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국 4대 대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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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ffe800><colcolor=#D50000> 왕호 | 라마 5세 (Rama V) | 
| 이름 | 프라짜오록얏 짜오파 쭐랄롱꼰 (พระเจ้าลูกยาเธอ เจ้าฟ้าจุฬาลงกรณ์) | 
| 출생 | 1853년 9월 20일 | 
| 사망 | 1910년 10월 23일 (향년 57세) | 
| 재위 기간 | 시암 국왕 | 
| 1868년 10월 1일 ~ 1910년 10월 23일 | |
| 부모 | 아버지 라마 4세 (1804 ~ 1868) 어머니 데브리씨린드라 (1834 ~ 1862) | 
| 배우자 | 수난다 쿠마리라타나 (1860 ~ 1880)[A] 수쿠말라 마라스리 (1861 ~ 1927)[A] 사방 바다나 (1862 ~ 1955)[A] 사오바바 퐁스리 (1861 ~ 1919)[A] 그 외 후궁 143명 | 
| 자녀 | 슬하 32남 44녀 라마 6세 (1881 ~ 1925) 라마 7세 (1893 ~ 1941) 마히돌 아둔야뎃[5] (1892 ~ 1929) | 
| 종교 | 상좌부 불교 | 
1. 개요
|  | 
| 공식 초상화 | 
시암 왕국(태국)을 통치한 짜끄리 왕조의 제5대 국왕으로 라마 5세로도 불린다.
제4대 왕 라마 4세[6]와 그의 왕비인 데브리씨린드라[7] 사이에서 출생했으며, 2016년 10월 13일에 승하한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의 할아버지이자, 현 태국 국왕 라마 10세의 증조부였다. 그리고 짜끄리 왕조의 역사에서 시조인 라마 1세, 손자인 라마 9세와 함께 대왕의 칭호를 받은 명군이었다.
2. 재위
부왕 라마 4세가 적극적으로 서양식 교육을 장려해 유럽 선교사들의 교육을 받았다. 부왕이 승하한 후 15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이후 5년 동안의 섭정기간 동안 전 세계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주변 국가들을 순방하며 정치적인 우의를 다졌다. 섭정 중인 1885년 개혁안을 발표했을 때, 개혁안 중에 입헌군주제 실시가 있다보니 모든 개혁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이후 섭정이 끝난 20세부터 정치, 경제, 사회 개혁에 주력했다. 20여 개의 소왕국으로 분산되어 있었던 국가를 중앙집권체제로 정비하고 내각제 도입, 행정조직 개편, 군대 현대화, 바트화 발행, 토지개혁 실시, 조세 징수 시스템 개혁 등의 국가 근대화에 기여했으며 국민의 교육을 장려하고 병원과 의료, 교육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 힘썼다. 그리고 근대화 정책과 더불어서 노예제를 폐지한 업적 등으로 인해 역사상 쭐랄롱꼰 대왕으로 불린다.
제도적으로는 추밀원, 내각평의회, 재무부 등을 신설했다. 그리고 지금의 두싯 지역[8]은 그가 동경하는 유럽풍 양식을 적극적으로 반영해서 설계했다.
태국에 철도가 처음 등장한 것이 라마 5세의 시대로 수도 방콕의 후아람퐁역[9]이 이때 생겼다. 철도를 통해 태국은 말레이시아 및 싱가포르, 베트남 등의 이웃 국가들과 접속되었다. 기차가 제일 먼저 등장한 동남아시아 국가가 태국이었던 것이다.[10] 물론 현재 태국 국철은 협궤로, 라마 5세때의 19세기 시설을 그대로 써서 낙후되었지만 어쨌든 이웃의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베트남 등의 상황을 보면 인도차이나에서 가장 앞선 나라가 태국이었다.
1897년과 1907년 두 번 유럽을 방문하여 각국의 군주들과 회담했는데 이는 태국을 한 나라가 먹지 못하도록 한 노력이었으며, 이 시기로부터 태국 왕족들이 외국에 유학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2.1. 대나무 외교
| 짜끄리 왕조의 역대 대왕 | ||
| 라마 1세 | 라마 5세 | 라마 9세 | 
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국제 외교정책인 대나무 외교도 쭐랄롱꼰 대왕의 작품이다. '대나무 외교'란 당시 태국의 지정학적 위치상 서쪽의 영국령 인도 제국과 동쪽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이 두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라마 5세만의 외교술이자 라마 5세의 업적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서, 이 외교정책은 가장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기에도 태국이 독립과 근대화를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 정책으로 태국은 라오스와 씨엠립 일대를 프랑스에, 버마, 말라야와의 접경지대 일부[11]를 영국에 각각 떼어주고 독립을 유지했다.
대나무 외교는 시암과 태국 역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쭐랄롱꼰은 태국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칭송받고 있다. 만일 이 사람이 태국 국왕이 아니었다면 태국도 미얀마,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처럼 영국 및 프랑스, 네덜란드 같은 서양 열강들에게 고스란히 국권을 피탈당하고 식민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나라를 보전했다는 위대한 업적 때문에 오늘날의 태국인들은 라마 5세를 무척 사랑하고 경외한다.
2.2. 노예제 폐지
노예제를 폐지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일부다처 제도를 통해서 영토를 확장시키고, 태국의 정치적인 통합을 이루기 위해 총 113~116명의 아내와 자식 33남 44녀를 둔 라마 5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첫 번째 아내[12]인 수난타였다. 그녀는 남편인 라마 5세 쭐랄롱꼰을 열심히 내조한 현모양처임과 동시에 국민들을 많이 아꼈기 때문이다. 1879년 딸을 출산한 수난타 왕비가 둘째 아이를 임신한 1880년 왕을 만나기 위해 방파인으로 향하던 와중, 차오프라야 강에서 칸나폰 공주[13]와 함께 물에 빠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고가 일어난 차오프라야 강은 수심도 비교적 얕았고, 당시 지켜보던 사람도 많았으나 아무도 그녀를 도와주지 않았다. 결국 만삭의 왕비와 공주, 그리고 왕비 뱃속에 있었던 아기 모두 물에 빠져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던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던 것이었다. 당시 지켜보던 사람들이 많았으나 아무도 왕비를 도와주지 못한 것은 태국에 노예제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 국민의 1/3이 노예[14]였었던 당시 노예가 고귀한 사람에게 손을 댔다가는 손을 댄 사람이 죽음을 면하지 못했기에 만삭의 왕비와 어린 공주가 물에 빠졌지만 아무도 그녀를 구할 수 없었던 것이며, 이것이 라마 5세 쭐랄롱꼰이 사랑했던 수난타 왕비와 그녀의 자녀들이 모두 죽게 된 원인이 되었다.
결국 한순간에 사랑하는 아내와 딸, 뱃속의 아이까지 모두 잃게 된 라마 5세는 큰 상심에 빠져 슬퍼하다가 그 후 30여년 후인 1905년 노예제도를 폐지했다. 이후 방파인에는 수난타 왕비와 칸나폰 공주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는 추모비가 건립되었고, 평상시 국민들의 교육에 신경썼던 왕비를 기리기 위해 수안 수난타 라차팟 대학이 설립되었다.
이 부분은 2017년 5월 14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어졌다. 또한 <차트를 달리는 남자> 243회 - 비극적인 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것들! - 에서도 다뤄졌다.
다만 위키피디아의 'Sunanda Kumariratana' 항목에선 좀 다른 설명을 싣고 있다. 라마 5세의 일기에 따르면, 선박 간의 충돌로 인해 수난타 왕비와 칸나폰 공주가 강물에 빠지자 뱃사공이 강에 뛰어들어 커튼 장식에 휘말려 있었던 두 사람을 다른 보트로 꺼내 올렸고, 왕실 수행원들이 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즉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죽은 사건이 아니라 현장에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불행한 사고였다는 것이다. 이 사고에서 모녀 둘을 제외한 다른 사망자는 없었다고 전해진다. 위키피디아의 이 항목에서 이 내용을 언급하며 제시한 근거 서적은 《Bulletin de la Société académique indochinoise de France》와 《The Palace Law of Ayutthaya and the Thammasat: Law and Kingship in Siam》이다.
그리고 노예제 폐지와 관련해서도 노예제가 공식적으로 완전히 폐지된 것은 1905년이었지만 사실상의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정책이 실시되기 시작한 건 1874년경 부터였다. #1. #2. 1874년이면 수난타 왕비와 칸나폰 공주의 사망 사건이 일어나기 전이기 때문에 두 사람의 사망으로 인한 충격 때문에 라마 5세가 노예제 폐지를 결심했다는 건 꾸며낸 이야기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3. 기타
3.1. 가계
정실 부인 외에 공식적으로 후궁 153명을 두어서 유산하거나 사산된 자녀를 포함해 자녀 97명을 두었다. 참고로 왕비들이 전부 이복여동생이었다.[15] 당연히 근친혼 농도가 매우 높아서 자녀들 대부분이 어린 시절에 죽었고, 라마 5세 사후 라마 6세와 라마 7세는 후사가 없어서 라마 5세의 또다른 아들인 마히돌 아둔야뎃의 아들들인 라마 8세 및 라마 9세를 데려와야 했다.- 정비: 수난다 쿠마리라타나 (1860 ~ 1880)[A]: 익사
- 공주: 칸나폰 베자라타나 (1878 ~ 1880): 익사
- 계비: 사오바바 퐁스리 (1861 ~ 1919)[A]
- 공주: 바후라다 마니마야 (1878 ~ 1887)
- 왕자: 라마 6세 (1881 ~ 1925)
- 왕자: 트리벳루타마 담롱 (1882 ~ 1887)
- 왕자: 착라봉세 부바나 (1883 ~ 1920) / 왕자비: 카테리나 데스니츠키 (1886 ~ 1960) 우크라이나 귀족 출신
- 왕손: 출라 착라봉세 (1908 ~ 1963): 태국-우크라이나 혼혈
- 왕자: 시리랏 카쿠다반드 (1885 ~ 1887)
- 왕자: 앗사당 데차붓 (1889 ~ 1925)
- 왕자: 춧타툿 다라딜록 (1892 ~ 1923)
- 왕자: 라마 7세 (1893 ~ 1941)
- 계비: 수쿠말라 마라스리 (1861 ~ 1927)[A]
- 공주: 숫다 디뱌라타나 (1877 ~ 1922)
- 왕자: 파리바트라 수쿰반두 (1881 ~ 1944): 해군 복무
- 계비: 사방 바다나 (1862 ~ 1955)[A]
3.2. vs 대한제국 고종
비슷한 시기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과 자주 비교되며, 고종 안티들의 주요 논거로 쓰인다.논지는
고종이나 라마 5세나 똑같이 전통 교육을 받으며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정사에 임했으며, 각각 대영제국, 프랑스 식민제국 사이에 있는 태국과 청나라, 일본 제국, 제정 러시아 사이에 위치한 조선의 국왕으로서, 제국 사이에 위치한 약소국의 지배자였다는 공통점에도 라마 5세는 부국강병했고, 고종은 망국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태국의 경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내정 개혁도 내정 개혁이지만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완충지대라는 지정학적 위치 역시 큰 이유였고, 추가적으로 한반도만큼 커다란 땅덩어리를 떼주었다. 고종이 주권을 유지하기 위해 영토를 떼 준다는 게 당시 상황에서 가능한 일이었는가? 만일 태국이 할양한 면적 만큼의 영토를 내줬다면 전주 이씨 왕가와 조선 조정의 직할지는 서울/경기/인천의 경기 지방 및 가까운 강원도 영서 일부나 충청도 북부 일부분밖에 안 남았을 것이다.
그리고 태국이 라오스와 캄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준 것과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비교하는 것은 약간 무리가 있다. 일단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시암(태국)의 속국이었지 정식으로 편입된 영토가 아니었고, 애초에 이 3국은 동질의 민족의식도 없었다.[20] 심지어 캄보디아의 경우 태국이나 프랑스나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21] 고종이 제주도나 거제도, 울릉도, 거문도, 백령도 등 도서 지방들이나 부울경/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영남 및 강원도 영동지방 등 일본과 인접한 동부 지방들을 일본에게 떼어주거나 러시아 제국에 함경북도 웅기-나진, 신의주시 용암포 등 러시아 및 청나라와 가까운 북부 지역을 떼어주는 시나리오와 태국이 라오스/캄보디아를 프랑스에게 넘겨주는 건 일치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구한말 당시 조선이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백령도 같은 섬 지역 영토나 혹은 부산/진해/여수 등 일본과 인접한 영•호남 항구도시 일부를 떼어 러시아와 일본에게 할양했다 해도[22]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조선의 일부를 차지하는 선에서 그치고, 조선을 주권국가로 내버려뒀을지는 의문인데, 어느 쪽이든 조선 영토 전역을 병탄해야만 동아시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일본이 설쳐대서 그렇지 영국, 프랑스, 포르투갈, 네덜란드, 덴마크 등 유럽에서도 19세기 초부터 이양선을 보내며 조선 해안을 자주 깔짝거렸다.
게다가 지리적으로 따져도 태국은 열강들이 정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설정한 반면, 조선은 주변 국가 모두가 정면 충돌을 불사해서라도 자국 영향권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애당초 태국의 이해 관계자는 영국과 프랑스, 조금 더 하면 네덜란드 정도였는데,[23]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에 비하면 네덜란드는 겉절이에 가까운 존재였다.[24] 인도를 집어삼킨 대영제국이야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만 해도 자타공인 세계에서 제일가는 패권국이었고, 프랑스 식민제국 또한 보나파르트 이래, 보불 전쟁에서 조금 체면을 구기긴 했어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낫질 작전으로 개쪽을 당하기 전에는 유럽 육군 최강으로 손꼽히는 강대국이었다.
라마 5세의 재위기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역사적 앙숙이긴 했어도 서로의 국력이 막강했기에, 둘은 불편하지만 그럭저럭 이웃으로 살아갈 수 있었고, 이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이 같은 협상국이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대영제국의 숙적은 러시아 제국이었고, 영국은 러시아 제국을 엿먹이기 위해 피와 살을 깎아가며 그레이트 게임을 이어나갔다. 프랑스 식민제국의 숙적은 보불전쟁으로 프랑스에게 개망신을 준 프로이센 왕국이자 독일 제국이었다. 고작 태국 따위로 기싸움을 크게 벌이기엔 대영제국이나 프랑스 식민제국이나 너무 강력한 숙적이 이미 있었던 상태였기에, 태국을 완충지로 써먹자는 아이디어가 충분히 통할 법 했다. 대영제국의 입장에서 최대의 해외 식민지인 인도 제국의 안보가 보장되고, 러시아의 남하만 막을 수 있다면 나쁠 것이 없었고, 프랑스 식민제국의 입장에서도 인도차이나 반도의 식민지(베트남)만 위험에 처하지 않는다면 독일 제국이라는 강대한 적과 국경을 마주한 상태에서 대영제국과 마찰을 일으킬 이유가 적었다. 따라서 대영제국과 프랑스 식민제국은 굳이 마찰을 벌이며 태국을 먹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전혀 달랐는데, 한반도 문제의 이해 당사자들이었던 일본, 청나라, 러시아는 안보와 국격 때문에 한반도를 반드시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청나라의 경우, 말할 것도 없이 전통적인 조공국인 조선을 자신의 휘하에 두어야만 했다. 아편 전쟁에서의 연패와 태평천국 운동으로 인해 청나라 황실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여기에 더해 조선의 종주권까지 상실한다는 것은 청나라의 위신이 무저갱 속에 꽂힌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청나라는 끝까지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으며, 청일전쟁에서의 패전으로 군사적 지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놓여서야 종주국으로서의 지위를 포기할 정도로 질척댔다. 이후 장제스가 끝까지 한반도를 포기하지 못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는 중국의 자존심에 직결되는 땅이었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한반도는 매우 달콤한 땅이었는데, '그레이트 게임'이 벌어지는 동안, 영국은 러시아 제국이 부동항을 가지지 못하도록 온갖 훼방을 놨다. 분명 러시아 제국은 거대한 나라였으나, 위도가 높고 의미있는 항구는 죄다 북해나 흑해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영국의 포위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큰 안보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동항이자, 러시아 제국의 극동을 방어하기 좋은 한반도는 러시아에게 꽤나 군침이 도는 지역이었다. 니콜라이 2세가 한반도가 일본에게 먹히는 꼴은 두고 볼 수 없다고 할 정도의 요충지였다.
일본 입장에서는 대륙 진출을 위해 무조건 한반도가 필요했다. 다만 러시아 제국이 강성했을 시절에는 감히 러시아에 거역하면서 손을 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을미사변을 일으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고종과 순종 부자가 아관파천을 하자마자 바로 러시아의 파워가 강해졌음에도, 일국의 궁궐을 습격한 적이 있었던 일본이 주한 러시아 공사관에 손도 못 댄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애당초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간신히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그레이트 게임 때문에 대영제국과 미국이 일본을 도와줬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멀쩡해서 일본 및 청나라와 균형을 이루었다면 한반도도 중립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러시아 제국은 곪아터진 내부 사정이 결국 피의 일요일과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면서 멸망해버렸고, 청나라 또한 중화민국의 건립으로 이어지면서 멸망했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는 강대국들 간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었고 그 결과 일본이 한반도를 먹은 것이다.
지리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개방성이나 군대의 근대화 수준에서도 태국이 조선보다 우위에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대한민국이 명실상부 선진국으로서 개발도상국인 태국보다 경제력이 매우 앞서고 군사력도 비교가 안 되게 앞서는 상황이지만 냉전 이전에 전근대에서 개화기로 넘어가는 19세기 말의 상황에서는 태국의 경제력이 조선보다 근소하게 앞서 있었으며, 군사력도 프랑스인 및 포르투갈인들과의 접촉으로 이미 유럽식 무기를 갖추는 등 세도정치로 쇠락하기 시작한 조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25][26]
무엇보다도 태국은 이미 아유타야 왕국 시절부터 네덜란드 및 프랑스와 같은 유럽 국가들과 무역을 하며 막대한 부와 이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이후 17세기 말부터 펫라차 국왕의 쇄국정책이 실시되면서 무역이 쇠퇴했지만 다시 라마 3세의 치세때인 1840년 서양 열강들이 태국을 보급기지로 사용하고자 무역 및 자국군의 일시적인 주둔을 요구했고, 태국은 정식으로 나라의 문을 다시 열게 되었다. 이를 통해 근대화를 위한 교육과 자금이 축적되었고 라마 5세의 치세에 이르러 활발한 근대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조선은 정식으로 나라의 문을 열게 된 강화도 조약의 계기가 된 운요호 사건이 1876년의 일이었음을 감안한다면 태국보다 30년 가량 개방의 시기가 느렸으며, 이미 60여년의 세도정치 기간 동안 나라의 국고가 텅텅 비게 되어 근대화할 자금도, 여력도 부족했고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었다. 또한 군사적인 면에서도 군대의 신식화기 보유량 역시 세도정치 기간에 기술 발달이 쇠퇴하고, 군자금을 횡령하는 등의 추태까지 벌어지면서[27] 태국 군대가 조선 군대보다 앞섰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본군과 청나라군이 조선군을 무시하며 조선 땅에서 국지전을 펼친 반면, 태국에서 전투를 하고 태국을 식민화하려면 서양 열강 역시 근대화된 태국군과 만나 큰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차라리 이런 태국과 비슷한 전략을 취할 수 있었던 건 중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워낙 땅덩어리가 커서 누구 하나가 독점했다간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기에 어느 누구도 혼자 독식한다는 발상 자체를 못했고, 너무 거대한 나머지 이권만 뜯어먹어도 나름 만족스러웠던데다가 지리상으로도 여러 세력의 중간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태국보다 운이 좋았던 것은 땅을 뜯겼어도 홍콩, 마카오 등 일부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태국과 중국의 체급 차이가 애초부터 상대가 되는 수준이 아니었던 것도 감안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는 중립국의 개념이 있었던 것에 비해 동아시아에서는 중립국이라는 개념이 거의 없었다. 중화제국 아래의 수많은 조공국과 그 질서를 따르지 않는 적대국이 존재했던 동아시아에 비해 유럽은 스위스나 벨기에 같은 중립국들이 존재했다. 태국을 둘러싼 국가들은 영국과 프랑스로 중립의 개념을 아는 국가들이었다. 양국은 아프리카에서 파쇼다 사건을 겪으면서 서로를 어느 정도 견제했다. 그런 정치적 흐름과 지형적 이점, 중립국에 대한 이해가 태국의 '대나무 외교'를 가능하게 했다. 그에 비해 일본과 청나라는 중립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국가들은 조공국이거나 식민지 또는 동맹국과 적대국일 뿐이었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동아시아의 질서에 없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대한제국의 고종이 중립 노선을 추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3.3. 비슷한 인물
비슷한 시기에 에티오피아에도 라마 5세와 비슷한 업적을 남긴 황제 메넬리크 2세가 있었다.에티오피아에서는 혼란스러웠던 에티오피아를 통일하고 이탈리아의 침공을 막아낸 명군으로 추앙받는다. 더구나 근대화 개혁에 힘쓴 점, 북아프리카에 뻗어오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여 에티오피아를 19세기 말 아프리카에서 유일한 독립국으로 지켜낸 점 등 비슷한 업적이 많지만 태국은 라마 5세의 사후에도 왕실이 폐지되지 않고 오늘날까지 유지되어 온 반면 에티오피아 제국은 메넬리크 2세 사후 결국 베니토 무솔리니의 침공으로 이탈리아의 식민지로 전락하고[28] 이후 공산혁명으로 황실이 폐지된 데다가 폴 포트 정권[29] 당시의 캄보디아와 별 차이 없는 막장 상황을 겪고 그 후유증이 적지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라마 5세에 비해 묻히는 감이 있다.
4. 여담
그의 이름을 딴 쭐랄롱꼰 대학교는 대한민국의 서울대학교, 일본의 도쿄대학, 대만의 국립타이완대학, 홍콩의 홍콩대학과 같이 태국을 대표하는 플래그십 명문 대학교다. 이 학교와 탐마삭 대학교가 태국 내 명문이며, 민주화 운동에도 가장 앞에서 총대를 멨고, 그만큼 많은 희생을 치렀다.[A] 라마 5세 본인의 이복동생[A] [A] [A] [5] 라마 8세와 라마 9세의 아버지[6]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이다.[7] 라마 3세의 손녀였다. 그녀의 조부인 라마 3세 낭끌라오는 유명한 라마 4세 몽꿋의 이복형이었다. 라마 2세는 총명한 몽꿋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고 했으나, 귀족들은 조종하기 좋은 낭끌라오를 제3대 왕으로 올렸고 몽꿋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라마 3세 낭끌라오가 승하하자 몽꿋이 제4대 왕이 되었으나 그 조건으로 낭끌라오의 손녀를 왕비로 삼아 그녀의 자식에게 왕위를 물려주도록 했다. 즉, 라마 5세 쭐랄롱꼰은 라마 4세 뭉꿋과 그의 조카손녀 사이에서 태어났다.[8] 두싯 지역에 짜끄리 왕조의 두번째 왕궁인 비만멕 궁전이 있다.[9] 차이나타운 근처에 있다.[10] 그 다음은 영국령이었던 말레이시아였다.[11] 이 지역들은 미얀마 독립 이후 샨주(거의 대부분), 카야주, 카인주, 몬주, 타닌타리구로 나뉘어 편입되었고, 말레이시아에게는 크다, 프를리스로 각각 편입되었다.[12] 라마 5세의 이복 여동생이기도 했으며, 그녀 아래의 두 여동생들도 라마 5세의 왕비들이었다.[13] 사망 당시 1세였다.[14] 이유도 다양했는데 빌린 돈을 갚지 못하거나, 범죄를 저지르거나, 군대를 안 가는 등 여러 가지 많았다.[15] 부왕 라마 4세 역시 이복 조카손녀이자 라마 3세의 손녀인 데브리씨린드라와 결혼하여 라마 5세를 낳았다. 라마 3세와 라마 4세는 이복 형제지간이었다.[A] [A] [A] [A] [20] 그나마 이싼 지방과 라오스는 조금이라도 있었으나 크메르족의 캄보디아는 그것도 없었다.[21] 그나마 언어나 문화등이 상당히 유사한 라오스는 캄보디아와 달랐다.[22] 이는 영국이 청나라에서 뜯어간 신계처럼 조차지거나 혹은 영국령 홍콩 중 홍콩섬처럼 정식 영토일 수도 있다.[23] 라마 5세의 치세는 제2차 세계대전은 커녕, 아직 제1차 세계대전도 벌어지지 않았다.[24] 애당초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네덜란드에 귀속된 이유가 영국이 주요 유럽 국가들의 눈치를 보다가 돌려줬기 때문이다.[25] 다만 대한제국 시절에는 광무개혁으로 근 10년간 빠른 근대화를 통해 무기의 성능과 최신화만 놓고 보면 태국군은 물론 청나라군까지 압도하여 대한제국군은 동학 농민 운동 당시 황토현 전투때의 허접스럽던 추태상(...)에서 벗어나 청나라와의 국경분쟁에서 연전연승하고 청나라의 초기 수도인 선양의 변두리 지역까지 진격했으며, 연변 일대에는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해 아예 세금을 걷는 등 대놓고 행정력을 드러낼 정도로 제국주의적인 면모를 보였다.[26] 다만 무기체계의 통합이 안된데다가 정비 기술이 부족해 후원자인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에 의존해야 했으며, 그 반작용으로 일본 제국과 대영제국이 대한제국의 무기 구매를 방해했다. 특히 양무호 및 광제호 구입 당시 이들의 횡포와 간섭이 극심했다.[27] 바로 직전 영조-정조 시절만 해도 천보총이 나오는 등 화약무기의 발전 자체가 활발했다. 이때부터 조선은 서쪽 청나라의 만주족 및 몽골족 궁기병과 일본의 조총 모두 대응이 가능하도록 교리를 바꾸었으며, 그 결과 기병에 편곤과 장창이 들어오고, 조총을 쏘는 총기병이 등장했다.[28] 하지만 점령 기간이 매우 짧아 나치 독일의 프랑스/벨기에/네덜란드/폴란드 등 유럽 점령과 마찬가지로 정식 식민지 말고 임의점령으로 취급받는다.[29] 사실 에티오피아 공산당을 이끈 멩기스투도 '에티오피아의 폴 포트'였다. 아프리카에서 꽤 앞섰던 에티오피아의 모든 걸 작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