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41년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OKH)의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도. |
1941년 동부전선 흐름 |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 때 투하쳅스키가 처형되면서 소련군의 발달하던 작전 교리라든가 기계화되던 부대 구조 등이 말 그대로 전부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렸다. 특히 전쟁 직전까지 스탈린이 독일군의 침입 내지 도발에 반응하지 말라고 강력히 지시했기 때문에, 굴라크에 끌려가고 싶지 않았던 많은 소련군 병사와 장교들이 초기 독일의 침공에 매우 수동적으로 반응했고 그 결과 손 써볼 틈도 없이 궤멸당해야 했다. 물론 이 명령은 개전 수 시간 만에 철회되었다. 애시당초 소련군의 전략이 현지 사수 및 축차소모 등의 비현실적인 전략이었던 만큼 달라질 것은 없었을 것이다.
사정은 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대숙청 기간에 유능한 장교들이 피해를 입어 마치 척수가 뽑혀 나간 상황이나 진배없었던 것이다. 공군 사령관 야코프 블라디미로비치 스무시케비치[1] 중장을 위시한 스페인 내전의 베테랑들 상당수가 투옥되거나 사형당한 것이 시작이었다. 스무시케비치의 후임자인 파벨 바실례비치 뤼차고프 중장은 신기술 도입과 선진 교리 숙달에 적극적이었고 개전 시 선제권 획득을 위한 상시 준비 태세 수립을 주장했으나, 결국 대숙청의 희생양이 되어 독립 항공전대장으로 소령 계급이던 아내와 함께 재판 없이 처형당했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 자원한 에이스이며 창의적인 관리자로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공군 사령관에 발탁되었으나, 결함이 많은 기종에 대해 "우리 조종사들은 관을 타고 비행하고 있다!"고 일갈할 만큼 깐깐하며 지도층과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으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 외에도 젊고 실력 있는 장성들과 실전 경험이 풍부한 조종 장교들 상당수가 개전을 전후하여 처형되었다. 설계국도 예외는 아니라서 뛰어난 기술자들도 사소한 결함이나 사고로 문책을 당해 처형되거나 감방 신세를 면치 못했다. 유명한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투폴레프가 투옥된 것은 1937년이다. 그는 10년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1944년 석방되었다. 게다가 공군은 조종사나 기술자 등 인적 자원의 의존도가 육군보다 오히려 높으면 높았지 낮지 않았고, 이러한 대숙청은 공군 전력에는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그 결과 소련 공군은 육군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독일군의 공격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소련 해군의 경우엔 육-공군에 비해 타격이 크지 않은 것처럼 보여서 이를 두고 "러시아 혁명 당시 해군 수병들이 혁명에 적극 가담해서 숙청의 칼날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해군도 인적 자원 측면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한 예로, 잠수함 설계를 담당하던 설계 기사인 알렉세이 아사포프의 경우 말류트카급 잠수함을 설계할 당시 공산당에서 설계에 대해 이것저것 자기들이 원하는 요소들을 넣을 것을 지시했다. 처음에 아사포프는 잠수함의 성능을 떨어트린다며 반대했으나 결국 기존의 설계에 공산당에서 원하는 요소 중 일부를 강제로 집어넣었으며 결국 기존 예상 성능을 한참 밑도는 한심한 성능의 잠수함이 탄생했다. 이후 잦은 설계 변경에도 불구하고 성능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알렉세이 아사포프는 책임을 물어 숙청당하고 만다. 물론 예조프시나 이전부터 독일과 소련의 해군 전력은 듣보잡 수준이었고, 독소전쟁 때 소련 해군의 존재감이 매우 미미하다 보니 육군이나 공군에 비해 그 참상이 돋보이지 않은 것뿐이다.[2]
당시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제독과 같이 부하들의 공훈을 확인하고 신원 보증을 서 주며 대숙청에 용감히 저항한 지휘관들도 있지만, 이들의 힘만으로 해군 장교단의 약체화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6월 22일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루프트바페는 미리 다 파악해 둔 소련 공군 기지를 공습해 항공기들을 대파했고 불과 며칠 만에 1,200여 기의 항공기를 파괴해 제공권을 장악해 버렸다.[3] 이는 해군도 마찬가지였는데, 한술 더 떠 "크릭스마리네를 자극하지 말라"는 스탈린의 명령까지 있어서 소련 해군은 사실상 손을 놓고 있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소련 해군의 대다수 함정들은 항구 내에서 루프트바페의 공습 등으로 격침당하거나 손상을 입고, 심할 경우 항구 내에서 아예 버려지거나 건조 중이었던 함선들 역시 독일군의 폭격이나 공격 등으로 완전 박살이 나거나 독일군에게 노획당했다. 물론 소련 해군도 완전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아 키로프급 순양함과 그녜브니급 구축함 등을 동원해 독일 해군을 압박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하필이면 독일군이 부설한 기뢰원으로 돌입하는 바람에 기함인 막심 고리키가 손상을 입었고 구축함 1척이 가라앉고 말았다. 그나마 전비 태세는 잘 갖추어 두어 피해는 삼군 중 가장 적었고, 그간 육성해 둔 해군 항공대는 개전 초에 전멸한 공군이 우랄 산맥 너머에서 재건될 때까지 버텨 주었다.
더구나 전격전의 논리에 따라 시작된 300만 명이 넘는 독일 육군 3개 집단군의 대대적인 공격은 수동적 대응에 익숙했던 소련 육군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소련군은 선진 이론과 추진력을 겸비한 뛰어난 지휘관들에 의해 양성될 기회를 놓친 채, 그렇게 독일군의 파상 공세에 직면했다.
1941년 6월 소련 영내로 쇄도하는 독일군. 점령지 주민들이 독일군에게 꽃을 주며 환영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독일의 무자비한 탄압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이러한 화기애애한 모습은 사라졌다. |
1941년, 전쟁 초반 승승장구하는 독일군의 모습. 진격하는 독일군과 불타는 소련 마을들, 격파당한 소련 기갑병기의 잔해들, 수많은 소련군 포로들, 대공포 공격을 받고 추락하는 소련 전투기의 모습이 담겼다. |
1941년, 독일 침공군에 맞서 반격하는 소련군. |
제일 먼저 소련의 가장 강력한 전선군이 배치되어 있던 남부 지역에서는 독일군의 선봉 부대와 맞닥뜨린 소련군이 반격을 시도했다가 거의 모든 전차를 잃어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고 드네프르 강까지 철수해야 했다. 북부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소련군은 독일군을 막는데 실패했고 다우가브 강까지 후퇴해 방어선을 구축하려 했으나 독일군의 진격이 소련군의 후퇴 속도보다 빨라 방어선 구축에 실패하고 만다. 6월 25일 갑작스러운 소련의 공격을 받은 핀란드도[4] 결국 소련에 선전포고를 했고[5] 겨울전쟁에서 잃어버린 땅들을 모두 되찾았다. 더 북쪽에서는 독일군이 중요한 항구였던 무르만스크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자연 환경에 의해 실패했고, 이후 소련은 무르만스크를 통해 미국에게 보급품을 지원 받을 수 있게 된다.
중부 지역에서는 공세 첫날부터 대부분의 소련군 병력이 비아위스토크에서 포위당해 30만의 소련군이 포로로 잡힌다. 독일의 기갑부대는 별다른 저항도 받지 않고 민스크를 점령하고 벨로루시를 장악했으며 소련은 급하게 예비군을 배치했지만 전선에 생긴 구멍을 메꾸기엔 부족했다. 독일군의 기갑 사단은 소련군의 전선을 무너뜨렸고 스몰렌스크 근방에서 다시 한번 30만명의 소련군이 포위되었다. 소련군은 급조한 예비 사단들로 포위된 병력들을 구출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포위된 소련군은 전멸하였다. 그러는 사이 6월 27일, 헝가리 왕국이 소련에 선전포고를 하며 독소전쟁에 참전한다.
1941년 9월까지 2백만 명 이상의 소련군이 전사하였고, 이 시기 소련과 독일의 병력 손실비는 20:1에 달했다. 소련은 중요한 곡창 지대와 산업 중심지들을 상실했다. 이때에는 천하의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조차도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6]
이 시점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는 자명해 보였으며 작전 당시에 OKW가 목표하였던 A-A선[7]의 확보는 현실로 다가온 듯하였다. 영국과 미국의 지도자들도 소련이 몇 달 버티지 못하고 붕괴할 거라고 예측했으며 독일의 히틀러도 그렇게 예상했다. 히틀러는 겨울이 오기 전까지 우랄 산맥까지 정복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했다. 그러나...
"우리가 적 12개 사단을 섬멸하면 적은 그냥 12개 사단을 새로 편성한다."
"아군이 진격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거점에서 멀어지고 적은 적들의 거점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아군 전선은 유류도 보급도 부족한 채 파도에 휩쓸리는 난파선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프란츠 할더
"아군이 진격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거점에서 멀어지고 적은 적들의 거점에 가까워진다. 그러니 아군 전선은 유류도 보급도 부족한 채 파도에 휩쓸리는 난파선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프란츠 할더
"우리 정보국은 나에게 소련에는 160개 사단과 3000대의 전차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지금까지 400개 사단과 2만 대의 전차를 파괴했으며, 이제 우리 앞에는 500개의 사단과 3만 대의 전차가 있다." - 아돌프 히틀러
소련은 수백만의 예비 병력을 끌어 모아 궤멸당한 사단과 군단들을 대체했다.[8] 원래 개전 초 독일은 소련이 약 180여 사단을 동원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고 개전 초 이 사단들 대부분이 전멸 상태가 되자 진격을 막을 병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소련의 병력 동원 능력과 물자 생산 능력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있어서 180여 개의 사단을 뚫어내니 이번에는 360여 개의 사단이 독일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독소전에서 서로가 끝장이 날 때까지 모든 인구와 자원을 쏟아 부었다는 이야기다. 정말로 소련은 2만 대의 전차가 파괴되자 그냥 2만 5천 대를 새로 출고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여기에 더해서 모든 산업을 후방으로 옮기는 엄청난 사업을 단행했다. 이는 특히 무기와 탄약과 장비를 생산하는 중공업 시설이 대부분 이동이 불가능한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것이다. 당장 용광로 같은 것은 평시에도 이동이 불가능해서 용광로 건물을 지을 때 함께 현지에 건설된다. 게다가 소련의 교통시설은 빈약하기 이를 데 없었고, 그나마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받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소련 공장과 제철소들, 노동자들은 독일군이 지척까지 닥쳐와서도 무기를 생산하거나 공장 기재를 분해해 이송하는 작업에 열중했으며 몇몇은 너무 늦어서 독일군이 들이닥쳐서도 그 일을 계속했다. 말이 쉽지 몇마디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정말 황당하고 엄청난 일이다. 대한민국으로 비유하면 울산과 포항을 불과 몇 주 만에 통째로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으로 몽땅 뜯어서 옮긴다는 것. 이런 대사업의 성공은 보즈네센스키를 필두로 한 국가계획위원회와 소련 산업 관료들이 5개년 계획으로 대규모 산업단지를 이리 저리 뜯어서 붙여본 경험이 풍부했던 것이 주요했다.
1943년 소련 탄약공장의 모습 |
다른 문제점도 있었다. 전쟁 초기 히틀러는 모스크바는 별 가치가 없다고 보고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의 곡창 지대를 차지하길 원했는데 이 조치로 모스크바는 최소한의 방어력을 강화할 시간을 벌었다. 각지의 소련군은 궤멸당하면서도 대부분 격렬히 저항했고 라스푸티차로 대표되는 열악한 소련의 도로 상황도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프랑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거대한 소련의 영토와 빈약한 교통망은 1940년 5월의 전격전을 고려하고 있던 독일 군부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한편 1941년 8월, 중부 집단군이 소련군을 압도하고 폭발적인 속도로 진군하는 동안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은 낙후된 기반 시설과 소련군의 저항으로 인해 점차 진격이 더뎌지고 있었다. 특히 남부 집단군은 소련군이 드네프르 강을 따라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함으로 인해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에 히틀러와 독일 수뇌부는 모스크바를 공격하기 전에 중부 집단군의 측면을 먼저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중부 집단군의 기갑 사단에게 북부 집단군과 남부 집단군을 지원할 것을 명령했다.
북부 지역에서는 북부 집단군이 중부 집단군의 지원에 힘입어 발트 3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레닌그라드 근방까지 진격했다.
한편 소련군 수뇌부는 중부 집단군이 계속해서 모스크바로 진격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중부 집단군 남쪽으로 공세를 가하자 당황한 소련군은 패퇴했고, 소련군은 프리피야티 방면으로 구축해두었던 방어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되었다. 이것은 견고했던 드네프르 방어선을 위태로워지게 하고만다. 중부 집단군의 기갑 사단이 전선을 돌파하려고 시도했지만 소련군 지도부는 기갑 사단이 돌파에 실패할 것이라고 오판했고, 중부 집단군의 공격에 발 맞춰 남부 집단군 기갑 사단이 전선을 돌파하자 남부 집단군의 돌출부와 북부 집단군의 돌출부가 연결되어 버린다. 결국 우크라이나의 소련군 대부분인 75만명에 달하는 병력들이 키예프에서 포위 섬멸당했다.
그러나 이 일련의 작전들로 인해 중부 집단군의 측면은 확보되었지만 모스크바의 방비는 더욱 더 견고해졌고, 겨울은 눈 앞에 다가온 상황이였다. 시간이 촉박해지자 독일군은 전방면에서 총공세를 감행하였다. 우크라이나의 소련군 잔당은 오합지졸이였고, 독일군은 순조롭게 진격하여 풍부한 자원을 가진 동부 우크라이나의 통제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독일군은 크림 반도로 진격하여 세바스토폴을 제외한 크림 반도 전체를 장악했다.
동시에 북부에서도 공세가 시작되었다. 공세 목표는 레닌그라드로 향하는 보급망을 차단하고 핀란드군과 합류하는 것이였다. 초기 공세는 성공적이었고 레닌그라드는 포위되었다. 하지만 소련군은 강력히 저항했고 독일군은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한편 여전히 독일군의 주요 목표는 모스크바 점령이었다. 이를 예상한 소련은 병력을 최대한 긁어모아 125만 명의 병력을 모스크바 방위에 투입했다. 9월 말 중부로 복귀한 구데리안의 기갑 사단은 새로운 공세를 시작했다. 다시 한번 소련군은 뱌지마,브랸스크 방면에서 크게 포위당해 60만이 넘는 병력을 잃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 근방까지 진격했고 양갈래로 나뉘어져 모스크바를 포위할 계획이였다. 모스크바의 상황도 암담했지만 스탈린은 도시를 포기하지 않았고 수백만의 시민을 동원해 방어 설비를 축조하고 병력을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또한 그 당시 독일이나 서방에서는 거의 무명이었던 할힌골 전투의 영웅, 게오르기 주코프 대장[9]이 급히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전임해 와서 방위전을 지휘했다.
모스크바 전선 1941년 말에서 1942년 초까지 모스크바 외곽 지역과 툴라에서 벌어진 소련군의 반격을 촬영한 영상. 포격을 퍼붓는 각종 포대들과 장갑열차들, 폭격하는 소련 공군, 돌격하는 소련 기병대와 보병대의 모습이 담겼다. |
모스크바 공방전 때 소련군의 반격으로 밀리면서 독일군의 전선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독일군 수뇌부는 화학무기 사용을 진지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화학 무기가 사용되면 적도 당연히 보복으로 쓸 것이고, 기동전을 장기로 하는 독일군의 주요 수송 수단인 말[10]을 보호할 수 없어서 화학 무기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1941년 6월 소련이 처음 침공당했을 때 크렘린의 억압에 짓눌려 있던 많은 국가와 사람들이 독일군을 환영했다. 당장 1년 전까지 엄연히 독립국이었던 발트 3국과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최소 300만 명이 굶어죽은 우크라이나 주민들, 스탈린이 자치권을 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린 체첸[11]은 크렘린에 대항해 침략자들을 도울 것이라는 견해가 팽배했다. 실제로 소련 당국도 부분적으로는 그렇게 예상했다. 그리고 실제로 독일군이 침공하자마자 이 지역들은 반소 게릴라 운동이 일어나면서 독일군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쟁 전에 열등 인종인 슬라브족에게 관용과 용서를 베풀 필요가 없으며 승자가 정의이며 진실이라는 논리에 충실하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히틀러가 외치는 슬라브족은 러시아인뿐 아니라 소련 치하의 민족들을 모두 싸잡은 개념이라는 것. 이런 상황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적대자에게 증오를 품고 이를 폭력적으로 해소하려고 들기 쉬운 병사들을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당장 총통이 공언했는데 어느 장교가 쉽게 말릴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부분적으로는 역시 나치의 이념에 빠진 간부들이 이런 상황을 조장하고 방치하기도 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주인공인 슈타우펜베르크가 반 나치주의자로 전향한 계기 또한 독소전쟁에서 저지른 독일군의 학살을 목격한 것이었다. 게다가 독일군을 뒤따라 들어온 나치 친위대와 인종 청소 부대인 아인자츠그루펜이 자행한 인종 학살과 약탈, 강간, 학살, 촌락 파괴와 같은 각종 만행은 침략자들을 환영하던 피억압 민족들의 마음에 도리어 적개심만 품어주며 종전까지 독일의 골칫거리가 되는 파르티잔들을 대거 양성했다.
1941년 우크라이나에서는 전쟁과 설비 이동, 독일군의 방치와 학살로 또다시 무수한 우크라이나인들이 떼죽음을 당했으며 발트 3국이나 벨로루시라고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이 지역에서는 독일군의 대량 파괴와 학살, 인종 청소로 제3제국의 이데올로기가 만든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어쨌거나 그 결과 1941년 하반기가 되면 대부분의 점령지 주민들이 독일군에 비협조적으로 변했고 독일군의 학살은 독일에 열광적으로 환영하고 전적으로 협조하려 했던 점령지 주민이 급격히 독일군을 증오하도록 만들었고 많은 주민들을 파르티잔으로 만들어 버렸다. 여전히 독일에 협조하려는, 혹은 둘 다 싫다며 양쪽과 적대한 세력도 있었으나 그들이 대세가 될 순 없었다. 우크라이나 독립주의자들의 게릴라는 1950년대까지 살아남아서 소련군이 이들의 소탕전을 했다고 한다.[12]
결국 독일군은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나머지 이념적으로는 '청소'를 통해 성공했을지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대실패의 기반을 닦았던 셈이었다.[13] 이런 상황에서 모스크바 공략에 실패한 1941년 12월이 지나면서 대사건이 잇따라 일어나 소련의 기세를 올려주었다.
하나는 일본 제국이 소련 공격은 하지 않고 미국에 진주만 공습을 감행하여 태평양 전쟁이 터진 것이었고[14], 또 하나는 독일이 미국에 먼저 선전포고하여 아시아-태평양 지역과 유럽-아프리카의 전쟁이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소련도 이제 공공연히 미국에게 물자 지원을 요청하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2. 1942년
1942년도 동부전선 흐름 |
무기대여법이 1943년 초반 소련군이 독일의 진격을 막는 데 성공한 시점에서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을 거론하며 없어도 방어에 성공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으나 이 시점에선 소련군도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으므로 운이 좋아야 전선을 현상 유지하는 데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41년부터 들어온 무기대여법 물량이 적긴 했지만[16] 초반에 급속도로 밀린 탓에 전력 부족에 시달린 소련군에게는 정말 가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특히 마틸다, 밸런타인 같은 전차들이 대환영을 받는데 그 유명한 T-34-76도 전쟁 초반부에 무식한 운용으로 물량이 거의 소모되고 생산 공장은 우랄 산맥 너머로 급히 이동을 한 덕분에 제대로 생산할 여건이 안 되었으니 수량이 부족했고 결국 42년도까지 BT 전차, T-26같은 경전차들이 주력이었는데 문제는 이 전차들은 신포탑 장착형 치하와 별반 차이 없는 깡통 전차였다는 것으로, 거기다 매월 수백 대의 전차가 건너오면서 소련은 무기대여법 전차만으로도 독일에 대한 수적 균형, 혹은 우위를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42년 중반 ~ 43년부터 랜드리스가 재대로 가동되기 시작하자 이런 원조 무기들은 양과 질에서 소련군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영국과 미국에서는 찬밥 신세였던 P-39 에어라코브라는 180도 평판 역전에 성공했고 밸런타인 전차는 가벼우면서도 경전차답지 않은 장갑 및 화력으로 인기를 끌었다. 전면 장갑이 65mm이었는데 이는 M4 셔먼 전차의 전면 장갑보다도 더 두껍다. 이는 영국이 단종시키려 한 것을 소련의 요청으로 추가 생산한 것이다. T-34를 대신하여 배치된 75mm 셔먼은 비록 전선에서는 순식간에 털려나갔으나 후반기 등장한 76mm포 버전의 셔먼은 T-34보다 우수한 거주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혹한 환경에서도 잘 굴러가는 기계적 신뢰성, 구경이 더 큰 T-34보다 비교적 손쉬운 임무를 받음으로 인해 '무고장 전차'로 불리며 전차병들이 애용하는 전차가 되었다. T-34-85의 85mm 주포는 구경치수가 더 크고 그만큼 화력은 강했으나 소련의 금속 가공 기술 미비로 대전차전에 중요한 관통력은 셔먼의 76mm와 비슷[17]했고 무엇보다도 원거리 명중률이 안 좋았다. 그렇지만 원거리 명중률을 엄청난 숫자로 및 제파 전술로 메꿨기에 실제 명중률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게다가 소련이 그렇게 혹평했던 영/미제 무기들의 구성품들(주포 안정 장치나 엔진 등)은 이후 냉전기 소련 무기 개발에 중요한 참고자료가 되었다.[18] 이러한 무기들이 상당히 지원되어 생산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일시적 수적 공백을 메꿔주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주류 군사학자들의 의견은 조금 다르다. 무기대여법이 소련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막상 전쟁 양상에는 전투물자보다 비전투물자 지원이 특히 차량과 철도용 광궤, 식량 부분이 더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본다.
더불어 실질적인 연합국의 무기 공급은 1943년 6월에서야 시작되어서 그 이전에는 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소련을 향한 최단항로인 대서양 및 북극해를 통한 영국과 미국의 물자 수송은 독일의 주기적인 공격으로[19] 1943년 2월까지 중단되었고, 이란 루트는 아프리카전선을 평정한 1943년 여름부터야 이루어졌으며[20], 태평양 항로로는 비전투물자만 수송 가능했고, 보급선이 엄청나게 길었다. 실제 무기 대여법이 제대로 소련에게 도움을 주기 시작한 것은 1943년 6월 30일부터 시행된 서드 프로토콜부터였고, 구체적으로 1942년 소련이 연합국에게 도움 받은 원조물자의 가치는 1,376,000,000 달러였는데, 이듬해인 1943년부터 2,436,000,000달러, 1944년에는 4,074,000,000달러로 급격하게 늘어난다.[21] 따라서 1941년에서 1942년까지는 소련이 어느정도 독자적인 힘으로 버텨냈다고 보고, 1943년 6월 이후부터 무기대여법의 큰 도움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어쨌거나 42년 당시에는 비록 수량은 부족했지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이 도움이 됐던 미국의 물자 원조와 시베리아로의 산업 설비 재배치 성공, 엄청난 인력 동원을 통한 전시체제로의 이행, 수백만의 예비군 소집으로 인한 양적 우위의 확보를 통해 1942년 소련은 드디어 반격의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병크를 터트린 것은 소련 최고 사령부인 스타프카, 그리고 그것의 정점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동계 공세를 통해 확보된 영역을 더 넓히고자 1942년 전반기 내내 독일군이 강력하고 거대한 돌출부를 형성한 르제프에 물량을 과하게 쏟아부었다. 이 것이 바로 르제프 전투이다. 그 결과 소련은 엄청난 피해만 내고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는 독일군을 과소평가하고 무턱대고 전력의 재편도 없이 무리하게 공세를 했다가 나타난 한심한 결과였고, 이 공세의 실패는 소련군과 소련 당국자들에게 자국군의 한계와 독일군이 아직은 건재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남부에서도 소련 최대의 공업도시 중 하나인 하르코프를 탈환하고자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을 감행했으나 오히려 독일군의 반격에 수십개 사단이 포위섬멸되는 대참패로 끝나게 된다. 소련이 1942년 전반기를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으로 끝내는 동안 독일군은 새로운 전략 목표를 찾아냈다. 그것은 캅카스의 석유 자원이었다. 이에 독일은 캅카스 일대를 차지하기 위한 하계 공세를 입안하고 이름을 청색 작전이라 명명했다.
1942년 하반기,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와 남러시아를 지나 캅카스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방비가 상대적으로 허술했기에 독일군은 손쉽게 소련군을 격파하고 돈강을 건너 캅카스 지대로 들어갔으며 이에 호응해 체첸인들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 독일군은 조공의 목적으로 볼가강의 공업도시 스탈린그라드를 타깃으로 삼았는데, 이 도시가 지닌 엄청난 상징성 때문에 이 도시는 곧 2차 대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는 글자 그대로 소련의 통치자 스탈린의 이름을 따서 지어진 공업도시로, 당시 주력 전차 T-34의 주요 생산지이기 때문에 산업적 가치와 비중이 매우 높은 도시였다. 그리고 당시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밀려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던 독일군의 청색 작전에 있어서 흑해와 카스피 해 사이의 병목 지역을 닫을 수 있는 마개에 해당하는 지역이었다. 즉, 이 지역을 제압하거나 견제하지 않는다면 소련군이 바쿠를 향해 진격한 독일군의 뒤를 완전히 차단해 버릴 수 있었기에 스탈린그라드는 청색 작전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여기에 소련의 최고 통치자의 이름을 딴 도시[22]라는 상징적 이유까지 겹치면서 양측은 이 도시를 둘러싸고 1942년 말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돌입하면서 본격적인 동부전선 최대 격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초기 단계에서는 이번에도 독일군이 유리했다. 독일군은 재빨리 도시의 소련군을 다 몰아내었으며 곧 소련군을 볼가 강으로 밀어붙여서 소련군을 곧바로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그 즉시 대규모 지원군을 보내기 시작했다. 엄청난 물자와 병력이 스탈린그라드를 지키기 위해 투입되었으며, 이내 도시 전체가 포격과 폭격으로 초토화된 상황에서 거리 단위, 심지어 빌딩 단위로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1942년 10월에는 한때 스탈린그라드의 90%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다. 화력과 전술에서는 독일군이 크게 우세했지만 추운 겨울이 다가오고 소련군이 몇 배나 되는 병력으로 밀어붙이자 점차 궁지에 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킨 것은 히틀러의 전략적 사고였다. 히틀러는 독소전 초기의 스탈린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지휘관들에게 후퇴할 권리를 박탈하고 일단 차지한 점령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무조건 끝까지 지킬 것을 강권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장군은 히틀러의 이런 강력한 압박에 어쩔 수 없이 스탈린그라드에 잔류해야 했으며, 소련군은 엄청난 병력으로 도시를 역으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군은 지루한 공방전을 하루빨리 끝내기 위해 반격을 개시했다. 1942년 11월 여전히 고립 상태인 상황에서 소련군은 독일 제6군의 양 측면이 약체 루마니아 왕국군으로 방어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대병력을 집결시켜 포위 작전에 투입하는 천왕성 작전으로 독일군의 구원을 가로막았고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완전히 가두었다. 겨울폭풍 작전을 통해 독일군은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6군 구출을 시도했지만 소련군의 격렬한 반격으로 독일군은 결국 스탈린그라드의 아군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우크라이나로 전격 철수했다. 고립된 독일군은 강추위와 식량 부족으로 커다란 고통[23]을 겪다가 지휘관 파울루스 장군과 함께 1943년 1월 말 항복했으며, 살아남은 포로는 최초의 30만에서 10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이 대패를 계기로 독일군은 이제 소련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전선 안정화 작업에 몰두해야 했다.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막바지 모습. 볼가 강 강방함대의 엄호 사격을 업고 상륙하는 해군보병들, 평원에서 진격하는 보병들과 중전차 부대, 폭격을 가하는 소련 공군, 반격하는 독일 공군과 이를 막는 소련 방공포병, 폐허가 된 시가지에서 전투를 벌이는 소련 보병들의 모습이 담겼다. |
스탈린그라드의 승리는 곧 반파쇼 연합군의 승리로 인식되어 소련은 물론 서방 세계에도 엄청난 선전 효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독일군이 야전군 단위로 포위섬멸당하는 피해를 당한 적이 없었는데,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인해 회복하기 불가능할 정도의 큰 피해를 입어버렸기 때문이다. 반면 이미 북아프리카에서도 주도권을 잃은 독일은 1945년 4월 30일까지 이어지는 기나긴 패전의 나날을 밟게 되었다.
3. 1943년
1943년 동부전선 흐름. 다음 해까지 이어진 소련군 동계공세와 코르순-체르카시 포위전, 카메네츠-포돌츠크 포위전을 함께 다루고 있다. |
진격하는 붉은 군대 1943년 초의 모습이 담겼다. 진격하는 소련 전차부대와 폭격기들, 독일군이 버리고 달아난 각종 포대와 격파당한 독일군 전차들, 후방으로 이송되는 수많은 독일군 포로들이 보인다. |
독일은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제거하고 전선을 교착시켜 태세를 정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반면 소련은 쿠르스크를 지켜내어 독일군을 소모시키고 대규모 반격으로 실지(失地)를 만회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이 상태에서 소련은 쿠르스크에 참호와 벙커를 비롯한 엄청난 방어 설비를 구축했고 스탈린그라드 못잖은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했다. 엄청난 포병 부대의 배치는 1943~45년 독일-소련 전역의 특징이 되었다.
독일군은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예정된 작전 개시 일을 자꾸 늦춘 끝에 1943년 7월 쿠르스크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남북에서 돌출부에 대한 공격이 이어졌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방어설비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군의 쿠르스크 점령 실패는 그 자체로 1943년 전략의 무효화를 의미했다. 소련군은 이내 태세를 정비했다.
소련군은 계획된 대로 쿠르스크 돌출부 북쪽에서 '쿠투조프 작전'을, 남쪽에서 '류먄체프 작전'을 실시하여 독일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돌출부를 없앴다. 이후 중부에서 펼쳐진 '수보로프 작전'은 실패했지만 남부인 우크라이나에서의 공세는 효과가 있었다. 소련군은 독일 남부집단군과 혈투를 벌이며 미우스 강을 넘어서 제4차 하르코프 공방전 끝에 하르코프를 탈환하고 우크라이나로 쏟아졌다. 치열한 전투 끝에 소련군은 드네프르 강 좌안으로 독일군을 몰아내고 키예프를 탈환했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이 이렇게 형편없이 밀리게 된 데에는 물론 쿠르스크 전투로 야기된 기갑 전력의 공백도 있었지만, 히틀러가 이탈리아 전선에 너무 집착해서 동부전선의 알토란 같은 기갑 전력 상당수를 이탈리아로 돌리는 바람에 동부전선에 더 커진 전력 공백으로, 천연 해자인 드네프르 강을 제대로 활용 못하고 뚫려 버렸기 때문이다. 드네프르 강은 호수처럼 되어 강의 너비가 10km에서 20km로 엄청나게 큰 곳이 많아서
(축척에 보이듯이 강 폭이 매우 큰 곳이 많다.)
독일군이 제대로 방어를 할 경우 소련군이 강을 뚫으려면 엄청난 희생을 무릅쓰고 강폭이 좁은 지점으로 축차 투입을 하는 수밖에 없는곳이었다. 이탈리아로 빼고 남은 동부전선 병력이라도 제때 드네프르 강 서안으로 후퇴해서 요새화시켰으면 어떻게든 강을 끼고 버틸 수 있었지만 히틀러는 '강 건너에 요새를 구축해 두면 병사들이 열심히 싸울 마음이 떨어진다' 라는 미친 소리로 제대로 된 방어선 구축을 허가하지 않았다.
1943년 8월이 되어서야 마지못해 방어선 구축을 허락하는데 촉박한 시간으로 콘크리트를 치기는커녕 대충 참호나 판 엉성한 방어선이 되었다. 그럼에도 드네프르 강 자체의 방어력은 어디 가지 않아서 이런 엉성한 방어선에도 소련군은 강을 도하하기까지 적지 않은 사상자를 내야만 했다. [24] 그리고 강 건너로 후퇴를 원하는 만슈타인등 독일군 장성들의 청원을 계속 씹고, 히스테리적인 고집을 부리면서 전선 사수를 명령하다가 9월 15일이 되어서야 강 건너로 후퇴를 시작한다. 후퇴의 시기를 놓치고 현지 사수를 하다가 소모된 만신창이 병력으로 방어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던것. 게다가 소련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현지 파르티잔 등의 협조로 재빨리 9월 21일 드네프르 강 첫 교두보를 확보하였고 12월 말까지 좌안 우크라이나 대부분을 탈환한 후 드네프르 강 우안에 폭 300km, 종심이 80km에 달하는 교두보까지 확보하여 독일군을 더욱 손쉽게 밀어붙일 수 있게 되었다. 드네프르 강 우안의 교두보까지 내준 독일군은 천혜의 방어선인 드네프르 강에서 소련군을 저지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처럼 군사적인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동부전선 >>>> 이탈리아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연합군이 상륙한 직후 이탈리아 정부가 내분을 일으켜서 붕괴되고 무솔리니가 체포되었으며 이를 가까스로 수습한 것이 이탈리아에 주둔해 있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는 독일군이었다. 만약 이탈리아를 내버려 두었다면 이미 붕괴한 이탈리아는 손쉽게 연합군이 점령하게 되어서 군사적으로도 손해다. 비록 연합군이 이탈리아에서 전진을 거의 못하고 종전 직전에야 대대적인 진격이 가능했다고 하지만 이는 철저히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그게 가능했던 게 히틀러가 파견한 독일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점이라는 걸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노르망디 상륙 이후 주력을 서유럽에 쏟아부으면서 이탈리아 전선의 병력까지 차출되어 나가서 양측의 병력비가 1:1까지 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삽질을 많이 하기는 했어도 추축국에서 그래도 강력한 나라 중 하나였다. 이런 나라가 추축국의 대열에서 탈락한다면 다른 나라에 미치는 정치적 여파 또한 엄청날 것이다. 이런 점을 살피지 않고 이탈리아로 전력을 파견한 것이 실수라는 것은 정치적, 전략적인 면을 충분히 살피지 않은 근시안적인 견해다.
1943년 이후 소련군과 독일군의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전쟁이 계속되며 게오르기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를 비롯한 붉은 군대의 수뇌들은 비록 대놓고 내세우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붉은 군대가 초기의 '종심 작전'으로 회귀하도록 힘을 써서 소련군이 현대전에 걸맞은 기동과 화력을 갖추도록 했다. 그 결과 소련군의 돌파력은 증대되고 대규모 포격은 훨씬 정밀해졌으며 특히 기만술 측면에서는 독일군의 허를 찌를 정도로 크게 발전했다. 여기에 더불어 미국의 렌드리스로 비전투 분야의 생산은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자 남은 역량이 죄다 무기로 집중되어 소련은 경이적일 정도의 무기 생산을 기록했다.
반면 독일군은 소련군에 비해 대량 생산 체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데다가 독일 본토 항공전, 드레스덴 폭격 등 서방 연합군의 끊임없는 폭격에 시달려 소련군을 압도할 만할 무장을 갖추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또한 소련에 비해 인구가 적은 편인 독일은 병력이 소실될 때마다 신병들을 불러오고 그 경험 없는 신병들이 제일 먼저 전사해 또 신병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상황이 소련군보다 컸으며 더욱이 이민족에 대한 잔혹한 탄압으로 인해 이들을 전장에서 쓸 수 없는 건 물론 오히려 독일인 병력을 이민족 억압에 배정하여 가뜩이나 부족한 병력을 더 낭비하게 되었다.
또 흥미로운 부분은 히틀러와 스탈린의 태도 변화다.
스탈린은 청색 작전 이후 자신의 군사적 무지를 깨닫고 주코프를 총군부사령으로 임명해 실질적 군사 지휘권을 이양했으며, 쿠르스크 전투 이후에는 완벽히 휘하 장군들을 신뢰하게 되어 스탈린 자신은 그저 최고 결정권자 이상으로 붉은 군대의 작전에 관여하지 않으려 하고 정치장교의 권한을 대폭 축소시키는 등 2년 전에 비해 엄청나게 개념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그 결과 재량권을 확보한 소련군은 스탈린과 정치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얼마든지 효율적으로 작전을 진행시킬 수 있게 되었다.[25]
반면 히틀러는 해가 갈수록 장군들을 믿지 못하고 작전 입안과 수행에 사사건건 간섭하여 지휘관들의 재량권을 크게 떨어트렸다. 히틀러는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기동 방어를 위한 후퇴조차 허용하지 않는 현지 사수 명령을 남발하여 지휘관들의 손발을 묶어 버리는 꼴을 만들고 말았다. 게다가 현대전에 걸맞은 능력을 갖출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아 전쟁 기간 내내 바보 같은 지시가 계속 내려지고 그 결과 독일의 패망은 더 빨라지게 되었다.
한편 스탈린은 집요하게 제2전선의 구축을 요구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 그 때까지 유럽지역의 주요 전선은 동부전선밖에 없었고, 본질적으로 북아프리카 전역은 규모가 작은 데다가 부차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영 연합군은 1943년 7~9월 이탈리아에 제2전선을 구축했다. 이것이 이탈리아 전선. 이는 일시적으로 이탈리아를 이탈시켰으나 알베르트 케셀링이 지휘하는 독일군은 지형을 잘 이용해서 시간을 효과적으로 벌었고 독일 특수부대가 무솔리니를 구출하여 다시 괴뢰국을 세우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기에 더 이상 독일에게 큰 위협이 아니었다. 결국 영-미는 1944년 프랑스에 제2전선을 다시 구축하기로 했고 이것이 19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프랑스 진공으로 이어지게 된다.
4. 1944년
1944년 독일을 향해 진격하는 소련군. 해방을 목전에 두고 함포와 화포 사격을 가하는 레닌그라드 수비대 및 프리피야트[26] 근처에서 폴란드 방향으로 공세를 가하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모습이 담겼다. |
1944년 동부전선 흐름. 바그라티온 작전부터 종전시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
남부에서도 공세가 이어졌다. 작년 12월 말부터 드네프르강 좌안 우크라이나 지역에 대한 공세를 개시한 소련군은 재빠른 기동을 통해 1월에 체르카시와 코르순에 대한 포위망을 구축하는 데 성공하면서 독일 남부집단군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코르순-체르카시 포위망은 기대했던 것보다 성과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었지만 독일군이 기동 전력을 포위망 분쇄에 투입하느라 다른 전선에 투입하는 것을 막음으로서 소련군의 이어진 공세를 막아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2월 중순에 소련군은 카메네츠-포돌츠크 지역에 대한 포위를 통해 독일 제1기갑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역시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완전한 포위 섬멸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독일군 전력에 큰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20만에 달하는 기갑군은 몸만 빠져나왔지 기갑장비와 차량은 죄다 버리고 도망쳐야 했다.
결국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전체에서 독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크림 반도를 탈환했다. 독일군 17군과 루마니아군은 제 때에 철수해야 했지만, 캅카스의 유전지대에 대한 집착을 못버리는 히틀러의 야욕 덕에 현 위치를 고수하다가 크림 반도에서 포위 된 채 큰 피해를 입으며 해상 탈출로 겨우 몸만 빠져나올 수 있었다. 16만에 달하던 17군은 철수 작전 과정에서 3만여명의 전사자와 그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하며 전멸당했고, 루마니아군도 2만 50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결과로 루마니아 왕국은 추축국 탈퇴를 고려하며 서방 연합군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이는 등 전략적인 효과를 낳은 것은 물론이고 남부 전선에서의 독일의 누적된 피해가 심각해지는 결과로 나타났다.
한편 독일군의 관심사가 우크라이나에 집중된 사이 소련군은 벨로루시의 중부집단군을 한 방에 날려 버릴 또 다른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치밀하고 철저한 준비 끝에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서 제2전선이 실현된 지 얼마 안 되어 벨로루시를 비롯한 전쟁 이전 소련의 영토를 죄다 되찾는 바그라티온 작전을 실행시켜 독일 중부집단군을 문자 그대로 믹서기로 갈아 버리고 뒤따른 3번의 공세를 성공시켜 독일군을 폴란드까지 밀어내고 핀란드를 추축국 대열에서 이탈시켰다.
거기다 히틀러의 간섭이 상황을 더 악화시켰는데 넓은 방어선에 부족한 병력들에게 기동 방어를 위한 후퇴를 불허하고 무조건 전선 사수를 명령했다. 당시 중부집단군은 약 85만 명이었고, 공격하는 소련군은 233만 명 정도로 약 2.75배에 달하는 병력차가 있었는데 소련군은 거대한 규모의 부대로 여러 곳을 집중 공격하고 중부집단군은 히틀러 때문에 안 그래도 적은 병력으로 흩어져 있는 데다가 후퇴까지 불허되니 쌈싸먹히고 각개격파당했다.[27] 물론 저 당시 독일군의 상황을 고려하면 기동방어를 펼칠 역량이나 있었나 의심스럽기는 하다. 그렇지 않아도 장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소련군의 기만책에 걸리는 바람에 일부 기갑장비를 다른 부대에게 넘겨주었으니.[28] 게다가 전차의 전략적 기동성은 소련군 장비가 독일 장비보다 한 수 위였다. 바그라티온 작전이 끝나고 교환비를 보면 독일군 대략 25만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된 반면에 소련군 18만 명 정도가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29] 그리고 우크라이나에서 그랬던 것처럼 벨로루시를 탈환하고 나니 소련은 인구 1,000만 명을 다시 되찾게 되었고 여기서 또다시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다.
여하튼 독일군으로서는 중부집단군 괴멸 + 탈환한 지역에서 보충된 소련군 병력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런데 히틀러는 이 와중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치명적인 미스를 하게 되는데, 노르망디 상륙을 애초에 막았으면 모를까, 일단 상륙이 된 이상 병력을 보존해서 프랑스 동북부 삼림지대로 후퇴하고 제트기 생산을 폭격기가 아닌 전투기로 몰빵시키고, 서부전선의 기갑 병력 상당수를 동부전선으로 돌려서 나치 독일의 생명줄인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어떻게든 보전하는 것이 그나마 버티기라도 하는 수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실현 불가능한 망상인 '대서양으로 연합군을 쓸어 버린다'에 집착해서 무려 1,400대나 되는 전차를 동원해서 8월 중순에 서부전선에서 공세에 나섰다가 팔레즈 포위전에서 연합군의 포위와 폭격에 1,300대가 넘는 되는 전차가 무의미하게 녹아내렸다. 애초에 이 공세 자체가 그야말로 망상에서 나온 황당한 짓거리였는데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의 머릿수는 145만명 이상으로 해당 지역에 배치된 독일군 38만명의 4배나 되는 상황이었다. 즉 애초에 성공할 가능성이 없었다. [30] 전차뿐만 아니라 이 무모한 공세로 후퇴 시기를 놓쳐서 인적 고갈로 1명의 군인이 아쉬운 상황에서 20만 명이 추가로 포로가 되었고 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실 1944년 4월에 도입된 제트기 메서슈미트 Me 262를 원래 계획대로 전부 전투기로 생산했으면 1944년 서부전선처럼 제공권에서 완전히 밀려서 독일군 기갑 부대가 영미 연합군 폭격기의 밥이 되는 일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1943년 11월 26일 히틀러 눈앞에서 한 시제 비행 때, 완전히 삘이 꽂힌 히틀러가 메서슈미트 Me262를 전부 폭격기로 생산하도록 명령했다. 물론 이를 무시하고 상당수를 전투기로 생산하였으며 야전 부대에서는 어렵지 않게 이를 전투기로 개조해서 날렸다.
그 와중에 소련은 9월 초부터 루마니아 영내에 대대적으로 침입하여 곧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확보하게 된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잃고 나니 독일은 극심한 석유난에 시달리게 되어, 플로이에슈티보다 생산량이 적은 헝가리의 너지커니저 유전과 독일 내의 액화 석탄으로 근근히 버텨야 할 상황으로 몰리게 되는데, 얼마나 석유가 없었으면 800대 가량의 전차를 동원한 아르덴 대공세에서, 800대의 탱크를 120~130km 진격시킬 기름도 없어서 연합군의 석유를 노획해서 전진할 계획을 짤 정도로 난감하게 된다. 이것도 보면 가관인 게 공세 목표인 앤트워프를 확보하려면 120~130km를 진격해야 하는데 최대 진격 가능 거리가 60km인 기갑 부대도 있었다. 애초에 불가능한 작전을 했던 셈.
중부집단군이 심각한 피해를 입자 소련의 북서전선군은 측면의 안전이 확보되어 더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고,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있던 독일의 북부집단군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소련군은 리가 부근을 확보하여 북부집단군을 고립시킨 뒤 이를 궤멸시키고자 했으나, 아직 50만에 달하는 병력을 유지하고 있던 독일 북부집단군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고, 소련군이 진출했던 지역을 탈환함으로서 북부집단군은 일단 포위망을 벗어나 쿠를란트 지역으로 퇴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격속도는 독일군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빨랐고, 결국 약 40만의 북부집단군은 중부집단군과 연결이 완전히 끊어져 쿠를란트 지역에 고립되고 만다. 독일군은 이들을 수송해 독일로 데려오자는 방안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히틀러는 연합군을 아르덴 대공세에서 박살낸 다음 소련군을 공격할 때 북부집단군을 이용해 소련군을 크게 포위해 박살내겠다는 망상에 가까운 전략을 세우며 이를 기각한다.
이런 처참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동북부~독일 국경에 퍼져있는 넓은 삼림 지형을 이용한 방어의 사자 발터 모델의 눈부신 방어로 휘르트겐 숲 전투가 벌어지던 1944년 9월~12월 초까지 서부전선은 상대적으로 잘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발터 모델을 위시한 독일군 장군들이 반대한 아르덴 대공세가 히틀러의 고집으로 개시되었고[31] 작전 초반엔 그나마 악천후를 바탕으로 전진하다가 날씨가 개자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의 폭격으로 독일군은 800대 이상의 전차를 상실한다. 이 기 갑전력들은 상당수가 동부전선에서 빼온 것이었고, 8만 명 정도의 병력 손실까지 보게되니 안 그래도 부족했던 인력은 더 부족해졌다. 그런데도 https://www.youtube.com/watch?v=WOVEy1tC7nk를 보면 1945년 3월 20일경까진 서부전선을 그럭저럭 막아내고 있던게 신기하다. 아르덴 대공세라는 뻘짓을 안 했다면 서부전선은 삼림지대를 이용해서 몇 달 정도는 더 버틸 수 있었을 터이다.
이런 상황에서 1945년 1월 중순부터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자 동부전선은 말 그대로 쭉쭉 밀리기 시작한다. 그러잖아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인해 동부전선의 독일군 전력이 절단났는데 여기서 또 서부전선으로 병력을 빼고 상대하는 소련군은 더 늘어났으니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독일이 서부전선의 연합군을 상대하기 위해 동부전선에서 군대를 빼내자,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를 독일군이 막기는 더 어려워진 게 자명한 사실. 이후 소련군은 차례차례 루마니아, 불가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유고슬라비아 등 중유럽과 발칸 반도 국가들에 진격하면서 그 지역 파르티잔과 합류하거나 몇몇 나라에는 새 정권을 세웠다. 소련군이 점령한 국가는 소련군에 의해 신정권이 세워지고 이들은 즉각 독일군에 대해 총을 겨누었다. 소련군은 이후에도 폴란드의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계속 서진하여 1945년에 이르렀으며, 1945년 2월 미-영 지도자들과 스탈린이 얄타 회담을 개최했을 때 소련군은 순조롭게 진격하여 동프로이센까지 진격했다.
5. 1945년
이 시기 독일군은 바그라티온 작전의 여파로 잘게 쪼개져 각지에서 부분적 저항을 계속했으나 소련군의 빠른 공세 앞에선 역부족이었다.우선 1944년 12월에 연합군과 벌인 아르덴 대공세(벌지 전투)로 독일군은 800대 이상의 전차를 날려먹었고 이중 상당수는 동부전선에서 빼왔던 것이라서 당연히 동부전선은 더욱 더 급속도로 붕괴되었다. 소련군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작전을 펼쳐 이미 빈사상태에 빠진 독일군을 사실상 확인사살해버렸고 독일은 막대한 전술적 피해에 더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동프로이센 일대의 공업지대들을 상실해버리며 더 이상의 전쟁수행능력을 상실해버렸다.[32]
1945년 2월이 되자 히틀러는 또다시 미친 짓을 기획하게 되는데 소련군이 베를린 앞 60km 오데르 강까지 도달한 상황에서 동부전선의 기갑 전력을 상당수 남쪽으로 돌려서, 상대적으로 소련군을 잘 막아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남부전선 근처에 있는 헝가리 유전을 재탈환해서 석유를 확보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당연히 독일군 장성들은 베를린 방어를 위해 동부전선에 집중하자고 건의를 올렸지만 히틀러가 들을 리가 없었다. 아르덴 대공세 후 남은 전차, 돌격포, 구축전차에 1945년 초부터 생산한 전차로 쥐어짜낸 병력으로 3월 6일 봄의 새싹 작전을 감행한다. 이 공세는 전선을 따라 고작 15~40km를 전진한 후 저지되었으며 소련군의 반격에 되려 공격개시선 이전까지 밀려나면서 처참하게 실패했다.
이 마지막 도박 실패로 받은 손실은 전차 331대에[33] 돌격포와 구축전차는 244대 손실로[34] 전차+돌격포+구축전차까지 총 575대가 한방에 날아갔다. 하프트랙과 장갑차의 손실도 거의 1,000대에 육박했다. 거의 1,600대에 달하는 기갑전력이 날아가 버렸다. 이 공세로 그나마 남아 있던 기갑 부대를 죄다 말아먹지 않고 그걸 방어전에 돌렸으면 소련군의 손실은 훨씬 커졌을 것이고 종전도 몇 주는 더 뒤로 미뤄졌을 것이다.
이 병력들은 정말로 최후까지 남아 있던 독일군의 제대로 된 마지막 기갑 전력이었다. 보텐플라테 작전이 루프트바페의 사형 선고였다면, 독일 기갑 부대의 사형선고는 바로 이 공세 실패였다.
이후 독일군은 이제 얼마 남지도 않은 소수의 장비와 제대로 훈련조차 되지 않은 보병들로[35] 서쪽에서 몰려오는 450만 명에 달하는 연합군과 동쪽에서 몰려오는 650만 명에 달하는 소련군의 진격을 막아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 발트 3국에 포위되어 고립되었던 쿠를란트 집단군은 결국 소련군에 항복했고 20만 여명의 독일군 포로들은 그대로 소련 본토 재건 사업에 강제동원된다.
주로 동유럽의 정복민들에게 저지른 만행의 대가를 이제는 독일 국민이 치러야 했다. 전쟁이 끝나기 몇달 동안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 정권이 뿌린 야만이라는 씨앗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붉은 군대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자 동프로이센, 포메른, 슐레지엔 등 동부 지역은 공포에 질린 난민으로 가득찼다. 그들은 혹한을 견딜 준비도 없이 짐도 챙기는 둥 마는 둥하고 아무거나 타고 피난길에 나섰지만 대부분은 걸어서 갔다.
간혹 사람과 가방을 잔뜩 실은 차가 지나가면 걸어가던 사람들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길은 자꾸 막혔다. "소련군이 온다!"하고 누가 소시를 지르면 사람들은 어쩔 줄을 몰랐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본다. 믿기지가 않는다. 그때 한 남자가 말을 타고 오면서 고함을 지른다. "알아서들 하시오. 반 시간만 있으면 소련군이 오니까." 우리는 무서워서 몸이 얼어붙는다.
한 여자는 "지도자는 우리를 소련군 손에 넘기지 않을 거야, 차라리 우리를 가스로 보내주실 거야."라고 말하는가 하면, 자살을 하려면 청산가리가 얼마나 필요한지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마치 다음 끼니는 뭘로 해결할까를 궁리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어머니, 누이하고 폴란드에서 피난가던 한 소년은 만원 열차를 타고 브로츠와프로 갔다. 소년은 차창을 통해서 겁쟁이 탈영병이라는 팻말을 목에 매달고 철길을 따라 걸어가는 독일군 병사들을 보았다. 주인이 싣고 갈 수가 없어서 죽이고 간 가축들이 도로 주변에 널려있었다. 브로츠와프로 가는 마지막 열차에 겨우 올라탄 한 부부는 "피난민들은 서로에게 밟혀 죽기 딱 좋았고, 난방이 안 된 화물칸 밖으로 시체를 내던졌고, 걸어가던 사람들은 자꾸 길이 막혔고, 품에 안고 있던 아기가 벌써 죽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엄마들은 미쳤다."는 목격담을 전했다.
며칠도 못가서 베를린은 원한과 분노에 찬 피난민이 우글거리는 도시가 되었다. 소련군이 오기 전에 피하지 못한 독일 국민이 당한 행위가 소문으로 번지고 선전에 이용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두려움에 떨었다. 소련군 병사들이 보통은 술에 취해서 이성을 읽고, 자기들 손에 굴러 들어온 가족들에게 소련 국민이 전에 당했던 대로 보복한다면서 신나게 약탈하고 강간하고 구타하고 살해하고 온갖 만행을 다 저질렀다는 괴담은 대부분 사실이였다. 한 조심스러운 추정에 따르면 동부 지역에서 최대 140만명의 여성이 강간당했다. 이 지역에 사는 여성의 18%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동프로이센에서는 비율이 아마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1945년 4월이 되자 소련군은 베를린 지척에 다다랐으며 서방 연합군도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하고 라인 강을 건너 순조롭게 중부 독일까지 밀고 들어왔다.
물론 독일군의 저항에 연합군의 인명 피해도 적지 않았지만 소련군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이 때문에 스탈린은 베를린을 점령하기를 원했다. 그 상징적인 의미 때문에라도, 그리고 소련이 입은 막대한 피해에 대한 정치적 보상의 하나로서 베를린 공략을 소련에게 넘겨주길 원했고 영-미도 이에 수긍했다. 1945년 4월 중순 소련군은 베를린을 포위하고 이내 대규모 소탕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소련군은 베를린으로 진격하여 마지막 베를린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마지막 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250만 명의 병력(폴란드군 20만 명 포함)과 4,100문의 포, 6,200대의 전차를 투입했으며 독일군의 발악적인 저항으로 인하여 사망자만 81,116명, 부상자는 28만 251명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독일군은 무너졌고 결국 마지막 2주일 동안 소련군은 베를린 시내를 헤집고 다니며 도시의 저항군을 섬멸했다. 히틀러는 최후의 순간에도 무장친위대 병력과 9군의 잔존 병력으로 이루어진 슈타이너 분견대가 소련군을 격퇴할 것이라는 헛된 망상을 하고 있었지만, 슈타이너 분견대의 실제 가용 병력은 2개 대대에 불과할 정도로 처참한 상황이었고 대부분의 무장친위대 병력은 하인리히 힘러가 히틀러를 배반하고 그대로 연합군과 협상하기 위해 발을 빼게 했던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12군을 동원하라고 명령했지만 12군의 벵크도 이미 9군과 함께 피난민들을 이끌고 연합군 진영으로 투항하기 위해 엘베 강으로 도달하던 상황이었다. 이제 베를린을 사수할 병력은 열악한 장비를 지닌 국민돌격대와 베를린 방어군 병력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히틀러가 세상에 자랑한 소위 '천년제국'의 수도는 폐허와 포연을 넘어 진격해온 붉은 군대에 정복되었다.
1945년 4월 30일, 히틀러는 자살했고 일주일 뒤 모든 저항 여력이 거의 고갈된 독일 정부는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했다. 이날이 5월 8일이며, 서방 연합국은 이 날에 독일과의 전쟁을 끝냈고, 소련 정부는 나치 독일의 항복을 하루 뒤인 5월 9일에 공식 추인했기 때문에 소련(그리고 그 후계자인 러시아)은 5월 9일을 기해서 나치 독일과의 전쟁을 마침내 끝냈다.
베를린 전투 종료 직후 대규모의 피난민들과 잔존한 제9군의 병력들이 베를린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복수심에 불타는 소련군을 피해 서방 연합군의 점령지로 필사적인 탈출을 감행했다. 엘베 강 도하 작전으로 대표되는 이 탈출은 베를린에서 살아남은 티거 2 5대가 뒤에 남겨져 엘베 강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고 며칠간 버티며 엄호했다.
[1] 리투아니아인이었다. 리투아니아식 이름은 야코바스 스무슈케비추스.[2] 소련 해군, 특히 수상 함대의 전력 및 존재감이 미 해군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팽창한 것은 독소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냉전 시기, 1960년대 이후다.[3] 바르바로사 작전동안 소련은 2만여 기의 항공기를 손실하는데 이는 소련이 독소전 전기간에 상실한 항공기의 40%에 달하는 수준이다.[4] 히틀러가 일방적으로 핀란드도 독소전쟁에 참전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5] 핀란드는 선전포고 전까지 소련에게 자신들은 전쟁에 참여할 생각이 없고 참전은 히틀러의 일방적 주장일 뿐이니 공격하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겨울전쟁 때의 굴욕(어쨌든 이기긴 했지만)으로 눈이 뒤집힌 소련은 이를 무시했다.[6] 소련 지도부의 침공 당시의 상황은 이오시프 스탈린 항목의 제2차 세계대전과 독소전쟁 부분 참조.[7]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을 잇는 선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도달 목표였다.[8] D. 글랜츠의 <독소전쟁사>에 따르면 소련군에는 한때 96번 야전군 단대호가 있었다고 한다. 서방 기준으로는 누적 960만, 소련 기준으로는 누적 320만인데 서방기준으로 보인다.[9] 주코프의 당시 계급은 'генерал армии'인데, 이것은 상장(미국이나 영국 계급으로 환산시 중장)의 위이고 소련 원수 아래의 계급이다. 즉 대장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난 후 원수로 승진하였다.[10] 독일군 하면 대부분 기계화 부대가 연상되지만, 실제로 기갑 부대나 장갑 척탄병을 제외한 보병이나 포병의 수송력은 말에 의존했다.[11] 체첸은 독일군이 진입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게릴라 활동을 벌여 소련을 애먹였다.[12] 1944년 소련군에서 가장 창조성 있는 지휘관의 하나인 니콜라이 바투틴도 독일군이 아니라 이들의 습격에 의해 전사했다.[13] 2차대전 당시 핀란드와 태국을 제외한 추축국 진영은 예외없이 수많은 피점령민들을 학살하거나 학살에 일조했다. 독일군뿐만 아니라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도 우크라이나에서 절멸전쟁을 벌였고, 유대인을 도왔다는 불가리아도 그리스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보냈다. 지구 반대편의 일본군도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에서 중국인에게 적대적으로 행동해 많은 반감을 샀고, 그나마 덜 나쁘게 행동하던 연합군이 그들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조금 더 쉽게 풀어나갈 수 있었다.[14] 독일이 일본의 적성국가인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 때문에 일본은 내각이 총사퇴할 정도로 발칵 뒤집혔었는데, 이제 와서 그걸 파기하고 소련을 공격한다고 하는 상황이라서 일본 입장에선 매우 어이없는 상황이었기에 애초에 일본이 대소 선전포고를 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15] 출처 리처드 오버리 저, 지식의 풍경사 출판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p.268.[16] 소련이 지원 받은 랜드리스 가액은 103억 달러였고, 41년에 지원 받은 가액은 9100만 달러에 불과 했다.[17] 85mm AP와 76mm AP는 85mm AP가 소폭 우세한 정도의 비슷한 수준이지만 특수탄에서 관통력이 갈리는데 미국은 45년이 넘어서야 76mm HVAP(APCR)을 정식으로 도입했고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미군의 셔먼도 대전 내내 끽해야 차량당 한두 발 수준의 HVAP만 가질 수 있었으며 2차 대전 시기에 HVAP는 정식 보급용 포탄에는 포함되지도 못했던 것에 반해 소련은 85mm APCR을 차량당 4발씩 보급에 성공했기 때문에 미군이 쓰기도 부족한 HVAP를 거의 구할 수 없던 소련군이 사용하기에는 셔먼의 76mm보다 APCR을 사용 할 수 있는 자체 85mm 주포가 화력도 관통력도 훨신 강한 게 맞다.[18] 단적으로 T-64 전차의 엔진이 바로 미국이 지원해 준 기관차의 엔진을 베끼다시피해서 만든 것이다.[19] 대표적으로 1942년 7월 최초의 미국 랜드리스 호송선단 PQ-17이 독일 U보트 공격으로 35척 중 22척 격침당하고 1942년 9월 제2차 랜드리스 호송선단 XG-122 U보트에 의해 39척 중 12척이 격침당하였다.[20] 1942년 월 80-90t의 평균 보급량에서 1943년 하반기에 한 달에 200,000t으로 증가했다.[21] 출처: В.Н. Краснов, И.В.Краснов "Ленд-лиз для СССР. 1941-1945" Москва, Наука, 2008г., 246 стр., тираж не указан.[22] 사실 스탈린의 이름을 딴 곳은 스탈리노 등 이미 독일군이 점령한 게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과거 차리친이던 시절 스탈린이 처음으로 사령부를 차리고 군사 지휘를 해 본 곳이 스탈린그라드였다.[23] 포위당했으니 육로는 물론이고 근처 비행장들까지 다 점령당했으니 더는 공중보급조차도 기대를 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었다.[24] 여담이지만 스탈린은 처음으로 강을 건너는 병사에게 최고의 상을 주겠다고 선언했다.[25] 다만 이 시기에 스탈린이 직속 기관으로 만든 방첩기관 스메르쉬의 존재를 고려하면, 그가 군에 대한 당의 권한을 축소시켰을 뿐, 실제로 군에 대한 감시와 간섭을 푼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독소전의 본좌 데이비드 글랜츠 예비역 대령의 인터뷰에 따르면 이러한 견해조차 오류였다고 한다. 스탈린은 전쟁 끝까지 통제권을 놓은 적이 없었으며, 1942년 초 모스크바 전투 후에는 스탈린과 주코프 모두 견해가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로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스탈린이 현대전에 대한 개념을 새로 공부하여 이해할 능력을 늦게나마 갖추는 데 성공했고 그 결과 통제력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전에 걸맞은 군대를 운용할 능력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26] 후에 체르노빌 원전이 지어진 그 도시 맞다.[27] 15만 명 정도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포로로 잡히고 사상자는 35만 명 발생. 거의 50만 명이 날라갔다.[28] 가령 제3기갑군은 이름과는 달리 기갑 부대를 전혀 편제하지 못한 상황이었으며 거기다 제56기갑군단을 북우크라이나 집단군에게 넘겨주었다.[29] 단 부상자는 소련이 더 많아서 부상자 및 포로까지 집계하면 독일이 60만 명 소련이 77만 명이다. 하지만 소련군이 공세, 독일군이 수비였다는 점을 감안해야 하고, 소련군이 거둔 전략적 전술적 승리에 비하면 이정도 손실비는 아주 싸게 먹힌 것이다.[30]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이 동원한 전차가 2,938대였고 손실이 720대 정도였던 것을 감안한다면 이 무의미한 1,300대 이상의 소모는 엄청난 타격이었다.[31] 이 당시 독일군은 플로이에슈티 유전 상실로 비롯된 기름 부족으로, 공세에 동원한 전차들이 목표지점인 앤트워프까지(약 130km) 도달할 기름도 없는 상태로, 연합군의 기름을 노획해서 전진한다는 한심한 작전 계획을 짰다.[32] 이 과정에서 소련 측은 촉망받는 군인이었던 이반 체르냐홉스키 상급대장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33] 완전 파괴 86대 + 가동 불능 245대[34] 완전 파괴 42대 + 가동 불능 202대[35] 이 시기에 독일에서 젊고 건장한 성인 남성들은 거의 전멸한 지 오래였다. 10대 중후반밖에 안 된 미성년자들이나 나이 든 40~50대 아저씨들까지 끌고 가서 전선에 세우는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