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소재 아베노 세이메이 신사의 초상화 | |
이름 | 아베노 세이메이 安倍 晴明 (あべのせいめい)[1] |
출생 | 921년(?) |
사망 | 1005년 10월 31일 (84세?) |
1. 개요
10세기 중후반에 활동한 일본 헤이안 시대의 대표적인 음양사. 각종 작품에서 언급되는 음양사 이미지의 가장 중요한 모델이 되었다.2. 역사 기록과 전설
아베노 세이메이의 정확한 족보와 계보는 불명이다. 일본에서도 세이메이의 생년월일을 두고 명확한 정설은 없는 듯하다. 다만 921년생이 유력하긴 한 모양이다.[2]아버지 역시 불명확하다. 아베노 마스키(安倍益材), 또는 아베노 하루키(安倍春材)[3]라는 설도 있다. 일본 오사카 이즈미시 지역에 전하는 전설에 따르면, 아베노 야스나(安倍保名)란 사람이 이나리 신에게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기를 기원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사냥꾼들에게 흰 여우 한 마리가 사냥당하는 모습을 보고 여우를 숨기고는 사냥꾼들과 싸우다가 크게 다쳤는데, 쿠즈노하(葛の葉)라는 여인이 나타나 그를 간호해주었다. 둘은 서로 마음이 통하여 결국 부부가 되어 세이메이를 낳았다. 세이메이가 5살 되던 해에 쿠즈노하는 갑자기 둔갑술이 풀리면서 흰여우의 모습을 드러내버렸는데 그만 세이메이에게 들켜버렸다. 그러자 쿠즈노하는 구슬픈 시가를 한 수 남긴 뒤 떠나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오사카 이즈미시에는 쿠즈노하를 다른 신령들과 함께 제신으로 받드는 쿠즈노하 이나리 신사(葛葉稲荷神社)가 있다.[4]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음양두(陰陽頭)[5] 카모노 타다유키(賀茂忠行 생몰년 불상)에게서 음양도를 배웠고,[6] 그 인연으로 그의 아들 카모노 야스노리(賀茂保憲 917 ~ 77)가 음양두가 될 무렵에 당시 권력자였던 후지와라가와 인연이 닿아 활약하였다.
요괴를 퇴치하는 음양사의 대표인물로 알려졌지만, 본인은 여우 요괴의 피를 이어 받았다는 전설이 전해지니 얄궂은 일이다.[7] 혹자는 귀족과 평민의 차별이 견고했던 헤이안 시대였기에 평민 여자에게서 태어났다고 말할 수 없어서 저런 설화를 지어내었으리라 말한다. 아베 집안은 교역을 통해 부를 쌓았으므로, 세이메이가 아는 지식도 교역 과정에서 얻었다는 말도 있으나 진실은 불명이다. 당시 일본의 중앙집권이 완전치 않았고 개인적으로 교역을 하기에 넉넉한 시대도 아니었다.
식신을 자유자재로 다뤄 집안일까지도 맡겼다가 사람들이 무서워해서 집에서는 쓰지 않았다는 전설도 있다. 세이메이가 부린 식신은 종이로 만든 식신과는 별개로 일반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일 맡길 때 주변 사람들이 무서워했다고 한다.
어느 절에서 승려들에게는 식신을 마음껏 부리다니 사람도 죽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짓궂은 질문을 받았고, 귀족들에게는 근처 연못에 있던 개구리를 손 하나 대지 말고 죽여보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무익한 살생이라면서도 결국은 이를 받아들여 가벼운 풀잎 한 장을 올려놓는 것만으로 개구리를 압사시켜 버렸다고 한다. 이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싹 굳어졌다고.
우라시마 타로 전설과 비슷한 이야기도 있다. 어린 시절 동네 아이들이 뱀을 잡아 죽이려는 것을 말리고 풀어주었는데, 나중에 그 뱀이 오토히메라 정체를 밝히고 살려준 데에 대한 보답으로 세이메이를 용궁에 초대했다. 호화로운 연회에 참석한 세이메이는 감사를 표하는 용왕에게 일청환(一青丸)이라는 단약을 받아 눈과 귀에 넣고 집에 돌아왔다. 그 후로 사람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의 과거나 미래에 대해 속속들이 알게 되었으며, 새나 짐승의 울음소리에 무슨 의미가 담겨있는지 또한 이해하게 되었다.
관련매체에서 대체로 젊게 묘사되곤 하지만, 실제 세이메이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가 권력을 잡은 980년대, 본인의 나이가 60대로 접어든 이후부터 제대로 활동하였다.[8] 비슷한 시기에 세이메이와 더불어 유명한 음양사요 세이메이에겐 음양료의 상관이기도 했던 카모노 야스노리(賀茂 保憲 917 ~77)가 활약한 나이와 비교하면 꽤나 차이가 있다. 당시 음양도와 천문도에 별다른 벼슬이 없었기 때문에 관직이 적어 오랜 시간 동안 학생, 혹은 득업생으로 남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가 음양료에서 맡은 역할은 천문로, 후에 천문박사의 직책은 아베 집안이, 역박사의 직책은 카모 집안이 대대로 맡아 음양도의 큰 두 가문으로 성장했다.
3. 후예
아베노 세이메이의 후예(아베, 츠치미카도)들은 음양사 가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아들로는 장남 아베노 요시히라(安倍吉平)와 차남 아베노 요시마사(安倍吉昌)가 있다. 이중 차남 요시마사는 음양료의 수장인 음양두가 되었으나 후손이 끊겼고, 장남 요시히라가 슈시미(從四位)까지 올라 자손을 남겼다. 14세기, 요시히라의 12대손 아베노 아리요(安倍有世)가 음양사로서는 역사상 최고로 출세하면서 츠치미카도(土御門)을 칭했고, 이후 아리요의 자손들은 성씨로 '츠치미카도'를 사용했다. 또한 음양두의 직책도 츠치미카도 집안에서 세습하였다. 메이지 유신 이후 츠치미카도 집안은 자작위를 받았으나 음양료가 해체되어 꽤 힘든 상황을 겪었다. 오늘날 츠치미카도 가문의 일부가 옛 성씨 아베로 복성(復姓)하기도 했다.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점령 통치를 받던 시절에 츠치미카도 집안은 음양도와 신토를 결합한 종교 단체인 덴샤츠치미카도신토(天社土御門神道)를 창교, 종교 단체로 등록하였다. 이 종교의 본부는 후쿠이현 오이군(大飯郡)에 있다.
일본 교토시 가미교구에 세이메이 신사(晴明神社)가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1007년에 창건되었는데 그 자리가 아베노 세이메이가 살던 저택 터라고 한다. 과거에는 별로 유명할 바 없는 소규모 신사였으나, 소설가 유메마쿠라 바쿠가 1988년에 소설 음양사 첫 권을 발매하여 아베노 세이메이가 유명해지자, 세이메이 신사 역시 덩달아 유명해지면서 팔자가 활짝 폈다. 그 외에도 아베노 세이메이를 모신다는 신사는 일본 여기저기에 있다.
4. 대중문화에서
자세한 내용은 아베노 세이메이/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일본의 만화나 라이트노벨 같은 데서 등장하는 대음양사 아베노 세이메이는 대부분 이 실존인물을 바탕으로 삼아 만든 캐릭터다. 현재 일본 문화에서 어레인지되는 세이메이는 유유자적 하지만 할 땐 제대로 하는 강력한 권능을 지닌 인간의 수호자, 그러면서도 반인반요의 몸을 지녀 가끔씩 자신의 운명을 고뇌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는 유메마쿠라 바쿠가 1988년에 처음 출판한 소설 <음양사>가 특히 큰 기여를 했다. 소설 음양사를 영상화한 영화 음양사가 여기에 방점을 찍어 "세이메이는 이렇다."고 거의 확립했다. 물론 드물게 예외도 있는데 누라리횬의 손자에 나오는 아베노 세이메이는 어둠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다.
5. 기타
- 숙적으로는 아시야 도만이 있다. 상자 안에 든 것이 귤인가 쥐인가를 두고 겨뤄 담겨있던 귤을 쥐로 바꾸어 이겼다는 설화[9]가 제일 유명한데, 여기서 또 다른 주술대결과 네토라레(!)에 대한 일화까지 나온다. 1662년에 간행된 아베노 세이메이 모노가타리가 출처.
- 교만하지만 능력은 뛰어나 법도선인(法道仙人)의 제자를 자칭하던 도만이 세이메이의 성공을 질투하여 쿄에서 대결을 신청해 그 자리를 꿰차려 들었다. 20일 전에 이미 도만이 올 것을 눈치챈 세이메이는 이 승부를 받아들여 자신전에서 겨루기로 한다. 대결 당일 온갖 기이한 주술이 오갔으나[10] 자신의 패배에 납득하지 못한 도만은 이런 건 제대로 된 주술이 아니라 사기라며 이번에는 점을 치는 것으로 한번 더 겨룰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나오는 것이 앞서 말한 귤과 쥐 에피소드. 결국 도만은 진 벌로 세이메이의 제자로 들어가게 된다.
- 세이메이가 중국으로 유학가 백도상인(伯道上人)의 가르침을 받게 되고, 아직 도만이 세이메이의 제자로 있던 시절의 일이다. 백도상인이 3년 동안 세이메이를 가르치는 동안, 도만은 세이메이의 아내인 리카(梨花)[11]와 정이 통해 불륜을 하게 된다. 아직도 야심이 남아있던 도만은 리카를 꼬드겨 세이메이가 몰래 감춰둔 음양술 비법서, 금오옥토집(金烏玉蒐集)과 보궤내전(簠簋内伝)을 손에 넣는다. 한편 이를 알아챈 백도상인은 세이메이에게 급히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고, 아내를 무턱대고 믿다 방심하지 말 것, 술에 거나하게 취하지 말 것, 부주의한 말다툼은 하지 말 것을 경고해주나 이를 다 어긴 세이메이는 술김에 자기 목을 걸다 죽고 만다.[12] 도만은 세이메이의 목을 묘비 하나 없는 무덤에 묻어버린 후 리카와의 결혼생활을 즐기나, 제자가 걱정되어 찾아온 백도상인이 생활속명의 법(生活続命の法)으로 세이메이의 시체를 모아 되살린 후 잘못을 꾸짖고는 같이 도만과 리카를 벌주러 간다. 백도상인에게 세이메이가 살아있다면 내 목을 쳐도 좋다며 큰소리를 치는 도만이었지만, 떡하니 세이메이가 살아 돌아온 모습을 보자 기겁해 리카와 함께 도망치려 하나 결국은 잡혀 둘 다 세이메이가 당한 그대로 돌려받게 된다.
- 반면 아시야 도만과 사이가 좋다 못해 그를 후견인으로 둔 영재로 나오는 버전도 있다. 자세한 것은 이 항목의 아시야 도만 오우치카가미 부분 참조. 실제 역사 상으로는 세이메이가 37살이나 위겠지만,[13] 이 작품에서는 오히려 도만이 세이메이의 아버지 뻘이며 아베노 야스나를 라이벌로 두고 있다는 설정이다.
6. 관련 항목
[1] 음독으로 세이메이(せいめい)라고 읽는 경우가 많지만, 그의 이름을 정확히 어떻게 읽는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일본어 위키페디아에 따르면 하루아키(はるあき) 또는 하루아키라(はるあきら)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2] 일본어 위키페디아 아베노 세이메이 항목의 2022년 3월 21일자 버전까지는 변호사 호가 토시오(宝賀寿男)가 1986년에 편찬한 ≪고대씨족계보집성(古代氏族系譜集成)≫이란 책을 근거로 세이메이의 생년월일이 921년 1월 11일(양력 2월 21일)이란 설명이 있었으나 이후 삭제되었다.[3] 사실 春材를 '하루키'라고 읽음이 정확한지도 모른다.[4] 1990년대에 유메마쿠라 바쿠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화 음양사를 그린 만화가 오카노 레이코(岡野玲子)는 자신의 작품 후기에서 세이메이의 외가는 어쩌면 타치바나(橘) 집안 또는 그와 관련 있는 집안이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일본어로 여우를 키츠네(きつね)라고 하는데 타치바나(橘)를 음독하면 키츠(きつ)라는 점, 세이메이의 아들 요시히라(吉平)와 요시마사(吉昌)의 돌림자인 요시(吉)가 타치바나 가문의 돌림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요시(吉) 또한 음독하면 키치(きち)라고 읽을 수 있다.[5] 음양도를 다루는 관청인 음양료(陰陽寮)의 최고 직책이다.[6] 헤이안 시대의 서적 ≪곤자쿠 이야기집(今昔物語集)≫에 이런 야사가 있다. 세이메이는 어렸을 때 카모노 타다유키의 집에서 일했다. 어느 날 밤중에 다다유키가 수레를 타고 가는 도중에 잠이 들었는데, 세이메이가 다급히 깨우면서 "저쪽에서 사람이 아닌 이상한 형상을 한 것들이 오고 있습니다."라며 놀라 외쳤다. 타다유키가 세이메이가 가리킨 방향을 보니 과연 온갖 요괴들이 우글거리며 수레를 향하여 다가오므로 술법을 써서 요괴들을 피했다. 타다유키는 세이메이에게 남다른 영력이 있음을 알고 제자로 삼아 자신이 아는 음양도의 가르침을 모두 전했다고 한다.[7] 재미있게도 같은 섬나라인 영국 설화에 등장하는 멀린도 인큐버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둘 다 각자의 나라에서 전설적인 마법사로 통하는 등 유사성이 많아서 비교대상이 된다. 물론 세이메이와 달리 멀린은 온전히 허구의 인물이라는 차이가 있지만.[8] 당장 위 프로필 사진만 봐도 젊은 사람은 아니다.[9] 이는 세이메이가 어렸을 때 무라카미 덴노의 병환을 알아내기 전 먼저 시험을 받았던 대목과 유사한 부분이다. 거기서도 원래는 귤이 담겨있었던 것을 달걀로 바꿔 능력을 입증했다고.[10] 도만은 자갈을 던져 제비로 바꾸는데 세이메이는 이걸 부채질 한방에 다시 자갈로 되돌려 놓는다. 그 후 세이메이는 용을 불러 비를 내리게 했는데, 도만은 비를 그치게 하려 했으나 무슨 수를 써도 실패해 물이 배를 띄워도 될 정도까지 차오른다. 그러자 세이메이는 주술로 비를 그치게 한 건 물론, 그토록 내렸던 빗물도 사라지게 하고 흠뻑 젖은 관객들의 옷도 보송보송하게 말려준다.[11] 나시코(梨子)라는 이름이었다고도 한다. 실존인물은 아니고 가상의 인물.[12] 정확하게는 꿈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세이메이가 갖고 있다던 책을 받았다며 대놓고 구라를 치는 도만에게 너같이 욕심이 그득한 놈이 그런 꿈을 꿀리가 없잖느냐, 만약 그 책들이 네게 있다면 내 목을 쳐도 좋다며 호언장담한 것. 마침 도만의 품 속에는 그 두 권이 있었고, 그걸 본 세이메이는 그대로 참수된다.[13] 아시야 도만을 실존인물이라 가정할 경우 958년생이라고 한다.