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3:57:21

사마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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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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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사공(太史公)
사마천
司馬遷
파일:사마천.jpg
최종 직위 중서령(中書令)
사마(司馬)
(遷)
자장(子長)
생몰년 음력 기원전 145년 ~ 기원전 86년?
고향 섬서성(陕西省) 용문(龍門) (現 웨이난시[1] 한청시[2])
1. 개요2. 생애3. 평가4. 기타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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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마천의 사기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위대한 유산으로 우러러지나, 유철이란 이름은 누가 기억하는가?"
중국 역사학자 펑쉐린

중국 전한역사가이자 《사기》의 저자로, 동양에서 역사학을 정립한 사람이라고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은 위인이자 동양 사학계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위대한 역사가 중 한 명이다. 서양의 헤로도토스와 함께 동서양 역사학을 각각 대표하는 거물이다.

2. 생애

한나라의 전성기인 기원전 145년에 용문[3]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太史令)[4]이었다. 태사공서(사기)의 맨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는 사마천 자신이 쓴 자서전 성격도 있다. 여기에 따르면 기본적인 공부를 마친 후 관직으로 나가기 전인 20살 때부터 긴 시간 동안 중국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적을 탐방하고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데 썼다고 한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과 회하를 여행하고 회계산에 올라 우왕의 동굴 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절강성과 구의산 등을 보았다. 그 뒤 원수·상수 등의 강을 내려갔다가 북쪽으로 문수·사수를 건넜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도시에서 학업도 하고 공자의 유풍도 관찰했다. 그 뒤 파·설·팽성에서 곤란을 겪었으며 양과 초를 통과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가 35살이던 기원전 110년 한무제는 한 황실의 봉선례를 거행했다. 사마담은 태사령인 자신도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기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참석하지 못했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되었다. 사마담은 실망한 나머지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져 3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죽기 전에 사마담은 아들 사마천에게 "천하의 역사를 기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되었고 이후 황실과 조정의 석실금궤의 책들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수많은 사료들을 수집하고 정리했다.

참고로 봉선은 중국의 황제들이 하늘에 대해 지내던 일종의 제사로, '나처럼 위대한 황제면 봉선을 지낼 정도로 위대하도다'란 일종의 과시인데 그 시초는 주나라 때부터라고 하나 정치적 행사가 된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고 한무제가 규모를 더욱 키웠으며 이후 후한광무제, 송진종명군 혹은 시대를 잘 탄 행운아들이 봉선 의식을 거행했으므로 진짜 시대를 잘 만나고[5] 황제의 신임이 두터워야 간신히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놓친 사마담이 실의에 빠질 만하다.[6]

태사공서를 집필하던 중 보병 5천으로 분전하다가 흉노족 8만에게 포위당해 항복한 장군 이릉(李陵)을 변호했고 이로 인해 한무제의 노여움을 샀다. 그는 이릉은 선전했지만 상황의 여의치 못해 모두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항복한 것이라고 변호하였다. 패전의 책임은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가 져야 했으나 이광리의 누이가 무제의 애첩이었다. 따라서 이릉에 대한 변호는 무제 자신에 대한 비판이라고 여겨졌다. 그는 이릉과는 서로 얼굴도 본 적 없는 사이였지만 단순히 견해를 피력했을 뿐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사마천의 변호는 무제의 미움을 샀고 옥에 갇히고 말았다.[7]

무제는 옥에 갇힌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때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① 돈 50만 전을 내고 서민으로 풀려나기, ② 사형[8], ③ 궁형[9] 셋 중 하나였는데 당시 50만 전은 병력 5천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을 정도[10]로 거금이었는데 거부나 권세가가 아니었던 그가 이를 감당할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11][12] 결국 선친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궁형을 받고 성불구자가 되었다. 《태사공자서》에 의하면 궁형을 당했을 때 ''이것이 내 죄인가! 이것이 내 죄인가! 몸이 훼손되어 쓸모가 없구나!"(是余之罪也夫! 是余之罪也夫! 身毁不用矣!)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궁형을 받음으로써 그는 몸에도 마음에도 크나큰 상처를 입었다. 그나마 죄를 지어 받은 게 아니라 황제에게 억울한 누명으로 미움을 받아 궁형을 받은지라 가족들과 사람들의 동정을 샀다. 감염증에도 불구하고 결국 살아남는 행운(?)까지 누렸다지만 대신 여름에는 냄새 때문에 가족들도 멀리했다고 하고[13] 보임안서에서는 하루에도 장이 아홉 번 뒤틀린다(장일일이구회(腸一日而九回))며 육체적인 고통을 호소했다. 게다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이후 친구 임안(任安)[14]에게 보내는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 죽고만 싶다고 쓴 기록이 있다.

이후 옥중에서도 역사서를 계속 집필했으며 훗날 무제의 신임을 되찾아[15] 중서령의 자리까지 올랐다. 사실 신임을 되찾은 것도 아니었다. 중서령은 당나라 때부터는 엄연한 재상직이었지만 중서령이 재상직으로 격상된 것은 위문제 때부터였다. 전한의 중서령은 황제의 서간 등을 관리하던 벼슬로, 당시에는 지위만 높았지 사실상 환관이나 맡는 자리였다. 즉, 한무제가 그를 중서령에 앉힘은 사실상 환관 취급했다는 얘기다.

그는 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의 궁형을 당하면서도 살아남는 길을 선택했는지, 왜 끝내 《사기》를 남겼는지 자신의 심정을 편지 하나에 담아 후대에 남겼는데 이를 '보임안서'(報任安書)[16]라고 한다. 사형수로서 죽음을 기다리던 익주자사 출신의 친구 임안에게 보낸 이 편지는 그 처절한 문학성으로 동양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문장은 수려하지만 대충 취지를 정리하면 한무제는 생각 없이 일을 저지르는데 도가 튼 위인이니 나중에 무고가 입증되면 명예를 회복할 수 있으므로 임안에게 일단 살아서 견디고 재기를 노리라고 조언한 것인데 편지가 보내졌을 때는 안타깝게도 임안이 궁형을 받기를 거부하였고 한무제도 임안이 자신을 속이려 하고 불충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며 처형을 지시하여 결국 사형이 집행된 뒤였다.
(전략)
"죽음은 단 한 번이지만, 다만 그 죽음이 어느 때는 태산보다도 더 무겁고, 어느 때는 새털보다도 더 가볍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먼 옛날 주나라 서백은 제후의 신분이면서도 유리에 갇힌 몸이 되었으며, 이사의 재상까지 지냈으면서도 다섯 가지 형벌을 다 받고 죽었고, 팽월, 장오는 한때 왕의 칭호까지 받았으나 갖은 문초를 받아야 했고, 강후 주발은 한나라 가문과 원수지간인 여씨 일족을 주살해 권세가 비할 데 없는 몸이면서도 취조실에 들어갔습니다. 협객으로 유명한 계포는 노예로 팔려가기까지 했습니다…

예로부터 어려움을 극복해 고난 속에서도 남달리 뛰어난 일들을 이뤄낸 인물들은 몇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칭송되고 있습니다. 주나라의 문왕은 감옥에 갇혀서 《주역》을 연구해 글로 남겼으며, 공자는 곤액을 당하고 나서 《춘추》를 썼습니다. 좌구명은 두 눈이 먼 뒤에 《국어》를 지어냈고, 손빈은 두 다리를 잘라내는 형벌을 받고서 그 유명한 《병법》을 완성시켰습니다. 여불위는 촉에서 유배생활을 했기 때문에 《여씨춘추》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한비자는 진나라에 갇혔기에 《세난》, 《고분》의 글을 썼습니다. 《시경》에 실린 시 300편도 대부분은 성현께서 분발해서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훌륭한 일들은 생각이 얽혀서 잘 풀리지 않고 마음이 통할 곳을 잃었을 때 이루어집니다. 즉 궁지에 몰려 있을 때라야 지나간 일을 돌이켜보면서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지혜를 얻기 때문입니다. 좌구명이 시력을 잃고 손자가 다리를 절단당했을 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일어서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참혹한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물러나서 글을 쓰고, 방책을 저술했으며, 울분을 토로했고, 문장을 남겨서 자신의 진정을 표현했습니다."
출처: 한서 62권 사마천전 중 보임안서(報任安書)
사실 한무제가 대노한 이유도 꽤나 어이없었다. 이릉과 같이 출전한 이광리가 무제의 애첩 이부인의 오빠라 '편애 모드'가 없다고는 말하기 힘들었다. 반면 이릉은 조손 삼대가 무제와 꼬인 관계였는데 그의 할아버지 이광은 비장군으로 불리며 손꼽히는 명장이었지만 무제의 사주를 받은 위청에게 힐문을 당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살했으며 작은 아버지 이감도 나름 흉노를 토벌하여 공적이 있었지만 이를 위청에게 따졌다가 사냥터에서 곽거병에게 살해당했다.[17] 물론 공식적으로는 사슴뿔에 찔려 사망했다고 했지만 이릉이 그걸 모르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총대장 이광리는 패했는데 이릉은 압도적인 열세를 무릅쓰고 8일 동안 저항하다 끝내 투항했다. 이런 일로 궁형을 당해야 했던 그는 그야말로 비극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 총대장이었던 이광리 또한 나중에 흉노와 싸우러 출진하던 도중 무제 말년의 후사문제[18]에 휘말리게 되었다. 전쟁 자체는 계속 이겨나갔으나 무리하게 병사들을 이끌어서 내부 반란이 일어났고 그것은 진압했으나 직후 흉노에 참패한 후 망명해버렸다. 사마천을 성불구자로 만들면서까지 이광리를 두둔했던 무제는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 장안에 남아 있던 그의 일족을 모두 몰살해 버렸다. 투항한 이광리는 호록고 선우의 사위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았지만 오래 권세를 누리지 못하고 호록고의 모친인 전대 선우 저제후의 연지가 병에 걸리자 산 제물로 바쳐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는데 이는 먼저 투항해서 정령왕이 되었던 위율이 호록고에게 받던 총애를 이광리에게 뺏기자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꾀를 써서 무당을 매수했고 무당은 위율과 함께 선우한테 이광리를 제물로 바치면 모친이 나을 거라고 꼬드겼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중에는 한무제가 이 일을 후회했는지 당시 사마천을 비방하거나 처벌하라고 했던 사람들을 싹 다 죽여 버리고[19] 사마천을 불러 '남자그까짓 거(?) 없는 게 뭐 대수냐! 겨우 그런 걸로(....) 너무 절망하지 말고 당당하게 어깨 펴고 다녀라 하하하'라고 호탕하게 웃으며 위로했다는 기록이 있다.[20]

태사공서》 작성 이후의 기록은 전무해서 알 수 없지만 한서 사마천 열전의 '그 재능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고통을 당했으니 그 최후가 평안하지 않았다.'라는 기록으로 볼 때 말년이 영 좋지는 않았던 듯하다. 어쨌든 한서에는 그의 최후를 서술한 부분이 없다. 위에 서술된 보임안서 편지가 끝나고 바로 다음 줄에서 그는 이미 사망한 상태다. 보임안서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거나 또 간언을 하다가 심기를 거슬러 투옥되어 무제 말년이나 소제 초년에 옥사했다는 주장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정통성 있는 황제가 내린 명령, 특히 누군가를 처형하라는 명령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 여겨져서 기록을 빼먹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과 한서 열전 수록 인물 중에서 사마천 딱 1명만 사망 원인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을 토대로 무탈하게 생을 마쳤을 거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자택에서 조용히 사망하고 작은 규모로 장례를 치렀다면 역사에서 잊히는 게 충분히 가능하다. 그 주장에서는 저 "고통"을 그냥 노환이라던가 말년에 거세당한 피부에 병이 생겨 고생하다가 죽었다던가 하는 정도를 쓴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의 사기 연구자인 천퉁성도 사마천의 말년이 비교적 평안했을 것으로 보며 그가 당했던 형벌과 그 형벌을 받은 연령을 생각하면 말년에 군주로부터 큰 핍박을 당하지 않았다고 해도 형벌로 인한 합병증으로 고질적인 질병에 시달려서 다른 귀족들보다 당시 기준으로도 말년에 더 고생했을 가능성은 적지 않다.[21] 그의 사망년도 또한 정확하게 기록된 바는 없으나 기원전 86년 즈음으로 인식되고 있다.

3. 평가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택한 선택을 두고 가족들과 지인들을 제외하면 당시 사람들은 두고두고 그를 멸시했지만 개의치 않고 더욱 발분해 기원전 90년경, 중국 역사서 중 가장 중요한 책으로 손꼽히는 《태사공서》를 완성했는데 이 태사공서가 훗날 이름이 바뀌어 전하니 그 이름이 바로 사기다. 사기는 그 책이 사찬서(私撰書)임에도 중국의 정사인 24사에 항상 포함되면서 나머지 사서를 압도하는 위엄을 뽐냈다. 사기와 한서, 삼국지, 후한서의 이른바 전사사(前四史)를 제외한 다른 정사서는 모두 관찬서(官撰書)이다.

《태사공서》는 그동안 춘추로 대표되는 편년체(編年體) 역사 서술 방식과 구별되는, 본기(本紀)·세가(世家)·열전(列傳)·지(志)·연표(年表) 등으로 구성하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인 기전체(紀傳體)를 확립하는 시발점이 되었고 이후 동양 역사서의 기본 방침이 되었다. 사기는 중국 고대사를 사관에 입각해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는 의미를 넘어서는데 이는 사마천 개인이 보여 준 불세출의 통찰력과 날카로운 안목에 힘입은 바가 크다. 사기는 ‘기전체’라는 형식에 바탕을 둔 정확한 기술과 투철한 역사관으로 동양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책일 뿐 아니라, 행간 행간에 작가의 숨결이 느껴지는 문학서이자 학문의 전 분야를 아우른 백과사전이다. 이러한 사기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고려사도 기전체로 쓰였다. 사기의 쉼 없는 생명력의 원천은 처절한 인간적 고뇌를 통해 이루어진 산물이라는 데 있다. 사마천이 사기의 완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은 그것이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진 자신이 건재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서 받은 치욕과 오명을 사후의 언제라도 씻어 버릴 수 있다고 믿었던 그였기에 모든 것을 사기의 완성에 내걸었다.

《태사공서》에는 한무제에 대한 내용도 있는데 아무리 자신을 고자로 만들었다고 해도 당대의 권력자이며 황제인 한무제를 사마천 자신이 비판했으리란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세의 가필이란 의혹을 받지만 사마천은 잃을 게 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22] 어차피 죽을 마당에 황제를 욕한다고 해도 별 페널티는 없었기 때문에 이판사판으로 나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데다가 가필이라는 물증도 없다.[23] 한문학자들 가운데서는 효무제 본기의 문체가 지나치게 다른 부분과 달라 후대의 가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다.

그 외에도 한무제의 전 황제인 한경제 본기도 그 내용이 너무 단조롭다는 이유로 가필 의혹을 받고 있다.

사마천 이전에 역사라는 개념은 주로 역(歷)이라는 한자로 표기했는데 이것은 1년의 개념을 준 달력에 중심을 둔 생활중심의 개념이었다. 하지만 사마천 사후 역사(歷史)라는 단어가 탄생했는데 이는 역사의 개념이 도덕적인 평가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역사로 바뀌었다는 것이자 태사공 사마천의 업적을 기리겠다는 뜻이 담겨있기도 하다. 사마천의 위대함을 엿볼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상징이다.

사마천은 분서령 이후 아직 여러 군데에 여러 형태로 상당히 잔존해 있던 자료들을 모으고 모아 《사기》에 담았다. 프랑스의 사마천 연구자 샤반은 사마천이 종종 지방의 역사를 그대로 옮겼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예컨대 사마천은 위나라(권 44), 연나라(권 34)에 대한 사건을 서술하면서 ‘우리 군대’, ‘우리 성’, ‘우리 도읍’ 등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사마천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료들을 얼마나 살려내려 노력했는지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사마천은 <열전> 등을 쓰기 위해 수많은 책을 모으고 읽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망실 위기에 놓인 역사들이 <사기>에 수록되거나 녹아들어 살아남는다. 나아가 사마천은 <사기>를 만들기 위해 사료의 저자는 물론 그의 문장 스타일, 그의 생애, 나아가 저작 자체도 모으고 연구했다. 그래서 저작에 나오는 주요한 문장이 발췌돼서 실리곤 했다. 바로 이 덕분에 고대의 진귀한 문장들이 후세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예컨대 사마천은 천재적인 학자 가의의 과진론(過秦論)[24]과 시 2수도 발굴해 보존시키고 있다. 나아가 사마상여의 이색적인 작품인 부(賦)[25],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져 죽기 전에 지은 부(賦), 한비자의 세난(說難)[26], 명의 편작의 의론(醫論)[27] 등 수많은 작품들이 이렇게 해서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사마천은 동시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보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 진시황이 전국 각지에 남긴 5개의 각석(刻石)을 비롯해 한나라의 황제들이 그 황자들에게 광대한 영토를 줄 때의 수령문, 항우와 유방의 시 같은 게 그런 예이다.
내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는 세상을 뒤덮을 수 있건만
때가 불리하여 추(騶)도 나아가지 않네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만
우(虞)여! 우여! 너를 어찌 하리.
수많은 공적인 보고서, 명령문서, 변론, 담화 등도 모두 사마천의 손을 거쳐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마치 눈앞에서 오자서손빈이 울분을 딛고 복수에 성공하며 노자공자가 천지와 인간에 대해 대화하는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는 감동을 만나게 된다. 영원히 소멸될 수도 있었던 고대의 영웅들이 사마천의 손을 통해서 부활한 것이다. 사마천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기’를 저술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했던 14년 동안 수많은 과거의 인물들이 살고 죽은 이유를 기록하고 전하면서 그 인물들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동시에 자신도 해원했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가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가 감응한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억울함과 치욕을 알아줄, 《사기》 저술의 집념을 알아줄 또 다른 청운지사를 기다렸다. 사마천의 그 바람은 이루어졌고 《사기》와 더불어 지금까지 사마천은 불멸의 존재로서 살아 있다.

사마천은 단순히 역사서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문학의 영역에도 큰 영향을 줬다. 서사문학으로서의 전(傳)이라는 장르는 사마천의 태사공서 중 열전에서 비롯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특히 한문학에서는 문학과 비문학 간 경계가 불분명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 받았는데, 열전의 구조와 정신을 그대로 본뜬 실전이 나타나고, 여기에 허구적 형상화를 거친 탁전[28], 가전 등의 형태가 등장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몇몇 전들은 아예 사마천의 열전을 언급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가전은 훗날 소설(小說)로 이어지는데 주로 단일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전책 양식의 소설에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예로 사기 중 회음후열전은 한 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 통일의 큰 역할을 맡은 한신의 이야기다. 여기서 한신이 젊은 시절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어가는 수모를 당했다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런데 사마천은 의도적으로 한 구절을 끼워 넣었다. "한신은 한참 동안 그를 쳐다봤다.(信孰視之)"[29]는 네 글자다. 심리적 갈등과 인내, 내면적 성장의 깊이가 함축된 문장이다. 사마천은 기존 자료로 작업하면서도 그것을 재구성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 사기의 문학성이야말로 인간을 입체적이고 폭넓게 묘사할 수 있었던 열쇠다. 유방과의 싸움에서 패해 비장하게 자결한 항우, 진시황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형가, 자신을 알아준 주군의 복수를 위해 칼을 뽑아든 예양 등은 그런 사마천의 붓끝에서 피와 살을 얻어 입체적인 캐릭터로 살아난다. 결국 인간을 이해하는 감성과 깊이, 현대 시나리오를 방불케 하는 치밀한 설정과 구성,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 자유자재로 상승과 하강을 그리는 변화무쌍한 문장이 《사기》를 불멸의 고전으로 만들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백이열전>에서 불행한 삶을 산 의인과 천수를 누린 악인을 대비시키는 말인 "살인 강도짓과 인육을 먹는 짓만 일삼은 천인공노의 악당 도척은 천벌은 커녕 잘 먹고 잘살며 명을 다했는데 비해, 의로운 형제 백이와 숙제는 수양산 깊은 곳에 풀만 캐 먹자 결국 아사하였다."라고 한 뒤 돌연 간결한 문장으로 "몹시 헷갈리는구나! 천도란 옳은가, 그른가(天道是耶非耶)"라고 절규할 때 독자도 함께 괴로움에 빠지게 된다.

4. 기타

  • 사마천이 남긴 대표적인 글로 알려진 《사기》와 <보임안서> 외에도 몇 편이 더 남아 있는데[30] 반고의 《한서》·<예문지>에 따르면 여덟 편의 산문과 《사마천집》 한 권, 《소왕묘론》 두 권이 더 있다고 하지만 이들 중 상당수는 현재 전해지지 않고 있고 두 편의 산문[31]과 《소왕묘론》 일부만이 다른 책들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32]
  • 궁형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수술 후 생존 확률이 줄어드는데 당시의 수술 기술로 40대 후반인 사마천이 궁형을 택했다는 건 자존심은 자존심대로 잃어버리고 자칫 목숨까지 같이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도박이었다. 특히 사마천은 궁형으로 인해 '하루에 9번씩 창자가 뒤틀린다'고 할 정도로 신체적 고통을 받았지만 태사공서(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이 수모와 고통을 감당하였고 결국 동양 역사학의 시조로 평가받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 사료 문제로 공자의 견해에 대놓고 반대하기도 했다. 유학자들이 이 글을 싫어합니다[33] 하나는 백이 숙제의 건인데 공자는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다[34]고 기술하였으나 사마천은 시를 인용하여 원망하는 마음이 있었으리라 하는 주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요임금과 허유의 이야기인데 이것이 유교 경전에 나오지 않는다고 기술하였다.
  • 그의 아내는 유씨(柳氏)였고 그 딸[35]이 낳은 외손자 양운(楊惲)[36]은 《사기》를 보관하고 있으면서 이를 익히다가 세상에 내놓았으며 전한을 멸한 왕망이 사마천의 후손을 찾아서 사통자(史通子)라는 사관 벼슬을 주었다. 근데 신나라가 15년 만에 망했다.
  • 남성기를 잃은 공통점으로 인해 후대의 환관들에게는 강철장군이라는 칭호와 함께 환관들의 시조로 추앙받았다. 물론 사마천 훨씬 이전에도 환관은 있었고 사마천 본인이 환관인 것도 아니었지만(궁형을 받은 이후에 관인으로 중용되긴 했지만 이것이 환관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상징적 의미의 시조로서 엄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은 것이다.
  • 현대 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사마천의 작품 2개를 가르친다.
  • 그의 이름을 딴 도 있다. 소행성 12620 쓰마첸(Simaqian)은 바로 그의 이름의 중국어 발음에서 이름을 따 왔다.
  • 그를 소재로 한 시들도 있다.

그대는 사랑의 기억도 없을 것이다.[37]
긴 낮 긴 밤을
멀미같이 시간을 앓았을 것이다.
천형 때문에 홀로 앉아
글을 썼던 사람
육체를 거세당하고
인생을 거세당하고
엉덩이 하나 놓을 자리 의지하며
그대는 진실을 기록하려 했는가||

세상의 사나이들은 기둥 하나를
세우기 위해 산다
좀더 튼튼하고
좀더 당당하게
시대와 밤을 찌를 수 있는 기둥

그래서 그들은 개고기를 뜯어먹고
해구신을 고아먹고
산삼을 찾아
날마다 허둥거리며
붉은 눈을 번득인다.

그런데 꼿꼿한 기둥을 자르고
천년을 얻은 사내가 있다.
기둥에서 해방되어 비로소
사내가 된 사내가 있다.
기둥으로 끌 수 없는
제 눈 속의 불
천년의 역사에다 당겨 놓은 방화범이 있다.

썰물처럼 공허한 말들이
모두 빠져 나간 후에도
오직 살아 있는 그의 목소리
모래처럼 시간의 비늘이 쓸려간 자리에
큼지막하게 찍어 놓은 그의 발자국을 본다.

천년후의 여자 하나
오래 잠 못 들게 하는
멋진 사나이가 여기 있다.||
  • 일본의 소설가인 시바 료타로가 그를 매우 존경했으며 필명(본명은 후쿠다 사다이치)을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로 만든 이유도 '자신은 사마천을 따라가려면 멀었다'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38][39]
  • 나카지마 아츠시의 소설 이릉에서도 비중 있게 등장한다.[40] 내용은 이릉과 사마천의 전기(+소무의 일화를 포함)에 가까운데, 이릉을 변호한 일화에서 사기를 완성하기에 이르기까지 사마천이 겪었을 고뇌와 절망, 그리고 비장한 의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수작이다.
  • 사마천 사후 등장한 서진 고조 사마의는 같은 가문의 사람이었지만 사마천의 직계 후손은 아니었다. 즉, 전주 이씨로 비유하면 조선 태조 이성계이안사의 후손이긴 하지만, 조선 왕실 직계가 아닌 전주 이씨 가문의 한 직장인의 관계-본관은 같으나 분파는 다른 관계-로 볼 수 있다.
    • 사기》에 의하면 사마천의 가문은 원래 주나라 때부터 이어진 가문으로, 사관으로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진 가문은 주나라를 떠나 위(衛)나라, 조(趙)나라, 진(秦)나라 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 한편 진(秦)나라로 간 사마씨 중에 사마착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진 혜문왕에게 촉을 정벌할 것을 고하였고 이에 사마착이 촉을 정벌하여 진왕으로부터 촉의 수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장평대전에서 조나라를 대파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백기가 숙청될 때 두우에서 함께 처형당하고 말았다. 사마근의 손자 사마창은 진나라에서 철을 관장하는 관리가 되었다. 사마창의 아들 사마무택은 시장(상업 지역을 담당하던 관리)이 되었고 사마무택의 아들 사마희는 오대부의 작위를 받았으며 사마희의 아들 사마담은 태사공에 이르렀다. 사마천은 이 사마담의 아들이었다.
    • 한편 조(趙)나라로 들어간 사마씨의 후손사마앙은 진나라가 멸망할 무렵에 조왕 무신 휘하의 장이의 장수가 되어 조가를 함락했는데 항우에 의해 은왕으로 봉해졌고 한고조가 항우를 정벌할 때 한나라에 귀순하여 하내군을 영지로 받게 되었다. 이 사마앙의 11대손이 경조윤 사마방이었으며, 방의 차남사마의였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주나라의 사마씨 가문진나라로 간 사마씨 분파 → 사마착사마근 (착의 손자) → 사마창 (근의 손자) → 사마무택 (창의 아들) → 사마희 (무택의 아들) → 사마담 (희의 아들) → 사마천 (담의 아들)

      주나라의 사마씨 가문조나라로 간 사마씨 분파 → 사마앙사마방 (앙의 11대손) → 사마의 (방의 아들)
  • 한중 FTA 체결 기념으로 그의 고향 산시성 한청시에서 제작을 의뢰하여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오페라 <사마천>이 2016년 뉴서울 오페라단의 공연으로 초연되었다.
  • 한실이 쇠퇴한 삼국시대에서 동탁이 여포에게 살해당하고 왕윤이 정권을 잡았을 때 채옹은 그가 동탁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탄식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정위에게 넘겨졌다. 이때 채옹은 문신을 새기는 경형이나 발뒷꿈치를 자르는 월형을 받아도 좋으니 자신이 저술하고 있는 한나라 역사책을 완성하게 해달라고 왕윤에게 간청했고, 태위 마일제도 왕윤에게 채옹의 구명을 부탁했으나, 왕윤은 "무제가 사마천을 죽이지 않는 대신 궁형에 그쳤는데, 사마천은 황제를 비방하는 책을 쓰지 않았는가?" 하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좀 이상한 부분은 사마천은 당시 시대 인식으로 봐도 억울하게 한무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을 받은것이다. 채옹의 죽음은 왕윤의 몰락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폭정과 선정이 교차하던 한무제와 다르게 동탁은 폭정만 저질렀고 채옹은 동탁의 어용지식인이었다. 그런 인물이 동탁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기니 곱게 볼수 없긴 했다.

5. 관련 문서


[1] 지급시[2] 현급시[3] 현재 섬서성 한성시에 해당한다. 춘추시대에는 소량, 전국시대에는 하양이라고 불렸다.[4] 지금의 과학기술부 차관 겸 국가기록원장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5]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군 당태종도 "나 정도면 해도 되지 않느냐?"면서 봉선을 거행하려고 했으나 역시나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명신 위징이 "아직 천하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수두룩합니다." 하면서 극구 반대해서 결국 포기했다. 대신 그의 아들인 당고종이 황제가 되자 봉선을 하였다.[6] 다만 사마담만이 아니고 많은 이들이 봉선에 함께하지 못해서 한무제의 봉선에 참여한 이는 곽거병의 아들인 곽선뿐이다. 곽거병에 대한 한무제의 총애와 또 그에 걸맞은 곽거병의 활약을 감안해 보면 사마담 입장에서는 실의에 빠질 만하지만 한무제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7] 다만 서경잡기(西京雜記)에서는 이릉의 건 이전부터 사마천이 무제에게 밉보였다고 서술했다. 사마천이 역사서인 경제본기에 경제와 무제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을 적었는데 한무제가 나중에 이를 알고 잔뜩 화가 나 그 내용을 지워버렸고 이후 이릉의 건을 빌미 삼아 탄압했다는 이야기. 이에 따르면 전한 황실은 사마천의 후예를 등용하지 않았다고 한다.[8] 신하들에게 잔혹한 형벌을 자주 내리던 무제의 성격상 죽기를 선택하면 사마천은 그냥 참수도 아니고 일부러 능력 없기로 소문난 망나니에게서 너무 자주 써서 상태가 좋지 않은 대도로 처형당하는 식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사형에 처해질 가능성이 높았다. 무제에게 처형된 신하들 중에서 혹형으로 죽은 사람들이 많았다. 무제는 혈육조차 참수했던 황제다. 다만 사마천 본인은 애초에 이게 무서워서 궁형을 택한 건 아니라고 말했다.설령 진짜 무서워서 그랬다고 해도 쪽팔려서 말 못할테고[9] 사실 거세가 핵심은 아니다. 죽으면 목숨을 잃어도 명예가 보존되지만크으으으 남자다 궁형을 당하면 당장의 목숨은 건지되 인생은 완전히 끝장난다. 사실상 명예도 잃고 결국 목숨도 자살 혹은 감염증의 형태로 끝장나는 셀프 사형. 게다가 본인이 남긴 모든 업적이 부정당하기 때문에 대부분 전한대에 사형을 받으면 혹형이 기다려도 그냥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냥 사형받기 or 당장은 살지만 결국 모든 걸 잃고 몇 년도 가지 않아서 더 비참하게 죽기. 선택지는 뻔하다. 사마천처럼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길 업적을 세운다면 후세에는 업적을 남기기 위해 받을 수 밖에 없던 시련이었다고 여겨 치욕으로 취급받지 않겠지만 누구나 사마천과 같을 수는 없고 어쨌든 저 평도 죽어야 받는다.[10] 5천 병력의 식비 + 피복비 + 급여 + 기타 잡비 등등을 다 합친 수준이다. 일반 사졸이라도 천 단위면 급여가 엄청날 터이다. 20명당 1명꼴로 소위가 있고 100명당 1명꼴로 대위가 있으며 200명당 1명꼴로 소령이 있고 500명당 1명꼴로 중령이 있는 현대식 군대 체계로만 대입해도 여기서 몇 배는 더해진다.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니고 당시에는 군마, 즉 현대 기준으로 따지면 각종 전투용 기갑 부대의 구매 비용부터 유지 관리 비용도 다 포함하는데 이것만 대충 따져봐도 수백억에서 천억은 넘어가는 돈이 계산된다. 일반인은커녕 금수저도 쉽게 낼 수 없는 돈이다.[11] 전한의 벼슬아치는 봉급을 많이 받지 못했다. 고조선 멸망전에 참전한 전한의 장군 양복만 해도 패전에 대한 책임으로 참수당하는 대신 많은 돈을 내고 풀려났으나 이것도 순체와 공손수가 적극적으로 일을 개판으로 만든 게 인정되어서 양복이 내야 할 금전의 액수가 크게 줄어든 것이었다. 만일 반대 상황이었다면 양복은 낼 돈도 없어서 사형당했으리라는 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12] 정확히 말하면 양복은 순체를 기다리지 않고 멋대로 출전했다가 졌다고 벌받았고 순체, 공손수, 위산은 공을 시기하여 서로 다퉜다고 벌받았는데 왕검성 전투를 보면 확실히 양복보다는 순체, 공손수가 저지른 병크가 더 큰지라 양복이 이들보다는 낮게 처벌된 것으로 보인다. 사기에서도 양복보다는 순체가 더 문제아라고 보았는지 순체를 두고 '성질이 사납다.', '작은 싸움에서 이긴 걸 두고 교만해졌다.' 등으로 나쁘게 기술하였다.[13] 고환만 잘라서 생존율(?)도 높고 요도와 연결되는 음경은 건드리지 않는 한국과 달리 중국에서는 음경과 고환을 통째로 도려냈다. 이때 임시로 요도를 만들긴 했으나 몸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요구돼 막 거세된 신참 환관들은 소변을 눌 때 조절을 못해 줄줄 흘리거나 묻히기도 했으며 요실금처럼 소변이 새어나왔다. 그래서 항상 오줌 지린내가 나서 고참 환관이 이를 빌미삼아 신참 환관들을 갈구곤 했다.[14] 임안의 자는 소경(少卿)이며 형양(滎陽) 사람으로, 부모를 잃은 고아에다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그러다 청년 시절에 대장군 위청(衛靑)의 시종(侍從)이 되었다가 그의 추천으로 낭중(郎中)이 되었으며 이후 관직이 익주자사(益州刺史)에 이르렀지만 임안 역시 불행해졌다. 기원전 91년 여태자(戾太子) 유거의 반란, 즉 무고(巫蠱)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당시 임안은 경성(京城) 금위군(禁衛軍)의 북군(北軍)을 관리하는 군관으로 있었다. 그는 여태자의 출동 명령을 받고도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는데도 북군의 한 말단 관리의 모함으로 이 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처형될 위기에 몰렸다.(모함한 관리는 북군의 자금을 관리하는 사람인데, 임안이 그를 매질하고 모욕을 주어 원한을 품었다.) 한무제는 일단 삘이 오면 무조건 대책없이 일을 저지르는 성격이기 때문이었다. 임안은 반역을 하지 않았는데도 처형되는 것이 억울하다며 친구인 사마천에게 구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사마천은 자신의 처지 때문에 답장마저도 제때에 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임안은 반역의 누명을 쓰고 허리가 잘리는 요참형(腰斬刑)에 처해져 죽었다. 친구끼리 한무제한테 쌍으로 못볼 꼴을 당하고 말았다[15] 뭔가 이상해 보이지만 원래 무제는 신하들에 대한 대우가 심하게 무원칙적이었다.[16] 임안의 자인 소경을 따서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라 불리기도 한다.[17] 위청은 한 무제의 처남이고 곽거병은 처조카라 한무제와는 인척이었다. 거기다 두 사람 모두 이광보다 훌륭한 성과를 이루어낸 명장이긴 했다.[18] 이광리의 외조카인 창읍왕 유박(劉髆)을 황태자로 올리려고 승상 유굴리(劉屈氂)와 작당했으나 내자령 곽양(郭穰)이 무제에게 이것을 고발하면서 들통난 것. 유굴리는 요참형을 당하고 일족들도 다 죽었으며 이광리의 처도 하옥되었다. 창읍왕 유박은 당시 사정을 몰랐다는 이유로 무사했다.[19] 사마천을 그런 지경으로 만든 사람은 무제 본인이며 게다가 사마천의 처벌에 옹호했던 사람들은 사마천이나 이릉이 싫어서가 아니라 사실상 무제에게 잘 보이려고 아부한 것이다.[20] 사실 한무제 자체가 능력과 별개로 인간적으로는 대단히 뻔뻔하며 일 저지른 뒷수습 따위는 신경도 안 쓰는 인간이긴 했다. 그나마 궁형까지 가했음은 진짜 미안했는지 사과를 하긴 했지만 사람 인생을 그 꼴로 만들어놓고 사과한다고 수습될 리 없다. 게다가 지인까지 억울하게 처형당했으니. 싫은 티 내고 싶어도 황제인지라 낼 수도 없는 노릇[21] 여담으로 정통성 없는 군주가 내린 명령을 기록에서 빼 버린 경우로는 공자가 지은 춘추가 있다.[22] 본인 스스로도 자기는 궁형을 받고도 "치졸하게" 살아있는 이상 자기는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란 말을 여러 차례 했다.[23] 물론 사기 전체 내용을 보면 후대에 더해지고 빠진 부분들이 여럿 보이지만 무제에 대한 비판이 가필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얘기다.[24] 진나라의 실책에 관한 연구[25] 중국 시문의 한 형식[26] 유세하는 것의 어려움을 주제로 쓴 글[27] 의학에 관한 글[28] 실제 인물의 전기를 마치 가상인물의 전기인 것처럼 가탁하여 쓴 것이다.[29] 孰은 熟과 통하는 글자[30] 다만 사마천의 문장이 맞느냐 맞지 않느냐는 논쟁이 다소 있다고 한다.[31] 지준에게 보낸 편지인 <여지준서>와 그에 대한 답장이 한 편, 때를 잘못 만난 선비를 슬퍼하는 글이란 뜻의 <비사불우부> 한 편, 이렇게 두 편이 남아 있다고 한다.[32] 출처: 김영수 저,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모든 것》 1권 278p, 279p[33] 사마천 그 자신은 유학을 배웠음에도 유학자들과는 견해가 다른지 가령 여후를 다룬 기록을 본기에 넣기도 했다. 그리고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도 잘 보면 유학자들하고 꽤나 차이가 난다. 대표적인 게 오운인데 유학자들은 아무리 그래도 오자서가 자신의 군주였던 자에게 지나치게 잔인한 짓을 했다고 안 좋게 평하지만 사마천은 반대로 한때의 치욕을 참고 결국 대업을 이루어낸 인물로 평가한다. 본인도 비슷한 처지인 만큼 동병상련인 모양[34] 伯夷叔齊不念舊惡 怨是用希 求仁得仁 又何怨乎[35] 당연히 고자가 되기 전에 낳았다. 어차피 고자가 된 시점이 청년기가 아니라 40대다. 그는 기원전 98년 혹은 97년에 거세를 당했다. 정확히는 98년 겨울이 되고 나서야 옥에 갇혔고 궁형을 당하고 회복이 끝난 97년 봄이 되기 전에 풀려났기 때문에 정확한 날짜는 모른다. 양력, 음력에 따라서도 다를 텐데 어찌되었건 기원전 98년 말 ~ 97년 초라는 것은 확실하다.[36] 전한 경조윤(京兆尹) 화음현(華陰縣) 사람. 자는 자유(子幼)고 사마천(司馬遷)의 외손이다. 《사기》(史記)를 익혀 세상에 널리 전파했다. 선제(宣帝) 때 좌조(左曹)에 임명되어 곽씨(霍氏)의 음모를 고발해 평통후(平通侯)에 봉해졌고 중랑장(中郞長)이 되었다. 신작(神爵) 원년(기원전 61) 제리광록훈(諸吏光祿勳)에 올랐다. 관직에 있는 동안 청렴하여 재물을 경시하고 의로움을 좋아했지만 각박하고 남의 나쁜 비밀 등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하여 사람들의 원한을 많이 샀다. 태복 대장락(戴長樂)과 사이가 나빴는데 장악이 고발당하자 그가 시킨 것으로 잘못 알아 평소 언어가 불경하다고 상소를 올림으로써 면직당해 서인(庶人)이 되었다. 직위를 잃고 집에서 일하며 집안을 일으켜 그 재산으로 생애를 즐겼다. 친구 손회종(孫會宗)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충고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편지에 원망하는 내용이 많았는데 선제(宣帝)가 이것을 읽고 미워한 데다가 참소와 중상모략을 당해 대역 무도죄로 요참형(腰斬刑)을 당했다. 왜이리 주변에 요참형당한 사람이 많을까...[37] 궁형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자식이 없는 줄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마천은 처벌을 받았을 당시 자식이 있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도 후손이 남아 있다.[38] 한자를 풀이하면 시바는 사마, 료타로는 요태랑인데 직역한즉 '먼 장남'이다(다만 '타로'는 일본에서 매우 흔한 남자 이름, 그러니까 '○수', '○돌이' 같은 의미로 꼭 "첫째"라는 뜻을 살려서 해석할 필요는 없다.) 말 그대로 사마천을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다는 의미다.[39] 이는 고우영 만화에서 나오는 내용인데 시바 료타로가 대선배를 향해 절을 올린다며 옆에서는 그의 이름을 한자로 쓴 司馬遼太郎이 적혀 있다.[40] 작가가 요절하는 바람에 유고로 발견되어 원래는 무제 작품이다. 이릉이라는 제목은 후대인이 임의로 붙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