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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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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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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c5b356> 고구려 제6대 국왕
태조대왕 | 太祖大王
파일:칠성산 871호분.jpg
태조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칠성산 871호 전경.
출생
(음력)
<colbgcolor=#fff,#1f2023>47년[1]
고구려 국내성
사망
(음력)
121년 / 165년 3월[2] (향년 74세 ~ 118세)
고구려 국내성 별궁(國內城 別宮)
능묘 칠성산 871호 (추정)
재위기간
(음력)
고구려 제6대 국왕
53년 11월 ~ 121년 / 146년 12월[3] (68년 ~ 93년 1개월)
고구려 상왕
146년 12월 ~ 165년 3월 (18년 3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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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고(高)
궁(宮)
부모 부친 고재사 / 대무신왕(?)[4]
모후 부여태후
형제자매 동생 고수성, 고백고
왕후 제1왕후[5], 제2왕후[6][7]
자녀 사자 고수성[8]
왕자 고막근, 고막덕, 고백고[9], 고인고?[10]
아명 어수(於漱)[11]
묘호 태조(太祖)(?)[12][13]
시호 태조대왕(太祖大王)
국조왕(國祖王) }}}}}}}}}
“나는 너무 늙어 만기(萬機)에 귀찮음을 느낀다. 하늘의 역수가 네 몸에 있다. 게다가 넌 안으로는 국정에 참여하고 밖으로는 군사를 총괄하니 오랫동안 사직에 공을 쌓았다. 신민의 소망을 채웠으니 내가 부탁할 인물을 얻었다고 가히 이를 수 있다. 너로 하여금 즉위하게 하니, 영원히 영광을 누릴 것이다!”
"吾旣老倦於萬機 天之曆數在汝躬 況汝內參國政 外摠軍事 久有社稷之功 允塞臣民之望 吾所付託 可謂得人 作汝其卽位 永孚于休!"
삼국사기》에서 태조대왕이 아우 고수성에게 전한 양위의 말.

1. 개요2. 생애3.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 태조대왕의 나이와 관련된 문제
3.1. 중국 측 기록과의 충돌3.2. 왕계 교체설3.3. 학계의 정설
4. 기타5. 《삼국사기》 기록6. 대중매체에서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고구려 제6대 왕.

고구려 왕조의 중시조에 해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태조왕'이 아니라 태조대왕(太祖大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대왕'으로 표기된 군주는 제6대 태조대왕(太祖大王), 제7대 차대왕(次大王), 제8대 신대왕(新大王) 세 명 뿐이다. 그 세 명의 명칭[14] 때문에 이 시기에만 '대왕'이라는 말이 공식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지만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15]

'태조'를 붙였다는 점에서 묘호와 얼추 비슷해 보이기도 하는데 《삼국사기》에 차대왕에게 양위한 태조왕 본인이 자신을 '태조대왕'이라고 자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묘호는 본인이 죽은 뒤에 붙이는 것이므로 그가 살아있을 때 태조라고 했다면 엄밀히 말해 중국식의 묘호는 아니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묘호가 아니라 묘호와 비슷하게 지은 호칭이며, 후에 이 호칭이 시호로 굳어진 것이라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본래 묘호로 붙인 것이었는데 《삼국사기》를 지을 고려시대 중반에는 저렇게 알려진 것일 수도 있고, 본인이 스스로 저렇게 부른 호칭이 시호만이 아니라 묘호도 되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각주에는
'태조대왕 또는 국조왕(國祖王)이라고 불렀다.'
라고 각주를 달아놨기에 태조대왕이 아닌 국조왕이 실제 호였을 개연성도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대왕조-, -차대왕조-, -신대왕조-에서는 이 세 명 모두를 형제 관계라고 했다. 그러나 같은 《삼국사기》에서도 신대왕의 아들인 -산상왕조-에서는 산상왕을 태조대왕의 증손이라고 했다.[16]

중국측 역사서인 범엽의 《후한서》나 진수의 《삼국지》에 따르면 차대왕은 태조대왕의 아들이었다. 또한 《삼국지》는 신대왕을 다시 차대왕의 아들로 기록했다. 그런데 위진남북조시대의 역사서인 《북사》에서는 동천왕이 태조대왕의 증손으로 기록되어 있다.[17]

일단 신채호는 《후한서》, 《삼국지》, 《북사》 등의 기록을 채택해 차대왕과 신대왕 모두 태조대왕의 서자로 추측했다.

후한서》는 태조대왕의 외모를
"장성함에 용맹스럽고, 건장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했다."
라고 기록했다.#

2. 생애

《삼국사기》에 의하면 태조대왕은 제2대 유리명왕의 아들이자 제3대 대무신왕의 동생인 고재사의 아들로, 태어나자마자 눈을 떠 주변을 둘러봤다고 한다. 사실 모본왕(제5대)이 두로에게 시해당한 이후, 왕위에 추대된 건 고재사였지만 재사는 자신이 나이가 많다고 사양해 그의 어린 아들이 즉위했다.

당시 태조대왕은 10세도 안 되는 나이였기에 초기에는 어머니 부여태후섭정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장성한 후에는 자주 한나라의 변경을 유린했다고 한다.[18]

고구려 초기 최고의 정복 군주들 중 한 명으로 당시 고구려의 서쪽과 서남쪽에는 요동군낙랑군 같은 만만찮은 중국 지방 세력이 있었기에 그의 재위 초기에는 서쪽 대신 주로 동쪽과 동남쪽의 소국들을 병합해 고구려의 크기를 확대시켰다. 56년 동옥저 병합, 68년 갈사국 항복, 70년 조나국 병합, 72년 주나국 병합으로 영역을 크게 확장시켰으며 두만강 너머 책성, 남해(동해안 연안), 부여 지방을 순수하여 병합한 영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즉위하고 50여 년이 지난 재위 후반기쯤부터는 국력이 쌓이고 자신감이 생겼는지 통일제국인 후한(25년~220년)과도 피터지게 싸우기 시작했다. 후한군를 막기 위해 요서에 10개 성을 쌓기도 했는데, 일각에서는 요동을 확보해야 요서 10개 성 축성이 가능하다며 고구려가 이때 이미 요동을 확보했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통설은 아니다. 요서와 요동은 북방의 초원 및 고비 사막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북쪽으로 돌아서 간다면 요동을 완전히 장악해야만 요서를 공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05년에 요동의 요새 지역으로 들어가 6개 현을 공격했다가[19] 가을 9월에 요동태수 경기(耿夔)에게 격파되었다.

112년에는 예맥현도군 등을 공격했으며 118년에는 예맥과 함께 현도군 및 낙랑군 화려성을 공격했다. 태조대왕이 노쇠한 이후에는 고수성이 병권을 잡고, 이곳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위상을 높였다.

121년에는 후한의 침공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후한에서 유주자사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 등을 내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자, 태조대왕은 고수성을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여 후한군을 방심하게 만든 뒤 험한 곳에 자리잡고,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000명의 군사로 현도와 요동을 습격해 후한군 2,000여 명을 죽였다. 여름 4월에는 선비족 8,000명과 함께 요동을 재차 공격해 이에 맞선 요동태수 채풍이 추격하자 신창현에서 싸우다가, 채풍을 몸으로 호위하던 공조연 용단과 병마연 공손포 등을 죽이고 채풍까지 죽였다.

변방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요동태수를 사살하는 큰 전공을 세운 기세로 같은 해 12월에는 마한예맥의 수천 기병을 인솔해 현도를 포위했다. 그러나 북쪽에서 부여의 왕자 위구태가 현도를 구원할 지원군 20,000명을 이끌고 내려와 고구려군의 포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태조대왕의 치세때부터 시작된 요동 등 서쪽으로의 진출은 고구려의 기본 전략이 되었고, 훗날 제15대 미천왕 때 다시 시작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146년고수성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후 약 19년 뒤 별궁에서 118세의 나이로 승하했다고 한다. [20] 상식적으로 너무 장수했기 때문에 태조대왕의 수명에 대한 기록은 오늘날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국조'라는 호와 '태조'라는 범상치 않은 묘호(?)를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후대의 고구려인들은 그를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세웠거나 혹은 기틀을 다진 왕으로 보았던 듯하다. 이를 묘호가 아니라고 단정하는 의견도 있는데 묘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만도 없다. 고구려에서 태조대왕 이전의 군주들은 실제로는 추존 왕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21]# 예를 들어 진흥왕 순수비에는 '태조'를 언급하고 있고[22] 문무왕릉비김인문 묘비 등의 신라 금석문에는 태조 성한이라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신라의 '시조'라고 말하고 있으며, 무열왕의 묘호를 당나라가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태종'으로 올렸다. 일본측 기록인 《속일본기》에는 백제에서 도모왕(都慕王)을 '태조'라고 불렀다고 하니 고구려의 태조대왕도 이런 의미일 수 있다. 참고로 '조'나 '종'으로 끝나는 묘호는 당나라 이전에는 아무 군주한테나 올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 이전의 한반도 왕조도 묘호를 함부로 올리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인데다가 현재는 기록까지 많이 없어졌으므로, 원래 얼마 없던 묘호의 흔적을 더욱 찾기 어렵다.

3.삼국사기》 초기 기록에서 태조대왕의 나이와 관련된 문제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만 보면 태조대왕은 서기 53년에 만 6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146년에 왕위를 고수성에게 물려줄 때까지 무려 93년 동안 왕위에 있었다. 그 후에도 19년을 더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이것이 만약에 실제라면 대단히 장수한 셈이다.[23] 사실이라면 이집트 고왕국 시대 제6왕조의 파라오 페피 2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 재위한 인물이다. 《삼국사기》가 아니라 《후한서》 등 당대 중국 기록을 기준으로도 재위기간만 68년에 74세에 죽었어도 고대 세계에서는 충분히 장수한 것이었다. 그런데 만 118세라는 수명은 현재 기록된 기네스 세계 기록(《기네스북》) 남자 최장수 수명(116세)보다도 2년이나 길며, 《기네스북》에 공인된 최장수 인물인 잔 루이즈 칼망의 122년과 불과 4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현대 의학위생 관념이 부재하던 2,000년 전의 인물이 이 정도 수명을 누렸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물론 장수인들의 가족을 보면 직계 가족 역시 장수하는 경향이 있어서 이를 초장수인의 실제 장수 여부를 판별할 때 뒷받침하는 용도로 쓸 정도긴 하고, 태조대왕의 형제들도 상당히 오래 산 편이기는 하나 태조대왕의 118년 수명은 그런 것을 감안해도 여전히 비현실적인 수준이다.

고구려 왕의 나이 문제는 태조대왕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조대왕의 뒤를 이은(《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의 동생인) 차대왕71년에 태어나서 75세에 왕위에 올랐으며,(《삼국사기》에 따르면 동생인) 신대왕89년에 태어나서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70대인 사람이 왕위에 오르는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형제간에 나이 차이가 43년까지 벌어진다는 것도 이상하다.[24] 이복형제라고 둘러댈 경우 말이 되기는 하지만 삼형제의 아버지로 전해지는 고재사의 기록도 이상하다. 모본왕두로에게 시해당한 후 유리명왕의 아들인 고재사가 자신이 연로하다며 사양해서 어린 아들인 태조대왕이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 기록부터 의문인데, 당시 고구려는 부자 상속이 아닌 형제 상속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고재사가 즉위할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25] 고재사의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고재사보다 형이었을 대무신왕 무휼이 서기 4년에 태어났으므로 서기 53년에 고재사는 50세가 되지 않은 나이였을 것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고재사의 아들로 나오는 차대왕과 신대왕은 각각 서기 71년과 89년에 태어났다고 했기 때문에, 연로하다면서 왕위를 어린 아들인 태조대왕에게 양보한 고재사가 그로부터 20년~40년 후까지 더 살아서 아들을 낳은 셈이다. 유리명왕이 서기 18년에 승하했으므로 신대왕이 태어났을 때 고재사가 살아있었다면 최소 71살이고, 모본왕이 시해되었을 때 35세인 젊은 사람이 스스로 연로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현실적인 나이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원래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초기 군주들의 수명이 비상식적으로 길다는 문제가 공통적으로 나타남을 감안해도, 군주들의 수명이 너무나도 현실적이라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에 비해 비교적 신뢰를 얻고 있는 〈고구려본기〉에서[26] 특정한 시간대에 연속해서 왕들의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문제로 이 시기만큼은 백제나 신라 기록보다도 불신도가 더 높은 편이다. 이 때문에 후대에 신라 중심 사관으로 역사를 쓴 김부식이 고구려의 연대를 줄이기 위해 초기 왕들을 합쳤다는 의혹이 조선 시대부터 제기되었다.[27]

남당 박창화도 태조대왕의 나이를 의심하여, 그의 소설 《남당유고》에서 태조대왕의 치세 앞쪽을 고재사가 재위한 기간으로 분리해놓았다.

아마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참고한 《해동고기》의 내용에 몇 가지 오류가 있었을 듯 하며, 후대에 태조대왕의 기록을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제20대 장수왕도 97세까지 장수했다고 하고, 동시대 인물인 명림답부도 만 112세까지 살았다고 하니 김부식 입장에서는 "저렇게 오래 살았다는데 삼형제 설이 틀렸다고 할 수 있나"라고 생각할 건덕지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장수왕의 긴 수명은 교차검증할 수 있었던 반면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명림답부 등에 대한 것은 기록끼리 충돌이 있다. 때문에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3.1. 중국 측 기록과의 충돌

《삼국사기》와 달리 《후한서》에서는 태조대왕이 왕위에 오른지 69년만에 승하했고, 아들인 고수성이 왕위에 올랐다고 되어 있다. 기록의 차이에 대해서는 김부식도 〈고구려본기〉-태조대왕조-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후한서》에 이렇게 쓰여 있다. 안제(安帝) 건광(建光) 원년(121년)에 고구려 왕 궁이 죽어 아들인 수성이 왕위에 올랐다. 현도태수 요광이 아뢰기를 ‘그들이 상(喪) 을 당한 것을 타서 군사를 내어 공격하려고 합니다.’고 하니, 의논하던 자들이 모두 허락할 만하다고 여겼다. 상서(尙書) 진충(陳忠)이 말했다. ‘궁이 전날에 교활하게 굴 때는 (요)광이 토벌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공격하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마땅히 사람을 보내 조문하고, 이전의 죄를 책망하되 용서하여 죽이지 말고, 뒤에 잘되는 쪽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안제가 그 말을 따랐다. 다음해에 수성은 한나라의 산 포로를 돌려보냈다.』 《해동고기》(海東古記)를 살펴보면 이렇게 쓰여 있다. 『고구려 국조왕(國祖王) 고궁(高宮)은 후한 건무(建武) 29년(서기 53년) 계사(癸巳)에 즉위했는데, 이때 나이가 7세여서 국모(國母)가 섭정했다. 효환제(孝桓帝) 본초(本初) 원년 병술(丙戌)(146년)에 이르러 친동생인 수성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이때 궁의 나이가 100세였으며 왕위에 있은 지 94년째였다.』 그러므로 건광 원년은 궁이 재위한 지 69년째되는 해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 적힌 것과 《고기》는 달라 서로 합치되지 않는다. 《(후)한서》의 틀린 것이 어찌 (이와 같은가?)】
《삼국사기》 제15권 〈고구려본기〉 제3 -태조대왕조-'
자치통감》에서는 122년의 기사에서, 태조대왕의 뒤를 이은 고수성을 고구려 왕으로 표기하면서 차대왕이 한족 가운데 살아있는 자들을 돌려보내고, 현도에 와서 항복했으며, 이후 예맥이 따라서 항복해 동쪽 변방에는 사건이 적어졌다고 서술했다.

그런데 태조대왕의 재위기간과 연령문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검토한 노태돈은 《고구려사 연구》에서 정작 《후한서》의 이 기록에 대해 왕계에도 오류가 있는 중국 기록을 그대로 믿을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3.2. 왕계 교체설

아버지 고재사의 연령 문제에 대해서는 태조대왕부터 해씨가 아닌 고씨가 왕위에 올랐다는 점, 《삼국사기》에 태조대왕을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한다고 기록한 점[28] 등을 들어 태조대왕은 사실 유리명왕과 혈연 관계가 없는 새로운 왕조의 시조이며, 이전의 왕과 무리하게 혈연 관계를 주장하다가 설정오류가 생긴 것이라는 주장[29]도 있다. (노태돈의 견해)

유리명왕이 해씨 성을 사용했다는 점을 들어 아예 초대 왕 고추모(동명성왕, 추모왕)와 제2대 왕 해유류(유리명왕)가 혈연 관계가 아니었고, 이후 모본왕이 실각한 뒤 추모왕의 후손인 고재사의 아들 고궁이 왕위에 올라 계루부의 왕위가 다시 이어졌다고 보는 설도 있다.(해씨 고구려설 참조.) 이런 의심을 가능케 하는 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유리왕~모본왕까지 4명의 왕을 기록할 때 꼬박꼬박 성은 해씨이다. 라고 기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성에 대한 기재가 생략된 것이 태조대왕 때부터였다. 제17대 소수림왕의 경우, 소수림왕 옆에 '소해주류왕'과 '해미류왕'이라는 표기를 병기했으나, 굳이 성이 해씨라고 짚어 기재하지는 않았다. 참고로 동명성왕 고주몽의 경우, 부여 왕가에서 자라긴 했지만 고구려 관련 전승에서 부여 왕가의 조상뻘이 될 수도 있는 해모수의 자손이라고 했지, 부여 왕가의 자손이라고 언급한 건 단 한 건도 없다. 유리계와 주몽계가 다른 계보라는 학설은 여호규 교수의《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 신형식 교수의《고구려사》또한 제기한 바 있었다.

3.3. 학계의 정설

노태돈의 《고구려사 연구》에서 제기된 설을 토대로 하는 학설로, 제2대 유리명왕부터 제5대 모본왕까지의 왕가는 주몽계 및 태조대왕 이후의 왕가와 별개의 계통이었는데, 모본왕이 피살당한 후 긴 왕권 다툼이 발생해 최종적으로 주몽~신대왕(제8대)계로 왕가가 바뀌었고, 후대에 인위적으로 여러 왕계를 하나로 연결하면서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 등의 수명과 재위기간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난 것이라는 주장이다. 출처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을 여호규 교수의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에서 최근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다.

단 이 왕가 교체가 연노부(소노부)와 계루부 사이에서 일어난 것인지, 아니면 계루부 내부에서 일어난 것인지는 논쟁이 있다. 노태돈은 이 왕가 교체가 연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가 교체와는 별개로 계루부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봤다. 사실 연노부에서 계루부로의 왕가 교체부터가 이론이 많은데,
  • 제1대 동명성왕의 치세때 벌어진 비류국 세력의 귀순이 연노부와 계루부 사이의 왕계 교체라는 설(정설).
  • 제5대 모본왕에서 제6대 태조대왕으로의 왕가 교체가 연노부와 계루부 사이의 왕계 교체라는 설.[30]
  • 연노부와 계루부 사이의 분화가 제10대 산상왕 시기에 일어났다는 설[31]
이 있다.

그렇다면 태조대왕은 언제 출생하고 언제 사망했을까? 학자들 대부분은 《후한서》의 121년 태조대왕 사망 기록을 신뢰한다.[32] 이유는 《후한서》에 나타난 태조대왕의 사망 소식 전달부터 고구려로 사신을 파견하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자세하다는 점, 태조대왕의 죽음을 알린 인물은 태조대왕과 여러번 싸운 인물로서 고구려에 대해 잘 알았으며, 장례식에도 직접 참여했다는 점, 중국이 다른 나라의 왕계에 대해서는 종종 부정확하게 기록하지만 기년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기록한다는 점, 중국에서 굳이 죽지도 않고 장례식도 없었는데 조작할 이유가 없다는 점, 121년부터 146년까지 《삼국사기》 -태조대왕조- 후기 기사가 부자연스러우며 조작으로 보인다는 점 등이 있다.

또 출생년도의 경우, 정확하게 비정하기는 어렵지만 서기 98년 책성 순수 기사를 기준으로 서기 75년~85년 사이로 비정하고, 즉위년도는 80년~90년 사이로 비정하는 견해가 많다. 중국에선 태조대왕과 전쟁을 벌일 때 태조대왕이 '장성'했다고 표현했는데, 기존 생년대로라면 이 시점에서 나이가 무려 59세나 되어 표현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4. 기타

태조대왕 때 중국으로부터 꿀벌을 가져와서 기르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양봉 관련 최초의 기록이라는 정보가 인터넷에 떠도나 그 출처는 불명이다.

5.삼국사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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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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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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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태조대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태조왕이 즉위하다
三年春二月 요서에 성을 쌓아 후한의 침략에 대비하다
三年秋八月 남부 지방이 해충으로 곡식이 피해를 입다
四年秋七月 동옥저를 정벌하고 영토를 넓히다
七年夏四月 붉은 날개가 달린 흰 물고기를 얻다
七年秋七月 국내성 지역에 큰 홍수가 나다
十年秋八月 사냥을 나가서 흰 사슴을 잡다
十年秋八月 남부 지방이 풀무치 피해를 입다
十六年秋八月 갈사국 의 손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다
十六年冬十月 겨울에 천둥이 치다
二十年春二月 조내를 정벌하다
二十年夏四月 국내성에 가뭄이 들다
二十二年冬十月 주내를 정벌하다
二十五年冬十月 부여가 신기한 사슴과 토끼를 바치다
二十五年冬十一月 국내성 일대에 눈이 많이 내리다
四十六年春三月 책성을 순수하고 돌아오다
四十六年冬十月 책성에서 국내성으로 돌아오다
五十年秋八月 사신을 보내 책성 지역의 민심을 안정시키다
五十三年春一月 부여가 호랑이를 바치다
五十三年春一月 요동을 침략하였으나 요동 태수에게 패하다
五十三年秋九月 요동 태수 경기가 맥인을 쳐부수다
五十五年秋九月 자주색 노루를 잡다
五十五年冬十月 동해 곡수가 붉은 표범을 바치다
五十六年 가뭄으로 농작물을 거둘 수 없어 백성이 굶주리다
五十七年春一月 후한에 사신을 보내다
五十九年 현도군에 속하기를 청하다
六十二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二年秋八月 남해 지역을 순수하다
六十二年冬十月 남해에서 돌아오다
六十四年春三月 일식이 일어나다
六十四年冬十二月 눈이 많이 내리다
六十六年春二月 지진이 일어나다
六十六年夏六月 현도군을 공격하다
六十六年秋七月 황충과 우박 피해를 입다
六十六年秋八月 현명하고 착한 사람을 천거하게 하다
六十九年 후한이 침략해왔으나 수성이 이를 막다
六十九年夏四月 고구려가 후한 요대현을 공격하다
六十九年冬十月 태후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불쌍한 백성들을 위로하다
六十九年冬十月 숙신에서 사신이 오다
六十九年冬十一月 수성에게 나라 일을 맡기다
六十九年冬十二月 후한 현도성을 공격하여 포위하다
七十年 후한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부여가 후한을 도와 실패하다
七十一年冬十月 좌보와 우보를 임명하다
七十二年秋九月 일식이 일어나다
七十二年冬十月 후한에 조공하다
七十二年冬十一月 국내성에 지진이 일어나다
八十年秋七月 수성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건의하다
八十六年春三月 수성이 질양에서 사냥하다
八十六年秋七月 수성이 동생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다
九十年秋九月 환도에 지진이 일어나다
九十年 표범이 호랑이 꼬리를 물어 끊는 꿈을 꾸다
九十四年秋七月 수성이 왕위를 도모하려다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을 죽이다
九十四年秋八月 서안평을 공격하다
九十四年冬十月 우보 고복장이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말도록 건의하다
九十四年冬十二月 태조가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다

재위 초반부는 부여태후의 섭정 기간이고, 재위 69년차부터는 이게 태조대왕의 기록인지 차대왕의 기록인지 모를 지경이다.

6. 대중매체에서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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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칠성산 8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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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삼국사기》의 기록이다.[2]삼국사기》의 기록이며, 《후한서》에서는 121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현재는 사실상 후자가 정설로 여겨진다.[3]삼국사기》의 기록이며,《후한서》에서는 마지막 재위연도를 121년으로 기록하고 있다.[4]위서》에 기록. 정확한 세대수를 파악하기 힘들다.[5] 정실부인. 고막근과 고막덕의 어머니. 《조선상고사》에서 고막근과 고막덕을 태조대왕의 적자로 본 견해를 따름.#[6] 측실. 차대왕과 신대왕의 어머니. 《조선상고사》에서 차대왕과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서자로 본 견해를 따름.#[7] 다만 《후한서》에서는 태조대왕의 사자가 차대왕으로 나오기 때문에, 결혼 순서는 정실부인보다 빨랐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국내 사서에서 차대왕과 신대왕을 태조대왕의 아들이 아닌 형제로 서술한 만큼, 수계혼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8]후한서》에 사자(嗣子)로 기록.[9]후한서》에 기록.[10] 정사 문헌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만 등장하므로 실존 여부에 의문이 있다.[11] 어릴때 사용했던 이름[12] 묘호의 사용이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때부터 확인이 되어 당대에 사용했을 확률은 낮다.[13] 146년 태조대왕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 스스로 '태조'라 자칭했다.[14] 태조인 대왕, 다음 대왕, 새로운 대왕.[15] 아마도 이때의 고구려는 진(秦)나라시황제, 이세황제처럼 이런 방식의 왕호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16] 이럴 경우, 태조대왕 - 차대왕이 부자 관계이고, 차대왕 - 신대왕이 부자 관계이며, 태조대왕 - 신대왕이 조손 관계가 된다.[17] 《북사》에서는 차대왕에 관한 기록이 빠져있는데, 궁(태조대왕)이 죽고 아들 백고(신대왕)가 즉위했다고 되어 있다.[18] 삼국사기 기록상으론 105년 1월 장수를 보내 요동의 여섯 현을 상대로 약탈을 벌인 일이 첫 사례고, 후한서 고구려전의 경우 장성함에 용스럽고 건장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다.(及長勇壯, 數犯邊境.), 화제 원흥 원년元年(105년) 봄에, 다시 요동을 침입하여 여섯 현을 노략질하므로, 태수太守 경기耿夔가 격파하고 그 우두머리를 참살(斬殺)하였다. (和帝 元興元年春, 復入遼東, 寇略六縣, 太守耿夔擊破之, 斬其渠帥.)고 기록하고 있어 105년 이전에도 충돌했던 것으로 추측된다.[19] 호삼성에 따르면 태조대왕에 이르러 고구려가 점차 강성해져, 자주 한나라 변경의 요새를 공격했으며, 이때 고구려는 요동성의 신빈현에 도읍했다.[20] 참고로 공인된 최장수 기록은 1997년에 사망한 잔 루이즈 칼망의 만 122세이며 남성의 경우, 공인된 최장수 인물은 2013년에 사망한 일본의 기무라 지로에몬의 만 116세이다. 현대 의학의 혜택을 받으며, 고대보다 엄청나게 많은 인구수의 현대인에서 뽑고 뽑은 기록이 이 정도다.[21] 만일 이 태조대왕이 진짜 고구려의 건국자라면 주몽 신화도 설명이 가능하다. 왜 에서 나왔는지에 대한 것도 실제로는 태조대왕의 기나긴 재위기간에 만들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다.[22] 신라의 '태조'가 어떤 왕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 관계로 학자들 사이에 여러 설이 있다.[23] 태조대왕 및 장수왕과 달리 반대로 한국사의 군주들 중 가장 단명한 군주는 고려창왕으로 한국 나이로 겨우 10살의 나이에 주살되었다.[24] 태조대왕, 차대왕, 신대왕은 서로 형제로 언급되는데 각각의 나이차는 24년, 18년이다. 그러니까 태조대왕과 신대왕의 나이 차이는 40년으로 통상적인 생물학적 형제가 되기에는 불가능한 나이가 되는 것인데, 노산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차대왕과 신대왕이 태조대왕의 아들이라는 설과 이들이 각자 아들, 손자 관계라는 설이 있다.[25] 수렴청정을 했다는 부여태후에 관련된 기록을 보면 부여태후는 고재사의 아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남편이 버젓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아내가 섭정을 행한 것이 특이하다.[26] 이는 고구려가 가장 먼저 고대 국가의 기틀을 잡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 중 고구려 관련 기사가 가장 소상한 편이고, 백제나 신라와 달리 중국측 사서와 교차검증이 가장 잘 되는 편이다. 물론 중국 입장에서는 육로로 접해 있으면서 국가의 기틀을 갖춘 고구려만 실어준 것이고, 본토에서도 멀며 삼한의 소국에 지나지 않았던 백제와 신라 쪽은 적어 주지 않은 탓도 있다. 그나마 풍납토성이나 나정 등의 발굴 성과로 인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이 팽배하던 예전과 달리 현재는 백제와 신라의 초기 기록이 비판적으로 수용되는 편이다.[27] 북한에서는 이미 고구려가 기원전 2세기 혹은 기원전 3세기에 세워졌다고 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남쪽 구석에 있었던 신라가 부여를 이은 고구려보다 먼저 세워졌으니 조선시대부터 의혹이 생길 만하다. 다만 한국 사학계에서는 신라와 백제의 건국 연대가 끌어올려졌다는 데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되었지만, 고구려의 건국 연대가 끌어내려졌다는 데에 있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한 편이다.[28] 김부식이 인용한 《해동고기》의 구절에도 '국조왕'으로 표기하고 있다.[29] 두로라는 사람이 모본왕을 죽인 후 태자는 '불초하다'는 이유로 왕위를 잇지 못하고, 태조대왕이 대신 왕위에 올랐는데, 이 기록은 명백하게 쿠데타를 연상시킨다.[30] 정설에 밀리긴 했지만 아직도 주장하는 학자가 있긴 하다. 대표적으로 권순홍이 자신의 2015년 논문 〈고구려 초기의 都城과 改都〉에서 주장했다.[31] 〈고구려 초기 消奴部, 桂婁部의 형성과 卒本〉, 임기환, 2019[32] 이 기록대로라면 태조대왕은 향년 74세로 사망한 것이 된다. 118세 기록보다는 40년 이상 짧지만 현실적인 동시에 당대에는 확실히 장수한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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