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53:52

사록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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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black> 사록사 전투/파포라 전투
沙轆社之役
시기 1670년
장소 다두 왕국
원인 동녕 왕국의 토지 확장 침범으로 인한 한족과 대만 원주민 간의 갈등
교전 세력 동녕 왕국 세력 다두 왕국[1]
지휘관 정경
유국헌
카마찻 말로에
병력 3000명 이상 500~600명
피해규모 불명 수백명 학살 및 사망, 대다수 마을들이 전소 및 파괴
결과 동녕 왕국의 승리
영향 원주민들의 대다수 사망 및 영토 축소, 동녕 왕국의 영토 증가

1. 개요2. 상세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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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록사 전쟁이라고도 하는 사록사 전투는 17세기에 명나라 유신들인 동녕 왕국의 영토 확장과 논밭 증가로 인해 파포라족을 중심으로 한 다두 왕국의 대만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삶의 터전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심각한 생존 위기에 직면하였고 이내 양측 간의 사이에서 여러 갈등과 충돌 끝에 일어난 전투이다. 이 전투의 규모는 결코 작지 않았으며 정경 역시 이 전쟁에 참전했다.

1650년 전후에 유럽의 네덜란드스페인이 타이완 섬을 정복하고 섬 전체 주민들의 조사가 이루어졌었는데 이때 대만의 타이중 사루구(沙鹿區)는 사록사(沙轆社)로 불렸으며 거기의 주민들은 사슴을 중심으로 한 수렵과 고구마, 옥수수 농사를 하고 있었던 평포족 안의 파포라족이었다고 한다.

사록사 사건(沙轆社事件), 사록사 대학살(沙轆社大屠殺), 다두왕국 전역(大肚王國戰役)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2. 상세

동녕 왕국(명정)의 2대 군주 정경은 주둔지를 대만 남서부의 각지로 펼쳐 나갔고 그 과정에서 늘어나는 백성과 군대에 필요한 필수적인 안식처와 식량 및 보급 문제, 청나라의 침략과 교전을 대비한 세력 확장 등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우병어농(寓兵於農)[2]의 군둔(軍屯)[3]을 실시하였고 수많은 동녕 왕국의 장군들과 병사들은 충분한 식량 생산을 목적으로 해서 쟈난평원(嘉南平原)을 비롯한 대만 남서부의 평원 부분에 둔전(屯田)[4]과 식량 확보를 위해 서남부 땅에다 간척지와 경작지를 분산하며 마을별로 토지를 나누고 개간하여 건축을 짓고 간척과 경작을 하여 간식(墾殖)[5] 하는 것과 유국헌을 장화현으로 보내 좀더 둔전을 마련하는 등의 전략을 추진했고 결과 18,454개 이상의 논밭을 경작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대만 원주민들의 영토를 침범하여 타이중시를 다스리던 다두왕국을 위협하게 되었고 이 일로 다두왕국의 손실을 초래하였으며 이내 동녕 왕국과 평포족(平埔族) 원주민 부족들은 서로 양쪽 간의 토지를 두고 충돌 및 갈등을 빚었고 끝내 동녕 왕국과 타이완 원주민 부족들의 전쟁이 일어났다.[6]

1648년에 카마찻 아슬라미에(Camachat Aslamie)가 죽자[7], 그의 뒤를 이어 다두 왕국의 왕위를 계승하여 다두의 왕이 된 아슬라미에의 조카인 파포라족의 카마찻 말로에(Kamachat Maloe)[8]는 다두왕국을 통해 파포라족을 중심으로 해서 원주민 부족 동맹 연합을 모아 이들을 무장시켜 동녕 왕국의 침략 전투에 대비했고 병으로 사후한 정성공의 뒤를 이어 동녕 왕국의 왕이 된 장남 정경 역시 마찬가지로 장군 유국헌을 중심으로 해서 무장시킨 군사를 모아 원주민 부족들과의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그렇게 영토를 두고 한족과 원주민들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원주민들은 대만 섬 특유의 자연환경을 활용하여 동녕 왕국에게 대항했다. 전투의 규모는 상당했으며 동녕 왕국의 장군 유국헌은 군사를 이끌고 여러 원주민 부족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그중 부족 동맹 연합의 중심이었던 파포라족의 전사들과 민간인들을 수백명 학살했고 이 학살에서 파포라족 전사와 민간인 6명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원주민들은 다두왕국을 푸리진(埔里鎮)으로 강제 이전하여 슈이리 향(水里鄉)에 피신했으며 그러다 또 다시 동녕 왕국과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싸움은 서로 양측 간의 무승부로 끝이 났고 동녕 왕국은 정착지를 불태워 퇴각하고 원주민들도 산악 지역으로 후퇴했다.

결과적으로 군병력과 무기 쪽에선 동녕 왕국이 우세하였고 결국 이 전투는 원주민들의 패배로 끝났으며 원주민들은 다두 왕국 대부분의 붕괴와 수백명의 부상자 및 사상자를 낳은 채, 마을 일부를 불태우고 동녕 왕국을 피해 깊은 밀림이나 험한 고산으로 후퇴했다. 한편 전투에서 승리한 동녕 왕국은 대다수의 원주민들을 학살하여 그들의 토지는 물론 농장과 밭까지 갈취하고 마을까지 불태워 없앤 다음, 그곳의 땅을 개간하여 자신들만의 농장과 논밭, 건물을 만들었다.

또한 포로로 붙잡은 원주민들은 본보기로 고문이나 사형을 시켰고 혹은 노예로 착취했다. 그렇게 원주민들의 영토는 축소되고 반대로 동녕 왕국의 영토는 확장되어 갔다.

이후 동녕 왕국이 청에게 멸망당하고 청의 한족들이 대만으로 건너오자 한족과 원주민 간의 갈등은 더욱더 심해지다 이내 한족과 원주민 부족의 또 다른 전투들인 툰샤오 사 사건, 대갑서사항청사건이 벌어진다.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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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포족 안의 파포라족을 중심으로 한 원주민 부족 동맹 연합[2] 평소에는 경착을 하다 전시상황이 오면 군사가 되어 전투에 참가하는 농병정책.[3] 농부들이 아니라 장군들이나 병사들이 농사일을 하는 것.[4]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5] 황무지를 개간하여 식량을 생산하는 일.[6] 사실 정성공 재위 기간 때 1661년에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원주민들의 영토까지 침범하여 그로 인해 동녕 왕국과 남부의 평포족 간의 갈등이 생겨났고 이때 다두 왕국의 전사였던 대만 중부 지역 출신의 파포라족 아 텍 카우종(阿德狗讓 / 1592년-1661년)이 정성공의 원정으로 파견된 두 장군의 매복전술에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다.[7] 정확한 사인은 불명.[8] 말로에가 사후한 삼촌인 아슬라미에의 뒤를 이어 다두 왕이 되자 그의 계부 타라보에(Tarraboe)가 섭정되었지만 실질적인 지배력과 통치권은 말로에의 외할머니가 손에 쥐고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