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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6대 경기도지사 김동연의 생애에 대해 서술한 문서.2. 청년 시절
낮엔 은행원, 밤엔 대학생, 새벽엔 고시생
김동연이 직접 '본인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의 삶'을 표현한 말
김동연이 직접 '본인의 10대 후반부터 20대 중반까지의 삶'을 표현한 말
1957년 1월 28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서 아버지 김기수(1935 ~ 1968)와 어머니 최근식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가족들과 함께 서울특별시로 이주했다고 한다.
12세 되던 1968년에 아버지가 타계하면서 가세가 기울어 소년 가장 역할을 했다. 무허가 판자집에서 살고, 끼니를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했다.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채석장에서 일하고, 산에서 나물을 캔 후 파는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의 가족이 살던 판자촌마저 도시정비 사업으로 헐리면서, 허허벌판이었던 경기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수정구 단대동)로 강제 이주돼, 한동안 천막을 치고 살았다.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망해도 그렇게 망할 수가 없었다. 학업은 물론 때로는 끼니가 걱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2년 5월에 쓴 칼럼에선 "세 끼를 온전히 챙겨먹기 어려웠던 시절, 끼니로 자주 먹던 수제비, 외상 달고 됫박으로 샀던 쌀, 몇 장씩 사다 쓰던 연탄"이란 표현으로, 본인의 어려웠던 시절을 회고했다.
맏아들로서 가난한 집안사정 때문에 서울광희국민학교와 광희중학교(21회) 졸업 후 덕수상업고등학교(63회)에 진학했다. 고교 졸업 4개월 전인 1974년 11월, 17세의 나이[1]로 한국신탁은행(現 하나은행)에 입사했다. 2011년 9월에 쓴 칼럼에서 "어린 나이에 은행에 들어갔을 땐 우쭐했지만, 상고 출신이라는 현실의 벽은 높았고 100m 달리기 경주에서 50m쯤 뒤처진 채 출발하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라고 회고했다. 1977년 배움에 대한 갈증으로 일과 병행할 수 있는 국제대학 법학과(77학번)[2]에 진학했다. 1978년 3월 11일 육군 방위병으로 입대하여 제63훈련단 소속 소총수로 편제되었고, 이후 경기도 성남시 태평2동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병역의무와 대학 학업을 병행하였다. 1979년 5월 26일 일병으로 소집해제되어 병역을 이행했다.
3. 관료 시절
야간학부를 다니는 동안, 은행 합숙소에서 옆방 선배가 쓰레기통에 버린 '고시 잡지'를 보고 관료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전까지는 고시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이후 직장과 병행하면서 주경야독한 끝에, 1982년 제6회 입법고시[3]와 제26회 행정고시 양과에 합격하는 영예를 얻었다.[4] 훗날 이때를 회고하며 "직장에 충실하면서 공직에 뜻을 두고 준비했다.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다. 문제는 내 시간 만들기였다. 잠을 줄이고 15분 이상의 조각시간을 내 시간으로 만들었다"라고 밝혔다. 합격을 하고 나니 주변 친구들의 질투가 정말 심했다고 한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김동연 지사처럼 공부한 적이 없다. 같은 고등학교와 같은 대학교를 나온 친구가 자신을 뒷담화 하는 것을 들었을때는 심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주로 잘난 척을 한다, 변했다와 같은 근거없는 비난이었다.
1983년 '행정공무원'으로는 총무처(現 행정안전부)와 경제기획원(現 기획재정부)[5]에서, '입법공무원'으로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입법조사관으로 일하게 됐다.[6] 사무관 수습을 받을 때, 행정고시 동기들은 대부분 서울 근무를 원했지만, 고향인 충청북도청 근무를 자원했다. 당시 충청북도청 지방과에서 일했는데, 음성군청 근무를 지원한 뒤 그곳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후 경제기획원에서 예산실 사무관과 대외경제조정실 사무관을 거친 뒤, 대통령 비서실 행정관과 재정경제원 과장을 역임했다.
1986년,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것도 직장과 병행하면서 얻은 것이다. 그 후에도 자기의 학력을 두고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지고 싶지 않아 1989년 9월 미국 유학길에 올라 미시간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발령 이후 선배들이 대학교를 물어, 야간대를 나왔다고 하고 돌아나오는데 뒤에서 말하기를 "요즘은 희한한 대학 나와서 고시 붙어 여기까지 오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국제대(현 서경대)는 요즘의 방송통신대학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장실에서 일을 맡기게 한 사람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직속상사가, 자기와 고시 기수가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사회 경험이라고는 없는 서울대 출신 동료와 은행에서 8년 동안 일한 경력이 있는 야간대학 출신의 자신을 비교하며 서울대 출신 동료를 추천했다는 말을 당연스럽게 자신 앞에서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했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엘리트주의가 강한 관계에서도 경제관료는 구성원 대다수가 서울대 경제학과나 법학과 출신이라는 동질성을 공유했는데, 당시 경제관료계에서 '국제대 출신'이었던 김동연이 겪었을 고충은 안 봐도 눈에 훤하다. 공직에 입문하기 전에도 학력과 관련해 많은 고충을 겪었다. 은행에서 일하던 시절, 이름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졸업한 직장상사가 바둑을 두는 것을 보고 훈수를 두었다가 뺨을 맞은 일화가 있었다. 그리고 꽤 친하다고 여겼던 직장 동료와 상사와 술을 마시면서, 술주정으로 '야간대학밖에 못 다니는 놈' 운운을 하며 비하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진 적이 있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993년 6월, 3년 9개월이라는 '최단 기간'으로 미시간 대학교에서 공공정책학으로 석/박사를 취득해[7] 미시간 대학교 기록에 이름을 남기게 된다. 이때 국가장학금과 풀브라이트 장학 재단의 지원을 받았다.
2002년에는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 2002년부터 2003년까지는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대학원에 풀브라이트 교환교수로 활동했다. 또한, 2005년까지 세계은행(WB) 선임정책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2005년 기획예산처 전략기획관으로 돌아온 뒤, 기획예산처 산업재정기획단장과 재정정책기획관 등을 역임했다. 이때 참여정부에서 발표한 국정마스터플랜 "비전 2030" 보고서 작성을 주도했다. '비전 2030'은 2030년까지 한국을 삶의 질 세계 10위로 올려놓고, 전체 예산의 40%를 복지분야에 편성해, 전체 육아비용에서 부모의 부담을 37%로 축소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때문에 김동연이 국가에서 복지를 책임지는, 이른바 ‘큰 정부’를 선호한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김동연은 사회구성원 사이의 신뢰를 높여 사회적 거래비용을 낮추는 ‘사회적 자본’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비전 2030'을 짤 때도, 정부 공식보고서에 사회적 자본 확충을 핵심전략으로 넣기도 했다.
2008년 이명박이 당선인인 시절,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기획조정분과 전문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이명박 정부 대통령실에서 경제금융비서관을 맡았고, '경제·재정·통화·금융' 분야를 총괄했다. 경기 침체에 적극적 정책으로 맞서는 등,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9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의 청와대 조직 개편에 따라, 국정과제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기서 공기업 선진화와 규제 개편 등 주요 정책과제를 수행했다.
2010년 8월 기획재정부 예산실장[8]에 임명되었다. 당시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을 줄이는 등, 이명박 정부의 기조에 맞춰 재정 건전성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산실장으로 있을 때, 이명박 대통령에게 세 차례나 직언을 하면서, '영유아예방접종 지원 확대' 등 다섯 가지 재정사업을 관철한 일화가 있다. 또 예산실장으로 일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이 예산 정책기조를 다시 점검할 것을 주문하자 여름 휴가를 반납하고 예산안 검토에 집중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외계층인 차상위 이하 가정의 우수 고등학교 졸업생 해외 유학 사업인 '드림장학생'이 당시 예산실장이었던 김동연의 작품이다. 사업의 제안부터 예산 편성까지 직접 주도했다. 예산실장으로 있으면서 2조 5000억 원의 재원을 마련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교육희망사다리' 사업에 많은 공을 들였다.
이명박 대통령과 김동연 기획재정부 제2차관 |
2012년 1월에 기획재정부 2차관에 올랐다. 기획재정부 2차관이 된 뒤에도 밤늦게까지 일해 기획재정부에서 화제가 됐다.
2012년 4월 여야가 앞다퉈 복지공약을 내놓자,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는 점을 꼬집으면서 “여야의 공약은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김동연은 선거법을 위반 했다는 논란에 휩싸이게 됐고, 곧바로 사의를 표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2012년 4월5일 전체 위원회의를 열고, 기획재정부가 정당의 복지공약을 분석해 언론에 밝힌 행위는 '공직선거법 제9조(공무원 등의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 선관위는 “2012년 4월 총선이 일주일 남은 시점에서 기획재정부가 정치권의 복지공약을 분석한 일이 유권자의 판단에 부당한 영향력을 미쳐 선거결과를 왜곡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 소신 발언이,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김동연을 국무조정실장으로 발탁한 데에 영향을 줬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김동연은 “여야의 복지정책을 점검하니, 재정 차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워, 추가 증세나 국채 발행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뿐이다. 야인이 될 각오를 했는데, 오히려 더 큰 자리(국무조정실장)가 왔다”고 말했다.
2012년 6월, 전체 학생 수가 21명인 강원도의 중학교를 방문했다. 가정 상황이 너무 어려워서 꿈과 희망을 갖지 못하는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달라는 해당 학교 수학 교사의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동연 차관은 각기 다른 책 21권을 구입해서, 학생 한명 한명의 이름을 쓴 뒤 직접 전달했다. 그리고 본인의 성장 과정을 소개하며 "주어진 어려움을 원망하지 말고 큰 꿈을 가져라. 지금의 어려움은 '위장된 축복'이며 참 행복을 느끼는 단계까지 가려면 정말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며 학생들을 다독였다.
2012년 12월, 18대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을 노리는 후보들에게 '기득권층에 맞서고 많은 국민이 반대하는 인기 없는 정책을 펴는 용기', '선거공약에 솔직할 수 있는 용기', '경쟁 후보의 공약을 수용해 사회통합의 큰 걸음을 떼는 용기', 즉 '진정한 용기'를 주문하는 칼럼을 썼다.
박근혜 대통령과 김동연 국무조정실장[9] |
2013년 3월, 막 출범한 박근혜 정부에서 업무 능력을 인정 받아 초대 국무조정실장으로 임명되었다. 국무조정실장으로 지명됐을 때, 박재완 당시 재정경제부 장관은 사석에서 “각 부처의 정책을 틀어쥐고 국정 현안을 조정해야 하는 국무조정실장 자리에 김동연이 최고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국무조정실장이 된 뒤, 국정과제 점검체계인 ‘신호등 평가제도’를 만들고 '규제비용총량제'도 도입했다.
2013년 10월, 큰아들이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오랜 기간 투병했지만 골수이식을 한 날도 주변에 알리지 않은 채 휴가를 썼고, 발인을 마친 날도 오후 사무실로 출근해 국무조정실에서 만든 '원전비리 종합대책'을 직접 발표했다. 하지만 훗날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큰아들을 생각하면) 가슴을 도려내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에 큰 구멍이 난 것 같기도 하다”고 단장의 아픔을 토로했다.
2014년 5월, 세월호 침몰사고 당시, 중앙일보에 ‘"김동연의 시대공감" 혜화역 3번 출구’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 글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이번 사고로 많이 아프다. 어른이라 미안하고 공직자라 더 죄스럽다. 2년여 투병을 하다 떠난 큰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한데 한순간 사고로 자식을 보낸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 생각하니 더 아프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그분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그분들 입장에서 더 필요한 것을 헤아려는 봤는지 반성하게 된다. 이번 희생자 가족들도 견디기 어려운 사연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분들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위로를 드리고 싶다. 그렇게 할 어떤 방법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 말 않고 그저 따뜻한 허그(hug)를 해드리고 싶다. 그분들에게 닥친 엄청난 아픔의 아주 작은 조각이나마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그분들의 힘든 두 어깨를 감싸며 전하고 싶다”
2014년 7월, '가족'과 '건강' 등의 이유를 들어 사표를 내고 관료 공직 생활을 마무리했다. 국무조정실장에서 물러날 때 청와대에서 몇 차례 만류했으나, 1년 4개월 동안 격무에 시달렸다는 점과 아들을 잃은 가족을 돌봐야 한다는 점을 들면서 거듭 사퇴를 요청해, 청와대가 이를 수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경기도 양평으로 내려가, 근처의 중고등학교에서 강연을 하거나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국무조정실장에서 물러날 때 신임 사무관들을 대상으로 ‘공직관’에 대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따뜻한 가슴이 없다면, 진정한 엘리트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열심히 생각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공직자들의 자기희생이 필요하다.”
30년 동안 주로 예산 전문 경제 관료로 일하면서, 꼼꼼하고 기획력이 뛰어나며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면서도 상사의 뜻을 잘 헤아리는 타입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정책을 수립하고 개별 정책들을 연계하는 데 뛰어나 기획예산처와 기획재정부에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강한 기획력과 추진력을 보여줬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정책 수립의 마스터’.
4. 아주대학교 총장
김동연 부총리 후보자의 특별한 총장 이임식, "아주대 15학번"
김동연 '아주대를 떠나도 영원한 아주인이다'
경제부총리 김동연, 진짜 ‘사람 냄새’ 나는 인물
김동연 경제부총리 후보, 총장 시절 바꾼 아주대 풍경
국무조정실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나, 2015년 아주대학교 제15대 총장직을 맡았다. 기존에 교수들 사이에서 총장이 선출된 것에 비해 처음으로 추천에 의해 외부 인사로 아주대학교 총장으로 영입되었다. 취임 이후 개방적 소통을 중시했다. 총장으로 취임하고 총장실의 소파를 치우고 회의하기 편한 원탁형 테이블을 들여왔다.
고졸-야간대를 다니면서 행정고시에 합격한 자수성가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에 대한 열정이 매우 컸으며, 아주대학교에 여러 파격적인 시스템과 이벤트를 진행하였다. 이에 학생들의 지지가 이전 총장들에 비해 남달랐고, 여러 언론에도 여러 번 등장하였다. 당장 포털에 김동연이라고만 검색해도 취임식부터 총장 재임 시절 했던 업적들, 경제부총리로 내정되어 떠날 때까지 좋은 기사가 수두룩하게 쌓여 나온다.
취임식 당시부터 대학 서열, 화려한 캠퍼스 이런 것이 아닌 학생들의 꿈과 도전정신을 키워주는 방향으로 학교를 운영하였고, 학교를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 보겠다는 Ajou Greart Turning을 제시하고 제2의 창학, 유쾌한 반란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취임 이후에는 후술되겠지만 아래와 같은 이벤트를 시행했다. 취임 첫 해 대동제에서 저녁 늦게 술에 취하신 채로 학생들은 아무도 모르는 교가를 흥얼거리는 모습에 많은 학생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했다고.
* 파란 학기제
정말 수없이 많이 언론에 등장하였다. 파란이란 아주대의 상징색인 파란색과, 알을 깨고 나온다는 파란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종의 도전학기제이다. 학생들이 모여서 혹은 개인이 한 학기 동안 어떠한 목표를 짜고(예를 들면 이번 학기에는 미니 드라마를 촬영해 보겠다던가) 계획을 제출해서 승인 후 성실히 잘 수행한 경우 3~18학점의 정규 학점을 인정해주고 성과에 따라서 수상도 받을 수 있는 제도이다. 첫 파란학기부터 42개팀 120명의 학생이 참여해 계획한 도전과제를 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당연히 금방 언론을 타고 수많은 대학교에서 벤치마킹하기 시작하였다.
- After you
이 또한 수많은 언론의 관심과 함께 여러 정재계 인사들의 후원을 받았다. 학생들을 외국대학교로 파견하는 것이나, 본인이 지원하는 것이 아닌 나보다 너 먼저라는 슬로건 아래에 가난하거나 어려운 학생들을 추천하여 보내주는 제도이다. 김동연 전임 총장은 “개천에서 용 나오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려운 학생부터 먼저 배려하기 위함"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됐다고 한다. 교환학생제도와는 별개이며 학교의 지원금으로 파견된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파견된 학생들은 여름과 겨울방학을 활용해 미국, 중국의 최고 대학에서 4주간 고강도 집중 언어 및 문화 교육을 받았다.
- Ajou Global Internship
학생들을 BMW, 미국 H-MART, 미국 CKP회계법인 등 해외 인턴쉽을 보내 글로벌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 여러 해외기업과 인턴제휴를 체결하였다. 파란 학기제와 연계돼 참가자들은 글로벌 기업의 실무와 문화를 경험하고, 이를 파란학기제 도전학점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Brown bag Meeting
매주 신청한 20여명의 학생들과 함께 봉투에 담긴 빵을 점심으로 먹으며 얘기를 나누고, 학생들의 학교에 바라는 점 혹은 총장으로서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나누는 이벤트자리이다. 첫 ‘브라운백 미팅’에서는 20명 정원에 50명이 몰렸었다. 기획처장, 교무처장 등도 함께 참석하며 이날 토론 내용과 조치 결과는 매주 학교 사이트에 공개된다.
- 총장 Book 릴레이!
매주 학교에서 지정해준 책을 읽고서 총장과 학생들이 모여서 토론을 나누는 이벤트이다.
- 총장 진로 멘토링
총장이 직접 학생들과 만나서 진로에 관한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을 해주는 자리이다. Cheer up Change up - 취창업 진로 책임서포트제의 일환으로 1시간 동안 신학생회관 대학창조일자리센터에서 총장 진로 멘토링이 진행됐다.
- 아주 희망 SOS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학업 중단 위기에 놓인 학생을 도와주는 시스템으로, 김동연 총장 본인도 월급의 상당 부분을 기부해왔다.
- 인도네시아 조코위도도 대통령 방문
인도네시아의 첫 직선대통령이자 첫 서민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자신과 비슷하게 어려운 환경에서 올라와 성공한 김동연 총장을 만나보고 싶다고 아주대를 방문하였고, 김동연 총장과 조코위도도 대통령과의 대화가 율곡관 대강당에서 이루어졌다. 꿈과 희망, 그리고 리더십, 소통 철학과 노하우, 청년들에게 보내는 조언, 아시아 시대 도래에 따른 양국의 교류·협력에 대한 무게감 있는 대화들이 진행됐다. 이날 수백명의 학생들과 고위직 인사들이 참석하였고, 언론에서도 여러번 기사화되었다.
- 프라임 사업 지원 철회
프라임 사업은 공학 위주의 학과 개편사업으로 대부분의 학교에서 기존의 학과를 철폐하였고, 지원금을 타기 위해 학생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강제로 학과 규모를 줄이거나 폐지까지 하면서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주대도 프라임사업의 지원금이 큰 만큼 계획을 검토하였으나, 학생들이 반대 의견와 충돌하자 강행이 아닌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것을 존중하여 계획을 철회하였다.
이외에도 창업경진대회, 독서토론대회 등을 수시로 열고 학생들과 수시로 소통하려 했던 총장으로 취임 때부터 갓(god)동연이라고 불리며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 모든 것이 총장 재임 기간을 절반정도로 수행하면서 시행한 것으로 2년 3개월만에 학풍을 크게 바꾸어놓았다는 평. 학생 해외연수 지원비도 직접 발로 뛰어 재원을 마련했고, 게다가 총장 재임하면서 받은 연봉의 40프로를 모두 기부하였다.
2015년 2월 25일 아주대학교 총장 시절 인터뷰에서 “국내 대학에서 A학점은 질문 안 하고 교수에 순응적 학생들에게 돌아가지만, 미국 대학은 교수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도전하는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비판적 사고가 필요한 요즘에는, 외국어 점수 등 ‘스펙’보다는 인생의 ‘스펙트럼’을 넓혀야 한다”고 말했다.
2016년, 새누리당에서 "양심적이고 맑은 사람"이라며 비상대책위원장으로 강력하게 추천되었으나 본인이 끝까지 고사했다고 전해진다.
2016년 7월 17일 아주대학교 총장 시절 인터뷰에서 “기성세대가 ‘나도 젊을 때 힘들었다’고 하는데, 지금 젊은이들은 그보다 훨씬 힘들다. 나 때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은행에라도 갔다. 지금 학생들의 고민은 단순히 취업과 진로 문제에 국한된 게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깊다”라고 말했다. 또, 대학생 새내기 시절로 돌아간다면 “금융회사나 공무원 취직 대신, 창업 등 하고 싶은 일을 ‘빡세게’ 찾을 것 같다”고 말했다.
2017년 5월 5일, <있는 자리 흩뜨리기>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였다.
5.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5.1. 2017년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자, 정부 장악력 등의 점을 사서 청와대 정책실장에 기용된다는 여러 하마평이 오르내렸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에서 장관급을 지냈다는 점에서 불가능하지 않냐는 시각이 있었다.2017년 5월 21일, 예상을 깨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에 내정되었다. 인선 배경으로 "거시경제 통찰력과 조정 능력 겸비한 유능한 경제 전문가"이며 "소년가장 출신으로 누구보다 서민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경제 사령탑"이므로 "위기의 한국경제를 이끌어갈 경제 수장으로서 최적임자로 평가"했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경제부총리로 임명되면서 아주대학교를 떠나게 되었고 학생들의 반응은 축하한다와 더 오래하시길 바랬는데 너무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아주대학교 역사상 가장 지지를 많이 받은 총장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당시 언론에서는 고졸신화라며 띄워주었다. 하지만 엄연히 그는 야간대학 출신이지 고졸 출신이 아니다.
2017년 6월 9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인사청문 보고서가 채택됨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초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이 되었다.
2017년 7월 25일 열린 경제부처 합동 브리핑에서 눈이 붉게 충혈되고 입술에 물집이 잡힌 모습으로 참석하였다. 결막염에 걸렸다고. 피로가 누적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들인지라 얼마나 장관을 갈아넣었으면 저렇게 되느냐는 반응이 꽤 있다. 취임 직후부터 기재부 공무원들에게 토요일 업무 관련 카톡 금지 지시 등을 내리며 휴식시간을 보장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정작 본인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듯. 8월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세제 개편과 예산 편성 때문에 매일 야근하는 세제실, 예산실 직원들에게는 9월 초 국회에 법안과 예산안을 제출한 뒤에 휴가를 꼭 가라고 당부했다.
김동연 "토요일 카톡 금지..나부터 주말 사무실 안 나온다",17-06-21,머니투데이
충혈된 눈, 부르튼 입술...경제부총리 김동연의 '고단한 행군',17-07-25,이데일리
8월 9일, 성과 미흡 부처 사업에 들어가는 11조 예산에 고강도 구조조정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당연히 진행 중인 사업이 부실하다고 말하는 부처는 없는 만큼 기재부와 각 부처 사이의 기싸움이 예상된다. 그래서인지 정부 정책 집행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거의 전 부처가 구조조정의 아픔을 함께 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내년 예산안을 물적 투자를 축소하고 복지와 일자리 투자를 늘리는 방향으로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경제 정책 수립 면에서 존재감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그동안과 달리 예산안 편성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듯하다.
8월 14일, 경제 현안 간담회에서 북한 때문에 요동치는 금융시장 불안에 외국인 자금 이탈이 심할 경우 시장 안정화 정책을 취할 것 이냐는 질문에 급격한 변동에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지만 그 전까지는 시장에 맡겨두며 모니터링에 충실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현재 24시간 국내 시장뿐 아니라 국제, 외환시장 상황을 긴밀히 모니터링 하고 있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이 새롭게 발표한 건강보험 개편안을 언급하면서 관계 부처와 재정당국 협의를 통해 건강보험 보장성 확대와 기초생활보장 확충안에 대한 재원 대책이 마련돼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2013년에 백혈병으로 아들이 사망했는데, 이때도 평소처럼 일을 했다고 털어 놓았다. 이 때문에 '아들이 죽어도 열심히 일하는 워커홀릭'이라는 말이 퍼졌다. 이에 대해 김동연은 '당시 국무조정실장으로서 도저히 일을 쉴 수 없는 상황이었다'라고 말하며 워커홀릭이라고 불리는 게 칭찬이라고 해도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말했다.
8월 16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와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금리 문제는 금융통화위원회, 한국은행의 고유 권한이며 정부 당국자가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며,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는, 최근 청와대 김현철 경제보좌관이 부동산 가격 급등과 가계 부채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현 금리를 지적하면서 채권 금리가 급등하자 이를 해소하기 위한 차원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정기적 만날 예정이라고 말하면서, 정책 공조의 의지를 강조했다.
8월 17일, 세무관서장 회의에 참석해 한승희 국세청장과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동연 경제 부총리는 국정 과제 수행을 위한 재정 수입 확보에 힘써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조세 정의 구현을 위해 지능적 탈세나 대기업 세금 탈루에 철저히 대응 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역외탈세와 고액·상습체납에 대한 대응도 강화해 '성실납세가 최고의 절세(節稅)'라는 인식을 확산시키라고 당부 했다.
8월 23일, 국회 예결위 회의에서 "법인세를 올렸을 때 기업 경제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잘 유념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규제완화 등에 신경을 써서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의) 부정적 효과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8월 24일,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저출산 문제를 지적하며 회의 끝난 후 기자 간담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 하지 못하면 우리 경제 앞날을 밝게 보기 힘들다고 말하며 주거비, 의료비, 교육비, 통신비 등 강제성 있는 생계비를 낮춰 실질적으로 가처분 소득이 늘어나도록 하는 대응 방안을 소개했다. 그리고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기재부는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전담하는 '인구구조과'를 신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8월 25일, 경제 정책 수립에 경제부총리가 소외됐다는 지적을 신경 쓴 듯,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 부처 업무보고에서 "오랫동안 다닌 익숙한 길을 버리고 한 번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는데도 김 부총리 지휘 아래 잘 해주고 있어 매우 고맙다"고 말하며 김동연 부총리를 높이 평가했다. 이 자리에서 김 부총리는 올 하반기 핵심 정책으로 혁신 성장으로 꼽으며 그 일환으로 신 기술과 서비스에는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규제 샌드박스' 를 추진 하겠다고 밝혔다.[10]
9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미래성장 경제정책 포럼에 참석해 우리 경제 패러다임 전환을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김 부총리는 이번 강연에서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시대와 상황에 패러다임이 전환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채식주의자 소설의 '왜 다른 것을 틀리다고 표현할까.' 라는 문구를 인용하며 야당 의원들의 발언을 우회적으로 꼬집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본격적인 종교인 과세 실행에 앞서 종교계 인사들을 만나며 우려를 달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개신교를 제외한 종교 단체들은 납세는 당연한 의무라며 적극 협력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10월 15일, 한중 사드 갈등이 극심한 상황에서 중국으로 날아가 한중 통화스와프 연장을 성사 시키는 쾌거를 이루면서, 곧바로 미국으로 가서 美 재무부를 설득해 환율조작국 지정을 막는 기염을 토했다.선물 안고 귀국하는 김동연…"美·中 급한 불 껐다, 환율조작국 피했다. 그리고 김 부총리가 워싱턴 출장에서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들과 국제통화기금(IMF)ㆍ세계은행(WB) 등 글로벌 경제를 주도하는 인사들이 만나 우리 경제를 둘러싼 악재들에 대한 불안을 덜어주는 데 주력한 것이 IMF가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로 상향 조절한 것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냐는 분석도 나와 그 동안 존재감 없다는 지적을 불식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무디스는 북핵 도발 속에서도 한국의 신용등급을 Aa2를 유지하는 등 해외 기관의 긍정적인 평가를 이끌어 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주요 경제 전략에 민간 기업 위주의 혁신 성장을 주요 축으로 설정하면서 혁신 성장을 주도하고 있는 김 부총리의 입지가 더욱 커졌다.
10월 30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종합국감에서 혁신성장 전략과 관련해 “쥐를 잡는 데 고양이 빛깔이 희건 검건 상관없다. 이전 정부나 과거 정책을 차별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12월, 취임 6개월 맞았다. 취임 초기 장하성 실장, 김상조 위원장 등 흔히 말하는 정권 실세에게 이래저래 밀려 존재감이 없다는 지적이 있었으나, 17년 경제 성장률 3% 달성이 확실시 되고 본 문서에서 적혀 있는 것처럼 미국의 환율조작국 우려, 중국의 사드 보복과 통화스와프 연장 등 난제도 뛰어넘었고, 수출 호조로 경제상황도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 내년 예산안에는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줄이는 대신 일자리와 복지 등 인적 투자를 확대하는 소신을 확실히 담아내면서 서서히 경제부총리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5.2. 2018년
1월 16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했다. 라디오 출연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김어준은 뉴스공장 측에서 먼저 요청했다고 하는데, 정작 김 부총리는 그런 요청은 못 받았다고 한다. 김 부총리 측이 먼저 요청했다고. 출연해서 한창 진행되고 있는 이슈인 암호화폐, 최저임금 인상, 보유세 인상 관련에 대해서 답했고, 현재 논란 중인 자동차 부품업체 다스의 지분을 19.91% 보유하고 있는 기획재정부의 수장으로서 관련한 질문에 답했다. 반응이 좋았는지 이후 격월 간격으로 뉴스공장에 출연하고 있다. 관련 영상이 있었지만, 23년 9월 기준으로 영상이 비공개 처리되어 내려간 상태1월 24일, 세종컨벤션센터에서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4차산업혁명과 혁신성장 업무 보고'에서 직접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하얀 스케이트식 혁신’을 강조했다. '하얀 스케이트식 혁신'은 노르웨이의 피겨스케이팅 선수였던 "소냐 헤니"가 관행이었던 검정 스케이트와 긴 치마 대신, 하얀 스케이트와 흰색 미니스커트를 착용하고 올림픽 3연패와 세계선수권 10년 연속 제패를 기록한 데 착안한 것이다. 이런 사례를 들어, 안 가본 길이지만 가야할 길인 ‘혁신의 길’을 가야한다고 제안한 것. 김 부총리는 미래 변화가 급진적이고 파괴적이며 융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이런 상황에서는 '하얀 스케이트식 혁신'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전망한 것.
2월 9일, 캐나다에 이어 스위스와 통화 스와프 신규 계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스위스는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기축 통화국으로 분류되며, 스위스가 기축통화국인 아닌 국가와 통화 스와프 체결은 맺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계약 성공의 공과 함께, 김 부총리와 이주열 한은 총재가 통화스와프 계약 체결 합의 사실을 공동으로 발표하면서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거시경제정책의 중추인 기재부와 한국은행이 시장 안정을 위해 공조를 강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평도 나오고 있다.
3월 8일에는 부산대학교에 와서 강연을 했다. '사회적 자본'에 대한 강연이 인상깊었다.
5월 9일 취임 1주년을 맞아 뉴스공장에 또 출연. 월간 부총리 한다 그래놓고 안 한다고 김어준에게 까였으나 G20 참석하는 훌륭한 분이라고 용서를 해줬다. 문재인 정부의 1년을 평가하며 비트코인, 국제경제 등 여러 분야를 다뤘다.
5월 10일, 정부 출범 1년을 맞아 문재인 정부의 1년을 평가했다. 지난 1년간의 경제 성과로 '3%대 성장률 회복'을 첫손에 꼽았다. '기업'에서 '사람'으로 경제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한 초석을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다만 경제 성과가 국민의 피부에 와닿지 않은 점을 반성했다. 특히 일자리의 경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라며 "노동시장 구조 개선이나 혁신인력 양성 측면에서 갈 길이 많이 멀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5월 17일, 썰전에 출연해 지난 1년간 경제부총리로 일하면서 느낀 소감과 지금까지 이룬 성과와 아쉬운 점들에 대해 설명했다.
7월, 기획재정부 예산실 직원 200여 명에게 '사상 첫 집단 여름 휴가'를 부여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 휴가는 챙기지 못했다. 여기에는 김 부총리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획재정부 예산실은 보통 5월부터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하는 9월까지, 밤낮 없이 격무에 시달려 여름 휴가를 꿈도 꾸지 못한다. 그래서 김 부총리는 2018년 8월 첫째 주까지 여름휴가 일정을 잡지 못하다가, 둘째 주가 돼서야 9월 초까지 '하루씩 휴가를 쪼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2017년 문단에도 있지만 2017년에 김 부총리는 여름휴가 중 경제 관계 장관회의를 주재하는 등 업무를 봤다.
7월 12일, 최저임금 인상에 관해서 우려를 표하며 소득주도성장에 부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7월 18일, 문재인 정부의 사람 중심 경제 체감 효과가 미흡하다며 고개를 숙이면서 재정보강과 내년 대규모 확장 재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8월 6일, 취임 이후 처음으로 삼성전자를 방문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정문 앞으로 나와 김 부총리를 환대했다. 이 부회장의 환대를 받은 김 부총리는 방명록에 "우리 경제발전의 초석 역할을 하며 앞으로 더 큰 발전 하시길 바랍니다"라고 적었다. 김 부총리는 일자리 창출이나 투자는 어디까지나 기업 고유의 판단문제라고 강조하면서 "일자리가 20만개 이상 나오면 광화문광장에서 춤이라도 추겠다. 삼성전자가 결정해 발표할 것으로 본다"고 말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10월 3일, 심재철 의원의 정부 재정 정보 유출 논란을 두고 국회 대정부질문 중 심 의원과 설전을 벌였다. 국가 재정 최고 책임자로서 불법적인 재정 정보 유출이 상당히 불쾌했는지 그간 보여온 온화한 모습을 잠시 접어두고 강하게 공세를 취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심 의원과 설전을 벌이면서 과거 심 의원 역시 본인이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주말 중 업무추진비 사용 사실이 있다고 공개했다
그리고 자유한국당 김광림 의원과의 질의 중에는 계속되는 고용지표 악화에 머리를 숙이며 “가슴에 숯검댕이를 안고 사는 것 같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동시에 최저임금과 관련해 “업종별 차등화는 최저임금위원회에서 논의됐지만 부결됐고, 지역별 차등화는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와 저희(기재부)가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고용지표 악화와 관련해서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시한 적 있다고 한다
11월, 김 부총리의 경질이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정치 입문설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오로지 능력만으로 정권의 성격에 관계없이 중책에 기용된 이력과 흙수저에서 부총리 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라는 스토리 등 정치권에서 탐낼만한 자산이 많아 여야의 영입 경쟁이 시작되었다는 후문도 흘러나오고 있다. 더 나아가서 자유한국당에서는 김 부총리를 '현 정부와 각 세운 경제부총리'로 포장해서 차기 대선주자군에 포함시키려는 분위기가 있다고 전해졌다.
이러한 야당의 반응에 더불어민주당에는 “김 부총리를 보수 진영에 빼앗겨선 안 된다”는 위기감이 감돌며 현 정부에서 김 부총리를 더 활용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여당의 한 중진 의원은 “문재인 정부의 국정 철학을 잘 알고 있고 경제 전문가인 김 부총리가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면 우리가 받는 타격이 너무 크다”며 “김 부총리를 청와대 정책실장에 기용하든지 해서 그런 우려 자체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김 부총리의 향후 거취를 둘러싸고 여야의 영입경쟁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폭로 사건으로 인해 자유한국당이 김 전 부총리를 영입할 가능성은 상당히 낮아졌다.[11]
11월 9일, 홍남기 국무조정실장이 새로운 경제부총리로 지명되었지만, 바로 취임하는 게 아니라 내정자 인사청문회도 거쳐야 되고 대통령 인가까지 시간이 걸리며 2019년 예산안도 있어서 김동연은 여전히 바쁜 상태. 2018년 마지막 G20 회의인 아르헨티나 회의까지 수행할 예정이다. 덕분에 국회 예결특위, 예결소위 등등 찾아다니고 각종 행사들 찾아다니느라 퇴임 시즌에도 바쁘기 그지 없다. 그 와중에 유류세 인하 정책이 성공해 2주 만에 148원이 떨어졌다. 퇴임 맞이 미담 기사들도 끊임없이 나오는 중.
홍남기 내정자 인사청문회가 12월 4일에 열리니 그 후에 퇴임할 듯. 그리고 2019년 예산안이 와장창 되고 있고 선거제도 개편 등으로 민주당, 자유당과 바미당, 민평당, 정의당이 대립하는 등 국회가 연말스럽지 않게 핫한 정치논리로 사방팔방 돌아가고 있어서 홍남기 내정자 청문회 보고서가 불채택, 아니 아예 잊혀져버려서 퇴임이 점점 미뤄지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 서울 방문 때까지 재임하고 있을...줄 알았는데 12월 7일 오후 11시 55분에 홍남기 내정자 보고서가 채택되어 퇴임할 수 있게 되었다. 12월 7일 오늘 예산안과 온갖 위원회 안건들이 밀려서 새벽 가까이에도 회의중인데 2019년 예산안 통과 책임지고 퇴임하게 되었다. 이임식은 12월 10일.
12월 10일 당일에는 따로 이임식을 가지지 않고 기자간담회로 퇴임사를 대신 했으며 정식 이임사는 기획재정부 홈페이지에 올렸다.
오전에 기자간담회를 가지고 오후에 혁신성장본부 간부들과 간담회를 가진 뒤에 서울정부종합청사에서 전 직원 일동과 인사를 마치고 (정문을 나가는 중에 김부겸 장관과 잠깐 만나 인사를 나눴다) 자기 소유 차를 운전하며 퇴임했다. 퇴임 시 자차운전으로 퇴임한 부총리는 역대 최초.
6. 퇴임 이후
신재민 전 기획재정부 사무관 폭로 사건과 관련한 논쟁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로. 이에 대해 검찰은 김동연 전 부총리와 신재민 전 사무관 모두 무혐의로 처분하였다.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는 김동연을 영입해 총선에 출마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고 한다. 출마할 경우 정우택 자유한국당 전 원내대표의 지역구인 충북 청주시 상당구가 유력하다고. 하지만 김 전 부총리가 총선에 출마할 가능성은 낮아보인다는 전망도 있다. #
2019년 6월 29일, 제주 서귀포에서 중소기업중앙회가 주최한 '2019 중소기업 리더스포럼'에서 '유쾌한 반란'이란 주제로 폐막강연을 했다. 강연에서는 계층이동 단절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주제로 이야기했다. #
자유한국당과 더불어민주당은 모두 김동연을 영입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전부 거절하고 결국 미국의 미시간대에서 초빙교수로서 강단에 서기로 결정했다. #
21대 총선을 앞두고 여러 더불어민주당 후보들을 돕고 있다. 기획재정부에서 자신과 함께 일했었던 김용진 전 기획재정부2차관(경기 이천 후보)과 김영문 전 관세청장(울산 울주 후보)의 후원회장을 맡았다고 한다. # 또한 기재부 출신이 아닌 후보들 중에서는 정태호 전 대통령비서실 일자리수석비서관(서울 관악을 후보)를 방문해 지지를 호소했고, #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장관(대구 수성갑) 지원에 나선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 그러나 이 4명 중에서 정태호 전 일자리수석만 당선되었다.
2022년 지방선거에서 충북도지사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설이 돌았다.[12] 그러나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이 출마를 준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부총리 시절 노영민 실장과 가까운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충북도지사 출마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나왔다.
미래통합당에서는 "국회 안에서는 김동연을, 국회 밖에서는 윤석열을 당의 대권주자[13]로 밀자"라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 그러나 본인이 스스로 "저는 문재인 정부 초대 부총리"라고 밝히며 당시 자유한국당의 영입 의사를 일찍이 일축한 적이 있고, # 상기한 바와 같이 21대 총선에서 정태호 의원, 김부겸 전 장관 등 민주당의 여러 후보를 지원하는 등 민주당과 가까운 행보를 3년 가까이 지속한 상황이라 미래통합당 입당을 자신의 차후 행보로 선택할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14]
2020년 9월 21일 자신이 설립한 '소셜 임팩트 포럼'의 출범식을 열었다. #
2021년 1월 여당의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여당 후보로 영입되어 출마할 것이라는 설이 돌고 있다. # 그러나 1월 18일 불출마를 시사했다. 당시 박영선 장관이 수차례 찾아와 출마를 권유했지만 고사했다고 전해진다.
7. 대선 출마와 사퇴
2021년 6월 20일 안동 강연회에서 국가 운영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는데, 사실상 대권 출마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 이후 6월 22일에는 "재정과 경제를 정치에 휘둘리게 해선 안된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경제적 타격과 피해는 계층과 직역에 따라 다르다", "직접 피해를 당한 사람을 분명히 (구분)해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해야한다"며 민주당의 보편적 현금지원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냈고, 대신 기회복지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정권에 각 세운다고 국가경영 잘 하겠나?", "청와대와도 치열한 논쟁을 벌였지만 정치를 할 목적으로 대립각을 세운 적은 없었다." 라며# 윤석열 전 검찰총장, 최재형 전 감사원장을 직격하는 발언을 했다.
2021년 7월 28일, <김동연의 금기깨기>라는 제목의 국가비전을 담은 책을 출간했다#. 저서는 과거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좌절, 국가과잉·격차과잉·불신과잉으로 인한 분열·갈등 사회로 치닫는 현실과 이런 모순을 만들어내는 승자독식구조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진영논리를 넘어 대한민국 미래의 발목을 잡는 '금기'를 깨야 한다는 소신대로 추격경제의 금기, 세습경제의 금기, 거품경제의 금기 등을 비판하며 "금기를 깨지 못하면 미래는 어둡다"고 김 전 부총리는 강조했다.
2021년 8월 18일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연대 제안을 "세 유불리나 정치 공학 따라 움직이지 않을것"이라며 거절했다.#
2021년 8월 20일 본인의 고향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화하였다.#
2021년 9월 8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출마선언에서는 기득권공화국을 기회공화국으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2021년 10월 24일 새로운물결 창당을 선언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김종인 국민의힘 전 비상대책위원장, 배진교 정의당 원내대표, 홍영표 전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김관영 전 바른미래당 원내대표 등 여야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2021년 11월 8일 국민의 힘 윤석열 후보가 자신의 슬로건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 윤석열 후보는 대선 후보 경선결과 발표일 읽은 후보 수락연설문에서 “내년 3월 ‘기득권의 나라’ 에서 ‘기회의 나라’로, ‘약탈의 대한민국’에서 ‘공정의 대한민국’으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2022년 2월 2일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와 1대1 토론회를 가졌다. 해당 대선 첫 후보자 간 토론회이다.
2022년 2월 13일에는 경기도 과천시에 있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방문하여 대선 후보로 등록하면서 완주 의사를 천명했다.#
2022년 2월 14일에 KBS 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야에 출연하였다.#
2022년 2월 22일에 열린 비초청 후보 토론회에 조원진과 함께 불참했다.[15]
2022년 2월 24일에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 정의당 심상정 후보와 함께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다당제 및 통합정부 제의를 받았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2022년 3월 1일, 이재명 후보와 회동하며 정치 교체에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이튿날 3월 2일에 후보직을 사퇴하며 이재명과 단일화하였다.
이재명 후보가 승리할 경우를 가정해 국무총리이나 차기 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후보 등 요직을 두고 하마평에 올랐으나 3월 9일 개표 결과,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인이 민주당 이재명 후보에게 0.7%p 차로 승리하면서 무산되었다. 다만 대선 직후 인터뷰에서 이재명 전 지사와의 단일화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고 밝혔다.[16]
8.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출마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김동연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후보 TV광고 |
2022년 6월 1일 열릴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범야권의 서울특별시장이나 경기도지사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다.[17] 김동연 대표 역시 3월 15일, YTN 인터뷰를 통해 서울시장이나 경기지사 출마 제안을 여러 곳에서 받아 고심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서울, 경기 중 고심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겨 출마는 사실상 확정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일부 더불어민주당 인사들이 김동연을 기회주의자나 제2의 윤석열(...)로 몰아가며 견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
3월 29일, 김동연 대표가 이끄는 새로운물결이 전격적으로 더불어민주당과 합당하기로 함에 따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당적을 가지고 출마에 도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3월 30일에는 윤호중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과 합당 등 현안 논의를 위해 회동했다.#
3월 31일,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공식 선언했다. 이 자리에서 김 대표는 자신의 승리가 윤석열 정부가 독선의 길로 빠지지 않도록 견제하는 역할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날 출마선언에는 이재명계 핵심 인물인 정성호, 김병욱 의원이 참석했는데 이를 고려한다면 이재명계가 확실히 김동연 대표를 밀어주는 모양새로 보인다.#
4월 15일, 새로운물결이 더불어민주당과 최종 합당하면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이후 당 경기도지사 경선에 참여하여 안민석 의원, 조정식 의원, 염태영 시장과 4자 경선을 치르게 됐다. 경선 룰과 관련하여 갈등[18]이 있자 당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밝혔다.#
4월 21일 진행된 경선 토론회에서 이명박 정부 및 박근혜 정부에서 근무한 이력, 제20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당시 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공약을 비판했던 점 때문에 다른 후보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다.#
4월 25일 발표된 경선 결과, 김동연 전 부총리가 과반인 50.67% 득표율을 기록하여 결선 투표 없이[19] 민주당의 경기도지사 후보가 되었다.#
5월 1일, 수원 공군기지와 성남 서울공항을 모두 이전해 '경기국제공항'을 추진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5월 2일, 윤석열의 경기도 방문을 '노골적 선거개입'이라고 비판했다.
여론조사를 하면 1개는 김동연이 1개는 김은혜가 이기는 정도로 김은혜와의 승부는 박빙인 상황이 이어졌다. 실제로 양 후보 중 한 명이 오차범위 밖으로 이기는 여론조사는 거의 없었다.
8.1. 대역전극의 주인공
6월 1일 투표 종료 직후 발표된 방송3사 출구조사 결과 48.8%를 득표할 것으로 예측되어 49.4%를 득표할 것으로 예측된 국민의힘 김은혜 후보에게 0.6%p 차이로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개표 과정 초반 5만 표 이상 크게 밀리다가 이후 차차 격차를 좁혀갔지만 득표율이 아닌 순 득표차로는 3만 2~3천 표차 즈음에서 좀처럼 더 이상 줄이지 못했고, 연이어 김은혜 후보에게 유리한 개표 결과가 이어지면서 MBC는 오전 2시 무렵 일찌감치 김은혜 후보에게 당선 유력 판정을 내리기도 했다.그러나 3만 2~3천 표차 정도에서 안정적으로 유지되나 싶던 두 후보의 표차가 이튿날 오전 4시 경부터 경기도 서부 지역의 사전투표 개표 본격화를 시작으로 갑자기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시점에선 개표가 비교적 느렸던 부천시의 민주당 표 vs 분당구+포천시+양평군의 국민의힘 표 중 어느 쪽이 더 큰 영향을 줄지 설왕설래가 많았는데, 급기야는 10,000여 표차까지 줄어든 4시 55분경 가장 먼저 김은혜 후보의 유력 판정을 내렸던 MBC가 유력 판정을 번복했고 이쯤에서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인 분당구 개표가 거의 마무리되며 김동연 후보의 추격 속도가 한층 빨라졌다.
결국 개표 96.6% 시점, 5시 32분에 골든 크로스가 일어나며 처음으로 김동연 후보가 김은혜 후보를 앞질렀다. 역전 직후에는 양평군 표가 빠르게 개표되며 김은혜 후보가 다시 바싹 붙었지만,[20] 이후 부천시와 고양시, 안양시, 화성시, 의정부시의 사전투표함이 열리면서 급속도로 표차를 벌리기 시작했고, 끝내 오전 7시 무렵 개표율이 99.2%를 달성했을 때 기존 판정을 뒤집고 KBS 기준 '당선 확실'을 받아내며[21] 결국 최종적으로 8,913표 차이로 지방선거 역사에 남을 대역전극의 주인공이 되어 제36대 경기도지사에 당선되었다.
이로써 김동연은 더불어민주당 텃밭으로 분류되는 호남권과 제주도를 제외한 더불어민주당 유일의 광역자치단체장이 되었는데 특히 사실상 양당의 경합 지역으로 분류되는 수도권과 충청권에서는 유일하게 출구조사 열세를 뒤집고 승리한 더불어민주당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인이 되었으며[22] 또한 광교신도시에 위치한 경기도청 신청사에 입주한 첫 경기도지사가 되었다.[23] 더불어서 역대 광역자치단체장 당선자 중 최소 득표율차 당선인[24][25][26]이라는 타이틀도 따냈다.
9. 제36대 경기도지사
자세한 내용은 김동연/생애/경기도지사 문서 참고하십시오.[1] 빠른 57년생이니 56년생과 동기로,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은행원이 된 것이다.[2] 당시 서경대학교는 야간 4년제 국제대학이었다. 종합대학인 서경대학교로 바뀐 것은 1988년 성한학원 인수 이후.[3] 당시 수석이었다고 한다.[4] 첫 해에는 두어 문제를 수정을 하지 못한 채 답안지를 제출해 1차에서 아쉬운 점수 차이로 낙방하고, 두 번째 해에는 국민윤리와 헌법은 점수가 양호했으나 세 번째 시험인 행정법 시험이 끝난 뒤 실수로 답안지를 가방에 넣고 점심을 먹으러 가는 바람에 실격처리가 되었다. 시험 감독관이 부정처리를 할 수도 있었으나 답안지 표지에 시험문제를 푼 것이 증거가 되어 단순경고만 받고 풀려났다고 한다. 본인이 회고하길, 법학을 전공하던 사람이라 행정법은 자신 있는 과목이었다고 한다.[5]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 사무관[6] 입법고시의 임용 시기가 행정고시보다 조금 빨라, 양과 합격자는 잠시 국회사무처에서 근무하다 행정부로 옮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역시 잠시 예결특위 입법조사관으로 일하다 경제기획원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7]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박사과정으로 바로 진입할 수 있으며 1년차를 마치고 실시하는 박사 퀄 시험을 통과하면 박사과정으로 쭉 이어지지만 이걸 통과하지 못하면 석사까지만 하고 졸업한다. 한국의 석박통합 제도와 비슷하여 석사박사를 한 로드로 쭉 취득할 수 있다.[8] 대통령비서실/국가안보실을 제외하면 행정부 최강의 기관이라 할 수 있다. 대검찰청, 국가정보원, 감사원, 국세청도 여기 앞에선 한 수 접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이유는 모든 국가예산은 행정부, 특히 기획재정부 예산실에서 총괄하는데 제 아무리 권력기관이거나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도 예산만큼은 기재부가 편성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9] 왼쪽의 인물은 당시 안전행정부장관이었던 유정복 인천광역시장이다. 두 사람은 훗날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각각 인천시장과 경기지사로 동반 당선되었다.[10] 그 결과 중 대표적인 것이 해외주식 소수점 투자 되시겠다. 금융관계법령 중 일부의 적용을 유예하는 ‘혁신금융서비스’를 김동연 당시 부총리가 도입한 덕분.[11] 신재민의 의견에 반박의 가까운 의견을 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자유한국당에서도 김동연 전 부총리를 비판했다.[12] 이시종 현 충북도지사는 이미 3선이어서 더 이상 출마할 수 없다.[13] 현실 정치 경험이 부족한 두 인물 같은 경우에 단번에 대권주자로 올라서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일 수밖에 없다. 굳이 간다고 해도 종국에는 다른 후보들을 위한 들러리로 이용될 여지가 많다.[14] 참여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던 김장수가 한나라당으로 입당하고 비례대표에 당선되면서 안팎으로 비난을 받은걸 생각하면, 미래통합당으로 입당하기에는 지극히 부담스러운 상황이다.[15] 군소후보 토론회에 나온 사람들은 허경영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번 대선을 통해 떠올라 일반인들에게 각인된 사람이 없다. 반면 김동연 후보는 부총리를 지낸 고위급 인사고 조원진 후보도 TK에서 터를 닦은 3선 중진이라 중량감이 높은 사람이다보니 대선 기간 동안 한 번밖에 안 열릴 정도로 사람들이 관심도 덜 가질 군소후보 토론회에 참여하는 것보다 지방 순회 선거운동을 하면서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다니는 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들을 했기 때문에 불참한 것이다. 오준호 후보도 이를 눈치채고 "오늘 불참하신 두 분은 아직도 본인이 고위급 관료인 줄 알고 아직도 본인이 국회의원인 줄 아는가봅니다."라고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16] 단일화로 인해 더불어민주당에 합당되어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지사 경선 후보에서 1위로 선출되었고,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1위로 경기도지사에 당선과 동시에 더불어민주당 참패 속 경기도를 따냈고 유력 대권주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에 이는 김동연에게 탁월한 선택이 되었다.[17] 지난 대선에서 단일화했던 더불어민주당에서도 정치 혁신 차원에서 김 대표의 출마를 지원하겠다는 목소리가 있다.[18] 당 외부 출신인 김동연 전 부총리는 완전국민경선을, 민주당 소속 다른 후보들은 기존 경선 방식(당원 50%-여조 50%) 고수를 주장했다.[19] 김동연 전 부총리 50.67%, 안민석 의원 21.61%, 염태영 전 수원시장 19.06%, 조정식 의원 8.66%[20] 실시간으로 무려 52표차까지 좁혀졌다가 다시 800여 표로 벌려졌고, 이후 다시 좁혀지는 일은 없었다.[21] KBS의 디시전K 기준으로 직전에 '유력'이 뜬 단계에서 김은혜 후보가 빠르게 패배 승복 선언을 했고, 김동연 후보는 '확실'이 뜬 후에 승리 감사 인사를 했다.[22] 똑같이 출구조사에서 경합으로 결과가 나온 허태정 대전시장, 이춘희 세종시장은 끝내 역전에 실패한 채 각각 이장우 당선인과 최민호 당선인에게 패했다.[23] 참고로 김동연 본인이 총장을 지냈던 아주대학교가 인근에 있다.[24] 0.15%p. 표수로는 8,913표인데, 2,252표차로 당락이 갈린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선거가 있기에 '최소 표차 당선인'이라는 타이틀까지는 아니다. 지방선거가 아닌 재보궐선거까지 포함하면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직후 열린 2012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세종특별자치시장 선거에서 2,038표차로 당락이 갈렸다. 하지만 이 지역들보다 수십 배의 인구를 가진, 무려 1400만명이 거주하는 거대 광역자치단체에서 1만 표도 안 되는 표차로 신승한 것도 나름 진기록이다.[25] 기존 최소 득표율차 기록은 2010년 5회 지선 서울특별시장에서 오세훈 후보가 한명숙 후보를 상대로 승리했던 0.6%p이다.[26] 20대 대선 당시 이재명 전 경기도지사가 경기도에서 약 5%p 차이로 윤석열 후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에 비하여도 훨씬 더 박빙인 승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