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30 02:56:24

프란츠 슈베르트

슈베르트에서 넘어옴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음악가로서2.3. 죽음
3.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4. 작곡 성향5. 사생활과 외모6. 슈베르트 작품의 특징7. 주요 작품
7.1. 교향곡7.2. 협주곡&관현악7.3. 실내악7.4. 피아노7.5. 가곡7.6. 오페라
8. 기타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ranz_Schubert_by_Wilhelm_August_Rieder_1875.jpg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년 1월 31일 ~ 1828년 11월 19일.

오스트리아의 음악가이자 작곡가로, 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모차르트-베토벤-슈베르트로 이어지는 각 세대를 대표하는 천재음악가 3명중 마지막 인물이다.

2. 생애

그의 생애는 가난하고 매우 고달팠다. 음식을 살 때 밤에 떨이로 파는 음식(소금을 뿌려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을 사서 먹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전해진다.

2.1.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교외의 리히텐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리히텐탈에서 초등학교의 교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장인의 딸로 요리사였다. 무려 16명이나 되는 자식들[1]에서 13번째로 태어난 슈베르트는 어릴 때부터 음악을 즐겨하던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배우게 되었다. 6살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큰 형에게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취미나 여가활동, 향후 학교 교사로서의 교육 수업 차원에서 음악을 가르친 것이었지 슈베르트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였고 학교 선생을 시키려고 했었으나, 슈베르트는 전문적인 음악가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 탁월한 미성을 가지고 있었다. 11살때(1808년) 스타드콘빅트 (궁정 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아름다운 목소리 덕분에 빈 궁정예배당의 아동 합창단에 뽑혔다. 슈베르트는 그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했는데 특히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다.

학창시절에 궁정 오르간 연주자인 루치카와 궁정 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로부터 음악 이론을 공부했고,[2]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제1 바이올린 주자(콘서트 마스터)를 담당하기도 했으며 탁월한 미성으로 독창회에 나가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지만 13세(1810년)에 변성기가 도래하여 특유의 미성은 사라졌고 이에 따라 합창단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결국 학교를 나와야 했다.

2.2. 음악가로서

당시 오스트리아 법은 징병제였기 때문에 일정연령이 된 남성은 군대를 가야 했다. 당시 슈베르트의 입장에서 군대를 안 가는 유일한 방법은 학교 선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음악쪽으로 진로를 삼고 싶었던 슈베르트는 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이 내키지 않았으나 군대를 가고 싶지 않었던 슈베르트는 결국 1814년 17세때부터 아버지의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하면서 저학년의 수업을 담당했다. 이 해에 슈베르트 최초로 발표된 큰 작품인 F장조의 장례미사곡을 작곡했는데 이때 독창을 맡았던 한살 아래의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3].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다수의 가곡들을 작곡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괴테의 시를 기반으로 한 유명한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 '마왕' 등이 작곡되었다. 특히 마왕을 작곡할 때 집중력이 아주 대단했는데, 친구들이 와서 슈베르트에게 인사할 때 그들이 자기 바로 옆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갑자기 필을 받아 악보에 작곡을 하고 이 선율을 본 친구들이 아주 좋다고 외친 후에야 슈베르트는 그들을 알아보았다고한다. 이곡의 초연 당시 지인 연주자는 진짜 마왕을 소환한 것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고한다.

이듬해인 1815년에는 무려 145개의 가곡과 2개의 교향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했지만 소수의 친구들 말고는 아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친구들과 연주모임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었다. 얼마 되지 않던 친구들은 죽을 때까지 그와 친했고 서로를 아꼈으며 도움을 주고 받았다. 쇼버와 슈빈트를 비롯하여 법률가 요제프 폰 슈파운(1788~1865), 법률을 전공한 시인 요한 마일호퍼(1787~1836), 화가 레오폴트 쿠펠비저(1796~1862), 극작가 에두아르트 폰 바우에른펠트(1802~1890), 작곡가 안젤름 휘텐브렌너(1794~1868), 그리고 친구가 아닌 아버지 또래이지만 그를 후원하던 성악가 미하엘 포글(1768~1840)같이 죄다 살아 생전 인정받던 예술가들이 많았다.

19살이던 1816년, 초등학교 교사 일에 신물이 난 슈베르트는 마침 라이바흐의 초등교원양성학교에 음악교사 자리가 비자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친구 슈파운이 몇 개의 가곡을 출판할 것을 제안하고 그 중에 괴테의 시를 바탕으로 한 작품 몇 개를 추려서 괴테에게 보낼 것을 제안하자 슈베르트는 고심 끝에 승낙했다. 하지만 괴테는 슈베르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악보를 되돌려보내자 슈베르트는 실망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작곡은 계속되어서 가곡 '방랑자', '자장가' 등이 작곡되었다.

결국 슈베르트는 아버지와의 대립으로 교사생활을 그만두고 빈으로 나와서 친구인 프란츠 폰 쇼버(1798~1882)와 함께 살면서 작곡에 열중했다가 쇼버의 동생이 외국에서 돌아오자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818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여름동안 음악 가정교사를 구했는데 슈베르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음악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슈베르트는 고향집을 완전히 떠나 개인 레슨을 하면서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23년,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처녀'를 작곡했고 가곡 '방랑자'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피아노용으로 작곡한 '방랑자 환상곡'을 내놓기도 했다.

1827년, 슈베르트는 경제적 어려움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함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다. 이 해에 그는 평소 가장 존경하던 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 짧은 만남을 가졌다. 이 때 자신이 작곡한 작품 중 몇 곡의 악보를 베토벤에게 소개하자 베토벤은 그의 음악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이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는 베토벤 항목에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하자.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크게 슬퍼했고 베토벤의 관을 운구하는 음악가들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한편 베토벤 사후 슈베르트의 음악가로의 진로를 반대하며 학교교사를 강제로 시키려던 아버지와 슈베르트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집안의 형제들과 슈베르트의 주변 친구들이 슈베르트가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칠 무렵 슈베르트의 아버지를 설득하자, 아들이 작곡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고 아들을 용서하면서 마침내 두 부자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화해도 잠시, 슈베르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형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 요양 치료를 했다. 병명은 티푸스, 매독, 식중독 등 설들이 다양한데 확실히 밝혀진 건 없다. 그 뒤 슈베르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말년에 슈베르트는 헨델의 '메시아'의 악보를 구해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죽기 불과 1년전에야 피아노를 장만했다.다시 말해서 이전까지는 피아노 없이 자신의 머리에서 생각나는 대로 쓴것이다. 모차르트도 이것이 가능하다고 전해지지만 모차르트는 피아노가 있었다.

2.3. 죽음

결국 1828년 11월 19일 혼수상태에 빠진 슈베르트는 공무원이던 둘째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31살이라는 너무나도 한창의 나이에 위대한 작곡가의 삶을 마감했다. 혼수상태였을 때 "묻혀지는...... 건... 싫어... 홀로 있는 건 싫어......" 라고 중얼거리자 페르디난트가 프란츠, 모두 걱정하여 모였다면서 걱정마라고 하자 갑자기 그는
하지만, 여긴 베토벤이 없어!

라고 말했다. 마지막까지 존경하던 이의 이름을 외친 모양. 그리고 그렇게 숨을 거두면서 저게 유언이 되고 말았다. 임종을 지켜본 친구 슈빈트는 형 페르디난트가 갓 숨을 거둔 그의 얼굴을 만지며 한참을 울었으며 "너무 일찍 갔구나, 프란츠. 너무나도 일찍 갔어!" 라며 슬퍼했다고 회고했다.

슈베르트의 바람대로 친구들은 그가 그토록 존경하던 베토벤이 묻힌 빈 벨링크 공동묘지[4]에 그의 곁에 안장했다.슈베르트 및 여러 유명 음악가들의 묘비석 처음에는 웬 듣보잡을 감히 베토벤 곁에 묻느냐며 반대도 있었으나 후원자이던 존라이트너 백작이 20년 아니,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베토벤 못지않게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을 위대한 음악가라고 적극 옹호하고 베토벤 씨도 잠깐 만났음에도 그를 인정했던 만큼, 곁에 묻혀지면 베토벤 씨도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주장한 끝에 묻힐 수 있었다고 한다.

쇼버에게 생을 마감하기 1주일 전인 1828년 11월 12일에 보낸 편지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인데, 여길 봐도 그의 마지막 당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잘 있었어? 나는 너무나도 아프다네. 고열과 어지러움이 계속되고 정신을 유지하기도 힘드네. 먹을 것을 먹는 즉시 토해버리고 열하루째 물만 마시고 있어.

그나마 페르디난트 형과 린나(누이동생)가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있어줘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간혹 좀 낫기도 하고 그러면 책을 읽고 있다네, 지금 마지막 모히칸이라는 소설을 재미있게 읽었네. 이거 작가인 쿠퍼가 쓴 다른 책이 있으면 좀 빌려줄 수 있겠나?

자네의 친한 친구인 프란츠가

1828년 11월 12일.

이 편지는 빈에 있는 슈베르트 생가 박물관에 벽에 걸려 액자로 전시되어 있다.

3.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

"매일 밤 침대에서 잠들 때마다 다음날에 눈을 뜰 수 없다면 좋겠다." - 프란츠 슈베르트 본인

슈베르트는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일찍 요절한 음악가로 보통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하여 반론도 있다. 슈베르트 연구가이던 오토 비버의 주장에 의하면 1822년 악보 출판 수입으로 2000굴덴을 받았다는 것을 세월이 지나 발견했는데 이 액수는 당시 공무원 10년 이상 근무자 연봉이라는 거액이다.[5]

자세히는 생전에 인정을 받지 못한 게 사실이며, 저 돈은 바로 성악가로 인맥이 있던 미하엘 포글과 귀족이던 후원자인 레오폴트 폰 존라이트너 백작이 그의 마왕 악보 판권을 사주면서 1822년 내준 것이다. 당연히 듣보잡인 슈베르트를 어느 출판사도 내주지 않아서 할 수 없이 백작이 자비로 악보를 내주고 이를 음악계에 알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작이 저 거액을 지급한 것. 게다가 저 거액이 악보 출판 수입보다는 슈베르트를 아끼던 백작이 반거짓말로 내준 돈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기에 인정받았다고 하기에는 아리송하다.

그렇긴 해도 제법 큰 귀족이 후원하였다는 건 어느 정도 생활의 기반이 잡혔기에 비참한 삶을 누렸다는 것도 결국 잘못 알려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슈베르트는 돈에 얽매이지 않아서 후원자인 백작이 되려 곤란해 했다.

그리고 돈을 벌어도 다른 가난한 예술가 후배나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같이 나누기도 하고 생활비를 도왔다고 한다. 그와 친구였고 같이 가난한 시절을 겪었다가 나중에 화가 및 조각가로서 꽤 성공한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t, 1804~1871)가 남긴 회고록에 그 때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야기가 나와있다. 하루는 좀 돈을 어느 정도 벌게 된 다른 친구가 슈베르트와 슈빈트의 사정을 알았기에 그들에게 모처럼 밥 좀 산다고 했다. 이 자리에 나온 슈베르트는 그 자리에서 10분도 안 가서 큼직한 빵을 6개나 단번에 먹어버리고 차도 여러 잔을 얼른 비워버렸다. 그리고 좀 늦게 자리에 나타난 슈빈트도 그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도 똑같이 그렇게 먹어버렸단다. 다른 이들이 이 둘을 보고 그리도 배가 고팠나? 하자 두 사람은 "이틀 동안 물 빼고 아무 것도 못 먹었다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슈빈트는 이 글을 쓰면서 자신은 그래도 나중에 꽤 성공해서 이제 굶주리는 일은 없지만 그렇게 배고픈 상태로 죽어간 슈베르트를 너무나도 안타까워했다. 다만 위에 악보 판매 일을 보면 이 이야기가 친구들이 그의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 이미지를 위하여 왜곡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거 말고도 다른 기록을 보면 가난하게 살아간 것도 맞다고 볼 수 있다. 1817년 3월에 친구 슈파운이 쓴 글을 보면 이미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성악가 포글이 나이 스물을 갓 넘긴 슈베르트를 처음 만났는데, 나이도 50에 가까운데다 풍족하게 살면서 꽤 잘 차려입은 포글과 꾀죄죄한 차림에 헝클어진 머리 스타일을 하고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나온 슈베르트와의 첫 만남은 포글의 얼굴에 '뭐야 이 녀석은?'이라는 실망감을 단번에 나타나게 했다고. 물론 슈베르트는 음악 실력으로 그 실망감을 뭉개주었고 감탄한 포글이 자네같은 인물이 묻혀졌다니 놀랍다며 뭐 도와줄 게 있느냐고 묻자 단번에 "배가 고프네요"라는 말을 했다. 이에 포글은 쓴웃음을 짓더니 후하게 한턱 냈다고 한다.

이렇듯 포글이나 존라이트너 백작같이 그를 아낀 친구들이나 후원자들이 백방으로 그를 인정받게 하려고 노력했지만 슈베르트 생전에는 이뤄지지 못했고, 몇몇 가곡들의 악보가 출판되기는 했지만 그렇게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슈베르트를 널리 알린 사람은 로베르트 슈만으로, 슈베르트 사후 슈만은 우연히 슈베르트의 가곡 악보들을 보고 크게 놀라서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널리 알렸다. 결국 슈베르트는 뛰어난 음악가로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슈만의 공이 컸다.


4. 작곡 성향

슈베르트는 상당히 독특한 작곡가였는데, 그의 머리속에서는 쉴새없이 멜로디가 흘러나왔고 슈베르트는 단숨에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가지고서 작곡을 했다. 길을 걸으면서도 끊임없이 멜로디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그런 탓에 슈베르트는 겨우 31살의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무려 998개의 작품들을 작곡했다.

슈베르트의 작품들의 가장 큰 특징은 아름다운 멜로디다. 슈베르트는 본인부터 음악으로 즐거웠고, 자신의 음악으로 다른 사람도 즐겁기를 원했다. 그런 생각으로 슈베르트의 작품들은 엄격한 형식이나 잘 짜여진 구조와는 좀 거리가 있다. 실제로 슈베르트는 여러 곡의 피아노 소나타나 교향곡을 남겼지만 살펴보면 반듯한 구조적 형식미와는 거리가 있다. 형식적으로는 좀 느슨하고 구조도 잘 짜여지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선율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그의 음악은 어렵지 않고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청중에게는 한없이 편하고 서정적인 음악이지만 연주자에게는 너무나도 불편한 음악이다. 쌩뚱맞은 전개와 수정없이 머리속에서 나온 멜로디로만 즉시 작곡한 멜로디들은 테크닉면에서나 진행적인 요소에서 매우 불편하고 어렵다. 피아노 소나타의 경우 길이는 또 어찌나 길고 반복이 많은지 여러 피아니스트들에게 좌절을 안겨준다. 또한 슈베르트 본인이 서민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음악도 상당히 서민적이고, 소위 말하는 평범한 빈 사람들이 가진 '빈 기질'을 가장 잘 표현했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에 관련된 그의 멘트는 다음과 같다. "너희들은 그 잘난 신분에 끊임없이 속박되어 있을 뿐이지. 하지만, 난, 자유야!"

천 여 곡에 가까운 그의 작품 중에서 3분의 2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가곡이다. 슈베르트의 별칭이 '가곡의 왕'인데, 무려 633곡에 달하는 가곡을 작곡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가곡은 슈베르트 음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의 음악에서 가장 중요하다. 슈베르트 이전에는 모차르트나 베토벤도 오페라에서 독립된 아리아나 가곡을 작곡하긴 했으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이 결합된 시와 노래, 반주가 혼연일체되는 리트(독일 예술가곡)의 시조가 되었고 이후 슈만, 브람스, 볼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의 가곡은 모두 슈베르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5. 사생활과 외모

인간적으로 슈베르트는 좀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외모도 당대 사람들이 보기엔 못생긴 외모였고 고수머리에 숏다리에다가 단신(약 152cm)이라 여자들에게도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 사실 어렸을 때에는 꽤나 미남형이였으나 젊었을 때 너무 고생을 해서 얼굴이 많이 망가졌다고 한다. 실제로 슈베르트의 청소년기 얼굴 스케치로 알려진 작품을 보면 곱상한 미남형 얼굴이다. 맨 위에 나온 그림보면 얼굴이 왜 이리 퉁퉁 부었지?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돈없어서 팔다 오래되어 소금뿌리고 떨이로 파는 것들이나 사먹다보니 콩팥에 이상이 있어 몸이 퉁퉁 부었다는.

파일:1516170026.jpg

파일:1515874689.jpg

그럼에도 어린애 같은 천진난만함과 밝은 성격에 친한 친구가 많았으며 대부분의 친구들은 슈베르트를 위해 여러가지 도움을 많이 주었다. 그리고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EDPS의 달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평상시 여자에게 인기가 없던 슈베르트는 쇼버의 집에서 잠시 묵었을 때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쇼버의 꼬임에 넘어가 빈의 밤을 즐기기도 했으나 이 때문에 슈베르트가 매독에 걸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우습게도 쇼버는 유흥업소에 자주 들렀으면서도 슈베르트와는 차원이 다른 84살의 긴 인생을 살다갔다. 그는 집안도 부유했으며, 낮에 친구들을 만날 때면 항상 여자를 옆에 끼고 있었는데 매달 여자가 바뀌었다고 한다. 쇼버는 시인이자 작사가로서 슈베르트의 곡에 가사를 붙이기도 했는데, 슈베르트의 마지막 편지로 보아 쇼버가 자신이 굉장히 아끼던 친구라는 걸 알 수 있는 반면 쇼버는 죽을 때까지 슈베르트에 대하여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너무 슈베르트가 일찍 죽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죽을 때까지 없다는 건 좀...

가족끼리 서로 친한 사이였던 소프라노가수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 1798~1875)라는 첫사랑이 있었다. 그가 작곡한 미사곡 Mass No. 1 in F major, D 10을 그녀가 소프라노 독창한 적도 있으며 그녀의 남동생 하인리히에게 곡 모음집을 준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버는 봉급이 적어 결국 결혼하지 못했고 그녀는 제빵사 요한 베르그만(Johann Bergmann.1797~1875)과 결혼해 1남 3녀를 두었다. 소프라노로 활동하긴 했지만 그다지 알려지지 못한 테레제 그로브는 1875년 남편과 그리고 아들인 요한(1822년생)과 같은 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6. 슈베르트 작품의 특징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 친근성과 아름다운 멜로디 때문에 대중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교향곡 8번 '미완성', 피아노 5중주곡 '송어'[6], 가곡 '자장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겨울나그네', '마왕', 현악사중주 '죽음과 소녀' 등이 대중들에게 친근한 슈베르트의 음악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왕'을 슈베르트가 작곡하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슈베르트가 이 곡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편지를 출판사에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베르트의 편지 수신인이었던 독일의 음악 출판사 대표가 마왕은 슈베르트의 작품이 맞다고 주장했다. 당시 출판사는 슈베르트의 '마왕' 악보를 받았지만 돌려보냈는데, 출판사 측의 실수로 동명이인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 놀랍게도 동명이인은 미들네임만 다른 프란츠 안톤 슈베르트[7]로, 당시 유명한 음악가였다. 출판사 대표는 뒤늦게 이를 알고 동명이인 슈베르트 두 사람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했고, 모든 오해를 풀었다고 설명했다. 이 부분은 2015년 8월 2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갖가지 영화 OST광고지겨울 정도로 나오는 이 음악도 슈베르트의 작품이다. 원제는 피아노 3중주 2번 E♭장조 D.929 2악장 'Andante con moto'.

7. 주요 작품

  • 슈베르트의 작품들은 도이치 번호로 정리되어 있으며, 쾨헬 번호처럼 연대기순으로 정렬되어 있다. 모차르트의 1.8배에 달하는 작품 수 덕분에 매우 복잡하지만, 음반 찾을 땐 매우 유용하다.
  • 급한 성격 탓인지 유난히 스케치(Sketch), 단편(Fragment), 미완성(Unfinished)이 많다.
  • 가곡을 다른 작품에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피아노 5중주 송어, 시든꽃 주제에 의한 변주곡, 방랑자 환상곡,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 슈베르트는 21개의 피아노 소나타와 즉흥곡을 비롯한 많은 피아노곡을 남겼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피아노 협주곡은 단 한곡도 작곡하지 않았다.[8]

7.1. 교향곡


교향곡 8번 B단조 "미완성" D.759
교향곡 9번 C장조 "그레이트" D.944
슈베르트는 생전에 교향곡을 여섯 곡 발표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만인 1838년, 슈만이 교향곡 C장조(그레이트)를 발견했고 이 곡은 7번 교향곡이 되었다. 그 뒤 1865년에 또 다른 교향곡이 발견됐는데, 두 악장만 완성된 미완성 교향곡이었다. 작곡 순서로는 앞선 그레이트보다 앞선 곡이었으나 이미 7번이 있었기에 8번 교향곡이 되었다.

여기에 스케치 상태로만 남아 있는 E장조 교향곡도 있었는데, 이 곡을 몇 번으로 할건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고 따라서 E장조를 7번, 미완성을 8번, 그레이트를 9번으로 하자는 합의가 나왔다.일부는 그레이트를 7번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독일 학자들은 슈베르트의 작품번호인 도이치(D) 번호를 만든 도이치가 정리한 목록에 따라 8번으로 부르고 있다. 반면 영어권 학자들은 9번으로 부른다. 마찬가지로 미완성 교향곡도 7번과 8번이 혼재되어 불리고 있다.
조성 도이치번호 작곡연도 발견연도 비고
E장조 D729
B단조 D759 1822 1865 미완성
C장조 D944 1826 1838 그레이트
D장조 D936A 1828

7.2. 협주곡&관현악

이탈리아 스타일의 관현악 서곡 D장조 D. 590
바이올린 협주 소품 D장조 D. 345
부수음악 로자문데 D.797

7.3. 실내악

D.821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중 2, 3송어 D. 667죽음과 소녀 D.810
현악 4중주 C단조 "서곡" D.8A
현악 4중주 1번 "조성의 변화" D.18[9]
현악 4중주 9번 G단조 D.173
바이올린과 현악 합주를 위한 론도 A장조 D.438
현악 4중주 12번 C단조 "Quartettsatz(콰르텟자츠)" D.703[10]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A단조 D.821
피아노 5중주 A장조 "송어" D.667[11]
8중주 F장조 D.803
현악 4중주 13번 A장조 D.804
현악 4중주 14번 D단조 "죽음과 소녀" D.810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시들어버린 꽃" 주제에 의한 서주와 변주 E단조 Op.160 D.802
현악 4중주 15번 G장조 D.887
피아노 3중주 2번 E플랫 장조 D.929[12]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C장조 D.934
현악 5중주 C장조 D.956

7.4. 피아노

D.145D.733 No.1D.951
스케르초 D.593
네 손을 위한 환상곡 F단조 Op.103 D.940
4개의 즉흥곡 Op.90 D.899
4개의 즉흥곡 Op.142 D.935
6개의 악흥의 한때 Op.94 D.780
방랑자 환상곡 C장조 Op.15 D.760
피아노 소나타 19번 C단조 D.958
피아노 소나타 20번 A장조 D.959
피아노 소나타 21번 B플랫 장조 D.960
네 손을 위한 소나타 D.812
3개의 피아노 소품 D.946

7.5. 가곡

물레 옆의 그레트헨 D.118들장미 D.257
마왕 D.328음악에게 D.547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D.795겨울여행 D.911
송어 D.550세레나데 D.957 No.4


마왕 Op.1 D.328
송어 D.667
들장미 D.257
제비꽃 D.786
어서 오세요 D.741
방랑자 D.489 Op.4-1
아베마리아 D.839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 D.795
겨울여행 D.911[13][14]
백조의 노래 D.957[15][16]
어부의 노래

7.6. 오페라

피에라브라스 D.796
징슈필 쌍둥이 형제 D.647

8. 기타

  • 1993년에 KBS-1를 통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만든 3부작 TV 드라마 슈베르트가 더빙 방영된 적이 있다. 1823년을 무대로 이미 그 시절부터 탈모와 기억력 감퇴에 빠지면서도 가난 속에 음악을 작곡하던 그의 모습이 드라마를 통하여 잘 나타나 있다. 슈베르트 성우는 고 오세홍.
  • 이름이 같은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프란츠 안톤 슈베르트(1808~1878)는 이름으로 오해받는 것이 싫어 스스로 프랑수아 슈베르트(François Schubert)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소품 '벌'[17]의 작곡자로 알려져있다. -출처: Violin Encores (EMI classics)
  • 일본 애니메이션 클래시컬로이드에서 그를 모티브한 캐릭터가 등장했다. 말 그대로 개그 캐릭터이며, 베토벤의 빠돌이 캐릭터로 내비친다. 모차르트는 말 그대로 증오하고 있다. 2기에 들어서는 신 캐릭터인 바그너에게 말 그대로 엄청나게 눌리고 있는 불쌍한 캐릭터.
  • 개그집에서도 등장한다. 정확히는 인물이 아닌 작품이지만. 내용은 한 학생이 시험을 치루고 있는 중 음악문제가 출제됐는데 '다음의 곡을 듣고 작곡가와 제목을 답할 것'이란 문제였고 곡이 흘러나왔는데 그게 슈베르트의 '송어'였다. 문제는 이 학생은 곡은 알고 있었지만 작곡가와 제목을 모르고 있었던 것. 그러다 작곡가의 이름 앞 글자와 제목의 앞글자가 같다는 것을 배운 것을 기억해내고 자신있게 답을 써서 제출했다. 그 학생이 쓴 답이 무엇이었는고 하니 '베토벤의 '붕어'.
  • 그에게 있어 인생의 목표는 첫사랑 테레제와 존경하는 베토벤이 전부였는데, 둘 모두로부터 좌절을 맛보았다. 테레제와의 사랑의 경우, 슈베르트의 가곡에 반한 테레제가 슈베르트에게 먼저 청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는데, 당시 슈베르트 가곡의 대부분이 테레제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을 정도. 그러자 테레제의 부모님은 슈베르트에게 안정된 직업을 가지면 결혼을 허락한다고 했고 마침내 어느 귀족의 후원을 받게된 슈베르트는 테레제를 찾아가지만 테레제는 울면서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이 결정됐다고[18] 이야기하는 바람에 슈베르트는 첫 번째 좌절을 맛보게 된다.
  • 두 번째 좌절은 바로 베토벤.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2키로도 안되는 거리에 살고 있었지만 소심남이었던 탓에 자신의 우상 베토벤을 만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사람들의 주선으로 마침내 베토벤을 만나게 되는데, 문제는 당시 베토벤이 이미 병들어 죽을 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베토벤은 병상에서 슈베르트의 악보를 살펴본 후 감탄을 하면서, '슈베르트 자네를 모르고 있었다니 정말 아쉽네. 자네를 10년 전에만 만났으면 정말 좋았을텐데'라고 말했다. 이어 하고 싶은 말을 적으라고 했지만[19] 베토벤의 초췌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슈베르트는 울면서 그대로 나가버렸다. 이 일이 있은 후 일주일 뒤에 베토벤은 결국 죽고 만다. 이후 슈베르트도 베토벤이 죽은 다음해에 죽었고, 베토벤과 같은 묘지에 안장됐다. 비록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 존경하는 베토벤에게 인정받고 죽은 후에도 그의 옆에 묻힌게 다행이라면 다행. 만일 그가 테레제와 결혼하고 베토벤을 일찍 만났다면 살아생전부터 대음악가로 칭송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1] 이 가운데 11명은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의학이 그다지 발달되지 못하던 시절에는 흔한 일이긴 했다. 당시에는 평균수명이 40살도 채 되지 않았고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는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다.[2] 모차르트의 생애를 다룬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살리에리다. 그는 슈베르트의 우상이었던 베토벤 등 후세에 알려진 여러 음악가들을 가르쳤다.[3] 반대의 이유는 슈베르트가 경제력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이유는 사실이었다. 이후 테레제는 베르그만이란 부유한 빵집주인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후일 슈베르트는 그의 일기에서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나의 마음은 극도로 상했다.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녀를 사랑해. 그 후 테레제와 같이 나를 기쁘게 해주는 여자는 만날 수 없었다'라고 적어 실연으로 인한 상심을 나타냈다.[4] 일명 음악가들의 공동묘지. 비엔나를 무대로 활약했던 음악가의 거장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5] 40년 이상 세월이 있기에 물가 차이가 있겠지만, 모차르트가 궁정음악가로 받은 첫 연봉이 600굴덴이었고, 그 이전 궁정음악가였던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1714~1787)가 20년 넘게 연봉 2500굴덴을 받았다고 한다. 그 밖에 오토 비버의 기록에 의하면 1820년대 오스트리아 우체국 직원 초봉 연봉이 350굴덴, 군 소위 연봉은 450굴덴이라고 한다.[6] '숭어'가 아니다! 번역 오류로 많이들 잘못 알고 있는 제목. 송어와 숭어는 전혀 다른 물고기이다. 모티브가 된 같은 제목의 가곡 '송어'는 강물 위를 헤엄치며 다니는 송어에 대한 가사인데, 숭어는 바닷물고기이다![7] Franz Anton Schubert (1768~1824), 이 문서에 나오는 슈베르트는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다. 차이라면 프란츠 페터는 오스트리아인, 프란츠 안톤은 독일인이었다.[8] 피아노 뿐만 아니라 다른 악기를 위한 협주곡도 작곡하지 않았다.[9] 슈베르트가 처음으로 야심차게 작곡한 현악 4중주이다. 다만 여러 개의 악장으로 구성된 곡을 작곡하는게 익숙치 않았을 때여서, 각 악장의 조성이 모두 따로논다. 1악장은 C단조-G단조, 2악장은 F장조-C장조(트리오 부분), 3~4악장은 B플랫 장조...[10] 단악장의 현악 4중주라는 뜻이다. 현악 4중주 11번을 작곡한 이후, 다른 곡들을 많이 작곡한 후 작곡해서인지 표현이 훨씬 원숙하다. 완전히 작곡되었다면 어떠하였을지 매우 기대되는데 단악장이라 아쉬움이 남는다.[11] 4악장의 "송어" 주제가 유명한 곡.[12] 2악장이 특히 유명하며, 여러 CF 배경음악으로도 쓰였던 곡이다.[13] '겨울나그네'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중에 5번째 곡이 널리 알려져 있는 보리수이다.[14] 슈베르트가 죽기 1년 전에 작곡되어서인지 묘하게 암울한 곡이 많기도 하지만, 원래 시 자체가 암울한 내용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도 암울한 내용인 것을 보면 굳이 죽음을 예감하고 이런 곡을 작곡했다라기보다 그냥 슈베르트 개인 취향일지도 모르겠다...[15] 이 중에 4번째 곡이 그 유명한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이다.[16] 제목이 약간 사망 플래그같지만, 이 연가곡집은 슈베르트가 직접 '백조의 노래'라고 이름붙여서 출판한 것이 아니라, 슈베르트 사후에 출판업자가 슈베르트가 죽기 얼마 전에 쓴 가곡들을 모아서 '백조의 노래'라 이름붙이고 출판한 것이다. 백조의 노래라 이름붙일만큼 아름다운 곡들이기도 하다. 다만 슈베르트가 직접 노리고 연가곡집으로 만든 게 아니기에, 다른 연가곡집들처럼 스토리가 연결되지는 않는다.[17]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바가텔" 작품 13의 9번째곡으로 1분정도의 짧은 곡이나 왕벌의 비행보다도 세밀한 움직임을 잘 묘사했다.링크[18] 그게 하필이면 빵집주인이다.[19] 아시다시피 말년의 베토벤은 귀가 완전히 멀어서 말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글로 적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