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7 22:58:06

영국 해협 돌파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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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전의 개요와 히틀러의 명령3. 작전의 입안과 준비4. 작전 개시5. 결과

1. 개요

1942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이어진 크릭스마리네작전. 독일 해군 함대프랑스의 브레스트에서 출발해 독일의 킬 항구까지 도버 해협을 돌파한 작전이다.

2. 작전의 개요와 히틀러의 명령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비스마르크가 격침된 이후로 독일 해군 총사령관 해군 원수 에리히 레더 제독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발언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히틀러는 독일 해군의 모든 행동에 대해 사사건건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 때, 브레스트에는 독일의 주력함인 전함 샤른호르스트그나이제나우 그리고 브레스트에 들어온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 등 세 척의 대형함선이 집결해 있었다. 레더 제독은 이들 주력함과 아직 건재한 비스마르크의 자매함 '티르피츠'를 합류시킬 수 있다면 아직 '라인 연습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나, 문제는 히틀러의 대양함대에 대한 불신이 점점 깊어만 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반면에,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은 브레스트의 이들 독일 함선들을 전략상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잠재적 위협으로 규정, 브레스트 항에 대한 집중공격을 할 것을 계속 주장하였다. 이는 브레스트의 위치상 영국 해협의 서단 남측에 위치하고, 대서양으로 진출하기도 용이하기 때문에, 영국 입장에서는 코 앞에 적이 몰려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브레스트에 대한 폭격은 전쟁 전 프랑스 해군이 건설해 놓은 각종 대공 방어시설과 독일이 추가한 장갑도크 등으로 인해 타격을 주기 어렵고, 아직 영국 공군 중(重)폭격기대의 폭격술도 미숙한 등 기술적으로도 곤란한 점이 많았으나, 1941년 영국 공군 폭격 항공단이 투하한 폭탄의 75%정도가 브레스트에 투하되었을 정도로 처칠의 브레스트 공격에 대한 집념은 대단하였다. 처칠의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41년 7월 초 프린츠 오이겐에 드디어 한 발의 폭탄을 때려박을 수 있었다.

7월 24일에는 계속적인 영국 공군의 공격을 피해 몰래 브레스트를 나서 비스케이 만의 라팔리스 항으로 향하던 샤른호르스트가 영국 공군에게 덜미를 잡혀 무려 5발의 폭탄을 맞고, 이 폭격으로 대화재를 일으킨 샤른호르스트는 3천t이나 되는 해수를 선체에 끌어들여 겨우 침몰을 면하고, 만신창이가 된 채 간신히 브레스트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나이제나우는 이미 예전에 입은 손상을 수리하고 있었으므로, 이로서 독일 해군의 강력한 주력함 3척은 1941년 7월 말 현재 모두 브레스트항에 숨어 수리를 해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대양함대의 주력함 3척이 모두 작전 불능 상태가 되어버린 상황은 그렇지 않아도 대양함대에 대해 불신감을 더해가던 히틀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 사건이 터지자 독일 해군이 보유한 대형함선의 존재가치 자체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영국 해군노르웨이에 대해 코만도 병력을 잠수함을 이용해 보내 치고 빠지는 산발적인 공격을 가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는 브레스트 항을 거점으로 계속 유지함으로서 중요한 전력을 허비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영국 공군의 노르웨이 공격은 1941년 3월부터 재개되고 있었는데, 먼저 대규모 기습대(코만도)가 노르웨이 북서해안을 공격했고, 8월 25일부터 9월 3일에 걸쳐서는 스발바르 제도에 침투, 노르웨이인들과 러시아인들을 선동시켜 탄광들을 마비시켰고, 12월 27일에는 복크세이 섬을 공격하여 해안포대를 완전히 파괴했고, 총계 1만6천톤 이상의 선박을 격파했으며, 98명의 포로까지 잡는 대 활약을 벌이고 있었다. 노르웨이에 대한 영국 해군의 일련의 공격행동은 히틀러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는데, 특히 12월 27일의 복크세이 섬이 공격당한 것은 큰 충격이었고, 히틀러는 결국 나름대로의 중요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 결론이란 바로 대양함대에 대해 대서양에서의 통상파괴 임무를 중지시키고 노르웨이라도 제대로 방어를 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는 영국 특수부대들이 노르웨이 북부를 계속적으로 노릴 것이고, 그 다음에는 대규모 함대와 지상부대를 동원하여 나르비크를 점령하려 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렇게 되면 스웨덴핀란드도 위협받게 될 것이고, 전쟁의 향방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판국에 귀중한 함선들을 하릴없이 프랑스의 브레스트에 묶어둘 수는 없다는 것이며, 모든 전함과 순양함들은 노르웨이로 집결해서 노르웨이라도 제대로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궁극적인 결론이었다. 아울러,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연합군의 대 소련 원조물자들을 실은 호송선단을 습격하는 데 이들을 활용할 여지도 있었다.

3. 작전의 입안과 준비

레더 제독은 이런 히틀러의 견해에 대해, 일단 비스마르크의 자매함인 티르피츠를 가능한 한 빨리 노르웨이의 트론하임 항으로 보내는 데에는 전적으로 찬성하였으나, 브레스트 항에 있는 3척의 독일 주력함에 대해서는 히틀러와 의견을 달리 하였다. 최단거리 코스인 도버 해협을 지나 북상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고, 그렇다면 이들 함선이 노르웨이로 가려면 아이슬란드 북쪽을 돌아 독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데, 이 항로의 경우 과거 비스마르크 추격전을 생각해보면 안전성에 의문이 드는데다가 아군 항공기의 도움도 못 받으며, 항로 길이도 만만치 않았고 일본이 참전하여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마당에 일단 출격중인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트미랄 셰어의 작전 진행을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의견을 내었다.

레더 제독의 이러한 의견을 히틀러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히틀러는 그 특유의 객기를 발휘하여 도버 해협을 강행돌파한다는 무모해 보이는 작전계획까지 세웠다. 그리고 나서 히틀러는 자신이 그런 대담한 행동을 벌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스스로 만족감까지 나타낸 것이었다. 당연히 군부에서는 이런 무모한 작전에 반대하였으나 히틀러는 자신의 '감'을 내세워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도버 해협을 돌파하는 것이야말로 영국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므로 훨씬 성공 확률이 높다. 도버 해협을 돌파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브레스트의 모든 대형 함정들을 퇴역시키고 승조원들과 배에 달린 함포들을 해안포 운용 요원과 자재로나 써먹어라."는, 사실상의 협박까지 덧붙였다.

결국 해군 내부에서도 히틀러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군 수뇌부에서도 "기왕지사 이렇게 된 것, 엄청난 도박이기는 하지만 한 번쯤이라면 해볼만 하지 않겠는가"하는 기대로 작전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작전의 가장 큰 열쇠는 독일 함대에 대해 계속적인 항공 엄호를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942년 1월 1일, 신임 공군참모총장 한스 에숀넥 장군은 전투기대 총감인 아돌프 갈란트 장군에게 "이 작전의 성패를 결정짓는 열쇠야말로 강력한 전투기 부대의 엄호에 달려있으므로 이에 만전을 기하라."는 내용의 지시를 내렸다. 1월 12일에 총통 관저에서 레더 제독과 에숀넥 장군, 갈란트 장군 그리고 3척의 대형함 전단장 해군중장 오토 칠리악스(Otto Ciliax) 제독 등이 모인 가운데 비상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 작전회의에서 긴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
1. 작전개시전에 독일 함대의 행동을 최대한 자제한다.
2. 야간에 브레스트를 나서 주간에 도버 해협을 돌파한다.
3. 갈란트의 지휘 아래에 있는 전투기대는 전력을 다해 함대를 엄호한다.

이 작전의 암호명은 '케르베로스'작전으로 명칭을 결정했다. 구체적인 작전계획은 전단장 오토 칠리악스 제독과 전투기대를 맡은 아돌프 갈란트 장군의 몫이었다. 해군과 공군으로부터 서로 연락장교가 파견되어 긴밀한 연락이 이루어졌고, 브레스트를 나서는 독일 함선에도 각 해상전투기대에서 파견된 공군 연락장교들이 승함하였다. 그리고 항공 엄호를 위해 Bf109Fw190전투기가 약 250대, 야간 엄호용 Bf110전투기가 30대를 준비했다. 그리고 이 작전의 주역인 3척의 주력함에는 임시적으로 해군 기지들의 육상용 대공화기를 대량으로 함체에 증설, 자체적인 대공화력을 크게 늘렸다. 작전시기에 관해서는 악천후에 조류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강하게 흐르는 때가 최고이므로 이를 면밀히 검토한 끝에 2월 11일로 결정했다.

이 작전 때는 그간 수장의 기싸움 때문에 상호 협조가 영 안 되던 해군과 공군이 간만에 제대로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공조했는데, 공군 또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죽을 쑨 이후로 총통에게 눈칫밥을 먹고 있었기에 여기서도 사고를 쳤다간 무슨 꼴을 겪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한편, 영국군도 사실은 독일 해군의 도버 해협 돌파 가능성을 생각은 하고 있었다. 1942년 2월 2일 영국 해군부에서는 "얼핏 보기에 독일 해군이 도버 해협을 뚫고 북상하는 것은 너무 무모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거함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구축함항공기의 엄호하에 해협을 돌파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쪽에 그들을 저지할 만한 강력한 함정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독일의 순양전함[1] 2척과 중순양함 1척이 대형구축함 5척과 소형구축함 5척 그리고 전투기들의 엄호를 받으며 도버 해협을 돌파하는 장면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분석이 나오고, 그 다음날 관할 영국 해군과 공군 부대에게 이러한 독일군의 도버 해협 돌파 가능성에 대하여 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의하여 도버 해협 연안의 보포트 뇌격기와 소드피시 뇌격기등 약 40대가 즉각출동태세에 들어갔고, 해협 근처의 해군 전력으로 6척의 구식 구축함들과 어뢰정등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스캐퍼플로에 있는 강력한 영국 해군 주력 전함들은 트론하임에 짱박힌 티르피츠를 견제해야 하는 이유로 그 곳을 나설 수는 없는 처지라 도버 해협쪽에 긴급사태가 벌어지면 거리상의 문제로 인해 당장 투입하더라도 제 시간에 도착하기 곤란하였다. 언급한 대로 영국군은 이미 독일군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있었고, 브레스트로 독일 해군 구축함들이 모여들자 경계를 더욱 강화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독일군은 보기에는 브레스트에서 조용히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영국 공군의 폭격대가 독일 해군의 작전 당일 저녁 브레스트를 공습한 뒤에도 보고서에는 언제나처럼 '독일 함대는 브레스트에 정박중'으로 되어있었다.

4. 작전 개시

1942년 2월 11일, 브레스트 항을 출발하는 독일 함대는 선두의 구축함 7척과 그 뒤를 따르는 칠리악스 제독이 승함한 기함 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 그리고 프린츠 오이겐 순서였다. 저녁 무렵 브레스트를 나서려 하는 순간에 공습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여, 함선들은 황급히 돌아왔다. 공습이 끝나자 함대는 다시 출동준비를 갖추고 브레스트항을 서둘러 떠나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가 예정보다 약 2시간 늦은 23시 00분 경이었다. 브레스트를 나선 독일 함대는 자정이 넘어 프랑스 북서안의 웨상 섬을 돌아 동쪽으로 진로를 변경해 약 27노트의 속도로 도버 해협을 향해 북상하기 시작하였고 1942년 2월 12일 05시 30분 경에는 셰르부르 만에서 어뢰정 편대를 합류시켰고, 이 때부터 Bf 110 야간전투기가 엄호에 들어가 08시 50분까지 같이 비행하였다.

영국군은 레이더를 장착한 허드슨 정찰기를 이용해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계속적인 초계활동을 벌이고 있었지만, 묘하게도 이날은 영국군 정찰기가 독일군이 활동하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날고 있었다. 09시 00분 경부터는 독일군은 영국군에 대해 레이더 방해전파를 내보내기 시작하였는데 이러한 방해전파는 이미 늘 독일군이 내보내고 있던 것이었으므로 영국군은 별다른 이상을 간파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브레스트항 폭격에서 폭격기들이 항구 내부에서 대공사격 엄호를 받으면서 숨어있는 3척의 독일 주력함들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설마 이들이 폭격이 끝나자마자 항구를 즉시 탈출했다고 예상하지 못한 것도 영국군의 사태 파악에 지장을 주었다.

영국군이 '이상한 징조'를 감지하기 시작한 것은 10시 20분이 넘어서였다. 먼저 프랑스 연안 상공에 다수의 비행기가 레이더에 포착되었고, 이어 해상초계중이었던 스핏파이어 정찰기가 독일군 어뢰정의 발견을 보고하였다. 그리고 10시 42분에는 2대의 스핏파이어가 독일군의 Bf 109 2대에 쫓기는 도중에 드디어 독일군의 주력함이 북상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황급히 기지로 도망친 이 스핏파이어 2대에 의해 영국군은 11시 09분에야 브레스트의 독일 주력함이 출항했다는 사실을 보고받게 된다.

영국 공군 연안항공단 사령관 공군소장 조버트 장군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만한 것이 독일군은 이미 영국군이 당초 예상하고 있던 지점보다 벌써 약 550km 이상 떨어져 있던 데에다가, 해가 질 무렵까지 공중 공격을 할 수 있는 시간은 6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국군은 즉각 각 부대의 긴밀한 협동에 의한 항공공격을 가해야 했으나 현 시점에서 즉각 출격이 가능한 것은 '만스톤'기지에 있는 소드피시 뇌격기 뿐이었고, 보포트 뇌격기 부대는 공격범위 밖에 있거나 또는 어뢰 대신 폭장을 한 상태에 있는 등 전혀 출격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제1차 항공공격 지휘를 맡은 에드먼드 공군중령은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어 버렸다. 당장 출격 가능한 것은 소드피시 5개 편대 중 달랑 1개 편대뿐이었고, 이것으로는 고속으로 북상하는 독일 함대를 잡기에는 역부족일 것이 뻔한데다 전투기의 호위도 당장은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결국 중령은 전투기의 호위 없이 1개 편대 6대의 뇌격대를 출격시킬 것을 결심하였다. 그러나 1개 편대 6대의 뇌격대는 독일 해공군의 호위 전투기와 강력한 대공포화에 휘말려 단 1발의 어뢰도 명중시키지 못하고 모두 격추당했으며, 에드먼드 중령을 비롯한 모두 18명의 탑승인원 중에 단지 5명뿐만이 구조되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이러는 동안 독일함대는 이미 12시 30분 경에 도버 해협을 통과하여 북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조버트 장군은 콘월과 노포크에 있는 보포트 뇌격기대에 출격준비를 명하고 서니 섬에 있는 보포트 뇌격기대를 출격시켰으나 영국군의 전투기와 공격기 사이에 독일군의 방해전파로 교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영국의 보포트 뇌격기대가 독일 함대에 접근할 즈음인 14시 30분, 기뢰를 건드린 전함 샤른호르스트는 큰 폭발음을 내며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이 폭발은 상당히 큰 것이어서 주변의 다른 함정에서도 그 진동을 느낄 수 있었고 폭발로 큰 피해를 입은 샤른호르스트는 어쩔 수 없이 벨기에네덜란드에 임시 기항해야 할 듯 보였으나 샤른호르스트의 승조원들은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여 응급 수리를 해내어, 15시 00분이 지나자 다시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상공에서는 보포트 뇌격기대와 독일 전투기들 간에 치열한 공중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영국 해군의 구축함 전대도 공격을 가해왔지만, 영국 해군의 공격이 대규모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해군 구축함 1척에 손상을 입힌 것 빼고는 독일 해군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는 못하였다.

저녁무렵이 되자 독일 해군 측에 더 유리하게 악천후가 찾아오기 시작하였고, 영국군은 더이상 독일군을 공격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독일 함대는 네덜란드를 지나 독일 본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19시 55분경 이번에는 그나이제나우가 기뢰를 건드렸으나, 응급수리로 항해를 계속했고 그나이제나우와 프린츠 오이겐은 다음 날 07시 00분에 킬 운하 입구의 브룬스뷔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편 샤른호르스트는 운없게도 뒤쳐져 따르던 그날 21시 34분에 그나이제나우가 당했던 그 장소에서 또 기뢰에 걸려 손상을 입었다. 이번에도 샤른호르스트는 큰 피해를 입어 기관이 거의 정지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배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1,000t에 이르는 해수를 끌어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으나, 겨우 응급수리를 마치고 1942년 2월 13일 아침 빌헬름스하펜에 임시로 기항하게 된다.

5. 결과

비록 샤른호르스트가 큰 피해를 보고 그나이제나우도 만만치 않은 피해를 보았지만, 케르베로스 작전은 결과적으로는 성공하게 되었다. 이 공로로 전단장 오토 칠리악스 제독은 대장으로 진급, 노르웨이 주둔 독일 해군 사령관으로 종전시까지 재직했다.

영국 해군과 공군으로서는 브레스트의 독일 함대가 주는 위협은 없어졌다는 득도 있으나, 자신들의 앞바다를 독일 함선들이 유유히 통과하는 모습을 보게 됨으로서 해양제국의 자존심에 타격을 입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태까지 브레스트에 집중한 폭격이 모두 무용지물화되면서 영국 공군 중폭격기대에 대한 신뢰가 바닥까지 떨어지게 된다. 이 때 입은 타격은 폭격부대에 대한 예산 등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아서 해리스 장군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기를 써야 했다.


[1] 영국 측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