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학살 사건들을 정리한 문서. 테러 사건이나 제노사이드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작성시 시대순으로 정리할 것.
2. 한국
- 여요전쟁 (993 ~ 1019) 거란군의 민간인 학살 (규모 불명)
- 무신 정변 (1170) 당시 문벌 귀족 학살 (규모 불명)
- 진주 민란 시기 (1200)에 벌어진 정방의 일당의 학살[1]
- 대몽항쟁 당시 몽골군의 민간인 학살
- 목호의 난 당시 제주도민 학살[2]
- 왕씨 몰살 (1392 ~ 15세기 초반)
- 임진왜란 (1592 ~ 1598) 중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
- 홍경래의 난 직후의 관련자 집단처형
- 1931년 화교배척사건
- 북한 정권 성립 직후 토지개혁에 저항하는 지주 및 유산가 학살.
-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 대구 10.1 사건
- 제주 4.3 사건 (1948 ~ 1954) (약 3만 명)
- 여수·순천 10.19 사건
- 6.25 전쟁 학살 (1950 ~ 1953)
- 6.25 전쟁 학살/인민군과 좌익
- 6.25 전쟁 학살/유엔군, 국군, 미군, 우익
- 보도연맹 학살 사건: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국군, 대한민국 경찰, 서북청년회 등이 대한민국 국민들을 상대로 6.25 전쟁 기간 와중에 조직적으로 벌인 대규모 민간인 학살. 연구에 따라 추정치가 다르지만 대략적으로 약 10만~3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 서울 홍제리 집단총살 사건: 서울 북쪽 홍제리 교도소에 갇힌 민간인들을 한국군이 학살했는데 마침 그 지역에 주둔했던 영국군이 이 사건을 목격하여 영국 정부에 알려서 한때 영국 정부에서 이승만을 몰아내고 한국을 유엔이 관리해야 한다는 논의까지 나왔다.#1
- 파주군 두포리 학살 사건: 1950년 10월 파주군 두포리 장깨다리 근처[4]에서 있었던 철수하는 인민군에 의하여 자행된 민간인 학살.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중에는 애국청년단과 장깨다리 근교 마을 주민들이 대다수였다. 생존자는 오직 한 명이었고[5] 매우 참혹한 사건이지만 다른 학살극에 비해 제대로 알려져 있는 정보가 매우 적은 편이다. 인민군들이 용의주도하게 증거를 말살하려 했지만 생존자가 남아있었고, 마침 인민군을 추격하던 호주군이 파주를 지나가면서 기록한 매체들이 남아 있어서 세간에 그나마 알려질 수 있었다.
- 신천·재령군 봉기[6]
-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7]
-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8]
- 거창 양민 학살사건
- 서울의대 부속병원 학살 사건
- 해주시 학살 사건[9]
-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
- 국민방위군 사건
- 4.19 혁명 (1960) 당시 경찰이 저지른 시위대 학살
- 5.18 민주화운동 (1980) - 광주 학살
-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1975 ~ 1987) (최소 513명)
- 고난의 행군[10]
- 정치범수용소/북한[11]
3. 그 외 국가
☆: 한국과 관련된 국외 발발 학살들- 로마군의 유대인 학살: 서기 132년에 발발한 바르 코크바 주도의 유대인 반란을 로마군이 진압하면서 무려 58만 명의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했고, 1035개의 마을들이 파괴되었으며 많은 유대인 포로들이 로마군에게 붙잡혀 노예로 팔려나갔다#.
- 명청교체기 학살[12]
- 1298년 델리 학살: 인도의 수도 델리에 수용되어 있던 몽골군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들의 가족들이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다.#
- 1848년 헝가리 혁명 헝가리인-루마니아인 양방 학살: 현재는 루마니아 영토이나 과거 헝가리 왕국 영토였던 트란실바니아에서 발생한 헝가리인과 루마니아인의 양방 학살. 헝가리인은 혁명을 진압하려던 오스트리아 제국군에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 오세이지족 연쇄살인 사건: 20세기 초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오세이지족 사람들이 윌리엄 킹 헤일이 이끄는 백인 집단에 의해 연쇄살인당한 사건.
- 2021년 미얀마 쿠데타로 인한 미얀마 내전 중 군부의 학살
-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한 러시아 연방군의 우크라이나 민간인 학살.
- 모라 학살
- 2022년 페루 시위 도중 정부군이 시위대를 향해 헬기와 탱크를 동원해 자행한 민간인 학살.
- 2023년 수단 내전 중 신속지원군이 자행한 학살.
-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 과정에서 방글라데시 경찰의 민간인 학살.
- 2.28 사건[A]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
- 3국 동맹 전쟁 당시의 브라질군에 의한 파라과이인 학살
- 아인자츠그루펜의 학살
- 털사 인종 학살
- 9.11 테러 (2001)[A][15]
- 30년 전쟁 당시의 독일인 학살
- 9월 대학살
- T4 작전[16]
- 경신 참변[17]☆
- 갈리치아-볼히니아 학살: 스테판 반데라의 사상을 따르는 우크라이나 반데라주의자들이 갈리치아-볼히니아에서 폴란드인, 유대인, 체코인,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저지른 학살.
- 그로데고보 학살약탈 사건
- 그래뉴 학살[18]
- 2014년 7월 가자지구 분쟁
- 갈근묘 사건(Gegenmiao massacre)
- 갈리아 전쟁 당시의 갈리아인 학살
- 과테말라 내전 당시 좌익 및 원주민 학살
- 관동대학살/일본군의 학살☆ #
- 글렌코 학살(Massacre of Glencoe)[19]
- 난징 대학살 (1937 ~ 1938)
-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 니콜라옙스크 사건
- 노르웨이 연쇄 테러
- 다르푸르 학살
- 다하우 강제수용소 경비병 처형 사건(다하우 해방 후 보복): 대전 말기 미군과 수용자들에 의해서 다하우 수용소에서 독일군 포로와 수용소 직원(무장친위대) 대략 500명이 구타 밎 총살 등으로 사망한 사건. 수용소의 비극적인 참상에 충격을 받은 미군에 의해서 사건이 일어났고 지휘관들이 제제하는 것이 늦어져서 사망자가 좀 있었다. 이 사건을 일으킨 미군들은 법정에 기소되었으나 형식적으로 재판에 송치만 되었지 실제로 처벌을 받은 병사는 없었다. 엄밀히 전쟁범죄는 맞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례적으로 학살자들의 학살 행위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20]이 많으며 동정적인 시선을 받는다.
- 대갑서사항청사건(大甲西社抗清事件): 동녕 왕국이 청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 1699년 강희제 통치 때 벌어진 툰샤오 사 사건 뒤인 1732년 옹정제 통치때 다두 왕국의 마지막 후신들이 한족의 군사작전으로 인해 그대로 토벌당해 대만 원주민들의 부족 동맹 연합왕국이었던 다두 왕국이 멸망한 학살 사건이다. 이후 원주민들은 한족들과 끊임없이 대립했다. 그런데 동녕 왕국 역시 청나라처럼 원주민들을 탄압해 착취하거나 학살한 전적이 있었다.
- 대숙청[A][22]
- 대약진 운동 당시의 대기근[23]
- 둘리틀 특공대 보복 학살: 둘리틀 특공대를 보호해줬다는 이유로 중국인 25만 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 학살 규모가 난징 대학살과 비슷하지만 엄연히 별개다.
- 라스쿨라치바니예: 스탈린 시절 공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농촌으로부터 무자비한 공출로 인한 우크라이나 대기근 포함
- 라틴인 학살
- 르 파라디 학살: 2차대전 중 프랑스 침공 당시 본대로부터 낙오되어 적에게 포위된 영국군 왕립 노포크 연대 2대대가 총알이 떨어질 때까지 저항한 뒤 항복하자 2대대를 사로잡은 제3SS사단이 이들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사건. 99명 중 2명만이 살아남았다.
- 리디체 학살
- 르완다 학살
- 레오폴드 2세의 콩고 학살
- 1959년 티베트 학살: 1950년 티베트가 중국에 강점된 후 시행되던 토지 몰수, 반종교 정책 등으로 인해 민심이 요동치던 중 1959년 달라이 라마 14세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경호원을 한 명도 데려오지 말고 경극을 보러 오라는 초청을 받은 뒤 라싸에서 달라이 라마를 보호하기 위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자 중국군이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건. 당시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증언으로는 라싸 시내에 시체들이 깔려 있었다 하며 대략 85,000명이 학살된 걸로 추정되고 있다.
- 마긴다나오 학살
- 마오쩌둥의 토지개혁 당시 저항하는 지주, 유산가들에 대한 학살
- 마녀사냥
- 마닐라 대학살
- 마루타☆
- 말메디 학살
- 메이완드 구 살인 사건
- 모란사 사건
- 몽골 제국의 정복전쟁 중 벌어진 학살[A]
- 문화대혁명[25]
- 미군 이라크 일가족 살인사건
- 뭄바이 연쇄 테러
- 민생단 사건☆
- 밀리환초 학살사건☆
- 바레인 반정부 시위
- 바나나 학살[26]
- 바빈야르 학살
- 발렌타인 데이 학살[27]
- 방데 전쟁
- 버마 대학살
- 베트남 전쟁
- 벵골 대기근[29]
- 비스카리 학살(Biscari massacre)[30]
- 북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 서부개척시대
- 북부 대약탈: [윌리엄 1세의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저항하는 잉글랜드 북부를 진압하며 이루어진 학살
- 사마의의 공손연의 난 토벌 직후 15세 이상 남자 7천명을 학살하고 그 해골을 쌓아 전승 기념비로 삼은 사건.
- 사브라, 샤틸라 팔레스타인 난민촌 학살사건[31]
- 산악 베이스 사건 / 아사마 산장 사건[32]
- 삼보의 난
- 소련의 1921-22년 사이의 대기근
- 샤에체라그 학살사건
- 수정의 밤
- 숙칭 대학살: 싱가포르 화교 학살[33]
- 슈노뉴 학살[34]
- 시리아 정교도 학살
- 신멸작전
- 서주 대학살
- 시리아 민주화 운동
- 시마바라의 난 때 벌어진 기독교인, 농민 학살.
- 신안대학살
- 십자군 전쟁 중에 일어난 학살들.
- 셈린 학살: 군중 십자군이 헝가리에서 저지른 학살.
- 안티오키아 학살: 1차 십자군이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행한 대학살.
- 예루살렘 학살: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행한 대학살.
- 에데사 학살: 장기가 에데사 백작령을 점령하고 서유럽 기독교도들은 물론, 원주민인 아르메니아 기독교도들도 모두 학살한 사건.
- 리처드 1세의 포로 학살: 살라딘이 약속한 몸값도 지불하지 않고 포로와 성유물도 돌려주지 않자 리처드가 2000여명의 포로들을 학살한 사건. 그러나 살라딘도 약속을 어겼기에 당시 관점에서는 부정적인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
- 안티오키아 학살: 바이바르스가 안티오키아를 점령하고 자행한 학살.
-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구교도인들의 신교도 학살)
- 아르헨티나의 원주민 말살 작전(사막 정복작전)
- 아르메니아 학살
- 아시리아인 대학살[35]
- 아일랜드 대기근: 식민지 수탈과 영국의 잘못된 구제정책이 빚은 참사이다.
- 아프가니스탄의 마자르이샤리프 학살: 탈레반의 민간인 학살과 북부동맹의 탈레반 보복학살이 있었다.
- 양저우 학살
- 연해주 4월 참변☆
- 염민의 갈족 학살
- 알제리 전쟁[36]
- 암리차르 학살사건
-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 우서 사건
- 원폭 및 민간인을 고의적으로 노린 무차별 폭격[37]
- 추축국의 무차별 폭격
- 독일의 무차별 폭격
- 일본의 중국대륙 무차별 폭격
- 연합국의 무차별 폭격
- 드레스덴 폭격 - 본래 목표는 군수공장 등 산업시설이었으나 기상악화와 부정확한 폭격으로 민간인 피해도 컸다.
- 도쿄 대공습[A]
-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A]
-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 대량학살
-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포로 및 민간인 학살
- 운디드니 학살사건
- 이라크 내전[A][41]
-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에 의한 학살
- 신자르 대학살 - 이라크 신자르에서 야지디교인들을 참혹하게 학살한 사건.
- 이라크군, 시리아군, 쿠르드족, 그외 시아파 민병대 포로 학살
- 이집트 콥트 정교회 교인 학살
- 시리아 코바니 겨자 가스 살포 사건
-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당시 학살
- 레임 음악축제 학살: 2023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당시 하마스가 음악축제를 즐기던 시민들을 상대로 저지른 학살 및 인질극
- 베에리 학살
- 니르 오즈 학살
- 크파르 아자 학살
-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민간인 학살[42]
- 인도네시아 쿠데타 당시의 학살[43]
-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 학살
- 인도네시아의 서파푸아 학살
- 인민사원 집단자살 사건
- 에스파냐 콩키스타도르의 남미 원주민 학살
- 장검의 밤
- 장평대전
- 제1차 세계 대전 중의 학살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 제3차 포에니 전쟁중의 카르타고인 학살
- 죽음의 철도
- 준가르 학살
- 첼레 학살(Celle massacre)
- 체트니크의 크로아티아인/무슬림 대량 학살[44]
- 체르케스 대학살
- 체첸 전쟁 중의 체첸인 학살
- 천안문 학살
- 카비앵 학살[45]
- 카틴 학살
- 오하이오 켄트 주립대학교 발포 사건
- 체첸클리어
- 킬링필드
- 칸다하르 학살 사건
- 카니카티 학살[46]
- 칼라공 학살[47]
-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1453년)에서 벌어진 학살.
- 파리 코뮌
- 파키스탄의 방글라데시인 학살
- 프랑스 혁명[48]
- 피의 일요일 사건(북아일랜드)
- 핑딩산 학살[49]
- 하디타 학살
- 하마 학살
- 해란강 대학살 사건☆
-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독일 제국이 저지른 20세기 최초의 제노사이드
- 훈춘 사건[A]
- 홀로도모르 - 아일랜드 대기근처럼 잘못된 행정이 낳은 대참사라는 의견과 의도적인 학살이라는 의견이 나뉘어진다.
- 홀로코스트
- 훌라 학살
4. 가공매체에서의 학살
자세한 내용은 학살/가공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1] 1200년 신종 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공·사노비들이 향리들의 탄압과 착취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켰는데 엉뚱하게도 이 난리통에 집이 불탄 정방의가 난의 주모자로 오해받아 옥에 갇혔다가 아우에 의해 구출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형제는 노비 반란을 등에 업고, 불평분자들을 끌어모아 진주 고을을 흽쓸고 다니며 무려 6400여명을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기가 막힌 것은 이때 정방의 일당에게 끔찍한 피해를 입은 진주 백성들이 국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일개 도적떼 무리에게 의탁하여 정방의 세력과 대결했지만 패퇴해 전멸했고 정방의는 더더욱 날뛰면서 경남 지방을 휘젓고 다니다가 이듬해 3월에 가서야 진주 사람들에 의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2] 목호의 난은 공민왕 집권 당시의 고려에서 원나라와 관련된 '목호'들이 명나라에 말을 바치는 것을 반대하며 저항하자 최영, 염흥방 등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무력으로 진압한 사건이다. 그러나 진압 와중에 목호들과 연루되어 많은 수의 제주도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을 고려판 4.3 사건이라고 하기도 한다. 더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 제노사이드의 성격을 띄는 사건[4] 현 파주시 파평면이다.[5] 당시 78세였던 주민이 언론에서 얘기하길, 산속에서 한쪽 팔을 제대로 못 가누는 사람이 내려와서는 쇠스랑을 빌려달라 했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되묻자 자신은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인데, 인민군이 철수하면서 자신의 처자식은 물론 마을 주민들과 청년들을 세워두고 기관총으로 사살했으며, 자기 자신은 운 좋게 팔 관통상으로 끝나, 확인사살을 피하기 위해 죽은 척 하고 살아남았다며 사정을 얘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이 학살의 생존자가 알려준 지점으로 가보니 시체 썩는 냄새가 참혹하다 못해 코가 삐뚤어질 지경이었고, 인민군의 잔혹함에 주민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고 증언한 기록이 남아있다.[6] 좌·우익 대립에 의한 민간인 학살[7] 국군과 북한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8]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9] 북한군의 자국민 학살[10] 후술할 대약진 운동, 벵골 대기근과 같은 인의적인 대기근.[11] 정치범수용소의 운영 방침 자체가 "당과 수령과 조국을 배신한 배반자로서 곱게 죽어서는 안 되고, 뼈에 사무치도록 아픔과 고통을 처절하게 느끼다 서서히 죽음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인 만큼(#) 정치범수용소 운영 자체를 반체제 인사에 대한 조직적, 계획적인 학살이라 봐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12] 양주에서만 80만 이상, 광주에서 70만 이상이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변발을 거부했다가 학살당하기도 했다.#1, #2 물론 과장일 가능성도 있고 상당수의 희생자는 명말-청초 사이의 혼란기에 발생된 희생자 전체를 포함한 것이다. 이 혼란기에 지역을 떠난 유민들의 많은 수가 명이 멸망한 뒤 청이 제대로 안정된 뒤에야 나타났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또한 이 시기 많은 명나라 유민이 조선과 베트남, 일본으로 이민을 가기도 했다.[A] 한국인 희생자 발생[A] [15] 한국인 공식 사망자 1명, 한국계 미국인 사망자 28명.[16] 장애인에 대한 국가기관의 학살.[17] 다른 이름으로는 간도 참변이며 강조하여 경신 대참변이라고도 한다. 1920년 일제가 마적 토벌이라는 명분 하에 독립군을 소탕할 목적으로 간도 지역의 조선인들을 대거 학살한 사건. 봉오동 전투에서 일제가 패배하자 일제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훈춘 사건(중국 마적단과 내통하여 훈춘시에 있는 일본 영사관를 고의로 습격한 사건)을 조작하여 이를 빌미로 만주에 군대를 출동시켜 간도에 있는 조선인들을 학살한 사건.[18] 프랑스 그래뉴에서 미 공수부대원들이 백기를 들고 투항하여 자비를 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에게 즉결처분당해 학살당한 사건이다.[19] 스코틀랜드의 글렌코 지역에서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의 맥도널드 가문 일원 78명을 학살한 사건이다.[20] 정확히는 학살 행위 자체에 대한 긍정보다는 나치에 대한 반감에 의해 긍정적인 여론이 생긴 것이다.[A] [22] 숙청과 고려인 강제이주 과정에서 희생자 발생.[23] 터무니 없는 계획으로 일어난 의도하지 않은 참사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마오쩌둥은 자국의 인민이 굶어죽어 감을 분명히 직시했음에도 이를 방관하고 오히려 자신의 체면을 위해 조기에 전국적으로 풀면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던 곡물을 수출하고 외국에서 식량을 수입하지 않는 악행을 저질러 수천만의 인민을 굶겨죽였다. 저명한 역사학자 디쾨터 교수는 마오쩌둥 집권기의 기근 희생자들은 마오 정권에 의한 학살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비협조적이거나 터무니없는 생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인민을 대상으로 무자비한 가혹행위와 학살이 자행되었다.[A] [25] 학살도 많았지만 정확히는 대반달리즘.[26] 1928년 12월 6일, 콜롬비아의 바나나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이 더 나은 처우를 요구하며 벌인 파업을 군인을 동원하여 진압한 학살이다.[27] 1929년 2월 14일, 경찰관으로 위장한 알 카포네 파 조직원들이 라이벌인 조지 모런 파 조직원들을 살해한 사건.[28] 1958년 남베트남 정권이 푸로이 수용소에 있던 베트민 죄수들을 독살 및 총살한 사건이다. 6,000명의 죄수들 중 최소 1,000명이 학살당했다.[29] 직접 학살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주요 식민지 정책인 이간질이 사태를 수습하기 어렵게 만들었다.[30] 1943년 7월 14일, 시칠리 침공 당시 71명의 이탈리아군 포로와 독일군 포로 2명이 미군에 의해 사살된 사건.[31]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시기, 대통령 임기 시작일을 1일 앞두고 대통령 당선인이자 팔랑헤당이라고도 부르는 친미·친서방·친이스라엘 기독교 민병대 카타엡(Kataeb)당의 대표인 바시르 게마옐(بشير الجميّل, Bachir Gemayel)이 시리아 정보원에 의해 암살당하자 제대로 빡친 팔랑헤가 레바논에 있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봉쇄 후 학살한 사건. 목표는 테러리스트 제압이었다고 하지만 이미 이 사건은 작전 수일 전에 노출되어서 남자들은 모두 탈출한 뒤였고, 부녀자와 아이들만이 남아있었음에도 3일간에 걸쳐서 학살이 자행되었다. 이 학살을 이스라엘군은 묵인하다 못해서 조명탄까지 쏴주면서 부추겼기 때문에 이스라엘에 다시 국제적 비난이 쇄도하였다. 학살의 원인인 바시르의 암살을 일으킨 시리아는 아에 모른척 무시했다. 바시르와 왈츠를이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다.[32] 공산주의 테러집단인 일본 연합적군이 자신들의 멤버들 중 12명에 린치를 가해 살해한 사건[33] 肅清大虐殺.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싱가포르를 점령한 일본군이 2월 18일에서 3월 4일 사이에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 화교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34] 벨기에 슈노뉴 마을 근처에서 미군이 독일군 포로를 학살한 사건, 말메디 학살의 일로 역으로 보복한 것이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35] 1차 세계대전 중 일어난 학살로 오스만이 동원한 비정규군 + 쿠르드족이 주도했다.[36] 프랑스군이 저지른 학살이 대부분이지만 알제리인들이 프랑스인들을 학살한 사건도 있었다. 그나마 알제리인들이 보복 학살은 상대적으로 옹호 받는 편이다.[37] 단, 이 경우는 당시의 전쟁법 기준으로는 전쟁범죄가 아니다.[A] [A] [A] [41] 내전 초기 당시 한국인 희생자 발생. 또 한국인이 필리핀에서 ISIL 연계조직 아부 사야프에 의해 피랍되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42] 하마스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이후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폭격과 지상군 투입으로 인해 라파흐 난민촌 등에서 다수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43] 1960년대 수하르토의 쿠데타 이후 공산당 토벌을 빌미로 100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한 사건.[44] 2차대전 때 세르비아에서 일어난 학살. 체트니크 항목도 참조.[45]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같은 편인 독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46] 1943년 이탈리아 카니카티에서 미군에 의해 민간인이 살해당한 사건.[47] 2차대전 당시 일본군이 버마의 칼라공에서 벌인 학살.[48] 특히 방데 전쟁 진압 과정에서의 학살은 근대적 학살, 제노사이드의 효시로 보는 시각도 있을 정도로 잔혹했다. 해당 항목 참조.[49] 1932년 일본군이 게릴라 토벌을 벌인다며 중국에서 저지른 학살.[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