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0 12:12:14

장 베델 보카사

1979년 방기 학살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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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카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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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프리카공화국 제2대 대통령
장베델 보카사
Jean-Bédel Bokassa
중앙아프리카 제국 초대 황제
보카사 1세
Bokassa 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okassa_colored.png
출생 1921년 2월 22일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 우방기샤리[1] 보방기
사망 1996년 11월 2일 (향년 75세)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방기
재임기간 제2대 대통령
1966년 1월 1일 ~ 1976년 12월 4일
재위기간 중앙아프리카 황제
1976년 12월 4일 ~ 1979년 9월 20일
부모 아버지 민도곤 음그분둘루
어머니 마리 요코워
배우자 카트린 뎅기아데[2]
자녀 장남 장 세르주 보카사, 차남 장베델 보카사 2세
종교 천주교이슬람교 → 천주교

1. 개요2. 생애
2.1. 상류층에서 고아가 되다2.2. 고아에서 군인이 되다2.3. 군인에서 대통령이 되다2.4. 대통령에서 황제가 되다
2.4.1. 초호화 대관식2.4.2. 폭정과 기행2.4.3. 부정부패와 경제 파탄2.4.4. 방기 대학살(Bangui massacre)
2.5. 황제에서 평민이 되다2.6. 최후
3. 사생활
3.1. 숨겨진 딸
4. 기타5. 관련 문서6.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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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저는 도적단의 우두머리입니다. 저는 그들을 억제하기 위해 때때로 그들을 채찍질합니다. 누군가 죽는다? 맞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절 날 프랑스의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10배 적습니다. 다음 일요일에는 도로에 더 많은 희생자가 있을 것이고 희생자 덕분에 더 이상 도둑이 없을 것입니다!
보카사 1세
유튜버 다큐DF가 소개하는 보카사 영상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의 2대 대통령이자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 독재자.

상상을 초월하는 사치 행각과 기행들을 저지름으로써 우간다이디 아민, 에티오피아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적도 기니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짐바브웨로버트 무가베, 수단 공화국오마르 알바시르에 비견되는 아프리카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대통령이 직접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 자리에 오른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도 특이한 지도자들 중 한 명이다.[3]

그의 일생을 요약하자면 프랑스에 의해 부모를 잃었지만,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출세를 하여 대통령에 오르고, 프랑스의 황제를 동경하여 프랑스의 묵인 속에 황제가 되었지만, 프랑스를 무시한 탓에 쫓겨나, 프랑스로 망명을 간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과장 좀 보태면 프랑스에 살고 프랑스에 죽는 인생인 동시에, 프랑스가 보카사의 인생의 모든 것을 구성한 것이다.

2. 생애

2.1. 상류층에서 고아가 되다

1921년 2월 22일에 장베델 보카사는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보방기라는 마을에서 촌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가톨릭수호성인의 이름을 딴 '장바티스트 드 라살 보카사(Jean-Baptiste de Lasalle Bokassa)'였는데, 달력에서 성인의 이름이 'Jean-B'라는 약어로 적혀 있었고, 반쯤 문맹이었던 부모가 이를 오독해서 '장베델(Jean-Bédel 또는 Jean-Bedel)'이 되었다. '보카사(Bokassa)'는 그의 출생 부족이던 음바카(Mbaka)족의 말로 '작은 숲'을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 민도곤 음그분둘루(Mindogon Mgboundoulou)는 보카사가 6살 때 프랑스 기업에서 마을 사람들을 강제 징용하는 것에 반항하다가 마을 광장에서 구타당해 살해당했고, 그로부터 1주일 후 어머니 마리 요코워(Marie Yokowo)마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12명의 자식들을 남긴 채로 자살하면서 고아가 되고 말았다.

2.2. 고아에서 군인이 되다

부모님의 사망 후 친척집에서 유년기를 보내면서 지역 선교 학교인 잔다르크 학교[4]에서 공부한 보카사는 훌륭한 성직자가 되는 것을 꿈꿨고, 학업 성적도 좋았지만 학교폭력을 자주 저질렀다고 한다.

졸업 후 그는 1939년 프랑스군육군 병사로 입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5]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6]에서 올린 전공으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비롯한 무공 훈장을 10여 개나 받았으며 1961년에는 육군 대위로 진급했다.[7] 프랑스 군에 입대했을 때부터 보카사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시절의 프랑스 군대를 동경하여 자신이 나폴레옹처럼 되는 것을 꿈꾸게 되었다.

1962년에 프랑스 육군에서 전역한 뒤에는 해방된 고국으로 돌아와 대대장이 되었다. 보카사는 조국의 독립운동에 직접 참가하기는커녕 오히려 식민지 부역자였으나 초대 대통령인 다비드 다코의 사촌 동생이자 독립 전 자치령 시기의 총리 바르텔레미 보간다의 조카였기 때문에 군부의 요직에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보카사는 1963년에는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1년 뒤에는 중앙 아프리카 공화국군 최초의 대령으로 진급했다.[8]

하지만 그 시점부터 보카사는 단순한 군인이 아닌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정치인이 되기 위한 뒷공작을 시작했다. 사촌 형이자 대통령인 다코는 처음에는 훈장과 메달 수집에만 열을 올리는 것처럼 보이는 보카사의 야심을 눈치채지 못하며 보카사를 무시했지만, 측근들이 보카사의 정치 공작에 대한 보고를 계속 올리자 군대를 견제하기 위한 무장 경찰대와 대통령 경호대를 창설했다. 군대는 프랑스와 연줄이 있는 보카사가 꽉 잡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손댈수 없었다.

1964년에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쪽의 킨샤사 콩고와 북동쪽의 수단 공화국에서도 이를 틈타 국경 침범 행위가 수시로 행해졌다. 다코는 이 위기를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고 차관을 들여오는 식으로 벗어나 보려고 했지만 차관 도입에 실패했고 고위층들의 부정 부패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65년 7월에 보카사는 다코의 명으로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기념일 식전에 참가하기 위해 프랑스로 출국했는데 식전 후 보카사가 귀국하려고 하자 다코는 입국 금지령을 내렸다. 이에 분노한 보카사는 옛 프랑스군 동료들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군 동료들에게 연락해 금지령 해제를 호소했고 다코는 국내외의 압력에 못 이겨 결국 귀국을 허락했다.

이후 다코와 보카사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게 되었는데 다코가 노골적으로 군부를 무시하고 무장 경찰대와 대통령 경호대에 주요 예산을 책정하는 등의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자 보카사는 자신의 부하 알렉상드르 반자(Alexandre Banza, 1932~1969) 대위의 협력을 얻어 쿠데타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2.3. 군인에서 대통령이 되다

1965년 12월 31일에 다코와 내각 관료들은 송년회를 겸해 방기 남서부의 한 농장을 방문했는데 그 틈을 타 보카사는 대통령 궁을 점령하고 다코와 무장 경찰대 총사령관 장 이자모 등 휘하 관료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몇 시간 뒤 다코는 군부에 의해 체포되어 보카사 앞으로 끌려왔고 보카사는 다코에게 대통령직을 사퇴하라고 강요했다. 결국 다코는 대통령직을 포기하고 가택 연금되었고 보카사는 이듬해 1월 1일 아침에 방기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대통령직에 올랐다. 쿠데타 이후 다코의 경호대나 헌병대의 사령관 등 8명이 체포, 고문 과정에서 사망했다. #

보카사는 일단 사촌 형인 다코를 사면하고 대통령의 고문이라는 명목상의 명예직을 주기는 했지만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이자모에 대해서는 얄짤없이 '중국 스파이와 정권을 찬탈하려고 한 반역자'로 규정해 처형해버렸다. 또 보카사는 집권 직후 중화인민공화국과 곧장 단교하고 중화민국과 재수교하는 등 반공주의 성향을 보여주었다. 다만, 1969년에는 첫 해외 방문지로 북한평양을 택하고 김일성을 만나 두 나라 사이의 외교 협정을 맺기도 했으며[9] 1970년에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시절 루마니아에도 방문하는 등[10], 반공주의자였음에도 의외로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는 좋은 편이었다. 이 무렵에 보카사는 친동방 대외정책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별로 성과가 없자 다시 친서방 대외정책으로 복귀했다.

보카사는 집권 초기에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서민층과 군부를 달래기 위해 여러 개혁 정책을 펼쳐 국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또 일부다처제와 결혼 때 신부 측에서 강제적으로 지참해야 했던 지참금 관행, 여성할례여성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악습을 법으로 금지했고 대중교통 체제를 정비하고 국립 관현악단과 국영 항공사[11], 국립 대학교도 개설하고 도로망도 정비하는 등 건설적인 면모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71년 6월 6일에는 어머니의 날에 보카사는 여성을 강간하거나 살해한 죄로 복역 중인 모든 죄수를 처형하게 하고는 같은 날에 공화국의 모든 여성 수감자들을 석방케 하며 어느 정도 민심을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여전히 군부를 앞세운 폭력적인 행위가 자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1972년 7월 29일에 강도들이 보카사의 집에서 메르세데스 자동차의 타이어와 라디오를 훔쳤을 때, 보카사는 이틀 후인 31일 직접 감옥에 가서 간수들에게 수백 명의 죄수를 구타하게 한 것은 물론, 본인도 교도소에서 직접 45명의 죄수들을 구타해 이들 중 3명을 죽였고,[12] 살아 있는 사람들을 햇볕이 내리쬐는 시장 광장에 5~6시간 동안 공개적으로 전시했다고 한다. 이때 '도둑질을 하면 귀를 자른다'는 조칙이 반포되었는데, 정확히는 '도둑의 첫 번째 범죄 후에는 한쪽 귀를 자르고, 두 번째 범죄에는 다른 귀를 자르며, 세 번째 범죄에는 오른손을 잘라야 하고, 네 번째 범죄 후에는 시장 광장에서 공개 처형에 처해질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보카사는 이 법령을 악용해 반정부 인사들을 '절도죄'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보카사의 반대파들은 귀를 넘어 코가 잘리거나 심지어 거세를 당하기도 했다.

게다가 보카사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18세에서 55세 사이의 사람이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과 구걸하는 것, 최초의 일렉트릭기타인 팬핸들을 연주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사람들이 너무 향락에 빠져 열심히 일하지 않을 것 같아 모든 펍, 바, 댄스홀을 감시하기 위해 "도덕 여단"을 설립하고는 평일 낮에 전통 북 연주를 금지했다. 덤으로 보카사의 집권 기간 동안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대통령 선거는커녕 국회의원 선거조차 단 한 번도 실시되지 않았다.[13]

그리고 보카사는 자신의 우상화에도 열중하기 시작하여, 집권한 바로 그 해부터 "나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지만 어느 곳에도 없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본다. 나는 아무것도 듣지 않지만 모든 것을 듣는다."는 말을 남기며 스스로를 신격화했으며, 모든 공공 장소에 많은 훈장으로 장식한 본인의 사진을 달았고, 1968년 초부터 교과서의 앞 페이지를 자신의 사진으로 장식했으며, 수많은 학교와 병원, 도로, 정책에 보카사의 이름이 붙었다. 심지어 보카사는 고국의 독립을 주도했던 사람도, 초대 대통령도 아니었던 주제에 아예 스스로를 국부라고 선언했다.

쿠데타 성공 후 몇 년 뒤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반자와 점점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는데 반자는 보카사 집권 초기 외교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새 군사 정부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노력했고 프랑스에서도 공식 정부로 승인받는 등의 공을 세운 바 있었다. 하지만 반자는 보카사가 자신의 향락을 위해 막대한 국가 예산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군부 내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이에 보카사는 반자를 지지하는 부대를 국경 경비대로 투입해 수도에서 떨어뜨려 놓았고, 반대로 자신의 지지 부대는 수도나 그 인근에 배치하는 등 반자와 권력 투쟁을 시작했다. 1968년 4월에 단행된 내각 개편에서 보카사는 반자를 기존의 외교부 장관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미미한 보건부 장관으로 이임시켰다. 결국 반자는 1969년 4월 8일에 동료들에게 '다음 날에 보카사를 몰아낼 것이다'고 말하며 쿠데타를 모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자의 계획은 그가 포섭한 장클로드 만다바 중위가 이 계획을 보카사에게 폭로하면서 틀어졌고, 반자는 곧 체포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체포하러 온 사람들에 의해 팔이 부러진 후 자동차 트렁크에 던져져 보카사에게 보내졌고, 4월 12일에 군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후 척추가 부러질 정도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고는 방기의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끌려나간 후 총살형에 처해졌다. 그 직후에 반자의 가족들도 모두 감옥에 끌려갔는데, 그나마 아내와 9명의 자식들은 2년 뒤에 풀러나게 되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감옥에서 아사하였고, 남동생들은 감옥에서 끌려나간 후 '실종'되었다.

이때부터 보카사는 노골적인 독재 야욕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1971년에 스스로 대장 계급을 단 뒤 이듬해인 1972년 2월 4일에는 부정선거를 통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고, 1974년 5월 15일에는 원수로 등극하였다. 보카사의 독재 행각에 반발한 반정부 세력들이 1974년 12월과 1976년 2월에 쿠데타와 암살을 기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73년 가봉을 공식 방문한 다음 환송행사가 끝나 비행기가 귀국길에 올랐는데 갑자기 회항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오마르 봉고 대통령이 사정을 묻자 지금까지는 공식 방문이라고 다시 돌아온 것은 사적 방문이라고 대답했다. 전날 밤 공식 만찬장에서 보카사의 춤 파트너였던 무희를 보고 못 잊어서 그렇게 한 기행이었다. 공식적으로는 항공기 고장으로 인한 비상착륙이라고 알렸지만 이후에 이 사실이 밝혀졌다.

원래 보카사는 가톨릭 교도였으나 리비아무아마르 가다피를 만나고 난 1976년 9월에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살라흐 에딘 아흐메드 보카사(Salah Eddine Ahmed Bokassa)로 개명했다. 그러나 3개월 만에 도로 가톨릭으로 원복한다. 리비아의 자금 지원을 계속 얻어보려는 의도였지만, 눈치도 관심도 없던 카다피가 돈 보낼 생각조차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제국 선포까지 해서 나폴레옹 1세 코스프레를 하기에 이슬람교도 황제는 영 아니기도 했다.

이 당시에도 보카사는 여러 기행을 펼치기도 했다. 그 일례로 1970년에 샤를 드골이 사망하자 드골의 장례식에 참석한 보카사는 드골의 가족 앞에서 공개적으로 "아빠, 아빠!"라고 외치며 양아버지를 잃었다고 말했다고 하며, 1976년까지 보카사는 "내무장관, 국방, 농업, 무역, 산업, 광산, 운송, 민간 항공, 보건, 공공 서비스 및 사회 보장부, 정보부 장관 - 그리고 최초의 엔지니어, 최초의 농부 및 최고의 축구 선수" 등 32개의 직위를 스스로에게 수여했다. 거기다가 보카사는 총 12개의 장관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1967년부터 1977년까지 정부를 20번 이상, 1년에 2번 꼴로 개각했다고 한다. 이렇게 짧은 임기 동안 각료들은 더 많은 돈들을 챙기기 위해 부정부패에 빠지게 되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당시 아프리카 신흥독립국에 흔해빠졌던 전형적인(?) 잔인하고 부패한 독재자로 보이겠지만, 집권 말기 3년 동안 보카사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기이한 행각들로 유명해졌다.[14]

2.4. 대통령에서 황제가 되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숭배하고 있었던 보카사는 프랑스 제1제국에게서 영감을 받아 황제되기로 결심하고, 결국 1976년 9월에 정부와 의회를 해산하고 같은 해 12월 4일에 신 헌법을 공표해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체제를 바꾸어 스스로 중앙아프리카 제국보카사 1세로 자처하는 황제가 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일무이하게 새로 건국(?)된 제국이었다.

2.4.1. 초호화 대관식

파일:보카사 1세의 대관식.jpg
파일:imagetime.jpg 파일:external/www.jeremyhunter.com/057.jpg
황제로 즉위한 보카사와 황후가 된 그의 아내 카트린 뎅기아데.
보카사 1세의 대관식 당시 실제 영상

이후 보카사는 제국 선포 만 1주년이 되는 1977년 12월 4일에 약 2200만 달러에 이르는 경비를 지출한 초호화 대관식을 마련했다. 이 대관식은 1930년에 에티오피아의 정식 황제인 하일레 셀라시에의 즉위식 이후 무려 47년만에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대관식이었다. 이 날짜는 1804년 12월 2일에 거행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대관식에 영향을 받았는데, 보카사는 나폴레옹을 존경했기 때문에 대관식 날짜를 이틀 미뤘던 것이다.

이 대관식에 든 금액을 2024년 환율로 환산하면 약 1억 1266만 달러, 대략적으로 환산해도 1,527억 원이나 되는 거액이었는데, 이는 당시 1년 국가 예산의 1/3 정도였고, 1년 총수출액의 1/4, 심지어 당시 국가의 GDP[15]약 18%나 되는 엄청난 규모였다.[16] 거기다가 보카사는 프랑스가 개발 목적으로 지원해 준 원조금 전액을 대관식에 쏟아부었다. 참고로 이 시기 제국 일반 국민들의 1인당 소득은 세계은행의 추산으로는 216달러에 불과했다.[17] 그런데도 이 대관식을 위해 제국 내 기업들은 물론, 공무원들조차 대관식 경비로 쓰기 위해 원래 받아야 하는 봉급 중 40달러를 강제로 보카사에게 헌납해야 했다.

이 대관식을 위해 수도 방기의 거리는 정비되고, 건물의 도색도 새롭게 했으며, 거리의 거지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대관식 준비를 위해 특별 위원회도 설치되었는데, 이들은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 <황제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히 고증하여 보카사 황제의 대관식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로 즉위했을 당시와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행해지도록 연출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당시 세세한 증언들과 기록들까지 참고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심지어 이 대관식을 위해 보카사는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1953년)과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의 대관식(1967년) 영상까지 참고했다.

보카사는 온도가 35도가 넘고 습도가 90%에 달하던 이 대관식 날에 6천 석 크기의 방기의 실내운동경기장에서 대관식을 치를 때 이 그림을 모방하여 보카사 본인이 가장 총애하는 부인이자 유일한 황후로 결정된 카트린에게 왕관을 직접 씌워주었다. 대관식 후에는 방기 주교좌 대성당에서 기념 미사를 거행했고, 미사 후에는 400명 정도가 참여하여 궁전 근처의 정원에서 열린 만찬과 무도회가 이어졌다.[18] 대관식 바로 다음날인 12월 5일에는 방기에서 경축 군사 퍼레이드를 열었는데, 여기에 참여한 병사들 역시 나폴레옹 1세 시대의 모습을 재현한 제복을 입었다. 이 군사 퍼레이드 후에는 농구 토너먼트 등 스포츠 행사들이 열렸다.

당연히 이에 대해 자국은 물론이고[19] 외신에서나 다른 나라, 자국 내에서도 미쳤다거나 에티오피아의 하일레 셀라시에를 대신해서 황제가 될려고 하냐는 식의 비웃는 반응이 많았기 때문에 외빈 초청은 보카사 1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일단 교황 비오 7세를 직접 파리까지 납치노트르담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뤘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는 달리[20] 교황 바오로 6세를 데려오는 것부터 실패했다. 당시 교황 대사 오리아노 퀼리치 대주교는 "교황께서는 연로하셔서 그리 먼 길은 못 가십니다"라고 보카사를 설득했고[21] 결국 방기 대교구장 조아심 은다옌 대주교와 교황 특사 도메니코 엔리치 대주교가 참석하는 선에서 마무리됐고, 이 때문에 보카사는 자신이 직접 왕관을 쓰는 방법을 택해야 했다.[22]

보카사는 군주제를 만들면 고국이 눈에 띌 것이고 세계의 존경을 받는 데 도움이 될 거라 믿어서 외국 정상들에게 자신의 위업을 직접 와서 보라는 듯이 총 2천 5백 명에게 대관식 초청장을 보냈다.[23] 그러나 이들 중 초청에 응한 사람은 기자 100명을 포함한 600명밖에 없었으며, 특히 외국 군주와 국가원수는 단 한 명도 오지 않았고,[24] 초청장을 받은 나라들은 그냥 주재 대사와 비교적 격이 떨어지는 인사들을 특사로 참석하게 했다. 그나마 모리셔스시우사구르 람굴람 총리와 모리타니모크타르 울드 다다 대통령은 영부인을 대신 보내줬으며, 리히텐슈타인에서는 엠마누엘 루이 공자 한 명을 특사로 보냈다. 과거 식민지배국이던 프랑스에서는 협력부 장관 로베르트 갤리(Robert Galley, 1921~2012)[25]와 대통령의 아프리카 담당 고문 르네 주르니아크를 특사로 보냈으며, 대한민국이용희 당시 통일원 장관을 특사로 보냈다. 물론 보카사는 다른 나라 국가원수들이 아무도 오지 않은 것에 대해 "그들이 나를 질투해서 그런 거다. 난 제국이 있지만 그들에겐 제국이 없거든.(Ils étaient jaloux de moi parce que j'avais un empire et pas eux)"이라는 말을 남겼다.

대관식에 쓰인 사치품 명단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았다.[26]
  • 6m 길이의 붉은 비단과 흰 모피, 표범 가죽으로 만든 뒤 금실로 태양과 별, 독수리를 새긴 후, 거기에 진주 78만 5천 개와 크리스탈 비즈 122만 개를 덧붙인 14만 5천 달러짜리 9m 길이의 예복.[27] 나폴레옹의 대관식 당시 제복을 수놓은 회사와 같은 회사에 특별 주문했고, 재단사 110명이 이 옷을 만드는 데에 동원되었다. 황후의 제복을 만드는 데에도 7만 2400달러나 들었다.
  • 진주로 자수가 짜진 신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신발로 기네스북에 등재될 정도였다.
  • 다이아몬드를 끼운 2m 길이의 순금 지팡이와 보석이 박힌 도금된 검.
  • 128면체로 세공된 80캐럿짜리 다이아몬드 1개를 포함한 엄청난 양의 보석으로 장식한 250만 달러짜리 순금 왕관. 엘리자베스 2세의 왕관인 성 에드워드 왕관에 영감을 받아서 만든 왕관의 상단은 진홍색의 비단 캐노피와 금으로 아프리카의 지도를 새긴 푸른 지구 모형으로 장식되었다. 이 왕관을 장식한 보석이 어느 정도로 많았냐면, 매 기록마다 이 왕관의 장식에 사용된 보석의 수치가 달라 정확한 추산이 불가능할 정도다.
  • 250만 달러를 들여 만든 나폴레옹의 독수리를 본떠 금을 도금한 2t짜리 청동 독수리 옥좌. 높이는 약 3.5m, 너비는 약 4.5m에 달했으며, 이 옥좌 제작에 장인 30명이 동원되었다[28].
  • 블랙 다이아몬드 반지. 다이아몬드에 아프리카 대륙을 새겼다. 참고로 보카사는 실제 가치가 당시 가치로 500달러[29] 정도인 이 반지에 대해 50만 달러를 청구한 다이아몬드 판매자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한다.
  • 대관식 초청 인사들을 위해 신분, 직업별 색깔을 지정해 제국 내에서 맞춤 제작한 수백 벌의 옷.
  • 대관식 후 할 만찬을 위해 유럽에서 공수해온 240t 이상의 신선한 식료품들과 1병에 최고 22만 달러까지 호가하는 명품중에서도 명품 와인인 1971년산 샤토 무통 로쉴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적포도주를 꾸준히 엄선해 생산하고 있는 '태양왕의 포도주' 라고 불리는 샤토 라피트 로쉴드 각각 4만 병, 모엣 & 샹동 샴페인, 조니워커 스윙, 시바스 리갈 각각 2만 4천 병.[30] 프랑스에서 요리사 200명을 초청해 왔다. 대관식 만찬은 이란캐비어(오르되브르, 캐비어 통은 요리사 2명이 날라야 했을 정도로 컸으며, 이 대관식을 위해 45kg의 캐비어를 수입했다.)를 시작으로 랍스터 페이스트리 롤(앙트레), 철갑상어 요리(생선), 그랜드 베니어 소스를 곁들인 영양고기(포유류), 푸아그라(조류), 대관식 케이크(디저트) 순으로 제공되었다. 대관식 케이크는 니스에서 특별히 제빵사를 공수해 만든, 초록색 아이싱으로 장식된 4피트(1.2m) 높이와 3피트(0.9m) 너비의 7층짜리 거대한 케이크였고, 제국의 문장과 독수리가 앉아 있는 해가 위에 있는 초콜릿 기둥들이 케이크를 돋보이게 했고, 케이크를 반으로 자르자 비둘기 여섯 마리가 날아올랐다.
  • 귀빈 접대용 은식기와 황제를 포함한 황실 가족들이 사용할 보석이 박힌 금식기 각각 1만 개
  • 황제 부부 앞으로 던져질 장미 꽃잎 450파운드, 튤립 25만 송이를 포함한 꽃 7톤
  • 대관식 다음 날로 예정된 퍼레이드에 쓸 도금 마차를 끌 벨기에산 백마 8마리.[31] 근위병들에게도 노르망디산 회색 말을 타고 황제의 마차를 호위하게 했다. 이 말들을 위해 병사 30명이 프랑스에 파견되어 수개월간 말 조련법을 수련받았다.
  • 같은 행사에 쓸 벤츠 신제품 60대. 중앙아프리카 제국이 내륙국이여서 카메룬의 항구로 운송한 후 비행기로 중앙아프리카 제국까지 운송해 운송비만 1대당 5천 달러로, 총 30만 달러가 나갔다. 보카사의 차는 흰색 가죽으로 되어 있는 데다가 전화, 샴페인이 있는 미니 바까지 설치된 메르세데스-벤츠 600이었다.
  • 프랑스의 작곡가에게 의뢰한 대관식 전용 행진곡과 대관식 만찬 후의 무도회에서 쓸 왈츠. 참고로 왼쪽 영상의 배경 음악이 '대관식 행진곡'이다.[32]
  • 프랑스의 시인에게 의뢰한 대관식 송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오늘날 위대한 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 어디인지 아느뇨?
프랑스의 그리스도교 정신,
고대 로마와 비잔티움이...
그곳은 바로 방기, 라코케트(la Coquette)라네.
클로비스 대왕의 후계자
그리스와 갈리아의 영웅들
샤를마뉴성왕 루이
보나파르트드골.
보카사,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프랑스의 가장 저명한 인물!
그의 흉상 앞에 엎드리세.
어디에서나 그의 호의를 축하하세.
새로운 보나파르트, 보카사
그의 위대한 도읍 방기
로마, 아테네, 스파르타는 일식으로,
그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 독일의 화가에게 의뢰한 실물 크기의 보카사의 공식 초상화 2점
  • 외국에서 공수한 불꽃놀이 도구. 불꽃놀이는 대관식 만찬 후 35분 동안 치러졌다.
  • 상술한 물품들을 나를 대형 수송기 22대. 모두 외국에서 임대한 것들이었다.
  • 경호를 위해 프랑스에서 데려온 헌병대들.

대관식에 쓸 장신구 제작에만 1977년 기준으로로 총 500만 달러가 들어갔으며, 대관식에 쓴 복장과 장신구의 디자인, 제작은 다 프랑스 본토에 있는 유명 디자이너들에게 맡겼다. 의상을 만든 디자이너들 중 피에르 가르뎅이 총괄했고 랑방에서 제작했다. 거기다가 대부분의 비용을 프랑스가 부담했기 때문에 중앙아프리카 제국은 프랑스에 막대한 빚까지 지었다. 여하튼 당시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언론은 이 대관식을 '식민주의의 사슬을 끊고 독립한 아프리카가 새시대를 맞이하여 선조들의 위대한 생활양식으로 복귀했음을 세계 만방에 고한 행사였으며 아프리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자화자찬했으며, 보카사 1세 황제에게는 '존엄하신 보카사 1세 황제 폐하, 평화의 사도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종, 중앙 아프리카의 황제이며 국군통수권자(His Imperial Majesty Bokassa the First, Apostle of Peace and Servant of Jesus Christ, Emperor and Marshal of Central Africa)'라는 길고 화려한 수식이 붙었다.[33]

보카사는 이 엽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호화스러운 대관식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 여론에 "위대한 역사는 희생 없이는 창조할 수 없다. 민중은 희생을 달게 받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보카사가 말했던 '위대한 역사'는 2023년 기준 취약국가지수는 뒤에서 8등, 2023년 기준 1인당 GDP 순위는 뒤에서 6등, 2021년 기준 인간개발지수 순위는 뒤에서 4등, 2022년 기준 세계기아지수 순위는 뒤에서 2등이라는 '비참한 역사'로 돌아왔다.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 편에서 독일이 성공한 이유로 부정부패가 비교적 적었던 것을 언급하며 어떤 나라의 왕이 서방 국가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았음에도 왕이 몽땅 다 자신의 비자금으로 착복하고 국민들은 굶어죽고 있음에도 왕 혼자 온갖 호강을 다하고 있는 것을 언급한 게 있는데 그 나라가 바로 장 베델 보카사의 중앙아프리카 제국이다.[34] 특히 그 아프리카 국왕이 위의 보카사 1세가 대관식 때 착용한 복장과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 빼박이다.

2.4.2. 폭정과 기행

중앙아프리카제국은 입헌군주국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가혹한 제정 통치와 괴상한 법안 제정을 밀어붙이는 등 국민들의 생활과 자유를 통제하는 등의 인권 탄압을 자행했으며, 황제 앞에서는 6보 앞에서 경배를 해야 하고 "아니오"라고 '불경하게' 말하는 것은 금지되었으며, 유럽 순방 중에도 갑자기 사라져 주차장에서 샤워를 하거나[35], 과잉 경호를 하는 등[36] 각종 기행으로 물의를 일으켰다. 보카사가 정적들을 악어 밥으로 던져주거나 측근을 처형한 뒤 그 시체를 요리해서 다른 측근들에게 먹이게 했다는 소문도 생겼다.[37]

보카사는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모든 시민들에게 여당이자 유일한 합법 정당인 흑아프리카사회개발운동(Black African Social Development Movement)의 당원이 돼야 하며, 모든 당원은 조직에 회비를 내야 한다는 칙령도 발표했는데, 이에 따라 회비를 못 낼 정도로 가난한 백성들은 강제 노동형에 처해졌다. 거기다 중앙아프리카 제국은 명목상으로는 입헌군주제를 내세웠으면서 실제로는 각료회의 위에 궁정고문회의를 두고, 황제가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등 사실상 전제군주제 체제가 되었다. 거기다가 대학교에서 헌법학·정치학·사회학을 가르치는 것조차 금지되었고, 심지어 '민주주의'와 '선거'라는 단어는 금지어가 되었고, 키스, 포옹, 악수와 같은 '미개한' 에티켓 역시 폐지되었다.

그리고 보카사는 왕위에 오른 후 많은 돈을 들여 300대가 넘는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며 수도를 드라이브하는 것을 즐겼고, 이 퍼레이드에 참여한 누군가가 사람을 치어 죽여도 고소, 처벌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

게다가 모든 신문은 폐지되었고, 유일하게 허용된 언론 매체인 국영 라디오 방송국 하나는 보카사와 관련된 뉴스와 '황제 폐하를 거스르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는 등의 취지의 황제를 찬미하는 내용만 방송할 수 있었으며, 황제의 이름을 딴 건물들이 무수히 지어진 것은 물론, 화폐를 넘어서 학생들의 연습장 표지에까지 황제의 얼굴이 인쇄되었다.

심지어 제국에서는 공화국 시절 헌법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호칭을 언급하는 것도 위법이 되었는데, 1978년 국제엠네스티 보고서에 1977년 8월에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죄로 학생 4명이 구속되었고, 심지어 그들의 선생님도 '그들이 이전에 파리에 갔을 때에 숙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사례가 언급되었다. 이들은 카메라로 촬영되며 변호사도 전혀 접견할 수 없는 재판을 받은 후 '국가 안보에 반하는 범죄'와 '보카사 황제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며, 물론 이들이 항소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또 보카사는 방기로부터 80km 떨어진 곳에 건립된 별장인 빌라 콜롱고(Villa Kolongo)의 정원의 우리의 문을 열고 사자나 악어를 풀어 죄수들을 살해하게 하기도 했는데, 어느 날에는 사자 조련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사자에게 그 조련사를 죽이라 했는데 사자가 말을 안 듣자 보카사는 이 조련사를 악어에게 던져버렸다. 그리고 프랑수아 보지제라는 대위는 1978년에 황제에게 '무례하게 군' 프랑스인 부사관을 폭행했다는 이유만으로 황제에 의해 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대관식 전인 1977년 7월 14일에 마이클 골드스미스(Michael Goldsmith, 1921~1990)라는 AP통신 특파원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요하네스버그의 AP통신 지국에 전달하자 보카사는 골드스미스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스파이라고 의심하고는 자신이 손수 '정의의 지팡이'[38]라는 이름을 붙인 상아로 덮인 흑단 셉터로 골드스미스의 이마를 가격한 후 두 아들, 보좌관과 같이 골드스미스를 짓밟은 뒤 수도 소재의 응가라그바 감옥(Ngaragba Central Prison)에 1달 동안 감금하고 고문했다.[39]

이 때문에 당시 서방 언론들은 보카사를 우간다이디 아민, 에티오피아의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에 비견될 만한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자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고, 보카사가 반대파들을 직접 고문했으며 심지어 인육을 즐겨먹었다는 괴소문도 떠돌았다.[40]

[보카사의 식인과 관련된 소문들]
* 베트남에서 용감해지기 위해 적군의 심장과 간을 먹었다
  • 첫 여자친구를 살해한 뒤 잡아먹고는 이후 새 여자친구가 생길 때마다 옛 여자친구의 인육을 대접했다
  • 대관식 만찬을 위해 죄수들을 처형한 후 요리해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 해외 사절들에게 인육을 대접했다
  • 정적을 요리해 정적의 가족들에게 먹게 했다
  • 내각 인사들의 점심 식사를 대접하기 위해 장관 한 명을 처형한 후 요리해 식사로 대접하고는 식사가 끝난 후에 그 고기의 정체를 밝혔다
  • 자식들이 인육을 먹으면 자기보다 강해질 것 같아 자식들에게 그가 자주 먹는 것을 인육이 아닌 것처럼 속인 후 먹는 것을 막았다
  • 인육을 정력제로 쓰려고 했다
  • 직업에 따른 육질의 차이가 궁금해서 다양한 직업을 가진 백성들의 인육을 먹었다
  • 여고생의 장기를 먹고는 이를 외교 만찬 손님들에게 제공했다
  • 인육을 보관하기 위한 특제 통조림을 만든 뒤 그것을 해외를 순방할 때에도 가져갔다
  • 매 끼마다 인육을 먹었다
  • 어린아이들의 고기를 진미로 여겼기에 반정부 시위 때 자신이 살해한 어린이들의 시체를 요리해서 먹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놨다

만행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1978년 5월에 보카사는 새로운 지위로 파리에서 열린 프랑스-아프리카 정상회담에 참석했는데, 왕위에 오른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자리가 할당되었으나, 보카사는 명색이 황제라는 사람이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세네갈 대통령과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코트디부아르 대통령 사이에 앉으며 황제로도 취급받지 못하며 단순 대통령으로 취급되었고, 오직 오마르 봉고 가봉 대통령 1명만이 보카사를 '폐하'라고 부르는 굴욕을 당했다.

2.4.3. 부정부패와 경제 파탄

대관식을 제외하고 봐도 보카사는 매우 부패한 사람이었는데, 보카사는 재무부를 은행의 개인 계좌처럼 여기며 재무부 장관에게 매주 5만 5000달러(2024년 환율로는 약 23.5만 달러)의 정부 자금을 현금으로 직접 건내게 한 후 이렇게 횡령한 돈을 후술할 사치 행각에 썼으며, 아프리카의 국가원수들로부터 뇌물을 수수받기도 했고, 개인 용도로 국고에서 빼돌린 돈은 대관식에서 쓴 돈을 제외하고도 최소치가 1979년 당시 제국의 GDP(7.1억 달러)의 24.2% 정도였던 1억 7천만 달러(2024년 환율로는 약 7억 2700만 달러)에 육박했다.

보카사는 또한 공공 시설 건립을 위한 자금들과 제국에 매장된 다이아몬드를 팔아 얻은 수익들, 외국의 원조들을 횡령해 스위스 등 유럽의 계좌에 비자금으로 보관하기까지 했고, 이렇게 보카사가 해외에 은닉한 비자금은 당대 가치로만 1천만 달러(2023년 환율로는 약 4270만 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이렇게 횡령한 돈들을 가지고 보카사는 철도도 없고[41] 포장 도로는 180km밖에 안 되는 데다가 의사도 12명[42][43]밖에 없는 가난한 나라의 통치자이면서 프랑스에 6채의 별장을 두었고, 금으로 도금된 침대에서 자며 파리에서 직접 케이크를 주문해 먹는 등의 호화 생활을 누렸으며, 자식들을 스위스의 기숙 학교에다가 유학을 보낸 것도 모자라 많은 학비까지 대주었다고 한다.

보카사는 제국 내에는 두 개의 궁전을 뒀는데 하나는 수도 방기의 강둑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방기에서 6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렝고 궁전(Palais de Berengo)이었다고 한다. 베렝고 궁전은 보카사의 고향인 보방기 근처에 위치해 있었고,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진정한 정치적 수도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 궁전들은 수백 헥타르에 달하는 매우 고급스러운 궁전이었던 데다가 작은 공항도 내부에 지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던 판이니 제국의 산업 및 농업 생산, 수출은 날이 갈수록 줄었지만, 반대로 무역 적자와 외채는 크게 늘어[44] 제국의 경제는 오히려 식민지 시절보다도 악화되었고, 따라서 중앙아프리카 제국은 세계 최빈국 25개국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다.

2.4.4. 방기 대학살(Bangui massac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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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살의 도화선이 된 문제의 교복. 왼쪽이 여학생용 교복, 오른쪽은 남학생용 교복. 출처

1977년에 제국의 학생들의 시험 결과는 평소보다 좋지 않게 나왔다는데, 이에 보카사는 학생들의 실력 저하가 학생들의 게으름과 규율 부족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마침 보카사는 이전에 중국 등의 공산권 국가들을 순방할 때 인민복을 입은 학생들의 행렬에 큰 인상을 받았다. 군인 출신의 보카사는 통일된 디자인의 학생용 옷이 '질서와 규율'을 불러와 학교의 목적성과 방향성을 회복시켜주리라 확신하여 위와 같이 자신과 황후의 모습이 들어간 교복을 손수 디자인하였다. 보카사는 이 교복이 학생들을 똑똑하게 보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의 '천년 제국'을 굳건히 하고 학생들을 황제의 충성스러운 부하들로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고 한다.

이 교복은 대관식에 참여했던 황제의 아내이자 황태자 장베델 보카사 2세(Jean-Bédel Bokassa Jr., 1973~)의 어머니였던 카트린 뎅기아데가 지분을 가지던 프랑스의 섬유 기업인 CIOT에서 만들어졌고 보카사가 직접 소유한 상점에서 판매되었다. 거기다 교복의 가격마저 말도 안 되는 수준으로 비쌌다. 1979년 가치로만 무려 한 벌에 165달러나 되어 당시 제국의 백성들의 1인당 평균 소득[45]절반을 넘었다. 2024년 환율로 환산하면 무려 약 705.3달러, 한화로 환산하면 대략적으로 약 95만 6천 원에 달했다.[46][47]

1978년 2월 2일에는 "1978년 10월 1일부터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제국의 모든 학생들은 황제께서 친히 고안하신 교복을 입어야 한다." 하는 교육부의 지침이 발표되었는데, 당연히 맨발로 학교에 다녀야 했던 최빈국의 가난한 학생들은 반년치 봉급으로도 못 살 정도로 비싼 교복을 사실상 강제로 구매해야 한다는 것에 반발하였고, 실제로 교복들은 제대로 팔리지도 않아 가게 진열대에 보관되던 보카사의 교복들에는 먼지가 쌓였을 정도였으며, 많은 학생들은 황제의 교복을 입지 않고 학교에 갔다고 한다. 그리고 1978년 10월에 교복 의무화가 시작될 무렵엔 공무원들의 월급은 두 달째 밀린 데다가 어느 누구도 자식들에게 교복을 줄 여유도 없었다.

자신의 교복이 팔리지 않자 보카사는 분노하여 1979년 1월에 '교복을 구매하지 않거나, 전용 교복을 착용 하지 않고 교육시설에 들어 온다면 그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퇴학을 당할 것이다'는 새로운 규정을 발표하여 교복을 사지 않은 학생들을 학교에 가지 못하게 했다. 이 황당한 조치로 인해 1월 15일부터 학생들이 교실에서 쫓겨나는 일들이 발생하자, 이에 반발한 3천여명 정도의 학생들은 1979년 1월 18일에 수도 방기에서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였는데, 실업자들과 월급을 받지 못한 노동자들도 이 시위에 동참하며 많은 교복 상점들과 교복 공장 2곳을 파괴했으며, "우리의 부모님께 돈을 지급하라", "봉건제국 타도하라", "황제를 처형하라"는 구호까지 외치며 보카사의 동상을 공격하는 등 사실상의 반제정 시위가 되었다.

보카사는 먼저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을 돕기 위해 2개 군부대를 시위 현장에 투입하도록 지시했고,[48] 이 군부대들은 시위대를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시위대를 폭행하는 방식으로 진압하고 있었지만, 이들은 진압이 충분하지 않다며 보카사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보카사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질서를 회복하라', '문제가 지속되는 지역들은 불태워도 좋다'며 자신의 부족인 무바카족과 외국인 용병으로 구성된 황실 근위대에게 시위를 진압하도록 지시한 것은 물론, 심지어 반제정 시위 진압을 위해 자이르모부투 세세 세코에게 군대 파견을 요구했다.[49] 보카사는 이때 군인들에게 실탄을 직접 분배해 줬는데, 이는 1976년의 쿠데타 미수 사건 이후 군대가 총에 실탄을 장전하는 것을 금지당했기 때문이었다.

보카사는 현장에서 군복을 입고는 직접 현장에서 진압을 지휘했는데, 이때 제국에 들어온 자이르의 군대(도합 200~300명)와 황실 근위대는 물대포와 최루탄, 수류탄을 사용했고, 기관총을 장착한 장갑차와 소련제 탱크 2대도 동원했으며, 심지어 보카사는 직접 진압군들에게 시위대를 향해 공포탄이 아닌 실탄을 장전한 기관총을 발포하도록 명령하여 1월 20일까지 단 이틀 동안 8세에서 15세 남짓한 학생들을 무려 50~150여 명이나 사살했다. 심지어 살아남은 시위자가 말하기를 시위를 해산하라는 경고의 말 한 마디도 없이 군인들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무차별 발포를 했다. 여기에 시위에 참여한 아이들의 부모들마저 연행되어 재판에 넘겨지고 구금되었다.

시위 진압이 완료된 후에는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통행금지령과 계엄령이 선포되었으며, 황제는 자기 생각보다 진압이 폭력적이었다며 진압의 책임을 전부 장교들에게 떠넘겨서 진압에 참여한 장교들을 해고한 후 '이 시위에서 6명이 죽고 60명이 다쳤다'는 거짓 발표를 했으며, 백성들의 반발을 인지했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교복 규정을 폐지하고는 자신의 58세 생일인 1979년 2월 22일에 수감된 학생들을 사면했다.

그러나 동년 3월에 반제정 인사들이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된 후에 반제정 책자를 가진 학생들이 체포되었고, 4월 12일에 황제가 모든 학교를 폐쇄하고 대학에 군대를 투입하자, 이에 반발한 6~26세 정도인 학생들은 방기에서 1979년 4월 17일에 교회에서 집회를 연 것을 시작으로 이전보다 더 큰 규모의 대규모 반제정 시위를 벌였고, 그날 저녁에 통행금지가 선포되며 보카사 1세는 군대에게 이 시위도 진압하라는 지시를 내리게 된다. 이 지시가 내려진 후 사흘 동안 방기에서는 과거의 식민지배국에서 일어난 1961년 파리 학살과 1년 뒤에 일어날 1980년 광주 학살도 거뜬히 뛰어넘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폭동적 시위진압이 벌어졌다.

무력 진압은 규모뿐만 아니라 방법도 엄청나게 잔혹했는데, 먼저 진압에 동원된 군인들과 경찰들은 트럭을 타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찾을 수 있는 모든 연령대의 학생들을' 체포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진압군은 단지 나이가 어린 미성년자라는 이유만으로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고, 시위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코흘리개 아이들까지 거리나 집에서 강제로 끌고 가 군용 트럭에 던진 후 군홧발로 짓밟거나 곤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또 군인들은 적십자사를 습격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진압군들은 일상처럼 거리를 걷고 있는 학생들과 엄마 심부름을 하러 잠깐 외출한 어린이에게까지 트럭에 장착된 중기관총의 실탄을 난사하거나 개머리판과 총검, 못이 박힌 곤봉, 채찍으로 폭행하는 방식으로 죽였으며, 군인 4~5명이 어린이 하나에게 달라붙어 몽둥이로 무자비한 구타를 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어느 어린이는 단지 황제의 차에 돌을 던졌다는 이유만으로 황제의 근위병들에게 투석형을 당해 죽기도 했다. 그 결과 4월 17일부터 19일까지 단 이틀 동안 현장에서만 학생 100여 명을 포함한 민간인들이 무려 400여 명이나 사망했다.[50] 당시 현장에서 사망한 사람들 중에는 겨우 8살[51] 정도밖에 안 된 아이들도 있었다.

이 때 수감된 학생들은 대부분 12~16세 정도였지만, 더 어린 학생들도 수감되었으며, 심지어 수감된 아이들 중에는 겨우 6~8살 정도도 안 된 아이들까지 있었다. 이들이 연행된 후 수감된 감옥의 환경도 극히 열악하였다. 특히 학생들을 창문도 없는 작은 감방에 강제로 밀어넣어 20명이 질식사하기도 했고,[52] 교도관들은 학생들을 강제로 나체로 만든 후에 경찰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했으며, 어느 고등학생이 증언한 바로는 자신과 같은 감방에 있던 40명 이상의 수감자 중 생존한 사람은 자신을 포함한 단 3명밖에 없었다고 하며, 심지어 또 다른 학생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감옥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는 가장 작고 어린 아이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카사는 4월 19일 밤에 감옥에 방문한 뒤 다음날인 4월 20일까지 약 500명이 이송되어 수감되었던 응가라그바 감옥에 머무르며 다음과 같은 악행들을 저질렀다. 매우 끔찍한 묘사들이 많으니 읽을 때 주의를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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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카사 1세 황제는 만취한 상태로 4월 19일 밤 8시에 친히 교도소에 왕림하여 '교훈을 주겠다'는 명목 하에 본인이 직접 '정의의 지팡이'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이들의 등을 내리쳐 죽인 후 교도관들에게 이와 같은 행동을 계속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은 물론 학생 39명에게는 직접 리볼버를 쏘기도 했다. 심지어 황제에게 '정의의 지팡이'로 뒤통수를 맞아 죽은 아이들도 최소 5명이나 있었다. 그리고 보카사는 4월 20일 새벽 12시에 돌아와서 다시 학생들을 처형했고, 새벽 3시에도 또다시 돌아와 학생 처형을 이어나갔다. 보카사는 이 교도소에서 아이들을 죽이며
너희들 중 미래에 내가 황제로 군림하는 것을 누가 반대할 수 있는지 지켜봐라!
는 막말을 남겼으며, 어느 아이는
너가 날 사형하겠다 했지?
이제는 내가 널 처형할 거다.
라는 황제의 말을 듣자마자 황제에게 살해당했다. 그리고 보카사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은 학생들을 감방에서 끌어낸 후 기관총을 난사하거나 사슬로 목을 조르기도 했다.

심지어 프랑스의 언론인 베르나르 루바[53]가 전한 에피소드는 그야말로 일반인들의 상상을 거뜬히 초월하는 수준이다. 보카사는 '남자들 간의 대화'라며 4월 20일 아침에 6세에서 20세 정도의 수감된 학생들 약 30명을 트럭에 싣고는 베렝고에 있는 자신의 궁전으로 옮긴 후 궁전의 안뜰에 눕히게 한 뒤, 트럭 운전사에게 트럭을 운전하여 이 '살아있는 카펫' 위를 지나가도록 전화로 명령했다. 당연히 트럭 운전사는 이 명령을 거부했고, 이에 술에 취해 있던 보카사는 자신이 직접 트럭의 운전대를 잡아 트럭을 앞뒤로 움직여 '마지막 외침이 멈출 때까지' 이 학생들을 치어 죽였다. 심지어 보카사는 트럭에서 내린 후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아이들마저 봐주지 않고 모조리 '정의의 지팡이'로 때려 죽였다.

그가 이렇게 교도소에서 이틀 밤을 보낸 결과 당시 교도소에 있던 총 180명의 학생들 중 무려 153명이 사망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보카사가 직접 살해했다. 끝까지 생존한 학생은 겨우 27명밖에 없었다. 이 교도소에서 살해된 학생들과 어린이들의 시체들은 강에 던져지거나 감옥에 암매장되거나 불에 태워진 것도 모자라 보카사가 기르던 사자와 호랑이의 먹이가 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상술한 것처럼 보카사가 먹을 인육으로 보관하기 위해 냉장고에 넣어졌다는 소문도 있다.

그러고도 1979년 4월 21일에 보카사 1세는 라디오로 중계된 연설에서 뻔뻔하게도 1979년 4월 20일을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평화의 날'로 선포했으며, 이 시위의 사망자들이 황제 체제에 반기를 든 '나이든' 학생들이라고 주장하며 스스로를 "조국의 미래인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보호자"라고 자칭했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가 나를 '아빠(Papa)'라고 부른다."고 하며 투옥된 '반란학생'들을 석방하겠다고 선언했고, 실제로 당시 살아남았던 학생들 중 일부는 이 조치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심지어 보카사는 여기서 '청소년은 관습법과 형법을 위반했을 때를 제외하면 체포와 구금이 불가능하다' 는 내용으로 중앙아프리카 청소년 보호를 위한 조례까지 발표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 피의 학살은 제국의 모든 백성들을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이 참극이 일어난 1979년은 UN에서 세계 아동의 해라고 선포한 해이기도 했으니 수많은 어린이들을 살해한 보카사의 악행이 전세계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적인 비난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54] 결국 앰네스티는 1979년 5월 14일에 보카사의 학생 학살을 폭로하게 되었고, 집권 초부터 보카사와 친했던 국방위원 겸 프랑스 주재 중앙아프리카 대사였던 실베스트르 방기(Sylvestre Bangui, 1934~1996)도 이 학살에 경악하며 1979년 5월 22일에 파리에서 직접 기자회견까지 열며 대사직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방기는 아예 동년 9월 11일[55]에 파리에서 '우방기 공화국'이라는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하며 스스로가 이 임시정부의 수장이 되기까지 한다.

당연히 이 학살 소식을 들은 미국과 프랑스 등의 세계 각국은 중앙아프리카 제국에 대한 지원을 끊게 되었다. 이에 대해 보카사는 '나는 기독교인이고, 많은 아이들의 아버지라 아이들을 해칠 수가 없다'고 주장했고, 1979년 6월 1일에 프랑스의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도 '당시 시위 진압은 법과 질서를 유지하려고 이어진 것이 전부다.', '외국인 반체제 인사들의 선동이 없었다면 이 시위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 '엠네스티가 학생들의 거짓말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사건의 심각성을 과장했다' 같은 망언을 남기며 사태를 수습하려고 했지만, 당연히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폭로 이후 르완다키갈리에서 여러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 사건에 대해 조사위원회를 만들어 6월 12일부터 22일까지 방기에 온다고 하자 보카사는 사과는커녕 피해자들의 유족들을 방기에서 쫓아낸 후 그들에게 돈을 주며 입막음을 시도한 것은 물론이고 조사단들 앞에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데다가 비굴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의를 갖추며 '지난 1월의 소요로 진압군 중 13명이 죽고 60명이 다쳤으며, '폭도'들 중에서는 60명이 다쳤다. 그게 전부다. 그 상황은 '진정한 전쟁'과도 같았다. 내가 군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위를 진압하도록 한 덕분에 제국에는 질서와 평화가 돌아왔다'며 자신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심지어 보카사는 2년 전에 이혼한 자신의 프랑스인 아내가 자신에게 분노하여 자신에 대한 '가공할 만한' 거짓말을 앰네스티와 프랑스 언론에 퍼뜨려 복수를 하고자 했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이 조사관들은 물론, 주요 외교 및 정치 인사들이 모인 공개 회의에서 했다고 하며, 보카사가 독립적으로 조직한 제국의 조사 위원회는 '4월의 시위에서는 학생 시위에 말려든 경찰들이 사망한 것을 제외하면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까지 했다. 물론 조사단들은 여러 학생들과 교사들, 종교인들과 인터뷰를 한 후[56] 황제의 혐의 부인은 전부 거짓말이며, 오히려 황제가 직접적으로 아동 살해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확인했고,[57] 이후 정확성을 더욱 높이기 위해 파리에 거주하던 제국의 고위층들과 망명자들을 직접 찾아가서 인터뷰한 후 런던의 엠네스티 관계자들과 서신을 공유하기까지 했으며,[58] 이 학살에 대한 모순되는 증언들을 걸러낸 후 1979년 7월 초에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완성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보카사는 1979년 7월 초에 제국에 있는 반제정 단체들이 베냉의 수도 코토누에서 통합위원회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자 기겁하여 대관식에 쓴 사치품들을 숨긴 후 비행기를 보내 제국의 수도를 폭격한 다음 자신의 가족과 장관들을 모두 죽이고 궁전에서 홀로 살아남겠다는 계획까지 세웠지만, 보카사는 죽는 것이 두려웠던 데다가 아직 더 살고 싶었기에 계획을 포기했다고 한다. 이후 마음을 가다듬은 보카사는 이처럼 '흐린' 정치상황이 얼마 안 있어 '맑음'으로 바뀌어 '비바람'이 온 뒤에도 계속해서 자신이 황제로서 제국을 다스리리라는 환상을 품기도 했다. 자신의 만행을 어느 정도 인지했는지 언젠가는 전복될까 매우 두려워해서 언제든지 쉽게 탈출할 수 있도록 베렝고 궁전에 많은 재산과 사치품을 보관해뒀다고 한다.

2.5. 황제에서 평민이 되다

이 무렵 보카사 정권을 암묵적으로 지원했던 프랑스 정부도 보카사가 너무하다고 생각했는지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특사 르네 주르니아크(René Journiac, 1921~1980)를 보내서 선정을 베풀라고 했다. 그러나 보카사 1세는
감히 일개 대통령 주제에 어디 천하의 지배자 보카사 1세 황제에게 대드는 건가!
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며 주르니아크에게 달려든 후 지팡이로 머리를 직접 두들겨 팬 후 추방시켰다.[59]

당연히 이런 보카사 1세의 안하무인한 태도에 분노한 프랑스 정부는 식량지원을 제외한 제국에 대한 지원을 완전히 끊은 후, 1979년 9월 20일에 다코를 지지하던 세력들의 비밀 협조를 받아 방기 공항에 프랑스군 특수부대 제1해병공수연대를 파견하는 '바라쿠다 작전' 을 개시했고, 기회를 얻은 다코의 반군이 들고 일어나며 군대도 보카사를 배신하면서 제국을 무너뜨렸다. 바라쿠다 작전은 단 한 발의 사격도 없이 무혈로 끝났으며, 다코는 이튿날 방송을 통해 제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복귀한다고 발표했고 동시에 대통령에 취임해 정권을 장악했다. 이렇게 보카사의 '천년 제국'은 1대 3년[60]이라는 짧디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파일:폭군의 몰락.jpg
군중들에게 조롱당하는 보카사 1세의 동상.

보카사 1세가 쫓겨난 직후에 거의 축제 분위기가 된 방기에서 보카사의 초상화는 백성들에게 짓밟혔고, 대관식에도 쓰였던 보카사의 옥좌는 상술한 것처럼 모두 뜯겨나갔고, 방기에 건립된 보카사의 거대한 동상은 파괴되어 거리로 끌려나가 위의 사진처럼 군중들의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빌라 콜롱고에서는 냉장고에서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61] 연못에는 악어에게 먹힌 30여 명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프랑스군의 침투 당시 리비아를 국빈 방문하고 있었던 보카사는 베렝고 궁전에 둔 귀중품들을 챙기지도 못한 채 곧 코트디부아르로 도망쳐 체류했는데, 여기에서 보카사는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의 도움으로 대통령궁에 기거하며 매달 10만 프랑의 연금을 지급받았으나, 보카사는 그 돈을 며칠 만에 다 써버릴 정도로 사치스럽게 살았으며, 어느 날에는 우체국에 갔을 때 자신을 알아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을 보고는 갑자기 지갑을 열고는 사람들에게 돈을 뿌리는 등의 기행을 선보였고, 결국 우푸에부아니는 보카사에게 토요타 크레시다를 준 채 서민 주택가로 쫓아냈으며, 보카사의 난폭함을 눈치채고는 국가 행사에 초청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보카사는 1983년 11월 26일에 수십 명의 용병을 이끌고 비행기에 타서 중앙아프리카로 날아가 빼앗긴 왕좌를 다시 되찾으려고 했다. 물론 우푸에부아니는 비행기의 이륙을 허용하지 않았고, 오히려 보카사 일가를 해외로 쫓아냈다.

한편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법원은 1980년 12월 19일에 궐석재판으로 국가 재산 절도, 아동 학살, 식인 혐의로 보카사에게 사형을 선고하여 보카사에게 국제 영장을 발부하고 그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도록 명령했고, 프랑스에도 프랑스에 있는 보카사의 자산을 동결할 것을 요구했다.

망명지에서 또다시 쫓겨난 보카사는 프랑스 정부의 허가를 받아 1983년에 프랑스로 망명하여 10명의 자식들, 내연녀들과 함께 파리 서쪽의 성에서 가택 연금 상황에서 살게 된다. 프랑스에 살던 시절에 이웃들의 증언에 따르면 보카사는 '가장 매력적인 매너를 가진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었으며, 그의 자식들을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망명 중에도 자신에게 생활비로 지급되던 군인 연금(당시 가치로 1개월에 5,998프랑, 1,000달러 가량)이 너무 적다고 불평하면서[62] 이전에 프랑스 법원에 의해 박탈되었던 자신의 프랑스 시민권을 요구했고,[63] 1985년에는 자신과 프랑스 정부 사이의 관계를 과장되게 서술한 '나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출판하려고 했다가 프랑스 법원에 의해 출판 금지 처분을 당했다.[64]

보카사의 자서전은 결국 출판되지 못했지만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에서 보카사와 친분이 있었던 정치인들은 대부분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특히 1979년 10월 10일에는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데다가 보카사가 절친이라고 언급했던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이 재무부 장관 시절이던 1973년 4월에 보카사에게서 당시 가치로 25만 달러 정도였던[65] 30캐럿 정도의 다이아몬드 판을 수수받았고, 이후에도 보카사가 지스카르데스탱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최소 3차례나 더 다이아몬드를 줬다는 것이 발각되어 망신을 당하고 '추악한 독재자와 놀아난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워져 1981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경쟁 후보인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패배하고 정권을 넘겨줘야 했다.

결국 프랑스에서도 보카사에 대한 망명 허용이 비판받는 등 지내기가 영 껄끄러워지자 1986년 10월 23일에 사실상의 추방 형식으로 귀국했다. 이때 보카사는 변장을 한 채 비행기에 탑승하여 당시 가장 사이가 좋던 아내 아세마(Assema)와 자녀 5명과 함께 고국으로 돌아와 옛 부하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으나, 비행기에서 스튜어디스가 보카사를 알아보고는 이를 기장에게 알렸고, 보카사는 고국에 착륙하자마자 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수도의 가벨라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보카사는 1986년 12월 15일부터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이 재판은 아프리카 역사상 최초의 전직 독재자에 대한 재판이었다고 한다. 이 재판에서 보카사는 자신의 모든 혐의를 부인했고, 자신의 집권 하의 악행들의 책임을 전직 내각과 군대에게 돌리며 '나는 성인(聖人)이 아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라는 말로 자신을 변호했다. 보카사는 재판 과정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누구에게나 고문이나 죽음을 명령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궁전에 시체를 보관한 적도 없고, 아이들을 때려 죽인 적도 없고, 인육을 먹은 적도 없다. 그러나 그는 일부 사람들의 체포와 구금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인정한다.' '내 혐의는 내 정치적 반대자들에 의해 퍼진 소문이나 내 명령 없이 독단적으로 행동한 열성적인 부하들의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뻔뻔스럽게 말했다.[66] 1987년 3월 15일자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기사

1987년 6월 12일에 보카사는 14개 혐의 중 13개 혐의가 인정되어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보카사의 요리사[67] 필리프 링기사(Philippe Linguissa) 등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증언했던 식인 행위 하나만은 증거 불충분으로 기각되었다.[68] 여기서 법원은 보카사가 명령하거나 직접 저지른 것으로 알려진 살인 혐의 중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확인된 살인 행각은 20건에 달한다고 인정하며 그 20명의 유족에게 17,000달러를 지불하도록 명령했으며, 결국 장베델 보카사는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사형을 선고받은 보카사는 조용히 흐느껴 울었다고 하며, 보카사의 변호사들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헌법은 전직 국가원수를 반역죄로만 기소할 수 있다'며 항소를 했지만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법원은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당시 두 번째 쿠데타를 일으켜 다코를 축출하고 정권을 잡고 있던 앙드레 콜링바 대통령은 이 판결에 반대해 1988년 2월 29일에 보카사를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고 이듬해에 다시 20년형으로 추가 감형했다. 그리고 1993년에 콜링바가 자유 선거에서 패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자 마지막 대통령 권한으로 보카사에게 특별 사면령을 내렸고, 보카사는 1993년 8월 1일에 석방된 후 '감옥에서 신을 찾았다'는 말을 남기고 방기에 있는 빌라 나세르(Villa Nasser)에 가택연금된다.

2.6. 최후

이후 보카사는 이 폐허가 된 대저택에서 20명의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비교적 조용하고 검소하게[69] 여생을 보냈고, 죽기 1년 전인 1995년 6월 8일에 이탈리아의 기자 리카르도 오리지오(Riccardo Orizio, 1961~)와 한 인터뷰에서 '아리엘 샤론도 학살을 용서받았는데 나는 왜 용서받지 못하는가? 내가 아프리카인이라서 그런가?'[70] 라는 취지의 궤변을 남겼어도 자신이 직접 사람을 죽였던 것만큼은 인정했지만, 식인 소문은 '이 루머는 나를 파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멋지게 장식된 프랑스 장교가 식인종일 수 있다고 정말로 믿는가?'며 전면 부인했다.

1996년 11월 2일에 장베델 보카사는 향년 75세의 나이로 심장마비사망한 후 베렝고 궁전에 묻혔는데,[71] 죽기 얼마 전에도 자신이 1970년에 바티칸에 방문했을 때 교황 바오로 6세가 자신을 비밀리에 접견하여 13번째 사도로 세례를 받았다는 발언을 남겨 구설수에 올랐다고 한다.

이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된 프랑수아 보지제는 보카사가 '인류를 위해 많은 것을 주었다'고 주장하며 '모든 사람이 위대한 건설자로 인정하는 나라의 아들'이라고 칭하며 2010년 12월 1일에 보카사에 대한 복권을 발표하게 되었다.

여하튼 초호화 황제 대관식에 쓴 엄청난 돈과 그 이후에 자행된 학정, 그리고 후대에 발생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내전을 위시한 고질적인 정치 불안으로 인해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은 다이아몬드, 구리, 등 풍부한 광물 자원이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세계구급 최빈국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한편 보카사의 아들 중 한 명인 장세르주 보카사(Jean-Serge Bokassa, 1972~)는 2005~2011년 음바이키 지역의 국회의원을 역임한 후 2011~2013년 청소년체육문화부 장관, 2016~2018년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20년 대선에도 출마하려 했지만 출마를 포기했다.

3. 사생활

보카사의 정식 부인은 차드 출신 여성인 카트린 뎅기아데(Catherine Denguiadé, 1949~)로, 황제의 조카딸이었다. 15살이던 1964년에 군인이던 보카사가 거리에서 보고 빠진 후 군인을 동원해 납치한 후, 부모의 허락을 겨우겨우 받아내어 1965년 6월에 결혼하고는 보카사와의 관계에서 총 7명의 자식을 낳았다.

보카사는 그녀에 광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외출도 막아 궁에 사실상 유폐시켰고, 그 결과 카트린은 영화관도 못 가게 될 정도로 폐소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나마 양심은 있었는지 보카사는 카트린이 크리스마스 기간만큼은 파리 인근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자유롭게 보내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때 카트린은 샹젤리제의 '모든 매장을 한 군데도 빠트리지 않고 순례할' 정도로 최고급 명품 쇼핑을 즐겼고,[72] 하루에 10만 프랑(약 2600만 원) 이상의 금액을 쇼핑에 쓴 적도 있었다.

1979년에 쿠데타로 남편이 축출될 당시 카트린은 파리에 있어서 쿠데타를 면할 수 있었는데, 카트린은 이 쿠데타가 벌어진 것이 억압적인 남편에 대한 탈출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남편의 망명지인 코트디부아르에서 보카사를 만나 몇 주간 같이 지내다가 남편의 폭력성 때문에 신경쇠약 직전의 상황에 몰리게 되었고, 결국 코트디부아르 대통령의 영부인에게 허락을 받은 후에 스위스로 망명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보카사는 그녀에 대한 집착을 못 버린 나머지 스위스에 있는 아내에게 끊임없이 협박성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보카사는 사생활이 매우 난잡했는데, 실제로 보카사는 자기가 제정한 일부다처제 폐지 법안을 버리고 17명의 아내(카트린도 포함)와 공식적으로만 62명의 자녀를 두었다. 보카사의 아내들은 국적도 다양해서 자국인은 물론이고 대만인, 프랑스인, 베트남인, 나이트클럽 댄서 출신의 루마니아인 등이 있었다. 그리고 보카사의 자식의 수는 77명이라는 설도 있고, 심지어는 100명이 넘는다는 말도 있는데, 확실한 것은 보카사 본인도 자기 자식이 정확히 몇 명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만인 아내의 경우, 1968년에 보카사는 대만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호텔에서 투숙하던 중에 자기보다 29살이나 어린 18살 대만 소녀인 린비춘(Lín Bìchún, 林必純)[73]을 만나게 됐고, 첫눈에 반하여 프러포즈를 한 후 성대한 결혼식도 올리며 2년간 결혼생활을 하며 2명의 자식도 남겼다. 하지만 보카사는 이미 8명의 부인과 첩이 있었으며, 린비춘은 남편의 폭력성과 '그녀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에 자식들을 남겨놓고 모국으로 도망치게 되었다.참고자료 심지어 1973년 7월에는 카트린을 감시하기 위해 운전사를 고용했는데, 그 운전사가 카트린이 다른 남자, 그것도 보카사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보고하지 않자, 이 사실을 알아챈 보카사는 극도로 분노한 나머지 그 운전사를 지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해 때려 죽였다.[74]

게다가 1974년 4월 방기의 한 호텔 침실에서 북부 프랑스 출신인 브리제트 미루(Brigette Miroux)의 목 졸린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프랑스의 신문이 그녀가 보카사의 호스티스였고 보카사가 그녀의 살인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보도하자, 보카사는 프랑스 신문의 수입을 금지한 후 방기에 위치한 AFP 에이전시 본사를 장악했다.

3.1. 숨겨진 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인 1953년 1월 30일에 베트남에서 보카사는 응우옌 띠 휴(Nguyễn Thị Huệ)라는 17살 베트남인 소녀와 결혼해 1953년에 마르틴(Martine)이라는 딸을 낳았지만, 보카사는 나중에 베트남에 또 다른 근무를 위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아내와 아이를 두고 베트남을 떠났다.

이후 대통령이 된 보카사는 남베트남 정부에 연락해 프랑스 시민으로 등록된 딸 마르틴을 1970년 11월 26일에 찾고 아버지의 나라에 오게 했지만, 이 딸은 사실 프랑스 정부가 보카사를 속이기 위해 조작한 가짜였기에 보카사는 가짜 마르틴을 감금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베트남의 시멘트 공장에서 일하던 진짜 마르틴이 발견되어 보카사의 50살 생일이던 1971년에 보카사의 가족에 합류하게 된다. 이 소식은 당시 한국에서도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을 정도로 국제적인 화제를 낳았다.

보카사는 가짜 마르틴에 대한 처벌도 취소하고 똑같은 딸로 대했는데, 진짜 마르틴은 데데보데(Dèdèvodè)라는 의사와, 가짜 마르틴은 피델 오보루(Fidel Obrou)라는 보카사의 개인 경비대장과 결혼하게 된다.

오보루는 1976년 2월 3일에 보카사를 몰아내기 위해 방기 공항에서 보카사의 암살을 기도했지만,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쿠데타에 가담한 열세 명 중 단 두 명을 빼고는 다 처형되었다. 물론 피델 오보루도 처형되었는데, 마르틴은 1976년 2월 23일에 막 갓난아기를 낳은 상태였지만 보카사는 그 아기를 데데보데가 운영하는 병원으로 보내 치사량의 화학 물질을 주사하여 죽이게 했다.

그러나 보카사는 갑자기 변심하여 가짜 마르틴을 가족으로 계속 여겼지만, 가짜 마르틴은 다음 해인 1977년에 공항까지 차를 몰고 가는 중 의문의 실종을 당하고, 이후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반면 진짜 마르틴은 보카사의 퇴출 후 방기를 탈출하여 2008년 기준으로 프랑스에서 어머니와 함께 베트남 음식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4. 기타

  • 보카사의 정확한 신장은 불명이나, 1970년에 루마니아를 순방할 당시에 168cm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160cm대 중반의 신장이었던 추정된다.
  • 브리지트 바르도의 열성적인 팬이라 바르도를 베렝고에 있는 자신의 궁전에 초대하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다만 바르도는 이 요청을 거부했다.
  • 사소한 일에 크게 분노하고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보카사가 이를 표출하면 그 '광기'를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하며, 지독한 편집증을 앓은 나머지, 아버지가 자기 방에 도청장치를 설치해 감시당한 적이 있었던 보카사의 아들 조르주는 아버지가 '세상 모든 사람을 의심했다. 심지어는 그의 자식까지.'라고 술회했다. 실제로 조르주는 아버지와 말다툼을 벌이다 1972년 9월부터 두 달 동안 감금당한 적이 있다.
  • 적도 기니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가 그와 매우 비슷한 수준으로 비극적인 유년기를 보냈다. 응게마 역시 아프리카에서는 상류층의 자제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당시 적도기니를 통치했던 스페인 당국의 만행으로 인해 목숨을 잃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자식들을 남겨둔 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바람에 고아가 되어 친척들에 의해 양육되는 등 보카사와 매우 비슷한 수준의 비극적인 유년기를 보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집권 이후 가히 북한에 비견되는 수준의 개인 우상화를 시도하다가 결국 권좌에서 축출되었다는 점도 같다.
  • 보카사의 식인 루머는 공식적으로는 루머로 판명되었지만, 전속 요리사도 격렬하게 부정한 아민의 식인 루머와는 달리 보카사의 식인에 대해서는 보카사의 다른 요리사가 의미심장한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보카사의 식인 행위는 궁전에서 비밀이 아니었고,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고, 그는 상대를 잡아먹는 것보다 상대를 이기는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우리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인육을 요리하게 한 적은 없었지만, 나는 때때로 신체 부위를 보았습니다. 그는 방기 근처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시체를 절단했습니다." 심지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방기 주재 미국 대사였던 윌리엄 데일(William Dale)은 방기에서 '어린 소녀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의미심장한 증언을 남겼으며, 1975년에 보카사의 농장을 방문했을 때에 한 스위스인 루터교 목사는 두 명의 여학생이 나무에 밧줄로 묶인 것을 보았다고 데일에게 말하기도 했다. 덤으로 데일은 "보카사가 만찬에서 대사들에게 대사들이 자신이 먹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지 궁금해했다"는 발언을 남겼기에 전속 요리사도 격렬하게 부정한 아민의 식인 루머와는 달리 사실일 가능성이 완전히 없지는 않다. #
  • 보카사의 축출 이후에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은 내전까지 일어나는 등 도무지 국가 상황이 나아지지 않고 있기에, 상술한 보지제를 위시한 오늘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사람들 대부분은 '보카사 시절이 지금보다 먹고살기 좋았고, 사회도 안정되었다'라고 말하며 보카사를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라고까지 여긴다고 한다.[75]

5. 관련 문서

6. 참고자료



[1]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옛 이름[2] 정식 부인은 카트린이었지만, 보카사에게는 그녀 외에도 16명의 부인이 더 있었다.[3] 보카사 이전에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알바니아의 조구 1세도 대통령이었다가 친위 쿠데타로 군주가 되었다. 이란의 레자 샤 팔라비는 총리였다가 군주가 된 케이스지만 이쪽은 이란 국회가 왕으로 추대해서 왕이 된 거라 전술한 사례와 비교하기는 힘들다.[4] 보카사의 고향이 위치한 로바예 주의 주도인 음바아키에 있었다.[5] 자유 프랑스군에 가담 후 공적을 쌓아 부사관으로 진급했다.[6] 이때 디엔비엔푸 전투에도 참여했다고 한다.[7] 당시 대위는 프랑스 군대에서 아프리카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등급이었다.[8] 최초의 대령이라니 뭔가 계급이 낮은 게 아닌가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신생국이나 작은 나라들은 군대의 규모가 크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장성급이 거의 없거나 최고 계급이 소장이나 중장 정도인 경우도 많다. 당장 독립 직후 미국의 최선임자였던 조지 워싱턴도 생전 최종 계급이 중장이었지만 이것도 명예 계급 비슷하게 수여받은 칭호라서 중장이었던 기간 자체도 매우 짧았다.[9] 이 무렵에 보카사가 마르크스주의에 우호적으로 변했다는 말이 있지만, 이후의 행보를 보자면 자신의 엽기적 독재행각을 옹호하기 위해 있어보이는 것을 막 가져다 붙인 것일 가능성이 크다.[10] 다만 이때의 루마니아는 공산국가 중 서방국가들과 친한 편에 속했다.[11] 보카사의 집권 직후인 1966년에 중앙 아프리카 에어 방기 회사(Compagnie Centre Africaine Air Bangui)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1967년에 DC-3으로 방기-베르베라티 국내선을 운항하며 운항을 시작했고, 1971년 중반에 에어 센트라프리크(Air Centrafrique)라고 이름을 변경했으며, 1979년 초에 운항을 중단했다. 참고로 보카사는 1973년 2월 13일에는 프랑스 항법 직원과 다투고는 국영 항공사의 운영을 중지하라는 법령을 발표하여 일시적으로 항공사 운영이 중지되기도 했다.[12] 이때 보카사는 "힘들지만 이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13] 1981년 있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선거가 1964년 이래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실시된 최초의 선거였다.[14] 이는 시아드 바레도 마찬가지. 바레도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초반 8년은 당시 아프리카 독재자 중에서는 온건한 독재를 펼쳤지만, 1977년 오가덴 전쟁을 기점으로 맛이 가더니 1988~1989년 이사크족 5~10만 명을 학살한 것으로 정점을 찍었다.[15] 1977년 기준으로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GDP는 약 5.1억 달러도 되지 않았다.[16] 참고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1971년 이란 건국 2500주년 기념식에 든 돈이 공식 수치로 1700만 달러였고, 2024년 가치로 환산하면 1.3억 달러였다. 국력 차이는 막대했는데도 왕실 행사에 들인 실질 금액은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란 건국 2500주년 기념식은 행사에 든 실질 비용이 당대 가치만으로 1억 달러를 넘어 6억 3500만 달러라는 주장이 있지만 근거는 부족하다.[17] 2024년 가치로 환산해도 약 1109달러이다.[18] 만찬 당시에 궁전의 정원은 보안상의 이유로 방탄 유리 스크린으로 뒤덮였다.[19] 심지어 황후조차 황제 즉위식을 격렬히 반대한 나머지 보카사가 다른 여자를 대관식에 대동해야 할지 걱정할 정도였다고 한다.[20]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자신을 파문한 교황을 납치해 강제로 데려왔다. 그래서 상술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대관식 그림에서도 교황은 역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에게 직접 왕관을 씌워준 것과 달리 옆에 뚱하니 앉아서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이후 비오 7세가 나폴레옹에게 굴하지 않고 유폐와 감금생활을 버틴 것으로 인해서 저항의 아이콘이 되었으니 보카사가 교황을 데려오지 못했다고 비난받기에는 좀 억울한 면이 있다.[21] 실제로 당시 80살 고령이었던 바오로 6세는 대관식 약 8개월 뒤인 1978년 8월 6일에 선종했다.[22] 아이러니하게도 나폴레옹은 비오 7세를 대관식에 끌고 와서는 자기가 직접 왕관을 썼다. 보카사는 본의아니게 자신이 그렇게 존경해 마지않은 나폴레옹과 같은 방식으로 왕관을 쓰게 된 것이다.[23] 이는 6년 전 이란에서 열렸던, 마찬가지로 엄청난 돈을 들여서 거행한 페르시아 2,500주년 기념식에서 감명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팔라비 2세(보카사가 가장 먼저 초청하려 했던 사람이었다.)는 이 행사가 이란의 유구한 역사를 전세계에 알릴 좋은 기회라고 하면서 모든 수교국에 초청장을 보냈는데, 그 결과 왕정 국가들에서는 에티오피아 황제, 요르단 국왕, 말레이시아 국왕, 영국의 필립 공을 비롯해 여러 나라 왕실에서 대표 인사를 보냈고, 한국에서는 김종필 국무총리가 대통령 특사로 참가했으며, 그 외에도 미국 부통령, 소련 외무장관,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루마니아 대통령 등 진영을 불문한 전세계 여러 나라의 특사들이 대거 참석한 가운데 행사가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행사에 대한 이란 국민들의 반응 또한 호불호가 갈리긴 했어도 꽤 괜찮았다고 한다.[24] 당시 황제를 칭하고 있던 두 나라인 일본히로히토 천황과 이란팔라비 2세를 데려오기 위해서 상당한 로비를 했지만, 막대한 외교비용만 낭비해서 외교가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다만 이들은 이들의 이름으로 대관식 축전은 보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자이르의 모부투 세세 세코, 가봉의 오마르 봉고, 우간다의 이디 아민도 핑계를 대가며 대관식 참석을 거절했다. 그 이디 아민조차 걸렀을 정도였으니 보카사의 대관식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25] 보카사의 대관식을 지지하며 "왜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에는 참여했으면서 보카사 1세의 대관식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비난한 적이 있다.[26] 1977년 기준 1달러는 2024년 가치로 5.1달러 정도니 하술할 수치들에 5.1을 곱하면 현재 가치가 나온다.[27] 사치가 너무 심해서 2009년 타임지 선정 워스트드레서 10위에 올랐다.[28]옥좌는 보카사가 쫓겨난 후에 군중들에게 돌팔매질당한 후 금이 모두 약탈되어 철제 뼈대만 남은 채 궁전 안뜰에 버려졌다. 2015년에 찍힌 사진[29] 짝퉁 다이아몬드를 쓴 반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30] 특히나 보카사는 시바스 리갈을 엄청나게 좋아했었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하루라도 시바스 리갈을 마시지 않는 날이 없었고, 중요한 외교 행사와 심지어는 대관식 전날에도 시바스 리갈을 잔뜩 먹고는 그대로 취해서 쓰러진 적까지 있을 정도였다. 대관식 전날에 보카사를 본 카트린은 술을 모두 하수구에 버린 후 "황제가 될 사람은 절대로 술을 마셔서는 안 돼요!"라고 말했다.[31] 이들은 대관식 후에 아프리카의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32] 참고로 오른쪽 영상에 쓰인 아동 합창곡은 원래 기독교 찬가로 쓰인 곡이 보카사의 대관식을 위해 전용된 것으로 추정된다.[33] 우간다이디 아민도 이런 호칭을 좋아했다.[34] 에스와티니도 해당 사항이 될 순 있겠지만 에스와티니 국왕의 재산은 고작 1억 달러로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라 예시로 들기엔 부족하다. 더구나 먼나라 이웃나라가 첫 출판된 1987년 당시 에스와티니의 현 국왕인 음스와티 3세는 즉위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완전히 새내기 왕이었다.[35] 1978년 6월 21일자 경향신문 중[36] 1978년 5월 10일자 동아일보 중[37] 제국 유일의 수학자 겸 치과의사와 제국 최초의 미인대회 우승자도 이 사건의 희생자라는 소문도 있었다.[38] 후술하겠지만, 후에 보카사가 '정의의 지팡이'를 가지고 한 일은 가장 부정의한 일이었다.[39] 다만 골드스미스는 다른 수감자들에 비하면 보다 나은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40] 이디 아민멩기스투도 인육을 먹는다는 말이 돌았다.[41] 사실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식민지 시절이었던 1930년에 7.5km에 불과한 극히 짧은 철도가 건설된 적이 있었지만 독립 전쟁 중인 1960년에 파괴되었고, 2023년 현재에도 중앙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철도가 건설되지 않았다.[42] 참고로 킬링필드 당시 캄보디아에서 살아남은 의사가 40명 정도였다.[43] 반면 다른 기록에 의하면 1977년 기준으로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의사 수는 인구 43,400명당 1명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중앙아프리카 인구는 204만 명 정도였다.[44] 1978년 기준으로 중앙아프리카 제국의 부채는 제국의 5년 세입에 달하던 약 2억 8천만 달러였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 제국의 GDP는 약 6억 1천만 달러 정도였다.[45] 정확히는 약 293달러로, 2023년 환율로 환산하면 1253달러 정도다.[46] 참고로 2024년 기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1인당 GDP는 이 교복 가격보다도 낮은 약 573달러에 불과하다.[47] 다만 이 교복의 가격이 실제로는 25달러(2023년 환율로는 107달러)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것도 당시 제국의 백성들의 1달 봉급을 뛰어넘는 큰 돈이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교복 가격이 서아프리카 프랑으로 5천 프랑으로 일반 노동자들의 월수입과 맞먹는 돈이었단 것을 감안하면 후자가 더 가능성이 높긴 하다.[48] 당시 진압을 지휘한 군인 중 한 명이 프랑수아 보지제였다.[49] 외환의 죄를 범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지만 자국 군대가 너무 약해 어쩔 수 없이(...) 보다 강한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렸을 가능성이 더 높다. 이렇게 보면 몰디브에서 쿠데타(이쪽이 외국 용병을 동원하며 진짜 외환의 죄를 범했다)가 일어났을 때 몰디브군이 너무 약해 인도군을 동원해 쿠데타를 진압할 수밖에 없었던 마우문 압둘 가윰과 비슷한 맥락인 셈. 그런데 이러면 더욱 가관이 되는 게, 외국 군대 힘을 빌려서 '폭동'(?)을 진압해야 할 정도로 허약한 군대를 가지고 천년 제국 운운했다는 말이 되며(전술한 사례는 합법), 무엇보다 외국 군대를 동원해 자국 시위대를 학살할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외환유치죄가 성립된다. 즉슨 보카사는 오삼계 이래로 단신으로 내란죄외환의 죄를 모두 저지른 초유의 인물인 셈이다.[50] 한 목격자는 4월 18일 하루에만 최소한 학생 62명이 정부 관리들에게 암매장되었다는 증언을 남겼다.[51] 프랑수아 보지제와 함께 현장에서 시위 진압을 지휘하던 요제파트 마요모콜라(Josephat Mayomokola, ?~1981) 장군의 총에 사살당했다. 보카사의 몰락 후 시위 유혈진압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1981년 1월 24일 다른 보카사의 부하 5명과 함께 총살형에 처해졌다.[52] 가로 2.5m에 세로 3m, 2.3평보다도 협소한 독방에 서른 명을 가두었다.[53] Bernard Loubat, 1942~. 아프리카에서 프리랜서 기사로 일하면서 1979년 6월 보카사와 독점 인터뷰를 한 인물로, 보카사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법부에서 사형을 선고받으며 목숨의 위협을 받는 우여곡절 끝에 루바가 중앙아프리카에서 수집한 자료들은 1981년 '베렝고의 오우거 : 보카사가 저에게 말했습니다(L'ogre de Berengo: "Bokassa m'a dit)'라는 제목의 책자로 출판되었다.[54] 그런데 같은 해에 에티오피아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도 '세계 아동의 해'를 기념한답시고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경기장에서 멩기스투 본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어린이 2만 명을 모아놓고는 오리걸음을 시키기도 했다.[55] 후술할 쿠데타로부터 고작 9일 전이다.[56] 이들 중 대부분은 황제의 보복이 두려워서 보카사의 요원들이 찾기 힘든 외진 곳에서 익명으로 인터뷰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57] 전두환마저 감옥까지 찾아가 수감된 민간인들을 직접 때려죽이는 만행은 저지르지도 않았고, 이를 저질렀다는 주장도 전혀 없다. 그런데 보카사가 시위에 참여했다가 수감된 민간인들, 그것도 어린이들을 직접 때려죽였다는 것은 여러 목격자들의 증언과 당대 조사위원회의 치밀한 조사로 공인된 사실이라는 점에서 보카사가 얼마나 극악무도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다.[58] 이때 파리에서 별거하던 보카사의 아들 조르주도 아버지의 악행을 비난했다고 한다.[59] 주르니아크는 보카사가 권좌에서 쫓겨나고 약 2개월 뒤인 1980년 2월 6일 기상 악화로 인한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60] 보카사 1세의 재위기간은 날수로는 1020일이었다. 천일제국[61] 머리와 팔, 다리 한 쪽이 사라진 시신 한 명은 전술한 수학자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식인설의 증거로 언론에서 자주 언급되었다.[62] 실제로 보카사는 500만 프랑이 넘는 연금(여러 직책에 따른 연금 200만 프랑+자기 가족들에게 줄 연금 300만 프랑+별도의 공과금)을 받기를 원했다고 한다.[63] 실제로 보카사의 성은 요금 체납 때문에 전기와 수도가 자주 끊겼고, 자식들 중 일부는 좀도둑질까지 했으며, 심지어 보카사 본인도 먹을 것이 없어서 소시지를 훔친 적이 있었다고 한다.[64] 보카사는 이 책에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 프랑스 대통령이 1979년 5월에 본인에게 카트린 황후를 프랑스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 후 카트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후 임신시켰다는 주장을 했다. 덤으로 보카사는 카트린이 가진 지스카르데스탱의 아이는 지스카르데스탱의 요구로 낙태당했으며, 자신이 후에 폭행한 주르니아크도 카트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주장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카트린은 이 의혹들을 전면 부인했다.[65] 2024년 기준으로 환산하면 175만 달러로, 한화로는 약 23.7억 원이나 된다.[66] 물론 보카사 시기 관리들은 보카사의 암묵적인 승인 없이는 어리석은 사람만이 그 당시 누군가를 투옥하거나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을 것이라고 증언했다.[67] 재판에서 보카사가 1979년 2월에 반역 혐의로 수감된 장군을 독방에 가둬놓고는 일부러 진수성찬만 줘 살찌운 뒤 1979년 2월에 처형하고는 요리해서 각료들에게 먹게 했다고 증언했다.[68] 전술한 냉장고 속 시신에 대해 보카사는 고대 아프리카의 신앙에 따라 '행운을 위해' 보관했다고 해명(?)했으며, 재판에서 보카사를 식인을 증언했던 보카사의 요리사는 '정신적으로 미친' 상태로 간주되었다고 한다.[69] 말년의 보카사는 방기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서 분기별로 지급되는 전직 프랑스군 대위로서의 연금만으로 생활했으며, 기독교에 귀의하여 매일 성경을 읽으며 기도를 했고, 몇 년 동안 술과 성관계를 끊었다고 한다. 1996년 11월 5일자 뉴욕 타임즈 기사 이와 비슷하게 자이르모부투 세세 세코도 집권할 적에는 술과 미식, 호화저택, 여자 등 온갖 향락을 누려오다가 축출된 후에는 과거의 죄악들을 참회하고자 수도승에 비유될 정도로 검소하게 먹다가 죽었다.[70] 그러나 아리엘 샤론은 미국의 쉴드로 전범재판에서 무죄를 받은 것이라 용서라고 볼 수 없다. 당장 샤론이 사망한 날 생전 그에게 피해를 입었던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국민들은 잘 죽었다고 환호했으니 말이다.[71] 베렝고 궁전은 제국의 몰락 이후에는 폐허가 되었고, 2018년 기준으로는 아예 군사 캠프로 변했다. 베렝고 궁전을 군사 캠프로 이용하는 조직 중 하나가 바로 바그너 그룹이다.[72] 특히 루이 비통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73] 참고로 중국사 마지막 황비이다...[74] 여담으로 당시 카트린은 임신 상태였으며, 이 사건으로부터 약 4달 뒤에 후에 황태자가 될 장베델 보카사 2세를 출산했다.[75] 다만 이러한 현상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몇몇 나라들 중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었던 콩고민주공화국, 차드, 소말리아, 말리 등에서도 있다. 보가사와 비슷한 시기에 집권했던 콩고민주공화국모부투 세세 세코, 차드프랑수아 톰발바예, 소말리아시아드 바레, 말리모디보 케이타무사 트라오레가 집권할 시기는 무능하고 억압적인 독재 정치가 펼쳐졌으나 당시 반정부 세력의 무장능력이 매우 빈약하여 국가가 내전의 상태로 혼란에 빠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무기가 뿌려지면서 반정부 세력의 무장능력이 강해지자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혼란에 빠진 것을 현실을 볼 때, 해당 국가에서도 해당 지도자들 시기를 그리워하는 여론은 있다고 한다. 심지어 우간다/적도 기니에서는 무려 이디 아민/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를 '서구 식민주의로부터 아프리카인의 자주성을 지켜냈다'는 이유로 그리워하는 사람까지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