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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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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왕조실록 중 흥미로운 일화 등을 모은 문서. 왕이나 신하, 혹은 사관 등 발언 주체를 가리지 않고 정리하였다.

2. 태종실록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 4년(1404) 2월 8일 4번째 기사

해외에서도 밈이 될 정도로 조선왕조실록 하면 누구나 떠올릴 만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 태종이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졌는데, 태종은 자신이 말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사관에게 말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는데, 사관이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라고 한 말까지 몽땅 기록한 일화이다. 후일 태종은 14년에 한 번 더 낙마했는데, 그 때는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지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란 말은 없고 단지 왕이 넘어진 것과 왜 넘어졌는지만 기록되어 있다.

아래 일화에 등장하는 사관은 민인생이라는 인물인데, 민인생은 스토커마냥 태종의 뒤를 집요하게 따라다니면서 태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기록하고 다녔다. 태종 입장에서는 정말 진절머리 나는 스토커가 따로 없었다. 덕분에 태종실록에 자주 언급되는 인물이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조준(趙浚)·좌정승 이거이(李居易)·우정승 하륜(河崙) 등이 들에 설치한 악차(幄次)에서 연향을 베풀었다. 임금이 무신(武臣) 10여 인을 거느리고 강 연안에서 매를 놓고, 날이 저물어서 환궁하였다. 사관(史官) 민인생(閔麟生)이 뒤 따라 이르니, 임금이 보고 내수(內竪)에게 눈짓으로 무엇하러 왔느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신(臣)이 사관으로서 감히 직사(職事)를 폐할 수 없기 때문에 온 것입니다. "

하였다. 총제(摠制) 이숙번(李叔蕃)이 아뢰기를,

"사관의 직책이 매우 중하오니, 원컨대 묻지 마옵소서."

하였다.
태종 1년(1401) 3월 18일 2번째 기사[1]
편전(便殿)에서 정사(政事)를 들었다. 사관(史官) 민인생(閔麟生)이 들어오려고 하므로, 박석명(朴錫命)이 말리면서 말하기를,

"어제 홍여강(洪汝剛)이 섬돌 아래[階下] 들어왔었는데, 주상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일전(無逸殿) 같은 곳이면 사관이 마땅히 좌우에 들어와야 하지마는,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시었다."

하였다. 인생이 일찍이 전지(傳旨)가 없었으므로 마침내 뜰[庭]로 들어왔다. 임금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사관이 어찌 들어왔는가?"

하니, 인생이 대답하기를,

"전일에 문하부(門下府)에서 사관이 좌우에 입시하기를 청하여 윤허하시었습니다. 신이 그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

하니, 인생이 말하기를,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는 것과 경연(經筵)에서 강론하는 것을 신 등이 만일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곳은 내가 편안히 쉬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고, 또 인생에게 말하기를,

"사필(史筆)은 곧게 써야 한다. 비록 대궐[殿] 밖에 있더라도 어찌 내 말을 듣지 못하겠는가?"

하니, 인생이 대답하였다.

"신이 만일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습니다."
태종 1년(1401) 4월 29일 1번째 기사[2]
사관(史官)이 6아일(六衙日)의 시조(視朝) 때에 입시(入侍)하라고 명령하였다. 처음에 임금이 편전(便殿)에 좌기(坐起)하였는데, 민인생(閔麟生)이 호외(戶外)에서 엿보았다. 임금이 이를 보고 좌우(左右)에게 묻기를,

"저게 어떤 사람인가?"

하니, 좌우가 대답하기를,

"사관 민인생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노하여 박석명(朴錫命)을 시켜 전명(傳命)하게 하였다.

"이제부터 사관이 날마다 예궐(詣闕)하지 말라."
태종 1년(1401) 7월 8일 2번째 기사
민인생(閔麟生)을 변방에 귀양보내었다.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러하였다.

"예전에 열국(列國)이 각각 사관(史官)이 있어, 항상 임금의 좌우에서 언행과 정사를 갖추 기록하지 않음이 없어 후대의 권계(勸戒)를 삼았습니다. 지난번에 신 등이 이것을 직접 계달하여 곧 유윤(兪允)을 받아 사관으로 하여금 날마다 좌우에 입시(入侍)케 하였는데, 가만히 듣건대, 사관은 아일(衙日)의 정사를 듣는 때 이외에는 입시하지 말도록 하시었다 하오니, 이것이 어찌 전하의 본심(本心)이겠습니까? 이것은 사관이 적임자가 아니어서, 나아가고 물러감[進退]에 예(禮)를 잃어서 성념(聖念)을 움직인 소치입니다. 한 사관이 실례한 까닭으로 하여 마침내 만세의 좋은 법을 폐하시니, 신 등은 전하를 위하여 애석히 여깁니다. 원컨대 사관으로 하여금 매일 일을 아뢸[啓事] 때마다 따라 나오고 따라 물러가게 하여 모범을 만세에 남기소서. 사관 민인생은 입시할 때를 당하여 여러 번 예(禮)를 잃어서 휘장을 걷고 엿보기까지 하였으니, 불경하기 심합니다. 원컨대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직첩(職牒)을 거두고 외방에 귀양보내게 하소서."
태종 1년(1401) 7월 11일 1번째 기사
사헌부 대사헌 정역(鄭易)이 사관(史官)을 조계(朝啓)에 입시(入侍)하기를 허락하도록 청하였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매양 조계 때마다 사관이 직필(直筆)을 잡고도 유독 참여하지 못하오니, 신은 전하의 가언(嘉言)·선정(善政)이 혹시 후세에 다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임금이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조회에서 물러나, 임금이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일렀다.

"예전에 사관(史官) 민인생(閔麟生)이 경연 때 병풍 뒤에서 엿듣고, 곧장 내연(內宴)으로 들어왔었다. 또 내가 들에 나가 매사냥을 할 때 얼굴을 가리우고 따라왔으니, 이런 것은 모두 음흉한 짓이다. 지난해에 또 한 사관(史官)이 곧장 내전으로 들어오므로 그 뒤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인데, 지금 정역의 말이 어찌 주무(綢繆)하다 하겠느냐? 만약 기사(記事)로써 말한다면, 대언(代言) 등이 모두 춘추(春秋)의 직임을 맡았으니, 이렇다면 대언이 기사(記事)하기 싫어서 정역을 사주하여 나에게 고하게 한 것이다."

김여지 등이 대답하였다.

"신 등이 어찌 감히 말하겠습니까? 신이 저번에 청한 바 있었고, 사간(司諫) 이육(李稑)도 일찍이 그런 말을 하였은즉, 정역이 듣고 이 같은 청이 있었는가 합니다."
태종 12년(1412) 11월 20일 2번째 기사

결국 참다 못한 태종은 민인생을 임금의 집무실인 편전에서 자신을 엿보는 민인생을 예를 갖추지 못했다는 죄목으로 귀양 보냈다. 그러나 민인생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태종은 민인생을 귀양 보낸 지 11년이 지나도록 민인생의 험담을 했으며, 업무 보고 시간인 조계 때 신하들이 사관을 들이자는 말에 기겁하며 민인생이 사관으로 있을 때 했던 행동들을 다시 언급하며 반대했다. 이 정도면 PTSD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해당 이야기와 같이 왕의 인간적인 면모가 세세히 적혀있는 사례는 실록에서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이것은 조선에서 실록을 편찬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관이 정말로 모든 일을 다 적으려 했기 때문이다. 후대의 실록엔 불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이 정도로 세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현대에 국사를 공부하거나 역덕후들에게는 킬방원(Kill + 이방원)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철의 군주였던 태종의 인간적인 면모와 그런 태종을 벌벌 떨게 만든 민인생의 뚝심이 만들어낸 재미난 에피소드로 회자되며, 방송에도 자주 언급되어 대중들에게도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실록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사실 해외에선 일상인 유명인사와 파파라치의 관계의 원조라고 해도 상관없을듯(…)

3. 세종실록

임금이 상왕을 따라 계산(鷄山)에서 사냥을 하는데, 경기도 도관찰사(都觀察使) 서선(徐選)이 와서 알현하거늘, 상왕이,

"이 후부터 관찰사는 와서 알현하지 말라."[3]

고 명하였다. 상왕이 일찍이 하연으로 하여금 정부와 육조에 유시하기를,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또 문과 무에 어느 하나를 편벽되이 폐할 수는 없은즉, 나는 장차 주상과 더불어 무사(武事)를 강습하려 한다."

고 하였다.
세종 즉위년(1418) 10월 9일 을유 1번째기사
위의 '사관이 알게 하지 마라'와 더불어 태종의 사냥 애호를 보여 주는 사례이다. 상왕이 되자 여유가 생겨서 오히려 더 사냥을 나가려 하고, '아들이 자꾸 살이 찌는 것 좀 봐라. 그러니 같이 나가서 운동도 좀 하자!'라는 식으로 사냥 나갈 핑계를 대는 것을 보면 태종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전략)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音)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반된다.’ 하였는데,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또 소(疏)에 이르기를, ‘새롭고 기이한 하나의 기예(技藝)라.’ 하였으니, 내 늘그막에 날[日]을 보내기 어려워서 서적으로 벗을 삼을 뿐인데,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또는 전렵(田獵)으로 매사냥을 하는 예도 아닌데 너희들의 말은 너무 지나침이 있다. 그리고 내가 나이 늙어서 국가의 서무(庶務)를 세자에게 오로지 맡겼으니, 비록 세미(細微)한 일일지라도 참예하여 결정함이 마땅하거든, 하물며 언문이겠느냐. 만약 세자로 하여금 항상 동궁(東宮)에만 있게 한다면 환관(宦官)에게 일을 맡길 것이냐. 너희들이 시종(侍從)하는 신하로서 내 뜻을 밝게 알면서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중략)

"정창손(鄭昌孫)은 말하기를,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반포한 후에 충신·효자·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資質) 여하(如何)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 하였으니,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

하였다. 먼젓번에 임금이 정창손에게 하교하기를,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세종 26년(1444) 2월 20일 1번째 기사

최만리를 필두로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상소를 올리자, 이에 대해 강하게 반론하는 세종대왕의 모습이다.

앞 내용은 최만리의 주장을 반박하는 부분이다. 본래 세종대왕은 평상시엔 방대한 기반 지식을 바탕으로 논리적인 논박을 행하였다. 그런데 이때만큼은 논점을 살짝 회피하며 의견을 묵살하고 권위로 찍어누르는 매우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 상소에 대한 세종대왕의 반박인 만큼, 해당 상소 내용을 같이 봐야 이해가 편하며 해당 부분은 최만리 문서를 참조할 것.
  • 설총의 이두: 세종대왕이 반박의 예시로 언급한 설총의 이두는 최만리가 미리 언급했다. 최만리는 상소문에서 이두와 한문이 겹치는 부분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고, 이두는 한자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확장팩 내지는 MOD에 가까운 추가 개념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따라서 최만리는 이두를 단순히 '백성을 편리하게 함'이라는 목적만을 가지고 두둔하지는 않았다. 세종이 '목적'이 같다는 이유로 이두도 되니 훈민정음도 된다고 주장한 것은 논점을 빗겨간 것.
    여기서 세종이 제대로 반박하려면 '이두가 한자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거나 '훈민정음도 한자를 기반으로 했다'거나 혹은 '문자는 한자 자체를 근간으로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어야 했다. 하지만 첫째와 둘째는 완벽히 틀린 사실이며, 셋째는 아무리 세종대왕이었어도 당시의 한자 문화와 유교 기반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어물쩍 넘어간 것이다.
  • 운서(韻書)를 아느냐: 전형적인 '권위에 기대는 오류'다. 세종대왕이 최만리보다 음성학에 대해 더 잘 아니까 새 문자를 만드는 자신의 행동은 정당하다는 것. 하지만 최만리의 상소를 보면 최만리는 훈민정음의 구조에 대해서는 완벽하다고 평가를 내렸다. 다만, 최만리는 훈민정음이 가져올 파장과 이로 인해 찾아올 한문 교육의 붕괴, 나아가 유교 학문 연구의 단절을 우려한 것이다. 즉 '음성학 구조적 측면'이 아닌 '사회적 측면'을 가지고 비판한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필요 없는 논점이다.
  • 어찌 옛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여 하는 것이겠느냐: 이 지적은 최만리가 "학문에 있어 새로운 것을 시도해 성공한 역사가 없습니다." 하는 지적에서 나온 반론인데 일단 훈민정음은 명백히 새로운 물건이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이 새로운 것이라는 지적에 자신이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내놓는다. 평소에 옛것을 좋아할지언정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는 있으며, 설령 세종대왕이 매우 보수적이고 옛것만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라 해도 어쨌든 훈민정음이란 것을 새롭게 내놓은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결국 세종의 답은 완전히 논점을 이탈한 답변으로, 세종이 제대로 반박하고 싶었으면 '학문에 있어 새로운 시도를 해서 성공한 사례'를 들어 반드시 실패했다는 최만리의 주장이 틀렸음을 보임과 함께 나아가 훈민정음의 성공 가능성을 논해야 했다. 토론을 좋아하는 평소의 세종이었으면 결코 하지 않는 답변 방식으로 그만큼 세종이 최만리의 상소에 적잖게 흥분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런 식의 논법은 세종이 추구하던 토론과 논박을 통한 국정운영 방식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자세고, 오히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이 아주 잘 써먹었던 방법이다. 비논리적인 논박이 많다는 점에서 내심 세종 본인 스스로도 최만리의 논점을 완벽하게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는 어렵다고 여겼음을 이 일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뒷 내용은 인터넷에 흔히 돌아다니는 '세종대왕이 대노한 일화'로 널리 알려져 있는 내용이다. 위의 최만리의 반대 상소에 대한 반응과 같은 날의 기사이다. 정창손훈민정음의 창제 의도는 물론이고, 공자자로로 대표되는 유교의 기본적인 교화 사상과 반하는 막말을 늘어놓자 세종이 이를 인용하면서 한마디 하는 부분이다. 세종으로선 오히려 최만리의 주장보다 이 정창손의 주장을 더욱 부정적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최만리 등 다른 신하들이 한 발언은 '반대 의견' 정도로 치부할 수 있고, 나름대로 논리를 갖춘 이성적인 주장이어서 함부로 반박하기 힘들어 일부러 권위로 찍어누르는 화법을 써야 했다. 하지만 정창손의 주장은 사람의 자질은 태어날 때부터 등급이 매겨져 있다는 내용으로,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에서는 절대 해서는 안 될 발언이었다. 현대로 치환하자면 '국민은 개돼지다'급의 민주주의를 무시하는 막말로, 내용 자체가 도저히 말이 안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뭐 딱히 치환 안 해도 현대에도 저딴 소리를 하면 난리난다.

물론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자료들과는 다르게 실록 원전에는 다소 정제된 언어로 적혀있지만,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용속한' 같은 수식어로 적혀 있는 걸 봐선 실제로도 세종대왕이 정창손을 꽤나 험악하게 비난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최만리를 비롯한 다른 신하들은 간단히 벌주는 선에서 끝났지만 정창손은 끝내 파직당하고 만다. '반드시 무리로'라고 하셨다는 대목에서 아주 그냥 이를 가셨을 듯한 뉘앙스인데?
참고로 이 내용은 정창손 본인이 손댔을 가능성도 있다. 문종 대에 세종실록을 정리, 편찬할 당시 정창손도 작업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의정부(議政府)의 영의정(領議政) 하연(河演)·좌의정(左議政) 황보인(皇甫仁)·좌찬성(左贊成) 박종우(朴從愚)·좌참찬(左參贊) 정분(鄭苯)·우참찬(右參贊) 정갑손(鄭甲孫)·예조 판서 허후(許詡)가 동궁(東宮)의 병이 나은 것을 하례하였는데, 임금이 연(演) 등에게 이르기를,
"홍희(洪熙) 원년(元年)에 칙서(勅書)를 영접할 때, 내가 병이 있어서 세자(世子)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고, 경술(庚戌)·신해 연간(辛亥年間)에 창성(昌盛)이 왔을 때와 연전(年前)에 왕무(王武)가 왔을 때에도 역시 세자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였다. 내가 이미 병들고 세자도 또한 평복(平復)되지 못하였으므로, 세손(世孫)으로 하여금 조서(詔書)를 맞이하게 하려는 것은 명분(名分)이 이미 정해진 것이고, 또 나이가 어리므로 행례(行禮)할 때에 비록 잘못 실수가 있을지라도 저들이 반드시 허물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고 넓은 의복을 입고 높은 계단을 오르내릴 때 만(萬)에 하나라도 잘못됨이 있다면 후회됨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종친(宗親)을 대우함이 매우 박해서, 그 사는 집이 담장을 높게 쌓아서 죄수를 가두는 옥과 같은데, 그러나, 황제가 유고(有故)하면 반드시 종친(宗親)으로 하여금 섭정(攝政)하게 하여 천지(天地)·종묘(宗廟)·사직(社稷)에 제사지내기까지 섭행(攝行)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제 세상이 돌아가기를 점점 옛날과 같지 아니하여 임금이나 세자가 연고가 있어도 대신(大臣)이 섭정(攝政)할 수 없고 반드시 왕자로 하여금 섭정하게 하는데, 섭정하는 것도 오히려 그러하거든 하물며 조칙(詔勅)을 대신하여 맞이하는 것이겠는가.
대저 비록 좋은 법일지라도 만약에 한 사람이 잘못 의심을 내게 되면 여러 사람이 모두 현혹되는데, 나와 동궁이 함께 병이 있고 장손(長孫)도 또한 어리니, 경들은 잘 제도를 의논하여 정해서 더벅머리 선비들에게 기롱을 받지 않게 하라. 근일에 동궁이 나를 보러 왔을 때 평지(平地)는 행보(行步)가 편이(便易)하나 섬돌을 오를 때에는 다리와 무릎에 힘이 없었으니, 사신(使臣)이 만약 내월(來月)에 입경(入京)하게 되고 동궁의 몸이 평강(平康)하다면, 전정(前庭)에 나가서 조칙(詔勅)만을 받게 하고, 문밖에서 명령을 맞이하는 것과 사신에게 잔치를 베푸는 것은 왕자로 하여금 대신하게 하는 것이 어떠할까. 이제 예조 낭청(禮曹郞廳)으로 하여금 사신에게 묻기를, ‘전하(殿下)와 세자(世子)가 병이 있으니 장차 어느 사람으로 하여금 조칙(詔勅)을 대신 맞이하게 함이 옳겠는가.’ 하려 한다. 그러나, 예로부터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고 칭하였는데, 먼저 사신에게 의식을 물어서 정하지 아니하면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까."

하니, 연(演)과 인(仁)이 아뢰기를,

"동궁의 병환이 이제 비록 나아가지만 조복(朝服)을 입고 조서를 맞이하기는 어려울 것이오니, 마땅히 왕자로 하여금 대행(代行)하게 하고, 후일에 태평관(太平館)으로 사신을 가 보게 하는 것이 편할 듯하옵니다."

하고, 종우(從愚)·분(苯)·갑손(甲孫)·후(詡)는 아뢰기를,

"동궁이 조서를 맞이할 수 없다는 뜻을 미리 사신에게 알리고, 만약에 사신이 내월(來月)에 입경(入京)하게 되면 동궁께서 전정(殿庭)에 나가 조서를 받게 하고, 문밖에서 명령을 맞이하는 것과 연향(宴享)하는 것은 왕자(王子)로 하여금 대행(代行)하게 함도 역시 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서를 맞이하는 의식은 전에 만든 의주(儀注)로써 하되, 사신이 압록강을 건너기를 기다려 다시 아뢰게 하라."

하였다. 전번에 강서원(講書院)에서 왕세손(王世孫)으로 하여금 조칙(詔勅)을 대신 받게 하도록 청하였었는데, 더벅머리 선비[竪儒]란 말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1450) 1월 18일 갑오 1번째기사 (1450년) 임금과 동궁이 몸이 불편하여 조서를 맞이하는 방법에 대해 대신들과 의논하다

세종대왕의 욕설 2탄(...).

명나라에서 황제의 즉위를 알리는 사신이 와서 이를 영접하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 세종은 병이 깊어서 영접 행사를 주최하기 곤란했다. 실제로 세종은 이후 약 1달 뒤인 1450년 2월 17일에 사망했다.

원래대로라면 당시 대리청정을 하던 왕세자인 문종이 맡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하필이면 문종 역시 건강이 매우 나쁜 상태였다. 그런데 이때 강서원의 관료들은 '왕세손에게 일을 맡기면 된다'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당시 왕세손인 단종은 나이가 겨우 9살이었다.[4] 평상시에도 무리한 일이지만, 이 때는 명나라와 조선의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던 때였다. 이 사신이 오기 바로 전에 토목의 변이 일어나서 정통제가 포로로 잡히고, 북경이 오이라트에게 포위되자 병부상서 우겸이 경태제를 옹립하고 북경 방어에 총력을 기울여서 겨우 물리쳤었다. 당시 명나라에서 온 사신은 바로 이 경태제의 즉위를 알리고 이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 문제를 정리하기 위한 중요한 임무를 띄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9살 어린이에게 외교를 맡긴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5] 그래서 세종은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이냐며 '더벅머리 선비놈'들이라고 욕을 한 것. 물론 이 역시 위의 내용과 비슷하게, 실제로는 더욱 과격하고 걸쭉한 욕설을 하였고 실록에서 적당히 윤색했을 가능성도 있다.

결국 사신을 영접하는 공식 행사는 문종이 참석을 강행하였고, 그외의 실무적인 접대 부분은 수양대군이 맡아서 처리하였다. 아니나다를까, 명나라 사신도 이 문제를 지적하면서 '왕자(수양대군)가 세자와 동모제(同母弟, 친형제) 지간이 맞긴 합니까? 주상 전하와 세자가 모두 병환이 깊어서 조서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도 (본국의) 조정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곤란해집니다. 차라리 세자께서 병환이 다 나을 때까지 1년이라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며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이 때문에 조선 측에서는 사신에게 정말로 병이 심해서 곤란하다는 부분을 납득시키고 조서를 받는 공식 행사만이라도 세자 문종이 부축을 받아 참석하겠다고 말해서 간신히 달랠 수 있었다. 세종실록 127권, 세종 32년 1월 26일 임인 4번째 기사

4. 성종실록

특진관 예조판서(禮曹判書) 유지(柳輊)가 아뢰기를,

"성안에 요귀(妖鬼)가 많습니다.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의 집에는 귀신이 있어 능히 집안의 기물(器物)을 옮기고,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두(李杜)의 집에도 여귀(女鬼)가 있어 매우 요사스럽습니다. 대낮에 모양을 나타내고 말을 하며 음식까지 먹는다고 하니, 청컨대 기양(祈禳)하게 하소서."

하자, 임금이 좌우에 물었다. 홍응이 대답하기를,

"예전에 유문충(劉文忠)의 집에 쥐가 나와 절을 하고 서서 있었는데, 집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유문충에게 고하니, 유문충이 말하기를, ‘이는 굶주려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다. 쌀을 퍼뜨려 주라.’고 하였고, 부엉이가 집에 들어왔을 때도 역시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였는데, 마침내 집에 재앙이 없었습니다. 귀신을 보아도 괴이하게 여기지 아니하면 저절로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정창손의 집에 괴이함이 있으므로 집사람이 옮겨 피하기를 청하였으나, 정창손이 말하기를, ‘나는 늙었으니, 비록 죽을지라도 어찌 요귀로 인하여 피하겠느냐?’고 하였는데, 집에 마침내 재앙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부엉이는 세상에서 싫어하는 것이나 항상 궁중의 나무에서 우니, 무엇이 족히 괴이하겠는가? 물괴(物怪)는 오래되면 저절로 없어진다."

하였다. 유지가 아뢰기를,

"청컨대 화포(火砲)로써 이를 물리치소서."

하니, 임금이 응하지 아니하였다.
성종 17년(1486) 11월 10일 2번째 기사

대신들의 집에 귀신이 있다는 소문이 돌자 퇴마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장면. 노신 정창손의 집에는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일어나 물건들이 어딘가로 움직이고, 이두의 집에는 여자 귀신이 출몰해 대낮에도 밥을 먹고 돌아다닌다는 등 대신들이 여러 썰을 풀고 성종은 다른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대신들은 "그런 게 나타나도 무서워하거나 괴이하게 여기지 않으면 별 일 없을 겁니다"라고 의견을 내고, 성종도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았는지 "귀신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없어진다"로 이야기를 적당히 마무리 하려는 찰나, 맨 처음 화제를 꺼냈던 예조판서 유지가 까짓 거 대포로 쏴서 물리쳐보자며 무시무시한 안건을 내놓는다. 당연히 성종은 이를 퇴짜를 내놓았다.

유지가 정말로 그게 퇴마 작용을 할거라 믿었던 것인지, 귀신이 대포에도 안 죽고 배기겠냐는 의미로 말한 것인지는 미지수. 개드립으로는 이때 아니면 언제 서울 한복판에서 대포를 쏴보겠냐는 마인드로 권유를 한 것이라는 화력덕후다운 해석을 내놓는 경우도 있다. # 그냥 정창손과 이두가 싫어서 집을 날려버리려고 한 게 아닐까 다만 이는 음양오행설로는 설명이 되는데, 귀신 같은 존재는 음기를 가진 존재이니 대포처럼 양기가 강한 화력으로 제압하자는 논리. 실제로 광해군 때 요사스러운 기운이 있다며 동궁에 포를 쏜 일이 있다.

의외로 미군도 애용하는 방법이다

이중 호조좌랑 이두의 집에 나타났다 하는 여귀는 고수여칠로 알려진 하체만 존재하는 악귀이다. 다른 시선으로는 이두와 집 안 사람들의 귀에 10년전 돌아간 고모의 목소리로 들렸다 하여 '고모귀'라고도 불렸다.

보름 후 성종은 이두에게서 예의 귀신에 대해 다시 물어보았다.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듣건대 호조 좌랑(戶曹佐郞) 이두(李杜)의 집에 요귀(妖鬼)가 있다고 하는데, 지금도 있는가? 그것을 물어서 아뢰라."

하니, 이두가 와서 아뢰기를,

"신의 집에 9월부터 과연 요귀가 있어서, 혹은 나타나기도 하고 혹은 자취를 감추기도 하며 창문 종이를 찢기도 하고 불빛을 내기도 하며 기와나 돌을 던지기도 하는데, 사람이 부딪혀도 다치는 일은 없으나 다만 신의 아내가 살쩍에 부딪혀 잠시 다쳐서 피가 났습니다. 종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사람과 말을 하기를 사람과 다름이 없고, 비록 그 전신(全身)은 보이지 아니하나 허리 밑은 여자의 복장과 방불한데 흰 치마가 남루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고, 단지 밤에 두 번 사람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뿐입니다. 신이 처자(妻子)를 이끌고 다른 지붕으로 피해 있었더니, 얼마 아니되어 또 따라와서 때없이 나타났다가 없어졌다가 하기에, 신이 생각하기를, 피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고 여기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는 요귀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성종실록 197권, 성종 17년(1486) 11월 25일 병인 4번째기사
이두는 귀신의 패악질에 이기지 못하여 결국 거처를 옮겼으나, 또 다시 귀신이 따라와서 본가로 돌아왔더니 귀신이 없었다 하였다. 하지만 용재총화에 따르면 이후 다시 귀신이 나타나여 이두를 괴롭히기 시작하였고, 얼마 뒤 이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모진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5. 연산군일기

전교하기를,

"안양군(安陽君) 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 이봉(李㦀)을 목에 칼을 씌워 옥에 가두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숙직 승지 두 사람이 당직청에 가서 항과 봉을 장 80대씩 때려 외방에 부처(付處)하라. 또 의금부 낭청(郞廳) 1명은 옥졸 10인을 거느리고 금호문(金虎門) 밖에 대령하라."

하고, 또 전교하기를,

"항·봉을 창경궁(昌慶宮)으로 잡아오라."

하고, 항과 봉이 궁으로 들어온 지 얼마 뒤에 전교하기를,

"모두 다 내보내라."

하였다. 항과 봉이 나오니 밤이 벌써 3경이었다.

항과 봉은 정씨(鄭氏)의 소생이다. 왕이, 모비(母妃) 윤씨(尹氏)가 폐위되고 죽은 것이 엄씨(嚴氏)·정씨(鄭氏)055) 의 참소 때문이라 하여, 밤에 엄씨·정씨를 대궐 뜰에 결박하여 놓고, 손수 마구 치고 짓밟다가, 항과 봉을 불러 엄씨와 정씨를 가리키며 ‘이 죄인을 치라.’ 하니 항은 어두워서 누군지 모르고 치고, 봉은 마음속에 어머니임을 알고 차마 장을 대지 못하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마구 치되 갖은 참혹한 짓을 하여 마침내 죽였다.

왕이 손에 장검을 들고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침전 밖에 서서 큰 소리로 연달아 외치되 ‘빨리 뜰 아래로 나오라.’ 하기를 매우 급박하게 하니, 시녀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고, 대비는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왕비 신씨(愼氏)가 뒤쫓아가 힘껏 구원하여 위태롭지 않게 되었다.

왕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 대비(仁粹大妃)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필을 가져다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씨·정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담그어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연산군일기 52권, 연산 10년(1504) 3월 20일 신사 5번째기사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1) 이복동생들인 이항과 이봉을 불러 자신들의 어머니를 쳐 죽이게 함
2) 자순대비의 침전 밖에서 장검을 들고 나오라고 재촉했으나 중전 신씨의 만류해 그만둠
3) 인수대비의 침전으로 가 왜 우리 어머니를 죽이셨습니까!라며 폭언을 내뱉음
4) 자기 아들들에게 맞아죽은 계모 둘의 시신을 젓갈로 담가 아무 곳에나 버렸다.

갑자사화의 시작인 연산군의 만행을 다룬 부분이다. 연산군 시대의 하이라이트인 갑자사화의 시작인데다 연산군이 감정적으로 폭발하여 각종 만행을 저지르는 극적인 장면이어서 연산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창작물에선 반드시 묘사하는 장면이다.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쳐들어가서 폐비 윤씨의 죽음을 언급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라고 하는데, 정황상 폭언을 퍼부었을 가능성이 높다. 야사에선 이 때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 박치기를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위에 나오듯이 실록에선 기록이 없다. 그렇지 않아도 인수대비는 이전부터 병이 위중한 상태였는데, 이 일로 충격을 받아서 악화 되었는지 1달 후 사망한다.

6. 중종실록

(전략) 상이 상참(常參)을 받고, 이어 최임을 불러 보고 들어가 싸운 절차를 자세히 진달하라고 명하니, 최임이 대답하기를,

"19일 진시(辰時)에 교전하여 신시(申時)에 싸움이 끝났는데, 우리 군사는 한 사람의 사상자도 없었습니다. 강윤희는 적장 성친(盛親)의 말을 빼앗아 탔고, 좌·우도 병선 합계 30여 척이 바다로 들어가고, 황형·김석철·유담년은 세 길로 나누어 육지로 쫓아 들어가 쳤는데, 맞아 싸운 자는 모조리 잡히고 달아나서 배를 타다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얼마인지도 알지 못할 정도입니다. 적선 3척이 침몰되고 배를 타려는 자가 있으면 왜구가 저희끼리 칼을 뽑아 팔뚝을 쳤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왜적이 모두 제포에 모이고 다른 데는 둔취한 곳이 없었는가."

하자 최임이 대답하기를,

"제포뿐이었습니다. 제장들이 처음에 생각하기를 ‘적이 험한 곳에 웅거하여 나오지 않으면 우리들이 무력을 쓰기가 어렵겠다.’ 하였었는데, 마침 적이 제포 동문(東門) 바깥 작은 산에 결진하여 혹은 차일을 치고 혹은 방패를 설치하였으므로, 이들과 싸워 이 공을 이룬 것입이다. 또 교전하는 처음에 선봉군에게 각각 녹각목(鹿角木)을 가지고 적병을 향하여 왜적이 가까이 오면 이것을 설치하여 막게 하니 적이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습니다. 또 돌을 던지는 군사로 한 전봉(前鋒)을 삼았는데, 적의 방패가 모조리 돌팔매에 파괴되었습니다. 【안동(安東) 사람들은 풍속이 돌을 던져 유희하는 것을 숭상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것을 써서 적을 깨뜨렸다.】 전일에 제포·웅천의 관사가 다 적병에게 분탕(焚蕩)되었다고 들었는데, 적이 물러간 뒤에 보니 관사는 그대로 있고 불탄 것은 웅천의 동문뿐이었습니다."

하였다.
중종 5년(1510) 4월 22일 1번째 기사

석전짱돌 문서에서도 언급되는, 돌팔매로 왜구를 격퇴한 내용.
(전략) 남곤이 아뢰기를,

"왜인도 활을 잘 쏘던가?"

하니, 나사항이 말하기를,

"비록 쏘는 자가 있었으나 활이 강하지 못하여, 맞은 자가 다치지 않았습니다."[6]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각궁(角弓)을 사용하여 쏘던가?"

하매, 나사항이 아뢰기를,

"왜인들이 방패 안에서 활을 쏘았으므로 무슨 활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남곤이 말하기를,

"방패 안에 있었다면 너희들이 어떻게 쏘아 맞혔는가?"

하니, 나사항이 말하기를,

"그 방패 위에 두 귀[耳]가 있었는데, 왜인들이 반드시 이를 통하여 엿보았으므로 쏘아 맞힐 수 있었습니다."

하였다. (후략)
중종 18년(1523) 7월 6일 2번째 기사

전라도에 왜구들이 나타나자 이들과 교전하면서 얻은 전과에 대해 보고하는 내용. 왜인들이 화살을 막기 위해 방패를 들었지만, 시야 확보용으로 뚫어놓은 구멍 사이로 화살을 쏘아 맞췄다는 신들린 듯한 활솜씨를 보여주고 있다.이래서 항상 올림픽에서 양궁 1등을 하는 건가

7. 인종실록

우부승지(右副承旨) 송세형(宋世珩)이 고문(誥文)[7]을 읽다가 중종(中宗)의 성휘(姓諱)를 읽지 않았는데, 부사(副使)가 알고 불러서 묻기를,

"아버지 앞에서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고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르는데 그대의 임금을 위하여 사사로이 휘(諱)하니, 이것도 예(禮)입니까?"

하니, 송세형이 말하기를,

"경근(敬謹)이 지극하여 숨이 가쁘고 목소리가 작아서 분명하지 못하였을 뿐이지, 감히 휘하였겠습니까. 나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하니, 부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렇습니까? 어찌 그랬겠습니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선왕의 휘(諱)를 차마 범하여 읽지 못하는 것은 신하의 정으로서는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인데도 임금 앞에서는 신하의 이름을 부른다는 말로 반드시 힐문하려 한 것은 예(禮)를 안다고 할 수 없다.
인종 1년(1545) 5월 2일 3번째 기사

중종이 죽고 난 이후 명나라에서 조문단을 파견했는데, 중국의 사신 앞에서 황제가 보내준 조문에 적힌 중종의 이름을 피휘했다고 해서 생긴 일화. 왕조 국가에서 신하된 도리로 왕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문제는 명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참석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원칙상 사신은 황제의 대리자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황제의 앞에서 행동하듯이 행동해야 했다. 조선의 왕은 명목상 중국의 신하였으므로 황제에게 보내는 서신이나 황제가 보내오는 문서에는 일종의 압존법적 용법을 적용하여 피휘를 하지 않았는데, 사신이 자기 앞에서도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시비를 건 것.

다행히 '말소리가 작았을 뿐이지 피휘한 게 아니다'로 어물쩍 넘어가긴 했지만 사관은 슬픈 일로 모인 이 마당에 꼭 그걸 따져야겠냐는 투로, '중국 사신이 무례하다'고 논평하며 깠다. 특히 녹취 기록물의 성격을 띠기도 하는 실록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누구누구가 말하기를(○○曰)'같이 건조하게 적어놓는 게 일반적인데 이 부분에는 사관이 '부사는 웃으며 말했다(副使笑曰)'고 웃었다는 점을 강조하여 적어놓았다. 명나라 사신은 조문단 자격으로 왔으니 장례식에 조문 온 사람이나 마찬가지인데 꼬투리를 잡고 슬며시 웃은 모습을 아주 아니꼽게 본 모양.

8.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을사년(乙巳年)의 공신을 삭제하고, 윤임(尹任) 【찬성】 ·유 【계림군】 등의 관작을 회복시키도록 명하였다.

이때 대비(인성왕후)의 병이 계속 낫지 않았는데도 궁인들이 대부분 을사 원종 공신(原從功臣)의 계레 붙이들이었으므로, 대비가 그 공신을 삭제하려는 것을 원망하여 언제나 (上)의 앞에서 대비의 증세가 심할 정도로 이르지 않았다고 아뢰었다.

하루는 (上)이 문안한 뒤에 그대로 나아가 뵙고서
'녹훈(錄勳)한 것은 바로 선조(先祖)에서 한 지극히 중대한 일이므로 감히 가벼이 고치지 못합니다. 외정(外廷)의 의논을 따르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하니,

대비가 '견딜 수 없다(不堪)' 고 잇따라 부르짖으면서,
'국가의 큰 일을 어찌 미망인(未亡人)을 위해서 가벼이 고칠 수 있겠소.' 하였다.

이 물러나서 계단에 미치지 못하였는데 대비가 소리를 내어 통곡하니, 상이 듣고 자리를 가져다가 계단 아래에 앉아 머리를 떨군 채 한동안 있다가 늙은 궁인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사가에 있으면서 녹봉을 받아 먹으면 일생을 편안히 보낼 터인데 불행스럽게도 여기에 이르러 난처한 일을 만났다.' 하였다.

며칠 후에 대비의 병이 위독해졌는데 대비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나는 지하(地下)에서도 죄명(罪名)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하고, 말을 마치자 손발이 모두 싸늘해졌다.
궁인에게 달려가 보고하니 상이 즉시 나아가 뵈었으나 이미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중전도 와서 서로 대하여 울었다.

상이 대비에게 아뢰기를, '녹훈을 삭제할 것이니 안심하고 병을 조리하소서.' 하니, 대비가 기쁜 빛을 나타냈는데, 눈이 저절로 감겼다.

상이 물러가자 다시 깨어나서 사람을 보내어 에게 사례하기를,

'상의 은혜가 망극하여 보답할 바를 알지 못하겠소.' 하였다.
다음날 대비가 승하하였다.

선조수정실록》 11권, 선조 10년(1577, 명 만력(萬曆) 5년) 11월 1일, 계축 1번째기사.

인종비 인성왕후가 죽기 직전 선조가 을사사화의 위훈 삭제를 시행한 일이다. 을사사화의 공신들을 인정하면서 내세운 명분이 '정통 후계자 명종을 즉위시킨 공'인데, 이는 거꾸로 말하면 명종이 즉위할 당시 '누군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공신들이 명종을 즉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러면 그 '누군가의 방해'는 당연히 인성왕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을사사화 당시 인성왕후와 그의 친정인 반남 박씨 가문은 사화를 주도한 문정왕후가 관용을 베풀어서 화를 면할 수 있었지만, 인성왕후는 이 문제에 대해 굉장히 괴로워했다.

하지만 선조로서도 이 위훈 삭제 문제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자칫하면 공신의 위훈 삭제 문제로 터진 기묘사화와 비슷한 일이 터질 수도 있었다. 한 예로 이전에 이이가 이 위훈 삭제를 주장한 적이 있었는데, 이준경은 이에 대해 격렬히 반대한 적이 있었다. 이준경의 스승이 바로 조광조였고, 이준경은 어린 시절에 스승이 이 문제로 죽임을 당한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 을사사화는 명종과 강한 연관이 있었으므로 위훈 삭제는 자칫하면 명종의 정통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었고, 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선조 본인의 정통성까지 위협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선조 또한 쉽게 건드릴 수 없었고, 본문에 나오듯이'왜 내가 왕위에 올라서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만나게 되었나'라며 한탄한 것. 인성왕후가 위독한 상태에 빠지자 선조는 결국 위훈 삭제를 하겠다는 결단을 내렸고, 그제서야 인성왕후는 한을 풀고 세상을 떠났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해 한산(閑山) 싸움의 패배에 있어 수군(水軍) 제장들에 대하여 즉시 공(功)과 죄(罪)를 가려내어 법대로 처리했어야 했는데도, 아직까지 고식적인 습관에만 젖어 위엄을 밝히는 교훈을 보여줄 생각을 않고 있다. 지금까지 한 사람의 죄도 바로잡지 않고 한 사람의 공도 포상을 하지 않고서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진 채 공을 세워 속죄하도록 하자는 것에 불과한데, 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어떠한 소견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다가는 비록 한백(韓白)058) 이 장수가 되더라도 싸움을 승리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도원수마저도 대수롭잖은 일로 보아 한 명의 교위(校尉)라도 목을 베어 군율(軍律)을 크게 진기시키지 않고 있으니, 어떻게 일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옛사람이 삼군(三軍)으로 하여금 죽음을 영광으로 삶을 치욕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권징(勸懲)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 한산 싸움에 대하여 실시한 권징은 과연 어떠한가. 이 일은 여느 심상한 일이 아니니 서둘러 권징을 시행해야 할 것이다. 세월이 점점 오래되고 나면 사실을 밝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원균(元均)이 주장(主將)으로서 절제(節制)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적들로 하여금 불의에 기습을 감행하도록 하여 전군(全軍)이 함몰되게 하였으니 죄는 모두 주장에게 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각 장사들의 공죄(功罪)에 대해서도 신상 필벌을 행하여 군기(軍紀)를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균 한 사람에게만 핑계대지 말라."

하였다. 【이산해(李山海)와 윤두수(尹斗壽)가 그렇게 아뢰게 한 것이다. 】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99권, 선조 31년(1598) 4월 2일 병진 2번째 기사, 한산 전투에서 패배한 장수들을 징계하도록 하니, 비변사가 원균의 징계를 청하다
한산의 패배란 칠천량 해전을 의미한다. 칠천량에서 참패한 뒤, 선조는 장수들 중 공과를 엄히 물어 기강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변사에선 '다른 장수들도 공과 죄가 있는 건 맞지만 최고 지휘관인 원균이 가장 책임이 큽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선조는 '원균만 잘못한 게 아닌데?'라고 우긴 것.[8]

왕이 인지 부조화에 빠지자 그나마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알고 있던 사관은 이 참극을 보며 '오직 원균 한 사람 때문에 이런 참패가 벌어졌으니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라며 크게 분노하고 있다. 글 자체가 완전히 절망에 빠져 있는 문체인데 그만큼 당시 원균의 행적과 그 결과는 참담한 수준이었다.
상이 별전(別殿)에 나아가 《주역(周易)》을 강하였다. 영사 유영경(柳永慶)이 아뢰기를,

"지난번 가미이진탕(加味二陳湯)을 지어 올렸는데 진어(進御)하신 후에 기후(氣候)가 어떠하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복용하는 중이다. 내 병은 일조일석에 얻어진 것이 아니어서 언제 나을지 기약이 없다. 매번 경이 와서 애써 문안하니 그 때문에 병이 중해진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삼가 주상(主上)을 살피건대 춘추가 아직 높지 않은데 질병이 계속되어 약이(藥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듣건대 작년 가을 전교에 '천하에 어찌 어미 없는 나라가 있겠는가.' 하면서 군신(群臣)들을 협박하여 급급하게 나이 어린 비(妃)를 맞아들였다. 주부(主婦)가 없는 예(禮)로 논한다면 맞아들인 후에는 알묘(謁廟)의 의식과 증상(蒸嘗)의 제사를 한결같이 예제(禮制)에 따라야 할 터인데,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대해 윤허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재취(再娶)하지 않는 예(禮)로 말한다면, 1후(后) 3부인(夫人) 9빈(嬪) 27세부(世婦) 81어처(御妻)가 이미 등극하던 초기에 갖추어졌으니, 1후가 훙(薨)하였어도 궁(宮)을 대신 다스릴 사람이 있는데 재취하는 데 급급한 것은 어째서인가. 옛날 송 태조(宋太祖)를 보건대 잠자리에서 늦게 일어났다는 것으로 궁녀를 죽였으니 이는 좀 지나친 듯하지만 그가 여색(女色)에 연연하지 않은 뜻을 상상할 수 있다. 제갈양(諸葛亮)은 추녀인 부인을 두었었다. 선유(先儒)들은 이에 대해 흥망(興亡)을 자기의 책임으로 삼은 자로서는 행동을 당연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했다. 국가가 한번 패란된 후로 기세가 쇠약해져서 위망(危亡)의 조짐이 한둘이 아니었다. 중훙(中興)에 대한 계책 가운데 급박한 것이 많은데도 먼저 백성에게 국모(國母)가 없는 것을 걱정하였으니, 질병의 발생이 아마도 여기에서 말미암았을 것이다. 치료하는 데의 묘방(妙方)은, 마땅히 마음을 깨끗이 가지고 욕심을 적게 하여 홀로 거처하며 잡념을 줄이면 병을 낫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질병 때문에 한두 달이 지나도록 경연에 나아가지 않으니, 옛날 한 고조(漢高祖)는 천하를 다투다가 상처가 극신해졌어도 함양궁(咸陽宮)으로 돌아가 척희(戚姬)를 대하지 않았었다. 지금 이 천리의 나라는 바로 자기 한 사람의 물건인데도 병 때문에 일을 폐하니, 기미를 아는 군자라면 반드시 미리 근심하였을 것이다.
선조 36년(1603) 3월 17일 1번째 기사
사관이 대놓고 "이 답도 없는 로리콘 자식. 어린 여자나 밝히니 뼈가 삭아 저리 아프지" 투로 선조를 탈탈 털었다[9]. 배경을 설명하자면,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는 임란 직후인 1600년에 사망하였고, 1602년에 51세였던 선조는 '나라의 안주인이 없어서야 되겠냐'면서 새 장가를 든다. 문제는 두 번째 왕비인 인목왕후가 당시 19살이었다는 것.[10][11].근데 60 넘은 나이로 15세 여자를 중전으로 들인 도 있다. 에이 그래도 그 왕은 오래 살았잖어[12]

현대적인 관점에 봐서도 나이 차이가 심각하게 많이 날 뿐더러 결혼을 일찍했던 조선 시대에는 딸뻘을 넘어서 거의 손녀뻘이었다. 위 실록 내용은 선조가 새 장가를 가고 난 뒤 1년이 지나고 나서 쓴 기사인데 이때 선조는 기사에 나오다시피 젊은 왕비와 재미를 보느라 정력에 좋은 탕약을 지어다 먹고 경연도 대충 나갔다. 왕의 눈치를 잔뜩 보는 대신들이 국정에 힘을 쓰라고 간언하기는 커녕 약을 지어 올렸는데 몸은 좀 어떻냐면서 비위나 맞추고 있는 것은 덤.

사관은 이 같은 행태를 비판하면서 왕이 어린 왕비와 노느라 체력적으로 힘들어 병이 나고, 굳이 국모의 자리가 비어있다면 있는 후궁 중에 한 명을 중전으로 올리면 되는데 왜 새로 장가를 가느냐면서 줄기차게 까고 있다.[13] '군신들을 협박하였다'느니 '위망의 조짐이 한둘이 아니다'라느니 등의 말을 대면서 꽤나 강도 높게 비판하고 있는데 실제로 이 시기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고작 2~3년 남짓한 시기에 지나지 않았다. 전후 피폐해진 국토를 복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왕은 외롭다고 징징댄 끝에 나이 어린 여자와 재혼이나 하고, 그러더니 몸이 허하다, 피곤하다 이런 소리나 늘어놓고 있으니 사관이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호조가 아뢰기를,
"대저 북도에서 온 사람은 모두들 '본군(本郡)은 채은(採銀)하는 까닭에 다른 고을에 없는 역(役)을 담당해야 한다. 이 때문에 기를 쓰고 은맥을 숨기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본조(本曹)가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모든 공물은 다과(多寡)를 막론하고 일체 견감하여 다른 고을에 이정(移定)함으로써 조금도 침탈함이 없이 은을 캐는 데 전력을 기울일 수 있게 하도록 약조(約條)를 분명히 세우고 후한 상을 줄 것이라고 효유하라고 본도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한번 신혈(新穴)을 지시하여 3천 냥 이상을 캘 수 있는 경우에는 당초에 지시한 사람이 공사천이면 면천하고, 군보(軍保)면 면역한 후에 6품 영직(影職)을 제수하고, 서얼(庶孽)이면 허통(許通)하고, 양반이면 우리 나라에서는 사족(士族)을 양반이라 한다. 동반 6품직에 제수하고, 60세 이상자면 노직 당상(老職堂上)을 제수할 것이며, 5천 냥 이상을 캘 수 있으면 등급을 더하여 논상하소서."
하니, 비망기로 이르기를,
"윤허한다. 서얼을 허통하는 것에 대한 것은 금석(金石) 같은 법전을 가벼이 훼손할 수 없다. 은혈(銀穴)을 보고했다는 이유로 동반직을 제수하며 정옥(頂玉)의 품계로 올리는 것은 더욱 불합리하니, 거행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면천·면역의 영(令)이 백성들에게 불신을 받은 지 오래되었다. 신의를 잃는 일은 상앙(商鞅)도 하지 않던 일인데 지금의 조정은 감사·수령과 함께 차마 하고 있으니 국가가 지금까지 보전된 것이 다행이다. 조정에서는 일이 급하면 호령을 내어 백성을 꾀고, 꾀고 나서는 감사·수령이 고을에 원역(員役)이 없다고 핑계대며 강제로 부리니, 백성들이 국가에 속은 것이 적지 않다. 통탄스럽기 그지없다.
선조 36년(1603) 3월 19일 2번째 기사
을 캐느라, 해야 할 일이 많은 북쪽 지방 백성들이 고생이 많고 은맥을 감추려 드니 이를 대비해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말. 왕과 대신들이 열심히 논의하고 있는 와중에 사관은 '조정에서 혜택을 준다고 약속만 하고 지키질 않으니 쓸데없는 탁상공론이다'라고 신나게 까고 있다. 여기서 사관은 상앙을 언급하는데, 상앙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이목지신(移木之信)'의 일화를 말하는 것이다. 즉, 사관은 어떤 제도를 시행할 때에는 국가와 백성 간의 확실한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취소선 드립마냥 사관이 말을 적어놓은 게 있는데 양반(兩班)이라고 적고 그 옆에 깨알같이 '우리 나라에서는 사족을 양반이라 한다(東方稱士族爲兩班)'고 적어놓은 것. 번역하는 과정에서 첨가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실록에 저렇게 적혀 있다! 아무래도 당시 사초를 적던 사관이 후세 사람들이 '양반'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수도 있다고 적어놓은 듯. 재밌는 점은 양반을 설명하면서 '사족'을 부르는 명칭이라고 적어놓았는데 현대에는 '사족(士族)'이 '양반(兩班)'보다 더 접하기 어려운 단어라는 점이다. 사족은 선비의 일족, 양반은 문반과 무반을 뜻한다.

9. 광해군일기

전라도 나주에 사는 진사 김종해(金宗海) 등 1백여 명이 쌀 1천 석을 바치면서 목사 유석증(兪昔曾)을 유임시켜 주기를 청했고, 함평(咸平) 백성들이 쌀 3백 석을 바치면서 전 현감 이홍망(李弘望)을 현감으로 제수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 당시 수령들을 제수하는 데 있어서 모두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박탈을 일삼았다. 그런데 유석증은 전에 영광(靈光)의 수령으로 있을 때 청백하고 근신하여 잘 다스렸고, 홍망도 청렴하고 근신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청을 한 것인데, 백성들의 마음 또한 감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 14년(1622) 10월 6일 무진 1번째 기사
광해군 집권 시절, 백성들이 어진 수령에게 제발 가지 말라고 부탁하며 유임의 대가로 쌀을 바친 내용이다. 기울임 처리된 구절은 실제로 사관이 쓴 주석이다. 감동적이라는 개인적인 평가까지 덧붙인 것으로 보아 이 일화가 사관에게 매우 인상깊었던 모양.

다만 사관도 알고 있듯 이 당시 수령은 부패했고 그 부패의 원인에는 광해군의 지나친 궁궐 증축으로 인한 재정 탕진에 있었다. 광해군 본인이 직접 매관매직을 행하여 간에 '잡채 참판' 같은 말이 떠돌았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그렇기에 절대 웃으면서 볼 순 없는 이야기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유임을 간절히 원한다면 그냥 집단으로 탄원하여 부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백성들이 목사를 유임시키기 위해 쌀을 바쳤다는 이야기는 유임시키는 데에도 돈(뇌물)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또 그렇게 바친 양이 1천 석이다. 당장 천석꾼이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감안해보자. 당연히 만석꾼에게 밀리지만 천석꾼도 충분히 부자다. 거기에 만석꾼은 비유적 의미가 강했지 실제로 만 석의 재산을 가진 이는 적었다. 즉 어줍잖은 액수가 아니라 상당한 거금을 들고 와서 유임시켜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 이만한 비용을 기꺼이 감내할 정도면 당대 수령들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백성들이 탐학하는 수령을 얼마나 피하고 싶었는지 대충 알 만하다. 부패한 수령들은 최소 천 석 이상의 뇌물과 수탈을 일삼았다는 것 아닌가.

10. 인조실록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엄한 분부를 누차 내렸는데도 심로 등은 털끝 하나 까딱하지 않고 더욱 새로운 말을 만들어서 위를 모욕하는데, 이는 무슨 의도인가. 승지는 살펴서 아뢰어라."

하니, 우승지 정치화(鄭致和)가 회계하기를,

"신들이 삼가 어제 간원(諫院)에서 올린 계사를 보니, 그 말에 과연 타당하지 못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를 모욕했다.’는 하교에 이르러서는 실로 대간(臺諫)의 본 마음이 아닌데 하교가 이처럼 엄하시니, 몹시 온당치 못하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개새끼(狗雛)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하였다.
인조 24년(1646) 2월 9일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에 담긴 '임금의 욕설'. 여기서 말하는 '개새끼'는 왕의 며느리였던 민회빈 강씨를 말하는 것이다.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지금도 분분하지만, 인조는 자신의 아들 소현세자와 그 며느리 민회빈 강씨를 철저하게 탄압하여 자신의 가계에서 아예 지워버리려고 했다. 민회빈 강씨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 과정은 순 어거지로 인조 혼자 떼쓴 것에 지나지 않았다.[14]주변 신하들도 이것이 왕의 억지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래도 며느리면 전하의 자식 아닙니까' 하고 좋게 말을 꺼내자 인조는 민회빈 강씨를 개새끼에 비유하며 그녀를 자신의 자식이라고 칭하는 건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까지 말했다.

실록에서 필터링 없이 직접적으로 이러한 욕설을 적어놓은 것은 거의 드문데 여기에서는 직접적으로 욕설을 실어놓았다. 이렇게 기록한 데에는 당대 사관도 이를 억지로 여겼으며, 인조에 대한 반동으로 사초에 그대로 필터링 없이 적어놓은 것 아니냐는 말이 있다. 즉, 후손들에게 두고두고 까여보라는 의도에서 적은게 아니냐는 추측. 저 내용대로라면 강빈의 시아버지인 인조는 사람이 아니고 라고 사관들이 왕을 욕한 거다. 실록에 있는 내용은 기반 사료가 되는 수많은 사초들 중에 추리고 또 추려서 작성한 것들인데 그럼에도 왕의 욕설이 대놓고 기록된 정도라면 당시 인조가 소헌세자 일가에 대해 날렸을 욕설은 이보다 더 심했을 것이다.

11. 숙종실록

(전략) 이날 새벽에 임금이 하련대(下輦臺)에 나아가 먼저 비망기(備忘記)를 나려 여러 선비들에게 게시하게 하였는데, 이르기를,

"학교(學校)를 설치하여 사방의 선비를 기르는 것은 대개 바른 학문을 연구하여 착한 것을 가리고 몸을 닦아서 인륜에 근본하고 물리에 밝게 하기 위한 것이니, 어찌 글을 짓고 녹(祿)을 구하기만 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예전에 전손사(顓孫師)가 녹을 구하는 법을 묻자,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많이 들어서 의심스러운 것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말하면 허물이 적을 것이고, 많이 보아서 위태롭게 여기는 것을 줄이고 그 나머지를 삼가서 행하면 뉘우침이 적을 것이다.’ 하였다. 참으로 배우는 것이 넓고 가리는 것이 정하고 지키는 것이 요긴한 것일 수 있다면, 녹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올 것이니, 이것이 어찌 만세의 격언(格言)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가만히 살펴보건대,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쇠퇴해져서 선비의 버릇이 예전만 못하여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닦아 치체(治體)를 잘 아는 자는 적고, 문사(文辭)를 숭상하여 경학을 버리고 녹리(祿利)를 좇는 자가 많으니, 어찌 우리 조종(祖宗)께서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본의이겠는가? 이에 나는 일찍이 세도(世道)를 위해 개탄하지 않은 바 없다.

(중략)

사신(史臣)은 논한다. 당습(黨習)이 점점 고질이 되고 요행의 문이 크게 열려서 과거(科擧)가 공정하지 못하니 선비가 따라서 이 때문에 바른 것을 잃고, 용사(用捨)를 사정(私情)에 따르니, 관(官)이 이 때문에 날로 어지러워지므로, 경학을 버리고 이록(利祿)을 좇는 것은 또한 괴이할 것도 없다. 만약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방도로 크게 경동(警動)하고 크게 진작(振作)하는 거조(擧措)가 있지 않고, 한갓 말로 가르치는 말단의 일에 구구하기만 한다면, 날마다 열 줄의 가르침을 내리더라도 마침내 무익한 것이 될 것이니, 개탄스럽다.

이때 과거는 사정(私情)에 따르는 것이 많으므로, 민암(閔黯)의 아들 민장도(閔章道)가 글을 못하는 사람으로서 다만 세력에 의지하여 외람되게 급제하니, 온 세상이 놀랐다. 사관(史官)도 민가(閔家)에 아첨하지 않는 자는 아니나, 눈으로 그 일을 보고서 적은 것이 이러하였으니, 공론을 알 수 있다.
숙종 17년(1691) 8월 10일 1번째 기사

숙종이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다'를 시전하는 장면. 그런데 이때 숙종은 31세 였다[15][16]다만 여기서 말하는 '버릇'은 일반적인 의미의 버릇이 아닌 '습성' 내지는 '행태'에 가까운 뜻으로 쓰였다. 다시 말해 예전 선비들과 다르게 요즘 선비들은 학문에 힘쓰지 않고 돈버는 것에만 눈독을 들인다며 까는 내용. 물론 '예전 선비'나 '요즘 선비'나 탐관오리 혹은 뇌물 문제는 항상 있어왔다는 점에 의미적으로는 일치한다.

재밌는 점은 사관도 이를 맞장구치면서 실제 사례를 열거하면서 깨알같이 자아비판을 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민암(閔黯)의 아들 민장도(閔章道)가 특혜로 과거에 급제했다고 고발하면서도 자신 또한 이런 아첨을 하긴 했다고 후세 사람들 앞에 솔직하게 고해성사를 늘어놓고 있다.
승지(承旨)가 동궁(東宮)에 입대(入對)하였다. 승지 유숭(兪崇)이 겨우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가자마자 세자(世子)가 성난 목소리로 말하기를,

"승지는 속히 물러가라. 조영복(趙榮福)은 오늘 무엇 때문에 들어오지 않았는가? 승지들이 무상(無狀)하니 여섯 승지들을 마땅히 모두 나문(拿問)하도록 하라. 사관(史官) 또한 모두 물러가도록 하라."

하였다. 유숭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엄위(嚴威)가 갑자기 진동(振動)하니 지극히 황공(惶恐)합니다마는, 단서(端緖)를 알지 못하겠으니, 감히 청하건대, 명백히 하교(下敎)해 주소서. 죄명(罪名)을 알고 물러가고자 합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육승지(六承旨)는 마땅히 모두 나문(拿問)할 것이니, 속히 물러가도록 하라."

하므로, 유숭이 총총히 걸어 나갔다. 문학(文學) 이중협(李重恊)이 진달(進達)하기를,

"신이 궁관(宮官)의 반열(班列)에 봉직(奉職)하고 있으니, 이미 생각한 바가 있으면 어찌 감히 진달(陳達)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 저하께서 사기(辭氣)가 과격(過激)하시고 거조(擧措)가 너무 당황스러우신 것은 아마 평소 함양(涵養)의 공부가 부족(不足)해서인 듯하니, 신은 가만히 이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승지가 만약 죄과(罪過)가 있다면 진실로 명백하게 하교(下敎)하셔야 할 것인데, 이미 입대(入對)하도록 하고는 곧 물러가게 하셨으니, 다만 일이 전도(顚倒)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아랫사람을 접대(接待)하는 도리에도 어긋난 것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모두 곧 물러가라. 사관(史官) 또한 곧 물러가라."

하므로, 이중협과 사관(史官)이 또한 총총히 걸어 나왔다. 잠시 후에 사약(司鑰)이 나와서 영지(令旨)257) 를 전하여 승지로 하여금 도로 입대(入對)하게 하였다. 유숭(兪崇)이 합문(閤門) 밖에 나아가 말로써 전하여 진달(陳達)하기를,

"지금 다시 입대(入對)하라는 명(命)을 받고 합문 밖에 나아왔으나, 이미 나문(拿問)하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황공하여 감히 입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니, 영(令)을 내리기를,

"다른 승지들도 입대하게 하라."

하므로, 유숭이 일어나 나갔다. 승지 한중희(韓重熙)·이병상(李秉常)이 같이 합문 밖에 나아가 전하여 진달(陳達)하기를,

"신 등이 와서 합문 밖에 나아왔으나, 엄교(嚴敎)가 여러 승지들에게까지 미쳤으니, 신 등의 황공함도 유숭과 다름이 없으므로 대죄(待罪)하는 중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자, 영(令)을 내리기를,

"대죄(待罪)하지 말라. 우승지(右承旨)도 도로 입대하게 하라."

하였다. 한중희·이병상이 또 아뢰기를,

"우승지 유숭은 지금 이미 합문 밖으로 나갔습니다. 패초(牌招)하여 입대시켜야 하겠습니까?"

하니, 영을 내리기를,

"곧 패초하여 입대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한중희·이병상이 일어나서 나갔다. 유숭이 패초를 받고 입대하여 공사(公事)를 품재(稟裁)하기를 마쳤다, 유숭이 일어나 절하고 말하기를,

"신이 비록 무상(無狀)하나, 군주(君主)를 섬기는 의리를 대강 알고 있습니다. 군신(君臣)은 부자(父子)와 같으니, 부모(父母)가 비록 혹시 꾸짖더라도 모두 가르쳐 신칙(申飭)하는 뜻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이 어찌 이러한 뜻을 모르겠습니까마는, 조금 전의 엄교(嚴敎)는 진실로 어떠한 일에서 기인(基因)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으므로, 죄명(罪名)을 알아서 징개(懲改)258) 하는 계획으로 삼고자 할 따름입니다. 군주의 희로(喜怒)는 중도(中道)를 얻기 어려워 발작하기는 쉽고 제어하기는 어려우니, 마땅히 평일(平日)에 성찰(省察)해야 할 따름입니다."

하였는데, 세자가 답하지 않았다. 이중협이 말하기를,

"신이 궁료(宮僚)에 인원을 갖추고 있었는데, 천둥 같은 위엄이 엄중하고 사기(辭氣)가 너무 당황한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는 허둥지둥 진계(陳戒)하였으나, 회청(回聽)을 얻지 못하고, 이내 물러가라는 교령(敎令)을 내리셨으므로, 방금 매우 황송(惶悚)하였습니다. 그런데 곧 개오(開悟)하시는 일이 있어서 이미 물러갔던 승지를 도로 들어오게 하시는 데 이르렀습니다. 희로(喜怒)는 빨리 고치기는 어려운 법인데도 저하(邸下)깨서 이를 능히 고쳤으니 누군들 대성인(大聖人)의 작위(作爲)를 흠앙(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대개 제어하기 어려운 것은 희로(喜怒)만한 것이 없으므로 옛말에 이르기를, ‘분노(忿怒)를 억제하는 것은 태산(泰山)을 꺾는 것과 같다.’ 하였으니, 마땅히 근실하게 힘써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평일의 사기(辭氣)를 표현하는 사이에 항상 공부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폭발(暴發)하는 근심이 없게 해야 하니, 이것이 신의 바라는 바일 따름입니다."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마땅히 유의(留意)하겠다."

하였다. 이중협이 또 말하기를,

"소대(召對)를 오랫동안 폐지(廢止)하셨습니다. 비록 상약(嘗藥)259) 하시는 가운데 있고, 또 겸하여 서무(庶務)를 대리(代理)하시게 되니 소대(召對)하실 여가가 없겠지마는, 일을 하다가 그만두는 것은 공부(工夫)에 가장 방애(妨碍)가 됩니다. 지금 비록 몹시 덥다 하더라도 마땅히 앞이 탁 트인 곳에서 궁료(宮僚)를 불러 접견(接見)하시고, 공부를 중간에서 단절(斷絶)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옳다."

하였다.
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1719) 6월 11일 임자 1번째기사

세자 시절 경종이 거의 유일하게 화를 내며 폭발한 사건. 이 이후 신임사화까지 다시는 이러지 않았다.

당시 경종의 대리청정 시기였고 이 때 경종은 신하들이 하는 말에 '따르겠다', '따르지 않겠다', '유의하겠다' 중에서만 말하며 극도로 조심스럽게 행동했었다. 신하들도 이런 경종의 행동이 답답했는지 "유의하겠다고만 하지 말고 가끔은 모르면 물어보시고 의견도 직접 내어 보십시오"라고 간했는데 그에 대한 경종의 답변도 "유의하겠다"가 전부였다. 신하들의 입장에선 그냥 고구마 몇개씩 먹은 심정일 것이다..

그런데 승지인 유숭이 너무 늦게 왔는지 아니면 조영복이 오라고 했는데 안 와서 그런지 경종이 갑자기 오라고 해서 온 유숭에게는 꺼지라고 하고 나머지 승지들도 모두 나문해야겠다며 대노하였다. 유숭은 도대체 왜 이러시냐고 물었다가 본전도 못 건지고 물러나고 이중협이 말씀하시는 게 너무 지나치다고 항의해도 요지부동. 결국 이중협과 승지까지 물러나야 했다. 그러다가 화가 가라앉았는지 다시 다 들어오게 했다. 이후 경종은 신하들의 꾸지람에 아무 말 않다가 '유의하겠다'라고만 하였다.

한편 숙종은 이에 대해 '지나친 행동이다'라는 비망기(숙종 45년 6월 14일 을묘 2번째 기사)를 내렸는데, 이에 대해 신하들은 노론과 소론의 구분을 떠나서 오히려 '전하께서 더 지나친 행동입니다. 굳이 비망기를 내려서 꾸짖을 정도는 아닙니다'라며 경종을 옹호하고 숙종을 비판했다. 이는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경종의 권위를 깎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추정한다. 숙종은 "부자간의 정으로 그런 말도 못하나?"(숙종 45년 6월 16일 정사 2번째 기사)라고 투덜거렸지만, 이미 이 당시 숙종은 병으로 오늘내일하던 상태라서 유야무야 끝났다.

12. 영조실록

충청도 감사(忠淸道監司)와 병사(兵使)·수사(水使)가 적들이 흉관(凶關)·흉격(凶檄)을 여러 고을에 투입한 것을 올리니, 모두 불태우라 명하고, 그것을 지니거나 전하는 자는 참하라고 유시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흉격(凶檄)의 조어(措語)는 본디 마땅히 곧바로 쓰고 숨기지 말아서 흉적이 천일(天日)을 욕한 죄를 드러냈어야 한다. 아! 유봉휘(柳鳳輝)·김일경(金一鏡)의 무리는 우리 성상께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은 지 오래이다. (중략) 대개 심유현은 궁액(宮掖)의 척속(戚屬)으로 성품이 본시 간특하여 항상 분에 넘치는 바람을 품었는데, 박필현(朴弼顯)과 이유익(李有翼)이 그의 사특한 마음을 알고 이익으로 꾀어 마침내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亮) 등 여러 적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대궐로 향하게 했던 것이다. 흉한 격문이 도로 위에 교체(交替)해 나돌았는데, 심지어 ‘납일초주 사왕숙대(臘日椒酒思王叔帶)’ 등의 말을 함부로 쓰기도 했다. 이는 실로 천고에 없는 흉역(凶逆)이며, 그 원두(源頭)를 추구해 보면 모두가 당론(黨論) 속에서 나온 것인데, 유봉휘와 김일경이 그 괴수가 되고, 박필현과 심유현이 다음이 되며, 이인좌·정희량 등 여러 적에 이르러서는 호서(狐鼠)의 무리에 불과했으니, 족히 말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영조실록》, 영조 4년(1728) 3월 20일자 기사

경종 독살설을 빌미로 터졌던 이인좌의 난 당시 사관의 기록에 대한 집착을 엿볼 수 있는 내용. 반란군은 영조를 비방하면서 '납일초주 사왕숙대'라는 문구로 영조를 규탄한다. 이는 평제를 독살한 왕망[17], 형을 죽이고 왕이 된 사왕, 형을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킨 숙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죄다 형의 왕위를 찬탈하거나 국왕을 독으로 시해한 인물들이다. 경종 독살설에 시달리던 영조가 이를 보고 불같이 화를 냈을 것임은 당연지사.

따라서 당연히 영조는 격문 등을 죄다 불태워버리고, 지닌 자는 참수하라 명하면서 이 내용을 절대 남기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기록하던 사관은 오히려 '역적의 죄는 숨기지 말고 죄를 드러내야 한다'는 논리로 역적 무리들에 대한 욕을 한바가지 한 다음, 격문의 핵심 내용일 것으로 추정되는 '납일초주 사왕숙대'라는 말을 주석으로 죄다 적어놨다. 덕분에 이인좌의 난이 어떤 의도와 어떤 정치적인 목적으로 여론을 호도하여 진행되었는지 후손들이 알 수 있게 된 것.

황해 수사(黃海水使) 박문수(朴文秀)가 아뢰기를,

"당선(唐船)[18]이 어채(漁採)하는 것을 이롭게 여겨 여름이 되면 오지 않는 해가 없는데 이를 인하여 연해의 백성들과 물건을 교역(交易)하는 등 그들이 법을 무시하고 멋대로 하는 습관이 더욱 조장되고 있습니다. 그들을 추포(追捕)하기 위해 온갖 계책을 다 썼지만 힘을 얻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에 있어 최상의 계책은 비선(飛船)을 많이 만들어 밤낮으로 바다 위에 띄워 놓고 당선의 어채의 이익을 빼앗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에 먼저 비선 20척을 만들려 하고 있습니다만 본영(本營)의 재력으로는 실로 착수하기가 어렵습니다. 감영의 유고전(留庫錢)과 병영의 별비전(別備錢) 각 2백 민(緡), 상정미(詳定米) 50곡(斛)을 특별히 획급해 주도록 허락하면 제때에 배를 만들어 쓸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좌의정 송인명이 그 말을 따를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은 간과(干戈)가 극렬한 가운데에서도 능히 전선(戰般)을 만들었었는데 옹진(瓮津)이 아무리 피폐되었다고 해도 돈 4백 냥을 마련하지 못하여 이런 청을 한단 말인가? 수신(帥臣)은 추고하고 스스로 마련하여 배를 만들게 하라."

하였다. 형조 참판 이주진(李周鎭)이 말하기를,

"황해 수사가 새로 부임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이 있는 것입니다만 1년에 거두어 들이는 어리(漁利)가 4, 5천 냥에 가까워서 그 재력이 호곤(湖閫)에 견줄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임금에게 어떻게 영곤(營閫)에 있는 물력(物力)의 풍박(豐薄)에 대해 비교하여 진달할 수 있는가?"

하고, 이주진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20년(1744) 2월 27일 2번째 기사

18세기에도 중국의 해외 불법 조업이 극심했음을 알려주는 내용. 박문수가 황해도 지역의 수군절도사를 맡고 있을 당시, 중국 어선을 막으려고 배를 건조하는데 돈이 없다고 하자 영조이순신을 언급하면서 '이순신은 돈 없어도 잘만 배를 만들었는데 왜 너는 못하냐'고 깐다.저는 이순신이 아닙니다

한편, 옆에서 듣고 있던 이주진은 눈치없게 왕 앞에서 '황해도 지역은 세금이 별로 안 걷히잖아요' 하면서 말을 하다가 영조에게 '어딜 감히 임금 앞에서 아는 척을 하냐, 죄를 반성하라'고 핀잔을 받는다.

여기서 '곤(閫)', 또는 '영곤(營閫)'은 각 지방의 군에서 세금을 거둬들여 관리하는 재원을, '호곤'은 호남지방의 영곤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전라도 지방은 평야가 넓게 펼쳐있고 인구와 생산이 많았으므로 조선시대에는 물자의 중심지였다. 즉 이주진은 황해도는 전라도보다 가난하니 돈이 없는 게 당연하고,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였던 이순신과 황해도 수군절도사인 박문수를 단순히 비교하기엔 어렵다고 말한 것. 헌데 영조의 말을 보면 알겠지만 영조도 황해도가 상대적으로 돈없는 지역인 줄 잘 알았다.[19] 그런데도 '4백 냥도 확보를 못해서 그걸 왕 앞에까지 끌고 오느냐.'고 타박한 것인데 이주진은 논점을 이탈해서 잘못 지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영조는 박문수가 이 일을 조정까지 끌고 온 것을 가지고 지적하는 것이다. 박문수는 젊은 나이에 병조판서라는 요직에 오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내직과 외직을 두루 겸하면서 나름 커리어를 쌓을대로 쌓은 인물이었다. 보통 이 정도의 일은 조정까지 끌고 올 필요 없이 황해도 관찰사와 이야기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 정도로 액수가 그리 중대한 정도는 아닌데, 박문수는 수군절도사 부임 초기에[20] 얼굴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손벌리는 것이 껄끄러웠는지 황해도 관찰사에게 말도 안하고 임금한테 대뜸 찾아와 예산을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영조는 박문수가 생판 신참도 아니고 알만한 사람이 이렇게 절차를 생략한 채 요청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까는 것. 영조: 누가 이따위로 결재선을 세우고 상신하랬냐

애초에 황해도가 피폐하다고 하나 막상 그렇게 척박한 지역도 아니었다. 함경도 같이 정말 척박한 곳과 비교하면 현재 북한에서도 농업 생산량 톱을 달리는 지역이 바로 황해도다. 조선 시대에도 상황은 비슷했으며 박문수가 이 요청을 하게된 이유가 중국 선박들의 황해도 지역 불법 조업 때문임을 생각해본다면 황해도의 어업 생산량도 꽤 나온다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황해도가 척박한 지역이었다면 불법 조업이 이뤄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4백 냥은 아무리 황해도라도 충분히 감당 가능한 예산이었다. 다만 그게 박문수가 담당하는 영곤, 즉 지금으로 따지면 군 예산에 배정이 안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또한 여기서 이순신을 들먹이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국가의 중차대한 위기 상황 속에서 조정의 도움 없이 혼자 전투선을 만들고 반드시 승리를 쟁취한 이순신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왕조 내내 무인들의 가장 모범적인 표본이 되었다. 그 때문에 이후 무인을 평가할 때마다 이순신과 비교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군대에서 돈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면 이 사례처럼 '이순신은 이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해냈는데 너는 왜 돈이 없다고 징징대느냐'는 말을 하면서 예산을 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21]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너는 왜 못하냐는 식의 비교질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며 실무자로서 흠이 있던 박문수처럼 영조 역시 조직 관리자로서의 한계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볼 수 있다.
이조 판서 원경하(元景夏)가 아뢰기를,

"귤을 내리시며 시를 짓게 하신 일은 국조(國朝) 3백 년 만에 다시 있게 된 훌륭한 일입니다. 조종조에는 이러한 훌륭한 일이 자주 있었기 때문에 한 시대 문사(文士)들이 모두 몹시 장려되어 인재가 성하게 배출되었습니다. 임금이 미리 배양하지 않으면 어떻게 위란(危亂)이 있을 때에 사람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사육신(死六臣)처럼 절의를 세운 선비들은 대체로 영묘(英廟)011) 께서 모아두고 배양하신 사람들입니다. 임진 왜란 때에도 이순신(李舜臣) 한 사람만 난리 중에 발탁된 사람이고 여타 충신 석보(碩輔)로서 끝내 중흥의 위공을 세운 사람은 이항복(李恒福)·이덕형(李德馨)·윤두수(尹斗壽)·윤근수(尹根壽)·유성룡(柳成龍)·이원익(李元翼) 같은 사람으로 모두가 선조 초년에 배양한 인재들이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선조조의 인재가 그렇게 성했는데도 지금 사람들은 매양 영묘조(英廟朝)보다 못하였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영묘조는 우리 나라의 제일 으뜸가는 문명(文明)의 기회였기 때문에 도덕과 문장의 선비만 배출한 것이 아니라, 예악(禮樂)을 만들고 정비하는 시대라서 백공(百工)의 비상한 기능을 가진 자로 박연(朴堧) 같은 이들도 시대에 응하여 태어났으며 경쇠[磬]를 만드는 옥이나 율(律)을 만드는 기장[黍]이 역시 시대에 응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남양(南陽)의 옥과 해주(海州)의 기장도 그때에 나온 것들이다."

하였다. 원경하가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박연은 가슴과 배를 두드리며 음률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들었다."

하였다. 홍중효(洪重孝)가 말하기를,

"신이 몇 해 전에 명을 받들고 차왜(差倭)를 접대하느라 오랫동안 동래(東萊)에 머물면서 임진란 때에 송상현(宋象賢)이 사절(死節)한 일을 자세히 들었는데, 순원(巡遠)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고, 원경하가 말하기를,

"송상현은 개성부 사람입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장상(將相)과 귀척(貴戚)은 적의 궐정(闕庭)에서 머리를 조아리는데, 군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목숨을 바치고 멸족지환(滅族之患)을 당하는 자는 바로 먼 지방 변두리 고을의 임금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였는데, 이는 참으로 옳은 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도 송서(宋書)를 보다가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개연한 생각이 들지 않은 때가 없었다."

하였다.
영조실록 71권, 영조 26년(1750) 1월 9일 계축 1번째기사 이조 판서 원경하 등이 인재의 양성에 대하여 아뢰다

영묘조는 영릉, 즉 세종의 시기를 의미한다. 세종 시대와 선조 시대의 인재들에 대해 비교한 기사이다. 각 임금의 시대는 조선사에서 뛰어난 인재들이 가장 많이 등장한 시기들로 꼽힌다. 영조는 '선조 때에도 훌륭한 인재들이 많았지만 사람들은 다들 세종 때만 못하다고 하는데 왜 그런가?'라고 묻자 신하들은 박연의 이름을 거론하며 '당시 시대는 문명이 가장 발달한 기회였기에 단순히 선비 뿐만 아니라 박연과 같은 인사도 나올 수 있었습니다.'라며 시대상의 분위기 또한 중요함을 언급한다.
이날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이 졸(卒)하였다. 예단(禮單)이 먼저 들어오고 조금 있다가 중궁전(中宮殿)이 승하하였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장차 곡반(哭班)에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좌의정과 우의정을 입시하도록 명하여 임금이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들은 이 가슴속의 슬픔을 이해하여 한 번 덜 수 있게 하라."

하자, 좌의정 김상로(金尙魯)·우의정 신만(申晩) 등이 감히 한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다만 곧바로 나아갔다가 일찍 환궁하라는 뜻을 아뢰고 물러났다. 이때 승정원과 삼사의 신하 및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서로 잇달아 청대(請對)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이미 좌의정과 우의정에게 하교하였는데 어찌 이런 일을 하는가?"

하고, 인하여 승지를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승지 이최중(李最中)이 빨리 앞으로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이렇게 망극(罔極)한 시기를 당하여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망극한 일을 하시려 합니까?"

하니, 임금이 잇달아 엄중한 하교를 내렸으나, 이최중이 눈물을 흘리며 더욱 힘껏 간쟁하였다.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이최중에게 물러나도록 명하였는데, 이최중이 말하기를,

"신은 청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면 감히 물러날 수 없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최중의 직임을 체차하도록 명하고, 인해서 합문(閤門)을 닫고 마침내 보련(步輦)으로 연영문(延英門)을 나갔다. 대간(臺諫)과 옥당(玉堂)에서 앞으로 나와 다투어 고집하자, 임금이 또 모두 체임하도록 명하였다. 대사간 이득종(李得宗)이 말하기를,

"신의 관직을 체임하더라도 전하의 이번 행차는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삼사의 신하를 중도 부처(中途付處) 하도록 명하였다가, 조금 뒤에 단지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밤 4경(四更)에야 비로소 궁궐로 돌아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를 총호사(摠護使)로 삼았다.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1757) 2월 15일 정축 3번째기사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 즉 영조의 부마인 정치달이 병으로 사망하자 영조가 친히 조문을 가겠다며 행차를 강행하는 모습이다. 왕이 부마의 장례에 참석하는 것 자체도 파격적인 행동이지만, 진짜 문제는 이 날이 중전인 정성왕후가 사망한 날이었다. 일국의 왕비가 사망했으니 당연히 국상을 준비하느라 온 조정이 분주한데, 영조는 자신의 아내의 장례 준비는 신경도 쓰지 않고 딸을 위로하겠다고 떠나려 한 것. 당연히 신하들은 이건 해도 너무한 행동이라며 영조를 뜯어 말렸고, 이득종 등은 차라리 자신의 벼슬이 날아가도 이건 안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끝끝내 행차를 가버렸고, 한밤중인 4경(대략 새벽 2~4시 무렵)에야 돌아왔다. 본문을 보면 영조가 '엄중한 하교'를 여러번 내렸다는 부분이 있는데, 영조가 폭언을 퍼부은 일을 돌려서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족들에 대한 영조의 심각한 편애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승정원에서 계사(啓辭)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24자의 휘호의 선양은 만백성들의 똑같은 심정일 뿐만이 아니라, 사실 주위에 오르내리는 영령(英靈)께서 주신 것입니다. 지금 위에 고하고 아래에 반포한 뒤인데, 어떻게 이것을 논의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빨리 윤허를 내리시어 사람들의 심정을 위로하소서."

하였다. 재계(再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부교리 서호수(徐浩修)가 소를 올리고, 교리 신광집(申光緝)·수찬 조재준(趙載俊)도 차자를 올렸는데,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김약행(金若行)[22]이 올린 상소에 이르기를,

"숭정 갑신년의 뒤로는 천하에 임금다운 임금이 없었고, 예악 문물(禮樂文物)이 모두 우리 동방에 있으니, 청컨대 교체(郊禘)의 예를 행하고 태묘에는 구헌(九獻)과 팔일(八佾)의 의절을 행하소서. 그리고 인조(仁祖) 이하 오묘(五廟)에 휘호(徽號)를 소급해 올리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크게 놀랐다.

이때부터 올린 올린 장주(章奏)를 보지 않고, 여러 신하들이 말한 일에 대해 임금이 승지에게 물으면 승지가 어떤 일을 논하였다고 대답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임금의 마음에 24자의 휘호를 보지 않고 싶어서였다. 전후로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극력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승정원이 먼저 계사를 올린 것이었다.
영조 44년(1768) 6월 11일 정묘 1번째기사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김약행은 이해 5월 8일에 사간원 정원이 되었는데 정원이 되자마자 며칠만에 이런 사고를 쳤다. 김약행이 주장한 교체의 예, 구헌과 팔일의 의절, 휘호의 소급은 모두 천자의 의식이다. 즉, 칭제건원을 하자는 것. 숭정 갑신년이란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인해 숭정제가 자결하고 명나라가 멸망한 해를 의미한다.

이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중화 문명의 정통성은 이제 조선에게 있으니, 조선이야말로 황제국이 될 자격이 있다는 매우 과격한 논리이다. 당시 소중화 사상의 일면을 보여준다.

구절에 대한 해석
실록의 이 구절을 만화로 표현한 포스팅

김약행의 상소는 이날 올라온 것은 아니고, 그 전에 이미 올라 왔으나 그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라서 내용을 제대로 밝히기도 전에 태워버렸었다. 하지만 사관이 이 내용을 이런 식으로 그대로 올려 놓은 것.
아래는 김약행이 처음 상소를 올렸을 때의 기사이다.
"너무나 황당하고 잡스러워 이를 데 없었습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불효하고 불초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을 들은 것이다."

하고, 탕제를 들지 않겠다고 물렸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약행의 상소를 각사(各司)에서 베껴 갔는가? 그 상소 초본은 어디에 있는가?"

하니, 가주서 이사렴(李師濂)이 상소 초본이 승정원에 있다고 아뢰었다. 그러자 주서(注書)는 잡아다 추국하고 여러 승지는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김약행의 상소를 불태우라고 명하였기 때문에 세상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연석(筵席)에서 하교한 것으로 보면 대체로 사공(司空) 이하에게 제사를 지내자고 청하면서 천자의 예악(禮樂)을 사용하자고 하였고, 또 선정 박세채(朴世采)를 비방 배척하였을 것이다.

김치인(金致仁)이 왕세손이 어떤 책을 강할 것인지 여쭙자 《맹자(孟子)》를 거듭 강하라고 명하였다.
영조 44년(1768) 5월 11일 무술 1번째기사

또한 영조는 김약행의 주장에 대해 이후에도 심하게 짜증이 났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약방에서 문안하였는데, 답하기를,
"고금에 물어보라. 조선에 임금이 있는지 신하가 있는지 말이다. 하루를 지내고 나면 김약행(금약행)이 있고 이틀을 지내고 나면 이겸빈(리겸빈)이 있는데, 무슨 마음으로 탕약을 복용한단 말인가? 문안을 그만 청하도록 하라.”
하니, 약방에서 구두로 재차 아뢰고,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뵙기를 청하여 입시하였는데, 탕약을 들겠다고 허락하였다.
영조 44년(1768) 5월 26일 계축 1번째기사

이겸빈은 당시 사간원 정언으로 있었던 사람으로, 소론들을 영조가 너무 옹호한다며 '무신란(戊申亂)을 기록한 『유곤록(裕昆錄)』을 폐기할 것'을 주청했다가 영조의 분노를 사서 추자도로 귀양을 갔다. 여기서 무신란이란 이인좌의 난을 의미한다. 이 때 당시 김약행의 상소는 숭정 갑신년 운운하는 글보다는 소론 선정신 박세채를 비방한 일이 더 문제가 되었다. 물론 숭정 갑신년 운운하는 글도 허황되다고 까였지만 말이다. 이 상소로 김약행은 바로 흑산도로 유배되었다. 특히 박세채를 비방한 일은 상소가 불태워졌음에도 박세채의 문인들 후손들이 상소를 올릴 정도로 꽤나 조야에 알려진 일로 보인다.# 이 당시 기록을 보면 이정렬(李鼎烈)이라는 자가 이겸빈, 김약행과 비슷하게 박세채를 비방하고『유곤록(裕昆錄)』을 훼파할 것을 요청하다가 추자도로 귀양을 갔는데# 이를 보면 김약행 역시 이들과 비슷한 주장을 하다가 유배를 갔음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영조 입장에선 크게 분노할 수 밖에 없었고 김약행이 일으킨 일이 이 이겸빈, 이정렬 만큼이나 짜증나고 불쾌한 일이었던 것. 즉 숭정 갑신년 이전에 위에서 언급된 24자 휘호를 받지 않겠다고 영조가 거부한 일과 이런 연유로 유배를 갔다는 얘기이다.

김약행은 순천부사, 승지까지 역임한 인물이었으나 영조, 정조 대에는 이상한 주장을 하는 인물, 혹은 왕을 거스르는 인물로 여겨져서 유배도 굉장히 많이 간 사람인데 나중에는 홍국영 일당과 비슷한 역적으로까지 여겨져 역률로 유배간 적도 있다. 정조대에도 신약추라는 사람이 '(임금이) 친히 명산에 봉선(封禪)을 해야 한다'고 주장해서 벽동군으로 유배를 간 적이 있는데 이때도 김약행이 존양의 예를 어긴 예로 언급되면서 까인다.# 따라서 김약행의 주장은 당대 조정이나 선비들의 주류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임금이 여러 강관(講官)에게 앞으로 나아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23],

"지금 세손(世孫)을 보니, 진실로 성취(成就)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命脈)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하고, 이어서 면유(勉諭)하기를,

"기품(氣稟)을 잘 기르면서 감히 게을리하거나 하던 일을 버려두지 말고 거울 같은 마음을 더럽히지 말며 구슬처럼 맑은 자질을 더럽히지 말고서 내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만약 오늘 주대(奏對)한 말을 저버린다면, 이는 바로 너의 할아버지를 저버리는 것이며 저 하늘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였다.
영조실록 97권, 영조 37년(1761) 1월 5일 을사 2번째기사, 주강에서 왕세손과 공을 성취하는 것 등에 관하여 논의하다

영조와 세손인 정조가 주강 자리에서 문답을 하는 장면. 영조는 정조가 반듯하고 공부를 잘하는 모습을 보고 매우 좋아했다. 위 문답에서도 정조가 또박또박 잘 대답하자 중간에 "겨우 10살 된 어린애가 이렇게 잘 하다니!"라며 감탄하였다.

문제는 주강이 끝난 직후 영조의 발언. 아무리 세손을 칭찬한다지만 대놓고 "왕실의 명맥이 세손에게 달려 있다"라고 말하는데, 이 때는 엄연히 왕세자인 사도세자가 있을 때였다. 그리고 이 당시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고, 사도세자의 몸 상태도 엉망이던 시기였다.

즉 이 날 영조의 발언은 왕위 계승을 세손에게 곧바로 하겠다는 영조의 의도가 은연중에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바로 다음 해인 1762년, 임오화변이 발생한다.

13. 정조실록

빈전(殯殿)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였다. 윤음을 내리기를,

"아! 과인은 사도 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 선대왕께서 종통(宗統)의 중요함을 위하여 나에게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이어받도록 명하셨거니와, 아! 전일에 선대왕께 올린 글에서 ‘근본을 둘로 하지 않는 것[不貳本]’에 관한 나의 뜻을 크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예(禮)는 비록 엄격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나, 인정도 또한 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향사(饗祀)하는 절차는 마땅히 대부(大夫)로서 제사하는 예법에 따라야 하고, 태묘(太廟)에서와 같이 할 수는 없다. 혜경궁(惠慶宮)께도 또한 마땅히 경외(京外)에서 공물을 바치는 의절이 있어야 하나 대비(大妃)와 동등하게 할 수는 없으니, 유사(有司)로 하여금 대신들과 의논해서 절목을 강정(講定)하여 아뢰도록 하라. 이미 이런 분부를 내리고 나서 괴귀(怪鬼)와 같은 불령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한다면 선대왕께서 유언하신 분부가 있으니, 마땅히 형률로써 논죄하고 선왕의 영령(英靈)께도 고하겠다."
정조실록 1권, 정조 즉위년(1776) 3월 10일 신사 4번째기사 빈전 문밖에서 대신들을 소견하고 사도 세자에 관한 명을 내리다

이덕일을 비롯한 노론 음모론자들이 자주 들먹이는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 드립의 원 출처이다. 하지만 실제 의미는 아예 달랐다. 정조가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 자체는 맞지만, 바로 다음 구절에서 효장세자의 후계로 왕위를 이어 받았음을 말했다. 게다가 '함부로 (사도세자를) 추숭하겠다는 자들은 선대왕(영조)의 뜻을 따라서 엄히 처벌하겠다'라고 분명히 밝혔다[24].

물론 이후의 정조의 행적을 보면 사도세자와의 인연을 정말로 끊지는 않았으며 사도세자의 추숭과 신원 회복을 위해 크게 노력했다. 다만 정조는 선대왕인 영조의 의도와 노론 세력의 입장을 인정하고, 이와 타협하며 점진적으로 노력하였다. 위의 발언도 이런 행적의 연장선상이다.

한편 노론 음모론의 주장과 별개로 정조가 일종의 전략적 모호함이란 화법을 썼다는 해석은 있다. 즉 사도세자를 비호하려는 자들에게는 "내가 사도세자의 아들이 맞긴 맞는데 그렇다고 추숭 운운하여 정국을 뒤흔드려는 시도는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면서 동시에 노론에게는 "내가 원래 사도세자의 아들인지라, 할바마마의 명령만 없었으면 너네들 담가버렸을 거거든? 알아서들 기어라!"라고 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것.다만 정말 사도세자의 아들하고 싶었으면 할바마마를 담가버리지 굳이 노론을 담글 이유는 없다는 게 문제다
성균관 제술(製述) 시험에서 합격한 유생을 희정당(熙政堂)에서 불러 보고 술과 음식을 내려주고는 연구(聯句)로 기쁨을 기록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사람의 말에 술로 취하게 하고 그의 덕을 살펴본다고 하였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생각하고 각자 양껏 마셔라. 우부승지 신기(申耆)는 술좌석에 익숙하니, 잔 돌리는 일을 맡길 만하다. 내각과 정원과 호조로 하여금 술을 많이 가져오게 하고, 노인은 작은 잔을, 젊은이는 큰 잔을 사용하되, 잔은 내각(內閣)의 팔환은배(八環銀盃)를 사용토록 하라. 승지 민태혁(閔台爀)과 각신 서영보(徐榮輔)가 함께 술잔 돌리는 것을 감독하라."

하였다. 각신 이만수(李晩秀)가 아뢰기를,

"오태증(吳泰曾)은 고 대제학 오도일(吳道一)의 후손입니다. 집안 대대로 술을 잘 마셨는데, 태증이 지금 이미 다섯 잔을 마셨는데도 아직까지 취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희정당은 바로 오도일이 취해 넘어졌던 곳이다. 태증(泰曾)이 만약 그 할아버지를 생각한다면 어찌 감히 술잔을 사양하겠는가. 다시 큰 잔으로 다섯 순배를 주어라."

하였다. 식사가 끝난 뒤에 영보(榮輔)가 아뢰기를,

"태증(泰曾)이 술을 이기지 못하니 물러가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취하여 누워 있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옛날 숙종조에 고 판서가 경연의 신하로서 총애를 받아 임금 앞에서 술을 하사받아 마시고서 취해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였던 일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지금 그 후손이 또 이 희정당에서 취해 누웠으니 참으로 우연이 아니다."

하고, 별감(別監)에게 명하여 업고 나가게 하였다. 그때 가랑비가 보슬보슬 내리니, ‘봄비에 선비들과 경림(瓊林)에서 잔치했다.’는 것으로 제목을 삼아 연구(聯句)를 짓도록 하였다. 상이 먼저 춘(春) 자로 압운하고 여러 신하와 여러 생도들에게 각자 시를 짓는 대로 써서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취하여 짓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내일 추후로 올리라고 하였다.
정조 16년(1792) 3월 2일 1번째 기사
제술 시험에 합격한 자들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정조가 "너희들은 에 취하기 전에는 집에 못간다"라는 어명을 내리는 모습이다. 술에 취하게 하고 덕을 본다는 것은 아무래도 술버릇이 어떤지 확인해 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후술할 오태증과 오도일의 내용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술버릇 중에서도 특히 곤란한 유형이 이런 술 강요인데 하물며 '어명'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오태증이라는, 집안 대대로 주당으로 이름난 유생이 있어서 술에 취하지 않았는데, 정조는 그의 할아버지 오도일이 숙종 대에 여기 희정당에서 술에 취해 넘어졌다면서, 술 5잔을 더 먹여 결국 취하게 했다. 그래놓고는 "오도일이 여기서 술에 취해 쓰러진 것이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며 "지금 그의 후손이 같은 장소에서 취해 쓰러진 것이 우연이 아니다"라며 흐뭇해했다. 정조가 얼마나 술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심각한 꼰대(?)였는지를 잘 나타내 주는 일화.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지난밤에 흰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궁궐의 담장 아래에서 술에 취하여 누워 있기에 호패(號牌)를 상고해 보니 진사 이정용(李正容)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마침 성균관에 들어갔다가 술을 마시고 나서 야금시간에 걸린 줄을 몰랐다고 하였는데, 법에 따라 형조로 넘겼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성균관 근처의 민가는 집춘영(集春營) 건물과 지붕이 서로 잇닿아 있으니 야금시간을 범하였다고 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근래에 조정의 관료나 유생들을 물론하고 주량이 너무 적어서 술의 풍류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다. 이 유생은 술의 멋을 알고 있으니 매우 가상스럽다. 군향(軍餉)을 맡은 고을에서 주채미(洒債米) 한 포대를 주어, 술을 주어 취하게 하고 취한 중에서 덕을 관찰하는 뜻을 보여주라."

하였다.
정조 20년(1796) 4월 12일 1번째 기사
그리고 아예 한걸음 더 나아가, 만취하여 궁궐 담장 밑에서 자고 있던 유생에게 "요즘 선비들은 주량이 너무 적은데 뭘 좀 아는 친구구만"하면서 포상까지 한다(...). 당연하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국가 권력의 핵심 중추에서 이렇게 행동한다는건 매우 중대한 범죄로 다스려질 수 있다. 대통령 관저 앞에서 노숙을 해도 의심을 받을텐데 하물며 궁궐 담장에서 노숙을 했으면 까딱 잘못하면 불경죄로 다스려질 여지가 충분했다. 그런데 그걸 오히려 좋다꾸나 하고 상까지 줬으니 정조가 얼마나 술꾼인지 알 수 있다.
"영길리국(咭唎國)은 광동(廣東) 남쪽에 있는 해외 나라로서 건륭(乾隆) 28년에 조공(朝貢)을 바쳐왔었는데 올해 또 바쳐왔고, 두목관(頭目官)으로 온 마알침(嗎戛𠶀)과 이시당동(呢嘶噹㖦) 두 사람은 영길리국 왕의 친척이었으며 그들이 바친 공물(貢物)은 모두 19종입니다."
정조 17년(1793) 10월 26일 3번째 기사
대영제국의 당시 청나라 사절 조지 매카트니(George McCartney, 1737 ~ 1806)와 그의 보좌를 맡은 조지 토마스 스턴톤(George Thomas Staunton, 1781~1859)이 언급된다. 매카트니마알침니(嗎戛𠶀呢, Majiá𠶀ne)라고 음역되었는데,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에는 오류인지 끝의 니(呢)가 뒤의 그의 보좌를 맡은 시당동(스턴톤)의 뒤에 붙어서 이시당동(呢嘶噹㖦, 니시당동)이 되었다. 𠶀가 번역기에 중국어 발음 표기가 안 된다.

14. 순조실록

"속칭 이른바 남초(南草)는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혹은 위(胃)를 조양(調養)하는 데 이롭다고 하고 혹은 담(痰)을 치료하는 데 긴요하다고 하나, 과연 그런지 모르겠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속습(俗習)이 이미 고질이 되어 남녀 노소를 논할 것 없이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겨우 젖먹이를 면하면 으레 횡죽(橫竹)으로 피우고 있는데, 세상에서 더러 ‘팔진미(八珍味)는 폐지할 수 있어도 남초는 폐지할 수 없다.’[25]고 하니, 비록 금하고자 하나 이유가 없을 따름이다. 옛날에 듣건대, 금한(金汗)이 군중(軍中)에 거듭 금하였으나 오히려 그치지 않는다고 하니, 금한(金汗)의 위세로써도 오히려 금지시킬 수 없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중략)

임금이 말하기를,

"남초가 폐해가 되는 것은 술과 일반이겠으나, 술은 그래도 제사에 쓰고 성인(聖人)도 또한 말하기를, ‘술은 양(量)을 제한하지 않되 난잡한 데 미치지는 않는다.’ 하였는데, 남초에 이르러서는 마땅한 것이 없고 해로움만 막심한 것이다. 속습(俗習)이 이에 이르렀으니, 끝내 금지할 수 없겠는가?"

하니, 박종훈이 말하기를,

"남초는 금지할 수 있음을 사람들은 모두 말하지만, 신은 일찍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주금(洒禁)이 어려운 것은 대개 술을 좋아하여 깊이 빠진 자가 많기 때문이며, 남초에 이르러서는 이미 몸에 이익이 없는데도 드러나게 좋아하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만약 법을 엄하게 하여 금지한다면, 죄를 무릅쓰고 금법을 범하는 것이 반드시 주정(洒政)보다 심함이 있을 것입니다."
순조 8년(1808) 11월 19일 1번째 기사

아버지 정조와는 정반대의 일화. 지독한 골초주당이었던 정조와는 달리, 순조는 혐연가였다. 순조가 남초, 즉 담배의 해악을 언급하면서 첫마디 운을 떼는 말을 잘 보면 '위장에도 좋고, 담에도 특효라는데 진짜 맞아?' 라는 식으로 까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 내용은 아버지 정조가 했던 말이다.[26] 1796년 11월 18일, 정조가 과거시험의 책문으로 '남령초(담배)의 효능에 대해 논하고, 어떻게 하면 온 백성이 담배를 피울 수 있겠는가?'를 냈는데 여기에서 담배의 효능으로 위와 같은 내용이 언급된다. 아버지 정조는 담배를 '남쪽에서 온 영험한 풀'이라는 뜻에서 남령초라고 높여 부르고, 담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들 순조는 평범하게 남초라고 부르는 것도 깨알같은 포인트.

물론 순조가 아버지 정조를 디스할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시 조선의 애연가들 사이에서 이러한 논리로 담배를 옹호하곤 했음은 확실해 보인다.

이 당시에는 담배의 중독성을 불러일으키는 원인물질인 니코틴의 존재가 알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왜 담배를 못끊지?'라는 순조의 질문에 신하들도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술과 비슷한 중독성 강한 물건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법으로 금지시킬 수 있는 물건은 아니라는 것은 바로 언급한다.[27] 자세한 원인 물질은 몰라도 금지했을 때 금주법과 비슷한 현상이 일어날 것은 알고 있었던듯 하다. 애초에 영조때 조선에서도 금주법을 시행했지만 실패했던 역사가 있으니 당대 조선 신하들도 술이나 담배를 쉽게 막을 수 없다는 점 정도는 잘 알았다.

좀 다른 얘기지만, 청 황제 숭덕제를 금한(金汗), 즉 금나라 칸이라고 부른 것도 포인트. 조선은 과거 여진족이 세운 금을 계승한다는 의미의 '후금'이라는 국명 및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지간으로 두는 것은 반쯤 아니꼽게 인정했으나[28] 칭제건원하며 새로이 정한 '청'이라는 국명 및 양국 관계를 군신지간으로 두는 것에는 큰 거부감을 보였다. (관련 실록 기사)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인해 억지로 받아들이긴 했다만 항복(1637) 이후 171년이 지난 순조조(1808)에도 여전히 '청 황제'가 아니라 '금한'으로 칭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으로는 여전히 청나라를 인정할 수 없었다는 당대 인식을 보여 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이재홍(李載弘)의 장계에, ˝마량진(馬梁鎭) 갈곶[葛串] 밑에 이양선(異樣船) 두 척이 표류해 이르렀습니다. 그 진(鎭)의 첨사 조대복(趙大福)과 지방관 비인 현감(庇仁縣監) 이승렬(李升烈)이 연명으로 보고하기를, ˝표류하여 도착한 이양선을 인력과 선박을 많이 사용하였으나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14일 아침에 첨사와 현감이 이상한 모양의 작은 배가 떠 있는 곳으로 같이 가서, 먼저 한문으로 써서 물었더니 모른다고 머리를 젖기에, 다시 언문으로 써서 물었으나 또 모른다고 손을 저었습니다. 이와 같이 한참 동안 힐난하였으나 마침내 의사를 소통하지 못하였고, 필경에는 그들이 스스로 붓을 들고 썼지만 전자(篆字)와 같으면서 전자가 아니고 언문과 같으면서 언문이 아니었으므로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좌우와 상하 층각(層閣) 사이의 무수한 서책 가운데에서 또 책 두 권을 끄집어 내어, 한 권은 첨사에게 주고 한 권은 현감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펼쳐 보았지만 역시 전자도 아니고 언문도 아니어서 알 수 없었으므로 되돌려 주자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기에 받아서 소매 안에 넣었습니다. 책을 주고받을 때에 하나의 작은 진서(眞書)가 있었는데, 그 나라에서 거래하는 문자인 것 같았기 때문에 가지고 왔습니다. 사람은 낱낱이 머리를 깎았고, 머리에 쓴 모자는 검은 털로 만들었거나 노끈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동로구와 같았습니다. 의복은 상의는 흰 삼승포[三升布]로 만들었거나 흑전(黑氈)으로 만들었고 오른쪽 옷섶에 단추를 달았으며, 하의는 흰 삼승포를 많이 입었는데 행전(行纏) 모양과 같이 몹시 좁게 지어서 다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버선은 흰 삼승포로 둘러 쌌고, 신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발막신[發莫]과 같고 끈을 달았습니다. 가진 물건은 금은 환도(金銀環刀)를 차기도 하고 금은 장도(金銀粧刀)를 차기도 하였으며, 건영귀(乾靈龜)를 차거나 천리경(千里鏡)을 가졌습니다. 그 사람의 수는 칸칸마다 가득히 실어서 자세히 계산하기 어려웠으나, 8, 90명에 가까울 듯하였습니다. 또 큰 배에 가서 실정을 물어 보았는데, 사람의 복색, 패물, 소지품이 모두 작은 배와 같았고, 한문이나 언문을 막론하고 모두 모른다고 머리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숫자는 작은 배에 비하여 몇 갑절이나 될 것 같은데, 배 위와 방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고 서 있기도 하였으며,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는 등 매우 어수선하여, 하나 둘 세어 계산하기 어려웠습니다. 서책과 기물(器物)은 작은 배보다 갑절이나 더 되었습니다. 큰 배나 작은 배를 물론하고 그 제도가 기기 괴괴하며, 층이나 칸마다 보배로운 그릇과 이상한 물건이 있었고, 기타 이름을 알 수 없는 쇠와 나무 등의 물건이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또 여인이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본 것은 단지 한 명뿐이었는데, 흰 베로 머리를 싸매고 붉은색 치마를 입었습니다. 두 배에 모두 대장간이 설치되었는데, 만드는 것은 모두 대철환(大鐵丸), 화살촉 등의 물건이었습니다. 첨사와 현감이 배에 내릴 때에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책 한 권을 가지고 굳이 주었는데, 작은 배에서 받은 두 권과 합하면 세 권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서북풍이 불자 크고 작은 배가 불시에 호포(號砲)를 쏘며 차례로 돛을 달고 바로 서남 사이 연도(煙島) 밖의 넓은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첨사와 현감이 여러 배를 지휘하여 일시에 쫓아갔으나 마치 나는 새처럼 빨라서 사세상 붙잡아 둘 수 없었으므로 바라보기만 하였는데, 앞의 배는 아득하여 형체가 보이지 않았고 뒤의 배는 어슴프레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가 이미 떨어져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두 배의 집물 적간건기(什物摘奸件記)와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진서전을 모두 베껴 쓴 다음, 첨부하여 올려보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작은 배에서 얻은 한 폭의 서전 내용에, ˝ 영길리국(英吉利國) 수사 관원(水師官員)에게 글을 주어 진명(陳明)하는 일로 해헌(該憲)에 보내니, 잘 알기 바랍니다.
순조 16년(1816) 7월 19일
영국 범선 두 척(알세스트호, 리라호)에서 각각 멕스웰 함장과 바질 홀 함장이 영국 사절단을 청나라 텐진에 내려주고 조선과 유구를 거쳐 영국으로 떠나던 도중 충청도 해안가에 표류한다.

이 중 바질 홀 함장 일행이 해안가에 내리자 조선 백성들이 외국인들을 구경하러 왔는데, 바질 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 사람들은 스타킹을 보고 흥분했다고 한다. 선원들이 조선 측 관원들에게 건넨 책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당시 영국 사회상을 고려했을 때 낯선 이에게, 그것도 한 사람당 한 권씩 굳이 내어줄 만한 책은 성경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한문도 아닌 영문 성경을 가져온 모양인지 조선인들은 읽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또한 바질 홀 함장은 조선의 서해 탐사를 마치고, 조선의 여러 풍물들을 그려 책에 담아왔는데, 이후 귀항 도중에 리라호가 세인트헬레나에 들르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방문한다.
파일:조선사또 이승렬.jpg
1816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 해군이 그린 조선 비인[29]현감 이승렬과 부하들의 모습

바질 홀 함장은 군의관인 맥레오드와 자신이 항해기에 그린 조선 관리들의 복식과 풍물을 담은 그림들을 보여주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조선은 외국을 침범한 적 없는 평화로운 은자의 나라'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커다란 을 쓰고 긴 장죽을 피고 있는 흰 수염의 늙은 조선 선비의 그림[30]을 보며 '이 긴 모자와 담배가 아주 멋있다, 갖고 싶다' 라고 했으며, '조선의 이 분들은 정말 멋진 인물이다. 얘기를 듣고 그림을 보니, 이들은 세계 어느 민족 보다도 뛰어난 민족임에 틀림없다'라 말했다. 어쩌면 한류는 벌써 이때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공충 감사(公忠監司)[31] 홍희근(洪羲瑾)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 죽선(三帆竹船)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英吉利國)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와 수군 우후(水軍虞候) 김형수(金瑩綬)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은 영길리국(英吉利國)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 난돈(蘭墩)과 흔도사단(忻都斯担)[32]이란 곳에 사는데 영길리국·애란국(愛蘭國)·사객란국(斯客蘭國)이 합쳐져 한 나라를 이루었기 때문에 대영국이라 칭하고, 국왕의 성은 위씨(威氏)이며, 지방(地方)은 중국(中國)과 같이 넓은데 난돈(蘭墩)의 지방은 75리(里)이고 국중에는 산이 많고 물은 적으나 오곡(五穀)이 모두 있다고 하였고, 변계(邊界)는 곤련(昆連)에 가까운데 곧 운남성(雲南省)에서 발원(發源)하는 한줄기 하류(河流)가 영국의 한 지방을 거쳐 대해(大海)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북경(北京)까지의 거리는 수로(水路)로 7만 리이고 육로(陸路)로는 4만 리이며, 조선(朝鮮)까지는 수로로 7만 리인데 법란치(法蘭治)·아사라(我斯羅)·여송(呂宋)을 지나고 지리아(地理亞)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선재(船材)는 이목(桋木)047) 을 썼고 배의 형체는 외[瓜]를 쪼개 놓은 것같이 생겼으며, 머리와 꼬리 부분은 뾰족한데 길이는 30파(把)이고 넓이는 6파이며 삼(杉)나무 폭을 붙인 대목은 쇠못으로 박았고, 상층(上層)과 중층(中層)은 큰 것이 10칸[間]이고 작은 것이 20칸이었으며, 선수(船首)와 선미(船尾)에는 각각 건영귀(乾靈龜)를 설치했고, 배 안에는 흑백의 염소[羔]를 키우며 오리와 닭의 홰[塒]를 설치하고 돼지 우리도 갖추고 있었으며, 선수와 선미에는 각색의 기(旗)를 꽂고 작위(爵位)가 있는 자의 문전에 있는 한 사람은 갑옷 모양의 옷을 입고 칼을 차고 종일토록 꼿꼿이 서서 출입하는 사람을 제지하였으며, 급수선(汲水船) 4척을 항상 좌우에 매달아 놓고 필요할 때에는 물에 띄워 놓았습니다. 전(前)·중(中)·후(後)의 범죽(帆竹)은 각각 3층을 이루고 있고 흰 삼승범(三升帆)도 3층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사용하는 그릇은 화기(畵器)이고 동이[樽]와 병(甁)은 유리였으며 숟가락은 은(銀)으로 만들었고, 배 안에 실은 병기(兵器)는 환도(環刀) 30자루,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大火砲) 8좌(座)이었습니다.

또 배에 타고 있는 사람은 총 67인이었는데, 선주(船主)는 4품(品) 자작(子爵) 해밀턴 〔胡夏米: Hugh Hamilton Lindsay〕이고, 6품 거인(擧人)은 수생갑리(隨生甲利) 출해리사(出海李士)이며, 제1과장(第一夥長)은 파록(波菉)이고, 제2과장은 심손(心遜)이고, 제3과장은 약한(若翰)이고, 화사(畵士)는 제문(弟文)이며, 사자(寫字)는 노도고(老濤高)이고, 시종자(侍從者)는 미사필도로(米士必都盧)이며, 과계(夥計)는 벽다라마(辟多羅馬)·행림이(行林爾)·임홍파(林紅把)·가파지(加巴地)이고, 수수(水手)는 가타(嘉他)·랍니(拉尼)·야만(耶熳)·주한(周翰)·명하(明夏) 및 마흥(馬興) 6인이며, 진주(陳舟)에 10인, 손해(遜海)에 20인이고, 주자(廚子)는 모의(慕義)와 무리(無理)이며. 지범(止帆)은 오장만(吳長萬)이요, 근반(跟班)은 시오(施五)·시만(施慢)·시난(施難)·시환(施環)·시섬(施譫)·시니(施尼)·시팔(施八)이었습니다.

용모(容貌)는 더러는 분(粉)을 발라 놓는 것처럼 희기도 하고 더러는 먹물을 들인 것처럼 검기도 하였으며, 혹자는 머리를 박박 깎기도 하였고 혹자는 백회(百會)048) 이전까지는 깎고 정상(頂上)에서 조그만 머리카락 한 가닥을 따서 드리운 자도 있었으며, 입고 있는 의복은 혹은 양포(洋布)를 혹은 성성전(猩猩氈)을 혹은 3승(升)의 각색 비단을 입고 있었는데 웃도리는 혹 두루마기 같은 것을 입기도 하였으며 혹 소매가 좁은 모양을 입기도 하고 혹 붉은 비단으로 띠를 두르기도 하고, 적삼은 단령(團領)을 우임(右袵)049) 하고 옷섶이 맞닿은 여러 곳에 금단추(金團錘)를 달았으며 소매는 좁기도 하고 넓기도 하였는데 작위(爵位)가 있는 사람이 입는 문단(紋緞)은 빛깔이 선명하였습니다. 머리에 쓴 것은 호하미(胡夏米)는 푸른 비단으로 족두리처럼 만들었는데 앞쪽은 흑각(黑角)으로 장식하였고, 그 외의 사람은 붉은 전(氈)이나 흑삼승(黑三升)으로 더러는 감투 모양으로 더러는 두엄달이(頭掩達伊) 모양으로 만들었고 혹 풀[草]로 전골냄비 모양으로 엮기도 하였습니다. 버선[襪子]은 흰 비단으로 만들기도 하고 백삼승(白三升)으로 만들기도 하였으나 등에 꿰맨 흔적이 없었고, 신[鞋]은 검은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은 발막(發莫)050) 과 같았습니다.

배에 실은 물품은 파리기(玻璃器) 5백 개, 초(硝) 1천 담(担), 화석(火石) 20담, 화포(花布) 50필, 도자(刀子) 1백 개, 전자(剪子) 1백 개, 납촉(蠟燭) 20담, 등대(燈臺) 30개, 등롱(燈籠) 40개, 뉴(鈕) 1만여 개, 요도(腰刀) 60개인데, 아울러서 값으로 따지면 은화(銀貨) 8만 냥(兩)이라 하였습니다.

나라의 풍속은 대대로 야소교(耶蘇敎)를 신봉해 왔으며, 중국과의 교역은 유래(由來)가 2백 년이나 되었는데 청국(淸國)과 크기가 같고 권세가 비등하였으므로 조공(朝貢)도 바치지 않았고 그 나라에서 북경에 가도 계하(階下)에서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하였으며, 대청 황제(大淸皇帝)는 먼 나라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 주려 하였으나 요사이는 관리들이 황제의 뜻을 잘 받들지 않으므로 황은(皇恩)이 외국인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또 외국 상인은 관리의 횡포로 인하여 많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교역하고 있는 나라는 우라파국(友羅巴國)·법란서국(法蘭西國)·아임민랍국(阿壬民拉國)·자이마미국(者耳馬尾國)·대여송국(大呂宋國)·파이도사국(波耳都斯國)·아비리가국(亞非利加國)·식력국(寔力國)·영정도국(伶仃都國)·대청국(大淸國)이며, 교린(交隣)하는 나라는 아라사국(我羅斯國)·법란치국(法蘭治國)·하란국(荷蘭國)·파려사국(波呂斯國)이라 하고, 영국(英國)의 지방은 구라파(歐羅巴)에 있는데 사람을 귀히 여기고 있으며, 지방이 또 아미리가(亞未利加)에 있는데 그 역시 크고 좋은 땅이고, 또 서흔경(西忻慶)에도 있어 섬들이 많으며, 아비리가(亞非利加)의 극남단(極南端)에 있는 호망(好望)의 갑(甲)은 수위(垂圍)의 속지(屬地)이고, 또 태평양의 남쪽 바다에도 영국에 소속된 허다한 미개(未開)한 지방이 있으며, 그 끝은 아서아주(亞西亞州)에 있는데 섬들이 많고, 또 흔도사단(忻都斯担)·고위(古圍) 각 지방도 모두 영국의 판도(版圖)에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최근에 중국에서 영국으로 소속된 미개한 지방으로는 익능부(榏能埠) 마지반부(馬地班埠) 마랍가부(馬拉加埠)·선가파부두(先嘉陂埠頭)라 하였습니다.

그들은 ‘금년 2월 20일 서남풍을 만나 이곳에 와서 국왕의 명으로 문서와 예물을 귀국의 천세 계하(千歲階下)에 올리고 비답이 내리기를 기다리기로 하였으며 공무역(公貿易)을 체결하여 양포(洋布)·대니(大呢)·우모초(羽毛綃)·유리기(琉璃器)·시진표(時辰表) 등의 물건으로 귀국의 금·은·동과 대황(大黃) 등의 약재(藥材)를 사고 싶다’고 하였는데, 이른바 바칠 예물은 대니(大呢) 홍색 1필, 청색 1필, 흑색 1필, 포도색 1필과 우모(羽毛) 홍색 1필, 청색 1필, 포도색 1필, 종려색(棕櫚色) 1필, 황색 1필, 양포(洋布) 14필, 천리경(千里鏡) 2개, 유리기 6건(件), 화금뉴(花金紐) 6배(排)와 본국의 도리서(道理書) 26종이라 하였습니다.

또 7월 12일에 모양이 이상한 작은 배 한 척이 서산(瑞山)의 간월도(看月島) 앞 바다로부터 태안(泰安)의 주사창리(舟師倉里) 앞 포구(浦口)에 와서 이 마을 백성들을 향하여 지껄이듯 말을 하면서 물가에 책자(冊子)를 던지고는 바로 배를 돌려 가버렸는데, 던진 책자는 도합 4권 중에서 2권은 갑(匣)까지 합하여 각각 7장이고 또 한 권은 갑까지 합하여 12장이었으며 또 한 권은 갑도 없이 겨우 4장뿐이었다 하기에, 고대도(古代島)의 문정관(問情官)이 이 일로 저들 배에 다시 물으니, 답하기를, ‘금월 12일 묘시(卯時)에 종선(從船)을 타고 북쪽으로 갔다가 바다 가운데에서 밤을 새우고 13일 미명(未明)에 돌아왔는데 같이 간 사람은 7인이고 책자 4권을 주었으나 받은 사람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저들이 식량·반찬·채소·닭·돼지 등의 물목 단자(物目單子) 한 장을 써서 내면서 요청하였기 때문에, 소 2두, 돼지 4구(口), 닭 80척(隻), 절인 물고기 4담(担), 갖가지 채소 20근(斤), 생강(生薑) 20근, 파부리 20근, 마늘뿌리 20근, 고추 10근, 백지(白紙) 50권, 곡물 4담(担), 맥면(麥麵) 1담, 밀당(蜜糖) 50근, 술 1백 근, 입담배 50근을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저들이 주문(奏文) 1봉(封)과 예물 3봉을 전상(轉上)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굳이 물리치고 받지 아니하니, 저들이 마침내 물가에 던져버리고 또 작은 책자 3권과 예물의 물명 도록(物名都錄) 2건(件)을 주었다고 하기에, 서울에서 내려온 별정 역관(別定譯官) 오계순(吳繼淳)이 달려가서 문정(問情)하였는데, 그의 수본(手本)에 의하면 문서와 예물을 저들이 끝내 되돌려 받지 않으려 하여 여러 날을 서로 실랑이를 하다가 17일 유시(酉時)에 이르러 조수(潮水)가 물러가기 시작하자 저들이 일제히 떠들면서 우리 배와 매 놓은 밧줄을 잘라 버린 뒤에 닻을 올리고 돛을 달고 서남쪽을 향하여 곧장 가버려 황급히 쫓아갔으나 저들 배는 빠르고 우리 배는 느리어 추급(追及)하지 못하고 문서와 예물은 결국 돌려줄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이 배는 필시 바다 가운데에 있는 나라들의 행상(行商)하는 배일텐데, 우연히 우리 나라 지경에 이르러 주문(奏文)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교역을 시도해보려 하다가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자 저들도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다만 그 주문과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간 것은 자못 의아롭습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의 속셈을 비록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처리에 있어서는 의당 신중히 해야 하겠으므로, 문정관(問情官)과 역관 등으로 하여금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櫃)에 봉해 두게 하고 우리들에게 준 책자를 빠짐없이 모아 함께 봉(封)하여 본주(本州)의 관고(官庫)에 보관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충 수사(公忠水使) 이재형(李載亨), 우후(虞候) 김형수(金瑩綬), 지방관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가 문정할 때에 거행이 지연되고 처리가 전착(顚錯)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이 논감(論勘)한 대로 파직의 율로 시행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번의 영길리국은 비록 대국(大國)에 조공(朝貢)을 바치는 열에 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친 책자로 보면 민월(閩越)과 광주(廣州) 등지로 왕래하는 상선(商船)이 1년이면 6, 70척에 밑돌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이번에 우리 나라에 와서 정박한 사실이 혹 대국에 전해질 염려도 없지 않으니 우리 나라에서 먼저 발설(發說)하여 후환을 막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槐院)051) 으로 하여금 사실을 매거(枚擧)하여 자문(咨文)을 짓게 하여, 형편에 따라 예부(禮部)에 들여보내야 하겠습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홍희근이 홍주의 고대도 뒷 바다에 정박한 영길리국의 배에 대해 보고하다, 순조 32년 7월 21일 을축 4번째기사
순조 32년(1832) 7월 21일
위의 순조 16년 기록에 이어 1832년 또 발생한 영국 함선 로드 암허스트 호와의 접촉으로 이번에는 이들 중 통역을 맡은 사람이 한문을 쓸 줄 알아서 필담으로 대화진행하였다. 이 기록은 아라사라고 적어야 하는 것을 초반에 아사라라고 적혀 있는 등 오류가 아예 없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정확하다는 을 받는다.

여기서 호해미(胡夏米)라고 기록된 사람은 휴 해밀턴 린지(Hugh Hamilton Lindsay, 휴 해밀턴 린제이)인데 나중에 쓴 보고서가 남아 있다.

또한 여기서 수생갑리(隨生甲利)라고 기록된 사람은 통역관 겸 선의(船醫)인 독일 출신 목사 카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ützlaff)인데 조선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로, 이는 토마스,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보다 53년 앞선다. 그는 중국어 및 한자를 알기 때문에 통역을 맡았는데 조선에 도착했을 때 이곳이 한문 뿐만이 아닌 한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했고, 이후 "한국어에 대한 소견(Remarks on the Corean Language)"이라는 짧은 글을 발표했다.


[1] 태종이 신료들이 베푼 야외 연회장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궁궐로 돌아왔는데 민인생이 따라붙는걸 보고 “너 뭐하냐?”고 물었더니 “사관으로서의 직무를 수행 중입니다.”라고 대답해서 이숙번이 “사관이란 직책은 매우 중요하니 그냥 덮어두시죠”라고 했다는 장면.[2] 민인생이 편전에까지 들어오자 태종이 공무와 관련된 장소라면 몰라도 사적인 곳에까지 들어와선 안된다라고 하자 그런 것까지 따지면 어떻게 임무를 수행하겠냐고 민인생이 되묻자 태종은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하면서 자신이 편전에 있다해도 궁궐에 나도는 얘기를 참고해 적는것으로도 충분하다고 하자 진실은 어떻게든 드러나게 되는법이라고 맞받아치는 장면.[3] 여기서 상왕은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이다. 왕과 상왕이 함께 행차하자 당시 지역의 도관찰사(지금의 도지사)가 알고 인사를 하러 온 것을 보고 이제부터 인사하러 올 필요 없다고 도관찰사에게 말한 것이다.[4] 단종의 아버지인 문종이 어린 나이에 명나라 사신을 상대한 적이 있긴 한데 그 때 문종의 나이는 12세였고 상대한 것도 그저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인 하마연이었다. 단종과는 상황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다.[5] 한번 생각해보자. 조선 8대 왕 예종이 아들을 얻은 당시 나이가 불과 11살이었다. 그의 아들인 성종이 조선의 9대 왕으로 즉위한게 12살때였다. 지금이야 잼민이 취급받는 형편이지만 당시에는 10대로 접어들면 어느 정도 사회 생활을 시작하기 가능한 시기라고 보았고 대체로 세자 책봉이나 교육 역시 이 시기에 중점적으로 이뤄진다. 유대인의 성년식인 바 미츠바{Bar Mitzvah}도 유대인 남자 아이가 13세가 되면 ‘이제 비로소 너는 유대인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받는다’란 의식이어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진다.[6] 실제로 일본의 활은 기후 문제로 인한 합성궁 사용의 어려움과 탄력있는 활을 만들 만한 목재질의 부족으로 활 만드는 기술과 재주가 썩 좋지 못했다. 활의 일본 문단 참조.[7] 중종이 죽은 이후, 명나라에서 내려준 일종의 위로문. 실록에서도 해당 내용이 이렇게 각주처럼 적혀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황제는 사례감 태감(司禮監太監) 곽방(郭)과 행인사 행인(行人司行人) 장승헌(張承憲)을 보내어 조선 국왕 성휘(姓諱)에게 유제(諭祭)한다. 왕은 하방(遐邦)을 사수(嗣守)하여 나라의 번병(藩屛)이 되어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따라 신직(臣職)을 공경히 하여 온 40년동안 시종 변하지 않고 동토(東土)를 보안(保安)하기에 짐(朕)이 포가(褒嘉)하는 바이었는데 부음(訃音)이 들리니 슬프다. 그래서 특별히 공희(恭僖)라 시(諡)하고 관원을 보내어 유제하여 휼은(恤恩)을 보이니 영(靈)이 어둡지 않거든 받기를 바란다." 여기서 '성휘'라고 적힌 부분은 사관이 실록에 기록하는 과정에서 피휘를 한 것이고 실제로는 중종의 본명인 '이역(李懌)'이 적혀있었을 것이다.[8] 이런 참패 이후에 모든 장수들의 공과를 논하는 건 모두 내쫓고 군대를 아예 해체하겠다는 것이 아닌 이상 사실 아무 의미가 없는 헛짓이다. 큰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는 군대에서 너는 잘 했네 너는 못했네 하며 상벌을 논하는 것은 서로 이간질만 되기 때문. 이때는 상벌이 문제가 아니라 최고 책임자를 속히 쳐내어 기강을 잡고 군대를 다독여 후일을 기약하는게 당시 조선 수군에 필요한 일이었다. 현실을 전혀 파악 못하는 선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다만 선조가 말한 것에서 보듯 선조는 애초에 원균에게 패배를 지우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부하들에게 책임을 지우려고 저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9] 웃자고 한 말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에서 임금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비판한 사설은 찾아보기 힘들다. 나라의 어려운 상황을 언급하고, 여자를 멀리했던 지도자들의 고사를 읆은 후 선조가 “마음을 깨끗히 해야한다”라고 말한 것은, 음란마귀가 왕이랍시고 앉아있으니 나라가 평안할 수 있겠는가를 빙빙 둘러서 쓴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병을 핑계로 경연에 나오지 않는 것도 비판한 것은 덤.[10] 다만 지금 기준으로는 윤리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당시로는 노처녀에 속하는 나이였다. 아마 전쟁통에 혼기를 놓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선조의 나이를 생각하면 당시 기준으로 언제 승하할 지 모르는 나이였기에 빨리라도 적자를 얻기 위해 당장이라도 임신이 가능한 나이의 여성을 골랐다는 얘기도 있다. 물론 어린 왕후와 관계를 즐기느라 국사를 등한시했다는 사관의 비판은 유효하다.[11] 단 조선 3대 왕인 태종이 원경왕후에게 장가 든 것이 원경왕후 나이 18세 때의 일이다. 그 이후의 왕비들은 모두 10대 중반의 나이에 간택을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다.[12] 게다가 영조는 아버지 숙종이 후궁을 중전으로 올릴 수 없게 법을 바꿔버려서 딱히 답이 없었다.[13] 실제로 조선의 역대 왕비후궁 출신 왕비현덕왕후, 안순왕후, 폐비 윤씨, 정현왕후, 장경왕후, 희빈 장씨 총 5명이다. 그래서 선조가 더더욱 까이게 된다. 후궁이 중전에 오를 수 없게 된 건 숙종 이후의 일이다.[14] 그나마 소현세자의 자식 대신 강림대군을 후계로 세운 건 왜란과 호란을 총 4번이나 겪은 마당에 장성한 임금이 필요하다는 근거라도 있지 이건 그냥 순 어거지로 떼쓴건데 왕의 뜻이라서 누가 막지도 못한 것이다.[15] 취소선이 그어져 있는데 사실 당시 시대상으로 본다면 숙종 역시 적은 나이가 아니다. 한 예로 그의 아들이었던 영조가 붕어(왕의 사망)했을때 향년 81세였고 이는 역대 조선 왕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왕이면서 최장기 재위기간을 지낸 왕이었다. 조선의 임금들의 평균 수명이 대부분 40대 후반에서 50대 초중반이었음을 감안하면 이 발언을 했을 당시의 숙종의 나이가 결코 젊은측에 낀다고 하기엔 어려운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11살이란 나이에 아버지가 된 예종의 예까지 있는것을 보면..[16] 해외로 본다면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난 미합중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있는데 이분은 지병까지 있던데다 온갖 질병은 다 앓던지라 ‘걸어다니는 병상’이라고 불릴 정도다.[17] 평제가 독살당한 내막을 일컬어 납일초주(臘日椒酒)라는 말이 있다. 납일(臘日. 동지로부터 세 번째의 미일.)에 독을 넣은 '초주'(椒酒)로 왕망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얘기이다.[18] 당나라의 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중국 배를 의미한다. 당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당나라 멸망 이후에도 오랫동안 '당(唐)'이란 단어는 중국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19] 또한 영조 본인이 '간과가 극렬한 가운데'라고 운을 뗀 것에서 알 수 있지만 이순신이 활약하던 시기는 한창 전쟁 중인 때였다. 아무리 물자가 풍부한 전라도라고 해도 임진왜란 당시는 피폐했으며 아사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즉, 영조는 전라도의 풍요로움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남에게 손 안벌리고 알아서 해결하는 이순신의 솔선수범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20] 영조가 박문수를 황해도 수군절도사에 제수한 것은 1744년 1월이다. 전근대 시기에 명령이 전해지고 채비하여 황해도까지 가야 하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거의 부임 직후라고 봐도 무방하다.[21] 조선의 지방 감영은 근대화 시기까지 독자적 자금 운영으로 무장을 마련하는 방식을 취하긴 했지만 이순신의 경우 그 권한을 넘어서 월권에 가까운 경제 활동을 조정의 묵인 아래 행동했다. (물론 당시 사정상으론 어쩔 수 없는 면도 있었다. 평상시라면야 조정에서 돈 대주고 하겠지만 임진왜란 시기의 조정은 이순신과의 관계를 들어서 보면 조정이 이순신에게 잘 싸우라고 돈 주는게 아니라 이순신이 조정에게 꼬박꼬박 물품을 갖다바칠 정도로 궁핍한 형국이었다. 이순신 압장에선 중앙에선 돈이 안 오지 전란이라 조세도 제대로 걷힐 리가 없고 또 자신은 그런 권한도 없는 사람이니 경제활동이라도 해야 함대를 유지할 수 있다. 군대도 밥을 먹어야 전진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즉 단순 사령관이라기보단 지방총독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조선 후기로 갈수록 온돌의 보급으로 목재의 가격이 폭등하여 이전보다 전선건조의 비용이 증가하였다.[22] 1718~?, 병자호란강화도에서 폭사한 것으로 유명한 김상용의 후손이다. 후대에는 이 상소 말고도 흑산도와 진도 유배가서 쓴 유배기도 나름대로 유명하다.[23] 앞 내용은 영조가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을 하며 세손(정조)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내용이다. 거침없이 척척 답을 말하자 영조가 감탄을 하면서 이야기를 꺼내는 부분이다.[24] 이미 영조 역시 임오화변 후, 사도세자와 관련된 어떠한 언급이라도 들리는 경우엔 엄중하게 다스리겠다고 천명한 이후였고 이를 정조에게까지 주지시켰다.[25] 팔진미란, 아주 맛있고 성대한 음식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로 쉽게 말해서 맛있는 음식을 못먹고 살순 있어도 담배는 못끊는다라는 뜻이다(...).[26] 한 130년 뒤 쯤 담배의 해악성이 더 잘 알려진 시기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부하들이 같은 논리로 담배를 권하다가 담배 피는 사람들이 죄다 가래나 뱉어대며 숨이 차 헉헉대고 이도 누렇게 되는 데 이게 좋은 거냐며 까인다. 물론 히틀러는 담배가 약과로 보일 정도로 각종 약물과 단 음식에 중독되어 있어서 이가 누렇게 되는 선이 아니라 그냥 이가 죄다 빠져버리고 말았다. 당연하겠지만 히틀러의 말도 안 되는 미친 행동들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고, 그걸 제지해야 할 최측근인 헤르만 괴링 등이 전부 약물중독자여서 인류 최악의 학살자를 만들게 되었다.[27] 니코틴은 20여년 후인 1828년 독일 과학자 포셀트(Wilhelm Heinrich Posselt)와 라이만(Karl Ludwig Reimann)에 의해 발견되며, 역학작용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43년의 일이다.[28] 후금 군주의 호칭와 관련해서도 말이 많았다. 정묘호란 당시에는 '이귀, 최명길이 노추(奴酋/虜酋, 오랑캐 추장) 따위를 한(汗, 칸)으로 불러 줬다'는 내용의 격앙된 상소가 올라오는 등 후금 군주를 '칸'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거부했으나, 병자호란 때에는 주전론자들조차 '칸'을 인정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정도 호칭이면 충분하다는 정도였으며, 애초에 '칸'과 '황제'는 조선 입장에서 격이 달랐다. '칸'은 유목 민족 군주의 전통적인 호칭이었으므로 '오랑캐가 오랑캐 칭호 썼구나' 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으나, '황제'는 무려 중원의 천자 칭호였다. 책봉-조공 체제에 포섭되어 중원 한족 왕조의 오랜 제후국을 자처했던 조선의 입장에선 감히 오랑캐 따위의 칭제(稱帝)를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시대가 흐른 후 소중화 사상이 강해지던 시기의 조선에서는 스스로 칭제건원하자며 나선 사람이 나왔지만(상기된 김약행)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수 조선 사대부들에게 진정한 천조(天朝)는 명나라였던 것이다.[29] 현재의 충청남도 서천군의 비인면[30] 사또였던 당시 충청도 비인현감 이승렬의 모습이다.[31] 지금의 충청도. 왜 충청이 아니라 공충이냐면, 당시 청주반역향으로 찍혀 이름이 바뀌었기 때문. 1826년 청주에서의 반역 모의로 인해 충청도에서 청주가 빠지고 공주충주를 따서 공충도가 되었다가 이 사건 이후 1834년 충청도로 환원되었다.[32] 여기서 정확히는 영국 동인도 회사령 인도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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