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04:31:44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서양 음악사의 주요 인물 · 기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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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F1116>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Georg Philipp Teleman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Telemann_4.jpg
69세의 텔레만, 발렌틴 다니엘 프라이슬러 작 (1750)
<colcolor=#fff> 출생 1681년 3월 14일 금요일
신성 로마 제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 마그데부르크
사망 1767년 6월 25일 목요일 (향년 86세)
신성 로마 제국 자유제국도시 함부르크
직업 작곡가
사조 바로크 음악
종교 기독교(개신교, 루터회)
서명 파일:텔레만 사인.png

1. 개요2. 생애
2.1. 초기 ~ 라이프치히 대학생2.2. 폴란드~아이제나흐2.3. 프랑크푸르트2.4. 함부르크의 칸토르
2.4.1. 여러가지 출판활동2.4.2. 말년
3. 인간관계
3.1. 텔레만의 가족3.2. 동료 음악가
4. 작품세계5. 기타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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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1]를 위한 협주곡 , TWV 53:A2 중 4악장.
텔레만의 주요 작품집인 Tafelmusik(식탁음악) 중 한 곡이다.
바이올린 협주곡 , "개구리들"(Der Relinge), TWV 51:A4.
연주는 무지카 안티쿠아 쾰른(Musica Antiqua Köln), 지휘는 라인하르트 괴벨(Reinhard Göbel).
1악장에서 독주 바이올린과 리피에노 바이올린이 개구리 울음소리를 모사한다.
▲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모음곡 '걸리버', TWV 40:108.
4개의 악장이 1726년 출판된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4개 국을 묘사하고 있다.
장 바티스트 륄리는 칭송을, 아르칸젤로 코렐리는 격찬을 받았을 뿐이지만, 오직 텔레만이 이 모든 찬사 위에 있다.
요한 마테존, 『개선문의 기초Grundlage einer Ehren-Pforte(1740)』 中
맹세코 말씀드리지만 저는 당신을 늘 성실로 가득찬 진실로 존경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 텔레만에게 쓴 헨델의 1740년 12월 14일자 편지 中
만년이 되어 그분이 높게 평가했던 인물들은, 푹스, 칼다라, 헨델, 카이저, 하세, 그라운 형제, 텔레만, 젤렌카, 벤다 그리고 베를린과 드레스덴에서 특별히 높이 평가받고 있던 모든 분들입니다. 처음에 든 네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분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습니다.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에게 보내는 1775년 1월 13일 편지 中


독일 태생의 바로크 작곡가이자 악장.

2. 생애

2.1. 초기 ~ 라이프치히 대학생

독일 마그데부르크(Magdeburg)의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대학에서 요한 마테존과 함께 법학을 공부했지만 뒤늦게 음악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라이프치히에 머물고 있던 1702년 텔레만은 콜레기움 무지쿰이라는 대학생 음악 단체를 설립하며 여러 음악 활동을 열었고 1704년에는 당시 대학 교회였던 라이프치히 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한다.
파일:요한 빌헬름.png
작센-아이제나흐 공국의 요한 빌헬름 공작

[clearfix]

2.2. 폴란드~아이제나흐

텔레만은 1705년 6월 작센 선제후국의 조라우(Sorau)[2]를 다스리는 에르트만 프롬니츠 백작 궁정의 악장으로 임명되었다. 음악애호가였던 백작의 비호 아래서 장 바티스트 륄리 같은 우아한 프랑스 스타일의 음악을 처음 접했으며, 특히 작센의 민속음악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이 조라우라는 도시는 텔레만의 전체 생애를 조명했을 때 매우 중요한 곳인데, 텔레만이 첫 아내를 만나게 결혼한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독일 양식'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텔레만의 음악 스타일 확립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해인 1706년 대북방전쟁의 여파로 스웨덴 국왕 칼 12세가 이끄는 스웨덴군폴란드-리투아니아를 넘어 작센까지 공격하게 되자[3], 텔레만은 요한 빌헬름 공작이 다스리는 옆동네 아이제나흐 공국으로 일자리를 옮겼다. 텔레만은 이 아이제나흐에 있던 시기에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처음 만났으며 이후에도 끈끈한 관계를 이어나간다. 1708년 12월 24일 관현악단의 악장(콘체르트마이스터, Konzertmeister)으로 임명되며 이듬해인 1709년 8월에 작센 아이제나흐 공국의 궁정악장(카펠마이스터, Kapellmeister)이자 서기관으로 임명된다. 조라우로 돌아가 동해 9월 아내와 결혼하고 1711년 첫 딸을 낳지만 아내는 곧 사망하고 만다.

2.3. 프랑크푸르트

1712년 3월 이주가 승인되자 프랑크푸르트암마인으로 이주했다. 텔레만은 프랑크푸르트 바르퓌서 교회 칸토르 겸 시립 음악감독으로 일하였다.

2.4. 함부르크의 칸토르

파일:함부르크 오주 교회.jpg
현재의 함부르크 5 주교회. 왼쪽부터 성 야코비, 성 카타리나, 성 베드로, 성 니콜라이, 성 미하엘 교회.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는 음악이 내리막길을 걷고 있지만 여기서는 꾸준히 오르막길을 걷고 있지요. 제가 보기에 함부르크보다 음악가의 심신에 자극이 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렇게 된 큰 요인을 보자면 여기는 귀족이 많을 뿐 아니라 시의 원로와 참사회 모두가 대중 공연을 보러 옵니다. 그들은 수많은 전문가들과 똑똑한 이들이 내리는 분별있는 판단에 매혹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제 오페라는 활짝 꽃피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곳 음악 애호가들은 가지고 있기에는 신경쓰이는 물건을 자기들 수중에 들러붙게 놔두는 법이 없지요.
텔레만이 1723년 프랑크푸르트의 시 참사관 요한 프리드리히 아르만트 폰 우펜바흐에게 보낸 편지 中
파일:텔레만 판화.jpg
1745년경 판화.
게오르크 리히텐슈테거(Georg Lichtensteger)

동시대의 역사가였던 존 호킨스 경의 저서에 의하면 함부르크에서 특별한 음악가를 모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텔레만을 설득했다고 한다. 위에 편지에서 보듯 함부르크에서는 최고 수준의 음악을 원했던 듯하며 그리하여 텔레만은 1721년 10월 16일 함부르크의 칸토르로 임명되었으며 함부르크 다섯 교회의 음악활동을 총괄하게 된다. 함부르크는 텔레만에게 높은 수준의 음악을 요구하였으며, 텔레만은 이에 맞추어 의무적으로 일주일마다 칸타타를 두 곡을 써야 했을 뿐 아니라 일년에 한 번씩 대규모 수난곡과 함부르크 시민군을 위한 오라토리오, 세레나타 한 곡을 작곡해야 했다.

중간에 요한 쿠나우가 타계함에 따라, 라이프치히 쪽의 칸토르 자리에 티오가 나게되었다. 이에 라이프치히 시의회는 여러 후보들에게 초청을 보냈는데, 그중 1순위가 바로 텔레만이었다. 당시 독일 음악계에서 텔레만의 이름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텔레만은 라이프치히로 이사를 하는 듯 했으나, 사실 이것은 훼이크로 함부르크에게 자신의 봉급을 높여달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던 것. 텔레만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함부르크 시의회는 텔레만의 연봉을 인상해주고, 함부르크 콜레기움 무지쿰과 오페라단의 감독 직도 주었다고 한다. 텔레만이 오지 않자, 라이프치히 시 칸토르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가 이어받는다. 텔레만은 오페라단에서 1738년까지 정열적으로 일했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함부르크의 악장으로 지냈다.

2.4.1. 여러가지 출판활동

이후 교회음악을 담당하는 일 이외에 텔레만은 1725년부터 자신의 음악들을 출판하기 시작한다. 당시 함부르크는 출판업이 발달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지만 텔레만의 출판된 작품집들은 높은 평가를 받으며 텔레만에게 많은 추가 이익을 안겨주게 된다. 여기서 특기할 만한 출판물은 1728년 출판한 『충실한 음악 교사(Der getreue Music-Meister)』로 이 출판물은 최초의 음악 정기 간행물로 정기 구독자들을 위하여 격차를 두고 발간하였다. 여기서는 자신의 노래, 소나타 등 실내악 곡 뿐 아니라 동시대 음악가들의 음악들도 종종 실었다.

그 외에도 1733년 『식탁음악(Tafelmusik)』과 『클라브생 환상곡집(Fantaisies pour le clavessin)』, 1735년의 『비올라 다 감바 환상곡집(Fantaisies pour la basse de violle)』과 1739년의 『음악 연습(Essericizii Musici)』 등 여러 권의 작품집을 출판했다.
파일:새로운 사중주.png
파리에서 출판된 6곡의 사중주(1738)

점점 명성이 유럽에 떨치자 텔레만은 1737년 가을 파리의 음악가들이 보낸 러브콜에 응해, 직접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다. 파리에서 텔레만은 콩세르 스피리튀엘에서 자신의 그랑 모테트를 연주하는 영예를 누리며 루이 15세의 비호 아래 자신의 기악 음악을 프랑스에서 독점 출판할 권리를 부여 받는다. 파리에서 텔레만은 여러 작품을 출판하였는데 전 유럽의 구독자로부터 큰 호응을 얻으며, 특히 『새로운 사중주(Nouveaux quatuors)』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역시 직접 구매하기도 했다.[4] 1739년에는 미츨러가 창립한 음악 협회의 회원이 되어 몇 편의 논문을 쓰기도 했다.

2.4.2. 말년

파일:텔레만 8.png
1764년, 83세의 텔레만.
게오르크 리히텐슈테거(Georg Lichtensteger)의 판화
선율이 새롭지 않다면 화성이 참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 1751년 텔레만이 쓴 편지 中. 그의 음악적 신념이 잘 드러나는 말이라 하겠다.

나이가 들어서도 텔레만의 작곡 열정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친구 바흐가 말년에 거의 작곡을 하지 않은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당시 1750년은 텔레만의 나이 70세로, 이후에 쓰여진 작품들은 전의 작품들보다 오히려 더 독창적인 작품들이 많은데, 이는 텔레만이 절대 유행에 뒤쳐지는 음악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텔레만은 이제 스무 줄에 접어든 새내기 작가들의 대본을 많이 사용하는 등, 젊은 세대와 많이 접촉했다.

1750년대부터 텔레만은 오히려 더 큰 규모의 굵직한 성악곡들을 쏟아낸다. 친구였던 헨델처럼 오라토리오라는 장르에 눈을 돌려 여러 곡의 수난곡을 비롯해 오라토리오 《예수의 죽음(Der Tod Jesu)》과 리스본 대지진을 추모하기 위한 《청천벽력(Die Donnerode, TWV 6:3)》[5], 하이든사계를 듣는 듯한 칸타타 《하루의 시간(Die Tageszeiten, TWV 20:39)》등이 이 때의 작품들이다.

1760년대에도 텔레만은 쉬지 않고 작곡하였다. 《해방된 이스라엘(Das befreite Israel, TWV 6:5)》과 최후의 심판, 칸타타 이노 등을 작곡했다. 이런 작품들을 보면 바로크 양식에 대두된 고전주의 양식을 혼합해 새롭게 변모시키려는 80대 노장의 표현 방식이 엿보인다.[6]

생애 막바지 무렵에는 손자 게오르크 미하엘을 돌보다가 86세의 고령에 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7]

3. 인간관계

3.1. 텔레만의 가족

1709년에 아말리에 루이제 에블린이란 여성과 결혼해 딸을 얻었으나 이 딸에 대한 기록도 그리 없으며 아내도 아이를 낳다 죽었다. 1714년에 2번째로 시 의원의 딸이였던 마리아 카테리나(1698~1775)와 결혼해 목사가 된 아들 안드레아스(1715 ~ 1755)와 여러 아이를 얻었지만 마리아는 사치스럽고 도박중독자인데다가 스웨덴 장교와 바람이 나버려 3천달러[8]의 빚[9]만 텔레만에게 떠넘긴 채 도망가 버렸다. 이에 텔레만은 어쩔 수 없이 많은 작품을 쓰며 빚을 갚아야 했고 결국 참다못해 1736년 이혼한 후 다시는 결혼을 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파산 직전이었던 텔레만을 보고 함부르크 시민들이 텔레만의 출판물들을 많이 구입해서 재정상태가 좋아졌다고 한다.
반대로 마리아 카테리나는 17살 나이 차이가 있었는데 30대 나이로 텔레만이랑 이혼하고 자업자득으로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

생몰년대로도 확인할 수 있지만 86세까지 살았고,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반대로 아들딸들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다. 덤으로 큰 아들 안드레아스가 40살로 먼저 숨진 후 손자인 게오르크 미하엘 텔레만(Georg Michael Telemann, 1748.4.20. ~ 1831.3.4.)을 돌봐야 했다. 그의 손자인 미하엘도 82세까지 장수를 누렸고 텔레만이 사망할 당시 그 곁을 지켰다. 미하엘도 음악가가 되었지만 할아버지가 너무 유명한지라 상대적으로 묻혔다. 그래도 오르간 연주자로서 그럭저럭 이름을 알렸고 러시아 제국 리보니아 현의 리가[10] 대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 및 음악 감독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리가에서 숨을 거뒀다.

3.2. 동료 음악가

바흐헨델에 비하면 4세 연상이었는데, 사적으로는 바흐와 상당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가 태어났을 때 대부가 되어준 것도 텔레만이었으며, 이때문에 C. P. E 바흐의 중간 이름은 텔레만의 중간 이름 , '필리프'가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C. P. E.바흐와 텔레만의 끈끈한 인연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서 텔레만 사후 공석이 된 함부르크 악장 자리에 C. P. E.바흐가 임명되기까지 쭈욱 이르렀다.

헨델과는 대학시절부터 친분을 쌓아온것으로 보인다. 말년의 헨델이 텔레만에게 쓴 2통의 편지가 남아있는데, 헨델이 편지에서 깍듯한 말투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아 둘의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4. 작품세계

파일:텔레만 자필.png
서곡 F장조 TWV 55:F16의 자필악보.
텔레만이 죽은 해인 1767년에 쓴 작품으로 텔레만의 왕성한 활동력을 짐작하게 한다

음악학적으로 텔레만은 후기 바로크를 빛낸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일부 작품들은 고전파적 성향까지도 예견했다는 해석도 있다. 작곡할 때 장르를 거의 가리지 않아서, 교회 음악과 세속 음악 양쪽에 모두 많은 공헌을 했으며, 오페라, 성악곡, 관현악곡, 실내악곡, 건반 악기용 소품, 모음곡, 협주곡 등등 별의별 분야에 손을 댔다. 독일뿐 아니라 프랑스, 이탈리아, 동유럽의 민속 선율 등의 다른 지역에서 발흥하는 바로크 음악들도 한꺼번에 모아서 녹여냈으니 가히 바로크 음악세계의 도가니라고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상술했지만 텔레만은 기본적인 바로크 양식 이외에도 항상 새로운 양식을 음악에 차용한, 결코 유행에 뒤쳐지는 작곡가가 아니었다. 하지만 텔레만 말년에 점점 가볍고 우아한 양식들이 유행함에 따라 텔레만의 음악은 점차 잊혀지게 된다.

텔레만의 작품들은 듣기에 부담이 없고 간결하며 직관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다.[11] 반대로 복잡하고 현학적인 대위법이나 고난이도의 기교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다르게 말하면 아마추어도 금세 연주가 가능할 만큼 대중적이고 무난한 악풍을 보여준다. 한 예를 들자면 36개의 건반 환상곡(TWV.33:1~33:36) 같은 경우는 바흐의 인벤션과 신포니아보다도 더 쉬운 내용이며, 유튜브에 7~8세 꼬꼬마들이 연주하는 영상들이 수두룩할 정도이다. 그 외에도 하프시코드를 위한 작은 푸가(TWV.30:21~30:26),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카논소나타(TWV.40:118~40:123), 네 대의 바이올린만을 위한 협주곡(TWV.40:201~40:204) 등등, 정말 기본적인 기량만을 갖춘 아마추어 하나, 둘, 셋, 넷 정도만 모이면 연주할 수 있는 작품들이 숱하게 많다.

오늘날에는 클래식덕후가 아닌 이상 생소한 이름이지만 적어도 바로크 시대 당시만 해도 대중적으로 인기가 많았다. 바흐 생존 당시 라이프치히 시에서 작곡가 인기 투표를 한 적이 있는데, 바흐는 7위였고 헨델이 2위, 그리고 텔레만이 1위였다고 한다. 바흐가 20여년을 재직하여 사실상 나와바리나 다름없던 라이프치히에서조차 텔레만의 인지도가 앞섰던 것이다.

다만 바흐의 음악이 음악학적으로 파고들 만한 건덕지가 있는 대신 그만큼 일반 대중들에게는 진입장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12] 충분한 식견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도 즐길 수 있는 텔레만의 음악이 대중성 측면에서는 좀 더 유리했다. 사실 바흐는 당시 작곡가로서 그렇게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그에 반해 텔레만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상황이 너무나도 크게 역전됐지만.

4.1. 다작

그렇게 손쉽게 곡을 작곡할 수 없었다면, 텔레만은 더 위대한 작곡가가 되었을 것이다.
- 크리스토프 에빌딩, 1770년

역사상 최다 다작 작곡가 중 한 명.

텔레만의 작품들은 당대에 많은 인기를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거의 대부분이 잊혀졌으나, 음악학자들의 노력으로 인해 현재까지 상당수가 발굴된 상태이다. 그리고 그 작품의 수는 확인된 것만 무려 3,000여 곡에 달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작품들이 발견되고 있다. 그 중에 종교적인 칸타타가 1518곡으로 절반을 차지한다.

아무튼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 중, 아침마다 가볍게 푸가 한 곡씩 쓰면서 하루를 시작했다는 바흐는 천여 곡 넘는 수준으로 작품들이 정리되어 있으며, 의뢰를 받을 때마다 거의 비슷비슷한 수준으로 협주곡들을 마구 휘갈겨 써내려 간 비발디가 800여 곡 정도를 작곡했다고 알려진 걸 생각하면 비유가 이상하긴 하지만 따지자면 매일 한 곡씩 작곡해도 꼬박 10년을 꾸준히해야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사실 여기에는 속사정이 있는데, 상술했듯이 텔레만이 이렇게 작품을 열심히 작곡해야 했던 건 그의 재혼한 아내였던 마리아 카테리나(Maria Catherina)가 도박중독자라서 어마어마한 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 여자, 텔레만을 버리고 스웨덴 장교랑 도망을 가버리기도 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작품을 출판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결국 1736년 이혼한 후 마리아는 비참하게 생을 마쳤다.

여기에서 그 엄청난 작품들의 일부를 볼 수 있는데, 이 목록에는 겨우(?) 수백여 곡밖에는 업로드되어 있지 않다.

4.2. 작품목록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작품목록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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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자신의 정원을 가꾸는 취미가 있었으며 전 유럽의 희귀한 식물을 수집하고 있었다. 친구였던 헨델은 1750년 후로 영국의 희귀한 식물들을 모아 텔레만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헨델이 텔레만에게 부친 편지

6. 관련 문서



[1] 첼로는 사실상 플루트, 바이올린을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이 곡에서 첼로의 솔로를 듣고 싶다면 4분 12초부터 들을 것.[2]폴란드 자리(Żary).[3] 당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 2세였다.[4] 더 정확히는 바흐가 구매했다는 영수증이 남아있다.[5] 인기가 대단해서 작곡가 자신이 1760년에 2부를 덧붙였다.[6] 텔레만이 살아있던 1760년대면 하세는 이미 61세였고, 글루크도 40대 중후반이였고, 하이든이 30줄에 접어들며, 모차르트 역시 신나게 유럽 음악원정을 돌고 있었다.[7] 비슷한 사례로, 후배 작곡가 하세도 84세까지 장수하였으며, 볼로냐 악파의 작곡가 자코모 페르티(Giacomo Perti, 1661 ~ 1756)은 무려 94세까지 장수하였다![8] 현재 한국 기준으로 약2억5천만원[9] 그나마 이혼하고 텔레만 본인의 사업수완도 뛰어나서 그럭저럭 넘어갔다.[10] 현재 라트비아의 수도[11] 플루트 협주곡 TWV.51:D1 1악장이 대표적으로, 시작부터 주제선율이 담백하고 수수하게 돌직구를 날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 #[12] 대위법적인 작법을 극한까지 파고드는 바흐의 음악은 당시 대중들에게 르네상스 비스무리한 '낡은 것'으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