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냐시오 데 로욜라 관련 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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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예수회 총장 |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 페테르 파울 루벤스 作 | ||||||
<colbgcolor=#c72518,#c72518><colcolor=#e6cd85,#e6cd85> 본명 | 에네코 로페스 로이올라코아[1] (Eneko Lopez Loiolakoa) 이니고 로페스 데 오냐스 이 로욜라[2] (Íñigo López de Oñaz y Loyola) | |||||
출생 | 1491년 10월 23일 | |||||
카스티야 연합 왕국 아스페이티아 | ||||||
사망 | 1556년 7월 31일 (향년 64세) | |||||
교황령 로마 | ||||||
학력 | 알칼라 대학교 (논리학, 물리학, 신학 / 중퇴) 살라망카 대학교 (논리학, 물리학, 신학 / 중퇴) 파리 대학교[3] (철학 / 학사) 파리 대학교[4] (철학 / 석사) | |||||
직업 | 성직자(사제), 신학자, 작가, 군인 | |||||
종교 | 가톨릭 | |||||
소속 | 예수회 | |||||
사제 수품 | 1537년 6월 24일 | |||||
베네치아 공화국 빈첸초 네구산티 주교 주례 | ||||||
재임 기간 | 초대 예수회 총장 | |||||
1541년 4월 19일~1556년 7월 31일 | ||||||
서명 | ||||||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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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냐시오 데 로욜라 (1541년~1556년) | 디에고 라이네스 (1558년~1565년) |
성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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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 | 1609년 7월 27일 | ||
교황령 로마 교황 바오로 5세 주례 | |||
시성 | 1622년 3월 12일 | ||
교황령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5세 주례 | |||
상징물 | IHS 문장[5], 비레타, 수단, 십자고상, 책[6] | ||
축일 | 7월 31일 | ||
수호 | 군인, 피정, 어려운 시기에 놓인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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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D MAIOREM DEI GLORIAM[7]AMDG이라는 약칭으로도 표기한다. 본래 문장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과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 inque hominum salutem)’로 예수회의 표어뿐만 아니라 30년 전쟁 시절 군인들이 전장에서 외치는 구호로도 사용되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지은 예수회의 표어 |
그는 생전에 방대한 신학적·인문학적 지식을 갖춘 지적 엘리트로 유명했다. 또한 그는 자기 자신을 꾸준히 성찰하고 감정과 욕망에 휘둘리지 않은 채 냉철한 태도로 인생을 살아가도록 영혼을 단련하는 이냐시오 영성 및 영신수련과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 지식 습득을 통한 신앙과 이성의 연계를 피력함으로써 이지적인 믿음을 중시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아울러 그는 예수회의 설립자이자 초대 총장으로서 개신교의 공세로부터 가톨릭교회가 다시 영향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선교, 교육, 그리고 문화 활동에 주력해 대항종교개혁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가톨릭과 성공회에서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다. 축일은 7월 31일이다.
2. 생애
2.1. 유소년 시절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탄생과 이를 예견한 예언자들 (Nacimiento de San Ignacio de Loyola y profecías que le predijeron) 미구엘 카브레라 作, 테포초틀란 부왕령 국립박물관 |
이후 1498년 로욜라가 7살이 되던 해, 둘째 형 마르틴이 혼인과 동시에 새로운 가주가 됨으로써 상황이 안정되자 로욜라는 다시 본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그의 아버지는 로욜라가 수도자의 길을 걷기를 바랐다.
2.2. 군인 시절
예수회의 설립자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 (Saint Ignace de Loyola, fondateur de l'ordre des Jésuites) 화가 미상, 베르사유 궁전 |
그렇게 로욜라는 1508년 17살에 마침내 입대를 하게 되었다. 당시 그는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이 매우 높았던 동시에 춤 실력이 뛰어났고 여자 관계가 복잡했으며 거친 성미를 지니기까지 해 툭하면 싸움에 휘말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일할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완벽히 소화해 내어 이듬해 로욜라는 그의 또 다른 친척이자 나바라 왕국의 나헤라 공작인 안토니오 만리케 데 라라(Antonio Manrique de Lara)가 이끄는 부대의 장수로 진급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전투에서 연거푸 승리를 거둠으로써 그의 우수한 외교 능력과 리더십은 빛을 발했고, 덕분에 그는 공작으로부터 아낌없는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1521년 5월 20일 팜플로나 전투[10]에서 로욜라는 프랑스 왕국 군대의 공격에 맞서 싸우던 도중 그의 오른쪽 다리가 포탄[11]에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그는 자신의 본가인 로욜라 성으로 급히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는데, 회복하던 중 뼈가 잘못 붙어 다시 부러뜨리고 교정해야만 했다. 마취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당시 로욜라에게는 교정 수술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이었고, 이러한 과정이 수차례나 반복되었으나 뼈가 다시금 잘못 붙은 바람에 부상당한 오른쪽 다리가 왼쪽 다리보다 짧아져 결국 절름발이 신세가 되고야 말았다. 그렇게 군인으로서의 경력이 끝난 그는 크게 낙심했지만, 이윽고 향후 그의 인생을 완전히 탈바꿈할 커다란 전환점이 그에게 찾아왔다.
2.3. 회심과 순례
병상에 누워 있는 것이 마냥 지루하기만 했던 로욜라는 여느 때처럼 기사들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자 이를 가져올 것을 요청했으나 시종들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대신 평소 친하게 지냈던 그의 형수 마그달레나 데 아라오스(Magdalena de Araoz)가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일생을 다룬 책들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로욜라는 마지못해 14세기의 가톨릭 신학자 작센의 루돌프가 집필한 <그리스도의 생애(Vita Christi)>와 13세기의 제노바교구의 대주교 야고보 데 보라지네가 쓴 <성인 전기(Legenda sanctorum)>[12]를 집어 읽었는데, 그는 책장을 넘기면서 자신의 오만하고 방탕했던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되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같은 수도자 성인들처럼 하느님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또한 로욜라는 돈과 명예를 얻은 출세의 미래와 성인들처럼 신앙의 길을 걷는 미래를 상상하며 비교했는데, 그는 이런 생각들에 큰 차이가 있음을 인지했다. 세속적인 일을 공상할 때에는 당장은 즐거웠지만 나중에는 싫증이 나고 황폐해진 기분을 느꼈던 반면, 성인들을 본받아 고행을 실천하는 상상을 할 때에는 당시에도 위안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생각을 끝낸 다음에도 행복한 여운을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로욜라는 이러한 깊은 사색을 통해 악한 영에서 오는 생각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생각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회심 (La conversión de San Ignacio de Loyola) 미구엘 카브레라 作, 멕시코 국립미술관 |
만레사의 이냐시오 (Ignatius at Manresa) 앨버트 셰발리에 테일러 作, 윔블던 성심 성당 |
이윽고 로욜라는 악마의 유혹을 완전히 떨쳐 버리기 위해서 마을 언덕의 동굴 속에 자리 잡았다. 그는 수개월 동안 동굴 안에서 기독교 서적들은 물론 당시 성행했던 르네상스 철학 서적들까지 탐독한 후 매일 7시간씩 기도를 함으로써 사사로운 감정과 욕망을 물리치는 극기를 수행했고, 이를 토대로 <영신수련(Exercitia spiritualia)>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1523년 초 로욜라는 순례의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에 이르기 위해 만레사를 떠났고, 베네치아에서 배를 탄 후 키프로스를 거쳐 같은 해 9월 3일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는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고 싶었지만, 당시 순례지를 관할하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이를 완강하게 거절함에 따라 도착한 지 20여 일 뒤에 유럽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2.4. 만학도의 길
로욜라는 순례를 마치고 예루살렘을 떠나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기나긴 여정을 통해 그는 구원에 대한 조바심으로 마냥 자신의 죄를 수없이 고백하고 극단적인 고행만을 지속하는 것보다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체감했다. 당시 로욜라의 나이는 이미 33살이었기에 학교를 다니기엔 한참 늦었지만, 그는 더 늦기 전에 대학교에 입학하고자 우선 무료로 운영되는 공립 예비 학교에 다녔다. 그렇게 그는 대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기본적인 라틴어 교육 과정을 거쳐 1526년 마드리드 북부 지역에 있는 알칼라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그는 도밍고 데 소토(Domingo de Soto)의 논리학, 대 알베르투스(Albertus Magnus)의 물리학, 그리고 페트루스 롬바르두스(Petrus Lombardus)의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틈틈이 길거리로 나아가 자신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시민들에게 종교적인 상담을 진행했다. 그러나 아직 학생 신분으로 설익은 지식을 전하다 보니 이단심문소에서 로욜라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고, 이윽고 그는 이단심문관들에 의해 마땅한 학위도 없이 길거리에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다는 죄로 17일 동안 감옥에 수감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석방되는 날 그에게 학위를 취득하기 전까지는 교리는 절대로 입에 올리지 말라는 조치가 내려졌다. 이듬해 로욜라는 살라망카 대학교로 학적을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알칼라의 이단심문관들로부터 그의 범죄 이력을 알게 된 도미니코회 수도자들[13]에 의해 또 다시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수도원에서 약 한 달 간 수감되었고, 마찬가지로 학위를 취득하기 전까지는 설교를 금지한다는 훈계를 받고 석방되었다. 이냐시오와 동료들이 장엄서원을 하다 (Ignatius and Companions Profess their Solemn Vows) 앨버트 셰발리에 테일러 作, 윔블던 성심 성당 |
시간이 흘러 1535년 43살이라는 나이에 석사 학위를 취득한 로욜라는 파리를 떠나 교황령 볼로냐와 베네치아 공화국을 방문했다. 한편 여전히 파리에 있었던 그의 동료들도 역시 1537년 1월 8일 베네치아로 건너가 다시금 그와 결속을 다졌다. 이들은 다 같이 팔레스티나로 순례를 떠나고 싶었으나,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전투로 인해 그곳으로 향하는 뱃길이 끊겨 있어 그 염원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같은 해 6월 24일 로욜라는 베네치아에서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사제 서품을 받았다.
2.5. 예수회 설립
성 이냐시오의 환시 (The Vision of Saint Ignatius)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作, 우스터 미술관 |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한 예수회 승인 (Aprovação da Companhia de Jesus pelo Papa Paulo III) 도밍구 다쿠냐 作, 코임브라 신 대성당 |
2.6. 예수회 총장 시절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기적 (Wunder des Hl. Ignatius von Loyola) 페테르 파울 루벤스 作, 빈 미술사 박물관 |
남만병풍 (일부) (南蛮屏風) 가노 나이젠 作, 고베시립박물관 |
로욜라는 사회 복지 사업에도 힘썼다. 그는 로마에 범죄를 저질렀거나 중독에 빠진 여성들의 교정 및 재활을 돕는 시설과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세간의 차별로부터 보호하는 시설을 건립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두 곳의 고아원과 더불어 극심한 가난으로 위험에 처한 여성들을 보살펴 주는 시설도 추가로 세웠다.
아울러 로욜라는 헌장을 바탕으로 자신의 비서 후안 알폰소 데 폴랑코(Juan Alfonso de Polanco)의 도움을 받아 <예수회 회헌(Constitutiones Societatis Iesu)>을 집필해 1553년 예수회의 규율과 체계를 공식적으로 명문화했다. 회헌에는 교황의 명령에 따르는 수직적인 행동 양식을 강조한 군대식 규율, 사적인 성찰과 명상으로 개인적인 신학적 체험에 중점을 두는 영신수련의 정신, 그리고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필요성 등 로욜라가 주창한 모든 사상들이 집대성되었다. 더불어 그는 회헌을 통해서 훗날 수도회의 표어가 되는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Ad maiorem Dei gloriam)’라는 최우선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가톨릭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사상, 물건, 혹은 목표일지라도 그것이 악하지 않는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하느님의 영광과 자신의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했다. 일례로 로욜라는 천문학이 우주를 창조한 하느님의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믿어 예수회가 해당 학문의 발전에 기여해야 함을 역설했는데, 이로 인해 많은 예수회 사제들이 천문학은 물론 이와 연계된 학문인 수학과 물리학까지 직접 공부해 다양한 연구들을 진행했다. 이들의 대표적인 성과로는 그레고리력 제작, 지구의 자전 및 자전축 증명, 월면학[16] 확립, 그리고 겉보기 쌍성 발견 등이 있다.
2.7. 말년과 죽음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죽음 (Muerte de San Ignacio de Loyola) 미구엘 카브레라 作, 테포초틀란 부왕령 국립박물관 |
로욜라의 성 이냐시오의 제단과 묘소 안드레아 포초 作, 제수 성당 |
3. 신학적 사상
로욜라의 신학적 사상은 이냐시오 영성과 영신수련이라는 두 용어로 명시될 수 있다. 이냐시오 영성이 근본적인 개념이라면, 영신수련은 이를 바탕으로 구체화하는 실질적인 방법이다. 그의 사상은 인본주의적인 요소가 강하게 들어 있는 신비신학의 특징을 지니는데, 이는 르네상스의 영향에 기인한다. 로욜라가 살아 있던 당시에는 르네상스가 주된 시류였고, 그 본질적인 기저는 다름 아닌 신보다는 인간 중심의 가치관을 핵심으로 여기는 인본주의였다. 동시대의 여느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자연스레 해당 사상을 설파하는 저서들과 인물들을 알게 되었으며, 이러한 학문적 접촉은 과거 만레사에서의 고행 경험으로 얻은 깨달음과 어우러져 신학과 르네상스의 이념적 산물이 융합된 독특한 사상을 구축하는 것으로 발전했다.로욜라는 ‘활동 중에 관상’을 실천함으로써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찾기’를 제창했다. 즉,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기도와 성찰로 구성된 수행 방식인 영신수련을 통해 이 세상 만물에 깃들어 있는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영성에 관한 기존의 신학과는 다른 이냐시오 영성만의 인본주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전통적인 영성 신학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과 같이 수직적이고 보편적인 하느님으로부터의 계시를 중시했다면, 로욜라의 사상은 하느님을 향하는 가르침을 주도적으로 탐색하는 인간 개개인의 식별 능력과 체험에 초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냐시오 영성의 성향을 띠는 의미를 지닌 형용사로 ‘이냐시오적(Ignatian)’이라고 부른다.
3.1. 이냐시오 영성
자세한 내용은 이냐시오 영성 문서 참고하십시오.3.2. 영신수련
자세한 내용은 영신수련 문서 참고하십시오.4. 사후 공경 및 영향
“영혼의 아버지.” |
“이냐시오의 내면의 눈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에 열중했습니다.” – 카를 융 |
“그의 기도 방법은 자기 희생과 자제력 또는 나쁜 습관의 통제를 행하게 만듦으로써 영혼을 가장 높은 수준의 묵상과 신성한 사랑으로 인도합니다.” |
“성 이냐시오는 상처를 회복하던 중 하느님의 목소리가 그의 마음속에서 힘차게 들렸을 때 이를 따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령의 영감에 예민했습니다.” |
“그는 세속적인 생각과 영적인 생각을 구별하고, 후자를 키워 나가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 마음속에 여물도록 하는 것의 중요성을 설파했습니다.” |
로욜라가 설립한 예수회는 현재 가톨릭 내에서 가장 많은 수의 사제들을 보유한 수도회로 자리 잡았으며, 이탈리아를 포함한 전 세계 112개국에서 종교, 교육, 문화, 과학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시설들을 운영하고 있다.
로욜라가 제창한 영성신학인 이냐시오 영성은 시간이 흘러 가톨릭뿐만 아니라 성공회, 루터교회, 감리회, 침례회 등 다양한 기독교 교단에 도입되었고, 평신도들에게 이냐시오 영성 교육 및 피정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관인 이냐시오 영성 센터가 세계 각지에 창설됨으로써 기독교 내에 뿌리내렸다. 그뿐만 아니라 그의 영성신학은 수많은 심리학자들과 철학자들에 의해 깊이 연구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카를 융이 있다.
4.1. 그의 이름을 딴 것들
- 교육 시설
- 로욜라 대학교
- 로욜라 대학교 뉴올리언스(미국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 로욜라 대학교 메릴랜드(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 로욜라 대학교 시카고(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 로욜라 대학교 안달루시아(스페인 세비야, 코르도바)
- 로욜라 메리마운트 대학교(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콩고 로욜라 대학교(콩고민주공화국 킨샤사)
- 로욜라 스쿨(미국 뉴욕주 뉴욕)
- 로욜라 아카데미(미국 일리노이주 윌메트)
- 로욜라 칼리지(인도 타밀나두주 첸나이)
- 로욜라 폴리테크닉 대학교(도미니카 공화국 산크리스토발)
- 마닐라 아테네오 대학교 로욜라 스쿨(필리핀 메트로 마닐라 케손시티)
- 산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 대학교(페루 리마)
- 서강대학교 로욜라국제대학(대한민국 서울)
- 세인트 이그네이셔스 칼리지(영국 잉글랜드 런던)
- 시애틀 대학교 로욜라 홀(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 안드라 로욜라 칼리지(인도 안드라프라데시주 비자야와다)
- 콘코디아 대학교 로욜라 캠퍼스(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 쿨리온 로욜라 칼리지(필리핀 팔라완주 쿨리온)
- 종교 시설
- 로욜라 성소(스페인 기푸스코아주 아스페이티아)
- 비지오네 디 산티냐치오 디 로욜라 경당(이탈리아 로마)
- 산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 성당(미국 텍사스주 엘패소)
- 산티냐치오 디 로욜라 인 캄포 마르치오 성당(이탈리아 로마)
- 서강대학교 성이냐시오성당(대한민국 서울)
- 성 이그나치오 성당(일본 도쿄)
- 세인트 이그네이셔스 가톨릭 성당(영국 잉글랜드 런던)
- 세인트 이그네이셔스 성당(영국 스코틀랜드 위쇼)
- 세인트 이그네이셔스 오브 로욜라 성당(캐나다 퀘벡주 몬트리올)
- 슈벤타시스 이그노토 대성당(리투아니아 빌뉴스)
- 스바테호 이그나체 성당(체코 프라하)
- 스웨티 이그나시야 성당(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 이그나티우스 성당(오스트리아 린츠)
- 제수 성당의 산티냐치오 경당(이탈리아 로마)
- 영성 센터
-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 이냐시오 영성 센터(바티칸 시국 로마 바티칸령 권외 소유지)
- 로욜라 하우스(캐나다 온타리오주 구엘프)
- 보스턴 칼리지 이냐시오 영성 센터(미국 매사추세츠주 체스트넛힐)
- 빌라 로욜라(캐나다 온타리오주 그레이터서드버리)
- 이냐시오 영성 센터(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 이냐시오 영성 센터(영국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 기타
5. 대중 매체
- 1949년 스페인의 역사 영화 <로욜라 대장(El capitán de Loyola)>이 로욜라의 일생을 다루었다. 배우 라파엘 두란(Rafael Durán)이 그를 맡았다.
- 2016년 필리핀의 역사 영화 <이그나시오 데 로욜라(Ignacio de Loyola)>도 역시 로욜라의 일생을 다루었다. 배우 안드레아스 무뇨스(Andreas Muñoz)가 그를 맡았다.
6. 어록
“가서 세상에 불을 질러라.”[17] “Ite, inflammate omnia.” |
“우리는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면 우리에게 더욱이 도움되는 것만을 갈망하고 선택해야 한다.” “Ex omnibus ea demum, quae ad finem ducunt, eligere ac desiderare.” |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보살피실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승리다.” |
“세상을 개혁하고자 한다면 그 시작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
“모든 사람이 같은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위험하며,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
“하느님께서 많은 고통을 주신다면, 그것은 당신을 성자로 만들려는 의도가 분명하다는 신호다.” |
7. 여담
- 로욜라의 신장은 157cm에 살짝 못 미치는 정도였다고 한다.
- 종교와는 별개로 로욜라가 생전에 큰 흥미를 가졌던 것은 바로 음악과 우주였다. 그는 생전에 음악을 좋아했는데, 그중 성가를 듣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또한 그는 평소에 우주에도 관심이 많아 자주 밤하늘의 별을 보곤 했다고 한다.
8. 관련 문서
[1] 바스크어식 본명.[2] 스페인어식 본명.[3] 콜레주 드 몽테귀에서 재학.[4] 콜레주 생트바르브에서 재학.[5] 예수회의 공식 문장에 쓰여 있는 로마자.[6] 특히 예수회의 표어인 Ad maiorem Dei gloriam(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이 쓰인 책.[7] 라틴어. MAIOREM이라는 단어를 MAJOREM으로 쓰기도 하며,[8] 스페인어식 본명. 그의 고향인 아스페이티아가 속해 있는 바스크 지방의 언어인 바스크어식으로는 에네코 로페스 로이올라코아(Eneko Lopez Loiolakoa)이다.[9] 바스크어식으로는 성 에네코(Eneko Oñakoa)라고 일컫는다.[10] 당시 아라곤 왕국에 병합된 나바라 왕국은 아라곤 출신 관리들에 의해 핍박을 받아야만 했고 이에 나바라 국왕 헨리케 2세는 프랑스 왕국과 손을 잡아 왕국을 되찾기 위한 원정을 단행해 전쟁이 발발했다.[11] 로욜라가 있었던 장소 근처의 성벽에 맞고 그를 향해 튕겨 나갔다고 한다.[12] <황금 전설(Legenda aurea)>이라는 제목으로도 유명하며, 로욜라가 병상에 누워 있던 당시에는 <성인들의 개화기(Flos sanctorum)>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13] 당시 이단심문관들의 대부분은 도미니코회 수도자들로 구성되었다.[14] 다만 바오로 3세는 인원 수를 60명으로 제한한다는 조건하에 수도회 설립을 허가했다. 이러한 제약은 10년 후 1550년 교황 율리오 3세에 의해 해제되었다.[15] 처음에 로욜라는 자신이 총장이 되는 걸 꺼렸지만, 동료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다고 한다.[16] 달 표면 상태와 그 성질을 탐구하는 지리학적 천문학이다.[17] 1541년 인도로 떠나려는 자신의 설립자 동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에게 보낸 편지에 쓰인 라틴어 경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