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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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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가계3. 인맥
3.1. 여자 관계
4. 사회적 논쟁거리5. 음악6. 국내 인식7. 기타

1. 개요

찰리 채플린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가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Charles_Chaplin_Sr.jpg* 아버지 : 찰스 채플린 시니어(Charles Chaplin Sr., 1863년 ~ 1901년). 뮤직홀에서 배우 겸 코미디언으로 일했다. 1885년에 해너 힐과 결혼했다. 당시 해너에겐 시드니 존[1]이라는 다른 아들이 있었다. 1889년에 부부는 찰스 스펜서 채플린을 낳았는데 바로 찰리 채플린이다. 1891년부터 별거에 들어가 찰리 채플린은 어머니가 키웠다. 그 후 다른 여자를 만나 살았지만 자식을 더 두지는 않았고 1901년에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Hannahchaplin.jpg* 어머니: 해너 채플린(결혼 전 이름은 Hannah Harriet Pedlingham Hil, 1865년 ~ 1928년). 1885년에 첫 아들 시드니를 낳았는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1889년에는 찰리를 낳았으며 1891년에 찰스 채플린과 헤어진 뒤 뮤직홀 배우인 리오 드라이든을 만나 셋째 아들 조지 윌러 드라이든(George Wheeler Dryden)을 낳았다. 1898년부터 정신병 증세가 나타났다. 그 때문에 시드니와 찰리는 어머니의 전 남편이었던 찰스 채플린을 찾아가야 했다. 그 후 해너는 요양 등을 하다가 1921년에 찰리와 시드니가 캘리포니아로 모셨고 거기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ydney_chaplin.jpg* 이부형 : 시드니 채플린(Sydney John Chaplin, 1885년 ~ 1965년). 채플린과 어머니가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으로 찰리와 함께 자랐다. 같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채플린의 매니저[2] 역할을 했다. 찰리는 자신의 아들 중 하나를 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본인도 영화배우로 활약했다. 1959년 브로드웨이 연극 "Goodbye, Charlie"에서 로런 버콜의 상대역으로 나온 적이 있다. 시드니는 두 번 결혼했지만 자식을 두지 않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Wheeler-dryden.jpg* 이부동생 : 조지 윌러 드라이든(George Wheeler Dryden, 1892년 ~ 1957년). 영국의 배우이다. 리오 드라이든과 해너 채플린의 아들로 시드니나 찰리와는 달리 리오가 키웠다. 1915년이 돼서야 찰리와 시드니가 자신의 형이란 걸 알게 됐다고 한다. 그래서 두 이부형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무시당했고 1917년에 채플린의 애인이었던 에드너 퍼바이언스를 만났다. 에드너는 그를 채플린의 친척으로 생각했다고. 1918년에는 두 형들과 만나고 어머니를 만났다. 1936년에 미국으로 귀화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뒤에 형의 일을 도왔고 라임라이트 후 채플린이 미국을 떠나자 미국에 남아 그의 사업 등을 정리했다. 말년에 FBI가 그의 형을 두고 그에게 정신적 압박을 가하는 바람에 꽤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고. 윌러는 스펜서 드라이든, 제프리 드라이든, 제시 드라이든, 잭슨 드라이든의 네 자식을 두었다. 그 중에서 스펜서 드라이든(Spencer Dryden, 1938년 ~ 2005년)은 미국의 유명 뮤지션이었으며 세 명의 아들을 두었다.
  • 장남 : 노먼 스펜서 채플린(Norman Spencer Chaplin, 1919년 ~ 1919년). 밀드러드 해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출생 후 3일만에 사망했다.
파일:external/sim01.in.com/54154ec5608f99d01cceabf7103576cf_m.jpg* 차남 : 찰스 스펜서 채플린 주니어(Charles Spencer Chaplin Jr., 1925년 ~ 1968년). 찰리가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지은 아들. 리터 그레이에게서 낳은 아들로 사실상 장남이었다. 미국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으며 배우로도 활동했다. 1958년에 배우 수잔 매그너스와 결혼하여 1959년 딸 수전 머리 채플린(Susan Maree Chaplin)[3]을 낳았으나 이혼했다. 1968년 폐색전증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미국 국적인지라 아버지와 달리 스위스에 가지 않고 미국에서 지냈다.
  • 삼남 : 시드니 얼 채플린(Sydney Earl Chaplin, 1926년 ~ 2009년). 형인 찰스 채플린과 마찬가지로 리터 그레이가 어머니이다. 삼촌인 시드니의 이름을 땄다. 영화와 드라마 등에서 활동했다. 《라임라이트》에서 클레어 블룸에게 관심을 보이는 젊은 군인이 바로 시드니이다.
    파일:external/static.guim.co.uk/Sydney-Chaplin-has-died-a-001.jpg
    아버지를 보고 있는 시드니. 소파에 앉은 군인이 시드니 채플린이다. 프랑스의 배우 노엘 아담과 결혼하여 아들 스테판 채플린(Stephan Chaplin)을 낳았고 손녀인 타마라 채플린(Tamara Chaplin)이 있다.
  • 사남 : 마이클 채플린(Michael John Chaplin, 1946년 ~ ). 마찬가지로 우나 오닐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1960년대까지 아역배우로 활동했고 그 이후엔 배우로는 은퇴했다. 그 후엔 작가로 활동하는 듯. 딸인 카먼 채플린(Carmen Chaplin)[4]과 덜로리스 채플린(Dolores Chaplin)[5]영국의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2013년 현재 마이클은 채플린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찍고 있다. 페이스북을 하기도 한다. 그의 페이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Dolores_Chaplin_Carmen_Chaplin_Deauville_2011.jpg
    왼쪽부터 덜로리스 채플린과 카먼 채플린. 마이클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아내인 패트리스 사이에 크리스천 채플린(Christian Chaplin)[6], 팀 채플린(Tim Chaplin)[7]을 낳았고, 둘째 아내인 퍼트리셔 비투어디에(Patricia Betaudier)[8] 사이에서는 캐슬린 채플린(Kathleen Chaplin)[9]과 덜로리스, 카먼, 조지 채플린(George Chaplin), 트레이시 채플린(Tracy Chaplin)[10]을 낳았다. 카먼과 덜로리스는 프랑스 영화에 나오기도 한다.
파일:external/rymimg.com/2833976.jpg* 차녀 : 조저핀 채플린(Josephine Hannah Chaplin, 1949년 ~ ). 미국에서 배우로 일하다가 1980년에 프랑스의 영화 제작자인 모리스 로네(Maurice Ronet, 1927년 ~ 1983년)를 만나 아들 쥘리앵 로네(Julien Ronet, 1980년 ~ )를 낳았다. 그 외에도 첫 아들 찰리 시스토바리스(Charlie Sistovaris, 1971년 ~ )가 있는데, 그리스 모피상인 니콜라스 시스토바리우스(Nicholas Sistovaris)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며 막내 아들 아서 가딘(Arthur Gardin)이 있다.
  • 삼녀 : 빅토리아 채플린(Victoria Chaplin, 1951년 ~ ). 초기에는 영화 배우로 활동하다가 서커스에 들어갔다고 한다. 남편은 장 바티스트 티에레(Jean-Baptiste Thiérrée)이다. 티에르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제임스 티에레(James Spencer Henry Edmond Marcel Thiérrée, 1974년 ~ )도 서커스 연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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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첫째 딸 오렐리아 티에레(Aurélia Thiérrée, 1971년 ~ )는 영화 배우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James_Thierr%C3%A9e_2010.jpg
아들 제임스 티에레.
  • 오남 : 유진 채플린(Eugene Anthony Chaplin, 1953년 ~ ). 스위스에서 레코딩 엔지니어와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레코딩 엔지니어로 롤링스톤즈데이비드 보위, 등과 협업했다. 스위스의 국제 코메디 영화 페스티벌 기획자이기도 하다. 자식을 여럿 뒀는데 딸인 키어러 채플린(Kiera Chaplin, 1982년 ~ )은 영국의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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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키어러 채플린.[12]
그 외에도 로러 채플린(Laura Chaplin, 1987년 ~ ), 케빈 채플린(Kevin Chaplin), 섀넌 채플린(Shannon Chaplin), 스카이 채플린(Skye Chaplin), 우나 채플린(Oona Chaplin)을 낳았다.
  • 사녀 : 제인 채플린(Jane Cecil Chaplin, 1957-). 멕시코의 영화 제작자인 일리야 살킨드(Ilya Juan Salkind Dominguez, 1947-)와 결혼하여 오슨 살킨드(Orson Salkind, 1986-)와 오세올라 살킨드(Osceola Salkind, 1994-)를 낳았다.
  • 오녀 : 아네트 채플린(Annette Emily Chaplin 1959 ~). 행적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파일:external/i1.sndcdn.com/avatars-000003333566-dtrbrc-crop.jpg* 육남 : 크리스토퍼 채플린(Christopher James Chaplin, 1962년 ~ ). 막내아들로 작곡가배우이다. 찰리 채플린의 둘째 아들의 맏딸인 수잔 마리 채플린(1959년생)보다 어린 1962년생으로, 첫 조카보다 나이가 세 살이나 어린 삼촌이다.

자녀들 사진을 모아놓은 곳
이렇게 찰리 채플린은 영화계에도 많은 후계자를 남겼지만 생물학적으로도 굉장히 많은 후계자를 남겼다.

3. 인맥

원체 각광받던 영화 스타였던 만큼, 주변인들도 대단한 인물들이 많았다. 《시티라이트》의 개봉 때도 초청받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박사를 비롯해 스튜디오에 찾아와 촬영을 참관하기도 했던 윈스턴 처칠 총리[13], 조지 6세 - 엘리자베스 2세국왕, 세계 여행 중 만난 마하트마 간디, 유럽 여행과 정주 시절 사귄 장폴 사르트르파블로 피카소 등 몇 사람만 언급해도 장난이 아니다. 심지어 훗날 중국의 총리가 되는 저우언라이 총리도 제네바에 회담하러 왔을 때 한 차례 만났다고.

한편 채플린이 아돌프 히틀러를 희화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나치 독일 치하에서 개봉되지 못했지만, 정작 히틀러는 포르투갈을 통해 밀반입된 《위대한 독재자》를 관저에서 두 번이나 보았다고 전해진다. 채플린은 자서전에서 히틀러가 "위대한 독재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고 싶다고 적었으나, 나치 독일이 패망하기 직전에 히틀러가 자살하는 바람에 그를 만나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14]

'인츠 사건'의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도 채플린과 막역한 관계였고, 영화인들로는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버스터 키튼이나 막스 랭데르[15] 등과도 교우 관계를 가졌다.

특히 키튼의 경우 《라임라이트》 후반부에서 채플린과 함께 공연을 하는 피아니스트로 특별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밑에 쓸 '음악' 항목과 관련해서 음악과 관련된 친분 관계도 있었고, 피아니스트 클라라 하스킬 등이 자서전에 언급되고 있다.

3.1. 여자 관계

채플린은 영화계에 남긴 눈부신 업적에 비해, 사생활 면에서는 상당히 많은 스캔들을 일으켰던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그가 여러 여성을 만나기도 했지만 만났던 여성 대다수의 나이가 10대 중후반이었다는 점이 컸다.[16] 그래서 사생활의 문란함이나 상대 여성들의 어린 나이 때문에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때문에 에페보필리아를 연구하는 측면에서도 꽤 무게감을 갖는 인물이기도 하다.

채플린의 결혼 생활

채플린의 딸 중엔 그와의 나이 차이가 무려 70살이나 차이가 나는 딸도 있다. 이렇게 자식을 많이 남긴 것은 채플린 본인의 무분별한 성 생활도 문제였지만 평생 고무로 된 카메라 지지대도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고무 알레르기가 있어서 콘돔 사용을 거부했기 때문이다.[17]

채플린의 생애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여자들은 다음과 같다.
  • 헤티 켈리(1893년 ~ 1918년)
    채플린이 카노 극단의 스타 코미디언으로 활동하던 1910년에 만난 첫사랑. 당시 런던의 한 연극단에서 무용수로 일하던 15세 소녀였지만, 헤티의 부모가 채플린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불과 다섯 번의 데이트만 하고 헤어졌다. 켈리와의 비극적인 첫사랑이 훗날 채플린의 여자 관계[18]에 많은 영향을 미친 걸로 알려져있다.
    1917년 스타가 된 채플린은 어느 날 켈리의 편지를 받게 되었고, 바로 다음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국행을 준비하지만 스케줄이 너무 바빠서 내년으로 미루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1918년 켈리가 당시 유럽에서 대유행하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하면서 이들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 에드너 퍼바이언스(1895년 ~ 1958년)
    1916년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1918년 채플린이 밀드러드 해리스와 결혼하기 전까지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원래 에사네이 영화사의 비서였으나 채플린의 추천으로 1915년 여배우로 데뷔했으며 에사네이~퍼스트 내셔널 시기의 거의 모든 채플린 영화에서 상대역[19]으로 출연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서 만든 첫 영화인 '파리의 여인'에서는 여주인공을 맡았다. 그러나 파리의 여인이 흥행에 실패[20]하고, 안타깝게도 이 영화가 그녀의 마지막 헐리우드 영화 출연작이 되고 말았다. 1926년, 찰리 채플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바다의 여인》이라는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으나 이 영화는 끝내 개봉되지 못하고 파기되고 말았다.
사실, 워낙 찰리 채플린과 가까운 사이이다보니, 후술할 찰리 채플린이 두번째 결혼 상대였던 리터 그레이와 이혼할 때 일부 언론에서는 이혼 사유로 에드너 퍼바이언스와 찰리 채플린이 불륜 관계라고 보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할리우드를 은퇴한 후, 항공 조종사였던 존 P. 스콰이어와 결혼해서 7년만에 사별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58년 향년 62세로 타계한다. 찰리 채플린은 그녀가 죽은 뒤 가졌던 인터뷰에서 "내가 어떻게 그녀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녀는 저의 모든 일이 시작될 때 항상 같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라며, 그녀와의 좋은 기억을 술회하기도 했다.[21]
  • 밀드러드 해리스(1901년 ~ 1944년)
    채플린이 29세이던 1918년에 처음 아내로 맞은 아역배우(당시 16세). 밀드러드가 채플린에게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 계기가 되어 1918년 10월 23일에 급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MGM 창립자 루이스 메이어는 채플린의 명성을 보고 채플린과 막 결혼한 밀드러드에게 접근해 그녀와의 영화 출연 계약을 따냈으며[22] 1919년 7월, 밀드러드는 채플린의 첫 아이였던 노먼을 낳았지만 노먼은 태어난지 3일만에 사망하고 만다.
이후 채플린은 그리 유명하지 않은 여배우인 밀드러드가 자신의 명성을 아용하기 위해 거짓으로 임신했다 속이고 자신과 결혼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밀드러드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채플린은 밀드러드에게 촤소한의 생활비만 주었으며 이조차 밀드러드가 자신이 준 생활비로 무엇을 왜 구매했는지 보고하도록 명령했다고 한다. 또한, 찰리 채플린은 밀드러드 해리스와 같이 밖에 나갔을 때면 밀드러드가 행여나 다른 남자를 쳐다볼까봐 항상 시선을 바닥에 두라고 강요했으며 밀드러드에게 만약 자신과의 결혼 생활을 지속하고 싶다면 자신에게 아내로서의 의무를 다하라고 압박했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이 자신을 냉대하기 시작하자 밀드러드는 채플린과의 결혼 생활을 유지하려고 외모를 엄청나게 꾸미는데 집중했는데 돈에 인색했던 채플린은 이를 보고 더 화가 나서 밀드러드에게 절대로 동시에 3개 이상의 드레스를 갖고 있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결국, 1919년 가을 부터 채플린은 밀드러드와 같이 살았던 집에 발길을 끊었다.
1920년 4월 4일 말드러드 해리스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사유로 찰리 채플린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찰리 채플린은 그녀가 레즈비언이며 다른 여성과 외도를 했다고 주장하며 재산 분할을 거부했다.[23]
두 사람의 이혼 소송은 1920년 11월 13일에 마무리되었고 법정은 밀드러드 해리스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며 두 사람이 함께 살고 있던 집의 소유권이 밀드러드에게 있으며 채플린은 밀드러드에게 10만 달러의 위자료를 지불하라고 판결했다.
밀드러드 해리스는 프랭크 카프라 초기작에도 나와 좋은 연기를 펼치는 등 꽤 괜찮은 배우였지만, 크게 대성하지 못했고, 1944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향년 43세. 안타깝게도 그녀가 출연했던 대부분의 작품들의 필름이 소실된 상황이라 그녀의 연기를 현 시점에서 보기가 어렵다.
  • 리터 그레이(1908년 ~ 1995년)
    1924년에 두 번째로 결혼한 상대. 1920년에 촬영된 《키드》에서 단역 천사들 중 한 명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채플린과 사귀기 시작하였다. 채플린과 밀회를 시작한 때는 무려 12살이었다(…). 밀드러드 해리스와 마찬가지로 채플린과 결혼했을 때의 나이는 16세였다. 《황금광 시대》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채플린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조지아 헤일로 교체되었다.
리터 그레이가 찰리 채플린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찰리 채플린은 이미 리터에게 관심이 식은 후였고 조지아 헤일과 사귀고 있었다. 그래서 채플린은 리터에게 돈을 주며 아이를 낙태하라고 요구했지만 리터의 아버지가 리터의 임신 소식을 전해듣고 찰리 채플린에게 총을 들고 찾아가 리터를 책임지라며 만약 그녀와 결혼하지 않는다면 채플린을 아동 성범죄자로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아동 성범죄자로 잡혀 감옥에 수감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찰리 채플린은 1924년 12월 26일, 멕시코에서 리터 그레이와 성급히 결혼하였고 결혼 직후부터 찰리는 리터에게 "이 결혼은 얼마 안갈거야" "곧 나와 사는 것을 질리게 만들어 줄게"라는 폭언을 내뱉으며 그녀를 압박했다고 한다.
이후 리터는 1925년 5월 5일에 시드니를 1926년 8월 16일에는 찰스를 낳았지만 결국, 1927년 1월 10일 채플린에게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람은 1927년 8월 22일에 이혼했고 이혼 소송 결과 채플린은 리터에게 60만 달러(2022년 물가로 환산하면 10.1 million 달러), 아들들인 시드니와 찰스에게 각각 10만 달러 씩 총 80만 달러의 위자료를 지불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는 당시까지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위자료 금액이었다고 한다.
이혼 소송은 미국 연방 정부에서 채플린을 탈세 혐의로 제기한 소송과 병행되었고, 덕분에 당시 작업하던 '서커스'의 개봉이 늦춰지는 원인이 되었다.
리터 그레이의 사후 두 사람의 이혼 소송에 관한 약 50페이지의 법정 기록이 세상에 공개됐는데 이 기록을 살펴보면 리터 그레이가 법정에서 찰리 채플린이 자신에게 세 명이 함께 성관계를 갖자는 등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성적 요구를 했으며 자신이 이를 거부하자 찰리는 이전에 사귀었던 여배우들은 요구를 다 들어줬는데 너는 왜 들어주지 못하냐고 자신을 향해 큰 소리로 윽박질렀다고 증언했다.
찰리 채플린과의 이혼 이후, 그녀는 위자료를 가지고 나이트클럽을 열었으나 망했고 이후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모두 이혼하였다. 그 후 평생을 홀로 살다가 1995년 암으로 향년 87세의 나이에 타계했다. 리터 그레이는 말년에 "찰리 채플린은 가난과 상처로 얼룩진 가정 환경 때문에 매우 불안정한 성격을 갖고있던 사람이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사실상 찰리 채플린이 만나왔던 여자들 가운데 찰리 채플린과 가장 사이가 나빴던 여자였으며 실제로 그 두꺼운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에서도 나름 부인이었던 리터 그레이에 대한 서술은 단 한 줄밖에 기재가 안되어 있다. 후술할 1992년 영화 《채플린》에서도 그녀에 대한 묘사는 1분도 되지 않는다.
  • 폴렛 가더드(1910년 ~ 1990년)
    뉴욕 출신의 배우. 《모던 타임즈》와 《위대한 독재자》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배우이다. 《모던 타임즈》에서 바나나를 훔치는 "집 없는 소녀"로 나오는 배우가 바로 이 사람이다. 매리언 데이비스처럼 지그펠드 쇼라는 1910년대 브로드웨이 쇼 출신이다. 목재 기업 사장인 첫 남편과는 1929년에 헤어졌고, 1932년 이혼이 완료됐다.
1932년 7월부터 채플린과 사귀기 시작해 《모던 타임즈》 개봉 5일 후인 1936년 2월 17일중국에서 비밀리에 결혼했는데, 찰리에게는 폴렛이 세 번째 부인, 폴렛에게는 찰리가 두 번째 남편이었다. 또한 결혼했을때 나이가 26세로 채플린이 결혼한 상대 중 유일하게 10대가 아닌 여성이었다.
결혼 생활은 밀드러드나 리터보다 길었지만 그래도 짧게 끝났다. 두 사람은 결혼한지 1년만인 1937년 무렵부터 자주 다투기 시작하였고 1938년 《위대한 독재자》의 제작을 시작했을 때는 이미 별거 중이었다. 두 사람은 《위대한 독재자》가 개봉한 1940년에 이혼했는데, 위의 두 여인들보다는 우호적으로 관계를 정리했다고 한다. 이후 플렛 가더드는 "찰리는 이혼을 원하지 않았어요. 이혼을 원한건 저였죠. 천재랑은 살기 힘들어요 그렇게 뛰어난 사람의 높은 정신적 레벨을 맞춰주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에요"라고 밝혔다.
플랫 가더드는 찰리 채플린과 이혼 후에도 파라마운트 영화사 등에서 계속 영화배우로 활동하다가 1958년 영화계 은퇴를 선언한 후 독일소설가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와 재혼했다.
영화계 은퇴 후에는 스위스로 거처를 옮겼고, 채플린 부부와 가까운 곳에서 살며 80세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그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찰스와 폴렛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없다.[24]
  • 조앤 배리(1920년 ~ 2007년)
    본명은 메어리 루이즈 그리블(Mary Louise Gribble). 1942년에 잠시 사귄 여성. 채플린은 이 여성을 배우로 키우려고 했는데, 배리가 정신병 증세를 보여 얼마 못 가 결별했다.
이후 배리는 채플린의 아이를 낳았다며 소송을 제기했는데, 혈액형 검사 결과 친자식이 아닌 것으로 판명[25]되었다. 하지만 당시 법원은 배심제의 폐해인 비논리적 판단에 따라 채플린을 아이의 아버지로 인정했고, 결국 채플린은 판결에 따라 그 아이가 21세가 될 때까지 양육비를 주며 부양해야 했다.
채플린은 이 재판에서 완전히 이미지를 구겨버렸고 이후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찰리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가까지 하여 결국 1952년, 찰리 채플린은 미국에서 추방당했다.
배리도 소송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결국 정신병 증세의 악화[26]로 1953년에 강제 격리[27]되었고, 이후로는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잊혀가다가 2007년 향년 87세로 사망했다.
40년 후 채플린의 FBI 문서가 공개되었을 때 FBI가 배리의 친자소송 배후에 있었다는게 밝혀졌다. 당시 채플린을 몰락시키기 위한 계획을 짜던 FBI 국장 에드거 후버가 채플린에게 쫒겨나 그를 증오하고 있던 조앤 배리에게 접근하여 친자소송을 제안한 것이었다.#
채플린과 결혼했을 때의 나이는 18세였고, 채플린과는 무려 36살 차이였다. 다시 말해 이때 찰리 채플린의 나이는 54세였다. 그녀의 아버지 유진 오닐은 채플린보다 겨우 1살 많다. 결국 채플린과 결혼하면서 이 결혼을 강력히 반대하던 아버지에게 의절당했다. 그러나 이 점은 유진 오닐에게 책임이 큰데, 자세한 것은 유진 오닐 항목을 참고할 것.
채플린은 오닐과 결혼을 할 때 평소 자신을 '미국에 배은망덕한 영국인'이라고 욕하던 연예계 칼럼니스트 헤더 하퍼(Hedda Hopper)를 물 먹이기 위해 라이벌인 루엘러 파슨스(Louella Parsons)에게 자신의 결혼 특종 소스를 줬는데 이에 분노한 하퍼는 그간 자신의 정보원들을 통해 수집한 채플린의 온갖 정보를 FBI에 넘겨버렸고, 친공산주의자 성향으로 보일 수 있는 채플린의 행적들을 FBI로부터 제공 받아 기사화하며 반채플린 여론을 조성했다. 이는 1952년의 재입국 금지에서 큰 역할을 했다.
채플린의 부인들 중 가장 많은 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장녀는 제럴딘(1944). 채플린이 1952년, 미국에서 추방당하자 우나도 찰스와 함께 미국 시민권을 포기했다.
채플린보다 14년 더 살았고, 1991년에 유방암으로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남편의 죽음을 슬퍼했다.

이 외에 중요성이 별로 없어서 생략했을 뿐이지, 채플린과 연인 관계였던 여성은 폴라 네그리[29], 루이즈 브룩스[30] 등을 포함해서 5명 정도 더 있다. 아래에 나올 매리언 데이비스도 이 숨겨진 다섯 명 중 한 사람이다.

4. 사회적 논쟁거리

여자 관계와 함께 채플린과 관련해 가장 격한 논쟁이 오간 부분이 정치적 성향이었다.《모던 타임즈》를 비롯한 여러 영화들에서 보여준 좌파적인 측면 때문에 종종 공산주의자 의혹을 받았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개박살났던 독일을 되살려낸 훌륭한 정치인(으로 그 당시에는 여겨진) 총통 양반을 까는 위대한 독재자가 결정적인 떡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우익(혹은 극우)[31] 세력들은 채플린을 탐탁치 않게 여기기 시작했고, 모던 타임즈에서 트럭에서 떨어뜨린 붉은 깃발을 들고 휘두르며 가져가라고 소리치다가 자기도 모르게 파업 시위를 주도하는 장면이나[32] '순례자'를 소련 대표 신문인 프라우다에서 칭찬한 기사같은 별의별 잡다한 사례를 마구 끌어다가 빨갱이라는 증거로 만들기 위해 기를 썼다. 거기다 찰리 채플린은 인종차별을 반대하였기에 KKK단 같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도 위협을 받고 하였으며 당시 인종차별주의로 유명한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는 찰리 채플린이 인종차별반대 나치 비판을 핑계로 찰리 채플린을 공산주의자로 단정짓고 찰리 채플린을 감시 및 도청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에는 매카시즘으로 촉발된 '반미활동위원회'라는 심사에도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고 실형을 선고받던 다른 '피고'들과 달리 끝까지 개기는 용자 기질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같이 기소되었던 독일 망명 작곡가 한스 아이슬러를 지원해주고, 프랑스에 체류 중이었던 파블로 피카소에게 미국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담은 편지를 보내는 등 무고 주장 이상의 대담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순례자'나 '살인광 시대'에서 보이는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미국과 영국의 종교 관련 단체들을 자극했고, 1차 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복무 기피자'로 영국 언론에서 까이기도 했다. 사실 채플린은 1차 대전이 발발하자 현역을 자원했지만, 신장과 체중 미달로 탈락했다. 그리고 전쟁 자금을 대기 위한 채권 구입을 호소하는 집회에서도 자주 연설했고, 작품 목록에 나온 것처럼 아예 '채권'이라는 선전 영화를 형 시드니와 같이 만들기도 했다. 거기다 2차 대전 당시에는 아들들이 현역으로 복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치적인 문젯거리 외에 키스턴의 맥 세넷과 동료였던 트라이앵글 영화사의 타머스 인츠[33]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론에도 얽힌 적이 있었다. 1924년 11월에 미국 신문왕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자신의 거대한 요트에서 주최한 선상 파티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는데, 언론에서는 인츠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보도했지만 몇몇 사람들이 "인츠의 머리에 총알 구멍이 나 있었고 혈흔도 있었다."[34]고 증언해 파문이 일었다.

요트에 승선한 이들로는 인츠 외에 허스트와 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 채플린, 그외 여러 저명 칼럼니스트들과 시나리오 작가, 배우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같이 인츠가 요트 위에서 허스트에 의해 살해 되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사건을 맡은 샌디에이고 경찰서도 인츠의 사인을 심장마비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지만, 사건 뒤에도 채플린[35]이나 허스트가 보여준 미심쩍은 행동 등이 겹쳐 잠시 떡밥이 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채플린이 허스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와 불륜 관계였고, 한창 검열삭제(혹은 키스) 중에 허스트와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들켰다고 한다. 격분한 허스트가 두 사람에게 총을 쐈는데, 그만 총알이 빗나가서(!) 엄하게 옆에 있던 타머스 인츠가 맞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런 명백한 살인을 과실치사나 자살이 아닌 심장마비에 의한 돌연사로 은폐하려 했냐는 데 있다.

아무리 언론을 쥐락펴락하던 천하의 허스트라 할지라도 이런 은폐 전략을 실행하기는 대단히 어려웠고, 실제로 그 소문 때문에 여러 차례 조사가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심장마비라는 인츠의 사인을 뒤집을 만한 단서는 어디에도 없었고, 허스트나 기타 요트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군가가 인츠를 죽였다는 설은 거의 도시전설 수준의 이야기로 남아있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 그의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가 금지가 모두 풀린, 공교롭게도 그의 탄생 100주년에 딱 맞춘 1989년이 되어서야 한꺼번에 여러 편이 개봉하게 된다. 당시 채플린 영화들을 단독으로 수입, 개봉하던 곳이 우진필름과 그 계열이던 씨네하우스 극장. VHS 비디오판조차도 계열인 우진비디오에서 냈는데 수입사 대표가 영화감독이자 제작자이던 정진우였다.

5. 음악

찰리 채플린 관련 매체들 하면 많이 등장하는 음악인 "His Morning Promenade". 영화 키드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왼쪽에 개재된 버전은 영화에서 OST로 쓰인 버전이다. 오른쪽에 개재된 버전은 좀더 템포가 빠르고 개그스럽게 가공된 버전으로 Living Strings(RCA 전속 악단)가 연주하였고 이게 채플린 관련한 매체에서 많이 쓰인다. 아무튼 이 곡은 채플린과 관련한 매체만이 아니라 개그스런 다른 매체에서도 많이 인용되어 쓰인다. 핑크 팬더 테마곡과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한데, 안그래도 핑크팬더 테마곡처럼 이 곡도 뭔가 꽁기꽁기한 상황이나 개그적인 추리극 상황 등에서 자주 쓰이는 마성의 BGM이다. 일례로 한국에서는 감기·비염약 액티피드를 광고할 때 찰리 채플린을 인용한 광고에서 쓰인 바 있다. #

배우 활동 초기에는 음악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하는데, 노래 외에도 바이올린첼로, 피아노를 독학 혹은 몇 차례의 레슨 등으로 익혔다고 한다. 단, 바이올린과 첼로의 경우 왼손잡이였던 관계로 줄을 역순으로 감고 왼손으로 활을 켰다. 이외에도 몇몇 자선 음악회나 가수들의 녹음 때 지휘자로 등장하기도 했고, 《뉴욕의 왕》이나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의 오리지널 스코어(영화음악 연주곡) 녹음을 위한 리허설이나 시연회에서도 관현악단을 지휘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자신의 영화에 음악을 직접 붙인 만큼 작곡에도 관심이 있었던 것도 분명한데, 특히 《모던 타임즈》에 나오는 'Smile'은 원래 그냥 스코어로 작곡된 음악이었지만, 상당한 인기를 얻어 존 터너와 제프리 파슨스가 가사를 붙여 대중가요로 만들었다. 이 가요판은 냇 킹 콜 같은 재즈 음악인들부터 월드스타 마이클 잭슨, 클래식 테너 가수 플라시도 도밍고까지 불렀고, 지금도 계속 리메이크되고 있다. 영화 조커의 트레일러 삽입곡으로 또다시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

이외에도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의 '이것이 나의 노래(This is My Song)'도 나름대로 히트한 주제가다. 노쇠해지면서 만년에 자신의 구작 무성영화들을 재편집해 내놓을 때도 스코어를 직접 작곡했는데, 임종 직전, 가장 마지막으로 한 작업도 《파리의 여인》에 음악을 붙이는 것이었다.[36]

그러나 채플린의 영화음악 작업은 엄밀히 말하면 초보적인 작곡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실제로 스코어 작곡 작업의 기초는 채플린 자신이 어떤 곡조를 흥얼거리거나 악기로 연주해 보이는 것이었고, 이 때문에 실제로 스코어를 관현악용으로 정서하기 위해서는 전문 편곡자를 필요로 했다. 가령 첫 영화음악인 시티 라이트의 경우 아서 존스턴이, 나머지 영화들의 스코어도 막스 테르(황금광시대), 에드워드 파월과 데이비드 랙신(모던 타임즈), 메러디스 윌슨(위대한 독재자), 루디 슈래거(살인광시대), 레이 래시(라임라이트), 보리스 사르벡(뉴욕의 왕), 램버트 윌리엄슨(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등의 영화음악 전문 편곡자들이 따라붙어 완성시켰다.

물론 채플린 자신은 자서전에서 이런 작업을 하면서 지휘자용 총보를 보는 법이라든가 하는 전문 지식을 익혔다고 쓰고 있지만, 아무래도 작곡과 지휘, 영상과 음악의 싱크 작업 등을 혼자 할 만한 수준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늘 편곡자를 필요로 했다. 이 작업 방식은 대개 전문 작곡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데 익숙했던 편곡자들에게는 상당히 고역이었는데, 각각 모던 타임즈의 편곡과 지휘를 맡았던 에드워드 파월과 앨프리드 뉴먼이 이 때문에 채플린과 대판 싸우고 때려치면서 신출내기였던 데이비드 랙신이 대신 작업을 맡아 마무리지어야 했다. 하지만 랙신도 채플린이 언제고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악기를 연주하면서 받아적으라고 할 지 몰라 며칠 밤을 새우며 수면 부족 상태로 대기타고 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요새라면 채플린이 집에서 데모 녹음해서 전문 작곡자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작업했겠지만 당시 개인 녹음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시절이라 생겼던 해프닝.

어쨌던 OST에 들어간 음악 자체는 채플린 자신의 착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작곡자는 채플린으로 등록되어 있고, 채플린이 아직 생존 중이던 1972년에는 영국의 팝스 오케스트라 지휘자인 스탠리 블랙이 여러 영화의 OST에서 가려뽑은 곡들을 편곡해 녹음한 헌정 앨범을 데카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채플린 사후에도 OST의 히트 넘버들이 계속 여러 형태로 편곡되어 음반으로 발매되고 있고, 영국의 작곡가 겸 지휘자인 칼 데이비스와 티머시 브록은 채플린의 영화음악 악보를 복원해 영화 상영과 동시에 현장에서 생음악으로 연주하는 라이브 오케스트라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6. 국내 인식

채플린은 정부 수립 후 대중에게는 공산주의자가 아닌 1920년대의 위대한 코미디언 정도로 인식되었고[37] 사회주의자였던 헬렌 켈러처럼 그의 후반기는 말 그대로 삭제되어 알려져 있었다. 방송국에서 명절 특선 등으로 1910년대 그의 단편들[38]을 TV에서 틀어주곤 했지만, 매카시즘적 시비가 있던 위대한 독재자 같은 작품은 개봉금지작으로 분류되어 대중에게 인지도는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민주화가 진행되고 88올림픽이 개최된 1988년에서야 개봉금지작 영화들에 대한 제재가 풀려 그의 영화가 정식으로 우리나라에서 개봉됐다. 정진우가 운영하던 우진필름에서 채플린 영화를 여럿 개봉했는데 《모던 타임즈》는 1988년 7월 2일 개봉되어 서울 관객 26만을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후 1991년~1992년에 걸쳐 우진비디오에서 채플린영화제라는 이름으로 그의 명작선 테이프 시리즈가 출시됐었으며, 모던 타임즈위대한 독재자[39]는 비디오 대여 시장에서 몇 주간 순위권에 머무르기도 했다. 이후로도 모던 타임즈키드가 다시 재개봉하거나 상영회가 열리는 등 무성 영화 시절 감독 중에서는 한국에서도 입지가 탄탄한 축에 속한다.

7. 기타

  • 뮤추얼 전속 시절, 요양 겸 휴가차 한 시골에 내려갔다가 거기서 '찰리 채플린 따라하기 대회'를 하길래 신분을 감추고 참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1등을 하지 못했다.[40]
  • 무성영화 시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 무성영화들 상당수가 필름이 소실된 로스트 미디어 신세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술한 것처럼 채플린이 출연한 영화는 단 1편을 제외하면 모두 전해지고 있다.[41] 거의 모든 출연 영화가 보존될 정도로 채플린의 인기가 많았다는 증거라고 봐도 무방하다.
  • 채플린히틀러는 정말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1889년생 동갑에, 생일은 채플린이 4일 일찍 태어났으며, 둘다 예술가를 지망했고,[42] 칫솔모처럼 짧게 다듬은 콧수염을 달고 분장한 채플린의 방랑자 캐릭터는 히틀러와 비슷하게 생겼다.[43] 이 때문에 위대한 독재자에서 채플린이 열연한 독재자의 모습은 히틀러를 빼다 박았다.
    다만 맨 얼굴의 채플린은 히틀러와는 그다지 닮지 않았다. 평범하게 생긴 히틀러에 비하면 채플린은 문서 최상단의 사진에서 보다시피 이목구비가 매끄러운 미남이었다.[44] 이 콧수염을 두고 '히틀러를 풍자하기 위해서 한 분장'이라고 여기기는 이들도 있지만, 이 수염 분장은 히틀러가 정계에 데뷔하기도 전에 채플린이 '떠돌이' 캐릭터를 위해 먼저 했다. 그래서 오히려 '유명 배우인 채플린의 모습을 보고 히틀러가 따라 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부분은 조금 애매하다. 독일에서 채플린의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히틀러가 수염을 그렇게 길렀다는 정황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45]
    이렇게 두 사람은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최후는 너무 완벽하게 대조된다. 히틀러는 한때 세계를 공포에 떨게 만든 야심가였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자손 하나 남기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그의 이름은 세계사에 악인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이와 대비되게 채플린은 상술한 대로 수많은 자손들을 남겼고, 크리스마스에 정말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위대한 영화인 중 한 사람으로 전 세계의 존경을 받고 있다.
  •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지만, 1938년에는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심각한 소설 '리듬'을 발표하기도 했다. 국내 시공사에서 출판한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시리즈의 80번째 권《찰리 채플린, 희극이라는 이름의 애수》라는 책 후반부에 번역본이 실려있다.
  • 자서전을 보면 젊은 시절 싸움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싸움을 잘했었는지 신참이라지만 프로 복서랑 연습을 하는데 가지고 놀았다거나, 복싱 선수하고 여자 문제로 호텔방에서 싸웠는데 비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자서전 내용이라 완전히 믿는데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사이가 안 좋았던 MGM 영화사의 창립자 루이스 메이어와 찰리 채플린이 호텔 로비에서 싸움을 벌였는데 채플린이 메이어의 주먹 한 방에 나가 떨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 당시 기준에서 채플린은 영화 제작에 참여한 스탭들이 너무 꼼꼼하게 영화를 찍는다고 불평할 정도로 상당히 정교하고 치밀하게 영화를 찍는 편이었다고 한다. 채플린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버스터 키튼도 채플린은 영화를 만들 때 시계공처럼 정교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이다.
  • 어린 시절 찢어지는 가난을 겪은 탓인지 돈 문제에 인색한 면모를 보였다고 한다. 한 주당 $10,000 이상[46]을 벌어들이는 스타가 된 후에도 꼬박꼬박 주급을 저축했으며, 좀처럼 현금을 들고 다니지 않아서 지인들과의 식사모임에서도 웬만해선 본인이 식대를 내는 일이 드물었다고 한다.# 같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를 설립한 영화 감독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가 자금 문제로 채플린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때도 매몰차게 거절했다. 찰리 채플린이 얼마나 구두쇠였냐면 돈을 아낄려고 옷조차 잘 갈아입지 않아서 평상시 그의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고 향수를 뿌려서 이를 감췄다고 한다.[47] 단, '키드'의 꼬마 아이로 나온 배우 존 레슬리 "재키" 쿠건이 금전적 지원을 요청했을 때 채플린이 1천 달러라는 거금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긴 하다.
  • 1932년 일본을 방문했다가 암살당할 뻔 했다. 5월 14일 고베항에 도착했고, 다음날 도쿄에서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의 초청을 받았는데, 덴뿌라를 먹고 스모 구경을 해야한다는 이유로 약속을 다음날로 미뤘다고 한다. 드디어 마중나온 아들 이누카이 다케루[48]와 함께 스모 구경을 마치고 덴푸라를 먹으러 가는데... 바로 그날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암살당했다. 채플린이 운이 나빴던 게 아니라 쿠데타 주모자들이 애초부터 채플린을 총리와 함께 암살할 작정으로 방일을 노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의 계획대로라면 이누카이는 물론이고 채플린도 끔살당할 뻔했다.# 운이 좋았던 것. 하지만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던 채플린은 당일 저녁 새우 덴뿌라를 매우 즐겼다고 한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도 자주 덴뿌라를 먹으러 일본에 발을 들였다고 한다.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 자서전에 따르면 범인들은 채플린이 미국인인 줄 알고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상기한 대로 채플린은 대부분의 영화 활동을 미국에서 했으나 엄연한 영국인이다. 이 일화는 2018년 3월 1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심지어 2.26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도 채플린은 도쿄에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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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플린에 대한 전기 영화로 1992년작인 《채플린》이 있다. 채플린 역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맡았는데, 지금이야 아이언맨 시리즈로 세계 최정상급 스타의 반열에 오른 배우가 됐지만, 당시의 그는 유명한 대표작도 없었고, 채플린의 19~83세라는 장대한 기간을 연기하기에는 너무도 경험도 없고, 나이도 어린 20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채플린을 완벽하게 재현하기 위한 혹독한 노력으로 열연을 펼쳐,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그해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 후보에 노미네이트되었다.
  • 할리우드 초창기 시절, 시민 케인의 제작 비화를 다루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2020년 영화 맹크에 찰리 채플린도 잠시 단역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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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채플린의 이름을 딴 발리송 기술이 있다.
  • 포켓몬스터에 나오는 가라르지방의 포켓몬 마임꽁꽁의 모티브이다. 가라르지방은 영국을 모티브로 한 지방으로, 타입 중 하나인 얼음은 모던 타임즈의 스케이트를 타는 장면에서 착안한 것이다.
  • 해병문학의 등장인물인 야율 채플린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점은 야율 채플린은 설정상 베트남 출신 외노자라는 것.


[1] 시드니 채플린으로 바뀌어 불린다.[2] 찰리 채플린이 미국으로 입국을 거부당하자 스위스로 이주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3] 1959년생[4] 1977년생[5] 1979년생[6] 1964년생[7] 1966년생[8] 트리니다드 토바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9] 1975년생[10] 1980년생[11] 보그 <이탈리아 판>에 나왔던 딸 오렐리아.[12] 키 173cm로 이쪽도 상당히 키가 크다.[13] 의외로 윈스턴 처칠과 사이가 좋았다. 둘의 정치 성향은 정 반대였으나 처칠이 영화광이었고 두 사람 모두 아돌프 히틀러와 적이었던 탓에 둘은 서로에 대한 존경을 갖고 있었고, 자주 만남도 가졌다고 한다. 처칠은 위대한 독재자를 개봉하기 전 먼저 총리 관저에서 관람했는데, 굉장히 흡족해 했다고 한다.[14] 그런데 이것도 불행 중 다행인 게, 위대한 독재자라는 영화 자체가 나치와 히틀러를 까기 위해 만든 데다 그 내용을 모른 채 봤기 때문에 다행이지, 만일 알았으면 채플린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치의 인종 청소 대상에는 유대인 뿐 아니라 채플린의 혈통인 집시도 끼어 있었다. 외국의 질분답변 사이트 Quora에서는 이에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자신의 행적을 제3자의 시선에서 '조롱'했으니만큼 히틀러가 당연히 싫어하고 채플린을 죽이려 했을 것이라는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15] Max Linder(1883~1925). 프랑스 영화 초창기 최고의 인기 코미디언. 채플린보다 몇년 일찍 데뷔해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의상이나 연기스타일 면에서 채플린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프랑스 사회 분위기가 비관적으로 바뀌면서 랭데르의 인기도 추락. 미국 진출 등을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16] 동양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여성의 조혼을 선호하는 풍습이 있었으나 서양, 특히 유럽 쪽은 이미 근대시대부터 20대 초중반에 결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게 되었다.[17]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 중 발췌.[18] 10대 중,후반의 여성들만을 골라 사귄 것, 사귀고 있는 연인과 헤어질 때를 대비해 다른 여자들과 양다리를 걸친 것.[19] 실제로 유튜브에서 Charlie Chaplin이라고 검색해서 나오는 대부분의 짧은 콩트류의 영상에서 거의 모든 여주인공은 다 이 분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20] 그런데 이 실패에는 의외로 에드너 퍼바이언스 본인의 이미지에 타격이 있던 대형 스캔들 사건이 한 몫하기도 했다. 평소 에드너는 그녀의 절친했던 여배우 메이블 노먼드(Mabel Normand, 1893 ~ 1930)와 함께 석유 재벌 코틀런드 다인즈(Courtland Dines)라는 남자와 서로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1924년 메이블의 운전기사였던 그리어(Greer)라는 남자가 다인즈를 총으로 쏜 사건(범행 사유는 그리어가 재판 출석을 거부함에 따라 끝내 밝혀지진 않았으나, 그리어가 메이블에 대해 이성적 호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질투심에 의한 우발적 범행이라는 설이 그나마 설득력이 있는 편이다. 물론, 고용주인 메이블은 이에 대해 부인했다.)이 발생한 것이다. 이로 인해 에드너는 메이블과 함께 순진한 재벌 남자적당히 꼬시고 놀려고 했던 여자라고 손가락질 당하는, 여배우로서는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되었고, 이런 악평에 정신적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매일을 술에 찌들어 사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은 이런 그녀의 모습을 안쓰럽게 여겨서 자신의 회사인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첫 영화에 그녀를 주인공으로 투입시켜 배우로서의 길을 계속 이어가게 해주려는 노력을 보여준 것이었다.[21] 실제로 찰리 채플린은 그녀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퇴사한 이후에도 꾸준히 연금 같은 형식으로 소량의 월급을 줬다고 한다.[22] 이에 찰리 채플린은 루이스 메이어를 벼르고 있었는데, 한 호텔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치자 채플린이 먼저 내 명성을 이용했다며 메이어를 도발했고 메이어는 채플린에게 변태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화가 난 채플린이 주먹을 날렸고 노동자 출신의 메이어가 반격하여 채플린을 주먹 한방에 KO시켰다는 일화가 있다.[23] 찰리 채플린은 외도 상대로 의심되는 사람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대중들은 러시아 출신 여배우 겸 시나리오 작가였던 양성애자의 알라 나지모바(1879 ~ 1945)를 의심하였다고 한다.[24] 폴렛은 첫번째 결혼 생활 중 한 번 유산한 이후로는 평생 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25] 유전법칙에 따라 혈액형부터 성립이 불가능한 상태.(추정 부(父)인 채플린은 O형, 베리는 A형, 아이는 B형. 정말 친자였다면 A형과 O형만 나올 수 있다. B형 유전자는 A형 및 O형과 염기서열이 다수 다르기 때문에 돌연변이를 고려해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26] 당시 나이 33세인데도, 어린이 샌들과 어린이용 장난감 반지를 끼고 돌아다녔다고 한다.[27] 이때 그녀의 후견인으로 지목된 사람이 당시 10살이던 그녀의 딸 캐롤 앤 배리(Carol Ann Barry)였다. 캐롤은 상술한 채플린의 친자 소송 결과에 따라 21살까지 양육비를 지급받게 된 대상자였고, 아마도 후견인으로서 정신병 질환의 어머니를 보살피는데 이 양육비가 어느 정도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28] '느릅나무 밑의 욕망'이 가장 유명하다.[29] 폴란드 출신의 여배우. 1923년 폴라가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채플린과 연인 관계가 되었고 둘이 결혼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았지만 결혼까지 가지는 않았다. 채플린은 1년 후인 1924년 리터 그레이와 결혼했다.[30] 플래퍼 시대 아이콘으로 유명했던 배우로 플래퍼 항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 판도라의 상자가 있다. 채플린이 두번째 부인인 리터 그레이와 별거 중일 때 잠시 사귀었다고 한다.[31] 이때의 미국 극우는 인종차별주의 정당화를 주장하였다.[32] 《모던 타임즈》의 공장 장면이 나치스 치하의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 "우리에게 자유를"의 장면을 도용했다는 얘기도 있었다.[33] 초기 영화 시절 서부극을 시도했던 감독이자 제작자다.[34] 혹은 피범벅이 된 인츠의 시체가 실려 나왔다.[35] 자신은 인츠의 장례식장에 간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후 장례식에 참석한 그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등등.[36] 때문에 홈비디오나 복원판으로 만들어지는 채플린 무성 영화 사운드트랙은 생전 재개봉 당시 채플린이 만들고 녹음한 스코어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무성 영화 사운드트랙은 감독 검수 없이 새로 작곡해 녹음하는 케이스가 많아 판본이 다양한 경우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메트로폴리스(영화)가 있다.), 채플린은 예외에 속한다.[37] 채플린의 전성기였던 식민지 조선에서도 이름이 실릴 정도로 인지도가 있었다.[38] 상기한 바와 같이 1970년대에 음악을 입혀 재개봉한 단편들.[39] 출시 당시는 독재자라는 제명[40] 정확한 등수는 2등이었다는 말도 있고 3등이었다는 말도 있다. 매체마다 결과가 다르다.[41] 채플린이 아직 살아 있던 1965년 기준으로 채플린의 초기 무성영화 5편이 '영원히' 유실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2014년까지 이들 중 4편이 발견되었다.[42] 채플린은 어렸을때부터 음악가를 지망해서 됐지만 히틀러는 화가를 지망했지만 결국 낙방했다.[43] 이 외에도 유년기 시절 그다지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아왔다는 점. 그리고 삶의 전성기가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대였다는 점 등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44] 나중에 코미디로 대박을 친 탓에 이미지가 굳어져서 그렇지 젊은 시절의 찰리 채플린은 굉장한 미남이었다.[45] 히틀러는 1차대전 참전 시절에도 콧수염을 길렀지만 좌우로 길게 뻗은 카이젤 형태였다. 이후 히틀러가 좀 더 짧아진 콧수염을 단 것은 1차대전이 끝난 후이며, 그 과정에서 채플린의 떠돌이 캐릭터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46] 오늘날 금액으로 환산하면 거의 $220,000에 해당[47]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에서 발췌[48] 찰리 채플린의 비서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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