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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4A17A><colcolor=#fff> 강의석 姜義錫 | Kang We-suck[1] | |
출생 | 1986년 8월 25일 ([age(1986-08-25)]세)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1cm, 76kg, B형 |
가족 | 아버지 강재정[†], 어머니 백완숙[3] , 누나 강혜리[4] 아내 김나래[5] , 슬하 1남 1녀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학력 | 서울신답초등학교 (졸업) 성일중학교 (졸업) 대광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 / 학사)[6] |
직업 | 사회운동가, 영화감독, 학원 강사, 과외 강사 |
방송국 |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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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생운동가 출신 사회운동가이자 전 영화감독. 그의 사회 운동은 학교 내 종교 강요 정책 폐지와 반기독교 운동의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종교 문제로 학교에 반발함으로써 처음으로 화제에 올랐고, 미션스쿨에서 종교 강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대중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이후 평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병역거부 운동으로 다시 화제가 되었다. 병역거부로 인한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이후로는 주로 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활동들은 종교의 자유 운동과 병역 거부 운동, 재소자인권운동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평화주의, 진보주의적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사실 서양권에서는 흔하다면 흔한 자유주의 운동이지만 한국에서는 워낙 이런 류의 사회운동가가 없었다보니 더 화제가 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경솔한 발언이나 기행에 대한 비판도 존재하여 여러모로 논란거리가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사회 활동(2004) - 종교 선택의 자유 운동
강의석이라는 이름 석자를 알린 사건.
강의석은 개신교 미션스쿨인 대광고등학교에서 1~2학년을 다니며 무리 없이 적응한 것으로 보이는데, 대광고와 연계된 교회에서 찬양과 전도활동을 하기도 했고, 교회 장학금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강의석 본인은 허위사실이라며 부인하기도 했다. "교회 장학금은 사실을 알게 된 뒤 돌려주었고, 학생회장 장학금만 받았으며, 찬양인도를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3학년에 가서 학생회장이 된다. 그런데 대입 수시 모집을 앞두고 갑작스레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시위에 들어간다.
대광고등학교는 개신교 계열 재단에서 설립한 미션스쿨로, 채플 규정이 있었다. 이것은 신입생들도 알고 있었고, 따라서 강의석 군도 입학하기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7] 다만, 같은 채플이 있는 연세대학교나 이화여자대학교나 숭실대학교 같은 대학과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반 고등학교라는 것이 문제였고, 따라서 이 요소 때문에 나중에 대법원 판결에선 학교 측이 패소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연세대는 채플이 있지만, 채플이 싫다면 입시 때 다른 대학교를 지망하면 그만이고, 채플 있는 미션스쿨임이 공개되어 있는데 거기에 들어간 건 학생의 선택이기에 입학 후 학교가 종교 강제하네 뭐네 해도 법리적으로 뭘 다툴 여지가 없지만, 일반고등학교는 강제로 배정되고 전학도 이사 등을 가지 않으면 힘들기에 법적 다툼이 생길 여지가 있었다.
당시 대광고는 무신론자와 비 개신교인에 대한 차별 규정이 있었고, 강의석이 투쟁하면서 이 점이 언론에 알려져 논란이 된다. 대광고의 학칙에 의하면 개신교인만이 학생 임원이 될 수가 있었으며, 또한 학생들 사이에서도 비 개신교인들을 은연중에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다고 한다. 종교 강요도 있었는데 가령 영락교회까지 가서 예배를 드리게 한다거나, 주된 쟁점이었던 채플 강제 참여 등이 있었다. 강의석은 이러한 종교의 자유를 문제 삼았는데, 이것은 언론과 대중이 보기에도 대광고 측에 문제가 상당히 있다고 보였으므로 강의석의 투쟁은 상당한 사회적 공감을 일으켰다. 이러한 예배 및 채플 강요 주장에 대해 "예배는 강제되지 않았고,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싶지 않으면 남아서 휴식할 수 있었으며, 채플은 성적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라는 다른 대광고 졸업생의 상반된 주장이 존재한다고도 하나, 또 반대로 당시 및 이후 재학생들에 의해 '강당에 가지 않으면 교사의 쿠사리가 날아온다'며 실질적으로 강요가 있었다는 반론 역시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2010년의 대법원 판결문에 '학교가 종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불이익을 줘 참여를 사실상 강제했다'고 분명히 명시되어 있으므로 당시 대광고에서 예배 강요가 있었음은 법원 판결을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저런 변명이 통하리라 믿는 쪽이 오히려 어리석은 것. 애초에 본 문단 자체에 (이미 대법원 판결을 통해 그 부당함이 상당부분 입증된) 대광고측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위해 당시 강의석의 행적과 주장을 무리하게 깎아내리려는 시도가 많고, 이를 위해 당시 대광고 및 그를 지지하던 개신교측의 언플 내용을 그대로 적어둔 부분도 많음에 주의해야 한다.
저 당시 언론에는 그의 집안이 독실한 불교 집안이고 이 영향으로 그가 저런 운동을 하게 된 거란 말이 있었는데, 정작 강의석은 훗날 "저 당시 무신론자였다"고 고백했다. 또한 그는 덧붙이길 "종교투쟁 당시 신의 존재를 믿지도 않았고 신앙심을 가지기 어려워서 고민이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러한 강의석의 행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제기되는 경우도 있다. 《종교 자유에 대한 시위에 가려 무시되는 부분이나, 도덕적으로 볼 때 강의석이 "대광고등학교 학생회장이었을 때 사실 무신론자였다."고 밝힌 것은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광고 학칙에 의하면 무신론자는 학생회 임원이 될 수가 없었고, 개신교 신자만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강의석은 학생회장이기 전에 그가 개신교 신자라고 주변 사람들과 학교 측에게 말했다는 말이 되고, 이는 무신론자인 그가 기독교인 행세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인 것이다. 또한 그는 학생회장이 되고 나서 "실은 개신교 신자가 아니고 무신론자"라고 밝혔는데, 이것은 2년 동안 그를 개신교 신자라고 생각한 학우들과 학교 측에 대한 배신이었으며, 또한 그렇게 알고 찍어준 학생들을 기만한 것이었다. 게다가 학생회장이라는 타이들이 대학 입시에 상당한 유리하게 반영된 것을 감안한다면, 강의석에 패배해서 낙선된 다른 후보자에게 큰 피해를 입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선거로 치면 입후보 자격을 거짓말한 것이고 이것으로 당선된 것이므로, 이는 이는 도덕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대광고 및 개신교측의 입장에 지나치게 편향되어 객관성을 상실한 것이다. 위에서는 '학생회장이라는 타이틀이 대학 입시에 상당히 유리하게 반영된 것을 감안한다면 강의석에게 패배하여 낙선된 다른 후보자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면 애초에 대광고 측이 학생회 임원의 자격을 개신교 신자로 한정함으로써 모든 비 개신교도 학생에 대해 큰 피해를 입혔다고 보아야 한다. 역으로 본다면 강의석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학생회장이 된 것인데, '개신교도만이 학생회장이 될 수 있다'는 학칙을 이용하여 강의석에게 패배한 다른 학생이 학생회장이라는 타이틀을 통해 얻어지는 이득을 취한다면 이것은 강의석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 말하자면, '선거로 치면 입후보 자격을 거짓말하고 당선된 것이니 도덕적으로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 을 따지기 이전에, 비 개신교도의 출마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학칙의 심각한 도덕적 결함을 따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광고의 학칙 자체가 종교 강요로써 헌법에 어긋난다는 점이 대법원 판결을 통해 이미 확인되었다.
따라서, 위 내용 중 '강의석의 학생회장 당선이 낙선한 다른 후보자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 이라는 주장은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 여기서 말하는 '피해'란 '부당하게 타인을 차별하고 기회를 박탈하여 자신의 이득을 취할 기회를 상실했다' 정도일 뿐이다. 그리고 이 이외의 부분, 즉 '어쨌건 강의석이 학생회장에 출마할 당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속인 것이 아니냐' 는 주장은 앞의 주장보다는 좀 더 진지하게 논의할 가치가 있기는 하나, 강의석이라는 개인의 행동에 대해 판단하기에 앞서 그 전제조건으로써 '학생들에게 종교를 강요하고 비 개신교도 학생들을 차별한' 대광고측의 조직적 행태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학생회에 참여하는 것은 학생의 정당한 권한 중 일부인데, 비 개신교도에게는 이 권리 자체를 박탈할 정도로 '노골적이고 명백한 학교측의 차별행위' 라는 상황을 무시하고 '조직적인 차별행위로 인한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개인의 행동' 만을 비판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학교측의 차별행위를 정당화하고 옹호하는 태도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8] 이 문제에 대한 상식적이고 공정한 평가가 가능하려면 당연히 '비 개신교도 학생을 노골적으로 차별하고 권리를 제약하던 당시 대광고등학교의 상황 속에서, 강의석이라는 개인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라는 기준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일제강점기의 상황에 비유하여 설명하자면, 어떤 조선인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받는 차별이나 불이익을 피하고 일본인에게만 제공되던 기회를 얻기 위해 스스로의 출생을 속였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이 사람을 비판하기에 앞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정책과 차별에 대한 비판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더 정당할까? 아니면 해당 정책에 대한 논의는 일단 미뤄두고 '어쨌건 거짓말을 한 것은 사실이니 그것은 분명 잘못 아니냐'고 그 개인의 소행만을 따지고드는 것이 더 중요할까?
학생회장이 된 뒤 얼마 안 있다가, 그는 학교 측에 종교의 자유를 언급하며 채플 규정을 폐지하라고 요구한다. 이에 학교 측은 강의석에게 전학을 권고하였고, 강의석은 이를 거부하면서 맞선다. 학교는 그를 제적하기에 이르렀는데, 이 소동을 감지한 매스컴에서 앞다투어 취재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시 대광고의 교목이었던 류상태 목사가 그를 지지했다가 해직당하기도 했다.
매스컴이 지켜보는 것을 안 강의석은 삭발까지 하면서 단식투쟁에 돌입했고, 대체로 학교 측에 비판적인 언론에 의해 그는 영웅시되었다. 그 결과 여론에 밀린 데다 재판에서도 패한 학교 측은 종교 문제가 없는 학생만 받기로 방침을 변경했고, 그 과정에서 강의석은 유명해졌다.
대학 진학 후 강의석은 자기 이름으로 장학금을 제정, 모교(대광고)의 후배들을 돕고 싶다는 의견을 내비쳤지만, 대광고 측에서는
당시의 종교 수업은 대법원 판결에서 보이듯이 분명히 문제의 소지가 있는 사항이었고, 당연히 학교 내에서도 문제가 많다면서 반발하는 학생들도 상당히 있었기 때문에 불공정한 제도를 바꾸려는 시도 자체는 상당히 뜻깊은 행동이었다. 사실, 이 시절까지만 해도 강의석은 나름대로 지지를 받았고 상식있는 행동을 했었다.
또한 이 사건에 대해 강의석이 함께 대광고에 재학중인 학우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종교의 자유에 대한 자신의 주장이 학생들 사이에서 널리 지지받고 있음을 입증하지 못했다는 점을 문제로 지적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 역시 억지스러운 트집잡기이다. 해당 사건에서 대광고 재단은 강의석에 대해 전학을 요구하고 퇴학 처분까지 내릴 정도로 극히 강경한 입장이었으며, 강의석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직원인 류상태 교목까지 사실상 해임할 정도로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진행하는 것이 가능했으리라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학교측이 인정하지 않는 여론조사를 학교 내에서 어떻게 진행할 것이며, 설령 어찌 진행한다 해도 그 응답에 학교측의 영향력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역시 비유적으로 설명한다면 대부분의 독재국가에서 벌이는 요식적인 선거행위나 여론조사 행위에서는 대부분 독재자의 지지율이 높게 나온다. 그렇다면 그런 나라들의 민주화 운동은 국민 대수의 지지를 입증하지 못했으니 부당한 것이 되는가?
다르게 보면 당시 대광고의 학생중에는 학내 종교행사 참여 강요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는다'(=자신이 개신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단순히 행사에 참여하는 정도로는 큰 불만을 느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가진 이가 다수였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당시 대광고측 및 강의석의 운동이 지나치다고 여기는 이들의 상당수는 분명히 그런 기대를 가지고 '강의석 혼자 그렇게 주장하는 거지 그게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잇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고 반론했던 것 역시 사실이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라는 상위 사회의 규범에 위배되는 학교 운영과 학칙 강요가 일어나고 있는 이상 그러한 여론이 '정말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학교의 강요로 조성된 것'인지는 구별할 수 없게 된 것. 즉 이 역시 대광고측이 스스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파괴한 것이다.
당시 대광고등학교는 사립 미션스쿨이라는 특성상 폐쇄적 종교집단의 성향을 강하게 나타냈음에도 거주지에 따라 선택권 없이 입학되는 일반고등학교로 운영되어 다수의 비종교인 학생들은 학교 사정도 모르고 강제로 입학당한 피해자인 것이 사실이다. 강의석 사건 이전엔 대광고에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었는데 그 사례는 아래와 같다.
- 종교의 자유 문제:예배시간에 입으로는 빛과 소금이 되어라 하고 외치면서 예배중에 졸았다고 뒤에서 교사가 발로 학생을 차거나 헌금을 강요했고, 성경공부 시간에 목사가 일본 온천에서 여자들 훔쳐본 얘기나 했다. 이 예배와 성경공부는 모두 선택이 아닌 강제참석이었고, 합숙캠프를 진행하면서까지 기독교로 유도했다.
- 학습권 문제: 과학주임이었던 화학교사는 자신의 권한으로 2시간짜리 연강을 진행하며 교실에 학생을 시켜서 큰 칠판 가득히 빽빽하게 2시간 내내 베껴쓰기도 벅찬 내용을 채워놓고 반마다 화학 선택반들이 돌아가면서 필기하도록 일주일 내내 방치하는 동시에, 교사는 수업시간 내내 다른 장소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 전체를 몇 회 읽었다고 그걸 학생들에게 자랑했다.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3때에 입시담당인 다른 교사에게서 겨우 화학을 제대로 배우게 됐다. 영어과목의 경우는 문법 자체를 안 가르치고 그냥 내내 교과서만 읽는 등 부실한 수업 문제가 있었다.
- 시설 사용권 문제: 주말에 학교에 모여서 공부하려고 갔다가 영락교회 교인들에게 교실에서 자신들 뒤풀이 해야 한다고 왜 학교에 오냐고 욕을 듣고 쫓겨났다.
- 교사의 책 판매와 홍보 문제: 수학과목은 교사가 고3에게 학교에서 세를 주는 문방구에서 폐지값에 고물상에 넘어갈 작년도 대입 문제집을 거의 정가에 사오게 해서 문제풀이를 하는데 그나마도 책을 더 팔아먹으려고 한 챕터씩 건너뛰고 가르쳤다.
강의석 사건 이후 대광고등학교는 신입생들에게 종교수업 및 채플에 대해 동의서를 받고 채플을 진행한다. 학교 자체도 자율형 사립고등학교로 전환되어 사실상 입학 전에 한 번 선택권이 주어져 기존에 해오던 종교교육 시스템은 유지한 채로 종교의 자유 문제는 해결된 편이다. 다만 사립학교 특유의 문제는 남아있고[10], 채플시간에 초청하는 외부인사의 자질 논란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등[11] 강의석 사건 당시에 드러난 여러 악습들이 완전히 해결되진 않았다.
가끔씩 강의석 사건때부터 재직했던 교사들이 당시의 썰을 풀고는 한다. 강의석은 외부에 알려진 대로 학교생활 대부분을 모범적이고 우수한 태도로 보냈다고 하며, 기존부터 존재하던 부조리에 대해서도 크게 문제삼지 않고 견디던 학생이었는데, 고3 들어서 돌연 학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학생회장 활동중 학교 측에서 내린 억울한 징계가 기폭제가 되어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교사들은 전반적으로 ‘취지는 공감하나 소송을 하지 않고 조금 더 온건하게 풀어나갔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의견을 표시하는 듯. 물론 진지하게 평가하자면 이런 의견은 대단히 뻔뻔하고 파렴치한 것으로, 대광고는 강의석의 운동이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를 퇴학처분했고, 강의석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류상태 교목실장에게까지 사표를 받았을 정도로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의견에 대해 철저하게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온건하게 풀어나갔으면 좋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전형적인 트집잡기, 즉 상대방의 활동이 가지는 취지 자체에 반론하지 못하는 대신 그 수단에 대해 '더 좋은 수단이 있을수도 있는데 그런 이상화된 수단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나쁜 수단을 사용한 것이다, 나쁜 수단을 사용한 것은 잘못이다'라는 식으로 한없이 트집거리를 찾아내며 상대를 깎아내리는 수법의 전형인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구체적인 상황을 보면 이는 더 어처구니없는 주장인 것이, 애초에 강의석 퇴학 처분 취소 자체가 소송을 통해 가능했고, 그 후 제기된 소송 역시 퇴학처분이 부당한 징계권의 남용임을 주장하는 소송이었다. 즉 해당 사건에서 강의석이 제기한 모든 소송은 학교측의 행위에 대한 대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송을 하지 말고 온건하게 풀어나갔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경우 '소송이니 뭐니 시끄럽게 안했으면 깔끔하게 걔 하나만 퇴학시켜버리고 묻어버릴 수 있었는데, 소송이나 언론, 여론등으로 시끄러워져서 지고 말았다'는 불평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보다 좀 순화해서 받아들인다고 해도 (당시부터 재직하던 교사라면서) 사실관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이야기하는 것이든지, 아니면 '강의석과 학교가 종교의 자유 문제로 소송전을 벌였다'는 정도만 알고 구체적인 사실은 모르는 이들에게 '가민히 있는 학교에게 강의석이 소송을 걸었다' 고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언플을 하려는 의도라고 의심할 수 밖에 없는것.
어찌되었건 사회적 파장이 컸다보니 변호사 시험, 공무원 시험 등에서 종교의 자유 문제에 관한 판례로 가끔씩 언급이 된다.
3. 학업 활동
- 바로 아래의 내용들과 이 항목 전체의 몇몇 사항들은 강의석의 누드시위 직전부터 유포된 '강의석의 실체'라는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입증 안 된 사실이나 부풀리기도 있지만 강의석 본인이 부분 사실이라고 인증한 몇몇 사건[12] 또는 목격자가 많은 사건들[13]도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마지막 모의고사 때, 강제 시험 응시제도에 비판을 하기 위하여 일부러 오답을 찍어 13점을 맞은 적이 있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결국 퇴학을 당했으나, 퇴학처분무효 가처분 신청 및 소송으로 학생신분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종교 자유 시위를 했을 때 대학 문제로 비난이 가해지는데, 대학 수시에 합격하기 위해 쓴 수였다는 것이 주된 비난이다. 이에 대해 강의석의 발언과 이후 행보를 종합해보자면, 합격하기 위해서인 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강의석의 밝힌 바를 통해 정확한 동기를 추정한다면, 그가 처음에 밝히길 "판사가 되고 싶다"고 하였으므로 서울대 법대는 그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지원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강의석은 뒤이은 인터뷰에서 "서울대학교에 합격한다는 것의 의미가, 일반적으로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려는 학생들과는 달랐다"고 주장하며 그 자신이 미래를 보장받기 위한 합격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려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언론에 비춘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면접에서는 이것을 밝히지 않은 채 다르게 말했다고 하므로, 그의 정확한 동기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참조)
결국 2004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리더십과 봉사활동 전형으로 특례합격했다. 여기에는 면접위원인 법대 교수들이 일개 고등학생이 종교자유를 실천하기 위해 단식투쟁까지 하는 등 법적인 면에서 탁월함을 온몸으로 보여준 것을 높이 샀을 수도 있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당시 학교 내부에서도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일명 고백 사건# (본인의 해명)과 맥아더동상 사건과 같은 일련의 일들로 스누라이프 같은 서울대생 커뮤니티에서 까는 글이 많다. 해당 사건에 대해서는 아래에 설명.
고백사건에 대한 첫 번째 링크의 경우 강의석을 비판하는 글에 대해 강의석이 답글을 남긴 것인데, 비판자는 다음의 논거들로 강의석을 비판하고 있다. 1) 대광고등학교에서 임원을 하려면, 우선 "학교의 방침의 체제에 순응하고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해야 한다. 강의석이 만약 대광고의 종교 강요하는 방침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이것을 바꿀 생각이 있었다면, 그가 이러한 선서하는 것부터 거부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맹세를 스스럼없이 하였으니 임원이 되었고, 임원이 되자 선서한 것을 어기고 학교 운영 방침을 바꿀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이중적인 행동들에 문제가 있다. 2) 그는 서울대에 진학하려는 목적이 "서울대를 폐지하고 싶어서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면접교수들이 "서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목적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러한 의중을 밝히지 않았다. 훗날의 인터뷰에서 "이것을 굳이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면접관들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것은 고등학교 임원할때 보인 태도와 마찬가지로, 목적을 위해서라면 신념을 감추고 왜곡시키는 짓을 한 것 아닌가.[14] 3)강의석은 "종교적인 목적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하였다. 그런데 이 종교적인 목적의 학교 운영은 법으로 보장된 권리인데 이를 비난하는 것은, 곧 강의석은 자신의 권리를 존중해달라고 하면서 다른 이의 권리는 묵살하는, 즉 '내로남불' 식의 이중적인 태도이다.[15][16] 4) 그는 서울대 법대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였고 이것이 휴학의 원인인데, 이를 미화하여 기자들에게 발언하였다. 5) 박노자의 글을 읽고 학교 체제를 바꾸자는 결심이 섰다는 글에 대해 비판하며, 북유럽의 현실을 한국의 이상적인 모델이라는 무비판적인 수용을 해선 안 된다고 하였다. |
3.1. 맥아더 동상 질문 사건
강의석이 수업 중에 갑자기 맥아더 동상 철거에 대한 질문을 했다는 사건이다. 2005년 2학기 전공 시간에 미국인 법학 교수를 초빙한 특강시간이었다. 질문시간에 강의석이 질문자로 선택되자 'Do you know General MacArthur?(맥아더 장군을 아는가?)'라고 질문은 했다. 두 유 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잘못된 표현이다. 'Do you know 사람 이름'이라는 표현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냐고 물을 때 쓰는 표현이고 진짜 우리 의도대로 말하려면 두유노가 아니라 'Have you ever heard about ○○○?'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강의석은 그냥 영어를 못해서 이렇게 질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교수 입장에서는 언어의 장벽이 있었지만, 교수가 맥아더 동상에 대한 사회적 문제를 알고 있었으므로, 나름대로 질문의도를 간파하고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었다.그런데 진지하게 듣고 있던 강의석은 교수의 대답이 끝난 뒤 한국어로 "한국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문제로 많은 논란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라고 말했다. 그 질문에 수업 담당 한국인 교수가 번역을 안 하고 가만히 있었고, 듣고 있던 다른 학생들이 대폭소를 했다. 수업을 듣던 학생이 말하길 "맥아더 아냐고 물었을 때 그 얘기 다 했는데, 쟤가 그냥 쇼맨십으로 질문한 거라 답은 듣지도 못한 것이다."라고 한다.
사실, 아무리 미국인 교수라도 나이대가 맞지 않기 때문에 맥아더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사이일 가능성은 적다. 따라서 'Have you heard of General MacArthur? 혹은 'Do you know about/of General MacArthur?'라고 질문해야 맞는다.
3.2. 기타
강의석이 강의실에서 어느 여학우에게 공개적으로 고백을 하였으나 차였다고 하는, 소위 고백 사건이 있다. 그런데, 그녀는 퀸카로 유명한데다 남자친구도 있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당연하겠지만, 그녀는 부담을 느끼고 거절했다고 한다.후에 강의석 본인이 이 사건에 감명을 받았는지 그 경험을 소재로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시놉시스는 여기에.
서울대학교 재학시절 영화 동아리 '씨네꼼'에 가입하여 잠시 활동하였으나, 얼마 안 가 활동을 중단했고 결국 제명되었다. 여기에 대해선 강의석과 씨네꼼 측의 증언이 서로 엇갈리는데, 일단 강의석의 증언에 의하면 "동아리 전체 회의에 출석하지 않겠다고 했다가 제명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군대 투쟁 당시에는 복학했다가 재판을 받은 2011년 이후론 강의석은 서울대 법대에는 더 이상 적을 두지 않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제적당한 것이다. 언론에서 서울대학교에 취재해본 결과, "학과 측에서 전화를 걸어 "휴학하거나 등록 안 하면 제적"이라고 했더니, '등록 안 하겠다'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2019년 12월 중순 쯤 서울대 철학과에 재입학 신청을 했다고 한다. 원래는 법학과를 다녔지만, 제적 이후 법과대학이 폐지되면서 법학과로 재입학할 수 없게 되어 철학과로 대신한 것.[17] 그리고 재입학 신청이 받아들여져 2020년 3월부터 9년 만에 다시 학교를 다니게 되었고 2022년 2월 졸업하였다.
4. 휴학 기간 직업 활동
그는 휴학 기간 동안 택시기사, 권투선수 활동, 호스트바 등에서 일하였다. 단식투쟁하던 시기에 찍힌 사진만 본 사람들이 강의석이 호스트바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듣고 당황했지만, 단식투쟁 이후 찍힌 사진들을 보면 꽤 준수하게 생겼다. 항목 맨 위 사진 참조. 덕분에 소수지만 얼빠(…)도 있다.강의석이 이렇게 계속 이슈가 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18], 잘생긴 얼굴 때문이기도 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아무튼 이 얼빠(?)들이 진심으로 한탄하는 부분은, 강의석이 호스트바에서 일할 때 손님으로 가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거의 지명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19] 여담으로 이때의 소개 멘트는 "감미로운 목소리와 섹시한 엉덩이 의석이에요"가 있었다고 한다.[20]
해당 직업 활동에 투신할 때마다 인터뷰에서는 "뭔가 한번 해보겠다."는 투로 말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때려쳤다. 젊은 시절에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거칠 수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보통 사람들의 경우도 이렇게 여러 번 진로를 바꿀 경우 단 하나만이라도 좋으니 직업적 성공을 해야 욕을 먹지 않는다.[21]
군대 투쟁 직전까지도 강의석은 권투 훈련을 받았고, 또 2005년 한국권투위원회의 테스트를 통과해 프로권투선수 자격증을 따는 등의 건강한 모습을 보이나, 병역 신체검사를 앞두고 갑자기 연약한 두개골 문제가 발견되어 4급 공익요원으로 판정받는다. 본인 증언에 의하면 "권투를 하다가 맞았는데, 그 이후로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연약한 두개골로 인한 뇌출혈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4급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게 군대 입대를 앞둔 까닭인지, 군대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4.1. 강의석 닷컴(2010)
군대 누드 시위 이후에는 관악구 신림동 서울대 앞에 작은 심부름 센터인 '강의석 닷컴'을 만들어 몸소 사장이 되어 떡볶이 등을 나르는 일을 하기도 했다. 2012년 출소 후 인터뷰에 따르면 '강의석 닷컴'은 돈만 엄청나게 날리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22]<친구의 누나에게>라는 제목의 디지털 싱글을 발매하기도 했다.
5. 사회 활동(2008~2011) - 군대 투쟁
아래 기고사건 이전 2008년 3월 인터뷰부터 군대 반대 인터뷰를 하게 된다. 실천은 9월 박태환 기고 사건부터이다. 병역거부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지 강의석을 검색하면 그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냐는 질문 글이나 추측 글이 있는데, 강의석은 종교가 없고 적극적인 무신론자이다.그가 군대 무용론을 지지하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2008년 1학기에 성공회대학교에서 한홍구 교수의 '군사주의와 한국사회'라는 수업을 청강하면서 병역 거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됐고[23], 고교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병역거부를) 결심했다. 그때 군대라는 것이 조금도 쓸모가 없는 곳이라는 것을 확신했다."고 한다.(#)
5.1. 박태환 기고
대학내일 기고 칼럼에서 박태환에게 '너도 군대 가'라는 기고를 통해 군대를 가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보인다. 그 뒤 박태환이 금메달을 따서 면제[24] 받자 "박태환도 현역으로 복무해야 한다"고 말하며 앞뒤가 안 맞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울대 법대 전 학생회장인 차진태는 윗 글에 대해서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어떤 평화주의자들의 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이다. 그는 반드시 자신의 폭력성을 조절, 통제해야 하는 단계에 이른 것 같다."고 지적했다.
위의 박태환에게 보낸 기고 칼럼에서는 2009년 2월 완성이라 했지만 누드시위 이후에 본인의 미니홈피에서 단편영화 <군대?>를 공개했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약 20분 영상. 강의석은 그 이전에도 학내 아프리카 봉사활동 후 <아프리카?>라는 단편 영상물을 제작한 경험이 있다. 영화에 관심 있다고 하는데, 아래 맥스무비 인터뷰를 보면 영화에 대한 조예가 깊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5.2. 국군의 날 알몸 시위
이렇게 붉은색 페인트로 몸에 칠을 하고 시위한 것은 2008년 9월 30일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일대에서 시위한 것이다. 군대 무용론 항목의 사진도 동일한 날의 시위.
본격적으로 2008년 10월 1일, 국군의 날 군사 퍼레이드 때 나체 퍼포먼스를 하였다. 헌데 이게 그냥 국군의 날 행사가 아니라, 건군 60주년 기념 국군의 날 행사였던 것이다. 소총 모양으로 만든 과자를 하나 들고 알몸으로 뛰쳐나와, 천마 대공장갑차를 향해 탕탕탕 하고 과자를 먹는 퍼포먼스였다. 언론의 관심을 다시 받는 데 성공은 하지만, 종교 투쟁 때와는 달리 그닥 여론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하필이면 바로 다음 날 최진실 자살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시위 자체가 조용히 묻혔다.(...)
이게 나름대로 근성이었던 게, 국군의 날 퍼레이드 전에는 테러를 대비한 수색을 하게 되어 있고, 특히 강의석 퍼포먼스의 경우 사전에 예고까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방부 측에서는 이걸 막으려고 온갖 안간힘을 썼는데도 못 찾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강의석은 국군의 날 퍼레이드 시작 12시간 전부터 중앙분리대 관목 사이에다 미리 참호를 파놓고(...)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국군의 날 당시 "평화는 맛있다!"는 뜻에서 나눠준 쿠키.
2012년 인터뷰에 따르면, 이 일을 벌인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이 전부 전쟁에 미치고 살상무기에 미친 사람이 아니란 걸 적극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어."라고. 그의 평화주의 사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시위였는데, 외설적인 것을 싫어하는 대중의 여론을 생각해봤을 때, 알몸시위는 너무 과격한 시위였다는 평도 있다.
5.3. 서해교전 전사자 폄하 논란
2008년 9월경, 군대 문제를 토론해보겠다고 만든 싸이클럽 '군대?'에서 자신에게 날을 세우는 네티즌에게 "서해교전뿐만 아니라 독립군, 의병, 6.25 전쟁 당시 군대까지 모두 싸잡아 쓸모없다"는 극단적 주장을 내세웠는데 이게 논란이 되자 자기 주장이 담긴 장문이랍시고 아래의 글을 올렸다.
2008년 10월 13일, 강의석은 자신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서해교전(=제2연평해전)의 전사자들을 "개죽음"이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하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유가족들은 강의석에게 사죄를 요구하였다.(유족 공식입장/유족 인터뷰)
서해교전 전사자는 개죽음을 당했는가 전문
이 글에서 강의석은 개죽음이 전사자에 대한 비하가 아닌, 군대라는 비극적 현실에 희생당한 사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전사자들의 죽음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는 주장은 여전하다.
강의석의 주장은 결국, "전사자들은 강제로 군대에 끌려왔다가 서해교전이라는 사건에 휘말려 원치 않은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배경에 '남성들은 강제로 군대에 끌려간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 그러나 옹호 측에서도 그걸 짧게 줄인다고 말한 단어가 '개죽음'이냐는, 단어선정에 대한 비판이 있다.
5.4. 징역 선고
강의석 미니홈피 사진첩에 '곧 가게 될 곳'[27]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사진이다.[28] 본인도 감옥에 갈 것이라고 각오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누드시위 사건 후 생계를 위해 심부름 센터[29]나 분식집 일을 하였다.
2011년 공익근무요원 대상자에게 일괄적으로 부과하는 1개월 간의 기본훈련을 거부하면서 재판을 벌이게 된다. 그런데 강의석은 검사와 면담할 때 '군법무관으로 복무하고 싶다', '사법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군대 때문에 며칠 차이로 못 치르게 되었다.'[30] 등 신념과 별개의 개인적인 얘기를 해버려서 재판부에게서 "진심으로 군대에 대한 신념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언론에 조명된 것과 달리 "군법무관으로 복무하고 싶다"는 것은 주된 주장이 아니었다. 판결 결과에 따르면, 그저 만약에 가게 된다면 사법고시에 붙어서 군법무관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라는 말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다만 군대도 아니고 공익인데 이렇게까지 일을 벌였다는 데서, 나름의 '진심'은 있었을지도.
결국 법원은 "신념은 자유이나 행동은 제약이 있으며, 헌법이 정한 국방의 의무는 국가를 존립할 수 있게 하는 기본적 의무이며, 분단상황을 고려하면 의무를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며 그에게 2011년 6월 2일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는 당시 유죄판결을 받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일반적으로 내리던 선고내용이다.
재판 후 강의석은 드디어 판결이 내려져 기쁘다면서도 2년이나 시간을 끈 사법부에 회의를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다. #. 기자가 "MC몽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를 지지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강의석이 사법시험을 보는 것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현행법상 징역살이 뒤 만기출소일을 기준으로 5년간은 시험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데, 2017년에 사시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강의석이 자격조건을 갖춰도 이미 사법시험이 사라진 것.
6. 옥중 활동(2011-2012)
6.1. 수감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단식 투쟁
2011년 9월 20일, 기사화 되면서 알려졌다. 기사에 따르면 그가 수감돼 있는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면회를 다녀온 사람이 "강 씨가 지난 14일 아침식사부터 끼니를 거르기 시작해 6일째 단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19일 전했다.그를 면회한 인권연대 오창익의 페이스북에 전하면 전반적인 수용자 처우 개선을 요구하길 '어두운 생활거실의 조명을 더 밝게 해달라', '격주 토요일에만 가능한 운동을 매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등을 요구하고 있다. 안 그래도 군대반대운동과 병역거부로 이미지가 막장화된 강의석에 대한 이미지와 여론은 좋지 않아서, '정치인이 되려는 스펙 쌓기'라는 비판이 더해지고 있다.
그리고 저 단식 투쟁이 잘 안 돼서 한 차례 관뒀다가, 2012년 1월 27일에 다시 시작했다. 2월 9일에는 쓰러졌다고 한다. 결국 단식을 중단했고, 서울구치소에서 신설 교도소인 전남 해남교도소로 이송된다고 한다. 구치소 관계자는 "겨울에 기온이 크게 떨어져 수용자뿐 아니라 교도관들도 괴로웠고, 다른 재소자들은 문제 삼지 않았는데 홀로 제기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수감경력이 있는 김유식이 조언하길, 대체할 방법이 많다며 처우 개선의 필요성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의 글을 쓰기도 했다.
7. 출소 이후(2012-)
2012년 8월 14일, 가석방으로 출소했다.(#) 출소 이후 현재 독립영화 워크숍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2013년 1월 21일, 선정성으로 논란이 된 강민경 CF를 꼬집어 더 선정적이고 노골적으로 만들어 자기 유튜브에 올림으로써 논란에 올랐다.#
“남녀가 단 둘이 있으면 할 게 뭐 있나? 선정성보다는 여자가 남자를 면도해 준다는 가부장적인 컨셉이 더 문제인 것 같은데, 기껏해야 둘이 뽀뽀하는 건데 이것도 못 봐 준다면 표현의 자유는 어디 있을까? 초딩들도 다 아는 거 쉬쉬하지 말고 피임교육이나 확실히 했으면 좋겠다."라면서 제작 배경을 설명하고는 있지만, 만들어진 물건은 강민경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놓고 피임기구를 꺼내면서 "오빠가 지켜줄게"라는 발언을 하며 조롱하는 거였다.
영화감독으로 정식 데뷔했는데, 이번에 야심차게 영화를 촬영한다고 한다. #
한 여성과 결혼을 했다. 2017년 7월 22일 자신이 운영하는 술집 7번 출구에서 결혼식이 아니라 결혼 기념 파티를 조촐하게 열었다.
7.1. 단편영화 <미션스쿨>
대광고등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영화로 제작하려다가 지원금이 끊겨 고전하고 있다.대충 정리하자면, 영화 <미션스쿨>의 제작에 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 지원금 2천만 원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종자연 측이 갑자기 자금 지원 약속 당시에는 없었던 요구사항들을 제시하였다. 이에 지원금 송금이 2달째 연기되다가 결국 종자연 측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지원 계약 파기 통보를 받았다. 이 사태로 인해 종교 자유 투쟁 당시 한 배를 타며 신뢰를 쌓았던 종자연에게 제대로 통수를 맞았다는 게 강의석 측의 주장. 그러나 강의석이 주장한 예고편, 인터뷰, 설명회 등에 대한 요구가 제작비를 지원하는 입장에서 과도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굿펀딩에 등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크라우드 펀딩으로 제작자금을 마련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과는 마감일이 지나도록 목표액의 6.35%밖에 채우지 못해(₩635,000/₩10,000,000) 실패했다.
그렇게 제작비용 문제로 고전하다가, 2015년 10월이 되어서야 겨우 만들어져서 개봉했다. 네이버 영화 정보 그런데 네이버 영화 정보에 등록된 네티즌들의 평이 영 좋지 않다. 10점(별 5개)을 준 소수의 네티즌을 제외하면 대부분 1점(별 반개)을 줘서 평균 평점은 3점대에 머물러 있다. 기본적으로 강의석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비난과 미션스쿨에 대해서 지나치게 부정적이게 왜곡했다는 것이 주 이유.
그런데 평론 리플들을 호감순으로 정렬해 보면, 1점짜리 평론들이 앞에 몰려 있고, 10점짜리 평론들은 뒤로 밀려 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누적관객수는 152명. 이 영화가 독립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화의 모티프가 되었던 학내 종교 자유 투쟁이 제법 유명세를 탔건만, 정작 그런 영화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한 셈이다.
그나마 관심을 갖고 평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워낙 서울대 법대 입학 후에 일삼은 기행 때문에 대광고등학교 시절의 종교 자유 투쟁조차 진정성을 의심하는 여론이 형성됐는지라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7.2. 2차 국군의 날 누드시위
2013년 국군의 날 전쟁기념관 앞에서 또 다시페이스북에 올라온 사진을 보면 "한국은 전쟁을 기념한다(Korea Celebrates the War)"이라고 국문이랑 영문으로 적어 놓은 팜플렛으로 시위하였는데, 문제는 이 '기념[31]'이라는 의미 풀이에서 페이스북에서 난리가 났다. 강의석이 주장하는 기념관의 기념은 탄생이나 결혼의 축하의 의미로, "한국은 전쟁에서의 죽음을 무슨 결혼 축하마냥 기념한다"는 말을 하였다. 이 때문에 영단어 뜻 구분도 못하냐며 까이기도... 사실, 맥아더 질문 사건만 놓고 생각해봐도 영어실력이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강의석이 celebrate와 memorial의 차이를 몰랐다기 보다는, 국군의 날 행사를 '전쟁을 찬양하려는 행위'로 몰아붙이려는 의도에서 celebrate라는 단어를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한국군 측에서도 북한과 주변 강대국의 안보 위협과 관련해 할 말이 많다.
7.3. <애국청년 변희재> 촬영
2015년부터는 논란이 되는 인물을 주로 취재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하고 있다. 2015년 4·29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서울 관악을 출마를 선언한 변희재 인터넷미디어협회 회장의 일상을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 애국청년 변희재로 개봉한 적이 있다. 2015년 3월 19일 경향신문 ‘애국청년’ 변희재 일상 담은 다큐 영화 나온다···강의석 제작 영화는 당연히 변희재를 까는 내용에 가깝다.2016년에는 <제국의 위안부> 논란의 중심에 있는 박유하 교수에 대한 다큐 영화를 구상, 촬영 중이다. 2018년 3월 1일 IPTV를 통해 개봉한다고 한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극장에서 전부 까여서(...) IPTV로 개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참고로 넷플릭스에서도 서비스 예정이었는데 사용자들의 항의로 취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월 21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시사회를 하는데, 한국영상자료원 측에 ‘왜 이딴 영화를 상영하느냐’고 항의가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사실, 한국영상자료원을 강의석이 대관한 것이기 때문에, 자료원 측에서는 영화에 대한 호불호로 일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7.4. 네티즌 모욕혐의 무더기 고소
2015년 5월 17일, 인터넷에 올라온 자신을 비방한 글에 대해 모욕 및 명예훼손 혐의로 경찰에 무더기 고소하였다. 모욕 혐의 고소 건수는 무려 260여 건으로 강 씨가 고소한 글은 2011년 작성된 글부터 그 당시 것까지 다양하다. 네티즌 모욕혐의 무더기 고소 사건 대리인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 당시 인터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가 비방 글 작성자를 무더기 고소한 홍 모씨의 고소 대리인 최모 변호사가 맡고 있다.무더기 고소한 이유에 대해서 “결혼을 앞두고 처가에서 인터넷에 있는 악성 댓글을 보고 충격을 받아 고소를 결심하게 됐다. 댓글을 단 사람들이 강하게 처벌받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강 씨는 이어 “경찰 수사 과정에서 악성 댓글의 피해자인 나에게 여러 차례 진술을 하러 나오라고 하는 등 2차 피해가 컸다”고 주장했다.
경찰 측은 강의석 씨가 고소한 글 중 10%만이 검찰이 제시한 기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고소를 당한 사람들 가운데 강 씨의 고소 대리인과 합의를 한 사례는 계속 늘고 있으며, 합의금은 건당 150만~400만 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합의금 제시에 응하지 않은 사람은 민사소송을 진행하였다. 실제 손해배상 판결 금액은 대략 10만 원에서 100만 원 사이인 걸로 알려졌다. 관련기사1 | 관련기사2
7.5. 서울대학교 재입학 및 졸업
서울대학교에 재입학하여 졸업했다. 법대가 없어져 철학과로 입학했다고 한다. #애국청년 변희재 2를 계획중인 것으로 보인다. 근데 돈이 없어서 만들지 못하고 있단다.
현재는 과거의 기행적인 모습들은 거의 사라지고 자식들을 키우면서 평범하게 생활하는 듯 하다.
현재 직업은 학원 강사이자 과외 강사로 보인다.# @ 용두동 수학신으로 홍보하고 있다.
8. 사상과 평가
"또 사람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생각도 들었어. 사실 친구들하고 스몰토크를 한 적이 없어. 고등학교 다닐 때도 학교와 집만 오가면서 친구들과 공부 이야기나 학생회 이야기만 했어. 고등학교 졸업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여자 친구에 대해 물어본다든가 술을 한 잔 할 경우도 없었고… 사람을 잘 몰랐던 것 같아. 종교 자유가 있고 법이 완전해도 사람들은 힘들어 하겠구나 그때 깨달게 된 것 같아. 서로간의 비교, 열등감, 연인관계 등으로도 힘들잖아. 그래서 3학년 때부터 이런저런 고민이 시작됐고, 하고 싶은 일을 찾다 보니 택시기사를 하게 됐지." - 스스로에 대한 평가 |
8.1. 군대투쟁 관련 평가
고등학교 당시의 종교 자유 문제는 나름대로 설득력도 있고 지지도 얻었다. 서울대 법대 수시 입학 이후로 약간 의심하는 여론은 생겼지만 미션스쿨, 개신교에 대한 반감이나 헌법상 종교의 자유 보장이라는 명분의 측면에서 안티 기독교 집단 지지자가 많았다.그러나 서울대 입학 이후의 여러 기행으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고, 까를 양산하여 과거 종교자유 시위의 진정성까지 심각하게 의심받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알고 보면, 종교 자유 투쟁 때에도 "종교 교육" 자체를 부정했던 강의석의 "주장"은 상당히 극단적이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학교 선택의 자유" 정도로 받아들여져 매듭 지어지기는 했다.
군대 문제에서 강의석은 양심적 병역거부 외에도 군대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강의석은 아예 "세상에 군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군대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는 극단적인 군대 무용론을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징역형도 대체복무도 거부할 정도로 극단적인 주장을 펼친다(#).
누드시위 당시에도 연행되면서 외친 주장이자 어떤 인터뷰나 강의석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이렇다.
사람들이 입대는 국방의 '의무'라고 하는데, 그건 정부의 일방적인 생각일 뿐이다. 국민을 위해 국가나 군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나 군대를 위해 국민이 희생되고 있다. 군대에 가는 것은 국가 폭력에 동참하는 일일 뿐이다.
대체 복무에 대해서도 "군대는 원래 갈 필요가 없는 곳인데, 뭘 대체한다는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그가 설득보다는 우격다짐으로 주장한다는 점이 이미지를 악화시키기도 했다. 이런 소수자 운동일수록 대중에게 설득이 필요한데, 강의석이 선택한 비호감적 방법과 극단적 방식은 대중을 설득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여론을 악화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던 것.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가의 기고기사를 참조해보면, 이쪽 운동가의 강의석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볼 수 있다. 유교 사상의 영향이 잔존한 한국 사회의 통념상 외설적인 것을 꺼리는 사회에서 누드시위 등은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기보다, 대중들에게는 혐오스럽다고 인식시킬 수도 있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서는 그의 주장을 평화주의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본다. 사실 평화주의자들의 군대반대 운동, 군대무용론은 생각보다 오래된 운동이며, 한국에서 드물었을 뿐이지 해외에는 강의석 같은 사회운동가가 역사적으로 수두룩하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평화주의자들이 징병거부를 해서 후방의 재건사업에 투입되는 등 대체복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배경에는 '군대는 폭력집단'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현재 과반수의 징병제 국가에서는 징병을 거부하는 평화주의자들을 위해서 아예 국방세라는 제도를 병행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병역의 의무로 인해 실행해야 하는 군복무를 돈으로 메꾸는 제도이자 합법적으로 실시하는 간접적 용병제도이다. 왜 이게 간접 용병제냐 하면 납부된 국방세는 현역 군인의 급여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특히 군인이나 전역자들은 군대 부정론에 대해 '반역자', '매국노', '비겁한 놈'이라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은 법을 지키고 군대로 가는데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생기니, 스스로가 부정된 듯한 감정을 느끼는 것.
군대를 국가폭력이라 주장하면서 군대를 비판하지만 군대가 국가에서 어떤 위치에 존재하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며 군대를 폐지해야 한다면 그에 대한 대체 방안과 같은 군대에 대한 알고리즘에 대한 설명이나 논리는 전혀 없다. 만약 군대를 없애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려면 이렇게 해야 했다.
-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 군대를 없애면 무엇으로 국토방위를 대체할 것인가?
- 외국의 사례는 어떠한가? 실제로, 코스타리카, 아이슬란드 등의 나라는 정규군이 없다. 이 중 아이슬란드의 경우, 나토군에서 파견복무 형식으로 아이슬란드의 국토방위를 전담하고 있다.
그러나 강의석의 주장대로 완전히 군대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며 일반적인 국가에서 반드시 필요악으로 존재하는 것이다.[32] 그의 징병제 반대에는 찬성하는 반군국주의 성향의 사람들도 보통 모병제를 주장하지 군대폐지라는 극단적인 입장은 반대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또한 강의석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려고만 할 뿐이고 제대로 설명하려고 들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다.
사회운동을 할 때 거의 개인적으로만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종교투쟁 때도 혼자서 단식, 군대투쟁 때도 그냥 혼자서 누드시위를 했다. 이를 지적하는 기사가 있다. 강의석과 함께했다는 사람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이다"라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
그때그때 자신의 상황과 목적에 맞춰 '사상'을 변화시킨다는 비판도 크다. 고3이 되자 단순히 스펙을 쌓아 대학을 잘 가고싶다는 이유로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던 종교행사를 뒤집어엎으려 들었으며, 군대갈 때가 되자 군대에 가기 싫다는 이유로 평화주의 컨셉을 잡고 병역기피 행각을 벌였다. 결국 교도소에 가게 되자 이제는 교도소 인권 타령을 해대기 시작하는데, 결국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가 연관된 일에만 의로움을 내세워 달려드는 이러한 모습은 그가 주장하는 사상이 그저 사상누각일 뿐임을 드러낸다고 볼 수 있다.
8.2. 기타 평가
당시 서울대 법대 전 학생회장인 차진태는 "강의석은 언론을 통해 주목받는 데 성공한 경험 때문에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양식을 고치기 힘들기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위해 본인 스스로 더욱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고 지적했다. 또 "고교 때의 종교자유 단식투쟁, 권투, 호스트바 등은 지극히 폭력적인 행위이며 그 피해는 본인에게 간다"며 강의석의 폭력성을 지적했다.(#)프리미어 인터뷰에서 허지웅 기자는 세간의 평가를 이렇게 정리한다.
종교자유화 투쟁 이후 강의석의 행보들 탓에 순수성을 의심받는 것 아니겠나. 제기하기 편한 주제들 뒤에 숨어서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한다. 지금의 논란은 단순히 주제의 화제성 때문이 아니라. 예전의 그 강의석이라는 기억이 소환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개인 강의석을 따로 떨어뜨려 놓고 논의하기가 이미 어려워져 버렸다. 어떤 면에선 자초한 것이고, 감수해야 하는 부분이다.
88만원 세대 공저자 박권일의 평도, 허 기자와 비슷하게 발언했다.
강의석은 어렸을 때는 '세계평화'를 고민하다가 회의를 느끼고 '개인의 행복'을 찾게 됐다고 말한다. (중략)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다른 20대가 저렇게 하다간 십중팔구 망한다는 거다. 저건 고등학교 때에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현재 서울대 법대를 다니는 사람만이 구사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일 뿐이다.(#
9. 필모그래피
10. 참조
- 강의석 미니홈피
- 오마이뉴스 기고 - 강의석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기사
- 주간경향 인터뷰
- 맥스무비 인터뷰
- 매일일보 기사 - 강의석의 일대기가 정리된 기사
- 웹진 고함20의 출소 후 인터뷰
- 동아일보 인터뷰
11. 관련 사이트
12. 관련 항목
[1] 본인 명함 등에 하는 영문 표기이다.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에 따르면 Gang Uiseok이지만, 고유명사와 이름은 예외이다.[†] 2009년 12월[3] 한국의약품시험연구원 원장을 정년 퇴직하였으며 약학 연구와 아들 강의석의 고교 제적 취소 투쟁 지원으로 알려져있다.[4] 여동생 1명이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강의석이 종교자유 운동을 할 당시 인터뷰를 살펴보면 그의 형제관계는 누나 1명이 있음을 알 수 있다.[5] 영화 분장의 조연 역할을 맡았다. 한양대학교 무용학 학사.[6] 본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으로 입학했으나 2010년 미등록 제적되었다. 2019년 재입학이 허가되었으며 법학전문대학원으로 인해 법학과가 폐과되면서 철학과로 입학하여 2022년 2월 25일 졸업했다.[7] 물론 후술된 바와 같이 당시 당시 서울시의 고등학교는 진학생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배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기에 입학 이전에 인지했는지의 여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재학기간중 학교에 적응하려는 시도로 학교측이 요구하는 활동에 참석했을수도 있는 것을 굳이 트집잡는 것 부분과 마찬가지로 <아무 문제 없이 학교에 다니다가 대입 수시를 앞두고 다른 노림수가 생겨 갑자기 종교의 자유 활동을 한 것 아니냐?> 와 같은 메신저에 대한 인신공격을 목적으로 '진정성'에 대해 입증할 수 없는 자잘한 트집거리를 잡으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부분이다.[8] 그리고 위 단락에서는 '당시 대광고의 학칙상 개신교도만 학생회 임원이 될 수 있었으니 강의석이 비 개신교도였다면 거짓말을 한 것' 이라는 식으로 상황을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으나... 이 역시 학교측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해당 학칙을 적용하고 있었고, 이를 회피하기 위해 강의석이 얼마나 명확하게 거짓을 이야기했는지 역시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즉, 해당 학칙이 단순히 후보자들의 자율에 맡겨진 참고사항 정도였기에 비 개신교도 출마자도 단지 자신의 종교적 입장에 대해 말하지 않는 정도로 회피할 수 있는 문제였을 수도 있지만, 학교측의 철저한 입증 요구를 회피하기 위해 적극적인 거짓말이 필요했을수도 있다는 것. 전자라면 학교측의 책임이 보다 가벼워지는 대신 출마자 역시 적극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은 것이 되고, 후자라면 출마자가 적극적인 거짓말을 한 것이지만 학교측의 종교 강요 역시 그만큼 강력했다고 봐야 할 문제라는 것이다.[9] 다만 종교의 자유 문제를 제외한 문제는 미션스쿨이 아니더라도 사립고등학교에서 꽤 흔하게 나타나는 부조리이다. 강의석이 목소리를 내서 개선된 것은 종교의 자유 문제 하나 뿐이다. 그 외의 문제점은 자질이 부족한 교사가 퇴직하거나 자녀 진학 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부모의 항의가 있어서 해결된 것에 가깝다.[10] 재단이 영락교회다 보니 주말에 운동회를 여는 등의 일에 학교 운동장을 자주 빌려줘 주말 자습반 자습실이 소음으로 가득차거나, 자질 부족인 교사가 수십년째 근무하는 등.[11] 일례로 2017년 채플에 초빙된 청소년 사역자 문대식 목사가 해당 채플 이후 미성년자 성추행 혐의로 실형을 사는!!! 일이 있었다.[12] 고백사건, 영화동아리 제명이 그 예.[13] 고백사건이나 맥아더 동상 사건 등.[14] 1과 2에 대해 '개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옹호가 있지만, 강의석이 진학한 곳은 다른 학과가 아니라 법대다. 물론 법대 지망한다고 무조건 법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사회에 나가려는 것은 아니지만, 강의석은 아래 군대 문제에서 "군 법무관이 되고 싶었다"고 밝혔다. 군 법무관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일을 하는지 알고 있다면, 과연 강의석이 선서를 어기고 목적을 숨긴 과거가 군 법무관이 되기는커녕 그 과정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 것이다.[15] 종교의 모든 외부 활동의 목적은 종교적 목적이 수반된다. 순수한 의미로 외부 활동만 하라는 건, 종교 단체에게 "아무 외부 활동도 하지 말라"는 얘기랑 똑같은 말이다. 이게 문제라면 종교 단체들은 그 어떤 봉사활동도, 심지어 재난 구호활동도 할 수 없게 된다. 단순히 말해서 그냥 종교 간판만 달고 봉사활동만 해도 간접적으로 선교활동 효과가 된다. (과도한 선교 활동으로 숱한 어그로를 양산하고 있는 일부 예수쟁이들과, 아프리카 오지에서 묵묵히 봉사했던 이태석 세례자 요한 신부를 비교해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학교를 비롯, 각종 사업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애초에 무리인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16] 강의석이 그런 생각을 갖추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왜냐하면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는 이기적인 성향이 강의석의 활동에서 자주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군대 문제에서 그는 "평화를 위해 우리가 먼저 군대를 해체하자. 그러다 나라가 망하고 죽고 노예가 되어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며 타인의 자유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그리고 논리적으로도 앞뒤가 맞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17] 서울대 학칙상 학교를 스스로 그만두거나, 제적된 경우 1회에 한해 재입학을 신청할 수 있다 [18] 워낙 어그로 끄는 짓들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19] 아래의 맥스무비, 주간경향 기사를 참고하면 자세히 알 수 있다. 거의 최소 2번인 듯하다.[20] 당연하지만 이런 의견의 수는 엄밀히 말해서 적다. 고로, 걸러서 들어야할 여지가 있다.[21] 예를 들어 안철수 같은 경우 의대 출신으로 20대 후반에 이미 의대 교수가 되었으나, 다 관두고 컴퓨터 벤처기업을 차려서 성장시킨 데다 나중에는 경영대학 교수나 과학 융합 분야 교수가 되기도 하였으며 정치까지 발을 뻗었다. 이래도 직업을 아무렇게나 자주 바꿔댄다며 욕을 먹지 않는 이유는 성공적인 결과를 거두었기 때문. 즉, 직업을 바꾸는 것 자체보다는 성공을 못 거둔 게 욕을 먹는 원인이다.[22] 2019년 현재도 간판은 존재하고 있다.[23] 그는 이전부터 관심은 있었는데. 이때 사상적으로 군대 무용론을 확정하게 되었다.[24] 정확히 말하면 공익근무요원의 한 분야인 예술체육요원에 편입했다. 이 또한 2년 10개월 동안 해당 분야에 종사해야 하는 조건이 있으며, 조건을 갖추지 못할 경우 이전의 박주영처럼 재입대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면제라고는 하지만 그건 현역으로 가지 않기 때문에 편의상 싸잡아 말하는 것이고, 운동선수들은 예술체육요원으로 군복무를 대체하는 것이며 기초 군사 훈련도 받으므로 군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베이징 올림픽 이전 도하 아시안게임 3관왕으로 이미 자격을 획득했다.[25] 해군 측에서는 해군에 기여한 인물에게 명예역 대위 신분을 주는 제도가 존재한다. 박태환뿐만 아니라 이국종 역시 원래의 병역은 해군 수병으로 복무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 의사로서의 국군에 대한 기여도를 감안해 해군 명예역 대위로 임관했고 그 명예역에서 진급 명예역 소령을 거쳐 현재 명예역 중령이다.[26] 물론,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하는 드립이다. 도핑 사건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분명했고, 의료처방의 문제였던데다 고의가 없었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래서 박태환은 다시 선수로 복귀했다. 박태환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도핑에 대한 부도덕만 문제를 삼았고 다시 군대를 가라고 하지는 않았다.[27] 정확히는 '곧 2년간 있어야 할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검찰의 구형량이 정확히 징역 2년이었다. 이후 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때리는 선고형량인 1년 6개월을 선고했다.[28] 이곳은 롯데월드 어드벤처 3층에 있는 감옥 모형의 포토세트로 정식 명칭은 개구쟁이 감옥이다. 감옥의 창살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 고무로 되어 있어서, 양 옆으로 늘이면 들어갔다 나올 수 있게 된 구조다.[29] 앞에서 말한 '강의석 닷컴'이 강의석의 사업체 사이트였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문을 닫았다. 그것도 언제 문을 닫았는지 모를 정도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강의석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교통사고 한 번 나니까 망하더라'고…[30] 입영연기 사유 중에는 사법시험도 있기 때문에, 먼저 입영연기를 하고 사법시험을 치를 수 있다. 이에 대해 강의석의 주장은 "합법적으로 입영연기를 하는 방법을 몰랐다"였다. 입영연기 방법은 병무청 공식 사이트에서도 안내를 해주고 있는데, 과연 정말로 몰랐을까…[31] 기념(紀念)이라는 단어 자체가 '잊지 않고 마음에 되새긴다.'라는 뜻으로, 긍정적인 일과 부정적인 일을 구분하지 않고 쓰인다.[32] 사실 국가수호목적으로 보면 필요악이라고 볼 수 없다.[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