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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도주의 역사를 설명해 놓은 문서다.2. 고대
술 중에서도 과일주(과실주)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양조주의 일종[1]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 시대부터 포도주를 식사에 곁들이거나 요리에 사용했으며, 이는 현재 서양 음식 문화의 기본이 되었다. 현재도 서양 술이라고 하면 포도주와 맥주가, 증류주 중에서도 이 둘을 증류한 술인 브랜디와 위스키가 가장 먼저 나올 정도다. 다만 포도라는 과일 자체가 당과 효모를 동시에 가지고 있어서 자연적으로 발효되어 포도주가 되기에 어디서 누가 처음 만들어 먹었는지 추정하는 것은 많은 난제가 따른다. 아프리카에서 원숭이나 코끼리가 물이 괸 웅덩이나 나무 구멍 등에 나무 열매가 떨어져 자연 발효되어 생긴 자연 과실주를 음용하는 사례가 목격된 바 있다. 지구상에 인류가 처음 나타난 것이 약 200만 년 전이라 추정하는데 포도는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전인 약 700만 년 전부터 있어왔기 때문에 포도주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보다 앞선다고도 할 수 있겠다.기원전 7,000년 무렵 조지아 ~ 아르메니아 ~ 튀르키예 동북부 지역, 이른바 캅카스 지방에서 출토된 포도씨앗과 타르타르산(tartaric acid)[2]를 보고 최초로 포도를 재배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기원전 6,000년경의 포도 씨, 항아리, 포도주 양조 기구 등이 발견되었으며 이후 신석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토기가 등장했고 기원전 약 4,000년에 포도주 용기의 뚜껑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조지아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기원전 약 3,5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용기 안에 포도주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발견 기록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포도주 항아리 유물이 발견된 조지아를 '포도주'의 기원으로 볼 수 있지만, 시대 차이가 있을 뿐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다른 지역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일 수 있다. 상술했듯이 포도 자체가 워낙 발효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다만 코카서스 지역을 시작으로 소아시아를 통해 발칸(고대 그리스)으로, 그리고 이탈리아(고대 로마)로 전래되었다가 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이베리아 및 프랑스 지역까지 퍼져나갔다는 것[3]은 대개 부정하지 않는다. 대략 올리브와 거의 전파 경로를 같이한다. 때문에 공식적으로 포도주는 유물로 증거가 남아있는 한에선 가장 오래된 술로 꼽힌다.[4]
수메르의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포도주와 관련된 기록이 있을 정도로 포도주의 역사는 매우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이집트 유물을 보면 현대의 포도주처럼 병에 양조한 연도, 장소, 포도의 품종을 기록한 라벨을 붙여 관리했을 정도로 체계적이었다. 또한 성서에 따르면 노아가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후 최초로 빚은 술이 포도주였고, 예수 그리스도 가 최초로 행한 기적이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다. 카나의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예수의 어머니 성모 마리아가 "잔치에 쓸 포도주가 다 떨어져서 큰일이다"라고 예수에게 말하자 잠시 고민하다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면서 축성한 술 또한 포도주였고, 이에 포도주가 미사에 사용되면서 서구에서는 신성한 이미지 또한 갖게 되었다. 동아시아에 포도주가 유입된 이유 역시 기독교와 관련이 있으며, 신세계 포도주 생산국들 중 상당수는 성체성사용 포도주 생산을 위해 포도 재배를 시작하였다.
2.1. 고대 그리스 & 로마
포도주는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다.
플라톤
헬레니즘 시대의 포도주와 직접 관련된 신으로는 디오니소스가 있으며, 신화와 함께 번성하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예술, 문화 등의 발달과 함께 즐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야생종 포도는 접지하여 재배되기 시작하였고, 그리스 당시에는 91가지의 포도 품종이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대 그리스 포도주는 심히 걸쭉한 시럽이나 진배없는 것이라 반드시 물을 타 팔도록 로크리스가 법으로 정할 정도였다.[5] 이는 '암포라'라고 하는 다용도 토기에서 숙성을 시켰는데, 토기 특성상 숙성 과정에서 수분이 토기 표면으로 빠져나가 농축되었기 때문이다. 물을 안 타고 마시는 사람이나 타 민족을 야만인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6] 플라톤
포도주와 물을 섞는 데 쓰는 그릇을 크라테르(κρατήρ)라고 하는데(라틴어로는 cratera)[7], 이는 크레이터라는 어휘의 어원이기도 하다.
로마군 군인과 민간 육체 노동자들은 포도주 운송 과정에서 포도주가 쉬어 발생하는 식초를 처리하고, 현지의 물을 마시고 탈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포도주 식초를 식수에 타서 포스카(Posca)라는 음료로 만들어 마셨다. 이는 식초의 아세트산으로 악취를 제거하고 식수에 있을 박테리아를 살균하는 효과가 있었다.[8] 로마군의 형벌 중에는 식초를 주지 않고 맹물만 마시도록 하는 벌도 있었을 만큼 포도주 식초는 생필품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렇게 살균 목적으로 물에 식초를 타거나 맥주로 만들어 마시는 모습은 로마가 멸망하고 중세에 와서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후술하듯 성경에서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로마 군인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건네는 장면이 나온다.
로마시대에서 로마인들은 포도주를 납그릇에 넣고 끓여서 마시기도 했다. 포도주의 아세트산과 납성분이 만나면 아세트산납(Pb(CH3COO)2)[9]이 생성된다. 이 경우 해당 성분으로 인해 포도주에서 단맛이 돌게 된다. 로마인들은 아세트산납이 함유된 포도주 시럽을 사파(sapa)라고 불렀다. 이런 조리법은 납 중독을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있었지만[10] 과연 얼마나 고대 로마인들이 이를 자주 섭취했고 어느 정도의 납 중독이 발발했는지는 학계에서 이견이 있는 편이다.
성경에 나오는 해면에 적신 쓸개 탄 신 포도주(혹은 몰약이나 그냥 신 포도주)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먹이는 것[11]도 한 병사가 상술할 포스카를 마시도록 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그냥 식초를 먹였다는 해석과 달리, 이 경우에는 자신들도 평소 마시던 음료를 그대로 준 것이므로 죽어가던 예수를 동정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 & 로마 시대와 더불어 이후의 시대에 걸쳐 유럽에 포도주가 널리 퍼진 데에는 종교와 예식과 관련된 문화적 요소가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에 대한 의식은 로마 신화의 바쿠스 의식에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그리스도교의 성체성사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가 빵을 가리켜 자신의 몸(성체)이라 일컫고, 포도주(물론 적포도주)를 가리켜 자신의 피(성혈)라고 일컬어 성체성사나 성만찬에서도 사용되는 등 빵과 함께 신성한 의미가 부여되면서 유럽에서 포도주는 위상이 매우 높다.[12] 로마 제국의 팽창과 함께 전파된 기독교 문화의 영향으로 유럽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다른 술은 안 마셔도 포도주만은 예외로 마시는 신자도 있다. 20세기 금주법 시대에도 종교예식용 포도주는 예외로 쳐서, 술꾼들의 포도주 소비가 급증했다.
2.2. 중국
오래 전부터 포도주의 제조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난성에 위치한 자후 유적지에서 초기 신석기 시대인 약 9천 년 전 최초로 포도를 사용해서 술을 빚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이 술은 포도와 산사나무 열매, 그리고 꿀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에서는 전 세계 야생 포도 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50종 이상의 포도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원사 시대를 거치면서 곰팡이로 곡물을 당화시킬 수 있는 단계를 맞이한 중국에는 수수나 쌀로 만든 술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렇다고 과일주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나라의 도시 타이시에 과실주가 양조되었던 흔적이 남아있으며, 주나라 시대의 주례(周禮)에는 적어도 두 종류 이상의 술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과일로 만든 술(酪)이다.기원전 2세기 말에 유라시아의 포도가 중국으로 전래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무제의 특사로 중앙아시아로 갔던 장건 장군은 유라시안 포도(Vitis vinifera ssp. vinifera)가 재배되는 것을 보고 장안(長安)으로 포도주 제조용 포도를 가져왔다. 이후로도 쌀과 포도를 사용하여 포도주를 빚은 기록들이 여럿 남아있다. 예를 들면 조조의 아들이자 위나라의 황제이던 조비의 경우 포도는 물론 포도로 담근 술을 극찬했다. 당나라 시기의 양주사에서도 포도미주야광배(葡萄美酒夜光杯)라는 시구가 포도주의 존재를 간접적으로 알렸다.
3. 중세 시대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포도 재배와 포도주 산업이 일시적으로 타격을 입었으나, 미사에 필요한 포도주를 조달하기 위하여 성당이나 수도원에서 포도나무를 재배하여 명맥을 유지하였고, 곧 빠르게 부흥하였다. 오히려 수도원과 성당의 끊임없는 개량 덕분에 퀄리티 면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능가하는 발전을 이룬 시기다.#왜냐하면, 수도원의 풍부한 노동력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포도 재배와 포도주 생산이 가능하였으며, 고품질의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여 관련 지식을 축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부 수도원에서는 대량으로 포도주를 생산하여 의식에 필요한 분량을 제외한 나머지를 판매하여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포도주 판매에 이윤이 남게 되자 과학적인 방법들을 연구 및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다른 맛을 가진 포도주들이 생산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수도원에서 포도주가 제조되고 있다.
중세 유럽에서 포도주는 남유럽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북서유럽에서는 귀족 집안조차도 평소에 포도주를 물처럼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포도주는 보통 귀한 손님이 방문할 경우에 내는 고급 만찬의 일부였으며, '귀한 손님을 따라온 기사들'의 경우는 대부분 그 식사에서 포도주를 마시지 못했다. 계급과 중요도에 따라서 특별한 자에게만 차별적으로 내놓는 사치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보르도 등 남유럽에서는 포도주를 물처럼 마실 수 있었다. 평민들도 값싼 저급 포도주는 일반적인 음료수로 마셨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 지역에서 중저가 포도주가 생수와 맞먹을 정도로 저렴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13] 특히 프랑스는 12세기 이래로 보르도와 부르고뉴에 포도 플렌테이션이 형성되어서 영국, 네덜란드 등 지역에 대규모로 수출했다. 프랑스 포도주의 명성이 높은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으며, 반면 스페인 포도주와 이탈리아 포도주는 역사도 깊고 생산량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저평가받는데 이는 국제 수출보다는 자국에서 서민들과 부자들을 가리지 않고 마신 역사적 배경이 관련되어 있다.
유럽의 포도주는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까지도 전해지긴 했고, 꽤 고급품 대접을 받았긴 했지만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수입산이어서 물량도 적은데다 매우 비쌌고, 기존의 곡주의 영향력이 강해서 제조법의 갈피를 못 잡았기 때문이다. 후한대에는 포도주를 뇌물로 바쳐서 주자사가 된 인물[14]이 있어서 후대의 소동파까지 시로 조롱했는데, 이건 포도주가 뇌물이 될 정도로 희귀성을 만족시켰다는 이야기이다. 이백을 포함한 시인들의 시들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진 당 대 이후의 포도주 제조 시도에는 포도와 쌀을 섞어서 만들려고 한 흔적이 보인다. 즉 포도로만 만든 포도주는 모조리 서역 수입산. 이백의 시에도 포도주에 맞는 술잔은 유리잔이라고 하고 있는데, 당대에는 유리 역시 대표적인 수입 사치품이었다.
결국 고급품의 이미지가 확고해져서 이후 포도만으로 발효시켜 마신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도 곡주처럼 그 영향력을 확대시키지 못했고, 포도주 자체 생산은 근현대에 들어서 가능해졌다. 포도주를 만들어 마셨던 중앙아시아권과 접한 중국이 이 지경이니 한반도나 일본은 말할 것도 없는 상황. 일본의 경우 전국 시대부터 남만인(포르투갈인)이나 홍모인(네덜란드인) 등 서양에서 온 상인이나 선교사들에게서 정말로 어쩌다 입수하여 귀한 것을 조금씩 마시는 정도였으나 사실상 과시용 사치품이나 다름없었고, 역시 본격적으로 마시기 시작한 것은 근대 이후다.
한편, 이 시기에 포도주의 탄생지였던 중동 및 페르시아는, 술을 금지하는 이슬람이 들어서자 크게 쇠퇴하였다. 명맥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지만 포도주의 주산지를 유럽에 완전히 내어주게 되었다.
3.1. 수질 때문에 포도주를 마셨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어느정도만 맞는 사실이다. 로마군에서 포스카를 사용한 것처럼 수질 정화에 포도주를 이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식수의 보조품이었을 뿐, 포도주를 식수의 대체품으로 썼다는 건 사실과는 다른 과장된 내용이다.유럽은 지반에 석회가 포함된 지역이 많아서 물에 석회가 섞여 뿌옇게 되고 당연히 마시지 못하는 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데다 각종 오물로 인해 강물이 더러워지는 일이 빈번했기에 그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는, 전설과도 같이 널리 퍼진 속설이 있다. 그렇기에 당시 중세에서는 포도주와 맥주를 물을 대신해서 마시기 시작했다고 알려졌으며, 이것에 대해 심지어 서양권에서조차 오랫동안 큰 이의가 제기되지 않은 채 학자들까지도 인용해오곤 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근래의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포도주를 양조할 때에는 따로 물을 첨가하지 않지만, 맥주는 그 제조 과정에서 대량의 깨끗한 물이 필요하기에 포도주는 몰라도 물 대신 맥주를 마신다는 속설은 맞지 않는다. 수질 문제 중 석회질에 대한 부분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석회수에 대한 오해 문제는 센물 문서를 참조. 이에 대해, 고대 로마의 병사가 식수를 찾지 못하는 경우나 비상시를 대비해서 '포스카(posca)'라고 하는 식초 수준의 묽은 포도주를 상비하고 다닌 것이 와전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이것도 소독에 대한 얘기이지 석회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속설과 달리, 유럽에서도 물을 마셨다는 기록은 계속 발견되고 있다. 예를 들어 7세기 로마 제국의 의사인 Aegina의 Paul은 '물은 모든 종류의 식이요법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며, 가장 좋은 물은 맛과 향이 없고 눈으로 보기에 맑으며 마실 때 무엇보다도 기쁨을 주어야 한다.' 라고 말했다.The Regimen Sanitatis Salerni에서는 갈증에 물이 좋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중세의 많은 수도원들이 양질의 수원을 도시에 보급하기 위해 애썼으며 이것은 도시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지반에 석회가 포함된 지역이 많아서 물에 석회가 섞여 뿌옇게 되고 마시지 못하는 물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건 사실이지만, 그럴 경우에 어떻게든 깨끗한 물을 찾아서 마시려고 했지 물 대신 술을 마신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단지 영양 보충의 수단으로써 포도주를 다른 문화권에 비해서 많이 마셨을 뿐이다. 무엇보다 술을 마시면 알코올의 이뇨 작용으로 수분이 배출되기 때문에 술 자체가 식수 대용으로 적합하지가 않고, 석회 섞인 물로 만든 술은 성분도 그대로인데다 맛이 없어서 식수 대용으로 부적합하다.
4. 근대
16세기 이후부터는 포도주 자체에 대한 소비가 증가하고, 상류층은 고품질 포도주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신대륙 발견으로 포도주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그 이후 17세기 남아프리카, 18세기 호주와 미국 서부까지 전파되었다. 19세기에는 필록세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어 포도주 산업이 침체되기도 하였으나, 품종 개량과 농업 기술 발전으로 극복해 냈으며, 경제 발전, 교통수단 발전, 국제화 등으로 포도주 양조 기술은 더욱 발전하고 있다. 다양한 지역에서 포도주를 증류하여 브랜디를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포도주 양조 부산물을 재활용하여 포메이스 브랜디를 만들어냈다. 또한 스파클링 와인, 강화 포도주, 귀부 포도주 등 일반적인 포도주와 크게 다른 특성을 지닌 특수주조벙식으로 양조된 포도주들도 이 시기에 개발되거나 생산 방법이 정립되었다.한반도 또한 고려 말 근제집, 16세기 수운잡방, 17세기 동의보감에 쌀과 포도로 빚은 포도주 양조법이 실려있다. 이렇게 쌀을 추가하는 이유는 동아시아권에서 주로 먹는 포도종인 캠벨이 양조를 하기에는 당도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포도주의 경우 부족한 당도를 보충하기 위해 발효 전에 정확히 계량된 만큼의 설탕을 추가한다. 술의 발효란 기본적으로 당이 알코올로 바뀌는 과정이다.
현재 '근대' 항목의 설명이 매우 부족하나, 이 시기는 파스퇴르의 술에 관련된 연구와 더불어 현재 우리가 마시는 종류의 포도주가 탄생한 시기이다. 중세에 마시던 포도주와 19~20세기 이후 마시게 된 포도주는 다른 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차이를 갖고 있다. 발효에 대한 비밀, 오크통이나 숙성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제조법의 표준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역사적 사건들 때문에 큰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귀족 사회가 완전히 무너졌다. 그런데 당시까지 러시아 황실 및 귀족 집단은 고급 포도주의 중요한 수요처였다. 이 수요처가 사라지면서 포도주 수요가 급감하였다. 이후 공산권이 크게 발전하는 와중에도 자체 생산을 선호하면서 수입 포도주 수요는 회복되지 않았다.[15] 게다가 미국에서 금주법을 시행하고, 결정적으로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포도주 시장은 오랫동안 침체에 빠진다.
5. 현대
냉전 시기에도 국제적인 포도주 무역이 이루어졌으나 대규모 수출입은 거의 개별 경제 블록 내에서만 이루어졌다. 현대에는 세계화와 무역 발전,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세계적으로 포도주 수출입량이 크게 증가하였으며, 양조 기술이 상향평준화가 되어가고 있다. 신세계 포도주 생산국들에서는 새로운 포도주 산지가 속속들이 생겨나고 있고 새로운 장르의 포도주를 개발하거나 외국 품종을 새로이 재배하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페인 등 기존의 포도주 강국들도 생산자들에게 자본이 유입되고 포도주 수출이 쉬워짐에 따라 종전에 비해 많은 차이가 생겼다. 또한 여러 포도주 평가 매체들의 등장으로 포도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쉬워졌으며, 커뮤니티를 통해 애호가들이 의견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포도주 생산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른 술과 마찬가지로 실험적인 시도가 증가하였고 유행의 주기가 더욱 빨라졌다. 정보 공유와 다양한 포도주를 구입하는 것이 쉬워짐에 따라 이점이 많지만 인기 있는 포도주둘의 가격이 폭등하는 등 부작용도 있다.일본에선 과거 버블 경기 시절을 통해 포도주가 사치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여러 졸부들이 이름난 포도주들을 농장째로 싹쓸이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갑부가 아닌 부동산으로 돈 좀 땡긴 일반인들도 캬바쿠라나 룸살롱 등지에서 로마네 콩티에 돔 페리뇽을 말아먹었다는 이야기[16]는 이미 유명하다.[17] 버블이 빠진 뒤에 죠 아라키의 소믈리에, 소믈리에르 같은 만화를 통해 포도주에 대한 지식이 높아지고 포도주 소비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으며, 일본 포도주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보다 더욱 늦었다. 머루로 담그는 머루주는 리큐르에 가까운 물건이고, 산림경제, 증보산림경제, 임원경제지 등에 포도, 쌀, 누룩으로 포도주를 담그는 양조법이 기록되어 있긴 하나 이를 유럽 등지의 포도주와 같은 술로 보기는 힘들고, 유럽의 포도주가 들어온 것은 개항기 이후이다. 여담으로 헨드릭 하멜이 제주도에 포류한 다음에 제주 목사에게 포도주와 은잔을 뇌물로 바쳐서 환심을 사보려 한적이 있었는데 포도주를 맛본 조선 관리들은 그 맛에 몹시 감탄하여 포도주를 모조리 해치우고 기분이 매우 좋아져서 네덜란드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해줬다고 한다. 아마 당시 제주 목사와 관리들이 기록상으론 유럽의 포도주를 맛본 첫 번째 한국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다만 당나라가 서역에서 포도주를 수입한 사례가 있어서,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신라나 발해 사람이 포도주를 맛보았을 수는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극소수의 사치품이나 다름없었고, 독립 이후에도 한동안 마찬가지였으며 대중들에게 포도주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이후로 볼 수 있다. 2004년~2008년 정도에 걸쳐 한국의 포도주 시장은 매년 수십 %씩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그래서 떠오르는 신흥 시장으로 외국의 주요 와이너리 오너들이 저마다 한 번씩 한국을 찾아와 프로모션 행사를 갖는 일도 많았다. 웰빙 열풍 때 웰빙 식품의 하나로 각광을 받게 되는데, 이른바 폭탄주라 불리는 음주 문화의 개선과 양주나 소주보다 알코올 함량이 낮은 저도수 주류 섭취 권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꽤 잘나가는 듯했다.[18]
하지만 2008~2010년에 걸쳐 거품이 크게 꺼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로는 환율의 상승. 1,300~1,400원 하던 유로화는 1,700~1,800원을 넘게 뛰어올랐고, 이는 고스란히 유럽산 포도주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졌다. 2번째로는 국제 경기 경색. 미국의 서브 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 장기 신용 대출) 붕괴 사태와 PIGS[19]의 재정 악화 등으로 국제 경기에 적색 신호등이 켜지면서 사치품에 해당하는 포도주 수요가 급감하게 되었다. 셋째로는 수입사의 난립과 출혈 경쟁에 따른 유통 질서 교란이다. 포도주 시장이 성장하며 너도나도 수입사를 세워 중소 수입사가 난립하게 되고, 여기에 LG, 신세계 등 대기업까지 가세했다. 이 과정에서 출혈 경쟁과 연이어지는 세일로 인해 수익성이 악화되었다. 네 번째 이유는 이 시기에 사케가 인기를 끌며 붐이 일어난 것. 이 시기 한국 포도주 동호인 상당수가 사케로 넘어가며 '고급주'라는 인식 속에 붐을 일어났으나 이 사케 붐도 2~3년 정도 반짝하다가 2011년 엔화 가치가 폭등하면서 사케 수입 가격이 급등하자 거품처럼 푹 꺼졌다. 관세, 주세, 교육세, 부가세를 포함하여 총세율 68%에 이르는 높은 세금, 또한 관련 법령에 의해 규제에 묶여있어 면허제로 되어있는 주류 판매망과 수입사-도매-소매로 이어지는 다단계의 유통 경로에서 들러붙는 업자들 마진이 한국이 포도주 값이 비싼 원인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한동한 폭발적 성장세를 구가하던 포도주 시장이 급랭하게 된 것은 관세/유통의 문제보다는 환율과 국제 경기의 영향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붐이 휩쓸고 지나간 후 거품이 빠지면서 경쟁력이 약한 중소 수입사들이 적잖이 정리되었고, 포도주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포도주의 유통망 역시 그간 쌓은 경험을 통해 진일보하였으며, 결정적으로 FTA가 체결되자 저렴하면서도 질 좋은 신대륙 포도주가 수입되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런 변화와 더불어 포도주에 대한 인식이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듯 그냥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 먹는 술로 점점 변해가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보통 술이라기보단 비싼 술의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포도주가 일반적으로 서민의 친구로 인식되는 국산 맥주와 희석식 소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비싼 것과 고가품스러운 이미지 위주로 홍보가 이루어진 것, 운송비 등의 문제로 일정 가격 이상의 포도주만 수입하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생산국에서는 한화로 만 원 내외에서도 충분히 맛있는 포도주를 구할 수 있다.[20] 이 때문에 포도주에 대해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허세를 부리는 와인 스노비즘 환자들이 있는가 하면, 역으로 포도주 자체를 터부시하고 부유층들이나 마시는 술 수준으로 폄하하는 부류도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은 비슷하게 고급 주류로 취급받는 위스키나 브랜디보다도 유난히 포도주에서 심한 편이다.
국산 포도주 양조도 시작되었다. 영천, 영동 등 한국의 포도 주산지에서 재배한 포도로 포도주를 양조하는 소규모의 와이너리둘이 21세기 들어 생겨났는데, 본래 캠벨 얼리 종에 설탕을 첨가하여 양조하였고 중저가 스위트 와인 정도의 품질에 가격대가 높아 평이 그리 좋지 못했으나 머루와 청수 등의 품종으로 한국 기후에 최적화된 포도주 양조를 시작해 나름대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포도주/한국 문서 참조.
[1] 본래, Vino(Wine)이라는 단어 자체가 과실주라는 뜻으로 쓰이는 단어이다.[2] 주석산(酒石酸)이라고도 하며, 포도에 다량으로 함유되어 있는 성분이다.[3] 게르마니아와 브리타니아는 포도가 자생하기 어려워 전파가 늦었다.[4] 다만 여러 고대 기록과 양조장 유물 등으로 입증된 한에서 보면 학계에서는 맥주를 가장 오래된 술로 보고 있다. 가장 오래된 유물이 기원전 1만 4천 년 전의 것이다.[5] 성경의 마카베오기(개신교 기준으론 외경) 하권의 마지막 부분인 "포도주만 마시는 것이 해롭듯이 물만 마시는 것도 해롭다. 그러나 물을 섞은 포도주는 달콤한 기쁨을 자아낸다. 이와 마찬가지로 잘 짜인 이야기는 그 글을 읽는 이들의 귀를 즐겁게 한다."라는 말은 이와 같은 포도주의 특성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오디세이아 등 고대 그리스 문헌을 보면 포도주와 물을 섞는 장면이 정말 자주 등장한다.[6] 십자군 연대기에는 프랑스 국왕이 기사에게 "넌 왜 포도주에 물을 안 타고 깡으로 먹냐?"고 묻는 부분이 있다. 마찬가지로 로마 5현제 중 한 명인 트라야누스의 몇 안 되는 결점 중 하나가 포도주를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을 들 정도였다.[7] 동양 쪽에는 없었던 물건이다 보니 딱히 대응하는 단어가 없고, 그래서 혼주기(混酒器)라고 의미를 살려 번역하기도 한다.[8] 비슷한 이유에서, 중화권에서는 차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했다.[9] 연당(sugar of lead), 초산납(醋酸-)이라고도 불리는 물질. 납 성분과 초산 성분이 만나면 생성된다. 용매는 물과 글리세린.[10] 납 성분을 대량 섭취하면 급성 납 중독, 소량으로 자주 섭취하면 만성 납 중독에 걸린다.[11] 마태오 복음서와 마르코 복음서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복음서의 저자들은 구약 성경이 예수에 대한 예언을 담았다고 봤으며, 특히 이 장면은 시편 69장 22절의 '그들은 내가 배고프다 할 때 독을 탄 음식을 주고 목마르다 할 때 식초를 줬습니다'라는 구절을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이를 예수에 대한 모욕으로 해석하는 케이스가 있는데 이것은 반론의 여지가 있다.[12] 이 포도주를 만드는 데 필요한 포도 품종은 긴 세월 끝에 멸종했는데, 이스라엘 아리엘 대학 연구 팀이 복원했다고 한다.[13] M. Adamson, Food in Medieval Times, Greenwood Press, 2004[14] 《후한서(後漢書)》권78 《환자열전(宦者列傳)》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부풍 사람 맹타는 재산이 많았으며, 장양(張讓)의 종과 친구가 되어, 자주 찾아 선물을 하며 안부를 묻는데 아낌이 없었다. 종들은 모두 그가 덕이 있다고 여겨서 맹타에게 '그대는 무얼 원하시오? 힘써 처리해 보리다'라고 물었다. 맹타가 '저는 당신들이 나를 위해 절을 한 번 해주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했다. 당시 빈객이 장양을 만나기를 원하는 수레가 항상 수천 대가 되었는데, 맹타는 그때 장양을 만나기 바랐지만 뒤에 왔기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노비 감독관이 여러 노비를 이끌고 길에서 맹타에게 절을 하고, 마침내 모든 수레가 문안으로 들어갔다. 빈객이 모두 놀라, 맹타가 장양과 아주 친하다고 여겨서, 진귀한 물건을 그에게 선물하였다. 맹타는 이것을 나누어 장양에게 선물하니, 장양이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맹타를 양주자사로 삼았다." 본문에서는 맹타가 무엇을 주었는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후한서의 주석인 《삼보결록주(三輔決錄注)》에서 “맹타는 자가 백랑(伯郞)인데, 포도주 1두(斗)를 장양에게 보냈고, 장양은 곧 맹타를 양주자사로 삼았다.”고 적혀 있으며, 다른 기록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도서집성(圖書集成)․식화전(食貨典)》권273 《주부(酒部)》: “한말의 정권이 환관에게 있었다. 서량주(西凉州) 포도주 10곡을 장양에게 준 자가 곧 양주자사가 되었다.(漢末政在閹宦. 有獻西凉州葡萄十斛於張讓者, 立拜凉州刺史.)”, 《예문유취(藝文類聚》권87 《속한서(續漢書)》: “《돈황장씨가전(敦煌張氏家傳)》에서 이르기를 "부풍 사람 맹타가 포도주 1승(升)을 장양에게 주고, 양주자사로 불리게 되었다.", 《삼국지, 위지(魏志), 명제기(明帝紀)》: “그(맹타)는 또 포도주 1곡(斛)을 장양에게 보내어 곧 양주자사가 되었다.”[15] 그루지야 SSR과 아르메니아 SSR, 헝가리 인민 공화국 등이 당시 공산권의 주요 포도주 산지였다.[16] 일본어로는 로마콩노핑돔와리(ロマコンのピンドン割り)라고 불렸다.[17] 특히 핑돔이라고 불렸던 돔 페리뇽 로제가 재료로 인기가 많았다. 현재는 로마네 콩티와 돔 페리뇽의 가격 차이가 수십 배에 달하지만 당시에는 가격 차이가 현재보다 훨씬 적게 났다.[18] 포도주를 섞어 마시는 경우는 아예 포도주 베이스 칵테일 레시피라도 외워 오지 않는 한 드물며, 도수가 높지도 않다.[19]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에스파냐[20] 일반적으로 파는 소주는 외국 제법으로 만들어진 가짜 소주이다. '진짜 소주'인 증류식 소주처럼 청주나 탁주를 증류해 만든 게 아니라, 저질 재료를 발효시킨 후 연속 증류해서 얻은 주정을 물로 희석시켜 화학조미료나 당류를 섞어 술이라는 딱지만 붙인 희석식 소주이기 때문이다. 제법 자체가 싸구려라 원가도 매우 낮으며, 한국의 현행 주세 제도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제대로 된 증류식 소주는 위스키나 브랜디와 마찬가지로 풍부한 맛과 향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