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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슬람의 종파 중 하나. 한국 이슬람 중앙회의 공식 표기에 따르면 '쉬아'이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를 예언자의 자리를 잇는 자로 받든다. 영어로는 시아 이슬람(Shia Islam), 시아파(Shi'ite)[2]라고 한다.
수니파와 달리 개인의 이성과 유추를 통한 깨달음을 중시한다. 무함마드의 혈연을 종정으로 삼다 보니 지역색이 수니파보다 옅은 탓인지 상대적으로 서구식 사고에 유연한 편이다.
2. 분포
시아파의 분포. 진한 녹색이 시아파, 연두색이 수니파[3] |
수니파 다음으로 가장 큰 종파라지만 신도 숫자로 따지면 확실히 소수 종파다. 소수 종파라고 해도 절대적인 인구수는 엄청난데 2021년 기준으로 대략 3억 4천만 명 정도로, 전 세계 무슬림의 17%를 차지한다.[4] 인도-동남아 쪽 무슬림들은 거의 전부가 수니파이며 이들이 세계적인 인구 대국들이라서 퍼센트로만 보면 시아파가 매우 소수종파로 보인다.
그러나 전통적인 이슬람 중심지이며 두 분파가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는 근동에 한해서 본다면 수니파와 시아파의 차이가 크게 줄어든다. 이 지역은 사막이나 산이 많아 인구 밀도가 낮지만 이슬람 세계에서의 중요성은 인구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마냥 일반적인 소수 종파로 취급할 종파는 아니다.
수니파 무슬림이 시아파 무슬림을 고작 17%밖에 안 되는 이단들이라는 식으로 비하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은 수니파도 인구의 많은 부분이 이슬람의 중심인 중동이 아닌 중국, 동남아, 유럽,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등지의 무슬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말만 수니파지 토착종교와 결합하거나 변형된 이슬람이어서 샤리아를 법처럼 강력한 통치수단으로 쓰는 수니파들이 보기엔 수니파니 시아파니 하기 이전에 무슬림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수니-시아파 간의 대결에도 큰 관심이 없고 단지 시아파의 확장이 수니파보다 늦은 것과 현 메카의 수호자인 사우드 가문과 와하브파의 권위나 권력 때문에 수니파를 칭하는 것일 뿐이다.
이슬람의 정통을 자처하는 사우디 등 수니파 강국에서는 동남아시아, 서아프리카, 남아시아의 이슬람 문화 현황을 심각하게 여겨서 지속적으로 수많은 학자를 파견하고 현지 모스크에 자금 지원을 하여 정통 수니파로의 일치를 꾀하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시아파 무슬림들은 메카와 메디나를 수복하면 인도-동남아의 무슬림들이 별탈없이 시아파로 개종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아파 신도가 사회에 큰 영향력을 지니거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는 아래와 같다.
- 이란
사실상 전 세계 시아파의 구심점. 국민의 91%가 시아파다.
- 이라크
이란 다음 가는 주요 시아파 국가로, 전체 인구의 65% 정도가 시아파다. 현대에는 국력 차로 인해 이란이 시아파의 주도국이 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시아파의 본산은 이라크라고 봐도 무방하다. 나자프, 카르발라 등의 시아파 주요 성지도 모두 이라크에 있고 사담 후세인 때까지만 하더라도 종교적/정치적 영향력이 이란 이상이었지만 이라크 전쟁으로 후세인이 처형당하고 국제적 영향력이 크게 약화되면서 시아파 종주국 지위를 이란에 빼앗겼다.[5]
허나 이라크는 수니파 인구도 전체의 30~40%에 달해 두 종파 간 종교 갈등이 극심하다. 이라크 바트당 및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구 하심 왕가 세력은 수니파, 사담 후세인 정권 실각 이후의 현 집권층은 시아파다.
-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가 시아파. 이란을 골수 시아파로 개종시켜 버린 사파비 왕조가 이 지역에서 발흥하였다. 시아파 인구 비율로만 따지면 이란 다음이지만 실질적으로 국가 정체성으로서의 시아파의 영향력은 크지 않은 수준이다. 그 이유는 아제르바이잔인이 종교적으로 세속적인 튀르크족인 것도 있고 근대로 오면서 지속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국가 무신론 체제였던 소련의 영향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외교적으로도 튀르키예나 다른 수니파 국가들과도 관계가 좋다.이란과의 사이도 나쁘지는 않은 편이며그러나 막상 이란과는 사이가 나쁘다. [6] 주류 종교가 다르고 한때 지배국이었던 러시아와도 우호관계를 맺고 있다.
- 시리아
인구의 15.6%가 시아파로 1974년에 시아파 종파로 공식 인정된 알라위파가 있는데 이들의 인구 비중이 10% 남짓이라 총 시아파 인구 비율은 걸프 연안의 수니파 왕정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그 소수의 알라위파가 바트당, 세속적 수니파, 기독교 세력과 연합하여 수십년간 기득권층으로 장기 집권 중이다. 사실 알라위파는 종교적으로 이슬람의 일부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도 많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이란의 종교 지도자가 인정해 줬기 때문에 일단 시아파로 본다.[7]
- 레바논
인구의 50%가 무슬림이고 그 절반인 25%가 시아파다. 인구 비중이 압도적이지는 않지만 헤즈볼라로 대표되는 시아파 무장 단체가 레바논의 주요 정치 세력을 이루고 있다. 시아파와 헤즈볼라는 레바논 남부에 많다.
- 예멘
수니파가 조금 더 많긴 하지만 시아파도 인구의 40% 가량을 차지한다. 현재 진행 중인 예멘 내전도 수니파(예멘 정부, 알카에다 계열)와 시아파(후티 반군)의 종파 갈등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참고로 예멘의 시아파는 이란의 12이맘파와는 다른 자이드파지만 같은 시아파로서 예멘의 시아파는 이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 바레인
지배층 왕족들은 수니파지만 인구 70%가 시아파다. 때문에 왕가는 이란하고 사이가 매우 안 좋으며 정치 주류로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시아파들이 꽤 있다.
튀르키예[8], 쿠웨이트에도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시아파 인구가 존재하며 인도, 사우디아라비아[9],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에도 시아파 인구가 상당한 규모의 소수종파로서 존재한다. 알제리, 리비아, 이집트, 나이지리아, 케냐, 탄자니아 등의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아프리카의 절반 지역들, 팔레스타인,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러시아 다게스탄에도 약간의 시아파들이 존재한다. 다만 이들은 튀르키예[10]와 인도[11] 정도를 제외하면 수니파에게 매우 심각한 수준의 박해와 차별을 받는 상황이다.[12]
한국에 시아파 이슬람 사원은 단 두 곳 있다.# 건물이 모스크가 아니라 단독주택 내부에 조그맣게 예배당을 차려놓은 수준이고 이란인들이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파키스탄인 시아파 수피들이 운영하고 있다.
2.1. 시아파 벨트(저항의 축)
이미지의 녹색 부분 |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 이슬람 시아파 국가 동맹.
이라크[13], 시리아, 레바논 정부는 현재 이란에 우호적인 세력이 주도하고 있으며 이를 이란과 묶어 '시아파 벨트'로 부른다.
시아 벨트 또는 초승달 벨트라고도 부른다. 중동의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으로 이어지는 이슬람 시아파 국가의 동맹 전선을 말한다. 이란을 필두로 시아파는 동맹을 맺어 수니파와 맞서는 형국이다. 이란은 IS 등장 이후 대테러전을 명목으로 이라크·시리아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며 영향력을 키워 왔다.
3. 교리
마음 속에 예언자의 가문을 사랑하다가 죽은 사람은 순교자의 죽음과도 같은 것이라. 그러나 예언자의 가문을 증오하다가 죽은 자는 천국의 향수를 맡을 수 없을 것이라.
3.1. 칼리파
수니파와 시아파 모두 할리파 직책에 대해 혈통주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수니파는 누구든 할리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시아파가 혈통주의적 시각을 견지했다는 설이 사회적으로 상식처럼 여겨지지만, 이는 역사 왜곡이며 수십년 동안 유지된 적폐 중의 적폐이다. 현실 세계의 수니파는 쿠라이쉬 부족에서 할리파를 선출해야 한다고 인식한 반면, 시아파는 반드시 무함마드의 형제였던 알리의 자손들이 할리파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실제로 누구든지 할리파가 될 자격이 있으며 무슬림 움마(공동체)에서 할리파로 선출한 인물이라면 무슬림들은 그가 누구든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알리와 갈등을 빚었던 하와리지파와 그 분파 세력(아자라카, 수프리, 나지다티, 이바디)들이었으며 하와리지파는 1차 피트나에서 압둘라 이븐 와합 알 라시비를 자신들을 지도자로 선출했다.
- 수니파
예언자가 무함마드로 끝났으며 칼리파를 무함마드가 지닌 신적, 종교적 권위가 없는 무슬림 공동체(움마)의 지도자로 인식했다. 그러나, 아바스 제국의 할리파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할리파의 권위는 움마가 아닌 신으로부터 위임받은 것이라는 '할리파 신수론'을 주장하고 할리파의 종교적 권위와 권한을 대폭 확대해 나갔다. 이후, 아바스 왕조가 내전과 지방 세력들의 분리 독립으로 대폭 약화된 뒤에는 종교적 권위만 남아 일종의 교황처럼 기능했다.
- 시아파
예언자는 신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자들이며 칼리프는 이 말씀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적용하는 직위라고 생각했다. 이는 칼리파에 신성을 부여한 것이며 당연히 알리의 후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3.2. 이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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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알리의 이복 동생인 자파르의 손자 | }}}}}}}}} |
하지만 이런 정통성 넘치는 칼리파는 알리의 후손이 죽으면서 사라졌고 이맘이 이를 대신한다. 즉, 같은 단어를 쓰지만 수니파의 이맘과는 크게 다르다.
- 수니파
이슬람에 대한 지식이 있는 무슬림이면 아무나 될 수 있으며 직위라고 할 것도 없다. 예배를 이끄는 자일 뿐이며 이슬람 성원 등 규모가 큰 곳이나 군종 이맘을 운영하는 군대의 국가에서는 사정이 다르지만 혼자 예배할 때는 스스로가 이맘이 되며 가족이 함께 예배를 할 때는 가족 중에서 가장 웃어른이, 형제간에는 맏형이, 무슬림 친구간에는 생일이 가장 이른 사람이, 이슬람 군종이 없는 국가에서 지휘관과 병력들이 이슬람을 믿는 경우 지휘관이나 직급이 가장 높은 자가 이맘이 된다. 군종 이맘은 해당 군대에서 주관하는 시험을 봐서 군종사관 훈련을 통해 임관해야 하며 지원 자격은 국가별로 비슷하거나 다를 수 있다. 기독교에 대입해서 설명하면 개신교 비슷하게 성직자, 목회자는 율법과 신학의 전문가일 뿐 영적 위상은 평신도나 다를 바 없다.
- 시아파
신성의 직위이며 무함마드로부터 '비전의 지식'을 물려받은 자들이다. 이슬람 공동체에서 무함마드가 무오류의 예언자였음을 상기해 본다면 이맘도 무오류의 인간이 되는 셈이다. 기독교에 대입하자면 가톨릭이나 정교회처럼 교회 체계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고 성직자들도 단순한 전문가가 아니라 신성과 영적 권위가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14]
시아파 이맘의 계보도 |
3.3. 마흐디
언젠가 마흐디라는 구세주가 강림할 것이라는 신앙이 있기에 무려 천오백 년간 수니파에게 탄압당하면서도 아직도 끈질기게 세를 불려나가고 있다. 그런데 이 '마흐디'를 누구로 보느냐는 점 때문에 시아파는 분열을 거듭했다.3.4. 타끼야
자세한 내용은 타끼야 문서 참고하십시오.시아파들에겐 수니파인 척 가장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교리. 수니파는 전 세계 무슬림의 90% 이상으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주류이므로 수니파 무슬림이 아주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시아파 무슬림이라 거짓말 할 이유는 전혀 없어서 타끼야(taqiyya, تقیة)는 일반적으로는 해당되지 않는다.
타끼야가 마치 무슬림들이 거짓말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교리로 인터넷에 이상하게 퍼져 있는데 이슬람에는 신천지 추수꾼 같은 건 없다. 극우 개신교의 말이 사실이라면 한국 개신교 교회는 신천지 추수꾼 외에도 이슬람 추수꾼들이 잠입해 활동해서 몰래 선교하고 사기도 치고 다녀야 하는데 여태 그런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타끼야는 시아파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할 경우에 한해서 허용된 것이며 수니파는 애초에 거짓이라도 무슬림임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죄다.
참고로 시아파에서 종종 사용되는 이름인 “압둘 알리”, “압둘 후세인”은 수니파 기준으로는 ‘이름부터 우상숭배’라고 여겨져서[15] 사용되지 않고 시아파는 정통 칼리파 네 사람 중 우마르, 아부 바크르, 우스만 셋과 아이샤를 비열한 찬탈자로 보기 때문에 이름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시아파 무슬림이 타끼야를 하는 경우에는 종종 아버지나 형제, 친척 이름을 잠시 빌려 쓰거나 가명을 쓴다.
3.5. 무타
임시로 결혼을 허용하는 교리. 일정기간 계약혼이라고 할 수 있다. 시아파는 무함마드가 임시결혼을 허락한 사례를 들어 무타를 고유의 교리로 지키고 있으나 수니파는 무타는 무함마드 당대에 이미 취소된(나시크) 교리이며 사실상의 매춘 행위로 여겨 혐오한다.이라크의 시아파 교도들이 '임시 결혼'이라는 명목으로 어린 소녀들을 성적 학대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3.6. 아슈라
자세한 내용은 아슈라 문서 참고하십시오.이란 마슈하드의 이맘 레자 성지에서 아슈라를 지내는 신도들
시아파 신도들은 카르발라 참극을 애도하며 후세인 이븐 알리를 구하지 못한 자신들의 잘못과 슬픔을 참회하는 뜻에서 '아슈라(Ashura)'라는 행사를 가진다. 그러나 자해하며 피를 흘리는 것이 시대 착오적인 하람이라는 것이 제기되어 다 같이 가슴을 치는 선에서 자해는 마무리하고 다 같이 지역 사회와 환자들을 위한 헌혈을 하자는 운동을 벌여 무슬림들의 호응이 좋다고 한다.
4. 수니파와의 차이
정치적 이유로 분리되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상적인 면에서도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거기다 공교롭게도 시아파의 핵심인 이란이 페르시아인이라는 현 아랍의 중심과는 다른 정체성까지 갖게 되다 보니 정체성 갈등까지 추가되어 수니파와 시아파(사실상 이란을 중심으로 한 친 이란 이슬람 국가)의 싸움이 되었다.
4.1. 상속론: 알리만이 후계자
대표적인 차이가 상속론(al-wasiya)인데 무함마드가 죽기 전에 알리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전통에 따라 시아파의 이맘은 선임자의 유언에 따라 선임되어 바꿀 수 없다. 알리에 대한 신격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강화되어 알리의 지위가 무함마드와 비교해 다를 것이 없으며 알리는 무오류의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자들까지 생겨났다.흥미롭게도 쉬아 사상의 근간이 되는 상속론(알 위싸야)과 재림론(앗 라즈아) 사상은 예멘 출신 유대계 개종자인 이븐 사바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다. 칼리파 우스만의 재위기에 활동한 그는 모든 예언자에게는 후계자 내지는 상속자 (와씨)가 있는데[16] 그 중 무함마드의 상속자는 바로 알리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일종의 상속자라고 할 수 있는 1~3대 칼리파들은 전부 찬탈자들이며 우스만 정권에 대한 봉기를 선동하였다. 정당한 칼리파가 아닌 그는 폐위되는 것이 선이며 '선을 행하고 악을 금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라'는 쿠란 구절을 인용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부추겼다. 한편 재림론은 사실상 쿠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고 심판의 날에 예수가 돌아온다는 교리 혹은 유대교의 메시아 교리 등에서 차용된 것으로 여겨진다. 어쨌든 이븐 사바는 후일 알리의 부고를 접하고도 이를 부인하고 그의 영생과 재림을 주장하는 마흐디론을 주장하였다. 다만 이븐 사바의 교리가 쉬아 사상에 큰 영향을 주긴 했으나 초기 쉬아 사상은 알리를 신격화하는 정도로 급진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무조건 동일하게 여길 수는 없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4.2. 재림론
시아파의 아주 중요한 사상으로, 시아파의 대표적인 분파인 12이맘파는 은둔한 12번째 이맘이 예수와 함께 마지막 날 다시 돌아와 적그리스도를 죽이고 세상을 통치할 것이라고 믿는다.원인을 따지면 역사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분파 후 지금까지 다수인 수니파에 핍박을 당하고 숨어서 신앙을 이어가던 시아파의 활동 특성상 재림론이 뿌리내리기 딱 좋은 환경이기 때문이다.
4.3. 이맘(성인) 인정
시아파는 이슬람 성인(이맘)들을 인정하는 관습이 있다. 마치 가톨릭,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네스토리우스파처럼 성인들이 신자들의 기도에 도움을 준다고 여기는데 바로 이 점도 수니파를 분노하게 만드는 생각이라고 한다.- 시아파
수니파의 주장은 이슬람의 교리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며 죽은 성인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중계인으로 대신 빌어 준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비교적 소수파이므로 숨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보니 소수 정예로 교리를 전파해야 하므로 종교 지도자의 존재감과 책임, 권위가 그만큼 강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4.4. 초상화, 의례 등의 차이
이러한 교리적 차이만이 아니라 종교적 인물의 초상화(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와 후세인 이븐 알리뿐만 아니라 심지어 무함마드까지도)의 활용이나 기타 여러 의례적 차이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시아파는 기도할 때 머리가 닿는 부분에 모흐르(mohr, 도장) 혹은 모흐레 나머즈(mohr-e namâz)라고 불리는 작은 원형 도기 조각을 사용하는데 수니파에서는 이를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모흐르는 주로 카르발라의 흙으로 만들어지고 위에는 카바, 카르발라, 마슈하드 사원같은 시아파의 성지의 모습이나 쿠란 글귀가 새겨져있는데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의 이마에는 모흐르 자국이 뻘겋게 배기기도 하며 심지어 배긴 자국이 시간이 흘러 검게 착색되기도 한다. 순교한 이맘들의 고통을 나눈다는 의미로 쓰기 때문에 머리가 편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아프다.
- 수니파는 하루 5번 기도를 시간에 따라 철저히 나누는 반면 시아파는 5번 기도는 하되 특정 시간에 기도를 두 번 하는 식으로 하루 3번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이란에서는 낮예배와 오후예배를 합치고 저녁예배와 밤예배를 합쳐서 근행한다. 수니파도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 예배를 한두번 합치거나 심지어 하루치를 몽땅 몰아서 해도 되긴 하지만 이건 개인이 혼자 예배할 때의 얘기고 모스크에서는 제시간에 예배를 인도한다.
- 수니파는 종교적 인물들의 초상화를 우상숭배로 보아 엄금하고 있으나 시아파는 공식 행사에도 사용하는 등 허용하고 있다.[17][18] 12이맘과 시아파 성인들의 축일을 지키고 촛불을 밝히는 등 기독교와 유사한 부분들도 볼 수 있다.
4.5. 역사상 서로에 대한 평가
이런 차이들 때문에 수니파는 시아파를 "이런 이단 녀석들!!" 하면서 이를 갈고 시아파는 "저런 덜 떨어진 꼴통들!" 하면서 이를 갈고 있다.이렇게 자기들끼리 싸우다 보니 현재 시아파랑 수니파는 서로보다 가톨릭이나 정교회와 더 친할 지경으로[19], 이러한 현상은 심지어 역사적인 수준으로 옛날부터 이어져 왔으며 현재진행형이다.[20]
4.5.1. 터번: 시아파의 모자
흔히 알려진 터번 쓴 무슬림 남성의 이미지는 시아파의 모습에 가깝다. 전근대에는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등 수니파 국가에서도 터번을 쓰는 경우가 많았지만 현대의 무슬림들 중 터번을 쓰는 이들은 아프가니스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시아파 무슬림이다. 수니파에서 시아파를 비하하는 말 중 하나가 '터번쟁이' 다.4.5.2. 서로의 대립
이슬람의 양대정파인 수니파와 시아파는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다. 시아파는 수니파와 구별되는 독특한 신앙과 교리, 그것도 기성 체제를 뒤엎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교리를 갖추고 있어 '내부의 배신자'로 몰릴 위협을 항상 안고 있었다.- 중세 수니파들의 시아파 습격
중세에 들어서는 아주 이런 박해성 공격이 정례화되어 매주 토요일마다 수니파 근본주의자들이 "불신자들아, 이슬람으로 개종해라!" 라고 외치면서 시아파가 다니는 '알 카르크'의 '시아 모스크' 등을 습격했다.
- 결혼 불가
마치 무슬림이 타종교인이나 무종교인과 쉽게 결혼할 수 없듯이 수니파는 시아파와 결혼할 수 없었다.
- 예배인도 불가
시아파는 수니파의 예배를 인도할 수도 없었다.
- 할랄 인정 불가
심지어 시아파 신자가 도축한 가축의 고기는 할랄 푸드로 인정되지도 않았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먹지 못하게 막은 게 아니라 수니파 입장에서 시아파를 유대인이나 기독교도와 마찬가지로 이교도로 보았기 때문에 시아파들이 만든 음식은 수니파 무슬림들 입장에서 코셔 푸드와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았다. 육류뿐만 아니라 시아파를 믿는 농민이 생산한 농작물도 마찬가지였다.
4.5.3. 시아파에 대한 무슬림 부정: 수니파 계열 테러단체의 목표화
즉, 시아파는 아예 무슬림 취급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시아파를 겨냥한 테러는 대부분 수니파 테러 단체들이 먼저 일으킨 경우가 많은데 이는 종파 갈등으로 인한 보복뿐만 아니라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알카에다 등 글로벌 테러 단체들이 지하드를 펼치는 데 있어서 배교자 겸 우상숭배자나 다름없는 시아파를 박멸한다는 의미가 맞는다.이슬람국가 칼리프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는 "기독교인은 종교세를 내면 살려주되, 시아파는 그냥 죽여라"라고 설교했으며 이슬람국가의 대변인인 셰이크 아부 무함마드 알 아드나니도 시아파를 이슬람의 분파가 아닌 별개의 종교이며 종파 갈등이 아닌 거룩한 종교 전쟁이라는 연설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분쟁의 핵심에는 정치적인 패권 이유와 함께 중동 전역을 뒤흔드는 수니파-시아파 이슬람 간의 묵은 교리적 갈등 및 관용적인 태도가 부족한 수니파의 와하브파 계열의 광신적인 감정이 작용하는 게 맞다.
각 진영을 대표하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두 나라 집권세력의 이슬람적 정체성만 생각해 봐도 알수 있다.[21][22]
5. 역사
5.1.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이슬람의 교조 무함마드의 사촌동생이자 사위인 알리가 시아파의 시초다. 알리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기 때문에 혈연적으로 무함마드에게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으며 최초의 남성 무슬림이었고 무함마드에 대한 믿음도 깊었으며 능력도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다.[23][24]이런 상황이었으니 당초부터 무함마드의 후계자로 주목받았지만 무함마드 사후에는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로 선출되었다. 알리 지지파들은 당초부터 이에 불만을 품었는데 정통 칼리파는 알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리는 이에 승복하였고 이후 2대 칼리프 우마르의 즉위도 지지하였다.[25]
제3대 정통 칼리파인 우스만 이븐 아판이 사망한 뒤 그 뒤를 이을 후계자 자리를 두고 벌어진 다툼이 시아파 분리의 계기가 되었다.
우스만의 뒤를 이어 당초부터 많은 지지를 받던 무함마드의 사위 알리가 4대 칼리파로 선출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우스만의 6촌인 무아위야가 우스만의 암살에 복수한다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은 결국 진압되었다. 궁지에 몰린 무아위야는 쿠란의 낱장을 창 끝에 붙이고 낭송가들이 뒤를 따르면서 쿠란을 낭송하게 하며 알리의 군대로 돌진하도록 했다. 신앙심이 깊었던 알리의 군대는 쿠란을 더럽힐까 봐 공격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알리는 이에 무아위야와 협상하였다.
이전부터 알리는 같은 무슬림 내에서는 매우 신사적이고 관대한 인물로, 자신의 권력보다 이슬람 세계의 통합을 중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자신을 거역하는 정적들에게도 관대하게 대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전에도 무함마드의 마지막 아내 아이샤와 관대하게 협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알리의 관대한 태도에 반발하는 이들이 나타났으니 이들은 급진적이고 젊은 세력이었다. 이들은 알리에게 실망했다면서 알리 진영에서 이탈하면서 이탈자라는 뜻으로 '하리지파'로 불리게 된다.
알리의 세력이 분열되면서 여유를 얻고 세력을 확대해나가던 무아위야는 예루살렘에서 칼리프를 칭하게 되었다. 이에 반발한 하리지파는 무아위야를 암살하려고 시도하고 알리는 무아위야와 싸우면서 하리지파와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세력이 피폐해졌다.
결국 하리지파의 인물인 압달 라흐만 이븐 무라잠은 무아위야의 회유에 넘어가서 모스크에서 기도를 하던 알리를 독을 바른 단검으로 찔러서 살해하고 말았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칼리프 지위를 이어받았다. 무아위야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하산의 세력을 토벌하려고 하였고 하산은 어쩔 수 없이 협상할 뜻을 밝혔지만 같은 편에게 공격당해서 부상을 입었다. 몇 차례 전투를 거친 다음 하산은 결국 불리한 상황에서 평화와 화합을 위하여 무아위야에게 항복하고 칼리프 지위를 포기하였다. 하산이 죽게 되자 시아파에서는 무아위야의 음모로 인한 독살설에 나오게 되었다.
5.2. 우마이야 왕조와 후세인의 죽음(카르발라 참극)
이라크 카르발라에 있는 이맘 후세인 모스크. 현재 시아파의 대표적인 성지이자 마치 시크교의 황금사원처럼 시아파 무슬림의 정체성이 된 곳이다. 이곳엔 세계 각지에서 항상 성지순례하러 오는 시아파들로 북적인다.
알리의 아들 하산 이븐 알리가 죽고 나서 그 동생 후세인 이븐 알리가 알리 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680년 다마스쿠스에서 무아위야가 죽고 야지드가 칼리파에 올랐는데 당시까지 칼리파는 공동체에서 투표로 뽑히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무아위야는 이러한 전통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세습해 버렸다. 이것이 최초의 세습 칼리프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의 시작이다.
비록 쿠파의 백성들의 마음은 후세인과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창검은 시리아인들과 함께 있을 것이네.
ㅡ 7세기 말의 시인 파라즈다크
ㅡ 7세기 말의 시인 파라즈다크
이라크의 쿠파에서 후세인의 지지자들은 야지드에 대한 반란을 준비하였다. 후세인은 메카에서 야지드의 군대를 피하고 있었는데 요청을 받고 쿠파로 이동하였다. 이 상황을 알게 된 야지드는 군대를 파견했다. 추종자들과 함께 이동하던 후세인은 쿠파의 도착을 앞두고 카르발라에서 야지드가 보낸 3000명의 군대에 포위당했다.
이때 전설이 하나 전해져 내려온다. 야지드의 군대가 유프라테스 강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세인의 추종자들은 물을 구할 수 없었다. 후세인의 형제 압바스[26]가 유프라테스 강으로 물을 구하러 가서 가죽 물통에 물을 채우고 돌아갔다. 압바스는 후세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강에서 물을 뜨면서도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았다. 야지드군은 압바스가 물을 가지고 돌아가면 후세인과 추종자들이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압바스를 공격하였다. 압바스는 왼팔에 물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칼에 맞아 왼팔이 떨어지자 오른팔로 들었고 오른팔도 칼에 맞아 잘리자 입으로 물통을 물었다. 그러자 화살을 쏴서 물통이 망가져 물이 쏟아지고 압바스는 눈에 화살을 맞았다. 야지드군이 머리를 메이스로 내리치자 압바스는 결국 말에서 떨어졌고 "Ya Akkha!"("형제여!") 라고 외치며 죽음을 맞았다.
전설에 따르면 결국 궁지에 몰린 후세인은 단신으로 야지드의 군대에 싸움을 걸었고 무수한 적을 쓰러뜨렸지만 결국 적이 많아 후세인은 머리에 돌을 맞고 가슴에 화살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은 후세인은 얼굴의 피를 닦고 하나님을 향하여 호소하였다. 후세인은 포위를 뚫었지만 결국 큰 부상을 입은 그의 말이 쓰러졌고 나무 아래에 있던 후세인을 야지드의 군대가 붙잡아 갔다. 후세인은 참수를 당하게 되었는데 그를 처형하려던 자 시므르 이븐 딜자우샨에게 "오늘 당신은 기도를 마쳤는가?"라고 물었다. 이때는 3번째 기도 시간이었다. 후세인은 기도할 시간을 요청하였고 시므르는 후세인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었다. 기도를 마친 다음 후세인은 참수되었다.
카르발라의 참극은 단순히 이슬람이 분열된 '정치적 사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으로 시아파에서 해석된 이 사건은 이슬람에서 말하는 '과거의 예언자들이 겪었던 수난'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며 아슈라에서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현세의 불의를 드러내지만 동시에 내세의 축복을 약속하는 것으로 본다. 이 억압받는 '현실'에서 미래의 구세주(마흐디)를 약속한다는 의미가 추가된다. 그리하여 후세인의 죽음인 카르발라의 참극은 '영적인 사건'으로 여겨지며 시아파의 종교적 정체성, '영성'과 연결된 중대한 사건이 된다.
5.3. 우마이야 왕조 치하
결국 후세인은 죽고 그 자손들은 살해당하거나 노예가 되거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지만 이렇게 성립한 우마이야 왕조는 누가 봐도 정통성이 부족했다. 알리를 지지하던 시아파는 지속적으로 '찬탈자' 우마이야 왕조에 대해서 저항 활동을 벌였다.시아파가 이렇게 세를 불릴 수 있던 것은 우마이야 시대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아랍인과 비아랍인 무슬림과 마왈리에 대한 차별이 심한 것을 잘 이용한 덕이다. 시아파는 '개종자중 구세주 강림설'을 퍼뜨리며 개종자들에게 큰 선교 효과를 가지고 왔다. 8대 칼리파 우마르 2세의 3년의 선정으로 인해 이런 현상은 많이 타파됐지만 쉽게 바뀌는 게 아니라 시아파는 그 틈을 이용해 세를 꾸준히 불렸다.
한편, 무함마드의 삼촌이었던 아바스의 자손인 아바스 가문은 중앙 정계에서는 멀어졌지만 무함마드의 친척인 하심 가문의 일족으로서 존경받는 위치에 있었다. 아바스 가문의 당주 무하마드는 '하시미야'라는 비밀 결사를 만들었는데 같은 반체제 운동 집단인 시아파와 협력 전선을 펼쳤다. 하시미야의 조직원으로 호라산에 파견되었던 아부 무슬림은 8000명을 이끌고 거병하여 세력을 펼쳤고 이라크에 도달했다. 시아파도 이 거병에 함께 하였다.
물론 우마이야 왕조도 반체제 운동을 감지하고 있었으므로 대응에 나섰고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아바스 가문의 당주가 된 아브라함 이븐 무함마드를 처형하는데 성공했지만 아브라함의 동생 '아부 알 아바스' 등 14명의 탈출은 막지 못했고 이들은 이전에 후세인이 가려고 했던 이라크 쿠파로 도주했다.
이후 호라산에서 일어난 반우마이야 반란군이 쿠파로 외서 탈출자들과 합류하였고 아바스 가문의 아부 알 아바스가 칼리프로 추대되었다. 우마이야 왕조는 패배를 거듭하다 결국 다마스쿠스가 함락되어 우마이야 왕조의 왕족 대부분이 살해되었고 왕족 중 하나였던 압달 라흐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이베리아로 가서 후우마이야 왕조를 세웠다. 우마이야 가문을 완전히 끝장내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주류 이슬람 세계에서 몰아내는데는 성공하면서 새로운 칼리프 조인 아바스 왕조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힘을 보탠 시아파들은 결국 아바스와는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시아파는 '알리의 후손'을 칼리프로 추대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아바스 가문은 우마이야 가문보다는 무함마드의 가까운 혈통이지만 '알리의 후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바스 왕조는 시아파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다시 시아파는 지하로 숨어들어야 했다. 물론 칼리프의 권위를 훼손할 우려가 있는 개국공신 아부 무슬림 등도 탄압을 당했다.
6. 시아파의 분파
시아파는 분파가 매우 많다.[27] 기본적으로 알리-알리의 큰 아들 핫산-작은 아들 후세인 순으로 이어지는 것을 인정하지만 후세인 다음 '이맘'의 지위를 계승한 자손이 누가 되느냐를 놓고 논쟁이 많다.[28][29]현존하는 시아파의 대부분은 이란에서 융성한 12이맘파다. 이 분파는 지역에 따라서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예멘은 자이드파가 주류다.
크게 보면 10여 개 정도 파벌이 있고 역사적으로 잠깐 있었다가 사라진 파벌까지 합치면 정말 굉장히 많은 숫자가 있다.
6.1. 4이맘파
통칭 카이산파. 알리의 셋째 아들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Muhammad ibn al-Hanafiyyah)를 이맘으로 추종했던 집단이다.[30] 후나피야는 카르발라의 참극으로 후세인 이븐 알리가 죽은 뒤 알리 가의 당주가 되었고 그 부하 알 무크타르(Al-Mukhtar)가 후세인의 복수를 내걸고 무아위야 왕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자 '마흐디'로 추앙받았다. 무크타르는 일시적으로 거대한 카이산파 세력권을 건설햇지만 무아위야 왕조에 토벌되어 전멸당했다.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가 죽은 뒤 카이산파는 그가 죽은 게 아니라 모습을 감춘 것이며 '마흐디'로서 재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파벌, 무함마드의 자식을 이맘으로서 세우려는 파벌 등으로 분열이 계속되었다. 압바스 왕조의 성립에 공적을 세우기도 했지만 다른 시아파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받았다.
누구를 이맘으로 세우느냐는 문제로 분열이 많아 세력이 쇠퇴하다가 결국 12이맘파에 흡수되어 소멸하게 된다. 사실 카이산파가 '숨겨진 이맘' 이론과 '마흐디 재림론'의 원조격이다.
6.2. 자이드파
자세한 내용은 자이드파 문서 참고하십시오.주로 1천년간 자이드파 이맘이 지배한 북부 예멘에 분포한다. 예멘이 오랜기간 순니파 종주국 역할을 맡았던 오스만 제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영향으로 여타 시아파에 비해서 수니파에게 온건한 편이다.
6.3. 이스마일파
자세한 내용은 이스마일파 문서 참고하십시오.현재는 타지키스탄 동부에 제일 많으며 아프가니스탄 동북부, 파키스탄 북부(정확히는 카슈미르),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타슈쿠르간 지방에도 일부가 거주하며, 키르기스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투르크메니스탄 북부에도 극소수가 존재한다.
6.3.1. 드루즈파
자세한 내용은 드루즈 문서 참고하십시오.오늘날에는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에 주로 분포하며 앗 다라지라는 중앙아시아 출신 이스마일파 신학자가 이집트에서 창시한 종파다. 요르단, 레바논에도 소수 신도들이 있다. 수니파는 물론 시아파 무슬림조차도 대다수는 드루즈파를 일종의 떨어져 나간 사이비 종교로 취급하고 주류 이슬람으로 치질 않는다.
6.4. 12이맘파
자세한 내용은 12이맘파 문서 참고하십시오.현대 시아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레바논, 바레인에 주로 분포한다.
6.4.1. 알레비파
자세한 내용은 알레비파 문서 참고하십시오.12이맘파에서 떨어져나간 파로 튀르키예 시아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도 소수 위구르인들이 믿고 있는데 공식 통계에서는 집계하지 않고 있다.
6.4.2. 알라위파
자세한 내용은 알라위파 문서 참고하십시오.주로 시리아에 분포한다.
6.4.3. 바비교
1842년 12이맘파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로 바하이 신앙의 직계 기원이 된다. 이란의 카자르 왕조의 세속주의 정책과 이에 따른 샤리아 폐지와 토지세 혜택 축소에 항거하여 봉기한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는 스스로를 12번째 이맘과 무슬림들을 이어주는 바압(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1844년 가서는 자신이 12이맘 중 1명이라고 주장하며 "파르시 바얀"[31]이라는 경전을 작성하여 쿠란의 개정되었으며 심판의 날은 종료되었다고 주장하였다.1850년 봉기가 실패하면서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가 체포되어 처형당하자 사이드 알리 무함마드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아잘리파의 경우 카자르 왕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다가 1905년 혁명에 동참하였으며 두 번째 집단은 샤바크교에 영향을 받았던 수피 지도자였던 바하올라를 추종하면서 바하이교가 시작되었다. 아잘리파가 결국에는 급진적인 해석을 포기하고 다시 12이맘파로 합류한 것과 다르게[32] 바하이교도들은 자신들 스스로가 이슬람의 분파가 아닌 별개의 종교라고 창립 초기부터 주장했기 때문에 이슬람과는 아예 다른 종교로 분류되고 있다.
다만 바하이 신앙 교리 중 일부다처제 금지 같은 진보적인 조항들은 이슬람 모더니즘 학파의 창시자 자말룻딘 알 아프가니[33]와 무함마드 압두의 영향을 받았으며 일단 바하올라 본인도 세 명의 부인을 두었다. 무함마드 압두는 본인이 수니파였음에도 불구하고 바하이교 신도들과 약간의 친분이 있었다.[34]
7. 시아파는 온건파인가?
현재 사우디를 비롯한 수니파, 특히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대두하여 지즈야를 바치지 않는 이교도의 생존권 자체를 부정하며 워낙 미쳐돌아가고 있어 세계의 평가가 크게 떨어진 반면 시아파 이란은 최소한의 정치적 처신을 보이고 있다는 점 때문에 수니파=강경파, 시아파=온건파라는 관념을 갖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이는 단순히 수니파가 이슬람의 절대다수를 차지해서 근본주의 극단파도 많기 때문에 생긴 오해일 뿐이다. 애초에 가톨릭이나 정교회, 개신교를 믿는 국가들이 다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듯 수니파를 따르는 국가라고 해서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19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이란 혁명 세력이나 헤즈볼라, 후티 반군 등의 시아파 무장단체들은 냉전 시기 미국과 서구권 에 대해 대립각을 세우는 반면 수니파의 수장이라고 볼 수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대외적으로는 친미 노선을 표방하였기 때문에 수니파=온건파, 시아파=과격파 테러리스트라는 공식이 제1세계 국가에는 더 익숙하게 여겨졌다.[35] 그러던 것이 21세기가 되어 2001년 탈레반의 바미안 석불 파괴, 알카에다의 911 테러와 같은 반달리즘 및 민간인 대상 무차별 살상 테러가 테러리즘의 대세가 되고 2010년대 들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라는 초극단주의적인 광신도 집단들이 등장하면서 수니파와 시아파의 평가가 정반대로 뒤집혔다.
시아파, 특히 이란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나을 뿐이지 기존의 정교분리를 지지하던 시아파 전통학파를 모조리 숙청한 호메이니주의 정권의 한계와[36] 내부 강경파 때문에 이란에 대한 서방의 경계심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이란 혁명 당시만 하더라도 호메이니를 위시하여 시아파가 강경파이고 수니파가 온건파로 평가받았던 걸 생각해 본다면 상전벽해. 국제 정세의 변화에 따라 그 온건 정도가 다소 부각되어 보인다. 단지 수니파 광신도들이 세계에서 워낙 테러를 많이 저질러서 안에서만 문제를 일으키고 사는 시아파가 대비되어 온건하게 보일 뿐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 가서는 비교적 조용하다. 원체 소수인 무슬림 중에서 시아파는 더욱 소수라 시아파 모스크는 매우 희귀하고 구심점이 되어야 할 이란계 주민은 이란 혁명 당시 망명 온 세속주의자/사회주의자들이 주류라서 포교에도 매우 소극적이고 폭력적인 면모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랍계나 남아시아계와 비교할 경우 확실히 비종교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란계 미국인 문서 참조. 물론 보수적인 시아파 신도들도 수니파 광신도들마냥 테러를 일으키지는 않지만...[37]
시아파 계열 무장단체들이 수니파 계열 무장단체와는 행동 방식이 다른 부분도 있다. 시아파계 무장단체는 공식적인 정규군이나 정치 조직의 성격이 강한 편인데 헤즈볼라나 후티가 대표적인 사례다. 따라서 중앙의 지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소속이 명확하며 지역 밀착형 형태가 강하다. 그래서 중앙 통제에 따라 서구 인사들을 함부로 공격하지 않고 민간인들을 약탈하는 일도 방지할 수 있으며 포로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제대로 포로 대우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지지를 얻기 용이하다. 이는 시아파 계열 무장단체가 테러리스트란 인식을 약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시아파 계열 무장단체들은 공식적인 군사-정치 조직이란 면을 살리기 위해 자폭 테러 '따위'가 아니라 아예 전면적으로 적대 세력과 교전하는데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과 교전하거나 후티가 사우디아라비아 주도의 아랍 연합군과 교전하는게 대표적인 사례다.
[1] 알리가 직접 말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7세기 초기 알리당이 퍼뜨린 말이다.[2] '~ite'는 종교나 사상의 추종자, 어느 지역 출신자나 원주민, 부족 소속원 등을 가리키는 영어 접미사. 한국어로는 단어에 따라 파(派), ~사람 등으로 번역할 수 있어 주의할 필요가 있다.[3] 좀 더 엄밀하게 들어가면 지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사우디아라비아의 페르시아 만 연안인 카티프 지역, 예멘과 인접한 헤자즈의 일부 지역, 인도의 데칸 고원 등지에도 시아파가 존재한다.[4] 출처[5] 그러나 후세인은 수니파였다...[6] 2023년에 주이란 아제르바이잔 대사관에서 테러가 일어났으며 이란발 비행기는 아제르바이잔에 들어 올 수 없었다. 당시 양국 간에 전쟁이 있을 거라는 기사들이 쏟아졌다. 애초에 1년 전에 러우전쟁이 발발한터라 전세계적으로 작은 분쟁이 전쟁으로 확전될 가능성에 두려움에 떨었다.[7] 중동에서 시아파의 지정학적 핵심 역할을 하는 네 국가, 즉 이란-이라크-시리아-레바논을 잇는 시아파 정치권력-인구 벨트를 시아파 초승달(Shia crescent)이라고 부른다. 보통 중동의 수니파와의 종파 갈등 차원에서 강조되는 개념으로 많이 등장한다. 시아파 초승달 지역의 시아파 인구를 합하면 같은 중동의 수니파와 인구수 차이가 크게 없고 영토 차이도 없다. 사실상 중동 중심만 치면 수니파와 시아파가 반반으로 갈라져 있는 상황이다.[8] 다만 튀르키예의 시아파 인구의 대부분은 알레비파로 대부분 신도가 튀르키예인에 기존 시아파랑 다르게 기독교의 영향을 크게 받아 이들을 시아파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다.[9] 사우디 동부에 상당한 숫자의 시아파 교도들이 거주하고 있다.[10] 시아파가 주류인 아제르바이잔과 사이가 좋으며 언어, 문화적으로도 아제르바이잔과 매우 가깝다.[11] 인도를 지배했던 이슬람 왕조들은 대부분 수니파 왕조였고 특히 인도사에서 이슬람 왕조로 가장 큰 족적을 남긴 무굴 제국과 델리 술탄 왕조가 수니파 왕조였다는 점에서 데칸 지역에 있던 시아파 왕조들은 크게 존재감이 없다. 현재 인도는 물론 남아시아 전역의 무슬림 중 시아파는 소수고 무슬림 자체도 힌두교도의 압도적인 인구에 비하면 소수이기 때문에 이슬람의 종파 문제에는 초점이 안 맞춰져 있다고 보는 게 최선이다.[12] 사우디는 와하비즘이 국교라서 시아파는 국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단 취급당하고 정치/사회의 모든 면에서 비주류 신세이며 아프간과 파키스탄에서는 잊을 만하면 탈레반과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가 주도하는 시아파 모스크 테러가 발생하는 상황. 중국의 시아파 신자들도 국가 무신론을 추구하는 중국공산당에게 억압을 당하고 있다. 러시아는 특별히 종교적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필 다게스탄이 그 문제 많은 체첸 공화국 바로 옆이라 분리 독립을 막고자 블라디미르 푸틴이 동네를 쥐락펴락하고 있다. 중앙아시아는 그래도 세속적이어서 나아 보일 것 같지만 수니파가 다수여서 시아파는 수니파들에게 차별받는다. 어디까지나 사우디 같은 동네에 비하면 약하다는 거지 결코 약한 수준은 아니다. 인도네시아는 시아파가 극심한 핍박 받는 말레이시아나 브루나이에 비하면 낫지만 그래도 시아파 박해는 있다. 자카르타 같은 대도시에 시아파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있긴 하다.[13] 이라크와 이란은 전쟁도 했던 사이지만 이라크는 시아파 정부가 들어선 만큼 이란도 과거의 원한을 잊고 우호적 관계 수립에 노력했다.[14] 이인태,'끝없는 테러공격: 테러리즘의 이해와 중동 테러 공격전술',책과나무,2016,pp102-103[15] 자세한 내용은 압둘라 문서 참조[16] 구약에는 모세-여호수아 엘리야-엘리사처럼 선대 선지자의 후계자로서 선지자가 된 사례가 존재한다. 물론 구약인 만큼 당연히 모두 야훼의 뜻으로 특히 엘리야-엘리사는 아얘 직접적으로 그를 선택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유대계 개종자인 만큼 구약의 사례를 기초로 주장을 펼친 듯하다.[17] 다섯 손가락을 펼치고 손바닥에 쿠란 구절을 적은 조형물도 쓴다.[18] 성화에 관한 시아파 무슬림의 답변(댓글 단 무슬림이 한국인 시아파 무슬림이다.)[19] 말이 되냐 싶지만 원래 종교에서는 이교도보다는 이단자를 더 미워한다. 이교도는 배척하면 그만이지만 이단자는 자신의 세력이 침범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정체성까지 위협받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톨릭이 개신교보다는 불교와 더 친하게 지내고, 개신교가 불교나 무속신앙보다 신천지를 더욱 배척하는 것을 생각하면 어느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20] 16세기의 사례를 하나만 들자면 지배층이 수니파를 믿었던 오스만 제국은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합스부르크 제국을 견제했고 합스부르크 측은 오스만 제국의 배후를 위협하기 위해 원래부터 오스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시아파 국가인 사파비 제국과 손을 잡았다.[21] 실제로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서 축구 경기 분위기는 한일전 못지않다.[22] 다만 이는 종교적 차이 외에도 민족성, 역사성 등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다.[23] 무함마드의 아들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후사를 남기지 못했다. 무함마드의 장녀 자이납은 무슬림이 되기를 거부하고 아버지를 선지자로 인정하기도 거부하여 결국 무함마드도 고집을 꺾었다. 자이납과 파티마를 제외한 다른 딸 2명은 무슬림이 되어 결혼은 하였으나 역시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다. (시아파 전승에서는 무함마드의 장, 차, 삼녀가 친딸이 아니라 카디자 전 남편의 딸이라고 본다. 이 전승이 사실이라도 무함마드는 양아버지로서 딸들을 책임졌다.) 결국 알리-파티마 부부만이 무함마드와 육체와 종교를 모두 포함하여 가장 가까운 혈족으로 통했다.[24] 믿음과 능력뿐 아니라 때때로는 희생 정신도 발휘해서 헤지라 당시 무함마드는 자신을 대신해서 누군가를 자신인 것처럼 속이고 탈출했는데 그 누군가는 알리였다. 알리에게는 다행히도 자신이 무함마드가 아니라는 것이 반대파에게 들켰지만 어찌저찌 목숨은 구하고 무함마드 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25] 다만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로 선출된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라 수니파 측 기록과 시아파 측 기록 모두 아부 바크르와 알리 간에 불화가 있었던 것은 인정하고 있다. 다만 수니파 측은 그저 불화가 있었다 정도로 끝나지만 시아파 측은 아부 바크르가 알리에게 "너네 집을 불태워 버리겠다!"는 식으로 협박했다고 말한다.[26] 알리가 파티마 전에 결혼한 여자의 아들이다.[27] 다만 수니파도 시아파 못지않은데 수니파는 이슬람 경전인 쿠란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학파가 나뉘고 이 이슬람 학파에 따라 분파가 나뉜다. 그래도 크게 보면 시아파보다는 종류가 덜한 편이다.[28] 정통 칼리파까지만 인정한다. 이후 칼리파의 직위를 계승한 우마이야 왕조는 알리를 살해하고 불법적으로 탈취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으로 칼리파에 해당하는 종교 최고위직을 칼리파가 아닌 이맘이 차지하고 있다.[29] 이란의 12이맘파는 정통 칼리파 중 3대(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도 인정하지 않으며 모두 알리에게 이어져야 할 정당한 칼리파권을 찬탈한 사람으로 보기 때문에 아이 이름을 지어줄 때조차도 이 이름을 쓰지 않을 정도로 적대시한다. 알리와 대립했던 무함마드의 부인 아이샤도 마찬가지로 좋게 보지 않는다.[30] 근데 다른 시아파와는 달리 무함마드 이븐 알 후나피야의 어머니 후나피야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가 죽은 다음 알리가 결혼한 아내로서 이 사람은 알리의 자손이긴 하지만 무함마드의 자손은 아니다.[31] 나중에 자기 경전을 자기가 아랍어로 번역한 아라비 바얀도 저술했다.[32] 이로서 바비교는 사멸한다.[33] 수니파와 시아파와의 갈등 해소 및 힌두교도와 무슬림들이 단결하여 영국에 맞설 것을 주장한 현대 사상가[34] 항목 내용 출처 :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이슬람 / 손주영[35] 이원복 교수의 책에서도 이런 편견이 그대로 드러났지만 이건 상술한대로 수니파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발호하기 전에 쓰였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며 최근 출판작들은 이런 면이 거의 사라졌다.[36] 특히 이란의 광신과 인권탄압은 굉장히 악명높다.[37]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현 이란 신정체제부터가 이란 토착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와 숙적인 수니파에 대한 탄압과는 별개로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이슬람화 이전 페르시아 왕조나 사파비 제국에 의해 시아파가 주류가 되기 이전 수니파 왕조의 문화재를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보호한다. 다만 이는 페르시아 제국의 역사가 이란인에게는 또다른 자부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