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4:41:57

응오딘지엠

응오 딘 지엠에서 넘어옴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디엠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DM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ff00, #ffff00 20%, #ffff00 80%, #ffff00); color: #DA251D;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DA251D>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응오딘지엠 응우옌반티에우 쩐반흐엉 즈엉반민 }}}}}}}}}

파일:대한민국장 약장.png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D4D4D, #696969 20%, #696969 80%, #4D4D4D); color: #fede58"
{{{#fede5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파일: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부장.png
1949
이승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49
이시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파일:미국 국기.svg
1953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1955
하일레 셀라시에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1957
응오딘지엠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1958
아드난 멘데레스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1962
허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좌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오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조병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안중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윤봉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강우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안창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신익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김창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손병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승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한용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최익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이강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민영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4
더글러스 맥아더
파일:미국 국기.svg
1964
해리 S. 트루먼
파일:미국 국기.svg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파일:독일 국기.svg
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파일:차드 국기.svg
1965
다비드 다코
파일:중앙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1965
수루-미강 아피디
파일:베냉 국기.svg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파일:세네갈 국기.svg
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1965
레옹 음바
파일:가봉 국기.svg
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파일:카메룬 국기.svg
1965
하마니 디오리
파일:니제르 국기.svg
1965
조모 케냐타
파일:케냐 국기.svg
1965
무테사 2세
파일:우간다 국기.svg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파일:마다가스카르 국기.svg
1965
툰쿠 압둘 라만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66
타놈 키티카초른
파일:태국 국기.svg
1966
쑹메이링
파일:대만 국기.svg
1966
천궈푸
파일:대만 국기.svg
1968
쑨원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8
천치메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파일:엘살바도르 국기.svg
1970
조만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6
임병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77
필립 제이슨
(서재필)

파일:미국 국기.svg
1979
박정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0
최규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1
시리낏 끼띠야꼰
파일:태국 국기.svg
1981
푸미폰 아둔야뎃
파일:태국 국기.svg
1983
전두환(취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김규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조소앙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
장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8
여운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유관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
홍범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 : 독립유공자 : 기타 공훈 및 국가원수}}}}}}}}}

<colbgcolor=#ffff00><colcolor=#DA251D,#e72d24> 베트남 공화국 초대 총통
응오 딘 지엠
오정염 | [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琰,ruby=Diệm)][1]
파일:고딘.png
출생 1901년 1월 3일
인도차이나 연방 안남 보호령 꽝빈 성 레투이 지구 다이푸옹록 마을
(現 베트남 꽝빈성 레투이현 퐁투이 마을)
사망 1963년 11월 2일 (향년 62세)
남베트남 사이공 도성 (現 베트남 호치민시)
재임기간 베트남국 수상
1954년 6월 16일 ~ 1955년 10월 26일
초대 총통
1955년 10월 26일 ~ 1963년 11월 2일
서명
파일:NgoDinhDiemSignature.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ff00><colcolor=#DA251D,#e72d24> 부모 아버지 응오딘카吳廷可
어머니 팜티탄范氏紳
형제자매 형 응오딘코이吳廷魁·응오딘툭吳廷俶
아우 응오딘칸吳廷瑾·응오딘뉴吳廷瑈·응오 딘 루옌吳廷練
누이 응오딘자오吳氏交 ·응오딘히옙吳氏協·응오딘흐엉吳氏璜
학력 Hue Pellerin Seminary
National School College
미시간 주립대학교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식민지 관료에서 독립운동가로2.2. 8월 혁명에서 집권까지2.3. 친프랑스 세력의 제거와 바오다이의 축출2.4. 독재의 길과 미국에 대한 의존2.5. 공산화의 위협과 사회 혼란의 가중2.6. 경제성장과 실패한 내부 개혁
2.6.1. 농지2.6.2. 밀집촌2.6.3. 프로젝트의 중단2.6.4. 한계와 문제점
2.7. 백색테러와 학살2.8. 쿠데타와 피살2.9. 사후
3. 평가
3.1. 미국 괴뢰론3.2. 낡은 전통주의자3.3. 전면적 재평가
3.3.1. 반론
3.4. 기형적인 지엠 정권의 구조3.5. 다른 반공주의 지도자들과의 비교3.6. 총론
4. 참고 문헌5. 여담

[clearfix]

1. 개요

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총통(대통령)[2].

식민지 관료로서 사회활동을 시작했지만 프랑스 제국주의에 항의하여 독립운동에 나섰고, 호치민도 응오딘지엠을 포섭하려고 했을 정도로 한때는 독립운동가로서 명성이 자자하여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가 종식되고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된 이후로도 80만명에 달하는 반공 탈북민을 정착시키고 부패한 군벌을 일소했으며 경제성장을 이끄는 등 나름대로 뛰어난 업적을 세웠지만, 오래지 않아 족벌정치와 불교탄압을 일삼는 등 무능하고 타락한 독재자가 되면서 민심을 잃었고 결국 세계적으로 어그로를 끌면서 군부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응우옌반티에우를 제외한 그 이후의 지도자들이 응오딘지엠만도 못한 역량과 지도력을 지닐 정도로 무능하여 안정화에 실패했고, 남베트남은 미국에 의존하는 파탄국가로 전락하다가 결국 1975년에 멸망했기에 역대 남베트남의 지도자 가운데서는 그나마 능력은 있던 인물이라는 재평가를 어느 정도 받게 되었다.

2. 생애

2.1. 식민지 관료에서 독립운동가로

1901년, 광평성[ruby(省,ruby=Tỉnh)][ruby(廣,ruby=Quảng)][ruby(平,ruby=Bình)] 여수현[ruby(縣,ruby=Huyện)][ruby(麗,ruby=Lệ)][ruby(水,ruby=Thủy)]의 독실한 가톨릭교도 가정의 3남으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장바티스트(Jean-Baptiste). 그의 아버지 오정가[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可,ruby=Khả)](세례명 미까애·Micae)는 프랑스의 꼭두각시가 된 응우옌 왕조에서 예부상서를 지냈으나 1907년 프랑스에 항의하여 사임했고, 이 때문에 애국자라 불리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아들인 응오딘지엠 역시 행정학교 졸업 이후 식민지 관료의 경력을 밟았으며 1930년대 초반에는 공산주의와 연대한 반프랑스 성향의 농민 봉기를 프랑스와 함께 진압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3년 이부상서로 임명된 후 두달이 되지 않아 프랑스가 베트남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항의하며 사직하였고 다시는 식민지 관료의 길을 걷지 않았다.
파일:20231210_121156.jpg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응오딘지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의 인도차이나 진주가 시작되자 응오딘지엠은 일본과 협력하여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을 독립시키고자 했다. 1943년, 베트남의 민족주의 정당을 규합하여 프랑스에 맞서려고 했는데 이것이 적발되어 식민당국에 체포될 뻔 했으나 일본의 도움으로 사이공으로 도피했다. 이후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과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일본이 1945년 3월 9일 비시 프랑스를 내쫓고 베트남 제국을 선포하며 인도차이나 병탄의 의지를 보이자 응오딘지엠은 바오다이의 정부를 구성해달라는 제안을 뿌리쳤다. 이에 대해서는 전통주의적 해석에 따라 일본의 힘을 빌려서 베트남을 독립시키려 한 것을 부귀영화를 위해 친일했다는 식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이 해석은 북베트남의 프로파간다에 무비판적인, 잘못된 해석으로 간주된다.

비슷한 시기에 호찌민이 주도하는 베트민 세력이 강대해지자 응오딘지엠을 비롯한 반공 민족주의자들은 프랑스의 편을 들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호찌민의 편을 들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고민하다가 반식민, 반공주의를 표방하는 제3세력을 추구했다. 이때 베트민은 1945년 8월 사이공에서 후에로 이동하던 응오딘지엠을 억류하고 그의 맏형인 응오딘코이를 처형했다. 이 때문에 베트민과 응오딘지엠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고,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연립정부에 참여해달라는 호찌민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호찌민은 독립운동가로 나름 명성이 높았던 그를 억류하는 것이 정치적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반공 성향의 민족주의 세력을 포섭하려면 그가 필요하다는 것을 감안하여 그를 석방했다. 아래의 대화는 스텐리 카노우의 책에 나오는 대화다.
응오딘지엠: 나에게 뭘 원하는 겁니까?


호치민: 내가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나에게 항상 원했던 것입니다.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당신의 협력이오. 우린 같은 대의를 추구합니다. 따라서 우린 함께 해야 합니다.


응오딘지엠: 당신은 조국을 불태우고 파괴한 범죄자입니다. 또한 당신은 나를 포로로 붙잡았고요.


호치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에 대해 먼저 사과합니다. 억압받던 민중들이 봉기하면 그런 실수들은 불가피하고 비극이 나타나죠. 하지만 저는 인민들의 복리가 그런 오류보다도 더 중대하다고 봅니다. 불만의 여지가 있겠지만 이제는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응오딘지엠: 당신의 부하들이 내 형을 죽인 것을 잊어버리라는 얘기오?


호치민: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 형제들의 죽음에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소. 나 또한 이 지나친 일에 대해 당신만큼이나 유감스럽게 생각하오.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당신을 이곳에 데려오기 위해 제가 명령이라도
한 줄 아십니까? 더군다나, 당신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우리 정부의 중차대한 직책을 맡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응오딘지엠: 친형제와 친형의 자식은 수백 명의 사망자 중 2명에 불과합니다. 이외에도 수백 명이 배신당했습니다. 나를 불러 함께하자고 초청할 자격이 있다고 자부할 수 있소?


호치민: 과거 일에 지나치게 빠져 있군요. 미래세대에 대한 교육과 인민생활의 향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응오딘지엠: 몰지각한 말만 하는구려. 협박을 받으면서까지 나는 조국을 위해 일할 이유가 없소. 나는 자유인이오.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고. 똑똑히 보세요. 내가 탄압과 죽음에 겁먹을 사람으로 보이는지.


호치민: 당신은 자유인이오.
Vietnam: A History, Viking, 1983, p.232~233

흔히 미국의 지지를 받아 하루아침에 떠오른 듣보잡 정도로 여겨지지만, 이 시기의 응오딘지엠은 베트남에서 두루 존경받으며 호찌민도 무시할 수 없는 중량감 있는 독립운동가였다.

2.2. 8월 혁명에서 집권까지

1945년 8월, 혁명으로 바오다이의 베트남 제국은 붕괴되었으나 1949년, 엘리제 협약을 통해 바오다이는 다시 베트남의 지도자로 복귀했다. 응오딘지엠은 이런 상황에 반발하여, 1949년 6월 16일 성명을 통해 베트민은 물론 바오다이와도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이에 친프랑스파는 물론 베트민 역시 응오딘지엠을 위협적인 라이벌로 여겨, 1950년 2월엔 응오딘지엠 암살령을 내렸다. 이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가톨릭 주교인 둘째 형 응오딘툭과 함께 외유를 떠나, 일본, 미국을 돌며 정치적 입지 확보를 꾀했고 바티칸을 들러 교황 비오 12세를 만나기도 했다. 이때의 미국 방문이 성과를 거두었는데 존 F. 케네디, 마이크 맨스필드, 윌리엄 더글라스를 비롯한 미국의 정치 거물들과 1953년에 접촉하여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어 미국이 자신을 지지하게 만든 것이었다. 같은 시기에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뉴는 베트남에 남아 형을 위해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고 있었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자 궁지에 몰린 바오다이는 응오딘지엠을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 미국의 압력이라는 해석이 많았으나 결정적인 증거는 발굴되지 않고 있으며 바오다이는 이것이 베트남인들 스스로의 논리적 선택이었다고 회고했다. 1954년 6월 16일, 응오딘지엠은 전권을 약속받은 총리직을 수락했다.

이후 제네바에서 베트남 문제 해결을 위한 9개국 회담이 개최되면서 1956년 전국 총선거 이전까지 베트남을 북위 17도선에서 분할한다는 것이 합의되었고 프랑스 군대는 총선거 실시 때까지 주둔하기로 하였다. 이 제네바 협정에서 미국은 협정 준수는 선언했지만, 북베트남의 공산화를 불만스럽게 여겨 서명은 하지 않았다. 바오다이 정부 역시 서명하지 않았다.

2.3. 친프랑스 세력의 제거와 바오다이의 축출

내가 앞장서면, 나를 따르라. 내가 달아난다면 나를 죽여라. 내가 적들에게 죽는다면, 나의 복수를 해다오!
1954년의 발언.

전권을 약속받고 수상직에 올랐지만 응오딘지엠의 입지는 아주 불안했다. 일단, 친불 성향이 아주 강했던 베트남국의 기득권층은 응오딘지엠에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베트남국 정규군의 대부분은 프랑스군에게 훈련받은 군대였고, 특히 총참모장 응우옌반힌은 대놓고 응오딘지엠을 제거하겠다고 천명하고 있었다.

친불 세력만 문제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손에 넣은 이래로 가장 오랫동안 프랑스를 상대로 항쟁한 것은 바로 불교 같은 종교 세력이었고, 20세기가 되자 이들은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같은 현대적이고 절충적인 형태의 종교들로 승화하면서 스스로의 입지를 강하게 다졌으며, 곧이어 스스로 사병조직을 만들어 프랑스에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스스로의 군대의 충성심도 보장하지 못하는 와중에, 지방, 특히 안보상 중요한 캄보디아 국경 근처 지방들을 이들이 장악하고 있던 것도 불안 요소였다. 이들은 2차대전 종전 전까지 항불 군사투쟁을 계속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는데다 종교까지 곁들여져서 지역 주민들의 막강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수도 사이공은 안전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던게, 사이공에서 외항도시 붕타우로 통하는 수로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범죄조직 기반 군벌 빙쑤옌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사이공 시의 경찰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2년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여기에 미국도 아직까진 응오딘지엠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응오딘지엠을 지지했으나, 미국 대사 도널드 히스와 로턴 콜린스 모두 응오딘지엠은 가망이 없으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렇듯 응오딘지엠 정권은 군권, 경찰권, 경제권이 모두 친프랑스파에게 장악당하고 중앙권력마저 취약하며,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기도 힘든 매우 위태로운 상태에서 출발했다. 이 때문에 아이젠하워 정권은 콜린스의 제안에 따라 응오딘지엠에 대한 지지 철회까지 고려했다.

1954년 6월 25일, 떤썬녓 공항을 통해 귀국하여 7월 7일 정부를 구성한 응오딘지엠의 첫 과제는 90만에 달하는 탈북민의 정착이었다. 당시 북베트남에서는 가톨릭을 제국주의의 주구로 본 호치민 정권의 탄압으로 수많은 가톨릭 교도들이 탈북의 길에 올랐고 토지개혁의 실패로 정권이 흔들릴 정도의 혼란이 오면서 가톨릭 교도들이 아닌 농민들도 탈북하고 있었다. 대략 가톨릭 교도가 60~70만, 불교도가 20만 명 정도 탈북했다. 여기에 미국이 '자유의 길 작전'이라는 해군 작전을 실시하여 이들의 월남을 조직적으로 도왔고 CIA도 "성모 마리아께서 남으로 가셨다"는 소문을 북베트남에 퍼뜨려 가톨릭 교도들의 탈북을 자극했다. 하지만 이들의 월남을 유도한 결정적 원인은 미국의 막후 공작보다는 '베트민의 보복과 남베트남에서의 경제적 기회'로 꼽히고 있다. 여기에 북베트남 가톨릭 교도들이 북위 17도 이남의 가톨릭 성지를 자주 순례한 '이주 문화'도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응오딘지엠은 이들 90만의 탈북민을 매우 성공적으로 정착시켰고, 이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의 골수 지지층이 되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불안정한 정권 공고화에 나섰다. 가장 먼저, 첫 내각을 자신의 친지들로 채운 것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종교파 일원들과 기타 지식인들이 반 응오딘지엠 조직인 '연합전선'을 형성했으나, 한편으로는 북쪽에 공산주의자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저렇게 큰 반정부조직이 있는 걸 불안하게 생각한 일부 종교파 인원들이 응오딘지엠 체제에 합류해서 또 다른 종교파 연합조직인 '혁명위'를 창설하게 되었다. 특히나, 베트민에게 까오다이교가 배신을 당하고 프랑스와 손을 잡은 와중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부족한 돈과 인력으로도 양쪽과 동시에 싸웠던 것으로 매우 명성이 높았던 찐민테가 이 혁명위의 중진이 된 것이 응오딘지엠에게 큰 성과였다. 당시까지 응오딘지엠 본인에게는 군대가 없었기 때문에, 혁명위 소속 장군들의 군사력이 그를 보호해주지 않았다면 지엠 정권은 황실친위대장 응우옌반비에게 전복당했을 것이다. 즉, 혁명위, 특히 그들 중에서도 찐민테의 군사조직 리엔민은 베트남 공화국의 개국공신이다. 이 혁명위 자체가 종교주의자들 뿐 아니라 수많은 성향을 가지고 있던 집합체였기에, 이들과 협치를 하면서 공산주의 세력을 막아냈다면 응오딘지엠은 민주주의를 제대로 베트남에 정착시킨 영웅으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3]

1955년 5월, 사이공 전투를 통해 빙쑤옌의 영향력을 일소시켜버렸고, 덕분에 빙쑤옌이 소속되어있던 연합전선까지도 큰 타격을 받으면서 응오딘지엠의 입지는 점점 단단해지게 된다.

이러한 초기 성공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고, 이 때문에 응오딘지엠은 민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응오딘지엠은 여세를 몰아 봉건주의의 수괴라고 여긴 바오다이를 겨누었다. 1955년 10월 3일, 응오딘지엠은 신임투표를 통해 군주제 폐지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정치적 선전방송을 통해 바오다이를 쾌락 추구자로 비난하고 자신은 국가를 위한 경이로운 일꾼으로 선전했다. 응오딘지엠을 행운의 상징으로, 바오다이를 불행의 상징으로 띄운 선거 전략은 주효하여 바오 다이는 98.2%의 찬성 투표를 통해 폐위되었다.[4] 당시 아이젠하워이승만과 응오딘지엠 사이의 유사점에 주목하면서 이런 평을 내리기도 했다.
사실 바오다이 정권의 통솔력의 결핍과 무기력은 베트남 인민들 사이에 무엇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싸우느냐는 감정을 일반화시켰다. 어떤 프랑스인이 나에게 말했듯이 베트남이 필요로 하는 인물은 이승만과 같은 지도자이다. 설사 그런 인물의 존재가 필연적으로 수반할 모든 곤란할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1955년 9월 27일에서 29일에 걸친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의 인도차이나 지원이 1956년 1월부로 프랑스를 거치지 않을 것임이 결정되자 응오딘지엠은 즉각 프랑스 연방에서 탈퇴했고, 1956년 1월 19일, 프랑스 주둔군 연장협상에서 "아무리 그들이 친할지라도 외국군의 존재는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양립할 수 없다."라고 비판하며 프랑스군 철수를 요구했다. 결국 프랑스는 1956년 4월 26일, 제네바 협정의 합의를 파기하고 공동 의장국인 영국소련에게 일방적인 철수를 통보했다. 1956년 3월 4일, 단독국회가 구성되었으며 7월 헌법이 국회를 통과, 10월 26일 베트남 공화국이 정식으로 탄생했다.

2.4. 독재의 길과 미국에 대한 의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go_Dinh_Diem_at_Washington_-_ARC_542189.gif
1957년 미합중국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국무장관 포스터 덜레스와 만나는 응오딘지엠

1956년, 응오딘지엠은 베트남 공화국 헌법을 발표했다. 헌법 자체는 구구절절 명문이었는데, 문제는 응오딘지엠 자신이 그다지 민주적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불편해했고 정권 비판에 민감하여 반정부 세력에 대해 신속한 탄압으로 대응했고 북부 출신 반공주의자들만 가까이하며 편협해졌다. 특히, 혁명위는 종교주의자부터 민주사회주의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정당 소속 사람들까지 매우 다양한 성향을 가진 인사들이 오직 타도 베트남 공산당, 타도 호치민의 기치 아래에 모인 것이었기에 그 목소리가 매우 다원적이었고, 민주주의보다는 권력을 독점하고 싶던 응오딘지엠은 이 조직의 존재가 매우 불편했다.

때문에, 베트남 공화국이 정식 출범하자마자 즉시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 그리고 기타 응오딘지엠의 세력을 제외한 정치권에 대한 격렬한 탄압이 시작됐다.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종교 군벌 군사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정부에 호의적이던 정명세나 응우옌타인프엉(Nguyễn Thành Phương)의 부하들조차도 당초 응오딘지엠이 약속했던 것과 달리 베트남 정규군에 전혀 편입되지 못했다. 호아하오교 지역 주민들에게 위대한 영웅으로 칭송받던 레꽝빈이 정부에게 항복했음에도 항복을 거부당하고 단두대로 처형당했다. 이렇게 민중들의 지지를 받던 인사를 체포한 사람들이 하필이면 구 베트남국의 친불 기득권 세력이라는 점도 문제였고, 사실상 응오딘지엠은 이 때부터 민중들을 상대로 한 명분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5]

종교파만 탄압당한 것이 아니다. 응오딘지엠은 반공선언운동을 벌이는 한편 반공 재교육 캠프를 만들어 1만 5천~2만명을 수감시켰고 1957년에만 7~8만의 정치범을 투옥시켰다. 1956년 1월 '질서와 안보가 충분히 회복될 때까지 국가 방위와 공공질서에 위험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은 누구라도 가택 연금하거나 수감할 수 있다'는 법령 6호를 발표했고 1959년 10/59법을 발표, '국가안보를 파괴 혹은 침해하려는 목적을 지닌 범죄를 저지르거나 혹은 그에 대한 기도는 사형에 처해진다'고 발표했다. 이 법은 피고인 변론도 주지 않는 악법이었다. 이 법은 1962년 11/62법, 즉 최전선군사법으로 강화되었고 가족 친목회까지 탄압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 치하보다도 덜 자유스럽다는 평가까지 나왔고 북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이 16만명을 죽이거나 부상입히고 24만명을 투옥시켰다고 주장했다.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단 2.7 백색테러와 학살을 참고하면 된다.

한편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은 이전부터 명백했다. 미국은 루스벨트 정권 시절에는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를 제거하려 했지만 트루먼 정권이 들어선 이후 반식민주의보다는 반공에 집중하여 유럽의 반공질서 구축을 위해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개입을 묵인했다. 트루먼 정권이 일찍이 1950년 2월 1일 바오 다이 정부를 승인함으로 인도차이나에 본격적으로 개입했고 국공내전6.25 전쟁이 각각 국부천대와 시원치 않은 휴전으로 마무리됨에 따라 인도차이나의 정치적 중요성이 높아졌다. 미국은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우려했고 적극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 미국이 퍼부은 돈만 30억 달러에 달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제네바 회의의 미국대표단에게 "예상치 못한 정전 혹은 현존하는 합법정부를 타도하는 기능을 가진 어떤 해법을 인정하거나 동의하지 말라."라고 지시하는 등 남베트남의 공산화를 막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1954년 이래 미국의 대월정책은 1. 남베트남의 안보 확보, 2. 남베트남의 경제발전, 3. 남베트남의 민주주의 증진이었다. 그리고 남베트남 지원의 명분을 약화시키는 제국주의를 연상케하는 바오 다이 정권 퇴출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성립을 지원한 것이었다. 1954년 9월 8일 동남아시아조약기구가 정식으로 출범했고, 아이젠하워는 10월 23일 "강하며 성장발전하고 전복시도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때부터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해 이념 기초, 헌법 구상, 군사, 경찰, 정보, 행정, 문화, 교육, 경제 전반에 대한 인적, 물적 지원이 시작되었고 1954~1955년에만 3억 2천만 달러에 달하는 지원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적은 것처럼, 1955년까지 응오딘지엠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그렇게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응오딘지엠에 대한 회의를 막고 지원한 것은 CIA와 미국의 응오딘지엠 지지자들이었는데 대표적으로 랜스데일과 맨스필드 등이었다. 렌스데일은 응우옌반힌 제거를 원조했고 맨스필드는 바오다이 퇴출을 도왔다. 1955~1956년까지의 미국의 원조는 남베트남 반공정권의 유지와 재생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응오딘지엠의 반민주성과 이것이 결부되면서 민주주의 증진은 등한시되고 미국의 베트남 지원은 남베트남의 현대적 경찰국가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61년 말, 미국인 고문수는 700명에서 1962년 중반 3,400명으로 증가했고 미국의 지원이 생존에 필수적이었던 응오딘지엠 정권이 '미국의 돈과 비전에' 종속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서방 언론에서 남베트남은 독립성을 의문시하는 비판적 보도들이 나오게 되었다. 확실히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해 지나치게 고압적인 정책을 유지하여 정권 내부의 반발도 샀다. 응오딘뉴는 "미국 대사는 편견을 가지고 우리에게 언제나 반대한다."라고 했으며 웅오딘지엠도 미국 고문들이 베트남을 식민지로 여기는 듯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응오딘지엠 정권 역시 미국의 괴뢰국이라는 주장을 북베트남과 반미 측에서 오랫동안 정설인양 유포했지만 응오딘지엠 - 미국 관계는 어디까지나 주권국가간 관계로 평가되며 응오딘지엠 정권은 괴뢰국이 아니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하지만 사실상 괴뢰국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당장 응오딘지엠 정권의 출범이나 종말도 모두 미국이 관여했다. 응오딘지엠의 몰락은 이러한 사실을 간과한체 자신의 힘으로 미국의 간섭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리고 응오딘지엠 정권붕괴후의 남베트남 정권은 응오딘지엠의 사례를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미국에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고 결국 미국이 남베트남을 버리자 패망할 수 밖에 없었다.

어쨌거나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나친 입김을 경계하여 이를 제거하기 위해 한가지 수단을 도입했는데 그것이 바로 가족 정치였다. 응오딘뉴는 내무부장 겸 남베트남의 여당인 근로당 지도자였고 제수인 '마담 누' 쩐레쑤언은 국회의원 겸 베트남여성운동 수장을, 오정유의 처가에 외교부장, 교육부장을 비롯한 부장직 3개에 주요국 대사, 파기원 주석 등의 요직이 돌아갔으며, 응오딘깐이 공식 직위도 없이 중부 지방을 통치하는 등[6] 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의 개인 왕국처럼 변해갔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정권은 남부에 있으면서 정작 남부사람들을 배척하고, 중부인과 북부인을 중심으로 정권을 꾸렸는데 베트남에 중부인이 500만, 남부인이 900만에 달한 반면 상위 행정관료 186명 중 남부인은 67명에 불과했다. 소외된 남부인들은 정권에 대해 반감을 품었다. 게다가 전국의 7%에 불과한 가톨릭 교도들이 국회의 22~27%를 장악했다는 보고도 있었다. 이로 인해 응오딘지엠 정권이 민사 정책을 펼쳐도 민중들은 다른 발음을 구사하고 상이한 종교를 믿는 이방인이었던 피난민들로 구성된 정부의 억압적인 통치에 분개했다.

2.5. 공산화의 위협과 사회 혼란의 가중

1955년부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대한 평화 공세에 돌입했다. 그 해 2월, 북베트남이 총선거를 위한 사전협의의 발판을 위해 남북간의 정상관계 회복을 제안했는데 이는 우편, 도로, 철도, 해공상 교통 재개를 의미했다. 이는 북베트남이 자신들이 선거를 통한 권력장악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7][8] 이후 북베트남은 6월, 7월 그리고 1956년 5월과 6월에 걸쳐 총선거와 통일문제를 논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천명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철저한 반공주의자로 북베트남을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1955년 1월 남베트남은 총선거를 치를 법적, 도덕적 의무가 없어 총선거를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며 북베트남의 평화공세를 거부, 무시했다. 남베트남은 제네바 협정의 당사자도 아니고, 서명도 한 적 없으니 얽매이지 않고 북베트남에는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자유 총선거를 할 수 있냐는 것이 응오딘지엠의 논리였다. 실제로 북베트남은 독재 정권이 맞았고 선거를 감독할 프랑스 군대의 일방적 철수로 인해 선거의 안정성 역시 담보할 수 없었으므로 응오딘지엠의 논리가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은 그해 5월에 응오딘지엠의 견해를 지지했다. 응오딘지엠은 1955년 7월과 8월에 총선거를 위해 협의하지 않을 것임을 재통보했다. 그리고 북베트남의 전체주의 성격과 제네바 협정 위반 사례, 보장국 부재를 상기하며 북베트남을 비판했고 북베트남에 억지로 묶여 있는 사람들의 출국을 촉구하기도 했다. 통일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개 북진통일의 피상적 언급에서 그쳤고, 응오딘지엠의 당면과제는 남베트남 국가의 건설로 인식되었다. 미국은 1956년 6월과 7월에 응오딘지엠의 입장을 다시금 지지했다. 1958년 4월 26일 응오딘지엠은 북베트남이 남부와 비슷한 민주적 자유를 세운 후에만 선거가 가능하단 입장을 밝혔다.

한편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위원회에서 흐루쇼프가 서방과 공존을 추구하겠다고 결정한 이후, 북베트남은 한동안 남베트남과의 평화통일을 주장했지만 헝가리폴란드의 소요 및 중소분쟁이 이어지면서, 북베트남은 1956년 12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11차 전체회의에서 남베트남에서 혁명조직을 점진적으로 형성하고 반동분자를 처벌한다는 비밀정책을 승인했다. 이는 남부 혁명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테러를 승인한 것이었다. 이후 남베트남에서는 정부 관리, 교사등에 대한 테러가 이어져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북베트남은 1957년 남북베트남의 UN 동시 가입을 제안하는 소련의 제안마저 거부하고 남베트남 민족해방을 외쳤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베트남 통일을 원하는 북베트남에게 UN 동시가입은 분단의 영구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북베트남이 사주한 테러가 이어지자 응오딘지엠은 농촌을 안정시키고 혁명을 제압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2천명 이상이 처형되고 수천명이 동조자로 투옥되었다. 이로 인해 남베트남 지역의 혁명역량이란 것 자체가 붕괴될 지경에 이르자 1959년 1월 북베트남 노동당 중앙위원회가 15차 전체회의를 열고 혁명전쟁전략 채택을 결의하면서 그해 늦여름부터 남베트남의 무장 저항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1960년 9월 5일 하노이의 베트남 노동당 3차 전국대회가 결성, 미국의 개입 없이 응오딘지엠을 무너뜨리기 위한 방책으로 1960년 12월 20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을 결성시켰다. 이로써 1959년까지 이어졌던 남베트남의 '6년 동안의 평화'는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응오딘지엠의 독재에 분노한 남베트남 지식인 사회가 반발했다. 농민들은 공무원 부패와 실패한 토지개혁 때문에 불만스러워했고 불교도들은 정부가 가톨릭을 편애한다고 분개했다. 여기에 화교와 소수민족들은 중앙권력 강화과 지방 통제력 강화에 권리를 침해당했고 대도시에서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반 응오딘지엠 운동이 벌어졌다. 여기에 미국은 응오딘지엠이 공산화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고 불만스러워했고 응오딘뉴의 성향과 미국이 충돌하면서 미국-응오딘지엠 정권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61년 1월엔 미국이 묵인한 가운데 쿠데타가 벌어졌고 비록 실패로 돌아갔으나 북베트남은 이것으로 남부의 안정기가 끝났다고 판단, 평화적 해결이 필요없다고 결론짓고 1961년 2월 인민해방군을 결성하여 민족해방전선의 군대로 삼았다. 이로 인해 베트콩의 세력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2.6. 경제성장과 실패한 내부 개혁

1950년대 중반부터 응오딘지엠 정권은 농촌 관련해서 주요 프로젝트와 개혁을 진행했다. 농지개혁, 농지개발, 밀집촌 건설이었다.

2.6.1. 농지

이중 농지개혁에 관해 1955년 1월 법령 2호, 1955년 2월 법령 7호를 발표해 처음 손을 본 바가 있었다. 2호 법령은 소작인의 경작권 보호를 통한 안정화와 소작료를 15~25%로 제한한다는 것이었고 7호 법령은 유휴농지를 재경작한다는 것이었는데 그다지 효과를 보지도 못했고 제대로 실행되지도 못했다. 좀 더 근본적인 농지개혁은 1956년 10월 법령 57호가 발령되면서부터였다.

통계에 따르면, 농촌 인구의 0.025%에 불과한 2,500명의 지주가 40%의 쌀 생산농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때문에 메콩강 삼각지대 일대의 토지 소유 불평등을 해결하고 지주의 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하려 했다. 하지만 성공적으로 끝난 일본, 중화민국, 대한민국의 토지개혁과 달리 법령 57호는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100ha[9]나 되는 농지의 1인 보유를 허락했고, 응오딘지엠의 권력이 약한 상태라서 강하게 밀어붙힐 수도 없었다. 게다가 지주 출신인 지방 관리들도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2,255명의 지주로부터 65만ha를 유상몰수하여 소작농에게 분배했으나 앞서 언급한 관료들의 능력과 의지 부족으로 원래 계획의 반에 불과한 10%의 소작농가만 혜택을 입었다.

그리고 오히려 1945년 8월 혁명을 통한 베트민의 개혁으로 혜택을 입은 농민이나 전쟁을 피해 도시로 피난간 부재지주의 토지를 공짜로 경작하던 농민들에게는 오히려 피해가 가는 개혁이었다. 1960년도에는 여전히 2.5%의 대지주가 45%의 토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11%의 중소지주가 42.5%를 소유했고 일반 자작농의 보유 면적은 12.5%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나마 혜택을 입은 자들도 군 장교, 월남민, 가톨릭 교도, 중부인들이 대부분이라 토지개혁은 오히려 남부 농민의 불만을 샀다. 여기에 토지개혁으로 오히려 응오딘지엠 일가의 배만 불렸단 소문이 퍼지면서 반정부 불만은 확산되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은 농지개발 프로젝트였다. 응오딘지엠은 농지가 아니라 사람을 재분배하는 정책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무주지에 농촌 거주자들을 대거 이주시켜 농지 없는 농민에게 농지를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 남베트남은 인구과잉에 90만의 월남민까지 몰려와서 지나친 농지부족에 시달렸는데 농지를 확장하여 인구압력을 해결하면 경제, 안보, 이념 목표가 모두 달성되고 궁극적으로 베트남 농촌의 중농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계획에만 따르면 농지의 확장을 통한 농업생산력 증가와 상품작물 재배로 경제적 자립도 이룩할 수 있었다. 거기에 라오스-캄보디아 지역의 공산주의 침투 저지와 과거 반정부 군벌들로 소란스러운 지역의 안정도 꾀할 수 있으리라 여겨졌다. 이러한 장밋빛 전망을 바탕으로 응오딘지엠은 1959년 중반까지 84개 정착지에 125,000명을 정착시켰다.

7만명이 중부인, 17,000명이 월남민이었다. 1962년 말 발표로는 173개 정착지에 23만명이 산다고 했다. 하지만 이 농지개발 정책은 지나치게 강압적인 수단이 동원되었고 농민의 희생을 지나치게 요구하여 월남민조차도 꺼렸다. 게다가 땅의 비옥도, 농업용수 접근 가능성, 교통 등의 여건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는 미국의 조언은 조속한 성과에 집착한 응오딘지엠에 의해 무시되었다. 이 때문에 월남한 사람들이 차라리 북으로 돌아가는게 낫다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희생은 컸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은 미국 고문들로부터 베트남 주권 손상을 우려하여 미국에게 정보 제공을 거부하고 미국의 자금이 관료적 절차에 막히는 것에 대해 불만스러워했다. 그래도 이 농지개발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의 성과는 거둔 정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2.6.2. 밀집촌

마지막은 밀집촌 프로젝트인데, 이는 1959년 7월 7일 대통령 공포로 시행된 정책으로 농촌 경제발전, 사회발전, 내부안보 강화가 목적이었다. 응오딘지엠은 1963년 말까지 각 구역에 400가족이 들어가는 80개의 밀집촌과 그보다 작은 120가족 규모의 위성밀집촌 400개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역시 행정력 부족, 주민들의 저항, 안보 집착으로 효과가 좋지 못했다.

안보와 관련해서 실패한 정책 중 하나가 전략촌 정책이었다. 이 전략촌은 남베트남 정부의 경제, 정치개혁의 거점을 마련하고 국내 안보를 증진시키며 농촌 주민들로부터 베트콩으로부터의 보호를 제공한다는 목적으로 실시된 농촌 평정+근대화 정책이었는데 이미 비슷한 정책이 프랑스나 이전 정권에서 시도된 바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이 계획의 입안자인 오정유는 매우 야심차게 1962년 8월경까지 5천개나 되는 전략촌을 건설했다.[10] 이러한 전략촌 건설은 원조를 무기로 정치개혁을 강요하는 미국에 대한 일종의 돌파구이기도 했는데 미국은 전략촌 정책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 군사고문들은 남베트남 정규군이 전략촌 방어에 묶여 민사활동에만 종사하게 된다고 난색을 표했지만 정치 고문들은 정부의 공공 서비스 제공과 지역 자치정부 수립, 경제 강화등 긍정적 영향을 강조했다. 결국 미국은 응오딘지엠 정권 개혁과 베트남 농촌 평정을 동시에 이루기 위해 '제한적 협력'을 하기로 했는데 전략촌 정책 지원도 그 중 하나였다.

2.6.3. 프로젝트의 중단

응오딘지엠 형제는 이 전략촌 정책이 미국과 다른 남베트남 실력자들을 제쳐두고 자신들의 독보적인 권위를 확보해줄 정책이라 믿어 1963년까지 7천개의 마을을 전략촌화하기로 하고 이를 강압적으로 밀어붙히며 미국의 정치개혁 요구를 모두 거부했다. 하지만 중앙의 권위 부족과 행정력의 부재, 응오딘지엠에게 아첨하기 위한 남베트남 관리들의 거짓보고로 인해 많은 무리수가 발생했다. 게다가 전략촌 건설에 따르는 각종 부담[11]이 주민들에게 전가되면서 오히려 민심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 거기에 공산주의자들은 전략촌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자신들에게 직격타가 될 것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전략촌을 수용소라고 중상했으며 나중에는 전략촌을 군사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무리한 전략촌 건설로 원래 목표인 방어에 실패했으며[12] 농민들의 민심 이반을 초래하여 정권에 타격을 주었다. 전략촌 프로젝트는 응오딘지엠 형제 암살 이후 중단되었다.

그리고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지원 하에 50만에 달하는 정규군, 민병대, 경찰력을 양성했으나 이들에 대해 지나치게 간섭했고, 이들의 전투력은 영 좋지 않아서 사이공 근처까지 출몰한 베트콩을 상대로도 변변찮은 성과를 거뒀다. 예를 들어 1963년-65년 사이 일련의 전투 중 평가[ruby(平,ruby=Binh)][ruby(嘉,ruby=Gia)] 전투와 동수[ruby(同,ruby=Dong)][ruby(帥,ruby=Xoai)] 전투에서 베트콩은 베트남 전쟁에서 흔히 현상되는 게릴라전이 아니라 정직하게 회전에 들어가서 전술적인 교환비에서조차 남베트남 정규군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겼다. 그리고 빈 지아와 동 쏘아이는 사이공에서 30km도 떨어지지 않은 곳들이었다.[13]

2.6.4. 한계와 문제점

응오딘지엠 정부는 1956년부터 농지개혁을 시작했고, 1957년부터 1960년까지 평균 경제 성장률은 7.2%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쌀 생산량에 있어서 선농업발전정책이 성과를 거두었던 것은 사실이다. 1954년 지엠 집권 초기와 1963년 지엠 집권 말기를 비교해보면, 1954년 2,565,540톤에서 1963년 5,326,680톤[14]으로 늘어났으며, 고무의 경우 1954년 54,917톤에서 1963년 76,200톤으로 생산량이 증가했다.[15] 성장의 양적 지표는 남베트남이 전후 경제재건 사업과 경제회생작업에서 초기부터 실패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수는 있으나, 보다 높은 단계로의 진보라기보다는 이전 경제 수준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러한 지엠정부의 선농업발전정책을 가장 크게 제약했던 것은 청산하지 못한 반(半)봉건적 농업체제였다. 지엠의 농지개혁은 반봉건적 경제질서를 해체할 의지가 전혀 없었다. 지엠 정부 하에서 남베트남의 지주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부터 있던 과거의 관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기업가적 지주로 전환하지 못했다. 이는 농민에 대한 착취를 강화했을 뿐 실질적인 생산성 향상에는 전혀 기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경제적 혜택은 돌아가지 않았으며, 대신 정부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조세 부담이 증대됐다. 이는 지엠 정부에게는 안정적인 지역 통제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농민에게는 전쟁기간에 사라졌던 중앙정부의 수탈체제가 다시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엠 정권과 농민들의 관계는 날로 악화되었으며, 농촌에 근거지를 형성한 베트콩이 대다수 농민들에게 지지받는 현상이 벌어지게 됐다.[16] 아래의 인용문을 보도록 하자.
정부가 후원하는 토지재분배계획은 이전에 베트민에 의해 수립되어 농민들에게 보다 유리하게 되어 있던 토지분배를 폐지하였다. 그래서 토지분배로 인해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 측에서 취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가 넓어진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이러한 선택권 중에서 반란에 참여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90
아래의 인용문은 민주화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교수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다루고 있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단행한 토지개혁의 문제점이다.
디엠 정부는 전국 농토 가운데서 45만 7,000 헥타르를 몰수하였고,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인 전 개인소유지 24만 6,000 헥타르를 베트남 정부에게 반환했는데, 정부가 1958년까지 농민을 위한 농지개혁 계획으로 농민에게 재분배한 것은 프랑스인 소유로 반환된 것에 해당하는 24만 8,000 헥타르 밖에 안된다. 최근의 미국 AID 보고에 의하면 분배되지 않은 농지는 대부분 정부가 쥐고 있으며 정부는 그것을 최고가격으로 입찰하는 자에게 임대하고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창비, 2006, p.374~375[17]

반면에 공산주의자 세력들은 주민들과 함께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민중들 깊숙이 파고 들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교수 제프리 레이스(Jeffery Race)는 당시 베트민과 주민들이 어떠한 관계였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베트민은 주민들과 같이 잠을 잤지만, 마을위원회의 유지(남베트남에 협력하는 인사)들은 기지에서 군인들과 함께 잠을 잤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90[18]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응오딘지엠 정부의 문제점은 베트남공화국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의 요구를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토지개혁 법안은 지주들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작성되었고, 토지개혁이 몇 년 동안 실시된 후에도 자격을 갖춘 소작인들 가운데 실제로 토지를 받은 사람은 10% 정도에 불과했다. 이전에 베트민이 장악했던 지역에 사는 농민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프랑스-베트민 전쟁)동안 받았던 토지를 전 주인에게 돌려주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응오딘지엠 정부는 강압적인 수단을 동원하기도 했다. 따라서 농민이나 전국의 다른 많은 농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응오딘지엠 정권은 식민지 시대의 프랑스 정권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었던 셈이다.[19] 아래는 마릴린 B. 영의 저서 <The Vietnam Wars 1945-1990>에 나오는 내용이다.
10/59법과 같은 정부의 테러행위는 남베트남 농촌지역에서 또 다른 문제들을 악화시켰다. 지주들에게 이미 분배된 땅을 되돌려줌으로써, 농민들은 프랑스 식민지 통치시절처럼 다시 한 번 무토지 소유자나 빈농이 됐다. 강제노동을 포함한 과거 베트민 시절 폐지된 세금이 다시 부활했고, 각급관료조직들의 공공연한 부정부패가 눈에 띄게 나타났으며, 지방 민병대를 징집하여 강탈과 자의적인 체포를 일삼았다.
Marilyn B. Young, 『The Vietnam Wars 1945-1990』, Harper Prennial, 1991, p.62
위의 인용문처럼, 지엠 정부의 토지개혁은 오히려 대다수 농민들에게 역효과를 냈다. 특히 1960년에 창설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의 존재는 정부와 농민의 갈등을 심화시켰는데, 특히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농지개혁은 정부와 혁명세력의 차이를 확연히 갈라놓았다. 역사학자 피츠 제럴드(Fitz Gerald)는 당시 민족해방전선의 농지개혁이 응오딘지엠 정부 하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민족해방전선의 계획은 토지 없는 사람들에게 실제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민족해방전선은 토지 보유나 지대를 제한하는 전국적인 법률을 기초로 하는 대신에 모든 마을에서 토지 분배와 지대를 가능한 한 공평하게 하려고 했다. 그들은 삼각주의 상이한 부분들에 나타나는 극히 다양한 사회적 유형과 토지 보유 유형을 고려하면서 기존체제의 폐단을 최소화하기보다는 테러를 포함해서 가능한 온갖 수단으로 농민계급 전체의 경제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일했다. 민족해방전선은 삼각주의 대부분에서 농민들이 생산한 작물에 대한 권리를 그들에게 주고, 그들 자신의 협상권 및 지주에 대한 평등 의식을 심어 주었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92~693
<호치민 평전>을 집필한 미국의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1959년부터 1960년 사이 반정부 세력 지도자들은 필사적인 방법에 의존하려 했으며, 1959년 8월 말 광의성의 척박한 산악지대에 사는 수많은 농민들이 모여 남베트남 정부의 국회의원 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베트민 세력의 지원을 받은 시위자들이 있었고, 이들이 중부 산악지대에 자리잡은 인근 16개 마을을 장악했고, 잠시나마 50개 마을에서 1만 명 이상의 주민으로 이루어진 해방구를 형성하기도 했었다.[20] 특히나 메콩강 삼각주 중심부의 키엔호아 성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는데, 항불전쟁(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절부터 베트민 활동가들이 친불 지주들의 경작지를 몰수하여 빈농에게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이 지역 대다수 주민들이 베트민이 이끄는 혁명 운동에 공감하고 있었으며, 또 동참하고 있었다. 이 지역 대다수 주민들이 베트민 혁명운동에 공감한 이유는 1954년 제네바 협정 뒤 지주들이 다시 돌아와 남베트남 정부군의 지원을 받으며 토지를 도로 빼앗아갔고, 토지를 분배받은 빈농에게 체포와 수감 그리고 처형을 포함한 가혹한 보복을 했기 때문이었다.[21]

1961년 융안[ruby(隆,ruby=Long)][ruby(安,ruby=Anh)]에서 민중봉기에 가담했던 한 무토지 농민은 응오딘지엠 정부 하에서의 사태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으며, 왜 베트콩에 가입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나는 가난했다. 나는 땅을 전부 빼앗겼다. 돈이 없어서 아이들을 돌보기도 힘들었다. 1961년에 공산당이 주도하는 민족해방전선의 선전 요원들이 나에게 접근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들과 만나 부자와 빈민 계급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부자들이 항상 프랑스에 봉사해 왔으며 프랑스 당국의 힘을 빌려 빈민을 억압했다고 말했다. 다른 생존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빈민들은 지주의 노예로 전락했다. 당원들이 우리에게 선전한 내용은 빈민들이 부자에 맞서 일어서지 않으면 영원히 지배받으리라는 것이었다. 자유를 쟁취하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우리 마을 주민은 약 4,300명이었다. 이 가운데 아마 10여 명 가량이 지주였을 것이다. 최고 부자가 500헥타르를 소유했고, 나머지가 각각 적어도 20헥타르씩 가지고 있었다. 다른 주민들은 소작인이거나 순수한 빈농이었다. 나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억압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해방전선(베트콩)에 가입한 것도 그 때문이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p.60~61
따라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정책과 정치적 목적이 대다수 농민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또 실제로 대다수의 남베트남 지역에서(특히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 지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응오딘지엠 정부의 개혁은 프랑스 식민지 체제로부터 비롯된 지주와 소작농 간의 봉건적이고 식민주의적 모순관계를 심화시킨 셈이다. 따라서 응오딘지엠 정부의 초기 바오다이 정권 축출을 통한 친불파 제거는 어디까지나 친바오다이 성향의 친불파를 숙청 및 흡수한 것이지, 그것이 식민주의적 잔재의 청산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관계는 응오딘지엠 정부가 추진했던 개혁의 한계에서 드러나는 셈이다. 정말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가 식민주의적 잔재를 청산했다면, 군부에 프랑스군 출신 인사들이 버젓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장교와 사령관을 하는 것은 뭐라 설명해야 할까? 그 점에서 응오딘지엠 정부는 근본적으로 식민주의적 잔재가 명확히 남아있는 비상식적인 정부였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의 베트남 정책을 결정하던 케네디의 문제이기도 했다. 아래의 논문 내용을 보자.
케네디에게 베트남은 다른 어느 곳보다 각별했다. 그는 상원의원 시절인 1956년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총통을 "동남아시아의 자유세계의 주춧돌"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케네디가 그렇게 생각한 데는 남베트남 정부와 엘리트들에 대한 그의 그릇된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케네디는 미국이 프랑스처럼 제국주의국가가 아니며 디엠과 그의 지지자들 거의가 실은 프랑스식민지 지배의 앞잡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식민지지배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건강한 민족주의자들로 보았다. 케네디에게 필요한 것은 교육을 받고 조직된, 그리고 미국에 충성스런 자들이었다.
김정배, 「베트남전쟁과 미국, 그리고 냉전체제」, 『역사와 경계』 80, 2011, 257~258쪽.
따라서 응오딘지엠 개인이 자신 나름의 독립운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가 구성한 남베트남 정부는 기본적으로 프랑스에 부역한 민족반역자들이 차고 넘치며, 항불투쟁을 한 독립운동 세력인 베트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것으로 민중들에게 비춰질 수 밖에 없었다. 즉, 정치, 사회, 군사 부분에 프랑스에 협력한 민족반역자들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으니, 어찌보면 민중들의 반발은 당연한 결과였다. 2017년 켄 번즈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인 PBS 베트남 전쟁에서도, 북베트남군 참전용사이자 『전쟁의 슬픔』으로 한국에서도 바오닌(BảoNinh)이란 필명으로 알려진 소설가 황유방[ruby(黃,ruby=Hoàng)][ruby(幼,ruby=Ấu)][ruby(芳,ruby=Phương)]프랑스군이 철수한 다음 미국이 들어왔고, 그의 부모님 세대에게 당신과 같은 미국인들이 프랑스인과 다를바가 없었으며, 미국도 침략자였기에 아들로서 그런 부모님의 생각을 물려받았다고 인터뷰에서 증언했는데, 당시 응오딘지엠 정부의 문제점과도 분리할 수 없을 것이다.

응오딘지엠 정부 개혁의 또 다른 문제를 뽑자면, 바로 가톨릭 중심의 사회체제 형성일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응오딘지엠 정부의 큰 문제점은 식민지 지배 체제 협력자들과 소작농의 계급적 민족적 모순관계인데, 가톨릭 중심의 사회체제는 이러한 모순관계를 더욱 뚜렸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역사를 전공한 유인선 교수에 따르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군을 적극 지지해주는 세력은 대략 100만 명 정도의 가톨릭 교도들 뿐이었다고 한다.[22] 즉 이러한 상당수의 가톨릭 교도들이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제네바 회담에 따라 남북 분단이 되자 월남했고, 응오딘지엠 정부 사회에서 국가교회의 역할을 했던 세력으로 성장했다. 반면에 남베트남에서 가톨릭과 대척점에 있으며 민중교회의 역할을 했던 것은 불교였다.[23] 1960년 남베트남의 가톨릭 교도는 약 10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7% 정도를 점했는데, 비공식적 조사로는 고위 공무원 가운데 34명이 가톨릭 교도이고, 20명 가량이 불교도였으며, 제1대 국회의 123명의 의원 가운데 22~27% 정도가 가톨릭 교도였다. 특히 이 가톨릭 교도들은 정부 조직에서도 교육, 외교, 정보, 민사 부서와 같은 대내외 통제 및 관리 부문에 배속되어 주로 활동하였고, 특히 정보국에서의 활동은 두드러졌다.[24] 아무튼 지엠 정부의 이런 반민중적 친가톨릭적 정책은 80%가 불교지향의 종교를 지니고 있었던 남부의 피지배계급에게는 지엠 정부가 자신들을 대표하는 것이 아닌 가톨릭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인식하게 하는 효과를 발생시켰던 것이다.[25]

또한 응오딘지엠은 내부 평정에 있어서도,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이젠하워와 케네디 정부는 도미노 이론에 따라, 남베트남에서라도 반공주의적인 정권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당시 미국이 무장한 최신식 무기와 남베트남군을 지원하는 미군사고문단을 보냈고, 1962년에는 MAC-V를 창설하기도 했다. 펜타곤 페이퍼에 따르면, 미국은 1954년 6월부터 남베트남의 군대를 훈련시킨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막대한 물자와 군사적 지원이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초기 미국은 폴 하킨스가 보내는 보고에 따라, 내부 평정이 잘 되는 것으로 착각했다. 1962년 초반의 경우 헬리콥터 기습 공격으로 베트콩을 섬멸해 남베트남군이 승리한 적이 두어 번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베트콩은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사력이 허약하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들어냈다. 군의 군사능력 강화에 실패한 남베트남 정부는 1964년 빈지아 전투와 1965년 동쏘아이 전투 등에서도 비슷한 졸전을 기록하게 되며, 결국 대규모 미 지상군이 들어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따라서, 미국의 지원을 받았던 응오딘지엠 정부는 남베트남에서의 현대식 군사 장비를 무장하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군사적으로 유능한 군대를 길러내는 데는 실패한 셈이다. 군사적 실패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압박 전투 문서를 참고하라.

2.7. 백색테러와 학살

지엠이 가장 큰 위협으로 느꼈던 것은 과거 반프랑스전쟁에 참여했던 베트민 세력이었고, 이에 대한 대중들의 동조였다. 또한 당시 지엠은 이중의 압력, 곧 한편으로는 토지개혁과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에 대한 압력, 다른 한편으로는 1956년 평화적 통일선거 이행에 대한 압력에 봉착해 있었다. 지엠은 이런 불안과 압력을 멸공(滅共, diệt cộng), 토공(討共, tố cộng)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했다.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4~325
응오딘누의 비밀경찰이 자행한 게슈타포 같은 행동이나 고문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확실한 공산주의자들이나 공산주의 동조자들에게 국한하여 이런 행동을 했다면 사람들이 그런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억압은 단순히 다른 정당의 대표나 대변인처럼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까지 확산되어 갔다. 또한 정부의 학정에 항거하는 보통 사람들을 탄압·투옥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13
남베트남에 언론의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매일 정부군에 의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총살을 당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7~448[26]
디엠의 지지자이자 고문인 조셉 버팅어(Joseph Buttinger)는 1956년 대규모 원정대의 병사들이 "공산당 점령 지역에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했다"고 설명했지만 이들은 마을을 습격하고 수백 혹은 수천 명의 농민을 살해했다. 이 사건은 아직까지도 미국인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여론조작 p.320~321[27]
베트민 전직 인사들에 대한 지엠의 소탕작전은 1955년 말에 시작됐다. 베트민의 깃발아래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수천수만의 인사들은 체포되고 구금됐으며 강제 수용소에 투옥됐다.
The Vietnam Wars 1945-1990, Marilyn B. Young, Harper Prennial, p.56
디엠의 통치 초기부터 전개되어 온 소요진압베트민이나 반란군 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증거나 재판도 없이 죽이거나 체포하는 일이었다. 지방 단위의 무수한 소규모 유혈사태, 그밖에 농촌주민에 대한 디엠의 군사정벌에 따라 보다 대규모의 유혈사태들이 발생했다.
미국 대외정책론 p.352~353[28]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처럼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인 응오딘지엠 또한 반공이라는 이름아래 적잖은 규모의 테러와 학살을 저질렀다. 테러나 학살의 수법은 전형적으로 미국이 작의적으로 내세우는 친미 반공국가들과의 유사성을 보였으며, 따라서 양민 전체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하고 자행하는 야만적인 학살과 테러가 지엠 정권 하에서도 합리화되고 동반됐다. 미국 외교 사학자 가브리엘 콜코에 따르면, 아무리 낮게 추산해도 1955년부터 1957년까지 최소 12,000명 이상의 사람이 살해되었고, 1958년 말까지 약 40,000명의 정치범이 수감되었다.[29][30] 베트남 전쟁 관련 책을 쓴 역사학자 마릴린 B. 영 또한 1956년 1월 지엠은 법령 제6호를 발동하여 총선을 주장한 사람들을 체포하고 구금했으며, 대략 12,000명을 살해하고 50,000명 이상을 구금했다고 주장했다.[31]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10/59법을 발동하기 전인 1957년부터 1959년까지 최소 2,000명 이상이 처형당했다고 책에서 썼다.[32][33]

당시 응오딘지엠은 동생 누를 총통 고문으로 임명해 비밀경찰 책임자로 맡기고 깐라오당 조직을 이용하여 반정부세력을 탄압했다. 남베트남의 무차별 백색테러을 실행했고, 적잖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알렉산더 켄드릭은 <미국의 갈등(The Wound Within)>이란 책에서 응오딘 누의 비밀경찰이 집권 기간 동안 총 75,000명을 살해했고, 5만 명을 투옥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후에 나온 책인 <끝없는 전쟁(Our Endless War)>이란 책에선 응오딘지엠 정권의 마지막 육군총참모장이었단 쩐반돈([ruby(陳文敦,ruby=Trần Văn Đôn)]) 중장은 그들은 제멋대로 체포했고, 집단수용소에서는 아무런 법적인 보호 조치도 받을 수가 없었으며, 기간도 정해지지 않은 채 감금했고, 공산주의자로 의심이 가는 사람이 있으면 암살도 서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34]

베트남 공산당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산하에 있는 베트남공산당사연구회에서 나온 <베트남 공산당사>를 보면, 응오딘지엠은 1954년말부터 응안썬(Ngan Son), 찌탄(Chi Thanh), 쩌드억(Cho Duoc), 모까이(Mo Cay), 빈탄(Binh Thanh) 등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나온다. 특히나 수 차례에 걸친 공산주의자 토벌 작전에서 그러한 인명살상이 이러났다고 하며, 1958년 12월 1일 푸로이(Phu Loi) 수용소에서는 수감중이던 수천 명의 베트민과 그 지지자들이 독살당했다고 한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남베트남에서 466,000명의 공산주의자와 애국지사[35]들이 체포되었으며, 이 중 400,000명이 수감되고 68,000명이 살해되었다.[36] 반면 2018년에 출간된 맥스 헤이스팅스(Max Hastings)의 저서 < Vietnam: An Epic Tragedy 1945–75>를 보면 이 숫자를 인용하지만, 이러한 추산은 호치민의 토지개혁 희생자들 처럼 부풀려졌다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고 언급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2015년 베트남 공산당의 서기장인 응우옌푸쫑은 위의 수치를 인용하며, 응오딘지엠 정권이 그만큼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다고 말했다.베트남측 기사 또한, <마오이즘>이라는 저서를 집필한 줄리아 로벨은 저서에서 제네바 회담 이후 응오딘지엠 치하에서 베트남 남부에서 노동당 당원 90%를 잃었고, 7만 명이 살해됐으며 100만 명이 투옥 그리고 20만 명이 잔혹한 고문으로 영구 장애 신세가 됐다고 썼다.[37]

박사 학위 논문으로 <베트남과 한국 반공독재국가형성사>를 집필한 윤충로 교수[38]는 응오딘지엠이 집권하고 몇 년 사이에 874개의 감옥에 275,000명이 감금되고, 53만 명이 고문으로, 230,000명이 지뢰나 폭탄에 의해 불구가 되었으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80,000명의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한다. 윤충로 교수는 쩐반쟈우의 자료가 수치의 과장이 있을 수도 있으나, 이를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으며, 1956년 남베트남 정부는 최소 20,00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재교육센터에 감금되었다고 발표한 반면, 드빌레는 50,000명으로 추정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1971년에 세상에 공개된 펜타곤 페이퍼에도 하노이와 농촌의 과격분자 사이에는 어떠한 직접적인 연관도 없었다고 밝혔으며, 지엠 정부의 강제 수용소를 조사했던 호니(P.J Honey)도 수감자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도, 공산주의 지지자들도 아니었다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지엠 정권의 폭력은 이념적 지향에 따라 선별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닌 사회개혁과 통일선거를 요구하는 모든 세력에게 무차별적으로 가해졌다.[39] 베트남어 위키 자료에도 이 수치가 미국인의 추정치로써 인용되어 있다. 관련문서인 Tố Cộng diệt Cộng을 참고해도 좋다.

1957년 기준으로 꽝응아이성에만 최소 6,000명 이상의 정치범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민을 구금하기 위해 사용된 풀로 콘도르(Poulo Condore) 섬은 응오딘지엠 정부의 반공정책이 시작되자, 다시한번 죄수들로 꽉 차게 됐다. 당시 수감되었던 한 베트민의 증언에 따르면 그 안에서 아주 야만적인 고문이 자행되었다고 증언했을 정도.[40][41] 1967년 3월 랜드 연구소에서 작성한 연구 조사 자료를 보면 항불전쟁 당시 베트민 병사였던 한 사람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 나온다. 전직 베트민 투사였던 한 사람은 그의 마을에서 있었던 응오딘지엠 정부의 테러행위 및 유혈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 마을 촌장은 외지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잔인했다. 그는 항불운동 당시 공산당 당원이었던 사람들을 모두 추적하여 그들을 체포하고 살해했다. 그는 우리 마을에서 모두 합쳐 14명의 공산당원을 살해했다. 나는 머우럼([ruby(懋林,ruby=Mậu Lâm)]) 마을에서 그가 두 명의 공산당원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들은 두 손을 등뒤로 결박당한 채 군인들에 의해 생매장되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42]
베트남 중부인 꽝남성에서 저항군이었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956년 꽝남의 지방당국은 이전의 항불 저항군들에 대한 테러조치를 시작하였다. 저항군 부대 1만 명이 체포되었으며 그들 중 상당수는 학살당했다. 나는 내 목숨을 부지해야 했으며 그래서 1960년까지 산 속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같은 마을 출신의 다른 3명과 함께 살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부족마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43]
응오딘지엠 정부가 이러한 테러와 탄압을 가속화하자, 당시 하노이 당국은 이러한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955년 말부터 디엠이 '공산주의자 고발' 운동을 장려하면서, 애국자와 저항운동자에 대한 사냥이 심해졌다. 운동가들은 농촌에서 살면서 정치투쟁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이전의 저항기지였던 갈대평원, 우 민 밀림, D와 C 저항지대(사이공의 서부와 북서부)로 피신했다.[44]
이러한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소위 전직 베트민 출신들을 포함한 지지자들이 테러와 무장투쟁을 시작하기 전인 응오딘지엠 집권 초기부터 양민학살을 동반한 이들에 대한 학살과 탄압이 대대적으로 남베트남 정부 하에서 자행됐다는 것이다. 즉, 베트남 전쟁 초기 남베트남에서의 학살과 테러의 시작 점은 베트민과 그 지지세력이 아닌 응오딘지엠 정부였으며, 결과적으로 그 근본적인 책임은 응오딘지엠 정부에게 있는 것이다. 당시 남베트남의 미군 고문단으로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쪽 분야를 심층있게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제프리 레이스(Jaffrey Race)는 저서 <War Comes to Long An>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정부의 테러 행위는 혁명운동측 보다 훨씬 심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베트민 출신에 대한 소탕작전, '공산주의 마을'에 대한 포격 및 지상공격, 그리고 '공산주의 동조자들'에 대한 검거 등이 그것이다. 1960년에서 1965년까지 롱안(Long An)에서의 혁명운동이 계속 강화되었던 것은 바로 정부측의 이러한 테러전략 때문이었다.[45]
또한 ICC(국제 통제기구 위원회)의 1954년에서 1956년 사이의 활동을 보면, 초기 휴전 상황이던 당시 남베트남에서 미국이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정권에 의해 자행된 잔혹한 보복조치가 베트민이 자행한 잔혹행위보다 규모면에서 훨씬 광범위했음을 보여준다. 이들의 보고서에 따르면, 1956년에서 1957년 사이 지엠 정부는 베트민을 적극 지지하는 농민들을 대상으로 공식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응오딘지엠의 초기 후원자이자 진심어린 지지자중 한명이었던 조셉 버팅어는 1956년 6월 지엠은 아주 경미한 무장력조차 없는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는 지역에 두 차례의 대규모 토벌을 조직했다. 지엠의 병사들은 수만 명을 체포했고...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농민이 죽었다. 남베트남 정부에 우호적이지 않은 민간인이 거주하는 마을 전체가 포병의 포격으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이러한 학살 사실들은 미국 언론에선 비밀로 은폐되며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증언했다.[46]

심지어 이 주장은 응오딘지엠의 가장 큰 적이던 베트민이나 호찌민을 포함한 북베트남의 지도부가 한 것이 아닌, 응오딘지엠의 열렬한 미국인 지지자가 이후 증언한 것이다. 따라서, 여러가지 상황과 1차 조사자료 그리고 응오딘지엠 측근의 증언과 주민들을 대상으로한 조사를 종합해 보자면, 남베트남 정부의 무차별적 테러행위는 베트민이 선별적으로 했던 테러보다 훨씬 심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대다수 남베트남 농민들이 이런 응오딘지엠 정부의 테러행위와 무차별 농민학살에 분노하여,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했던 사실은 당시 남베트남 농민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래는 미국의 역사학자 마릴린 B. 영의 저서 <The Vietnam Wars 1945-1990>에서 인용한 자료로 1963년 응오딘지엠 정부가 몰락한 이후 롱안 성[47]의 촌장이었던 한 인물이 미군사고문단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증언한 것이다.
지엠 정권 당시 이 지역의 대다수 민중은 남베트남 정부가 모든 면에서 정말 안좋다고 봤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이들 중 대략 80%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을 따랐던 것이겠죠. 나는 이 지역의 촌장이었고, 정부가 지시하는 대로 해야만 했습니다. 만약 따르지 않으면, 비밀경찰이 나를 대리고간 뒤 죽을때까지 고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는 이 지역에서 선거를 조작한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나 100만 피아스터[48]를 준다 하더라도 난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당신이 만약 입을 열게 된다면, 그 즉시 당신은 감옥에 투옥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말을 믿어주길 바랍니다. 제가 바로 장본인이기 때문에 알고 있는 진실을 그저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The Vietnam Wars 1945-1990, Marilyn B. Young, Harper Prennial, p.63
1962년부터 남베트남에 미군사고문단으로 배치되어, 갑북전투에 대해 진실을 알렸던 존 폴 밴(John Paul Vann)은 당시 응오딘지엠 정부의 군대가 남베트남에서 어떠한 테러 행위와 짓거리를 했는지 알았고, 그들이 하는 테러 행위에 대해 상식적으로 이해하질 못했다. 아래 닐 시핸이 쓴 <A Bright Shinning Lie>의 한 구절을 보도록 하자.
존폴밴이 보기에 후인반까오(존폴밴이 담당했던 지역의 남베트남군 사단장)나 다른 남베트남군 장교들은 체계적인 근거나 이유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협할 정도로 충분히 베트콩으로 의심되는 민간인들을 죽이고, 그들의 집을 파괴하며 가축을 도살하길 원한다고 판단했다. 남베트남 측의 평정화 작전 이론은 명백히 말하자면 베트남 농민들에게 베트콩을 지지하지 못하도록 테러를 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후인반까오나 그 지역 도지사 그리고 구청장들도 이러한 고문행위나 살인행위를 막기 위한 그 어떠한 일도 전혀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들은 그런 테러행위가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테러행위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우린 그 베트콩 빨갱이 지지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우린 그 베트콩 빨갱이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강력하고 냉정한지를 보여줄 것이다.는 식이었다. 그들(미군고문단과 남베트남군)이 항공공습과 포격에 대해 논할 시에 후인반까오에게서 유일하게 얻을 수 있는 일관된 대답은 항공기와 대포가 정부의 군사력을 과시했고, 남베트남 민중이 이를 존중하도록 만들었다는 대답뿐이었다. 또한 존폴밴은 왜 후인반까오와 대다수 남베트남군 장교들이 이런 잔혹한 학살과 끔찍하기 짝이 없는 가학적 행위에 대해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지 처음부터 이해할 수 없었다. 밴은 또한 남베트남군들이 일반적인 베트남 농민을 인간 이하의 생물로 간주하는 것도 알아차리게 됐다. 이들은 인간을 죽이거나 인간이 사는 마을과 집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냥 동물 사냥하듯이 몰살시키고, 동굴 밖으로 내쫓는 짓을 했다.
Neil Sheehan, 『A Bright Shinning Lie - John Paul Vann and America in Vietnam』, Vintage, 1989, p.109~110
일본 기자 오쿠라 사다오는 응오딘지엠 정부는 1959년 5월 6일에 국가치안유지법을 반포하고 특별군사법정에서 반정부세력을 마음대로 투옥했다고 심층적인 취재보도를 전했다. 오쿠라 사다오에 따르면 1960년까지 응오딘지엠 정권 하에서 80만 명이 수감되고, 9만 명이 처형당했으며, 19만 명 이상이 고문으로 장애인이 되었다고 한다. 남베트남의 소위 '정치훈련센터'에는 항상 8천 명에서 1만 명이 수용되어 있었고, 400개 지역에 농민수용소를 설치해 농민들이 대대로 살아온 가옥을 파괴하고 강제 수용했다고 한다.[49] 심지어 1958년에는 푸로이 감옥에서 수천 명의 정치범 죄수들이 독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단 하루만에 1,000명이 죽었을 정도다.[50] 1958년 12월에 발생한 이 푸로이 대학살을 보면, 당시 푸로이 정치교육센터에는 최소 6,000명의 베트민 출신 인사들과 지지자들이 체포 및 수용되어 있었다. 즉, 남베트남 정권은 이들의 음식에 독약을 뿌려 1,000명을 독살하고 4,000명을 중태에 빠뜨렸으며, 중태에 빠져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51] 베트남의 근현대사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버나드 폴(Bernard Fall)[52]은 1957년부터 1965년까지 미 지상군 개입 이전 기간 동안 15만 명의 민간인이 미고문단이 남베트남군에게 지원한 화력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고 얘기했다.[53]

응오딘지엠 정부 시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에 대한 숫자는 추정치에 따라 다르지만,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백색테러와 학살의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54] 따라서 지엠 정부의 반공주의적 테러 정책은 소수 기득권을 우대하고, 대다수 민중인 농민을 적으로 간주하는 정책이었으며, 반민중 반민주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남베트남 다수의 민중들이 지엠 정부에 반감을 가졌던 것.

응오딘지엠 집권 시기 진행된 소위 '작전으로서의 학살'은 1960년 남베트남에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 자체적으로 창설되면서 더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거기다 미국의 존 F. 케네디 정부가 미군사고문단의 숫자를 증강하면서, 이러한 인명살상은 미군의 지원을 받은 헬기와 APC 장갑차량를 포함한 막강한 화력을 동원한 수준에 도달하기에 이르렀으며, 이후 미군의 베트남 전쟁 전면개입에서 더 광범위하게 수행되기에 이른다. 베트남 국제조정위원회의 캐나다측 인사인 휴이 캠벨(Hugh Campbell)은 미군사고문단이 개입한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대략 2년이라는 기간 동안만 보더라도 남베트남에서 16만 명의 민간인이 남베트남측의 군사작전으로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참고로 이러한 주장의 출처는 사이공 정부측의 공식적인 추정치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이들의 군사작전으로 죽은 이들 중 대다수가 민간인을 차지했다는 것이다.[55][56]

특히나 응오딘지엠 정부 초기에 실행한 소위 전략촌 계획은 당시 베트남 인민들의 정서나 민족감정, 생활양식에 대한 고려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며, 주민들은 대대로 살아오던 자신의 근거지를 떠나야만 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수반된 폭력성은 극에 달했다. 전략촌 계획이 실행된 1962년 남베트남에 주둔한 미군은 남베트남군을 도와 전투지원, 마을폭격, 무장 헬리콥터 출격을 통한 농민들 학살, 곡물고사작전 등이 자행됐다. 전략촌계획에 비협조적이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마을에 대해서는 즉각적인 폭력이 가해졌는데, 이러한 지역에 대해서는 미국의 기갑부대가 파견되었고, 네이팜탄, 제트폭격기의 폭격, 구토 유발가스의 살포 등 지역파괴전략이 수행됐다. 1962년 한 해에만도 어린이, 노인을 포함하여 최소 3만 명의 주민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57] 노엄 촘스키와 에드워드 허만은 <여론조작>이라는 책에서 응오딘지엠 정부의 학살과 잔혹한 테러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954년으로 접어들면서 프랑스가 수세에 몰리자 미국은 1956년에 총선거를 실시해 베트남을 통합할 발판을 마련하기로 규정한 제네바 협정을 즉각 파기했다. 그러고는 무력으로 국민을 통제하면서 남베트남에 친미정권을 세웠고, 테러를 통해 저항세력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59년에는 미국의 조직적인 국가 테러로 많은 인명을 희생당한 남베트남의 베트민 지도자 집단이 무력을 통한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때까지 수십만 명의 국민을 살해하고 도시 엘리트들과 수많은 농민들을 차별한 친미정권의 신속한 붕괴를 꾀했다.
노엄 촘스키·에드워드 허만, 정경옥, 『여론조작』, 에코리브르, 2006 p.309
위에 인용된 수치의 과장과 축소를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았을 때, 그의 집권 기간인 1954년에서 1963년 동안 작은전쟁(처형으로서의 학살과 작전으로서의 학살을 포함)을 통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대략 10만 명 정도로 보는 것이 현실적인 추산에 가까울 것이다. 한반도에서 해방 후 미군정 기간 5년 동안 최소 1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듯이, 남베트남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1948년 제주 4.3 사건이나 여수·순천 10.19 사건처럼[58], 이러한 학살적 정책을 미국이 반공이라는 이름 아래 지원했다는 점에서 당시 작전으로서의 학살로 벌어진 남베트남 정부의 자국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 행위는 분명히 비판적으로 봐야할 지점이다.

2.8. 쿠데타와 피살

응오딘지엠 정권은 내부 개혁 실패로 인한 민심 이반, 공산당의 공격으로 인한 안보 불안, 미국과의 관계 악화가 겹치면서 크게 흔들렸다. 여기엔 여러가지 대내외적 요인이 겹쳤다. 우선 이웃국가인 라오스를 두고 미국과 프랑스가 중립화 정책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는데, 이에 응오딘지엠이 남베트남 공산화의 첫걸음이라고 라오스 중립화를 비난하면서 가뜩이나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미국에게 크게 반감을 샀다.

반대로 미국 정부는 남베트남과 상의도 없이 미국 고문들의 숫자를 늘이는 등 응오딘지엠과 미국의 갈등은 날로 심각해지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을 믿지 못하고 북베트남과 접촉하여 자체적 중립화를 논하는 등 미국에 대놓고 거스르는 행동을 보였다. 거기에 미국 언론들은 베트콩의 활약과 남베트남군의 무능을 강조하며 응오딘지엠 정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퍼뜨렸고 응오딘지엠 정권의 존속이 미국의 노력을 무소용한 것으로 만들 것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

1960년 쿠데타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이 시점에서 이미 균열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쿠데타의 주역은 공수부대의 왕문동[ruby(王,ruby=Vương)][ruby(文,ruby=Văn)][ruby(東,ruby=Đông)] 중좌로, 베트민과 싸우던 북베트남 출신 월남민이었다. 한마디로 원래는 응오딘지엠의 핵심 지지층에 해당하는 사람. 게다가 응오딘지엠은 군 통제력을 강화한답시고 실력보단 충성심 위주로 장교를 승진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보람도 없이 최정예부대에서 이런 인물의 지도하에 쿠데타가 일어났으니, 응오딘지엠이 얼마나 군심을 잃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게다가 원래 응오딘지엠의 명령에 따라 종교파 군벌 토벌에 동원되었던 양문명은 쿠데타 진압에 참여하지조차 않았다.

게다가 응오딘지엠 정권의 대부 소리까지 들었던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마이클 맨스필드가 1962년 사이공 방문 이후 비판자로 돌아서는 등, 미국 내부의 친응오딘지엠 인물들이 반응오딘지엠으로 돌아서기 시작하면서 미국에서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었다. 맨스필드는 아예 1963년 2월 맨스필드 보고서를 내놓아 응오딘지엠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주었다.

거기에 베트남 내부 안보도 연일 악화되었다. 출처가 선정적이긴 하지만, 8월엔 게릴라들이 메콩강 삼각주 전 지역을 모두 장악하여 대낮에도 돌아다닐 수 없을 지경이고 9월엔 게릴라의 공격이 8월에 비해 3배로 증가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미 국방부는 전투병 파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는 등 2만 2천에서 4만의 병력을 파병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장비의 제공은 동의했으나 전투병 파병은 반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멕스웰 테일러, 월트 로스토우, 에드워드 렌스데일 대표단은 미국 전투병 파병이 답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거기에 1963년 5월, 응오딘지엠의 친형 응오딘툭이 대주교로 재직하던 후에 지역에서 불교 탄압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지고 진압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자 불교도들의 항의 시위가 빗발쳤다. 6월 11일에는 이에 항거하여 그 당시 베트남에서 인망 높기로 유명한 승려 틱꽝득(Thích Quảng Đức, 釋廣德)의 소신공양이 나왔다. 그만큼 불교도가 많은 베트남이고 그만큼 민심이 안좋은 상황에서 퍼스트레이디이자 응오딘지엠의 제수인 쩐레수언이 엄청난 망언을 하고 말았다.
파일:external/i.epochtimes.com/Madame_Nhu-387x400.jpg 파일:external/images-na.ssl-images-amazon.com/51W0gkZ8WkL._SX306_BO1,204,203,200_.jpg
위 사진의 인물은 '마담 뉴(Madame Nhu)'로 더 잘 알려진 진려춘[ruby(陳,ruby=Trần)][ruby(麗,ruby=Lệ)][ruby(春,ruby=Xuân)](1924년 4월 15일[59] ~ 2011년 4월 24일)으로 오정염의 제수(동생 오정유의 아내)였다. 응오딘지엠은 독신주의자라 영부인이 없었고[60] 때문에 제수인 쑤언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는데, 쑤언이 아주 극도로 오만하며 사사건건 여러 국가행사에 관여하여 오만 비위와 폭정에 관여하는 통에 민심 이반으로 베트콩에 입대하는자가 더 많았을 정도로 베트콩에 간접적으로 도움이 되었다.[61] 이 인간의 행보는 서방권에서도 눈치도 없으면서 비리는 비리대로 저지르기로 유명하여서 쑤언은 '마담 뉴'라는 비아냥적인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고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드래곤 레이디[62]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여담으로 미국이 관여한 쿠데타에서 가까스로 피신하는데 성공, 자기 일가족을 사지로 몰아넣은 미국을 원수로 여기며 미국 망명은 거부했다. 베트남 군사정부가 자산을 동결하자 이탈리아에 있는 친척에게 도움받기 위해 이탈리아로 망명하였다. 자식은 맏이가 딸 오정려수[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麗,ruby=Lệ)][ruby(水,ruby=Thủy)]고 둘째가 아들 오정탁[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卓,ruby=Trác)]이고 셋째가 아들 오정경[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瓊,ruby=Quỳnh)]이고 막내가 딸 오정려연[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麗,ruby=Lệ)][ruby(娟,ruby=Quyên)]인데 자식농사는 잘했는지 옹오딘꾸인은 무역공사 대표를 지내고 응오딘레꾸옌은 이탈리아에서 변호사가 되었다. 쑤언 본인은 2011년까지 천수를 누리고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하여튼 진려춘이 틱꽝득의 소신공양 소식을 듣자 안타깝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틱꽝득의 소신공양을 '바베큐' 운운하며 고인을 모독하는 선 넘는 망언을 지껄였다.[63]

What have the Buddhist leaders done, comparatively? The only thing they have done: they have barbecued one of their monks, whom they have intoxicated, whom they have abused the confidence[64]. Even that barbecuing was done not even with self-sufficient means because they used imported gasoline.
"그에 비하면 불교계 지도자 놈들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기껏해야 한 거라곤, 중놈 하나 바베큐로 만든 것 뿐인데 말입니다. 마취를 시켜놓고 믿음을 이용해먹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서구화에 항의한다면서) 수입 가솔린을 썼으니 자주적인 방법으로 바베큐를 한 것도 아니었잖습니까."
그것도 이 발언을 미국 방송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말해버려서, 당시 (마찬가지로 가톨릭 교인이었던)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그 자리에 있었던 보좌관 및 기자들도 어이없어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응오딘지엠 정부를 그대로 두면 공산당이 활개치는 꼴이 될거라며 응오딘지엠 축출을 기획했고 후일 쿠데타에 미국도 관여하였다. 나중에 그는 쿠데타군에 잡힌 지엠이 처형된 뒤 이렇게 말했다.
"That goddamn bitch. She's responsible for the death of that kind man. You know, it was totally unnecessary to have that kind man die because that bitch stuck her nose in and boiled up the whole situation down there."
"저 빌어먹을 악녀같으니. 그 사람 좋은 양반이 죽은 건 다 그 자 탓이야. 죽게 할 필요까진 없었는데, 그 자가 괜히 끼어들어서 일을 그렇게 키운 거야."[65]
미국 보수파들도 스스로 베트남 반공세력을 좀먹게 한다고 한탄했을 정도였다. 더불어 미국 정부는 사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 문제의 절로 가서 위로할 정도였다.

여기에 응오딘지엠은 정신 못차리고 불교도들의 저항을 강경하게 찍어눌렀고, 8월 초 응오딘뉴가 사이공의 사리사에 군경을 보내 짓밟아 민심 이반을 초래했다. 전 국민의 90%가 넘는 불교도들이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지만, 응오딘지엠은 이게 다 빨갱이들의 준동일 뿐이라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런 막장대응에 식겁한 백악관은 결국 응오딘지엠 정권을 종교를 탄압하는 악질 부패 독재 정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결국 미국은 1961년의 쿠데타를 묵인했으며, 1963년 10월에는 백악관 주도로 응오딘지엠 교체가 논의되었고, 케네디 대통령은 응오딘지엠 제거에 동의했다. 이러한 미국의 모습에 남베트남의 군사 지도자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결국 1963년 11월, 베트남 공화국 육군양문명[66] 소장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응오딘지엠 정권은 무너졌다. 한편 응오딘지엠은 사이공의 한 성당으로 달아난 뒤 미국 대사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미국의 입장을 요청했지만 주 베트남 미국 대사 헨리 캐벗 로지(Henry Cabot Lodge Jr)[67]는 아무런 입장이 없다면서 사실상 도움을 거절했고, 자신은 누가 쿠데타를 일으켰는지 모른다면서 신변상의 이유로 하야를 권하였으며, 쿠데타 세력이 만약 당신이 항복한다면 안전한 출국을 보장한다더라고(쿠데타 세력이 누군지도 모른다면서 쿠데타 세력의 입장은 어떻게 알았겠는가) 사실상 쿠데타 세력에 편중된 모습을 보였다. 실망한 응오딘지엠은 질서 회복에 노력할 것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져서 아우 오정유[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瑈,ruby=Nhu)](1910년 10월 7일 ~ 1963년 11월 1일)와 함께 11월 2일 오전 6시에 쿠데타군에게 항복했으나 군부는 그들을 살해했다. 쿠데타군이 두 형제의 안전한 출국을 보장하겠다며 호송용 육군 장갑차를 보냈고, 거기에 탑승하자마자 양 손을 결박한 뒤 장갑차 안에서 총살해 버렸다. 물론 군부는 그들이 장갑차 안에서 병사의 총기를 탈취하려고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사살했다고 주장했지만 후일 공개된 처형 직후의 사진에는 양 손이 묶여 있고, 머리에 총알구멍이 난, 전형적인 총살당한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그 외에도 동생 오정근[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瑾,ruby=Cẩn)]은 CIA에게 체포된 뒤 쿠테타군에게 넘겨져 1964년 5월 살해되었고, 그나마 둘째 형인 오정숙[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俶,ruby=Thục)][68]과 오정련[ruby(吳,ruby=Ngô)][ruby(廷,ruby=Đình)][ruby(練,ruby=Luyện)]은 각각 바티칸런던에 있어서 살아남아 타지에서 천수를 누렸다.

한편 당시 방미 중이던 진려춘은 프랑스, 미국, 영국 같은 나라를 떠돌다가 201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초라하게 87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죽기 전에 조국에서 죽고 싶다고 베트남 정부에 애원했지만 "당신은 죽어서도 시체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며 거부당했기에[69] 이탈리아 공동 묘지에 묻혔다.

응오딘지엠이 죽으면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맞설 수 있는 국민국가로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지엠 타도는 극히 인기 없는 독재자를 제거하는 것을 의미했으나, 이는 또한 남베트남의 능력 있는 거의 유일한 민족주의 지도자를 죽인 셈이었다. 그는 꼭두각시가 되지 않고 미국에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지엠의 타도 후에 생긴 정치 혼란으로 인해 미국의 정치적 노력은 소용없게 되었으며 군사적인 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지엠이 있는 한 미국은 비공산주의 정권을 돕고 있다는 이념을 견지할 수 있었다. 즉 지엠의 타도 이후 이미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직접 개입의 필연성은 증가한 반면 개입의 명분성은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분단 전기(1954~1963년) 베트남 통일문제」, 노영순,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p.17

2.9. 사후

그들은 분명히 내게 지엠을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었소. 나는 그들에게 "좋소. 나는 지엠 대통령을 죽이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만 쿠데타에 가담하겠소."라고 했었소. 하지만 그들은 지엠을 죽였소. 그 머저리들이 말이오. 무책임한 미치광이들 같으니라고. 그 일은 굉장히 고통스럽고 지금도 고통스럽소. 내 머리와 가슴 사이가 말이오. 지금도 그의 기일만 되면 나는 내 성당에 나가서 그를 추모하는 미사를 드리곤 합니다.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완문소의 발언
그래서, 내가 틀렸는가? 지엠이 죽고 4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즈엉반민의 그룹이 했던 지엠과 뉴 암살 사건의 유력한 공범자인) 군벌 지도자 응우옌반티에우가 소위 "국가영도위원회"의 주석직을 차지했을때, 사이공 한복판에서 "지엠 총통의 명예 회복" 운동이 일어났다. 어디에서나 지엠을 위한 기념식이나 기도회가 열렸다. 수치스럽게도, 티에우 본인은 그러한 움직임을 막으려는 행동을 취할 생각조차 못할 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가 지엠 기념식에 참석하게 은밀하게 허락했다. 몇년 전에 그 자신이 지엠을 배신했는데 말이다.

그래서, 내가 역사의 죄인이란 말인가? 시간과 사람들의 마음이 이미 내게 답을 해줬다.
니랑(Nhị Lang), 찐민테에 대한 회고록에서[70]
쿠데타 직후 사이공은 축제 분위기였으나, 그 후 몇년 간 베트남 공화국의 정국이 하도 무질서하고 혼란스럽게 돌아갔고, 사람들의 삶도 덩달아 막장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들어가기도 했다. 심지어 지엠 정권을 뒤엎는 데 일조했던 티에우조차도 총통 취임 이전 그런 움직임에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1975년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 그의 시신은 부관참시 당했으나, 묘비 자체는 현재까지도 베트남에 남아 있다. 과거 미국으로 도망쳤다가 도이모이 이후 방문할 수 있게 된 일부 보트피플계 인사들이 그 곳에 가서 추모제를 열기도 했었다고.관련 유튜브 영상

3. 평가

응오딘지엠을 보는 평가는 여러 가지로 갈린다. 다만 재평가 시도는 있지만 총론으로 결합해본다면 한 국가의 지도자로서는 좋은 평가를 내리기는 힘들다는 것이 현대의 중론이다.[71]

3.1. 미국 괴뢰론

응오딘지엠에 대한 가장 전형적인 평가다.

북베트남은 응오딘지엠을 My-Diem[72]이라 부르며 미국의 꼭두각시라 비판했고 이 떡밥을 물어버린 서방 기자들도 남베트남은 독립국가라고 할 수 없다거나, 응오딘지엠이 미국 훈령을 거부한 적은 있느냐며 마구 비난하여 미국 내부의 남베트남 여론 악화에 기여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마냥 미국의 꼭두각시처럼만 행동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의 요구를 거부한 적이 있긴 했다. 결국 미국-남베트남 관계는 응오딘지엠 집권 이후에는 여러 요인으로 악화로 치달았고, 응오딘지엠의 집권 자체도 미국의 압력보다는 베트남 내부 상황과 응오딘뉴의 지원에 힘입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하여 로버트 시글리아노 교수는 응오딘지엠을 "미국의 꼭두각시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 줄을 당기고, 미국의 줄도 당기는 꼭두각시였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문제는 응오딘지엠은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해 미국과 불필요한 충돌을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응오딘지엠 정권을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근본적으로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정권유지가 힘들었다. 앞서 언급된 로버트 시글리아노 교수의 말처럼 응오딘지엠이 미국의 영향권 아래있는 꼭두각시라는 사실은 큰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다 이미 남베트남 내부에서도 반대파의 목소리가 커져갔고 군부는 기회만 있으면 쿠데타를 할 생각이었다. 결국 1963년 미국의 협조와 묵인하에 응오딘지엠 정권은 붕괴되었다.

응오딘지엠을 미국의 괴뢰로 볼 수 있는 근거로는 대미의존적이었던 정권의 행태에 있다. 1955년 중반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고, 미국의 승인 없이는 정책을 채택할 수도 없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런 모습을 보이던 것이 응오딘지엠 정부였고, 이 점에서 보자면 미국의 꼭두각시로 볼 수 있다.# 아래는 1963년 압박 전투를 폭로했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이 내린 응오딘지엠에 대한 평가다.
“그러나 양측의 성격이 구분된 상황에서 미국이 식민주의의 흔적 없이 베트남에 들어간다는 덜레스의 말처럼 순진한 말도 없을 것이다. 베트민은 선거를 통해서든, 전복이나 게릴라전을 통해서든 남쪽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할 자신이 있었다. 그들은 근대 세력이었고, 그들에 반대하는 남쪽 세력은 봉건주의자들이었다. 그 상황에서 그들은 민중의 영웅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가에 강렬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일깨웠다. 아울러 전쟁을 치르면서 프랑스를 쫓아내는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베트남 사회에 대의와 의미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식민 지배 아래에서 그들 사회는 분열되었고, 서로를 불신하며 의지할 가족에게만 충실했다. 따라서 그들이 연대하는 순간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국가를 알게 되었다.

남쪽은 정반대였다. 남쪽의 정부 구성원들은 서유럽인들을 상대했고, 전쟁 때 국가를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지냈다. 그들은 프랑스에 협력했고, 전쟁으로 이권을 챙겼다. 응오딘지엠은 외국에 있어서 어느 편도 고를 수 없었다. 남쪽에는 옛 봉건 질서가 여전히 존재했는데, 이는 미국의 지원 덕분이었다. 남쪽은 다양한 정치 세력이 연대하기보다 분열되는 양상을 보였다.

베트남의 전통은 가문에 충성하는 것이었다. 응오딘지엠 정부는 친족 정부였고, 따라서 지엠이 몰락하던 시기에 오로지 친족만 신뢰했다. 처음부터 한 베트남 친족만 과거 속에서 살고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현대에 살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 리더십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북쪽은 외국인을 쫓아낸 사람이 이끌었고, 남쪽은 외국인이 추대한 사람이 다스렸다. 호찌민은 프랑스 식민주의가 한창인 시기에 드러내놓고 활동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망명했고, 지엠은 해방에 대한 열정이 가장 뜨겁던 시기에 베트민을 인정하지 못하고 망명했다. 호찌민은 권력을 잡기 위해 외국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국 세력을 몰아내기 원하는 농민층 속으로 깊숙이 침투했던 것이다. 지엠은 외국의 도움이 없으면 단 한 주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미국의 정치적 필요성과 야망이 만들어낸 미국의 피조물이었다. 베트남 기준에서 볼 때 그에게는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 지엠은 불교 국가의 가톨릭교도이자 남부의 주류 베트남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혁명이 휩쓸고 간 국가의 봉건 귀족이었다.
최고의 인재들 p.253~254

응오딘지엠을 미국의 괴뢰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 베트남 전쟁에 깊이 개입한 미국 지도부 스스로의 평가이기도 했다. 2023년 작고한 대니얼 엘스버그가 베트남 전쟁 당시 폭로한 펜타곤 페이퍼에는 남베트남은 미국의 창조물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미국 자신들이 세운 꼭두각시라고 밝히고 있다. 아래에 인용한 펜타곤 페이퍼에 나온 내용 일부를 보자.
남베트남을 위한 미국의 특별한 헌신과 개입


마지막으로, 베트남에 대한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칠 요소들을 검토하는 차원에서 보자면, “남베트남은 본질적으로 미국의 창조물[73](동남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이었다.”는 명백한 사실을 우린 명심해야 한다.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응오딘지엠은 1955년과 1956년에 남베트남에서 자신의 권력을 절대 공고히 하지 못했을 것이다.


미국의 개입이라는 위협이 없었다면, 베트민 군대의 즉각적인 공격을 전혀 받지 않은 채 1956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요구된 선거에 대해 논의하는 것조차 전혀 거부하지 못했을 것이다.


매해 마다 지속적인 미국의 원조가 없었다면, 응오딘지엠 정권과 독립국가 남베트남 둘 다 확실히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54년 시점부터 남베트남을 향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은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및 거래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형태로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 남베트남에 대한 이와 같은 미국의 지원이 부적절한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미국의 지원은 항상 경제적인 것이었으며, 때로는 우리 미국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응오딘지엠 정권이 사회적인 개혁에 착수해야할 의무를 지녔다는 발언으로 포장됐다. 그러나 1961년까지도 경제적인 지원과 통상적인 군사 장비 그리고 이와 관련한 조언을 넘어서는 어떠한 지원을 고려할 기회가 없었으며, 남베트남에 대한 우리들의 지속적인 지원이 의심스럽다는 의견 또한 전혀 없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남베트남에 대한 특수한 지원 및 원조를 점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와 같은 지원은 1961년 초에 존재했던 지원 수준에서 보아도 절대적으로 구속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남베트남이 필요로 하거나 요청할 수 있는 더 높은 수준의 지원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미국의 개입이었다; 최소한 생각이 있다면 이걸 그냥 넘기는 것은 다소 어색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정말로 추후 정책결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미 본문에서 논의된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여 보자면, 물론 미국의 정책없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똑같은 경로를 따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렵지 않다. 반면에, 미국과 남베트남 사이에 있는 기존 특수한 관계가 없었다면, 1961년 시점에서 미국은 적어도 베트남과 라오스를 위한 연립 정부를 고려했을 것이며, 역사적으로 하노이와 베이징 둘로부터 독립적인 태국과 다른 국가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제한하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가장 무미건조한 종류의 질문이다. 1961년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없었다면, 미국이 걱정할 남베트남 또한 없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74]
펜타곤 페이퍼 본문은 미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응오딘지엠은 1955년과 1956년에 남베트남에서 자신의 정치적 지배력을 공고히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이는 미국 스스로가 1급 기밀문서에서 내린 평가이며, 따라서 응오딘지엠 미국 괴뢰론을 단순히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이라고 볼 수 만은 없다.

3.2. 낡은 전통주의자

응오딘지엠이 가톨릭과 유교에 집착하여 자본가와 지주의 이익만 옹호하다가 결국 현대성에 휩쓸려간 것이라는 해석이다. 여기서는 응오딘지엠이 미국의 꼭두각시는 아니라고 보지만 케케묵은 낡은 인물이라고 비판한다.

응오딘지엠은 아버지 응오딘카로부터 고전 한문과 유학을 배우는 한편 라틴어와 프랑스어도 배웠다. 자본주의의 끝을 달리던 미국의 경제 대공황을 지켜보면서, 응오딘지엠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맹목적으로 따르기보다는, 유교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여 향촌 사회에서부터 교화를 이뤄내고 국민의 이타심과 공동체주의를 함양하기를 꿈꿨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남베트남에 현대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이루려 한 것이다. 그는 또한 프랑스에서 사서 교육을 받았던 동생 응오딘뉴로부터, 에마뉘엘 무니에(Emmanuel Mounier)[75]의 가톨릭 인격주의(personism)[76]를 접한 후 유교와의 유사성이 있다고 느꼈고, 이를 베트남이 따라야 할 제3의 길이라고 믿었다. #

그러나 다원적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미국이 보기에는 응오딘지엠의 이러한 행보가 구태의연한 권위주의로 보일 뿐이었고, 응오딘지엠 본인의 내향적인 성격과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버릇으로 인해 주변 관료들과는 물론 미국인 인사들과의 오해는 갈수록 커졌다. 이는 미국과 응오딘지엠이 계속해서 노선 충돌을 일으키는 주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응오딘지엠은 불교와 까오다이교 등을, 자신이 추구하는 유교와 가톨릭 인격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구습'으로 인식하고서 마구 탄압했다.

결국 1963년 응오딘지엠은 틱광득 소신공양 후 퍼스트레이디를 방치해 놓고 '소련유고슬라비아에 하듯이 미국도 베트남을 그렇게 대해달라'며 독자 노선을 추구할 것임을 대놓고 선언하고 북베트남과도 물밑에서 화해 및 상호지원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나치 독일을 몰아낸 티토와 달리 응오딘지엠은 미국에 빌붙고 이용해 먹은 탓에 외줄타기가 될 리가 없었다. 티토는 자기들만의 공산주의를 시행하고 외세 의존받지않고 잘 이어나갔는데 응오딘지엠은 밀집촌 프로젝트를 실패하였고 이러한 응오딘지엠의 움직임은 공산주의의 확산을 경계하던 미국의 심기를 제대로 거슬렀고, 얼마 안 가 응오딘지엠은 미국의 방조를 등에 업은 쿠데타로 축출되어 죽었다.[77]

하지만 전통주의자 해석에 있어서도 응오딘지엠의 정권이 미국의 배신으로 붕괴되지 않고 존속되었으면 응오딘지엠의 '자애로운 권위주의'가 성공을 거두었을 것이란 긍정적인 견해도 있다. 만일 응오딘지엠이 제수가 인터뷰를 해서 사고 치는 것을 막았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고. 정권에 위협되는 반정부세력이라고 어쩔 수 없이 말했다면 미국의 심리가 달라졌을 것이다.[78]

3.3. 전면적 재평가

집권 과정에서 응오딘지엠 일가의 노력을 강조하며, 베트남 근대화 시도와 국가건설 전망을 조명하고 응오딘지엠이 베트남식 발전전망을 가진 민족주의 지도자였다고 재평가한다. 이 관점에서 응오딘지엠의 최고 실수는 초반의 성공에 도취되어 자신이 이미 승리했다고 착각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도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을 다섯가지 가정 중 하나로, 응오딘지엠 정권의 존속을 두번째 가능성으로 지목한 바가 있다. 독재와 부정부패와는 별개로 자체적인 정치적 수완도 상당했고, 미국 내에 미시간 대학교 고문 그룹을 중심으로 커넥션도 있어 나름 독자적인 정책을 펼치며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닌 자신만의 정치를 할 역량이 있었던 남베트남 정치인은 응오딘지엠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제거된 이후 남베트남 정국은 오히려 더 악화된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더욱 더 고무된 베트콩은 1964년, 65년 쯤에 들어서는 아예 사이공 바로 앞의 동호이 전투에서 남베트남군 레인저[79] 대대 3개와 정규군 보병 연대 3개를 박살내며 월남 적화 통일을 1960년대 중반에 거의 이룩할 뻔 한다. 이대로 두면 월맹이 직접적으로 나설 것도 없이 베트콩만으로도 남베트남이 몰락할 것 같은 기세여서 이 시점 이후로 미국은 직접적이고 대대적인 전면전에 개입하게 된다.

3.3.1. 반론

UC 버클리 대학의 베트남계 미국인 교수 Nu-Anh Tran 교수는 2013년에 새로운 해석을 제시했는데, 이 해석은 기존에 20세기 초중반 베트남 사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베트남 공화국 멸망 이후 서방권의 일반인들이나 정치가들에게는 주목받지 못한 '종교파'(sect)들에 주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일단, Nu-Anh Tran 교수의 평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의 '친프랑스 세력의 제거와 바오다이의 축출' 문단에서 잠시 소개된 종교파 세력에 대해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20세기 초반에 형성돼서 56년까지, 그들의 종교인 까오다이교와 호아하오교를 기반으로 민중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1945년까지 프랑스를 상대로 항불 무력 투쟁을 전개했고, 사실상 떠이닌성과 메콩강 삼각주 같은 남베트남 남서부 지역의 지배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이들이 베트민의 일방적인 배신 때문에 반공 성향이 아주 강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베트민의 배신 때문에 1차 인도차이나 전쟁 기간 잠시동안 프랑스와 협력하기도 하는 흑역사도 있으나, 애당초 먼저 배신때린 세력이 누군지 뻔했기 때문에 이들의 명분이 희석되는 일은 없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응오딘지엠에게 크게 토벌당하던 그 순간까지도 자기 지역에서 주민들의 열성적인 지지를 받았다.

종교파 자체가 하나의 세력이 아닌 두 개의 주요 종교를 포함한 여러 이념과 목소리가 뭉친 세력이었기 때문에, 이들만으로 이루어진 정부 체제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1947년에 이들이 만든 Việt Nam Quốc Gia Liên Hiệp(베트남 국가 연합)이 실패한 것에서 그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이들이 실패한 남베트남만의 단일 정부를 구성하는 일과, 베트남국의 친불 기득권 세력의 우두머리들을 숙청한 성과는 분명 응오딘지엠이었기에 해낼 수 있던 업적이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베트남국의 정치체계를 자기 편으로 만들어서 세력을 확보하자마자 스스로 만들어가던 나라를 말아먹기 시작한다. 종교파 세력이 만든 두 연립조직 중 반정부 세력인 연합전선 쪽은 분명히 문제가 많기는 했다. 연합전선의 통보에 참여를 했던 찐민테조차 결국 북베트남의 위협 앞에서 대놓고 반정부 조직을 키우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고 친 응오딘지엠 세력인 혁명위에 참가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응오딘지엠이 스스로 모든 권력을 움켜쥐려고 혁명위 쪽 종교파 세력들까지 숙청해버리면서 모든 것이 엇나가버리기 시작한다. 혁명위가 응오딘지엠의 해산 요구에 응해 해산한 뒤로도 지엠은 이들을 자기 세력으로 흡수할 생각은 안하고 탄압하기 바빴다. 종교파 군벌 병사 대부분은 약속과 달리 베트남 공화국군에 편입되지 못했으며, 소수의 편입된 병사들도 계급을 강등당하고 낮은 위치의 비전투병과에만 배치되는 등 온갖 차별을 겪어야만 했다. 극히 일부는 궁지에 몰려 베트콩에 들어가길 강요당하기까지 했다.

종교파들에 대한 숙청이 지나치게 가혹했던 것도 문제였다. 정치와 아무 상관도 없던 호아하오교의 최고 지도자가 의문스러운 납치를 당하는 것은 물론이요, 호아하오교의 명망 있던 영웅 레꽝빈이 항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단두대로 잔혹하게 처형당한 것은 호아하오교 교도들 전체의 민심이 크게 악화되는 데 기여했다. 까오다이교 역시 수많은 성직자가 체포당하고 본부가 베트남군에게 침입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출처1 출처2

3.4. 기형적인 지엠 정권의 구조

응오딘지엠 치하의 베트남 제 1 공화국 정부의 정권 구조는 그 탄생 과정의 난맥상 때문에 굉장히 기형적이었다.

일단 일부 극좌 인사의 주장과 달리 베트남 공화국은 미국의 '개입'이면 모를까, 미국의 '지시'로 세워진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일단 미국에게는 남베트남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군사력 자체가 없었다.[80] 미국이 한 일은 (에드워드 랜스데일 휘하의)자신들의 첩보망을 통해 바오다이 정권을 뒤엎도록 남베트남 내부의 반식민주의 유력자들을 '부추긴' 정도가 다였다.[81] 그나마도, 아예 응오딘지엠보다 다른 민족주의자들이 바오다이의 실각에 더 적극적이었고 응오딘지엠은 초기에는 하얗게 질려서 그걸 바라만 봤다는 증언도 있으니만큼 미국이 굳이 부추기지 않았더라도 바오다이 정권이 과연 얼마나 갔을지도 의문.

여하튼 베트남 공화국은 남베트남인들의 힘으로 세워졌다. 그나마 프랑스가 통제하기 유리할 만큼 무력했던 바오다이의 권위를 언플로 깎아내린 것도 남베트남의 언론이었고, 1955년 4월 당시 총리였던 응오딘지엠의 주도로 베트남국 정부가 뒤집힐 때 친불파 남베트남군 수뇌부의 개입을 막은 것도 남베트남인들 자신들이 만든 군대였으며,[82] 거대한 제네바 합의 반대 시위를 일으키고 분위기 과열로 폭동까지 일으켜 남북 총선거를 엎어버린 것도 남베트남인들 자신들이었다.

이렇게 베트남 공화국의 국내 건국 주체가 여러 남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의 교집합이었으니만큼, 정권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건국 주체 자신들의 '협치'가 필수적이었는데, 민주주의를 싫어하고 독재정권이 반공국가로써의 최선이라고 여겼던 응오딘지엠에게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걸 스스로의 힘만으로 뒤집을 수 없던 응오딘지엠은 두 가지 수단을 사용했는데, 하나가 바로 친인척을 포함한, 응오딘지엠 개인과 뭔가 공통점이 있는 인사 위주로만 등용하는 것이었으며, 나머지 하나는 좀 전까지 자신들과 신나게 치고받던 기존의 친불 기득권 세력의 잔재를 부려먹는 것이었다.[83]

응오딘지엠 정권이 지나칠 정도로 카톨릭 위주의 인사정책을 폈던 것도 사실은 이게 원인이다. 근로인위혁명당은 종교 정당이 아닌 세속주의 정당이었다.[84] 딱히 지엠 정권이 카톨릭 종교국가를 지향해서라든지, 혹은 지엠 자신이 너무 독실한 카톨릭이라서라든지의 이유가 아니다. 그저 지엠 자신의 국내 세력 기반이 너무 미약하게 출발했으며 정권 성립 과정에서의 동지들도 잔혹하게 숙청해서 입지가 약했기에 종교에서라도 동질감을 가진 인사라도 대거 채용하여 반대파로부터 보호받기 원했기 때문일 따름이다.

이렇듯 응오딘지엠 정권은 정권 그 자신의 근원이나 사상과 실제 정권 구조가 모순으로 가득 찬 기형적인 정권이었다. 이런 정권의 구조적 모순은 사실 베트남 제 1 공화국의 여러 고질병의 원인이라고 봐도 좋은데, 응오딘뉴가 그렇게 구린내나는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마약 밀매에까지 손을 댔음에도 해임시키지 못했던 이유도 안 그래도 지엠 자신의 행보로 믿을 사람이 없는데 가족마저 잘라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며,[85] 불교와 민족종교계의 반발을 샀던 것도 이미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민족종교계를 토사구팽하고 카톨릭을 대신 택했으니만큼 카톨릭의 민심이라도 확실히 장악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3.5. 다른 반공주의 지도자들과의 비교

3.5.1. 장제스

1954년, 그가 수상으로서 집권했을 때의 베트남국의 상황은 일견 국민혁명 직후 일시적으로 통일된 중화민국의 상황과 비슷해보인다. 혼란기 동안 여기저기 난립한 군벌, 권위가 없던 전임자(장쭤린, 응우옌푹브우록)의 정권, 그리고 여전한 외적 등. 어쩌면 응오딘지엠이 철저하게 정치적 다원주의를 배제하고 정적 숙청으로 일관한 것은 통일 중화민국의 어지러운 상황을 보고 느낀 것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장제스와는 달랐다. 중국 군벌들은 부패한 똥별들이 많았고 이념적 기반도 부실했다. 남베트남의 군벌들은 빙쑤옌 같은 그런 조직도 있었지만, 독립전쟁 기간 동안 강력한 외적인 프랑스를 상대로 맞서 싸워 능력을 증명한 인물들도 많았고, 일단 북쪽의 공통된 적이었던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단결은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인물들이 꽤 많아 응오딘지엠이 초기의 유화적인 태도를 유지했다면 제대로 포섭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응오딘지엠은 장제스와는 달리 군사적인 능력이 전무했다는 것이다. 장제스가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황포군관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군사적인 지식을 착실히 쌓은 뒤 거물이 된 것과 달리, 지엠은 관료 계통의 독립운동가였을 뿐이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무력으로 저항운동을 한 적은 없었다. 이런 차이는 군사적인 성과 차이로 드러났는데, 중일전쟁 시기에 군벌군이 연이은 추태를 보이는 와중에도 장제스의 직속군은 나름의 체면치레는 했다는 평가를 듣는 데 비해, 1955년 당시에 나름 싸울 줄은 아는 군대였던 남베트남 정규군은 지엠의 집권이 길어지면서 질적으로 심각하게 저하되어 압박 전투 같은 개망신을 당하는 등 공산군을 상대로 (1955년에 바로 그 정규군에게 숙청당했던) 1955년 이전의 까오다이교, 호아하오교 군벌들보다 훨씬 처참한 수준을 보였다.

사실 장제스도 군사적으로 고평가만 받을 인물은 아니긴 하다. 군부의 부정부패를 제대로 해결 못 해서 군 질적 저하를 불러왔고, 중일전쟁에서의 뛰어난 판단력은 어디로 갔는지 국공내전에서는 실책을 거듭하다 대만으로 쫓겨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은 장제스보다도 실책이 심각했으며, 그나마 성과라고 불릴 만한 것도 "전술은 오십보백보인데 숫적으로 많은 쪽이 이겼다"라는 평가를 듣는 1955년의 사이공 전투 정도를 제외한다면 없었다. 그래도 1955년에 숫적으로 밀어붙이면 이길 줄은 알았던 남베트남군이 압박 전투에서는 비정규군 베트콩을 상대로 패배할 정도로 약해진 건 당연히 응오딘지엠의 책임이다. 장제스 중앙군은 적어도 이 정도로 질적 저하가 두드러지진 않았다. 스스로의 군사역량조차 함량미달인 주제에 정치동맹이었던 군벌 지도자들마저 토사구팽했던 실책은 베트콩의 대대적인 침투라는 결과로 되돌아왔다.

1960년에 이미 쿠데타가 한 차례 일어났고, 1963년에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이 다름 아닌 그가 밀어준 즈엉반민이었다는 사실은 지엠이 장제스보다 군 내부를 통제하는 정치력조차 훨씬 떨어졌음을 보여준다. 차라리 국부천대 이후의 장제스처럼 군대를 철저히 휘어잡고 철권통치를 했다면 종교파 군벌이 사라진 남서부 지역의 군사적 공백으로 베트콩의 침투가 쉬워지지도 않았을 것이고, 스스로가 1963년에 쫓겨날 일도 없었을 것이다.

3.5.2. 이승만

'군사적 경험은 없지만 외국을 돌아다니며 외교적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란 커리어와 미국의 지원을 받아 친미국가의 초대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점을 보자면 이승만과의 공통점도 많지만 차이점도 많다.

이승만은 지엠과 달리 자신 외의 반공 독립운동가를 모조리 숙청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덕분에 대한민국 국군은 베트남 공화국군과는 달리 군사적 경험이 있던 독립운동가였던 이범석, 손원일, 김홍일, 최용덕 같은 사람들이 초기에 군 수뇌부로 큰 무리 없이 편입되었고,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 장교들과의 갈등도 아예 없진 않았겠지만 문제가 있을 수준으로 두드러지는 일은 없었다. 이승만은 응오딘지엠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승만은 후일과 달리 초반에는 국회에서 정당하게 선출된 대통령이었지만 응오딘지엠은 그의 동생이 선거를 조작하여 98%의 득표율로 당선되는 등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지도자였던 것도 초기의 패착이다.

국가의 정체성도 중요했다. 응오딘지엠은 위의 마담 누의 망언에서 단적으로 들어나듯, 천주교를 우대하고 베트남 민족 대다수의 종교였던 불교를 탄압했다. 이는 민심 이반은 물론이고 남베트남이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로 보이게 하여 베트콩의 토양을 제공했다. 베트콩에는 공산주의자 뿐만 아니라 민족주의자들도 가담했다. 이는 한국으로 치면 해방 후 한국에서 식민지배자의 종교인 신토가 우대받는 꼴이었다.[86] 반면 이승만은 내각에 독립운동가를 등용하고 이범석, 지청천 등 민족종교 세력과도 연대하며 일본괴뢰라는 프레임이 성립되지 않았다. 결국 전쟁 기간은 물론 그 이후에도 북한은 한국에게 그저 미국 앞잡이라는 먼 산의 메아리스러운 주장만 내놓고 있는 것이다.

지엠의 정치적인 협소성 때문에 베트민 게릴라를 많이 상대했던 종교파 군벌 쪽 군인들이 정규군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낳았고, 여기에 지엠이 군대를 지나치게 못 믿어서 능력보다는 충성심 위주로 장교들이 승진해서 결국 남베트남군 붕괴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같은 군사경험 없는 독재자였어도 이승만은 적어도 전쟁이 터진 뒤에는 자신의 비전문가로써의 한계를 인정하고 아돌프 히틀러처럼 무리하게 자국군 장성이나 미군 장성들의 결정에 토를 달아 발목을 잡지는 않았고, 지엠은 그렇게 했기에 이승만과 달리 공산군과 싸울 수 있는 군대를 만드는 데 철저하게 실패했다.[87]

이런 점에서도 응오딘지엠은 이승만과 차이를 보인다. 한국의 이승만 정부는 반공이라는 이념적 우산 속에 모여들어 철저한 이념적 통일성을 이루어낸 반면, 남베트남 응오딘지엠 정부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기제를 갖지 못했다. 베트남에서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한 결집은 그 집단의 반민족성을 자인하는 것밖에 다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할 것이었고, 남베트남의 지배집단은 권력 안에서 보호받기를 원했지만, 그것이 곧 반공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신봉하는 것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88]

그리고 이승만은 지엠과 달리 달리 농지개혁에 성공했으며 여순사건을 통해 군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을 축출하는데도 성공했다. 이승만은 정권 초반 농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어 미래 경제발전의 기틀의 닦았으며 6.25 전쟁 당시 북한이나 공산주의자들에게 민심이 흔들리지 않게 막아냈으나 지엠은 그러지 못했다. 이승만 정부도 국민방위군 사건 같은 부정부패 사건과 여러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반정부 세력의 토양을 완벽히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반면 지엠은 그냥 처음부터 개판만 치는 상황이였으니 말이 필요없다.

대한민국이 물이 조금씩 사라지는 기묘한 항아리였다면, 남베트남은 그냥 밑빠진 독이었다. 미국이 한국보다 남베트남에 더 많은 원조를 했음에도, 한국은 생존하고 남베트남은 패망한 것은 이런 차이점들 때문이다.

말년도 다른데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가 일어난 후 책임지고 하야한 후 하와이에서 여생을 보내다 죽었지만, 지엠은 쿠데타가 일어나자 군부에 체포된 후 살해됐다.

3.6. 총론

결국 남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지키는 것은 미군이 한다 해도 실제로 남베트남 정부를 구성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를 하며 현지 인민들을 남베트남이란 국가 안으로 끌어올 만한 남베트남의 정치인은 응오딘지엠이 실질적으로 마지막이었던 셈이다. 응오딘지엠이 쿠데타군에 의해 축출당한 후 남베트남의 많은 장성들이 정권을 노리며 나도 수장이 되겠다며 수많은 쿠데타의 수렁을 겪다가 통킹만 사건 발발을 계기로 미국이 직접 개입한 이후 아예 주권 국가로서의 존재감과 독자적 역량이 사라져버리고, 진짜 정직한 미국의 꼭두각시로 전락해버렸다. 파리 평화 회담 같은 자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전시 회담에서도 아예 철저히 배제되면서 괴뢰국 수준으로 떨어진 남베트남은 결국 응오딘지엠 이후 상실한 독자적 정치적 역량을 회복하지 못하고 식물인간처럼 미군의 보호에 연명하다 결국 1975년 북베트남과 베트콩의 최후의 공세에 의해 그 기구한 역사를 끝마치게 되었다.

하지만 응오딘지엠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어디까지나 응오딘지엠 이후의 남베트남 지도자들과 남베트남 군대가 더 무능하고 형편없었기 때문에[89] 차라리 응오딘지엠이 존속하는 게 더 가능성이 있었지 않았을 것라는 의미일 뿐이다. 대안들이라고 나온 인간들이 더 무능한 인간들밖에 남지 않도록 한 사람이 바로 응오딘지엠 자신이다. 독립운동은 했으나 무력투쟁 경력은 없던 책상물림 주제에 무장투쟁 경험이 풍부한 혁명위의 장군들을 앞뒤 안 가리고 숙청해버리는 동시에 정규군 장교들은 실력보단 충성심 위주로 승진시켜서 베트남군 간부들의 질적 수준을 크게 저하시켰고, 수많은 베트남 농민들의 마지막 희망이자 성공했다면 베트콩의 계급투쟁 전략을 가장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던 토지개혁을 소극적인 태도로 말아먹고, 전략촌 같은 허황한 곳에 물자/시간/노력을 헛되어 날려버렸으며[90], 편협하고 차별적인 종교 정책으로 국민 대다수인 불교도, 특히 그 중에서도 독립운동에 큰 기여를 했던 호아하오교 분파를 배척하고 분열시켰을 뿐 아니라[91], 생각없는 충동적인 행동으로 국민의 공분을 샀던 쩐레쑤언의 행동을 통제하지도 못했다. 이러한 억압적이고 불통 그 자체인 국정운영은 민심의 이반을 유발했고, 특히 젊은 지식인들과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농민들은 가장 격렬히 반발했다. 이 모든 실책 중에서 결과적으로 보면 디엠 본인과 남베트남에게 가장 해가 되었던 것은 미국과의 관계 악화다. 전쟁으로 강제 분단된 상태라 경제적 자립도 어려운 상황에서 중공과 북베트남이라는 거대한 위협에 노출된 국가로서 살아남으려면 후원자인 미국과 서방세계와 우호적인 관계가 필수적인데, 이유야 어쨌든 지엠은 각종 독재와 실책으로 서방세계를 실망시켰다. 해외 망명객 시절 구축한 인맥 역시 디엠의 비타협성과 고집 때문에 정권 말기가 되면 붕괴되다시피했고, 서방과의 계속된 갈등은 끝내 가장 큰 후원자 미국이 인내심을 잃고 응오딘지엠 제거를 승인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결론은, 지엠의 몰락과 남베트남의 멸망에 가장 큰 책임을 가진 사람은 바로 응오딘지엠 본인이라는 것이다.

4. 참고 문헌

  • 지엠 정권과 미국의 동맹, 정일준, 고려대학교.
  • 베트남 공화국 응오 딘 지엠 정권 지배이데올로기의 특성과 한계, 윤충로, 동국대학교.
  • 분단 전기(1954~1963년) 베트남 통일문제, 노영순, 고려대학교.
  • 케네디의 베트남 정책 - 냉전 승리를 위한 색다른 방식, 장준갑, 전북대학교.
  • 나라를 빼앗긴 군대의 비망록-월남군,그들의 이야기, 김만식, 중앙미디어 출판.

5. 여담


영상 초반의 곡은 베트남 공화국의 국가인 공민에게 고함이다.
  • 1957년 9월에는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 중장(현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서 인식은 좋은 편이었고, 반공 정부 지도자로서 언론에서 높이 평가했지만 죽은 뒤에 응오딘지엠의 치세가 비난을 받고 국내 교과서에서도 그냥 이름만 언급되며 상세하게 거론되지 않았었다.
  • 전술되었듯이 1960년대 초반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의 영향력을 교두보 삼아 북베트남에 접촉해 협상과 자체적인 중립화 논의를 시도한 적 있다. 성공했다면 베트콩과의 내전을 마무리하고 불안하게나마 평화가 지속될 수도 있었겠지만, 쿠데타군에 의해 피살되면서 접촉은 중단되었다. [92]
  • 인도를 방문하는 등 제3세계와의 관계도 꽤 중시한 편이었고, 미국과의 관계 역시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자주적이어야지 장제스의 대만이나 이승만의 남한처럼 지나치게 의존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인식했다고 추정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물론 제3세계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잇따라 독립하는 당대의 사정을 볼때는 괜찮은 길이었지만 본인이 알아서 말아먹는 바람에 그 노력이 쓸모없어졌다.

[1] 영어권에는 그냥 'Ngo Dinh Diem'으로 쓰고 발음도 영어식으로 '노 딘 디엠'이나 '노 딘 지엠'에 가깝게 읽는다. 이는 베트남식 라틴 문자와 영어권의 라틴 문자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일이다. 한국에는 예전에 '고 딘 디엠'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ng를 ㄱ으로 읽은 일본 서적들이 번역되어서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응우옌은 당시 구옌으로 알려졌다. 참고로 북한에서도 잘못 읽어서 느고 딘 디엠으로 표기했었다.[2] 보통 응오딘지엠의 직위인 president를 쯔꾸옥응으로는 똥통(tổng thống)이라고 표기하는데, 한국에서는 통상 대통령(president)이라고 번역하나 이것은 사실 한자로 쓰면 總統(총통)으로 '대통령'의 베트남어 번역이다.[3] https://gall.dcinside.com/m/war/1641103 https://gall.dcinside.com/m/war/1635853[4] 하지만 이 선거는 부정선거였다. 98.2%라는 결과도, 99%로 발표하려던 것을 미국에서 너무 비민주적으로 보인다고 지적해서 낮춰서 발표한 것이다.[5] https://gall.dcinside.com/war/1640506[6] 이 때문에 대개 중부지역 사령관 정도로 표현된다.[7] 아이젠하워와 덜레스도 선거를 하면 분명 호치민이 80% 이상의 득표로 승리할 것이라 보았다. 이는 '민주적이고 정통성 끝판왕인 북베트남'이 민심을 얻어서 이긴다는 전망이 아니라 일당독재와 공포정치로 북베트남을 장악한 공산당이 부정선거로 이길 것이 틀림없다는 전망이었다. 가톨릭 교도 탄압, 토지개혁과 농민 학살 등을 보고 미국은 북베트남을 전형적인 레닌주의 독재정권으로 판단하여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있었고 선거를 감독한 프랑스군은 남북베트남에서 동시에 난타를 당하다 손털고 나가서 공정한 선거는 이미 물건너간 후였다.[8] 그러나 당시 뉴욕 타임스만 하더라도 "1955년과 1956년에 걸쳐 6개월 동안" 제네바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미국의 정책을 알리는 뉴스 보도를 단 한 건도 싣지 않았다. 미국 3종의 주요 주간지도 마찬가지였다. 선거의 회피는 공산주의자의 테러와 결집을 근거로 정당화되었다. 즉 당시 언론은 호치민과 베트민을 오로지 테러와 무력을 통한 지지 확보를 일차적 수단으로 생각하는 소련중국의 하수인으로 표현했다. 즉 총선 거부관련 보도도 여론조작이 있었으며 매카시즘적 반공주의적 사고관으로 베트남 문제를 본 것이지, 완벽한 사실이었다고 보기 힘들다.(여론조작 p.319~320을 참조)[9] 한국에선 농지개혁법에 따라 약 3ha의 토지만 보유할 수 있었다.[10] 2500개가 완성, 2500개는 공사 중이었다.[11] 방어시설이 갖춰진 새 마을을 짓고 그곳으로 사람들을 이주시켜야 하니까.[12] 전략촌은 기본적으로는 남베트남 민병대가 방어했는데 이들의 장비나 훈련이 영 아니올시다 였는지라...[13] 단 이 두 전투들은 모두 응오딘지엠이 피살된 이후에 벌어진 전투들이긴 하다. 하지만 생전인 1963년 1월 2일에도 수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갑북전투에서 수적으로 훨씬 우세한 남베트남군이 훨씬 소수의 베트콩에게 무참하게 깨졌다.[14] 다만 버나드 폴은 1963년 수치가 과장되었다고 주장했다.[15]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81~690을 참조.[16]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681~692를 참조.[17]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리영희 교수가 인용한 자료는 서방권에서 베트남 근현대사 연구 1차 사료로 인정받는 버나드 폴(Bernard Fall)의 저작이다.[18] 원출처는 제프리 레이스의 War Comes to Long An, Berkel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2[19]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44~745[20] 이 시기 해방구는 공식적으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이 창설되기 전에 만들어진 해방구다.[21] 윌리엄 J. 듀이커, 정영목 역, 『호치민 평전』, 푸른숲, 2003, p.755~756[22] 베트남의 역사(2018년 개정판) p.357[2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34[24]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34~535[25]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37[26] 책에서 인용한 출처는 Hans Morgenthau, Vietnam Chief a Multi-Paradox, Washington Post, 1956.02.26[27] 책에 인용된 출처는 Political Economy of Human Rights, (Boston: South End Press, 1979)[28] 원출처는 David Hotham, in Richard Lindholm, ed., Vietnam; The First Five Years(Michigan States, 1956), p.359[29]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67 원 출처는 가브리엘 콜코의 저서 Anatomy of War, The New Press, 1994, p.89[30] 벌거벗은 세계사에서 베트남 전쟁 편을 강연했던 김봉중 교수(미국사 전공) 또한, 이 수치를 인용했다.[31] The Vietnam Wars 1945-1990, Marilyn B. Young, Harper Prennial, p.56[32] 호치민 평전 p.743[33] 그러나 이 숫자는 처형으로서의 학살에 대한 제한된 기간의 숫자를 인용한 것이며, 응오딘지엠 시절 단두대에 보내져 처형당한 정치범의 숫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지엠 정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된 작전으로서의 학살의 수치를 언급한 것은 아니다.[34]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112~113[35] 베트민 지지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36] 베트남 공산당사, 베트남공산당중앙위원회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소 산하 베트남공산당사 연구회, 김종욱(옮김), 소나무, 1990, p.103[37] 줄리아 로벨, 심규호 옮김, 마오주의 - 전 세계를 휩쓴 역사, 유월서가, 2024, 341쪽.[38] 베트남사 전공자로 <베트남 전쟁과 한국의 사회사>등 다수의 저서 및 논문들이 있다.[39]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326~327[40] The Vietnam Wars 1945-1990, Marilyn B. Young, Harper Prennial, p.61[41] 프랑스의 식민지화와 침략에 맞서 베트민이 독립투쟁을 벌이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 프랑스에 의해 수감된 정치범 보다 미군 점령기인 응오딘지엠 시대와 응우옌반티에우 시대에 수감된 정치범들이 더 많다. 티에우 정부만 하더라도 1972년 기준으로 정치범이 30만 명이나 있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무고한 피해였다.[42] J.J Zasloff,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 The Role of the Southern Vietminh Cadres(RAND, March 1967), p.11[43] J.J Zasloff, Origins of the Insurgency in South Vietnam, 1954~1960: The Role of the Southern Vietminh Cadres(RAND, March 1967), p.12~17[44] 호치민 평전 p.694~695[45] Jeffrey Race, War Comes to Long An, University California, 1971, p.197[46] 출처: Edward Herman, 『Atrocities in Vietnam: Myths and Realities』, Pilgrim Press Philadelphia Boston, 1970, p.22[47] 남베트남의 수도인 사이공(현 호치민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지역이다.[48] 남베트남의 화폐단위[49] 베트남 역사문화기행 p.68[50] 베트남어 위키자료인 푸로이 감옥 학살 문서를 참조.[51] 원성묵 외,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연구』, 친구, 1990, 130쪽.[52] 기본적으로 베트남 전쟁 초기에 미군의 개입을 지지했던 인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치민에 대해서 높게 평가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버나드 폴은 호치민의 토지개혁으로 북베트남인 5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수치는 이후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 반박당하기도 했다.[53] 미국 대외정책론 p.357을 참조[54] 물론 윤충로 교수 또한 이러한 학살과 테러의 규모가 작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달리 단기간에 벌어진 동족 내부의 심각한 대규모 학살 수준의 만행은 없었으며, 그러한 점에서 이승만 정부가 자행한 학살의 규모보다는 더 작다고 주장했다. 즉 응오딘지엠 정권하에서도 이승만 정권처럼 '작전으로서의 학살'이나 '처형으로의 학살'은 계속 진행되었고 그 규모가 결코 작지 않았지만, 남한에서와 같이 단지 적을 이롭게 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을 가지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처럼 대규모의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55] The Children of Vietnam을 참조.[56] 이 자료는 마틴 루터 킹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인물인 윌리엄 페퍼와 미국에서 소아과 의사로 유명한 벤저민 스포크가 폭로한 자료다. 이 자료에 따르면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최소 41만 명의 민간인이 미국과 남베트남에 의해 학살당했고, 이 중 25만 명의 영유아 및 어린이가 네이팜탄에 의해 희생됐다.[57] 윤충로, 「베트남 혁명과정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p.184~185[58] 미군정기와 대한민국 정부수립 5년 기간 동안 대략 10만 명 정도의 민간인이 미군정 하에서 죽었듯이,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에서도 소위 작은전쟁을 통해 이러한 학살적 정책으로 대략 10만 명이 죽었다. 즉, 그러한 점에서 백색테러와 학살의 유사성을 양측이 가지고 있는 것.[59] 8월 22일이라는 설도 있다.[60] 대신 미남 수행원들을 항상 옆에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인해 게이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확실히 밝혀진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동정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 루머를 믿는 베트남인들이 많다.[61]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오빠가 처형되었기 때문에 반정부세력에 대해 극단적인 증오심을 표출했는데, 퍼스트 레이디로서는 부적절한 언행이었다. 사실 지엠의 일가 친척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식민당국에 협력한 이들이었고, 쑤언 또한 마찬가지였다.[62] 결코 좋은 의미에서 붙인 별명이 아니다. 용을 왕이나 황제의 상징으로 여기는 동양과는 달리 서양같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드래곤(용)은 사악한 존재인지라 그 의미는 마귀 같은 악녀 정도. 중국에서는 이걸 사갈부인()이라고 부른다.[63] 역설적이게도 쑤언은 원래 불교 신자였다가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이다.[64] 사실 이 표현은 문법이 틀린 영어다. 문맥상 abuse trust나 abuse faith 등을 의도했던 듯한데, 쑤언은 그럭저럭 영어를 할 줄 알았지만 평소 프랑스어에 더 유창했기 때문에 프랑스어 qu'ils ont abusé de la confiance를 직역한 것.[65] 하지만, 케네디 자신도 이 사건 이후 한 달도 못되어 죽었고, 케네디의 암살에 지엠 살해가 원인이 되었다고 하는 음모론도 존재한다.[66] 즈엉반민은 응오딘지엠이 직접 장군으로 임명한 것으로 유명했고 이 사건 이후 만 12년도 못 되어 북베트남군에게 사이공이 함락될 때 잡혀간 마지막 총통으로 더 유명하다.[67] 특이하게도 자신을 대사로 임명한 존 F.케네디에게 두번이나 선거에서 패배한 경력이 있는데 첫번째는 매사추세츠 연방 상원의원이었던 1952년 선거에서 재선에 도전했다가 패배했고, 그 후 UN 대사로 지내다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의 러닝메이트로 지명되어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또 케네디-린든 B. 존슨에게 패배했다. 이후 1963년 8월 케네디에 의해 남베트남 대사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4월에 1964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기 위해 사임했으나 공화당 후보지명전에서 패배했다. 그 후 1965년 존슨에 의해 다시 남베트남 대사로 임명되어 2년간 활동했다.[68] 1984년 멕시코에서 사망했다. 또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전통 가톨릭 성향을 가지게 되는데 전통 가톨릭 운동 내에서도 급진적인 교황공석주의자가 되었다. 현재 교황공석주의자 주교들은 거의 이 사람에게서 주교로 성성받았거나 주교로 성성받은 사람에게서 주교로 성성받은 사람들이다. 거의 교황공석주의자들의 대부격 되는 성직자인 셈이다. 이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당한 전력이 있다. 응오딘툭으로부터 비롯된 주교들을 툭 라인 주교들(Thuc-line bishops)이라고 부른다. 재미있는 점은 인종적으로 그들 사이에 베트남인은 한 사람도 없으며 백인 아니면 히스패닉이다.[69] 베트남 정부 입장에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저 사람은 미국에서 북베트남을 비난하며 자신이 반공투사인 양 행세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물론 저지른 일이 그렇다 보니 '드래곤 레이디' 라고 불리며 혐오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지만 베트남 정부 입장에서는 곱지않기는 마찬가지, 즈엉반민이 한번 출국한 후에는 귀국이 허락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귀국 금지 빼면 딱히 큰 보복조치는 없었으며 사후에는 애도라도 보내줬지만 이는 그가 정부수반일 때 베트콩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결국 대세가 기울자 순순히 항복했으며 그 이후에는 특별한 행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애초부터 자신들에게 거스르지 않았기에 봐줬던 것이라 할 수 있다.[70] 그가 몸을 담았던 찐민테의 조직 리엔민은 베트남 제 1 공화국의 개국공신이었음에도 지엠에게 버림을 받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면서 뿔뿔히 흩어졌다. 니랑 본인 역시 지엠의 병크 때문에 고생만 하다가 지엠 정권 내내 캄보디아로 도망가 있었고, 회고록에서 자신의 전우들을 저버렸던 원망감을 지엠에게 표했으나, 한편으로 지엠 본인에 대해서는 '친절하고 부드러우며 도덕적인' 사람으로 평하기도 했다. 사실 아무리 악명높은 독재자라도 직접 만나보니 의외로 검소하고 친절하더라는 사례가 한둘이 있는 게 아닌 만큼 니랑의 지엠에 대한 평가는 그리 이상한 건 아니다.[71] 당연하지만 한국의 이승만, 중화민국의 장제스 보다 평가가 더 나쁘다.[72] 베트남어로 미국을 뜻하는 '미(Mỹ)'와 응오딘지엠의 '지엠(Diệm)'을 합친 것으로 보인다.[73] 완곡어법이다. 직설법으로 말하자면 괴뢰국이다.[74] 본문에 언급한 바와 같이, 당연히 출처는 펜타곤 페이퍼다. [Part IV. B. 1.] Evolution of the War. Counterinsurgency: The Kennedy Commitments and Programs, 1961에서 The Special American Connnitment to Vietnam 파트를 참고하면 되며 기밀문서 6~7페이지에 관련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75] 이 사람은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비시 프랑스에 부역했다.[76] 사람은 서로를 수단이 아닌, 존귀한 인격체로 대해야 한다는 공동체주의적 사상.[77] 티토가 소련의 왕노릇에 대한 반발로 코민포름에 탈퇴한 이유다.[78] 물론 미국내에서도 친불교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불교를 탄압한걸 알면 남베트남을 천주교 이외에는 종교의 자유가 없는 나라라고 비판했을 게 뻔하다.[79] 레인저는 남베트남에서 그래도 정예로 손꼽히는 병력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대가 3대 대대가 작살이 났다는 것은...[80] 베트남이 전후 최초로 남북분단될 때 주둔한 병력은 미군이 아닌 중화민국군과 영국군이었다.[81] 바오다이 휘하 베트남국 정권의 취약함은 사이공 인근에 내정간섭을 계속하길 원하던 프랑스에게는 좋은 일이었으나, 당장 하노이 정권에 대한 소련의 지원이 점점 강해지던 걸 보던 미국 입장에선 이만큼 불편한 일이 또 없었다. 즉 스스로 국정을 이끌 능력이 없는 바오다이를 추출하는 건 미국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내 영향력 부족 때문에 스스로 이걸 할 수는 없었기에 남베트남의 독립운동가 출신 유력자들을 부추긴 것이다.[82] 더 정확히 말하면 사이공에 급히 진주한 찐민테의 병력이다.[83] 이미 응우옌반비를 비롯한 수뇌부가 제거당한 친불파는 물리적인 힘은 남아있으면서도 더 이상 주도적으로 정치적 행보를 보이기는 어려웠기에 이런 일에 딱이었다. 그 응우옌반비는 지엠이 죽은 뒤에는 다시 승승장구하며 떵떵거렸던 건 함정[84] 근로인위혁명당의 사상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에마뉘엘 무니에의 인격주의는 종교와는 딱히 관련 없는 사상이었다.[85] 다만 응오딘뉴는 단순히 형의 권세를 믿고 비리를 저지른 부정축재자인 게 아니라, 비리를 저지르면서 동시에 능동적으로 비밀경찰을 운영하며 형의 독재를 도왔던 능동적인 2인자이기도 했다.[86] 개인이 신토를 믿는 것은 상관없을지라도 외세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그렇다는 얘기다.[87] 그 히틀러조차도 제2차 세계 대전 초기까지만 하더라도 자국군 장성들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 결과 대전초 독일군은 승승장구했었다. 즉, 응오딘지엠은 군사적인 부분에선 그 히틀러보다도 못했던 것이다.[88]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p.533 참고.[89] 지엠 본인이 육성하고 미국이 후원한 친미 군부에서 후속 지도자들이 계속 나왔는데, 응우옌 반 티에우를 제외하면 하나같이 다 후속 쿠데타로 망했다.[90] 전략촌이 의미가 있으려면 최소한 베트콩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 방어가 가능한 수준이 되어야 했는데, 대나무 방벽 친 마을로 강제 이주시킨 후 주민들에게 죽창 연습 좀 시킨 게 전부였으니 당연히 방어가 가능할 리 없었다. 심지어 겨우 이정도 수준의 방위 노력을 한답시고 농민들이 원래 살던 집을 불태우고 강제로 이주시킨 것도 모자라 통금을 걸고 통금 시간에 마을 밖에 있으면 베트콩 취급하며 죽여댔으니, 전략촌 마을 주민들은 오히려 응오딘지엠 정권에 분노했고 베트콩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기는 커녕 되려 전략촌 째로 베트콩에게 협력해 대남 침투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다.[91] 사회 혼란을 빌미로 일체 종교 행사를 못하게 하면서 그에 따라 국민의 90%가 믿는 불교의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억압했는데, 정작 응오딘지엠 일가가 믿는 가톨릭의 크리스마스 때는 그런 거 없이 트리 세우고 할 거 다했다. 그러니 국민들 사이에서 응오딘지엠 정권이 불교를 억압하고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고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폭증했고, 그에 따라 소신공양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92] 협상이 성공했어도 남베트남 공산화의 위협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중공군과 소련 고문단, 미국 주도 연합군이 어지러이 참전한 초대형 분쟁인 베트남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고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났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