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21:45:52

여순광

여순광
麗順光 | Yeosungwang
파일:여순광 지도.svg
<colbgcolor=#0047a0><colcolor=#fff> 위치 전라남도 동부
면적 1,887.46㎢
인구 704,216명[1]
인구 밀도 373.71명/㎢
최대 도시 순천시
범위 여수시, 순천시, 광양시

1. 개요2. 역사3. 정치
3.1. 통합 논의
4.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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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라남도 동부에 있는 수시, 천시, 양시를 통틀어 일컫는 말. 일반적인 용례는 '여순광'이나 가끔 인구수에 맞게 '순여광'으로 쓰기도 한다.

전남 동부권을 대표하는 도시권으로 전라남도 지역내총생산(GR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전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며 광양만을 중심으로 광양만권경제자유구역으로 묶여 있다. 지리적으로는 전라남도에 속하지만 광주나 목포보다는 경상남도 서부와 더 밀접한 생활권을 이루고 있어 동남권 메가시티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논의도 있다.

1967년 여수에 여수화학단지(여천공단)가 준공된 이래로 한동안 여수가 권역 내 최대도시로 기능했으나 1987년 광양제철소의 준공으로 광양이 성장하기 시작했고, 21세기 이후로는 여수와 광양을 연결하는 지리적 이점을 등에 업은 순천이 발전하여 2020년에는 여수의 인구를 역전하기까지 했다. 다만 아직까지 눈이 띄는 격차가 벌어진 건 아니고, 아주 근소한 격차로 앞서고 있다.

2. 역사

원삼국시대에는 대체로 마한에 속하였고, 지금의 여수시에는 원지국(爰池國)이, 순천에는 사타국(娑陀國)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마한의 맹주였던 건마국(지금의 전북 익산)이나 목지국(지금의 충남 천안)은 호남정맥 동쪽까지는 간섭할 여력이 없어 실질적으로는 느슨한 형태로 마한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산강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이 강했던 소국연맹체인 침미다례도 이 일대까지는 영향력을 뻗지 못 했고, 때때로 대가야가 이 지역을 점유하기도 했다.

5세기부터 백제전라도 지역을 차례차례 복속시키며 남하하다가 6세기 초반에는 이 일대가 백제의 영향권 아래 들어가게 된다. 무령왕 대에는 지금의 순천에 감평군(欿平郡, 혹은 삽평군(歃平郡))[2]을 설치하여 백제의 지방행정 체계에 편입시킨다. 감평군은 여수의 원촌현과 돌산현, 광양의 마로현을 관할하였고, 이것이 여순광이 역사적으로 통합된 첫 사례이며, 이 일대는 그 후 6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순천이라는 하나의 지역으로 존속하게 되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신라가 이곳을 점유하게 되면서 지금의 광주를 중심으로 한 무진주에서 소속되었다. 그리고 경덕왕 대에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꾸며 감평군이 승평군으로 바뀌었고, 산하의 원촌현은 해읍현으로, 돌산현은 여산현으로, 마로현은 희양현으로 개칭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박영규가 이 지역의 호족이 되었고, 박영규가 견훤의 신하가 되며 이 일대는 후백제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신검이 견훤을 폐위시키고 이에 견훤이 고려로 망명하여 일리천 전투 때 노구를 이끌고 돌아오자, 박영규는 신검을 배신하고 고려의 승리를 도왔다.

그 공을 인정받아 박영규는 고려 조정에서 승승장구 할 수 있었고, 두 딸을 고려 제3대 국왕인 정종의 왕후로 들이며 순천 박씨는 고려의 유력 가문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고려 제4대 국왕에 등극한 광종은 정종의 지지 세력이었던 순천 박씨 가문을 숙청하며 승평도 함께 몰락하게 되었다. 장화왕후 가문이었던 나주 오씨왕건의 개국을 도운 후 나주전라도의 2대 도시로 부상하게 된 것과는 대비되는 대목이다.

한편, 고려 태조는 고려를 건국한 이후 해읍현을 여수현으로, 여산현은 돌산현으로, 희양현은 광양현으로 개칭하였고, 곡성군 산하의 부유현(富有縣, 현 주암면 승주읍 일대)이 승평군에 속하게 되었다. 983년(성종 2년)에는 승평군을 승주목으로 승격하여 12목(牧)의 하나로 삼았다.

995년(성종 14년)에는 전국을 10도로 나누면서 해양도에 속하게 되었고, 현종 대에 다시 5도 양계로 개편되며 비로소 전라도에 속하게 되었다. 1310년(충선왕 2년)에는 승주목이 순천도호부로 강등되었다. 그 후 광양현이 순천도호부로부터 독립하였다.

조선 개국 이후, 당시 여수현령 오흔인이 새 왕조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수현은 폐현되어 순천도호부 여수면이 되었다. 이후 돌산현도 왜구의 침략으로 인해 운영하기 어렵게 되어 순천도호부에 속하게 되었으며, 500년 동안 이 상태가 지속되었다.

1479년에는 이 지역에 전라좌수영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이 터진 직후에도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이 이 지역을 필사적으로 막아낸 덕분에 삼남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왜군에게 유린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광양읍성은 함락되어 폐허가 되었고, 그 결과 잠시간 다시 순천도호부 소속이 되기도 했다.

1696년에는 여수가 여수도호부로 잠시 승격되기도 했었으나, 다시 강등되었고, 영조 대에도 계속해서 승격과 강등을 거듭하다 결국에는 도로 순천도호부로 귀속되었다. 500여 년 동안 여수는 순천에서 독립하지 못 하고 있다가, 구한말에 가서야 겨우 여수군으로 승격되어 순천에서 분리된다.

23부제가 시행될 때 남원부에 속하였다가 이듬해 23부가 폐지될 때 전라남도에 속하게 되었고, 여수, 순천, 광양의 3개 군으로 편제되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원래 여순광의 중심지는 순천이었고,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하나의 행정구역이었다.

3. 정치

전남 동부권을 대표하는 지역이고 전남 전체에서도 인구, 경제력 면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곳이다. 이 때문에 전라남도 정치권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목포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권에 비해 호남 정당에 대한 지지가 서부/중부권보다 상대적으로 약한 편이고, 2차, 3차 산업이 가장 발달한 곳이어서 이를 기반으로 한 노동 운동도 상당히 활발해서 진보 정당들의 지지율도 상대적으로 더 높다. 이 때문에 지역 정계 개편이 상당히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3.1. 통합 논의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행정구역 개편/호남 문서
3.5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990년대부터 이미 여순광 통합이 논의되었고, 2007년에는 3개 시가 통합을 목적으로 하는 업무협약을 체결하기로 합의하며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듯했지만, 잘 진척이 안 되고 있다. 지역 내에서도 통합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분위기이다.#

이 지역들의 통합이 어려운 점으로는 다음과 같다.
  • 순천으로의 집중 문제: 여순광에서 경제력은 여수가 압도적이고 광양도 인구 대비 높은 경제력을 갖추고 있는 데 반해 편의시설, 상권, 의료, 행정 등 주요 인프라는 제일 돈이 없는 순천이 꽉 잡고 있다. 그렇다고 순천이 여수보다 인구가 훨씬 더 많은 것도 아니다. 지리적으로 순천이 중간에 있다보니 여순광의 인프라는 순천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다. 즉 돈은 여수, 광양이 벌고 순천은 앉아서 넙죽 받아먹는 꼴이 되기에 여수, 광양은 통합에 부정적인 여론이 더 우세하다.
  • 여수의 내부 갈등: 지금의 여수시는 1998년 삼여통합의 탄생으로 출범한 지역이지만, 아직도 구 여수시와 옛 여천시 지역의 잦은 반목으로 수십년 넘게 통합 시청사조차 만들지 못한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다시 통합시를 만들고자 한다면 갈등을 더욱 증폭시키게 된다.
  • 기득권 문제: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구 획정을 놓고도 순천과 여수를 떼어 놓는 것을 전제로 진행되고 있으며, 순천 사람이 여수, 광양에서 전시 공간을 대여하려 해도 자기네 주민을 더 우선시하는 소지역주의 현상으로 주민들이 동질감을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다.

4. 경제

전라남도에서 가장 2,3차 산업이 발달한 곳이다. 광양항, 포스코 광양제철소, 여수국가산업단지, 율촌산업단지 등 대규모 중화학공업 단지가 밀집해 있다.


[1] 2023년 5월 기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 통계[2] 훗날 순천이 승평이라 불리게 된 걸 생각하면, 발음 상 삽평군이 맞을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