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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정치사/전기/브리튼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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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브리튼섬
2.1. 잉글랜드
2.1.1. 게르만족들의 칠왕국
2.1.1.1. 켄트2.1.1.2. 서섹스2.1.1.3. 에섹스2.1.1.4. 동앵글리아2.1.1.5. 머시아2.1.1.6. 노섬브리아2.1.1.7. 웨식스(데인로 이전)2.1.1.8. 기타 소왕국들
2.1.2. 웨일스를 제외한 브리튼 내의 로만 브리튼인들의 세력들2.1.3. 이교도 대공세기
2.1.3.1. 데인로2.1.3.2. 웨식스(데인로 이후)⇒잉글랜드 왕국
2.2. 웨일스2.3. 스코틀랜드
3. 아일랜드

1. 개요

4~5세기경 이민족이 국경 전역을 강타하자 국력이 급속도로 감소한 로마 제국속주의 군대들을 전부 소집해 제국을 방어하고자 했다. 일부 군대가 남아 있었지만 407년 콘스탄티누스 3세황제를 참칭하며 브리타니아 주둔군을 이끌고 갈리아를 침공했고, 그곳에서 전멸하는 바람에 본토는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410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브리타니아로 편지를 보내 스스로를 지키라고 명령하며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전격적으로 철수되었다.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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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인 픽트족
브리튼인
(로만 브리튼)


이에 남아 있던 로마인과 로마화된 켈트족들인 로만 브리튼들은 현재의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던 픽트족들의 침략에 노출되었다. 결국 446년에 브리튼인들의 지도자 보티건(Vortigern, 왕이라는 뜻에서 유래)은 색슨족을 용병으로 불렀는데 주트족 이주민들은 처음에는 브리튼인들과 함께했지만 꾸준히 브리타니아의 항구들을 확보해나가는 등 점차 더 많은 토지와 재물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일어났다. 수도자 길다스(Gildas),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건은 색슨족의 족장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 형제와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헹기스트의 딸 로웨나(Rowena)와 결혼했으나 헹기스트 형제가 보티건을 배신하여 잔치 자리에서 참석한 브리튼인 귀족 전원을 학살했고 보티건의 왕권을 강탈, 켄트 왕국을 세웠다.

보티건의 아들들인 보티머(Vortimer)와 카티건(Catigern)이 맞서 싸워 호르사를 죽였으나 이들도 결국 헹기스트와 로웨나에게 살해당해서 브리튼인은 색슨족에게 복속되었다. 이후 색슨족에 이은 앵글족, 유트족의 공격으로 수많은 브리튼인들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430년 전후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Ambrosius Aurelianus)라는 지도자의 지도 하에 브리튼인은 한 세대 정도 앵글로색슨족의 침공에서 버티다가 물러났는데, 이 시대를 배경으로 생겨난 전설이 바로 아서 왕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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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브리튼어 화자들의 이주

그러나 그 잠깐의 승리 이후 결국 브리튼인들은 스코틀랜드, 웨일스, 콘월, 그리고 바다 건너편의 브르타뉴로 밀려나야 했으며, 이후 켄트 왕국만이 잉글랜드 남동부에 자리잡았고,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476년까지 있었으나 이후 477년에 그 빈자리로 그리고 뒤이어 같은 게르만계 민족인 앵글족, 색슨족, 프리지아족 등 게르만 대병력이 자신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와 비집고 들어왔다. 477년 색슨족의 서식스를 시작으로 519년 웨식스, 521년에 앵글로족의 머시아, 527년 미들색슨족의 에식스, 571년 앵글로족의 동앵글리아와 마지막으로 653년에 노섬브리아를 세우는 등 잉글랜드 곳곳에 자신들의 왕국을 건국해 로마 제국의 보호가 없는 브리튼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2. 브리튼섬

2.1. 잉글랜드

2.1.1. 게르만족들의 칠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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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왕국의 통상적인 강역도

잉글랜드의 경우 5세기경 초인 410년 로마군이 철수한 후 북쪽의 픽트족의 침공이 두려워 나머지 트족 용병 대장 헹기스트, 호르사 형제를 고용해 함께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으나 곧 주트인들이 비옥한 땅 브리튼 섬을 탐내게 되어 본토 북해 연안 일대에서 대군을 호출해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펼쳤다.

주트린들은 겐트 지방에 켄트 왕국을 세웠고, 이후 같은 게르만계 민족인 색슨족, 프리지아족, 앵글족도 이 정복 활동에 동참해 나가, 섹슨족들은 엘레를 왕으로 하는 서식스를 건국했고,뒤이어 체르디치를 국왕으로 하는 웨식스, 애셀와인을 국왕으로 하는 에식스 등을 건국한다. 앵글로족은 뒤늦게 이겔을 왕으로 하는 머시아의 건국을 시작으로 6세기 중반 위하 왕이 동앵글리아를 마지막으로 노섬브리아가 건국이 되면서 칠왕국이 성립되었고, 한편으로 제일 강력한 세력들이 앵글족과 색슨족이었기에 앵글로색슨 시대로도 불리고 있다.

7왕국 초기는 당대 기록이 없어서 형성 과정이 명확하지 않으며 이들의 경계도 서서히 생겨났다. 잉글랜드인들은 대체로 서로를 정복하기보다는 가장 강력한 왕에게 복종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가장 강력한 종주국 왕을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처럼 브리튼의 지배자라는 의미로 '브레트왈다'(brytenwalda)로 불렸다. 브레트왈다와 종주국은 나머지 왕국들을 명목상 종속국으로 삼았고, 각 왕국들에게 봉토를 수여하는 형태로 각 소왕(小王)들의 봉지를 인정해주는 대신 주종 관계를 유지했지만 브레트왕다의 자리는 대략 100년 단위로 번갈아가며 차지하는 국가가 바꿔져 갔다.

초창기인 5세기에는 남부 서식스로 초대왕인 서식스의 엘라가 최초의 브레트왈다로 언제 브레트왈다로 불렸는지는 불명이다. 다만 해당 낱말 자체가 9세기 후반에 쓰인 웨식스의 여러 역사서들, 즉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용어이다. 5~9세기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7왕국의 지배자들 중 다른 앵글로색슨 왕들을 압도하는 권력을 가진 브리튼(잉글랜드)의 패왕(覇王), 대군주들을 역사가들이 선정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한마디로 춘추전국시대의 주도권을 쥔 5명의 군주를 뜻하는 단어인 춘추오패와 비슷한 용어로, 엄밀히 말하면 직위가 아니다. 정작 7왕국의 각축이 한창이던 5~8세기의 앵글로색슨 군주들이 이 용어를 썼다는 증거는 없다. 브레트왈다 목록 작성의 원조가 되는 8세기의 인물인 성 베다(Bēda)도 브레트왈다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역대 브레트왈다의 목록에는 7세기 이전까지 남부 제(諸), 7세기 후반에는 북부의 노섬브리아가 잉글랜드의 패권을 차지했다는 점이 반영되어 있다. 단, 8세기에서 9세기 초반까지는 중부의 머시아가 패권을 장악했지만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는 머시아 군주들이 브레트왈다로 평가받지 못한다. 머시아는 웨식스의 숙적이었으므로 웨식스의 관점에서 작성된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저자들은 머시아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9세기 말 남서부 웨식스가 데인족들의 점령지들을 탈환하고, 머시아를 합병하는 등 최종 승리를 거두어 브레트왈다 목록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게르만족들의 칠왕국의 정치 구조는 마지막으로 건국된 노섬브리아가 세워진 7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형성제 사회를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사회는 가장 큰 단위인 왕국을 지배하는 왕(대군주)와 그 하위 지역을 지배하는 귀족(earldorman이라고 불림) 또는 독립적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부족 지도자가 있었고, 그 밑에는 자유민(ceorl)과 노예로 구분되었다. 자유민은 앵글로색슨인 평민들로 구성되었고, 노예는 절대다수가 로만 브리튼인들의 후손들로, 이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데인인의 침공으로 사회가 초토화되기 이전까지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상인이나 수도자와 같이 이에 속하지 않는 계급들은 왕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체올(ceorl)이라 부르는 자유민은 기본적으로 게르만 부족사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스카를처럼 한 개의 대가족의 수장이었으며, 그의 가문과 그에 속한 가문원들은 가장(자유민)에게 속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들은 필요할 때 자체적으로 무장하였으며, 왕국의 법의 적용을 받았다. 물론 재판을 걸 수도 있었다.

반면, 농지를 경영하는 농부들은 이런 체올들과는 별개로 여겨졌는데, 앵글로색슨의 토지는 내야-외야 토지로 구분되었으며 농부들은 대게 외야 토지를 경영했다. 그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가졌으며, 대군주(왕)에게 지대와 몇몇 의무들을 지불, 또는 수행하여야 했다. 농부들은 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친족 및 문화적 집단 내에서 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이들과 별개로 각 왕국들 내에서 자치를 유지하는 부족들이 7왕국을 통틀어 35개 존재했다. 이들은 Tribal Hidage라고 불렸는데, Hidage는 하이드세를 뜻하는 단어로 토지 1하이드(Hide) 단위로 왕에게 바치는 세금을 뜻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각 왕국별로 이들 부족들의 영토와 부족원의 수를 측정하고 세금을 매기기 위해 1하이드 단위로 쟀기 때문이다. 이 각 부족들의 족장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있어서 왕가가 통치하는 지역과 동등하게 여겨졌으며, 공물이나 세금도 따로 냈다. 이 부족들 대부분은 6세기에서 늦어도 7세기까지는 각 왕국들에 통합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앵글로색슨인이었지만 예외적으로 브리튼 부족들이 그대로 자치권을 인정받은 경우도 있었다. 한편 이 Tribal Hidage에 속하지 않는 반독립적인 부족들도 존재했다. 이 부족들은 Tribal Hidage에 포함되기에는 너무 크지만 그렇다고 독립적인 왕국을 이루기에는 애매한 부족들로, 때때로 그들이 속한 왕국이 혼란에 빠지거나 힘이 약해졌을때 왕을 자칭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머시아 동남부 동앵글리아국경에 인접한 중앵글족(Middle algles)이나 동앵글리아의 귀르워스(Gyrwas)족, 서식스의 해스팅가스 또는 하에스팅가스(Haestingas)족 등이 있다.

중앵글족은 머시아와 동앵글리아 국경에 끼인 앵글족들을 이르는 말로, 이들 이외에 밑에 남앵글족(South Angles)나 북쪽에 북앵글족(North Angles)도 있었으나 이들은 독립적인 단위를 이루지 못하고 소멸했다. 중앵글족 역시 독립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7세기 머시아의 펜다 왕 통치 기간에 머시아에 병합되었으나 이후로도 머시아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적인 영토 단위로 간주되어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으며, 교회 교구도 따로 설치되었다. 한때는 머시아 교구와 중앵글리아 교구가 동등한 단위로 주교를 각기 임명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늦어도 8세기까지는 독자의식이 희미해지고 머시아의 일부로 완전히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귀르워스족은 앵글로색슨족이 주변에 가득한 상황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로만 브리튼계 부족으로, 어떻게 살아남았냐면, 그들이 사는 지역은 현재 케임브리지셔 구역과 정확하지는 않으나 얼추 일치하는데, 당시는 이곳이 육지가 아니라 늪지대였다. 앵글인들은 굳이 그 지역까지 진입하는 것을 꺼렸기에 브리튼계이면서도 거의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앵글로색슨어로 Gyr는 깊은 늪지대라는 뜻으로, 깊은 늪지대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들 부족은 각각 머시아와 동앵글리아에 분할 점령되었다.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하에스팅가스족은 오늘날 헤이스팅스 지명의 어원이 된 부족으로, 바로 그 유명한 헤이스팅스 전투가 그들이 사는 영역에서 발발했다. 하에스팅가스라는 이름은 하에스타라는 족장의 부족이라는 뜻이다. 한때 이들이 프랑크족이라는 가설이 제안되었으나 현재는 켄트 왕국의 주트족과 동계라고 본다. 6세기 또는 늦어도 7세기에는 정착했으며, 686년 켄트가 웨식스에게 국경지대 영토를 할양했을 때 이들도 웨식스령으로 넘어갔으나, 771년 머시아의 오파 대왕이 에식스, 켄트, 서식스, 웨식스를 개발살 내놨을 때 이들도 오파에 맞섰으나 대패하고 이후로는 서식스에게 귀속되었다. 이들은 무려 11세기까지 독자성을 유지했다고 한다. 참고로 7세기 말~8세기 초에 켄트와 서식스가 모두 개판일 때 거의 완전한 독립을 누렸는지, 서식스에서 이 부족의 지도자를 '왕'이라고 자신들과 동등하게 언급하는 서신이 존재한다.

앵글로색슨 사회에서 엘리트적인 귀족 가문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했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내 패자를 뜻하는 브레트왈다는 본래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의 지도자를 부르던 명칭이라고 하며, 이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지역 게르만 부족왕국들이 그랬듯 전쟁에서 싸우는 전사에 가까웠고 왕권의 기반 또한 전쟁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워딘(오딘)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신화적인 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왕국에 속한 이들에 대해 '친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배했다. 왕은 군대를 소집해 전쟁을 벌일 수 있었으나 대신 음식이나 숙소, 무기를 병사들에게 지원해주어야 했던 의무관계였다. 또 왕은 자유민들로부터 식량을 빌렸으며, 약탈에 나서 획득한 약탈품들을 통해 잉여가치를 만들어냈다.

한편 앵글로색슨족은 7세기를 기점으로 매장이 쇠퇴하고 무덤을 만들게 되는데, 동시에 무역을 위한 무역소들이 설치되고 약탈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물품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소 또한 설치되었다. 그 결과로 이전에 약탈에 의존하던 시절보다 수지가 크게 개선되었고, 잉여생산물이 증대됨으로써 왕들은 무덤에 화려한 귀금속과 같은 것들을 같이 묻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동시에 사회적 부의 재분배 또한 이전보다 크게 활발해져, 사회적 계층 형성이 뚜렷해지고 토지 및 영토에 대해 더 수월한 관리가 가능해졌다. 또 브레트왈다의 정의가 명확해지고 전체 앵글로색슨 권역이 단순한 regnum(왕국)들의 집합체가 아닌 하나의 imperium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각 왕국들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도 변화했다. 머시아의 펜다나 오스위우, 오파 같은 왕들이 브레트왈다로서 주변국들에게 삥을 뜯고 내정에 간섭하며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던 행위들은 이러한 관념의 변화를 상징한다. 한편 오스위우는 북부의 픽트족이나 컴브리아인처럼 앵글로색슨의 권역에 포함되지 않는 부족들에 대해서도 통제를 시도했다. 이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으나 훗날 전체 브리튼 섬을 통합한 단일 국가라는 관념이 이미 이 시기에 아주 미약하게 싹텄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결과로 독립을 누리던 부족들이나 군소 왕국들은 서서히 더 큰 왕국들에게 통합되었고, 최종적으로 9세기 즈음에는 잉글랜드를 통틀어 5개의 나라만이 멀쩡히 독립을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단순히 사회적인 변화를 통해 군사적으로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단순히 확장하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베오울프 서사시에서 표징되는 것처럼 더 강한 세력을 가진 왕이 더 약한 세력을 가진 부족/소왕국들을 '보호'한다는 관념에 가까웠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7왕국에는 여러 부족들이 자치와 명예를 누렸고, 이들은 왕국에 종속된 것이 아닌 보호를 받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서서히 왕국 그 자체에 통합되어 이런 의미가 퇴색된 경우가 상당수이기는 하나, 서식스 왕국의 경우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서식스는 멸망할 때까지 합병한 부족들의 자치와 권역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다.

한편, 색슨족에게는 '위태나게모트'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의회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 이것의 본질적인 역할은 왕에 대한 조언 정도였지만, 이들은 실제로는 더 강력한 영향을 발휘해 토지 소유나 전쟁, 교회 문제 등 더 복잡한 사안을 처리했으며 때때로 웨식스의 경우처럼 왕위 승계에 관여하기도 했다. 한편 서식스 같은 경우는 고대 게르만족의 고유한 의회였던 '팅그'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초반에는 이들은 불과 수백 명 단위가 간편한 장소에 모여 회의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이들의 위상이 올라가 지방행정조직 간의 정기적인 만남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 법원의 역할도 수행했다.

한편, 9세기에는 최초로 '사제', '전사', '노동자(농민)'으로 구성된 세 계급이 언급되었다. 이는 왕이 자신의 통치를 펼치기 위해 이 세 계급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에서 나온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이 세 계급의 협조를 얻지 못하는 왕은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또 바이킹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알프레드 대왕은 왕국의 방어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는 명분을 들어 이 세 계급이 통치에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는데, 그는 이를 통해 단순히 자신의 통치권을 정당화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지주나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들을 적극적으로 회수하였다. 이전까지 토지 증여는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이제는 영구적인 소유권 이전을 의미했다. 그는 이 토지를 교회에 증여했고, 이를 통해 교회의 권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토지 소유를 퍼트렸다. 또, 이러한 개념의 도입은 토지의 세습을 정당화했으며, 곧 그 토지에 부속된 작위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었다. 이전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대륙의 백작에 해당하는 지방행정관 earldorman은 세습되는 작위가 아니었으나, 이제는 세습되는 대륙식 백작 또는 공작과 유사해졌다. 이로써 고전적인 부족적 전통에 기반해 있던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봉건제기독교에 기반한 중세적 국가로 재편되었다.

다만 편의상 칠왕국이라고 부르지만 동시에 건국된 것도 아닐뿐더러 또한 일곱 왕국만 있던 것이 아니라 위흐트아라, 메온와라, 서리, 린데세게,흐위체, 마곤새테, 펜케르새테, 팬츠새테, 우레오첸새테, 톰새테, 헤이스팅가스, 기르와스, 사우섬브리아와 같은 소왕국들이 존재했으며, 왕국 수준은 아니지만 여러개의 군장 국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2.1.1.1. 켄트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 헹기스트는 생존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의 476년 이후의 행적을 다룬 연대기들 마다 그의 죽음을 달리 서술하고 있다. 앵글로색슨의 입장을 반영한 <잉글랜드 교회사>와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선 그의 죽음이 기록되지 않고, 473년 로만 브리튼으로부터 승전했다는 것 밖에 없는 반면 로만 브리튼의 입장을 반영한 <브리튼의 역사>,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경우 브리튼인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하는데, <브리튼의 역사>에서 브리튼인들이 성 게르마누스를 사령관으로 세우자 성 게르마누스가 보티간 성에서 3일 저녁 기도를 바쳤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길이 떨어지고 성을 삼켜, 보티건이나 헨기스트의 딸, 그 외 많은 아내들과 거주자를 소사시켰다고 하고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넬리아누스가 지휘한 브리튼 군대에게 붙잡혀 처형되었고, 그의 손자인 옥타와 에오사는 아우렐리우스에 항복하고, 스코틀랜드와의 국경 근처의 토지를 주어져, 아우렐리우스와 계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켄트 왕국의 위치가 잉글랜드 동남부에 위치했던 만큼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내용은 오류이기는 하지만 헹기스트는 488년 사망했는데, 477년 원래 땅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던 색슨족의 일파가 족장인 엘라와 세 아들인 퀴멘(Cymen), 울렌킹(Wlenking), 치사(Cissa)와 함께 세 척의 배를 이끌고 퀴멘소라(Cymensora), 즉 지금의 웨스트 서식스의 셀시(Selsey) 해안에 상륙했다. 부자가 켈트 브리튼 인들을 죽이자 원주민들은 Andred's leag이라 불리는 숲으로 달아났고, 엘라는 서식스를 건국한다.

488년 헹기스가 죽자 그의 아들인 오이스크가 켄트의 다음 왕이 되었다. 512/516년 동안 통치한 것 외에 오이스크의 대한 기록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오이스트가 죽자 그의 아들인 옥타가 뒤를 잇는다.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 조부인 헹기스트가 죽자 암브로시우스에게 함복해 스코틀랜드와의 국경 근처의 토지를 얻은 것과는 달리 옥타는 친척인 에오사와 함께 암브레시우스가 이끄는 브리튼인들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으나 옥타는 색슨족이 아우렐리우스의 가신으로 브리튼 북부에 머물 것을 인정하는 휴전 협정을 협상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의 사후, 옥타와 에오사는 조약에 구속력이 없어진 것으로 간주하여 그의 동생 우서 펜드래곤과 교전을 재개한다.

새로운 브리튼인의 왕인 유서 펜드래곤은 군대를 이끌고 야습으로 옥타와 에오사가 이끌던 켄트 왕국군을 패주시킨다. 옥타와 에오사는 포로가 되지만 결국 탈주하여 독일로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군대를 고용한 후 대군을 이끌고 534/540년에 귀환하고, 유서는 다시 그들과 싸우고, 옥타와 에오사는 마침내 죽게 되었고, 옥타의 아들로 추정되는 에오멘릭이 뒤를 잇는다. 589년까지 통치한 것까지 외엔 치적이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애델베르흐트[1]가 켄트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시기 미상이나 애델베르흐트는 왕자 시절 파리-프랑크 왕국을 통치하고 있던 카리베르 1세의 딸 베르타를 왕비로 맞아 당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을 구축했다. 이당시만 하더라도 켄트 왕국은 게르만족 토착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동맹인 프랑크인들은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고 베르타도 마찬가지였다. 베르타의 영향력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Cantuariensis)를 켄트 왕국으로 파견해 가톨릭 포교를 시작했고, 국왕 애델베르흐트는 아내의 조언인지 아우구스티누스가 세니트섬에 도착하자 마자 개종하였고, 주트족 대부분이 왕을 따라 개종했다. 애델베르흐트는 자기 왕국의 수도 캔터베리에 새 교회를 지어 주었는데, 이것이 먼 훗날 영국국교회의 아성이 되는 캔터베리 대성당이 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면서 켄트 왕국은 기독교 국가로 발전시켰다.

또한 애델베르흐트의 치세에 각종 벌금제도를 규정한 에설버트 법전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게르만어파 언어로 쓰여진 법률서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후대의 머시아오파와 웨식스의 이네 또한 애델베르흐트의 법전을 참고한 자신들만의 법전을 만들었다. 유럽 대륙과 가까웠던 켄트는 에설버트의 치세 하에 프랑크 왕국과의 교역으로 번영했다. 켄트와 프랑크 사이에는 사치품 무역이 있었고, 매장 유물에는 프랑크의 문화적 영향을 반영하는 의복, 음료, 무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켄트의 매장지는 인근 앵글로색슨 지역의 수입품보다 더 다양한 수입품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그 빈도가 큰 것으로 보이지만 문헌 등을 조사하면서 애델베르흐트는 귀족들이 사적으로 해외 교역을 하는 것을 통제하고, 왕실이 해외 교역을 주도하게끔 해 왕실 재정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는데, 켄트의 특산품은 유리 컵과 보석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류로 인해 앵글로색슨인의 브리타니아 정착 이래 처음으로 켄트에서 화폐가 다시 유통되기 시작했다.

애델베르흐트의 대외 정책의 시작은 604년 직후 조카인 에섹스의 세베르트를 굴복시켜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킨 것이었고, 뒤이어 동앵글리아래드왈드 역시 애델베르흐트의 세력의 들어가 두카투스(ducatus), 즉 자신의 백성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유지했으며, 레베르트와 래드왈드는 애델베르흐트가 살아 있는 동안 켄트에서 명목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애델베르흐트의 치세 동안 켄트 왕국의 세력은 험버 강 남쪽의 잉글랜드 전역을 지배했고, 이후에는 현재의 서리(Surrey)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해 브레트왈다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강성해졌지만 머시아와 노섬브리아, 웨섹스를 세력권에 넣는 것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어재든 그의 치세동안 켄트는 잉글랜드에서 4번째로 부유해졌다.

말년에 애델베르흐트는 자신의 아들인 애드볼드를 공동 왕으로 세웠다. 또한 왕비인 베르타가 사망하자 이름 불명의 여성과 재혼했다. 문제는 애드볼드가 부모와는 다르게 여전이 전통적인 이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616년 애델베르흐트가 사망하자 애드볼드가 켄트의 단독왕이 되었다. 단독왕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애드볼드는 반기독교 정책과 함께 다시 이교신앙으로 회귀할 반동 정책을 실시하면서 자신의 계모와 결혼하려고 했다.

하지만 애드볼드의 종교 반동 정책은 얼마 가지 못했다. 베다에 따르면 애드볼드는 불신심 때문에 '빈번한 광기의 발작'과 '악령'의 빙의[2]로 고통을 받았고, 결국 619년쯤에 이교를 버리고 첫번째 왕비 즉 아버지의 후처와 이혼한다. 이후 624년까지 죽은 켄터베리의 2대 주교 멜리투스를 봉헌 교회를 세웠고, 3대 주교인 유스투스는 교황 보니파시오 5세에게 편지를 보내 애드볼드의 개종에 대해 보고한다.

이후 애드볼드는 두 번째 결혼으로 외가쪽 친척인 이메와 결혼한다. 이는 켄트와 프랑크 왕국의 강한 연결이 왕의 개종의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나아가 캔터베리의 선교사들이 프랑크인의 지원을 받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 620년, 애드볼드의 여동생 에젤버그가 켄트에 왔지만, 아이들을 프랑크 왕국의 다고베르 1세의 궁정으로 보냈다. 외교상의 연결 외에도 프랑크인과의 무역은 켄트에게 중요했다. 프랑크인의 압력이 애델베르흐트를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도록 설득하는데 영향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고, 애드볼드의 개종과 이메와의 결혼은 외교상의 결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625년 노섬브리아의 전신인 데렌 왕국의 에아드위네에게 누이인 애설부르흐와 결혼하여 켄트와의 결혼동맹을 맺은 것과 자신의 자식들을 다른 왕국들의 왕족들과 혼인 시킨 것을 제외하면 아버지와 달리 브리튼 섬의 게르만족 국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브레트왈다의 칭호 또한 매부인 에아드위네에게로 넘어 갔다. 이후 640년 사망하고 켄트의 왕위는 아들인 에오센베르트가 물려 받는다.

베다(HE III.8)에 따르면, 에오센베르트는 이교의 "우상"을 파괴하고 사순절을 지키라고 명령한 최초의 앵글로 색슨 왕이었다. 이 명령은 애델베르흐트가 시작한 켄트의 법전의 전통에 따라 공식적으로 문서화되었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문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캔터베리 대주교 호놀리우스가 죽은 후, 에오르센베르트는 655년에 첫 색슨인 대주교 데우스 데디트를 임명했습니다.

에오르센베르트는 동앵글리아의 왕 안나의 딸, 엘리의 섹스부르가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에그베르트와 할로테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각각 켄트의 왕이 되었고, 두 딸은 결국 열성되었다. 성 에오르센 고타는 대륙의 팔렘티에 수도원의 수녀가 되었고, 성 에르메닐다는 이리의 여자 수도원장이 되었다. 664년 에오센베르트가 죽가 장남인 에그베르트가 켄트 왕위를 잇는다.

즉위할 당시 에그베르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어머니인 섹스부르가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성년이 된 후 친정을 하면서 에그베르트의 궁정은 로마 교황청과의 외교나 성직자와의 교류가 활발한 것 같다. 그는 윌프리드와 베네딕트 비스코프를 맞이했고, 갈리아로 여행을 떠나는 시오도어 대주교와 캔터베리의 아드리안 수도원장의 호위를 맡았다.

켄트 왕가의 전설의 다양한 버전에 따르면, 그는 고문인 투노르의 부추김으로 사촌인 에셀레드와 에셀벨트를 죽이고, 그 때문에 그들의 누이인 돔네이프에게 두사람의 핏값(Weregild)를 지불해야 했고, 그녀가 사넷에 수도원을 지을 수 있었다. 이것은 에오센베르트의 혈통을 가진 왕족들 싸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살해당한 두 명의 왕자는 나중에 헌팅던셔의 람지 수도원에서 성인으로 숭배되었다. 칙허장에는 샐리의 처치 수도원의 수도원에 대한 에그베르트의 비호가 기록되어 있다.

673년 에그베르트가 사망했는데, 그의 자식들인 에아드리치와 위트래드가 어렸기에 들인 동생인 할로테가 켄트 왕위를 이어받는다. 676년 마시아 왕 에셀래드가 켄트에 침공하여 큰 파괴를 일으켰다. 베다에 따르면 교회와 수도원조차도 피해를 입었고 로체스터는 황폐했다. 피해가 컸기 때문에 로체스터 주교 푸타는 사임했으며 후임인 쿠위헬름도 주교구의 빈곤 때문에 사임했다.

그러나 할로테는 이 맹공격을 살아남았다. 할로테는 에그베르트 1세의 아들 조카 에아드리치이 장성한 후 공동으로 통치했으며, 시기 미상이나 두사람의 이름으로 기존의 애델베르흐트의 법전을 개정한 할로테와 에아드리치의 법전이 반포되었다. 반포된 법전으로 주로 살인과 관련된 보상 및 재산 상속과 부동산 취득에 대한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하지만 얼마안가 권력 다툼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고, 685년 에아드리치는 서식스로 망명하고 서식스의 공동 국왕이자 사촌인 베르둔과 안둔의 원조를 받고 켄트를 공격해 숙부인 할로테와 싸워 이겼고, 할로테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얼마 안 가 사망했고, 에아드리치가 켄트의 단독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웨식스의 패왕 캐드왈라의 공격으로 에아드리치는 축출되고, 캐드왈라의 동생 물(Mul)이 왕위를 차지한다[3].그러나 물의 통치는 1년도 못 가 켄트인들이 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지역 교회 근처 건물로 달아났지만 반란군들이 그들이 숨은 장소에 불을 질려 태워 죽였다.

캐드왈라는 해당 봉기를 진압했으나 688년 돌연 퇴위하고, 로마로 순례를 떠났고, 이때 켄트의 왕위는 에식스 출신의 스웨프허드와 스웨프베르흐트, 그리고 켄트 왕실의 후손으로 보이는 오스와인이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스웨프허드와 스웨프베르흐트는 켄트의 서부를 오스와인이 켄트 동부를 분할 통치했다. 689년 7월의 오스와인은 세인트 피터스 대성당과 하드리아누스 수도원장에게 켄트 주 리민의 왕궁에 속해 있던 철광석을 포함한 토지 1 술룽(아라트룸)을 준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치적에 대한 기록이 없었으며, 스웨프허드를 제외한 나머지 두 왕은 69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켄트의 다음왕으로 에아드리치의 동생인 위트래드가 켄트의 왕으로 즉위한다.

다만 그의 즉위 자체가 이전 왕들과의 권력 투쟁으로 얻은 것으로 보이는데, 베다에 따르면 위트래드의 즉위에 대해 그가 '정당한' 왕이자 '헌신과 근면함으로 나라를 외국 침략으로부터 해방했다'고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위트레드는 스웨프허드와 한동안 켄트를 공동으로 통치했다. 692년 7월 베오르트발트가 캔터베리 대주교에 선출되었다는 베다의 보고서에는 스웨프허드와 위트레드가 켄트의 왕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스웨프허드에 대해서는 이날 이후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694년까지 위트레드가 켄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것 같지만, 위트레드의 통치 중에 아들 에셀베르트가 서켄트의 소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위트레드에는 3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첫번째 아내는 쿠네시스에게 불렸다 그러나 696년의 헌장에서는 에셀버가 왕실의 배우자 및 재산의 공동 증여자로 나온다다. 이전 배우자는 단기간에 사망 또는 이혼했음을 여겨진다. 그의 통치가 끝나자 새로운 아내인 워버가 남편과 아들 알릭과 함께 증여자가 되었다.

위트레드가 웨식스의 왕 이네와 평화를 맺은 것도 694년이었습니다. 이네의 전왕 케드왈라는 켄트를 침공하여 동생인 물을 켄트의 왕에게 세웠지만, 그 후 켄트인이 반란을 일으켜 물을 태워 죽였다. 위트레드는 살해에 대한 보상에 동의했지만 이네에 지급된 금액은 알 수 없으며, 대개 3만 파운드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695년 기존의 할로테와 에아드리치의 법전을 개정했고, 새 법전은 주로 교회 내부와 교회에 대한 범죄, 교회의 권리와 절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이후 725년 사망하기까지 별 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죽기 전 세아들인 알릭과 애드베르트, 애델베르흐트가 켄트를 공동으로 통치하게끔 했다.

알릭은 즉위한지 1년도 안되어 사망했고, 748년 애드베르트가 아들 에아드울프를 남기고 사망했고, 이후 애델베르흐트는 조카 에아드울프와 함께 켄트를 공동 통치했다가 762년 사망했다. 그러다가 764년 머시아의 오파(offa)가 켄트를 침공했고, 에아드울프는 오파에게 굴복했다. 764년에 Offa는 로체스터에 자신의 이름으로 토지를 부여했으며 에아드울프를 왕좌에서 축출한 후 애델베르흐트 2세의 아들 애드베르트 2세와 시거드란 인물을 명목상 켄트의 왕으로 임명하지만 얼마 못가 오파에 의해 퇴위되거나 죽었는지 이안문드가 켄트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이후 헤베르트에서 에그베르트에 이르기까지 22년간 머시아의 속국으로 있다가 에그베르트 2세가 머시아와 오파를 상대로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고, 머시아와 켄트의 군대는ㄴ 현재 켄트 주의 오트포트에서 격돌했다. 승장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켄트가 수년 동안 독립된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아 켄트측의 승전으로 보고 있다. 이후 에그베르트 2세는 780년경까지 켄트의 왕으로 있다가 사망했다. 이후 애그베르트 2세가 사망하자 웨식스 출신인 에알흐문드가 켄트의 왕이 되었다. 이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친족이 없는 애그베르트가 부득이하게 웨식스 출신의 에알흐문드를 불려 공동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고 있거나 아니면 에알흐문드의 출신이 웨식스가 아닌 켄트로 보고 있다.

에알흐문드가 켄트의 합법적 계승자라는 사실은 784년 발행된 칙허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그의 통치는 1년을 넘기지 못했으며 머시아의 오파에 의해 축출되었고, 사제였던 애드베르흐트 3세를 환속시켜 켄트의 명목상 왕으로 세워졌으며, 오파는 796년 죽기 전까지 켄트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파가 죽자 애드베르흐트는 머시아의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친머시아파인 캔터베리 대주교 애셀하트는 반란 중에 도망쳤다. 머시아의 쾬울프는 당시 영국의 교회 상황에 대해 교황 레오 3세와 서한을 주고 받았고, 그 과정에서 레오에게 머시아가 켄트를 정복하기 위해 애드베르흐트가 전직 사제였다고 밝혔고, 레오는 애드베르흐트를 파문하면서 머시아가 켄트를 정복하는 것에 대해 동의했다. 교황의 승인을 얻은 쾬울프는 켄트를 재정복했다. 그는 동생을 그 자리에 맡기고 798년에 애드베르흐트를 잡았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쾬울프는 "켄트를 정복한 후 왕인 애드베르흐트를 붙잡고 머시아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연대기 이후의 설명에서 애드베르흐트는 양손을 잘라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웬도버의 로저는 쾬울프의 자비로 어느 시점에서 애드베르흐트가 해방되었다고 추측했다.

이후 켄트는 완전히 머시아의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오파의 동생으로 분국왕으로 임명된 커스레드는 통치 기간 동안 리치필드 대주교구는 803년 10월 12일 클로베쇼 공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캔터베리 대주교구는 머시아의 오파가 박탈하려고 했던 지위를 되찾았다. 커스레드의 통치 중에 바이킹에 의한 첫 습격도 일어났으며, 수도 켄터베리가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다. 807년에 그가 죽은 후, 쾬울프가 직접적으로 켄트를 통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811년 켄트의 군대가 섀피 제도의 바이킹 요새를 공격했다.

한편 7~9세기 사이 켄트에서 유럽 본토의 문화와 기술 등이 들어왔다. 종교의 중심지, 교회를 포함한 대성당은 많은 자원과 무역의 연결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 거주지보다 훨씬 큰 경우가 많으며, 사넷 대성당은 3척의 무역선을 소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7세기에는 앵글로 색슨의 영국에서 석공이 재도입되어 주로 교회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가장 오래된 교회는 "켄트 그룹"이라고 불리며, 그 디자인은 이탈리아와 프랑크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초기 예로는 캔터베리의 성 어거스틴 수도원을 비롯해 성 판크라스, 성 메리, 성 피터와 성 폴, 로체스터의 성 앤드류스, 리민지의 성 메리 등의 수도원들이 석조로 개축되었다.

7세기 후반에는 가장 오래된 칙허장이 등장했고, 영지의 경계를 나타내고, 원섬 해협과 롬니 습지에서 가축용 토지를 개척한 것을 나타냈다. 서부 켄트의 그레이브 센드 근처에 있는 에브스프리트 수차 오두막은 70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경관의 새로운 이용법을 반영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하지만 캔터베리는 7세기에 켄트의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도버와 로체스터에서도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졌다. 캔터베리와 로체스터 모두 이 시대에 주요 조폐소가 있었고, 주로 은화를 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7세기 이후 켄트의 왕이 왕국의 경제구조에 대한 지배를 확립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8세기부터 9세기까지 왕국 간의 잦은 전쟁으로 당대에 켄트 왕국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토벽으로 된 요새화된 장벽들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원즈다이크(Wansdyke)와 오파즈다이크(offa'sdyke)가 건설되었고, 이러한 군사화의 증거는 790년대에 문서화된 로체스터 다리의 부담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부담은 메드웨이 강에 걸리는 로마 다리를 유지할 의무가 규정되어 있으며, 켄트군이 강을 건너는 데 필수적이었다.

821년 쾬울프가 죽자 체올울프 1세, 베오른울프(Beornwulf)가 차례대로 켄트를 통치했는데, 베오른울프 시기에 발행된 켄트의 동전에 발드레드라는 이름으로 화폐가 발행된 것으로 볼 때 당시 머시아의 왕위 분쟁을 이용해 켄트 내에서 독립적인 화폐 발행권을 가지고 반자치적인 통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802년 오파에 의해 꼭두각시 왕으로 세워진 베오르흐트리치가 802년 사망하자 에알흐문드의 아들인 에즈베르흐트가 웨식스의 왕이 된 상태였다. 이후 20년 뒤인 826년 결국 머시아와 웨식스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고, 결국 머시아가 패배하자 켄트는 서식스와 함께 웨식스의 속국이 되었고, 발드레드 또한 에즈베르흐트가 부왕으로 파견한 그의 아들 애설울프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리고 839년 에즈베르흐트가 죽자 부왕이었던 애설울프가 웨식스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켄트를 아들 중 한명인 애셀스탄을 부왕으로 임명했다. 애셀스턴은 켄트뿐만 아니라 에식스와 서식스 등을 통치했다.

851년 에셀스탄과 엘더만 엘히레는 켄트주 샌드위치 앞바다에서 바이킹의 함대와 군대를 격파했고, 후대의 역사가인 프랭크 스텐턴은 이를 "기록에 남는 영국 사상 최초의 해전"이라고 평가했다. 에셀스탄은 851년 이후에는 언급되지 않았고, 아버지 부재 중에 왕국의 통치의 약정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에셀울프가 855년에 로마에 가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853년, 엘히레는 바이킹에 의한 켄트와 서리의 참패로 사망했지만, 에셀스탄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고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그 무렵에는 사망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켄트의 통치는 조카 애설버트가 물려 받지만 웨식스 왕위를 물려받았던 형 애설볼드가 2년만인 860년에 사망했다. 본래 애설 울프는 웨식스와 켄트를 분할 상속과 함께 영구적으로 양국을 분할하고자 했다. 하지만 애설볼드가 2년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면서 애설 울프의 계획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켄트에는 어떠한 분국왕 및 부왕 등을 따로 두지 않았기에 웨식스에 영구적으로 웨식스에 귀속되었다. 시간이 흘러 865년 애설버트가 후사없이 죽고 동생인 애설레드 1세가 즉위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노섬브리아의 왕 앨라 2세가 전설적인 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를 죽이자 스칸디나비아에 있던 그의 아들들인 이바르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이 그소식을 듣고는 이교도 대군세가 시작된 시기였다.
2.1.1.2. 서섹스
서식스의 영토

두번째로 건국된 브리튼섬의 서계르만계 왕국으로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후 1년 뒤인 477년 엘라라는 섹슨족 족장중 한명이 세 아들인 퀴멘(Cymen), 울렌킹(Wlenking), 치사(Cissa)와 함께 세 척의 배를 이끌고 퀴멘소라(Cymensora), 즉 지금의 웨스트 서식스의 셀시(Selsey) 해안에 상륙했다. 부자가 켈트 브리튼 인들을 죽이자 원주민들은 Andred's leag이라 불리는 숲으로 달아났다.

485년에 엘라는 Mercredesburne에서 브리튼인들과 싸웠다. 490년에 엘라와 그 아들 치사가 안드레드(Andred) 시[4]를 공격해서 그곳의 모든 자를 죽여 그곳에는 그 뒤로 브리튼인이 남지 않았다.

이후 엘라의 기록은 끊긴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헌팅든의 헨리(Henry of Huntingdon)라는 인물이 추측해서 남긴 바가 있다. 흥미롭게도 엘라의 행적이 사라진 때가 아서 왕의 등장 시기로 비정되는 무렵과 얼추 비슷하다. 따라서 아서 왕에게 엘라가 패배하여 죽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아서 왕은 실존이 입증되지 않은 데다 실존 가능성이 높은 엘라조차도 기록이 매우 부실해서 진실은 저 너머에.[5]

8세기의 노섬브리아 수도자이자 역사가였던 성 베다(Bēda)는 엘라를 앵글로색슨족의 패왕 중 하나로 기록했다. 이는 후세에 이어져 엘라는 브레트왈다 중 하나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앵글로색슨족브리튼 섬에 대한 정복을 개시하던 초창기에 엘라가 그중 가장 세력이 컸거나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라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부족해서 가상인물이라는 의혹을 받았으나 고고학적 발굴 결과 5세기에 서식스 지역에서 이후 머시아가 세워지는 지역 바로 턱밑까지[6] 단기적인 확장이 일어났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그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고고학적 조사 결과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비롯해 서식스의 역사를 기록한 중세 앵글로색슨 연대기들이 주장한 477년 건국설은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최근에는 고고학적 조사 결과 5세기 초반에 건국되었다는 설이 떠오르고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켄트 왕국보다도 이른 최초의 앵글로색슨 왕국인 셈이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 서식스 동부 지역에서 우즈 강 근처에 5세기 초의 색슨족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게 5세기 초의 무덤인 이유는, 부장품에서 로마 동전과 로마식 공예품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서식스 지역의 5세기 앵글로색슨 정착지는 이것이 유일하며, 만약 서식스가 5세기에 건국된 것이 맞다면 이것이 초기 서식스 시대의 유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 위에 나온 대로 또 다른 고고학적 증거들은 서식스의 엘라가 실존인물이며, 잉글랜드 남부를 단기간에 재페하고 브레트왈다, 그것도 초대로서 군림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다만 491년부터 기록이 아예 없는 걸 보면 그리 오래가진 못한 듯하다.

514년쯤에 엘라가 죽고 아들들 중 한 명인 치사가 서식스의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제는 치사가 56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는 것 외에는 491년에서부터 607년까지 어떠한 역사적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이 시대의 절반 정도는 ‘바돈 산의 전투’로 알려진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족의 격돌 결과 앵글로색슨이 대패하여 더이상 브리튼 섬 내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평화가 유지되었던 시대인데, 이 바돈 산의 전투가 일어난 날짜를 보통 5세기 말로 추정하는걸 고려해 엘레가 바돈 산의 전투에서 앵글로색슨족을 이끌었고 대패하는 바람에 향후 약 100년간 암흑기를 맞은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다만 이를 격하게 부정하는 학자들도 아직 많은지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607년 웨식스의 체올울프(Ceolwulf)가 서식스를 위협하자 머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7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는데, 660년경에 에델웨알흐(Æthelwealh)가 연대기상 기록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당시 웨식스는 햄프셔 남부와 와이트 섬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태였기에 서식스는 머시아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노섬브리아에서 성 윌프리드(Wilfrith)가 방문해 기독교를 설파했다고 전해지며, 에델웨알흐 또한 켄트 국왕인 애델베르흐트 다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673/4 에델웨알흐는 켄트의 왕권 분쟁에 개입했는데, 당시 켄트는 할로테와 그의 조카이자 전국왕의 장남인 에아드리치가 공동으로 통치했으나 얼마 안가 둘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자 에아드리치가 서식스로 망명했고, 이에 에델웨알흐는 에아드리치를 앞세워 켄트를 공격할 준비를 하지만 685년 서식스를 침공한 웨식스의 왕자 캐드왈라에게 살해당했다.

캐드왈라는 애드울프와 애드왈드라는 인물들을 앞세워 서식스를 지배하려고 했으나 서식스의 엘더만이었던 베르둔(Berthun)과 안둔(Andhun)에 의해 웨식스로 물려나야 했고, 이후 베르둔과 안둔이 공동 왕으로서 서식스 왕국을 다스렸다. 이들은 에델웨알흐가 시행하지 못한 계획에 따라 686년 켄트 왕국을 침공해 왕위 계승권자인 사촌 에아드리치(Eadric)를 왕위에 올렸다.

하지만 에아드리치의 통치는 곧 울프헤레(Wulfhere)의 머시아가 급성장함으로 끝났다. 이때문에 북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던 웨식스는 둠노니아와 켄트를 대신 정벌했고, 웨식스의 왕 캐드왈라(Cædwalla)의 침공으로 켄트의 에아드리치가 축출당했다.[7] 캐드왈라는 이어서 서식스까지 침공해 베르둔과 안둔이 전사했고, 서식스는 웨식스에 합병당했다. 캐드왈라는 성 윌프리드를 불려들어 자신의 고문으로 임명했고, 686년 셀시(Selsey) 교구는 인체스터에 있는 웨식스 교구에 흡수되었다. 서식스는 현세적인 문제에서는 웨식스 왕들의 지배를 받았고, 교회적인 문제에서는 윈체스터 주교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강제 통합당한 서식스는 오랜 세월 동안 웨식스에 의해 강제 노역에 부려지는 등 착취를 당했다. 그러던 와중 710년 웨식스의 군주 이네(Ine)가 서쪽의 둠노니아(Dumnonia)로 원정을 떠났을 때 서식스는 노드헬름(Nothhelm) 왕을 옹립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722년 웨식스의 군대가 침공했지만 4년간의 전쟁 끝에 서식스는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서식스의 왕권은 분열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692년에 노드헬름으로부터 영토를 나타내는 기재가 없는 칙허장에 와트라는 이름의 또다른 왕의 이름이 서명하고 있었고, 와트 역시 서섹스 엘더만 브루니가 세르지 수도원장 이드바트에게 4 하이드를 주는 칙허장에 서명했다. 이 칙허장에는 날짜의 기재가 없지만, 이드바트가 705년 또는 그 조금 후에 주교로 임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칙허장은 705년 또는 그 조금 전에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와트는 노드헬름과 함께 칙허장의 증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한편으로 와트가 헤이스팅가스의 왕이라는 추측이 있기도 한다. 한편 상술한 엘더만 브리니 또한 왕은 아니었지만 노드헬름, 와트와 함께 공동으로 서식스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700년경에 와트와 브리니가 죽고 710년경에 오스릭이 노드헬름과 공동으로 서식스를 통치했고, 714년 노드헬름이 죽었는데, 죽기 전에 남긴 헌장에 또다른 공동 통치자로서 애설스탄이란 인물이 등장하는 등 서식스는 단일 왕권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다.이후 740년까지 서식스의 통치자의 이름과 치적에 대해선 기록이 단절되다가 애설버트라는 이름의 왕이 등장한 것 외엔 별다른 정치적 상황이 언급되지 않았다. 이후 760년경에 오스문트, 오스라크, 앨프발트, 엘드울프, 그리고 시기 미상이나 오스왈드가 차례대로 서식스의 왕위에 올랐는데, 문제는 이들 다섯 모두 공동왕이었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771년에는 머시아의 오파가 헤이스팅가스를 정복했다. 오파는 이미 지배했던 켄트 왕국에서 서식스에 침공했던 것으로 보이며, 서섹스 왕국 전체를 정복한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오파는 또한 에델베르트의 두 칙허장을 확인했고, 772년에는 서섹스 엘더만으로 강등된 오스왈드를 필두로 오스문드, 엘프발트, 오스라크 등을 증인으로 서섹스를 자신의 토지로 선포하고 서섹스 왕국을 병합했다.

오파는 776년부터 785년에 걸쳐 지배를 유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후 지배권을 되찾은 것 같다. 796년에 오파가 사망한 후, 서식스를 지배하고 있던 마시아인 귀족들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남색슨인은 독립된 정치적 존재로서 다시 나타났으나 오파가 죽은 이후 머시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796년 서식스는 왕국 내의 머시아 세력을 축출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825년 웨식스의 에즈베르흐트(Ecgberht, 에그버트)가 정복전쟁을 펼쳤고, 머시아를 쓰러뜨린 후 곧바로 서식스를 굴복시켰다. 그 후 서식스는 백작령으로 남아 있었으나 860년경에는 완전히 통합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2.1.1.3. 에섹스
527년 에스크와인이라는 동색슨족의 부족장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하며, 이후 주변의 군소 부족이나 왕국들을 잡아먹으며 성장하다 현재의 영국의 수도인 런던 일대의 현 미들섹스 주에 살던 미들색슨족을 복속시키고 국경을 완성했다.

앵글로색슨 7왕국 중 압도적으로 공기 비중에 역사 기록도 부족한 나라로, 물론 서식스마냥 100년간의 역사기록이 통째로 날라가는 대참사는 없으나 기록이 매우 불완전하고 훼손이 심하며, 심지어 나라의 시조조차 기록마다 다르다. 앞서 527년 에스크와인이라는 동색슨족 부족장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했는데, 그건 9세기에 웨식스가 편찬한 정사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나온 기준이고, 다른 기록에는 584년(추정)에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에스크와인의 아들로 비정된 슬레드라는 왕이 건국했다고 되어있는 곳도 있다.

심지어 527년이라는 숫자조차 기록마다 달라서 추정치이다. 그런데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기록이 뻥일 가능성이 높은게, 에식스 왕들은 앵글로색슨 연대기가 시조라고 주장하는 애스크위네(AEscwine) 이외에는 죄다 S로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며, 왕 이외의 인명에도 S로 시작하는 인명이 많다. 게다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는 애스크위네가 584년까지 60년간 재위했고 다음 왕이 슬레드라고 되어있는데, 슬레드는 아버지가 60년간 재위해고도 이후 20년간 재위했으니 이건 뭐…

어째든 영문 위키백과에서 슬레드가 604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세베르트가 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604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파견한 그레고리오 선교사들 중 한명인 멜리투스가 런던에 도착한 후 선교를 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런던에 교구를 설치하는데 성공했다.세베르트는 멜리투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이후 610년 멜리투스는 주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귀환했고, 교황의 서한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616년 세베르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인 섹스래드와 세워드가 에식스의 공동왕이 되었다.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아버지와 달리 여전히 게르만 이교 신앙을 신봉했고, 성찬식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만 흰빵을 주고, 이교도인 자신들과 그추종자들에게는 흰빵을 주지 않은 것을 문제를 삼고, 베데와 멜리투스를 런던에서 추방시켰다. 이후 623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웨식스퀴네길스와 전쟁을 하다가 이들이 이끈 에식스의 군대는 패전했고, 두 왕 또한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세워드의 아들인 시게베르흐트가 왕위를 승계받는다. 시게베르흐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게르만 이교 신앙을 신봉했고, 635년 같은 이교도였던 머시아펜다와 동맹을 맺었다. 653년 시게베르흐트가 사망하고 동생으로 추정되는 시게베르흐트 2세가 에식스의 왕이 되었다.

시게베르흐트는 왕위에 오르기 전 훗날 노섬브리아의 왕이 되는 오스위그와 만나 그와 친구이자 동맹이 되었고, 서로의 궁정에 드나들면서 교류를 했다. 둘의 동맹의 머시아의 펜다를 견제할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때 시게베르흐트는 동앵글리아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과 함께 오스위그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받게 되었다. 결국 653/4년 시게베르흐트는 부하들과 함께 오스위그의 사유지 중 하나인 Ad Murum에서 아일랜드 수도자인 린디스판의 피난으로 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이후 시게베르흐트는 오스위그에게 선교사들을 자신의 나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받은 오스위그는 세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파견해 에식스에 다시 기독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게르만 이교 신앙을 신봉안 기득권 세력들은 왕의 행보에 대해 자신들에 대한 적대적 및 배신 행위로 보기 시작했다. 660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시게베르흐트는 스위드헬름과 스위드프리드와 다툼이 있었는데, 이때 다시 기독교로 국교로 들어서면서 기독교 가치관에 반하는 결혼을 아직 이교도였던 이들이 한 것에 대해 시게베르흐트가 질책했는데, 일단 결혼인 만큼 시게베르흐트는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했는데, 이때 파견된 선교사인 세드가 결혼식에 참석한다면 분명 죽게 될 것이라 경고했지만 시게베르흐트는 세드의 경고를 무시하고 결혼식에 참석하나 두 형제는 왕의 반대 세력과 함께 시게베르흐트를 죽일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결국 결혼식장에서 시게베르흐트는 살해되었고, 스위드헬름이 에식스의 왕으로 즉위한다.

스위드헬름은 기독교도들에게 적대적이었으나 662년에 그는 동앵글리아의 왕 애설발드의 설득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664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사촌인 시게레(Sighere)와 세비(Sebbi)가 그의 뒤를 이었다. 시게레와 세비와 에식스의 왕위에 오른 당시 에식스는 게르만 이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으로 양분된 상태였고, 이는 두 공동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게레의 경우 게르만 이교 신앙을 고수한 반면 세비의 경우 기독교도였다.

그들은 곧 권력 및 종교 문제로 대립했다. 시게르는 웨식스에, 세비는 머시아에 동맹자를 발견했다. 그들의 라이벌 관계의 결과, 머시아의 울프헤레는 에식스의 패자로서 지위를 확립하고, 시게르를 설득해 자신의 조카로, 샐리의 머시아의 부왕 프리츠월드의 딸인 오스기스와 결혼시켰고, 이때를 기점으로 에섹스는 머시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머시아의 주교 자르만은 울프헤레로부터 에식스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673년, 시게르는 오스기스와 이혼했고, 오스기스는 노스 엘햄의 베드위누스 주교의 보호하에 도망쳤다. 이에 세비가 에식스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686년 세비는 웨식스의 캐드왈라와 함께 켄트를 침공했고, 에아드리치를 몰아낸 후 켄트 서부를 지배했으며, 694년 세비는 왕위에서 물려나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그의 아들들인 시게하르트와 스웨프레드 2세였다. 705년, 그들은 웨섹스 왕 이네의 왕의 경쟁자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 그와 소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브렌트퍼드 교회 회의에서 그들은 이네 왕이 에섹스를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기 위해 그의 라이벌을 에섹스에서 추방하기로 합의했다

시게하르트는 머시아의 코엔레드와 함께 헤리퍼드의 주교 티르텔, 런던 주교인 발데레로부터 풀럼의 구매를 확인했다. 스웨프레드는 수녀원 설립을 위해 나징의 토지와 관련된 두 개의 헌장을 발행했지만 이 헌장은 이후 사본에서만 남아 있다. 그는 뎅기 반도의 토지와 관련된 추가 헌장을 발행했다. 트위크넘의 토지와 관련된 헌장은 그에게 귀속되었다.

둘 중 시게하르트가 먼저 사망했고, 스웨프레드 2세는 705년부터 사촌이자 쫓겨난 시게레의 아들인 오파와 709년 죽기 전까지 공동으로 통치했다. 이후 오파가 단독 왕이 되었지만 그 역시 얼마 안가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나다가 그곳에서 머시아의 왕 코엔레드와 함께 수도자가 되었고, 결국 에섹스의 왕위는 슬래드의 후손인 세일레드와 미들섹스를 통치하던 스웨프베르흐트가가 승계하며, 스웨프베르흐트는 738년에 사망했고, 세일레드의 경우 746년에 사망했고, 시게하르트의 손자인 스위드드가 왕위를 승계했다. 이후 758년 사망하자 아들인 시게릭이 에섹스의 왕이 되지만 798년 왕위에서 물려나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고, 아들인 시거드가 승계받지만 812년 머시아의 왕인 코엔울프에 의해 엘더만으로 격화되었다.

825년 웨식스의 왕 에즈베르흐트가 머시아의 베오른울프(Beornwulf)를 상대로 엘렌둔(Ellendun)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로 머시아의 권위가 실추되자 머시아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서식스와 켄트는 웨식스의 속국이 되었고, 시거드는 자신의 통치권을 에즈베르흐트에게 양도했다.
2.1.1.4. 동앵글리아
동앵글리아의 영역

정확한 건국 연도는 알 수 없지만 6세기 중반인 571년 위하(Wehha) 왕이 프리지아 지방에서 이주해 건국했다고 한다. 위하 왕은 우핑 왕가로 건국부터 794년까지 이어졌다. 다만 위하 왕은 571년, 그 아들인 우파(Wuffa)왕은 571년부터 578년까지 통치, 그리고 그 아들인 티틸라 왕은 578년부터 616년 까지는 재위했다는 것 외엔 연대기로 통해 이름과 통치 기간만이 전해질 뿐 통치 전반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전설로 여겨지며, 실존했음이 확실한 왕은 수도사 베다의 기록에서 교차검증되는 4대 래드왈드 왕부터이다.

래드왈드는 599년경부터 624년경 죽을 때까지 통치했으며, 치세 초기에는 켄트의 애설버트브레트왈다로 인정하여 종속되었다. 더욱이 585년 머시아의 왕 크레오다(Creoda)는 톰툰에 수도를 건설했고,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데이라와 버니시아를 앨라(Ælla) 왕이 통합하여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7세기 초 애설버트가 기독교인이었던 프랑크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그 역시 기독교로 개종했고, 때문에 래드왈드는 605년 이전에 애설버트의 궁정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동앵글인의 왕들 중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616년 데이라에서 에아드위네가 동앵글리아로 망명해 왔다. 당시 버니시아 왕이었던 애델프리드(Æthelfrith)가 버니시아-데이라 통합왕국에서 데이라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래드왈드는 에아드위네에게 국빈 대접을 하며 매우 환영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애델프리드가 동앵글리아에 상당한 금액을 주며, 에아드위네를 암살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래드왈드는 거절했고, 이후에도 애델프리드가 여러 번 엄청난 선물을 전해줬지만 래드왈드는 전부 거절했다. 오히려 에아드위네와 함께 애델프리드를 정벌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고, 아이들강 전투에서 데렌리체 왕위를 손에 넣어 북방의 강자로 떠오른 베오르니체 국왕 애설프리스와 싸워 이겼다. 이 전투에서 애설프리스와 래드왈드의 아들 래건헤레가 전사했다. 래드왈드는 애설프리스의 처남이자 데렌리체의 왕자인 에아드위네를 데렌리체와 베오르니체의 왕으로 꽂았고, 패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강제했다.

616년을 전후하여 래드왈드는 훔버강 이남의 앵글로색슨인 군주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베다 베네라빌리스에 따르면 그는 남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패권(임페리움)을 잡은 네 번째 군주로서 켄트 지방을 제외한 험버 강 남쪽 땅을 점령했다고 보고있으며, 에아드위네를 노섬브리아의 왕을 세웠기에 북쪽의 노섬브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브리튼의 게르만 왕들 중 가장 력한 왕이었다. 그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브리타니아의 패자인 브레트왈다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치세에 동앵글리아에는 게르만 토착종교의 신전들이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당대의 패자였던 래드왈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덕분에, 동색슨인들과 켄트가 각각 세게베르트, 에설버트가 사망한 후 이교도였던 후계자들에 의해 토착종교로 재전향하는 동안 동부 잉글랜드에서 기독교의 명맥이 지켜질 수 있었다.

624년 래드왈드가 죽자 에오르프왈드가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에오르프왈드 또한 동시기 켄트와 에식스의 왕들처럼 아버지와 달리 이교도였다. 그러다가 에오르프왈드 즉위 이후 일어난 내분의 도중에 동생인 시게베르트가 동앵글리아에서 갈리아로 도망하고, 새왕의 이교 신앙이 왕국의 기독교파와 이교도파 사이에 긴장을 낳고, 그 결과, 그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627년, 새로운 브레트왈다로 부상한 에드윈은 노샘브리아, 린지, 이스트 앵글리아 사람들의 개종에 착수했고, 베다에 따르면, 그의 권고에서 에오르프왈드는 “기독교의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었다”. 펠릭스 드 부르고뉴가 이스트 앵글리아의 주교직으로 일했다고 여겨지는 해를 고려하면, 이 사건은 627년에 일어났다고 추측되고 있다. 대조적으로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에오르프왈드의 세례가 632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오르프왈드가 이스트 앵글리아, 노섬브리아, 켄트 중 어느 세례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했지만, 당시 상급 통치자 에드윈이 그의 후견인으로 동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얌은 동앵글리아에는 적절한 성당이 없었기 때문에 노샘브리아에 있는 에드윈의 권력의 중심에서 파울리누스에 의해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시사하고 있다. 에오르프왈드의 개종 방식으로 그는 종속적인 왕이었고, 에드윈이 그의 군주임을 알 수 있다.

세례 후, 에드윈의 노섬브리아의 기독교 사제들은 에오르프왈드의 왕국에서 이교의 관습을 억제하고 동앵글리아인을 개종시킬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이 개종은 에섹스를 제외한 노섬브리아에서 켄트까지의 동해안 전역을 에드윈과 그 기독교 동맹자의 지배하에 두는 정치적 이익을 가져왔다.

에오르프왈드의 개종은 왕국에 주교좌를 설치하는 등 교회의 기초의 확립에는 이어지지 않았다. 베다는 에오르프발트가 개종 직후 리베르트라는 이교도에 의해 살해되었고, 살해 후 왕국은 3년간 이교도의 지배로 돌아갔다고 보고 있다. 이후 629년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했던 시그베르트가 돌아와 친족인 에그릭과 함께 동앵글리아의 공동왕으로 즉위했다.

시그베르트는 에그릭과 함께 기독교가 동앵글리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우선 부르고뉴 출신의 펠릭스를 던위치의 주교로 임명했고, 켄터베리 대주교호노리우스 또한 동앵글리아의 선교 활동에 동참했다. 또한 프랑크에서의 망명 생활을 바탕으로 라틴어의 독해를 위한 학교를 설립했으며, 교직원들로는 켄트 출신의 사제들이 기용되었다.

하지만 634년 시그베르트는 에그릭에게 자신의 반쪽짜리 왕권을 양도한 후 돌연 수도사로 은퇴한다. 다만 이때 에그릭은 아직까지 이교도였던 것으로 보이며 후대에 남겨진 문헌 등에서도 에그릭이 기독교도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없었다. 다만 이전의 이교도 왕들과는 달리 종교 반동 정책을 펄치지 않고 아일랜드 선교사들의 개종 활동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한편 시그베르트가 퇴위하기 1년 전 노섬브리아의 왕 에드윈이 귀네드 왕의 커드왈론(Cadwallon ap Cadfan)과 연합한 머시아펜다 왕에 의해 사망하고 에드윈의 가족과 주교가 요크에서 켄트로 망명하면서 브리튼 섬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펜다의 통치하에 머시아는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펼쳐갔다.

결국 에그릭이 단독으로 통치한지 2년이 흐른 636년, 머시아는 동앵글리아를 침공했으며, 단독왕인 에그릭의 친정과 함께 수도원으로 은퇴했던 전왕인 시그베르트까지 반강제로 참전했으에도 불구하고 동앵글리아의 군대는 머시아의 군대에 패전했고, 에그릭과 시그베르트를 죽였다. 이후 새로운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티틸라의 손자인 안나(Anna)가 즉위한다. 처음부터 머시아의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졌는지는 불명이나 안나는 평생을 걸쳐 머시아와 대립했다. 안나는 자신의 딸 섹스스버를 켄트의 왕 에오센베르트와 혼인시켜 켄트와의 결혼 동맹을 성사시킨다.

하지만 641년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왈드가 머시아와의 전쟁에 패전해 전사하면서 노섬브리아는 둘로 분열되었고, 645년 웨식스의 첸왈흐가 펜다의 누이인 왕비와 이혼한 것에 대해 머시아의 침공을 받아 동앵글리아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때 첸왈흐는 동앵글리아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안나의 군사 지원을 받고 648년 웨식스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동앵글리아의 서쪽 끝은 엘리섬을 둘러싼 습지대에 접하고 있었지만, 651년에 딸의 에셀트리스가 사우스길웨의 왕자 톤드바트와 결혼한 것으로 안나의 지배력은 강화되었다.

안나는 통치 중 크노버스버그의 수도원에 호화로운 건물과 물건을 기증했다. 이 수도원은 동앵글리아에 도착한 퍼시에 의해 633년경에 지어졌다. 이윽고 왕국에 대한 공격에 지친 퍼시는 동앵글리아를 떠나 수도원을 동생 포이란에 맡겼다. 651년에 펜다가 수도원을 공격했을 때, 안나와 그 부하가 도착해, 마시아군을 막았다. 이에 따라 포일란과 그 수도사들은 책과 귀중품을 가지고 도망칠 시간이 생겼지만, 펜다는 안나를 생포한 후 아마 슈롭셔 서부 마곤사에텐의 메레왈 왕국으로 추방했다. 안나는 653년경에 동앵글리아로 돌아왔다.

653년, 펜다가 아들 페아다를 미들 앵글족의 지배자로 만들었다[8] 직후, 머시아군에 의한 동앵글리아의 공격이 반복되었다. 펜다와 안나의 군대는 서퍽의 브리즈버러 근처의 불캄프에서 대치했다. 동앵글리아군은 패배했고, 안나 왕과 그 아들 저르민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전사했다. 전사한 안나의 뒤를 이어 새로운 동앵글리아의 왕이 된 이는 방계 왕족인 애설헤레가 속국왕으로 내세워졌다. 브레드왈다인 펜다가 이교도 왕임에도 불구하고 동앵글리아 내에 기독교는 용인된 것으로 보인다.

655년 애설헤레는 펜다의 주도하에 노샘브리아를 공격했다. 후대 역사가의 견해로 에설헬레가 펜다를 도와 노섬브리아를 공격한 계기가 동앵글리아에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펜다의 내정간섭을 줄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펜다는 브리튼인의 대부대를 포함한 30명의 왕실사령관(duces regi)을 이끌어 노샘브리아에 침공했다. 펜다는 로이디스 지구의 마스 가이에서 오스위그를 포위했다.

오스위그는 평화의 댓가로 보물을 내밀었지만, 베다에 의하면 거부되었다.[9] 어쨌든, 펜다는 노섬브리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오스위그의 군세는 훨씬 적었지만, 그 귀네드의 카드펠 왕이 이끄는 웨일즈군은 전투 전날 밤에 철수했고, 펜다의 동맹자인 데이라의 오텔발트는 결과를 기다리기 위해 방관했다.

655년 11월 15일 윈웨이드 강 해안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윈웨이드 강의 물은 폭우로 인해 수위가 높아지면서 주변의 토지를 침수시켰다. 노샘브리아 군대가 승리했고, 머시아 군대는 학살당했고, 그 대부분이 도주 중에 익사했다. 펜다 자신도 오스위그에 대항한 동앵글리아군을 이끌고 있던 동앵글리아의 에설헤레를 포함한 동맹왕들과 함께 전사했다.

애설헤레가 전사하자 새로운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안나의 동생인 애설왈드가 즉위한다. 이름과 통치 기한 외에 에설왈드의 치적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당시 브리튼 섬은 펜다의 전사 후 격변기였다. 강력한 이교도 왕이었던 펜다의 전사 후 브리튼 섬 내의 게르만족 왕국 안으로 기독교가 점차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크노버스버그에 세인트 퍼시 수도원과 세인트 포일란 수도원이 있는 동안 동앵글리아에서 켈트 의식의 영향은 강했다. 동앵글리아의 기독교 권위는 캔터베리에 종속된 도목의 동앵글리아 주교구에 아직 있었다. 성보틀프는 안나가 부르캄프 전투에서 죽은 해인 653년경 알데 강의 시오시마에 있는 이켄에 수도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오스위그는 에식스의 시게베르트 2세를 설득하여 세례를 받게 하는데 성공했고, 에이단의 노샘브리아인 제자인 세드는 피더의 지휘하에 미들 앵글인에게 노샘브리아의 선교에서 전향 그리고 이스트 색슨인의 주교가 되어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세드는 남부 틸베리와 북동부 에섹스의 현재 브래드웰 온 시에 있는 고대 로마 요새가 있던 이산 카에스터에 수도원을 세웠다. 시게베르트는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암살되어 에섹스의 이교도 스위드헬름이 찬탈했다. 세드는 그에게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고, 베다에 따르면 세드의 세례는 렌들샴에서 에설왈드 왕의 면전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오스위그의 아들인 에그프리스가 안나의 딸인 애설트리스와 결혼하면서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의 결혼 동맹이 형성되었다. 한편 펜다의 아들인 울프헬레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켄트의 왕 에오센베르트의 딸 에르메닐다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브리튼 섬의 게르만 왕국들은 한 동안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애설왈드가 사망하던 해인 664년에 오스위그와 브리튼 섬 내의 주교들의 주도하에 열린 휘트비 총회에서 아일랜드 선교사들의 켈트 기독교식이 아닌 로마식을 지지하여 통치하기로 결정, 곧 로마 총대주교의 통제를 받게 되지만 얼마 후 전염병이 브리튼 섬을 들이닥쳤고, 애설왈드 또한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조카인 엘드울프가 즉위했다. 713년 사망하기 전까지 엘드울프의 치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가 즉위할 당시 여전히 전염병이 브리튼섬을 강타한 상태였다. 게르만 왕국 내의 교회 세력 또한 여러 교구로 분할되었고, 늘어난 주교들은 앵글로색슨의 7왕국 내에서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또한 엘드울프 시기에 동앵글리아 또한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치 중 브리튼 섬 화폐의 발행과 사용은 켄트에서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660-670 년대에는 금, 실링 또는 트림사가 제조되었으며, 그 후 프랭크 화폐의 금 품질 저하 과 관련된 품위의 감소로 인해 다양한 종류의 은 셰이터 또는 페니가 제조되었다.

화폐의 지위는 아직 진정한 통화가 아니었고, 또 공개적으로 왕권을 잡는 것이 아니었다. 동앵글리아산으로 여겨지는 화폐는 주로 켄트, 에식스, 프리슬란트 또는 네델란트산과 함께 발견되어 이들 중심지와의 외부 교류를 반영하고 있다.

693년, 교황 세르지오 1세는 엘드울프를 비롯해 머시아의 에셀레드, 노샘브리아의 알도프리스에게 편지를 보내 캔터베리의 테오도르의 후계자로 레클버의 벨트왈드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했다. 713년 엘드울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엘프왈드가 왕위를 이었다.

엘프왈드 또한 749년 사망하기 전까지 고고학적 발굴 외의 문헌 내에서 자세한 치적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716년 머시아에 애셀발드가 왕위에 오랐고, 이후 736년 자신을 전 브리티니아의 왕이라고 자칭했다. 그리고 그의 통치기에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베오울프가 수도사들에 의해 문헌으로 쓰여졌다. 그밖에도 엘드울프가 실행한 동앵글리아의 기독교 및 화폐 경제의 정착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749년 엘프왈드가 사망하자 동랭글리아의 왕위는 세명의 왕들인 베오나와 알베르트, 훈이 공동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 역사상 최초로 화폐에 이름과 직위를 세긴 왕들이었으나 760년까지의 치적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발굴된 화폐들을 보았을 때 이들 또한 선대와 마찬가지로 동앵글리아 내의 화폐 사용의 보편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시기 미상이나 베오나와 알베르트, 훈이 사망하고 애설래드 1세를 거쳐 에델베르트가 779년쯤에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653년 애설헤레로부터 시작해 에델베르트가 즉위하기까지 명목상의 왕권은 머시아로부터 존중받았지만 엘드울프때부터 동앵글리아 또한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해 베오나와 알베르트. 훈에 이르면서 화폐에 자신들의 이름과 지위를 세기면서 독자성을 유지하려거 하자 머시아의 왕인 오파는 동앵글리아의 행보에 대해 이들이 독립할 것을 우려, 결국 동앵글리아 왕실의 화폐 주조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했다.793년 린디스판 수도원이 바이킹들에 의해 약탈하면서 동부 해안의 취약성이 드러났고, 1년 후인 794년 몽크웨어마우스-재로우 수도원까지 공격받게 되었다.

이에 에델베르트는 지역 방위의 강화 및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화폐에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를 상징하는 암늑대를 세기면서 라틴어인 REX를 화폐에 세겨 발행했다. 하지만 에델베르트의 행보에 대해 오파는 그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왕비인 키네스리스와 모의해 자신의 딸 엘프스리스와의 약혼을 미끼로 헤리퍼드셔의 왕가의 영지인 서튼 혹은 인근 마덴으로 에델베르트를 불려들인 후 참수형을 선고해 처형당하면서 우핑 왕가가 단절되었고, 오파가 796년 죽을 때까지 동앵글리아를 통치했고, 그의 통치는 강압적이라 오파 사후 머시아의 단독왕이 된 엑크프리스가 얼마 못가 사망하면서 동앵글리아는 에드월드라는 인물을 내세워 잠시나마 독립하는데 성공하나나 2년 뒤인 798년에 코엔울프에 의해 재정복되었고, 825년까지 머시아의 왕들이 동앵글리아의 왕위를 겸하게 되었다.

이에 동앵글리아는 끊임없이 머시아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821년 머시아의 코엔울프가 사망하고 동생인 체올울프 1세가 머시아를 비롯해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즉위하지만 2년만에 베오른레드의 친척인 베오른울프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는데, 이후 웨식스와의 전쟁에서 머시아가 대패하자, 825년 동앵글리아의 애설스탠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베오른울프의 머시아군과 싸워 승리한 후,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웨식스가 주변 지방을 흡수하며 강대국으로 거듭나던 시기와 겹쳤기에 웨식스의 에그버트(Ecgberht) 왕과 머시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음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도모했고, 827년 루데카의 침공마저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애설스턴은 845년까지 동앵글리아를 통치하다가 죽은 후 애설워드가 즉위한다.

애설워드의 통치에 대한 내용은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도 언급되지 않지만 그의 이름으로 발행된 주화만이 그의 실존을 입증하고 있으며, 854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에드문드가 14세의 미성년자로서 동앵글리아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865년에 데인족에 의한 침략이 개시된다.
2.1.1.5. 머시아
오늘날 덴마크 남부와 북부 독일의 일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해당하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 앵글족들이 521년까지 살고 있었다. 노섬브리아 출신의 기독교 수도사로, 신학자, 역사가, 연대기 학자인 성 베다는 앵글족들이 그레이트브리튼섬으로 이주하기 이전에는 앙굴루스(Angulus)라는 곳에 살았으며, "그곳은 유트족과 색슨족의 영토 사이에 있으며,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 채로 내버려있다."라고 언급했다. 유사한 증거가 《브리튼인의 역사》에 남아있다. 앨프리드 대왕과 연대기작가 애설웨어드는 그 장소를 슐레스비히(슬레스비) 지역인 앙겔른 반도로 인식했고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그곳은 더욱 큰 영역이었을 것이다), 이 인식은 비드가 나타낸 것과 일치했다.

노르웨이의 여행자 홀로갈란드의 오데어의 오를로피오르에서 슐레스비히까지 이틀간의 여정에 대한 기록에서, 그는 배의 우현에서 육지를 기록했고, 앨프리드 대왕은 수기에 "그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 이 섬들에 앵글족들이 살았다."라며 첨부했다. 이에 대한 대한 내용은 머시아 왕가가 후손임을 주장했고 업적들이 앙겔른, 슐레스비히, 렌츠부르크와 연관되어 있던 이들인 베르문드, 앵글족의 오파 등 두 명의 왕과 관련한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전승에서도 확인된다. 덴마크의 전승은 프로우위누스(Freawine)와 위고(wig), 슐레스비히의 관리자이자 부자(父子)지간인 두 명에 대한 기록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웨식스 왕가가 이들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5세기 동안에, 앵글족들은 브리튼섬을 침략했고, 그 후 이들의 이름은 튀링겐인들이 공포한 법률인 Lex Anglorum et Werinorum hoc est Thuringorum을 제외하곤 유럽 대륙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머시아의 초대 왕은 대륙 앵글족의 마지막 왕이였던 에오메르의 아들인 이켈로 알려져 있다. 489년 앵글족의 왕이 된 이켈은 어떠한 이유로 515년 다른 앵글족 집단 및 이웃한 섹슨족과 함께 먼저 주트족들이 넘어와 정착하던 브리튼 섬으로 이주해 템스 강 북쪽에 정착한 후 동앵글리아를 통해 머시아 지역의 브리튼인들을 쳐부순 후 머시아를 세웠다고 한다. 머시아인들의 조약에 따르면 초기의 국경은 더비셔, 레스터셔, 노팅엄셔, 노샘프턴셔, 스태퍼드셔를 비롯한 북부 지역을 포함했다. 535년 이켈이 죽자 그의 외아들인 크네바가 머시아의 왕으로 즉위하는데, 크네바-퀴네왈드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왕들의 이름이 연대기에서만 전해진채로 치적에 대한 기록이 없는 시기로 있게 된다.

이후 584년 크레오다가 실존인물임이 확인된 첫 왕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탬위스에 요새화된 왕궁을 세웠고, 593년 사망하자 아들인 피바가 뒤를 잇는데 606년까지 통치하며 서부로 영토를 확장한다.
2.1.1.6. 노섬브리아
2.1.1.7. 웨식스(데인로 이전)
839년 에즈베르흐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애셀울프가 웨식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851년 최초로 바이킹의 연합한 대군세가 웨식스 서쪽 해안가로 침략하자 이들을 물리쳤다.855년에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는데, 그동안 웨식스를 차남인 애설볼드가 대리 통치했다.그동안 애셀울프는 여행 중에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 왕 샤를 2세의 딸과 결혼했기에 대리 통치를 하고 있던 애셀볼드 입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졌기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잉글랜드로 돌아온 애설울프는 반란을 접했으나 아들과 싸우지 않는 쪽을 택했고, 애설볼드가 웨식스를 계속 통치하도록 놔두며, 자신은 켄트와 다른 동부 지역을 다스렸다. 858년 부왕 애설울프가 사망하자 애설볼드는 웨식스의 왕, 그의 동생 애설버트는 켄트의 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그의 왕비가 가진 서프랑크 왕국 공주로서의 지위가 너무 탐이 났기에 애설볼드는 엄청난 일을 감행한다. 왕비, 즉 그의 새 어머니와 결혼한 것이다. 당연히 이에 대한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 대주교는 애설볼드가 죽었을 때 그와 그의 통치에 대해 악평을 했을 정도였다. 860년 12월 20일 애설볼드는 도셋에서 사망했고, 왕위는 그의 동생인 애설버트가 이었다.

그의 치세는 내치적으로 평화로워 보였으나 외치로 볼 때는 전혀 아니었다. 바이킹들이 다시 브리튼 섬을 침략했고, 켄트 지역 동부를 개발살내고, 당시 수도격이었던 윈체스터까지 넘볼 정도였다. 그외의 치적으로는 웨식스에 켄트+영국 동남부 지역이 통합된 것 정도였고, 에설버트는 이전 왕들과는 달리 켄트 지역에 따로 제후를 두지 않고 직접 통치했으며, 켄트 지역의 정치 세력도 자신의 세력에 포함시켰다.

865년에 에설버트는 죽었고 그의 왕위는 동생인 애설레드가 이어받았다. 문제는 즉위 첫해부터 위기가 닥쳐왔다. 바로 바이킹들이 이전과 다른 규모로 연합군을 결성하여 브리튼 섬으로 대대적으로 침략해 온 것이다. 이 사건은 역사상 이교도 대군세(Great Heathen Army)로 알려져 있다. 대외적 원인으로 가장 강력한 바이킹 군벌이었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브리튼 섬을 털다가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앵글로색슨족의 왕국 중 하나인 노섬브리아의 해안에 좌초했다. 여기서 라그나르는 노섬브리아의 왕인 앨라 2세(Ælla II)와 생애 마지막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라그나르는 생애 처음으로 패배하면서 결국 붙잡혔다.

당시 엘라 2세는 라그나르를 죽이면 그의 아들들이 복수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라그나르를 구금할 생각이었으나 잡은 포로가 라그나르인지 모르고 있있기에 생포당한 라그나르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라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고, 이에 앨라 2세는 심문을 위해 그를 뱀굴에 쳐넣었다.

이에 라그나르는 유언으로 "새끼 멧돼지들이 늙은 아비의 죽음을 안다면 어떻게 꿀꿀거릴까?"를 남기며 죽었고, 이사실이 스칸디나비아에 있던 그의 아들을 알게 되면서 이들이 다른 바이킹들에게 라그나르의 복수를 하자고 선동하면서 시작되었고, 무엇보다 이때 스칸디나비아의 척박한 땅에서 하는 농사와 무역으로 급속하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에 벅찼기에 차선책인 약탈 또한 약빨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아예 그동안 약탈하던 지역들을 점령하기로 한 것이었다.

바이킹 군세는 65년 후반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켄트 지방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무차별적인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란 것은 동앵글리아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바이킹들이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조건으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장소와 식량 및 말들을 제공하기로 협의했다.

1년 동안 동앵글리아에 머물다가 866년이 끝나갈 즈음에 라그나르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인 앨라 2세의 노섬브리아로 진군했다. 노섬브리아 군대는 연전연패했고 이에 앨라 2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수도 요크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항전에도 불구하고 867년 노섬브리아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앨라 2세는 산 채로 붙잡혀 라그나르의 아들들에 의해 복수의 피의 독수리형으로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바이킹들은 노섬브리아 북부에 더럼을 수도로 에크베르흐트 1세를 괴뢰왕으로 세운 뒤 자신들이 점령한 지방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대리 통치'를 하는 형식을 빌려 통치했다.

노섬브리아 정복이 끝나자 바이킹 침략군은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전성기가 끝나고, 계속되는 내전으로 약화된 머시아를 급습했다. 국경을 넘어 남하하여 손쉽게 머시아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머시아의 수도 노팅엄을 점령했다. 웨식스-머시아 연합군은 머시아의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실패했다. 결국 수도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머시아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는데, 바이킹은 이를 받아들여 노팅엄을 돌려주고 노섬브리아로 철수했다.

또한 바이킹 대군은 당시 머시아의 군주였던 버그레드를 정치적으로 압박함과 동시에 머시아 국토를 유린했고, 왕의 무능함에 분노한 이들을 지원하면서 그의 퇴위를 종용했다. 그러면서 바이킹들은 머시아의 왕위를 원하는 세력을 지원했고, 압박을 견디지 못한 버그레드는 로마로 떠났으며, 바이킹들은 체올울프 2세를 새로운 왕으로 즉위시키고 머시아의 동부를 약탈했다. 성공적으로 약탈을 마무리한 바이킹들은 노섬브리아로 철수했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괴뢰국 노섬브리아에 일부 정착민들을 남겨 놓은 채 870년 동앵글리아로 돌아가 그해 겨울을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동앵글리아의 왕 에드문드는 바이킹들이 겨울을 보내는 동안 이들과 체결한 평화협정을 깨고, 이들을 기습했다. 하지만 바이킹에게 역습당해 동앵글리아 군대는 전열이 무너진 채 전멸했고, 심지어 왕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하며 왕국이 멸망했다.

이듬해 871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일명 '여름의 대군세'라 불리는 지원군이 얼 바그세크의 지휘 아래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이들은 동앵글리아 지역을 거쳐서 이번에는 곧장 웨식스 왕국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당시 웨식스는 머시아나 노섬브리아와 달리 강력한 기반을 다져 둔 상태였으며 애설레드 1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애쉬다운 평원에서 결전을 벌여 여름의 대군세를 격파하고, 군세를 이끌던 얼 바그세크를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여름의 대군세는 얼 바그세크의 전사와 함께 애쉬다운 평원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분열되어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을 격퇴한 웨식스군도 상당히 많은 사상자를 냈기에 피로스의 승리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킹 지원군이 전멸하자 각지에 정착한 바이킹들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엔 당분간 불편한 평화가 이어졌다.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그리고 동부 머시아 일대에 바이킹들이 정착했는데 이들은 데인(Dane)인, 즉 '덴마크 사람'이라 불렸다. 그 시기 웨식스의 왕이었던 애설레드 1세가 승하했고, 나중에 앨프레드 대왕이라 불리는 그의 동생이 즉위하면서 이교도 대군세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애쉬다운 평원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바이킹들은 871년과 872년 동안 런데위치(현 런던)를 점거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이들은 식량이 떨어졌고, 머시아와 웨식스의 포위망을 뚫고 노섬브리아로 철군했다.노섬브리아의 데인족 군대는 2개로 나뉘어져는데 오스켈트, 그리고 언웬드가 이끄는 두 번째 부대는 남하해 웨식스로 향했다. 이들은 캠브리지에 기지를 건설해 그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 876년 월햄을 점령하여 무차별 약탈을 저질렀다. 앨프레드는 이들과 협상하여 웨식스를 떠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불안한 평화가 지속되는 와중 데인족들은 877년 동시에 약화된 머시아를 급습해 스스로의 세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그들은 머시아의 마지막 왕 체올울프 2세를 퇴위시키고, 머시아의 동부를 완전히 자신들의 세력권안으로 병합했다.

또한 기세를 몰아 878년 1월 데인족 군대가 웨식스 북부에 위치한 치픈헴을 기습공격했다. 이곳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877년 12월 앨프레드가 방문한 이래 아직 머물던 참이었는데, 데인족들은 이 지역을 파괴하고 거주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하지만 다행히 앨프레드는 간신히 그 난리통에서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구트룸이 국경을 이렇게 쉽게 돌파한 이유는 과거 머시아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머시아의 버그레드 왕이 데인족들과 손을 잡은 정적들의 정치적 압박에 퇴외한 사례가 있듯이 데인족들의 강력한 군사적 원조는 왕위 요구자들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결국 일부 웨식스의 지방장관들이 권력을 얻고자 묵인 및 협조한 탓에 구트룸은 국경지대로부터 관문들을 재빠르고 손쉽게 돌파했고, 순식간에 앨프레드를 기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구트룸은 자신이 지원한 인물들을 웨식스의 주요 인사에 배치시키면서 사실상 웨식스를 괴뢰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구트룸이 간과한 것은 웨식스 왕국의 대다수 지역은 데인인과의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분노한 지역 주민들은 데인족의 지원으로 권력을 장악한 꼭두각시 정부에 충성하기를 거부했다.

한편 앨프레드는 간신히 탈출한 뒤 오지를 전전하며 데인족들에게 반격할 준비를 했다. 주변의 지지자들을 소집하고 구트룸과 적대하는 파벌을 불러들이며 새로이 군대를 꾸렸다.인근 지역의 수비군들과 지역 주민들이 협조했고 소수 정예로 구성된 부대가 데인족들과 반란군들을 무자비하게 섬멸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들어와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은 바이킹들이 무엇보다 애용하는 방식이었고,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반란 세력들은 수도 인근 지역을 제외하곤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앨프레드 대왕은 지방도시들과 마을을 다시 휘하에 복속시킴과 동시에 왕위를 재탈환할 군대를 지방에서 끌어모았다. 그는 바이킹과 꼭두각시 왕, 그리고 반역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진격했고, 에딩턴 평원에서 구트룸의 데인족 군대와 마주쳤다.

에딩턴 전투라고 불리는 이 격렬한 전투에서 앨프레드의 웨식스군은 바이킹의 방패벽을 격파하면서 대군세의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 우바 라그나르손의 군대가 사이누프 전투에서 무너짐으로서 이교도 대군세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878년 구트룸과 우바가 패배함으로써 바이킹이 감행한 대대적인 웨식스 침공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미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는 정복당했고, 머시아는 동부가 강제로 분할당했다. 878년 이후의 시대를 후대 사람들은 바이킹의 잉글랜드 지배, 즉 데인로(Danelaw)라고 부르게 되었다.
2.1.1.8. 기타 소왕국들
2.1.2. 웨일스를 제외한 브리튼 내의 로만 브리튼인들의 세력들
2.1.3. 이교도 대공세기
2.1.3.1. 데인로
2.1.3.2. 웨식스(데인로 이후)⇒잉글랜드 왕국
웨식스는 약화된 머시아를 완전히 산하의 종속국으로 두어 대외적으로 머시아-웨식스 vs 바이킹(데인족)의 구도가 본격적으로 잡혔다. 하지만 분열된 데인족의 세력들과 달리 하나로 뭉친 웨식스 왕국 간의 대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웨식스의 우세로 이어졌다. 동앵글리아의 군주로 구트룸을 삼으며 법과 규율로 그를 통제하는데 성공한 앨프레드는 약화된 데인족들을 하나둘 씩 몰아냈기 시작했다.

이후 앨프레드 대왕은 왕권 확립 + 중앙집권 스타일의 통치체제에 가까운 통치 시스템을 완비하기 시작했다. 앨프레드 대왕은 바이킹이 계속 침략하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도 왕권을 계속 강화시켜 나갔으며, 바이킹과 휴전한 후에는 자신의 지배 영역을 10개 정도의 주로 나누고, 각 주에는 각각 세속 권력인 장관과 종교 권력인 주교를 파견하였다. 통상적인 봉건주의 국가에서는 각 지역을 토착 세력에게 맡겨 두고, 국왕은 이들로부터 형식적인 충성맹세만 받았는데, 앨프레드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고, 세금을 걷으며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심지어 정치권력 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임명권과 파견권까지 국왕이 장악하여 종교 권력도 국왕의 손에 넣었다. 후계에게 물려줬다.

또한 지방 행정 조직을 방어 거점인 "부르흐"를 중심으로 재편하였고, 앨프레드 당시 웨식스에는 서른 셋의 부르흐가 요새화되어 있었는데 르흐 건설에서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곳은 웨식스의 수도였던 윈체스터로 성벽 안쪽의 로마시대 도로를 무시하고 새롭게 격자로 구획된 도로를 닦았다. 당시 도로 건설에서 측량을 위해 66피트 길이의 자를 이용했는데, 이는 웨식스의 표준 도량형이 되었다.

다만 그의 치세에 봉건제가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는지 데인족들이 지배하는 데인랜드로 불린 동부 머시아와 동앵글리아는 자영농들이 대세였으나 웨식스에서는 영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이 큰 농장(장원)을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소작을 시키는 장원제도가 대세가 되어 가고 있었다.

또한 제도 정비와 더불어 문화와 종교의 부흥에도 힘썼는데, 대표적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와 손잡고, 각지에 주교를 파견하는 등 가톨릭 신앙의 보급에 힘썼다. 또한 큰 산 하나만 넘어가도 말이 잘 통하지 않을 정도로 지역별 이질성이 강했던 고대 영어의 표준화를 시도했고, 기록을 위한 영문법을 정비하였다. 앨프레드 이후 웨식스 왕국에서는 기록문화가 정착되어 많은 문헌을 남겼다. 그의 시기에 라틴어로 쓰인 책 다수가 영어(고대 영어)로 번역되었는데, 보에티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 등 라틴 저술가들의 저작들이 본격적으로 영국에 소개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본인 스스로도 라틴어를 배웠으며, 자서전을 포함한 몇몇 저술을 남겼고, 그가 직접 쓴 문헌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다.

앨프레드는 데인족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머시아를 되찾고자 했던 머시아의 애설레드를 자신의 딸인 애설플레드와 결혼시켜 혼인 동맹을 맺고 머시아를 웨식스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자 했으며, 890년대 이후로도 데인로에 정착한 데인족 부대와 바다를 건너온 소규모 데인족 부대들이 침공하는 등 웨식스와 머시아는 끊임없이 데인족의 공격에 시달렸다. 앨프레드 대왕 또한 4년 동안 잉글랜드 전역을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쫓겨다니기도 했다. 이때 후계자인 대 에드워드가 데뷔하면서 군재를 쌓으면서 바이킹들을 몰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유입되는 대규모 침공은 더 이상 없었기 때문에 웨식스는 거의 대부분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고 점차 힘의 균형추는 웨식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899년 앨프래드 대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대 에드워드가 즉위하였지만 애설레드 1세의 아들들이자 그의 사촌들인 애설월드(Æthelwold)와 애설헬름(Æthelhelm)이 반발했다. 이중 애설월드는 왕위를 뺏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고, 도셋의 윔본을 점령했다. 뭐 만만한 성격은 아니었던 대 에드워드는 당연히 군대를 이끌고 애설월드를 정벌하려 나섰다. 그가 윔본 근처에 도착하여 공격을 준비하자, 애설월드는 한밤중에 윔본을 탈출하여 노섬브리아로 갔다. 그는 그곳의 데인족에 합류했고 왕으로 추대되었다.

애설월드의 반란을 제압한 대 에드워드는 900년 6월 8일 대관식을 올려 웨식스의 왕위에 올랐다.

901년, 도망갔던 사촌 애설월드가 함대를 이끌고 에식스로 돌아와 동앵글리아의 데인족들에게 봉기하라고 꼬드겼다. 이듬해(902)에는 그가 직접 머시아와 북부 웨식스를 침략했다. 대 에드워드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동앵글리아를 싹 쓸어버렸다. 그 직후, 대 에드워드의 철수 명령을 거부하고, 독자 행동하던 대 에드워드의 켄트족 병력과 적군인 데인족 군대가 한판 붙었다. 데인족이 이 싸움에서 이겼지만 큰 피해를 입었고, 그 와중에 반역자인 애설월드와 동앵글리아 왕 구트룸 2세도 죽었다.

그 후로도 몇 년간은 잉글랜드 북부와 웨식스는 계속해서 사이가 나빴다. 909년에는 대 에드워드쪽에서 노섬브리아를 집적대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노섬브리아 데인족은 이듬해 머시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들은 머시아와 웨식스 연합군에 걸려들어 참패를 당했다. 그 후로 데인족은 험버 강 이남으로는 침략하지 않았다. 대 에드워드는 곳곳에 요새를 쌓았는데, 이들은 모두 동일한 규격을 따른다는 특징이 있었다.[1]

대 에드워드는 머시아, 동앵글리아, 에식스에 대한 웨식스의 지배력을 넓혀나갔다. 런던과 옥스포드 및 이들을 둘러 싼 옥스포드셔와 미들식스 지역도 합병했다. 데인족이 점령한 땅을 정복했고, 머시아의 지배자였던 그의 누나 애설플래드가 죽고 난 후 그녀의 후계자였던 질녀 앨프윈을 웨식스로 데려와 권력을 빼앗고, 머시아를 직접 통치했다. 918년 말에는 애설플래드가 죽어서 못 다했던 '데인로의 다섯 도시' 정복을 이어서 끝마쳤으며, 그에 따라 머시아 전체가 그의 지배하에 들어왔다. 대 에드워드의 재위 말기에는 스코틀랜드인, 웨일즈인, 데인족 모두가 그의 권위를 인정했다.

군사/정치적인 면에서 상당한 활약을 한 대 에드워드였지만, 다른 분야에서의 그의 업적은 뚜렷한 것이 별로 없다. 그가 교회를 재조직하고 새로운 교구들을 만들긴 했지만 신앙심이 그다지 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종교 활동이 미흡하다고 교황이 정식으로 비난할 정도였다. 924년 7월 17일, 대 에드워드는 웨일스와 머시아가 연합한 반란군을 진압하러 가던 중 사망했고, 앨프워드가 즉위했으나 불과 16일만에 죽으면서 애설스탠이 즉위했다. 즉위 직후인 925년 노섬브리아의 요크 왕국은 예외로서 아직도 바이킹이 점령하고 있었다. 926년, 애설스탠은 그의 누이와 요크 왕국의 왕인 시흐트릭과의 결혼을 주선했다. 이를 기회로 애설스탠과 시흐트릭은 서로 침략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적을 돕지도 않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그 다음 해인 927년에 시흐트릭이 죽자 애설스탠은 이를 기회로 삼아 요크 왕국을 침략했다. 그는 요크 쪽 저항군을 가볍게 발라버린 후 요크를 점령했고, 내친 김에 노섬브리아의 왕위까지 가져가 버렸다. 이로써 애설스탠은 잉글랜드 통일에 가까우면서도 전체에 지배력을 가지게 되자 국호를 웨식스에서 잉글랜드로 변경해 첫 번째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

그는 서쪽 웨일즈 지역에 대해서도 강한 지배력을 가진 왕이었다. 웨일즈에 대한 지배력은 이미 아버지와 고모가 확립해 놓았고, 애설스탠이 이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웨일즈의 왕은 애설스탠의 지배를 받았고, 무거운 조공까지 웨일즈에 부과되었지만 웨일즈는 애설스탠의 영향력을 인정했다. 따라서 애설스탠 재위 기간 동안 웨일즈와 잉글랜드 사이에 평화가 유지되었다.

애설스탠은 그가 새로 지배하게 된 잉글랜드 북부, 즉 노섬브리아에서 귀족 세력과 공존하려고 노력했다.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던 그답게 점령지의 성직자들에게 푸짐한 선물을 나누어 주었고, 요크 왕국에서의 가장 중요한 심복이었던 요크 대주교에게는 광대한 토지를 매입하여 넘겨 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외부인으로서 증오의 대상이었고, 북부 왕국들은 차라리 아일랜드 더블린 왕국의 바이킹들과 연합하고 싶어했다. 애설스탠이 잉글랜드 남부에서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했던 것에 비해 잉글랜드 북부에서 그의 지배력은 매우 약했다.

934년 애셀스턴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네 명의 웨일즈의 소왕 네 명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떠났다. 공격은 육지와 해상 양면에서 이루어졌으며 둘 다 성공적이었고, 애설스탠은 스코틀랜드 깊숙히까지 털어먹었다. 전쟁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 결과 또한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같은 해 9월에 버킹엄에 돌아와 있었고, 거기서 스코틀랜드 왕인 콘스탄틴은 신하 왕으로서 법령 공표에 입회했다.

934년 올라프 구트프리트손이 바이킹족의 왕국인 더블린 왕국의 왕으로 즉위했고, 스코틀랜드 왕인 콘스탄틴의 딸과 결혼함으로써 스코틀랜드와 바이킹의 연합을 강화했다. 937년, 올라프는 아일랜드에서의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고, 곧 옛 바이킹 영토인 요크 왕국의 재건에 나섰다. 올라프 혼자 대적하기에는 애설스탠이 너무 강했으므로 동병상련하던 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틴과 연합하여 웨식스와 대적했다. 그해 가을에는 잉글랜드를 침공하는 목적으로 다른 스코틀랜드 왕국까지 끌어들였다.

이들 연합군을 가을에 기습해 왔고, 애설스탠은 그렇게 큰 규모의 공격이 다 늦은 가을에 이뤄지리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애설스탠의 초기 대응은 느렸다. 애설스탠이 웨식스와 머시아의 병력을 소집하느라 시간을 잡아먹는 동안, 연합군은 잉글랜드 북서쪽을 털어먹었다.

하지만 양측이 맞장 뜬 브루넌버 전투에서 애설스탠이 엄청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 연합군은 붕괴되었다. 올라프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으로 도망쳤고, 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틴은 아들을 잃었다. 승자인 잉글랜드군도 심한 피해를 입었으며, 애설스탠의 두 조카와 대 에드워드 왕의 동생인 애설위어드의 아들들도 죽었다.

한편 애셀스탠은 내치에도 주력했는데, 그는 할아버지 앨프레드 대왕과 아버지 에드워드의 정책을 고스란히 승계해 대 에드워드 시절의 작고 비공식적이었던 신하들의 모임은 애설스탠의 재위기간 동안 크고 정식화된 회의로 확장되었다. 애설스탠은 각 지방의 주교와 지방의 파견 관리, 지방의 권력자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했는데, 이는 잉글랜드 통일의 커다란 걸림돌이었던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다만 애설스탠은 명확히 자신의 근거지를 정하지는 않았으나, 주로 웨식스에 머무르며, 지방의 유력 인사들을 내각으로 불러 모으는 방식으로 지방을 통치했다. 고정된 근거지가 없었던 것은 원래 동로마 제국을 제외한 유럽 본토의 군주국들도 마찬가지로 앵글로색슨족 또한 수도란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의 궁정은 이곳 저곳을 옮겨 다니며 열렸고, 내각 모임 또한 이곳 저곳에서 열리곤 했었다.

앵글로색슨족은 브리튼에서 최초로 자국어로 된 법률을 공표한 민족일 정도로 법에 상당히 관심이 많았는데, 애설스탠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법 제정에 관심을 기울였다. 10세기 왕들이 만든 법들 중 가장 많은 내용이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법은 애설스탠이 만든 법이다.

요크를 정복하고, 브리튼의 다른 왕들을 복속시킨 후에는 새로운 주화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는 등 화폐 보급에도 관심을 기울였지만 화폐 제조가 중앙에서 관리되지 못하고, 각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었다.

앵글로색슨에게는 교회와 정부가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었다. 교회의 유력자들은 왕정 회의나 왕실 행사에 참석하고, 의견을 제시했다. 애설스탠의 통치 기간 동안 이러한 관계는 더욱 더 긴밀해졌다. 애설스탠 자신 또한 교회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애설스탠은 기독교 유물을 수집하는 데 열성적이었다. 그리고 교회에 선물과 봉헌도 자주 했고, 아예 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바다 건너 유럽 대륙의 교회와 관계를 맺는 데도 힘을 쏟았다.

애설스탠은 교회의 학문을 부활시키려던 그의 할아버지 앨프레드 대왕의 노력을 계승했다. 당시 교회 및 교회에서 주도되던 학문은 침체기에 빠져 있었는데, 애설스탠은 이의 부흥을 추진하여 책을 인쇄하고 유통시켰다. 애설스탠은 그 자신이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으며, 기독교 관련 학문의 증진으로 유명했다.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 종교 유물의 수집가로서의 그의 명성을 듣고 각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이 그의 궁정을 방문했다. 그의 학문 증진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으나, 그것에 대해 칭송하는 많은 시가 지어져서 후대로 전해졌다.

또한 유럽 본토의 왕국들과도 교류를 이어갔는데, 웨식스 왕조 후기의 웨식스 왕들은 유럽 왕들에게 성공의 상징이었다. 920년경의 유럽 대륙의 왕가들은 계속되는 전쟁과 내분을 겪고 있었다. 각종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애설스탠은 잉글랜드에서 정치적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더 나아가 전쟁만 잘하는 전사로서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카롤링거 왕조의 이상을 실현하려 하였다.

웨식스 왕정은 카롤링거 왕조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관계는 애설스탠의 증조할아버지인 애설울프가 신성 로마 제국의 전신인 프랑크 왕국의 왕의 딸과 결혼하고, 그들이 낳은 아들이 다시 앨프레드 대왕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애설스탠의 이복누이인 에아드기푸도 서프랑크 왕국의 왕인 단순왕 샤를 3세와 결혼했다. 애설스탠의 재위 기간 중에는 유럽 쪽과 결혼을 통한 동맹이 강화되었다. 애설스탠은 여자 친족들이 자신의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을 꺼렸고, 따라서 그들은 주로 유럽 쪽으로 시집갔기 때문이다. 그의 누이들은 모두 유럽의 귀족들과 결혼했거나 아니면 아예 결혼을 하지 않았다.

애설스탠의 가장 중요한 유럽 동맹은 새로 떠오른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왕조였다.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는 10세기 초반에 몰락했고, 새로 등장한 오토 왕조의 왕 하인리히 1세는 세력 기반을 쌓을 필요가 있었다. 하인리히 1세는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아들을 카롤링거 왕가의 여자와 결혼시키려 했으나 적합한 인물이 없었다. 꿩 대신 닭 삼아 웨식스 왕가가 혼처로 물망에 올랐고, 하인리히 1세는 아들인 오토, 즉 훗날의 대제 오토 1세를 애설스탠의 이복누이와 결혼시켰다.

애설스탠은 당시 관습에 따라 유럽의 왕자들과 양아버지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이들이 권력에서 쫓겨나면 유럽 대륙으로 병력을 보내 잃었던 영토나 왕위를 되찾게 도와주었다. 예를 들어, '미발왕' 하랄 1세의 뒤를 이어 '피도끼왕' 에이리크가 노르웨이의 왕위에 오르자, 자신의 궁정에 머무르고 있던 미발왕 하랄 1세의 막내아들인 하콘 1세가 그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물론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었고 실패한 원정도 있었다.

939년 애설스탠은 마지막 브래트왈다로 죽었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에드먼드 1세가 왕위에 오른다. 왕위를 계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올라프 3세 구트프리트손이 노섬브리아를 정복하고, 잉글랜드 중부의 미드랜즈를 침략했다. 그러나 942년에 올라프가 죽자 에드먼드 1세는 미드랜즈를 되찾았고, 944년에는 노섬브리아까지 되찾았다. 945년에는 스코틀랜드의 스트라스클라이드 지역을 정복했으나 말컴 1세와 군사 지원에 대한 협약을 맺고 그 지역을 넘겼다.

바다 건너 프랑스의 왕위에 개입하기도 했다. 프랑크 공작에게 사신을 보내 프랑스의 루이 4세의 복위를 주장하여 복위에 도움을 주었다. 946년 5월 26일,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외유 중이던 에드먼드 1세는 도적의 칼에 찔려 죽었고, 두 아들인 이드위거와 에드거는 어렸기에 그의 왕위는 동생 이드리드가 계승했다. 이드리드가 즉위할 당시 노섬브리아는 처음에 이드리드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나 1년 후인 947년 노르웨이 국왕이었으나 추방된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를 왕으로 삼아 독립해버렸다. 이에 948년 이드리드는 군대를 이끌고 노섬브리아를 침략하여 전투에서 승리했고, 노섬브리아를 잉글랜드에 복속시켰다. 950년 혹은 951년에 노섬브리아는 올라프 시그트뤼그손을 왕으로 삼으며 다시 반란을 일으켰으나 954년에 노섬브리아 왕 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함으로써 다시 복속되어 이드리드를 그들의 왕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노섬브리아는 7왕국 중 가장 마지막으로 잉글랜드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죽기 전에 소화기쪽으로 심각한 병을 앓다가 955년 11월 23일에 사망했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그의 형 에드먼드 1세의 아들인 이드위그가 왕위를 이었다.

왕위에 오른 이드위그는 전형적인 범군으로 주목받을 만한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토지를 너그럽게 잘 나눠주는 것으로 유명했다. 956년 한 해에 나눠 준 토지만 해도 앵글로색슨의 토지 중 5%를 차지할 정도였다.

통치기간 내내 가족과 귀족들, 그리고 특히 교회 세력과 대립했다. 교회 세력은 오도 주교와 성 던스턴이 주축이 되어 갈등을 빚어 왔는데, 점차 던스턴의 추종자를 중심으로 세력이 커져갔다. 이들은 이드위그의 이복동생인 에드거 1세를 지지했다. 그리고 평소 세금 징수에 불만이었던 머시아와 노섬브리아의 귀족들도 957년을 기점으로 에드거 1세 쪽으로 붙었다. 그러나 내전은 피하고 싶었던 귀족들은 템즈 강을 경계로 북쪽은 에드거 1세가 가져가고, 남쪽의 웨식스와 켄트는 이드위그가 계속 통치하는 선에서 합의하였다.

959년, 이드위그는 만 18세 전후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왕위는 에드거 1세가 이어 받는데 바스에서 거행된 그의 대관식은 이후 영국 왕실의 대관식에 본이 되었다. 에드거 1세는 별칭은 평화왕(the Peaceful). 그가 통치한 시대가 별다른 외침없이 평화가 지속된 시대였기 때문으로 그의 성격은 평화적인 것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오히려 강력한 통치력을 보이곤 했고, 이는 평화적인 상태로 이어졌기 때문으로 즉위 후 966년에서 970년 바이킹들이 각각 웨스트모어랜드와 앵글시를 습격했고, 960년에 웨일스 귀네드에 왕위 계승을 두고 분쟁이 벌어지자 귀네드 왕국을 공격했고, 970년 스코틀랜드 국왕 케네스가 노섬브리아를 공격했다.

에드거 1세는 데인족의 거주 지역인 데인로를 다시 정복하고 데인로의 주민들에게 자신들의 법적, 사회적 관습을 허용했다. 그는 이를 통해 데인족과 앵글로색슨과의 융합을 시도했고 데인인과 색슨인 모두에게 왕으로서 인정받았다.다만 이때까지 데인로의 바이킹들은 개종이 안된 상태였기에 성직자들에게 비판을 받앗다.

상술한대로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이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앵글로색슨 문화와 예술이 뒤늦게 꽃을 피웠다. 지방정부 또한 에드가 왕의 통치 이래로 발전했다. 샤이어리브들이 엘더맨(Ealdorman)[10]의 수행했던 임무를 위임받았을 수 있게 하는 등의 행정 개혁을 진행했는데, 이는 오랫 동안 엘더맨들의 권력이 왕을 압도했고, 에드거 1세때가 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캔터베리 대주교인 던스탄은 그의 주요한 자문관이었다. 던스탄의 지지 아래 수도원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수도원 개혁운동은 그의 왕권을 강화하는 데 긴밀한 역할을 했다.

베네틱트 수도원의 진정한 정신은 10세기 초기 잉글랜드에서는 거의 소멸되었다. 비드가 오래전에 통탄한 것처럼 수도원은 절제가 사라지고 세속적인 생활양식으로 기울어졌다. 영국 교회의 재건을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것은 수도원 개혁운동을 진행시킬 수 있는 모델과 수도원 건축 자금이었다. 그는 유럽의 대개혁운동을 본받아 수도원 개혁운동을 추진했고, 건축 자금은 에드가 왕과 그의 귀족들이 마련했다. 개혁운동의 추진 세력은 세 명의 위대한 성직자들인 던스탄, 에델월드, 오스왈드였다.

그러나 수도원 개혁운동의 특징은 영국의 수도원 개혁이 유럽의 개혁운동을 모델로 했을지라도 이 개혁은 명백히 영국적이라는 것이다. 유력한 성직자들은 후기 앵글로색슨 왕들이 가장 존경하던 조언자들이었고, 교회 개혁은 에드가 왕에게 신성한 평판을 더해주었다.

973년, 그가 서른 살이 돼서야 치른 대관식은 왕에게 사제와 같은 신분을 부여하며, 왕을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지위에 오르게 했다. 서른 살은 교회법상 사제직 서임을 위한 최연소 나이였다. 예식의 절정은 대관식이 아닌 성유를 부어 성별시키는 의식이었다. 의식을 통해 그는 사제의 권위를 부여받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이는 상술한대로 후대 영국 왕실의 대관식의 본이 되었다.

또한 화폐 개혁을 진행했는데, 973년경 에드가 왕은 새로운 주화인 페니를 도안했는데, 이 주화는 노르만 정복 이후까지도 오랫동안 영국 통화의 기초로 남아 있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필적할 수 없는 에드가 왕의 통제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975년 7월 8일, 에드거 1세가 죽었다. 후계로는 두 아들이 있엇는데 전부 나이가 어렸고, 이중 장남인 에드워드는 나이가 12세인데다가 무엇보다 공인하기는 했으나 사생아였다. 순교왕 에드워드가 즉위했지만 왕위 계승에 대한 다툼이 있었다. 에드워드가 비록 맏아들이었으나 평소 아버지가 그를 후계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정통성에 의문이 생긴 것이다. 일부 귀족들은 그의 이복동생인 에설레드를 후계자로 밀었다. 게다가 당시의 세 번째 아내이자 정실부인이었던 앨프스리스가 애설레드 2세의 친모였고, 그녀는 당연히 애설레드를 왕으로 밀었다. 하여간 에드워드는 대주교들 및 그들의 추종자들의 힘을 빌어 975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권력 기반이 약했고, 게다가 나이까지 어렸던 에드워드는 제대로 통치를 할 수 없었다. 그의 편에 섰던 귀족들은 선왕인 에드거 1세가 베네딕토회에 하사했던 토지도 도로 빼앗는 등, 왕의 이름을 빌어 권력을 휘둘렀다.

결국 978년 3월 18일, 계모 앨프스리스를 방문하던 중 암살되었고, 에설레드가 애설레드 2세로 즉위한다. 그리고 2년뒤 바이킹들이 다시 잉글랜드 해안가를 약탈하기 시작했다.이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과의 관계가 나빠졌다. 원래 노르만족은 노르드계 바이킹이 프랑스의 북부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하여 프랑스화한 사람들이었는데, 당시까지도 노르만족은 스칸디나비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덴마크인들과 동질감을 갖고 있었고, 덴마크인과 색슨족의 전투가 잦아지다 보니 색슨족에 적대감을 갖게 된 것이었다.

덴마크인들의 침략은 점점 거세졌고, 991년8월에 대규모의 데인족 군단이 잉글랜드의 남동쪽에서 전투를 개시했다. 이때 데인족은 잉글랜드 에섹스의 블랙워터 강 옆에 있는 몰든 지역에서 그 지역의 군대장관 비르트노쓰와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앵글로색슨족의 대패로 끝났지만 이들의 용맹은 고대 영시 몰던 전투(The Battle of Maldon)로 불멸화되었다.

이 전투 후 캔터베리 대주교 시게릭과 남서 지역의 군주들은 에델레드 왕에게 전쟁하는 대신 데인족 바이킹들에게 돈을 주고 달래라고 조언했다. 에델레드는 데인족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결정하고 평화를 사기 위해 매년 그들에게 10,000파운드의 은을 지불했다. 그러나 이 돈의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비르트노쓰를 무찌른 데인족 군대는 991년에게 993년까지 계속해서 다시 영국의 해안을 약탈했다. 심지어 994년에 데인족의 함대는 템스 강 어귀로 방향을 틀어 런던을 향했다. 이 전투에서 에델레드 왕은 그 함대의 지도자인 올라프 트리그바슨과 만나 협상에 돌입했다.

에델레드 왕과 올라프는 잉글랜드에 정착한 데인족의 회사와 영국 정부 사이에 협정을 맺었지만 그 관계 또한 갑자기 단절되었다. 에델레드 왕은 또다시 돈으로 그들을 달랬다. 이 과정에서 올라프는 세례를 받고 다시는 잉글랜드로 쳐들어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노르웨이로 떠났다.

실제 올라프는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바이킹 군대의 잔존 세력은 에델레드 왕의 용병으로 계속 잉글랜드에 남았다. 997년 데인족의 약탈은 다시 시작되었고 데인족에게 지불하는 돈, 이른바 데인겔드는 간간이 지불이 거절되기도 했지만 계속 평화와 교화를 조건으로 잉글랜드인들의 혈세로 지불되었다.

2.2. 웨일스

앵글로·색슨의 침공때 유일하게 침공을 면한 웨일스 지방은 로마 제국이 잉글랜드 일대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을 때인 400년대를 기점으로 귀네드, 구엔트, 포위스 등의 잘잘한 소국들이 건국된 상태였다. 이후 로마 군대가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이후 십여개 이상의 소국으로 존재했으며, 이후 중세 중기가 되기까지 귀네드, 룽 구이 아 하브렌, 포위스, 구엔트, 데허이바쓰의 다섯 국가로 통합되지만 남은 소왕국의 왕들 간 서로가 브리튼인의 왕을 자칭해 대립하면서 끝내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지진부진해졌다. 또헌 웨일스 사와 관련된 문헌이 많은 나라 중 고작해바야 귀네드, 포위스, 구엔트, 데허이바쓰 네 곳 밖에 없다.

포위스는 400년대에 구르세른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구르세른은 5세기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이름을 날린 보티건의 웨일스식 이름이다. 구르세른은 픽트족과 스코트족에게 쫓겨 웨일스 북부로 도피했고 그 곳에서 포위스를 건국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제대로 된 왕국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포위스는 여러 지역들이 느슨히 결합된 형태의 왕국이었고 완전한 왕국의 외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였다. 포위스 관련 초기 기록은 대부분 잉글랜드와의 충돌에 관한 것이다. 포위스는 웨일스의 동부로 잉글랜드와 국경을 맞댄 탓에 잉글랜드와 잦은 충돌을 겪었다. 616년 무렵 포위스의 왕 셀리브는 체스터 전투에서 잉글랜드 세력과 격돌한다.

8세기 중·후반에는 잉글랜드 왕국 중 하나인 머시아와 갈등을 빚는다. 잉글랜드를 호령한 머시아의 왕 오파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국경에 ‘오파의 방벽’을 건설하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또한 오파는 포위스에 몇 차례 공격도 가했다. 오파가 죽은 후에도 머시아는 포위스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822년 포위스는 잠시 머시아인에게 장악된다. 잉글랜드와의 충돌로 생긴 국력 소모는 포위스가 이웃 왕국인 귀네드와의 경쟁에서 열세에 놓이는 요인 중 하나로 사료된다.

9세기 초·중반 포위스는 귀네드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귀네드는 메르빈 브리흐의 즉위를 기점으로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진다. 메르빈은 포위스의 공주 네스타를 아내로 맞는데 이것을 이용해 포위스를 거의 장악하기에 이른다. 포위스와 귀네드의 예속 관계는 로드리 마우르의 즉위와 함께 더욱 심화된다. 메르빈과 네스타의 아들 로드리는 모계 혈통을 통해 포위스의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마침내 855년 무렵 귀네드의 왕관을 쓴 채 포위스의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고, 로드리 마우르의 공식 즉위 이후, 포위스의 왕위는 당연히 귀네드의 왕이 차지하는 처지로 전락해 중세 중기인 1063년까지 귀네드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구엔트는 로마인이 사라진 5세기 무렵에 건국되었다.. 410년 무렵 로마인들은 브리튼 섬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5세기 무렵 웨일스 남동쪽 끝에 에위아스(Ewias 또는 Ewyas)라는 왕국이 생겼다. 그러나 곧 에위아스와 에위아스 동쪽 땅을 모두 포함한 구엔트 왕국이 새로 탄생했다. 구엔트는 이스크와 와이에 흐르는 강 사이의 지역이 영토였다.

구엔트의 건국자는 카라도그이다. 카라도그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구엔트를 건국했는지 존재하는 기록은 없다. 카라도그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윤색된 중세 로맨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구엔트는 오랫동안 웨일스의 패권 다툼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인식되었다. 구엔트의 지리적 위치가 웨일스의 외곽으로 구엔트의 왕위를 여러 귀족 가문들이 번갈아 차지한 탓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왕권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엔트가 잉글랜드와 국경을 맞댄 것도 구엔트의 성장에 많은 방해가 되었다. 구엔트는 전 웨일스를 호령할 강력한 왕이 배출된 적이 거의 없었다. 구엔트 관련 기록도 상당 부분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웨일스의 강대국인 귀네드나 데헤이바쓰와 관련 있을 때만 등장했다.

다만 9세기 중엽의 왕이었던 모르간 압 오와인만큼은 기록이 많은 편으로 즉위 당시 그는 본래 구엔트의 남서쪽에 면한 글러위신그 출신으로 자신의 형제들인 그리피드와 카두간과 함께 왕국을 분할 상속받아 통치하다가 그리피드는 933년경 케레디기온 사람들의 손에 의해 살해되고, 카두간은 950년 앵글로색슨과의 전투 중 전사하면서 형제들의 영톨를 흡수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잉글랜드 왕국과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데 중시했는데 이는 선대로부터 이어진 외교 노선이었다. 다만 다른 웨일스의 소왕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잉글랜드에 대한 우위를 인정해야 했지만 그대신 잉글랜드가 국경을 맞대고 있던 구엔트를 침략하는 것을 방지하는데는 성공했다. 다만 그의 사후 그의 왕국은 다시 그의 아들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귀네드는 웨일스의 브리튼인 국가 중 가장 강성한 편에 속했으며, 종종 귀네드 왕이 브리튼인들의 왕을 자처하기도 했다. 귀네드는 브리튼인의 국가이나 왕가의 시조는 브리튼인이 아닌 스코틀랜드 고도딘 출신의 키네다 아프 에데른이다.

다만 귀네드는 부족 사회의 모습을 재빨리 벗고 국가의 틀을 갖춘 덕분에 일찍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귀네드는 6세기 초 이미 왕국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무렵 귀네드의 왕으로 즉위한 키네다의 증손자 말군 귀네드는 용맹하고 냉혹한 성격으로 주변 왕국들을 굴복시켜 웨일스의 패권을 움켜쥐었다. 귀네드는 해외 교류도 활발했다.

결국 635년 무렵 카드와슬론은 노섬브리아 왕가 출신인 오스왈드에게 살해당했다. 머시아와의 동맹은 카드와슬론 이후에도 계속 유지되는데, 이를 통해 귀네드는 노섬브리아와 대적하고 포위스로 세력을 확장할 힘을 갖추게 되었다. 건국 이후 큰 부침 없이 빠르게 성장한 귀네드는 9세기 들어 눈부신 전성기에 접어들었다.

9세기 초 귀네드에 새로운 왕가가 탄생했다. 825년 귀네드의 왕으로 등극한 메르빈 브리흐는 귀네드 왕들 중 최초로 건국자 키네다의 남자 후손이 아니었다. 메르빈의 아버지는 귀네드 왕국과 상관없는 구리아드로, 그가 귀네드의 공주인 에실트를 아내로 맞으면서 그들의 아들 메르빈은 귀네드 왕좌에 대한 권리가 생겼다. 메르빈의 즉위는 귀네드 왕국에 새로운 왕가의 시작을 알렸다.

귀네드의 새 왕가 ‘아베르프라우 왕가’는 대대로 걸출한 인물을 배출해 귀네드는 유례없는 번영기를 맞았다. 이후 귀네드는 다소 부침을 겪지만 웨일스가 잉글랜드에 정복되는 1283년까지 의심의 여지없이 웨일스 최강 자리를 지켰다. 한편, 메르빈의 증손자 허웰 다가 웨일스 남부에 데헤이바쓰를 세우면서 메르빈의 후손은 귀네드를 넘어 웨일스 최대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메르빈의 아들 로드리 마우르의 통치 아래 귀네드는 명실상부한 웨일스 최강국으로 거듭났다. 로드리 마우르라는 이름은 ‘로드리 대왕’이라는 뜻으로, 9세기 전 유럽을 통틀어 ‘대왕’ 칭호를 받은 왕은 샤를 대제, 알프레드 대왕, 로드리 마우르 단 세 명뿐이다. 로드리 마우르는 포위스 공주인 어머니 혈통을 이용해 귀네드의 이웃이자 경쟁국인 포위스를 장악했다.

이후 귀네드는 약 2세기 동안 포위스를 지배하며 웨일스 북부의 패권을 독식했다. 로드리 마우르는 웨일스 중부 세이시슬르그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귀네드는 웨일스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거대 왕국이 되었다. 856년 로드리 마우르는 앵글시 섬을 침공한 바이킹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이 사건으로 귀네드의 이름은 전 유럽에 퍼졌다.

하지만 로드리 대왕이 바이킹에게 거둔 승리가 바이킹 세력을 웨일스 땅에서 영원히 축출한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잉글랜드 땅을 차지하겠다는 바이킹의 야욕은 860년대를 기점으로 강해졌고 이와 맞물려 바이킹은 871년부터 웨일스에도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결국 877년의 바이킹 침공은 성공적이어서 로드리는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추방되어 아일랜드로 건너가게 되었다. 같은 해 바이킹은 웨섹스를 제외한 잉글랜드의 다른 왕국들을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점령해 영국 땅에 그들의 세력을 공고히 했다. 이듬해인 878년 로드리는 귀네드 왕국으로 돌아와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그의 재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났다. 왕좌를 탈환한 지 얼마 안 되어 878년 웨식스 영향하에 놓여 있던 머시아 서부와의 전투에서 아들 구리아드와 함께 전사했다.

그 뒤를 이은 아들 아나라우드 아프로드리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881년 콘위에서 머시아 왕국의 에델레드를 패배시켰고, 웨일스 북부로의 팽창을 저지하면서 머시아의 침략에 대한 우려 없이 왕국의 내부 강화를 꾀하고 남부 웨일스로 왕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바이킹에 대한 침략을 막기 위해 893년 웨식스와 공조를 시작했는데, 이때 앨프레드 대왕의 측근이었던 애서 주교가 남긴 전기인 『알프레드의 삶(Life of Alfred)』에 따르면 아나라우드는 웨섹스 왕국과의 동맹을 위해 앨프레드 대왕을 직접 찾아갔고 그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아나라우드와 앨프레드 대왕의 동맹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아나라우드가 앨프레드 대왕보다 낮은 왕의 위치에서 후원을 요청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앨프레드 대왕과 손잡은 후인 894년 바이킹이 웨일스를 공격했다. 귀네드 왕국이 있는 웨일스 북부를 먼저 공격한 그들은 아나라우드 군대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진로를 남쪽으로 선회했으나, 그곳에는 앵글로색슨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앨프레드 대왕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바이킹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한 아나라우드는 동맹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의 형제들과 웨일스 내부에서 영토 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형제들과 함께 성장한 아나라우드는 로드리가 죽은 후, 형제들과 각각 로드리의 왕국을 나눠 물려받았다. 이후에 아나라우드는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대신, 그들과의 협력과 연합을 통해 ‘로드리의 아들들’의 위력을 온 웨일스에 떨쳤다. 또한 요크의 바이킹 군벌이나 앨프레드 대왕의 웨섹스 왕국과의 협력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한편, 왕국의 영토를 남부 웨일스까지 확장하는 것을 도모했다.

바이킹을 무찌른 이듬해인 895년 아나라우드는 웨일스 남부로의 영토 확장을 본격화했다. 아나라우드는 앵글로색슨 군대의 지원 아래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를 침공했다.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는 모두 앨프레드 대왕의 동맹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앵글로색슨 군대는 큰 어려움 없이 아나라우드의 공격을 도울 수 있었다.

한편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는 귀네드 왕국과 더베드 왕국이 아래 위에서 호시탐탐 노리던 영토로, 더베드도 앨프레드 대왕의 웨섹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로 인해 아나라우드는 남부 영토 확장을 위해 앨프레드 대왕의 지원을 받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베드의 왕이던 더베드의 허피아드가 893년 사망하자 더베드와 웨섹스 왕국의 동맹은 지속되지 못했다. 아나라우드의 귀네드 군대가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를 침공한 895년 웨섹스와 더베드는 더 이상 동맹 관계가 아니었고, 웨섹스 군대는 걸림돌 없이 귀네드 군대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앨프레드 대왕이 아나라우드를 지원한 배경에는 앨프레드 대왕 본인의 정치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웨일스 최고의 세력은 누가 뭐래도 귀네드와 포위스, 세이시슬르그를 위시한 로드리의 아들들이 이끄는 왕국들이었고, 아나라우드는 이중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앨프레드 대왕에게 웨일스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과 손잡는 것은 어떤 동맹보다 유용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가 기꺼이 아나라우드의 웨일스 남부 침공에 힘을 보탰을 것으로 여겨진다.

웨일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병력을 형성하고 있던 귀네드 군대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앨프레드 대왕의 원조를 받아 마치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듯 거침없이 웨일스 남부를 침공했고, 얼마 안 되어 케레디기온은 아나라우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아써에 의하면, 이후에도 아나라우드는 영토 확장 욕심을 숨기지 않고 케레디기온보다 더 남동쪽인 브러하이니오그까지 손을 뻗쳤다.

916년 아나라우드가 사망한 후 귀네드 왕국은 이미 웨일스 내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로드리와 아나라우드의 후손들은 이후 북쪽으로는 귀네드 왕국, 남쪽으로는 데헤이바쓰 왕국을 중심으로 전 웨일스를 장악했다. 아나라우드의 아들인 이드왈 보엘은 귀네드 왕국을 물려받아 웨일스 북부에서 입지를 더 공고히 다졌으나 아나라우드의 조카이자 카델의 아들인 허웰 다는 웨일스 남부에 데헤이바쓰 왕국을 세워 귀네드 왕국의 입지를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916년에는 머시아의 여왕 에델플레드가 브러하이니오그를 공격하여 위협하였고, 917년경에는 바이킹에게 서쪽 해안가를 공격당하며 수세에 몰렸다. 결국 921년 웨일스의 가장 강력한 두 왕, 이드왈과 허웰은 모두 에드워드에게 신종하였다.

921년의 항복 이후 이드왈은 웨일스 최강자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그는 기존의 항복을 철회하고 점점 잉글랜드에 저항하는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반면, 허웰은 에드워드를 믿을 만한 동맹으로 인식하고 협력관계를 점차 강화했다.924년 대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이드왈은 혼란한 상황을 틈타 체스터 지역을 공격하였다. 잉글랜드와의 관계가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늘 편치 않았던 이드왈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에서 겪은 굴욕을 되돌려주고자 했다.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에드워드의 아들 애설스탠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웨일스 왕들과의 군신관계를 다시 확인받고자 했다. 927년 애설스탠은 허웰을 비롯한 웨일스의 왕들과 회동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드왈은 허웰과 함께 927년, 928년, 937년 총 세 번에 걸쳐 애설스탠의 궁정에 방문하였다. 당시 방문자를 기록한 명부에 의하면 허웰의 이름은 웨일스 군주들 가운데 언제나 맨 처음에 등장하였고 이드왈의 이름은 허웰의 이름 다음에 등장하였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가 이드왈보다 허웰에 호의적이었음을 증명하는데 이는 이드왈이 여전히 잉글랜드와 애설스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927년의 항복은 이드왈에게 에델스탄에 대한 표면상의 충성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표면상의 충성은 이드왈을 실질적 행동으로 이끌었는데, 이드왈은 허웰과 함께 애설스탠을 도와 브리튼 섬 북부에 위치한 스트라스클라이드 원정길에 참가한 바 있다.

939년 애설스탠의 사망과 함께 잉글랜드에 대한 이드왈의 태도도 바뀌었다. 이드왈은 잉글랜드의 궁정에 출입하는 대신 잉글랜드에 대항할 힘을 키웠다. 결국 942년 이드왈은 동생 엘리세드와 힘을 합쳐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전쟁은 결국 이드왈은 패사했다. 그의 슬하에 다섯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드왈의 후계자로 점쳐지던 아들은 이아고 아프 이드왈과 이아이아프 아프 이드왈이었다. 하지만 귀네드의 왕위를 차지한 자는 다름 아닌 허웰이었다. 허웰은 순식간에 귀네드를 침공하여 이드왈의 아들들을 추방하고 귀네드의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웨일스 최강국으로 군림해오던 귀네드는 신생국 데헤이바쓰에게 정복되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

949년 허웰이 사망하자 이드왈의 아들들은 귀네드를 되찾는다. 이드왈의 아들들은 데헤이바쓰와 949년, 952년 두 차례 격돌하여 승리하였고, 그 결과 왕국을 완전히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드왈의 다섯 아들 중 이아고와 이아이아프가 이드왈의 뒤를 이어 귀네드의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들의 사후 발생한 왕위 계승을 둔 내분으로 986년 마레디드에 의해 데헤이바쓰에 다시 장악되었다.이후에도 중세 중기인 1016년까지 왕위를 두고 내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데헤이바쓰는 상술한대로 920년 귀네드 왕 아나라우드의 조카 허웰 다에 위해 건국된 국가로 웨일스 중·남부를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그의 조부인 귀네드 왕이었던 로드리 대왕은 장남인 아나라우드 아프 로드리에게 귀네드 왕가의 본거지인 귀네드 왕국을, 차남인 카델에게는 웨일스 남부의 세이시슬르그를 물려주었다. 카델은 872년부터 그가 사망하는 909년까지 세이시슬르그의 왕으로 군림한 후, 장남 허웰 다와 차남 클러도그 아프 카델에게 그의 왕국을 나눠줬다. 다시 말해 카델이 죽은 후, 세이시슬르그는 약 10년 동안 두 명의 형제에 의해 다스려졌다.

허웰 다는 920년 동생 클러도그가 사망하면서 세이시슬르그의 전권을 손에 넣지만 허웰 다는 이에 앞서 세이시슬르그 동서쪽의 더베드 왕국의 군주로 등극한 것으로 추정된다. 더베드는 약 893년부터 904년까지 약 10년 동안 클러와르흐 아프 허바이드라는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 클러와르흐는 허웰 다의 장인으로, 허웰 다는 그의 외동딸인 엘렌 베르흐 클러와르흐와 결혼했다. 클러와르흐는 아들이 없어 904년 그가 서거한 후, 더베드의 왕좌는 공석으로 남았고, 허웰 다는 그 틈을 타 선왕의 사위라는 위치에 자신의 권력과 정치력을 더해 더베드의 왕관을 손에 넣었다.

904년 더베드의 왕이던 클러와르흐의 사망과 함께 허웰은 더베드의 왕위에 오름으로써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그로부터 16년 후인 920년, 허웰과 세이시슬르그를 분할 통치하던 클러도그가 사망함으로써 허웰은 더베드와 세이시슬르그의 유일한 통치자로 자리매김했다. 웨일스 남부를 이루는 더베드와 세이시슬르그가 허웰이라는 통치자 아래에 합쳐지면서 ‘남부’를 뜻하는 데헤이바쓰라는 이름이 새로운 왕국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데헤이바쓰는 이후 4세기가량 웨일스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동안 귀네드의 독무대와 같았던 웨일스의 세력 분포는 데헤이바쓰의 등장으로 북부의 귀네드, 남부의 데헤이바쓰 양강 체제로 재편되었다. 또한 소부족 집단들이 주축이 된 군소 왕국들의 모임과 같던 웨일스는 데헤이바쓰라는 초강대국의 등장과 함께 통일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더베드와 세이시슬르그를 장악한 허웰의 상승세는 멈출 줄 모르고 930년 마침내 세이시슬르그 동쪽의 브러하이니오그까지 차지했다. 브러하이니오그를 손에 넣음으로써 허웰은 웨일스 통일을 위해 웨일스 남동부의 두 왕국 글러위신그와 구엔트 그리고 북부의 강자 귀네드만 남겨놓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드왈이 942년 머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전사하면서 웨일스의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허웰이 이드왈의 사망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귀네드 왕국을 침공해 이드왈의 아들인 이아고 아프 이드왈과 이아이아프 아프 이드왈을 축출하고 귀네드의 왕관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귀네드 동쪽의 포위스는 귀네드의 통치 아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허웰은 귀네드의 왕좌를 차지하면서 자동적으로 포위스까지 지배하게 되면서 거의 웨일스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와의 외교 관계에서 허웰 다 또한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중시했는데, 이미 로만켈트족들을 서쪽 웨일스와 북쪽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몰아내 그나마 브리튼 섬의 옥토라 부르만한 지역들을 차지한 앵글로-색슨족들을 칠왕국과 바이킹들에 의한 이교도 대공세 시기를 해쳐나가면서 앨프레드 대왕 시기와 대 에드워드 시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브리튼 섬에서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한 상태였기에 그 역시 다른 웨일스의 소왕으로 있던 시기 다른 소왕들과 마찬가지로 웨식스에 신종했고, 이후 대 에드워드가 죽고 애설스탠이 웨식스의 왕이자 통일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 본인이 브리든인의 왕을 칭한 후에도 저자세로 있었다.

허웰은 애셀스탠의 궁정에 자주 드나든 것으로 유명하다. 애셀스탠은 자신의 통치구역 밖에 있는 군주들을 주기적으로 자신의 궁정으로 불렀고 특히 허웰은 이 모임에 자주 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허웰이 애셀스탠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친교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모임 참가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자료를 보면 웨일스 왕들의 이름은 애셀스탠과 대주교의 이름보다 뒤에, 주교와 귀족의 이름보다 앞에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웨일스의 왕은 굉장히 높은 지위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웨일스 왕들 중 항상 첫 번째로 기록된 이름이 바로 허웰이라는 점은 그가 웨일스 왕들 중 가장 높은 위치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와 허웰의 동맹이 그만큼 공고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동맹은 감정적이고 개인적이라기보다 철저히 실리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애셀스탠은 937년 브루난버 전투에서 바이킹과 스코틀랜드인 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 승리 이후, 애셀스탠은 웨일스에 대한 통제를 느슨히 풀었다. 그리고 애셀스탠의 후계자인 에드문드는 세력이 더 약했기 때문에 웨일스의 군주들을 강하게 압박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애셀스탠이 웨일스의 왕들을 덜 압박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허웰은 더 이상 모임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허웰의 모임 참가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강력한 군주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의무적으로 행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 밖에도 내치에 있어서 중요한 업적을 세웠는데 웨일스 역사상 최초로 성문법으로 만들었다. 웨일스 법은 940년 무렵부터 945년 사이에 허웰의 근거지인 카마던셔 근교의 ‘터 그윈 아르 다프’에 각 지역대표들이 참가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허웰의 웨일스 법 편찬은 단순히 한 국가의 법을 제정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허웰 이전까지 웨일스에는 성문화된 법이 없었다. 성문법이 없다는 것이 웨일스에 법 자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허웰이 수행한 과업은 법을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웨일스의 여러 지역에 퍼져 있는 법의 역할을 하는 ‘관습’이나 ‘풍습’을 성문법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허웰이 제정한 ‘웨일스 법’은 중앙집권적 성격을 띤 국가법이라기보다 여러 지역의 실상과 삶의 지혜가 묻어난 국민법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웨일스 법은 처벌을 통해 사회질서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친족 집단 간의 문제를 중재하고 탈 없이 화해할 수 있도록 권유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처벌보다 관용과 자비를 권하고 민중의 눈높이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여타 법령에서는 최근까지도 결여되어 있던 여성과 아이들을 존중하는 면이 두드러져 있으며, 이런 특성은 허웰의 법이 왕과 귀족들의 의사만 반영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시행되던 관습적인 법령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허웰의 법이 시대를 앞서간 성격을 갖는 또 다른 이유는 허웰 자신이 시대에 앞선 교육을 받았고, 뿐만 아니라 잦은 영국 궁정 출입과 심지어 웨일스 왕으로는 최초로 경험한 로마 순례는 그를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지 않고, 식견과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허웰의 시대는 유럽과 이슬람의 많은 국가들이 법 자체와 그것의 성문화에 큰 관심을 갖던 시기로 로마를 방문해 당시 유럽 전반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를 직접 체감한 허웰은 웨일스 법을 제정함으로써 선진문물을 적극 도입했다.

허웰의 법이 탄생한 또 다른 배경에는 웨일스 내 여러 왕국이 그의 통치 아래에 놓였기 때문이다. 허웰은 당시 각기 다른 왕국으로 오래 지내온 세이시슬르그, 더베드, 귀네드와 같은 다수의 영토를 동시에 통치하였기 때문에 행정 조치를 통해 이질적인 국가들에게 통일성과 일체감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공식적인 법 제정은 이 역할을 수행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수단이었다. ‘웨일스 법’이라는 공식적인 법의 등장은 지역에 따라 다른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백성들에게 동일한 가치관, 행동규범, 생활방식 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허웰은 웨일스 역사상 가장 많은 왕국과 넓은 영토를 통치했음에도, 그의 집권기의 웨일스는 큰 불화나 충돌 없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허웰의 통치기 동안 외세의 침입은 물론 내부 분열도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것은 허웰의 법에 웨일스의 여러 왕국 간의 분열과 갈등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허웰의 법은 모든 법전이 왕과 그의 관리들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할 만큼, 왕권 강화와 신성화라는 목적으로도 만들어져 이런 법의 배포를 통해 어떤 세력도 감히 허웰에게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들어 왕국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했다.

선진적이고 자비롭기로 유명한 허웰의 법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신분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을 구분하는 가장 기초적 기준은 자유민과 비자유민의 경계이다. 왕이나 귀족은 당연히 자유민으로 구분되는 반면, 농민이나 노예는 비자유민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웨일스의 법이 선진적인 것은 다수가 비자유민의 신분에 묶여 있던 유럽 전반의 풍토와 비교해 웨일스에서는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자유민의 권리를 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웨일스 법은 여성의 권익보호에서도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물론 웨일스 법에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은 뚜렷하다.

허웰의 법은 오늘날까지 총 42부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중 36부는 웨일스어, 나머지 6부는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웨일스 법은 처음에 웨일스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라틴어판은 원전의 번역본이다. 웨일스 법이 처음에 웨일스어로 기록된 것은 그것만이 웨일스 백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반영하고, 내용을 온전히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950년 허웰이 죽은 후 그의 자리를 아들인 오와인 압 허웰이 계승했고, 다른 아들들에게도 각각 왕국을 분할했다. 그리고 953년 무렵, 귀네드 왕국은 이드왈 보엘의 아들들인 이아고와 이아이아프가 왕좌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오와인은 귀네드를 무력으로 수복하려 했으나 수복하기는커녕 오히려 952년 이아고에게 데헤이바쓰 침공을 허용했다. 954년 귀네드와 데헤이바쓰의 운명을 가르는 최후의 일전이 귀네드의 흘란루스트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의 자세한 정황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승리의 여신은 또 한 번 오와인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결국 오와인은 허웰 다가 사망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귀네드 왕국과 귀네드에 복속되어 있던 포위스를 잃고 허웰 다가 이룬 거대한 데헤이바쓰 제국은 조각나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오와인은 남웨일스에서 데헤이바쓰의 패권을 공고히 하는 데 주력했고, 이를 통해 데헤이바쓰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다만 오와인은 귀네드의 왕좌를 여전히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고, 훗날 웨일스 연대기』에 이드왈, 아이고, 아아이아프에 대한 기록을 완전히 배제하는 등 귀네드 왕위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상술한대로 오와인은 다른 두 형제와 함께 950년 데헤이바쓰를 분할해 물려받았으나 다른 두 형제인 로드리와 에드윈이 각각 952년, 954년에 사망하자 오와인은 왕이 된 지 4년 만에 데헤이바쓰의 유일한 통치자로 등극했다. 귀네드의 패권을 완전히 빼앗긴 오와인에게 오랜 통치 기간은 여러 과제를 남겼다. 왕국 확장의 한계에 직면한 상황에서 오와인은 허웰 다가 시도하지 않았던 웨일스 남동부로의 세력 팽창에 힘을 쏟는 한편, 대내적으로 비교적 신생국인 데헤이바쓰 왕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통치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웨일스 연대기』이다.영토 확장과 왕국 강화 측면에서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오와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연대기』의 집필과 편찬으로 신생국인 데헤이바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상술한대로 선친의 유산인 귀네드 왕국을 빼앗아간 이아고와 이아이아프,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이드왈에 대한 언급은 철저히 피하하면서 메르빈의 진정한 혈통이자 데헤이바쓰와 귀네드를 포함한 웨일스 전체의 지도자로서 입지를 세우고 싶었던 오와인의 강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상술한대로 954년 흘란루스트에서 있었던 귀네드와 데헤이바쓰의 전투에서 귀네드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귀네드는 웨일스 북부에서 데헤이바쓰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데헤이바쓰를 세운 허웰 다가 귀네드의 통치권을 빼앗은 것이 942년이므로 12년 만에 귀네드는 자신의 통치권을 되찾은 것이다. 귀네드에게 당한 패배로 오와인은 북웨일스로 영토 확장을 도모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와인과 데헤이바쓰의 왕국 팽창 야욕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북웨일스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남웨일스에서 데헤이바쓰의 영향력은 여전히 공고했다.

북웨일스 경로가 차단된 오와인은 남웨일스의 왕국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웨일스 남동부의 글러위신그와 구엔트는 웨일스의 변방으로 전략적 요충지와는 거리가 멀어 그동안 많은 왕들에게 침략할 필요가 없는 땅으로 외면받아왔다. 오와인은 북웨일스 진출 경로가 완전히 막혀 다른 왕들과 달리 글러위신그와 구엔트 침략에 관심을 가졌다. 960년 오와인은 글러위신그 옆의 작은 왕국인 고웨르를 공격했다. 당시 고웨르를 비롯한 웨일스 남부의 소왕국들은 강력한 왕이 없는 대신 여러 가문 출신의 귀족들이 왕위를 번갈아 차지했기 때문에 이 국가들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불안정했다. 오와인은 이 국가들의 취약점을 간파하고 남부를 목표로 왕국 확장을 도모했다.

960년 오와인의 고웨르 공격은 데헤이바쓰가 웨일스 남동부로 진출해 남부의 패권자로 올라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970년대부터는 오와인의 아들 이니온 아브 오와인이 데헤이바쓰 군의 수장이 되어 고웨르를 비롯한 웨일스 남동부에 공격을 이어갔다. 이니온은 아버지 오와인보다 탁월한 전사였으며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겠다는 욕심도 더 큰 인물이었다. 이니온은 970년과 977년 두 차례 고웨르를 침공했고 계속되는 공격에 조금씩 데헤이바쓰의 손아귀로 들어오던 고웨르는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니온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980년대 들어 고웨르 동쪽의 브러하이니오그와 구엔트로 세력을 넓혀갔다. 오와인이 처음 확립한 웨일스 남동부로의 영토 확장 기조가 불과 20~30년 만에 큰 성과를 낳은 것이다. 탁월한 전사이자 야심가인 이니온의 통솔 아래 데헤이바쓰는 점점 더 빠르고 무자비하게 영토 확장을 진행했다. 하지만 데헤이바쓰의 세력 확장은 다른 소왕국들에게는 그들의 세력 약화를 뜻했고, 데헤이바쓰가 침략을 통한 전리품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동안, 피해국들의 생활은 피폐해져갔다. 결국 984년 이니온은 그가 침략한 구엔트 왕국의 귀족들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끝을 모르던 침략 야욕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니온의 사망은 오와인에게 왕위계승이라는 큰 과제를 안겨주었다. 오와인은 970년대부터 점차 왕국 통치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960년대 오와인이 시작한 웨일스 남동부로의 왕국 팽창을 970년대에 이니온이 계승하게 된 것도 오와인이 전면에서 물러나 자식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일어난 당연한 수순이었다.

데헤이바쓰의 군 통수권자이자 실질적 통치자인 이니온의 죽음은 자칫 데헤이바쓰 왕권의 공백을 초래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왕권의 공백은 왕국의 세력 약화로 직결될 수 있었다. 오와인이 귀네드 지배력을 완전히 상실한 954년, 흘란루스트 패배 이후 30년 가까이 소강상태이던 귀네드와 데헤이바쓰 간의 충돌은 이니온의 빠르고 무자비한 왕국 팽창에 귀네드가 위기를 느끼면서 불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니온이 살해되기 불과 1년 전인 983년 이니온이 이끄는 데헤이바쓰 군대는 귀네드 군대와 한 차례 맞붙었다. 이때 이니온은 귀네드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시 귀네드는 앵글로색슨과의 동맹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 탓에 승리의 출혈이 상당했다. 결국 이 전투로 촉발된 군사력 약화가 화근이 되어 데헤이바쓰는 구엔트의 침공을 허용했고 이니온까지 살해되었다. 귀네드가 호시탐탐 웨일스 남부로의 왕국 확장을 꾀하던 상황에서 오와인이 왕위계승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지 않는다면 데헤이바쓰의 존속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오와인은 이니온의 빈자리를 마레디드 아브 오와인이라는 아들로 대신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마레디드는 형 이니온 이상으로 훌륭한 전사이자 포부가 큰 야심가로 이니온이 사망한 984년부터 데헤이바쓰의 실질적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이니온의 사망과 마레디드의 왕위 등극은 데헤이바쓰의 영토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986년 마레디드는 데헤이바쓰의 왕들 중 허웰 다 이후 처음으로 귀네드를 침공했고, 이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당시 귀네드의 왕이던 카드와슬론 아브 이아이아프를 죽이고 귀네드를 장악하였다

987년 오와인이 죽고 마레디드가 데헤이바쓰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즉위 직후 바이킹들의 끝없는 침략을 대처해야 했다.즉위 이후 바이킹의 수장 고드프리가 귀네드의 거점이자 웨일스 북쪽 섬인 앵글시를 공격해 수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포로로 잡힌 사람 수가 무려 2천 명에 달했으며 이듬해인 988년 바이킹의 칼끝은 앵글시 남쪽 레디기온의 슬란바다른과 모르가누그의 슬란카르반으로 향해 해안가에 위치해 접근성이 높고 방어가 취약한 교회와 수도원 등을 약탈했다.

바이킹의 쉴 새 없는 전방위 공세에 견디다 못한 마레디드는 군사력으로는 그들을 완전히 격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고 그들에게 돈이나 재물을 주는 대신, 웨일스 땅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려고 했다. 바이킹에게 웨일스를 침략하지 않는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989년 마레디드는 인두세를 인상했고, 해당 인두세 수입으로 2년 전 붙잡혀간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해 자국민들을 돌려받는다.

마레디드의 협상으로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던 바이킹의 웨일스 침략은 잠시 소강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 왕국 내부의 반란이 문제가 되었다. 992년, 마레디드의 요절한 형 이니온의 아들인 에두인 아브 이니온이 잉글랜드 군대와 손잡고 마레디드의 영토를 공격했다. 이니온이 살아 있었다면 자신이 가장 유력한 차기 왕 후보였기 때문에 에두인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삼촌 마레디드에게 도전한 것이다. 에두인은 마레디드의 영토인 더베드, 고웨르, 케레디기온을 공격했지만 아직 젊고 경험이 일천한 탓에 귀네드를 정복하고 바이킹의 공격을 막으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마레디드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패했다. 오히려 이듬해인 993년 마레디드는 왕권에 대항하는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바이킹과 연합해 에두인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정복지인 귀네드에서도 마레디드에 대항해 왕권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은 메이리그 아브 이드왈의 아들들이었다. 결국 994년 마레디드는 귀네드의 반란군과 대면한 전투에서 패해 자신의 거점인 웨일스 남부로 패주하였다. 이 패배로 마레디드는 귀네드를 포함한 웨일스 북부 상당 부분의 영향력을 잃었다.

999년 마레디드가 사망했는데 후계자인 아들 카드와슬론은 이미 그보다 7년 일찍 죽으면서 그의 왕위는 이니온의 증손자인 테우두르의 손에 넘어갔다.

2.3. 스코틀랜드

[스코트랜드#s-2.1|스코틀랜드]]에서도 각각 부족 국가가 세워졌고, 이중 스코트랜드 지역에서 9세기 중엽까지 고산지역을 픽트족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남부의 평지는 노섬브리아 왕국이 차지 하고 있었다. 서부에는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게일인 이주자들의 연맹 왕국 달 리아타(Dal riata)가 존재했는데, 스코틀랜드를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왕 코이나흐 언 퍼르버서흐 막 알핀(키나드 1세)이 이곳의 왕이었다. 과거에는 픽트인들이 키나드 1세의 아버지 알핀 2세를 죽였고 키나드는 이에 대한 복수로 픽트랜드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정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키나드가 달 리아타와 픽트랜드 두 곳의 왕위를 얻은 것은 단순히 부모에 의한 상속일 뿐이었을 거라고 여겨진다.[11] 달 리아타는 키나드의 치세 이후로 픽트랜드에 흡수되었고, 이후의 군주들은 한동안 모두 픽트인의 왕을 칭했다. 현재는 게일인의 달 리아타와 픽트인의 픽틀랜드가 게일인 위주로 점차 통합되었다고 보며, 키나드가 달 리아타와 픽틀랜드 두 곳의 왕이 된 것이 그 시작으로 여겨진다.

키나드 1세의 치세는 중세 초의 여러 왕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얼룩지었다. 삭소니아에 6번 침공했다고 하는데, 이 삭소니아가 독일 북부의 작센 지방을 일컫는지 잉글랜드의 색슨족을 일컫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현재 스코틀랜드 최남단에 있는 멜로스를 침공하고 던바를 불태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때 잉글랜드 북부까지 침공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바이킹들의 공세에 시달렸고, 심지어 내륙까지 바이킹이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이당시 스코틀랜드 또한 바이킹의 약탈에 시달렸다.

858년 키나드 1세가 죽고 동생인 돔날 1세가 즉위했다. 돔날 1세는 스콘-퍼스의 근교에 있는 포테비엇에서 게일인들이 처음으로 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이 법의 이름은 '아드 파인드의 법'으로, 돔날 1세의 증조부 아드 막 오하드의 이름을 땄다. 아드 파인드는 아드 막 오하드의 별명으로, 게일어로 하얀 아드라는 뜻이다. 이 법은 현재 실전됐지만, 기리크나 카우산틴 2세 치세의 법률을 참고해 주로 교회의 특권에 관한 법으로 추정하고 있다.

862년 돔날 1세가 죽자 키나드 1세의 아들인 카우산틴 2세가 왕으로 즉위했다.불행히도 그의 치세는 즉위 3년에 바이킹들에 의한 이교도 대군세에 휘말려야 했다. 866년, 고드프레드의 아들 아믈리브와 외슬이 하이랜드 포트리우에 상륙해 많은 조공과 포로를 획득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카우산틴에겐 천만다행히도, 이듬해에 악재가 터져 아믈리브는 아일랜드로 물러갔다. 우선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이자 키나드 1세의 사위이기도 한 아드 핀들리어흐가 군사를 내어 바이킹 점령지를 습격해 여러 마을과 항구를 파괴하는 등 처남을 도왔는데, 이는 외슬이 자신의 아내를 탐했던 이유도 있었다.덕분에 아믈리브는 870년까지 브리튼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아일랜드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870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아일랜드를 진정시킨 아믈리브는 다시 바다를 건너 이번엔 브리튼인들의 국가인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을 공격해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군사 요충지 덤바튼을 4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점령했다. 여기서 카우산틴은 어부지리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 패배로 권위를 상실한 어스트라드클라이드 국왕 아르트갈은 키나드의 아들 카우산틴의 사주로 살해당했다. 아르트갈에 사후에 왕위에 오른 이는 카우산틴의 매부 룬이었다. 이를 통해 픽트 왕국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까지 영향권에 넣는데 성공한다.

이후 871년 혹은 872년에 아믈리브가 다시 한 번 픽트 왕국을 침공하자 카우산틴은 맞서싸워 874년에 아믈리브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거기다 아믈리브의 원정을 돕곤 하던 아믈리브의 형제 이마르도 873년에 죽으면서 일단 대규모의 바이킹 침공은 진정되는 듯 했다.

하지만 875년 노섬브리아동앵글리아, 머시아의 동부를 점거하던 바이킹들이 군대는 2개로 나눴는데 이중 할프단이 이끄는 군대는 북상해 북쪽의 픽트족과 스코틀랜드를 공격해 왔다. 할프단의 군대의 진격로에 픽트 왕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카우산틴 치세 최대의 위기였는데, 수도 스콘 근교의 달러에서 픽트 왕국군은 할프단의 군대에게 거대한 학살로 기록될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당하기까지 한다. 이는 픽트 왕국을 흔들리게 만들었고, 결국 877년 카우산틴 1세는 이 군대와 맞서 싸우던 중 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왕위는 동생인 아드 막 키나다가 이었으나 돔날 1세의 아들을 자칭한 기리크 막 둥갈이 일으킨 반란에 1년만에 내전에서 패해 죽었다.기리크 막 둥날에 대해 쇼러스 보허넌과 같은 역사가들은 그를 대왕이라고 부르며 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절반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는데, 신빙성은 떨어진다. 이유는 기리크에 대한 기록이 잉글랜드 쪽에는 남아있지 않으며, 그의 치세기가 동시대 잉글랜드에선 이교도 대군세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절반 이상을 정복한 것은 스코트인이 아니라 데인족 바이킹이었다.

기리크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의 국왕인 오하드 막 룬과 공동으로 통치했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둘의 관계를 친족 관계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885년 성 키리쿠스의 축일에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식을 불길하게 여기던 관습 상 왕권의 약화에 일조했으리라 추측되며 889년 카우산틴 1세의 아들인 돔날 2세에게 왕위를 빼았긴다.

돔날 2세의 치세는 그의 아버지 카우산틴 1세처럼 바이킹들과의 전쟁으로 점철되는데, 이는 유명한 하랄 1세 하르파그리, 즉 노르웨이의 왕 미발왕 하랄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랄 1세가 노르웨이를 정복한 직후 그의 과세 정책 등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대규모로 노르웨이를 탈출해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오크니 제도, 옛 달 리아타 땅 등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에 하랄 1세는 이들을 잡아족치기 위해 이 지역들로 원정을 나간다. 즉, 픽트 왕국은 가뜩이나 기존에 넘어와있던 이교도 대군세의 후예인 데인인들도 버거운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나 다름없는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픽트 왕국은 서쪽으로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왕국, 남쪽은 잉글랜드의 데인로 왕국, 북쪽으로는 반하랄 노르웨이인, 동쪽으로는 하랄 1세에게 시달리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픽트 왕국은 약탈당했으나, 돔날 2세는 분투해 이니시브솔리안에서 바이킹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900년에 살해당하는데, 이에 대해선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그가 900년에 오피둠 포더, 현대의 둠노타르 성에서 데인인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버찬의 예언'은 그가 게일인[12]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자는 아드 막 키나다의 아들인 카우산틴 2세였다. 그의 치세에 최초로 나타나는 기록은 904년 픽트 왕국군이 아일랜드 더블린 왕국에서 출병한 더블린 국왕 이마르와 그가 이끄는 데인인 군대를 스트래턴에서 맞닥뜨려 크게 이기고 국왕 이마르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906년엔, 수도 스콘에 있는 '믿음의 언덕'이라는 곳에서 주교 첼라흐와 만나 신앙, 법, 규율, 그리고 라틴어로 pariter cum Scottis라고 하는 것 네 가지를 수호할 것을 결의했다. 이 partier cum Scottis가 무엇인지는 여러 추측이 있으나 공통적으로 게일인의 법 또는 게일인의 관습을 의미하며 스코틀랜드의 기독교화와 게일화를 위해 왕과 교회가 손잡은 것이다.

이 만남의 또 다른 의미는 시기상 첼라흐 주교 및 대다수의 스코틀랜드 성직자는 기리크의 치세 당시에 임명되었거나 당시 정권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과 카우산틴 2세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카우산틴 2세는 동시기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왕국의 종교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 내정에 도움을 받게 됐다.

그는 바이킹들과도 전쟁을 치뤘는데 그가 즉위한 시기인 10세기 초반은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는 옛 바이킹들의 후예 데인인들이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우고 쇠락기로 접어들 때였다.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와 그 뒤를 이은 시트릭 케흐[13]는 노섬브리아와 맨 섬, 아일랜드의 바이킹들을 다시 통합해 주변의 기독교 국가들을 위협했는데,911년 즈음에 머시아 영주 애설플래드가 노섬브리아 지역의 데인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북벌을 감행할 때 아일랜드인들과 북쪽 군주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데, 데인인이나 아일랜드인이 아닌 북쪽 군주가 카우산틴 2세 밖에 없으므로 동맹에 가담해 바이킹에 대항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918년, 노섬브리아의 잉글랜드인 왕 엘드레드 1세가 왕국 남쪽의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가 이끄는 군대에게 쫒겨 스코틀랜드로 도망쳐오자 카우산틴 2세는 그를 도와 남하해 현대의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지대 동쪽인 코브릿지에서 라그나르와 크게 싸웠다.

이전투에서 라그나르는 군대를 네 부대로 분산해 배치했는데, 스코틀랜드군은 세 부대를 격파했으나 라그나르가 친히 이끄는 네 번째 부대에게 매복당해 승리를 놓쳤다고 한다. 왕이나 모마어[14]들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전투의 흐름은 완전히 스코틀랜드가 다 이긴 전투로 카우산틴 2세의 근소한 승리로 기록하나, 결국 엘드레드의 복위를 이루지 못한 카우산틴 2세가 패배한 전투라 볼 수 있고 실제로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는 이 전투를 통해 노섬브리아 지역의 데인인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918년에 반 데인인 동맹을 주창한 머시아의 영주 애설플래드가 죽고 그녀의 남동생 웨식스 왕 대 에드워드가 조카딸로 부터 머시아를 빼앗았는데, 그는 918-919년 즈음에 누나가 진행하던 데인인의 주요 다섯 도시, 더비, 레스터, 링컨, 노팅엄, 스탬포드의 정복을 위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920년에 라그나르 및 주변 국가들의 국왕들을 만나 조약을 맺고 이 왕들에게 명목상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노섬브리아-더블린의 왕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국왕 오웨인 압 디프날,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카우산틴 2세가 이 조약에 참여했다.

이후 카우산틴은 대 에드워드의 아들인 애셀스탠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는데, 이 둘의 관계로 인해 근세까지 악연으로 점철되었다.

대 에드워드의 사후 웨식스-머시아의 왕위를 물려받은 애설스탠은 더 큰 야망을 품는데, 그는 시트릭 케흐와 그의 누이를 혼인시켜 노섬브리아의 데인인들과 기독교화를 조건으로 동맹을 맺어주는 척 했다가, 시트릭 케흐가 죽자마자 927년에 대대적으로 노섬브리아를 공격해 노섬브리아에서 데인인들을 모두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모든 브리타니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때 카우산틴 2세는 망명 온 시트릭 케흐의 아들 올라프를 받아들이고, 잉글랜드에 대항해 반 잉글랜드 동맹을 체결해 군사적 대항에 나섰고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과 웨일스의 소 왕국들이 가담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패배였다.

927년 7월 12일 애설스탠은 주변 국가 국왕들을 컴브리아의 에몬트 다리로 소집하여 조약을 맺는데, 조약의 내용은 '우상숭배를 절대 금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북유럽 신화를 따르는 데인인들과의 동맹을 의미한다. 여기 참여한 왕들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국왕 오웨인 압 디프날, 웨일스 데허이바르스의 국왕 하이웰 닷, 그리고 카우산틴 2세였다. 또한 이때 애설스탠이 카우산틴 2세의 아들 일둘브의 대부를 서주었다고 한다.

웨일스의 하이웰 닷 등이 아예 애설스탠의 궁정에 입조해 있는데 비해 카우산틴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명목상의 지배권은 인정만 하는 스텐스를 취했고, 결국 934년, 애설스탠은 다시 스코틀랜드 정벌에 나서게 된다. 웨일스의 네 개 소 왕국들의 왕을 모조리 대동했으며, 934년 5월 28일에 윈체스터로 군을 집결시켜 6월 7일에 북진을 시작했고, 잉글랜드의 육군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오웨인이 이끄는 군대를 제압한 후 하이랜드까지 북진해 포트리우까지 다다랐고, 해군은 브리튼 섬 최북단의 케이트니스까지 공략하면서 카우산틴 2세는 또 패배해 조약을 채결했는데 조약은 스코틀랜드에게 불리하게 체결되었고, 카우산틴 2세는 그의 아들을 애설스탠에게 인질로 보내고 잉글랜드 궁정에 입조하고 애설스탠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약들에 참가해야 했다.

935년부터 다시 잉글랜드 궁정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므로, 934년 한 해 동안 잉글랜드에 머무른 뒤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번번히 무릎을 꿇었지만 카우산틴 2세는 포기하지 않고 와신상담을 꿈꿨다. 당시 아일랜드의 더블린 왕국은 노섬브리아의 데인인 왕이었던 시트릭 케흐가 노섬브리아로 갈 때 왕위를 넘겨줬던 그의 동생 고드프레드의 아들로 시트릭 케흐의 아들 올라프와는 사촌지간인 올라프 구드프리트손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카우산틴 2세는 올라프와 동맹을 맺었다.

어스트리드클라이드 역시 이 동맹에 다시 가담했고, 이 새로운 반 잉글랜드 동맹은 937년, 잉글랜드에 대대적 공격을 가했다. 아예 각을 잡은건지, 주로 여름에 전쟁을 진행하던 관습까지 깨고 가을에 잉글랜드를 기습한 것이다. 허를 찔린 애설스탠은 빠른 초기대응에 실패했고, 스코틀랜드-더블린 연합군은 신나게 잉글랜드 북서부를 털었다. 애설스탠은 군대 소집에 한 달 가량을 소모한 뒤 10월 경에 브루난버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전투의 결과는 잉글랜드의 피로스의 승리로, 이 전투에서 카우산틴 2세는 아들 첼라흐를 잃었고, 애설스탠은 두 조카와 사촌들을 잃었다. 양군 모두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잉글랜드도 워낙 큰 피해를 입어 또 애설스탠에게 가서 조아리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평생 동안 카우산틴 2세의 이를 바득바득 갈리게 한 애설스탠은 결국 939년, 세상을 떠난다.

이후 943년 내정, 종교 양쪽의 개혁으로 강한 권위를 얻었지만 패배가 반복되고 본인도 늙으면서, 카우산틴 2세는 더 이상 예전같은 권위를 누리기 힘들다고 판단해 퇴위하기로 했다. 그의 아들인 일둘브가 아직 어렸기에 조카 말 콜룸에게 양위하고 파이프에 있는 성 앤드류 컬디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래 후술한 대로 죽기 전까지 조카인 말 콜룸 1세의 정책에 대해 간섭하는 등 권력을 내려 놓지 않았다.

말 콜룸의 통치는 스코틀랜드 남쪽에 있는 포스 강까지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말 콜룸 1세의 포스 강 지배는 945년에 945년에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먼드 1세는 노섬브리아 정벌에 나섰는데 애셀스탠 사후 노섬브리아가 다시 독립했기 때문으로 943년에 올라프 구드프리트손이 죽은 후 스코틀랜드로 망명했었던 그의 사촌 올라프 시그트리드손이 노섬브리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이 945년의 정벌에서 올라프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디프날 압 오웨인과 동맹을 맺고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에드먼드 1세는 북진해서 어스트라드클라이드까지 털어버리고 디프날의 두 아들을 잡아다 눈을 뽑았다. 그러면서 잉글랜드 왕 에드먼드 1세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에 대한 스코틀랜드 왕국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잉글랜드는 컴브리아까지만 점령하며, 서로 간의 군사 지원을 약속하는 조약을 통해 확정되었다.

948년에 노르웨이에서 에릭 블러드엑스가 노섬브리아를 침략해 데인로를 재건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노려 말 콜룸 1세는 950년에 카우산틴 2세의 주장에 동의해 노섬브리아로 출병해 알비도소룸의 약탈, 또는 나인디쉬의 약탈로 불리는 대규모 약탈을 벌여 많은 사람과 소를 노획했다. 이후 시기 미상이지만 하이랜드의 중심지인 모레이의 모마어 첼라흐를 공격해서 잡아 죽였다. 말 콜룸은 954년 전쟁터에서 죽었고, 그 뒤를 일돌브가 계승했다.

일둘브의 치세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며 연대기마다 제각기 다르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일둘브가 대규모 남정을 통해 현재의 에든버러를 확보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정벌은 일둘브 대에만 있었던 대규모 원정이 아닌 이전 왕들이 꾸준히 전개했던 남진 정책 중 일부로 보고 있으며, 에든버러 역시 이르면 카우산틴 2세 치세, 늦으면 일둘브의 치세에 이미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962년에 일둘브가 사망했는데 역시 연대기마다 차이가 있어 '버찬의 예언'은 962년에 아버지가 퇴위한 뒤 들어갔던 성 앤드류 컬디 수도원에서 평온하게 죽었다고 기록한 반면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선 지도자가 알려지지 않은 바이킹 약탈대와 하이랜드의 모레이 근교 컬렌에서 맞붙은바우드 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나오며 실재로 그의 사후 말 콜룸 1세의 아들인 두브 막 밀 콜룸과 일둘브의 아들인 킬렌 막 일둘브 간의 왕위를 두고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자는 두브였으나 그의 치세는 일둘브의 아들인 킬렌의 반란과 싸우며 장작 5년 동안을 왕위를 지키는데 허비해야 했다. 결국 967년 폐위당해 하이랜드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던 포레스에서 살해되었다. 킬렌의 치세는 두브의 치세 또한 짧았으며 그 끝 또한 연대기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971년 그가 살해된 것에 대해 고통점을 갖고 있다.

그 뒤를 이은 자는 말 콜룸 1세의 아들이자 두브의 동생인 키나드 2세로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해주며 충성심을 견고하게 했으며, 이를 위해서 잉글랜드를 지속적 침략하기까지 했다. 또한 스트래스클라이드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잉글랜드를 침입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케네스 2세의 야망은 컸다.

973년 체스터에서 열린 영국 왕들의 정상회의에서 그는 당시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거를 상대로 외교력을 발휘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영토 경계선에 대한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대신,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컴벌랜드까지 스코틀랜드 영향력 아래 놓이게 한 것이다. 키나드 2세의 성공적인 대외 업적은 그의 권위와 함께 왕권 안정화를 가져왔다.

키나드 2세는 자신의 왕권을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잠재적인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특히 친형 두브의 아들인 시내드 막 두프의 왕위 계승권을 없애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했지만, 이는 도리어 시내드를 지지하는 세력의 결속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시네드의 세력들은 키나드 2세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이 둘은 지속적으로 왕권을 놓고 경쟁을 하였다.

키나드 2세는 자신의 아들인 말 콜룸에게 에게 왕권을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 왕권 승계에 관한 법을 개정하고자 했다. 법 개정 내용은 죽은 왕의 가장 가까운 혈족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자신의 왕권을 노리고 있는 시네드와 카우산틴의 왕권 승계를 배제하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 법을 마련하기 전에 키나드 2세는 995년 이둘의 음모에 살해된다.

키나드 2세를 암살한 후 카우산틴이 카우산틴 3세로 즉위했지만 시내드와 말 콜룸은 여전히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결국 997년 스코틀랜드 동해안 쪽 아몬드 강 인근 성곽에서 시네드에 의해 살해되었고, 시네드는 키나드 3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아직 컴브리아 주에 말 콜룸이 남아 있는 등 여전히 불안정한 정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3.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경우 스코틀랜의 북부와 함께 로마 제국에 점령되지 않은 곳인데다가 이미 고대로부터 여러 군소 왕국들이 세워진 상태였다.이들 왕국은 5~9개 정도로 대에 따라 멸망하기도 하고, 분열되기도 했는데 이 왕국들을 쿠어거(Cuaighe)라고 한다. 아일랜드의 다섯 지방으로 알려진 울라(얼스터), 무운(먼스터), 라긴(렌스터), 코나흐타(코노트), 미데(미스)들이 이런 쿠어거들이었다. 아일랜드 신화에 따르면 대다수의 쿠어거들은 기원서 4~5세기 경에 건국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로마 제국이 현재의 잉글랜드 지역을 정복할 당시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각 쿠어거들은 투어허(Tuatha)[15]라는 수많은 소왕국들로 나뉘었다.

쿠어거의 왕을 리(Rí)라고 했다. 또한 아일랜드 섬 전체에 대한 군주로서 쿠어거의 '리'들 위에 아르드리(Ard Rí, High king)가 있었다. 아일랜드 신화에서는 아르드리가 기원전 1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되고 적게 잡으면 846년, 최대한 높여도 459년에야 아르드리가 출현했다.

아르드리의 왕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쿠어거의 '리'들 중 힘센 자가 아르드리를 겸했다. 그래서 쿠어거들은 국력이 좀 강해졌다 싶으면 군사를 일으켜 아르드리에게 도전했다. 아르드리의 권한은 강하지 않았고, 지극히 형식적인 왕위였다. 미데의 플란 너 시나너, 무운의 브리안 보루마 등의 아르드리가 통일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아일랜드는 중세 내내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서로마 제국 붕괴 당시의 아일랜드의 쿠어거들의 행보는 다음과 같다. 북쪽의 올라는 5세기 당시 일부 부족민들이 현재의 스코틀랜드 서부로 이주해 달 리아타를 건국했고, 이후 6세기 중반부터 픽트족으로 부터 달 리아타를 위협받게 되었다. 이후 7세기경인 626년에 달 나라이디의 소왕인 콩갈 카에흐가 올라의 리를 자처했고, 628년에 쿠어거로 독립하여 아르드리를 자처하고 있던 이 넬의 수이브네 멘을 죽이고 아르드리 자리를 찬탈했다. 하지만 637년 북 이 넬의 돔날 막 아에도에게 패배하고 죽게 된다. 이후 8세기 동안 북 이넬에게 밀려 영토가 동쪽으로 축소되었고, 732년 또는 735년에 북 이 넬에게 패하면서 종속되었다.

북 이 넬의 경우 상술한대로 본래 올라에 속한 투어허였다가 425년에 올라 북서부를 공격하면서 별도의 쿠어거로 독립한다. 이후 대체로 강력한 쿠어거들의 눈치를 보며 세력을 확장해 6세기 초 미데를 공격해 킬데어를 빼았으며, 이 넬의 왕들 중 상당수가 아르드리를 자처할 정도로 성장했다. 비록 상술한대로 628년 올라의 리인 콩갈 카에르의 공격으로 당시 아르드리였던 수이브네 멘이 죽었지만 637년 둠날 막 아에도가 복수를 함과 동시에 아르드리 자리를 탈환했고, 이후 8세기까지 올라의 서쪽 영토들을 잠식했다.

미데의 경우 4~5세기경, 코나흐타와 라긴으로 부터 상당한 영토를 빼앗으나 6세기 초 이 넬의 공격을 받고 킬데어의 근거지를 상실, 위클로우 산맥까지 밀려나서 오늘날의 아클로 지역을 새 도읍으로 삼았다.이때 이 넬의 왕가 일부가 킬데어에서 따로 투어허를 성립해 남 이 넬로 분가하게 된다. 참고로 성 패트릭 이전 421년 로마 총대주교가 파견한 팔라디우스라는 인물이 미데와 라긴을 중점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이후 8세기 중엽인 743년부터 왕들의 계보가 기록되었는데, 이때 이 넬 왕가 출신으로 촐마인 씨족의 돔날 미디 막 무르차도가 미데의 왕이 되어 그의 씨족이 12세기 중엽까지 미데를 통치했다.

라긴은 4세경 말인 383년 로마 황제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명령으로 브리튼 섬에서 로마 군단이 철수하자 바다 건너 웨일스에 식민지를 건설하지만 이후 이 넬의 공격받고 일부 영토를 상실하고 이넬과 오랫 동안 적대적 관계가 된다. 상술한대로 성 패트릭 이전인 421년 로마 총대주교가 파견한팔라디우스라는 인물의 선교지 지역 중 하나였다.. 8세기 무렵에는 라긴 왕가가 북쪽을 근거지로 하는 이 둔라이(Uí Dúnlainge)와 남쪽을 근거지로 하는 이 켄슬라로 분화된다.

코나흐타는 아일랜드의 쿠어거들 중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곳으로 438년 사망한 두아흐는 칸노트 최초의 기독교인 왕이다. 8세기경 북이넬과의 접경지역이였던 브레프네가 쿠어거로 독립하였거 브레프네를 다시 병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전쟁을 했다. 칸노트의 통치 왕가는 973년 사망한 왕 콘코바르의 이름을 따 오 브리언에서 오 콘코바르로 이름을 바꾸었다.

무운은 쿠어거들 중 2개의 강력한 투어허들의 연합체와 같은 곳으로 오가나흐타와 달 가쉬가 자신들보다 더 작은 투어허들을 통제했다. 오가나흐타는 5세기 경에 건국되었으며, 투어허 중 431년 성 패트릭에 의해 개종되었다. 무운의 패권을 장악하는 6세기부터 10세기 후반인 977년까지 아르드리를 배출하지는 못했으나 비교적 오래 안정적으로 무운을 지배했다.

아일랜드 전역을 통틀어 기독교를 독실하게 신봉했던 왕국이며 몇몇 왕들은 실제로 성직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820년 왕위에 올라 847년까지 먼스터 지역을 통치했던 펠리미 막 크림산은 성직자로서도 큰 명성과 권위를 떨쳤으며 사람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아일랜드인’으로 칭했다.

5백 년 이상 먼스터 지역의 주도권을 가졌던 어거나흐타 왕국의 통치 방식은 다른 아일랜드 왕국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들은 무력에 기반을 둔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에 주로 의존했던 것이다. 어거나흐타의 왕들은 대체로 전쟁보다 평화를 선호했으며 그들이 정복한 다른 왕국의 왕족이나 백성들을 매우 공평하게 대우해 주었다.

브레프네의 경우 상술한대로 700년대 코나흐타에서 독립한 쿠어거로 다시 투어허로 복속시키려는 코나흐타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해야 했고, 영토와 인구수 등에 밀린 브레프네가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8세기경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오로크 일족이 브레프니의 왕권을 장악하고 있던 오렐리 일족에게 반기를 들고 권력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양측의 힘이 팽팽히 맞서 장기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오스라거는 1세기에 옹구스 오스리허가 건국했으며 라긴의 투어허었다. 5세기 무운의 코르쿠 리그더가 달 비른 왕조를 폐하고 오스라거를 합병했다. 7세기에 달 비른 왕조가 다시 힘을 되찾았지만 859년까지 명목상 무운의 일부였다가 커르발 막 둔렁거 왕 때 독립을 되찾았다. 이후 오스라거 왕들은 향후 3세기 동안 아일랜드 섬의 정치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섬 전체를 다스리는 아르드리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아르길라의 경우 331년 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되며 본래 올라에 속한 투어허였으나 카르브러 리페하르의 손자들인 콜라 3형제가 울라 왕국으로부터 오늘날의 얼스터 중부를 빼앗아 건국했다고 한다.원래 동쪽의 이웃나라 울라의 영향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6세기부터 북쪽의 북 이 넬 왕조와 남쪽의 남 이 넬 왕조에게 동시에 영토를 잠식당하면서 쪼그라들었다. 735년 아르길라는 북 이 넬 왕조의 케넬 노간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827년 북 이 넬 왕조의 제후로 신종했다.

바이킹들에게 묻히긴 했어도 이기간의 아일랜드 또한 해적질을 했었다. 주된 활동지는 브리튼 섬의 서쪽 해안으로 위의 상술한 웨이스와 스코틀랜드의 개척된 정착지 또한 이러한 해적질로 인해 만들어진 전진 기지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며 그 밖에도 살리아 북부 해안 등도 아일랜드 해적들의 활동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라진 남부의 아타코티 족들의 경우 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선교 활동을 하게된 계기가 바로 이들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붙잡혀 오랫 동안 노예 생활을 한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8세기 후 아일랜드 또한 바이킹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795년 아일랜드에 최초로 바이킹이 이오나 섬, 라흘란 섬, 미라가크 섬에 도래했고, 대략 200년에 걸친 기간 동안 그들의 침공을 받았는데 당시 아일랜드 섬에 있던 여러 왕국들은 바이킹에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이었고, 이후 여러 지역에 걸쳐서 그들이 점령한 거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852년 현대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도 그들이 이 땅의 원주민인 켈트족들을 쫓아내고 건설한 거점으로 이바르와 울라프 형제가 요새를 축조한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나마 각각의 군소 왕국들이 힘을 합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모든 역량을 동원하면서 잉글랜드처럼 바이킹들에게 짖밣히는 꼴은 면했디. 이후 902년 브레가의 말 피니아 막 폴라나카인과 라긴의 체르발 막 무이레카인이 연합해 더블린을 공격했고, 980년 더블린의 왕을 자처하던 바이킹 군벌인 올라프 시그트뤼그손이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였던 말 세크날 막 돔날에게 패배해 시키는 등 선전했고, 이후 2세기 넘게 노르만 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정착지에서 살면서 점차 원주민들인 아일랜드계 켈트족들과 섞여지게 되었고, 점차 아일랜드화되어 갔다.

이들 바이킹들이 세운 아일랜드의 정착지들은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노예 거래 등이 행해졌으며 최초로 화폐를 주조해 은본위제를 도입시켰다. 다만 아일랜드의 정착지를 기반으로 한 아일랜드의 바이킹들이 잉글랜드에 정착지를 둔 바이킹들과 협공을 해 당시 알바 왕국으로 불린 스코틀랜드와 웨식스를 공격하기까지 하는 등 아직 그기세가 꺽이지는 않았다.



[1] 고대 영어로 Æthelberht. 애설버트. 재위 589년~616년[2] 아마 간질 발작[3] 이후 캐드왈라는 서식스를 공격해 두 공동왕을 죽이고 서식스를 정복한다.[4] 고대 로마 제국의 요새 안데리툼(Anderitum)으로 추정되는 장소[5] 반면 2004년 미국 영화 킹 아더에서는 바돈 산 전투에서 아서와 싸워 죽는 왕이 웨식스 왕국의 시조 체르디치, 킨리치 부자로 나온다.[6] 정확히는 옥스퍼드셔-글로스터셔까지[7] 이후 캐드왈라는 자신의 동생 물(Mul)을 대신 앉혔다.[8] 그러나 자국은 계속 통치하고 있었다.[9] 혹은 『브리튼인의 역사』에 의하면 받고 분배되었다.[10] 지방장관으로 번역된다. 보통의 봉건 영주와 비슷한 직위지만, 가문에 상속되는 타국의 봉건제와 달리 샤이어무트에서 선거제로 선출 후 왕에 의해 형식적인 승인을 받거나(머시아의 경우) 왕에 의해 테인들 중에 임명되는(웨섹스의 경우) 직위라는 차이점이 있다.[11] 달 리어타는 부계로, 픽트랜드는 모계로.[12] 알핀 가문은 게일계고 돔날 2세도 아일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추측이 있는 만큼 왕가 사람 혹은 최측근 귀족 세력으로 추측할 수 있다.[13] 데인인 또는 데인-게일 혼혈인 왕들로 아일랜드 식으로 이름이 기록되었다.[14] 스코틀랜드 고유의 귀족 작위로 보통 백작위로 번역되나 아일랜드의 소 왕과 같은 급이라 볼 수 있다. 중앙 집권이 약했던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모마어들은 넓은 자치권을 누렸다. 참고로 모마어라는 귀족 작위는 바로 이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한다.[15] 원래 민족, 족속이라는 뜻이었다가 이 시기에 소왕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시골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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