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50:30

국민의 정부/평가/부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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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에 대한 평가
2.1. 14대 대선 후보연설 중 유권자 비판2.2. 야권 분열
2.2.1. 단일화 합의의 무산
2.3. 부정부패
2.3.1. 14대 대선 불법정치자금 수수2.3.2. 불법 대북송금 사건2.3.3. 진승현 게이트2.3.4. 정현준 게이트2.3.5. 이용호 게이트2.3.6. 최규선 게이트2.3.7. 홍삼(弘三) 게이트
2.3.7.1. 김홍업 검찰수사 외압논란
2.4. 의원내각제 불이행2.5. 역대 최대 규모의 특별사면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4.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4.1. 제1연평해전제2연평해전 관련
4.1.1. 제1, 2연평해전 전사자 및 부상자 대우 논란
5. 외교에 대한 평가
5.1. 한일어업협정 재협상 과정에서의 논란
6. 경제에 대한 평가
6.1. 외환위기 극복과정의 극약처방들6.2. 신자유주의 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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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다룬 문서이다.

2. 정치에 대한 평가

2.1. 14대 대선 후보연설 중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에서 여당 민주자유당김영삼 후보에 맞선 민주당김대중 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여당 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은 13대 국회에서 수세·농지세 감면, 농어가 부채의 상환연기, 농·수·축협 조합장 직선제 도입 등 농민을 위해 일한 유일한 정당"이라면서 "364일 야당하다가 선거날에만 여당하는 농촌 유권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30여년간의 군정 기간 중 가장 많은 차별과 천대를 받은 계층이 바로 여러분 농민들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뭐가 좋다고 선거 때만 되면 여당을 찍고 선거가 끝나면 후회를 하곤 합니까"라고 주장했다. 이미 1992년 14대 대선 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후보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강조

2.2. 야권 분열

1987년, 제5공화국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해 민심이 이반하는 가운데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온 국민의 관심사는 민주화 투쟁의 중심이었던 김영삼, 김대중 두 사람의 단일화 여부였다.

투옥-사형 선고 등 군부의 탄압으로 생명의 위협을 수차례 넘긴 DJ에게 동정적인 여론이 있었지만, 이에 못지 않게 국내에서 질산 테러, 조폭 손도끼 테러, 국회 제명, 가택연금 조치 등의 탄압을 당하며 민주화 운동을 하고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규명을 강경하게 촉구하는 용기와 배짱을 갖춘 YS에게도 여론이 매우 호의적이었다. 특히 김영삼에게는 71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계파의 김대중 지지로 고배를 마셨지만 승복하고 김대중의 대통령 선거를 전폭적으로 지지했다는 명분과 함께 지난 16년 동안 DJ의 발목을 잡아온 색깔론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강점[1]까지 있었기 때문에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물러설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야당 내의 경선에서는 김영삼의 우위가 점쳐지는 상황이었으나 김대중이 "단독 입당 및 경선"의[2]김대중씨는 대선에 출마하라[3]고 발언한 YS 본인 또한 말을 바꾸어, DJ에게 자신이 이끄는 계파의 수장으로서가 아닌, 김대중 개인으로 입당하라고 권한 것이었다. 하지만 DJ도 전두환 정부가 직선제를 수용하면 불출마하겠다고 발언했으면서 6.29 선언 이후 6월 항쟁에 의한 타율적 직선제 수용이라며 불출마에 얽혀야 할 필요가 없다는 발언으로 출마 명분을 만들었다.] 제안을 거부하고 탈당을 하며 신당 창당 및 대선 출마 선언을 해버린 것. 물론, 여권에서 지난 7~8년의 세월 동안 양김의 모든 정치적 활동에 제약을 가하다가, 선거 국면에 해금(解禁)시키는 공작을 펼치기도 했지만 국민의 기대를 저버린 선택임은 분명했고, 그간 모든 대선에서 이겨온 여권은 야당의 대표 주자의 내분이라는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자 총력을 기울이기에 이른다.

DJ가 탈당 및 출마 선언을 한 이후 나온 논리가 바로 4자필승론. TK의 노태우, PK의 김영삼, 충청의 김종필, 그리고 호남의 김대중 자신 중에서, 민주화 열망을 바라는 수도권에서 더욱 지지를 얻고 있는 김대중 자신이 대선에서 충분히 승리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 양 후보 모두 선거 연설을 하면 수십만의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투표율이 89.2%에 이르렀을 만큼 선거 열기도 매우 뜨거웠기 때문에, 군정 종식과 민주정의 출범이 목전에 다가온 듯 보였다. 그러나 지지층이 겹친다는 것을 간과했으며, 4자필승론의 분수령이었던 경기도 인천의 표심이 군사정권의 연장인 노태우를 선택해버리며 표가 분산된 양김이 아닌, 12.12 군사반란의 핵심이자 5공화국의 2인자였던 노태우가 그야말로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

1971년 대선에서 김영삼이 1차 경선에서 승리하였으나, 2차 경선에서 이철승과 연합한 김대중에게 패하자, 깨끗이 승복하고 김대중의 유세를 전적으로 도왔던 것과는 완전 반대되고 비교되는 행동이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DJ는 민주화 지지자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대통령 병에 걸렸다는 조롱까지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 일은, 3년 후 김영삼이 꽃놀이패 상황을 타파하고자 3당 합당을 단행함으로써 두 사람의 간격은 더 멀리 벌어지며 지역감정이 고착되는 계기가 되게 된다. 또한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구절이 사람들에게 각인되었으며, 30년이 지나도록 "그때 대통합이 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결과론이 나오는 등 당사자들에게도, 지지자들에게도 두고두고 천추의 한이 되었다.[4][5]

아래의 내용은 당시 노태우 후보 진영에서 양 김(金)의 관계를 분석한 내용으로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외형적으로는 김영삼 총재가 민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고 김대중 상임고문이 이를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미묘하고 복잡했다. 김대중 고문의 입장에서는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사면-복권된 상태였으므로, (출마하여 당선되면) 자신이 (군사정부 시절) 잃었던 모든 것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가 온 셈이었다. 따라서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모든 영광을 김영삼 총재에게 돌릴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나 역시 김대중 고문이 출마를 포기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중략)...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도 많은 지식인, 특히 군부(軍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은 두 사람의 후보 단일화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었다.
- 노태우 회고록 上권, 374 ~ 375쪽

2.2.1. 단일화 합의의 무산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1987년 5월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때만 해도 손을 맞잡고 훈훈한 모습을 보여준 그들이었건만, 점점 그들 사이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실 양김은 라이벌답게 물밑에선 오래전부터 신경전이 치열했다. 일단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박빙의 승부 끝에 패배한 이후로 김대중과 동교동계는 군사정권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때문에 김대중은 유신 이후로 일본 망명, 국내납치, 체포, 사형선고, 미국 망명 식으로 계속 떠돌면서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반면에 김영삼은 유신체제에서도 계속 야당 국회의원과 총재로 활동했고[6] 전두환 정부 시기에도 가택연금과 정치 규제를 당했지만 측근들을 내세워서 상도동계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7] 이로 인해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1985년 신한민주당, 1987년 통일민주당 창당은 모두 김영삼계가 주도하고 살아남은 김대중계 일부 인사가 가담하는 형식이었다. 당연히 통일민주당 내에서 지역 지구당 위원장(그러니까 국회의원 후보)와 당직 인선은 대체로 김영삼계 위주였다. 자연스레 김대중계는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6월 항쟁 이후 다가오는 대선과 총선에 대비해서 미조직 지구당을 창당하고, 지역조직을 정비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제안을 김영삼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서 회피하면서 불만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8]

6월 항쟁 직후 양김의 후보 단일화 문제가 불거지자, 어차피 둘 다 양보하지 않을테니 경선을 하라는 제안도 나왔다. 하지만 이미 주요 지구당과 당직을 김영삼계가 장악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내 경선은 결과가 뻔할 것이라는 주장과 또 경선을 하게 되면 분명 당시 정권의 정치공작으로 당이 엉망이 될 것이라는 지적에 경선 제안은 묻히게 된다.[9]

이제 남은 것은 양김 서로의 자발적인 합의인데, 이게 쉽지가 않았다. 물밑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위에서 언급된 당내 조직책(국회의원 후보) 선정 문제까지 얽히면서 점점 양 세력 사이에 감정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덩달아서 민주화 운동 세력, 재야 세력도 분열하기 시작했다. 후보 단일화(약칭 후단), 비판적 지지(약칭 비지) 그리고 독자후보 추대(약칭 독후)로 나뉘었는데 후보 단일화는 군부와 보수 세력에서 거부감이 적은 김영삼으로 단일화하자는 사람들이었고, 비판적 지지는 김대중의 선명성, 진보성에 주목해서 우리와 비교적 생각이 가까운 김대중을 지지하자는 주장이었다.[10] 특히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쪽에서는 소수의 독자후보파를 제외하면 다수가 비판적 지지, 즉 김대중 쪽이였다.[11] 독자 후보를 추대하자는 측에서는 더 이상 보수 야당에 끌려다니지 말고 진보 후보를 세워서 스스로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백기완 후보 추대로 결집했다.[12]

기다리다 지친 재야에서는 비교적 중립적인 인사들이 중심이 돼서 ‘후보단일화추진위원회’까지 만들어 두 사람의 합의를 촉구했고, 동교동과 상도동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끝에 마침내 단일화 일보 직전까지 다가갔다. 그러나 그 합의는 성사 직전에서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추진위원회 대표의 한 사람이던 장을병[13] 전 민주당 대표의 술회는 이렇다.
“재야도 두 사람을 놓고 선호가 갈렸고, 김대중씨 쪽이 더 목숨 걸고 민주화 투쟁을 했다는 평가를 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문제는 당선가능성이었으며, 그런 점에서 독재정권이 덧씌운 멍에이지만 김대중씨는 사상적으로 의심스럽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일반 국민 중에도 적지 않다는 점이 지적됐다. 그래서 이번만은 김대중씨가 양보를 하라는 쪽으로 계속 설득했고, 마침내 김대중씨도 받아들였다. 그래서 김영삼씨가 대선 후보를, 김대중씨가 당권을 맡는다는 합의[14]가 이뤄져 기자회견만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영삼씨가 딴소리를 하고 나왔다. 1971년 선거 때 대선 후보는 김대중, 당권은 유진산이라는 식으로 분리하다 보니 당과 선대위 사이에 손발이 맞지 않더라. 그러니까 대통령 후보도 당권[15]도 자신이 전부 가져가겠다는 것이었다.[16] 김대중씨가 승복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더러 벌거벗고 무조건 항복하라는 거냐?’ 그렇게 단일화는 성사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무산되고 말았다.” 관련기사 링크

사실 김대중이 오랜 미국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김영삼은 국내에서 민주화 운동을 사실상 이끌었기 때문에, 야권에서는 김대중에게 양보를 권유하는 세력도 상당했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양보를 권유했다. 김 추기경은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김대중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가 될 경우 군부가 용인하지 않으면서 또 다른 정변이 일어날 우려를 했다는 내용의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17][18] 그러나 김대중은 이를 긍젓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야권 원로들이 김영삼에게 양보를 강제하는 것을 '감정적으로 불쾌하게 여겼다.'고 한다.

결국엔 김영삼 김대중 서로 각자 대선에 출마하여 서로간에 후보에서 사퇴하라는 비방까지 오갔고 결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36%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3. 부정부패

임기 중에 온갖 권력형 비리와 측근 비리, 게이트가 난무하였다. 이용호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 홍삼 게이트, 대북 불법송금 사건, 측근 계파인 동교동계의 부정부패 등이 잇따라 터져 '게이트 공화국'이란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재야에서 오랫동안 민중운동을 전개한 원로 백기완이 "87년 대선 만큼이나 실망적인 그의 행보는 DJ와 그 측근들은 점점 부패의 상징이자 한국 정치의 암흑적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과거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10년을 거치는 동안 기존의 군사정권과 동일하게 계속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것에 대해 일침을 가한 바 있다.[19][20]

2.3.1. 14대 대선 불법정치자금 수수

1992년 11월 초 노태우 대통령은 “여당은 선거자금을 그런대로 꾸려 가고 있는 것 같고, 정주영 후보는 재벌이니까 관심 가지지 않아도 되는데, DJ는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며 김중권 정무수석에게 ‘선물’을 전하라"고 지시했다.

경호실로부터 와이셔츠곽을 받은 김 수석은 DJ에게 이를 전달했고, DJ는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김 수석은 “9·18 결단을[21] 높이 평가해 주신 데 대한 대통령 각하의 감사의 표시"라며 "이 돈을 다시 가져갈 수 없으니, 대통령 각하의 성의를 생각해서 받아달라”고 했다. 결국 DJ는 “고맙다”면서 그 돈을 받았다. 기사

박계동 의원의 6공 비자금 4,000억원 폭로로 정계에 큰 파문이 일었던 1995년 10월, 노태우의 비자금이 폭로되자 김대중에게도 의혹의 눈길이 쏠렸다. 그때 김대중은 국민회의 총재의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야당 저격수로 일컬어진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으로부터 "유력한 야당 총수에게도 노태우 前 대통령의 자금이 흘러들어갔다."는 말이 흘러나오던 중, 결국 1995년 10월 27일 중국에 체류 중인 DJ가 기자들 앞에서 직접 노태우 대통령 측으로부터 20억 원을 받은 것을 시인했다.[22]

당시 대통령이었던 YS 측에서는 "김대중 총재가 노태우의 돈 20억을 받았다고 먼저 발표했으나, 지금까지도 금액이 20억인지 200억인지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DJ가 "김영삼 대통령은 먼저 자신과 관련한 모든 정치자금 의혹을 명백히 밝혀야만 한다"며, "나는 20억 원을 받았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당시 노씨는 물론 각계로부터 엄청난 돈을 지원받았다"고[23] 맞불을 놓으면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점점 유력한 대권후보였던 김대중의 자금 의혹으로 번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여권의 자금 용처에 관하여 "살아있는 사전"을 자처한 JP지원 사격으로 "이참에 여권의 92년 대선자금 내역도 공개하라."는 여론이 대두되어 유야무야 일단락되었다. "저격수" 강삼재 의원이 다시 "20억원 + a" 設을 흘려 "추가 수뢰의혹을 밝히라"고 주장하며 국면 전환을 꾀했지만, 이미 검찰까지 '20억+알파'설을 부인한 상황에서, JP의 노련한 手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다시 신한국당에서 김종필이 노태우 대통령 측으로부터 100억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흘려보기도 했지만, 이미 여권 대선자금 공개론으로 여론을 선점한 JP는 구렁이 담넘기의 진수를 선보이며 사태는 유야무야되었다.

2.3.2. 불법 대북송금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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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진승현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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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 정현준 게이트

2000년 10월 한국디지털라인(KDL) 사장 정현준과 동방금고 부회장 이경자가 수백억원 규모의 금고 자금을 횡령하면서, 당시 여당인 민주당 소속 정치인과 검찰, 금융감독원 등에 불법로비를 벌인 사건이다.

금융감독원이 장래찬 전 비은행검사1국장(금고담당)의 연루 사실을 알고도 은폐했는지의 여부등 5가지가 의혹의 핵심이었다. 당시 금감원은 24일 동방·대신금고에서 불법인출 금액이 514억 원이라고 밝혔다. 2000년 10월 정형준과 이경자가 대신금고에서 각각 37억 6천만원과 11억 원을 불법인출, 이 돈으로 동방금고를 인수한 사실을 금감원이 적발하고도 솜방망이 조치를 내린 점으로 은폐 의혹이 일어났었다.

당연히 예금자 보호 차원에서 영업정지감이었지만 대신금고 대표자와 감사를 면직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어 정형준과 이경자는 제재를 받지 않았다.

당시 검사담당이던 장모 금감원 국장이 연루됐으며 장 국장 윗선도 관련됐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같은 시기 불거진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된 인물인 김재환 MCI코리아 회장이 진승현 외에 정형준에게도 거액의 돈을 받은 것을 확인해 사실상 로비스트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검찰이 집중 수사에 들어갔었다. 실제로 김재환은 정관계 로비와 변호사비 명목 등으로 받은 12억 5,000만원가운데 5억 800만원을 횡령했으며 추가로 거액을 받은 사실도 드러났었다. #

그러나 이 사건은 핵심 연루자인 장모 전 금감원 국장이 자살하고, 핵심 관계자들이 해외로 도피하면서, 용두사미가 됐다. 이때문에 당시 검찰의 수사 의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었다. # 수사 당시에는 청와대 8급 직원인 이모씨가 정현준에게서 3억여원을 뜯어낸 사실을 밝혀내는데 그쳤다가 2001년 김형윤 전 국가정보원 경제단장이 이경자에게서 5,500만원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다.

2.3.5. 이용호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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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2.3.6. 최규선 게이트

최규선5공화국 시절 전경환(전두환 前 대통령의 동생)의 비서로 있으면서 모은 돈으로[24] 도미(渡美) 유학했으며, 전미(全美) 유학생 협회를 조직해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미국으로 건너온 야당 총재 김대중 캠프에도 소정의 지원을 하며 인연을 맺었다. DJ가 유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는 90년대 중반에 다시 캠프 인사들과 접촉해 "대외(對外) 담당 보좌역" 직책을 얻었지만, 이 대외 보좌역 직함으로 광주(光州)에서 미심쩍은 행적을 벌였다는 의심을[25] 받아, 정권 교체 후 마이클 잭슨의 대통령 취임식 참여를 중계하고도 여권에서 정식 직책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5공화국 말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능란한 처세와 기발한 이벤트 연출 능력[26], 그리고 박학다식한 지식을[27] 바탕으로 5공화국 ~ 이명박 후보 캠프 인사까지 폭넓게 인맥을 쌓아, 20년 동안 정권 여부와 무관하게 살아남아 영달을 누린 인물로 가히 처세의 달인이라 부를 만한 사람이다. 단, 전경환, 마이클 잭슨, 김홍걸 등 인연을 맺고 도움을 준 사람들이 어려울 때 돕지않고 떠나버린 냉정한 면모로 세간의 시선은 매우 좋지 않은 사람.

자세한 내용은 다음 출처를 참조 바람.참조1, 참조2

2.3.7. 홍삼(弘三) 게이트

홍삼비리는 이걸(...) 말하는 게 아니라 아들들 이름이 , 김업, 이라 '홍삼 트리오'라고 불렀는데, 저 셋 모두 권력형 비리에 연루되었고 실형에 처해졌다.[28][29]

이 사건으로 김대중은 대통령 임기 중에 세 아들이 비리를 저질러서 검찰 수사를 받는 초유의 사태를 지켜보기에 이른다.

장남 김홍일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안상태 前 나라종금 사장으로부터 인사청탁 대가로 1억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2006년 9월 28일에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및 추징금 1억 5,000만원을 선고받아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차남 김홍업은 2002년 이용호 게이트 관련 의혹을 수사하던 검찰에 권력형 이권개입 연루의혹이 발각되어 수사 도중 여러 논란 끝에 2002년 6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와 조세포탈,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2003년 5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에 벌금 4억원, 추징금 2억 6,0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 구속되었다. DJ의 아들 3형제 중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김홍업이었던 만큼, 처신도 나름 신중을 기울였기 때문에[30], 정권 末에 수사팀이 김홍업의 주변인 수백명을 샅샅히 훑었어도, 의욕적으로 착수한 것에 비하면 태산 명동에 서일필(泰山 鳴動 鼠一匹) 수준의 물증이[31] 나왔다. 게다가 김홍업의 동창생을 무리하게 압박해 원하는 증언을 강요한[32] 정황도 있어, 오히려 논란이 제기될 수도 있는 상황.

삼남 김홍걸은 국민의 정부 출범 후,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현지 생활을 위한 자금 조달 문제, 미국 체류 신분 문제 등으로 논란이 있던 중출처,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최규선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최 씨는 김홍걸의 이름을 등에 업고 체육복표사업자 선정 과정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한 혐의를 받았으며, 결국 2002년 5월 8일 김홍걸 본인도 최규선으로부터 3억원을 수수한 것이 밝혀져,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 받았다.출처

최규선 게이트가 결정타가 되어 DJ는 여권 후보의 부담을 줄여주고자 민주당을 탈당해야 했다.
2.3.7.1. 김홍업 검찰수사 외압논란
김대중은 차남 김홍업, 3남 김홍걸의 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수사가 한창 진행 중이던 2002년 4월 어느 날, 송정호 법무부 장관이 업무보고차 청와대 집무실에서 DJ를 독대한 자리에서 수사중단을 요구했다. 당시 DJ는 "송 장관은 1997년 대통령 선거 직전 열린 고검장 회의에서 유일하게 'DJ 비자금'수사 착수를 반대하지 않았소. 이번 수사도 그렇게 해줄 수 없습니까. 남들이 다 안 된다고 하더라도 좀 도와주시오."라고 했다는 전언이 있다. 하지만 송정호 법무부 장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법무부와 청와대 간의 업무 협조를 전담했던 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비슷한 내용의 전화를 여러차례 걸었고, 대통령비서실장박지원도 이러한 전화를 걸었다는 것이다.

법무부 장관이 "구체적인 사건에 대해 검찰총장을 지휘감독할 수 있다"는 수사지휘권은 2006년 천정배 법무부 장관 시절 강정구 전 사회학과 교수의 방북 당시 소위 '만경대 발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발동된 적이 없었다.

2002년 알선수재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최규선은 영장실질심사를 받던 법정에서 "청와대가 사건을 덮기 위해 경찰청 특수수사과장 최성규를 통해 나에게 해외밀항을 종용했다."고 폭로했고 최규선은 육성 테이프를 언론에 공개하면서 "최성규에게 들었는데 청와대 회의에서 '(최규선이) 검찰에 출두하면 최규선의 말 한마디에 우리 정권이 잘못되고 대통령이 하야해야 하는데 걱정이다., '최규선을 부산에서 밀항시키면 어떻겠느냐'는 등의 말이 나왔다"고 주장했다.

청와대는 궁지에 몰렸고 김홍걸의 검찰조사를 촉구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마침내 검찰 수사가 개시되었지만, 송정호 법무부 장관에 대한 청와대의 압력도 가중되었다. 2002년 6월 초에는 송정호의 경질 가능성이 정치권 내에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송정호는 "6월이 되자 여기저기서 내가 경질될 것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대선을 치르기 위해 내각 개편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는데 '법무부 장관이 선거와 무슨 관련이 있나'하는 생각에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일부 언론에서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조직 장악력이 떨어지는 비경제부처 S장관 등이 경질대상으로 검토되고 있다"며 사실상 송정호의 경질 쪽으로 모는 듯한 개각 관련 기사가 청와대발로 실리기도 했다. 이에 송정호는 "업무장악 능력이 모자란다는 것은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미 아닌가. 그러나 현재 상황과는 맞지 않는다. (김홍업, 김홍걸에 대한) 검찰 수사는 내 뜻과 같은 같은 방향으로 진행됐다. 도대체 뭐가 업무 장악능력부족이냐"라고 주장했다.

결국 7월 11일 DJ는 송정호를 법무부장관에서 경질하고 김정길을 법무부 장관으로 내정했다. 김정길은 이미 1999년 6월부터 2001년 5월까지 법무부 장관을 지냈는데 재발탁된 것이었다.

송정호는 이임사에서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싸워서 죽는 것은 쉬우나 길을 내줄 수는 없다)이라는 임진왜란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의 말을 인용한 뒤,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았다. "검사는 외압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 한다. 누구도 검찰수사에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개입해서는 안 된다."라고 밝혔다. (『김대중 정권의 흥망』, 나남출판, 2005년, pp. 147~153.)

2.4. 의원내각제 불이행

내각제 약속은 내 인격을 걸고 약속하는 것이며 대통령에 당선된 뒤 2~3년 더 대통령 하기 위해 약속을 안 지키는 일은 없을 것(1997.06.14). 정치적 입장이 많이 달랐던 김종필과의 정치적 연합의 조건 중 상징적인 조건이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도서관 건립[33] 이었으며(이는 아래에서 한 번 더 언급할 것이다.), 정치적인 조건이 본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임기의 반이 지난 후에는 정부 구성을 의원 내각제 체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실제로 DJ는 대선 후보 시절 내각제 공부를 통해 "시행한다면 정부와 의회 모두 일정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독일식 내각제가 바람직하다."는 결론까지 내려둔 상태였지만[34], “IMF 외환위기(1997년 11월)는 후보단일화를 합의할 때 생각지 못한 돌발 변수였다”, “지금 경제개혁에 성공하느냐 마느냐에 죽느냐 사느냐가 달려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시행의 현실성 문제를 따져본 후 하지 못하겠다고 JP에게 직접 통보 하였다. JP도 당시에 대해 "이런 상태에서 개헌을 추진하면 국론 분열과 국력 소모, 국가 목표의 분산으로 나라가 다시 위험에 빠질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자민련 지도자만의 길을 걸을 것이냐, 국가운영을 책임진 자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기로에서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결심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2000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에게 패배해, 민주당-자민련의 의석 수가 과반을 점하지 못하게 되었고 개헌 정족수인 3분의 2에 한참 못미치자 DJP 연합은 점차 결별 수순을 밟게 되었다.

참고로 이는 1998년 한나라당의 총리 인준 거부 사태와도 관련 있는데, 당시 한나라당은 나라가 외환위기로 비상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총리를 비롯한 내각구성을 강하게 막았다. 그러면서 김종필 총재의 국회 장악력이 많이 떨어졌던 것.

하지만, 실현의 현실성 여부에 앞서 대통령이 되기 전에 본인의 인격을 걸고 약속한 일이었기 때문에, JP의 지지자들로부터 약속 불이행을 두고 비난받았으며[35], 대통령이 되기 위해 김종필과 김종필의 정치적 기반인 충청도보수층의 표를 얻기 위한 대선용 공약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까지 나온 상태.

김종필은 국민의 정부 당시에는 내각제 성사 여부에 대한 발언을 절제하였는데[36], 2016년 3월 10일, '김종필 증언록’의 출판 기념회에서, 김무성, 김종인, 안철수 등 여야 대표가 모인 자리에서, "제가 마지막 정치생명을 내걸고 내각책임제를 추진했던 이유 또한 나라의 먼 장래를 위한 결단이요 호소였다. 거의 모든 선진국이 채택하고 있는 내각제를 우리나라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나. 제가 비록 이루지는 못했지만 후진 정치인들이 꼭 계승해서 이루어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라고 말하며, 끝까지 내각제를 시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링크 기사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결국 김종필이 죽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남긴 회고록에서 김대중의 내각제 유보(사실상 파기) 제안에 대해 "나는 내각제에 관한 한 약속 이행을 촉구해야 할 당사자이지만 국난을 헤쳐 나가는 문제에선 DJ와 한 배를 탄 국정의 공동책임자였다. 그의 말에 과장과 축소는 없었다. 무엇보다 DJ가 개헌을 발의할 경우 국회에서 3분의 2의 찬성이 나와야 하는데, 절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한나라당이 동조해 줄 리 만무했다. 국민회의 내부에서 김대중의 임기 중단을 의미하는 내각제 개헌을 할 수 없다는 주장이 나온 지는 오래됐다. 국민 여론조사에서도 내각제보다 현행 대통령제를 선호하는 비율이 높은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개헌을 추진하면 국론 분열과 국력 소모, 국가 목표의 분산으로 나라가 다시 위험에 빠질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였다. 나는 ‘사무사(思無邪)’를 떠올렸다. 일에 당하여 간사함을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의 욕심에 끌려가지 않는다는 시경(詩經)의 가르침이다. 자민련 지도자만의 길을 걸을 것이냐, 국가운영을 책임진 자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기로에서 나는 후자를 택하기로 결심했다."'라며 자민련 정당으로서는 큰 피해를 본 건 사실이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99년 그때 상황에 내가 다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내각제 유보를 선택할 것이다. 당보다는 국가, 이상보다는 현실, 부분보다는 전체를 중시하는 게 정치인의 길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라고 갈음하였다.

2.5. 역대 최대 규모의 특별사면

2015년 기준으로, 김대중은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그 어느 대통령보다 특별사면을 많이 해줬다. 심지어 전두환, 박정희, 이승만보다 훨씬 큰 규모로 특별사면을 많이 해줘서 김대중의 특별사면 규모는 역대 최대 수준이다. 기사 참고 특히 야당 시절, 자신을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전두환 전 대통령과 12.12 군사반란과 관련해 수감 중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사면 결정을 내렸다. 이 점에 대해서 당시 시민단체나 민주화 운동 단체에게 엄청난 비판도 받았으며, 역시 큰 피해를 입은[37] 김대중 대통령이 이러한 단체들을 설득하면서까지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했다.[38]

3.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1. 교육 정책

3.1.1. 부실대학 증가

김대중의 전임 대통령인 김영삼은 군사정권 때 철저한 통제 하에 놓여있던 대학 설립 규정을 손봤던 과거가 있었고 대학 설립을 상대적으로 느슨하게 하기 위해서 대학설립준칙주의[39]를 1996년 도입하였고 김대중의 재임 기간에 이러한 대학설립준칙주의는 더욱 완화되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2001년 당시에 대대적 개정이 이루어져서 대학 설립이 훨씬 쉬워졌고 94개의 대학이 추가로 설립되었다. 여기에다가 당시 정원자율화 정책까지 겹쳐서 대학 정원이 대폭 늘어나게 되었고 이로 인해 노무현-이명박 정권 당시 대학진학률이 정말 높았을 때에는 80%가 넘기도 하는 등 맹목적인 대학 진학 현상이 심각했다.[40] 한 마디로 대한민국의 부실대학 증가는 김영삼이 시작했고 김대중이 그 정도를 심화시켰으며 노무현도 재임 기간 당시 이러한 대학 정책을 시정하지 않고 방치하였다. 이후 다행히도 이러한 대학설립준칙주의는 2013년에 폐지가 되었고 이 대학설립준칙주의로 인해 생겨난 수준 미달의 대학들을 정리하는 작업이 실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대학구조개혁평가이다.

3.1.2. 교육 정보화 사업

보통 줄여서 나이스(NEIS; National Education Information System)라고 불리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이 김대중 정부 후반기인 2002년에 구축되었다.[41] 그러나 도입되고 얼마 되지 않아 학생, 학부모 그리고 교사들의 반대가 빗발쳤다는 걸 알 수 있다. 해당 항목에 들어가서 보거나 혹은 관련된 뉴스들을 보면 알겠지만, 느린 속도나 낮은 웹 호환성, 인권침해 우려, 그리고 개인의 신상정보 유출 우려 등의 여러 문제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이 많다.

3.2. 노동계 탄압

노동자 운동권에 대해 국민의 정부는 폭력진압을 하여 비난받았다. 노동계와 재야 운동권으로부터 '노벨평화상 수상자에 걸맞지 않은 처사'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욕을 먹었는데 역사학연구소가 낸 <함께보는 한국근현대사>에 따르면, 정리해고 자유화 및 비정규직 증가 등으로 실업률이 늘고 노동자 임금소득도 줄면서 노동운동 횟수가 나날이 늘어나자 국민의 정부는 노동운동을 탄압했고 이로 인한 구속 노동자가 늘어 전임 정부인 문민정부 때 632명 및 1주당 2.34명이었던 게 2002년 11월 기준으로 총 878명으로 늘어났다. 대표적인 예시가 2000년대 초반 3대 폭력진압 사태인 2000년 6월 롯데호텔 강제진압, 2000년 7월 사회보험노조 강제진압, 2001년 4월 대우자동차 폭력진압인데 이것들은 전부 국민의 정부 시기 일어난 일들이다. 이를 방증하는 자료(오마이뉴스 게시판)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정부는 합법적인 노동운동을 법적으로 보장해 주고 노조는 반드시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세계적으로 이제 과거와 같은 노사간 극한대립, `너는 죽고나만 살자'는 식의 대립의 시대는 끝났다"면서 "노조는 근로조건과 권익문제를 갖고 교섭하거나 투쟁해야지 기업의 운영이나 인사문제에 개입한다면 노조 스스로 본연의 임무를 벗어나고 노동조합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기업은 노동자에게 경영내용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며 "기업의 투명성, 노동자의 생산성, 공정한 분배 등 3가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또 "노사간 협력이 없이는 평화적인 노동문화도 없고 평화적인 노동문화가 없이는 경쟁력도 없으며 외국기업의 한국투자도 없게된다"면서 "기업과 노동자가 계속 대화하면서 `윈(win)-윈(win)'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3.3. 국정원 불법 도청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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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지정차로제 폐지

1999년 4월 30일에 승용차만 편의를 봐준다는 일부 여론과 규제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지정차로제를 폐지했다. 이로써 저속 차량과 대형 차량이 무분별하게 상위차로에서 주행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아우토반의 예시와 교통공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과속보다 지정차로 위반이 사고를 훨씬 더 많이 유발하는 위험한 행위이다. 결국 사고가 많아지자 2000년 6월 1일부터 지정차로제를 다시 시행했지만, 이 때 한번 없어진 지정차로제로 인한 무의미해진 차로 구분은 2022년 현재까지 개선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3.5. 구제역 재발

2000년 3월 한 차례 방역에 성공하였지만 2002년 5월 재발했을 때는 2년 전의 그것과 같은 신속한 대처를 보여주지 못했고 투입예산도 3,006억원 → 1434억원으로 감소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예방백신접종이 이루어지지 않아 살처분 규모는 2216 두약 16만 두로 커졌다. 다른 건 몰라도 예방백신 접종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은, 1. "백신이 부족"하거나, 2. "피해 규모를 낮게 예측"해 차후 보상 시 지출을 줄이고자 하는 의도였거나, 3. "엉뚱"에 한 눈을 팔지 않으면 벌어지기 힘든 일이다. 이 중 첫 번째인 백신이 부족한 경우는 부족한 대로 접종을 실시하고 추가분은 수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유가 될 수 없다. 두 번째는 훗날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 뒷감당이 안 되는 조치이다. 결국 세 번째일 가능성이 제일 큰데, 농림부 관계자들이 월드컵 업무를 보느라 방역에 소홀했을 가능성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당시 여론조사 1위를 달린 명망 높은 대선후보 이회창으로 정권교체가 예상되는 국면에, 관료들이 다른 일에 몰두했거나 혹은 각 부처 간의 협조 수준이 이전보다 떨어졌을 가능성이 더 크다.

자세한 부분은 구제역 항목 참조.

3.6.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관련

가습기 살균제에 사망사건이 본격적으로 공론화 된 것은 2016년 들어서이지만, 제품 허가 및 출시는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부터 이루어졌으며, 시판 후 차기 정부인 국민의 정부 때도 사후관리를 할 기회가 있었다는 측면에서, 특히 직무유기를 한 환경부 관계자들의 책임을 엄중히 물어야 하며, 상급자였던 국민의 정부 관계자들도 도의적인 책임감을 가져야했다는 비판이 있다.[42]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의 최대 가해업체인 옥시는, 살균제 개발 전에 살균성분제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로부터 직접 제품 유해성 경고를 받고도 이를 무시하고 제품 개발을 강행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정당국에 따르면 2000년 중반에 옥시 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있던 최모(구속)씨는 서울 모처에서 생활화학제품 제조업체 E사 대표 노모(55)씨를 만났고 자문을 받았다. 기사 1 기사 2 노 대표는 당시 최씨에게 "CMIT·MIT와 달리 PHMG의 흡입독성은 국내외에서 전혀 검증된 바 없다. 자체적인 독성 실험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고 경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결국 흡입 독성실험은 생략된 채 제품이 제조됐으며, 2000년 10월 PHMG를 원료로 한 가습기 살균제 시판이 이루어지게 된다.

참여정부 말기인 2007년에 가습기 살균제 첫 소비자 피해가 접수되었지만, 옥시 측에서는 제품의 유해성을 인정하고 사과 및 피해보상에 나섰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가와 결탁해 9년 동안 소비자 속이기를 계속하였다.

3.7.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이 사고는 1999년 6월 30일 0시 30분경에 경기도 화성군(현 화성시) 서신면의 '씨랜드'라는 청소년 수련원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사고다. 사고의 원인은, 해당 문서에도 적혀있듯이 신고가 늦었고 가장 가까운 소방서가 70km밖에 있었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그 외에 원인으로는 건설비와 운영비 절감을 위한 가연성 소재를 통한 인테리어 구성, 화성군 공무원들의 뇌물 수수 등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국민의 정부는 이 사고의 원인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사고 이후 정부 대처였다. 이 사고의 원인 중 하나가 앞서 말했듯이 가연성 소재였는데, 국민의 정부는 이 사고가 터지고 나서도 계속 내장재 관련 법안을 개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이 사고가 터지고 불과 4달 후에 발생한 인천 호프집 화재 역시도 내장재가 사고의 원인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계속 법안을 개정해야 함에도 방치하다가, 밑에서 설명할 대구 지하철 참사가 씨랜드 화재사고와 비슷한 원인으로 약 4년 후에 터지고 나서야 건물 및 차량의 내장재가 불연재 또는 난연재로 바뀌게끔 법을 개정하였다.

3.8. 대구 지하철 참사

2003년 2월 18일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城內洞)[43]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 사고. 경위는 당시 56세였던 김대한이라는 뇌졸중[44]을 앓은, 정신지체 장애인의 석유통 방화가 원인이었다. 결국 총 192명이 사망하고 148명이 부상을 입었다.

2002년 12월 대선이 이미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기 직전에 터진 사건이지만, 비상시 레버를 당겨 문을 수동으로 여는 법만 제대로 홍보되었어도 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정부의 수장인 김대중 대통령에게 도의적인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이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법안을 개정했는데 이 사고가 아니라 예전에 있었던 씨랜드 화재사고가 터지고 나서 국민의 정부가 빨리 법안을 개정했어야 했다.[45]

4. 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4.1. 제1연평해전제2연평해전 관련

특히 제2연평해전이 일어나기 전에 이틀 전, “사격 명령이 있으면 즉시 (남한 고속정을) 사격하라”는 북한군의 교신을 도청하여 보고했지만 정작 국방부는 "1차 해전때처럼" "밀어내기"[46] 방침을 고수하고, 적들이 다른 대응을 할 가능성에는 대비를 소홀히 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게다가 당시 김대중은 북한의 무력 도발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여 군인 6명이 전사하였음에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4시간 35분만에 열었다.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우발적 충돌로 결론지었고[47], 비슷한 내용을 전하며 "유감" 표명을[48] 담은 북한 통지문이 오자 그대로 수용했다. 김대중은 교전 다음날 예정된 금강산 관광선을 출항시켰다.# 제2연평해전 발발 다음날인 30일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 사이타마로 출국하여 결승전 경기에 참석했다. 김대중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서해교전 사태에 대해 냉정히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며 한반도의 긴장이 고조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데 인식을 함께 했으며, "대북 포용정책 기조를 계속 유지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우리 軍의 활약 덕분에 이런 모습은 오히려 승자의 관용이자, 북한측이 우리를 믿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당위성 관련 주장이 설득을 얻었지만,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서운함을 표했다.#

또한 싸움의 시발점에 대해서도 수뇌부간 견해차가 극명하게 갈렸는데, 제2연평해전 5일 후인 7월 4일에 열린 한미 정보부처 연평해전 평가회의에서 국방부는 ‘북의 도발은 우발적인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리언 라포트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사령관과 남재준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은 김동신 국방부장관에게, ‘그 도발은 계획적인 것’이라며 항의하며 의도적인 도발 견해를 밀어붙였다. 군 수뇌부들이 시뮬레이션 게임 하듯 상황지휘를 했던 1차 교전 때와는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는 하지만, 싸움의 발단 해석이 극명하게 달랐던 것은, 순수한 견해차가 아닌, 2002년 대선 등 이런저런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려있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다. 특히 남재준 장군은 훗날 국정원장으로 영전했기 때문에 언론에서 교전 전후의 행적을 상세히 밝혀낸 관계로 구글 등지에서 비교적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게다가 장병들이 죽는 상황이었으므로 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국가의 외교적 결례를 무릅쓰고서라도 월드컵 폐막식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지말고, 전상장병들을 찾아가 위로해주었어야 한다는 비판이 있다. 기사

또한 당시 국군수도병원 소속 육군 군의관이었던 이봉기 교수이름을 빌어, "애국가를 부정하는 건 나라를 지키는 이들에 대한 모독이다. 종북 인사들은 나라를 지키는 사람에 대한 모독을 자주 하더라."면서 당시 군의관들이 불만을 토로했다고 주장했다라고 알려졌지만, 당시 이봉기 군의관은 부상이 심한 박동혁 상병을 치료하는데 전념하였지, 이런 정치적인 부분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나중에 부상당한 군인(오중사)도 본인처럼 이제 1살바기인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봉기 군의관의 진짜 심경은 아래의 글에 나와있다.#

일부 유가족과 부상병의 가족들은 "아들은 지금 부상을 입어 병원에 누워있는데, 병실 tv에는 대통령이 일본가서 박수치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며 대통령이라면 빨리 병실에 와야하는 것 아니냐는 서운함을 나타내기도 했다.[49]# 사실 김대중 대통령은 7월 2일 방일 일정을 마친 후 직접 국군병원으로 가서 위문, 쾌유를 기원하였지만, 정권교체가 예상되는 당시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걸 피할 수는 없었다.# 또한 박 수병이 숨지자 세상을 뜬 것에 대해서 조의을 표하고 유가족들을 위로했으며, 박 수병을 병장으로 진급시켰고 박 수병을 윤영하 소령과 동급인 충무무공훈장에 추서하였다.

후에 잭 프리처드 전 한반도평화회담 미국 특사는 저서 ‘실패한 외교 (김연철-서보혁 옮김, 사계절 펴냄)'에서 해군 장병 6명이 희생됐는데도 김대중 정부는 이를 무시하고 여전히 햇볕정책에 치중했다고 비판했다. 당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서해교전 여파로7월 10일로 잡혀 있던 대북협상단의 평양 방문을 미루려 했으나 ,오히려 한국 정부가 예정대로 추진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 때문에 미국 정부가 오히려 ‘한국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북한을 상대하도록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며 우리 정부에 주의(注意)를 줬다고 프리처드는 밝혔다. 그리고 미 정부는 협상단의 방북을 연기했는데, 그때의 한미관계가 이처럼 ‘기괴했다’고 프리처드는 덧붙였다.

북한의 사과에 대한 의견도 엇갈리는데, 그나마 사과 비스무레한 거라도 하나 한 것만 봐도 큰 성과 아니냐고 주장하는 측[50]과, 사과라는 표현 자체도 없거니와 소위 "아랫것들의" ‘우발적 충돌’이라면 그에 대한 처벌 의지도 담겨있지 않고 자신들이 먼저 도발했다는 언급도 없는 유감통지가 어딜 봐서 사과냐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하지만, 그 후 2015년 8월 북한의 도발에 우리가 155mm 포격으로 대응하기 전까지, 우리 정부가 유감을 넘는 외교적 표현을 들은 사례가 없다. 현재까지는 유감 표명이 우리가 들은 가장 수위높은 사과표현인 셈. 先역습 後대화의 효과 재확인...

1999년 6월 15일 제1연평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2함대사령관 박정선 제독은 당초 영전이 예상되었으나, 해군본부 군수참모부장으로 발령되었으며 이후 정보작전 참모부장, 해군 군수사령관을 지내고 2004년에 전역하였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박정선 제독이 데일리안과의 인터뷰에 의해서 밝힌 바로는 북한에서 남한의 전투 책임자를 좌천시키라고 해서 좌천되었다고 주장했다.[51]

그러나 박정성 제독의 전역은 2004년인데 김대중의 임기는 2003년 2월로 끝이었다. 정말로 북한이 좌천을 요구한걸 들어준 것이라면, 무슨 이유로 5년 가까이 질질 끌다가(...) 임기가 끝난 이후에 들어주었는지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리고 2004년의 경우 중장 진급대상자는 6명이지만 중장 자리는 3자리이므로 어차피 3명은 진급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으며 진급 실패에 노무현이 관여했다고 보기도 어렵다.[52] '좌천'은 더 낮은 관직이나 지위로 떨어졌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지만, 이 분은 지금 해군본부 군수참모좌천되었다고 주장하는 거다. 이 참모들 중에서 가장 선임참모가 바로 참모총장이고, 차선임참모가 참모차장이다.

당시 2전투전단장이었던 송영무 제독은 연평해전의 승리에 대한 공로로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이후 1함대사령관, 조함단장, 해군본부 기획관리참모부장등을 거쳐서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6년에는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의 자리를 맡기까지 했다.[53] 이는 단순히 북한의 요구로 좌천되었다는 박정성 제독의 주장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4.1.1. 제1, 2연평해전 전사자 및 부상자 대우 논란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군인들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이 거론된다.

특히 문제가 된 부분은, 당시 전몰 장병에게 보상할 수 있는 법정금액 최대 한도가 3,000만원이였다. 사실 이 법이 제정된 1972년에 3,000만원은 서울에 집 한 채를 구입하고도 남는 액수였지만, 2002년에는 쏘나타 같은 중형차를 살 수 있는 수준에 불과하여 화폐가치가 달라졌던 것. 이중배상금지라는 조항과 근거가 저 시기에 들어갔는데, 1972년이 언젠지 생각해보자. 그렇다. 유신헌법으로 추가된 조항이다. 게다가 그 이중배상금지 조항을 위헌 판결을 내린 대법관을 자르면서까지 전몰장병에 대한 대우가 개판이였다. 이 문제가 30년이 지나서야 터져버린 것.[54]

하지만, 헌법에 명시된 조항을 바꾸는 일은 발의부터 통과까지 1년 내외의 시일이 소요되는 현실이었던 고로, 국민의 정부 관계자들은 3,000만원 이상의 보상금을 증여하는 우회적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일단 규정에 따라 공무상 사망자로 처리해 3천만원을 지급하되, 성금이라는 우회경로로 4억 이상의 보상금을 전달함으로써, 3,000만원 + 4억원이 보상금으로 지급된것. 그 외 순직자에 대한 예우는 하단의 기사와 같다.
#.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여야를 막론하고 군인연금법(특히 전몰장병들) 개정의 필요성을 절감, 2002년 연금법 개정안이 발의됐으며, 참여정부 시기인 2004년 1월 마침내 개정안이 최종 통과되었다.

2년 만에 통과된 군인연금법 시행령 개정 요지는 적과의 교전과정에서 전사한 군 장병의 유족들이 최고 2억 원의 사망 보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연금 대상자인 부사관 이상 군인에 대해서는 보상금을 높이는 것. 그러나 이 개정안은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 소급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제2연평해전 유가족들 중에는 서운한 심정을 비추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 때 제2연평해전 전사자들에게 소급 적용을 해주겠다고 해서 유가족들이 기대했지만 6개월도 안 되어 해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고 결국 유가족들은 훈장을 반납했다.# 이 연평해전 전몰장병 소급보상 문제는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18년에 비로소 해결됐는데, 당시 3,000만원을 받은 유족분들께는 1억 7천만원을, 6,000만원을 받은 유족분들께는 1억 4천만원의 보상금이 추가로 지급된다고 한다.

참고로, 김대중 대통령이 교전 중에도 터키와의 4강전을 관람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공군 KF-16 전투기 1개 편대가 NLL 근처로 파견됐고, NSC까지 열렸다. 단, 제2연평해전 이틀 후 국군수도병원에서 해군장으로 거행된 합동영결식이 열렸을 때에 한일 정상회담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참석하지 못했던 것은 사실. 그리고 일본 천황 내외와 함께 일본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하였다.

또한 국무총리,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이 참석하지 않고, 장정길 해군참모총장 주관의 해군장으로 치러졌는데, 이를 두고 장례의 격에 대한 비판이 나왔다. 참석한 전/현직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일했다.[55] 이외에 눈에 띈 고관으로는 손학규 경기도지사 당선자가 있었다.[56] 또한 김대중은 2009년 8월 18일 사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제2연평해전 전사자 묘소를 참배하지 않았다. 이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도 자신의 임기 당시에 일어났던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 계속 추모를 하는 이명박과는 크게 대조된다. 이후 민주당 계열 대통령 및 대권주자 중에서는 문재인이 최초로 연평해전 전사자의 묘소를 참배했다. 물론 당시 상황이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결승전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었고 김대중은 개최국 국가수반의 자격이라서 이 월드컵 결승전에 불참하기 뭐한 상황인지라 일본으로 날아가야 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2002년 12월에 이들의 묘소를 참배했어야 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윤영하 소령 이하 6명의 전사자처럼 나라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분들을, 지위가 높은 정치인이 추모하는 행위 자체가 유족들에게 또다른 의미의 위로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57]

그리고 2017년 6월, 제1연평해전 참전용사가 돈이 없어서 빵을 훔친 사건이 일어남에 따라, 제1연평해전 당시의 용사들에게는 유공자 연금(월 170만원) 외에 어떤 보상이 주어졌는지 관심이 증폭되었다. 이 분이 투자사기를 당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부상 후유증을 앓고 있었기 때문. 90년대 초중반, 고엽제 후유증을 앓는다는 사실이 밝혀져 사회논란이 되었던 월남 참전용사들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전몰장병 외에 관련 부상후유증을 않고 있는 장병들에 대한 보살핌 영역은 아직 미비된 부분이 있는 고로, 이번 일을 계기로 보완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단, 나중에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위 사례의 조모씨는 실제 참전용사가 아니고 기지에 계류 중이었다고 하며 현재 앓고있는 병도 이전부터 앓던거고 군 복무중 악화되어 공상군경으로 분류된 상태라고 한다.

5. 외교에 대한 평가

5.1. 한일어업협정 재협상 과정에서의 논란

전임 정부였던 문민정부 시절의 일본과의 갈등은[58] 기어이 후임 정부인 국민의 정부에서 고름이 터지고 말았다. 게다가 IMF 사태 당시 단기 차관과 관련 빚쟁이인 일본에 아쉬운 소리를 할 일이 많았다는 치명적인 외부 요소가 있었다.

문민정부 시기 과거 일본과 체결한 구 한일어업협정(1965년 체결)을 일본 정부가 독자적으로 파기하면서[59] 국민의 정부 시기로 넘어오며 재협상이 진행된 것이다. 문민정부는 1997년 7월 배타적 경제수역의 기점을 울릉도로 하겠다는 발표를 했고 1997년 10월 당시 잠정공동수역안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독도를 중간수역으로 하기로 일본과 합의했다.# 잠정조치수역은 독도 중간수역으로, 이 때문에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졌는데, 국민의 정부가 이를 그대로 이어받아 독도가 공동수역에 포함된 채택안을 받아들이자 논란이 터지고 만 것이다. 원칙적으로 독도는 인간이 경제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섬이기 때문에 독도를 기점으로 EEZ를 긋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영상의 3분 50초 즈음부터 서울대 법대 이상면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일본 최고의 국제법 학자가 한국에 와서 대한국제법학회에서 강연을 했는데, 그 일본의 학자에게 누군가가 "한국에서 신 한일어업협정과 독도와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라고 물었더니 그 일본의 학자는 "신 한일어업협정 체결 이전에는 일본은 독도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할 입장이 못 되었는데, 신 한일어업협정을 체결함으로서 비로소 일본이 할 말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어업에 대한 수역이라는 변론도 있지만, 일본 사람들이 독도 인근에서도 조업을 할 수 있게 된 만큼, 독도 일본 영토설을 주장하는 무리들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가 되었고, 같은 취지로 독도에 접근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것과 별개로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2001년 신한일어업협정에 제기된 헌법소원을 심사하여, 어업협정은 영토나 독도 영유권 문제와 관련이 없다고 결론지은 상태이다. 2009년에도 심사했으나 역시나 같은 결론이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독도 문서 4.2 문단 참조.

6. 경제에 대한 평가

6.1. 외환위기 극복과정의 극약처방들

외환위기가 있었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후보와 새정치국민회의 측은 IMF측의 요구사항에 대해 "우리나라에 지나친 부담이 되는 부분에 대한 개선이 필요하다.", "세부사항에 대한 추가협상을 통해 국민들의 고통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할 것."이라며 재협상 혹은 추가협상을 주장한적이 있다. 하지만 IMF측은 당시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등 유력 대선 후보들로부터 당선된 후 IMF의 요구를 따를 것을 약속하는 ‘협정준수 이행각서’에 서명하도록 요구했다.###

김대중 대통령 시기 외환위기 대처법은 크게 공기업 긴축재정, 금융 개혁, 구조조정, 고이율[60], 양적 완화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중 금융 개혁을 제외하고는 부작용도 심각한 극약처방들이었다.

당시 IMF는 구제 프로그램의 하나로 높은 은행 이율을(29.5%까지 올랐다.) 강권하였는데, "이자가 높아야 시중의 돈이 은행으로 몰린다."는 처방 명분은 그럴듯 했지만 실제는 "도태될 업체는 일찌감치 도태되어라."는 것이었다. 결국 반기를(6개월) 버티지 못하고 "국내 금융기관을 인수할 수 있도록 금융시장을 개방할테니, 높은 이율을 낮춰달라."는 취지의 "항복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IMF에서 그리스 경제난을 지원할 때는 극약 성격의 처방을 자제하고자 했던 것이 한국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란 뼈있는 농담이 시중에 돌았을 정도로 이 무렵을 살아간 어르신들에게는 아픈 기억이 이 "살인적인 높은 이율"이다.

경제난으로 환율이 달러당 1900원대까지 올라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출 증가에는 매우 유리했으며, 이게 경제 성장률에도 반영됐던 만큼 급한 불을 끄고 향후 5년간 949억달러의 기록적인 무역흑자를 달성할 수 있었다.[61] 특히 대표적인 수출기업인 조선업이 최고의 호황을 누렸으며 거제도는 IMF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덜했다.

또한 양적 완화를 통해 시중에 풀려나온 자금은 IT 붐이 꺼짐과 맞물려 건설경기 부양을 위해 큰 제재를 가하지 않았던 부동산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런 움직임이 결과적으로 만성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에 일조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점이 있다.[62]

6.1.1. 카드 대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2002년 가계 신용카드 대출 부실 사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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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이를테면 외환위기 극복의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 사건. IMF 당시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인한 내수경기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경기부양 방안으로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을 폈다. 정부의 주도로 신용카드 규제를 대폭 완화시켜 신용카드를 널리 보급함으로서, 내수경기 진작 및 세수 자료 확보가 용이한 신용카드 거래를 늘리고자 한 취지의 정책으로 세수 확보에 기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성공하였지만, 국민의 카드빚이 늘어 신용 불량자 수가 크게 늘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이때 수백명의 젊은이들이 카드빛을 값지 못해 자살하는 비극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래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체크카드를 도입하게 되었으며 현금영수증 제출을 본격 권장하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이다.

6.2. 신자유주의 기조

김대중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당시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자유주의 성향의 정책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사실 대선후보 시절부터 IMF가 지시내린[63]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비정규직정리해고의 칼바람이 노동계를 휩쓸게 되었으며[64], 대기업들도 부채 200%가 넘는 계열사는 경영실적을 개선하거나 회사를 정리하거나의 양자택일 상황을 강요받게 된다.

또한 경제회복이라는 미명 하에 각종 안전 규제를 풀게 되었고, 이는 이후 벌어지는 각종 참사들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에 대기업들은 이헌재 금감원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방침 철회 또는 유보를 요구하였지만, 이 위원장은 오히려 "이 회사 사정을 봐주면, 자동차 회사는 할말이 없겠는가? 자동차 회사 사정을 살피면 OO 회사는 할 말이 없겠는가?"라고 말하며 기업들의 요구를 일축하고 구조조정 방침을 무자비하게 밀어붙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을 듯이 힘들었던 이때는 저승사자로 악명을 얻은 이헌재였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할 무렵에는 이헌재 같은 고수가 필요하다는 기사가 조선일보, 매일경제 같은 주요 신문사에서 나올만큼 호평으로 바뀌었던 점도 흥미로운 대목.#[65]

국제통화기금(IMF) 측에서는 미셸 캉드쉬 전 총재가 "한국의 외환위기는 위장된 축복"[66]이라 자평하였지만, 이때부터 구조조정긴축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 정책 기조가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이 양극화가 저성장으로 연결된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었다. 결국 이로 인해 국제사회로부터 한 나라를 망하게 할 뻔했다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으며 이후 IMF의 고압적인 신자유주의 태도가 다소 누그러졌다. 실제 IMF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67]


[1] 김수환 추기경은 이 점을 언급하며 DJ에게 양보할 것을 권했다고 한다.[2] 사실, 이 역시 86년에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DJ에[3] 1986.11.6 경향신문[4] 링크된 기사는, 그때 단일화에 성공했더라면 제4공화국 성립 이래 망국적으로 이어져 온 지역차별 구도가 완화되는데 큰 도움이 됐을 것이라는 일종의 "결과론". 또한 대의를 앞세워야 할 정치가가 온 국민의 열망(후보 단일화)을 외면하고 민의를 거스르는 전략을 세웠을 때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교훈이기도 하다.[5] 특히 DJ에게는 10% 내외로 추정되는 기존 지지자들이 DJ의 탈당 및 단일화 실패에 크게 실망하여 김영삼, 노태우 등 다른 후보에게로 표가 분산되었으며, 정권교체에 실패한 여파가 지지기반이었던 서울 수도권지역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1990년, 고립 국면을 타개하고자 김영삼이 김종필, 노태우3당 합당을 단행해, 제14대 대통령 선거까지도 영남과 호남이 더 멀리 갈라섰고 호남 고립은 악화되는 구도가 계속 이어지게 되는 비싼 대가를 치렀던 것.[6] 다만 김영삼도 고생한 건 결코 김대중에 덜하지 않다. 질산 테러와 손도끼 테러 등의 신변 위협, 국회 제명과 가택연금, 강제 정계 은퇴까지 힘든 일은 다 겪었다.[7] 대표적으로 최형우가 회장을 맡고 상도동계 인사들이 관리하던 민주산악회가 있었다. 김영삼은 가택연금에서 풀린 뒤에는 민주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매주 전국의 명산을 올랐다.[8] 당시 통일민주당은 전국조직이 완전하게 갖춰진 상태가 아니었다. 특히 충청, 강원 지역의 경우 국회의원 선거구에 지역사무소는 고사하고 당원이 없는 곳도 있을 지경이었다. 오랜 기간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야당 조직이 무너진 곳이 많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상태에서 선거를 펼칠 수는 없기 때문에 김대중은 시급히 39곳의 지구당을 창당해야 한다고 제안한 것이다. 물론 이 39곳의 지구당위원장으로는 자신과 가까운 동교동계 인사들을 대다수 추천했다. 즉 자신의 지분도 인정해달라는 의미인 것이다.[9] 이 경선 제안을 계속 주장한게 홍사덕이다.[10] 당시의 김대중은 확고한 한미동맹 관계와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만 빼면 재야와 학생운동, 노동운동 세력에 많이 가까웠다. 국가보안법 폐지, 노동3권 완전보장, 공무원/교사 노조 허용, 국제노동기구(ILO) 가입을 내걸고 있었다.[11]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이게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12] 하지만 독자 후보추대파들도 민주화를 위해서는 단일화가 필요하다는 쪽이였고, 실제 백기완 후보는 선거운동 도중에 후보 단일화를 주장하면서 사퇴하였다.[13] 본래 성균관대 정치학 교수 출신으로 이후 국회의원, 성균관대 총장 등을 역임했다. 2009년 타계.[14] 구체적으로 대통령 후보는 김영삼, 당 총재직과 국회의원 공천권의 70%는 김대중이 갖는 안이었다. 당내 지분을 김영삼 3, 김대중 7로 나누는 것으로 일견 김영삼이 일방적으로 불리해 보이지만, 대선에서 승리하면 김영삼이 막강한 대권을 쥐는 것이므로 사실상 동등하다는게 재야 쪽 논리였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대통령의 권력은 말할 필요가 없으니 나름 균형을 맞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15] 여기서 당권이란건 결국 국회의원 공천권이다.[16] 대선 정국이 본격화되면서 상도동계 일각에서는 대권과 당권의 분리는 선거 유세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권은 소장파의 김대중에게, 당권은 대여온건파의 유진산에게로 분리되면서 일사불란한 선거운동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래서 패배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제7대 대선은 군사정권의 막대한 금권, 관권, 부정선거로 패배한 것이 사실상의 중론이라 설득력이 없다 봐도 무방하다.[17] 이보다 앞선 서울의 봄 시절, 훗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에게 체포되는 정승화 계엄사령관조차도 다른 후보는 모르겠지만 김대중 후보는 사상이 불순한 자다. 김대중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가 된다면 군부는 그를 강제사퇴시켜버리겠다.고 반감을 드러낼 지경이었다. 신군부 반란군에게 체포된, 정치군인과는 거리가 먼 그조차도 당시 그런 인식을 가졌을 지경이니... 그래서인지, 정승화는 13대 대선에서 김영삼의 편을 들어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의 유일한 정당인 활동이었다.[18] 소위 군부 김대중 비토론은 당대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었다. 오랜기간에 걸친 걸친 군사정권의 호남 차별과 색깔론 공세가 이런 식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김영삼은 과거에 모친이 북괴 공비에게 살해당했고, 이전부터 보수우파 출신 정치인이었던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기에 군부도 감히 빨갱이 이미지를 씌울 수가 없었다. 후에 한겨레가 YS에 대해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워낙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이라 묻혀버렸다.[19] 사실 전두환 정부 시절, 전두환의 신뢰를 얻은 "경제대통령"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이 이런 정치자금을 투명하게 운용하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추진하였지만, 총선, 보궐선거를 겪으며 정치자금의 필요를 절감한 민정당 간부들이 전두환에게 실명제 반대를 건의하여 무산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95년에 구설수에 오른 액수가 9,000억원, 노태우 전 대통령이 95년에 구설수에 오른 "통치자금"(당시 기자회견 때 노태우가 쓴 표현) 액수가 4,000여억원이었던데 반해, "1993년에 금융실명제를 시행한"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장학노 비서관이 97년에 문제된 액수는 37억원, 후임인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 3인이 2002년에 문제가 된 액수 총액도 37억원으로 줄어들었던 것에서, 역설적으로 "제도 개혁이 사회 발전을 이끈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애초에 금융실명제가 실시가 되었으니 이런 정치자금 의혹이 가능했고 前 정부인 전두환 정부노태우 정부는 검은 돈이 많이 흘러갔을 것이라는 의혹이 많았던 때인지라 만약, 좀더 일찍 금융실명제가 시행되었다면, 현재까지 드러난 군사정권 수뇌부의 검은 돈 액수보다 더 큰 금액(예, 전두환 추징금)을 검찰측에서 찾아냈을 가능성도 있다.[20] 국민의 정부 후임 정부인 참여정부 시기에는 "비용이 적게 드는 선거"가 화두가 되어, 정치자금법을 개정하는 데까지 이른다.[21] 1992년 9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이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탈당함으로써 거국중립내각이 구성된 일을 가리킨다. 거대여당 탄생으로 여소야대 정국을 정면돌파한 것에 이어, 대선까지 기세를 이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현직 대통령이 여권 정당과 우호적으로 결별한 대표적인 사례로 줄곧 언급된다. 야당 총수였던 DJ도 아직 5개월여의 임기가 남아있는 노태우 대통령이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해 탈당계를 제출한 취지를 호의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22] 영상 재생이 안 되는 분들을 위해 적어보자면, DJ는 기자들과 만나, "귀국 후에 밝히려 했으나 언론에 터무니없는 일이 자꾸 보도되어 어쩔 수 없었다. 또 연희동측이나 여권이 화살을 나에게 돌리려 해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라고 밝히며 노태우에게 20억 원의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단, "분명히 20억 원 외에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고 못을 박으며, 처음에는 받지 않으려 했으나 아무 조건도 없으니 받으라고 했다"는 김중권 당시 정무수석의 말도 함께 전한다.[23] "여권과 일부 언론에서는 초점을 나에게 맞추고 김영삼 대통령의 대선자금 문제를 빠져나가려고 하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24] 혹은 전경환의 미국 비자금 일부를 배달사고 낸 것으로 "의심"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25] 연도는 다르지만, 대략 이런 식으로 불미스런 일을 벌였다는 의심을 받았다고 한다.[26] 미국 체류 시절, 마이클 잭슨의 생일축하 이벤트로, 헬기에다 벤츠(Benz)를 매달고 축하 파티가 벌어지는 저택 한복판에 착륙해 호스트인 잭슨의 체면을 세워준 적도 있다고 한다.[27] 미국의 주요 석학들의 강연을 듣고 개인적인 면담을 갖곤 했으며, 1990년대 중반에 "IT산업이 크게 성장할 것"을 자신있게 얘기했을 만큼 견문이 넓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창업 초기 자금난을 겪고 있는 국내 게임 회사들의 투자처를 알선해주며 도움을 주기도 했으며, 이때 투자를 알선 받은 업체 중에는 90년대 후반 게임 리니지를 출시해 큰 인기를 얻은 NC 소프트도 있다고. 이렇게 투자를 알선해준 업체에 수천만원 규모로만 투자했어도 초대박을 쳤을 것이지만, 최규선 본인은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후문이다.[28] 장남 홍일씨는 나라종금 인사 청탁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 차남 홍업씨는 아·태평화재단 부이사장으로 근무하며 각종 이권 청탁을 받고 대가를 받는 등 알선수재와 변호사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됐으며 삼남 홍걸씨 역시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 로비(일명 최규선 게이트)와 공사수주 로비 대가 등으로 약 37억원을 받은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29] 그나마 1993년부터 시행된 금융실명제 덕분에 차명계좌 개설이 어렵게 된 효과로, 전두환이 1995년 구설수에 오른 액수가 9,000억원, 노태우가 95년 구설수에 오른 "통치자금"(당시 기자회견 때 노태우가 쓴 표현) 액수가 4,000여억원이었던 반면, 김영삼의 측근이었던 장학로 비서관이 1997년에 문제가 된 액수는 37억원, 후임인 DJ의 3남 김홍걸이 2002년에 문제가 된 액수 총액은 36억 9천만원으로 수뢰 액수가 점점 줄기는 했다.[30] 나중에 무리가 생길만한 자금은 가급적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31] 활동은 차남이 제일 활발했는데, 막상 증거를 확보하고 보니, 최규선과 얽힌 3남을 수사한 팀이 개가를 올렸다고.[32] 2007년 세상을 떠나면서 그 때 겪은 일을 녹취해두었다고 한다.[33] 김종필은 박정희와 친했고 군 복무를 같이 했다. 또한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의 딸과 결혼했으니 법적으로 보았을 때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것이다. 곧, 김대중이 김종필에게 박정희 기념관 건립을 내세운 게 괜히 내세운 게 아닌 것이다. 전부 다 '박정희와 김종필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해서 내세웠다고 봐야한다.[34] 단, 독일식 내각제가 총리 = 대통령은 아니다. 독일 연방의 대통령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한국처럼 경제, 행정, 군사, 외교, 인사 전 분야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한다는 것. 이는 총리도 마찬가지지만 총리는 장관급 및 실무자들을 정무상 직접 대면하며 국정을 조율할 수 있다.[35] DJ, JP 모두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김용환(1932)이 이에 반발하여 자민련을 이탈하게 된다.[36] 김종필은 40여년 동안 정계에 몸담으면서 중요한 거취를 결정할 상황에서는 "정국 안정", "국민의 안정"을 위해 돕는다.는 대의명분 기준에 무게를 싣곤 하였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는 동안 일관되게 관철시킨 명분도 바로 이것[37] 개중에는 장남인 김홍일 전 의원이 고문 후유증으로 일생 동안 몸이 불편했던 것도 포함되어 있다.[38] 게다가 그 이후에 전두환이 광주는 무기를 들고 일어난 폭동이다.라는 망언을 하는 등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아 비판은 가중되었다.[39] 대학설립준칙주의는 최소한의 요건만 갖추면 대학을 설립할 수 있도록 정한 것이다.[40] 그러나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 대학진학률이 점차 떨어지는 추세이며 실제로 한 기사에 따르면 이제는 70% 아래로 떨어졌다고 한다. 다만 이게 학벌주의가 줄어서 그런건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안 되는 관계로 대학진학을 포기해서인지 그 원인은 확실치가 않다.[41] 물론, 본격적인 시행은 노무현 정부 초반기인 2003년 4월부터 본격 시행 되었지만, 구축은 엄연히 김대중정부 시절이다.[42] 하지만 정작 1차적 책임이 있는 문민정부의 부정적 평가 항목에는 이 항목이 없다.[43] 대구의 시내인 동성로가 있는 그 동네다.[44] 한의학에서는 대개 중풍으로 부르며, 우리가 흔히 뇌졸'증'으로 알고 있는 그 병이다.[45] 물론 법안 개정은 행정부 업무가 아닌 입법부인 국회의 업무이므로 그 책임은 국회가 더 크다.[46] 그대로 상대 배를 들이받아 북쪽으로 밀어내는 움직임. 1년 전에는 이 방침이 주효하여, 작은 피해로 승전하는 데 기여하였다.[47] 軍 내부에서는 "계획된 도발"이라는 주장과 VS "우발적 충돌"이라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고 한다. 결국 계획된 도발이라는 입장을 표해야 한다는 주장이(= "'軍'은 일단 강한 목소리를 내는 게 옳다"는 요지) 우세를 점하고 + 반대의견을 개진한 사람들이 크게 질책을 받았다고.[48] 북한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한 사과(비슷한) 표현 中 제일 수위높은 말이다. 딱 2차례 있었는데, 2건 모두 "先역습 後대화" 기조를 확실하게 관철시킨 김대중 정부,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49] 인터넷 상에는 이봉기 군의관이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해당 인터뷰는 치료 중인 의사보다는 슬픔을 직접 겪은 유가족들이 했을 법한 말들이다.[50] 이를 주장하는 측은, 천안함 피격 사건 때는 유감통지는 커녕 사과 비스무레한 것도 없었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51] 해당기사.[52] 육·해군 7명 중장 승진.[53] 해당기사.[54] 물론, 이 법을 수정할 기회는 있었는데, 1987년 민주화 이후, 민주당에서 이 법의 조항을 없애자는 제안을 했지만 여당인 민주정의당이 반대하면서 무산된 적이 있다.[55] 물론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 이 때부터 이미 건강상태가 악화되어서 혼자 거동을 못하는 수준이었고 최규하 전 대통령 또한 아내 간병 때문에 오지 못했다.[56] 그 당시에는 한나라당 소속.[57] 해군은 과거 김영삼 대통령이 일망타진한 하나회같은 군벌조직도 없고 무력으로 정권을 차지하거나 이를 시도한 적도 없으며 아무리 병역의무가 있다지만 말단 수병조차 징집이 아닌 자발적으로 입대하는 군대이다. 잘만 대해준다면 프로파간다 같은거 안 해도 얼마든지 나라에 목숨걸고 충성할 조직이라는 의미다. 육방부란 말이 나올만큼 차등 대우를 받은 과거가 있는 해군이, 옛 소련에서 들여온 민스크호 등 항공모함 2척(일명 김영삼 항모)을 日本의 훼방 상황에서도 활용할 방법을 궁리하고 + 해군 예산을 늘린 김영삼 대통령에 이어, 역시 해군 지원을 천명한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거는 기대가 컸던 측면도 있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에서는 김영삼 정부에서 추진했다가 경제난으로 보류된 구축함 예산을 다시 편성하고, 미국이 '경제난으로 개발이 어려울 것'으로 여겨, 제한을 걸지 않았던 순항 미사일 기술을 이스라엘러시아에서 도입하며, 약속을 지켰고, 전몰 장병분들께는 우회로(국민성금)를 통해 어떻게든 지원을 늘리는 방안을 강구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쏠리는 장례식 부분까지 신경을 더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 예) 이명박 前대통령의 사례 → 자신이 군 통수권자일 때 생긴 일이라는 이유로, 천안함 희생장병의 묘역을 대통령 임기 종료 후에도 매년 꾸준히 방문하면서, "대통령이 꾸준히 신경쓰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런 작은 행위로 유가족분들께 조금이나마 위로하는 마음을 전해드릴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봤음직한 부분.[58] 김영삼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역사 청산을 진행한다며 조선총독부를 철거하고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야 한다"라는 발언을 할 정도였다. 사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봐도 예정된 마찰이긴 했지만...[59] 영토에 비해 가벼운 협정이라 조항 중 일방의 의지만으로 파기가 가능하다는 항목이 있다. 양측 다 적용된다는 이야기.[60] 색깔 짙은 부분은 IMF에서 구제프로그램으로 특히 권한 것들이다.[61] 다만, 양적완화로 시중에 돈을 풀면 자연스레 물가상승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 물가상승 구도가 대침체 국면을 타파하고자 이명박 정부강만수 부총리가 취한 환율저평가(1달러 = 1200원대) 정책과 랑데부 → 08년을 기점으로 물가상승률이 연간 4%대를 찍어 서민들의 불황 체감지수를 크게 끌어올린 한 축이 되었다.[62] 그러나 김대중 정권 당시 전국의 부동산가격은 겨우 16% 상승하는 데 그쳤다. 노무현 정권 당시 전국의 공시지가 기준 부동산 가격이 무려 88%나 상승한 것과 비교된다. 김대중 정권은 대체로 양적 완화를 하기보다는 긴축 기조의 경제정책을 폈던 것으로 봐야 한다.[63] IMF에 차입을 하며 IMF의 지시대로 국가 경제를 운영해야 했는데 1997년 15대 대선 때 IMF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 총재는 대선후보 3인방에게 IMF와의 협약 이행을 요구하며 각서 서명을 요청했고, 3명의 후보들은 모두 사인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즉 누가 당선되었다 하더라도 신자유주의 정책 자체는 피할 수 없는 물결이었다 봐야 한다.[64] 정리해고를 허용하는 노동법 개정은 1996년 연말에 문민정부 때 노동법 날치기로 이미 통과됐었지만 전국민적인 반발로 애초보다 약화되었다. 그러나 약화된 것이지 무산된 것은 아니었기에 그 무렵부터 정리해고의 사례가 이미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국 문민정부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가 IMF 권고사항의 전초전 격이 되었던 것이다.[65] 사실, 기사 논조는 이 전 금감원장에게 매우 비판적이지만, 다른 신문사(조선, 매일)의 칼럼을 함께 실어, 비교하기에 편한 기사이다.[66] 덕분에 국제 기준을 충실히 따르면서 건실하고 강한 기업들이 경제를 지탱하는 구조가 되었다는 요지.[67] 한편으론 이러한 목소리는 케인즈주의 또는 사민주의적 성향의 경제학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며,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를 부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류의 경제학은 21세기 부동산가격 급등을 경험한 이후 경제학계에서 더 이상 주류(主流)가 아니다는 게 이들의 비판 요지. 양극화를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비정규직 고용 형태와, 정리해고제 모두 96년 12월 26일 법안 통과 이후 → IMF의 권고(?) 이행과정에서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된 것들이다. 다만,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노동계의 결사적 반대로 사실상 정리해고제도는 유명무실해졌으며, 이로 인해 고용경직성의 부담을 안게 된 기업들이 그 대응 방안으로 비정규직 확대로 인건비를 낮추는 변칙적인 해법을 선호하게 된 것. 이후 모든 대한민국 정부가 이 부분은 적극 개입하지 않았다. 그나마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가 반대급부로 복지를 확대해 → 사회안전망을 강화하는 조치로 보완하고자 했던게 전부. 강력한 노동조합의 보호를 받는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다른 선진국 노동자와 비교해보더라도 고용안정성과 고임금을 보장 받으며 유복한 중산층의 삶을 누리게 된 반면,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는 비슷한 노동을 하고도 터무니 없이 낮은 임금과 고용불안에 고통 받는 양극화 현상이 확대 되는 건, 여전히 개선 및 보완정책이 필요한 부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취하고 있는 대부분의 선진국이 정리해고를 자유롭게 할 뿐 아니라(구미권은 원래 안 맞으면, "Bye Bye!"를 외치는 게 자연스런 사회 문화 아녀?), 대기업 노동과 중소기업 노동의 차별 없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엄수하고 있는 것과 비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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