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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역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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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문서
<colbgcolor=#000><colcolor=#fe5a1d> 모기업 관련 정보 모기업 파일:요미우리 신문 로고.svg 요미우리 신문
일본시리즈 우승
★★★★★★★★★★
★★★★★★★★★★
★★
1951 · 1952 · 1953 · 1955 · 1961 · 1963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1981 · 1989 · 1994 · 2000 · 2002 · 2009 · 2012
리그 우승
(47회)
1936 추계 · 1937 춘계 · 1938 추계 ·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1949 · 1951 · 1952 · 1953 · 1955
1956 · 1957 · 1958 · 1959 · 1961 · 1963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1976 · 1977 · 1981 · 1983 · 1987 · 1989 · 1990 · 1994 · 1996 · 2000 · 2002 · 2007 · 2008 · 2009 · 2012
2013 · 2014 · 2019 · 2020
클라이맥스 시리즈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8 · 2019 · 2021 · 2024
시즌별 요약 2011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현역 선수 경력 사카모토 하야토/선수 경력 · 토고 쇼세이/선수 경력 · 마루 요시히로/선수 경력
경기장 1군 도쿄 돔 · 2군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 · 지방 홈구장 선 마린 스타디움 미야자키 | 과거 고라쿠엔 스타디움
홈 중계 채널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닛폰 테레비
주요 인물 감독 아베 신노스케 · 선수회장 오시로 타쿠미 · 주장 오카모토 카즈마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과거 응원가 · 유니폼 · 순혈주의 · 여담 · 전통의 일전 · 10.8 결전
도쿄 시리즈 · 2022년 센트럴 리그 3위
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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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역대 4번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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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영구 결번 및 임시 결번
2.1. 영구 결번2.2. 준영구 결번2.3. 임시 결번
3. 역대 선수
3.1. 투수3.2. 포수3.3. 내야수3.4. 외야수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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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재적했던 선수들을 이 항목에서 정리한다. 현역 선수단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선수단 항목 참고.

2. 영구 결번 및 임시 결번

2.1. 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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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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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cac00> No.1 No.3 No.4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쿠로사와 토시오
<rowcolor=#ccac00> No.14 No.16 No.34
사와무라 에이지 카와카미 테츠하루 카네다 마사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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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쿠로사와, 사와무라를 빼면 전부 V9 시대에 지도자, 선수로써 활약한 선수들이 영구 결번을 받았다.

1. 오 사다하루: 설명이 필요 없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세계의 오' . 통산 868홈런(1위), 2170타점(1위)에 트리플 크라운 2회 달성에 빛나는 성적을 냈다. 다만, 감독으로서는 자이언츠에서 일본시리즈 우승을 거두지 못해 결국 사임. 그 뒤 1995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자리를 옮겨 거기서 감독으로서 레전드가 됐다. WBC 초대 우승을 이끌었다.

3. 나가시마 시게오: 역시 교진군의 전설이자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미스터 베이스볼', '미스터 자이언츠'의 별명을 가졌으며, 현재를 통틀어도 가장 인기있는 역대 선수이기도 하다. 감독으로서도 자이언츠를 일본시리즈 2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다만 이건 2기 감독 시절의 일이었고 1기 감독 때는 전설의 V9 시기에 비하면 그닥 좋진 못한 성적을 기록했다.

4. 쿠로사와 토시오: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영구 결번 선수. 나고야긴코, 츠바사군 등에서 활약하다 1944년 교진군에 이적하여 구단 최초로 4번을 달고 4번타자로 나서 맹활약을 했다. 하지만 33세의 다소 젊은 나이에 장티푸스로 요절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전사한 사와무라 에이지와 함께 영구 결번으로 처리했다.

14. 사와무라 에이지: 일본 프로야구 양대 리그 이전(일본 야구 연맹 시절) 시대의 최고의 투수. 어린 나이에 일본 구계를 호령하는 대투수였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 27세 나이에 전장에서 산화했다. 이후 구단에서 그의 전설적인 활약을 기리고자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으며 후에 그의 이름을 딴 사와무라상을 제정했다.

16. 카와카미 테츠하루: '타격의 신'으로 칭송받는 인물. 또한 교진군의 9년 연속 일본시리즈 제패, 즉 V9(1965~1973)을 이끌었던 명장이기도 하다.

34. 가네다 마사이치: 일본 프로야구 통산 400승(1위), 4490삼진(1위)를 기록한 전설적인 투수. 사실 고쿠테츠 스왈로즈에서 데뷔한 데다가 스왈로즈에서 더 오래 뛰었고 자이언츠에서는 5시즌(1965~1969)밖에 뛰지 않았고 성적도 돋보이지 않았지만 여러 차례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을 하기도 했고 일본 야구계에서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너무나도 커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다.

2.2. 준영구 결번

8. 하라 다쓰노리: 하라가 은퇴한 이후 직접 니시 토시히사(仁志敏久)에게 넘겨줬고, 니시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한 뒤인 2007년부터 2013년까지는 오릭스 버팔로즈에서 이적해온 다니 요시토모(谷佳知)가 달았다. 2014년에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FA 이적한 도루왕 출신 2루수 카타오카 야스유키가 달게 되었고, 2019년부터는 또다른 대형 FA 이적생인 마루 요시히로가 달게 된다.

18. 에이스 번호: 구단 내에서는 준영구 결번으로 처리하지 않지만, 교진군의 18번은 에이스에게만 돌아가는 번호라 워낙 유명하다. 양대 리그 출범 이후 후지타 모토시-호리우치 츠네오-쿠와타 마스미-스기우치 토시야-현재의 스가노 토모유키로 이어진다.

2.3. 임시 결번

29, 41, 63 : 2015년 도박 사건으로 물의를 일으켜 무기실격 징계를 받은 후쿠다, 가사하라, 마츠모토의 등번호. 1년간 임시로 결번될 예정이라고.

3. 역대 선수

괄호 안의 숫자는 재적 연도

3.1. 투수

  • 사와무라 에이지 (1934 - 1937, 1940 - 1941, 1943)
    전쟁으로 인해 일찍 산화한, 초기 일본 야구의 신화적인 선수.
  • 빅토르 스타르핀 (1934 - 1944)
    러시아계 일본인으로 초기 거인군의 에이스였다. 일본최초의 통산 300승 투수.
  • 나카가미 히데오 (中上 英雄, 1942 - 1944, 1946, 1948 - 1955)
    한국계 일본인으로 1918년 5월 18일, 부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944년, 25살의 나이로 감독직에 올랐는데 이는 일본 프로야구 최연소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을 달성하기도 했고, 1976년에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선수시절 후지모토 히데오(藤本 英雄)라는 등록명을 사용한 시기가 있는데 퍼펙트 게임은 이 시기에 달성했다. 그래서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퍼펙트 게임 투수라고 하면 보통 후지모토 히데오라고 한다.
  • 벳쇼 다케히코 (1949 - 1961)
    본명은 벳쇼 아키라 였지만 요미우리에 입단한 이후 개명하였다. 난카이 호크스의 에이스였으나 요미우리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분쟁이 발생했고, 이 벳쇼 빼내기 사건은 일본 프로야구가 양대리그로 분리되는 계기를 제공하면서 일본야구 역사의 중대한 분기점을 남긴 선수. 선수로서도 통산 310승(NPB 역대 5위), 335완투(역대 4위), 4350.2이닝(역대 5위), 평균자책점 2.18의 뛰어난 성적을 남긴 당대의 대투수였다.
  • 후지타 모토시 (1957 - 1964)
    역대 요미우리 감독 중에서는 큰 인상은 남기지 못했지만 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의 임기 사이에 땜빵 가교 역할을 하면서도 그 사이에 두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룬 명장. 나가시마가 1980년 해임당하고 나서 같은 해에 은퇴한 오 사다하루가 코치로서 경력을 쌓는 동안[1] 감독 부임 첫 해인 1981년에 일본시리즈[2]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3년 후인 1983년 세이부와의 일본시리즈에서의 패배[3]의 책임을 지는 형식으로 후지타가 자진사임히고 정해진 수순대로 오 사다하루가 감독으로 앉았는데 오 사다하루가 임기 5년동안 기대이하의 성적을 거두자 88년 시즌 후에 자진 사임의 형식으로 오 사다하루를 물러나게 했다. 다음은 첫번째 임기 당시 일본시리즈 우승이라는 과제를 안고 본의 아니게 물러난 나가시마를 다시 감독으로 앉혀 명예회복의 기회를 주는 수순이었으나 나가시마 본인이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고사하는 바람에 다시 급하게 후지타에게 감독 취임을 요청했고 감독자리에 재취임한 후지타는 부임 첫해인 89년 다시한번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4] 4년동안 요미우리를 지휘한 뒤 1992년 야쿠르트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2위로 시즌을 마감하고 우승 실패를 책임지는 형태로 다시 사임을 했고, 후임에는 FA와 역지명제 도입 등으로 돈질로 선수들을 싹쓸이하는 게 가능해진 때를 기다려온 나가시마가 다시 취임했다.
  • 미야타 유키노리 (1962 - 1969)
    뛰어난 실력을 지녔지만 심장 질환 때문에 선발로 긴 이닝을 던지기 어려워지자 구원 투수로 전업해 활약했다. 동시대의 곤도 마사토시나 이후의 에나츠 유타카 등과 함께 일본프로야구 전업 구원투수의 1세대라 할 수 있으며, '8시 30분의 사나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뛰어난 구원 투수로 활약했지만 혹사의 여파로 짧은 전성기 이후 그대로 선수생활이 끝났다. 이후 세이부 라이온즈와 요미우리 등에서 뛰어난 투수코치로 활약했다.
  • 죠노우치 쿠니오 (1962 - 1971)
  • 다카하시 카즈미 (1965 - 1975)
    V9 시절 호리우치의 뒤를 이은 2선발, '왼손의 에이스'로 활약한 좌완투수. 1976년부터 1983년까지는 같은 고라쿠엔 스타디움을 홈으로 쓰는 퍼시픽 리그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준수한 선발투수로 선수생활을 이어갔으며 1981년 친정팀 요미우리와의 덕아웃 시리즈로 열린 1981년 일본시리즈에도 1차전과 5차전에 선발등판해 맞대결을 가지기도 했다. 2015년에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 호리우치 츠네오 (1966 - 1983)
    고시엔 2대 괴동. V9 시절을 대표하는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으나 실력외에도 기행이 하늘을 찌르던 이단아. 감독으로선 팀을 대차게 말아먹었다.
  • 장명부 (1968 - 1972)
    김일융과 동일한 경로(재일 한국인의 외국인 간주로 인한 드래프트 번외 지명)으로 입단해 꽤 큰 기대를 받았지만 끝내 요미우리에서는 포텐을 터트리지 못하고 난카이 호크스로 트레이드된다.
  • 김일융 (1968 - 1983)
    일본명 니우라 히사오. 나가시마 감독하에서 70년대 후반 요미우리의 좌완 에이스로 활약하였다.
  • 고바야시 시게루 (1973 - 1978)
    요미우리의 에이스였으나 에가와 사건에 얽혀 한신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비운의 투수.
  • 니시모토 다카시 (1975 -1988, 1994)
    70~80년대 초반 거인의 우완 에이스. 우타자 몸쪽으로 날카롭게 꽂히는 슈트가 주 무기였다. 2014년 오프시즌에서 김성근 감독을 따라 한화 이글스 투수코치로 부임했다.
  • 사다오카 쇼지 (1975 - 1985)
  • 카토 하지메 (1976 - 1990)
  • 스미 미츠오 (1978 - 1989)
  • 에가와 스구루 (1979 - 1987)
    '공백의 1일'로 드래프트를 시끌시끌하게 만들었던 인물. 이후 짧지만 강렬한 전성기를 맞으며 에이스로 군림했다.[5]
  • 카토리 요시타카 (1979 - 1989)
    80년대 요미우리의 주축 셋업맨이었던 사이드암 투수. 요미우리 생활 이후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한 뒤에도 뛰어난 구원 투수로 활약해 세이부 왕조 시대를 떠받들었다. 은퇴 이후 여러 차례 요미우리의 투수코치를 맡았다.
  • 마키하라 히로미 (1982 - 2001)
    2016년 기준 일본 프로야구 최후의 퍼펙트 게임 투수. 사이토, 마키하라, 쿠와타는 거인의 세 기둥으로 불렸다.
  • 사이토 마사키 (1983 - 2001)
    '헤이세이의 대 에이스'. 80년대 말-90년대 후반의 사이드암 에이스.
  • 코다 이사오 (1984 - 1994)
    2013-2014년에 두산 베어스 코치를 역임했다.
  • 김기태(재일교포) (1985)
    히로시마의 언더핸드 에이스로 활약하고 1976년 카프의 첫 리그 우승 장면의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사고로 인한 기량 저하로 인해 장명부와의 맞트레이드로 난카이 호크스로 이적해 구원 투수로 뛰면서 어느 정도 재기했다. 하지만 요미우리에서는 그다지 좋은 활약을 하지 못했고 이 해를 마지막으로 일본 무대를 떠나 한국프로야구 청보 핀토스에서 뛰게 된다.
  • 미야모토 카즈토모 (1985 - 1997)
  • 쿠와타 마스미 (1986 - 2006)
    키요하라 카즈히로와 함께 'KK 콤비'를 이 뤄 고교 야구를 제압한 스타. 요미우리에서도 에이스로 활약했다.
  • 이시게 히로시 (1986 - 1996)
  • 오카지마 히데키 (1994 - 2005)
    요미우리에서는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 등 여러 보직을 오가며 미묘한 활약을 했지만 2006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셋업맨으로 활약한 것을 시작으로 메이저리그에서도 준수한 좌완 중간계투로 활약했다.
  • 카와하라 준이치 (1995 - 2005)
  • 조성민 (1996 - 2002)
    대형 유망주로 주목받았으나 부상 이후 재기하지 못했다.
  • 발비노 갈베스 (1996 - 2000)
    심판에게 위협구를 던진 카리브의 괴물. 1999년에는 요미우리 구단 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투수로서 개막전 선발을 맡을 정도의 실적을 거두었지만 지랄맞은 성격이 발목을 잡았다.
  • 우에하라 고지 (1999 - 2008, 2018 - 2019.5)
  • 쿠도 키미야스 (2000 - 2006)
    세이부 라이온즈,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우승청부사. 요미우리에서도 두 번 일본시리즈 정상에 서고 통산 200승 고지도 밟는다.
  • 다카하시 히사노리 (2000 - 2009)
  • 정민철 (2000 - 2001)
  • 정민태 (2001 - 2002)
  • 게리 레스 (2003)
  • 기사누키 히로시 (2003 - 2009)
  • 쿠보 유야 (2003 - 2015)
  • 니시무라 켄타로 (2004 - 2018)
  • 우츠미 테츠야 (2004 - 2018)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까지 요미우리의 토종 에이스로 활약한 좌완 투수. 오릭스의 지명을 거부하면서까지 요미우리에 입단할 정도로 충성심이 뛰어난 선수였지만 FA영입된 스미타니 긴지로의 보상선수로 풀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로 이적했다. 그의 조부 우츠미 이소오도 요미우리에서 뛰어서 그의 등번호였던 26번을 달고 뛰었다. 한국에서는 이승엽의 요미우리 시절 에이스이자 2009 WBC한일 베이스볼 클래식 4차전에서 이용규에게 빈볼을 던진 것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 토노 슌 (2005 - 2012)
  • 츠지우치 다카노부 (2006 - 2013)
    교진군 드래프트 1픽 잔혹사 중 한명과 동시에 고시엔 대회의 투수 혹사의 예시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언급되는 선수. 2005년 드래프트에 오릭스와의 경합 끝에 교진군 1픽 지명을 받았으나, 입단 이후 고교 시절 혹사의 여파로 잦은 어깨 통증 및 수술 후 재활에만 시간을 허비한 채 1군 시합 등판을 전혀 하지 못했다. 2013년 8월 31일에 테이쿄 대학과의 프로-아마추어 전에 1이닝 등판했을 때 최고 구속 131km/h, 밋밋한 변화구 등을 보여주며 고교 시절의 모습은 이미 사라졌고, 결국 구단도 더는 기다려주지 않은 채 2013년 시즌 종료 후 방출당했고 직후 은퇴했다. 은퇴 이후로는 여성 야구팀의 코치, 감독에 취임했었다가 2018년에 퇴임했고, 이 후엔 아키타현으로 이주하여 사설경비업체에서 근무하고 있다.
  • 오치 다이스케 (2006 - 2014)
  • 야마구치 테츠야 (2006 - 2018)
    일본프로야구 사상 육성선수의 최고 성공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 좌완 투수. 고교 졸업 후 메이저리그에 도전했지만 4년간 싱글A마저 밟지 못하고 루키리그만 전전하다 요미우리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해 육성선수로 일본프로야구에 겨우겨우 입성하는 파란만장한 프로 입문을 겪었다. 하지만 입단 2년차인 2007년 후반기부터 1군 붙박이로 정착하더니, 이후 일본프로야구 육성선수 최초의 신인왕을 차지하는 2008년부터 2016년까지 9시즌 연속 60경기 등판의 일본 기록을 세우고 홀드왕도 두 번 차지하는 등 요미우리의 허리를 책임지는 특급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통산 273홀드로 닛폰햄의 미야니시 나오키[6]가 2018년 갱신하기 전까지 일본프로야구 통산 최다 홀드 기록 보유자였다.
  • 마크 크룬 (2008 - 2010)
  • 세스 그레이싱어 (2008 - 2011)
    KIA 타이거즈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한 뒤 요미우리에 입성해서도 프론트라인 선발로 제 몫을 다했다.
  • 디키 곤잘레스 (2009 - 2012)
    위의 그레이싱어처럼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활약 → 요미우리로 영전 테크를 탄 외국인 투수. 2010년 다승왕.
  • 데니스 홀튼 (2012 - 2013)
    2011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우승에 공헌한 뒤 2012년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그러나 2년 후 재계약을 포기하고 KIA 타이거즈로 적을 옮긴다.
  • 스캇 매티슨 (2012 - 2019)
    캐나다인 우완 셋업맨으로 JFK(한신)의 일원이던 호주 좌완 제프 윌리엄스를 제치고 일본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통산 홀드기록 보유자(174홀드)가 된 선수. 일본에서만 421경기 등판, ERA 2.46, 174홀드 54세이브를 거두고 홀드왕을 두 번 차지하는 등(2013, 16) 오랫동안 요미우리의 필승 계투로 활약했다. 메이저리그 이외의 리그에서 뛰는 캐나다 선수 중에서는 가장 실력과 실적이 뛰어난 선수 중 하나라서 현역시절 메이저리거가 나갈 수 없는 국가대항전에서 오랫동안 마무리를 전담해 캐나다 야구계의 레전드 중 하나.
  • 크리스 세든 (2014)
  • 타카기 하야토 (2015 - 2017)
  • 야마구치 슌 (2017 - 2019)
    DeNA에서 11시즌간 활약 후 2017년에 교진으로 이적했는데, 이적 첫 시즌에 경비원 폭행 사건으로 대형사고를 치기도 했다. 하지만 2019년 다승과 승률, 탈삼진 부문 센트럴리그 1위를 차지하면서 부진했던 스가노를 대신해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하지만 2019년 프리미어12 결승전에서 1회부터 빅똥을 싸질러놔서 쌍욕을 쳐먹었다. 오프시즌에 요미우리 소속 선수로서는 최초로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MLB에 진출했다.
  • 모리후쿠 마사히코 (2017 - 2019) 역동적인 투구폼을 가진 사이드암 좌완 불펜 투수. 하지만 FA 먹튀
  • 다구치 카즈토 (2014 - 2020)
  • 후지오카 타카히로 (2019 - 2020)
  • 앙헬 산체스[7]

3.2. 포수

3.3. 내야수

  • 치바 시게루 (1938 - 1941, 1946 - 1956)
    일본 프로야구 초창기의 명2루수. 감독으로서는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9] 하지만 킨테츠에선 감독으로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무이한 한 시즌 100패의 흑역사를 썼다.
  • 카와카미 테츠하루 (1938 - 1942, 1946 - 1958)
    붉은 배트의 '타격의 신'. NPB 최초의 2천안타 달성자. 후에 요미우리 감독으로써 요미우리를 센트럴리그- 일본시리즈 V9를 포함한 리그 우승 - 일본시리즈 우승 11회(즉 승률 100%)로 이끌며 지금의 요미우리가 명문구단으로 불리게 되는 계기가 된 명장.
  • 히로오카 타츠로 (1954 - 1966)
    자이언츠의 명 유격수이자 지략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첫 우승과 세이부 라이온즈 전성기의 서막을 이끈 명감독.
  • 나가시마 시게오 (1958 - 1974)
    '미스터 베이스볼'.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상징이자 일본 프로야구 사상 최대의 스타.
  • 왕정치(오 사다하루) (1959 - 1980)
    통산 868홈런에 빛나는 전설의 홈런왕. 세계의 오.
  • 쿠로에 유키노부 (1964 - 1974)
    히로오카의 후임 유격수로 V9 시대의 주전 유격수를 맡았다.
  • 도이 쇼조 (1965 - 1978)
    V9 시대의 주전 2루수이지만, 현대의 야구팬들에게는 오릭스 블루웨이브 감독 시절 2군을 폭격했음에도 특이한 타격폼을 갖고 있던 스즈키 이치로라는 젊은 외야수를 1군에 올리지 않은 꼰대로 더 기억되는 인물.(...) 또한 오릭스 감독 시절 부머 웰즈다구치 소 등 다수의 선수단과 불화가 있었다. 1993 시즌을 끝으로 오릭스 감독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1996년에서 98년까지 교진으로 돌아와 코치를 역임했고 2009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7년 6월 8일에 열린 교진의 5000승 기념 이벤트에서 휠체어를 타고 등장했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었다.
  • 코노 카즈마사 (1970 - 1986)
  • 데이비 존슨 (1975 - 1976)
    워싱턴 내셔널스 감독이자 요미우리 자이언츠 사상 최초의 외국인 선수.
  • 나카하타 키요시 (1976 - 1989)
    요미우리 45대 4번 타자 출신 프랜차이즈 스타. 2012~2015년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 감독을 맡았다.
  • 시노즈카 카즈노리 (1976 - 1994)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톱 타자 2루수. 통산 타율 3할의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수비력을 자랑했다. 베스트나인 5회, 골든글러브 4회를 차지했는데 1987년에 딴 베스트나인은 2020년 현재까지 요미우리의 마지막 2루수 베스트나인 상이다.
  • 오카자키 카오루 (1980 - 1996)
  • 하라 다쓰노리 (1981 - 1995)
    2002 - 2003, 2006 - 2015 요미우리 감독으로 유명하지만 선수시절에도 1980년대~1990년대 초반을 풍미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 코마다 노리히로 (1982 - 1993)
    만루에 강한 모습을 보인 만루의 사나이. 1989년 일본시리즈 MVP. 또한 요미우리 주전선수 중 유일하게 FA를 선언해[10] 요미우리를 떠난 선수다.
  • 카와이 마사히로 (1983 - 2003)
    번트 장인. 시노즈카 X 카와이 키스톤 콤비는 80~90년대를 주름잡았다.
  • 고토 코지 (1988 - 2005)
  • 오오모리 타케시 (1990 - 1998)
    대표적인 교진군 1픽 잔혹사의 사례. 노모 히데오, 요다 츠요시, 사사키 카즈히로, 시오자키 테츠야, 후루타 아츠야, 신조 츠요시 훗날 대스타가 된 이들을 제치고 1픽으로 뽑혔다. 2군에선 홈런왕과 타점왕을 먹을 정도로 활약했으나, 1군에서는 2군만큼의 활약을 전혀 하지 못했고, 결국 1998년에 긴테츠로 2:1 트레이드 형식으로 이적, 1999년에 은퇴한다. 그러나 은퇴 후 도호쿠/간토 지방 스카우트로 재직하면서 사카모토 하야토를 추천, 입단시켜[11] 프로 시절 삽질을 갚고도 남을 실적을 올렸다. 이후에도 2021년까지 국제부 과장, 총괄 스카우트, 편성 부본부장 등을 역임하다가 2022년에 프런트 직책에서 물러났다. 일본의 걸그룹인 AKB48의 멤버 오오모리 미유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모토키 다이스케 (1991 - 2005)
    키요하라처럼 오사카 출신이지만 골수 요미우리 팬으로, 이쪽은 1989년 드래프트에서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1순위 지명을 거부하고 1년 뒤의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에 지명된 바 있다. 쟁쟁한 내야수들이 많았던 팀 사정상 주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뛰었지만 수려한 외모의 고시엔 스타 출신에, 뛰어난 예능감과 팀에 대한 높은 충성도를 보여줘 나름의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은닉구나 거친 슬라이딩 등 비매너 플레이 때문에 다른 팀 팬들 사이에서 안티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심복으로서 파벌을 조성하고 어린 선수들을 괴롭히는 등의 모습이 부각되며 2005년 시즌 종료 후 키요하라와 함께 정리되었다. 은퇴 후에는 주로 방송인으로 활동했으며 키요하라와의 관계 때문에 현장 복귀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되었지만, 2019년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복귀와 함께 요미우리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 오치아이 히로미츠 (1994 - 1996)
    마츠나가 히로미, 코마다 노리히로 등과 함께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FA 선언자가 된 인물. 최전성기는 아니었지만 40대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번타자로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 니시 토시히사 (1996 - 2006)
    시노즈카가 은퇴한 뒤 90년대~2000년대 초 거인의 2루를 굳건히 지킨 호타준족의 선수.
  • 루이스 데 로스 산토스 (1997)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과 KIA 타이거즈 초창기를 함께했던 그 선수 맞다. 대만리그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대만의 이치로'라는 설레발까지 들으며 요미우리에 입성했지만 부진한 모습만 보였다.
  • 키요하라 카즈히로 (1997 - 2005)
    고교시절부터 염원해왔던 거인에 입성해 여전히 야구계 최고의 스타로 활약했지만 잦은 부상, 파벌 조성, 수뇌부와의 불화, 들쑥날쑥한 성적과 마약 복용 등 곡절이 많았던 시절.
  • 니오카 토모히로 (1999 - 2008)
    장타력을 갖춘 유격수였지만 유난히 도쿄돔을 살짝 넘어가는 홈런이 많다고 '돔런 아티스트'라는 특이한 별명이 있었던 선수. 그러나 불륜 소동과 후배를 괴롭힌 것이 발각되어 결국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로 쫓겨나다시피 트레이드된다. 그러나 은퇴 후 2군 코치로 다시 복귀.
  • 로베르토 페타지니 (2003 - 2004)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MVP 1루수로 활약하다 요미우리로 이적. 하지만 외야 수비를 보면서 무릎의 상태가 악화되어 선수생명이 꼬이게 된다. 후에 LG 트윈스에서 페타신으로 불렸다.
  • 고쿠보 히로키 (2004 - 2006)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프랜차이즈 스타. 요미우리 우타자로서는 최초로 40홈런을 치고 이적 선수로서는 최초로 요미우리 주장 자리를 차지하며 요미우리에서도 꾸준한 활약을 보였다. 이승엽의 전임 4번타자(제69대)이기도 하다.
  • 기무라 타쿠야 (2006 - 2009)
    항목 2번의 선수.
  • 이승엽 (2006 - 2010)
    2006년 41홈런을 치며 활약했지만 그 이후에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을 냈다. 요시 그란도시즌이 이 시기의 일.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2007 - 2013)
    에나츠 유타카에 이은 역대 2번째 일본프로야구 양대리그 MVP 수상자.
  • 호세 로페즈 (2013 - 2014)
  • 카타오카 야스유키 (2014 - 2017)
  • 야마모토 야스히로 (2016 - 2020)

3.4. 외야수

  • 나카지마 하루야스 (1934 - 1943, 1946 - 1949)
    일본 프로야구 최초의 타격 3관왕.
  • 아오타 노보루 (1942 - 1943, 1948 - 1952)
    통산 1827안타, 296홈런을 기록한 거인 초창기의 강타자로 '야생마'(ジャジャ馬)라는 별명이 있던 강견 강타의 외야수였다.
  • 쿠로사와 토시오 (1944, 1946 - 1947)
    요미우리 사상 최초의 구단장을 치른 당사자. 그의 생전 등번호 4번영구 결번이다.
  • 시바타 이사오 (1962 - 1981)
    V9 시대 거인의 테이블 세터로 활약하며 도루왕 6회를 수상한 선수. 통산도루 579개는 일본프로야구 통산 3위이자 센트럴리그 최고기록이며, 스위치 히터로써는 일본프로야구 최초이자 센트럴리그 유일의 2000안타 달성자이다. 그러나 리드오프임에도 3할 타율은 1번도 기록한 적이 없었다.
  • 타카다 시게루 (1968 - 1980)
    V9 시대의 주전 외야수. 당대 최고의 좌익수 수비로 이름높았다. 외야수3루수 부문에서 골든글러브(NPB)를 수상했는데, 3루수 골글은 외야수에서 컨버전 된 이후에 받았다(...). 장훈이 요미우리로 이적하면서 주전 좌익수 자리를 차지하자 포지션을 옮겨야 했던 사정 때문에 이루어진 컨버전이었는데, 보통 외야수비가 내야보다 난이도가 낮게 여겨진다는 걸 생각해보면 굉장히 특이한 이력. 최악의 3루수에서 준수한 좌익수가 된 라이언 브론과 정확히 반대 테크 은퇴 뒤에는 야구 지도자, 프로야구단 단장 등으로 활약중.
  • 장훈 (1976 - 1979)
    이쪽에서도 10번을 달았었다. 오 사다하루와 함께 'OH포'로 대활약. 일본프로야구 사상 2번째의 양대리그 수위타자가 될 수도 있었지만 히로시마 시절의 김기태(재일교포)와 관련된 모종의 사건으로 주니치의 야자와 켄이치에게 밀려 실패한 에피소드가 있다.
  • 마츠모토 타다시 (1977 - 1987)
    1982, 1983년 2년 연속 도루왕. 이중 1983년엔 센트럴리그 시즌 최고기록인 도루 76개를 기록. 퍼시픽 리그후쿠모토 유타카가 있다면 세리그에는 마츠모토가 있었다고 할 정도. "푸른 번개"(青い稲妻)라는 멋진 별명이 있었다.
  • 요시무라 사다아키 (1982 - 1998)
    1987년 30홈런을 때린 젊은 좌타 거포이자 고라쿠엔 구장 공식전 마지막 홈런, 도쿄 돔 개장 첫 홈런[12]을 때리는 등 요미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강타자로 주목받았던 선수. 그러나 1988년 시즌 도중 좌익수 수비를 보다 중견수와 충돌해 무릎 인대의 3/4가 파열되는 큰 부상을 얻은 뒤 커리어를 제대로 공쳤다. 고된 재활을 거쳐 현역에 복귀할 수는 있었지만 수비력을 상실하고 끊임없이 후유증에 시달렸기에 대타 요원 정도의 활약밖에는 할 수 없었던 비운의 선수. 요미우리 올드 팬들이 이 선수에 대해 갖는 감정은 삼성 팬들이 강동우에 대해 갖는 그것에 비유될 수 있다. 마쓰이 히데키로 유명해진 등번호 55번을 마쓰이 이전에 달았던(다만 현역 생활 도중 7번으로 변경) 선수이기도 했다.
  • 워렌 크로마티 (1984 - 1990)
    자이언츠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이자 가장 많은 인기를 받았던 선수. 만화 돌격!! 크로마티 고교의 크로마티는 여기에서 따왔다(...)
  • 미노다 고지 (1988 - 1990)
    한큐시절에 30-30클럽을 두번이나 달성했고 특히 1980년에는 30홈런 30도루 30희생타를 달성하는 보기드문 기록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프런트와의 불화로 고향팀인 히로시마로 이적을 요구했으나 결국 요미우리로 옮겼는데 1989년 일본시리즈 4차전때 1번타자로 선발출장하여 약빤 홈주루를 시전하면서 역스윕의 포문을 열어 재켰다. 그리고 5차전에서도 1번타자로 출장해서 결승득점을 올렸다. 6,7차전에서도 1번타자로 출장하면서 고향팀에게 털렸던 1984년 일본시리즈의 한을 풀었다. 1990년 시즌 중반에 은퇴해서 코치로 전업한후 95년까지 역임했다.
  • 마쓰이 히데키 (1993 - 2002)
    고질라.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거포였으며 메이저리그에서도 월드시리즈 MVP를 수상하는 등 강타자의 면모를 뽐냈다.
  • 시미즈 타카유키 (1996 - 2008)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중반까지 거인의 주전 좌익수였던 왼손 중거리 교타자.
  • 스즈키 타카히로 (1997 - 2016)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했던 대주자 요원으로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통산 대주자 100도루 기록을 갖고 있다. 일본 프로야구의 강명구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2016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퍼스트 스테이지 요코하마 디엔에이 베이스타즈전에서 연장 10회말 대주자로 나왔다가 견제아웃을 당하는 바람에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바로 이어진 11회 초 요코하마의 역전극의 빌미를 제공했다. 나이도 많은 베테랑이었는데 결국 이 경기의 실수가 치명타가 되어 팀은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탈락하고 본인은 은퇴를 선언(...)
  • 터피 로즈 (2004 - 2005)
    55홈런을 친 적이 있는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거포지만, 요미우리 시절은 안 좋은 추억. 거기에다 요미우리 시절에 가네다 마사이치가 가지고 있던 NPB 최다 퇴장 기록을 갈아치웠다(...). 실력 자체는 좋아 먹튀까진 아니었지만 구단과의 불화가 너무 심한 나머지 방출당했다.
  • 다니 요시토모 (2007 - 2013)
  • 마츠모토 테츠야 (2007 - 2017)
    2009년, 주전 중견수를 맡으며 전년도 신인왕을 차지한 같은 팀의 투수 야마구치 테츠야에 이어 육성선수 출신의 야수로는 최초의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했던 선수.
  • 오오무라 사부로 (2011)
  • 킨죠 타츠히코 (2015)
  • 카메이 요시유키 (2005 - 2021)
    전체적인 커리어는 눈에 띄지 않지만, 그래도 커리어 통틀어 요미우리에서만 뛴 프랜차이즈 스타이다.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1] 오 사다하루가 나가시마의 뒤를 이을 감독이 되는 것은 거의 정해진 수순이었지만 요미우리는 나가시마의 선수 은퇴 직후 V9을 이끈 가와카미 감독이 물러남과 동시에 지도자 경력이 없던 나가시마를 바로 그 자리에 앉혔다가 구단 사상 최초의 최하위(75년)을 기록한 흑역사가 있었다. 그 때문에 선수에서 은퇴한 오 사다하루를 지도자 경력 없이 바로 감독자리에 앉히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이를테면 오 사다하루가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기까지 시간 벌기용으로 앉힌 감독인데 그 동안 오 사다하루를 조감독 자리에 앉혀서 감독수업을 받게 했다. 이러한 형태는 나가시마가 두번째 임기 때 하라 타츠노리에게 정권을 이양하는 과정에서 또 한번 나타났다.[2] 이 일본시리즈가 일본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한 덕아웃 시리즈이다. 상대는 당시 고라쿠엔 구장을 홈구장으로 같이 쓰던 닛폰햄 파이터즈 이다.[3] 7차전까지 갔는데 역대 일본시리즈 중에서도 손꼽히는 명승부 중에 하나였다.[4] 이 일본시리즈가 그 유명한 기레기들의 찌라시 기사 한 방에 긴테쓰의 3연승 후 역스윕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낸 일본시리즈이다.[5] 또 여담이지만 근육맨의 주인공 근육 스구루의 이름의 모티브이다.[6] 초노 히사요시와 함께 도하 참사 일본 대표팀 멤버.[7] 2017년 까지 MLB리그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서 활약했고 2018~2019년 까지는 KBO 리그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한 투수로 한 미 일 무대를 모두 밟은 투수가 되었다.[8] 링크 걸지 말 것. 만화 은혼의 등장인물로 연결된다. 이 선수는 쿄진 원클럽맨이었지만 18년간 200경기도 못 나온 만년 백업포수였다.[9] 다만 치바가 킨테츠 감독을 맡을 당시 이름은 단수 형태인 킨테츠 버팔로였다. 치바가 100패 찍고 물러난 1962년부터 복수 형태인 버팔로즈로 개명.[10] 오치아이 히로미츠는 구단에 자유계약을 신청해 퇴단한 거지 FA 선언을 한 것은 아니다.[11] 원래 구단에서는 도노우에 나오미치(堂上直倫)를 1픽으로 하려고 했었지만 어떻게든 오오모리가 밀어붙여서 "하즈레 1위라면 사카모토"라는 조건을 관철시켰다고 한다. 실제로 도노우에를 지명했지만 주니치가 교섭권을 얻어서 오오모리의 조건대로 사카모토를 1픽으로 뽑았다.[12] 시범경기 기록이라 비공식이기는 하지만 요미우리 선수의 그것인 만큼 자주 언급된다. 공식전 도쿄돔 첫 홈런 기록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더그 데신세이라는 선수가 가지고 있다.[13] 디트로이트와 다저스 사이에 일본으로 귀국해서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2년간 플레이.[14] 메이저 진출 전 해인 2006년에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보스턴과 A's 사이에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뛰었고 A's에서의 메이저 도전이 실패한 뒤 다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를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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