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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토박이

서울 토박이에서 넘어옴
1. 개요2. 비율3. 서울토박이가 적은 이유4. 해당 인물5. 관련 문서

1. 개요

보통 토박이의 정의는 한 지역에서 3대째 이상 살고 있는 사람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본적(本籍)이 할아버지[1]고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 하지만 서울특별시에서는 토박이의 의미가 계속해서 변화해 왔다.
  1. 1993년, 서울시는 ‘정도 600년 사업’을 추진하면서 ‘서울 토박이’의 선정 기준을 “조상이 1910년 이전의 한성부에 정착한 이후, 현 서울시 행정구역 내에 계속 거주해오고 있는 시민”으로 정한 바 있다. 즉, 사대문 안사대문 근처 10리 내에 거주해 오던 사람의 후손으로서 현재 서울시에 거주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이를 기준으로 서울특별시가 내놓은 통계에서 당시 서울시민 1100만 명 중에서 오직 3565가구, 즉 1만 3582명이 순수 서울토박이로, 수치로 나타내면 0.12%에 불과했다.[3]
2. 이후 2004년 서울특별시 산하기관인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실시한 ‘2004년 서울 서베이’에서 내놓은 토박이의 기준은 조부모 때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자였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토박이의 정의인 3대째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며 이전에 비해 기준이 많이 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 시내 2만139가구 중 조부모 때부터 서울에서 살아온 ‘서울 토박이’는 4.9%, 즉 100명 중 5명 꼴인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조사 역시 2023년 기준으로 19년이나 된 조사이기에 현재로서 정확한 비율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본인이 서울 출신이라도 부모나 조부모가 타 지역 출신이면 서울 토박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최소한 자신의 조부모 세대부터, 즉 3대 이상 서울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진짜 서울 토박이이며 6대 이상부터 서울에서 살아왔으며 선산이 서울 근교지역인 인천, 양주, 남양주, 용인, 고양, 경기도 광주, 하남, 성남, 시흥[4]에 있는 경우면 그 중에서도 진정한 토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100명 중 1명을 제외하면 서울 출신이더라도 그 말투에 지방 사투리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5] 최근에는 사투리의 사용 자체가 줄어드는 편이지만 수도권 사람이던 타 지역 사람이던 대부분 억양이 존재한다.

2. 비율

본래 조부의 호적이 사대문 내 혹은 성저십리에 소재한 사람을 서울토박이의 기준으로 보지만 호적제도가 폐지된 현재 시점에서 정확하게 서울토박이의 비율을 알 수 없다. 호적이 대체되어 본적의 기준이 되는 등록기준지는 본인이 원하는 위치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로써는 추정치로밖에 예상할 수 없는데 여러 조사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강북강남보다 많다.[6]

다음 수치는 2003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시민을 대상으로 현재의 서울특별시 구역에 조부 세대 이전 혹은 조부 때부터 살아왔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시민들을 비율로 산정하여 나타낸 내용이다. 전체 평균은 6.5%이며 아래에 나열된 자치구는 본적이 아닌 현재 거주하는 지역이다.

도심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종로구가 11%로 가장 많고 용산구는 9.2%, 중구는 6.8%를 차지하고 있다.

서북권의 서대문구는 9.0%, 은평구는 8.5%, 마포구는 7.9%를 차지하고 있다.

동북권의 도봉구는 7.2%, 강북구는 6.5%, 노원구는 6.3%, 성북구는 5.3%를 차지하고 있다.

동부권의 광진구는 6.7%, 성동구는 5.5%, 동대문구는 5.3%, 중랑구는 3.8%를 차지하고 있다.

동남권에서는 강남구가 9.2%로 가장 많고 서초구는 8.6%, 송파구는 7.4%, 강동구는 5.8%를 차지하고 있다.[7]

서남1권은 양천구가 6.8%, 강서구는 6.6%, 구로구는 3.7%를 차지하고 있다.

서남2권은 동작구는 5.7%, 금천구는 4.2%, 영등포구는 4.2%, 관악구는 4.0%를 차지하고 있다.

20년이 지난 지금 서울토박이의 비율은 이보다 조금 더 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부 세대의 출생 연도는 늦춰지고 있고, 그만큼 서울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였다는 것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8] 서울토박이의 비율은 앞으로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3. 서울토박이가 적은 이유

1983년에 발간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조선 시대 서울의 특수한 인구구성 및 역학 관계 때문에 서울토박이가 적었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

한양은 애초부터 조선이 건국하면서 만들어진 계획도시이기 때문에 조선 건국 이전 고려시대부터 그 곳에 살던 토박이들은 성저십리양주군으로 쫓겨났으며, 그 대신 전주 이씨 왕족 및 지방 출신의 출세한 양반들이 올라와서 사는 곳으로 변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항 이후 외국 상인, 지방 출신 상인들에 밀려 서울토박이 상인들은 쇠퇴하고 말았다. 양반들은 종로구 삼청동[9], 가회동[10]에 있는 북촌마을에, 중인들은 청운효자동[11], 사직동에, 농민들은 서대문구 신촌동, 마포구 도화동, 성북구 종암동에, 상인들은 마포구용산구에, 장의사들은 광희동에, 백정들은 혜화동에 모여 살았다고 전해진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서울토박이의 수모는 계속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부 외곽의 토막집 지역에 살던 빈민층 토박이들이 만주 등으로 강제 이주당하기도 하였으며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은 일제의 감시 속에서 불편하게 살아가야만 했다.

해방 이후, 특히 6.25 전쟁 때는 대구부산 등 남쪽에 있는 대도시로 피난을 가거나 인민군 등에게 강제노역과 굶주림으로 수난을 당하기도 했으며 국군이 서울을 수복했을 당시에는 상당수 시민들이 '인민군 부역자'로 오인받아 많은 수난을 겪었다. #[12]

실제로 전쟁 중 월북이나 학살자 수를 보면 절대적 수치는 아니지만 상대적 수치로 보았을 때 서울이 가장 많았다. 게다가 전쟁 고아의 대다수가 서울 출신이기도 하다.[13] 그렇기 때문에 1.4 후퇴 당시 부역자로 안 몰리려고 거의 대부분의 서울시민들은 서울을 떠났다.

경제 성장 이후로는 서울토박이의 상당수가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14] 한국에 남아 있는 토박이들은 성저십리 바깥의 강남, 영등포나 경기도의 과천, 분당 등지로 분산 이주하였다. 빈민층 토박이 중 일부는 지금의 성남시 구도심 지역으로 강제 이주당하거나 금천구 시흥동, 관악구 봉천동 등 서울 변두리로 밀려나기도 했다. 도봉구, 은평구에도 분산 이주한 토박이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특히 사대문 안성저십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경성부 토박이는 출산율이 절망적으로 낮았는데 서울에서도 타 지역 출신 이주민들의 출산율에 비해 1~2명 더 낮은 수치였다.[15][16]

대표적인 서울토박이를 들자면 마포 공덕동에서 3대째 살아온 노웅래 마포구 갑 대한민국 국회의원, 역시 마포에서 5대째 살아온 박홍섭마포구청장, 대대로 서울 종로 일대에 살아온 집안 출신인 김태영국방부장관 등이 있다.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조선시대까지 한국은 전통적인 농경사회였으며 일제강점기에도 근대적 도시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농업 비중이 높았다가 1960년대 이후 산업화로 급격히 도시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이촌향도로 인해 시골에서 대도시로 몰릴 수 밖에 없어 대도시 내 토박이의 비율이 적을 수 밖에 없다. 이로 인해 비단 서울 뿐 아니라 부산, 대구 등 다른 대도시들도 정도의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마찬가지로 3대 이상 토박이의 비중이 외국들에 비해서 낮은 편이다.[17]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서울은 최대 도시로서 전국 각 지역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많은 점도 영향이 크다.

3.1. 사대문 안 지역

좁은 의미에서 서울토박이를 잡을 때 사용되는 범주. 사실 이 범주는 매우 극소수라 정말 찾기 힘들다. 유명인들 중에서는 가수 서태지[18], 성우 장세준[19], 언론인 손석희[20], 유홍준문화재청장 정도가 이에 해당한다.

사대문안이 남경이었던 고려시대부터 조상이 살아왔다는 부류도 있다. 이들은 조선 건국과 함께 상당수가 쫓겨났기 때문에 조선 이후부터 산 경우보다 훨씬 드물다.

3.2. 사대문 안 + 성저십리 지역

정부나 서울시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서울토박이의 범주. 조선시대 한성부의 관할권이 미친 지역의 범위에 대해서는 성저십리 문서 참조. 1994년 서울 600주년 행사에 맞춰 정부가 마련한 서울토박이 기준은 성저십리가 포함된 옛 한성부 지역에서[21] 1910년 이전부터 대대로 살아왔고 현재 서울특별시 지역[22]에서 거주 중인 사람이다.

3.3. 현재의 서울특별시 지역

1936년[23], 1949년[24], 1963년[25], 1973년[26], 1995년[27] 서울시 행정구역 확장으로 서울특별시에 신규 편입된 지역[28]의 토박이들까지도 포괄하는 개념. 사실 이쪽은 진정한 서울토박이라고 잘 부르지는 않는다.[29]

다만, 서울로 편입된 지역의 토박이들은 고양토박이[30], 양주토박이[31], 경기도 광주시(廣州)토박이[32], 시흥/과천토박이[33], 김포(양천)토박이[34], 부천(부평)토박이[35]라는 정체성보다는 나름대로 서울토박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편이긴 하다.

예를 들어 봉천동 토박이는 시흥군 토박이라는 의식보다는 서울에 있는 봉천동의 토박이라는 의식이 강하다.[36]

4. 해당 인물

본인 출생지만 서울인 사람[37]은 기재 불가

5. 관련 문서


[1] 아버지가 처가데릴사위로 들어간 경우를 제외하면 여기서의 할아버지는 거의 무조건 (부계) 친할아버지를 의미한다.[2] 단, 서울 출신이 아닌 차남 이하의 아버지를 둔 젊은 층들은 본적지가 서울인 경우도 많다. 구 호적법 상 아버지가 장남이라면 할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할아버지의 호주 지위를 상속받는 탓에 지방에서 상경했더라도 본적지가 서울로 바뀌지 않지만 차남 이하는 결혼과 동시에 할아버지의 호적에서 법정분가되어 본적지가 신혼집 주소로 바뀌기 때문이다.[3] 당시에는 시민들의 자발적 신고로 확인한 것이라서 불확실하긴 하지만 일반적 예상보다는 훨씬 적었다고 한다.[4] 강북 지역에 해당하는 성저십리 지역은 금산이 걸려 있어 묘지 조성이 금지되어서 서울 근교 지역에 묘지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성저십리 접경 지역이었던 구파발이 한때 공동묘지 지역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여담으로 원래는 서울이 아니었으나 서울 편입으로 도시화된 지역의 묘지들은 이장되었다.[5] 100명 중 1명이라는 서울토박이들의 억양은 그렇다고 표준어냐 묻는다면 그 대답 역시 아니오이다. 이들의 억양에는 5~60년대 서울 사투리의 억양이 조금씩 묻어나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표준어를 서울 방언 기준으로 택하면서 김일성이 평양말이라는 정치적 선전을 하며 서울과의 연관성을 주장하면 반동 취급하여 서울말이 평양말과 비슷하다는 오해가 많으나 서울 말투는 과거 '네다', '라우', '덩거당' 거리던 평양 말투와도 다른 그냥 현재보다도 부드러운 말투였다. 평양도 실제로는 충청도 말투를 빠르게 말하듯이 어감이 구수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안성기, 이순재 같은 나이가 있고 경력이 있는 배우가 비슷한 말투를 쓴다.[6] 오리지널 서울인 성저십리단 한 곳의 예외를 빼면 모조리 강북 지역이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다.[7] 70년대 강남 개발 당시 강북에 살던 부유층과 고학력층들이 서초/강남으로 많이 옮겨 갔다. 당시 강남에서는 강북 출신(태어나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강북에서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나온 사람)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영남 출신이며 충청도 출신이 그 다음을 이었고 제주도, 강원도와 전라도 출신이 제일 적다는 말이 있었다.[8] 부모 세대부터 서울에 거주한 토박이의 비율은 전체 평균 33.6%이다.[9] 팔판동[10] 계동, 재동.[11] 누상동.[12] 참고로 본래 서울시민들은 남부 지방에 비해 보수적인 성향이 짙었는데 6.25 전쟁으로 인해 인민군의 점령 치하로 들어간 서울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잔류파'가 되어 인민군 치하 3개월 동안 노역에 시달리고 굶주림으로 고생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부는 9.28 서울 수복 후 서울에 돌아와서 '부역자 엄단 방침'을 선포했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민들 사이에 '도강파 - 잔류파 문제'로 서울특별시는 오랫동안 갈등에 시달렸고 세태가 험악해져 서울시민들은 이승만자유당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1956년 선거 때 부통령 선거, 1958년 총선 때마다 이승만과 이기붕, 자유당이 유독 서울에서만 선거운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민들로부터 야유를 심하게 받았다. 특히 서울시민들은 이기붕을 매우 싫어했다.[13] 이 중에는 혼혈 전쟁 고아도 상당수였는데 대부분이 미군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며, 95%가 서울 태생이다.[14] 미국이나 캐나다 내 이민자의 대다수가 서울 출신인 점 때문에 미주 한인어는 예전 서울토박이 말투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역으로 서울특별시에는 전국 각 지방 이주민의 영향으로 말투와 억양이 크게 달라졌다. 역사적으로도 초창기 인천항을 통해 하와이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한 이민자들도 인천항과 비교적 가까운 서울, 경기 지역 출신이 대부분이었다.[15] 실제로 서울토박이들인 서태지손석희 둘 다 또래 기준으로 당시로써는 형제자매수가 적은 축에 속한다. 비단 이 둘 말고도 해당 인물 문단에도 당시 기준으로 적은 축에 속한 이들이 꽤 된다.[16] 더군다나 남아 있는 서울 토박이들은 대체로 대졸 이상인 고학력자다. 실제로 당시 대졸 이상인 부부의 출산율이 고졸 이하인 부부에 비해 낮았다.[17] 수도권을 제외한 대도시들 중에서 토박이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은 대구로, 전체 인구의 55%가 3대째 이상 살고 있는 토박이다. 반대로 가장 낮은 지역은 대전으로, 25% 정도밖에 안 된다. 물론 서울과 비교하면 높은 비율이지만 전체 토박이 인구 수로 따지면 서울은 50만 정도, 대전은 37만 정도로 서울보다도 적다.[18] 구한말 시절인 증조부 세대 때부터 서울 삼청동 일대에 살았다.[19] 조선시대인 6대조 때부터 종로에 쭉 살아왔으며 고종 황제에게서 하사 받은 위패까지 있다고 한다. 생전 서울 사투리 때문에 엄청 고생도 했다고 한다.[20] 서울 중구에서 아버지 쪽은 5대째, 어머니 쪽은 3대째 제대로 살아온 서울 토박이인데 선산도 경기도 고양시 일산이라고 한다.[21] 성저십리 지역의 상당부분은 고양군에서 경성부/서울특별시로 편입되긴 했지만 일제가 성저십리를 고양군에 넘긴 걸 도로 서울에 되돌아온 것이다.[22] 과거 한성부 영역이 아닌 현재의 서울시 행정구역.[23] 여의도, 마포구 일부, 서대문구, 용산구, 동대문구, 성북구 일부, 성동구 일부 쪽은 재편입, 영등포 쪽은 순수 신규 편입.[24] 성북구 일부, 진관동, 마포구 일부, 광진구 일부, 성동구 일부 쪽은 재편입. 대림동, 구로동, 신도림동, 신대방동, 잠실 쪽은 순수 신규 편입.[25] 전 지역 신규 편입[26] 전 지역 신규 편입[27] 전 지역 신규 편입. 그래봤자 광명시 철산3동 월경지 소규모 편입.[28] 예전에는 한성부였고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고양군으로 넘어갔다가 1936년1949년에 서울로 재편입된 지역은 제외한다.[29] 후술하겠지만 도봉구에서는 양주 토박이(도봉구에는 실제로 의정부를 포함한 양주 출신이 30% 이상 거주한다.), 강남구나 송파구에서는 광주 토박이라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현대의 서울 토박이는 사대문 안 지역과 성저십리였던 종로구, 마포구, 은평구, 용산구, 성북구, 그리고 서대문구 일대에 많이 거주한다.[30] 지금의 은평구 일부.[31] 지금의 도봉구,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송파구 잠실. 여담으로 중랑구 면목동과 광진구 서부는 구한말에 한성부로 편입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에 의해 고양군으로 편입되어 버렸다.[32] 지금의 강남구, 송파구(잠실 제외), 강동구, 서초구 내곡동.[33] 지금의 구로구 동부, 영등포구(여의도 제외.), 금천구, 동작구, 관악구, 서초구(내곡동 제외).[34] 오늘날의 강서구, 양천구.[35] 지금의 구로구 서부.[36] 사실 자신이 살아온 고향이 비교적 최근에 인접 지자체에 병합당한 경우(예: 인천 강화군)가 아닌 이상 토박이들은 과거의 행정구역보다는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광명시 토박이는 시흥군 토박이라기보다는 광명의 토박이라고 내세운다든지.[37] 상경 이주민이나 실향민인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경우 등.[38] 박두병의 아버지이자 박용곤, 박용오, 박용성, 박용만의 조부.[39] 외가 6촌형 신해철의 모친이 대구 사람인데 서태지의 모친과 4촌지간이다. 서태지가 2000년대 초반에 크리스마스에 메시지를 남겼을 때 어르신들이 굉장히를 경장히라고 발음하셨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영호남 쪽에서 쓰는 방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