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8 00:37:20

람캄행

태국 4대 대왕
수코타이 왕조 아유타야 왕조 톤부리 왕조 짜끄리 왕조
람캄행 나레수안 딱신 쭐랄롱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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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코타이 왕국 제3대 국왕
람캄행
รามคำแหง | Ramkhamhaeng
<nopad> 파일:람캄행동상.jpg
수코타이에 위치한 람캄행 대왕의 동상
<colbgcolor=#FF0000><colcolor=#fff> 출생 <colbgcolor=#fff>1237년 / 1247년
수코타이 왕국
사망 1298년 (향년 51 / 61세)
수코타이 왕국
재위 기간 제3대 국왕
1279년 ~ 1298년
왕명 프라밧 카몬텡 안시 라마랏
부모 아버지: 시 인트라팃
어머니 : 쑤앙
종교 상좌부 불교

1. 개요2. 치세
2.1. 대외 관계2.2. 불교2.3. 문화
3. 평가4. 조작?5. 기타

1. 개요

동남아 태국의 왕조인 수코타이 왕조의 제3대 왕. 본명은 퍼쿤 람캄행(Phokhun Ramkhamhaeng). 1239년(추정)에 태어나 1279년 왕위에 오른 뒤 1298년에 죽었다.[1] 1279년, 형이었던 반 무앙 왕이 죽자 타이 시암 중북부의 작은 왕국인 수코타이를 물려받았다.

이후 타이 민족을 처음으로 통일했고, 수코타이의 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자국의 문자를 손수 만들어 태국의 민족적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태국 국민들에게 학문의 신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어렸을 때부터 문무를 겸했다. 군사, 외교, 통치, 문화 다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당시 동남아의 패권국이었던 크메르 제국을 격파해 수코타이를 동남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만들었다. 전설의 왕인 르완을 선조로 삼고, 국왕은 아버지, 국민은 아들들이라고 하며, 왕족과 같은 온정주의를 강화하였다.

2. 치세

그에 대한 거의 모든 기록은 왕 자신이 초안해서 쓴 1292년의 비문에 근거하고 있다. 이 비문은 크메르 문자를 개량해 만든 태국 문자로 기록돼 있는데, 태국어의 원형을 보여주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국어 자료이기도 하며,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2.1. 대외 관계

대외 관계에서 람캄행은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외교적으로는 북방의 란나 왕조 및 파야오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어 북방의 안전을 해결했다.

그의 진정한 업적은 정복 활동에 있었다. 그는 말레이 반도 전체를 점령한 후 크메르 제국을 제압하였고, 이후 꾸준한 정복활동 끝에 당시 크메르 제국의 영토이자 오늘날 라오스의 땅인 위양 짠루앙프라방, 서쪽으로는 미얀마의 인도양 해안, 남쪽으로는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는 동남아의 패권국이 되었다.

특히 소년소녀가장으로서 바간 제국의 진압을 피해 도망쳐 와서 두 동생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영내에서 장사를 하던 와 가두를 눈여겨보아 여러 지원을 묵묵히 해준 다음 왕궁 경비대장에 임명하고 바간 왕조가 약해진 틈을 타 와 가두한타와디 왕국을 세워 와레루 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도와 버마족 사이의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타닌타리 지역을 대가로 받는 등 전략적 판단도 뛰어났다.[2]

다만 이때의 정복은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후 아유타야가 성립된 짜오프라야 강 캄보디아-롭부리[3]로부터 정복한 것은 사실인 듯 하나, 위앙 쨘, 루앙프라방, 테나세림, 나콘 시탐마랏의 정복의 경우 단순히 종주권을 인정받은 듯하기 때문이다. 그가 죽자마자 이 지역들은 대부분 수코타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당시 타이족은 동남아 전체로 이주해서 독자적인 소왕국(무앙)을 세우던 상황이었고, 람캄행은 이들을 대표하는 패자라고 보는 연구가 있다.

1294년과 1300년 두 차례에 걸쳐 원나라 조정에 방문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대 초강대국이던 원나라와의 우호에 특히 공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2.2. 불교

람캄행은 불교 선진국이던 스리랑카에서 스님을 직접 모셔와 왕실과 평민 모두 불교를 믿도록 하였다.[4]

람캄행의 이러한 서비스에 감동을 받은 스리랑카 왕조에서는 수코타이 왕조에 황금 불상을 선물해줬다.

2.3. 문화

태국만의 독특한 양식이 발전했는데, 특히 청동 조각과 도자기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에 달해있었다.

또한 조선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했듯, 크메르 문자를 바탕으로 태국 문자를 만들었다.

3. 평가

람캄행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매우 뛰어난 업적을 남긴 지도자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수코타이 왕조는 그가 죽은 뒤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고 아유타야 왕조에 병합되고 말았다.

한편 외교적인 통합의 한계도 보였다. 람캄행 재위기의 수코타이의 영토는 크고 아름답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방사형 영토가 아닌 실선으로 뻗어간 모양을 보인다. 즉, 각지에 분포한 타이족 소왕국들의 맹주적인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 동맹이 수코타이에 대한 복종보다는 람캄행 개인에 대한 신뢰에 가까웠으므로 그가 죽자마자 대부분의 소왕국들은 수코타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 타이족의 영토가 아니었던 짜오프라야 강 하구 서안을 정복함으로써 1350년 아유타야가 성립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또한 앙코르 왕조와의 항쟁도 계속했는데, 13세기 말 앙코르조 캄보디아를 방문한 중국인 주달관은 국경에서 섬(暹)인과 크메르인이 수시로 상대편을 학살하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고 기록했다.

일단 정복군주이다 보니 태국의 주변국에서는 침략자 취급이 강한 편이다.[5][6] 사실 모든 문화권의 정복군주가 이러한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4. 조작?

일부 학자들은 람캄행의 업적을 남긴 비문의 신빙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해당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일단 발견자가 훗날 태국의 국왕이 되는 라마 4세[7][8]라는 점에서 의심이 시작된다. 게다가 초반부와 중반부 이후에 서술자의 인칭이 변화하고, 문체마저도 바뀌는 데다 내용상으로나 시기적으로 이질성 등이 여러 군데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과연 이게 진품이냐?" 하는 논쟁이 일었다. 중반 이후에는 유럽 알파벳 체계의 영향을 받았다고 의심되는 부분이 있어서 이러한 학자들은 해당 비문이 19세기 이후에 쓰인 것으로 결론짓는다. "비문이 아예 통째로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중간 이후부터 조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이러한 주장은 태국 사람들의 민족주의에 큰 영향이 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피해를 입기도 했다. 람캄행은 타이 족을 역사상 최초로 통일한 인물이자 타이 문자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다. 만약 이게 조작이라고 확정된다면 지금까지의 타이의 역사 및 언어와 관련된 학술 서적과 교과서를 전부 다시 써야 한다. 이 논쟁에 참여한, 영국의 학자인 마이클 라이트(Michael Wright)는 국외 추방 협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의 반감과는 별개로 학술적인 차원에서는 태국 학계 역시 해당 주장을 진지하게 검토해서, 비문의 신빙성에 대한 검증작업에 들어갔었다. 태국 학자들 중에서도 해당 학설을 받아들인 케이스도 있었다. 최초로 해당 학설이 제기된 1987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람캉행 비문의 증거여부가 뜨거운 감자로, 이후인 1990년 추가 조사를 진행해 전자 현미경과 X선으로 비문을 검사했다. 그 결과, 다른 수코타이 시대의 비문들과 동일하게 500년에서 700년 정도 전에 제작되었다고 결론이 났다. 또 문체가 바뀌는 부분에 대해서는 연구가 거듭 쌓이면서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번역본이 나오면서 합리적으로 설명되었다고 평해진다. 1990년대 이후로 조작론 학자들은 합리적인 반론이나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지 못해 더 많은 지지자를 얻지 못했고 학계에서는 진위론에 대해서 더 이상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다.[9] 람캉행 비문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것도 검증작업이 완료된 후의 일이다.

5. 기타

람캄행은 막장제조 게임으로 유명한 문명 5시암 문명의 지도자로 나온다. 평소엔 내정에 집중하는 평화로운 성향이지만 고유 유닛인 코끼리만 나오면 호전적인 성격으로 돌변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외교, 문화, 정복 모두 성과가 있는 람캄행을 나름 반영한 듯 한 모습이다. 선전포고 때 한다는 소리가 "이제 세계는 나의 것!!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겠소!!"

태국 방콕에는 람캄행 대학교가 있다. 특이하게도 이 학교는 국립대학이며 그야말로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개방형 대학교이다. 정원이 없기 때문에, 한국어 붐이 불 때 람캄행 대학교의 한국어 수업은 학생 수가 천 명에 달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 1317년이라는 주장도 있다.[2] 이때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와 가두와 람캄행의 딸 낭 써이다오 공주와 고향 돈운으로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되었고(물론 두 동생들도 같이 갔다.) 람캄행은 화를 내는 대신 한타와디 왕국을 세우자 사위를 인정했다는 전설이 있다.[3] 반(半) 독립적인 몬족의 왕국.[4] 고려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5] 특히 태국과의 악연이 매우 강한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미얀마에서 람캄행을 찬양하는 말을 했다가는 현지 주민들에게 욕을 먹거나 심하면 구타를 당할 수도 있다.[6] 다만 미얀마의 주류인 버마족과 사이가 안 좋은 몬족들은 자신들의 영웅인 와레루를 인정하고 도와준 것 때문에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지금도 태국인몬족은 사이가 괜찮은 편으로 몬족 반군인 몬 민족해방군도 태국 정부와 태국군의 지원을 비밀리에 받고있다는 얘기가 있다.[7] 발견 당시에는 왕이 아니라 승려였다. 왕족이긴 했지만 라마 3세가 워낙 자식이 많았던지라 계승 역시 불투명했다.[8] 다만 라마 3세가 형이긴 했어도 서자였기 때문에 원래부터 계승권 1순위는 적자라마 4세였으나 본인이 왕위를 그닥 원하지 않아 라마 3세가 오르게 된 것이며 당시 세도가였던 분낙 가문라마 3세가 물려받되 차기 왕위는 라마 4세에게 돌려준다는 암묵적 계약을 했다는 썰도 있다.[9] 이상의 논쟁에 대한 출처는 https://www.academia.edu/9903229/Using_Ockhams_Razor_with_respect_to_the_Ram_Khamhaeng_Controver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