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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전한)

한고조 유방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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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초대 황제
고제 | 高帝
파일:한고제초상.jpg
청나라 시기 그려진 상상화[1]
출생 기원전 256년 혹은 기원전 247년[2]
패현 풍읍 중양리
(現 장쑤성 쉬저우시 페이현)
즉위 기원전 202년 2월 28일
전한 정도현 범수 북안
(現 산둥성 허쩌시)
사망 기원전 195년 6월 1일 (향년 52세~61세)
전한 장안 장락궁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장릉(長陵)
재위기간 후초의 한왕
기원전 206년 3월 혹은 4월
~ 기원전 202년 2월 28일
한 황제
기원전 202년 2월 28일
~ 기원전 195년 6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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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11><colcolor=#ece5b6> 성씨 유(劉)
방(邦)
부모 부황 태상황
모후 소령황후 유온
형제자매 4남 1녀 중 3남
배우자 정실 고황후 여씨
후궁 고황후 박씨, 척부인
자녀 8남 1녀
신장 179cm[3]
계(季)
작호 한왕(漢王)
존호 고조(高祖)
묘호 태조(太祖)
시호 고황제(高皇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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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高祖本纪.gif
《사기》에 실린 〈고조본기〉

1. 개요2. 출생3. 생애4. 가족 관계5. 평가6. 기타7. 대중매체에서8. 둘러보기

1. 개요

중국사의 두 번째 통일 제국인 한나라를 건국한 개국군주이자 초대 황제.[4] 성은 유이고 휘(이름)는 방()이다.[5]

중국 역사상 최초의 평민 출신 황제로,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과 연이 없는 농부의 자식이 동네 건달에서 말단 관리를 거쳐 황제라는 지고무상의 지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진(秦)나라 말기의 대혼란 속에 세력을 일으켜 초한대전을 거쳐 항우(項羽)를 제압하고 천하를 차지했다.[6]

이후 각지의 반란을 평정하고 이성왕(異姓王)들을 숙청해 한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시황제의 중국 통일을 이어 받아 오랜 기간 지속된 통일 왕조를 구축하여 중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7] '한족'이라는 말의 기원이 된 것도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다.[8]

2. 출생

파일:패현 지도.png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豊邑) 중양리(中陽里)에서 태어났다.

유방은 패현(沛縣) 풍읍(豊邑)[9][10] 중양리(中陽里)에서 태어났다.[11] 이 지역은 원래 송나라 땅이었으나 유방이 태어나기 3~40여년 전인 기원전 286년 송나라가 멸망하면서 초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풍읍은 위치에서 알 수 있듯이 초나라의 중심지보다는 위(魏)나라의 국경과 훨씬 가까운 지역이었다. 전한의 학자 유향의 말을 인용한《한서》의 기록에는 위나라가 대량으로 천도한 기원전 4세기 중반 무렵 유방의 선조가 진(秦)나라에서 위나라로 포로로 끌려갔다가 이후 유방의 아버지 대에 이르러서야 풍읍에 정착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12]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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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족 관계

부친은 태공(太公)이었고 어머니는 유온(劉媼)이었는데 태공이나 온은 남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호칭에 지나지 않았다고《사기집해》나《사기색은》 등의 주석서에서 일관되게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유태공과 유온을 현대어로 풀이하자면 그저 유씨댁 어르신, 유씨댁 안주인 정도의 의미로 유방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진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찾을 수가 없다. 유방의 형제를 살펴보면 이름이 형제 간의 서열, 순서를 간편하게 나타내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붙여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방의 형들로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유계'라는 호칭이 어째서 생겼는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방은 본래 개별적인 이름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고 그저 '유씨네 막내'정도로 통용될 수 있는 유계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둘째 형 유중은 유희(劉喜)라는 휘가 알려져 있고, 이복동생 유교(劉交)는 유(游)라는 자가 따로 있었기에 모든 사람의 휘가 불명확한 것은 아니다. 백중숙계가 대충 지은 이름 같아 보이지만 그게 정식 자나 이름인 예가 꽤 있어 유계라는 이름이 개별적인 이름일 가능성은 다분하다. 더욱이 유교가 유학자로 특히《시경》에 능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하면 집안 사람들 중에 이름이 아예 없는 인물이 있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기도 하다.

고제는 8남 1녀를 두었는데 여덟 아들의 어머니가 모두 다르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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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기타

파일:kgvFShn.jpg
석문잔도풍경구(石門棧道風景區)에 있는 한고조 유방의 석상. 왼쪽은 소하, 오른쪽은 한신
  • 주로 '한고조(漢高祖)'라는 호칭으로 불리는데, 이는 정식 묘호나 시호는 아니다. 유방의 묘호는 태조,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이다. 즉 정식 호칭은 '태조 고황제'[13]지만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사기》에서 고조(高祖)라는 용어를 사용해 유방을 가리키는 칭호로 굳어졌다.[14] 이 고조(高祖)라는 용어는 후대 왕조의 창건자들에게도 붙었는데 이는 고조의 영향이 지대했다.
  • 고제의 이름은 원래 '유방'이 아니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 《사기》나《한서》(漢書)에는 고제의 휘가 방(邦)이라는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성이 유(劉)씨이고 자(字)는 계(季)라고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유방이라는 이름이 언급되는 것은 한참 뒤인 후한 말의 학자 순열(荀悅)이 저술한 《한기》(漢紀)가 최초다. 오늘날의 《사기》,《한서》의 판본에는 고제의 이름이 '유방'이라고 나오지만, 이는 후세 학자들이 주석을 달며 역으로 인용한 것이다.

    사기나 한서가 다른 인물도 아니고 한나라 초대 황제의 휘를 누락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당나라 학자 안사고는 피휘의 금기에 따라 사서에 조차 휘를 누락하였다고 봤으며, 후한 말 정도는 되어야 금기가 옅어져 '유방'이라는 휘를 기록한 것이라고 봤다. 당나라 사학자 사마정(司馬貞)은 사실 즉위 전 고제의 원래 이름은 중국 전체에서 흔하디 흔한 '계(戒)'였고, 즉위 후 피휘의 불편함을 피해 '방(邦)'으로 개명했다는 주장을 했다.[15] 당대에도 피휘의 관습은 있었는데, '백중숙계'에서 따온 그의 이름을 한나라 멸망까지 봉인했다간 나라 전체가 큰 불편을 겪었을 것이기 때문. 일본의 사학자 '사타케 야스히코'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고제가 즉위 전엔 딱히 특별한 이름없이 '유계(劉戒=유가네 막내아들)'라는 호칭으로만 살다가 즉위 후에 황제에 걸맞은 정식 이름을 지어 정했다고 봤다. 다시 말해 고제는 '유방'으로 산 기간은 얼마 되지 않았고, 최대 숙적 항우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그를 '유계'라고 훨씬 많이 불렀다는 설.
  •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호칭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



    사기》〈역생육가열전〉


    "豎儒,幾敗而公事!"



    사기》〈유후세가〉

    여기서 보이는 내공(乃公)과 이공(而公)은 비슷한 표현인데, 이는 본래 '자신' 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여기서 사용되는 乃나 而는 "너" 아니면 "자네" 정도의 의미가 되는데, 뒤에 公이 붙이니 그렇다면 "자네 아버지" "네 어르신" 정도의 의미가 된다.

    그러나 유방은 여기서 이 표현을 자신에게 사용했는데, 자기를 일컬어 "네 아버지" "(너희 아버지에 해당하는) 이 어르신" 같은 어감이 된다. 마찬가지로 상대 역시 "아들" "조무래기" 같은 상황이 된다. 이런 어감을 살려 번역하면 이런 느낌이다.


    "하찮은 유생 놈 때문에 이 어르신이 대사를 그르칠 뻔 했구나!"

    황제와 같은 단어로 자신을 호칭하기도 했지만, 이건 황제의 어투라기보다는 건달 우두머리의 어투에 더 가깝다. 유방의 이런 화법은 현대로 비유하자면 남자가 허세를 부릴때 "이 형이 말이야.", "오빠가 한 턱 쏜다"라고 하는 것이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좀 더 천하게 바꾸면 "이 엉아가 말야~" 정도로 볼 수 있다.
  • 자신을 따른 정강이라는 신하를 고발한 자의 코를 베는 형벌을 내렸다.
    正疆首茉事而當,上使參乘,解玉劍以之。天下定,出以爲守。有告之者,上曰:「天下方急,汝何在?」曰:「亡。」上曰:「正疆沐浴霜露,與我從軍而汝亡,告之何也?下廷尉劓。


    정강(正疆)이 수차례 사건에 대해 하는 말이 타당하자, 주상(유방)은 수레에 참승하도록 하고, 옥검을 풀어 그에게 채워주었다. 천하가 안정되자 (정강을) 내보내 군수로 삼았는데 그를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주상이 물었다.


    "천하가 위급해졌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도망쳤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주상이 말했다.


    "정강은 서리와 이슬로 목욕을 하며 나와 더불어 종군했는데, 너는 도망을 하고서 이제 고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그리고 정위에게 하명하여, 코를 베어버리는 의형에 처했다.




    《태평어람》(太平御覽) 648, 《초한춘추》(楚漢春秋)
  • 생년에 관한 논란이 있는데, 기원전 256년으로 칠 경우[18], 진나라가 6국을 완전하게 병합한 것이 기원전 221년이었으니 인생의 반 이상을 전국시대에서 보냈다는 얘기가 된다. 기원전 247년으로 칠 경우, 인생(52년)에서 반에 가까운(26년)을 전국시대에서 보낸 셈이 된다.
  • 아버지인 유태공보다 불과 2년 늦게 죽었는데, 영포(경포)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대략 5~60대에 사망했다. 현대인의 관점으로 요절한 것으로 보이나 당대 기준으로는 천수를 누리다 죽은 셈이다.
  • 마오쩌둥은 유방에 대해 "봉건 황제 중에서 가장 대단한 사람"이라 말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또 "그는 천하에 하나를 얻으면 정책을 결정해야 옳았고, 둘째는 사람을 쓰는 것이 적합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마오는 항우를 비정치가로 여겼고, 유방은 고명한 정치가로 여겼다고 한다.#
  • 자신의 아내들 가운데 척부인을 제일 아끼고 사랑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척부인이 끔찍한 최후를 맞는 원인을 제공했다. 척부인의 소생인 유여의가 정통성이 떨어지는 일개 서자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사심과 여후에 대한 견제를 이유로 멀쩡한 적장자 유영을 폐한 뒤 유여의를 태자로 삼으려 계승법을 필두로 한 국가의 율법을 훼손했고, 가정에서도 정실과 첩 사이의 질서를 무너뜨려 정실의 체면을 훼손해 척부인 모자는 여후의 원한을 샀고 신하들도 반감을 가지며 유방 사후 여후의 손에 숙청당할 때 황제로 즉위한 유영을 제외하면 아무도 두 모자를 구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9] 만일 율법과 당대 사회의 상식을 지키면서 여후를 견제하려 했다면 여씨 일족을 숙청하고 여후의 최측근들을 없애 여후를 정치에서 배제하거나 권력 기반을 없애는 것이 타당했다. 결국 척부인 모자가 죽게 된 배경에서 유방의 결정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 한고조는 중국의 역대 황제들 가운데 후손 농사를 잘 지은 편이다. 당장 아들인 문제 유항과 손자인 경제 유계는 '문경지치'로 중국사에서 유명한 명군들이었고, 이들의 후손들 중 무제 유철은 당태종 이세민과 더불어 중원 제일의 정복군주였으며, 광무제 유수와 소열제 유비는 나라가 망하자 다시 나라를 일으켜 사직을 이어나간 영웅들이었다. 무제 유철은 자신의 선조를 굴복시킨 흉노를 상대로 위청곽거병이라는 명장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해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본격적인 서역 진출의 문을 열었으며, 광무제 유수[20]는 전한이 멸망하자 왕망이 세운 신나라와 각종 군벌들을 격파하고 후한을 건국해 한 황실을 부흥시켰으며, 소열제 유비[21]는 후한이 위문제 조비에게 멸망당하자 익주 지방에 후한의 유민들을 모아 촉한을 건국해 사직을 지켜냈다. 그 덕분에 유씨 황실은 전한이 멸망한 뒤에도 후한과 촉한이 연이어 건국된 덕에 270년 동안 사직을 보전했다. 전한-후한-촉한을 합치면 중국 대륙에서 470년이나 사직을 이어나갔는데, 그 뒤에도 방계 후손인 무제 유유동진을 멸하고 유송을 건국했기에[22] 유씨 황실이 중국 대륙을 통치한 기간을 헤아리면 무려 500년 이상이나 된다.[23]
  • 워낙 파격적인 행적 때문에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려 이를 배경으로 하는《초한지》등에서는 라이벌항우나 부하인 한신 등에 비해 인기가 높은 편은 아니지만 최후의 승자로서 가지는 역사적인 입지와 비중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인기가 없다고는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현재의 인기만 놓고 보면 그렇다지만[24], 당대의 인기는 유방이 가장 높았다. 한신은 자신의 전문 분야인 군 지휘는 탁월했으나 인간 관계에서는 문제가 심각했고, 항우는 무분별하게 학살을 자행했기 때문에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에 비해 유방은 부하들을 잘 챙겨주어 병사와 백성들로부터도 인망이 두터웠고[25]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능이 있어 후초의 의제나 그 신하들도 유방을 항우의 대항마로 내세웠다. 유방의 평가가 다소 낮은 이유는 소설《초한지》등의 영향으로 고조가 무능하고 탐욕스럽게 나온 탓이 크다.[26][27]
  • 유방은 외모에 대해서도 융준용안(隆準龍眼)[28], 용안미수염(容顔美鬚髥)과 같은 식으로 용과 연결이 자주되는 편인데 이러한 과정에서 나온 전설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 콧날이 높고 이마는 넒어 용의 얼굴을 닮았으며, 수염이 그럴 듯해 멋있었다고 한다. 또한 왼쪽 넓적다리에는 72개의 반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29] 정장(亭長) 벼슬을 한 뒤로 유방은 휘하의 부하를 설(薛, 산동선 등현)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 대나무 껍질로 만든 관)을 만들게 시켜 이를 쓰고 다녔는데, 훗날 황제가 된 이후에도 죽피관은 계속 착용했다고 한다. 대체로 유방의 초상화에서는 넒은 이마, 콧날, 죽피관이 강조되는 편이다.
  • 유방이 남긴 시로는 <대풍가><홍곡가> 총 2수가 전해지고 있다.
    大風起兮雲飛揚[30]

    큰바람 일어나자 구름이 흩날리누나.

    威加海內兮歸故鄉[31]

    온 세상에 위세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나니,

    安得猛士兮守四方[32]

    어떻게 하면 용맹한 군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련지.



    <대풍가>(大風歌)

    <대풍가>는 유방이 영포(경포)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향 패현을 방문해 연회를 베풀며 부른 노래이다. 진시황이 죽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자신도 거병했던 과거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해 전국에 자신의 위세를 떨친 뒤 고향에 금의환향한 현재, 앞으로는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불안감을 나타낸 미래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鴻鵠高飛 一擧千里[33]
큰고니 한 번에 1,000리를 나는데,
羽翮已就 橫絶四海[34]
날개가 이미 자라 온 천지를 나는구나.
橫絶四海 當可奈何[35]
온 천지를 날아다니니 어찌하리오.
雖有矰繳 尙安所施[36]
화살이 있다 한들 어찌 쏘리오.
<홍곡가>(鴻鵠歌, 큰고니의 노래)
<홍곡가>는 적장자인 황태자 유영을 교체하려다가 주변의 반대에 부딪히자 이를 한탄하며 만든 노래라고 전해진다. 유영 대신 자신의 아들이자 서자인 유여의를 태자로 삼으려던 척부인은 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7.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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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7권 「항우본기(項羽本紀)」 8권 「고조본기(高祖本紀)」 9권 「여태후본기(呂太后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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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10권 「효문본기(孝文本紀)」 11권 「효경본기(孝景本紀)」 12권 「효무본기(孝武本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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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권 ~ 22권은 표에 해당, 23권 ~ 30권은 서에 해당. 사기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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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31권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 ||<-2><width=33%> 32권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2><width=33%> 33권 「노주공세가(魯周公世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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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61권 「백이열전(伯夷列傳)」 ||<-2><width=33%> 62권 「관안열전(管晏列傳)」 ||<-2><width=33%> 63권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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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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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1권 「고제기(高帝紀)」 2권 「혜제기(惠帝紀)」 3권 「고후기(高后紀)」
유방 유영 여치
4권 「문제기(文帝紀)」 5권 「경제기(景帝紀)」 6권 「무제기(武帝紀)」
유항 유계 유철
7권 「소제기(昭帝紀)」 8권 「선제기(宣帝紀)」 9권 「원제기(元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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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성제기(成帝紀)」 11권 「애제기(哀帝紀)」 12권 「평제기(平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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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tablewidth=100%><tablebgcolor=#a11><width=33%> 31권 「진승항적전(陳勝項籍傳)」 ||<-2><width=33%> 32권 「장이진여전(張耳陳餘傳)」 ||<width=33%> 33권 「위표전담한왕신전(魏豹田儋韓王信傳)」 ||
진승 · 항적 장이 · 진여 위표 · 전담 · 한신
34권 「한팽영노오전(韓彭英盧吳傳)」 35권 「형연오전(荊燕吳傳)」 36권 「초원왕전(楚元王傳)」
한신 · 팽월 · 경포 · 노관 · 오예 유고 · 유택 · 유비 초원왕
37권 「계포난포전숙전(季布欒布田叔傳)」 38권 「고오왕전(高五王傳)」 39권 「소하조참전(蕭何曹參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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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 · 진평 · 왕릉 · 주발 번쾌 · 역상 · 하후영 · 관영
부관 · 근흡 · 주설
장창 · 주창 · 조요 · 임오 · 신도가
43권 「역육주유숙손전(酈陸朱劉叔孫傳)」 44권 「회남형산제북왕전(淮南衡山濟北王傳)」 45권 「괴오강식부전(蒯伍江息夫傳)」
역이기 · 육고 · 주건 · 유경 · 숙손통 유장 · 유사 · 유발 괴통 · 오피 · 강충 · 식부궁
46권 「만석위직주장전(萬石衞直周張傳)」 47권 「문삼왕전(文三王傳)」 48권 「가의전(賈誼傳)」
석분 · 위관 · 직불의 · 주인 · 장구 양왕 · 대왕 · 양왕 가의
49권 「원앙조조전(爰盎晁錯傳)」 50권 「장풍급정전(張馮汲鄭傳)」 51권 「가추매노전(賈鄒枚路傳)」
원앙 · 조조 장석지 · 풍당 · 급암 · 정당시 가산 · 추양 · 매승 · 노온서
52권 「두전관한전(竇田灌韓傳)」 53권 「경십삼왕전(景十三王傳)」 54권 「이광소건전(李廣蘇建傳)」
두영 · 전분 · 관부 · 한안국 임강민왕 · 하간왕 · 임강애왕 · 노왕 · 강도왕
우왕 · 조왕 · 중산정왕 · 장사왕 · 광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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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권 「위청곽거병전(衛靑霍去病傳)」 56권 「동중서전(董仲舒傳)」 57권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위청 · 곽거병 동중서 사마상여
58권 「공손홍복식예관전(公孫弘卜式兒寬傳)」 59권 「장탕전(張湯傳)」 60권 「두주전(杜周傳)」
공손홍 · 복식 · 예관 장탕 두주
61권 「장건이광리전(張騫李廣利傳)」 62권 「사마천전(司馬遷傳)」 63권 「무오자전(武五子傳)」
장건 · 이광리 사마천 여태자 · 제왕 · 연왕 · 광릉왕 · 창읍왕
64권 「엄주오구주보서엄종왕가전(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
엄조 · 주매신 · 오구수왕 · 주보언 · 서악 · 엄안 · 종군 · 왕포 · 가연지
65권 「동방삭전(東方朔傳)」 66권 「공손유전왕양채진정전(公孫劉田王楊蔡陳鄭傳)」
동방삭 공손하 · 유굴리 · 전천추 · 왕흔 · 양창 · 채의 · 진만년 · 정홍
67권 「양호주매운전(楊胡朱梅云傳)」 68권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磾傳)」 69권 「조충국신경기전(趙充國辛慶忌傳)」
양왕손 · 호건 · 주운 · 매복 · 운창 곽광 · 김일제 조충국 · 신경기
70권 「부상정감진단전(傅常鄭甘陳段傳)」 71권 「준소우설평팽전(雋疏于薛平彭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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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권 「왕공양공포전(王貢兩龔鮑傳)」 73권 「위현전(韋賢傳)」 74권 「위상병길전(魏相丙吉傳)」
왕길 · 공우 · 공승 · 공사 · 포선 위현 위상 · 병길
75권 「수양하후경익이전(眭兩夏侯京翼李傳)」 76권 「조윤한장양왕전(趙尹韓張兩王傳)」
수홍 · 하후시창 · 하후승 · 경방 · 익봉 · 이심 조광한 · 윤옹귀 · 한연수 · 장창 · 왕존 · 왕장
77권 「갑제갈유정손무장하전(蓋諸葛劉鄭孫毋將何傳)」 78권 「소망지전(蕭望之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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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봉세 회양왕 · 초효왕 · 동평왕 · 중산왕 · 정도왕 · 중산왕
81권 「광장공마전(匡張孔馬傳)」 82권 「왕상사단부희전(王商史丹傅喜傳)」 83권 「설선주박전(薛宣朱博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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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권 「적방진전(翟方進傳)」 85권 「곡영두업전(谷永杜鄴傳)」
적방진 곡영 · 두업
86권 「하무왕가사단전(何武王嘉師丹傳)」 87권 「양웅전(揚雄傳)」
하무 · 왕가 · 사단 양웅
88권 「유림전(儒林傳)」
정관 · 시수 · 맹희 · 양구하 · 비직 · 복생 · 구양생 · 임존 · 주감 · 장산부 · 왕식 · 후창 · 호모생 · 엄팽조 · 안안락
89권 「순리전(循吏傳)」 90권 「혹리전(酷吏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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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권 「화식전(貨殖傳)」 92권 「유협전(游俠傳)」
백규 · 정정 주가 · 전중 · 극맹 · 곽해 · 우장 · 누호 · 진준 · 원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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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 남월 · 민월 · 동해국 · 조선
96권 「서역전(西域傳)」
선선국 · 저말국 · 소완국 · 정절국 · 융로국 · 서미국 · 거륵국 · 우전국 · 피산국 · 아타국 · 서야국 · 포리국 · 의내국 · 무뢰국 · 난두국 · 계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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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사전국 · 차사후국 · 차사도위국 · 차사후성장국
97권 「외척전(外戚傳)」
효혜황후 · 효문태후 · 두의방 · 효경황후 · 왕지 · 진아교 · 무사황후 · 효소태후 · 효소황후 · 사양제 · 왕부인 · 허평군 · 곽성군 · 효선황후 · 효성황후
반염 · 조비연 · 소의 부씨 · 정도정희 · 효애황후 · 효원소의 · 중산위희 · 효평황후
98권 「원후전(元后傳)」 99권 「왕망전(王莽傳)」
왕정군 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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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기(前漢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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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4권 「고조기(高祖紀)」 5권 「혜제기(惠帝紀)」 6권 「여후기(呂后紀)」
유방 유영 여치
7·8권 「문제기(文帝紀)」 9권 「경제기(景帝紀)」 10·11·12·13·14·15권 「무제기(武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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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권 「소제기(昭帝紀)」 17·18·19·20권 「선제기(宣帝紀)」 21·22·23권 「원제기(元帝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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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많이들 착각하는 것이, 태조 이성계를 제외한 조선 후기 이전의 어진이 거의 전무한 한국과 달리 중국은 고대의 어진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당나라 시기 역대제왕도권이 가장 오래된 어진이며 남아있는 어진들도 대다수 모본이다. 고조와 같은 고대 인물의 어진이라 전해지는 것은 명청 시기 그려진 상상화이다.[2] 기원전 232년생인 항우와 15살 차이라고 했고, 유방의 절친인 노관도 기원전 247년생인데 심지어 같은 날에 태어나 가족끼리 서로 매우 친했다는 언급이 있어 아마도 기원전 247년이 출생년이 맞을 듯하다. 하지만 기원전 256년으로 보기도 한다. 여담으로 기원전 247년생이라면 시황제가 즉위한 해 출생이고, 기원전 256년생이라면 진나라가 시황제의 증조부인 소양왕 치세였던 시절에 출생한 것으로 시황제와는 고작 3살 차이밖에 안 난다.[3] 키가 7척 8촌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척단위인 23cm로 계산하면 179cm가 나온다.[4] 따라서 중국사에서 진나라의 시황제, 이세황제와 후초의 의제에 이어 네 번째로 황제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인물이 된다.[5] 일반적으로는 본 문서의 표제인 고제라는 말보다 다른 창업군주와 비슷하게 그냥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여성의 젖가슴을 표기하는 단어와 음가가 동일한지라 구분을 위해 '한고조 유방'으로 부르기도 한다. 사마천 이후 일반 대중은 물론이고, 정치인이나 관료, 학자들도 대개 '한고조'라고 통칭하며 정식 표현인 '고제'는 현대에 들어서는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6] 중국 역사를 통틀어 평민이 왕조를 개창한 사례는 유방과 명태조 주원장 뿐이다.[7] 시황제가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했으나 가혹한 통치와 후대의 무능으로 분열되었고, 한고조가 이를 다시 통합해 통일 체제를 완성시켰다고 평가된다. 다만, 중앙집권을 추구했던 진나라와는 달리 초기 한나라는 진나라를 반면교사 삼아서 분권 통치를 하였다.[8] 다만 한족이라는 말 자체는 어디까지나 근대 이후 중국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민족 집단을 지칭하기 위해 만들어진 용어일 뿐, 전근대에도 사용했던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중국이 당나라였던 시절에는 한족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고, 당나라인은 말 그대로 당인이라고 불렀다.[9] 지금의 장쑤성 (江蘇省) 펑현(丰县, 병음: Fēng Xiàn)[10] 풍읍의 패현이라 '풍패'라고도 하는데, 조선 시대에는 전주의 별칭이 풍패였는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본관이 전주이기 때문이다.[11] 유방의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방의 어머니인 유온이 연못가 근처에서 쉬다 문득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神)을 만났다고 한다. 그때 번개가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태공이 그 모습을 보자 유온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맴돌고 있었고, 유온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으니 그 아이가 유방이었다.[12] 유방의 증조부이자 유태공의 조부인 유청은 위나라의 대부 벼슬을 지냈는데 위 왕실의 재산을 횡령한 사건으로 몰락해 평민이 된 것으로 보인다.[13] 이를 줄여 고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기를 저술한 사마천도 유방을 존칭해 고조 또는 한고조라 했으며 역대 중국 역사를 통틀어 고제라고 호칭한 적은 없다.[14] 정확히 말하자면 고조는 태조 고황제의 약칭인 것이다.[15] 실제로 유방의 휘는 한자부터 '나라 방'인데, 즉위 후 황제에 걸맞게 새 이름으로 정했다는 추측도 존재한다. 조선 이성계 역시 즉위 후 국호 '조선'의 앞글자 '아침 조(朝)'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아침 단(旦)'을 새 이름으로 정했다.[16] 이 발언에서 유래해 유방을 마상옹(馬上翁) 혹은 마상지내옹(馬上之乃翁)이라고도 한다.[17] 다만 세월이 지나 책을 읽으니 이치에 맞는 것이 많았다며 책의 중요성을 깨달았다.[18] 여담으로 동주의 마지막 왕인 난왕이 같은 해에 사망했다.[19] 다만 척부인도 억울한 것은 아닌 것이 일개 후궁임에도 불구, 노골적으로 유방에게 유여의를 태자로 삼아달라며 지속적으로 간청하는 등 여후에게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다.[20] 7남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 경시제도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이다.[21] 한경제의 9남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 또 동시대 군벌인 유언-유장 부자와 유표는 한경제의 4남 노공왕 유여의 후손이다. 한경제의 대에서 전한-후한-촉한 황실이 분기한 것이다.[22] 유방의 동생 유교의 후손이라 유방의 직계 후손은 아니다.[23] 전한, 후한, 촉한, 유송 왕조는 혈연적 거리 때문에 유씨 왕조의 분파로서 서로 구별되는데 이는 카페 왕조카페 직계, 발루아 왕조, 부르봉 왕조, 부르봉-오를레앙 왕조로 구별되는 것을 생각하면 된다. 필리프 3세에서 발루아 왕조가, 루이 9세에서 부르봉 왕조가, 루이 13세에서 부르봉-오를레앙 왕조가 분기되었다. 루이 9세가 필리프 3세의 아버지라서 발루아 왕조보다 부르봉 왕조가 카페 직계와 더 먼 것은 덤.[24] 이 역시 역사 그 자체보다는 소설 초한지에 기초한 인기라고 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한신과 항우를 남자의 로망으로 띄워주고 반대로 유방을 탐욕스럽고 한신을 질투하는 소인배로 묘사했기 때문.[25] 관중에서도 약탈을 지양하고 약법삼장을 내세우는 등 진나라 백성들에게도 잘 대해주었다. 또, 죽은 병사들의 시체를 일일히 찾아내 장례를 치러주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감동해서 유방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고 한다.[26] 유방이 비록 전투에서 항우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방어전은 잘 수행해 항우가 형양과 성고 서쪽으로 가지 못하게 막았다.[27] 유방과 한신의 관계는 일본의 미나모토 요리토모와 미나모토 요시츠네의 관계와도 비슷하다. 현대 일본에서는 요시츠네를 비극의 영웅으로 숭배했지만 당대에 인기가 있는 건 요리토모였다. 요리토모가 당대 무사들을 대변하는 쪽이었기 때문. 반면 요시츠네는 거만한 성격에 귀족들 편을 들었기 때문에 별로 인기가 없어서 나중에 요리토모에게 반기를 들어도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28] 여기서 유래하여 유방을 '패상융준'(沛上隆準) 또는 '한준'(漢準)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참고로 이 융준용안이라는 말은 훗날 조선의 건국자인 이성계이방원을 묘사할 때도 등장한다.[29] 대체로 이런 내용은 창업군주의 비범함을 강조하려 꾸며낸 이야기라 신빙성은 낮다.[30] 대풍기혜운비양[31] 위가해내혜귀고향[32] 안득맹사혜수사방[33] 홍곡고비 일거천리[34] 우핵이취 횡절사해[35] 횡절사해 당가내하[36] 수유증격 상안소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