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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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夜這い (よばい)
요바이

1. 개요2. 요바이의 과정
2.1. 결혼의 수단2.2. 혼음의 수단
3. 고육지책의 풍습4. 요바이의 쇠락
4.1. 요바이가 쇠락한 이유
5. 에도판 신데렐라 스토리의 일화6. 민속학 연구7. 여담8. 매체9. 관련 문서

1. 개요

사전적인 설명은 "야간에 성관계를 목적으로 여성의 침실에 몰래 침입하는 일본의 옛 풍습"을 말한다.

구혼을 위해 침소에 들어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강간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후술하겠지만 여성 측에서는 문을 막거나, 선언 이전 거절 의사를 드러내는 등 하기 싫으면 얼마든지 안 할 수 있었다. 물론 개중에는 그 과정에서 강간이 일어났을 수야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상호 동의가 깔려있는 행위다. 요바이를 강간과 동의어로 인식하기 시작한 건 근대에 이르러서이다.

주로 서일본 지역에서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간토 이북 지역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요바이라는 어원은 애초에 '부르다'는 뜻의 동사 요부(呼ぶ)에서 비롯되었으며, 구혼을 위해 남자가 여자의 침소에 들어가는 행위를 의미했다. 일본의 옛 혼인 풍습은 결혼 후에도 남자가 여자 집에 다니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이 때문에 이러한 행위도 요바이라고 불렀다.[1]

고대 일본에서 풍작을 기원하는 행사에서 유래되었다고 추측되며, 시대와 지역에 따라 신분상승, 간통, 강간, 결혼 의식, 성교육 등 다양한 이유로 일어났으며 여러 목적을 함께 가지기도 했다. 또한 후데오로시(ふでおろし:筆下ろし)[2]라고 대체로 유부녀나 과부, 나이 찬 처녀들이 소년들과 신사에서 혼음하거나 혹은 여자의 집에서 첫 경험으로 동정을 떼는 성인식이 존재했다.

100년 전에 메이지 정부가 없애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60년대가 지나서야 완전히 없어졌는데, 요바이의 의미가 달라지게 되어 부모나 상대의 허락 없이 이성의 침실에 몰래 침입하는 불순한 행위, 즉 성폭행을 가리키게 되어 '배덕한 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에서 이 풍습이 완전히 사라진 건 겨우 반 세기밖에 되지 않는다.[3]

2. 요바이의 과정

2.1. 결혼의 수단

혼기가 찬 여성의 경우, 지역 유지인 촌장의 공인 아래 요바이가 성립되었다. 해가 질 무렵 즈음, 남성이 여성의 집에 방문하고 여성이 딱히 반대하지 않거나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제지하지 않으면 성립된다. 보통 3~4일 정도 요바이가 이루어진 뒤 촌장의 공인 아래 결혼이 이루어지게 된다.

만약 한 명의 여성에게 여러 명의 남성이 구혼을 하게 되는 경우, 촌장의 주관 아래 밤에 숨어들기를 할 사람들의 순서가 정해지고, 특정 남성이 요바이를 해야 하는 날, 주변에 도움을 요구해 보초를 세워 그 남성이 숨어드는 것을 적발해내면 그 남성은 물러나야 했다. 바꾸어 말하면 보초를 세워 요바이를 막으려 해도 다 뚫고 들어오면 팔자이려니 하고 수용해야 했다.

중요한 건 할 거 다 하고, 해가 뜰 무렵에 들키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올 때까지가 요바이다. 빠져나오다가 걸리면 실패한 것으로 친다.

일본 교수에 의하면 여자가 거절할 수도 있고 거절당한 남자는 돌아가야 한다. 차례차례 남자가 오는데 요바이 기간 중 임신을 한 경우 여자는 그 동안 요바이한 남자들 중에 배우자를 고르는 게 가능했다.

위와 같이 결혼의 수단으로 사용되는 요바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가속된 선진문물의 보급으로 인한 의식 변화와 전구의 보급 후 성공률이 거의 제로로 떨어지면서 도시에서는 모습을 감추었고, 1970년대에 지역 유지들간의 정략결혼의 이유로 보도된 몇 건을 끝으로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나오지 않고 있다.

2.2. 혼음의 수단

전쟁이나 화재, 지진 등 천재지변으로 촌락 내 과부 수가 일정 이상이 되면 촌장이 허가한 경우에 한해 요바이가 진행된다. 대상은 혼기가 찬 여성을 포함해 젊은 여성과 과부, 신분이 낮은 여성과 전문적으로 아이를 돌보는 유모 등에 국한되는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규칙이 적용되었다.
  • 가족 이외 남성과 동거하지 않는 여성일 것
  • 아이가 생기면 '아버지 지명'은 여성이 할 것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해 혼음을 허가하는 요바이의 경우, 그러니까 나름 건전한 목표를 가진 요바이의 경우 위의 규칙이 대개 엄격히 적용되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 대해서는 여성의 거부권의 존재 여부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가족 외의 동거남이 있는 경우 동거남이 여성과 알아서 해결할 문제였기 때문이고, 사는 집 주변에서 금지한 것은 남녀의 질투라거나 처신 문제로 치정 문제가 생길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생길 경우 아이 아빠를 지명할 권리를 여성에게 주어 육아 문제 등에 대한 부담을 남성 쪽에 넘기는 제도적 안전장치도 존재했고, 무작정 밤일이나 하러 다니는 사람을 거부할 지명권도 보장이 되었다.[4] 애초부터, 여성들이 침실에 들어오는 남자의 요바이를 허용한다는 것 자체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니 남편으로 인정한다" 같은 이유도 있었을 것이고 어린 시절부터 연애를 했던 경우에는 굳이 요바이를 할 이유도 없었다.

물론 위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이런 게 있었다는 것이니 무조건 적용된 것은 아니다. 요바이를 관장하는 촌장이나 지역 유지에 의해 부분적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거나 예외 사례 등이 그때그때 다르게 진행되었다. 결혼한 지 수년 째 임신 소식이 없는 경우 요바이의 대상으로 강제지명된다거나 축제행사의 일환으로 하룻밤 동안 알아서 하라고 선언되는 등 그때그때 나온 케이스가 다르다.

혼음의 수단으로 요바이를 진행하는 여성은 남자를 기다리며, 집의 문을 열어두고 찬밥과 먹을거리 등을 준비해 해가 뜨면 집으로 돌아가는 남성에게 제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고 한다.

3. 고육지책의 풍습

고대 부족사회 문화에 기인하는 요바이는 오래 유지된 전란으로 인해 남성의 수가 줄고 과부 수가 늘어나면서 인구를 늘리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이러한 개방적인 성풍습은 지구촌 어느 부족사회에서도 종종 있었던 풍습이었다.

이는 옛 이누이트 인들도 가지고 있던 풍습이었다.[5] 1960년에 나온 안소니 퀸 주연의 '야생의 순수'라는 영화에서 이누이트를 방문한 선교사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자기 집 부인과 잠자리를 주선한 사건 때문에 투닥거리다가 선교사가 과실치사한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정도. 유럽 일부 지역과 우리나라에서도 일본의 요바이와 비슷한 보쌈문화가 행해졌다고 한다. 다만 완전히 비슷하지는 않으며[6] 이 역시 2차대전을 전후해서 사라졌다.

옛 일본의 부부관계는 부인이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였으며, 남녀는 각자 따로 살고 부인의 집에 남편이 들어갔다 나오는 형태였다. 또 요바이는 일반적으로 서민의 풍습이었으나 무사 계급에서 행해지기도 했으며, 어떤 지방에서는 여자가 남자의 처소에 드는 풍습도 있었다고 한다.

예전의 일본의 농촌에서는 "마을의 젊은 아가씨와 과부는 젊은이들 차지"라는 말이 있었다. 근대 이전의 농촌에서는 마을의 젊은 남성들이 마을 내에 특정한 룰을 정해 요바이를 했었다. 룰을 무시하고 다른 마을의 남자가 요바이를 하러 오면 이들이 격퇴하기도 했는데, 이 때 심한 경우에는 침입자가 반죽음 상태가 되기도 했다.

4. 요바이의 쇠락

일본 사회에서 요바이가 사라진 것은 길어야 50~60여년 전에 불과하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진행한 메이지 정부는 요바이 풍습을 없애기 시작하여 이미 츠야마 살인사건 때는 신문 등에서 산간 지역 문화라는 등, 두메산골 특유의 문화라는 등으로 비판한 걸로 보아 오지 일대에서나 남아 있는 정도로 보인다. 이마저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인 1950년대를 기점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

4.1. 요바이가 쇠락한 이유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권의 선진 문물들이 들어오며 성관념과 성의식 전반에 대한 변화가 진행되었고, 전구가 보급되며 요바이의 성공률이 크게 내려가 점차 쇠락한 것으로 여겨진다.

요바이의 중요 조건 중 하나가 경비를 세워놓았는데도 들키지 않고 숨어들어와 할 거 다 하고 빠져나간 거면 포기하자인데, 전구가 보급되어 들키지 않고 숨어드는 것이 불가능해져 성공률이 크게 내려간 것도 중요 포인트다.

또 오락 수단의 다양화도 한 가지 원인으로 지목된다. 과거 시골에서는 일종의 '오락수단'으로서 요바이가 행해졌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놀거리가 부족했으니 즐길거리로서 요바이가 행해졌다는 해석이다.

5. 에도판 신데렐라 스토리의 일화

에도 시대 중기, 전국적으로 축제를 빌미로 한 야외의 혼음이 허용되었는데, 이 시기를 잘 노려 신분이 높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진 후 회임에 성공할 경우 상술한 대로 아버지를 제일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지명해 신분 상승과 노후 보장이 이루어지는 신데렐라급의 로또가 터질 수 있었다. 이는 아이를 한 사람의 개체보단 노동력 = 공동재산으로 여기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며, 결혼 후에도 요바이를 이유로 다른 남성과 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고 여겼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요바이는 시골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비슷하게 행해졌다. 에도 중기에는 전국적으로 축제를 빌미로 야외에서 많은 남녀들이 혼음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는데 어떠한 불륜이나 방탕함도 비난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높은 신분의 남성과 사귀기를 기대했다. 때문에 도시에서의 요바이는 신데렐라의 꿈을 가능케 하기도 했다.

6. 민속학 연구

요바이는 시대적 지리적 차이에 따라 그 모습이 다양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낮선 손님이 마을에 찾아오면 그 손님에게 여자를 내어주기도 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자신의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아내를 밤에 빌려주는 곳도 있었다. 손님이 아내를 거부하면 그 여자는 죽음을 면치 못했다는 말도 들려온다. 또 아이를 공동재산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임신을 하면 여성이 지목하는 사람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으며, 결혼 후에도 다른 이성과 관계를 가질 수 있었으므로, 일본의 여성들은 결혼에 대해 큰 부담이 없었다고 한다.

요바이가 상대의 의사를 무시한 강간인가, 상대방도 어느 정도 동의한 후에 이루어진 행위였는가, 또는 상대는 불특정 다수였는가, 아니면 서로 사전에 파트너 관계가 성립되어 있었는가는 어려운 문제이다. 이 모든 상황이 그 당시에 혼재되어 있어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카마츠는 1909 년 효고현 출신으로, 이 당시는 아직 요바이 풍습이 남아 있었다고한다. 적당한 상대가 없으면 생부와 생모가 그 상대를 맡는 경우도 있었다. 일본의 공동체는 요바이 전에 성교육이 이루어졌다. 덧붙여서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아기가 누구의 아들인지 잘 모르는 예가 흔히 볼 수 있었지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양육했다.
일본어 위키백과 요바이 항목

일본 민속학자 아카마츠 케이스케(赤松啓介)가 쓴 '요바이의 민속학'[7]에 따르면 과거 전통 성인식 겸 성교육의 일환으로 남자아이는 褌祝(훈도시이와이), 여자아이는 요바이(夜這い)를 치렀는데, 자식의 온전한 첫 경험 상대가 없는 경우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신해 자식의 상대를 맡게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소년끼리 서로의 어머니의 '맛'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딸이 어머니의 밤의 상대를 끌어들이는 사례 등이 요바이의 민속학 pp. 3-4에 보고되어 있다. 일본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는 음풍누습(淫風陋習: 음란하고 나쁜 관습)이라며 다수와 성관계를 갖는 문란함을 비판했다.

비교 문학자 고야노 아츠시(小谷野敦)는 저서인 '에도 환상 비판'[8]에서 요바이는 남성에 의한 일방적인 성문화가 내재되어 있으며, 강간이나 데이트 강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지적하며 결코 '남녀 평등의 프리 섹스'가 아니었음을 말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주류 학설은 아니고 기본적으로 요바이를 통한 성관계는 상대방의 동의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 여러 문헌과 증언에서 드러난다. 다만, 요바이를 명목으로 강간을 저지르는 범죄자들도 있었으며, 현대와 달리 여성의 지위가 낮을 뿐만 아니라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법집행이 미약하던 시대이다보니[9]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형성되는 경우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현대의 연애관계도 상호 동의를 전제로 하지만, 스토킹, 데이트 폭력, 데이트 성폭력이 존재하듯이, 비슷한 상황일지라도 로맨스와 폭력으로 크게 나뉘는 것은 흔한 현상이다.

반면, 아미노 요시히코는 요바이가 모계사회의 유산이라는 주장을 했다. 고대 일본에서는 아내의 집으로 남편이 들어가 사는 혼인 형태가 일반적이었고 자식 역시 처가에서 양육됐다. 결혼을 한 경우에는 요바이를 할 게 아니라 당당하게 부부로서 지낼 수 있었지만, 혼전의 경우에 남녀는 남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야 했다. 여기에 데릴사위의 전통이 맞물려 남자가 몰래 여자의 처소에 찾아가는 요바이 풍습이 생겨났다는 것이다.[10]

헤이안 시기까지만 해도 남편이 아내와 동거하는 부계사회의 풍습이 기본형이 되는 대륙 국가와 달리 일반적인 고대 일본의 결혼 형태는 츠마도이콘(妻問い婚)이라 하여 별거하는 아내의 거처에 남편이 방문하는 형식[11]으로 이루어졌고, 사회 지배층 등 귀족이 아니라면 이런 형식의 결혼관계는 사실상 다부다처제가 되어 아이 아버지도 알기 힘든 경우가 되기 십상이었다. 본래 '요바이'라는 단어는 이 츠마도이콘 형식의 혼례에서 남성이 처음으로 여성을 방문해 구혼하는 행위를 일컫는 단어의 뜻이 점차 바뀌어 생긴 말이다. 이렇게 '남성이 여성의 거처를 방문하는' 형태의 성 관습이 일본 특유의 촌락 사회(무라샤카이)의 구조와 맞물린 것이 요바이이다.

민속학자들의 경우 옹호론과 비판론이 갈리는데, 비판론에서는 작은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성의 성 착취'로 바라보며 핏케언 제도 집단 성폭행 사건과 같은 엄연한 닫힌 사회인습으로 취급한다.

7. 여담

  • 츠야마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유명한 '도이 무츠오'는 이 풍습으로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지만, 징병 신체검사에서 탈락하면서 폐병(결핵)에 걸렸다는 소문이 퍼져서 요바이를 거부당하게 되었고 이로 인한 좌절감이 범행의 동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8. 매체

  • 일본인들은 지금도 요바이 문화에 대한 성적 판타지가 있어서 그런지, 헬스 등등 많은 유흥업소에서는 요바이 상황을 연출하는 상황극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요구하면 역(逆) 요바이도 가능한 모양이다.
  • 란마 1/2에서 사오토메 란마가 P짱이 된 히비키 료가를 텐도 아카네의 방에서 쫒아내기 위해서 잠을 자고 있던 텐도 아카네의 방에 몰래 숨어들었다가 들키는 바람에 서로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다음 날, 란마와 아카네의 가족들이 흐뭇하게 "요바이도 들키지 않게 조심해서 했어야지?"라고 놀리자 란마는 "아니라니까요!"라면서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요바이의 문제라기보다는 란마와 아카네가 가족들에게 약혼자 사이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복선이라고 봐야 된다.
  • 딸기 100%에서 니시노 츠카사가 부모님 몰래 남자친구 마나카 준페이를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초대하여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요바이를 했다. 물론, 작중 묘사를 보면 마나카가 아야의 고백을 거절한 것을 알게 된 츠카사가 마나카를 집으로 데리고 놀러왔다가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숨긴 것이고 나가지 못하게 되자 의도치않게 같이 하룻밤을 보낸 것이지만...
  • 마징가Z의 에피소드 중에는 카부토 코우지가 한밤중에 자신의 침실로 숨어들려고 한다고 오해한 유미 사야카가 코우지와 싸우다가 "내게 청혼을 할 거면 다른 방법을 써라"며 벌컥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요바이 풍습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대사이다. 요바이가 금지된 지 한참 지난 1971~2년 즈음의 어린이 대상의 티비 쇼에서 네타로 언급될 만큼 익숙한 개념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 여담이지만, 코우지의 반응은 "누가 너 같은 왈가닥한테 청혼을 하냐!" 였다.
  • 시티헌터의 주인공 사에바 료가 원작에서 여자 의뢰인을 집에 묵게 할 때 밤마다 시도하는 것이 바로 이거다. 정발판에선 밤나들이란 이름으로 순화해서 표현했는데, 시티헌터가 소년지에 연재된 만화인 만큼 성공률은 0에 가깝다. 그나마 료가 혼자 있을 때는 그나마 성공률이 눈꼽만큼 올라가는데, 마키무라 카오리가 곁에 있으면 거의 실패한다고 봐야 된다.
  • '하나조노 회전목마', '석신 떨구기'라는 만화가 이 때의 풍습을 그린 만화지만 전자는 막장만화다. 읽는다면 주의하자.
  • 1983년 개봉된 일본 영화 '오밤중의 마을'이 다루는 주제가 바로 요바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술한 츠야마 살인사건을 다룬 영화이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의 옆의 링크를 참조 바람#

9. 관련 문서



[1] 원래 요바이는 데릴사위제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이 때문에 요바이의 기원을 데릴사위제에서 찾기도 한다.[2] 원 뜻은 새로 산 붓이 뻣뻣하게 풀이 먹은 상태인 것을 물에 적셔 푸는 것을 뜻한다.[3] 1960년대 이후에도 요바이 풍습이 과거처럼 마을 단위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마을을 방문한 외부인들을 대상으로 마을 주민들의 개인적인 일탈로 벌어지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이런 이유로 2000년대 중반까지도 일부 일본의 시골에서는 요바이 풍습에 대한 경험담을 마을에서 오래 살았던 노인들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4] 의외로 안 알려진 사실이지만 여성의 지명권은 요시와라 유곽에서 활동한 전문 직업여성인 유녀(오이란, 花魁)들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이치케타야를 거쳐 이루어진 초회에서 손님을 거부할 권리가 있었다.[5] 다만, 이누이트의 경우는 과장된 면도 많다.[6] 독일어권에서도 Fensterln 혹은 Kiltgang이라고 해서 남자가 여자 침실에 몰래 들어가는 풍습이 있긴 했는데, 반드시 직접적인 성관계가 동반되지는 않고 단순한 구애, 구혼 차원에서 끝난 채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다.[7] 夜這いの民俗学,1994년, ISBN 4480088644[8] 江戸幻想批判, 신요사, 1999년 12월.ISBN 4-7885-0698-X[9] 강간, 납치 같은 것이 범죄로 여겨지지 않고 그냥 '난폭한 행위' 정도로 여겨지는 후진적 인식은 20세기 초반을 다룬 일문학, 특히 범죄소설에서 자주 등장한다.[10] 이 때문에 오히려 가부장제가 강화된 에도시대나 메이지시대에는 국가적으로 요바이를 금기시하였다.[11] 신랑이 신부의 거처를 방문해 폐백을 바치며 구혼하는 고구려의 혼례가 성립하는 과정도 이와 흡사하다. 이러한 구혼행위를 고대 일본에서 '요바이'로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