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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간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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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9년 - 1356년 (약 97년)
항복 이전 반원 개혁 이후
무신정권기 반원개혁기
<colbgcolor=#000><colcolor=#fff> 정치 체제 군주제
제후국
수도 개경
강도
언어 중세 한국어
중세 몽골어
민족 한민족
주군 몽골 카안
분봉왕[1] 고종[충헌왕][忠憲王][4]
김준
원종[충경왕][忠敬王][7]
김준 → 임연임유무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주요 사건 1259년 여몽전쟁 강화
1260년 고려의 신속
1269년 몽골 제국의 동녕부 설치
1270년 개경 환도
1274년 제1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1281년 제2차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1290년 카다안의 침입, 동녕부 반환
1356년 병신정변(세력 재편)

1. 개요2. 원 간섭기 성격 논의
2.1. 고려를 속국으로 보는 관점2.2. 고려를 속령으로 보는 관점
3. 부마4. 원의 간섭과 수탈 내용
4.1. 내정 간섭과 사법권 행사, 제후국제로의 관제 격하
4.1.1. 칭호 격하
4.2. 군권과 외교권 간섭(통제)4.3. 강제 징병과 징용·약탈과 주민 납치, 월권행위
4.3.1. 약탈과 주민 납치, 월권행위4.3.2. 강제 징병과 징용
4.4. 농우(農牛)와 쌀 수탈
4.4.1. 농우 수탈4.4.2. 쌀 수탈
4.5. 공녀(貢女) 진상 강요4.6. 응방의 폐해와 기타 여러 진상의 폐해들
5. 고려의 부원배 명단6. 여담7.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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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 간섭기()는 일반적으로 고려몽골속국이 된 1259년부터 병신정변이 일어난 공민왕의 1356년까지 약 97년 간의 기간을 가리킨다.[8]

무신정권대몽항쟁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개경으로의 환도가 이루어진 1270년(원종 11)이나, 삼별초제주도에서 전멸한 1273년(원종 14)을 원 간섭기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2. 원 간섭기 성격 논의

고려의 왕은 더욱 충정을 더하여 나라의 번직(藩屛)이 되었고, 그 지위는 높은 정승에 이르렀으며 훈위는 주국(柱國)의 반열이고, 대대로 그 왕위를 전하며 사해(四海)에 드러낸다. 현토(玄菟), 낙랑(樂浪) 사이는 백성들이 편안하고 물산이 번성하며 닭과 개의 소리가 서로 들린다.
髙麗之王克篤忠貞為國藩屏位至上相勳列柱國世祚其王以表四海玄菟樂浪之間民恬物熙雞犬相聞
《陳剛中詩集》, 〈元奉使與安南國往復書〉.

원 간섭기 고려와 몽골의 종속 관계를 두고, 독립국으로 유지되는 한편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이중적인 현상 때문에 당시 고려의 위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여몽관계를 전통적 한중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조공책봉관계론'이 있으며, 김호동과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몽골제국의 구조 속에서 위치를 파악하여 각각 대몽골 울루스의 외연적 속국, 카안 울루스의 내포적 속령으로 규정하거나 '투하령(고려왕부)'으로서 재래왕조체제가 유지되긴 했으나 그 강역 자체를 고려국왕이 배타적으로 점유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최윤정은 고려가 몽골 지배하의 속국 중에서 매우 특별한 경우로서 독립국으로 유지되었으며, '분지분민(分地分民)'에 근거한 '투하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종석은 고려가 제국 영내의 직할지도, 분봉지도 아니지만 몽골(원)과 '혼일(混一)'되었다고 할 정도로, '외국'이라는 위상이 강조 없이 당연시 되는 상태가 아니었다고 해석한다.[9]

한편 대만의 역사학자인 샤오지칭(蕭啓慶)은 당대 고려의 지위가 근대 식민제도 중 간접통치하에 놓인 보호국에 준한다고 해석하기도 했다.[10]

2.1. 고려를 속국으로 보는 관점

파일:몽골 제국 지도.jpg
고려 속국 관점에 따른 몽골 제국 지도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대개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전반을 아우르는 약 100년간의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정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는 원 간섭기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부재하여도, 연구자들 사이에서 고려가 왕조를 유지하고 사회전반적인 지배가 관철된 수준은 아니었다는 결론하에서 '지배'보다 '간섭'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통념을 형성했기 때문이다.

원 간섭의 구체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고려국왕의 친조와 조근(朝覲), 몽골 보르지긴 황실과의 혼인, 고려 관제의 격하, 정동행성의 설치, 이러한 요소들을 통한 내정간섭 기도 등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다.[11]

최근에는 국왕의 교체가 맥락 없는 '간섭'은 아니며, 또한 이 과정에는 고려국왕과 신료들의 이해관계도 반영되어 있었다는 점, 왕실 용어 및 관제 격하도 전혀 맥락 없는 요구가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가 간 관계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 양실의 통혼도 고려 왕실 측 요청에 따른 것으로, 몽골 측에서 고려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강요한 데 따른 것이 아니었다는 점, 정동행성이 유지된 것도 고려국왕 측의 이해관계가 상당부분 작용했던 것이고, 실제 정동행성을 통해 내정에 간섭한 사례도 그 초기에 한정된다는 점 등, 고려 측에서도 원과의 관계 구조와 특징을 이해하고 활용하고 있었다는 점에 무게를 두어, 몽골의 일방성을 강조하는 '간섭기' 대신 ‘복속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원 간섭기의 대표적 사례들을 모두 '간섭'으로 정의하는 것은 사전적으로 부적절하며 다소 엄밀성이 요구된다고 한다.[12]
나의 부왕(父王)께서는 2번이나 황제를 뵈었는데, 그때마다 황제의 칭찬을 받고 국가를 안보하였으며 제후(諸侯)의 법도를 근면하게 지켜왔습니다. 내가 세자로 있을 때 부왕을 이어 친조(親朝)하였더니 황제께서 특별히 총애하시어 공주와의 결혼을 허락하시고 부마(駙馬)로 책봉하시었고, 선조를 계승하게 하셨으며, 국호(國號)와 군신(君臣), 사직(社稷)을 잃지 않았으며, 예악(禮樂)과 문물, 의관(衣冠), 명분(名分) 등 모든 것을 예전대로 유지하며, 백성들이 안심하고 생업(生業)을 즐길 수 있게 하시었으니, 이는 실로 정성을 다하여 사대한 까닭입니다.
고려사》 권30 <世家> 30
이 보건대 지금 천하에 백성과 사직(社稷)이 있고 왕노릇하는 것은 삼한(三韓)뿐이다. 조상 때부터 신하가 된 것이 거의 100년이 되었으며, 아버지가 일구어놓은 것을 아들이 다시 성취하니, 나와는 장인과 사위라 할 수 있으며, 훈척으로 일가가 된 것이니 마땅히 부귀를 누려야 할 것이다. 예는 사대(事大)하는 것보다 우선인 것은 없으니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를 늦출 수 있겠는가?
고려사》 권30 <世家> 33

원 간섭기를 기록한 당시 사료들에서는 여몽관계를 전 왕조들을 이은 조공-책봉 관계의 연장선으로 인식하고 있다. 고려인들은 고려 스스로를 를 '동번(東藩)', '번병(藩屛)', '번직(藩職)' 등으로 묘사했으며, 원에서도 고려를 '동번(東藩)'으로, 고려 국왕을 '일국의 왕[一國之王]', '일국 신민의 주[一國臣民之主]', '외국의 주[外國之主]' 등으로 표현하여 고려가 독립국이라는 점을 인정하였다.[13]

이는 곧 몽골제국의 정치ㆍ군사적 영향 아래의 속국 중 고려가 매우 특별한 경우로 사직을 보존했음은 '만국독일(萬國獨一)'한 것이자 당대인들에게도 명백한 사실이었다.[14]

당시 구체적으로 "종묘(宗廟)가 있어 증상(蒸嘗)으로 그 조상을 모시고, 백관이 포열하여 직무를 이끌고, 그 형상(刑賞)과 호령(號令)은 그 나라에서만 전적으로 행하며, 정부(征賦)는 모두 삼한(三韓)의 경내에서 오로지 사용한다"고 하거나, “본경(本京)에는 비록 성(省)이 설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왕이 승상(丞相)의 신분으로 독자적으로 관할하고 있다. 그리고 조정의 임명을 받아야 할 성(省)의 속관들도 모두 자체 임명하고 있으며, 그 밖에 내외의 백사(百司)들도 본국의 구례(舊例)에 따르고 있다.”고 평했다.[15] 즉, 원대 고려를 명의상 신속(臣屬)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독립적 지위를 보전했다고 본 것이다.[16]

전통시대 책봉-조공관계의 '정치적 자율성'이 '원칙적'이라 보고 고려를 배제하는 것도 문제의 여지가 있다. 책봉-조공관계는 상하 관계를 전제하지만 1차적으로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로, 그 가운데 시대적 상황에 따라 조공국의 자주성이란 상황에 따라 강화되기도 하고 위축되기도 했다. 여몽관계는 고려 왕조의 유지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할 필요가 있다. 자주성을 상실하기도 했지만 고려가 국가로서 유지되었고 그에 따라 양국 간에 책봉과 조공의 형식이 존재하였다는 점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17]

그리고 제후국의 정치적 자율성을 보장한 '성교자유(聲敎自由)'나 '자위성교(自爲聲敎)'는 조선시대 이후의 사례에다가, 이러한 '명시' 자체가 고려국왕의 상위권력으로 작동, 권위로 기능한 몽골 황제권이 내정에 작용한다는 '현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가령 '국왕친조'를 책봉조공의 예법으로든, 몽골적 제도적 장치로든 이해할 수 있듯이, '책봉'과 '조공'이 군신관계를 내포하는 만큼, 고려의 '정치적 자율성' 침해 또한 군신관계의 다양한 범주 내에서 논할 수 있다.[18]

아울러 병자호란 직후 청이 제기한 왕위 교체설이나 국왕의 입조 소문, 인질과 그들을 앞세워 관리를 협박하고 척화신 압송을 요구하는 등 내정 간섭을 일으킨 것 역시 여몽관계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이는 당시에도 인조 입조 소문이 돌 때 충혜왕이 몽골에 압송됐던 전례가 거론됐다. 몽골의 복속국의 의무로 요구했던 '조군'의 경우도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명과 청이 여러차례 조병을 요구했다는 점에서 조군의 의무가 꼭 책봉-조공관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19]

그 밖에 책봉권의 실질화에 따라 책봉 취소나 국왕의 폐위가 가능해진 것은, 몽골적 관계 여하가 작용한 것으로 몽골이 황제와 제후의 관계를 의식해서 그 실현을 목표로 행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을 마구잡이로 행한 것도 아니며, 고려 전기 중국왕조와의 관계에서는 책봉이 사후 보고나 승인의 의미를 지녔던 것이 원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이지만 실제 행해지지는 않았던 것이 몽골과의 관계 속에서 실현됐다고 볼 수도 있다. 한편 여전히 고려 왕실 내부의 왕위계승 질서는 유효했다.[20] 원이 고려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원칙을 부정하지는 못한 것이다. 원 간섭기에 왕위 계승 자격 미달의 인물이 고려국왕으로 책봉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며, 심왕조차도 방계(傍系)라는 점이 결정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원 황실의 후원에도 불구하고 고려국왕을 차지할 수 없었다. 즉, 원 황제의 책봉권은 어디까지나 현왕이나 왕위 계승 후보 내에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21]

1276년 몽골이 한법(漢法)을 기반으로 국내 제도를 정비하는 중, 중국(당, 송)으로 차용한 관제를 차용하고 있던 고려의 제도에서 황제와 제후 간의 구분이 명확한 부분에서 양자간 위상이 맞지 않는 부분들을 발견하고 지적하여 고려의 왕실 용어와 관제를 격하했다. 묘호, 의식, 의복, 왕실 용어 등에서의 격하를 통해 고려는 피동적, 현실 추수적으로 제후라는 정체성을 수용하고, 국내적으로도 ‘신하+군주’ 위상의 구현'과 '제후국 체제의 실현', 즉 황제의 관료 및 부마와 함께 외신제후의 위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전대와 달리 속국에 몽골의 지배가 유교문화권의 방식으로 구현되어 국내에서 조차 제후의 위상이 관철되었다. 따라서 고려가 중국의 '외국'임을 강조할 필요 없이 당연시되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제국 영내의 직할영역도 분봉지역도 아니었다. 아울러 이는 전혀 맥락 없는 요구가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가 간 '관계'에 근거한 것이었다.[22]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은 대칸의 속령이던 중국에 설치된 행성들과는 달리 지방 행정기관으로 기능하지 않고, 여원관계에서의 연락기구로 작동했으며, 고려국왕 단독으로 행성의 승상이 되어 임용권을 쥐었다. 속관(屬官)은 원 조정에서 파견해 임명한 자가 있지만 정사에 대한 영향력은 미미했다.왕조의 독자성을 보존하면서 고려의 원래의 기구와 각종 제도는 모두 유지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이다.[23]

고려는 그 국왕이 정동행성의 수장인 승상을 겸직함으로써 독자적 왕조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동행성은 기형적으로 군정 부분만 관할했으며, 민정 부분은 여전히 고려 정부에서 관할했다. 이는 원이 고려에 대해 호구판적(戶口版籍)을 관철시키지 못한 결과였으며, 고려가 사직을 보존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소였다. 이는 고려가 호구 조사를 바탕으로 한 '투하령'이 될 수 없는 주요한 근거가 될 수 있다. 분봉과 수봉(受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통혼으로 부마가 되었기에 고려왕이 위하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제국 내지의 제왕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24]

쿠빌라이 사후 대일 원정 추진이 중단되었다. 성종은 1295년 충렬왕이 청한 청혼, 태사중서령 가봉, 공주 인장 강가, 세자 인장 개주 요구를 모두 거절하였고, 1307년까지 행성 조정과 정비에 착수했다. 한편 중조 사건 이후 고려국왕이 고려의 신료들을 통솔하지 못해 분란이 발생하는 가운데, 이를 수습하는 차원에서 1299년 고르기스(闊里吉思)를 정동행성 평장으로 부임시켰다. 그는 기존에 고려국왕이 최고 수장으로서 첨의사가 관할하던 민정권을 접수함으로써, 제국 내 행성과 같은 구조로 만드려는 실질적인 고려의 내지화 작업, 즉 일종의 속령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고르기스는 사법 처리 문제를 비롯하여 많은 부분에서 내정에 관여하며 고려국왕의 권한을 침해했지만 당시까지 정동행성관 고르기스의 존재와 활동, 즉 '입성(立省)'이 그 자체로 고려 국가의 존립을 좌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짚어야 한다. 더군다나 1300년 6월 충렬왕은 신속하게 성종을 알현하고 그로부터 일체의 허락을 받음으로써, 정동행성은 혁파되어 이전과 같이 독자적인 왕조국가에 설치되어 국왕이 승상을 겸직하여 고도의 자치권을 가지면서 형식적으로 대칸이 파견한 재집이 출장하는 형태로 유지시키게 되었다.

즉, 단순히 원의 고려 간섭 기구가 아닌 사직을 보존에 있어 보호 장치 역할을 지속할 수 있던 것이다. 이후에도 정동행성의 목적이 동요되면서 입성책동이 일어나지만, 모두 좌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1330년대에 이르면 그닥 위협적이지도 않았다.[25]

2.2. 고려를 속령으로 보는 관점

파일:몽골 제국 위치.svg
고려 속령 관점에 따른 몽골 제국 지도
고려를 원나라의 '투하령' 및 '속령'이었다고 보는 시각이다.[26] 외국의 역사 학계와 역사 지도들에서도 자주 보이는 관점으로 가령 서양의 몽골사 전문가인 데이비드 O. 모건(David O. Morgan) 교수의 명저 《몽골족의 역사》(The Mongols)에서도 고려는 원나라의 영토 경계안에 포함되어 있는 지역으로 인식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고려를 몽골의 부마에 수여된 투하령으로 이해했고, 김호동은 고려가 고려국왕이 통치하는 ‘속국’이자 부마의 ‘속령’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고 보았다.
- 이익주, 「고려-몽골 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관계의 탐색」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동북아역사재단, 2011)
이제는 몽골제국 중심의 세계 속에서 고려의 위상을 밝히는 것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실은 필자도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세조구제(世祖舊制)’라는 가설을 제시한 적이 있지만,3) 그 뒤로 모리히라 마사히코[森平雅彦] 교수의 ‘투하령(投下領),4) 김호동 교수의 ‘속국(屬國)·속령(屬領)’ 등5) 당시 고려-몽골 관계를 구조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가설들이 제시되었다.
- 고려-대원 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 이개석, 『고려-대원 관계 연구』(지식산업사, 2013) - 서평 이익주 서울시립대학교 교수

3) 李益柱, 1996, 「高麗·元關係의 構造에 대한 硏究–소위 ‘世祖舊制’의 분석을 중심으로-」, 『韓國史論』 36.
4) 森平雅彦, 1998, 「高麗王位下の基礎的考察–大元ウルスの一分權勢力としての高麗王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6; 森平雅彦, 1998, 「駙馬高麗國王の成立–元朝における高麗王の地位についての豫備的考察-」, 『東洋學報』 79-4.
5) 김호동, 2007, 『몽골제국과 고려』, 서울대학교 출판부.
세 번째는 부마 영지에 대한 다루가치 파견이 몽골의 관습에 어긋난다는 점이다. 제국 초창기부터 몽골은 전통적 家産制 관념에 의거하여 정복지의 토지ㆍ인민을 后妃ㆍ諸王ㆍ公主ㆍ駙馬에게 분여하는 分封制를 시행하고, 投下영주의 권익을 보호하는 취지에 따라 그 영지에 다루가치를 파견하지 않았다.

(중략..)

쿠빌라이는 카안으로서 황실의 부마로 지위가 격상된 충렬왕의 권익을 그 격식에 맞게 보장해줄 책임이 있었다. 이에 따라 부마의 영지에 다루가치를 설치하지 않는 관습에 의거하여 그것을 폐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점에서 이 조처는 고려에 대한 몽골지배층의 인식이 ‘외연적 속국’에서 ‘내포적 속령’으로 변모했음을 반영한다.
-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9.

원 복속기 초기 이후 다루가치가 고려에서 완전히 철수하였다는 점을 고려가 원의 속령으로서 취급받지 않았다는 증거로 인식하는 경우가 일부 있는데 오히려 다루가치의 철수는 그러한 일반의 인식과는 반대로 고려에 대한 몽골지배층의 인식이 ‘외연적 속국’에서 ‘내포적 속령’으로 변모했음을 반영하는 증거로 보기도 한다.[27]
충렬왕과 몽골지배층의 교섭에 관한 『高麗史』 「世家」 기록은 다루가치 폐지가 오직 쿠빌라이의 명에 의한 것임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충렬왕의 두 차례 다루가치 파견 요청에 대해 그는 “도대체 낭가타이가 어떤 인물이기에 다루가치로 임명하겠는가?” “어찌 다루가치가 필요하겠는가? 그대가 스스로 잘 하면 될 것이다”라고 거절하면서 고려 주재 다루가치를 최종 폐지했다. 그러므로 이는 충렬왕이나 호종신료가 몽골지배층과 능동적으로 교섭하여 거둔 외교적 성취가 아니라 쿠빌라이가 충렬왕의 파견 요청을 물리치고 스스로 내린 결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9.
또한 원종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몽골에 복종하는 자세를 취하여 쿠빌라이의 두터운 신뢰를 얻었다. 이에 쿠빌라이가 그 스스로 반몽행위를 감시ㆍ제압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다루가치의 고유 임무인 반란사건 조사ㆍ심문 권한을 그에게 위임했다고 이해된다. 이처럼 충렬왕이 다루가치의 상위에서 그들을 능동적으로 통제하고, 그 역할을 대신 담당하게 되자, 다루가치의 존재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28]
-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9.

오히려 다루가치의 파견은 고려가 부마(駙馬)의 투하령(投下領) 성격도 띄게 되면서 투하(投下)영주의 권익을 보호하고 본속주의 정책을 관습으로 한 당대 원나라 조정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관습을 어긴 것이었으며 결국 이러한 이유들로 고려에 파견되었던 다루가치들은 모두 철수를 하게 된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이미 행정체계가 마련된 당대 고려의 특성상 충렬왕이 직접 투하다루가치를 임명할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해당 조치는 몽골 지배층의 대고려 인식이 ‘속국’에서 ‘속령’으로 변모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평가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충렬왕이 투하(投下)영주로서 몽골에 복종하며 이미 그 자신이 스스로 다루가치의 상위에서 그들을 능동적으로 통제하고, 다루가치의 역할을 대신 담당하는 이상 다루가치가 계속 파견 될 이유가 크게 사라졌다는 점도 함께 작용을 하였다.[29]

3. 부마

충렬왕쿠빌라이 칸의 막내딸 제국대장공주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원 간섭기 내내 고려의 왕비 자리는 원나라 공주가 차지했다. 충렬왕은 이미 14년 전에 정화궁주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두고 있었으나, 제국대장공주가 시집온 후로 정화궁주는 둘째 비로 강등되었다. 왕위 또한 제국대장공주의 아들인 충선왕이 이어받았고, 정화궁주의 아들인 강양공 왕자(王滋)는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 왕비 자리를 차지한 원나라 공주들은 다음과 같다.

원나라 공주들은 자신보다 먼저 고려 왕에게 시집와 있던 고려 여인들을 제치고 왕비가 되었고, 심지어 공주가 아니더라도 몽골인이면 고려인들보다 우선 순위가 되었다. 예수진은 공주가 아니었지만 몽골인이어서 계국대장공주에 이어 둘째 비가 되었고, 고려인인 정비 왕씨(靜妃王氏), 조비, 순화원비 홍씨(順和院妃洪氏), 순비 허씨(順妃許氏)는 다음 순위로 밀려났다.

이렇게 고려 왕비가 된 원나라 공주들은 막강한 친정을 등에 업고 기세와 횡포가 대단했으며, 남편인 고려 국왕도 업신여겨 함부로 대했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원나라 황제의 친딸인[30] 제국대장공주가 가장 대단했는데, 그녀는 이재에 밝아 고려에서 많은 재산을 모았고, 흥왕사의 귀한 금탑을 빼앗았으며[31], 충렬왕과 함께 천효사(天孝寺)에 행차했을 때는 자신을 따르는 시종의 수가 적다거나 충렬왕이 자신보다 앞서 갔다는 구실을 들어 충렬왕을 때리기까지 했다.

또한 원나라 공주들의 투기로 인해 가정불화도 끊이지 않았다. 제국대장공주정화궁주가 둘째 비로 밀려난 후로도 계속 정화궁주를 경계하고 질투했다. 심지어 충선왕의 탄생을 축하하는 연회 때도 제국대장공주는 정화궁주 때문에 불쾌해하고 화를 내어, 연회가 파토나기도 했다. 결국 정화궁주는 충렬왕과 떨어져 별궁에 따로 살아야 했고, 제국대장공주가 사망한 후에야 다시 충렬왕과 함께 살 수 있었다. 충렬왕에게는 정화궁주 외에도 고려인 후궁들을 여럿 두고 있었고, 특히 시무비(柴無比)라는 여인에게 푹 빠졌는데, 당연히 이들도 제국대장공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1297년 제국대장공주가 38세에 갑자기 사망하자, 충선왕은 어머니의 죽음이 시무비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시무비와 그녀의 측근들을 처형했다. 그러나 충선왕도 (아버지처럼) 왕비 계국대장공주에게는 소홀했고 그 대신 고려 여인 조비를 총애했다. 이를 질투한 계국대장공주가 친정에 편지를 보내어 고자질하는 바람에 충선왕은 왕위를 아버지에게 내어주고 원나라로 소환되었으며, 조비와 그녀의 친정 가족들 또한 원나라로 잡혀가 혹독한 고초를 겪었다. 충숙왕은 먼저 맞아들인 고려인 둘째 비 덕비 홍씨를 총애하면서 동시에 몽골인 왕비 복국장공주를 홀대했는데, 이로 인해 충숙왕과 복국장공주는 자주 부부싸움을 벌였다. 복국장공주는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는데, 애초에 그녀의 건강이 좋지 않기도 했지만 충숙왕이 그녀를 종종 폭행했다고도 전해진다.

다만 마지막 몽골인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공민왕과 금슬이 좋았고[32], 공민왕의 반원자주정책을 지지해주었다.

4. 원의 간섭과 수탈 내용

이것이 800년 전 역사이고, 현재 몽골이 그다지 영향력있는 나라가 아니며, 기황후 등을 미화하는 사극 덕택에 잘 드러나지 않았다 뿐이지, 원에 입조한 후 고려는 정치・외교・군사・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부문에서 제국의 내적 존재가 되어가[33], 명목상의 반쪽짜리 국가로만 존재하게 되었다.

1218년부터 여몽전쟁이 발발하면서 고려는 몽골군과 지속적으로 교섭과 전투를 벌였으며, 1230년대 우구데이 카안 치세에는 몽골군이 고려에 호구 조사를 요구하는 등 체계적인 수취를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250년대까지 전쟁이 지속되면서 정기적인 의례나 수탈 행위는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1259년 고려 고종과 조정은, 몽골 측이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내놓은 태자 친조를 강화를 위해 수락하고, 쿠빌라이를 만나고 귀국한 태자가 즉위하여 영안공을 필두로 한 사신을 보내어 칭신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다.[34]

1260년 쿠빌라이는 대고려 정책을 전적으로 자신이 주관하여 일원화할 것은 천명하였고, 1263년부터 6사(六事)[35]를 요구하면서 고려는 정기적이고 지속적인 세공(歲貢)을 바쳐야 했다.[36] 이러한 세공은 1281년 충렬왕부마로서 지위를 공고히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으며, 이를 비롯하여 1300년대 초까지 막대한 경제적, 인적 자원 등을 수탈당했다.[37]

또한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은 원 황제의 부마 및 정동행성의 수장으로 임명되고 종종 소환, 폐위되기도 했으며, 비록 명목상 고려국의 최고 권력자였으나 이제 최고 권력은 몽골 황제에게 있었다. 신료들은 물론 국왕까지 모두 몽골 황제권 하에 들어오면서 고려 국왕은 사실상 고위 신료들에 대해 사법권을 행사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몽골 관료들과의 갈등 중에서도 몽골 황제권에게 권위를 기대야 했다. 이러한 양상은 외치와 내치의 경계가 모호해진 것을 의미한다.[38]

다음은 원 간섭기 동안 고려의 내정간섭 문제들과 원나라로 인한 여러 사회 문제들 중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① 고려는 고려 스스로 임금을 세울 수 없었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 국왕과 그 후계자는 몽골 황제권이 결정하였다.[39]
  • 심왕 제도(瀋王 制度): 요동 일대의 고려인의 통치를 구실로 고려 왕씨 왕족을 심왕으로 임명하여 고려에 대한 분열정책의 일환으로서 왕위 쟁탈전까지 벌어지게 만들었다. 초대 심왕이 된 충선왕은 고려에 귀국하지 않고 중원에서 원격 통치를 시작했고 측근 세력들이 고려를 다스리다 보니 부패한 측근들에 의해 고려 조정이 어수선해졌다. 그리고 충숙왕 대신 조카 왕고에게 심왕을 준 후 정작 자신은 좌천된다. 원 영종 시더발라(ᠰᠢᠳᠢᠪᠠᠯᠠ)가 충선왕을 티베트 지역으로 유배보낸 것.
  • 툴루게(禿魯花, 독로화) 제도: 몽골어 '툴루게'는 인질을 의미한다. 고려 후기 왕족 및 귀족의 자제들이 인질의 형식으로 원나라에 보내진 것. 1241년(고종 28) 처음으로 왕족 영녕공 왕준(永寧公 王綧)과 귀족 자제 10인이 끌려갔고 1271년(원종 12)에는 세자 왕심(王諶: 뒤의 충렬왕)과 송빈(宋玢), 설공검(薛公儉), 김서(金㥠) 등 귀족 자제 20인이 끌려갔다. 1275년(충렬왕 1)에는 대방공 왕징(帶方公 王澂) 등이 끌려갔다. 1279년엔 김방경(金方慶), 원부(元傅), 박항(朴恒), 허공(許珙), 홍자번(洪子藩), 한강(韓康), 설공검, 이존비(李尊庇), 김주정(金周鼎) 등 고위관직자의 자제들이 끌려갔다. 이후 1282년과 1284년, 1301년, 1313년에도 인질들이 끌려갔다.
② 국가 최고의결권을 원 조정이 가지고 있었다. 고려 왕실은 국가 주요 안건에 대한 의결을 내릴 때마다 언제나 원의 인가를 받아야만 했다.
③ 고려는 상비군을 거느릴 수 없었고, 원으로부터 수시로 병부와 군대를 사찰받았다.
  • 순마소(巡馬所): 원나라가 종래 고려의 포도기관(捕盜機關)이었던 야별초(夜別抄)를 혁파하고 만든 기관. 원나라의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제공관(提控官)이 되어 관리했다. 개경의 치안을 담당한다면서 반원파 인사를 주로 체포해갔으며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로 확대 개편되었다가 조선시대 의금부로 재편된다. 일종의 금군 겸 치안기구.
  • 만호부(萬戶府): 일본 정벌의 실패 직후인 1281년,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했다. 관직 책임자는 원나라의 관직으로서 임명되었고 공민왕 이전까진 주로 원나라에서 임명했다. 만호(萬戶), 천호(千戶), 백호(百戶) 등 북방의 유목민, 특히 몽골인들이 주로 쓰던 10진법에 의해 군사를 편성하고 관리했다. 고려의 국방과 치안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④ 원나라는 2차례 삼별초 토벌(1271, 1273)과 5차례의 일본 원정(1274, 1280, 1283, 1285, 1293)을 기획하면서 전함병량도감(戰艦兵粮都監)[40]을 설치하고, 농무별감(農務別監)[41]을 파견하여 고려의 인력과 자원을 수탈하였다. 그 밖에 고려는 평시에도 제국을 위한 식량과 물자를 수시로 공급해야 했다.
  • 응방(鷹坊): 원 황실이 조공품으로 요구하는 해동청(海東靑)을 잡고 길러서 보내기 위해 설치하였다. 사냥을 즐긴 몽골인들에게 매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궁궐 안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는데 매의 수요는 늘어만 갔고, 응방에 속한 관원들은 왕의 권력을 배경으로 횡포가 극심하였다. 고려 내의 몽골인과 같이 면역·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적 기반으로 많은 사전(賜田)을 받았고 노비와 소작인을 거느렸다. 수많은 고려인들이 피폐해져 굶어죽었다.
⑤ 결혼도감(結婚都監)을 설치하고 원에 공녀를 바치게 되었다.[42] 결혼도감(結婚都監)은 일명 '과부•처녀 추고 별감'이라고도 불렸으며, 1274년 3월에 최초로 젊은 여성 140인을 끌고 간것을 시작으로 1355년(공민왕 4)까지 80년에 걸쳐 총 176명이 끌려갔다. 민간의 독녀(獨女), 역적의 처, 파계승의 딸들 같이 힘이 없는 하층민 여성들만 공녀(貢女)가 되었을 것 같지만, 좋은 출신의 여성도 포함하도록 요구받았기 때문에 상류층 여성들도 공녀로 끌려가곤 했다.
다루가치의 배치: 1231년 서경을 비롯한 서북면 지역에 72명의 다루가치를 배치한 것이 시초로, 1년 후 도단(都旦)을 개경에 파견하여 내정간섭이 시작되었다. 1259년 원종이 귀국하면서 쿠빌라이의 다루가치들이 원종과 함께 고려에 입국함에 따라 전국에 배치되었으며, 1273년 삼별초 항쟁이 좌절된 뒤 제주도에 설치한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에 다루가치가 최종 배치되었다. 역할은 주로 감찰관 역할, 내정간섭, 엄청난 수준의 공물 징수 감독 등이었다. 중서성을 비롯한 고급 관청을 제외하고 그 예하의 중앙관청과 모든 지방 행정관청에 존재했다. 1278년 김방경 무고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친조한 충렬왕의 의도와 고려 국왕의 부마 지위에 따라 고려에서 다루가치는 모두 철수했으며, 고려 국왕은 정동행성의 승상이 되어 고려 내지에서 최고 권력을 휘둘렀다.
⑦ 왕실 호칭 격하: 짐 → 고, 폐하 → 전하, 태자 → 세자, ~조/종 → 충~왕, 선지 → 왕지, 상서 → 판서, 시랑 → 총랑, 사 → 유, 주 → 정 #
* 묘호의 사용 금지와 '충'(忠)자 돌림의 시호의 사용.[43]
⑧ 부원배 권문세족들의 성장과 전횡
⑨ 영토의 간섭 영토의 간섭은 다음과 같다.
파일:367px-원_간섭기_시기의_고려.png
* 동녕총관부(東寧摠管府): 1269년 서북면병마사 최탄(崔坦) 등이 반란을 일으켜 서경을 비롯한 북계(北界)의 54개 성과 자비령 이북 서해도(西海道)의 6개 성을 들어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1269년에서 1290년까지 21년간 자비령 이북을 지배하였다. 이후에는 땅은 반환하고 요동으로 옮겨졌다.
*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1258년에 조휘(趙暉)와 탁청(卓靑)이 고려의 지방관을 죽이고 몽골에 항복. 1356년 쌍성총관부의 신흥 천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에게 내응하면서 탈환. 1258년에서 1356년까지 98년간 존속했다.
*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 1273년 삼별초를 진압한 후 설치. 1300년 탐라만호부로 변경. 공민왕 때에 폐지되지만 장기간에 걸친 탐라총관부의 설치로 인해 반고려 운동이 벌어져 1374년 목호의 난이 발생한다.

4.1. 내정 간섭과 사법권 행사, 제후국제로의 관제 격하

몽골 복속기 몽골 황제의 고려 국왕에 대한 ‘책봉권’ 실질화가 기존의 동아시아적 책봉-조공 관계의 요소가 변화한 것인 측면도 갖지만, 몽골적인 관계 및 권력 구조와도 연결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즉, 고려 국왕의 즉위와 폐위 과정이 몽골제국 내 정치단위의 수장들, 한문 사료에서 제후(諸侯) 혹은 제후왕(諸侯王)으로 표현되는 자들에 대한 임면 과정과 별다른 차이점을 보이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고려 국왕들은 몽골제국의 다른 諸侯 혹은 諸侯王들과 유사하게, 통치영역에 대한 세습적 통치권을 보장받으면서도 개개인의 몽골 황제, 황실과의 관계 변화에 따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 자질 및 통치능력에 대한 황제의 판단 여하에 따라 교체되고 있었다.
이명미(2014), <恭愍王代 후반 親明정책의 한 배경: 몽골 복속기 권력구조에 대한 트라우마>, 《사학연구》 113, pp. 106~107.
원 복속기 들어 원(몽골) 측은 고려의 제도로 참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원(몽골)의 지배력이 고려 내부에까지 직간접적으로 관철되는 원 복속기 라는 여건 속에서, 고려는 원(몽골) 측이 문제 삼은 제도를 제후 제도로 개정해야 했다.
최종석, 왜 고려전기의 國制는 황제국 체제로 보일까? - 후대 감각과 지식의 소급 적용으로 탄생한 고려전기 황제국 체제 - 역사학보, 2021, vol., no.250, pp. 1-42 (36 pages)

고려 전기의 조공은 사실상 비정기적인 선물을 주고 받는 형태였기 때문에 의례상 군신 관계를 수립한 뒤에도 명목상의 상국으로부터 내정간섭을 받거나 조공으로 인해 경제적인 피해를 보는 경우가 전무했지만 원종쿠빌라이 칸에게 입조하여 칭신한 이후로는 몽골제국이 제국을 건설하여 천하질서가 일원화됨에 따라 고려 전기까지의 조공-책봉 관계와 달리 원 간섭기 이후로는 강력한 속국 관계가 구축되고 이로 인하여 내정간섭과 조공으로 인한 경제적인 피해가 크게 발생하게 되었다.
파일:원간섭기 관제 격하.jpg
원간섭기 관제 격하 예시.

이러한 책봉의 실질성이 강화된 것은 원 간섭기 이후부터로 이는 고려 국가 외부에 존재하는 군주(원나라 황제)의 상위 권력 혹은 권위인 황제권이 고려 국내의 정치, 의례에도 강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는 내정간섭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며, 원 복속기에 들어 몽골 황제권이 고려 내정의 최상위에 군림하면서 실제로 권력 행사와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였고, 고려 국왕이 황제권으로부터 체포, 심문, 유배, 폐위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충선왕충혜왕의 사례가 있다.) 고려 전기의 관제의 황제국적 성격 또한 제후국제로 격하됐으며 더 나아가 정동행성을 매개로 각종 외로 아문 의례가 고려에 적용되었다.[44]

아래의 내용은 원 간섭기 당시 원나라가 고려에 최소한의 외왕내제적인 모습들마저도 완전히 금지한다고 통보한 글이다. 이는 고려가 원 간섭기 이후로 원나라의 속국이 되었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

갑신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이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렇게 참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左承宣) 박항(朴恒)을 시켜 해명하기를, “감히 참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옛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감히 고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선지를 왕지(王旨)로, 짐을 고(孤)로, 사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고쳤다.
《고려사》 권 제28 충렬왕(忠烈王) 2년(1276년) 3월 19일(음) 갑신(甲申)년 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

이 밖에도 충렬왕이 원의 사신을 맞이할 때 성관(省官)이 “부마왕께서 사신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선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왕께서는 역시 외국지주(外國之主)이시니 조서가 도착하면 반드시 영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여 사신을 서문 밖에서 맞이한 사례 또한 원 간섭기 당시 고려의 위상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모습이다.
충렬왕이 원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서문 밖에서 맞이하다

충렬왕(忠烈王) 원년(1275) 5월 갑술, 왕이 조서를 지닌 사신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 재추(宰樞)·시신(侍臣)들을 거느리고 시복(時服) 차림으로 서문 밖에서 맞이하였다. 왕은 이미 원(元) 공주와 혼인하였으므로, 비록 조서를 지닌 사신이라도 일찍이 성 밖까지 나가 맞이한 적이 없었다. 통역[舌人] 김태(金台)가 원에 갔을 때 성관(省官)이 이것을 말하며 이르기를, “부마왕께서 사신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선례가 없지는 않습니다만, 왕께서는 역시 외국지주(外國之主)이시니 조서가 도착하면 반드시 영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해서, 이때에 이르러 맞이하게 되었다.
《고려사》 > 권별 보기 > <지>> 권 제19 > 예7(禮 七) > 빈례 > 충렬왕이 원 조서를 휴대한 사신을 서문 밖에서 맞이하다

또한 고려에서 이전에는 독자적으로 묘호시호를 선왕에게 올리곤 했으나 이를 처음으로 부정한 국왕이 있었으니, 바로 충선왕이었다. 이는 원나라의 완전히 복속된 고려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하였다.
【《목록》】
>왕이 대행왕의 시호 추증을 거부하다

병신 유사(有司)가 대행왕(大行王)의 시호를 올리는 것을 의논하자 왕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상국(上國)이 있으니 나로서는 단지 시호를 청할 따름이다. 죽책(竹冊)이나 옥책(玉冊)이 또한 예(禮)에 부합하는 것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단지 ‘순성수정상승대왕(純誠守正上昇大王)’이라는 호칭만 올렸다.
《고려사》 > 권33 > <세가> 권 제33 > 충선왕(忠宣王) 복위년 > 10월 > 왕이 대행왕의 시호 추증을 거부하다
신하들의 시호 추증 요청에 대한 충선왕의 대답은 상국에게 시호를 요청하라는 것이었다. 이는 더 이상 조공-책봉이 형식상의 관계가 아닌 그 실질성을 내포하게 된것을 의미했다. 원나라측에서의 고려의 시호 요청에 대한 대답은 충선왕 2년(1310)에 나오는데 아래와 같다.
원이 왕(충선왕)의 3대 조상을 추증하다

을미 원(元)이 제서(制書)를 내려 왕의 3대조를 추증하였다.

중략..

왕철(고종)에게〉 돈신명의보절정량제미익순공신 태사 개부의동삼사 상서우승상 상주국 고려국왕(敦信明義保節貞亮濟美翊順功臣 太師 開府儀同三司 尙書右丞相 上柱國 高麗國王)을 추증하고 시호는 충헌(忠憲)으로 한다.

중략..

왕식(원종)에게〉 단성봉화보경양절강제좌리공신 태사 개부의동삼사 상서우승상 상주국 고려국왕(端誠奉化保慶亮節康濟佐理功臣 大師 開府儀同三司 尙書右丞相 上柱國 高麗國王)을 추증하고, 시호는 충경(忠敬)이라 한다.

중략..

구관 고려국왕 왕장의 아버지인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공신 태위 개부의동삼사 정동행중서성우승상 상주국 부마 고려 국왕(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功臣 太尉 開府儀同三司 征東行中書省右丞相 上柱國 駙馬 高麗國王) 왕거(王昛, 충렬왕)는 효를 옮겨 〈우리에 대한〉 충성으로 〈백성에게는〉 위세를 바꾸어 은혜를 베풀었다. 중략.. 정결한 혼백이 위로하는 글[恤章]을 잘 받기를 바라면서, 순성수정추충선력정원보절인량화봉경공신 태사 개부의동삼사 상서우승상 상주국 부마 고려국왕(純誠守正推忠宣力定遠保節寅亮弘化奉慶功臣 大師 開府儀同三司 尙書右丞相 上柱國 駙馬 高麗國王)으로 추증하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라 한다.

중략..

처음에 나라에서는 송(宋), 요(遼), 금(金)의 정삭(正朔)을 사용하였으나 역대의 시호는 모두 '종'(宗)이라고 칭하였다. 원을 섬기기 시작하자 명분이 더욱 엄중해져서 옛날 한(漢)의 제후들이 모두 한의 시호를 받았기 때문에 왕도 표문을 올려 상승왕(上昇王: 충렬왕)의 존호를 청한 것이다. 또한 고종(高宗)과 원종(元宗) 두 왕도 추시(追諡)해줄 것을 청한 것이었는데,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권33 > 세가 권제33 > 충선왕(忠宣王) 2년 > 7월 > 원이 왕의 3대 조상을 추증하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또한 이후 시작된 '충'(忠)자 돌림 시호를 보면 완전히 종속된 속국 또는 속령 고려의 위상이 나타난다.
【《목록》】
>원이 왕에게 시호를 내려주다

忠宣王二年, 元賜謚忠烈, 恭愍王六年, 加景孝.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원(元)이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공민왕(恭愍王) 6년(1357)에는 경효(景孝)를 덧붙였다.
《고려사》 권 제32 충렬왕(忠烈王) 34년(1308년) 7월 13일(음) 기사(己巳)년 원이 왕에게 시호를 내려주다
이렇게 고려 고종에게는 '충헌왕', 고려 원종에게는 '충경왕', 충선왕의 아버지는 '충렬왕'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한 충선왕의 복위 이후 원 황제가 보낸 조서의 내용을 보면 신하로서의 고려 국왕의 지위가 어떠하였는지도 알 수 있다.
원 황제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봉하다

신해 원(元)이 사신을 보내왔다.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동쪽의 번국(蕃國)인 그대 나라는 대대로 신하의 직분을 지켰으며, 아들이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였으니 전례(典禮)와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근자에 고려의 왕 왕거(王琚)가 유서(遺書)로 아뢰기를 그의 아들 왕장(王璋)이 작위를 물려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짐이 생각하건대 왕장은 친히 우리 세조(世祖) 황제의 외손이며 황실 종친[宗姬]의 사위로서 아름다운 계책과 훌륭한 공적은 모두 칭찬할 만하다. 오랫 동안 조정에 입시(入侍)하여 충성과 노력을 다하였으니 특별히 정동행중서성 우승상 고려 국왕(征東行中書省右丞相 高麗國王)으로 제수하며, 전과 같이 개부의동삼사 태자태사 상주국 부마도위 심양왕(開府儀同三司 太子太師 上柱國 駙馬都尉 瀋陽王)으로 한다. 지금부터는 더욱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여 성실할 것이며 상국(上國)을 섬기는 정성을 힘써 닦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은 맡은 직분에 충실하여 각각 규범을 지킬 것이며, 뭇 백성[士庶]과 승려[緇], 도사[黃]들도 자기의 생업을 잃지 않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권33 > <세가> 권 제33 > 충선왕(忠宣王) 복위년 > 10월 > 원 황제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봉하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원나라의 황제였던 쿠빌라이 칸이 자신이 ‘책봉’한 원종에 대한 폐립을 곧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임연에게 왕을 폐립한 죄를 묻고 원종의 복위를 명한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원나라는 고려 국왕들을 직접적으로 폐위 또는 즉위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내정간섭에 해당하는 행위들로서 아래는 그에 대한 기록들이다.
【《목록》】
>몽고 황제가 국왕·왕창·임연의 입조를 요구하다

11월 임자 몽고가 병부시랑(兵部侍郞) 흑적(黑的, 흑적)과 치래도(菑萊道, 치래도) 총관부(摠管府) 판관(判官) 서중웅(徐仲雄) 등 12인을 보내 조서에서 이르기를,

“고려 국왕 왕식(王禃)과 요속(僚屬), 군인, 민인들에게 선유한다. 얼마 전에 왕식이 병이 났다고 하면서 제멋대로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에게 임시로 국사(國事)를 맡긴다고 하기에 사신을 보내어 알아보았다. 지금 사신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임연(林衍)이 말하길, ‘이 일은 모두 제가 한 일이라고 전해졌지만, 권력이 있는 자라야 능히 국왕을 폐하거나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관직 등급이 7명 아래에 있는데 무슨 권력이 있어서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말을 믿을 수 없으니 국왕은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 임연과 함께 여기 궁궐로 와서 면대하여 사실대로 진술한다면, 이 그 시비를 들어본 연후에 알아서 처리하겠다. 또 왕식에게 별 탈이 없다고 듣긴 하였으나, 그의 생사 역시 보장할 수 없으니 반드시 입조해야 짐이 믿을 수 있겠다. 이미 두련가(頭輦哥, 튀렝게) 국왕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고려의 국경에 이르렀을 것이니, 기한이 지나도 오지 않는다면 즉시 악당의 우두머리를 추궁하고 군대를 보내서 남김없이 소탕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권26 > <세가> 권 제26 > 원종(元宗) 10년 > 11월 > 몽고 황제가 국왕·왕창·임연의 입조를 요구하다
쿠빌라이 칸의 명령 이후 임연은 결국 자신이 옹립한 왕창을 폐위시키고 원종을 다시 복위시키게 된다.
임연이 흑적의 요구대로 왕을 복위시키기로 하다

임술 임연(林衍)이 자기 집에서 흑적(黑的, 흑적)을 위하여 잔치를 열었는데, 흑적이 왕의 복위(復位) 건을 말하였다. 임연이 부득이하여 재추(宰樞)를 모아서 왕창(王淐)을 폐위시키고 왕을 복위시킬 것을 의논하였다.
권26 > <세가> 권 제26 > 원종(元宗) 10년 > 11월 > 임연이 흑적의 요구대로 왕을 복위시키기로 하다
이후에는 원나라 황제가 고려 국왕들을 책봉할때 기존의 책봉문서와는 달리 일종의 관직 임명장으로서 선명(宣命)을 부여하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원 황제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봉하다

신해 원(元)이 사신을 보내왔다.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동쪽의 번국(蕃國)인 그대 나라는 대대로 신하의 직분을 지켰으며, 아들이 아버지의 작위를 계승하였으니 전례(典禮)와 제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근자에 고려의 왕 왕거(王琚)가 유서(遺書)로 아뢰기를 그의 아들 왕장(王璋)이 작위를 물려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짐이 생각하건대 왕장은 친히 우리 세조(世祖) 황제의 외손이며 황실 종친[宗姬]의 사위로서 아름다운 계책과 훌륭한 공적은 모두 칭찬할 만하다. 오랫 동안 조정에 입시(入侍)하여 충성과 노력을 다하였으니 특별히 정동행중서성 우승상 고려 국왕(征東行中書省右丞相 高麗國王)으로 제수하며, 전과 같이 개부의동삼사 태자태사 상주국 부마도위 심양왕(開府儀同三司 太子太師 上柱國 駙馬都尉 瀋陽王)으로 한다. 지금부터는 더욱 하늘의 경계를 두려워하여 성실할 것이며 상국(上國)을 섬기는 정성을 힘써 닦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은 맡은 직분에 충실하여 각각 규범을 지킬 것이며, 뭇 백성[士庶]과 승려[緇], 도사[黃]들도 자기의 생업을 잃지 않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권33 > <세가> 권 제33 > 충선왕(忠宣王) 복위년 > 10월 > 원 황제가 조서를 보내 왕을 책봉하다
이후로도 원나라의 고려 국왕에 대한 일종의 임명권 행사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태상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다

임신 태상왕(太上王)이 금교(金郊)에서 〈왕을〉 전송하였는데, 술자리가 무르익자 〈원(元)의〉 사신 패로올(孛魯兀, 보로우)이 황제의 명으로 국왕(國王)의 인장(印章)을 빼앗아 일수왕(逸壽王)에게 주었다. 이에 태상왕이 복위(復位)하였다.
권33 > <세가> 권 제33 > 충선왕(忠宣王) 즉위년 > 8월 > 태상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다

이하 그 외의 사례들

《고려사》 > 권32 > <세가> 권 제32 > 충렬왕(忠烈王) 33년 > 3월 > 전 왕이 다시 국권을 장악하다

권34 > <세가> 권 제34 > 충선왕(忠宣王) 5년 > 3월 > 원 황제가 왕의 장자 도를 왕으로 책봉하다

권36 > <세가> 권 제36 > 충혜왕(忠惠王) 2년 > 2월 > 원 황제가 상왕을 복위시키고 국새의 회수를 명하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또한 원나라는 고려에 대하여 직접적인 사법권도 행사하였는데 그 대상에는 고려의 군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목록》】
>원 황제의 지시에 따라 경창궁주를 폐위시키고 왕종을 유배보내다

임인 조인규(趙仁規)와 인후(印侯)가 원(元)에서 돌아왔는데, 경창궁주(慶昌宮主)를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삼고 왕종(王琮)과 종동(終同)을 바닷섬으로 유배 보냈다.
권28 > <세가> 권 제28 > 충렬왕(忠烈王) 3년 > 9월 > 원 황제의 지시에 따라 경창궁주를 폐위시키고 왕종을 유배보내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순안후(順安侯) 왕종은 원종과 경창궁주(慶昌宮主) 유씨의 아들로서 왕자의 신분이었는데 어머니인 경창궁주와 함께 보위를 탐내어 충렬왕을 저주하다가 걸린 사건으로 인해 충렬왕에게 친국을 당하였다. 다행히도 재산을 몰수당하는 선에서 처벌이 끝날 뻔했지만, 당시 대신들이 "상국인 원나라에게 최종 결정을 물어보고 지시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여, 결국 충렬왕은 원나라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하였다. 그렇게 원나라의 지시에 의해 어머니인 경창궁주는 폐서인이 되었으며, 왕종은 섬으로 유배를 가야만 하였다.
【《목록》】
>임바얀투구스충선왕을 참소하다

인종이 죽게 되자 황태후도 또한 물러나 별궁(別宮)에 거주하게 되었으므로, 임백안독고사는 더욱 거리끼는 바가 없어져 팔사길(八思吉, 바스기)에게 뇌물을 후하게 바치고 온갖 방법으로 〈충선왕을〉 무고하고 참소하였다. 영종(英宗)은 사신을 파견하여 전민(田民)을 그에게 다시 되돌려주고, 토번(吐蕃, 티베트)으로 유배 보냈다. 〈그 뒤에도〉 임백안독고사의 참소가 그치지 않았으므로 화가 어디까지 미칠지 예측할 수 없었으나, 승상(丞相) 배주(拜住, 바이주)가 구원해 준 덕분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고려사》 > 권 122 > <열전> 권 제35 > 환자(宦者) > 임바얀투구스 > 임바얀투구스가 충선왕을 참소하다
충선왕이 당시 원나라의 환관이었던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 임바얀투구스)에게 무고를 당하여 유배를 간 사례는 원 간섭기 당시 고려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들중 하나이다.
원 사신 내치 등이 정동행성에서 을 체포해서 압송해가다

갑신 원(元)에서 교사(郊社)를 지내고 사면령을 반포한다는 명목으로 대경(大卿) 타적(朶赤, 도치)과 낭중(郞中) 별실가(別失哥, 베시게) 등 6인을 보내왔다. 왕이 병을 핑계로 영접하지 않으려 하자 고용보(高龍普)가 말하기를, 황제께서는 늘 국왕이 불경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왕께서 나가서 영접하지 않으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교외에서 영접하였다. 정동성(征東省)에서 조서를 듣는 도중에 타적과 내주(乃住, 나이주) 등이 왕을 발로 차고 결박하였다. 왕이 급히 원사(院使)인 고용보를 불렀지만, 고용보는 왕에게 〈도리어〉 욕을 하였다. 원의 사신들이 모두 칼을 빼어 들고 왕을 시종하는 군소(群小)들을 체포하였다. 백관들은 모두 도망쳐 숨었는데, 좌우사낭중(左右司郞中) 김영후(金永煦)와 만호(萬戶) 강호례(姜好禮), 밀직부사(密直副使) 최안우(崔安祐), 응양군(鷹揚軍) 김선장(金善莊) 등은 창에 찔리고, 지평(持平) 노준경(盧俊卿)과 용사(勇士) 2인은 살해되는 등 칼과 창에 찔린 자가 매우 많았다. 신예(辛裔)가 병사를 매복시켜 밖을 방어하며 조력하는 사이에 타적 등은 왕을 부축하여 말 한 필에 싣고 달려갔다. 왕이 조금만 쉬자고 청하였지만 타적 등은 칼을 뽑아 들고 협박하였다. 왕은 매우 괴로워서 술을 찾았는데 어떤 노파가 술을 바쳤다.
권 36 > <세가> 권 제36 > 충혜왕(후)(忠惠王(後)) 4년 > 11월 > 원 사신 내치 등이 정동행성에서 왕을 체포해서 압송해가다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참고로 고려 역사상 최악의 폭군인 충혜왕을 귀양보낼 때, 원나라 혜종은 "그대의 죄는 너무 커 그대의 피를 천하의 개들에게 줘도 부족할 지경이나, 짐은 사람 죽이기를 즐기지 않으므로 귀양을 보낸다"라는 내용을 함께 보냈다고 한다. 몽골/문화에서 피를 흘리게 하는 방법으로 죽이는 것은 철천지 원수 내지는 대역죄인에게나 쓰는 방법으로, 특히 왕족이 땅에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엄청난 행위로 취급받았음에도 저렇게 표현한 것은 당시 고려 국왕의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다.

심지어 고려를 제후국을 넘어 원의 한 지방으로 편입 시키려는 입성책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고려에는 이미 정동행성이 있었는데 이건 원나라의 지방 행정기관 성이긴 하였지만, 지위를 원나라의 행정으로 규정하기 위한 형식적인 기관이었으므로 이를 없애고 고려 자체를 원의 지방행정기관으로서 성을 설치하여 완전히 원나라에 편입시키자는 것이었다. 결국 고려의 모든 정치세력이 결사 반대하고. 고려 출신 환관인 방망고태(方忙古台)나 원 내부의 고려 사람들의 도움으로 논의 수준에서 무산된다.

4.1.1. 칭호 격하

원 간섭기(13세기 후반~14세기 중반)는 고려 왕실과 귀족들의 칭호가 원나라의 제도적 간섭에 의해 대거 격하된 시기이다. 이는 고려 왕실과 귀족 체계가 원나라 제국 체제 내에서 종속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음을 반영하며, 고려의 독립성을 약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작업이다.
  • 고려 왕의 격하
    원 간섭기 이전에 고려 왕은 자주적으로 국왕을 뜻하는 '고려국왕(高麗國王)' 칭호를 사용하였다. 원 간섭기 이후, 고려 왕은 원나라의 제후국 군주로 격하되며 '충(忠)'이라는 시호를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이는 원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예: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
  • 왕비 및 왕녀 칭호의 격하
    왕비는 이전에 고려 자체의 작호 체계를 따랐으나, 원 간섭기에는 원나라의 황실 작호를 따르도록 강제되었다.[45] 왕녀는 이전에 비공식적으로 왕실의 딸을 뜻하는 호칭이었으나, 원 간섭기에는 '공주(公主)'라는 원나라 체계의 작호로 바뀌었다. 이는 고려 왕실의 딸들이 원 황실의 권위에 종속되었음을 의미하며, 종종 원 황실의 측근과 결혼을 강요당했다.
  • 귀족 및 관직 작호의 격하
    고려의 고유한 관직 명칭은 원나라의 '중서성 체계'를 기반으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어 고려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은 중서령(中書令)이라는 원나라의 작호로 대체되었다.[46] 귀족 계급의 칭호도 격하되거나 원나라 작호로 변경되었다. 고려 귀족들은 종종 'ㅇㅇ왕(王)'이라는 칭호를 받았으나, 이는 원 황실의 종속 체계 내에서 허가된 것이다. 원의 영향력 아래 특정 귀족이 원 황실에 충성한 공로를 세운 경우 '정동행성 좌우사(征東行省 左右司)' 등 원나라 작호가 부여되었다.

4.2. 군권과 외교권 간섭(통제)

다루가치는 치안과 무기관리를 주관하는 임무도 수행했다. 그들은 개경에 巡馬所를 설치하여 매일 밤 순찰을 돌면서 사람들의 야간통행을 금지하고,[47] 수차례 일반인의 궁시 소지 금지령을 반포하여 군사를 제외한 고려인의 무장을 불허했다.[48] 톡토르와 이익이 부임 직후 강화도에 가서 내부를 정탐한 사실도 그곳이 대몽항쟁의 거점으로 재차 활용될 여지를 불식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49] 이 같은 조처의 궁극적 목적은 고려를 무장해제하고 철저하게 감시하여 반몽 저항행위 발생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데 있다고 판단된다.
-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9.

이 시기 고려는 상시 병력을 거느릴 수 없었고, 지방의 얼마 안 되는 농민들로 이루어진 예비 병력[50]마저도 원나라를 위한 군사 작전과 치안 유지 목적 용도로 밖엔 운용할 수 없었다. 수도 개경의 치안 병력인 순마소만이 사실상 유일한 군사집단이었다. 심지어 고려 병사들은 원나라의 허락이 없이는 무기조차 소지할 수 없었고[51], 모든 무기는 몽골군으로부터 검열을 받았야만 했다. 이것은 당시 고려군이 원나라로부터 철저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음은 물론이거니와 군사 훈련조차도 금지당했음을 뜻한다. 다음의 기록들은 그 증거다.
【《목록》】
>우리나라에 과거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있을 적에 전국 민가에 있는 활과 화살 가운데 쓸만한 것은 심지어 타포호(打捕戶, 수렵에 종사하는 가구)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조리 징발해 갔습니다. 또 이전 일본 정벌 당시 군사 5,300명이 지니고 갔던 갑옷과 활·화살은 이미 대부분 망실되었고 겨우 수습해 창고에 쌓아둔 것도 이미 사용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하물며 지금 새로 징집한 군사 4,600명은 애당초 갑옷과 병기가 아무 것도 없으니 무엇으로 자기 몸을 방비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황제께 잘 아뢰어 갑옷 5,000벌, 활 5,000개, 활줄 10,000개를 내려주심으로써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바랍니다.

ㅡ《고려사》, 1280년 11월, 2차 일본 원정 직전 ㅡ

이하 그 외의 기록들

부다루가치 초천익이 병장기를 모두 압수해가다

흑적이 일반인의 무기 소지를 금지하다

다음의 기록들은 역시 고려 정부가 훈련받은 정규군(상비군)을 거느리지 못했음을 증언해준다.
"저희나라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은 관계로 군인과 농민의 구분이 없으며 그 위에 생활마저 매우 피폐한 실정입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 15년(1274), 4월 ㅡ

"현재 탐라(耽羅)를 수비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사 1,000명은 앞서 일본 정벌 때에 본국에서 차출한 병력 5,300명 가운데 일부입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구가 드물어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없는 터에 다시 정토군(征討軍) 4,700명을 더 차출한다면 도저히 그 수를 채울 수가 없을 것이 우려 됩니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6년(1280), 11월 ㅡ

당시에 논의하기를,“본국에 백성은 있으나 군사가 없는데도 만호(萬戶)나 천호(千戶)의 금패·은패[52]를 많이 요청하고 있다. 만약 조정에 일이 생겼을 때 패의 수를 가지고 병사를 징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ㅡ 《고려사 절요》, 충렬왕 14년(1288), 2월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원래대로라면 고려는 2군 6위의 정규군 체제를 가동하고 있을테지만 몽골의 감시와 압력으로 끝내 2군 6위 체제를 복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몽골이 들어오기 전 이미 오래전부터 무신정권의 수탈과 사병화 작업으로 2군 6위의 정규군 체제가 붕괴되었다 하더라도 원의 내정 간섭을 받는 수십여년의 세월 동안 단 한 차례도 군제 복구에의 시도가 없었다는 것은 고려 상비군 운영에 원나라가 방해가 되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카다안의 침입(1290)에 대응한 충렬왕의 일화는 고려왕의 무능함을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되어지는 고사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당시 고려엔 동원 가능한 상비군이 없었다는 점이다. 결국 카다안의 침입에 고려 정부는 원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고, 전투 경험도 없는 지방의 미천한 농민들을 소집해 맞서는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때 원나라가 고려를 도와준 것은 원이 고려를 '보호해야할' 제후국이나 속주로 인정해서가 아니라 카다안 무리가 본국(元)을 위협하는 반란군 무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비군의 부재 상황은 공민왕 말기까지 지속되는데 다음의 기록은 이때까지 고려가 2군 6위의 정규군 체제를 복구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목록》】
>공민왕 5년(1356) 6월. 왕이 다음과 같이 하교했다. "각 지역에서 추가로 별초(別抄)를 정하면서 노약자와 단정(單丁, 장정이 1명인 집안)을 가리지 않고 강제로 멀리 수자리를 살러 나가게 만드는 바람에 이들이 오가느라 지쳐 잇달아 도피하는 실정이다."

ㅡ 《고려사》 권 82, <지> 제 36, 병(兵)2 ㅡ

공민왕21년(1372) 10월. 왜적의 전함 27척이 양천포(陽川浦)[53]로 침구해오자 장수들이 나가 싸웠으나 패배했다. 간관(諫官) 우현보(禹玄寶) 등이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훈련받지 않은 민(民)들을 전쟁에 내모는 것은 민들을 버리는 일입니다. 하물며 전쟁이라는 것은 위험한 일로서 이기느냐 지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는 평상시 미리 대비하지 않아서 민(民)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다가 하루아침에 변란이 발생하면 그제야 놀라고 당황하면서 민들을 마구 몰아다가 군대를 편성하는 형편입니다. 병사들은 적과 맞붙기도 전에 멀리서 바라보고도 뿔뿔이 도망쳐 버리니 이런 식으로 싸우면 무슨 승산이 있겠습니까? 비록 손무(孫武)와 오기(吳起)를 장수로 삼더라도 역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미리 장수를 선발한 후에 병졸을 모아 전투를 가르쳐 익히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북소리에 귀를 익히고 깃발에 눈을 숙달시키게 해 전투에 나서도 놀라지 않고 한번 싸워볼 만하다고 여기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강한 적을 만나도 모두 용감히 싸울 것이니 우왕좌왕하다가 무너져 버리는 일이 있겠습니까?"

ㅡ 《고려사》 권 81, <지> 제 35, 병(兵)1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규군의 부재는 1359년 모거경이 이끄는 홍건적 무리가 고려를 쳐들어왔을때 수도를 빼앗기고 복주[54]로 피신한 공민왕이 다시 원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시기 고려의 외교권 또한 침해당하였는데 고려는 몽골을 위해 일본과 교섭하도록 강요당했고, 남송과의 교류도 끊도록 강요당했다.
【《목록》】
>계축일. 몽고에서 흑적(黑的)과 은홍(殷弘) 등을 파견하여 조서에서 말하기를,“그대 나라 사람 조이(趙彝)가 와서 말하기를,‘일본은 고려와 가까운 이웃나라인데 법률과 정치가 제법 훌륭합니다. 한(漢)·당(唐) 이후로 때때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기도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지금 흑적 등을 일본으로 파견하여 우호 관계를 맺으려 하니, 그대는 사신이 그 땅에 도달하도록 안내하여 동쪽 사람들을 깨우치고 중국의 의를 사모하도록 하라. 이 일은 경(卿)이 책임지고, 풍랑이 험하다는 말로 핑계대지 말고 이전에 일본과 통한 적이 없다고 하며 혹시 그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보낸 사신을 거부할까 염려된다고 핑계대지 말라. 경의 충성심은 이 일로 드러날 것이니 각별히 힘쓰라.”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1266년 11월 25일 ㅡ

또 다른 조서(詔書)는 다음과 같았다.

... (중략) ... "지난해의 경우, 어떤 자가 ‘고려남송(南宋) 및 일본과 서로 내왕한다.’고 하기에 사실 여부를 경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은 소인배들의 말에 현혹된 나머지 그런 일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었다. 금년 남송의 상선이 고려에 왔을 때 경이 우리 몰래 떠나보냈다가 행성에서 따지자 그제서야 행성에 알리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인정했다." ... (중략) ... "지금 이후로 남송이나 일본이든 간에 만약 그들과 무슨 일이 발생하면 즉각 군사·군마·전함·군량을 조달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 ... (중략) ... 우리가 육지로 나온 뒤에 송나라 상선이 와서 정박한 것을 우리 조정에서 몰래 돌려보냈는데, 행성에서 이 사실을 탐지했기 때문에 황제가 조서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다.

ㅡ 《고려사》, 1270년 12월 20일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4.3. 강제 징병과 징용·약탈과 주민 납치, 월권행위

4.3.1. 약탈과 주민 납치, 월권행위

무엇보다 고려가 공식적으로 원나라에 입조하고 주권을 이양한 후에도 몽고군이 고려에 들어와 고려 주민들을 상대로 자행한 무차별적 인신 구속과 약탈 행위는 당시 고려가 원나라의 특수한 지배를 받는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 있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여몽연합군이 삼별초 토벌을 위해 진도에 상륙했을 당시 몽골 병사들은 사람과 보물을 노획했으며, 이에 앞서 강화도를 접수했을 당시에도 몽골군 무리들이 섬의 곳곳을 누비며 임의로 주민들을 체포하고 약탈을 벌였다. 당시 삼별초는 이미 진도로 주둔지를 옮긴 뒤라서 전투는 커녕 몽골군을 자극할만한 일체의 소란 행위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몽골군은 고려 주민들을 상대로 불법을 자행하였다.
【《목록》】
>두련가(頭輦哥, 튀렝게) 국왕이 타자알(朶刺歹, 도라다이)을 보내 군사 2,000명을 이끌고 강화(江華)로 들어가게 하니, 왕이 타자알이 강화에 남아있는 백성을 반역자라고 생각하여 살육과 약탈을 저지를까 염려하여 들어가지 말 것을 청하였으나, 타자알은 듣지 않고 그대로 들어가서 군대를 풀어 재물을 약탈하였으므로 인심이 흉흉하였다.

ㅡ 《고려사》, 1270년 6월 5일 ㅡ

"두련가(頭輦哥, 튀렝게)가 사람을 시켜 강화성 안의 민가를 불사르니, 불탄 미곡과 재물의 양을 헤아릴 수 없었다."

ㅡ 《고려사》, 1270년 8월 11일 ㅡ
이에 대하여 고려왕은 어사대부(御史大夫)[55] 원부(元傅)를 쿠빌라이에게 보내어 정식으로 항의하게 하였으나 되려 쿠빌라이는 이를 소인배의 간언으로 몰아붙이며 고려왕을 꾸짖는 조서를 내려 돌려보낸다.
조서(詔書)에서 말하기를,“배신(陪臣) 원부(元傅) 등이 와서 두련가(頭輦哥, 튀렝게) 국왕과 행성(行省) 관리들이 몇 가지 시끄러운 사건을 일으켰다고 보고하였는데, 지금 직접 대질하였더니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이 다시 말하기를, 보고 내용은 경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이라고 하니, 이것은 경의 뜻이 아니고 소인배(小人輩)들의 소행으로 보인다. 지난번에 경이 짐에게 말하기를, ‘소인배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라고 하기에 짐도 타이르며 말하기를, ‘짐이 혹시 이전에 소인배의 말을 들었는지 잘 알지 못하는데, 경은 조심하여 소인배의 말을 듣는 것을 삼가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제 보니 경 또한 소인배의 말을 들었다는 것이 어찌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는가? 소인배 같은 자들은 또 전대(前代)의 고사(古事)를 늘어놓거나 조상 이래의 법도를 늘어놓을 텐데, 비록 전대의 고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경의 조상 이래의 법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없겠는가? 마땅히 좋은 것을 선택하여 따르고, 나쁜 것을 고치는 것이 옳다. 짐이 경에게 어찌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겠는가? 만약 나쁜 마음을 쓰려고 하였다면 당연히 작년에 그러했을 것이다.”

ㅡ 《고려사》, 원종11년(1270), 12월 20일 ㅡ
1년 후 몽골군이 진도를 접수했을때도 똑같은 상황이 재현되었다.
"적들(삼별초)에게 사로잡혔던 강도(江都, 강화도)의 사녀(士女)들과 진귀한 보석들 및 진도(珍島)의 거주민들은 모두 몽고(蒙古) 병사들에 의해 노획되었다."

ㅡ 《고려사》, 1271년 5월 ㅡ

상장군(上將軍) 정자여(鄭子璵)를 몽고(蒙古)에 파견하여 적도를 평정한 것에 대하여 사례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적선(賊船) 중에서 도망간 것이 적지 않으므로 화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있으며, 또 역적의 처자식과 일족(一族)은 모두 죄를 받을 것입니다. 다만 대소(大小) 인민(人民)이 먼저 옛 수도로 나왔는데, 그들의 부모 친척과 노비 가운데 역적에 의해 납치되었던 사람들이 지금 다시 귀국[上國] 군대에게 잡혀서 모두 귀국으로 잡혀갔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는 장수들을 잘 타일러서 모두 돌려보내 주소서.
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1271년 5월 ㅡ
이에 고려왕이 정식으로 항의해보지만 이번에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이 이에 원수(元帥) 흔도(忻都, 힌두)에게 연락하여 고려 백성으로서 위협에 못 이겨 따라간 자들을 반환하여 달라고 하였으나 흔도가 듣지 않았다.

ㅡ 《고려사》, 1271년 8월 ㅡ
중서성(中書省)에도 글을 보내 말하기를,“삼가 제공(諸公)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황제의 은택이 베풀어지도록 주선하여 역적에게 끌려간 백성들이 모두 돌아오게 하였으니 온 나라가 우러러 감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협에 의해 따라간 신민(臣民)의 친척 중에는 난리가 일어났을 때 혹은 이쪽으로 왔고 혹은 저쪽으로 가기도 하였으며, 사고로 인하여 빨리 빠져나오지 못하다가 온 가족이 위협 당한 자도 있습니다. 지금 귀국 군대(官軍)는 이들을 모두 역적의 무리라고 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령이 내려지기 전에 나누어 가진 사람들을 각각 전라도(全羅道)·경상도(慶尙道)·개경(王京)·황주(黃州)·봉주(鳳州) 등지로 분산 거주시키고 있으며, 혹은 서로 앞다투어 인근 지역에 숨겨 놓기도 하고 혹은 먼저 몰래 몽고로 보내니 비록 친척이 있더라도 서로 만나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혹은 다른 섬이나 고을에서 진도로 들어갔다가 붙들린 자도 있으며 혹은 귀국의 군대가 다른 섬이나 고을로 나뉘어 가서 잡아온 자도 있는데, 말로는 그들을 분간하여 고려나 귀국 군대에게 준다고 하지만 사실은 한 곳에 모아놓고 철저히 조사하여 석방을 허락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또 노비와 같은 자들은 각기 자기 주인을 따르는 자들로, 그 주인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육지로 나올 때 가산을 조사하고 정리하기 위하여 강화도(江華島)로 돌아간 자들이 있는데 모두 납치를 당하였습니다. 지금 모두 잡아다가 역적의 무리와 같다고 하면 황제의 은혜를 입어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ㅡ 《고려사》, 1271년 8월 ㅡ

9월 경오 재추(宰樞)가 탈타아(脫朶兒, 톡토르)와 함께 흔도(忻都, 힌두)의 주둔지 오산(烏山)에 가서 역적 외의 사람들을 반환하라고 요청하였다. 흔도가 고집을 부리며 허락하지 않자, 탈타아가 황제의 명령을 거론하면서 극력 따져서 어느 정도만 추려서 데리고 나오게 하였다.

ㅡ 《고려사》, 1271년 9월 ㅡ
그마저도 몽골인 다루가치 톡토르(脫朶兒, 탈타아)[56]가 황제의 명령을 거론하며 부원수를 설득하여 노획된 고려인들 중 일부만을 되찾아올 수 있었을 뿐이다. 이것은 당시 원나라 정부가 고려에서 자행되는 몽고군의 불법 행위들을 묵인해주었음을 뜻한다. 나중에 충렬왕이 이 문제를 한 차례 더 거론하지만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카베(哈伯)와 보라(孛剌)가 힌두(忻都)에게, “그대 휘하의 군사 중에 고려 백성들을 처족(妻族, 처첩)이라고 속이고 데려오는 자가 있다고 하던데 그대는 황제의 분부가 무섭지 않은가?”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고 왕에게는,“진도와 탐라를 정벌할 당시 군대에게 포로가 된 자에 대해서는 국왕께서도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마십시오.”하고 선을 그었다.

ㅡ 《고려사》, 1278년 7월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그 외에도 김방경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이 삼별초로부터 영흥도(靈興島)를 탈환했을 때도 몽골 장수 송만호(宋萬戶)가 삼별초에 억류되어 있던 고려 주민 1,000여명을 포로로 잡아가는 등, 몽골은 고려에 들어와 군사 활동을 벌일 때마다 민간인들을 전리품으로 삼았다. 그때마다 늘 옆에 있던 고려군 지휘관들은 이를 제재할 권한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목록》】
>김방경(金方慶)을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군사 60여인을 거느리고 몽고의 송만호 등 군사 1,000 여 인과 함께 삼별초를 추격하여 토벌하게 하였다. 바다 한가운데에 이르러 적선이 영흥도(靈興島)에 정박한 것을 바라보고, 김방경이 그를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송만호가 두려워 이를 제지하였다. 적이 이내 달아났다. 적중에서 도망하여 돌아온 자가 남녀노소를 아울러 1,000여 인이었는데, 송만호가 적당(賊黨)이라고 하며 모두 포로로 잡아 돌아갔다.

ㅡ 《고려사》, 1271년 4월 24일 ㅡ
대부도(大部島)에서는 몽골군의 수탈을 참다 못한 주민들이 봉기하는 일도 있었다.
착량(窄梁)을 지키는 몽고(蒙古) 군사가 대부도(大部島)에 들어가서 주민을 침탈하자 백성들이 매우 원망하였는데, 대부도 사람들이 숭겸(崇謙)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몽고인 6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ㅡ 《고려사》, 1271년 2월 7일 ㅡ
또한 여몽연합군이 진도를 점령했을 당시 원의 장수 홍다구가 삼별초에 의해 강제 옹립된 원종의 사촌 승화후 왕온(王溫)과 그의 아들을 적법한 사법 절차 없이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원나라 정부로부터 아무런 문책도, 처벌도 받지 않았다.
위왕(僞王)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은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의 동모형(同母兄)이었다. 왕준이 왕희와 왕옹에게 당부하기를, “만약 전쟁에서 이긴다면, 마땅히 나의 형을 죽음에서 구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홍차구가 먼저 진입하면서 왕온과 그의 아들 왕환(王桓)을 살해하였다.

ㅡ 《고려사》, 1271년 5월 ㅡ
○2월. 왕이 흔도(忻都, 힌두)·홍차구(洪茶丘)와 함께 김방경(金方慶)을 재차 국문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소국상국(上國)을 하늘과 같이 떠받들고 어버이처럼 사랑하는데, 어찌 하늘을 배반하고 어버이를 거슬러 스스로 멸망을 초래하겠습니까. 저는 차라리 억울하게 죽을지언정 거짓으로 자복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홍차구가 기필코 그를 자복시키고자 참혹한 형을 더하니, 몸에 멀쩡한 피부가 없었고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홍차구가 은밀히 왕의 좌우를 회유하기를, “날씨가 매우 춥고 비와 눈이 그치지 않는다. 왕 또한 문초하는 일 때문에 피곤해하신다. 만약 김방경으로 하여금 죄를 자복하도록 한다면 죄가 한 사람에게만 그쳐 법으로 유배형에 해당될 뿐일 것이니,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겠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이 말을 믿었고 또한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비록 자수한다고 해도 천자께서 어질고 슬기로우시니 장차 그 진정과 거짓을 밝혀 사형에 처하지 않도록 하실 것인데, 어찌하여 이와 같이 스스로 고통을 받는가.”라고 하였다. 김방경이 말하기를, 상(上)께서 이렇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군인 출신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간과 뇌를 땅바닥에 쏟을지라도[肝腦塗地] 나라에 보답할 수 없는데 어찌 제 몸을 아끼고자 거짓 자복을 함으로써 사직을 저버리겠습니까.”라고 하고 홍차구를 바라보며 “죽이고 싶다면 어서 죽여라. 나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갑옷을 숨긴 일만을 죄로 삼아 김방경을 대청도(大靑島)에, 김흔(金忻)을 백령도(白翎島)에 유배 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석방하였다. 김방경이 유배를 갈 때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

ㅡ 《고려사절요》, 충렬왕 4년(1278), 2월
홍다구는 또한 고려 장수 김방경에게 역죄를 씌워 고려왕이 보는 앞에서 고려의 관리(재상)인 김방경을 고문하는 만행을 저질렀음에도 고려왕은 이를 제재할 권한이 없었다.[57] 역설적으로 쿠빌라이 칸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홍다구와 위득유 등을 소환하여 꾸짖고는 곧바로 김방경을 풀어주라 이르게 된다.

다음의 기록은 심지어 고려에 주둔한 몽고군의 사소한 불법 행위들을 제재하는데도 원나라 황제의 인가를 직접 받아야 했음을 보여준다.
을유. 황주(黃州)와 봉주(鳳州)의 경략사(經略使)가 사람을 시켜 원(元)의 조서(詔書)를 가지고 왔으므로 승도들이 나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그 조서에서 말하기를, “원의 군사들이 사원에서 소란을 일으켜 불경불상을 훼손시키는 것을 금지하여 승려들이 안심하고 불법(佛法)을 닦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1273년 2월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원의 일개 관료들이 고려 땅에 들어와서 고려 지도부의 허가도 받지 않고 군사작전을 비롯한 각종 불법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있었던 것은 고려의 주권이 침해당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고려 정부의 역할 마저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린 사건이었다. 이처럼 당시 원나라는 원하면 언제든지 고려 정부의 행정력을 거치지 않고서도 고려의 내정을 통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고려는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는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고려에서 원나라 관리에 의해 자행된 각종 노역에의 동원과 물자 수탈은 이러한 직접 지배의 대표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4.3.2. 강제 징병과 징용

고려 백성들은 삼별초 토벌과 일본 원정을 위한 징용과 징병을 강제당했는데, 변변찮은 전투 병력이 없던 고려는 이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징발당하였다. 또한 원정이 없는 기간에도 원나라를 위한 각종 노역에 징발당하였다. 주요 내용 몇 가지만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강제 징병과 징용 관련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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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대장군(大將軍) 최동수(崔東秀)를 오도지(吾都止)와 함께 몽고에 보내 보고하게 하였는데, 대략 내용에 이르기를,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는 전성기에도 인구가 오히려 적었고, 하물며 신묘년(1231)부터 30년간 전쟁과 전염병이 계속되어 사망자가 매우 많았습니다. 현재 호적에 올라있는 남은 백성도 겨우 농사에 복귀하였으며, 군대에 소속된 사람들도 건장하고 날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명령을 어기기 어려우므로 다방면으로 징발하여 겨우 1만 명을 확보하였고, 전함은 이미 연해의 관리에게 맡겨서 재목을 마련하여 건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ㅡ 1268년 8월 ㅡ
몽고(蒙古)에서 주부개(周夫介)를 보내어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중략) "경은 부근에서 군사 6,000인을 뽑아 나누어 편성하여 진도(珍島)를 공격하여 점령하라." (중략) 부위병(府衛兵, 정규군)을 사열하였는데 정원을 채우지 못하였다. 이에 문,무 산직(散職)[58], 백정(白丁)[59], 잡색(雜色)[60] 및 승도(僧徒, 승려)를 아울러 사열함으로써 이를 충원하였다.
ㅡ 1271년 4월 ㅡ
원종(元宗) 15년(1274) 5월에 동정군(東征軍, 일본 원정군)을 뽑았는데, 각 영부(領府)에서 동반(東班, 문관)의 산직인(散職人) 및 백정(白丁)을 다투어 붙잡아 신고하였다. 혹은 사노(私奴)를 잘못 붙잡은 자도 있었다.
ㅡ 1274년 5월 ㅡ
"저희나라는 원래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는 터라 그들을 몇 달 동안이나 부역시킨다면 농사일은 어떻게 될지 우려됩니다."
ㅡ 1274년 2월 ㅡ
제주(濟州) 다루가치(達魯花赤, 감독관)가 사자를 파견해 수졸(戍卒)을 보내달라고 독촉하자 왕이 김광원(金光遠) 등에게 명하여 4령(領, 약 4,000명)의 병력을 징발하게 했다. 심지어 왕을 곁에서 시종하는 겸직 관리라도 남김없이 뽑아들인 다음 장군 양공적(梁公勣) 등으로 하여금 인솔해 가도록 했다.
ㅡ 1275년 8월 ㅡ
탐라와 진도(珍島)를 함락시킬 때 상국(上國)의 군대에게 포로가 된 자 중에서 도망한 자가 있으면 추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만, 함락된 뒤에 함께 부역한 평민(平民)을 포로라고 거짓말 하면서 강제로 노역에 충당시킨 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니 금지시켜 주기 바랍니다.
ㅡ 1278년 7월 ㅡ
"현재 탐라(耽羅)를 수비하고 있는 우리나라 군사 1천 명은 앞서 일본 정벌 때에 본국에서 차출한 병력 5,300명 가운데 일부입니다. 우리나라는 땅이 좁고 인구가 드물어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이 없는 터에, 다시 정토군(征討軍) 4,700명을 더 차출한다면 도저히 그 수를 채울 수가 없을 것이 우려 됩니다." ... (중략) ,,, "하물며 지금 새로 징집한 군사 4,600명은 애당초 갑옷과 병기가 아무 것도 없으니 무엇으로 자기 몸을 방비할 수 있겠습니까?"
ㅡ 1280년 11월 ㅡ
충렬왕(忠烈王) 9년(1283) 3월에 중방(重房)에서 산직(散職)·학생(學生)·백정(白丁)을 조사하여 동정군(東征軍)에 충당하였는데, 때때로 집을 버리고 도망하는 자가 있었다. 중방에서 요청하기를, "전정(田丁)을 빼앗아 종군(從軍)하는 자에게 주고, 이웃에서 고발하지 않으면 백금(白金) 1근(斤)을 징수하고, 집에 숨겨준 자는 백금 2근을 징수하십시오."라고 하였다.
ㅡ 1283년 3월 ㅡ
원(元)에서 단사관(斷事官) 소독해(蘇獨海)를 보내와 시찰하고, 아울러 일본을 정벌할 함선의 건조 상황을 감독하게 하였다.
ㅡ 1285년 11월 ㅡ
요동(遼東, 랴오닝)에 기근이 들자 원(元)에서 장수지(張守智) 등을 보내어 본국으로 하여금 군량 10만 석을 거두어 요동(遼東)으로 옮기게 하였다. .... (중략) ....감찰사승(監察司丞) 여문취(呂文就)와 직사관(直史館) 진과(陳果) 등을 파견하여 배 483척과 선원 1,314명을 동원하여 쌀 64,000석(石)을 개주(盖州, 랴오닝성 가이펑)로 운송하게 하였다.
ㅡ1289년 2~3월 ㅡ
카이두(海都)의 군사들이 원나라 변방(邊方)을 침범하므로 황제가 친히 정벌에 나서고자 아단부카(阿旦不花)를 보내 군사를 징발하게 했다. 홍자번(洪子藩)과 조인규(趙仁規) 등으로 하여금 봉은사(奉恩寺)에 집결해 군사를 모병하게 하는 한편 각 도(道)에서도 군사를 징발하게 했다. 인후(印侯)와 김흔(金忻)을 시켜 큰 네거리에서 군사를 검열하게 했다
ㅡ 1289년 7~8월 ㅡ
나유(羅裕)가 개주(盖州)에서 돌아와서 말하기를, “군량을 수송하던 선박 중에서 부서진 것이 44척, 바람을 만나 유실된 것이 9척, 쌀 중에서 침몰된 것이 5,305석(石), 양식이 모두 떨어져서 훔쳐 먹은 것이 908석 4두(斗), 익사자 119명, 병사자 4명, 도망자 67명, 행방불명자 86명입니다.”라고 하였다.
ㅡ 1289년 10월 ㅡ
갑진일. 원(元)의 선정원(宣政院)에서 사람을 보내와서 선박 건조를 독촉하였다. 당시에 황태후가 불사(佛寺, 절)를 지으려고 하자 홍복원(洪福源)의 손자인 홍중희(洪重喜)와 홍중경(洪重慶) 등이 아뢰기를, “백두산(白頭山)에는 좋은 목재가 많습니다. 만약 심양군(瀋陽軍) 2,000명을 뽑아 보내어 벌목하고 압록강으로 떠내려 보낸 다음, 고려를 시켜 배로 실어 수송하게 하면 편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요양행성(遼陽行省) 선사(宣使) 유현(劉顯) 등을 보내와서 고려에서 배 100척을 만들고 쌀 3,000석을 실어 나르게 하였으므로 그 폐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때 두 궁궐의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배를 만드는 공사도 또한 급하여, 서해도(西海道)와 교주도(交州道), 양광도(楊廣道) 백성들이 더욱 그 피해를 입었다.
ㅡ 1309 3월 ㅡ
기사일. 원(元) 추밀원(樞密院)이 수군천호(水軍千戶) 상중신(常仲信)을 보내와서 선박 건조를 독촉하였다.
ㅡ 1309년 4월 ㅡ

4.4. 농우(農牛)와 쌀 수탈

4.4.1. 농우 수탈

원나라는 삼별초 토벌과 일본 원정을 명분으로 전국 각지에 수시로 농무별감(農務別監)을 파견해 헐값으로 백성들의 소와 농기구를 구입해갔는데, 거의 빼앗다시피한 반 강제적 수탈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고려의 목소리는 철저히 무시되고 외면되었다. 고려는 총 5,000여 마리의 농우를 원나라로부터 빼앗겼는데 이 당시 전국 농가의 사육소 수는 10,000여 마리로 추정된다. (참고로 조선 초 전국의 사육소는 2~30,000 마리)
또 몽고 중서성(中書省)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다."황제의 뜻을 받들어 둔전에 필요한 소 6,000 두 중 동경(東京) 등지에서 보낸 3,000 두를 제외한 나머지 3,000 두는 경략사(經略司)로 하여금 돈을 수령해 고려 현지에서 사들이도록 조치했소. 그 외 농기구·종자·사료 등의 물품 및 가을까지 필요한 군량은 그 쪽에서 맡아 부족하지 않게 전량을 공급해 주기 바라오." 계유일. 봉주경략사(鳳州經略司)에서 비단 12,350필을 가지고 와서 농우(農牛)를 사갔다.[61]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3월 ㅡ

이에 원종은 전중감(殿中監)[62] 곽여필(郭汝弼)을 몽골에 보내 고려의 사정을 알리는 다음과 같은 표문을 전달하게 한다.
"또 상국 중서성에서 공문을 보내 봉주의 둔전에 필요한 농우·농기구·종자·군량 등에 관한 일을 통보해 왔습니다. 농우에 관련해서는 지난 번 보고드린 바와 같이 기르고는 있으나 아무리 넉넉한 자라도 한두 마리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가난한 자는 대부분 쟁기로 밭을 갈거나 혹 서로 소를 임대해 부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현재 시골에서 기르는 소들은 전라도 지역으로 군량을 수송하느라 배를 곯고 피로해 반 넘게 폐사해 버렸습니다."

"농기구·농우·종자·식량이란 것은 모두가 백성들의 생존 기반인데 이것들을 모조리 빼앗아 상국의 군대에 공급하면 우리나라의 잔존한 백성들은 거듭 기아 상태에 빠져 소멸해 버리고 말 것입니다. 제가 이 점을 참으로 민망히 여기고 있사오니, 폐하께서 밝게 살펴주시기만 간곡히 바라고 있습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3월 ㅡ

그러나 고려왕의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되려 고려는 농우 2,000마리를 추가로 공급하라는 원의 요청을 받아들이게 된다.
병신일. 각 도에 농무별감(農務別監)을 보내 농우와 농기구를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와 봉주(鳳州 :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납부할 것을 독촉하게 했다.

"여러 번 독촉하기에 농우 1,010두, 농기구 1,300개, 종자 1,500석을 공급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또 올해 안으로 계속 뒤진다면 농우 990두를 채울 수 있겠기에 그것으로 숫자를 재약정했습니다."

"아아! 우리 백성들도 모두 황제의 백성인데 농우·농기구·종자를 모조리 빼앗아 생업을 상실하게 만들면 그들이 모두 굶어죽게 될까 걱정입니다. 또한 여기에 사는 사람은 번다한 부역으로 힘이 다해 고통을 견딜 수 없는 반면 역적 편에 선 자가 굶주림이나 고통이 없다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역적 편에 설지도 모를 일입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12년(1271), 4월 ㅡ

4.4.2. 쌀 수탈

원나라는 쌀 수탈을 위해 전함병량도감(戰艦兵糧都監)을 설치하고 고려로부터 각종 군사원정을 위한 선박과 군량미를 보급받았는데, 기록에 잡히는 수치로만 미곡 약 85만 석[63], 우마 사료 46만 6천여 석, 종자 15,000여 석을 원 정부로부터 수탈당했다. 물론 이 수치는 최소치이며 기록에 잡히지 않는 수탈량은 누락되었다. 또한 원 강점기의 세월을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그 수치는 더 증가될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쌀 수탈 관련 수치와 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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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0~72년(진도 원정)
"정규군 6,000명이 몰고 다니는 말을 대략 1명당 3필로 계산하면 모두 18,000필에 달하는 바, 1필에 하루 5되씩 사료를 지급한다면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쳐서 상국의 단위로 135,000석에 이르며, 본국의 단위로는 27만 석에 이릅니다. 거기에다 농우 4,000마리에 드는 사료가 1마리당 하루 5되씩 든다면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상국의 단위로 36,000석이며, 본국의 단위로는 72,000석이나 됩니다."

ㅡ 《고려사》, 원종12년(1271), 8월 ㅡ
경오년(1270)으로부터 금년 4월 그믐에 이르기까지 이미 요구에 따라 조달한 군량이 109,199석 6두, 마소의 사료가 432,005석 6두, 수도의 객관에서 사신 접대용으로 쓴 쌀이 17,151석, 종자가 15,000석으로 상세한 세목은 별도로 첨부한 도표에 나와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백성들이 진작부터 궁핍에 절어 전자에 할당받은 수량도 가을까지 댈 수 없을까 고민인데, 하물며 다시 첨가까지 하시니 이 일을 어찌하겠습니까?

ㅡ 1272년 4월 ㅡ
: 군량 11만여 석 + 사신 접대용 쌀 17,000여 석 = 127,000여 석 / 우마 사료 43만 2천여 석 / 종자 15,000여 석


1273년(제주도 원정)
원수(元帥) 김방경(金方慶)이 아뢰기를, “흔도(忻都, 힌두)가 명령하기를, ‘탐라(耽羅) 토벌군의 군량은 반드시 3개월 분량은 되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이 수량을 채우려면 반드시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의 녹전(祿轉)으로 보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재추(宰樞)에게 대책을 묻자, 모두 말하기를, "강화도에서 수도로 나온 이래 각 도(道)에서 조운(漕運)으로 운송한 곡식은 모두 사용하여 창고는 비고, 경략사(經略司)와 기타 제반 공급도 오히려 지탱할 수 없습니다." "경상도(慶尙道)의 경오년(庚午年, 1270)과 신미년(辛未年, 1271)의 2년간의 조세를 운송하여 군량을 도와주고, 전주와 나주의 임신년(壬申年, 1272) 녹전(祿轉)[64]을 전부 우리에게 납부하게 하소서."라고 하자, 왕이 이를 따랐다.

ㅡ 《고려사》, 1273년 4월 ㅡ
또 지난해(1273) 4월에는 대군이 탐라에 들어가 적을 토벌하고 5월 그믐에야 돌아오는 통에 백성들이 농사철을 맞추지 못해 가을에 수확할 곡식이 없었기 때문에 다시 관청과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여 배를 건조하는 인부와 기술자, 주둔군, 행군하는 부대, 제주 백성들에게 무려 40,000석이 넘는 군량과 사료를 공급하는 부담을 졌습니다.

ㅡ 1274년 2월 ㅡ
: 군량 최소 40,000석 이상 / 기타 사료


1274년(1차 일본 원정)
정월 보름날부터 조선을 시작했는데 기술자와 일꾼이 모두 30,500명이니 1인당 1일 3식으로 계산하면 34,312석 5두를 지급해야 합니다. 또 정월 19일에 받은 중서성의 공문에는, ‘힌두(忻都) 관인(官人) 휘하의 군사 4,500명이 금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까지 행군하는데 필요한 군량 1,570석(碩)과 주둔지에서 필요한 군량과 사료 및 조선감독(造船監督) 홍총관(洪摠管)의 군사 500명의 행군에 필요한 군량 85석도 부담하라.’고 했습니다. 또 제주(濟州)에 남아 있는 상국의 군사와 우리나라의 사졸 1,400명의 7개월 분 군량과 사료는 이미 지급을 완료했는데 모두 2,904석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주(羅州)에 뒤처져있는 월로활단적(粤魯闊端赤)의 군량 8,000석과 말 사료 1,325석도 모두 저희나라에서 지급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또 지원(至元) 10년(1273) 12월에 접수한 중서성의 공문에는, 제주 백성 10,223명에게 식량을 모두 공급하라고 했으니 최근에는 군량과 사료를 도저히 조달할 길이 없어 관청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량을 거둬들였습니다.

ㅡ 《고려사》, 1274년 2월 ㅡ
: 일꾼 3만여 명의 식량 34,000여 석 + 군량 1,570석 + 85석 + 2,904석 + 8,000석 = 46,559석
그런데 또 다시 중서성은 문서를 보내 봉주둔전군(鳳州屯田軍)에게 매달 부족한 군량 2,047석과 소 사료 1,001석 7두를 부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종전군(種田軍)에게는 농우(農牛)와 농기구, 종자와 첫 해 가을까지의 식량을 지급하였으며, 또한 지원 9년(1272)의 부족한 식량까지도 이미 넉넉히 지급하였습니다. 또 작년에는 농사가 전혀 수재나 병충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그것을 구실로 내세워 중서성의 지시를 받아 우리나라가 공급하게끔 만드니, 그 지시를 감히 어길 수는 없지만 이처럼 없는 말을 꾸며 보고함으로써 해마다 공급하게 하고 공급 기한도 정하지 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이는 정말로 민망한 일이니 바라건대 이 부담들을 모두 면제하여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혜택을 베풀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ㅡ 1274년 2월 ㅡ
: 봉주둔전군(몽고군)에게 첫 해 가을까지 지급한 식량은 2,047석 x 약 10개월 = 20,470석
원(元)이 여룡우사(汝龍于思)를 파견하여 견(絹) 33,154필을 가지고 와서 군량(軍粮)을 사들이게 하였다. 그리하여 곧 관견도감(官絹都監)을 설치하고 견직(絹織)을 전국의 모든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개경(王京)에 4,054필, 충청도(忠淸道)에 4,000필, 경상도(慶尙道)에 20,000필, 전라도(全羅道)에 5,000필을 할당하여 매매하니 견 1필에 쌀 12두(斗)[65]로 계산하였다.

ㅡ 1274년 4월 ㅡ
: 4,054 + 4,000 + 20,000 + 5,000 = 33,054 x 12두 = 396,648두.
쌀 1석 당 10두에 해당하므로 396,648두는 39,664석에 해당.

∴ 1차 일본원정(1274) 기간 동안 징발당한 쌀의 양 = 46,559석 + 20,470석 + 39,664석 = 106,693석(약 10만석)


1277년
원정이 없는 기간에도 고려는 몽골 주둔군을 위한 식량을 공급해야 했다.
"방금 중서성(中書省)의 공문을 접수한 바, 그 내용은 추밀원(樞密院)이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홍다구(洪茶丘)를 고려에 보내 힌두(忻都)와 함께 일본원정에서 돌아온 3,000명을 훈련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전번 추밀원에서는 ‘참군(站軍) 200명과 환가둔전군(還家屯田軍)[66] 3,000명 및 코데치(闊端赤)[67]에게는 앞서 일본을 정벌하러 갈 때와 꼭 같이 식량과 사료를 공급하라.’고 공문으로 알려왔습니다. .... (중략) .... 추밀원의 공문을 받기 전에도 저희 나라는 지원7년(1270) 이래 진도(珍島)·탐라(耽羅)·일본을 정벌했던 상국 군대의 군량을 모두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공급한 바 있습니다. 그 후에도 현재 있는 합포진변군(合浦鎭邊軍), 탐라방호군(耽羅防護軍), 염주(塩州)·백주(白州)의 귀부군(歸附軍, 몽골에 투항한 남송군), 코데치(闊端赤) 등에게 1년간 군량 18,629석(石) 2두(斗)와 우마의 사료 32,952석(石) 6두(斗)를 지급했으니 이는 모두 중국의 도량형에 따라 계산한 것으로 역시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들였던 것입니다.

ㅡ 《고려사》, 1277년 2월 ㅡ
: 중국 기준 군량 18,629석 x 2 = 고려 기준 37,258석으로 대략 37,000여 석 / 우마의 사료 33,000여 석


1278년
봄 정월. 서해도의 전미(轉米)를 원수 홍차구(洪茶丘)의 군대에 지급하고, 아울러 백관에게 꼴과 콩을 내어 흔도(忻都, 힌두)·홍차구의 군대에 배급할 것을 명령하였다.

ㅡ 《고려사》, 1278년 1월 ㅡ


1280년~1281년(2차 일본 원정)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병선 900척, 뱃사공과 선원 15,000명, 정군(正軍) 10,000명 및 중국 단위로 계산해 군량 11만 석을 마련했으며, 기타 군수물자도 셀 수 없을 만큼 갖추었으니, 이제 있는 힘을 다해 황제의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 ...(중략)... 현재의 군량은 중국 단위로 70,727석을 제외해 놓고는 전국적으로 공적·사적인 비축분이 죄다 소진되어 버렸기 때문에, 각급 관원의 월봉과 국가에 필요한 각종 부세(賦稅)를 다 전용하는 한편 다시 전국의 민호에서도 거두어들인 결과 가까스로 중국 단위로 40,000석을 마련했는바 여기서 더 내라고 하면 도저히 더 이상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ㅡ 《고려사》 1280년 11월 ㅡ
원나라에서 불팔사(不八思)·풍원길(馮元吉)을 보내어 와서 군량미를 파악하게 하였다. 또 동정군(東征軍)이 패배하였기 때문에 군사 340명을 보내어 합포(合浦)를 지키게 하고, 군사 60명에게 왕경(王京)을 지키게 하여 불의의 변에 대비하게 하였다. 동정할 때에 지출한 군량미는 12만 3,560여 석(碩)이었다.

ㅡ 《동국통감》, 1282년 4월 ㅡ
: 군량 12만 3,560여석(중국 단위) => 고려 단위로 환산하면 그 2배인 24만 7,120석(중국 석수 계산법은 원종12년 8월 《고려사》 기사 참조.)


1283년 3월~5월(3차 일본 원정)
왕이 재추들에게 묻기를, "원나라 조정에서 송번의 말을 듣고 군량미 40,000석을 더 징발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하니, 대답하기를, "전번에 유주(庾賙)가 20만 석을 부과하자고 청하였는데, 집집마다 추렴하고, 의지할 데 없는 가엾은 사람에게까지 모두 긁어 모아서, 겨우 그 4분의 1(=50,000석)을 마련하였는데, 만약 40,000석을 더하기로 한다면, 어찌 마련할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다시 사람을 보내어 주청(奏請)하여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ㅡ 《고려사》, 1283년 4월 ㅡ
: 군량 50,000석 + 추가 40,000석 = 90,000석


1285년 11월~1286년 1월(4차 일본 원정)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사람을 보내어 와서 배 만드는 것을 독려하였다. 동지밀직사사 송빈(宋玢)을 경상도 조선 도지휘사(造船都指揮使)로 삼고, 또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배를 만들고 군량미를 모으는 일을 독려하게 하였다. 원나라 중서성(中書省)에서 첩문(牒文)을 보내어 군량미 10만 석을 징발하게 하였다.

ㅡ 《고려사》, 1285년 12월 ㅡ


1289년
중국 동북방에 기근이 들자 원나라는 이를 빌미로 군량(軍粮) 10만석을 요구해오고[68], 고려는 그 중 68,000석을 부담하게 된다.
요동(遼東, 랴오닝)에 기근이 들자 원(元)에서 장수지(張守智) 등을 보내어 본국으로 하여금 군량(軍粮) 10만 석을 거두어 요동(遼東)으로 옮기게 하였다. 왕이 신하들에게 명해 쌀을 차등 있게 내게 하였는데 ... (중략) ... 산직을 하사받은 자는 7두, 군관(軍官)·백성(百姓)과 공·사노비는 각각 5두와 3두로 하였다. 부상(富商, 부유한 상인)과 대호(大戶)는 3석, 중호(中戶)는 2석, 소호(小戶)는 1석으로 하였다. 동계(東界)와 평양(平壤)을 제외한 각 도(道)에 쌀을 차등 있게 옮기게 하였다.

ㅡ 《고려사》, 1289년 2월 ㅡ
감찰사승(監察司丞) 여문취(呂文就)와 직사관(直史館) 진과(陳果) 등을 파견하여 배 483척과 선원 1,314명을 동원하여 쌀 64,000석(石)을 개주(盖州, 랴오닝성 가이펑)로 운송하게 하였다. .... (중략) .... 내고(內庫, 왕실 창고)의 쌀 4,000석(石)을 내어 군량(軍粮)에 보충하였다.

ㅡ 1289년 3월 ㅡ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나유(羅裕)를 파견하여 개주(盖州)로 군량(軍粮)을 수송하였다

ㅡ 1289년 5월 ㅡ


1293년(5차 일본 원정)
원(元)에서 만호(萬戶) 홍파두아(洪波豆兒, 홍바투르)를 보내어 선박 만드는 일을 관장하게 하고 보전고부사(寶錢庫副使) 첨사정(瞻思丁)은 군량을 관장하게 하였으니, 장차 다시 일본(日本)을 정벌하려는 것이었다. 홍파두아는 곧 홍복원(洪福源)의 손자인데, 왕궁을 바라보고는 말에서 내려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비록 금의환향(衣錦還鄕) 하지만 직임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이니 부끄럽다."하였다.

ㅡ 《고려사》, 1293년 8월 ㅡ


1295년
요양심양에 기근이 들고 고려는 원나라로부터 다시 식량을 징발당한다.
정사일. 장군(將軍) 지단(智團) 등으로 하여금 배 73척(艘)에 쌀 10,000석을 선적해 요양(遼陽)으로 수송하게 했다.

ㅡ 《고려사》, 1295년 3월 ㅡ
기묘일. 장군(將軍) 김영손(金永孫)을 보내어 배 90척으로 쌀 12,180석을 싣고 요양(遼陽)까지 수송하게 하였다.

ㅡ 1295년 4월 ㅡ
계유일. 중랑장(中郞將) 조침(趙琛)을 원(元)에 보내어 제주(濟州)의 방물을 진헌하였고, 장군(將軍) 서광순(徐光純) 등을 보내어 배 65척으로 쌀 8,568석을 싣고 요양(遼陽)까지 수송하게 하였다.

ㅡ 1295년 윤4월 ㅡ
: 1만 석 + 12,180석 + 8,568석 = 30,748석


1309년
요양행성(遼陽行省) 선사(宣使) 유현(劉顯) 등을 보내와서 고려에서 배 100척을 만들고 쌀 3,000석을 실어 나르게 하였으므로 그 폐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이때 두 궁궐의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배를 만드는 공사도 또한 급하여 서해도(西海道)와 교주도(交州道), 양광도(楊廣道) 백성들이 더욱 그 피해를 입었다.

ㅡ 《고려사》, 충선왕 원년(1309), 3월 ㅡ


그 밖에도 원나라가 요구할 때마다 수시로 양곡을 반출당했다.

4.5. 공녀(貢女) 진상 강요

고려는 원에 공녀(貢女, 바치는 여자) 진상을 강요받았는데 이를 위해 원나라에서 해마다 매빙사(媒聘使)가 다녀가고, ‘결혼도감(結昏都監)’이라는 별도의 행정 기구까지 설치되었다. 결혼도감은 원나라 장수들과 투항한 남송 병사들을 위문할 고려 여성들을 차출해가기 위한 기구였다. 결혼도감이 처음 설치되었을 당시에만 무려 140명의 고려인 여성들이 '만자'(蠻子)에게 보내졌다는 기록이 있다. '만자'는 옛 남송(南宋)의 한족 군대로서 원나라의 군대에 그대로 흡수된 것으로 강남(江南)의 '신부군'(新附軍) 또는 '귀부군'(歸附軍)이라고도 불렸다.

【《목록》】
>원나라에서 만자(蠻子) 매빙사(媒聘使) 초욱(梢郁)을 보내면서 그 편에 다음과 같은 중서성(中書省)의 공문을 전달하게 했다. "남송(南宋) 양양부(襄陽府)[69]에 새로 편성된 군인(軍人)들이 처를 구하기에 선사(宣使) 초욱으로 하여금 관청 소유 견직(絹織) 1,640단을 가지고 고려국으로 가게 조치했으니 해당 관청을 시켜 관원을 파견해 함께 처가 될 여자들을 물색하도록 하기 바란다." 초욱이 남편 없는 부녀자 140명을 뽑아내라고 심하게 독촉하자 결혼도감(結昏都監)을 설치하고 그때부터 가을까지 민간의 홀어미, 역적의 처, 승려의 딸을 샅샅이 찾아내어 겨우 그 수를 채우니 원성이 크게 일어났다. 한 여자마다 혼례비용으로 비단 12필씩을 지급한 후 만자(蠻子)들에게 각각 보내주자 만자들이 즉시 데리고 원나라로 돌아갔다. 이때 통곡소리가 하늘을 진동하니 보는 사람마다 슬피 흐느꼈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 15년(1274), 3월 ㅡ
한편, 공녀 징발 대상으로는 재상 가문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이미 사위가 있는 집안도 딸을 빼앗기는 경우가 있었다.
탈타아(脫朶兒, 톡토르)가 아들을 위하여 며느리를 구하는데 반드시 재상 가문에서 보려고 하자, 딸이 있는 집안에서는 두려워하며 다투어 먼저 사위를 들였다. 나라에서 재상 가문 두세 곳을 적어 주고 스스로 택하라고 하였더니 탈타아가 외모가 예쁜 사람을 골라서 김련(金鍊)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려고 하자, 그 집에서는 이미 데릴사위[預壻]를 들였는데 그 사위가 두려워하며 집을 나가버렸다. 김련이 그때 원(元)에 입조(入朝)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집에서는 김련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혼례를 치르자고 요청하였으나 탈타아는 듣지 않았다. 고려(高麗)의 풍속에 나이 어린 사람을 데려다가 집안에서 길러 나이가 차면 사위로 삼는 것을 데릴사위라고 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원종 12년(1271), 2월 ㅡ
이렇게 원나라로 보내진 공녀들의 수는 얼마나 될까? 이곡(李穀)이 원(元)에 올린 다음의 상소문을 보자.
전의부령(典儀副令) 이곡(李穀)이 원(元)에 있었는데, 어사대(御史臺)에 말하여 처녀를 구하는 것을 그만 두기를 청하고, 이를 위해 대신해서 소(疏)를 작성하여 말하기를, .... (중략) .... "풍문으로 들으니,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기고 오직 드러날까 걱정하며, 비록 이웃이라도 볼 수 없게 한다고 합니다. 매번 중국에서 사신이 오면, 문득 실색하여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무얼 하러 왔을까? 동녀를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처첩을 데려가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합니다. 이윽고 군리(軍吏)들이 사방으로 나가 집집마다 수색하는데, 만약 혹시라도 딸을 숨기기라도 하면 그 이웃을 잡아 가두고 그 친족을 구속해서는 채찍으로 때리고 괴롭혀서 딸들이 나타난 뒤에야 그만둡니다. 사신이 한번 오게 되면 나라가 온통 소란스러워져서 비록 개나 닭이라도 편안하지 못합니다. 동녀들을 모아놓고 그 중에서 데려갈 사람을 뽑을 때가 되면, 얼굴이 예쁘기도 하고 못생기기도 하여 같지 않은데, 사신에게 뇌물을 주어서 그 욕심을 채워주면 비록 예쁘더라도 놓아줍니다. 놓아주고는 다른 데서 동녀를 찾게 되므로, 1명의 동녀를 취하는 데에도 수백 집을 뒤집니다. 오로지 사신의 말만 들을 뿐 누구도 감히 어기지 못하는데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사신들이 황제의 성지(聖旨)가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기를 1년에 2번, 혹은 1번이거나 한 해씩 거르기도 하는데, 그 수가 많으면 40~50명에 이릅니다."

ㅡ 《고려사》 <세가>, 충숙왕 후4년(1335) 윤12월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공녀 선발은 충렬왕 초부터 공민왕 초까지 약 80년 동안 정사에 기록 된 것만도 50여 차례이며, 이곡의 공녀 폐지 상소를 보면 그 수효가 많을 때는 40∼50명에 이른다 하니 끌려간 공녀들의 수는 2,000명을 넘었을 것으로 본다.[70] 그나마 이것은 공식적으로 기록된 것이고, 이 외 원의 사신이나 귀족·관리들이 사사로이 데려간 것까지 합치면 실제 숫자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71]

한 번에 500여명의 공녀를 끌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의 기록을 보자.

【《목록》】
>원(元)에서 양중신(楊仲信)을 파견하여 폐백(幣帛)을 가지고 와서 귀부군(歸附軍)[72] 500인의 아내를 구하게 하였다. 왕이 과부•처녀 추고 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73]인 정랑(正郞) 김응문(金應文) 등 5인을 여러 도(道)로 파견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2년(1276), 3월 29일 ㅡ
이렇게 원에 강제로 끌려가게 된 공녀의 가족들은 그 댓가로 원으로부터 비단을 받았는데, 그마저도 고려 정부의 '가로채기'로 빼앗기게 된다.
"지원(至元) 13년(1276) 귀환하는 귀부군(歸附軍)들의 처를 맞아주기 위해 가져온 비단들은 다루가치로 하여금 거두어들여 보관토록 조치했는데 농우와 농기구의 값은 그 가운데서 치르게 해 주십시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3년(1277), 2월 ㅡ
딸을 가진 집안은 공녀 징발을 피하기 위해 갓난아기를 안고 시집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고려 특단의 조치는 힘 없는 서민들의 마지막 발버둥마져도 수포로 만들어 버린다.
임자일. 장차 처녀들을 원(元)에 바치기 위하여 국내의 혼인을 금지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원년(1275), 10월 ㅡ

왕이 교지(敎旨)를 내리기를, "양가(良家)의 처녀는 먼저 관청에 신고한 뒤에 혼인하고, 위반하는 자는 처벌하라."라고 하고, 허공(許珙) 등에 명령하여 어린 동녀(童女)를 선발하게 하였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13년(1287), 12월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고려인들의 반발은 당연히 클 수밖에 없었는데, 이곡의 상소문에서 보듯 딸과 처를 가진 자들은 중국에서 사신이 올때마다 늘 가슴을 졸여야 했고, 딸을 숨기는 자는 그 이웃과 친족을 괴롭혀서라도 반드시 추쇄하였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인신매매뿐만 아니라 공녀를 추쇄하는 과정에서 행해진 사신들의 뇌물 수수 역시 큰 골칫거리였다. 상기했듯 1명의 공녀를 취하는데도 수백 집을 뒤져서 주민들을 수탈하는 행위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고려시대 공녀 출신으로 가장 유명한 기황후의 사례는 매우 특수한 극소수의 사례로서, 대다수 공녀들의 사례들과는 차이가 크다. 다음의 기록은 공녀에 대한 당대 고려인들의 기록이다.

【《목록》】
>순마소(巡馬所)에 명령하여 양가(良家)의 딸을 뽑아 황제와 사신에게 바치려고 하였다. 백관들에게 몰래 딸이 있는 집을 적어서 주관하는 관청(主司)에 넣으라고 하였다. 그러자 눈을 흘기고 원망하는 자들이 있었으며 비록 딸이 없어도 딸이 있다고 지목하였으므로 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닭과 개도 편하게 쉬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몰래 사위를 들이는 자들이 많았다.

ㅡ 《고려사》 <세가>, 충렬왕 24년(1298), 1월 ㅡ

지금 고려의 부녀가 후비의 반열에 있기도 하고, 왕이나 제후와 같은 귀한 자의 배필이 되기도 하여, 공경대신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고려의 외생(外甥, 사위)입니다. 이것은 본국(고려)의 왕족과 문벌 및 호부한 집안에서 특별히 조서나 지(旨, 황제의 뜻)를 받았거나 혹은 마음으로 원하여 스스로 온 자들이며 또한 중매의 예를 갖춘 것으로 실로 일반적인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익을 좇는 자들'이 이것을 끌어와 예로 삼고 있습니다.

ㅡ 1335년, 이곡의 상소문 ㅡ

일단 (공녀) 선발에 들어가면 부모와 친척들이 서로 모여서 우는데 밤낮으로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도성(都城)의 문에서 보낼 때에는 옷자락을 붙잡고 넘어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으며, 슬프고 원통해서 괴로워합니다. 그 중에는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는 자도 있으며,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도 있고, 피눈물을 쏟다가 눈이 멀어버리는 자도 있는데, 이러한 예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ㅡ 1335년, 이곡의 상소문 ㅡ

당당한 천자의 조정으로서 어찌하여 후비나 궁녀(後庭)가 부족하여 반드시 외국에서 취하려고 하십니까? 비록 아침저녁으로 사랑을 받아도 오히려 부모와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이 사람의 지극한 정인데, 지금 궁궐에 두고 시기를 넘겨서 헛되이 늙게 하거나 때로는 혹시 내보내어 환관에게 시집을 보내지만, 끝내 후사가 없는 자가 10명 중 5~6명이나 되니, 그 원망하는 기운이 조화를 상하게 하는 것이 또 어떻겠습니까?

ㅡ 1335년, 이곡의 상소문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이처럼 원에 공녀로 끌려가게 된 여성들 과반수는 중세 여성의 최고 권리 중 하나인 '자식을 보는 권리'마저도 박탈당하였던 것이다.

공녀로 선정되자 딸의 머리를 깍아 비구니로 만들려하기도 했다. 아래는 홍규[74]의 딸 일화이다.

【《목록》】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황제에게 바치려고 양가 집 딸을 뽑을 때 홍규의 딸도 뽑혔는데, 권세 있고 벼슬 높은 자에게 뇌물을 주어도 모면할 길이 없었다. 이에 한사기(韓謝奇) 더러 딸의 머리를 깎아 비구니로 만들면 어떻겠냐고 의논하자, 화가 홍규에게 미칠 것이라고 만류했다.

홍규가 듣지 않고 딸의 머리를 깎아버리자 그 말을 들은 제국대장공주가 대노해 홍규를 가두고 가혹한 형벌을 가했으며 가산까지 몰수했다. 또 그의 딸을 가두고 국문하자, 딸은 자기 스스로 머리를 깎았을 뿐 부친은 정말 모른다고 진술했다.

제국대장공주가 땅바닥에 끌어내려 쇠 채찍으로 마구 때리게 해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재상들이 "홍규는 나라에 큰 공을 세웠으니 작은 죄를 무거운 형벌로 다스려서는 안 됩니다"라고 건의했고,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도 병든 몸을 이끌고 나와 간청했으나, 들어주지 않고 바닷섬으로 유배보냈다. 얼마 뒤 홍자번(洪子藩)이 극력 청해 가산은 돌려주게 하였으나, 노여움이 아직 풀리지 않아 그의 딸을 몽골 제국 사신 아쿠타이(阿古大)에게 넘겨버렸다.

ㅡ《고려사》 <홍규 열전>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홍규는 원종 시기에 무신정권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를 몰아내는데 공을 세우고 공신 작위을 받은 인물이다. 이런 기득권층의 딸도 마음대로 공녀로 차출하고 아버지도 도저히 자기 능력으로 안되자 딸을 비구니로 만들어서 어떻게든 빼내려고 했으나 결국 쇠채찍으로 고문을 당한 후 유배당했으며 그 딸은 결국 공녀로 차출당해야 했다. 여러 재상들이 용서해달라고 간청하고 당대의 명장이자 일본 정벌에도 참여한 김방경도 탄원에 동참했으나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

이는 당시 아직까지 원이 건재한 상황이기도 했고, 제국대장공주가 쿠빌라이 칸의 딸이라는, 역대 몽골 출신 왕후들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의 혈통을 지녀 고려에서의 위상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제국대장공주의 위상은 후에 왕으로 즉위한 충렬왕조차도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였다.

이런 일이 벌어지니 권문세족 중에서도 고려의 반원 투쟁 당시 몽골에 반감을 가지고 협력한 자들도 있는 편이다. 이는 충선왕 시절 귄문세족들이 입성책동을 반대한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4.6. 응방의 폐해와 기타 여러 진상의 폐해들

그 밖에 원나라가 요구해올 때마다 개, 말, 쇠고기, 인삼, 진주, 백조(白鳥, 고니), 매(鷹), 은(銀), 여의주 등 막대한 양의 특산품을 수시로 바쳐야만 했다. 특히나 부족한 수량은 민간에서 약탈하듯이 징발하여 그 폐해가 심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원나라에 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응방(鷹坊)[75]의 폐해가 가장 심각하였다.
병신일.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응방(鷹坊)에 속한 백성 205호(戶) 중에서 102호를 없애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당시에 모든 백성들이 관리들의 수탈에 시달렸기 때문에 다투어 응방 소속으로 들어가버린 자들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는데, 205호라 한 것은 거짓이고 102호를 없앤다는 것도 9마리 소에서 털 한 가닥을 뽑는 것과 같을 뿐이었다. 응방에서는 오히려 은(銀)·모시(紵布)·가죽·베를 그 사람들로부터 거둬들여 사사로이 나누어 가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매(鷹)를 먹이는 것이 고기가 아니고 은과 베가 매의 배에 가득하다.”라고 하였다.

ㅡ 충렬왕 3년(1277), 7월 ㅡ

그러나 응방의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충렬왕의 노력은 친원파의 반대에 부딪쳐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원나라는 이를 알면서도 묵인하였다.
대장군 인후(印侯)와 장군 고천백(高天伯)이 타나(塔納)와 함께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 타나가 절령참(岊嶺站)[76]에 당도하자 옹진현(甕津縣)[77] 등 여러 현에서 점심을 대접했는데 그 자리에서 어떤 사람이 타나에게, "우리 고을 백성들은 모조리 응방(鷹坊)에 예속되었으니 가난한 백성들이 무엇으로 국가의 비용을 감당하겠습니까? 차라리 주기(朱記)를 나라에 반납하고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 낫겠습니다."라고 하소연했다. 이를 들은 타나가 개경(開京)에 도착해 재상더러 이렇게 질책했다. "동방의 백성은 천자의 적자가 아니오? 백성들의 고통이 이 지경에 이르렀어도 구휼하지 않았으니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문책하면 무슨 말로 변명할 것이오?" 이에 재상들이 왕에게 응방의 폐해를 없애야한다고 건의했더니 왕이 노하여 황제의 신임을 받는 회회(回回, 위구르) 사람을 요청하여, 그로 하여금 여러 도의 응방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여 재상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에 관한 말을 꺼내지 않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조인규(趙仁規)[78]가 극력 간쟁하고 공주도 또한 반대하는 바람에 이 계획은 결국 중지되었다.

ㅡ 충렬왕 6년(1280년), 3월 ㅡ

아래는 고려가 당대에 원에 매를 바친 기록들이다.
【《목록》】
>1262년 9월 기록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또한 원은 당시 고려에서 구하기 힘든 진상품들을 요구하여 고려를 힘들게 하기도 하였다.
몽고(蒙古)에서 필도적(必闍赤, 비칙치) 흑구(黑狗)와 이추(李樞) 등 7인을 보내 궁실(宮室)을 지을 재목을 요구하였으며, 또 중서성(中書省)에서 공문을 보내 금칠(金漆)·청등(靑藤)·팔랑충(八郞虫)·비자나무(榧木)·노태목(奴台木)·오매(烏梅)·화리(華梨)·등석(藤席) 등 물품을 요구하였다.

왕이 중서성(中書省)에 회보하기를, “이번 중서성의 공문을 받아보니 ‘고려는 아직 평온하지 못하므로 황제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올해의 조공하는 폐백은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다만 금칠은 소용되는 데가 많으므로 이제 필도적을 파견하여 가져오도록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나라에서 축적한 금칠은 육지로 나올 때 흩어져 없어졌습니다. 또 그 산지는 남쪽 지방의 섬인데, 요사이 역적이 왕래하는 곳이어서 기회를 보아 사람을 보내 채취하여 바치겠습니다. 우선 현재 남아있는 10항아리 분을 보내고, 옻칠액을 만드는 장인은 그 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 또 흑구가 말하는 비자나무는 지역민들이 백목(白木)이라 부르는 것인데, 이추에게 그 산지를 물으니 승천부(昇天府)의 금요도(今要島)라고 하였습니다. 청등과 팔랑충도 역시 이 섬에서 난다고 하고 또 진도(珍島)와 남해(南海) 등지에서도 난다고 하며, 비자나무 열매와 동백 열매(冬栢實)도 또한 거기서 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지역은 개경(王京)에서 1,000여 리가 넘기 때문에 바로 보내기가 어렵고, 이추가 가보지도 않고 되돌아 왔기에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과 함께 각기 사람을 파견하여 있는지 없는지 찾아보라고 하였으니, 그들이 돌아오면 구체적으로 보고하겠습니다. 우선 거두어들인 무늬 있는 비자나무 몇 조각을 보내며, 팔랑충은 이추가 처음에는 교동군(喬桐郡)에서 난다고 하기에 사람을 보내 채취하게 하였으나 없고, 또 금요도에서 난다고 하므로 다시 사람을 보내 조사할 예정입니다. 노태목·해죽(海竹)·동백(冬栢)·대자리(竹簟)는 현재 보유분을 모두 보내고, 오매·화리·등석은 원래 우리나라에서 산출되는 것이 아닌데 예전에 송나라 상선에서 얻은 것이 약간 있어서 아울러 보냅니다.”라고 하였다.

ㅡ 원종 12년(1271), 6월 ㅡ

아래는 그에 대한 기록들이다.
【《목록》】
>황후가 일찍이 낙산사(洛山寺)의 여의주(如意珠) 보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송분으로 하여금 그것을 진헌하도록 하였다.
ㅡ 1273년 3월 ㅡ

원(元)에서 임유간(林惟幹)과 회회인(回回人) 아실미리아(阿室迷里兒, 아시미리르)를 보내어 탐라(耽羅, 제주도)에서 진주를 채취하였다. 임유간(林惟幹)이 탐라(耽羅)에서 진주를 얻지 못하자 민(民)들이 소장하고 있던 100여 개를 취하여 원(元)으로 돌아갔다.
ㅡ 1276년 6월 ㅡ

좌랑(佐郞) 이행검(李行儉)을 원(元)에 보내어 황칠(黃漆)을 진상하였다.
ㅡ 1282년 4월 ㅡ

낭장(郎將) 백견(白堅)을 원(元)으로 보내 고니 고기를 바쳤다. 고니는 하양(河陽)[79]과 영주(永州)[80] 땅에서 많이 나는데, 매년 사신을 파견하여 잡게 하였으므로 그 일대가 전부 소란스러웠으며 백성들이 고통스러워하였다.
ㅡ 1294년 12월 ㅡ
고려사》(高麗史) 등의 기록】

5. 고려의 부원배 명단

6. 여담

  • 고려에게 있어 원 간섭기는 사실 경험해본 적 없는 외교적 대재앙에 가까웠다. 애초에 건국 자체가 5대10국 시절이었고, 이후로도 중원은 송에 의해 통일되었지만 동아시아 전체로 보면 관서(서하)-중원(북송/남송)-북방(요/금)-한반도(고려)의 4파전 구도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는 속에 북방제국과 아예 물리적으로 한 판 뜨거나 서로 소 닭 보듯 하며 좋게좋게 넘어가거나 하며 동아시아식 수직적 외교관계의 파행을 즐겨온 것이 무려 3세기 이상이었다. 어떠한 견제세력조차 없이 중원과 북방을 아우르는 통일제국의 등장, 그리고 이들과 직접 국경을 맞대는 외교환경은 나당전쟁 이래 6세기 만의 일이었고 자연히 고려의 제도와 외교도 원천적으로 재정립 될 수밖에 없었다.
  • 고려는 공녀를 포함한 재물을 원나라에 바쳐야 했고 몇 십년간 일정 주기로 갈수록 내정 간섭을 심하게 했다. 그리고 이 공녀 중 한 명이 바로 기황후. 기황후를 포함한 몽골은 어떻게든 고려를 간섭하려 들었으나 결국 내정간섭은 공민왕 때와 그 이후의 최영과 이성계의 활약으로 기황후가 보낸 군대가 박살나고 원 역시 명나라 주원장의 북벌로 인해 수도 대도를 잃고 북원으로 쫒겨나면서 막을 내렸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고려인 기황후는 원나라의 멸망을 가속화한 장본인이라는 것. 기황후의 무리한 고려 자극이 고려의 반원정서를 더욱 들끓게 만든 뒤 고려와 명나라의 연합을 만들었고 남쪽에서 명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기황후는 1만의 몽골군으로 고려를 공격했다가 대패하고 단 17명만 살아남아 도주하는 등 무리수를 많이 뒀다. 원혜종을 구슬려 사실상 국정을 장악한 시점부터는 매관매직 등 아예 원나라 입장에서도 국가 막장 테크를 타는 수준으로 패악질을 부렸다.
  • 원종의 경우에는 신하들의 쿠데타로 쫓겨난 후 쿠빌라이 칸이 반대하자 복위되는 등 원나라의 말 한마디에 고려 정치가 좌지우지되며 왕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몇 십 년간 횡포가 심해졌다. 이 당시 고려 왕은 몽골의 말 한마디에 휙휙 바뀔 정도로 허수아비 자리에 불과했고, 즉위한 왕 역시도 원 조정이나 원나라 황족 출신인 아내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을 정도로 제대로 된 왕권 행사가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이 원종 때부터 원이 몰락하고 북원으로 쫓겨나기 전까지 계속되다 보니 원이 멸망한 후에도 고려 왕실의 권위는 바닥으로 떨어져 왕실에 대한 충성심은 진즉에 날아가버린 상태였다.
    몽골은 고려 왕실을 몽골의 황금씨족의 일부로 인정해주었고, 공식적으로 계승권도 주어졌다. 하지만 고려 왕실의 권한 자체가 흔들리게 되기도 하였다. 충선왕은 고려에 가서 통치하지 않고 원 수도인 대도에 눌러앉아 통치하고, 자신은 중국에 앉은 채 고려에 의견만 보내 통치하기도 했다. 나중에는 오히려 원 조정에서 충선왕에게 고려에 돌아가라고 하기도 한다. 그래도 이후 열악한 상황에서도 반원파를 중심으로 반원 개혁 정치를 하며 나름 활동은 할편.
  • 공식적으로 고려인들은 원나라가 정한 민족 등급 4단계에서 몽골인-색목인에 이은 세 번째 민족 대우를 받았다. 가장 아래가 남송인, 즉 남방 한(漢)인이었고 금나라 치하에 있었던 북방 한(漢)인과 한인 외의 민족들, 즉 여진이나 거란족이 3단계인 고려인과 같은 계급에 있었다. 실질적인 지위는 몽골인-색목인이 지배계급이고 남송인이 피지배계급이니 중간 계급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고려는 자신들을 색목인으로 취급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외면당했다. 민족 등급 4단계가 정말 지배층, 피지배층 순서로 나열한 것인지에 대해 이견이 있다. 어디까지나 본속주의를 행하기 위해 분류한 것이라는 의견이다.그리고 고려에서는 몽골풍으로 몽골의 풍속이 유행하였으며 반대로 고려 여인들과 환관들로부터 고려의 문화가 퍼져 몽골의 고위 귀족과 황족들 사이에서 고려식 음식, 풍습, 옷 등이 유행하였는데 이것을 고려양이라고 한다.
  • 흥미롭게도 후대의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김공행군기》에서 여몽 관계를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하였으나, 막상 몽골제국의 침공을 직접 경험한 이규보(1168∼1241)는 《동국이상국집》에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전자는 강대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은 점을 높히 평가하였으며, 후자는 몽골인들의 잔혹함, 고려 인구의 약 절반이 사라진 상황에 치를 떨었다.
  • 한국에 관심 있는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은 한국사 공부를 하면서 이 시기를 알게 되면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고 한다. 그도 그럴 듯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굴욕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81] 차이점이 있다면, 현대 한국에서 칭기즈 칸에 대해서는 인식이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지만, 러시아인들은 몽골 및 이후 타타르계 국가들에게 하도 시달려서 칭기즈 칸을 갈아먹고 싶은 철천지 원수로 여긴다는 점이다.[82]
  • 훗날 원 간섭기가 끝난 고려 말기의 1388년(우왕 14) 4월에 명나라 군이 원을 북방 지역으로 쫓아내어 부이르 호(Буйр нуур)에서 북원 정권을 붕괴시켰고, 그 해 6월의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친명을 표방하는 신진 사대부가 집권하게 되면서, 사실상 정동행성은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개성의 정동행성 관청 건물은 조선 건국 후 한성 천도 당시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시설인 태평관(太平館)[83] 건물의 모델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태평관은 일제강점기 이후 사라졌지만, 2020년대 기준으로 현재 숭례문 로터리에서 세종로 사거리(광화문광장사거리)에 이르는 태평로는 태평관의 이름에서 따왔다.[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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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관련 자료

《고려사》<세가>(高麗史 世家)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사》<병지>(高麗史 兵志)
《동사강목》(東史綱目)
《원사》(元史)
『IMPERIAL CHINA 900-1800』 by F.W. MOTE.

[1] 제후, 부마, 승상[충헌왕] [忠憲王] [4] 《고려사》 <고종 세가>에 따르면 처음 시호를 올릴 때 원나라의 시호는 없었다. 이후 50년 뒤인 1310년에 고려가 완전히 원나라의 제후국이 되어버렸을 때 원나라 제3대 무종 카이산 칸이 보냈다.[충경왕] [忠敬王] [7] 시호를 올릴 때 없었으며, 사후 36년 뒤인 1310년에 원나라가 추가했다.[8] 1231년(고종 18) 이후 약 28여 년간의 여몽전쟁 끝에 1259년(고종 46) 몽골 제국(원나라)에 항복한다. 약 백년간 원나라의 내정 간섭과 수탈에 신음하다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의 반원운동으로 벗어난다.[9] 森平雅彦(1998), "高麗王位下の基礎的考察-大元ウルスの一分權勢力としての高麗王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6; 최윤정(2013), "駙馬國王과 國王丞相", 《大丘史學》 111; 최종석(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10] 蕭啓慶(1983),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与强權政治>, 《元代史新探》[11] 이개석(2007),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史學硏究》 88; 이익주(2009),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 시각의 검토 -고려-몽골 관계사에 대한 공시적, 통시적 접근->, 《한국중세사연구》 27.[12] 이명미(2021), "역사·한국사 교과서 ‘고려 ‐ 몽골 관계’ 서사 재구성 제안", 《歷史敎育》 160.[13] 이익주(2011), <고려-몽골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관계 요소의 탐색>,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p. 68~71.[14] 최윤정(2019), "13~14세기 몽골과 고려의 부마들 - 통혼의 정치적 의미와 고려왕권의 성격 재론 -", 《中央아시아硏究》 24(2), p. 83.[15] 陳得芝(2011), <쿠빌라이의 고려정책과 원-고려관계의 전환점>,《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p. 149~150.[16] 韓儒林(1986), 《元朝史 下》, p. 408~409[17] 이익주(2009),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 시각의 검토 - 고려-몽골 관계사에 대한 공시적, 통시적 접근 -", 《한국중세사연구》 27.[18] 이명미(2012), "고려-몽골 관계와 고려국왕 위상의 변화",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司法 문제를 통해서 본 몽골 복속기 고려국왕 위상 - 다루가치․管軍官 체재기의 ‘雜問’을 중심으로 -", 《사학연구》121; (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환경", 《역사비평》 121.[19] 이익주(2009), "고려-몽골 관계사 연구 시각의 검토 - 고려-몽골 관계사에 대한 공시적, 통시적 접근 -", 《한국중세사연구》 27, p. 33~35.[20] 이명미(2021), "역사·한국사 교과서 ‘고려 ‐ 몽골 관계’ 서사 재구성 제안", 《歷史敎育》 160, p. 166.[21] 이익주(2011), "고려-몽골관계에서 보이는 책봉-조공관계 요소의 탐색", 《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p. 64.[22] 최종석(2017), "고려후기 ‘자신을 夷로 간주하는 화이의식’의 탄생과 내향화 - 조선적 자기 정체성의 모태를 찾아서 -", 《민족문화연구》 74; (2017), "13~15세기 천하질서하에서 고려와 조선의 국가 정체성", 《역사비평》 121; 이명미(2021), "역사·한국사 교과서 ‘고려 ‐ 몽골 관계’ 서사 재구성 제안", 《歷史敎育》 160, p. 149.[23] 高柄翊(1961), <麗代 征東行省의 硏究>(上), 《歷史學報》 14; 陳得芝(2011), <쿠빌라이의 고려정책과 원-고려관계의 전환점>,《13~14세기 고려-몽골관계 탐구》, p. 148~149; 조원(2019), <몽골의 동아시아 전쟁과 지배 질서의 재편 -쿠빌라이 시기의 전쟁을 중심으로->, 2019年 《東洋史學會 冬季硏究討論會》.[24] 최윤정(2013), "駙馬國王과 國王丞相", 《大丘史學》 111, p. 39~40.) 고려를 투하령으로 보는 것은 고려를 정동행성의 통치영역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형식논리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전개한 측면이 있다.(이개석(2007),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史學硏究》88.[25] 최윤정(2013), "駙馬國王과 國王丞相", 《大丘史學》 111, p. 41~49; 이명미(2021), "역사·한국사 교과서 ‘고려 ‐ 몽골 관계’ 서사 재구성 제안", 《歷史敎育》 160, p. 150~151; (2021), "몽골 복속기 立省論의 구성 과정과 맥락: 초기의 立省 관련 논의를 중심으로", 《歷史學報》 252, p. 131.[26] 다만 김호동의 '속국, 속령론'은 대몽골 울루스의 속국이라는 위상도 상정하고 있다.[27]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9.)[28] 投下다루가치에 관해 李治安, ꡔ元代分封制度硏究ꡕ(增訂本), 中華書局, 2007, 65~85쪽. 趙阮, 앞의 논문, 2012, 88~95쪽. Elizabeth Endicott-West, op.cit., 1989, 89~103쪽 참조.[29] 고명수(2016), <고려 주재 다루가치의 置廢경위와 존재양태 -몽골의 고려정책 일 측면->, 《지역과 역사》 39.[30] 제국대장공주 이후의 몽골인 왕비들은, 원나라 방계 황족의 딸이거나 귀족 가문의 딸이었다.[31] 나중에 도로 돌려주기는 했다.[32] 물론 금슬도 좋았지만 공민왕 입장에선 노국대장공주 자체를 반원 개혁에 따른 정적들의 위협을 막는 방패이자 개혁의 동반자로 삼을 수 있었기에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했다.[33] Lee, Ki-Baik (1984). A New History of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p. 157. ISBN 9780674615762.[34] 김호동(2015), 《몽골제국과 고려》, p. 83~92.); 정동훈(2020), <고종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조공’의 의미>, 《한국중세사연구》 61; 정동훈(2020), <1260-70년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歲貢의 의미>, 《진단학회》 134.[35] 1. 납질(納質): 인질을 보낼 것. 2. 조군(助軍): 군대를 보내어 몽골의 정벌을 도울 것. 3. 수량(輸糧): 몽골군에 군량을 조달할 것. 4. 설역(設駅): 역참을 설치할 것. 5. 공호수적(供戸数籍): 호구 수를 조사하여 바칠 것. 6. 치달로화적(置達魯花赤): 다루가치를 둘 것. #[36] 김호동(2015), 《몽골제국과 고려》, p. 93~94.[37] 정동훈(2020), <1260-70년대 고려-몽골 관계에서 歲貢의 의미>, 《진단학회》 134.[38] 이명미(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 환경>, 《역사비평》121, p. 3~10[39] 이를 위해 원 조정은 고려 세자들을 볼모로 데려갔다. 원 간섭기 이전의 왕위 계승 후에 외국으로부터 형식적으로 인정받던 책봉 허례와 달리 이 시기 고려 국왕은 몽골 황제권에 의해 직접 임명되고 폐위되었는데 충선왕충혜왕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었다.[40] 원나라의 일본 원정 등에 필요한 전함을 건조하고 군량미를 보급할 목적으로 고려에 설치한 관청.[41] 원나라가 소와 농기구를 징발해가기 위해 고려에 파견한 관리[42] 이 시기 끌려간 공녀 수는 수천여 명으로 추산된다. 자세한 것은 본 문서의 '공녀(貢女) 수탈' 항목 참조.[43] 시법에 따르면, 忠은 신하에게만 붙일 수 있다. 달리 말해, 독립국의 군주라면 시호에 忠 글자를 쓸 일이 없는 것.[44] 이명미(2016), <몽골 황제권의 작용과 고려 국왕의 사법적 위상 변화>,《동국사학》 60; (2017), <성지(聖旨)를 통해 본 여말선초의 정치·외교환경>, 《역사비평》 121, p. 71; 최종석(2019), <고려 후기 ‘전형적’ 제후국 외교의례의 창출과 몽골 임팩트>, 《민족문화연구》 85.[45] 원나라 황실과 결혼한 경우 '황후국 비(皇后國妃)'라는 칭호를 얻었으나, 이는 고려 왕비가 독립적 위상을 잃고 원나라의 일원으로 간주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46] 모든 관직이 완전히 대체된 것은 아니고 일부 고유 관직은 유지되었다.[47] ꡔ高麗史ꡕ 卷28, 忠烈王 4년 7월[48] ꡔ高麗史ꡕ 卷27, 元宗 12년 10월 甲辰 ; 卷28, 忠烈王 원년 5월 壬辰 ; 忠烈王 2년 11월 丙辰.[49] ꡔ高麗史ꡕ 卷26, 元宗 11년 9월 戊午 ; 卷27, 元宗 13년 9월 丙寅.[50] 백정군에 대해선 본 문서의 '관군의 유명무실화' 항목 참조.[51] 고려 시대 군인들은 스스로 무기를 마련해야 했다.[52] 몽골 시대 역참 이용 허가증[53] 지금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가양동[54]경상북도 안동시[55] 고려의 감찰기관으로 관리들의 잘못과 비행을 고발하는 일을 하였다.[56] 톡토르는 당시 고려에 들어와 있던 몽골인 관리 중 유일한 친(親)고려 인사였다.[57] 《고려사절요》, 충렬왕 4년(1278), 2월 기사.[58] 관직에 나아가지 않은 양반[59] 평시에 군역의 의무가 없던 일반 농민[60] 군역의 의무가 없는 천민 집단[61] 고작 소 1마리 당 비단 4필에 교환된 것이다.[62] 고려 시대 왕실의 족보를 관리하던 관리[63] 보통 쌀 1석은 성인 1명이 1년간 먹을 수 있는 양으로, 144kg에 해당한다.[64] 나라에서 벼슬아치들에게 녹봉을 주기 위하여 각 지방에서 거두어 들이는 미곡[65] 1두는 성인 1명이 1달간 먹을 수 있는 양[66] 일본 원정에서 귀환한 군인들[67] 대궐을 수비하는 몽골 군대[68] 실제로는 카이두(海都)와의 전쟁을 위한 전비 확충이 목적이었다.[69] 오늘날 후베이성[70] 류홍렬, <고려의 원에 대한 공>, 《진단학보》 18, 1957, 34∼37쪽[71] 권순형, <원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공녀>, 《한국문화사》 권1, 2005, 85~96쪽[72] 몽골에 귀부한 남송군[73] 몽골은 병사들의 첩을 마련해주기 위한 목적으로 결혼도감 외에 과부•처녀 추고 별감이라는 관청도 두었는데, 훗날 귀부군 행빙별감(歸附軍行聘別監)으로 명칭이 바뀐다.[74] 충선왕의 왕비 순화원비 홍씨와 충숙왕의 왕비이자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의 아버지이다.[75] 원나라가 요구하는 매의 포획과 사육을 위한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두었던 관청[76]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77]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78] 고려시대 권문세족 중 한명으로, 충렬왕의 몽골인 아내 제국대장공주와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성장을 이루었다.[79] 경상북도 경산시[80] 경상북도 영천군[81] 벨라루스 지역은 당시 몽골 대신 튜튼 기사단,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의 위협을 받던 상황이고 몽골의 침략을 거의 받지 않았다. 몽골 제국의 간접 지배만 받던 모스크바 대공국 일대는 러시아로, 몽골 제국 및 킵차크 칸국의 직접 지배를 받던 키이우 및 드니프로 강 중류, 하류 일대는 우크라이나로, 독일 기사단을 막기 위해 리투아니아인들과 손을 잡고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일부가 된 민스크 및 주변 일대는 벨라루스로 분화된 것.[82] 다만 이것은 고려가 공격받은 것이 칭기즈 칸 시대가 아닌 이유도 있다. 오히려 고려와 연관성이 깊은 몽케 칸과 쿠빌라이 칸에 대한 시선은 미묘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83] 태평관은 드라마 대장금에서도 등장하는데, 명나라 사신을 접대할 때 사용하던 그 시설이 맞다.[84] 태평관은 현재의 숭례문 옆 대한상공회의소 부지에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