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13:25:46

헤이안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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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연혁
2.1. 초기2.2. 중기2.3. 후기
3. 문화
3.1. 종교3.2. 문학3.3. 복식3.4. 풍습
4. 한국사와의 관계5. 문서가 있는 헤이안 시대 인물6. 대중문화 속의 헤이안 시대
6.1. 헤이안 시대에 쓰인 작품6.2.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1. 개요

平安時代, 평안 시대

일본의 시대 구분. 그 기간은 간무 천황헤이안쿄(현재의 교토)에 천도794년부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겐페이 합전에서 승리한 1185년 혹은 고토바 천황으로부터 정이대장군(쇼군)을 제수받은 1192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1]

나라 시대에 확립된 율령제와 토지공령제가 무너진 시기이기도 하며, 끌어올렸던 황실의 권력이 외척에게 넘어갔다가 원정이 전개된 시기이기도 하다.

일본서기를 제외한 육국사가 이 시대에 편찬되었다. 육국사는 국가주도 역사서이므로 그만큼 중앙정부의 힘이 있었다는 의미다. 그러나 편찬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모두 전반 200년에 치중되어 있다.[2] 또한 육국사 중에서 나중에 나온 일본 몬토쿠 천황 실록일본삼대실록은 이전과 달리 모두 실록형태로 편찬되었는데 이전과 달리 실록형태로 편찬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화문명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3]

2. 연혁

2.1. 초기

초기(794~858)에는 황권 강화와 중앙집권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이 시기는 천황허수아비가 아니라 세계 다른 나라들처럼 실질적으로 군주 노릇을 하던 일본사의 얼마 안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견당사가 중지되고(894), 대외 교류가 규슈다자이후(대재부)에 제한되면서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국풍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귀족 문화가 성행했다.

가나서체가 형성된 것도 이 시기였다. 3대 격식(三代格式)이라 불리는 《고닌캬쿠시키》(弘仁格式), 《죠칸캬쿠시키》(貞観格式), 《엔기캬쿠시키》(延喜格式)와 같은 법령의 편찬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간무 덴노는 지방관제를 개혁하고, 군제 역시 개혁하여 상비군제와 모병제적인 군제로 전환하여 백성의 부담을 줄였다. 이 군대는 도모(伴)씨 같은 유력 가문이 후지와라 가문에 의해 몰락한 후 점차 무사 씨족이 담당하게 되었는데, 미나모토노 요리미츠(源賴光)가 이끈 카와치 겐지 등이 유명했다.

2.2. 중기

중기(858~1068)에는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이래로 후지와라씨가 천황의 외척으로 섭정(셋쇼)과 관백직을 독점하면서 귀족정치로 변모했다. 중기 후반부터는 939년 타이라노 마사카도후지와라노 스미토모가 각기 동서에서 일으킨 쇼헤이•덴쿄의 난을 시작으로 도호쿠(동북)를 중심으로 변방에서 늘 에조반란이 끊이질 않았고, 특히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경우는 스스로 '신황'(新皇)을 자칭할 만큼 격렬했다. 이때의 반란으로 (뒤에 쇼군의 유래가 되는) 700년대의 정이대장군이 잠시 940년에 부활하기도 했다. 이때의 쇼군은 후지와라노 타다부미(藤原忠文)였다.

또한 율령제의 핵심인 왕토사상과 토지공령은 이미 헤이안 초기부터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는 개인들의 능력차나 귀족 지방관의 탐학과 수탈, 개척지 귀속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권력자들이 개척지를 약탈하기도 했고, 국가의 수탈이 심해지면서 토지 경작자들이 대귀족이나 대사원에 자신의 토지를 바치며 예속되는 현상도 증가했다.

그리고 중앙권력은 나라 시대 말부터 외척 가문이자 실권 가문으로 대두했던 후지와라(藤原) 섭관가(摂関家)가 실권을 장악하여 섭관정치(摂関政治)를 펴면서 장원을 기진받아 일본 최대의 장원 소유 귀족으로 대두했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일부 천황들의 개혁 시도를 좌절시켰다. 천황에 협력하던 하급귀족 출신의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같은 뛰어난 인재도 후지와라 가문에 의해 지방으로 좌천당했고, 후지와라에 거슬리거나 후지와라의 외손이 아니던 천황 또는 황태자가 폐립되는 등 헤이안 시대는 후지와라 가문의 권력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황실이 권력을 회복했던 인세이(원정) 시절에는 도리어 도바 상황 때부터 원(, 인)이 장원소유주로 대두하여 사회문제를 악화시켰다. 이들 셋칸케를 중심으로 가문에 따른 관위 임명이 고착화되었으며, 중앙 권력은 후지와라 가문과 황족 가문이 장악했다. 그리고 사회문제 악화로 인한 반란 및 사원의 강소 등을 진압하기 위해 황손이었던 무사 씨족들이 중용되었고, 이들이 후에 무가정권의 주역이 되었다.

반란이 일어난 경우, 무사 씨족의 수장을 지방관이나 토벌대 장군으로 파견했는데 그 과정에서 토지 소유자인 지방의 무사들과 지방관으로서 지방 권력을 쥐었던 유력 무사 씨족의 수장이 유착하여 봉건적인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앙의 후지와라씨의 섭관정치는 이런 변천을 막지 못했고, 오히려 11세기 고정된 세율의 조세 부과 및 각 쿠니()별 수취와 같은 세제 개편을 통해 봉건화를 촉진했다.

지방은 토지 소유자들이 점차 국가 권력에 저항하기 시작하여 10세기 타이라노 마사카도(平將門)의 반란이나 해적 후지와라노 스미토모(藤原純友)의 반란 등이 이어졌고, 카와치 겐지이세 헤이시, 히데사토류 후지와라씨 같은 무사 씨족들이 이를 진압하여 공을 세우면서 점차 성장했다. 지방은 지방관인 국사(国司, 고쿠시)들이 지방 유력자들과 협조 및 견제하면서 중앙에는 조세만 보낼 뿐 반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했고, 귀족이나 무사 씨족들, 지방 유력 가문들이 국사가 되면서 지방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토지를 가진 지방 무사들과 봉건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혼슈(本州) 동북부에서는 조정군과 원주민 에미시(蝦夷) 간에 갈등이 계속되었다. 이전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 에미시 세력은 8~9세기를 거치며 점차 야마토 왕권에 정벌되었으나, 혼슈 최북단인 아오모리 일대에서 무츠 아베씨데와 기요하라씨를 비롯한 잔존 세력이 11세기까지 강력한 세력을 이루었으며, 전9년의 역(前九年の役)과 후3년의 역(後三年の役) 이후에는 오슈 후지와라 가문이 오슈에서 반독립적인 권력을 누렸다. 그리고 이들을 정벌하는 장군명 중 하나였던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훗날 무가 정권의 최고 권력자의 관직이 되었다.

2.3. 후기

후기(1068~1192)부터 섭관가의 간섭을 배제하려는 목적으로 천황이 양위하여 상황[4]로서 원정(院政, 인세이)을 펼쳤다.

사실 양위 자체는 간무 천황(재위 781~806) 다음인 헤이제이 천황(재위 806~809) 때부터 있었을 만큼 흔했다. 하지만 그 직후 구스코의 변(810)으로 헤이죠쿄로 다시 복귀하려는 헤이제이 상황[5]의 계획이 사가 천황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 출가하는 등 실체적인 힘을 가진 천황은 드물었다.

그러나 우다 천황(재위 887~897. 이후 출가) 이래 170년 만에 후지와라씨의 피가 섞이지 않은 고산조 천황(1034~1073, 재위 1068~1073)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고산조 천황은 장원을 대거 정리하여 국가로 환수하고, 무너져가던 율령제도의 정비를 도모했으며 그 수족으로서 중하류 귀족과 지방관들을 등용하는 등의 정책을 펴 국정을 안정시켰는데 이는 엔큐의 선정(延久の善政)이라고 했다. 이로서 장원제도의 폐단이 완화되었고, 국고가 충실해졌으며, 섭관가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다.

또한 고산조 천황의 치세인 1070년 엔큐 에조 합전(延久蝦夷合戦)을 통해 에미시를 완전히 정벌하고 쓰가루 해협까지 조정의 영향권을 확장하며 혼슈 전 지역을 일본에 복속시켰다. 이때를 기점으로 홋카이도를 제외한 일본 본토 3개 섬(혼슈, 규슈, 시코쿠) 전역이 일본 영토가 되었다.[6]

고산조 천황은 자신의 자손이 황통을 잇게 하고자 하여 양위를 실행에 옮기는 도중 4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후 황위를 계승한 아들 시라카와 천황(재위 1073~1086, 상황으로 1086~1129)는 무려 아들 호리카와 천황(재위 1086~1107, 요절), 손자 도바 천황(재위 1107~1123, 이후 양위), 증손자 스토쿠 천황(재위 1123~1142)[7]까지 3대 42년을 상황으로 있으면서 77세로 죽을 때까지 권력을 마음껏 휘둘렀다.

시라카와와 도바 재위시에는 후지와라 섭관가(摂関家)에서 내분이 발생한 데다가 그 씨장자가 어리거나 무능하여 그 위세를 꺾을 수 있었다. 여기에 스토쿠 천황이 아직 어렸기에 권력은 새로운 인(院)이 장악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도바도 역시 할아버지 시라카와가 죽은 1129년부터 1156년까지 27년간 실권을 휘둘렀다. 도바인은 자신의 장원 확대에 몰두하여 기존의 개혁을 무위로 돌렸으며, 민생 악화와 지방의 봉건화를 촉진시켰다. 율령에 기초한 조정 정치의 왜곡과 자의적인 측근 정치, 상황의 사욕 추구는 민생의 악화와 함께 황실의 권위나 정치의 정당성도 점차 악화시켰다.

이때 상황(上皇)이 일종의 사병이었던 무사들에게 권력을 주면서 무사 씨족이 성장하여, 타이라씨(헤이케, 이세 헤이시)와 미나모토씨(카와치 겐지)가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상쟁한 결과 가마쿠라 막부가 탄생하게 되는데 그 시초라 할 수 있는 것이 도바 법황[8]의 죽음 직후 벌어진 도바의 아들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와 스토쿠 상황(崇德上皇) 사이의 무력 충돌에서 천황 측이 승리한 1156년의 호겐의 난(보원(保元)의 난)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10일간의 소규모 싸움에 불과했다. 졸지에 수괴가 된 스토쿠 상황은 당시에도 실권이 없었고, 난의 정황도 몰라 아들 시게히토 친왕도 놔두고 도망갈 만큼 허둥거렸다. 되려 이 사건은 반도바 성향 무사들의 우발적인 사건에 가까웠다고 여겨지기도 하고, 반대파를 일소하려는 고시라카와 천황과 그 측근인 신제이 등의 술수에서 비롯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그리고 이후의 헤이지의 난(평치의 난) 등이 겹치면서 황실의 권위는 약화되었고, 수도의 군사와 치안이 타이라 일족에게 집중되게 되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필두로 하는 헤이케는 공경 외척 가문으로 승격했고, 수도 교토 인근의 무사들과 봉건적 주종관계를 확립했다. 또한 송나라와의 교역을 주선하며 막대한 부를 쌓아 황실이나 후지와라 가문을 능가하는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키요모리는 고시라카와 상황을 유폐시키고, 자신의 외손이었던 안토쿠 천황을 옹립할 정도의 권세를 과시했으나, 키요모리 사후 동국에서 궐기한(겐페이 합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무가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를 수립하면서 헤이안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인세이, 타이라노 키요모리,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항목 참조.

3. 문화

3.1.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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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노 세이메이가 이 시대의 인물이며 금기모노노케를 중히 여겼던 이 시대의 풍조를 대변하고 있다. 이 시대의 귀족들은 뭘 하든간에 음양사에게 길흉을 점치게 했으며, 자신이 있는 곳이 음양도에 따라 불길한 방위라면 잠시 남의 집에 가는 것이 일상사였다. 또 질병이나 흉사가 모노노케의 짓이라고 생각해 병을 앓게 되면 승려를 초빙하여 경을 읽고 귀신을 퇴치하게 했다.

불교도 융성했으며, 거대 사찰들은 귀족들과 황실의 지원을 받아 크게 성장했다. 황실이나 후지와라 같은 대귀족들이 사찰을 발원하기도 했으며, 이들 사찰들은 그런 가문들의 지원 세력이 되었다. 점차 사찰들은 막대한 장원의 소유, 지주의 세습, 유민들을 모아 승병을 조직하는 등의 문제를 나타내게 되었으며, 헤이안 말기에는 이들 승병을 동원한 거대 사찰들의 횡포가 문제되었다. 이런 문제는 센고쿠 시대 말까지 지속되었다.

3.2. 문학

여류 문학의 전성기로 무라사키 시키부, 세이 쇼나곤 등 일본을 대표하는 문인들이 다수 활동했다.

후지와라씨가 자신의 가계 안에서 섭관(섭정관백)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을 천황의 황후 비빈으로 바치면서 당대의 재녀들을 모아다가 시녀로서 섬기게 했기 때문에, 그 시녀들에 의해 세계 최고(最古)의 소설인 《겐지모노가타리를 비롯해 《마쿠라노소시》, 일기 등 많은 문학 작품이 쓰여졌다. 다른 모노가타리 문학도 쏟아져 나왔는데, 《타케토리모노가타리》도 이 시대의 작품이었다.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일기인 《미도칸파쿠키》(御堂関白記)[9]도 유명하다. 그리고 당시에 다이고 천황(897~930)가 명령해서 엮은 책이 《고금와카집》(古今和歌集)이다.

3.3. 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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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안 중기, 즉 견당사 폐지 이전까지는 나라 시대와 마찬가지로 중국풍의 옷을 입었다. 국풍 문화의 급진으로 일본의 풍토에 맞게 옷이 변형되었는데, 이것이 현재 널리 알려진 헤이안 시대의 복식이다. 현대에도 천황을 비롯한 천황의 친족들이 전통행사 때 입는 옷은 이 시대의 복식이다.

특히 무녀복 비슷한 바지인 하카마 위에 12겹의 겉옷을 껴입고 치마까지 두르는 쥬니히토에는 이 시대 시녀들의 제복이기도 했다. 습한 여름에는 평상복으로 히토에바카마(単袴)라고 해서 코소데를 입지 않은 알몸 위에 하카마를 입고 그위에 홑옷을 걸쳤다. 하카마는 허리에 묶어서 가슴을 드러내거나 가슴 위에 묶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성머리카락긴 것을 아름답게 여겼기 때문에 견당사 폐지 이전까지만 해도 올리고 다녔던 머리를 풀어헤치고 땅에 끌릴 정도로 길게 길렀다. 간혹 관례와 같은 큰 행사가 있었을 때에는 머리카락 일부를 올려 빗과 비녀, 기타 장신구로 장식했다.

반면 지체있는 귀족 여성들은 가벼운 평상복만 입고 있는 주제에 거동하는 것을 품위없게 여겼다. 신사에 참배가거나 어디 초대받아 놀러나가는 것 외에는 외출도 거의 하지 않았다.

또한 당시에는 두발, 특히 상투를 그대로 드러낸 차림을 창피한 것으로 여겼다. 현대로 치면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것과 동급인 셈이다. 때문에 남성들의 경우, 관[10]이나 에보시를 반드시 써야 제대로 의복을 갖춰 입었다고 간주되었다. 고려, 조선이나 중국 또한 머리카락을 드러내는 것을 창피하게 여겼고, 모자를 구입하기 힘든 하층민도 최소한 머리띠는 하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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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하는 방식에 눈썹을 밀고 새로 그리는 마로 눈썹 형태가 유행했다.[11]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매우 기괴해 보이겠지만, 이빨을 새까맣게 칠하는 오하구로 또한 유행해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시행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화장을 하고 다녔는가 보고 싶으면 노멘을 보면 된다.

3.4. 풍습

이 시대의 결혼 풍습은 여자가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마음에 드는 여자에게 연애편지를 보내다가 마침내 그 거처에 드나들어 합궁을 하고, 그것이 3일 연속 이어지면 결혼으로 인정받는 형태였다. 여성은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결혼한 후에도 자신의 저택에 살았다. 이런 혼인 형태를 '카요이콘'(通い婚)이라고 한다. 다만 정실부인이 되면 남자 집으로 들어가 남자의 집안 살림을 돌보기도 했다.

한 남자가 여러 여자의 거처에 드나드는 호색을 풍류로 여기는 시대였지만, 사실 여성 입장에서는 남자가 올 줄 예상도 못한 상태에서 남자가 들이닥쳐 성행위를 맺고 가는 '요바이'도 많았다. 현대로 치면 주거침입 및 강간이지만 가부장적인 고대 사회에서는 이것도 여성의 처신 문제나 연애 사건인 것처럼 여겨졌다. 《겐지모노가타리》를 보면 이 시대의 이런 성풍습에 대해 알 수 있다.

첫째 날과 둘째 날은 남자가 여자의 방에 몰래 들어와 밤을 지새고 나가지만, 셋째 밤부터는 공인된 사이가 되어 부모가 예물을 마련하고 연회를 여는 것으로 결혼식을 갈음했다. 이때 부부는 '미카요노 모치라는 작은 떡을 나눠 먹었는데 연을 끊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씹지 않고 먹었다.[12]

상류층 여성은 함부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고 남들을 만날 때도 발을 친 상태로 만나야 했다. 실제로 몸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대단히 불편한 복장[13]을 하고 다닌데다가 행동의 제약도 심했다.

반면에 중류층 여성은 의외로 사회 진출의 기회가 많았다. 글재주가 뛰어난 여성이 궁중에 시녀로 출사하여 문학 활동을 하며 이름을 떨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상술한 무라사키 시키부세이 쇼나곤 등이 있다. 결혼하거나 자식을 낳은 이후에도 궁중 출사가 가능했으며, 법회 참석 등의 명목으로 나다니기도 했다. 아무래도 남성들은 대체로 자신의 부인이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꺼렸지만. 《마쿠라노소시》를 보면 이런 부분에 대해 까는 대목이 나온다.

4. 한국사와의 관계

한국사남북국시대 중엽에서 고려 시대 중엽과 겹친다. 한국사의 국왕으로 대비된다면 신라 열조 원성왕발해 강왕의 치세에서 고려 명종의 치세와 겹치는 시기로 대략 400년에 달한다.

흥미로운 건 열조 원성왕 때 신라는 하대의 혼란을 추스렸고, 발해 역시 초기 혼란기에 접어든 직후 선왕 때에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또 무신정변이 일어나 무신정권이 들어서는 시기도 1170년으로 타이라 가문까지 포함한 일본의 군사정권 성립과 상당히 겹친다.[14]

흔히 한국에서는 백제와 가야 그리고 일본이 친했고 신라는 일본과 사이가 나빴다고 알려져 있지만, 쇼토쿠 태자의 집정 이후 백제 영향권 아래 진행된 외교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외교를 추진하며 신라와 고구려와의 관계 개선에도 힘 쓰기도 했다.[15] 실제로 백제 멸망 이후 통일신라와는 이전 백제만큼은 아니라도 아스카 시대, 나라 시대 내내 활발하게 대규모 사절단을 주고받으며 교류했다.[16] 통일신라가 무너지기 전인 9세기까지는 장보고로 대표되는 국제 사무역이 어느 정도 활발했다. 그러나 9세기 중후반 들어서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정세가 혼란스러워지면서 신라 해적들이 일본 서부 지역을 대규모로 약탈했고, 10세기에 들어서면 사무역도 감소했다.

일본 조정에 완전히 흡수된 백제계 망명 가문들은 간무 덴노 재위 시기에 그 권세가 절정에 달했다. 간무 덴노의 어머니인 타카노노 니이가사의 가문이 무령왕의 후손을 자처하였기에, 다른 백제계 가문들을 대표하는 백제왕조의 후손임을 인정받은 백제왕씨가 아예 외척가문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17] 그러나 헤이안 중기를 지나며 백제왕씨의 사서 등장 횟수가 점차 줄어들고 백제왕씨가 아닌 그냥 백제씨로만 등장하는 등 통혼으로 타 가문에 흡수되거나 신적강하 되고 있다는 정황을 보인다.[18] 백제왕씨가 힘을 잃었다지만 백제왕씨를 포함한 다른 백제계 후손들은 여전히 귀족으로써 조정에 봉사하였기에 크고 작은 일로 사서에 계속 기록되고는 했다. 이 때문인지 전국시대에도 오우치 가문처럼 백제왕조의 후손을 자처하거나 우키타 가문처럼 백제왕조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스스로 추정하는 다이묘들이 나오기도 했다.

한국의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후백제가 일본에 옛 백제 시절 인연을 상기시키면서 적극적으로 일본에 통교 요청을 했지만 전부 대마도에서 문전박대당했다. 일본 황실이 힘을 잃기 시작하던 때라 군사적 지원이 어려웠을 거라는 현실적인 이유와 신라구에 의한 피해가 막심한 와중에 과거 견훤이 신라의 신하를 자처했다는 점이 일본 조정의 불신을 샀을 것이라는 게 이유로 꼽힌다. 이후에 들어선 고려와도 건국 후 약 100여 년간 공식 교류가 거의 없었다.

5. 문서가 있는 헤이안 시대 인물

6. 대중문화 속의 헤이안 시대

일본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에서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 다음으로 많이 쓰이는 시대이다.수라의 각》에 나온 작가의 후기에 의하면, 센고쿠 시대, 에도 시대과 함께 일본의 3대 로망의 시대라고 한다.

시대 분위기나 풍습도 그렇고, 이 시기에 나온 문학 작품도 동양 판타지에로게, 순정만화 등에 활용하기 좋은 소재가 많아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게임이나 만화 등 서브컬처물이 꽤 있다. 특히 음양사가 나오는 퇴마물이나 요시츠네로 대표되는 군웅할거가 나오는 겐페이 전쟁이 나온다면 이 시대가 배경이다. 퇴마물 쪽에서는 아베노 세이메이미나모토노 요리미츠의 요괴 퇴치담이 주된 소재이고, 전쟁물 쪽으로 보면 헤이안 말기의 무인(武人) 가문인 겐지와 헤이케의 건곤일척의 승부를 다룬 겐페이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일본인들이나 외국인 입장에서는 뭔가 더 고풍스러운 중세 일본풍 판타지 로망을 자극하는 시기인 듯 하다. 또한 당대 여성이 이 시대를 묘사한 문학작품이 많기 때문인지, 순정만화나 여성향에서도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다. 와카를 좋아해서 오직 헤이안 시대만을 좋아하는 부류도 있다.

이렇게 일본 역사와 관련된 게임들은 한국의 게이머가 플레이하기에는 일본 게이머에 비해 진입장벽이 높다. 역사를 기반으로 한 창작물에서 일본 역사를 모르면 캐릭터가 왜 이런 드립을 치거나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중국 역사와 관련된 게임들이 중국 역사, 특히 <삼국지>가 한국인들에게도 인지도가 매우 높은 관계로 한국 게이머들의 진입장벽이 중화권 게이머들만큼은 아니어도 많이 낮은 편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닌자 슬레이어》에서는 세계관 배경으로 언급되며, 닌자들이 나타나 모탈들을 카라테로 지배하던 공포의 시대였다고 한다. 이후 에도 도쿠가와, 마츠오 바쇼와 같은 강대한 워로드들이 나타나 닌자에게 반기를 들었고, 이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자[19] 닌자들은 하라키리 리추얼을 통해 소울만을 킨카쿠 템플로 어센션시키고 사라져 모탈의 시대인 에도 시대가 시작됐다.

일본 만화를 대표하는 악역들이 탄생한 시기이기도 하다. 귀멸의 칼날은 주 무대가 다이쇼 시대이나 최종보스인 키부츠지 무잔은 이 시기에 태어났는데, 원래는 병약한 인간이었으나 푸른 피안화로 만든 약을 먹고 도깨비로 변모했고, 천 년 이상 살면서 자신의 목적에 따라 닥치는대로 살인 및 식인을 하게 된다.

주술회전에서 나오는 1000년 전 주술사들은 전부 헤이안 시대 출신이다. 공식 설정으로 주술의 전성기라고 불렸으며 저주의 왕 료멘스쿠나우라우메, 요로즈, 쿠루스 하나의 몸에 수육한 천사, 고죠 사토루옷코츠 유타의 조상이라고 하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신 카게류 간이 영역의 고안자 아시야 사다츠나가 전부 헤이안 시대 출신이다.

6.1. 헤이안 시대에 쓰인 작품

(국내 출판 기준)
  • 겐지모노가타리》 : 일본 최초의 고전소설이자, 세계 최초의 하렘물(!)이다. 그리고 인물들의 심리묘사까지 다룬 소설 형태로 보면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도 볼 수 있다.
  • 마쿠라노소시
  • 타케토리모노가타리
  • 《카게로닛키》 : "하루살이 일기"라는 뜻으로, 섭관시대의 전성기를 이끈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가네이에의 또 다른 부인이 가네이에와의 결혼생활에 관해 쓴 일기이다. 저자는 미치츠나노하하, 말그대로 "미치츠나의 어머니"로 불린다. 그리고 가네이에를 대차게 깠다
  • 《미도관백기》(御堂関白記) : 헤이안 시대 중기의 권력자로서 딸 넷을 천황에게 시집보내 세 명의 외손자를 천황으로 올렸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20여 년간 썼던 일기이다. 당시의 정치와 언어, 귀족의 생활모습에 대한 중요 자료로 인정받는 기록으로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호죠지셋쇼기》(法成寺摂政記)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대표적인 이름인 《미도칸파쿠기》도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 미치나가는 관백에 오르지는 않았다.
  • 《오치쿠보모노가타리》 : 헤이안 판 신데렐라. 계모에게 학대당하던 아가씨가 고귀한 신분의 쇼쇼를 만나 행복해진다는 아침 드라마 스토리이지만, 연구자들이 추정하기로 상류 귀족보다는 중하류 귀족이 즐겼던 작품으로 쇼쇼가 계모와 가족들을 지독하게 골탕먹여 복수하는 골계담이나마지막에는 진실을 밝히고 효도한다. 그걸로 납득하나 싶지만 주인공 오치쿠보의 시녀 아코기가 크게 활약하는 묘사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 당시 중하류 귀족들의 흥미나 관심사를 짐작할 수 있다.
  • 헤이케모노가타리》 : 완성된 것은 가마쿠라 시대이지만 내용은 헤이안 시대 막바지의 겐페이 전쟁이 소재이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승리보다도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나 타이라 일족의 몰락을 애잔하게 그리고 있는, 그야말로 판관편애의 전형이다. 애당초 판관편애라는 말 자체의 유래가 바로 미나모토 요시츠네에게서 나온 말이다.
  • 《사라시나닛키(국내 출판명은 《시라시나 일기》)》: 저자는 스가와라노 다에스케의 딸[20]로 52세에 남편과 사별 후, 자신의 반생을 돌아보는 의미로 일기를 작성했다고 말한다. 일기 초반부에 어린 시절 아버지의 부임지에서 떠나 헤이안쿄로 상경하는 여행길이 일기의 반을 차지하며 나오는데, 헤이안 시대 당시의 이동수단이나 도로 등 지리를 참고하는 자료로 쓰인다.

6.2. 헤이안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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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185년이 가마쿠라 시대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은 사무라이 계층의 독립성을 강조했을 때의 시각이며, 1192년을 가마쿠라 시대의 시작이라는 시각은 천황의 역할을 강조하는 역사 인식이다.[2] 10세기부터 사서 편찬이 끊긴다.[3] 비슷하게 국가주도는 아니지만 기전체 형식으로 쓰여진 대일본사는 에도 시대에 지어졌는데 이 때 일본에는 조선에서 넘어온 성리학이 퍼져있었다.[4] 상황, 즉 태상천황(太上天皇)의 약어. 죠-코라고 읽는다.[5] 그의 헤이조쿄(平城京)에 대한 애착(?)때문인지 헤이제이 천황(平城天皇)의 추호(追号)나라노미카도(奈良帝)란 별칭은 헤이조쿄에서 유래했다.[6] 이후 해당 지역에 반독립적 성향의 오슈 후지와라 정권이 들어서나 이들은 에미시 부족이 아닌 엄연한 일본인들이었다.[7] 사실 증손자가 아닌 시라카와 천황의 사생아였다는 설이 당대 기록으로 있다. 이렇게 되면 스토쿠는 나이는 16살 어렸지만 사실상 도바의 어린 숙부뻘이 된다. 물론 정설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8] '호우오우'(호-오-, 法皇), 출가한 상황. 공교롭게도 교황을 일본에서는 로마 법왕으로 부른다.[9] 이 이름은 후대에 붙여진 것인데 실제 미치나가는 관백(関白)이 된 적이 없다.[10] 옛날 일본 초상화 속에서 남성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그것이다. 나라 시대에 전래된 복두가 변형된 것으로, 일본어로는 칸무리라고 한다.[11] 위의 왼쪽 사람은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뮤지컬 <신겐지모노가타리>에서 고키덴 뇨고 역을 맡은 쿄우 미사(京三紗), 오른쪽 사람은 <타이라노 키요모리>에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를 연기했던 야마모토 코지이다. 전자의 눈썹 같은 경우에는 좀 더 현대적으로 표현된 편이다.[12] 이것 때문에 헤이안 시대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씹지 않고 먹었는지 사소한 논란거리가 되기도 한다. 근데 실제 크기를 보면 바둑돌보다 조금 큰 정도로, 입 안에서 조금 우물거리면 삼킬 수는 있는 크기이다. 이때 여자의 부모는 남자 신발을 껴안고 자는데, 다른 엉뚱한 데 다니지 말고 우리 딸에게만 오라는 뜻이었다.[13] 쥬니히토에 참조. 항목에도 나와있듯 평소에 쥬니히토에를 입고 다닌 것은 아니고, 평상복은 몇 겹 안 되긴 했지만, 옷 자체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데다가 머리도 바닥까지 질질 끌릴 만큼 길렀다.[14] 1. 제국으로 대변되는 기존 율령제가 무너진 시대에 그 외곽에서 남북국과 헤이안 시대 초기의 일본이 번성 -> 2. 다시 율령체계가 아예 붕괴됨에 따라 빚어진 혼란기에 한국은 후삼국시대, 일본에서는 섭관정치시대가 무르익었으며 -> 3. 북송고려의 번영이 시작될 때 중흥이 시작되었고 -> 4. 북송과 고려의 문벌체제가 다시 망하는 정권교체기에 헤이안 시대 역시 끝났다고 보면 대강 시대적 맥락이 맞는다.[15] 노중국 교수는 직전의 아스카 시대에 벌어진 백제의 일본 국서 강탈 사건을 이러한 사실과 연관지어 '일본의 독자성이 강조된 외교활동에 대한 백제의 불만'이 연유라 주장한 바 있다.[16] 백제계 인물들을 흡수하다보니 정부 차원에서의 앙금이 없지는 않아서 조정 간의 관계는 발해와 더욱 친밀했다. 그러나 발해와 일본 사이에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중국의 문물을 받아야하는 일본 입장에서 신라와의 교류가 더 잦을 수 밖에 없었다.[17]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본 조정에 흡수되지 않으려했던 백제계 도래인들은 아예 무력으로 복속된 것으로 추측된다. 정가왕 전설, 모모타로의 우라(오니) 전설 참고.[18] 간무 덴노의 4남인 카츠가하라노 미코도 준나 천황에게 상소하여 신적강하 되었다.[19] 원래 닌자와 모탈의 신체 능력적인 차이는 무시무시하지만 당시 닌자들은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영원한 지배를 계획하던 소가 닌자를 중심으로 다들 정치질에만 열중하고 카라테를 단련하지 않는 바람에 많이 약해져 있었다.[20]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도모야스의 딸로 《카게로닛키》(《청령일기》)의 저자의 이복 여동생이다. 그러나 다에스케가 두 번이나 지방관에 부임했을 때 따라가지 않았고, 남편이 히타치 지방에서 헤이안쿄로 돌아왔을 땐 며칠 후 비구니로 출가했다. 그랬기에 저자는 아버지를 따라 부임지로 함께 온 새어머니와 친했고, 소녀시절 새어머니에게 와카와 문학을 배우는 것이 일기에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