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하인리히 만 Heinrich Mann | |
| 출생 | 1871년 3월 27일 독일 뤼베크 |
| 사망 | 1950년 3월 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
| 국적 | |
| 가족 | 동생 토마스 만 |
| 직업 | 소설가, 시인 |
1. 개요
독일의 소설가, 시인.2. 생애
하인리히 만은 1871년 3월 27일 독일 뤼베크에서 태어났다. 경제와 재정을 담당한 시의원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유복하고 안정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9년제 김나지움인 카타리네움에서 8학년이던 1889년에 학업을 중단한 뒤, 드레스덴의 한 서점에서 약 1년간 수습 생활을 했다. 이후 베를린에 있는 피셔출판사에서 수습으로 일하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에서 공부를 병행했다.1894년 첫 소설 '어느 가정에서'를 출간하며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보수 성향의 월간지 '20세기'(1895~1896)를 발행했다. 1900년에는 '게으름뱅이 나라에서'를, 특히 창작력이 두드러졌던 1903년에는 '여신들'과 '사랑 추적'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 시기의 하인리히 만은 유미주의적인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했다.
그러나 이후 그의 문학관에는 변화가 생겼다. 1905년에 발표한 소설 '운라트 교수'에서는 유미주의를 벗어나 사회 개선에 대한 의식을 드러내며, 참여 문학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문학이 시대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다루고, 간접적으로나마 미래의 형성에 기여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후 그는 빌헬름 2세 시기의 독일 사회를 풍자적으로 그린 제국 3부작 '충복'(1914), '가난한 사람들'(1917), '머리'(1925)를 출간했다.
1933년 3월 21일 하인리히는 만은 베를린을 떠나 니스로 향한 후 다시는 독일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치 독일이 유대계인데다 대표적인 좌파인사였던 그의 시민권을 박탈한 한편, 4월에는 그의 작품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이다. 그는 프랑스 망명 시절 역사소설 '앙리 4세의 청년기'(1935)와 '앙리 4세의 완성'(1938)을 발표했다.[1]
히틀러가 프랑스를 점령하자, 하인리히 만은 아내와 조카 골로 만과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피신했고, 곧이어 포르투갈 리스본으로 이동했다. 당시 먼저 미국으로 망명해 있던 동생 토마스 만이 비자를 마련해주면서 하인리히 만도 미국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1940년 11월 미국 망명 후 하인리히 만은 정치·사회 활동보다는 생계를 유지하는 데 급급했다. 그는 “내가 미국을 아는 만큼 미국은 나를 모른다”고 토로할 정도로, 낯선 캘리포니아 생활은 그를 철저한 망명객으로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그의 작품을 알아주는 이가 없었고, 언론 기고조차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반면 동생 토마스 만은 프린스턴대 교수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루즈벨트 대통령과 교류하는 저명한 인물이었다.
하인리히는 한때 할리우드 워너브라더스에서 대본을 쓰며 주당 100달러를 받았지만, 그마저도 1년 만에 끊겼다. 이후 생계는 아내 넬리 만의 벌이와 동생이 보내주는 생활비에 의존해야 했다. 넬리는 양장점 점원, 재봉사, 간호사 등 닥치는 대로 일했고, 하인리히는 직업소개소 의자에 앉아 일자리를 기다리기도 했다. 독문학계에서는 이 모습을 ‘독일의 치욕’이라며 개탄하기도 했다.
프랑스 망명 시절 정열적으로 활동하던 그는, 이제 캘리포니아 해변에 나가 “저 너머 바다 건너 내 조국 독일이 있겠지”라며 그리움을 달래는 외로운 노인이 되었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아내 넬리는 세 차례 자살을 시도했고, 네 번째 끝내 생을 마감했다. 1944년이었다. 그녀는 1933년 망명 후 줄곧 하인리히의 곁을 지킨 두 번째 아내였다.
1945년 회고록 '한 시대가 고찰되다'를 출간했다. 이후 1949년 동독으로부터 예술 및 문학 분야 1급 훈장을 받았으며, 1950년에는 동베를린 예술아카데미 초대 회장으로 초청받았다. 그러나 귀환을 앞둔 1950년 3월 12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산타모니카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1961년에 동베를린으로 옮겨졌다.
3. 기타
밑의 동생인 토마스 만과의 관계는 그야말로 애증. 함께 문학도를 꿈꿨을 때는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을 함께 집필할 계획을 세울 정도로 친밀했지만. 근본적으로 두 사람의 기질이 너무 달랐기에 결국 토마스 만 혼자서 이 소설을 쓰게 됐다. 하인리히 만은 1915년 자신의 우상이었던 작가 에밀 졸라에 관한 에세이를 쓰면서 동생의 정치관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았는데, 이 일로 깊은 상처를 밭은 토마스 만은 자신을 비난한 것에 강력하게 항의했고, 1918년 평론집 '어느 비정치적인 인간의 고찰'에서 형인 하인리히를 두고 '독일인이 얼마만큼 자기혐오와 자기체념에 빠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보기'로 비판했다. 다만 1922년 하인리히가 중병으로 앓아 누운 이후 토마스 만이 문병을 오면서 두 형제는 화해를 했다.반면 토마스 만의 자녀들과 하인리히는 아주 사이가 좋았다. 엄격하고 내성적인데다가 깐깐한 부친과 달리 유쾌하고 활발한 성격에 사교계 인맥도 넓고, 조카들한테도 친절히 대한 백부를 더 편하게 생각한 것.
[1] 다만 하인리히는 망명생활을 되려 마음에 들어했다. 프랑스어도 유창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경하는 프랑스 작가들과 함께 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