, 이후 QPR이라는 흑역사를 거쳐 아인트호벤에서 자신의 선수 여정을 완전히 마무리지었다. 그래도 4명 중 유일하게 레전드로서 커리어를 마무리한 인물. 딱 30살에 은퇴했으니 짧고 굵은 그의 대표팀선수 커리어.

4.2. 박주영

4명 중 가장 극적으로 몰락한 인물. 아스날 FC로 이적한 후 역대 최악의 먹튀가 되어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는다. 출장 기회를 거의 잡지 못해 경기력을 상실한 것이 주 원인[10]. 그나마 국가대표 생활의 경우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2012 런던 올림픽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며 이름값을 했지만, 이후론 경기력 하락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몰락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었다. 게다가 조별리그 1, 2차전에서 주전으로 나오기까지 했지만, 더 이상의 졸전은 없을 듯한 한심한 플레이를 보여주며 팀 몰락의 일등공신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명예 회복은 커녕 욕만 수십배 더 먹고 아예 한국 축구계의 공적으로까지 추락해버렸다.

홍명보가 나가고 울리 슈틸리케가 선임된 이후로는 2014년 11월의 두 번의 평가전에서 모두 부진하였고, 그와 함께 2015 AFC 아시안컵 호주에도 출전하고 못하였다. 2014년 11월의 두 번의 평가전이 사실상 마지막 국가대표 출전이라고 봐야 할 듯. 이후에도 인터넷 등에서는 거론되긴 하였지만, 정작 번번히 뽑히지 않았다. 유리몸에다 실력 또한 많이 떨어진게 부정하기 함든 이유인 듯. 특히 고질적인 무릎 문제 때문에 클럽에서 출장도 감독이 생각을 해야 하는 레벨이다. 신태용파울루 벤투를 거친 이후에도 결과는 마찬가지.

게다가 2018년 기준으로 33살의 노장이라서 그런지 부상도 자주 달고 있다. 2017년, 한국이 중국과 카타르에게 일격을 당하며 월드컵에 탈락할 수 있는 위기에 몰릴 때도 언급조차 미미한 걸 보면 사실상 국가대표에서도 도태됐다.

2019년 기준으로 인터넷이나 축구 커뮤니티에 툭하면 언급됐었던 옛날과는 다르게 리그에서의 활약을 빼면 언급이 거의 없다. 그나마 손박대전에서 기사를 가지고 올 때 뜬끔없이 스플래쉬 데미지를 맞아 웃음을 주는 정도? 그래도 2016년, 매북을 상대로 정의구현을 해냈다.

그래도 2019년까지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보이는 것을 보면 끝발은 좀 간다고 볼 수 있다.

4.3. 이청용

이적 스캔들엔 휘말리지 않았으나, 2011년, 최악의 부상을 당하면서 선수 생활 자체에도 위기를 맞게 된다. 시즌아웃당해서 리그 막바지에 복귀를 했지만, 팀이 2부리그로 내려앉으면서 졸지에 같이 끌려들어가게 된다. 이후 세 시즌간 풋볼 리그 챔피언십에서 뛰게 되었고, 경기력은 부상 전에 비해 영 못하다는 게 중론.

국가대표에선 팀이 온갖 스캔들과 감독 교체로 내홍을 겪는 와중에도 붙박이 에이스로 활약하여 이름값을 했지만, 2014년 월드컵에선 알제리전/벨기에전 내내 눈이 썩는 경기력을 선보이며 남아있던 긍정적 여론을 잃어버렸고, 울리 슈틸리케 감독 부임 이후에도 가뜩이나 폼도 돌아오지 않는데, 동포지션에 새로 치고 올라오는 신예 선수들까지 늘어난지라 위기.

하지만 신태용호에서 발탁된 후 '매우 떨어지는 경기력을 보여주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그나마 정상적인 경기를 펼쳐 기성용과 함께 호평받고 있다'라는 이견도 있으나 여전히 클럽에서는 시합에 못 나오고 몇년 째 벤치 멤버 - 장기 시합 불출장 등으로 박주영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가 다가왔을 때 사실상 출장은 거의 힘들 듯 보였으나, 예상을 깨고 부상자들이 넘쳐나는 대표팀에 입성해서 온두라스전을 뛰었으나, 최종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다. 박에 박주영이 몰락했다면 용에는 이청용이 몰락한 듯 하지만, 월드컵 이후 2018-2019 시즌, 분데스리가2의 VfL 보훔으로 이적하면서 기량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19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 벤투호에는 당당히 대표팀 승선을 하면서 부활의 신호탄을 올리고 있었고 친구 기성용이 아시안컵 종료 이후 대표팀 은퇴를 선언해서 다시 본인에게 한 자리 생긴 듯 했다. 그러나 토너먼트에서 부진하면서 대표팀 8강 탈락의 원흉 중 하나가 되고 말았고 역시나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 후로는 대표팀에 뽑히지 못하고 있다. 다만, 2020년부터 울산 현대로 이적하여 클럽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4.4. 기성용

선수 생활 커리어 자체엔 별 문제가 없었으나, SNS 등의 외부에서 대형 스캔들에 휘말렸다. 특히 최강희/미카엘 라우드럽 감독과 반목하면서 부적절한 처신을 한 것이 발각되어 실력 이전에 인성 쪽에서 실망스럽다는 평. 그 때문에 이천수 이후 최악의 스캔들 메이커로 낙인 찍혔다. 다행인 것은 이후 결혼을 하면서 내조를 받아 안정감이 생겼는지 이런 한심한 모습이 줄어들고 경기에 집중하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거다. 결정적으로 기성용은 구설수가 많아도 이천수처럼 아예 팬을 폭행하는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기성용은 팬들에게는 매우 친절한 편이다.

국가대표 내에선 스캔들을 떠나 언터쳐블의 에이스. 그나마 양박쌍용 중 마지막까지 체면치레를 하고 있는 유일한 선수다. 이는 2014 월드컵에서도 다르지 않아, 외신 기준으로 국가대표 선수 중 몇 안 되는 고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브라질 월드컵 이후에는 개과천선을 했는지 팀의 주장이자 코어로 활약하며 2015년 AFC 아시안컵에서 팀의 코어로 활약하며 27년만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고, 러시아 월드컵에도 대표팀의 주장으로 출장했다. 2019년 AFC 아시안컵에서는 1차전에서 부상을 당하고는 대회에서 하차했고, 대표팀도 8강에서 탈락하면서 아쉽게 국가대표 경력을 마무리 하게 되었다.


[1] 2010년 대표팀에 비견되는 전력을 갖춘 팀들을 꼽자면 차범근, 최순호, 허정무, 변병주, 김주성, 조광래, 박경훈, 박창선, 정용환 등 레전드들이 대거 출전한 1986년 대표팀과 4강 신화를 일군 2002년 대표팀이 꼽힌다. 이강인, 김민재, 손흥민, 황희찬 등이 참가했던 2022년 월드컵의 전력이 양박쌍용 이상으로 평가된다.[2] 아직까지는 이렇다할 임팩트가 없긴 하나 물론 손흥민의 결장을 감안해 4-3-1-2 또는 3-4-1-2 로 황인범을 2선 공미에 두고 황의조황희찬 투톱을 쓰는 방법도 있긴 하다. 참고로 이 셋은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실력없는 선수라고 오명을 받았지만 추후 본인의 진가를 발휘해 대한민국의 핵심 선수가 됐다는 공통점이다. 일단 황의조는 원래부터 K리그 팬이나 일본 J리그 내에서도 실력있는 스트라이커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일부 FC 코리아들이 그의 실력을 폄하하면서 물타기로 인해 부정 여론이 많아졌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 때 손흥민을 능가하는 대활약을 했으며 프랑스 리그앙 이적 후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이자 에이스가 되며 본인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황인범 또한 국대에서의 부진으로 비난받았으나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 이적 이후 팀의 핵심 중원 미드필더가 되었으며 국대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황희찬은 아예 데뷔한 후로 계속 욕만 먹어왔으나 유럽 무대에서의 대활약으로 자연스레 차손박의 유력한 후계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있다.[3] 이영표+송종국[4] 최진철+홍명보+김태영[5] 여기에 기성용을 보좌해준 베테랑 김정우와 박주영과 투톱에서 뛰어난 호흡을 보여준 이근호 등 양박쌍용 외에도 다른 K리거들 역시 좋은 기량을 보여 대표팀에 무게감을 더해주었다.[6] 더군다나 이 당시 코트디부아르에는 그 유명한 드록바가 있었고 이 날 경기에도 선발로 출전했다. 드록바가 뛰고 있었음에도 2:0으로 승리를 거둔 것이니 어찌 보면 대단했다고 할 수 있다.[7] 여담으로 조별리그 1차전 그리스전에서 정성룡이 안정적인 활약으로 클린시트를 달성하며 일부에서는 양박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지만, 아르헨티나전 4실점 이후 귀신같이 사그라들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아르헨티나전은 박살난 수비진을 정성룡이 그나마 수습해 4실점에 그친 것이긴 하다. 진짜 아쉬웠던 경기는 우루과이전.[8] 참고로 삼연뻥 당시 박지성+쌍용에서는 그 누구도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 5번까지 갔다면 기성용이 5번 키커로 나섰겠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9] 게다가 남아공 월드컵 16강 우루과이 전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당시 4강까지 올라간 강호인 우루과이와 대등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운과 실력이 조금 더 있었으면 8강이나 그 이상의 성과도 얻었을 가능성이 있어 더 아쉬운 부분.[10] 당시 아스널에서는 유리몸 기질이 있는 로빈 반 페르시의 서브 멤버로 박주영을 영입했으나 하필 박주영이 아스널에 영입된 후로는 갑자기 반 페르시가 철강왕이 되면서(..) 박주영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